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음모의 밤
총성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가슴을 때리는 둔탁한 느낌에 도현은 짧게 신음을 내뱉으며 몸이 앞으로 푹 꼬꾸라졌다.
“크흑.”
측근 경호를 맡고 있던 박태철과 위사들은 경악성을 터트리면서 황급히 도현을 붙잡으며 그를 둘러쌌다.
“전하!”
“저격이다!”
꽃가루를 뿌리며 환호하던 인파들은 그걸 보고 곳곳에서 비명을 내질렀고 삽시간에 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꺄아아악!”
“전하께서 총에 맞으셨다.”
“이럴 수가!”
근위대 마군대장으로 부하들을 이끌고 자랑스럽게 개선 행진을 하던 흑치영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순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내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며 소리쳤다.
“전하를 지켜라! 허락 없이 접근하는 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역적으로 간주해 베어 버려라!”
“옛!”
차차차창!
위사와 근위대 병사 들은 도현을 가운데 두고 굳건한 방어 대형을 만들었고, 번들거리는 눈을 주위를 쓸어보던 흑치영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삼 층 객잔 건물 지붕 위에 저격범으로 의심되는 사내 둘이 벌떡 일어나 도망치려 하는 걸 발견하고 지체 없이 타고 있던 말 옆구리를 발로 찼다.
“흉수가 저기에 있다!”
구경꾼들이 잔뜩 몰려 있어서 자칫 사람이 다칠 수도 있었지만 도현이 쓰러지는 걸 보고 눈이 돌아간 흑치영은 상관하지 않고 객잔 쪽으로 말을 몰았고 부하들도 뒤를 따랐다.
“비켜!”
“흐익!”
“어이쿠.”
흑치영과 근위대 병사들의 살벌한 기세에 구경꾼들은 기겁을 하며 파리 떼처럼 허겁지겁 좌우로 흩어졌다.
“절대 놓쳐서는 안 돼! 너희들은 퇴로를 막아.”
“예. 따라와.”
지시를 받은 부장이 일단의 병력을 데리고 객잔 건물 뒤로 돌아가자 흑치영은 나머지 부하들과 함께 말에서 내려 곧장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한 명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해!”
우당탕!
한편 총탄이 도현의 가슴에 맞는 걸 확인한 박완용은 조총을 바닥에 던져 버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뜹시다.”
“확실히 맞은 거요?”
감시자로 붙은 사내의 물음에 박완용은 힐끔 온통 난장판이 된 개선문을 바라보고는 차갑게 말했다.
“총탄이 심장에 박혔소. 저러면 산중 제왕이라는 호랑이도 단번에 즉사하니 우리 살 궁리나 합시다.”
위사와 근위대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도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벌써 자신들을 잡으려고 몰려왔는지 아래층에서 떠들썩한 소음이 들려왔기에 사내는 더 머뭇거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시오.”
두 사람은 곧장 인접한 옆 건물 옥상으로 뛰어서 건너갔다.
잠겨 있는 옥상 문을 억지로 부수고 올라온 흑치영은 도망치는 범인들을 발견하고는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피슝!
“이크.”
하지만 거리가 있는 데다 다급한 나머지 제대로 조준을 하지 못해 총탄은 형편없이 빗나가 버렸다.
그러자 흑치영은 이를 부드득 갈고는 권총 대신 장검을 손에 들고 바로 뒤를 쫓아갔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총성에 움찔한 두 사람은 더 서둘러 미리 갖다 놓은 사다리를 타고 미끄러지듯 골목길 아래로 내려갔다.
도현이 상업을 장려하면서 우호죽순처럼 생겨난 수많은 점포와 건물 들로 복잡하게 뒤엉킨 좁은 골목을 박완용과 사내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뛰어갔다.
그들 뒤로 악에 바친 흑치영이 야차 같은 얼굴로 쫓아왔다.
“서라!”
자신과 처의 목숨을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이자 진심으로 충성을 맹세한 주군인 도현이 총탄에 맞았다는 데 흑치영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잡히면 어떻게 될지 불을 보듯 뻔했기에 박완용과 사내도 필사적이었다.
도망치면서 골목 벽에 쌓인 쓰레기와 잡동사니 들을 마구 넘어뜨려 추격을 방해하며 거미줄처럼 얽힌 길을 최대한 활용해 달아났다.
와장창.
소란에 무슨 일인가 싶어 밖을 내다보던 사람들은 살벌한 추격전에 화들짝 놀라 다시 문을 닫았다.
사방에서 그들을 잡으라는 고함과 발소리가 마구 울리는 가운데 전력으로 뛰어 겨우 추격을 따돌린 박완용과 사내는 한 허름한 점집 담을 넘었다.
타탁.
어깨까지 오는 담을 뛰어넘자 상투를 튼 중년 남자가 마당에 서 있다 두 사람을 보고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손짓을 했다.
“이쪽으로 오시오.”
중년 남자도 한패였는데 점집은 거사를 저지르고 금군禁軍을 추격을 피해 잠시 몸을 숨길 은신처였다.
두 사람을 방으로 데려간 중년 남자는 정면 벽에 모셔진 커다란 사대천왕상 족자를 옆으로 치웠다.
그러자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문이 나왔는데 그걸 열자 집 아래에 파 놓은 토굴로 들어가는 통로가 나왔다.
“다시 문을 열어 줄 때까지 숨도 쉬지 말고 숨어 있으시오.”
“알았소.”
사방에 금군이 다 깔려 있는 상황에서 이런 좁고 어두운데다가 도망갈 곳도 없는 토굴에 숨는 것이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기에, 박완용은 함께 온 사내와 몸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중년 남자가 문을 닫고 족자를 원상태로 돌려놓는 것과 거의 동시에 흑치영과 근위대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싸리문을 걷어차며 쏟아져 들어온 근위대 병사들은 살기등등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아이고. 나리, 무슨 일들이십니까?”
마당으로 나온 중년 남자가 일부러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굽실대자 흑치영은 핏발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금방 이쪽으로 사내 두 놈이 도망쳐 오는 걸 못 봤나!”
“글쎄요. 소인은 계속 방 안에 있어서…….”
“주상 전하를 시해하려 한 역적들이다. 행여 거짓을 고할 경우에는 엄벌을 받게 될 것이니 똑바로 고하렷다!”
“정말로 모릅니다.”
겁먹은 표정으로 손을 내젓는 중년 남자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린 흑치영은 뒤에 서 있는 부하들을 보며 소리쳤다.
“몰래 숨어 있을 수도 있으니 샅샅이 뒤져라!”
“옛!”
크게 대답한 병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집 안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흑치영도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장검을 손에 든 채 방 안을 살폈다.
“이건 뭐지?”
흑치영이 검 끝으로 사대천왕 그림이 그려진 족자를 가리키자 중년 남자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애써 침착하게 이야기를 했다.
“제가 모시는 신神입니다.”
“흐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족자를 쳐다보던 흑치영이 막 걸음을 떼려는 순간 바깥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삐익!
“저기로 도망간다!”
“잡아라.”
그 소리에 흑치영은 몸을 돌려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저쪽이다!”
최악의 경우 소매 속에 감춰 둔 단검을 꺼내려던 중년 남자는 흑치영과 근위대 병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병사들이 흉수를 잡기 위해 개선문 인근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을 때 저격을 당한 도현은 위사와 근위대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대궐로 옮겨졌다.
따각따각.
“으윽.”
도현이 낮게 신음을 흘리자 함께 마차를 타고 있던 칠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많이 불편하십니까?”
“괜찮아. 그것보다 상태가 어때?”
“천만다행으로 총알이 갑옷을 다 뚫지 못해 피부는 상하지 않고 가벼운 타박상만 입으셨습니다. 지갑紙甲을 입지 않으셨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지갑은 한지 중 갑의지甲依紙라는 아주 단단하고 질긴 종이를 여러 번 덧붙여서 만든 일종의 방탄복이었다.
재료가 종이다 보니 일반 갑옷보다 훨씬 가벼워 갑주 안에 내피로 입어도 될 정도였는데 여기다 옻칠을 하면 불도 잘 붙지 않았다.
실제로 치료를 한다고 상의를 벗긴 도현의 가슴에는 시퍼런 멍만 들어 있었다.
“간밤에 사나운 꿈을 꿔서 혹시나 해서 입었더니…….”
흔들리는 마차 벽에 기대 비스듬히 앉은 도현은 한쪽 손으로 멍이 든 곳을 만져 보며 침음성을 내뱉었다.
다시 생각해도 간담이 서늘해졌는데, 만약 예식용 갑옷 안에 지갑을 받쳐 입지 않았거나 흉수가 머리를 노렸다면 지금쯤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였다.
“정말 하늘이 도우셨습니다.”
가만히 머리를 끄덕인 도현은 이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짐이 크게 다치지 않은 건 어디까지 알고 있지?”
“총탄을 맞은 충격에 잠시 정신을 잃고 쓰러지시자마자 바로 마차로 옮겼기 때문에 저 말고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잘됐군.”
“예?”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듣고 그대로 실행하도록 해.”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에 칠현은 덩달아 긴장을 하며 대답했다.
“네.”
“내가 무사하다는 걸 비밀로 하고 신료들한테는 중태에 빠졌다고 알려.”
뜻밖의 지시에 칠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하의 건재함을 알려 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 불측한 무리가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막아야 될 것이온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쥐새끼들을 잡으려면 미끼를 던져야 되지 않겠어.”
“……설마!”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칠현이 헛바람을 삼키며 쳐다보자 도현은 눈을 섬뜩하게 빛내면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거사가 성공한 줄 알고 이번 일을 꾸민 자들이 굴속에서 머리를 내밀면 꼬리를 자르고 숨지 못하도록 단번에 모가지를 확 잡아채 몽땅 다 때려잡는 거야.”
도현의 온몸에서 피어오르는 진득한 살기에 칠현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얼마 뒤 도현을 태운 마차가 대궐 안으로 들어가자 친위대는 창덕궁 문을 모두 단단히 걸어 잠그고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철통같은 경계를 펼쳤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근위대장 박영식이 갑甲 호 비상령을 발령해 한양 성문을 폐쇄하며 일체의 출입을 막았다.
끼이이익.
쿵!
“지금부터 별명別命이 있을 때까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가 됐건 절대 성문을 열어 주지 마라! 만약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군령으로 즉결처분하겠다. 알겠느냐!”
“옛!”
수문장의 추상같은 지시에 오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알고 있는 병사들은 잔뜩 굳은 얼굴로 크게 대답했다.
장정 서너 명이 달라붙어야 겨우 옮길 수 있는 빗장을 치고 그것도 부족해서 장애물을 가져와 성문 앞을 완전히 막아 버렸다.
그런 가운데 근위대 일부와 의금부 그리고 포도청까지 가세해 저격범을 찾아 한양 전체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흥겨운 잔칫날이 한순간에 최악의 상황으로 돌변하자 백성들은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지 걱정하며 제발 도현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한편 변고가 일어났다는 청천 벽력같은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중전 장씨는 희정당 앞에서 위사들에 의해 가로막혔다.
“중전 마마께 이 무슨 무례요!”
상궁이 중전을 대신해 언성을 높이자 위사들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오나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사옵니다.”
“그래서 지금 감히 중전 마마의 앞길을 막겠다?”
“아니, 그게…….”
“당장 문을 열지 못하시겠소.”
성질 급한 상궁이 막무가내로 뚫고 들어가려는 걸 위사들이 급히 제지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뭐요?”
문 앞에서 한참을 옥신각신해도 위사들은 곤란해하기만 할 뿐, 도통 비켜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도현이 어떻게 되었나 싶어 초조하고 불안해 죽겠는데 이렇게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걸 참다 못 한 중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여봐라.”
“예, 중전 마마.”
상궁을 상대하고 있던 위사들은 중전의 낮은 목소리에 일제히 자세를 가다듬고 허리를 숙였다.
“윗전의 명령을 받들어야 하는 자네들의 처지는 내 잘 아네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나는 꼭 거길 들어가야 하겠네.”
“하오나 마마…….”
“아니면 손에 들고 있는 창칼로 나를 찌르기라도 할 텐가?”
중전이 강한 의지가 담긴 눈빛으로 위사들을 노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어, 어찌 감히 그럴 수가 있겠사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감히 중전의 몸에 손을 대다니, 일개 위사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위사들이 잠시 위축된 사이, 중전은 그 틈을 타 직접 희정당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주, 중전 마마.”
뒤에서 위사들이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대로 무시한 채 성큼성큼 전각 복도를 가로지른 중전은 도현이 치료를 받고 있을 안쪽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전하는 어디 계시냐?”
“마마.”
칠현을 발견한 중전은 인사를 받지도 않고 다짜고짜 도현의 행방을 물었다.
마음이 급한 중전과는 달리 칠현은 뒤에서 따라 들어온 몇몇 위사들의 얼굴을 보더니 쓰게 웃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이 있었는데 위사들이 제 할 일을 제대로 못하였나 봅니다.”
“그들을 탓하지 말게. 내가 억지를 부려 들어온 것이니.”
괜히 애꿎은 위사들에게 해가 갈까 싶어 그들을 변호한 중전은 다시 한 번 칠현에게 물었다.
“전하께선 무사하시냐? 다치셨다던데 설마 큰 부상은 아니겠지.”
“중전 마마, 좀 진정하십시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는가!”
중전은 화가 나서 견디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항상 조용하고 몸가짐이 조신한, 현모양처의 표본 같은 중전이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칠현조차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지아비가 쓰러졌는데 가만히 있을 아내가 세상 어디에 있는가. 무사하신지 어떤지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다는데 왜 이렇게 다들 내 앞을 가로막는 게야?”
“마마, 일단 고정하시고…….”
“됐다! 전하께서 어디 계신지 알려 주지 않겠다면 내가 직접 찾아보마.”
그러면서 중전은 희정당 내의 온 방을 다 뒤질 기세로 칠현의 옆을 지나갔다.
“중전 마마!”
칠현이 허둥지둥 그 뒤를 쫓았지만 중전의 발걸음이 더 빨랐다.
장지문이 굳게 닫힌 방 앞에, 침통한 얼굴을 하고 있는 궁녀들과 내시들이 복도를 지키고 있고 위사들까지 더한 엄중한 경호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중전은 여기가 바로 도현이 있는 곳이라고 알아차리고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니 됩니다, 중전 마마!”
간발의 차이로 그 앞을 가로막은 칠현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안 된다는 것이냐!”
“지금 어의가 안에서 전하를 보살피고 있는 중입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가 봤자 치료하는 데 방해될 뿐입니다.”
그 말에 중전이 일순 멈칫했다.
주위가 조용하고 시중을 들어야 하는 사람들이 다들 복도에 나와 있는 이유도 아마 어의가 그렇게 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중전은 곧 다시 칠현을 붙잡고 말했다.
“어의가 뭐라 하더냐? 분명 괜찮으시겠지?”
“그건 저도 아직 잘 모릅니다.”
“네가 모르면 누가 아느냐!”
“중전 마마.”
칠현이 문 쪽을 곁눈질하며 목소리를 낮게 낮추자, 중전도 입을 꾹 다물었다.
“전하께서는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주변이 소란스러우면 안에서 치료에 전념하고 있는 사람들이 집중을 못 하지 않겠사옵니까.”
“하지만…….”
중전은 어느새 눈물이 글썽글썽해져, 애원하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살짝 들어가 전하의 얼굴만 보고 나오는 것도 안 되느냐?”
“…….”
말없이 고개만 가로젓는 칠현의 대답에 중전은 두려움과 불안을 눌러 참듯이 눈을 꼭 감고 마음을 다스렸다.
“알겠네. 내 오늘은 이만 물러가지.”
“감사하옵니다, 마마.”
누구보다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중전이 겨우 물러갈 의사를 내비치자, 칠현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허나 만약 전하의 용태에 무슨 변화가 생기면 즉각 내게 알리겠다고 약속해 다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새벽이건 밤이건 상관하지 말고 바로 알려 줘야 하네. 알겠나?”
“예.”
칠현에게 단단히 다짐을 받아 낸 중전은 그러고도 마음이 안 놓이는 듯 다시 도현이 있을 방 쪽을 쳐다보고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어깨가 축 쳐진 모습으로 희정당을 나온 중전이 신발을 신는 걸 도와주던 상궁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는 얼굴로 물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주상 전하의 용안도 못 보게 하다니 진정 너무합니다.”
“어의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하지 않느냐. 그것만 믿고 기다려야지.”
중전은 몸에서 기운이 다 빠진 듯 힘없이 상궁의 팔에 기댔다.
“처소로 돌아가면 궁녀들에게 일러 사방에 불을 환히 밝혀 놓도록 하게나. 혹시나 희정당에서 기별이 올지도 모르니.”
“네. 허나 그러면 주무시기에 힘이 들지 않겠사옵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잠이 올 턱이 없지 않나.”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한 손으로 꾹꾹 누르며 하는 대꾸에 상궁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하였습니다.”
“됐네. ……돌아가세나.”
중전 일행이 희정당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칠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쉬면서 다시 복도로 돌아왔다.
유일하게 방 안으로 출입이 허락된 칠현이 조심스레 장지문을 닫고 도현의 곁에 섰다.
“중전은 돌아갔느냐?”
“예.”
짤막하게 대답한 칠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얼굴이 백짓장처럼 완전 창백해지셔서 금방이라도 쓰러지실 것처럼 보였사옵니다.”
“……나중에 중전이 날 원망해도 할 말이 없겠군.”
도현은 씁쓰레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중전 마마께는 전하께서 무사하신 것을 알렸어야 하지 않을까요? 크게 낙담하신 모습을 뵈오니 죄책감이 느껴져서 못 살겠습니다.”
“안 돼.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란 말도 있잖아.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
“하지만…… 분명 중전 마마께선 절 탓하고 계실 겁니다. 이러다가 크게 미움이나 받지 않을지 걱정이라고요.”
본의 아니게 악역을 맡게 된 칠현이 도현에게 투덜거렸다.
“내가 나중에 잘 말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
도현은 피식 입꼬리를 올리고 화제를 바꿨다.
“그건 그렇고, 내가 말한 건 잘 처리하고 왔어?”
“예. 어의와 의녀 들은 희정당에 있는 빈 방에 잠시 가둬 두었습니다. 바깥에 위사도 세워 놨고요.”
“그래. 미안하지만 일이 다 끝날 때까지는 그렇게 놔두도록 해.”
“그리고 이완 단장에게도 은밀히 명을 전했습니다.”
“병부 쪽 분위기는 어때?”
“처음에는 동요가 적지 않았지만 병판께서 나서서 휘하 장군들을 잘 단속하고 계십니다.”
“다행이군.”
무기를 손에 쥔 병부가 일부라도 불온 세력에 동조한다면 상황이 아주 골치 아파질 수밖에 없는데 임경업이 잘 대처하고 있다는 말에 도현은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이내 다시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음. 분명 내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이번 일을 주도한 놈들이 움직임을 보일 거야. 그때를 절대 놓쳐선 안 돼.”
“예.”
칠현은 바닥에 머리를 숙이고 대답했다.
이제 도현이 사냥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진 지금, 한양 전체가 불안과 두려움에 가득 차 있는 가운데 창덕궁은 온통 불이 환하게 밝혀진 채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울 만큼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회의실에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신하들은 문이 열리면서 희정당에 갔던 삼정승들이 들어오자 주위로 몰려들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주상 전하의 상태가 어떠신지 확인하셨습니까?”
쏟아지는 질문에 영의정 박황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펴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어의가 절대 안정을 취해야 된다고 해서 용안을 뵙지 못했소.”
그러자 신하 중 한 명이 얼굴을 찡그리고는 불평했다.
“아니. 낮부터 지금까지 계속 기다리라는 말만 하고 전하의 상태를 알려 주지 않으니 이거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이거야 원 답답해서.”
“에잉.”
“혹시 저희들에게 이야기를 해 주지 못할 정도로 전하의 상세가 심각한 것 아닐까요?”
“하긴 조총에 가슴을 맞으셨으니…….”
도현의 상태를 확인할 수 없자 온갖 억측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자 박황이 눈가를 찡그리고는 엄한 목소리로 신하들을 질책했다.
“서로 마음을 한데 뭉쳐 전하께서 무탈하시기를 빌어도 모자랄 판에 신하된 입장에서 어찌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거요!”
“흠흠. 하도 답답한 마음에 말이 헛 나온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섣부른 말을 꺼냈다가 혼이 난 신하들은 찔끔한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어수선한 시기에 괜한 헛소문이라도 나면 곤란하니 다들 입조심하시오!”
“예.”
그렇게 어수선한 분위기를 다 잡으며 넘어가려고 할 때 예조참판 이익치가 불쑥 딴죽을 걸고 나왔다.
“영상 대감의 말씀도 맞습니다만 국정을 책임진 조정 대신으로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뜻인가?”
박황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노려봤지만 작정을 했는지 이익치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었다.
“다행히 주상께서 건강을 되찾으신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이 없겠지만 최악의 경우도 대비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최악의 경우라면 도현이 죽는 거였기에 순간 좌중은 분위기가 싸늘해지며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서로 눈치를 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신하가 함부로 후계를 논하는 건 평상시에도 자칫 반역으로 몰릴지 모르는 아주 민감한 사안이었는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를 꺼내니 더 조심스러웠다.
“다들 아시다시피 청나라가 호시탐탐 아국을 노리고 있고 대통을 이어받을 후계마저 명확히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급작스럽게 주상 전하의 신변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큰 위기가 초래될 수도 있습니다.”
이익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쪽에 앉아 있던 병조판서 임경업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세게 내려치며 노호성을 터트렸다.
탕!
“주상 전하를 두고 후계 문제를 꺼내는 것도 망극한 일이지만 엄연히 적장자嫡長子이신 연 왕자님께서 계신데 무슨 그따위 망발이오!”
“그렇긴 하지만 이 어려운 난국을 양 어깨에 짊어지고 가시기에는 아직 연치年齒 너무 어리시지 않습니까.”
“어린 나이에 보위를 오른 선례가 없는 것도 아니지 않소?”
왕당파인 좌의정 김종일이 열두 살에 왕이 된 단종을 거론하며 임경업을 거들자 이익치는 냉소를 지었다.
“그 대가로 국론이 분열되어 큰 혼란을 겪고 결국에 가서는 불운한 말년을 보내야 했지 않습니까.”
“뭐요!”
도를 넘는 언사에 가만히 지켜보던 송시열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며 나섰다.
“그만하게.”
“제가 틀린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자신의 제지에도 말을 멈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불만을 가득 드러내자 송시열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어허. 이 사람이 정말,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때를 가려야지!”
“…….”
웬만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송시열이 언성을 높이자 이익치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자 상석에 앉은 영의정 박황이 피곤한 듯 한쪽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상황을 정리했다.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하지만 아직 후계 문제를 거론하는 건 시기상조이니 상황 변화가 있을 때까지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입 밖으로 꺼내지 말고 이번 일로 백성과 관리 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 주시오.”
“알겠습니다.”
다들 근심 가득한 얼굴로 대답하는 가운데 이익치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당파의 수장인 송시열이 반대되는 태도를 취한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일단 후계 문제를 쟁점으로 만들어 놓은 것만 해도 큰 성과였다.
실제로 영의정 박황의 말에 일단 수면 아래로 내려가기는 했지만 당파를 떠나 모든 신료들의 머릿속에 후계에 대한 생각이 자리 잡았다.
이처럼 창경궁이 불안과 초조 그리고 갈등에 휩싸여 있을 때 도성 한쪽에 위치한 황죽표의 기와집에서는 최석호와 그를 따르는 사대부 몇몇이 모여 축배를 들고 있었다.
“하하하! 이렇게 쉬운 걸 두고 그동안 왜 전전긍긍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게 말이오. 이런 말을 하면 좀 그렇지만 저격을 당해 쓰러지는 주상의 모습에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하더이다.”
“그게 다 자업자득 아니겠소. 함께 국정을 이끌어 나가야 될 사대부들을 무시하고 대동법이나 노비해방령 같은 이상한 행동으로 나라의 근간을 흔들었으니 이런 일을 당하는 게지요.”
“맞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왕실을 떠받쳐 온 사대부를 홀대하고 하찮은 상것들을 우대하시다니 정말 너무하셨지요.”
다들 이런저런 말로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지만, 결국은 기득권을 내려놓기 싫어서 유교의 기본 신념인 충을 버리고 국왕 시해라는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렇게 신이 나 떠들고 있을 때 다른 이들과 달리 차분한 얼굴로 앉아 있던 황죽표가 앞에 놓인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아직 주상이 승하한 것은 아니니까 긴장을 풀기에는 이를 것이네.”
“신하들은 물론이고 중전마저 상세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위중하다면 이미 다 끝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다들 현장에서 봤다시피 총탄을 가슴에 맞았으니 십중팔구 살기 어려울 겁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친위대가 창덕궁을 봉쇄하고 있는데도 대궐 안 사정을 다 알고 있는 건 미리 심어 놓은 세작 덕분이었다.
도현이 즉위한 이후 제일 먼저 손을 쓰고 지속적으로 신경을 쓰는 것이 바로 대궐 내부 장악과 보안이었지만 상주 인원만 거의 천여 명에 달하는 궁인들을 모두 통제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내부 정보가 여러 경로를 통해 조금씩 흘러나갔고 황죽표와 일당들도 거사가 성공했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신중한 태도를 보이기는 했지만 황죽표도 도현이 곧 죽는다는 것에 별다른 의구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려면 계획한 대로 인평대군한테 다음 보위가 넘어가야 될 것이오.”
황죽표의 말에 최석호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미 각 향교 지도자와 지방 유지 들하고 이야기가 다 되어 있으니 저희가 연락을 하면 바로 한양으로 상경해 행동에 나설 겁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자네가 다시 한 번 챙기도록 하게.”
“예.”
“그리고 의금부와 포도청에서 불을 켜고 이번 사건의 범인을 찾고 있으니 당분간 자중하면서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서로 연락을 하지 말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이 시점에서 자신들이 일을 꾸민 것이 발각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기에 다들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얼마 뒤 다른 이들이 모두 돌아가고 최석호만 남자 황죽표는 담뱃대에 불을 붙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가 놈은 어찌 됐나?”
“미리 마련해 둔 은신처에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놈이 잡히면 우리 모두 끝장이라는 걸 명심하게.”
“조만간 더 안전한 곳으로 옮길 겁니다.”
그러자 황죽표는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면서 차가운 시선으로 앞에 있는 최석호를 봤다.
“죽음보다 확실한 침묵은 없지.”
애초에 박완용은 쓰고 버리는 패였기에 최석호 역시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고개를 숙였다.
“알아서 깔끔하게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그래야지.”
모든 게 자신이 계획한 대로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에 황죽표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 일이 터지자 그 어느 곳보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관이 있었는데 바로 정보를 책임진 주작단이었다.
그중에서도 단장인 이완이 쓰는 집무실에서는 연신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아직까지 흉수의 정체도 밝혀내지 못하고 도대체 뭣들 하고 있는 거야!”
금방이라도 자신들을 잡아먹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이완이 좌중을 노려보자, 모여 앉은 간부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슬쩍 시선을 피해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이완이 이렇게 흥분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데, 스스로 부국강국과 북벌을 추진하는 도현의 열렬한 추종자일 뿐만 아니라 현재 그가 가진 권력의 원천이 바로 국왕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도현이 무너지면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 함께 사라지는 공동운명체라는 뜻이었다.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모든 정보를 관리하고 국왕을 보위하는 막중한 임무를 띤 자신들이 이런 엄청난 일을 사전에 알아내지 못했다는 건 주작단으로서는 얼굴을 제대로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의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당장 긴급히 소집된 대전회의에서도 그에 대한 신하들의 질책이 이완에게 쏟아졌었다.
이런 상황은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 모든 걸 만회하고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흉수와 배후 세력을 주작단이 제일 빨리 찾아내야만 했다.
“탐보망을 모두 가동하고 있으니 조만간 뭔가 걸리는 것이 있을 겁니다.”
“그거 가지고는 부족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결과를 가져오란 말이야!”
“……예.”
그렇게 한바탕 쏟아 내고 나자 조금 화가 풀렸는지 표정이 약간 누그러진 이완은 고개를 돌려 왼편에 앉아 있는 김근행을 보며 이야기를 했다.
“군부 쪽 움직임은 어때?”
“근위대는 원래부터 주상 전하에 대한 충성심이 각별한 곳이니 별다른 문제가 없습니다만 그 외에 일반 장병들은 상당한 동요를 보이고 있습니다.”
“심각할 정돈가?”
“아직까지는 병판이신 임경업 장군께서 잘 다독이고 있고 대부분 주상 전하를 저격한 흉수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지만, 상황에 따라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니 신경 써서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일부 주상 전하의 정책에 대해 반대되는 입장을 보인 장수와 군관에 대해서는 감시를 붙여 놔야 될 것 같습니다.”
설명을 들은 이완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무력을 가진 군부가 흔들린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악화될 테니 사전 조치가 필요하지. 현재 인원으로 가능하겠나?”
“쉽지는 않겠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그래. 고생 좀 해 줘. 다른 보고 사항은 없나?”
이완 단장이 주위를 둘러보며 묻자 간부 한 명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번 사건과 관계돼서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노비해방에 불만을 가진 일부 사대부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첩보를 지난번 회의 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잠깐 기억을 더듬은 이완은 뭔가 실마리를 찾아낼 수도 있겠다는 느낌에 몸을 살짝 앞으로 당겨 앉으며 물었다.
“그런데?”
“그때 감시 대상에 올랐던 몇몇 인사들이 인평대군과 접촉을 가지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전하께서 저격을 당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예조참판이 후계 문제를 거론하며 적장자이신 연 왕자님의 나이를 문제 삼았고 말입니다.”
“그럼!”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상황이 딱 들어맞지 않습니까?”
“확실히 그렇군.”
손가락 끝으로 앞에 있는 탁자를 툭툭 두드리면서 잠시 고심하던 이완은 이내 고개를 들어 이야기를 꺼낸 간부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그자들이 누구지?”
“전라도 남원 지역 유지인 황죽표와 최석호라고 합니다.”
“남원이라면 예조참판의 고향이 아닌가?”
“맞습니다.”
“이거 냄새가 심하게 나는데, 그렇지 않아?”
그러자 다른 간부들도 의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주상 전하를 시해하고 여론을 이끌어 내서 산당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인평대군을 보위에 올리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흐음.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그럼 굳이 피를 흘리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주상 전하께서 추진하는 개혁을 모두 무위로 돌릴 수 있고 덤으로 권력까지 가지게 될 테니까 이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겠지.”
“더 볼 것도 없이 당장 놈들을 잡아들이시지요.”
김근행의 말에 어쩐 일인지 제일 앞장서서 흉수를 잡으러 갈 것 같았던 이완은 머리를 좌우로 내저었다.
“심증뿐이고 확실한 물증이 없으니 조금 더 두고 보도록 하지.”
갑자기 이완이 신중한 태도를 취하자 간부들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반박했다.
“그거야 의금부 옥사에 가둬 놓고 심문을 하면 모두 다 토설하게 될 겁니다.”
“단장님께서도 정황상 이들이 배후라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이완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들 말이 맞아. 허나 섣불리 건드렸다가 자칫 일이 잘못된다면 흉수들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갈 기회를 주는 꼴이 될 게야.”
“그럼 어찌하시려고요?”
간부들의 물음에 이완이 답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흉계를 꾸미지 못하게 철저히 뿌리 뽑아야지.”
목표의 뒤를 쫓으며 활시위를 당길 최적의 기회를 기다리는 사냥꾼처럼 이완의 눈은 서늘하게 빛났다.
단순히 흉수를 붙잡는 걸로 끝이 아니라, 잠재적 불온 세력인 산당 전체를 모조리 끌어모아 한 번에 정리해 버리려고 한다는 걸 깨달은 간부들은 앞으로 불어닥칠 거대한 피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하늘에 휘영청 크게 뜬 달이 오늘따라 어두워 보였다.
여전히 굳게 닫혀 있는 창덕궁 각 문을 지키고 있는 친위대와 근위대 병사들의 그림자가 밝게 타오르고 있는 횃불에 비쳐 일렁거렸다.
“구름이 많이 끼었구먼. 내일은 비가 오려나?”
낮부터 경비를 선 동료와 교대한 병사 하나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따금 타닥타닥 불씨가 튀는 소리가 들릴 뿐, 사방이 너무 조용해 아무리 침착하게 있으려 해도 오히려 불안감이 가중될 뿐이었다.
“주상 전하가 무사하셔야 할 텐데.”
그는 고개를 뒤로 돌려 희정당이 있는 쪽을 힐끔 쳐다보고 말했다.
“우리가 걱정해 봐야 뭘 하나. 어의가 불려 갔으니 앞으론 그들 소관이지.”
같이 성벽 위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사내가 사뭇 담담한 태도로 답했다.
“그까짓 총격쯤이야 금방 훌훌 털고 일어나 다시 건재한 모습을 보이시겠지?”
“전장에 나가서도 항상 앞에 서서 병사들을 지휘할 정도로 강건하신 분인데 당연하지.”
도현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가득 담긴 이야기에 동료도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아.”
“그러니 괜히 불안한 표정 짓지 말게. 백성들이 자네 얼굴을 보고 뭐라 생각하겠나.”
“어차피 여기서는 보이지도 않을 텐데, 뭘.”
아래쪽에 있는 녀석들이라면 모를까, 한참 높은 성벽 위에 있는데 뭘 걱정하냐는 듯 병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보게.”
“응?”
고지식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사내가 손가락으로 밑을 가리켰다.
깊은 밤이라 대부분의 민가들이 불을 끄고 어둠 속에 잠긴 가운데, 불빛 여러 개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범인을 찾는다고 병사들이 도성 안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기에 분위기가 흉흉해져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면 밤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 빛은 더욱 눈에 띄었는데, 처음엔 드문드문 보이던 불빛이 하나둘씩 늘어나더니 급기야 무리를 이룰 정도로 많아지자 사내가 위사에게 급히 말했다.
“내가 여길 지키고 있을 테니 자넨 얼른 내려가서 군관 어른에게 알리게!”
“아, 알았네!”
찬물을 머리부터 뒤집어쓴 듯 정신이 바짝 든 병사는 허둥지둥 성벽 아래로 연결된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밑에서 경계 상태를 점검하고 있던 군관을 만나 급히 이 소식을 알리자, 그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는 바로 날 듯이 돈화문 성문 위로 올라왔다.
그때쯤에는 이미 하나하나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불빛이 많아진 상태였다.
군관은 느리지만 뚜렷하게 창덕궁 쪽을 향하고 있는 불빛을 노려보면서 허리에 차고 있던 칼집에 손을 올렸다.
“모두 정신 바짝 차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라!”
“예!”
힘차게 대답한 부하들은 만약 불온한 무리가 창덕궁을 향해서 오고 있는 거라면 언제든지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성가퀴 위에 조총을 올리고는 사격 자세를 취했다.
“반란군인가?”
군관에게 상황을 알렸던 병사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하자 옆에 있던 동료는 복수심에 불타는 얼굴로 조총에 총알을 쟀다.
“흥. 다 쓸어 줄 테니까 얼마든지 오라고 해.”
주위에 있는 다른 병사들도 두려움보다는 오늘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흉수한테 저격을 당한 도현의 복수를 하겠다는 듯이 강한 전투 의지를 보였다.
지근거리에서 국왕을 보위하는 근왕군인 만큼 도현이 각별히 관심과 배려를 해 준 것도 있지만, 병사들 대부분이 그동안 그가 펼친 정책에 직간접적인 혜택을 받으며 세상이 바뀌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기에 목숨을 걸고라도 충성을 바치겠다는 각오를 가졌다.
그렇게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상대가 성벽 아래에 피워 놓은 화톳불이 비치는 곳까지 접근해서 모습을 드러내자 일순간 병사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병사들을 지휘해야 될 군관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뜻밖에도 대궐로 다가온 정체불명의 무리는 반란군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었다.
허름한 옷을 입은 상것부터 갓난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업은 여인 그리고 폭이 좁은 갓을 쓴 중인까지 각양각색의 백성들이 손에 횃불이나 초 그리고 등불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그, 글쎄.”
어정쩡한 자세로 선 병사들은 난감한 얼굴로 지휘관을 쳐다봤지만 그도 어찌해야 될지 판단이 서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정색을 하며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절대 사격을 하지 말고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지 눈을 크게 뜨고 주시해라!”
일단 백성들을 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심하면서도 병사들은 잘 훈련된 정예답게 금방 조총을 고쳐 잡으며 맡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어느새 돈화문 바로 앞까지 다가온 백성들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마치 기도를 하는 것처럼 양손을 모았다.
“뭐 하는 거지?”
병사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묻자 옆에 있던 동료는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빼며 말했다.
“보고도 모르겠어.”
“그러니까 묻는 거잖아.”
“주상께서 무사히 일어나시기를 기도하는 거지 뭐겠어.”
“아…….”
짧게 탄성을 내뱉은 병사는 고개를 돌려 성벽 아래에 모여 있는 백성들을 보며 어쩐지 모르게 감정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누가 따로 동원을 하지 않았는데도 백성들의 숫자는 갈수록 늘어났고 행여나 치료를 하는 데 방해라도 될까 봐 소리도 크게 내지 않고, 조용히 간절한 염원을 담아 도현이 무사하기를 천지신명께 빌었다.
이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백성들에게 지지와 존경을 받는지 극명하게 드러났다.
보고를 받고 급히 돈화문으로 달려온 박영식은 성문 밖을 가득 메우고 있는 불빛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것 참.”
“처음에는 백여 명 정도였는데 점점 더 숫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걸 어찌해야 될지…….”
옆에 선 수문장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끝을 흐리자 박영식은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냥 내버려 두게.”
“예?”
“나라의 어버이신 주상 전하를 걱정하는 마음에 백성들이 스스로 모여 기도를 하겠다는데, 어찌 그걸 막을 수 있겠나.”
“하지만 만약의 경우 돌발 사태라도 발생한다면 돈화문 앞에 있는 백성들 때문에 제대로 대처를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수문장의 우려는 성문을 지켜야 되는 지휘관으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런 백성들의 모습에 조금은 쳐져 있던 병사들이 힘을 얻는 건 보이지 않나.”
“…….”
주위를 둘러보자 민심이 자신들한테 있다는 걸 알아서인지 확실히 병사들의 표정이 아까보다 한결 좋아져 있고 자부심마저 느껴졌다.
“너무 가까이 다가오게 하지는 말고 경계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상황 변화가 있으면 바로 보고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군례를 취하는 수문장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박영식은 백성들을 한 번 더 쳐다보고는 대궐 안에 있는 비변사 전각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은 얼마 있지 않아 칠현을 통해 희정당에 있는 도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게 정말이야?”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도현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되묻자 칠현은 약간 들뜬 모습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예. 벌써 모여든 인원이 천여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허어. 그 사람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모였다고?”
“그렇습니다.”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백성들이 자신을 지지한다는 생각에 도현은 그동안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개혁을 멈추지 않고 추진한 것에 보람을 느꼈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군.”
“이걸 보면 감히 불충한 마음을 품었던 역도들의 간담이 서늘해질 겁니다.”
칠현의 말에 도현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주작단에서 올라온 보고는 없어?”
“안 그래도 은밀히 전해진 연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칠현은 폭이 넓은 소매에서 여러 번 접힌 쪽지를 하나 꺼내 두 손으로 공손히 내밀었다.
주작단 단장인 이완이 직접 와서 보고를 해야 하지만 공식적으로 도현은 총격을 받고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 알려졌기에 부득이하게 이런 방법을 썼다.
건네받은 쪽지를 펼쳐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간 도현은 살짝 표정을 굳히고는 한쪽에 있는 화로에다가 집어넣어서 태워 흔적을 없애 버렸다.
불이 붙어 금방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쪽지를 바라보며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도현은 이내 고개를 들며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역시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군. 계획대로 진행하라고 전해.”
“네.”
“그건 그렇고 중전은 아직도 그러고 있어?”
질문을 받은 칠현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만 들어가시라고 몇 번을 말씀드려도 전하께서 무사히 일어나실 때까지 있겠다 하시면서 희정당 앞마당에 정한수를 떠놓고 치성致誠을 드리고 있으십니다.”
“아직 바람이 찬데 그러다가 몸이라도 축나면 어쩌려고…….”
도현은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이옵니다.”
“중전을 보필하는 궁인들은 도대체 뭣들 하는 거야.”
안타까운 마음에 괜한 데 짜증을 낸 도현은 자신이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어 칠현에게 줬다.
“나가서 이거라도 덮어 줘.”
“이건…….”
도현이 준 겉옷은 붉은색 비단에 금실로 용이 화려하게 수놓인 것으로 대궐에서도 오직 국왕만이 입을 수 있는 거였다.
“어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뭘 해?”
“아. 예.”
그의 재촉에 어정쩡한 자세로 겉옷을 손에 들고 있던 칠현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박석이 촘촘하게 깔려 있는 희정당 앞마당에는 옷을 정갈하게 차려 입은 중전 장씨가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는 정성을 다해 천지신명께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
“비나이다. 제발 주상께서 무사히 일어날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벌써 몇 시진째 이러고 있었으니 상당히 지칠 텐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날씨도 쌀쌀한데 여린 아녀자의 몸으로 반복해서 절을 하다 보니 무리가 왔는지 일어서던 중전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휘청거렸다.
“마마!”
걱정스러운 얼굴로 옆을 지키고 있던 상궁이 화들짝 놀라 부축하자 중전은 힘겨운 표정을 지으며 몸을 바로 했다.
“으음. 고맙네.”
“이 정도면 충분히 정성이 하늘에 전해졌을 테니 그만 들어가시지요. 이러다가 혹여 몸이라도 상하지 않으실까 걱정되옵니다.”
상궁의 이야기에 중전은 고개를 흔들었다.
“전하께서 사경을 헤매고 계신데 어찌 내가 방 안에 들어가 편히 쉴 수 있겠나.”
“하오나…….”
“됐네. 전하께서 쾌차하실 때까지 치성을 드릴 것이니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게.”
단호한 태도에 상궁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계속해서 말리지 못하고 그냥 옆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쪽에서 그런 모습을 다 지켜본 칠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중전에게 다가가 공손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중전 마마.”
고개를 돌린 중전은 칠현을 보고는 다급한 음성으로 물었다.
“박 내관, 전하의 상세는 좀 나아지셨소?”
간절한 얼굴에 사실대로 다 말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러면 도현이 계획한 것이 다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기에 칠현은 꾹 눌러 참고 대답했다.
“아직 별다른 차도가 없사옵니다.”
“그런가…….”
살짝 기대를 했다가 다시 어두워지는 중전의 표정에 칠현은 죄를 짓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중전 마마께서 이렇게 진심을 담아 기도를 하고 계시니 곧 괜찮아지실 겁니다.”
“정말 그리됐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군.”
“그러니 이제 거처로 돌아가시지요. 전하께서도 그걸 원하실 겁니다.”
“아닐세.”
이럴 줄 예상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 번 그만할 것을 권했던 칠현은 중전의 대답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대신 손에 들고 있던 겉옷을 내밀었다.
“그럼 날씨가 많이 추우니 이거라도 입고 계십시오.”
무심코 칠현이 내민 겉옷을 본 중전 장씨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이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무리 대전 내관이자 각별히 총애를 받는 칠현이라고 해도 국왕의 상징과도 같은 용포는 함부로 가져 나오지 못하는 물건이었다.
얼굴을 굳힌 중전이 막 야단을 치려는 순간 칠현이 눈짓으로 희정당을 가리키면서 이야기를 했다.
“행여 고뿔이라도 걸리실까 봐 걱정하는 이들이 많사옵니다.”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향한 곳을 눈으로 좇은 중전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칠현의 말속에 숨은 뜻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건지 파악하려는 듯 조심스럽게 그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마마.”
주변에 듣는 귀가 있어 차마 도현이 보낸 것이라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중전은 영리한 편이니 금방 알아차려 줄 것이라 믿었다.
그런 염원이 전해진 것인지 중전은 곧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칠현이 내민 용포를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정 그러하다면 내 차마 그 뜻을 저버릴 수 없으니 이번만 감사히 받아들이겠네.”
하나 중전은 용포를 어깨 위에 두르지 않고 그냥 소중히 품에 꼭 끌어안을 뿐이었다.
“이보게, 박 내관.”
“네.”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나한테 제일 먼저 알려 주게나.”
“알겠습니다, 중전 마마.”
어제와 똑같은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해야 하는 것이 죄송스러워 칠현은 중전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깊숙하게 허리 숙여 인사한 칠현은 이만 돌아가 보겠다며 희정당을 향해 돌아섰다.
여러 가지 상념이 교차하는 복잡한 눈빛으로 희정당과 칠현의 뒷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던 중전은 용포를 안고 몸을 옆으로 돌렸다.
“아무래도 내가 여기 있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심려만 끼치는 것 같구나.”
그렇게 중얼거린 중전은 행여나 다리가 저려 휘청거릴까 봐 재빨리 부축하러 달려온 상궁에게 말을 걸었다.
“이보게, 김 상궁.”
“예, 마마.”
“처소로 돌아가세나.”
그 말을 듣자 상궁은 일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금방 기뻐하는 기색을 띠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슨 말을 듣건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을 기세였던 중전이 갑자기 돌아가겠다고 나서는 급작스러운 태도 변화가 다소 당황스럽긴 했지만, 어쨌든 찬 바람을 쐬어 몸이 상하는 것보다야 백배 천배 나았기 때문이다.
‘전하께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 모르겠사오나, 저는 오직 믿고 따를 뿐이옵니다. 부디 무사히 제 곁으로 돌아오기만 하소서.’
기도하듯 속으로 되뇌며 처소를 향해 발길을 돌리던 중전은 아직도 손에 들고 있는 용포에서 누군가의 온기를 느끼려는 듯 가슴 쪽으로 가까이 당겨 얼굴을 파묻었다.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그분의 향기가 나서 절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마마, 추우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중전은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리고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종로 근처에 위치한 인평대군의 사저 안방에는 새벽이 다 된 늦은 시간이었지만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방 안에는 인평대군이 비단 보료 위에 앉아 고심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바깥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다.
“대군마님, 소인 황 집사입니다.”
“들어오게.”
미닫이문이 조용히 열리며 매부리코가 인상적인 중년인이 들어와 무릎을 꿇고 앉자 인평대군이 살짝 상체를 앞으로 숙이면서 물었다.
“알아봤나?”
“예. 아직 흉수가 잡히지 않았는지 의금부와 포도청에서 나온 포졸들이 저잣거리를 이 잡듯이 뒤지는 중이옵고, 대궐 출입을 제한하고 있어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분위기로 볼 때 전하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이야기를 들은 인평대군은 낮게 신음을 내뱉으며 한쪽 손으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사실 처음 황죽표 일당이 접근했을 때만 해도 왕위에 대한 욕심은 있었지만 지난 두 번의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는 걸 보고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유교적인 관습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사대부를 홀대하는 도현의 정책이 너무나도 급진적이라 잘못됐다는 것에 심정적으로 동조를 하기는 했지만, 괜한 불똥이 튈까 봐 약간 거리를 두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그리고 조총을 이용한 저격이라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황죽표 일당이 일을 벌일 거라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전날 무리를 했는지 가벼운 몸살 기운이 있어서 초대를 받았지만 개선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인평대군은 나중에 도현이 총에 맞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 조만간 큰일이 있을 거라던 최석호의 말을 떠올리고는 황죽표 일당이 이번 일을 저질렀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서 곧장 의금부를 찾아가 황죽표 일당을 고발했어야 하지만 인평대군은 그러지 못했는데, 이대로 형인 도현이 죽으면 그가 보위를 이어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고민은 시간이 흐를수록 욕심으로 변했고 그의 최측근 장자방인 황 집사의 이야기를 듣고는 결심을 굳혔다.
“황 집사.”
“네, 마님.”
“지난번에 날 찾아왔던 최 진사를 기억하나?”
“북촌에 집을 가지고 계시다는 분 말씀이십니까?”
“맞네. 날이 밝으면 자네가 직접 최 진사를 찾아가서 내가 은밀히 좀 보자고 한다고 전해 주게.”
딱딱하게 굳은 인평대군의 어투에 본능적으로 중요한 일이라는 걸 눈치챈 황 집사는 덩달아 정색을 하며 머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 보게.”
“예.”
자리에서 일어난 황 집사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가 바로 하고는 방을 나갔다.
혼자 남겨진 인평대군은 새벽을 알리는 첫닭 울음소리가 들리는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주상께서도 돌아가신 큰형님 대신 보위에 오르신 것이니 나라고 이 나라의 주인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