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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해방1 (56/104)

노비해방1

복속된 부족 출신 거란족 전사들이 조선군에 대거 가담하면서 봉황도에 주둔하는 방어 병력이 크게 보강되자 도현은 안심하고 예정대로 근위대 기병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한양으로 귀환했다.

무려 반년 넘게 대궐을 비웠다가 다시 돌아오는 거였는데, 청군의 재침공을 막아 냈을 뿐만 아니라 심양과 남만주 일대를 점령해 지난 병자년의 치욕을 시원하게 되갚아 주고 당당히 개선하는 길이었기에 지나가는 마을마다 백성들이 몰려 나와 천세를 외치며 도현을 환호했다.

귀환 소식에 조정 대소 신료들은 도성 밖까지 나와 그를 맞이했고 이틀 동안 대대적인 개선식을 열어 이번 전쟁 동안 거둔 성과를 널리 알렸다.

잔치를 벌이는 데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갔지만 국왕인 도현의 권위를 세우고 백성들에게 자부심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기 위해 호조에서 과감하게 곳간을 열고 아낌없이 재물을 풀었다. 그렇게 도성이 온통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는 동안, 도현은 겨우 모든 행사를 끝내고 가족들과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했다.

“중전, 그동안 잘 지냈소.”

도현이 자리에 앉으면서 하는 말에 중전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주, 중전, 왜 그러시오?”

당황한 도현이 황급히 중전을 끌어안으려 했으나 중전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도리질 쳤다.

“전하의 용안을 뵈오니 이제야 정말 돌아오셨다는 실감이 들어서 그럽니다.”

“허어, 중전도 참…….”

도현은 고마우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에 손수 소매로 중전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만하고 어서 눈물을 그치시오. 기껏 곱게 단장했는데 흉이라도 지면 어쩌려고.”

입으로는 짐짓 타박하는 척을 하면서도 도현의 얼굴엔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중전은 원래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 홀로 대신들을 상대하고 궁궐의 기강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단속하는 동안 얼마나 속으로 고생이 심했을지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속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전혀 티를 안 내고 꼿꼿이 버티는 게 중전다운 모습이긴 하지만, 막상 도현의 앞에서는 한없이 가녀린 여자로 돌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중전이 살그머니 어깨를 기대자 도현은 한쪽 손을 포개고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이렇게 단둘이 있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조용히 중얼거리는 중전의 말에 도현이 미안한 듯 답했다.

“내가 너무 일이 많아 어쩔 수 없지 않소. 그래도 애들한텐 신경을 쓰려고 나름 노력하고 있다오. 별다른 일이 없으면 자주 식사도 같이 하고…….”

따지지도 않았는데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처럼 서둘러 변명하는 말투에 중전이 쿡쿡 웃었다.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크흠.”

괜히 머쓱해진 도현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전하께서 우리 연이나 공주들을 각별히 생각하시는 건 잘 알고 있사옵니다. 다만 제가 말하는 건, 아이들 없이 우리 부부 단둘만 이렇게 있는 게 오랜만이라는 거지요.”

그 말에 도현이 시선을 아래로 옮기니 중전의 볼이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렇군.”

말하면서 어깨를 두른 팔에 힘을 꽉 주자, 중전이 더욱 몸을 기대 오는 게 느껴졌다. 손가락을 마주 얽고 중전의 흑단 같은 머리채에 코를 묻으며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있자니, 그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황폐해졌던 마음이 훈훈한 온기로 가득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주상 전하, 중전 마마, 준비가 다 되었사옵니다.”

그때 밖에서 상궁이 고하는 소리에 도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준비라니? 그러고 보니 아이들도 올 때가 한참 지났는데 안 보이는군.”

각자 생활하는 전각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지금쯤이면 벌써 도착하고도 남았어야 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도현이 쳐다보니,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중전이 대꾸했다.

“풍류를 아는 선비는 낮에는 꽃, 밤에는 달을 보며 시 한 수를 읊는다고 하는데 저희라고 못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도현은 중전이 뻗은 손을 잡고 일어나 싱긋 웃는 표정으로 물었다.

“호오, 그럼 중전이 시를 지어 읊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요?”

“제가 어찌 번데기 앞에 주름을 잡겠습니까.”

중전은 겸손을 떨 듯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더니 이내 맑은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허나 전하께서 저를 위해 시를 지어 주시면 제가 옆에서 술을 따라 드릴 수는 있지요.”

“그거 좋지. 자고로 미인이 따라 주는 술이 제일 맛있다고 했으니, 오늘은 잔뜩 취하는 날이 되겠구려.”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덕분일까, 두 사람은 마치 어제 오늘 혼약을 올린 신혼부부처럼 애틋한 정이 샘솟는 것을 느끼며 나란히 후원으로 향했다.

후원에는 계절에 따라 즐길 만한 장소들이 여럿 있는데, 그중에서도 오늘 중전이 도현을 위해 마련해 놓은 것은 연못에 있는 누각에서 즐기는 점심식사였다.

따뜻한 햇살을 받은 연못의 수면이 반짝이는 빛을 반사하고, 작년보다 일찍 찾아온 봄기운 덕분에 널찍한 잎을 가진 연꽃은 벌써 활짝 분홍색으로 만개해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봄꽃들이 한꺼번에 피는 시기이기도 해, 사방을 둘러보면 노란 유채꽃들이 장관이라 그야말로 봄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아버님! 어머님!”

일찍 누각에 와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이 길을 따라 걸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손을 붕붕 휘두르며 소리쳤다.

“하하, 목소리를 들으니 우리 연이로군.”

어른 못지않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방방 날뛰는 작은 형체를 멀리서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한편 그 뒤에서는 제일 맏이인 공주가 ‘죄송해요.’ 하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고 막내는 오빠를 따라 난간에 몸을 기대고 머리를 쏙 내밀고 있는 게 변함없이 어린애다운 애교가 철철 넘쳤다.

“아버님, 저것 좀 보세요!”

투명하게 빛나는 연못 물 사이로 커다란 비단 잉어가 모습을 슬쩍 드러냈다가 놀리듯이 다시 사라졌다.

“아, 지금 또!”

잉어가 물 튀기는 소리를 들었다며 소란을 피우는 연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준 도현은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자리에 앉혔다.

“나중에 저것보다 더 큰 잉어를 낚아 줄 테니 진정하고 좀 침착하게 앉아 있어라. 기껏 기분이 좋아진 네 어머니가 또 도깨비처럼 무서운 얼굴을 하고 호통칠라.”

“전하.”

중전이 옆자리에 앉으면서 새치름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도현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자 중전은 짐짓 화난 척하던 얼굴 표정을 풀고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바마마, 낚시도 하실 줄 알아요?”

“아무렴.”

“오빠는 몰랐어? 아바마마는 못하는 게 하나도 없으셔!”

이젠 제법 맹랑한 말도 할 줄 아는 막내 공주가 옆에서 타박을 하자 연이가 감탄한 표정으로 도현을 바라보았다.

“으음. 저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니 어째 좀 부담스럽구려.”

“다 전하께서 너무 뛰어나신 덕 아니겠습니까.”

“중전마저 나를 놀리는 게요?”

“먼저 시작한 사람이 누군데 그래요?”

“허어.”

마냥 얌전한 양가집 규수 같았던 중전이 언제 사람을 놀려 먹는 법을 배웠나 싶어 도현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분명 칠현이 요놈이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니는 바람에 중전이 그 모습을 보고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리라.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오. 그나저나 오늘 정말 날씨가 좋군.”

춥고 매서웠던 심양의 겨울과는 달리, 도성의 봄 날씨는 안온하고 쾌적하기 그지없었다.

여기서 눈만 살짝 감으면 바로 잠이 스르륵 들 것만 같은 느낌에 도현은 새삼스레 집에 잘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며칠간 가족과 단란한 시간을 보낸 도현은 그동안 원정을 떠나 있느라 미뤄 놨던 업무를 처리하느라 서류에 푹 파묻혔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도현은 도승지가 두루마리가 가득 놓인 쟁반을 들고 들어오는 걸 보고는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건 또 뭐야?”

“전하께 올라온 상소문이옵니다.”

“아직 봐야 될 게 이렇게 많이 쌓였는데 또 가져오면 어떡하라는 거야!”

“이건 전 함경도 감사를 지냈던 이시중 대감과 경주 유림들이 연명해서 보낸 것이라 꼭 보셔야…….”

이야기를 중간에 끊으며 도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의 상소를 보느라고 밥도 국수로 간단히 때우고 여기 앉아 있는 거 안 보여!”

“송구스럽사옵니다.”

“도승지가 하는 일이 뭐야! 대충 걸러서 꼭 봐야 되는 것만 올려야지.”

“그렇게 한 것이옵니다.”

조금 억울하다는 듯이 도승지가 하는 말에 도현은 양 눈썹을 위로 추어올렸다.

“운종가에 물건을 사려는 사람이 너무 붐비고 지저분하니 정리를 해 달라는 것도 내가 읽어야 되는 거야!”

“그건…….”

“이런 건 한양 부윤이 알아서 처리할 일이잖아. 내 말이 틀려?”

“마, 맞습니다.”

“그런데 밥값도 못 하고 나한테 올려 보내고 있잖아.”

“흠흠.”

손에 들고 있던 상소문을 책상에 세게 내려놓은 도현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지난번에 심양으로 결재 서류를 마차째 보낸 것도 그렇고, 그냥 참고 넘어가려고 했더니 도저히 안 되겠어.”

“전하.”

“당장 대신들을 모두 대전으로 불러들여!”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어쭈. 지금 내 말에 토를 다는 거야?”

화가 단단히 난 걸 눈치챈 도승지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그럼 빨리 시키는 대로 해!”

“예.”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승지는 괜히 불통이 튈까 봐 재빨리 방을 나갔고 한쪽에 서서 그걸 다 보고 있던 칠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고정하십시오, 전하.”

“내가 지금 그러게 됐어. 이것들이 날 서류로 치어 죽이려고 작정을 했지. 안 그러면 이렇게 못 해.”

“설마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그게 아니라도 이참에 업무 처리 체계를 제대로 바꿔 놓지 않으면 내가 제명대로 못 살겠어.”

도현은 뭔가 결심을 단단히 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 도승지의 연락을 받은 신하들이 속속 대전으로 모여들었다.

갑작스러운 소집령에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는 무슨 일인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영상께서는 뭐 좀 아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우의정 송시열의 물음에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영의정 박황은 고개를 좌우로 살짝 내저었다.

“나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소. 하지만 대신들을 이렇게 전부 소집하신 걸 보면 뭔가 중요한 일이 있는 것 아니겠나?”

“허어. 이것 참.”

송시열이 답답한 듯 탄식을 하자 옆에 있던 이조판서 조익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이야기를 했다.

“혹여, 북방에서 일이 생긴 것이 아닐까요?”

잠시 소강상태지만 청나라와 여전히 전쟁이 마무리되지 않았고 최근에는 거란족 문제까지 뒤엉켜 아주 복잡한 것이 현재 봉황도 상황이었기에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모여 있던 신료들의 시선이 병조판서인 임경업에게 쏠리자 그는 약간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제가 알고 있기로 북방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그럼 도대체 무슨 일인지…….”

“전하께서 오시면 알게 될 테니 다들 기다려 봅시다.”

영의정 박황이 다독이듯 이야기를 하자 대신들은 궁금증이 가득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 때 도현이 왔음을 알리는 상선의 목소리가 대전 가득 울려 퍼졌다.

“주상 전하 듭시오!”

문이 열리며 곤룡포를 입은 도현이 근엄한 모습으로 들어서자 신료들은 얼른 허리를 굽히면서 예를 갖췄다.

그런 신료들 사이를 성큼성큼 걸어가 단 위에 놓인 왕좌에 착석한 도현은 스윽 실내를 한번 훑어보고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두 앉으시오.”

“예.”

뭔지는 몰라도 목소리에서 기분이 별로 안 좋다는 걸 알아차린 신료들은 그의 눈치를 보며 각자 자리에 앉았다.

그 상태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신료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도현은 이내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서탁을 세게 내려치면서 버럭 호통을 쳤다.

탕!

“경들은 도대체 뭘 하는 사람들이오!”

“…….”

난데없는 상황에 신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도현의 호통은 계속 이어졌다.

“나라에서 주는 녹을 먹고 높은 자리에서 백성들을 이끄는 위치에 있다면 응당 거기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지 안이하게 그저 거드름만 피우고 있다면 조정에 정승 판서가 무슨 필요가 있겠소!”

“전하, 뭐 때문에 역정이 나셨는지 말씀을 해 주셔야 저희들이 알지 않겠사옵니까?”

조금 과하다 싶은 말에 송시열이 정색을 하며 묻자 도현은 언성을 계속 높인 채 이야기를 했다.

“정말 경들이 뭘 잘못했는지 모른단 말이오!”

“아뢰옵기 송구스럽사옵니다만 저희들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시옵소서.”

“우상은 내가 한양에 돌아오고 나서 지금까지 처리한 서류가 얼마나 되는지 아시오?”

“……글쎄요.”

“짐수레 한 대는 족히 넘을 거요!”

“그건 원정을 나가 계시는 동안 밀린 업무가 많아서 그런 것이지 않사옵니까.”

“경이 말한 대로라면 국왕으로서 당연히 해야 될 책무이니 내가 이러지 않겠지.”

“그럼…….”

“올라오는 상소와 서류 태반이 굳이 내가 보지 않아도 될 만큼 사소한 일들이니 문제가 아니겠소. 아니, 운종가에서 설치는 왈패들까지 짐이 신경을 써야 되겠소!”

그제야 도현이 왜 화가 났는지 파악한 송시열과 신료들은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흠흠.”

그런 모습에 도현은 지금까지 쌓인 스트레스를 모두 쏟아 내듯 목에 핏대를 세우며 질책을 해 댔다.

“이런 것까지 짐이 처리를 해야 된다면 삼정승과 육조 판서들은 도대체 왜 있는 것이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지 말고 어디 말을 해 보시오!”

그가 계속 다그치자 신료들의 대표인 영의정 박황이 고개를 들고는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선 신들이 전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것 같아 송구스럽사옵니다. 허나 원칙적으로 조정에서 하는 모든 일은 전하께 재가를 받고 행하게 되어 있어서 저희들도 어쩔 수 없었사옵니다.”

박황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송시열이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리고 예로부터 사대부들이 올리는 상소문을 빠짐없이 읽고 민심을 헤아리는 건 국왕의 책무이옵니다.”

“맞사옵니다, 전하.”

송시열은 물론이고 박황을 비롯해 왕당파에 속한 인물들까지 엉뚱한 이야기를 해 대자 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말들 잘하셨소! 하지만 국왕도 사람인 이상 처리할 수 있는 업무에 한계가 있으니 승정원에서는 상소문을 적당히 걸러서 올리고 짐이 큰 틀을 결정하면 거기에 맞춰 육조에서 정책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지 않소. 그런데 지금처럼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검토하고 지시를 내려야 된다면 다른 일은 어떻게 하라는 거요?”

구구절절 옳은 말에 달변가인 송시열마저 딱히 반박할 구실을 찾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이어지는 도현의 이야기를 들었다.

“앞으로는 이런 상소문처럼 굳이 짐한테까지 올리지 않아도 되는 일은 각 부처 담당자들이 알아서 처리를 한 뒤에 사후 보고만 하시오.”

도현의 말에 신료들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는데 이처럼 자율권을 주는 건 그동안 줄기차게 추진해 온 왕권 강화와 완전히 반대되는 일이었다.

“저, 전하.”

박황이 당황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지만 도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대신 권한이 있으면 책임도 따르는 법이니 모든 업무에 담당자를 명확히 하고 만약 비리를 저지르거나 일을 제대로 못했을 경우 삭탈관직은 물론이고 극형까지 벌을 내려 엄히 다스리도록 하겠소! 이를 위해 사헌부司憲府와 별도로 감사원監査院이라는 것을 새로 만들어 관리들의 비위와 직무를 감찰하고 처벌하겠소.”

이야기를 들은 송시열이 살짝 반대 의견을 냈다.

“이미 사헌부가 존재하는데, 구태여 새로운 기관을 만들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현재 운영 중인 사헌부를 가지고는 한계가 있으니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까지 폭 넓게 일 년 내내 감찰할 수 있는 곳을 신설해 서로 협력하고 때로는 부패하지 않도록 상호 견제하는 체계를 만들려는 것이오.”

“…….”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딱히 트집 잡을 것이 없고 소속 관원들의 청렴이 중요한 곳인 만큼 상호 견제 기능이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에 다른 신료들은 물론이고, 반대를 한 송시열마저 수긍을 했다.

무엇보다 일련의 사건들로 도현에게 완전히 넘어가 있는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이번 일을 계기로 조금이나마 되찾아 올 수 있다는 것에 신료들은 다른 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잠시 서로 눈짓을 교환한 신료들은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며 합창하듯 말했다.

“전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러자 도현은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면 모두 찬성하는 걸로 알고 이대로 추진하겠소.”

“예.”

신료들의 권한 확대와 관련된 이야기를 몇 가지 더 나눈 뒤 도현은 대전 회의를 끝냈다.

희정당으로 다시 돌아오자 수행을 했던 칠현이 그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며 이야기를 꺼냈다.

“어쩌시려고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왜, 내가 실수라도 한 것 같아.”

“이러면 전하께 집중된 힘이 분산돼 그동안 힘들게 눌러 놓은 신권이 자칫 다시 살아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위치가 사람을 만든다고 어느새 철없는 모습을 지우고 노련한 정객처럼 칠현이 조언을 하자 도현은 새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법인데.”

“제가 전하를 모신 것만도 벌써 십 년이 넘었습니다. 그것보다 정말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제일 가까운 곳에서 그를 보필하는 측근답게 겉으로 보이는 것 말고 뭔가 숨겨진 게 있다는 걸 눈치채고 칠현이 묻자 도현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쌓아 올린 왕권인데 내가 쉽게 넘겨줄 것 같아.”

“그런데 왜?”

“내가 감사원을 왜 만들자고 한 것 같아?”

“대전에서 말씀하신 대로 사헌부가 부패하지 않도록 서로 견제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한쪽 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까딱까딱 흔든 도현은 보료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그건 신료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댄 핑계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지.”

의아한 표정을 짓던 칠현은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바보처럼 입을 살짝 벌린 채 탄성을 흘렸다.

“설마!”

“감사원은 신료들의 목을 단단히 옭아맬 고삐야.”

“……!”

“지금 당장은 희희낙락하겠지만 나중엔 그들도 곧 깨닫게 되겠지. 자기 스스로 목을 조르는 동아줄을 만든 셈이라는 걸.”

신료들의 높은 콧대를 꺾을 비장의 한 수를 손에 쥐게 된 도현은 회심에 가득 찬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눈앞에서 대롱거리는 당근만 보고 죽을힘을 다해 달리는 말처럼, 신하들은 권한 확대라는 달콤한 말에 취해 자기들 입맛대로 국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거라는 허황된 꿈을 꾸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나 꿈이란 건 반드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게 되어 있듯, 신료들도 언젠가는 감사원의 실제 목적을 알게 될 것이었다.

“그때가 오면 과연 어떤 표정들을 지을지 참으로 기대되는군.”

도현은 덫을 놓고 기다리는 사냥꾼처럼 히죽거리며 즐거움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쏟아지는 일거리에 버럭 화가 나서 충동적으로 저지른 행동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다 머릿속으로 계획을 짜 놓고 계셨군요.”

“당연하지. 능구렁이 같은 영감탱이들을 상대하려면 이 정도 계책은 기본 아니겠어.”

“대단하십니다.”

“어쨌든 감사원을 만드는 것이 확정됐으니 이제 좀 쉬어야겠다. 책상 위에 있는 서류들도 다 돌려보내.”

“예.”

그러면서 도현은 앉은 자세 그대로 양손을 머리 위로 쭉 펴고 앓는 소리를 냈다.

“아고고. 일에 치여서 운동을 통 안 했더니 우두둑 뼈 소리 나는 것 좀 봐라.”

“차라도 한잔 올릴까요?”

“입이 심심하니까 뭐 씹을 것도 같이 내와. 저번에 보니까 약과가 아주 맛있게 잘됐더라고.”

“예에. 수라간에 말해서 바로 대령하라 이르겠습니다.”

칠현은 약간 경외심까지 섞인 표정으로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다가 돌아서서 나갔다.

그리고 혼자 남은 도현은 아예 비단 보료 위에 옆으로 벌렁 드러누워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거기다 한쪽으로 꼰 발끝을 까딱거리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니 그야말로 한량이 팔자 좋게 늘어진 모습과도 같았다.

“영감탱이들, 감히 꼼수를 부려서 나한테만 일을 다 떠넘겨? 어디 고생 한번 오지게 해 보라지.”

그렇게 도현은 낮잠까지 자며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한편 도현의 음흉한 흉계에 빠진 줄도 모르고 신료들 특히 송시열을 비롯해 신권을 강조하는 산당에 속한 인물들은 관리의 권한이 확대된 것에 크게 기뻐했다.

“하하하! 이거 정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그러게 말이오. 설마 주상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지 누가 알았겠소이까?”

“난 처음 이야기를 듣고 내 귀를 의심했소이다.”

퇴청을 하고 당수인 송시열의 사저에 모인 산당 소속 신료들이 희희낙락거리며 오늘 대전에서 있었던 결정을 기꺼워하는 것과 달리 상석에 자리한 그는 어쩐지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옆에 있던 신료 하나가 그걸 보고 말을 걸었다.

“대감께서는 이번 일이 기쁘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그러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송시열한테 모였고, 그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그렇소.”

“그게 뭡니까?”

“왕위에 오르신 이후부터 줄기차게 왕권 강화에 집중하신 주상이 너무 쉽게 권한을 양보한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그 감사원이라는 걸 새로 만드는 게 아무래도 신경에 거슬리오.”

그의 지적에 들뜬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기는 했지만 다들 여전히 장밋빛 환상에 빠져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제야 주상께서도 우리 사대부들과 함께 가지 않으면 조정 운영이 어렵다는 걸 느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감사원도 단순히 비리를 적발하기 위한 관청이니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을 겁니다.”

“맞아요.”

상황을 너무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아 걱정이 됐지만 현재로서는 의구심만 있을 뿐 딱히 문제가 드러난 게 없었기에 송시열도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제발 그렇게 됐으면 좋겠소이다.”

“그건 그렇고 병자년의 치욕도 씻었으니 청나라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다시 명과 관계를 회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옳은 말이오. 그동안은 청나라의 강요에 어쩔 수 없었지만 상황이 달라졌으니 응당 그래야지요.”

도현의 지속적인 노력에 조정 내부의 사대주의가 많이 희석됐지만 여전히 나이가 지긋한 원로와 산당을 중심으로 한 골수 유학자들은 명나라를 상국으로 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송시열 또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당연히 국교를 회복해야 되겠지만 아직까지 청과의 전쟁이 완전히 마무리된 것이 아니니 서두르지 말고 조금 더 두고 봅시다.”

그러자 전라도 남원 출신으로 산당 안에서도 강경파로 불리는 예조참판 이익치가 발끈하며 나섰다.

“아니, 뭘 더 기다리자는 겁니까!”

“내부적으로 처리해야 될 문제도 많고 다른 당파와 뜻을 모아야 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주상 전하의 재가를 받아야 되는 사항이니 신중하자는 거요.”

“이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어디에 있다고 그러십니까? 최근 몇몇 젊은 유생들이 명나라의 그늘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해야 된다는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모양인데 이럴 때일수록 명과 잠시 소원해진 관계를 다시 예전처럼 회복해 나라의 중심을 바로 세워야 될 겁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익치가 강하게 명나라와의 관계 회복을 주장하자 다른 사람들도 동조를 했다.

아주 약간이지만 도현을 옆에서 지켜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사대를 하는 것이 진정한 선善인지 고민을 가지고 있던 송시열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냥 놔뒀다가는 당장 내일 아침 조례에서 이걸 공론화시킬 분위기였기에 송시열은 일단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다독거렸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소만 지금 이 문제를 거론하면 조정에 논란이 크게 일어 자칫 신료들의 권한 확대가 무산될 수도 있으니 잠시 뒤로 미뤄 둡시다.”

“흠흠. 그건 곤란하지요.”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일단 우상 대감 말씀처럼 조금 더 상황을 지켜봅시다.”

“아쉽지만 그럽시다.”

자신들의 이익이 훼손될 것 같자 언제 그렇게 강경한 태도를 보였냐는 듯이 바로 꼬리를 내리는 모습에 송시열은 스스로 고매한 유학자라 자부하는 자들이 어찌 이럴 수가 있는지 한탄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당분간 그 문제는 묻어 두는 것으로 하고 다들 자중하시오.”

“알겠습니다.”

“그러지요.”

다음 날부터 도현이 천명한 대로 두 차례의 반란 이후 국왕한테 지나칠 정도로 집중되어 있던 권한이 상당 부분 삼정승과 육조에 넘어갔다.

대표적으로 예산을 관리하고 집행하는 호조 같은 경우 아무리 작은 지출이라도 예전에는 상세한 내역서를 도현에게 올려 결재를 받았지만, 금화 오백 냥 이하의 금액은 호조판서나 참판 선에서 우선 처리하고 나중에 추인을 받도록 했다.

이런 식으로 신료들에게 권한이 주어지자 도현이 혼자서 처리하던 업무량이 거의 절반 이하로 대폭 줄어들었다.

반면 신료들은 일거리가 많이 늘어났지만 권한이 커졌다는 것에 가려서 아직까지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며칠 뒤 감사원이 만들어졌는데 초대 원장에는 포도대장직을 맡고 있던 이상규가 한 품계 승차해 임명됐다.

무관인 데다 임경업 장군의 수하 장수 출신으로 왕당파에 속한 인물이었지만, 지난 몇 년간 포도대장직을 훌륭히 수행한 경력이 있었고 아직 감사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기관인지 아직 몰랐기에 별다른 반발이 없었다.

또 이때까지만 해도 원장 밑에 배치되는 감사관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도현은 이상규를 간판으로 세워 놓고 주작단 출신들을 대거 등용해 포진시켜 감사원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다.

업무를 파악하느라 바쁘던 이상규는 선전관의 연락을 받고 급히 도현이 있는 희정당으로 달려왔다.

“전하, 찾으시었사옵니까?”

바닥에 엎드린 이상규의 말에 비단 보료 위에 근엄하게 앉아 있던 도현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짐이 바쁜데 부른 건 아닌지 모르겠군.”

“아니옵니다.”

“편히 앉게.”

“괜찮사옵니다.”

“짐이 불편해서 그러네.”

“……예.”

“어떻게 새로 맡은 업무는 할 만한가?”

조심스럽게 상체를 들고 바로 앉은 이상규는 도현의 물음에 약간 긴장한 어투로 대답했다.

“막중한 임무를 주신 만큼 최선을 다해 실망시켜 드리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옵니다.”

“포도청도 잘 운영해 왔으니 경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게야.”

“과찬이시옵니다.”

머리를 숙이는 이상규를 보던 도현은 이내 정색을 하며 본론을 꺼냈다.

“경을 오라고 한 건 몇 마디 해 줄 이야기가 있어서네.”

“하교하시옵소서.”

“우선 줄 것이 있네.”

말과 함께 도현이 손짓을 하자 한쪽에 조용히 시립해 있던 칠현이 목 함을 하나 가져와 이상규 앞에 내려놨다.

“이게 무엇이옵니까?”

“열어 보게.”

“…….”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의아했지만 국왕의 말이었기에 이상규는 바로 손을 뻗어 목 함 뚜껑을 열었다.

“이건?”

목 함 안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비단 수실이 달린 네모난 옥패가 들어 있었는데, 앞에는 국왕을 상징하는 봉황 무늬가, 뒤편에는 한문으로 이 패를 가진 자는 국왕을 대신한다는 내용이 선명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짐이 경을 신임하고 관리들을 감찰하는 임무를 맡겼다는 걸 증명하는 패일세. 필요하다면 포도청은 물론이고 의금부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니 소중히 간직하게.”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상규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며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포도청은 몰라도 국왕 직속 기구로 조옥詔獄이라고도 불리며 일반 백성들뿐만 아니라 사대부도 덜덜 떨게 하는 무시무시한 곳을 지휘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권한이자 힘이었다.

소속 관헌들 대부분이 비밀 정보기관인 주작단에서 넘어온 걸 알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이상규는, 감사원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곳이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이렇게 힘이 세고 중요한 기관의 수장은 보통 국왕이 자신의 의중을 제대로 잘 반영할 수 있는 최측근을 내세우는 게 보통이었는데, 거기에 바로 자신이 선택됐다는 것에 이상규는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제 목숨보다 소중히 아끼겠사옵니다.”

“하하하! 옥으로 만들어서 꽤 비싸지만 경의 목숨과 바꿀 정도는 아니니까 그러지 말게.”

“예?”

“그만큼 경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말일세.”

“아. 예.”

농담을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껌뻑이던 이상규는 이어진 말에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옥패를 항상 패용하고 다니면서 어떤 압력이나 회유에도 흔들리지 말고 비리를 저지르는 자들을 찾아내 엄단하도록 하게.”

“옛. 전하의 말씀 가슴 깊이 새기겠나이다.”

“경만 믿고 있겠네.”

결연한 얼굴로 상체를 숙이는 이상규를 보며 도현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옆에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칠현은, 또 도현의 화려한 말발과 너만 믿는다는 이야기에 홀딱 넘어가 뼛골까지 쭉쭉 빨리며 일할 인사가 하나 더 늘어난 것에 속으로 혀를 찼다.

칠현의 예상대로, 옥패를 받고 기합이 잔뜩 들어간 이상규는 감사원으로 돌아오자마자 휘하에 있는 감사관들을 다그쳐 빨리 업무 파악과 정리를 끝내고 본격적인 감찰에 착수할 것을 지시했다.

새로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독자적인 정보 수집망이 아직 구축되지 않았지만, 적극 협조하라는 도현의 어명에 따라 주작단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깔아 놓은 탐보망을 통해 입수한 정보들을 공유해 주면서 감찰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제 시작하는 단계였기에 감사원이 과연 도현이 원하는 만큼 성과를 내줄지는 더 지켜봐야 했다.

이런 가운데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던 도현은 병조판서 임경업이 찾아와서 한 보고에 인상을 썼다.

“병력 충원이 어렵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청과 전쟁을 치르면서 발생한 사상자들을 보충하고 봉황도를 비롯한 기타 전방 군단들의 전력을 대폭 증강시키느라 여유 인력과 예산이 모두 다 소진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후방에 주둔하는 부대들을 완전 편성하는 건 최소 삼사 년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눈썹을 치켜세운 도현은 앞에 있는 임경업을 보며 살짝 언성을 높였다.

“삼사 년이라고!”

“그렇습니다.”

“미치겠군.”

언제 다시 청나라와 전쟁을 벌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병력 충원이 원활하지 않다는 건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예산은 그렇다 쳐도 인력이 부족하다는 건 뭐야?”

“현재 징집 기준에 들어가는 인원은 일 년에 칠팔천 명 남짓인데, 필요한 병력은 당장 비어 있는 함경도와 평안도에서만 이만 명이 넘으니 도저히 수요를 채울 수가 없습니다.”

“끄으응.”

“복속해 오는 거란족에서 병력을 모집해 급한 대로 부족한 부분을 조금이나마 채우고 있지만, 지켜야 될 영토가 늘어난 만큼 근본적인 해결책을 빨리 세우지 않으면 자칫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된 일이었는데 남해도부터 봉황도까지 지난 몇 년간 본래 조선 본토보다 많은 땅을 영토로 만들었지만 그걸 지키고 유지할 병력 자원은 크게 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근본적으로 병사가 될 대상이 열여덟 살을 넘긴 성인이었는데 기존에 양인들만 해당하는 걸 군제 개편을 통해 사대부까지 확대했지만, 도현의 계획대로 각 도道마다 군단을 하나씩 주둔시키고 여기에 수군과 근위군단까지 유지하려면 머릿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동안 고심을 거듭하던 도현은 이내 뭔가 결단을 내렸는지 살짝 머리를 들며 입을 열었다.

“조금 더 분위기가 조성되면 추진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지.”

“해결 방법이 있으신 겁니까?”

임경업이 기대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자 도현은 정색을 하며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양인으로 포함시키지 않았던 사노비들까지 징집 대상을 확대하시오.”

“예에!”

뜻밖의 말에 임경업은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노비들도 조선 백성이니 군역의 의무를 지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소.”

“하오나 그들은 사대부들의 개인 소유지 않사옵니까?”

탕!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서탁을 세게 내려친 도현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강제 노역을 하는 왜인과 청군 병사들은 지은 죗값을 받고 있는 거지만, 사람이 같은 사람을 소나 돼지처럼 소유하고 부린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오! 그들도 엄연한 짐의 백성들이오.”

“그건 그렇지만…….”

추상같은 기세에 눌린 임경업은 대놓고 안 된다는 말은 못 하면서도 부정적인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러건 말건 도현은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굳이 병력 문제가 아니더라도 언제고 짚고 넘어가야 될 일이었소. 노비들을 해방시켜 양인으로 만든다면 세금까지 더 거둘 수 있으니 나라에도 큰 도움이 될 거요.”

“그렇지만 노비를 사유재산으로 생각하는 사대부들의 반발도 클 것이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문제가 있을 거라는 걸 아시면서도 강행하시겠다는 것이옵니까?”

“노비를 내놓는 대신에 적당한 보상을 해 준다면 어느 정도 불만이 줄어들지 않겠소?”

“강제적으로 빼앗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하지만 한양에 있는 사노비 숫자만 해도 족히 수천은 될 텐데, 그 보상금을 어찌 마련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보상금이 얼마나 필요할지 도저히 가늠이 안 된 임경업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지만 도현은 무슨 생각인지 재정 상태를 걱정하는 임경업과 달리 아주 태평한 모습을 보였다.

“그건 또 따로 해결할 방법이 있지.”

“어떻게 하시려고?”

“후후후, 나중에 보면 알게 될 것이오.”

“…….”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이렇다 할 방안이 없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도현이 저리 장담을 하니, 임경업은 결국 마음대로 하라는 듯 체념한 표정을 내보였다.

“왜, 못미더운가?”

“아닙니다.”

부정을 하긴 해도 사뭇 불안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는 임경업을 지그시 쳐다보며 도현이 말했다.

“언제 내가 입 밖으로 꺼내서 이루지 못한 일이 있던가. 이번에도 철석같이 나만 믿고 따라오면 모든 게 다 잘될 거야.”

그러면서 도현은 가슴을 쭉 펴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예.”

지난날 사대부들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오고 급기야 반란까지 일으키게 만든 대동법 시행과 비슷한 강도의 충격이었기에, 도현은 성급하게 사노비해방을 공론화시키지 않고 먼저 조용히 물밑 작업부터 진행했다.

한양을 포함한 각 지방 관아에 공문을 보내 관활 구역에 거주하는 인구를 노비까지 포함해서 하나도 빼놓지 않고 조사해 호조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명목은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한 인구조사였다.

얼핏 들으면 뭔가 거창해 보였지만 실제로 노리는 건 전국에 있는 노비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기 위한 거였다.

그래서 관아로 내려 보낸 공문서에 그동안 인구 조사에 잡히지 않았던 노비를 가족 관계와 소유주까지 정확히 조사하라고 강조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냥 대충 적어서 올려 보내려던 관리들은 경상도 진주 목사가 허위 보고를 했다, 감사원에 적발돼 삭탈관직은 물론이고 멀리 남해도(쓰시마)로 유배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랴부랴 아전들을 풀어서는 아예 양반집마다 찾아다니며 데리고 있는 노비 숫자를 파악했다.

갑작스러운 소동에 사대부들은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마지못해 협조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이게 어떤 식으로 이용될지 전혀 몰랐다.

그리고 이때 감사원이 첫 직무 태만자를 적발해 내면서 조금씩 신료들 사이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희정당에 앉아 호조에서 올린 인구 조사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던 도현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허어. 엄청나군.”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이 정도로 많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옆에 있던 칠현이 동조하듯 하는 말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양에만 이만 명이 넘게 있고 전국적으로는 육십이만이나 되는군.”

“그중에 이 할만 징집해도 필요한 병력을 다 채우고 남겠습니다.”

“내 말이 그거야.”

보고서를 서탁 위에 내려놓으며 도현은 한탄하듯 말을 이었다.

“나라에 큰 도움이 됐을 사람들이 노비라는 굴레에 묶여 사대부들의 배를 불리는 데만 이용되고 있었다니 정말 어이가 없군.”

“그나저나 정말 이 일을 추진하실 겁니까?”

“왜, 내가 못 해낼 것 같아?”

“그런 것이 아니라…….”

우물쭈물 말끝을 흐리는 칠현을 보며 주먹을 꽉 움켜쥔 그는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조선이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꼭 해결해야만 되는 일이야. 한 사람의 손도 아쉬운 때에 이 많은 인력을 그냥 놔두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지.”

“후우. 전하의 뜻이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미리 밑밥을 깔아 둬야겠지. 이완 단장과 호조판서를 불러와.”

“네.”

잠시 뒤 호출을 받고 희정당으로 달려온 이완과 김육은 한참 동안 도현과 은밀한 이야기를 나눴다.

“대감, 요즘 대궐 내에서 도는 소문을 들으셨습니까?”

그를 따르는 젊은 관리 중 하나로 왕을 따라다니며 언행을 기록하는 사관인 황현욱의 말에 송시열은 손등으로 길게 자란 수염을 쓸어내렸다.

“흐음. 청나라가 심양성을 탈환하려고 삼십만 대군을 모으고 있다는 이야기 말인가?”

“알고 계셨군요.”

“그 소문으로 궐내가 떠들썩한데 어찌 내가 모를 수가 있겠나.”

“작년에 이어서 또다시 청나라가 그런 대군을 동원해 공격해 온다면 정말 큰일이지 않습니까.”

백성들한테 본이 되며 항상 당당해야 되는 조정 관리가 소문 따위에 휩쓸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송시열은 짧게 혀를 찼다.

“쯧. 확실하게 밝혀진 것도 아니고 고작 소문에 불과한 이야기인데 뭘 그리 신경을 쓰나. 아무리 청나라가 대국이라고 하지만 이십만 대군을 끌고 와서 큰 낭패를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또다시 그것보다 많은 군세를 일으킬 수 있겠어.”

“그게 단순한 소문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가?”

송시열이 의아한 얼굴로 되묻자 황현욱은 둘밖에 없는데도 혹시 누가 엿들을세라 주위를 둘러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오늘 제가 주상 전하를 따라다니며 사초史草를 기록하는 날이었사온데, 주작단 단장인 이완 공이 청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했습니다.”

국왕 직속 정보기관 수장인 이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건 그냥 흘려들을 상황이 아니라는 뜻이었기에, 송시열은 표정을 살짝 굳히고는 황현욱을 가볍게 나무랬다.

“사초에 기록되는 내용은 실록이 만들어질 때까지 함부로 외부에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있다는 걸 모르나?”

“제가 그걸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너무나도 중대한 일이라 벌을 각오하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황현욱의 말에 송시열은 더 이상 질책을 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갔다.

“아무튼 앞으로는 조심하게.”

“예.”

“그나저나 삼십만 명이라……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정말 큰일이로군.”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리 조정에서 봉황도 방어를 강화하고 있다지만 청군을 막아 낼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음.”

낮게 침음을 흘리며 송시열은 고민에 찬 표정을 지었다.

이런 가운데 청나라가 삼십만 대군을 모아 곧 심양성을 다시 공격할 거라는 소문은 신료들 사이에 빠르게 퍼져 나가며 대궐과 관가에 긴장감이 조성됐다.

“분위기가 어때?”

봄이 됐지만 다시 전쟁이 터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뒤숭숭한 바깥 분위기와 달리 도현은 태평스럽게도 비단 보료 위에 비스듬히 앉아 수라간에서 오늘 아침 만든 약과를 집어 먹고 있었다.

“신료들은 물론이고 궁인들까지 삼삼오오 모여 곧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이야기뿐이옵니다.”

“주작단에서 일을 제대로 했군.”

“저도 깜빡깜빡 진짜로 청나라가 쳐들어올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니까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사실 청군 삼십만에 대한 소문은 주작단에서 도현의 지시를 받아 의도적으로 신료들 사이에 퍼뜨린 거였다.

주작단이 일부러 퍼뜨린 것도 있었지만 작년에 대패를 당하기는 했어도, 청나라가 이대로 심양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건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었기에 소문은 조금씩 살이 더해지더니 신빙성이 아주 높은 이야기가 되어 급격하게 번졌다.

계획보다 일이 조금 더 커지기는 했어도 이걸로 도현이 원하는 분위기가 조정 안팎에 충분히 만들어졌다.

“신료들의 반응은 어때?”

“크게 두 분류로 나누어졌습니다. 임경업 대감을 위시한 군부는 계속된 승전에 자신감이 생겼는지 어디 한번 해보자는 분위기인데 반해, 문관들은 당파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 또다시 전쟁이 벌어지는 걸 크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딱 예상한 그대로군.”

“예.”

자세를 바로 한 도현은 두 손바닥을 비비면서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앞에 둔 아이처럼 눈을 반짝 빛냈다.

“그럼 이제 슬슬 나서 볼까.”

다음 날 대전에서는 어김없이 국왕이하 삼정승과 육조 판서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조회가 열렸다.

평상시와 같이 각 부처의 보고 사항과 현안에 대한 토의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최근 대궐과 관가에 돌고 있는 청나라 대군에 대한 소문 때문인지 신료들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어색하고 불안감이 느껴졌다.

“지난달에 완공한 두 번째 용광로가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가면서 쇳물 생산량이 두 배로 늘어나게 됐습니다. 그리고 겨울 동안 강제 노역 중인 청군 포로와 왜인 들을 동원해 발해도에 약 십오만 결의 토지를 새로 조성했고 올해부터 씨를 뿌려 농사를 시작할 계획이옵니다.”

“농작물은 어떤 걸 심기로 했나?”

“벼와 함께 봉황상단에서 가져온 고구마와 감자를 재배할 것이옵니다.”

구황식물인 고구마와 감자는 원래 조선에 없는 외래종으로 고구마 같은 경우에는, 훨씬 이후인 영조 때가 되어서야 통신사로 보내진 조엄이 일본에 갔다가 씨고구마를 가져온 걸 계기로 재배가 시작했다.

둘 다 척박한 땅은 물론이고 기후나 토양이 좋지 않아도 큰 어려움 없이 쑥쑥 잘 자라는 식물이었고 주식인 쌀에 못지않은 영양분을 가지고 있어서, 도현이 식량의 안정적인 확보와 일반 백성들이 배를 곪지 않고 생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장 총관한테 지시해 특별히 구해 오게 했다.

덕분에 두 작물은 원래 역사보다 훨씬 빨리 조선인들의 식탁에 오르며 수많은 서민들의 배를 채워 줬다.

“시험 재배 결과가 좋게 나왔다고 했었지?”

“예. 강원도에서 실시를 했사온데 재배에 큰 어려움이 없었고 수확도 괜찮았사옵니다.”

“다행이군. 발해도에서도 결과가 좋으면 모든 농민들에게 씨를 보급해서 벼와 함께 재배할 수 있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공조 판서를 끝으로 예정되어 있던 안건 토의가 모두 마무리되자 도현은 좌우에 앉아 있는 신료들을 천천히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청나라의 동태가 심상치가 않소. 간자들이 보내온 소식에 의하면 예친왕이 심양을 탈환하고 한양까지 치기 위해 무려 삼십만 대군을 준비 중이라고 하오.”

“허어.”

“삼십만이라…….”

“소문이 사실이었구만.”

“이런.”

그저 소문으로 떠도는 이야기를 듣는 것과 이렇게 국왕인 도현이 직접 말하는 건 무게감 자제가 달랐기에 신료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크게 술렁였다.

“그럼 빨리 대책을 세워야 되지 않겠사옵니까?”

황현욱을 통해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들었던 우의정 송시열이 비교적 차분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하자 항상 당당하던 것과 달리 도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지난번처럼 심양성을 방어선으로 청군의 공격을 막아 내는 수밖에 없는데 가장 중요한 병력이 충분하지 않아서 큰일이오.”

“제가 알고 있기로 발해도에만 십만이 넘는 군대가 주둔 중인데 그걸로 부족하다는 말씀이시옵니까?”

“공격해 오는 청군은 세 배나 많은 삼십만이지 않소.”

“저번처럼 수성전을 벌여 버티면 되지 않겠습니까.”

송시열의 말에 도현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예친왕이 바보도 아니고 한번 당했는데 또 속겠소. 그리고 지난번에는 겨울이라 우리한테 유리했지만, 지금은 군을 운용하기 좋은 계절인 데다 무엇보다 청군도 성급하게 덤비지 않고 철저히 준비를 해 올 것이오.”

“그렇군요.”

“병력이 부족하면 더 뽑아서 적과 싸우도록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산당에 속한 이익치가 던져 준 미끼를 물자 도현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러면 좋겠지만 징집할 양인들의 숫자가 너무 부족하니 문제가 아니겠소.”

“아니, 도대체 병력이 얼마나 더 필요하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그건 짐보다 병판이 대답하는 것이 좋겠군.”

도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한쪽에 앉아 있던 임경업은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이야기를 했다.

“흠. 군부 수장으로서 가능한 한 많은 병력을 확보하면 좋겠지만, 당장 예상되는 청군의 공격을 막으려면 발해도에 최소 십이만 명을 더 증강해야 됩니다.”

엄청난 숫자에 다들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헉!”

“너무 많은 거 아니요?”

불만 어린 말들이 쏟아지자 임경업은 특유의 묵직한 목소리로 왜 그런 숫자가 나왔는지 이유를 설명했다.

“방어선의 중심축인 심양성을 지키고 청군이 우회를 해서 바로 한양으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저지하려면 압록강과 주변 요새에 최소 십이만 정도를 배치해 둬야지만,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을 겁니다.”

“최근에 복속된 거란족을 활용하거나 경상도나 전라도에 있는 군단을 올려 보내면 되지 않소?”

이조판서 조익의 의견에 임경업은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기본적으로 거란 출신 병사들은 모두 기병이라서 이번처럼 방어전을 벌일 때는 큰 효용성이 없고, 후방에 위치한 군단들도 아직 편성이 다 끝나지 않아 병력 수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전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투입하는 예비부대로 써야 됩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한양에 있는 병력과 함께 국왕 전하를 보필해야 되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이것 참.”

그 말은 곧 자신들을 보호해 줄 병력이기도 하다는 뜻이었기에 조익은 물론이고 다른 신료들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문제를 삼지 않았다.

“그럼 대상자를 늘려 징집을 실시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상석에 앉아 있던 도현이 눈가를 찌푸리고는 질책하듯 말했다.

“올해 농사는 포기하자는 건가!”

“죄, 죄송하옵니다.”

괜히 나섰다가 본전도 못 찾은 이익치는 찔끔해서 어깨를 움츠렸다.

너무나도 어리석은 발언에 절로 혀가 차졌지만 그래도 같은 당파였기에 송시열이 나서 감싸 줬다.

“답답한 마음에 꺼낸 이야기일 겁니다. 전하께서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우상이 그렇게 말을 하니 참겠소만 국정을 맡고 있는 대신답게 좀 더 깊이 생각하고 이야기를 하시오.”

“예.”

창피를 당한 이익치는 벌게진 얼굴로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자 도현은 정색을 하고는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비상 상황인 만큼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소.”

“…….”

신료들이 모두 도현을 쳐다보는 가운데 송시열은 이럴 때마다 군제개편이나 대동법 실행 같은 폭탄선언이 있었던 걸 떠올리고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뜸을 들인 도현은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병력 자원을 확보하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세수를 늘리기 위해 전국에 있는 사노비를 해방시켜 평민으로 신분을 올려 주겠소.”

폭탄처럼 떨어진 말에 조정 대신들은 순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잠잠해졌다.

영겁과도 같은 침묵의 순간.

그리고 누군가가 헉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벌집을 쑤신 것처럼 득달같은 반대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사노비해방이라니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맞습니다. 엄연한 사유재산인데 그걸 조정에서 강제로 빼앗을 수는 없사옵니다.”

“재고해 주시옵소서.”

벌 떼처럼 쏟아지는 반대에 이맛살을 찌푸린 도현은 손바닥으로 앉아 있던 왕좌 팔걸이를 세게 내려쳤다.

탕!

“누가 되었건 사람의 인격은 소중한 것인데, 돈으로 사고파는 매매의 대상이 되어 평생 누군가의 소유로 살아가고 그 자식한테까지 힘겨운 굴레가 이어진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오!”

아예 신분제 자체를 부정하는 도현의 말에 신료들은 기겁을 했다.

“신분제는 예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전통이옵니다.”

“어찌 고고한 선비들이 하찮은 아랫것들과 같을 수 있겠사옵니까.”

그래도 명색이 조선에서 학식이 제일 뛰어나다는 자들이 꽉 막힌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너무나도 이기적인 발언을 해 대자 화가 난 도현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경들이 하늘처럼 생각하는 유교 경전 어디에 신분을 나눠 같은 사람을 마소처럼 부리라는 구절이 있소! 그리고 나쁜 관행이라면 그냥 놔두는 것이 아니라 뜯어서 고치거나 바로 잡아야 되는 것이 진정한 군자의 도리가 아니오.”

“하오나…….”

“노비들도 짐이 보호하고 돌봐야 되는 똑같은 백성이오. 또 임박한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조선을 지키기 위해서 꼭 필요한 조치이니 그렇게 알고 모두 내 뜻에 따라 주시오.”

“전하!”

“이건 어명이오!”

단호한 어투로 말을 내뱉은 도현은 신료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무시한 채 벌떡 일어나 그대로 대전을 나가 버렸다.

그러자 대전에 남겨진 신료들은 텅 빈 왕좌를 보며 한탄을 쏟아 냈다.

“사노비를 해방시키겠다니 주상께서 어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지난번 대동법 실행 때도 그러시다니 정말 해도 너무하신 것 아니오.”

“이건 조선의 근간이 흔들리는 일입니다.”

“희정당 앞에 멍석을 깔고 앉아 단식 농성을 해서라도 막아야 합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왕당파에 속한 신료들도 대놓고 반대를 하지는 못했지만 상당히 곤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리 이야기를 들어 도현이 오늘 사노비해방을 선언할 걸 알고 있던 임경업은 강하게 반발하는 신료들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쩌시려고 이러시는 건지?”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대궐 분위기가 소란스러운 가운데 도현은 신료들이 격렬히 반대할 거라는 걸 예상하고, 승정원을 통해 사노비해방을 선언하는 방을 한양 곳곳에 붙이고 명령서를 지방 관아에 보내는 걸로 먼저 선수를 쳤다.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운종가 한복판에 세워 놓은 게시판에 관리가 나와 방을 붙이고 가자 주위에 있던 이들이 뭔지 궁금해 모여들었다.

“뭐라고 적혀 있는 건가?”

게시판에 붙어 있는 방은 배움이 짧은 백성들을 위해 친절하게 한문과 한글 두 종류로 적혀 있었지만, 사내는 글을 아예 모르는 까막눈이었기에 함께 있는 친구를 툭 치며 물었다.

“어디 보자. 짐이 만백성들에게 알리노니 같은 인격을 가진 사람을 개인 소유물처럼 사고팔고 일을 시키는 것은 시조 단군께서 말씀하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에 위배되는 행동이고, 유교 이념에도 부합하지 않는 제도이다. 하여 이 시간 이후부터 모든 노비의 매매를 금지하고 그들이 자유의 몸이 될 것임을 선언하는 바이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방에 적힌 글을 읽던 친구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내용에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이게 무슨 소리야?”

“주상 전하께서 노비들을 해방시켜 주신데.”

“정말이야?”

“나도 못 믿겠지만 여기 이렇게 적혀 있잖아.”

친구가 손가락으로 게시판에 붙은 방을 가리키자 사내는 글을 모르면서도 멍한 얼굴로 바라봤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둘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는 크게 놀라 술렁거렸다.

“허어.”

“노비해방이라니.”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만.”

“누가 아니래.”

그것 외에도 밑에 앞으로 노비에게 일을 시키면 거기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되며 일반 백성과 같이 군역과 조세의무를 진다고 적혀 있었다.

또 주인한테는 조정에서 적당한 수준의 보상을 먼저 하고 차후 해당 노비가 이를 갚아 나가도록 명시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모든 것들을 어기고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엄벌에 처한다는 경고가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방이 붙자마자 채 반나절이 안 돼서 노비해방 소식은 한양 전체에 퍼졌다.

그동안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온갖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노비들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환호성을 내지르면서 기뻐했다.

반면 졸지에 토지와 함께 부를 쌓는 원천이 되어 주던 노비들을 잃게 된 사대부들은 크게 반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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