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모의 끝
임금이 대낮에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저격을 당하는 참담한 상황을 겪게 된 의금부 도사 고용태는 날밤을 꼬박 지새우며 휘하 부하들을 닦달해 흉수를 찾고 있었다.
직접 검문 상황을 점검하고 의금부로 돌아온 고용태에게 서리 한 명이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도사 어른, 흉수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가 완성됐습니다.”
“이리 줘 보게.”
“여기…….”
서리가 내민 종이를 받아 펼치자 붓으로 그린 인물 그림이 나왔다.
모두 두 장으로 실제 저격을 실행한 범인들과 아주 흡사하게 생겼는데 초상화를 자세히 살펴본 고용태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이자들이 확실한 거야?”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든 것이니 정확할 겁니다.”
“좋아. 당장 이걸 필사해서 모든 수색 인원에게 나눠 주도록 해.”
지시를 받은 서리는 무슨 이유에선지 대답을 하지 않고 머뭇거리다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하나하나 손으로 그려야 되기 때문에 시간이 좀 지체될 겁니다.”
“그럴 여유가 어디 있어. 도화서圖畵署에 소속된 화원들은 물론이고 도성 안에 있는 모든 화공畵工을 다 불러와서라도 초상화를 그려!”
호통을 들은 서리는 찔끔한 얼굴로 어깨를 움츠리고는 얼른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어서 처리하지 않고 뭘 꾸물거리고 있나!”
“아. 예.”
허둥지둥 물러나는 서리를 보며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혀를 찬 고용태는 손에 쥐고 있는 초상화를 다시 한 번 살펴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감히 주상 전하를 저격한 흉수가 이놈들이란 말이지.”
새벽부터 급히 불려 나온 화공들이 팔이 저리도록 열심히 붓을 놀려 그림을 그린 덕분에 정오가 되기 전에 의금부와 포도청 포졸들은 흉수들의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를 가지고 수색에 나설 수 있었다.
초반에 저격 현장에서 흉수를 놓치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포졸들은 초상화가 나오자 수색과 검문에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자 황죽표 일당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젠장!”
어렵게 구해 온 초상화를 황죽표가 인상을 쓰며 손으로 와락 구겨 버리자 앞에 앉아 있던 최석호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포졸들이 그걸 가지고 수색을 벌이고 있답니다.”
“안 되겠군. 더 골치 아파지기 전에 놈을 처리하게.”
“예.”
초상화를 다시 펼쳐 서탁 위에 올려놓은 황죽표는 입술을 살짝 비틀며 말했다.
“흥. 이게 아니면 그래도 며칠은 더 살 수 있었을 텐데 불쌍하게 됐군.”
토굴을 나와 점집 다락방에 숨어 있던 박완용은 소변을 보려고 한쪽에 놔둔 요강 뚜껑을 열어 보고는 눈가를 찡그렸다.
두 사람이 숨어서 볼일을 보다 보니까 어젯밤에 새로 넣어 준 것이 어느새 가득 차 있었다.
그냥 다른 이가 올 때까지 참을까 고민하던 박완용은 잠시 뒷간만 다녀오는데 별일 있겠냐는 생각에 뚜껑을 닫고 몸을 일으켰다.
다락방을 내려와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박완용은 행여나 지나다니는 사람이 있는지 살피고는 손에 들고 있던 짚신을 신고 뒷간으로 갔다.
살금살금 걸어가고 있을 때 조금 열린 부엌문 사이로 집주인과 감시역으로 따라다니던 사내가 주고받는 대화가 들렸다.
“어르신께서 뭐라고 하던가?”
“문제가 되기 전에 처리하라고 하시네.”
집주인의 말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길게 끌 필요 없이 지금 바로 처치해 버립시다.”
“눈치가 빠르던데 조용히 끝낼 수 있겠어? 괜히 시끄러워지면 골치 아파지는 건 나야.”
그러자 사내는 품속에서 시퍼렇게 날이 선 단검을 꺼내 보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시오.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방심하고 있을 때 둘이서 덮치면 제깟 놈이 별수 있겠소.”
“하긴.”
처음에는 호기심에 엿듣던 박완용은 이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걸 깨닫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처음부터 상대를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설마 했는데 이렇게 현실로 닥치자 배신감에 휩싸였다.
그사이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마침 줄 돈이 있으니까 그걸 핑계로 놈의 시선을 끌고 있으면 내가 뒤에서 숨통을 끊어 버리겠소.”
“알겠네. 그럼 이 돈은 어쩔 건가?”
집주인이 돈주머니를 슬쩍 들어 보이며 말하자 사내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죽은 놈한테 돈이 무슨 필요가 있겠소. 어르신도 거기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었으니 우리 둘이 나눠 가집시다.”
“그래도 될까?”
“사람 하나 잡는데 우리도 수고비를 챙겨야 될 거 아니오.”
“그 말도 맞군. 좋아. 그렇게 하세.”
탐욕에 찬 눈빛을 번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집주인의 모습에 박완용은 뒷간을 가려던 발걸음을 뒤로하고 급히 다락방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다락방까지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고 분노와 배신감에 숨이 가빴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잡으며 박완용은 애써 침착해지려고 노력했지만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마치 깊은 나락에 떨어진 느낌이었다.
아무리 이제 필요가 없어졌다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버림을 받고 목숨까지 빼앗으려 한다니 너무 억울하고 분했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주위를 둘러본 박완용은 놋쇠로 만들어져서 단단한 요강 뚜껑을 옷 사이에 숨겼다.
무기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랬지만 없는 것보다 나았다.
처음에는 그냥 이대로 도망쳐 버릴까 하고 생각도 했지만 받아야 될 돈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까웠기에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 때 밑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두 사람이 올라왔다.
“좁은 다락방에 있으려니 불편하지 않소?”
방금 전까지 자신을 죽이려고 작당을 해 놓고 천연덕스럽게 말을 거는 집주인의 모습에 박완용은 울컥했지만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대답했다.
“포졸들한테 잡혀가는 것보다 나으니 어쩌겠소.”
“맞는 말이오.”
“그런데 표정이 안 좋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소?”
옆에 있던 사내의 물음에 박완용은 내심 가슴이 철렁했다.
감정을 숨기려고 애를 썼지만 뭔가 어색하고 굳은 표정이 사내에게 들킨 것 같았다.
박완용은 당황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하게 변명을 했다.
“계속 여기에 숨어 있으려니 답답해서 그렇소. 언제쯤 도성을 빠져나갈 수 있는 거요?”
이야기를 하면서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변명을 하는 자신의 모습에 박완용은 내심 깜짝 놀랐다.
그러자 집주인은 웃으면서 그를 다독이듯 말했다.
“이제 곧 여길 나갈 수 있을 테니 힘들더라도 조금만 더 참으시오.”
“……알겠소.”
저 미소 뒤에 뭐가 숨겨져 있는지 알고 있던 박완용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살짝 말아 쥐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늘은 그쪽이 좋아할 만한 걸 가져왔소이다.”
“그게 뭐요?”
박완용이 모르는 척 묻자 집주인은 소매 안에서 제법 묵직해 보이는 돈주머니를 꺼내 앞에 내려놨다.
“잔금이오.”
은밀히 나눈 대화를 듣지 않았다면 반색을 하며 얼른 집어 들었겠지만 박완용은 선뜻 손을 가져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걸 본 집주인은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면서 재촉하듯 이야기를 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소?”
“아, 아니오.”
어느새 옆쪽으로 가 있는 사내를 힐끔 쳐다본 박완용은 한쪽 손을 뻗어 돈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집주인이 그의 시선을 돌리려는지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이거면 평생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테니 부럽소이다.”
“그래도 도망자 신세가 되지 않았소.”
“그거야, 일이 다 끝나면 어르신들이 알아서 처리해 주실 거요. 그러니까 눈 딱 감고 한두 해만 숨어 지내면 될 게요.”
그렇게 집주인이 시선을 끄는 사이에 슬쩍 옆으로 빠진 사내는 품속에서 시퍼렇게 날이 선 단검을 꺼냈다. 그러고는 곧장 박완용의 등을 노리고 있는 힘껏 단검을 찔렀다.
거리가 가까운 데다가 갑작스러운 기습이었기에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까부터 바짝 긴장한 채 사내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박완용은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요강 뚜껑을 휘둘렀다.
퍽!
“크윽.”
“개자식들! 내가 호락호락 당할 줄 알았어.”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사내는 몸을 휘청거리면서 벽에 부딪쳤다.
그 모습에 웃는 표정을 짓고 있던 집주인이 욕설을 내뱉으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런 쌍!”
얼른 몸을 돌려 피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옆구리를 살짝 베이고 말았다.
“큭.”
시뻘겋게 달군 불덩이가 살갗을 파고드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국이었기에 박완용은 이를 악물고 주먹으로 집주인의 턱을 쳐올렸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주먹에 거센 충격이 전해졌고 집주인은 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쓰러졌다.
“꾸엑.”
“헉헉.”
거칠게 호흡을 몰아쉬며 박완용이 잠시 숨을 돌리려는 순간 등 뒤로 아까 얼굴을 얻어맞고 넘어졌던 사내가 불쑥 몸을 일으켜서는 손에 쥔 단검을 찔러 넣었다.
푹.
“아악.”
꼬챙이로 쑤시는 듯한 느낌에 박완용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고 깊숙이 찔린 상처에서는 시뻘건 피가 쏟아졌다.
그러자 사내는 단검에 묻은 피를 혀로 살짝 핥으면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얌전히 있었으면 고통 없이 단번에 끝내 줬을 텐데. 멍청한 놈.”
“이렇게 배신하다니, 비열한 놈들!”
한쪽 손으로 상처 부위를 꾹 누르며 힘겹게 벽에 기대선 박완용이 씹어뱉듯 말을 하자 사내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모른 네놈이 바보지.”
“제길!”
“자! 이제 끝을 내지고.”
“순순히 죽어 줄 줄 알고.”
사내가 덤벼들자 박완용도 악에 바친 얼굴로 마주 달려갔다.
“이익.”
상대가 찌른 단검이 어깨를 파고들며 피가 튀었지만 박완용은 아랑곳하지 않고 체중을 실은 채 그대로 사내의 허리를 잡고 넘어졌다.
우당탕!
“이 자식이.”
그 상태에서 박완용은 사내의 목을 팔로 감아 꽉 쪼였다.
“컥컥.”
숨이 막힌 사내는 격렬하게 발버둥을 치면서 손에 쥔 단검으로 박완용의 등을 마구 찔렀다.
칼날이 들어올 때마다 피가 사방을 튀며 참기 힘든 고통이 척추를 타고 전해졌지만 여기서 손을 떼면 자신이 죽는다는 걸 알기에 필사적으로 팔에 힘을 줬다.
“끄으윽.”
“죽어!”
미친 듯 소리를 지르면서 팔을 조이자 사내는 이리저리 몸부림을 치다가 이내 힘없이 축 늘어졌다.
이미 사내의 숨이 끊어졌는데도 그 상태로 한참을 더 있던 박완용은 옆으로 누우면서 목을 조르고 있던 팔을 풀었다.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는 사내를 보며 숨을 길게 내쉬던 박완용은 턱이 박살 나 한쪽에 쓰러진 집주인이 신음 소리를 내며 꿈틀거리자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워 들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끄응.”
천근만근처럼 몸이 무거웠지만 이를 악물고 일어난 박완용은 비틀거리며 집주인에게 다가갔다.
겨우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집주인은 겁에 질린 얼굴로 사정했다.
“제, 제발 살려 줘.”
그러자 박완용은 입안에 고인 피를 바닥에 뱉으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내가 그런 말을 했어도 봐줬을까.”
“그, 그건…….”
“거봐.”
“안 돼!”
상대가 소리를 치는 것과 동시에 박완용은 쥐고 있던 단검을 집주인의 목덜미 깊숙이 박아 넣었다.
푸욱.
“끄어억.”
목에서 피분수가 솟은 상대는 그의 팔을 움켜잡으며 버둥거리다가 시커멓게 죽은피를 왈칵 토해 내고는 이내 머리를 아래로 떨궜다.
긴장이 풀린 박완용은 그대로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간신히 두 사람과 싸워 이기기는 했지만 그의 상태도 썩 좋지 않았는데, 단검에 찔린 상처만 여섯 군데가 넘었고 얼마나 피를 많이 흘렸는지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이대로 누워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언제 다른 사람이 찾아올지 몰랐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힘겹게 다시 일어난 박완용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돈주머니를 찾아 품속에 챙겨 넣고는 다락방을 내려갔다.
벽에 걸려 있던 겉옷을 하나 걸쳐서 대충 상처와 피투성이가 된 몸을 가린 박완용은 다른 은신처를 찾아 밖으로 나갔다.
“으윽.”
발을 움직일 때마다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상처 부위가 아팠지만 박완용은 애써 참으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난관에 부딪쳤는데 때마침 주변을 수색하고 있던 포졸들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깜짝 놀란 박완용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뒤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런 모습이 오히려 포졸들의 시선을 끌었다.
“어이! 거기. 잠깐 멈춰 봐.”
“젠장 할!”
욕설을 내뱉으며 박완용이 달아나자 포졸들은 가지고 있던 호각을 불면서 곧장 뒤를 쫓아갔다.
삐익!
“잡아라!”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필사적으로 뛰었지만 다친 몸은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호각 소리를 듣고 근처에 있던 포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저놈이다!”
연신 기침이 나오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자꾸 눈앞이 흐려졌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고함 소리와 반대 방향으로 정신없이 뛰던 박완용은 좁은 골목길 앞을 언제 나타났는지 포졸 네댓 명이 서 있는 걸 보고 황급히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는 도망치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 서야 했는데 어느새 뒤에도 포졸들이 육모방망이를 손에 들고 길을 막고 있었다.
“어디 또 달아나 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포졸 하나가 오랏줄을 꺼내며 하는 말에 아랫입술을 꽉 깨문 박완용은 단검을 빼 든 채 끝까지 저항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박완용은 흙담과 하늘이 핑그르르 도는 걸 느끼며 그대로 정신을 읽고 쓰러졌다.
털썩.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주위로 몰려드는 포졸들의 얼굴이었다.
“이 자식 뭐야?”
“그러게.”
옆으로 다가와서 쓰러진 박완용의 몸을 살피던 포졸들은 여기저기 칼에 찔린 상처를 발견하고 눈살을 찡그렸다.
“죽은 거 아냐?”
“아직 숨은 붙어 있어.”
그때 아까부터 고개를 갸웃거리며 박완용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던 포졸 한 명이 눈을 크게 뜨고는 손뼉을 쳤다.
짝!
“맞아.”
“왜 그래?”
“초상화에서 봤던 그 얼굴이야!”
“뭔 소리야?”
동료들이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포졸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아침에 의금부에서 나눠 준 초상화 있잖아. 바로 거기에 그려진 놈이라고!”
“……!”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던 동료들은 이내 화들짝 놀라 정신을 잃고 쓰러진 박완용을 쳐다봤다.
“어. 정말이네.”
급기야 가지고 있던 초상화를 꺼내 옆에 대고 비교를 해 보자 피가 묻어 지저분한 걸 빼고는 생김새가 거의 흡사했다.
그때야 박완용이 왜 자신들을 보자마자 도망쳤는지 깨닫게 된 포졸들은 월척을 낚았다는 생각에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
“어서 의금부로 압송해 가자고.”
“그래.”
다른 놈도 아니고 국왕의 저격범을 잡은 엄청난 공을 세운 포졸들은, 신이 나서 박완용을 오랏줄에 묶고서는 그대로 의금부로 끌고 갔다.
밤을 새우고 밀려오는 졸음에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의금부 도사 고용태는 서리가 기척도 없이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바람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도사 어른, 얼른 나가 보셔야 될 것 같습니다.”
“뭔데 이렇게 호들갑이야!”
자다가 깨서 그런지 고용태의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했지만 서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쪽 손으로 문밖을 가리키면서 이야기를 했다.
“전하를 저격한 범인을 잡았답니다!”
심드렁한 얼굴로 책상 위에 있던 주전자 물을 따라 마시려던 고용태는 순간 동작을 멈추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게 정말이야?”
“예. 포졸들이 범인을 옥사로 데려가는 걸 보고 오는 길인데, 초상화에 그려진 얼굴하고 똑같았습니다.”
“내가 직접 가 봐야겠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고용태는 벗어 놓은 모자를 챙겨 쓰고 황급히 집무실을 나섰다.
한달음에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옥사에 도착하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포졸이 그를 보고 허리를 숙였다.
“흉수를 잡았다던데 안에 있나?”
얼마나 급히 달려왔는지 고용태가 숨찬 목소리로 묻자 포졸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제일 안쪽 옥사에 있습니다.”
말을 듣기 무섭게 고용태는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창문이 작고 몇 개 없어 한낮인데도 어두컴컴한 옥사 안은 긴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죄인을 가두는 좁은 공간이 늘어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제일 끝 방에 포졸 서너 명이 모여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어쩐지 불길한 느낌에 눈가를 찡그린 고용태는 뒤에서 따라오던 포졸을 보며 말했다.
“왜 다들 저러고 있는 거지?”
“그게 어쩌다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잡혔을 때 큰 부상을 입고 있어서 급히 의원을 불러 치료 중입니다.”
“이런.”
고용태는 혀를 차고 재빨리 옥사 안으로 뛰어들었다.
축축하고 어두운 옥사 바닥에 박완용이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고, 의원이 한쪽 손목을 잡고 심각한 얼굴로 진맥을 하고 있었다.
그 주변을 엉거주춤 둘러싼 포졸 몇몇을 헤치고 앞에 선 고용태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몰골이 엉망이었는데 머리카락은 온통 산발이 되어 있었고 얼굴과 몸에는 군데군데 그가 봐도 상당히 깊은 상처가 나 있고 피딱지가 붙어 있었다.
“상태가 어떤가?”
다급한 물음에 맥을 살피던 의원은 박완용의 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어디서 이렇게 다쳤는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숨이 붙어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습니다.”
“그래서, 살 수 있다는 건가?”
겨우 붙잡은 범인이 이 꼴을 하고 있자 마음이 조급해진 고용태가 다그치듯 묻자 의원은 힐끗 누워 있는 박완용을 쳐다보고는 이야기를 했다.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그럼 안 죽는다는 거군.”
“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고용태는 이내 정색을 하며 앞에 있는 의원을 봤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살려야 되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자네가 그 책임을 다 감당해야 될 것이야.”
졸지에 날벼락을 맞게 된 의원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고용태는 막무가내였다.
“왜 대답이 없나!”
“그게…….”
“방금 자네 입으로 죽지 않을 거라고 했지 않나?”
고용태의 억지에 의원은 기가 막혔지만 이내 체념한 얼굴을 했다.
국왕 시해와 관련된 죄인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제 목숨을 걸고 박완용을 살려 내야 됐다.
하필이면 왜 자신이 불려 와서 이런 부담을 떠안게 됐는지 의원은 울상을 지으며 힘없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러자 고용태는 주위에 서 있는 포졸들을 둘러보며 명을 내렸다.
“옥사를 엄중히 지키고 의원이 치료를 잘할 수 있도록 모든 편의를 제공하도록 해라.”
“옛.”
그래도 불안한지 고용태는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군교에게 옥사 경비를 맡기고 포졸도 서른 명이나 더 배치했다.
워낙 모든 이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문제였기에 박완용이 잡혔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이제 인평대군을 새 임금으로 세우고 당당하게 조정에 출사할 꿈에 부풀어 있던 황죽표는 갑작스러운 이익치의 방문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쓸데없는 의심을 받게 될지도 모르니 당분간 서신으로만 연락을 주고받자고 말씀을 드렸는데, 어인 일이십니까?”
황죽표가 책망하듯 말했지만 이익치는 신경도 쓰지 않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오. 소식 들었소?”
그때야 상대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걸 본 황죽표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무슨 일이라고 생겼습니까?”
“어허. 이렇게 소식이 어두워서야.”
“…….”
이익치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짜증이 치솟았지만 아직까지는 그의 힘이 필요했기에 황죽표는 애써 화를 참아 넘겼다.
“주상을 저격한 범인이 붙잡혀 의금부 옥에 갇혀 있단 말이오.”
“그럴 리가요.”
깜짝 놀란 황죽표가 눈을 크게 뜨며 쳐다보자 이익치는 혀를 끌끌 차며 역정을 냈다.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요!”
“그런 것이 아니라…….”
“내 말을 정 못 믿겠으면 직접 의금부에 알아보면 될 것이 아니오.”
“끄으응.”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낸 황죽표는 적잖이 당황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익치의 이야기대로 박완용이 잡혔다면 그의 존재가 드러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박완용이 자신의 정확한 이름과 신분을 모른다는 것이 조금 위안이 됐지만, 의금부와 포도청이 작정을 하고 조사한다면 그것도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다.
목숨을 거둬 영원히 입을 막기로 한 날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황죽표로서는 정말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요!”
불안한지 연신 앞에 있는 서탁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언성을 높이는 이익치의 모습에 황죽표는 살짝 미간을 찡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일단 흥분을 조금 가라앉히십시오.”
“그놈이 입을 열면 지금까지 우리가 꾸민 일이 다 드러날 판인데 내가 진정하게 됐소!”
“이럴 때일수록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해야지 대업을 그르치지 않는 법입니다.”
“황 진사는 참 속이 편해서 좋겠소.”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에 황죽표는 참을 인 자를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그리며 불안해하는 상대를 다독였다.
“설사 일이 잘못된다고 해도 놈은 대감에 대해서 전혀 모르니 안심하십시오.”
“그게 정말이오?”
“쓰고 버릴 놈한테 제가 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흐음.”
당장 자기 이름이 나올 일은 없을 거라고 하자 그때서야 안심이 되는지 이익치는 작게 침음성을 흘리며 조금 진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황 진사가 걸려들면 자연히 나한테까지 영향이 있지 않겠소?”
“그렇게 되기 전에 손을 써야지요.”
그러자 이익치는 상체를 살짝 앞으로 숙이면서 기대 어린 시선을 보냈다.
“방법이 있겠소?”
“지금부터 생각을 해 봐야지요.”
“범인이 몸을 회복하면 바로 국문鞠問을 연다고 하니 서두르는 것이 좋을 게요.”
이익치의 이야기에 황죽표는 눈에 이채를 띠며 물었다.
“그 말씀은 놈이 다쳤다는 겁니까?”
“어찌 된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잡혔을 때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큰 부상을 입고 있었다고 합디다.”
“그렇군요.”
짐작되는 것이 있던 황죽표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계속 이었다.
“그걸로 대책을 세울 시간도 벌 수 있고 나중에 일이 생기면 좋은 핑곗거리가 될 테니 잘됐습니다.”
“이번에는 실수 없이 처리를 해야 될 것이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지금 같은 때에 저희가 만나는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것이 없으니 대감께서는 이만 가 보시지요.”
“알겠소.”
그제야 성급하게 찾아온 것이 걸리는지 이익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흠. 그럼 가 보리다.”
“멀리 못 나갑니다.”
이익치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황죽표는 입술을 비틀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명색이 조정 대신이라는 작자가 저렇게 대가 약하고 겁이 많아서야 무슨 일을 제대로 할지 저로 혀가 차졌다.
산당의 거두인 송시열만 자신과 뜻을 함께해 줬다면 진즉에 뒤로 밀어 버렸을 테지만 상황이 그렇지 못하니 어쩔 수 없이 손을 잡고 가야 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예조참판이 문제가 아니라 의금부 옥사에 잡혀 있는 박완용을 처리하는 것이 중했다.
손가락으로 서탁을 톡톡 두드리며 한참 고심을 하던 황죽표는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밖에 누구 없느냐!”
그러자 바깥을 지키고 있던 건장한 체격의 하인 한 명이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마님.”
“지금 바로 최 진사한테 가서 내가 좀 보자고 한다고 전해라.”
“알겠습니다요.”
머리를 숙이며 대답한 하인이 나가자 황죽표는 한쪽에 놔둔 담뱃대에 불을 붙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거 하나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다니…… 쯧.”
얼마 뒤 연락을 받고 달려온 최석호는 황죽표와 몇 시진이나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저택으로 돌아갔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근처에 숨어서 감시 중이던 주작단 요원을 통해 하나도 빠짐없이 다 파악됐고 바로 도현에게 보고가 올라갔다.
“호오. 그러니까 날 쏜 흉수가 잡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익치가 꽁지에 불붙은 쥐 새끼처럼 황죽표란 놈한테 달려갔다는 거지.”
“그렇사옵니다.”
“그리고 황죽표는 바로 최근 인평대군과 교류가 잦은 최석호라는 자를 집으로 불러들였고.”
“예.”
베개 위에 한쪽 팔을 올리고 비스듬히 앉아 있던 도현은 이완의 대답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그림이 확실히 그려지는 것 같군. 안 그런가?”
시선을 받은 친위대장 신철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감히 전하께 은혜를 입고 당상관의 높은 벼슬을 받은 자가 이런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다니, 당장 잡아들여 죄를 엄히 물어야 될 것입니다.”
“그래야지. 헌데 이걸 보면 산당에 속한 인물 상당수가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것 같은데, 수장인 우상이 빠져 있는 것이 의아하군.”
“저도 그 부분이 이상해 자세히 살펴봤습니다만 우상은 이번 일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거 의외군.”
도현은 몇 번이나 기회를 줬는데도 그걸 잡지 못하고 여전히 유교 경전만 붙잡고 국익보다는 기득권만 지키려는 골통들을 한꺼번에 싹 다 정리해 버리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 조금 아쉬우면서도, 나름 가치관이 제대로 박히고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명망이 높은 송시열이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는 점에 흡족한 기분도 들었다.
“그럼 예조참판이 독단으로 벌인 일이라는 건가?”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로 볼 때 그렇습니다. 헌데 모든 걸 계획하고 주도하는 인물은 예조참판이 아니라 아까 아뢰었던 황죽표인 것 같사옵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도현이 되물었다.
“황죽표?”
“네. 모든 단서의 끝이 대부분 황죽표를 향해 있고 인평대군도 예조참판과 바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이자를 통해서 끈이 이어졌습니다.”
저들이 계획한 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다음 보위를 인평대군이 가지게 될 텐데, 그 옆을 이익치가 아니라 황죽표가 차지하고 있다는 건 이완의 예상이 맞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다.
“하긴 예조참판이 권력에 대한 욕심이 많기는 하지만 이런 엄청난 일을 혼자 꾸밀 위인은 못 되지.”
“이번에는 벼슬아치들보다 각 지방 유림들, 그중에서도 대규모 토지를 보유한 유지들이 적극 가담한 것이 특징입니다.”
“결국 노비 해방에 반발해 역모를 꾸몄다는 거군.”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그러자 도현은 눈을 치켜뜨고는 씹어뱉듯 말했다.
“입으로는 충과 의를 내세우면서 정작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조금이라도 잃을 것 같으면 이따위 짓을 벌이다니. 이들을 어찌 사대부라 할 수 있겠나.”
“맞사옵니다.”
“이완 단장.”
“하교하시옵소서.”
고개를 숙이는 이완을 쳐다보며 도현은 단호한 어투로 명령을 내렸다.
“놈들은 분명 자신들이 지은 죄를 감추기 위해 옥사에 갇혀 있는 범인을 없애려고 할 것일세. 그걸 막고 증거를 잡아 의금부와 함께 역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잡아들이도록 하게.”
“옛!”
힘차게 대답하는 이완 단장 뒤에 나 있는 창문에는 저녁노을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튿날 밤 의금부에 소속된 옥리獄吏인 박태출은 근무 중에 잠시 짬을 내서 관청 밖으로 나왔다.
뭔가 불안해 보이는 얼굴로 서성이고 있을 때 어둠 속에서 그를 부르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보게, 여길세.”
“…….”
고개를 돌려 누군지 확인한 박태출은 주위를 살피고는 얼른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는데 하나는 일백이라고 그가 가는 투전판에서 뒷돈을 대 주는 전주였다.
함께 있는 사내는 그도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힐끔 사내를 곁눈질한 박태출은 일백을 보며 사정조로 이야기를 했다.
“돈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기한 내에 갚는다고 하지 않았나! 여기까지 찾아오면 날 보고 어찌하라는 거야?”
“깽판 치려고 온 건 아니니 염려 마시우. 설마 내가 산천초목도 부르르 떤다는 의금부에서 난장을 피우겠소.”
“그럼 뭐 때문에 날 불러 낸 거야?”
노름빚을 재촉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말에 박태출은 안심을 하면서도 여전히 불안해 보이는 얼굴로 상대를 쳐다봤다.
그러자 일백은 부드러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
“박 형, 오늘까지 나한테 갚아야 될 노름빚이 얼마인지 알고 있소?”
“은화 스무 냥 아닌가?”
박태출의 말에 일백은 밉살스럽게도 손가락 하나를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건 며칠 전 이야기고 정확히 금화 두 냥하고 닷 푼이오.”
“무슨 소리야!”
몇 배로 뻥튀기 된 금액에 박태출이 발끈했지만 일백은 느긋한 얼굴로 말했다.
“돈을 빌릴 때 일 할을 떼고 매일 삼 할씩 이자가 붙는다고 내가 이야기해 줬지 않소.”
“그렇긴 하지만 그때 빌린 돈이라고 해 봤자 고작 은화 열 냥인데 금화로 갚으라니 이건 해도 너무하잖아.”
강하게 항의를 하자 일백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래서 못 갚겠다 이거요?”
돈이 없으면 살갗을 벗기고 부조금까지 챙겨 간다는 말이 있을 만큼 악랄한 것이 바로 투전판의 전주들이다.
물론 의금부에 속해 있는 그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는 못하겠지만, 독한 마음을 먹고 나라에서 금지한 노름을 하고 빚까지 지고 있다는 걸 고발이라도 한다면, 당장 쫓겨날 것이 뻔했기에 지금 이 순간은 약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내 사정 좀 봐주게.”
박태출이 고개를 숙이며 사정하자 일백은 씨익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다시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좋소. 우리가 한두 해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고 깔끔하게 빚을 다 털어 주겠소.”
“그, 그게 정말인가?”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오.”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해 주겠네.”
이자를 깎아 주는 것도 아니고 빛을 전부 탕감해 주겠다는 말에 솔깃해진 박태출은 덤벼들 듯 물었다.
그걸 보고 일백이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지금까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가만히 있던 중년인이 슬며시 나섰다.
중년인은 최석호의 오른팔로 집사 노릇을 하는 조우석이라는 자였다.
“지금 옥사에 주상 전하를 저격한 범인이 잡혀 있다고 하던데, 맞소?”
뜻밖의 질문에 당황한 박태출이 일백을 쳐다보자 그는 담담한 얼굴로 대답을 재촉했다.
“어서 말씀 안 드리고 뭐 하시오?”
그러자 박태출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자가 먹는 음식에 이걸 몰래 넣어 줬으면 좋겠소이다.”
이야기를 하며 조우석은 소매에서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비록 투전에 빠져 왈패한테 협박이나 받는 처지가 됐지만 의금부 소속 관원인 박태출은 주머니를 보자마자 상대가 뭘 하려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지금 나보고 살인을 하라는 거요!”
“직접 죽이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눈 한 번만 질끈 감으면 되는 거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못하겠소.”
박태출이 손사래를 치며 거부하자 대번에 표정이 바뀐 일백이 사나운 눈빛으로 째려보며 말했다.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닐 텐데. 계속 빚은 늘어날 테고 기한까지 다 못 갚으면 박 형이 애지중지하는 딸내미를 돈 대신 기방에 팔 생각인데 그래도 괜찮겠소?”
“그건 절대 안 돼!”
마누라 없이 혼자 어렵게 키운 딸을 거론하자 흥분해서 달려든 박태출을 가볍게 밀어서 넘어뜨린 일백은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 꼴을 보기 싫으면 고분고분 말을 들으면 되잖아.”
“이익…….”
“그만하게.”
조우석의 말에 일백은 잡고 있던 멱살을 풀어 주며 한쪽으로 가서 섰다.
그가 비틀거리며 일어나자 조우석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을 해 준다면 빛을 탕감해 줄 뿐만 아니라 적당한 사례도 하겠소.”
“…….”
“어차피 지금 상태라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자에 평생 빚에 허덕이며 살 텐데, 그것보다는 단 한 번만 날 도와주고 이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백번 낫지 않겠소.”
달콤한 유혹에 박태출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사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살인적인 이자를 붙이는 노름빚에서 빠져나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조우석이 말한 것처럼 미친 척하고 한 번 일을 해 주고 노름빚을 털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 같았다.
짧은 시간 동안 고심을 거듭한 박태출은 이내 결정을 내렸는지 입술을 질근 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죄인이 죽으면 당장 옥리인 내가 가장 의심을 받게 된다는 걸 알고 있겠지요?”
“물론 그렇겠지만 박 형 말고도 옥사를 지키는 포졸이 여럿이고 음식은 다른 이가 담당하니까 눈치껏 행동한다면 들킬 일은 없을 거요.”
상대가 쉽게 이야기를 했지만 의금부에서 잔뼈가 굵은 박태출은 다른 사건도 아니고 대역죄에 관련한 죄인이 독살된다면, 엄히 추궁을 당할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운이 좋아 의심을 피한다고 해도 십중팔구 옥사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죄로 벼슬이 떨어지는 건 물론이고 잘못하면 큰 벌을 받게 될 것이오.”
“으음.”
조우석이 딱히 반박을 못 하고 낮게 침음을 흘리자 박태출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빚을 없애는 것도 좋지만 당장 호구지책이 사라지고 문책까지 감수해야 되니,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 준다면 시키는 일을 하겠소.”
박태출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조우석은 갑작스러운 그의 대담한 행동에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금방 평정심을 회복한 조우석은 상대를 물끄러미 보며 이야기를 했다.
“얼마를 원하시오?”
그러자 박태출은 기다렸다는 듯이 금액을 불렀다.
“금화 서른 냥은 받아야겠소.”
“너무 많은 거 아니오?”
“내 목숨 값이라 생각하면 많은 것이 아니지요. 돈은 일을 하기 전에 다 건네줬으면 좋겠소.”
언제 망설였느냐는 듯이 철두철미하게 대가를 다 챙기려고 하는 박태출의 모습에 조우석은 어의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만큼 각오를 단단히 했으니, 자기가 살기 위해서라도 일을 제대로 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 박태출 말고는 딱히 다른 대안이 없었고, 돈이 얼마가 들어가더라도 옥에 갇힌 박완용의 입을 막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조우석은 오래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대로 해 주겠소.”
너무 쉽게 요구를 받아들이자 박태출은 조금 더 달라고 할 걸 하며 살짝 후회를 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기에 빨리 머릿속에서 지웠다.
“돈은 바로 갖다 줄 테니까 내일을 넘기지 마시오.”
“알겠소.”
“그럼 조금 있다가 다시 봅시다.”
이야기가 끝나자 박태출은 몸을 돌려 서둘러 의금부로 돌아갔고 옆에 있던 일백이 너무 많이 주는 것 아니냐는 듯 볼멘소리를 냈다.
“집사 어른, 정말 그 돈을 다 줄 생각이십니까?”
“그래. 준다고 했으니 약속을 지켜야지.”
“그냥 저한테 맡기셨으면 절반만 줘도 됐을 텐데요.”
하지만 조우석은 생각이 다른지 살짝 고개를 내저으며 이야기를 했다.
“소탐대실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돈 몇 푼을 아끼려다가 더 큰 걸 놓치면 우리만 손해지 않겠어.”
“그래도…….”
알아듣게 설명을 했는데도 일백이 계속 돈을 아까워하자 조우석은 무시하고 지시를 내렸다.
“난 대감마님께 상황을 말씀드리고 돈을 가져올 테니 자넨 그때까지 박가 놈이 딴짓을 하는지 지켜보도록 하게.”
“예.”
일백의 대답을 들으며 조우석은 몸을 돌려 골목길 사이로 사라졌다.
다음 날 의금부 옥사에 얼굴을 내민 박태출은 한가롭게 돌아다니는 척하면서 박완용이 갇혀 있는 곳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숨이 간당간당했지만 이제 제법 상태가 호전되어, 혼자 일어나 미음을 삼킬 수 있을 정도였으나 아직 몸 여기저기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어 의원이 매일 돌봐 줘야만 했다.
집에도 못 가고 사흘째 박완용의 곁에 붙어 있는 의원은 물론이고 다른 죄수와는 달리 포졸들이 몇 명이나 감시를 하고 있어 그야말로 삼엄한 경계였다.
‘이제 어떡한다?’
아무리 옥사를 자유롭게 들락날락할 수 있는 신분이라곤 하나 저 감시망을 뚫고 박완용에게 접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음식에 비상을 타서 먹이라니, 말은 쉽지.’
애당초 죄수들에게 밥을 갖다 주는 역할은 평소 그가 하는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의심스럽게 생각하지 않게 자연스러운 상황을 만들어야 했는데, 안 하던 잔꾀를 부리려니 잘 먹힐까 싶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속으로 이래저래 투덜거리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려 애썼다.
포졸들의 눈에 띄지 않게 벽에 딱 기대어 서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박태출은, 마침 밥시간이 되어 죄수에게 먹일 국밥 그릇을 들고 오는 일꾼을 발견하고 슬쩍 알은척을 했다.
“어이, 이보게.”
“앗. 옥리 나리, 아니십니까.”
원래는 관에 속한 관비였지만 도현이 전격 실행한 노비해방령 덕분에 자유의 몸이 되어 이제 꼬박꼬박 세경을 받고 일하는 하인은 박태출을 보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나리는 무슨, 그것보다 지금 어디 가냐?”
“아, 예. 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에게 음식을 갖다 주러 가는 길입니다.”
그러자 박태출은 짐짓 불쌍해하는 표정으로 혀를 쯧쯧 찼다.
“허이고. 한두 놈이 아닌데 그걸 다 갖다 주려니 자네가 고생이 많아.”
그러고선 살짝 눈을 흘기며 속닥거렸다.
“그럼 저기 있는 죄수도 자네 담당이겠군.”
“누구요?”
“아, 왜, 있잖아. 의원까지 불러와서는 특별 취급하고 있는 놈.”
“아. 네, 그렇죠.”
하인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으휴. 나는 무서워서 그놈이 잡혀 있는 옥사 근처도 가기 싫던데, 넌 괜찮으냐?”
“좀 꺼림칙하긴 하죠.”
박태출은 목소리를 낮추며 겁을 줬다.
“저런 위험한 놈 곁에는 아예 다가가지 않는 게 몸에 좋아. 자칫 잘못해서 이상한 오해라도 받으면 어쩔 거야. 그놈이랑 내통한다고 누명 같은 걸 쓰면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건 시간문제지.”
“그렇지요.”
“지난번에 역모 사건이 일어났을 때 자네처럼 음식을 넣어 주는 관비 하나가 옥사에 갇힌 죄인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눴다가 들켜서 곤장을 열 대나 맞았잖아.”
“그런 일도 있었습니까요?”
“그러니까 자네도 조심하라고.”
“예.”
그가 계속해서 있는 말 없는 말 지어내 떠들어 대며 엄포를 놓자 하인은 차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는지 낯빛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오늘 음식은 뭔가?”
“국밥입니다요.”
“어제까지 미음만 먹이더니 이제 많이 괜찮아졌나 보군.”
“그런가 봅니다.”
광주리 안에 있는 음식을 살펴보는 척하면서 박태출은 손에 쥐고 있던 비상 가루를 국밥에 슬쩍 집어넣었다.
워낙 행동이 빠르기도 했지만 광주리를 덮어 놓은 보자기로 교묘하게 시선을 가려 하인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늦으면 야단을 듣게 될지도 모르니 어서 가 봐.”
“네.”
음식이 든 광주리를 옆에 끼고 황급히 걸음을 옮기는 하인의 뒷모습을 보며 박태출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국왕을 시해하려고 했던 대역 죄인이었기에 박완용이 갇혀 있는 옥사는 포졸 서른 명이 돌아가면서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었다.
하인이 다가오자 포졸들과 함께 입구에 서 있던 군관이 약간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냐?”
“죄인에게 줄 음식입니다요.”
“보자기를 걷어 보라.”
고개를 숙인 하인이 보자기를 걷자 군관은 직접 음식에 이상이 없는지 눈으로 살펴보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들어가 봐.”
“예.”
옥사로 들어간 하인은 곧장 박완용이 갇혀 있는 제일 끝 방으로 갔다.
“의원 나리, 고생이 많으십니다.”
“오. 자네 왔나.”
중상을 입은 채 잡힌 박완용을 치료한다고 팔자에도 없는 옥살이를 하고 있던 의원은 그동안 자신을 도와 이것저것 심부름을 해 주고 있는 하인을 보고 알은척을 했다.
“나리가 드실 것도 가져왔습니다.”
“자네가 고생이 많구먼.”
“제가 할 일인데요, 뭐.”
광주리를 바닥에 내려놓은 하인은 국밥과 반찬으로 가져온 나물 그릇을 하나씩 꺼내 놨다.
상세가 많이 좋아졌지만 혼자 거동이 어려운 박완용한테는 하인이 직접 국밥을 넘겨줬는데, 아까 박태출한테 들은 말 때문인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마침 출출했었는데 잘됐군.”
입맛을 다신 의원이 뜨거운 국밥을 후후 불어 가며 막 입안으로 넣으려는 순간 갑자기 옥사 문이 덜컥 열리며 일단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멈춰라!”
살벌한 기세에 의원은 영문을 모른 채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옥사에 나타난 이들은 바로 주작단 단원들이었는데 우두머리인 김근행은 박완용이 들고 있던 국밥을 빼앗아 옆에 있던 부하에게 건넸다.
“확인해 봐.”
“네.”
부하는 품속에서 가느다란 은침을 하나 꺼내 국밥에 반쯤 담갔다가 다시 꺼냈다.
그러자 음식과 닿았던 부분이 새까맣게 변색된 걸 볼 수 있었다.
“헉!”
그게 뭘 뜻하는지 바로 알아차린 의원은 대경실색한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국밥 그릇을 얼른 내려놨고, 김근행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독을 풀었군.”
독이라는 말에 박완용과 하인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고 뒤늦게 들어와 뒤에 서 있던 포졸들이 술렁거렸다.
그때 주작단 단원 두 명이 모여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누군가를 끌고 와 무릎을 꿇렸는데 바로 박태출이었다.
“네놈이 독을 풀었느냐!”
붙잡혀 오는 과정에서 몇 대 맞았는지 얼굴에 멍이 든 박태출은 손사래를 치며 극구 혐의를 부인했다.
“아닙니다.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요?”
박태출의 변명에 김근행은 버럭 호통을 쳤다.
“네놈이 한 짓이라는 걸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어디서 발뺌이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여기서 실토를 하면 끝장이었기에 박태출은 필사적으로 버텼다.
“오해십니다.”
“그래도 나라의 녹을 먹는 관헌이라고 살살 대해 줬더니 안 되겠구나. 저놈을 끌고 가서 죄를 실토할 때까지 물고를 내도록 해라.”
“예.”
명을 받은 주작단 단원이 뒷덜미를 잡고 끌고 가려고 하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박태출은 손을 비비며 사정했다.
“가자.”
“제, 제발 살려 주십시오.”
“빨리 끌고 가!”
울며불며 매달렸지만 박태출은 주작단 단원에게 두들겨 맞고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갔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있은 후 김근행은 바로 앞에서 동료가 잡혀가는 걸 보고 바짝 얼어 있는 의금부 관헌들을 훑어보며 차갑게 말했다.
“독이 든 음식을 들이는 것도 모르고 경비를 허술하게 선 죄는 나중에 의금부 도사께 알려 엄히 문책하도록 할 것이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던 포졸들은 김근행의 질책에 낭패한 얼굴로 그저 고개를 푹 숙였다.
시선을 돌린 김근행은 일련의 사태에 얼굴을 굳힌 채 앉아 있는 박완용을 내려다보며 고저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같은 패거리한테 독약이나 선물 받고 너도 참 불쌍한 놈이야. 이제 배후가 누군지 부는 것이 어때?”
“…….”
그러자 잠시 인상을 찡그리며 고심하던 박완용은 독기 눈빛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어차피 살기 어렵다면 자신을 이 일에 끌어들이고 두 번이나 죽이려고 했던 놈들에게 복수나 하자는 생각이었다.
“다 말하리다.”
“잘 생각했어. 혼자 죽기에는 억울하잖아.”
원하는 대답이 나오자 김근행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주작단이 정확히 때를 맞춰 독살을 저지할 수 있었던 건 유력한 배후로 지목된 황죽표 일당의 움직임을 은밀히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시망에 최석호의 집사인 조우석이 의금부 소속 옥리인 박태출을 만나는 것이 포착했고, 어렵지 않게 저들이 단서를 쥐고 있는 박완용을 제거하려 한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상황을 보고받은 이완은 즉시 황죽표 일당의 꼬리를 잡기 위한 함정을 팠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박완용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다 실토했고 박태출도 김근행이 증거를 제시하며 추궁하자 이내 자포자기하며 죄를 자백했다.
그렇게 꼬리가 잡히자 주작단은 도현의 재가를 받아 의금부와 함께 전격적으로 황죽표 일당 체포에 나섰다.
그 시각 대전에서는 후계 문제로 또다시 갑론을박이 시끄럽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 문제는 나중에 논의하자고 이야기하지 않았소!”
좌의정 김종일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지만 이익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자기주장을 이야기했다.
“나라가 안팎으로 어려운 이때에 후계를 제대로 세워 놓지 않고, 망극한 일이지만 주상 전하께서 승하하시기라도 한다면 큰 혼란이 있을 겁니다.”
이익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대편에 앉아 있던 병조판서 임경업이 노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며 호통을 쳤다.
“주상 전하께서 흉탄에 쓰러지신 지 이제 겨우 사흘째요. 그런데 어찌 그런 황망스러운 말을 입에 담는 것이오!”
“마음은 아프지만 현실을 외면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당장 내일이라도 예친왕이 대군을 몰고 다시 쳐들어온다면 그걸 어찌할 겁니까?”
군대라는 것이 생각만큼 쉽게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이익치의 이야기는 현실성이 조금 떨어졌지만, 지난 전쟁의 승리로 많이 나아졌다고 해도 병자호란이라는 아픈 기억을 가진 신료들한테는 큰 위협처럼 느껴졌다.
바로 좌중이 크게 술렁거리며 동요하자 임경업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주상께서 아직 살아 계신데 이렇게 마음대로 후계 문제를 거론하는 건 불충이오.”
“누가 지금 당장 양위讓位를 하자고 했습니까? 그저 다음에 누가 대통을 이어받을지 논의를 해서 나중의 혼란을 막자는 거지요.”
“그게 그거 아닌가! 왜 자꾸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예조참판의 저의가 의심스럽네.”
순간 찔끔했지만 이익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 미리 준비한 핑계를 댔다.
“전하의 상세가 호전되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벌써 며칠째 희정당 출입을 금하고 어의가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을 정도로 나쁜 상황에서 이런 논의를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오히려 이런 충심을 몰라주고 이상한 쪽으로 몰려는 병판대감이 다른 마음을 품은 건 아닌지 의심되는군요.”
“뭐요!”
발끈한 임경업이 눈썹을 추켜올리면서 고함을 내질렀고 대전은 순식간에 왕당파와 산당으로 갈려 서로 삿대질을 하며 격한 말들이 오갔다.
박황과 송시열이 나서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서 있던 신료들은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때 묵직한 음성이 신료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정말 한심스럽군.”
“……!”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린 신료들은 사경을 헤매는 중이라던 도현이 너무나도 멀쩡한 모습으로 대전 입구에 서서 혀를 차고 있는 모습에 다들 눈을 크게 치켜떴다.
“헉!”
“저, 전하.”
“아니, 어떻게…….”
임경업을 비롯해 그의 상태를 알고 있던 몇몇 인사들을 뺀 대부분의 신료들이 너무 놀라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특히 역모를 꾸민 이익치와 일부 신료들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큰 충격을 받았다.
“이게 어찌 된 겁니까?”
“나도 모르겠소.”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참판 대감만 믿고 후계 논의를 지지했는데 이렇게 되면 입장이 곤란하게 됐지 않습니까.”
옆에 있던 산당 소속 신료 하나가 낮은 목소리로 원망을 쏟아 냈지만 이익치는 그걸 받아 줄 정신이 없었다.
도현과 다른 신료들이 없었다면 말도 안 된다며 소리를 치고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대전 안이 충격과 혼란에 휩싸인 가운데 도현은 당당한 발걸음으로 신료들 사이를 지나가 비어 있던 왕좌에 앉았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좌중을 천천히 훑어본 도현은 크지는 않지만 묵직한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짐이 며칠 자리를 비우는 동안 아주 많은 일이 있었더군.”
의미심장한 말에 다들 마른침을 삼키면서 도현의 눈치를 봤는데 그중에서도 이익치와 그에 동조한 인사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것이…….”
“그렇게도 날 옥좌에서 끌어내리고 싶었나?”
이익치는 황급히 바닥에 상체를 엎드리고는 떨리는 음성으로 이야기를 했다.
“오해시옵니다.”
“오해라…… 그래도 이번 일을 꾸민 걸 보고 의외로 제법 배포가 있는 줄 알았더니, 실망이군.”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이익치를 내려다보던 도현은 이내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서탁을 세게 내려치며 호통을 쳤다.
탕!
“네놈이 황 모라는 작자와 공모해 짐을 저격하고 인평대군을 내세워 권력을 잡으려 했다는 것이 이미 모두 다 밝혀졌는데, 어디서 시치미를 떼는 거냐!”
순간 대전 안은 폭탄이 터진 것처럼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런 가운데 이익치와 일부 과격한 성향의 산당 인물들이 행여나 이번 일에 연관이 되어 있지 않을까 염려하던 우의정 송시열은 눈을 감으며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그런 일이!”
“예조참판, 전하의 말씀이 사실이오!”
“어서 대답을 해 보시오.”
대전에 있던 신료들이 당파를 가리지 않고 벌 떼처럼 쏘아붙이자 당황한 이익치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지만 여기서 죄를 인정하면 대역 죄인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집안이 풍비박산 날 것이기에 이익치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잡아뗐다.
“제가 어찌 그런 불경스러운 마음을 품었겠사옵니까! 아니옵니다.”
그러자 도현은 콧방귀를 뀌고는 칠현이 가지고 있던 서찰을 앞으로 집어 던지며 일갈했다.
“이걸 보고도 그딴 소리를 지껄이겠느냐!”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서찰을 집어 들어서 펼친 이익치는 이내 숨을 크게 삼키며 대경실색했다.
“헉! 이게 어떻게…….”
서찰은 후계 문제를 공론화시키면 인평대군을 띄우기 위해서 황죽표와 함께 그가 상소문을 올리라고 지시하기 위해 삼남 지방의 유지들한테 보낸 것 중 하나였다.
바로 어제 써서 보낸 서찰을 도현이 가지고 있으니 이익치는 너무 놀라 심장이 그대로 멈추는 것 같았다.
그런 이익치의 반응에 신료들은 도현의 말대로 그가 역모에 가담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봐라!”
“예.”
“저놈을 당장 의금부 옥사에 가두고 이번 역모에 대한 진상을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낱낱이 모두 밝혀내도록 해라!”
“알겠사옵니다.”
우렁차게 대답한 친위대장 신철이 손짓을 하자 대기하고 있던 위사들이 들어와 이익치와 동조했던 신료들을 끌고 나갔다.
“살려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옵니다.”
끌려 나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며 빌었지만 도현은 차가운 얼굴로 쳐다보기만 했고 다른 신료들은 행여나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봐 시선을 외면했다.
잠시 뒤 이들이 사라지자 대전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부상이 심각하다던 도현이 이렇게 멀쩡히 나타난 것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이번 저격 사건에 조정 중신인 예조참판 이익치가 연루되어 있다는 건 충격을 넘어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한참 동안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는데 차라리 화를 내며 호통을 치는 것이 낫지, 어깨를 짓누르는 압박감에 신료들은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 때 도현이 혀를 끌끌 차며 입을 열었다.
“가장 믿고 의지해야 될 조정 대신이 역모를 꾸미고 짐을 시해하려고 하다니 이게 무슨 부끄러운 일이오!”
“송구하옵니다.”
비록 이익치와 뜻을 함께하지는 않았지만 어찌 됐건 같은 조정 대신 사이에서 역적이 나왔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수치였기에 신료들은 죄스러움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
“이건 짐에 대한 도전이자 국가의 기강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중차대한 일이니 티끌이라도 이번 역모에 관련된 사람은 모두 찾아내 엄벌에 처할 것이오!”
도현의 추상같은 선언에 신료들은 또다시 거센 피바람이 불어닥칠 것을 예감하면서도 아무런 반대도 할 수 없었다.
한편 이미 대궐 밖에서는 한바탕 검거 열풍이 한양 전체를 휩쓸고 있었다.
지난 사흘 동안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했고 황죽표 일당과 연관되어 있는 인물은 일단 불문곡직하고 무조건 잡아들였는데 그 수가 무려 수백 명에 달했다.
개중에는 억울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건 나중에 조사를 해서 걸러 내기로 하고, 일단 역모를 꾸민 무리가 눈치를 채고 달아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이런 식으로 싹 쓸어버렸다.
주작단과 의금부 그리고 포도청까지 나서 협동 작전을 벌였지만 그래도 손이 부족하자 도성을 지키는 근위대 일부 병력도 동원됐다.
수많은 병력이 쏟아져 나와 사람들을 잡아가기 시작하자 백성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는 불안한 얼굴로 상황을 주시했다.
이렇게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역모 사건의 핵심 인물인 황죽표와 최석호를 간발의 차이로 놓치고 말았다.
얼마나 급히 도망쳤는지 안방에 온통 널려 있는 물건들을 보고 와락 얼굴을 구긴 고용태는 주위에 있던 의금부 소속 병사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멀리 달아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놈들을 찾아 주변을 샅샅이 뒤져라!”
“옛!”
우렁차게 대답한 병사들은 신속하게 사방으로 흩어져 수색에 나섰고 일부는 황죽표의 저택 곳곳을 뒤져 역모와 관계된 물증을 찾았다.
그걸 지켜보며 의금부 도사인 고용태는 바닥에 있던 돌멩이를 발로 차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제길!”
“허억. 헉!”
정신없이 도망쳐 나온 황죽표와 최석호 그리고 그들을 따라온 측근들은 의금부의 추적을 피해 북한산 능선을 타고 마구 내달렸다.
평생 책상머리 앞에서 책만 읽던 양반인지라 형편없는 체력 탓에 몸은 천근만근이요, 가죽신은 너덜너덜 헤어져 발걸음 하나 옮기는 것도 힘들었지만,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에 겨우겨우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어 움직였다.
허나 그것도 잠시, 뒤에서 의금부 병사들이 쫓아오는 기척이 없는 듯하자 최석호가 가장 먼저 나가떨어졌다.
“지, 진사 어른, 잠시만 쉬었다 가시지요.”
그러자 앞서 가던 황죽표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조금이라도 더 멀리 도망쳐야 할 판국에 무슨 태평한 소리를 하고 있나!”
“하지만 진사 어른, 더 이상은 꼼짝도 못 하겠습니다.”
최석호는 다른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며 변명했다.
“보십시오. 다들 기진맥진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최석호의 말과는 달리 급히 챙겨 온 돈이 든 작은 궤짝을 등에 짊어진 조 집사나 다른 일행은 아직 여력이 남아 있는 모습이었다.
물론 똑같이 지치긴 했지만 적어도 책상물림인 두 사람보다는 체력이 더 나은 덕분이다.
그런 일행의 모습을 슥 둘러본 황죽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숨도 고를 겸 반시진만 쉬었다 가도록 하지.”
솔직히 그도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누구 하나 먼저 쉬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기에 오기로 악을 써 가며 움직이고 있었던 것인데, 마침 최석호가 핑곗거리를 대 주니 안성맞춤인 격이었다.
“고맙습니다, 진사 어른.”
그런 속내도 모르고 최석호는 마냥 쉬어서 좋다는 듯 큰 바위를 하나 붙잡고 앉아 덥다고 손부채질을 했다.
다른 일행 역시 주섬주섬 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사이, 황죽표도 바닥이 평평하게 잘려 나간 작은 나무둥치를 의자 삼아 아픈 다리를 주물렀다.
입에서 단내가 날 때까지 뛰어다닌 건 난생처음 있는 일이라 팔다리는 물론 온몸이 근육통으로 욱신거렸다.
“이제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나뭇가지와 덤불숲을 헤치고 지나온 탓에 구겨지고 비뚤어진 갓을 매만지며 최석호가 물었다.
“자네는 생각해 놓은 곳이 있는가?”
“저는 남원으로 돌아갔으면 합니다만…….”
고향엔 남겨 놓은 처자식과 앞으로 힘이 되어 줄 기반도 있으니 최석호의 생각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황죽표는 고개를 내젓고 단호하게 말했다.
“생각이 짧군그래. 우리가 여기까지 내몰렸는데 남원에 남아 있는 식솔과 재산이라고 무사할 턱이 있나. 이 상황에서 어슬렁거리며 돌아갔다간 제 발로 옥사에 걸어 들어가는 꼴이 될걸세.”
“설마…….”
“못 믿겠으면 자네가 직접 실험해 보던가.”
싸늘한 황죽표의 말에 최석호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럼 남원에 있는 처자식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분명 지금쯤 관아에서 포졸들이 나와 끌고 갔겠지.”
답하는 황죽표의 안색도 썩 좋지는 못했다.
“이럴 수가…….”
땅바닥이 꺼지기라도 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최석호는 조심스럽게 황죽표에게 물었다.
“진사 어른께선 달리 생각해 놓은 방도가 있으신지요?”
그러자 황죽표는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가 떴다.
“명나라로 가는 수밖에.”
“예에?”
“왜 그렇게 놀라나?”
“아니, 하지만…… 명나라는 너무 멀지 않습니까.”
황죽표는 한심한 놈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최석호를 눈 아래로 깔아 보았다.
“조선 방방곡곡에 주상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데 그럼 어디로 도망쳐야 안전하단 말인가.”
“이, 일이 잠잠해질 때까지 산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나오면 되지 않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게.”
단번에 최석호의 의견을 일축한 황죽표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어린애를 살살 어르듯이 말했다.
“지금 주상이 행하는 일들 중에는 명나라의 뜻에 반하는 것들이 많으니, 거기로 가면 뭔가 길을 찾을 수 있을 걸세.”
“허나 명나라로 가려면 큰 바다를 건너야 하는데…….”
“그거라면 걱정하지 말게나.”
황죽표는 싸늘하게 식은 이마의 땀을 소매로 훔치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제물포까지 가기만 하면 돼. 거기에 도착하기만 하면 내가 아는 큰 배를 가진 선주가 있으니 찾아가 부탁하면 거절하진 않을걸세.”
“그렇군요.”
최석호는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곳까지 연이 닿아 계시다니, 역시 진사 어르신입니다.”
“흥.”
아첨하는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황죽표는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어쨌든 제물포까지 무사히 당도하는 게 급선무야. 모든 건 그다음일세.”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긴 했지만 일단 밤이 되면 거의 움직일 수 없었기에 어떻게든 그 전에 최대한 많이 이동해야 했다.
슬슬 일어나라고 최석호를 재촉하려고 하던 참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쉬고 있던 조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
“마님, 더 늦기 전에 움직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산에는 밤이 일찍 찾아온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조 집사는 의금부 포졸들이 언제 쫓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감까지 더해 상당히 초조한 기색이었다.
“알고 있네.”
황죽표는 엉덩이에 묻은 흙먼지를 탈탈 털고 최석호에게 말했다.
“자넨 언제까지 쉬고 있을 참인가? 얼른 일어나게!”
“끄응. 예. 알겠습니다, 진사 어른.”
한창 도망칠 때는 몰랐는데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려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괜히 더 우는 소리를 했다간 황죽표가 자기를 버리고 먼저 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든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빨리빨리 움직이게. 제물포까지 가려면 하루를 꼬박 새워도 모자라.”
“예.”
냉정하게 딱 잘라 말한 황죽표는 쌀쌀맞기까지 한 몸짓으로 등을 홱 돌리곤 조 집사를 길잡이로 내세워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떻게 됐나?”
옥좌에 앉은 도현의 물음에 의금부 도사 고용태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힘없이 대답했다.
“아직 소식이 없사옵니다.”
그러자 미간을 찌푸린 도현은 버럭 호통을 쳤다.
“황죽표와 최석호는 이번 역모 사건의 핵심 인물인데 그 자들을 놓치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면목이 없습니다.”
고용태도 큰 실책을 저질렀다는 걸 알기에 머리를 들지 못했다.
분위기가 급격하게 얼어붙자 옆에 있던 병조판서 임경업이 나서 화가 난 도현의 심기를 달랬다.
“의금부와 포도청에서 한양 일대를 샅샅이 뒤지고 있으니 곧 잡힐 것이옵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그래야지. 짐을 죽이려고 조총까지 쏜 놈들이야. 이대로 놓치면 자칫 골칫덩이가 될 수도 있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추포해야 돼.”
도현이 다짐을 받듯 말하자 고용태는 물론이고 함께 있던 이완 단장과 포도대장인 구인후까지 모두 머리를 숙였다.
“예.”
“다른 죄인들은 차질 없이 다 잡아 가뒀겠지?”
“네. 한양은 끝났고 내일부터는 지방에 병사를 보내 역모에 가담한 자들을 추포해 올 계획이옵니다.”
“이런 일은 길게 끌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세 기관이 긴밀하게 협조해서 최대한 빠르고 확실하게 마무리를 짓도록 해.”
“명심하겠사옵니다.”
“병부 쪽은 어떤가?”
도현의 물음에 병조참판 임경업은 앞선 고용태와 달리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초기에 한양을 봉쇄해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막은 것도 있지만 사태가 오래 지속되지 않았기에 병부의 동요는 없사옵니다. 그리고 몇몇 이익치의 주장에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인 장수와 군관 들은 지휘권을 박탈하고 별도의 장소에 구금 중입니다.”
물론 수장인 임경업이 중심을 굳건하게 잡아 준 영향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병부가 도현의 유고有故라는 비상 상황에도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켰다는 것에 그는 크게 만족했다.
“역시 병판이 있어서 참으로 든든하오.”
“과찬이시옵니다.”
“아니오. 병부가 제대로 통제되지 않았다면 이렇게 꾀를 내서 함정을 파지 못했을 거고 그러면 역도들을 찾아내는 것이 더 어려웠을 거요.”
노련한 장수이자 정치가인 임경업은 칭찬에 기분이 좋았지만 일부러 내색하지 않고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이번 기회에 병부 내부의 잠재적인 불온 세력을 깔끔하게 청소해 버리시오.”
“전부 다 말씀이시옵니까?”
숙군肅軍 명령에 깜짝 놀란 임경업은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무기를 손에 쥔 군대는 강력한 왕권을 뒷받침하는 힘이자 자칫 잘못하면 스스로 다칠 수도 있는 위험을 가진 양날의 검이었다.
현재 조선 안에서 가장 개혁이 많이 이루어진 곳이 병부였지만 여전히 지휘부에 송시열의 산당과 뜻을 같이하는 인물들이 많았다.
그래서 도현이 군부를 보다 확실히 틀어쥐기 위해서는 숙군이 필요하다는 걸 임경업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시기가 이렇게 갑자기 올 줄은 몰랐다.
“그렇소.”
“필요성은 신도 알고 있습니다만 너무 서두르시는 건 아닌지…….”
임경업이 에둘러서 반대를 표시했지만 도현의 결심은 확고했다.
“아니, 나중에 또다시 칼을 대는 것보다 산당을 정리하면서 함께 손을 보는 게 명분도 있고 피해와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 이번에는 단순히 불온 세력만 쳐 내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지 너무 오래돼서 낡고 현실에 맞지 않은 조정 체계를 근본부터 뜯어고치는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할 생각이오.”
“……!”
연이은 폭탄 발언에 모여 있던 신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