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자경장 1 (61/104)

무자경장 1

대대적인 검거 열풍이 한바탕 한양을 휩쓸고 지나간 뒤 역모 사건 처리는 이제부터라고 할 수 있었지만, 도현은 민심 안정과 괜한 혼란을 막기 위해 곳곳에 방을 붙여 그의 건재를 알리고 그동안 닫혀 있던 사대문을 열어 백성들이 지나다니게 했다.

물론 아직 체포되지 않은 잔당이 한양을 몰래 빠져나가는 걸 막기 위해 평상시보다 많은 병사들을 배치해 검문검색을 철저히 했다.

이 때문에 상당히 불편하기는 했지만 지난 며칠간 성 밖에 볼일이 있어도 꼼짝달싹 못하고 갇혀 있어야 했던 것보다 백번 나았다.

무엇보다 백성들은 진정으로 그들을 아끼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든든하게 울타리가 되어 주는 국왕인 도현이 죽지 않고 무사하다는 것에 기뻐하며 천지신명께 감사를 드렸다.

“그러니까 주상 전하께서 무사하시다, 이거지?”

“그래. 여기 그렇게 다 적혀 있지 않나.”

친우의 말에 낡은 옷을 입고 등에 지개를 진 사내는 두 손을 모으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럴 줄 알았어. 암, 주상께서 어떤 분이신데 그리 허무하게 돌아가실 리가 없지.”

“그날 총탄에 맞고 쓰러지시는 걸 보고 어찌나 놀랐는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구먼.”

“그 이야기는 하지도 마.”

대대로 양반집 노비였던 사내는 하루하루 희망이 없고 무의미한 삶에서 벗어나 새 삶을 살게 해 준 도현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일도 쉬고 개선식 행사를 보러 갔다가 저격 사건이 발생하자 하늘이 무너지는 감정을 느꼈었다.

그 때문인지 친우가 그날 이야기를 꺼내자 정색을 하며 싫어했다.

“알겠네. 아무튼 주상께서 다시 일어나셨으니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일은 없겠지?”

“그렇지.”

사내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처럼 일부 도현의 너무나도 파격적인 정책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대부들을 제외하고 대다수를 차지하는 일반 백성들은 그의 건재함을 기뻐하며 민심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이런 가운데 지방에 내려갔던 체포조가 역모 가담자들을 속속 잡아서 올라왔고 의금부 마당에서는 영의정 박황의 주관 아래 국문이 열렸다.

“죄인을 데려와라!”

“옛.”

머리를 숙이며 대답한 병사 두 명은 이내 며칠 사이 눈에 띄게 초췌해진 이익치를 끌고 국문장으로 데려왔다.

국문장에는 의금부 소속 군관과 병사 들이 좌우로 길게 늘어서서 위압감을 줬고 심문을 맡은 박황과 신료들이 대청마루 위에 놓인 의자에 근엄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죄인은 고개를 들어라!”

“…….”

“이놈이.”

박황의 말에 이익치가 반응을 하지 않자 옆에 있던 병사가 육모방망이를 턱밑에 집어넣어서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

옥사에 갇혀 있으면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는지 이익치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머리에 쓰고 있던 망건은 찢어져서 머리카락이 봉두난발蓬頭亂髮로 흐트러져 있었고 입가에는 부스럼딱지가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옷도 흙과 피가 묻어 지저분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 함께 대전에서 국사를 논하던 신료가 이런 모습으로 있는 걸 보니 박황 등은 짠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엄중하게 법 집행을 하는 데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시켜서는 안 됐고 무엇보다 이익치가 받고 있는 혐의가 역모였기에, 조금 들려고 했던 측은지심을 바로 버리고 엄한 목소리로 입을 얼었다.

“죄인은 황죽표 일당과 모의해서 무엄하게도 주상 전하를 시해하고 인평대군을 보위에 올리려고 한 사실을 인정하나?”

그러자 이익치는 고개를 저으면서 약간 쉰 목소리로 혐의를 부인했다.

“황죽표와 교류가 있기는 했지만 그건 단순히 같은 동향으로서 친분을 가지고 있던 것일 뿐 절대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어허. 이미 많은 증거가 드러났는데도 아니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인가!”

“오해입니다.”

목숨이 걸려 있는 만큼 이익치가 계속해서 아니라고 우기자 눈썹을 찡그린 박황은 한쪽에 서 있는 군관을 보며 말했다.

“다른 죄인을 데려오게.”

“예.”

지시를 받은 군관이 눈짓을 하자 냉큼 옥사 쪽으로 달려간 병사들은 이내 또 다른 죄인을 데려와 이익치 옆에 무릎을 꿇렸다.

“네놈의 이름이 무엇이냐?”

죄인이 머뭇거리자 군관이 큰 목소리로 야단을 쳤다.

“영상 대감께서 물으시는데 어서 대답하지 못할까!”

“화, 황갑열이옵니다.”

“인평대군 마마의 집사가 맞나?”

“그렇습니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한 점의 거짓도 없이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해야 될 것이네. 알겠는가?”

“……네.”

계속된 고문에 지쳤는지 아니면 살아날 가망이 보이지 않자, 모든 걸 포기한 것인지 황 집사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대는 옆에 있는 자를 본 적이 있는가?”

슬쩍 옆으로 들어 본 황 집사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전에 황 진사라는 분과 대군 마마를 찾아오신 적이 있습니다.”

황 집사가 나타나자 불안한 표정을 짓던 이익치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함을 지르며 그의 진술을 부인했다.

“거짓말입니다. 이놈!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러느냐!”

황 집사를 노려보며 금방이라도 덤벼들 듯이 이익치가 소란을 피우자 옆에 시립해 있던 병사들이 나서 그를 제압했다.

“가만히 있지 못해.”

퍽! 퍽!

“컥.”

인정사정없는 몽둥이찜질에 이익치는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구타는 박황이 멈추라는 말을 할 때까지 계속됐다.

“그만. 다시 한 번 신성한 국문장에서 소란을 피울 시에는 지금보다 더한 고초를 겪게 될 것이니 명심하도록 해라.”

“으으윽…….”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자가 인평대군을 찾아간 것은 그때 한 번뿐이냐?”

바로 눈앞에서 이익치가 무지막지한 구타를 당하는 걸 목격한 황 집사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얼른 질문에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사저를 찾아왔습니다.”

“뭣 때문에 찾아온 건지 아는가?”

“처음에는 단순히 친분을 다지기 위한 방문이었습니다만…….”

“그럼 뒤에는 아니었다는 건가?”

다그치듯 박황이 묻자 잠시 망설이던 황 집사는 이내 결심을 굳혔는지 알고 있는 사실을 실토했다.

“예.”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 보게.”

“주상 전하께서 승하하시면 두 분이 삼남 지방 사대부와 유지들의 여론을 모아 저희 대군 마마를 후계자로 추대하겠다는 거였습니다.”

“그 말을 한 시기가 저격 사건이 벌어진 이후인가 아니면 그 전인가?”

박황이 엄히 따져 묻자 황 집사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입니다.”

“허어.”

“어찌 그런 짓을…….”

역모에 가담했다는 걸 확실히 입증하는 발언에 박황은 탄식을 내뱉었고 국문장에 있던 신료와 병사 들도 크게 술렁이며 이익치를 비난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국문장이 시끄러워지자 박황이 앉아 있던 의자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탕!

“조용히 하게.”

“흠흠.”

소란이 가라앉자 박황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이익치를 내려다보면서 죄를 추궁했다.

“죄인은 이래도 죄가 없다고 우길 건가!”

“그, 그게…….”

그래도 미련이 남는지 이익치가 인정을 하지 않고 어름거리자 박황은 눈썹을 추켜올리며 크게 호통을 쳤다.

“이미 네놈이 한 짓이 만천하에 다 드러났는데 아직도 반성을 하지 못하고 끝까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하느냐!”

그러자 이익치는 모든 걸 체념한 듯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이렇게 증인까지 나온 마당에 더 이상 아니라고 버텨 봤자 고통만 당할 뿐, 죄를 벗을 방도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성문 앞에 목이 잘려 효수될 때까지 몸이라도 편히 있고 싶었다.

“왜 대답이 없느냐!”

“모, 모두 사실입니다.”

박황은 목소리를 살짝 누그러뜨리며 확인하듯 물었다.

“허면 네놈에게 씌워진 모든 죄가 사실임을 인정한다는 것이냐?”

“……예.”

원하는 대답이 나오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박황은 한쪽에 작은 서탁을 놔두고 심문 과정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기록하고 있던 사관에게 시선을 줬다.

“증언을 다 기록했는가?”

“네.”

“좋아. 죄인들을 다시 옥에 가두고 사관은 오늘 기록한 내용을 주상 전하께 올릴 수 있도록 정리를 해 주게.”

“알겠습니다.”

그렇게 심문이 모두 끝나자 병사들이 이익치와 황 집사를 다시 옥사로 끌고 갔다.

양쪽 팔을 붙잡힌 채 옥사로 힘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두 죄인의 뒷모습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얼마 뒤 박황은 다른 심문관들과 함께 사관이 정리해서 건넨 문초 기록을 가지고 도현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대궐로 들어갔다.

이처럼 심문이 진행되자 속속 드러나는 증거와 증인에 잡혀온 죄인들은 처음에는 완강히 버티다가 하나둘 무릎을 꿇고 죄를 실토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던 가담자들이 추가로 밝혀지면서 역모로 의금부에 잡힌 죄인의 숫자가 더 늘어났다.

지금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그냥 놔뒀던 불온 세력을 완전히 뿌리째 뽑아 버리려고 작정한 도현의 특별 지시에 비교적 가담 정도가 낮은 이들에게도 용서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상당수의 산당 인사들이 여기에 포함됐는데, 특히 주동자들의 고향이자 지지 기반인 남원 일대의 사대부들은 거의가 연루되어 조사를 받고 대부분이 죄가 확인돼서 곧바로 의금부 옥사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그 숫자가 얼마나 많았으면 예로부터 농토가 비옥하고 인구 또한 많아 이름 높은 학자들이 무수히 배출된 삼남 지방에서, 한동안 양반 구경을 하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아예 씨가 말라 버렸다.

노비해방을 비롯한 여러 가지 정책으로 그동안 도현이 개선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높다란 장벽처럼 남아 있던 신분제는, 이번 역모로 지금까지 조선 사회를 주도해 오던 사대부 계층, 그중에서도 골수 정통파들이 치명타를 입으면서 그 기반부터 송두리째 흔들리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이런 사대부의 몰락은 나중에 도현이 추진하는 대대적인 개혁을 성공으로 이끄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좋은 결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이익치는 모든 죄를 시인하고 의금부 옥사에 갇혀 있지만 사실상 이번 역모 사건의 주동자라고 할 수 있는 황죽표와 그 측근들의 행방이 묘연했다.

그들을 잡기 위해 의금부뿐만 아니라 포도청과 주작단까지 나서 추적했지만 몇 번이나 아슬아슬하게 검거망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무자년 봄은 싱그러움을 제대로 즐길 사이도 없이 금방 지나가 버렸다.

역모 사건으로 시끄러운 바깥과 달리 창덕궁의 숨겨진 보물인 후원은 마치 딴 세상이라도 되는 양 여름의 활기를 담아 아름답게 변해 있었다.

아름드리나무들은 가지마다 푸른 잎사귀를 무수히 틔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줬고 그 사이에 난 꽃들 위로 화려한 문양의 나비가 날갯짓을 하며 돌아다녔다.

명이나 일본의 정원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운치가 있고 정갈한 멋이 있는 후원 한쪽에는 인공 연못인 부용지에 반쯤 걸치고 들어서 있는 부용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었다.

부용정에 앉아 활짝 열어 놓은 문밖에 위치한 연못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현은 고개를 바로 하며 입을 열었다.

“명나라로 도망갔다, 이 말이지.”

그러자 어두운 얼굴로 앞에 앉아 있던 의금부 도사 고용태가 침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제물포에 있는 은신처를 덮쳤을 때는 이미 몰래 배를 얻어 타고 포구를 떠난 후였습니다.”

“으음.”

미간을 찌푸리며 도현이 낮게 침음성을 내뱉자 고용태는 이마를 바닥에 찧으면서 죄를 청했다.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저의 잘못이옵니다. 벌하여 주시옵소서.”

핵심 주모자를 놓친 것에 아쉬움이 크지만 이번 역모 사건 처리에서 많은 공을 세운 고용태였기에 도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추포했다면 좋았을 테지만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될 것이야.”

심하면 멀리 귀양을 가거나 아무리 못해도 강한 질책을 받게 될 거라 각오하고 있던 고용태는 의외로 도현이 그냥 넘어가자 내심 안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마음속 깊이 새겨 놓겠사옵니다.”

“그래.”

시선을 옆으로 돌린 도현은 아까부터 표정이 잔뜩 굳어 있는 영의정 박황을 쳐다봤다.

“국문은 다 끝났나?”

“그렇사옵니다. 이게 죄가 확인된 이들의 명단이옵니다.”

말을 하며 제법 두툼한 서책이 놓인 쟁반을 박황이 앞에 내놓자 시립해 있던 칠현이 두 손으로 공손히 그걸 받아 도현에게 가져다줬다.

“어디.”

책장을 한 장씩 넘겨 가며 명단을 살피는 도현을 보며 박황이 설명을 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관련자들이 모두 사백 명이 넘사옵고 대부분 산당에 속한 인사이거나 삼남 지방의 유지와 유생 들이옵니다.”

“꽤 많군.”

“역모에 직접 가담을 했기보다는 송구스럽게도 인평대군 마마를 다음 보위에 올리자는 상소문을 쓰는 데 찬성한 이들이 태반이옵니다.”

명단에 오른 자들을 변호하는 듯한 박황의 이야기에 도현은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이들을 용서해 주기라도 하자는 말이오?”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저질렀사옵니다만 숫자가 너무 많고 비교적 가담 정도가 적으니 아량을 베푸시는 것이…….”

눈치를 보면서 박황이 말끝을 흐리자 도현은 정색을 하고 호통을 쳤다.

“어림도 없는 소리! 비록 주동자가 아니라고 하나 역모에 가담한 건 사실이고, 아직 짐이 멀쩡히 살아 있는데 감히 후계자 운운하며 멋대로 인평대군을 세우려고 한 것은 왕실과 국가의 기강을 흐트러뜨리는 명백한 반역 행위요. 그런데도 역모 사건을 조사해 진상을 밝히는 막중한 책임을 맡은 영상이 그딴 소리를 하는 것이오!”

예상보다 더 격한 반응에 찔끔한 박황은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제 생각에 짧았사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관련자들은 법에 따라 엄히 처벌할 것이니 다들 그렇게 아시오.”

“예.”

법대로 한다면 역모는 일반적으로 모두 사형이었다.

그나마 약한 것이 귀양이었으며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인척까지 연좌제가 적용됐다.

한마디로 집안이 풍비박산 난다는 뜻이었는데 머리를 숙이며 대답하는 신료들은 코끝에 진한 피비린내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조금 과한 처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도현이 풍기는 살벌한 기세에 신료들은 감히 반대 의견을 낼 수 없었다.

이 자리가 가장 불편한 사람은 바로 우의정인 송시열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같은 당파인 이익치가 역모의 주모자 중 하나인 데다 의금부에 잡혀 들어간 사대부 상당수가 산당에 속하거나 지지하는 이들이었으니,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였다.

그 때문인지 시종일관 얼굴이 어둡던 송시열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드릴 이야기가 있사옵니다.”

“말해 보시오.”

“이익치를 비롯해 같은 당파에 속한 많은 이들이 이번 역모 사건에 연루된 상황에서 계속 우의정직을 맡고 있는 건 여러모로 안 좋다는 판단에, 이만 사임을 하려고 하옵니다.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꼭 그래야 되겠소?”

“제가 무슨 염치로 계속 조정에 남아 있겠사옵니까.”

“허어. 이것 참.”

혀를 차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인 도현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경의 뜻이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알겠소.”

“……감사하옵니다.”

싫다는데도 억지로 자리에 앉혀 놓던 예전과 달리 아쉬워하는 것처럼 하면서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사직을 받아들이는 도현의 모습에 송시열은 내심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즉위 초기 부족한 정통성을 확보하고 불안정한 권력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대부들 사이에 명망이 높은 송시열의 존재가 꼭 필요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송시열과 산당이 없어도 충분히 혼자서 조정을 이끌어 갈 수 있을 만큼 도현의 역량이 갖춰졌고, 무엇보다 백성들의 확고한 지지와 충성스러운 군대가 양 축이 되어 그를 든든하게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오히려 이념이 다른 송시열과 산당은, 그가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개혁을 추진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딱히 큰 실책이 없고 송시열이 딱딱한 유교 이념과 굴욕적인 사대주의에서 조금은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 줬기에 그냥 놔뒀는데, 이번 역모 사건은 그들을 정리할 명분을 줬다.

그나마 남아 있던 송시열마저 우의정직에서 물러난다면 산당은 중앙 정치판에서 완전히 밀려나는 거였다.

이제는 소수의 온건파와 왕당파만이 조정에 남게 됐고 이로써 도현은 더욱 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됐다.

그렇게 송시열의 사직을 받아들인 도현은 정자 안에 앉아 있는 신료들을 천천히 스윽 훑어보고는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미 두 번이나 반란이 있었는데 또다시 나라가 어찌 되건 상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충을 버리는 일이 벌어지다니 정말 실망이오.”

역모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하지만 국정을 책임진 대신으로서 국왕인 도현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죄가 있었기에 다들 송구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소신들이 부족한 탓이옵니다.”

“밖에서 늑대 같은 청나라가 호시탐탐 아국을 노리는 이때에 모두가 일치단결해서 국난을 헤쳐 나가도 부족한데, 백성들에게 본보기가 되어 줘야 될 사대부들이 역모를 꾸미고 짐을 시해하려고 하다니, 이래서 되겠소.”

한바탕 질책을 쏟아 낸 도현의 입에서 폭탄 발언이 나왔다.

“고인 물이 썩는다고 이 모든 것이 태조대왕 이후로 지금까지 딱딱하게 경직되어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조정과 사회제도에 그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판단에 새롭게 모든 걸 일신하려고 하오.”

“……!”

도현의 말에 좌중은 순간 정확히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서로 멍하니 얼굴만 쳐다봤다.

그러다 이내 뜻을 깨닫고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뭘 얼마나 바꾸시겠다는 것이옵니까?”

애써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송시열이 조심스럽게 묻자 도현은 담담한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말 그대로 모든 걸 다 바꿀 생각이오. 예를 들면 그동안 능력이 있더라도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당상관 이상의 관직에 오를 수 없었던 불합리한 차별을 없애고 효율적이지 못한 통치 체계도 뜯어고칠 것이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이야기에 송시열은 말문이 막혔고 좌중에 모인 신료들도 크게 술렁거렸다.

왕당파에 속하는 신료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영의정인 박황도 미리 귀띔을 받은 것이 전혀 없었는지 눈을 크게 뜨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사직을 한 상태라 더 이상 국정에 관여할 수 없는 처지였지만 너무나도 중차대한 일이었기에 송시열이 다시 나섰다.

“이번 역모로 참담한 전하의 심정은 백번 이해하옵니다만 그렇다고 이러시는 건 아닌 것 같사옵니다. 자칫 안에 묻은 작은 얼룩을 없애려고 하시다가 장독을 다 깨 버리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닌지 염려되옵니다.”

그러자 박황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신도 조금 더 신중하게 결정을 내리시는 게 좋을 것 같사옵니다.”

미간을 찌푸린 도현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뭘 더 생각하란 말이오. 경들도 의금부 옥사에 갇혀 있는 역도들처럼 기득권을 놓치기 싫은 것이오!”

이익치 일당을 거론하자 박황을 비롯한 신료들은 괜히 엮여 들어갈까 봐 정색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 것이 아니옵고…….”

“그게 아니라면 반대할 이유가 하나도 없지 않소! 우상이 장독 이야기를 했는데 문제가 있는 걸 알고도 그냥 놔뒀다가 그게 전체로 번져 애써 담근 장을 아예 먹지 못하게 만든다면 차라리 그런 건 일찌감치 다 깨 버리는 것이 나을 거요.”

상당히 과격한 언사에 신료들은 제대로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구체적인 계획은 다음 조회 때 발표하고 곧장 실행할 것이니 다들 그렇게 아시오.”

일방적으로 선언을 해 버린 도현은 더 이상의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그대로 부용정을 나가 버렸다.

그러자 뒤에 남겨진 신료들은 당파를 가리지 않고 다들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허어. 이것 참. 영상께서는 전하의 계획을 알고 계셨소이까?”

송시열이 가볍게 탄식을 내뱉으면서 쳐다보자 박황은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방금 말씀하실 때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소.”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마치 명색이 왕당파의 수장이면서 그런 것도 몰랐냐는 송시열의 시선에 박황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맛살을 찡그렸다.

“끄으응.”

갑작스러운 폭탄선언이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이렇게 큰일을 계획하고 있으면서 미리 아무런 언질도 없었다는 것에 박황은 서운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걸 또 송시열이 콕 찍어서 말하자 그런 생각이 더 커졌다.

“그나저나 도대체 어쩌려고 이러시는지 모르겠소이다.”

“즉흥적인 것처럼 보여도 사전에 철저히 앞뒤를 따져 보고 움직이시는 분이니 뭔가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그래도 이건…….”

서운한 감정은 있었지만 그래도 박황이 애써 도현을 두둔하는 가운데 송시열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남아 있는 신료들끼리 이야기를 나눴지만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헤어졌다.

이래저래 마음이 심란하여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던 박황은 김종일이 와서 부르자 그제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별다른 말없이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여 부용정을 나서는데, 박황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총총걸음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영상 대감.”

부르는 소리에 돌아본 박황은 익히 아는 사람임을 깨닫고 알은체를 했다.

“아, 자네는…….”

박황을 향해 칠현이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서로 사적인 친분은 없으나 항상 도현의 곁을 지키고 있는 칠현의 얼굴을, 명색이 영의정인 박황이 모를 리가 없었다.

“여긴 어인 일인가?”

하나 따로 말을 걸 만한 이유가 없었기에 박황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칠현은 살짝 목소리를 낮추어 답했다.

“주상 전하께서 영상 대감을 불러오라 하셨습니다.”

“나를?”

“예.”

방금 부용정에서 다른 신료들과 함께 도현을 알현한 참이다.

한데 찻물이 채 식기도 전에 또 할 말이 있다고 부름을 받으니 약간 아리송한 기분이었다.

어쨌든 신하된 몸으로서 보고자 하는 청을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

그때 함께 있던 우의정 김종일이 먼저 알아서 자리를 피해 줬다.

“전하께서 찾으신다니 가 보셔야지요. 전 먼저 퇴청하겠습니다.”

“그러겠나? 나중에 다시 보세.”

“예.”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김종일이 걸음을 옮기자 박황은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칠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됐네. 어디로 가면 되는가?”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칠현이 이끄는 대로 뒤를 따르던 박황은 곧 이 길이 희정당으로 향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렇게 화를 내면서 부용정을 박차고 나가더니, 곧장 이쪽으로 돌아와 앉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주상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칠현은 굳게 닫힌 장지문 앞에 서서 슬쩍 몸을 옆으로 비켜 주며 박황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을 시간을 주었다.

“크흠.”

박황이 한차례 헛기침을 내뱉고 자세를 바로 하자 칠현이 문 안쪽을 향해 고했다.

“전하, 영상 대감께서 오셨사옵니다.”

“들라 하라.”

안에서 도현의 허락이 떨어지자 양쪽에 선 궁녀들이 장지문을 소리 없이 열었다.

“신 박황, 부름을 받고 왔사옵니다.”

“어서 오시게.”

도현은 친근한 웃음을 띠고 박황을 맞이했다.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난다 싶었더니, 도현의 앞에 작은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

혼자 자작하고 있었던 것 치고는 술잔이 비어 있는 게 신경 쓰여 절로 흘낏거리며 눈치를 보았더니 도현이 앉으라며 손짓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 앉으시오.”

“황송하옵니다.”

무릎걸음으로 주안상 맞은편에 앉은 박황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물었다.

“전하, 어인 일로 저를 부르셨나이까?”

그러자 도현은 말없이 빈 잔을 들어 손수 술을 따랐다.

“사실은 아까 부용정에서 있었던 일 말인데…….”

“네, 전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영상에게는 미리 말을 해 놨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심히 유감스럽구려.”

“아닙니다, 전하.”

박황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국왕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신하라니, 가당치도 않는 소리였다.

“영상이 겉으로 말은 안 했어도 속으로 많이 섭섭했을 걸 내 잘 알고 있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하하! 어쨌든 일단 내가 주는 술이나 받으시오.”

도현은 송구스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는 박황에게 손수 따른 술잔을 건넸다.

“하나 영상이 이해를 좀 해 주시오. 마지막까지 고심을 거듭하느라 미처 이야기를 해 주지 못했소.”

“그러하셨습니까.”

가슴에 얹힌 작은 바위같이 답답했던 심정이 한순간에 사르르 녹는 것을 느끼며 박황은 도현이 준 술을 살짝 한 모금 마셨다.

“하온데, 주상 전하…….”

“음. 할 말이 있으면 해 보시오.”

앞에 앉아 있는 도현의 눈치를 보며 박황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조정의 분위기를 일신시켜야 된다는 전하의 뜻은 저도 충분히 알고 납득하고 있긴 하오나, 너무 급격한 변화는 자칫 큰 혼란을 불러오지 않을까 싶어 염려되옵니다.”

“흠…….”

도현은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우고 입술을 축였다.

“아까 부용정에서 그렇게 설명을 했는데도 영상마저 내 뜻을 헤아려 주지 못한다니 참 서운하구려.”

“송구스럽나이다.”

웃음기를 띤 얼굴에서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바뀐 도현은 또박또박 낭랑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나도 영상이 염려하는 일을 고려해 보지 않은 게 아니오. 허나 기둥뿌리부터 썩어 있는 이 상황에서 마루며 천장을 고쳐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소. 헛된 노력으로 시간을 허비할 바에야 차라리 모든 걸 허물어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도현은 열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박황을 보았다.

“앞으로 조선이 더 큰 나라로 발돋움하기 위해선 다소 무리가 따르더라도 꼭 해내야만 하는 일이오.”

“전하.”

“나는 뛰어난 학자이자 조정 안팎으로 인망이 두터운 영상이 이 일에 꼭 도움을 주셨으면 좋겠소.”

임금인 도현이 이렇게까지 간곡히 얘기를 하니, 처음엔 썩 내키지 않던 박황도 마음이 흔들렸다.

잠시 고심하던 그는 결국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하의 뜻을 따르겠사옵니다.”

그러자 도현이 금세 안색을 밝히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영정이 그리 말해 주니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하구려.”

그렇게 박황을 비롯해 왕당파의 주축을 이루는 신료들을 한 명씩 불러 설득하고 이해를 시킨 도현은, 그동안 꾸준히 교육(?)을 시켜 세상을 넓게 보도록 해 준 덕분에 유교 사상만 집착하지 않고, 보다 실용적인 걸 추구하게 된 젊은 신하들을 중심으로 별도의 임시 기구를 만들었다.

여기서 그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개혁을 현실에 맞게 구체화시키는 작업을 했다.

뜻이 정확히 반영되게 하기 위해 도현이 직접 모든 걸 감독했고 의견 충돌이나 문제가 있으면 당하관堂下官에 불과한 젊은 신료들과 격론을 벌이는 것도 마다치 않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젊은 신료들은 개혁의 당위성과 필요를 알게 됐고, 도현은 아무래도 잘 모를 수밖에 없는 현장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상당히 어렵고 고된 작업이었지만, 앞으로 조선을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한 밑바탕을 만든다는 자부심과 사명감에 젊은 신료들은 잠을 아껴 가며 일했다.

그렇게 현실과 이상 사이의 차이를 좁히고 계획을 구체화시킨 도현은 처음 부용정에서 이야기를 꺼내고 정확히 보름 만에 완성안을 만들어 냈다.

“오늘 경들을 모두 모이라고 한 것은 드디어 개혁안이 완성됐기 때문이오.”

도현의 말에 좌중이 크게 술렁였다.

나라를 바르게 세운다는 뜻으로 국정감國正監을 설치하고 빠르게 일을 진행시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조만간 발표가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자 신료들은 여러 가지로 복잡한 심정이 됐다.

개혁이 어떻게 진행될 건지 알아내기 위해 신료들은 각자 나름대로 애를 썼지만, 그동안 국정감에 들어간 젊은 신료들을 퇴청도 시키지 않고 대궐에서 숙식을 해결하게 할 만큼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했기에 단편적인 것들만 알 뿐 구체적인 내용은 아무도 몰랐다.

그가 손짓을 하자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내관들이 나무로 만든 지지대를 설치하고 이내 어른 팔보다 조금 더 긴 족자를 가져와 거기에 걸었다.

칠현이 매듭을 풀고 족자를 펼치자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개혁안이 드러났다.

족자를 쳐다본 조정 대신들의 첫 반응은 웅성거림과 낮은 침음성이었다.

“으음.”

“저건…….”

처음 보인 건 새로운 행정기구 개편도였는데 기존 육조체제六曹體制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확연히 다른 구조였다.

“여기 보이는 것과 같이 이제부터 행정기구를 육조가 아닌 일곱 개의 부部로 나누고 지금까지 함께 운영되던 왕실과 국정을 완전히 분리할 것이오.”

가장 관심을 가지고 개편도를 살펴보던 호조판서 김육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전하, 저기에 보면 총리대신이라는 것만 있고 삼정승의 자리가 없는데, 어찌 된 것이옵니까?”

“좋은 지적이오. 앞으로 삼정승을 없애고 그 직무를 새로 만들어진 총리대신이 모두 맡아서 할 것이오.”

관료들의 우두머리인 삼정승 제도가 사라진다는 이야기에 좌중은 크게 술렁였지만, 의외로 직접 관련이 있는 영의정 박황과 우의정 김종일은 미리 논의를 하기라고 했는지 별다른 동요 없이 담담한 표정이었다.

“새로 바뀌는 각 부서의 업무를 하나하나 다 설명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나중에 따로 정리한 자료를 나눠 줄 테니 그걸 참고하시오. 그리고 행정체계가 변하는 만큼 인재를 등용하는 방법도 달라질 것이오.”

“과거제도를 폐지하신단 말씀이옵니까?”

“그렇소.”

설마 하며 물은 말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신료들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바뀐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마음에 확 와 닿지 않는 행정체계 개편과 달리 과거제도 폐지는 당장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해 불철주야 글공부를 하고 있는 자기 자식들과 집안사람들의 미래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가장 민감한 문제답게 당장 반대가 빗발쳤다.

“아니 되옵니다.”

“과거제도를 없애 버린다면 무엇으로 인재들을 뽑는단 말입니까?”

이럴 걸 예상하고 있던 도현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한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별도의 시험을 쳐서 직무에 필요한 능력을 가진 이를 선발하고 이를 위해 사관학교처럼 행정과 재무 그리고 외국어를 가르치는 별도의 학교를 설립해 운영할 것이오.”

“대부분의 유생들이 사서삼경만 외웠지 다른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 말씀하신 대로 한다면 필요한 인원을 다 선발하기 어려울 것이옵니다.”

“맞사옵니다. 재고하여 주시옵소서.”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신료들이 상체를 숙이며 과거제도 폐지를 반대하자 도현은 앞에 있는 서탁을 손바닥으로 세게 내려치면서 언성을 높였다.

탕!

“그러니까 안 된다는 것이오! 스스로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성현들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는 건 좋으나, 과거제도는 기본적으로 나랏일을 하는 데 필요한 인재를 뽑는 것인데, 업무와 무관한 걸로 선발을 한다는 것이 이치에 맞는 거요? 한 예로 예조에서 일할 건데 외국어는 하나도 못 하고 단순히 시나 글솜씨가 좋다고 등용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날카로운 지적에 신료들은 대답이 궁해졌다.

“하오나 옛 성현들의 주옥같은 말씀을 통해 인성을 바로 세운 자라면 훌륭한 관리가 될 자질이 있는 것이지 않사옵니까. 또 실무는 잡과雜科를 통해 선발한 하급 관리들만으로도 충분하고 대과로 등용된 이들은 잘 처리가 됐는지 감독만 하면…….”

신료 한 명이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이야기에 도현은 눈썹을 위로 치켜 올리고는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오!”

“……예.”

말끝을 흐리며 대답하는 신료를 보며 도현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업무에 대해서 뭘 알고 있어야 관리 감독을 제대로 할 것이 아니오. 그저 사서삼경만 외울 줄 알고 맡은 일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실무자들이 농간을 부려도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가는 거 아니겠소.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그저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자는 조정에 필요가 없소.”

과거제도의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지적한 도현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선언하듯 이야기를 이었다.

“이제부터는 업무에 필요한 실력을 갖춘 자라면 서출이나 중인, 평민이라도 그 출신 신분을 가리지 않고 등용해서 나라를 위해 일할 기회를 줄 것이오!”

“당상관직도 허락하신단 말씀이십니까?”

“맞소. 당상관뿐만 아니라 능력이 된다면 정승, 판서도 할 수 있을 것이오.”

“……!”

다들 뒤통수를 한 대씩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종종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이들이 신분의 한계를 넘어 높은 자리에 중용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말 그대로 아주 특별한 경우였고 대부분은 말단 말직에 머물렀다.

도현의 말은 이걸 송두리째 뒤집어 버리겠다는 뜻이었고 그렇게 된다면 사대부들은 더 이상 높은 관직을 독점하며 우월한 위치에 있을 수가 없었다.

경우에 따라 지금껏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던 신분의 인물을 상관으로 모셔야 될지도 몰랐고, 이건 노비해방을 훨씬 뛰어넘는 파괴력으로 신분제도를 근본부터 뒤흔드는 일이었다.

“그런 미천한 무리에게 어찌 중요한 국사를 맡기신단 말씀이십니까?”

“아니 될 일이옵니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신료들이 반대를 했지만 도현의 의지는 확고했다.

“일을 제대로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자리를 준다는 건데 뭐가 문제란 말이오! 혹여 이들과 경쟁을 해서 이길 자신이 없는 것이오?”

“그건 아니옵니다만…….”

“그럼 됐지 않소. 과거제도를 폐지해도 그에 걸맞은 능력을 갖춘다면 얼마든지 등용될 테니까 말이오.”

“끄으응.”

교묘한 언변에 말린 신료들은 여기서 아니라고 하면 스스로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었기에 얼굴을 구긴 채 그저 앓는 소리만 냈다.

그 뒤로도 여러 가지 개혁 내용이 이야기됐지만 과거제도 폐지에 혼이 나가 버린 신료들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후대에 무자경장戊子更張이라고 불리는 개혁 작업은 이렇게 시작됐는데, 건국 이후 큰 변화 없이 계속 이어 온 행정 체계가 효율적으로 바뀌었고 과거제도 폐지는 신료들이 우려하는 대로 기존 기득권 세력인 사대부의 몰락을 가져왔다.

반대로 그동안 주류에서 소외됐던 계층이 크게 성장했다.

그중에서 실제로 실무를 보고 있지만, 출세에 제한이 있었던 중인과 양반가의 사생아로 풍족하게 살고 배울 수는 있어도 출사는커녕 제대로 된 사회생활도 하기 어려웠던 서출들이 대거 관직에 진출하며 조선의 새로운 활력소가 됐다.

대전에서 구체적인 개혁안을 밝힌 도현은 신료와 사대부 들이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곧장 조직 개편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신분제도에 막혀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인재들을 대거 발굴해 승차시켰다.

이미 주작단과 감사원을 통해 숨은 인재들을 다 파악하고 있었기에 인사 조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광화문의 육조거리에는 이름 그대로 수많은 관청들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평상시에도 관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관리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당상관 이상 고위 관리도 있었지만 대다수가 품계가 낮은 하급 관리들로, 실제로 이들이 조선을 움직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중인 신분인 도재성은 대대로 육의전에서 상업에 종사하던 집안의 둘째 아들로 관직에 뜻을 두고 별과시험을 치러 호조에 들어간 인물이었다.

어려서부터 상인인 아버지에게 산술을 배워 셈에 능했는데 이런 능력을 살려 호조에서도 회계 업무를 보고 있었다.

복잡하고 어려운 회계 업무도 척척 해내며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벌써 관에 몸담은 지 어언 십 년이 넘었지만 아직 종구품 회사會士에 머물렀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에 걸맞은 보상이 없자 뜨거웠던 열의는 점점 식어 갔고 관직 생활에 대한 회의를 가졌다.

거기다 얼마 전부터 늙으신 아버지 대신 가업을 이어받은 형님이 자신을 도와 달라고 하자 어찌해야 될지 망설이는 상태였다.

여느 때와 같이 밑에 거느리는 서리 두 명과 함께 한참 업무를 보고 있던 도재성에게 호조에 속한 사령使令이 찾아왔다.

“회사 어른.”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든 도재성은 앞에 서 있는 사내를 보고는 약간 놀란 얼굴로 두 눈을 깜빡였다.

“응? 자네는 호판대감을 모시는 사령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대감께서 회사 어른을 좀 보자고 하십니다.”

“날?”

“네.”

몇 번 업무 때문에 본 적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호조판서처럼 높으신 분이 자신 같은 말단 관리를 찾을 이유가 없었기에 도재성은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이유 때문에 부르시는지 아나?”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는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더 많았지만 하늘같은 상관이 보자는데 안 갈 수는 없었기에, 도재성은 검토하고 있던 서류를 덮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디에 계시나?”

“절 따라오십시오.”

도재성은 사령을 따라 호조 건물 안쪽에 위치한 호조판서의 집무실로 갔다.

“도 회사를 데려왔습니다.”

사령이 아뢰자 안에서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대답과 함께 사령이 슬쩍 옆으로 비켜서자 도재성은 옷차림을 바로 하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관복을 입고 근엄한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김육을 향해 도재성은 꾸벅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회사 도재성,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어서 오게. 이리로 앉지.”

“예.”

권하는 대로 한쪽에 있는 의자로 가서 앉자 이내 김육이 맞은편으로 왔다.

“이제 보니 낯이 익구먼. 전에 공조와 협력해서 제물포 제철소 건설 예산을 산출하는 일을 했었지?”

“네.”

“그때는 정말 잘해 줬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교수가 공석이라 자네가 힘들겠군.”

“예. 뭐…….”

도재성은 물음을 두루뭉술하게 받아 넘겼는데 종육품인 산학교수는 그의 직속상관으로 이번 역모 사건에 휘말려 금의위로 잡혀간 후 지금까지 후임이 정해지지 않고 비어 있었다.

산학교수뿐만 아니라 상당수 관리들이 역모와 관련되어 투옥되거나 파직을 당한 상태였는데, 이건 다른 관청도 사정이 비슷했다.

“갑자기 자네를 불러서 의아할 걸세.”

“…….”

침묵으로 도재성이 대답을 대신하자 김육은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이었다.

“이번에 대대적으로 행정기구가 개편된다는 건 알고 있겠지?”

“예.”

행정기구 개편에 관한 내용은 며칠 전 무려 넉 장이나 되는 관보로 제작돼 육조는 물론이고 지방까지 배포되어 모든 관리들이 읽고 숙지할 수 있도록 해서 도재성도 잘 알고 있었다.

기존 체계도 훌륭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만들어진 지 오래되다 보니까 현실에 맞지 않고 불편한 구석이 많았는데, 새로 개편된 안은 그런 걸 모두 없애고 상당히 효율적으로 정비됐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걸 보고 도재성은 국왕인 도현이 무재뿐만 아니라 행정가적 자질도 아주 뛰어난 걸 다시 깨달으며 내심 감탄을 했었다.

그건 그렇고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자신한테 왜 하는 건지 조재성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 호조도 거기에 맞춰 이름을 재무부로 바꾸고 조직 구성에 많은 변화가 있을 걸세.”

잠시 말을 끊고 앞에 있는 도재성을 물끄러미 바라본 김육은 깜짝 놀랄 소식을 전했다.

“현재 있는 회계사會計司를 회계국會計局으로 확대 개편하고 그걸 총감독하는 국장에 자네가 임명됐네.”

“예에?”

담담하게 이야기를 듣던 도재성은 뜻밖의 말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조정에서 소요되는 모든 자금의 수입과 지출을 관장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됐으니, 책임감을 가지고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해 주길 바라네.”

“회, 회계국장이라면 품계가 상당히 높지 않습니까?”

“맞네. 종오품으로 정해졌네.”

종오품이라면 기존에 회계사였을 때 부서 책임자였던 산학교수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거였고, 현재 그의 품계가 종구품이니 무려 열 단계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제가 어찌 그런 막중한 지위를 맡을 수 있겠습니까.”

좀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야 항상 가지고 있었지만 갑자기 고속승진을 하게 되니 도재성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너무 겸손하게 굴지 말게. 이게 다 주상 전하께서 자네의 능력을 익히 눈여겨보고 계셨단 뜻 아니겠나.”

“하나…….”

“어허. 좋은 소식을 들었으면 기뻐할 일이지 어찌 그러는가?”

쭈뼛대지 말고 당당하게 굴라는 듯 김육은 도재성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임명장을 받아야 하니 좀 있다 대궐에 함께 들어가세.”

“예.”

도재성은 아직 제대로 실감이 나지 않아 얼떨떨한 기분에 웃는 듯 마는 듯 어정쩡한 표정으로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이야기를 마친 후, 그는 내내 발이 하늘에 붕 뜬 듯한 기분으로 오전 업무를 처리했다.

동료들이 건네는 말도 듣는 둥 마는 둥 귓등으로 흘리기 일쑤고 평소엔 완벽 그 자체인 사람이 유독 사소한 실수를 반복하니, 아직 사정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무슨 근심이라도 있냐며 걱정을 해 주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어물쩍 받아넘긴 도재성은 오후 늦게 김육이 그를 부르자 바짝 긴장한 얼굴로 뒤를 따랐다.

“이 사람, 누가 보면 사약이라도 먹으러 가는 줄 알겠네.”

“죄, 죄송합니다.”

가벼운 농담에도 진지하게 사과하는 도재성을 보고 김육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기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발이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딱딱하게 굳은 몸을 억지로 움직이던 도재성은 대전 앞에 도착하자 경이감에 젖은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잡과를 치르고 호조에 처음 배정받았을 때, 우연히 대전 안으로 들어가는 고위 관리들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이제 막 사회에 발걸음을 뗀 청년에게 그때 본 대전의 문턱은 한없이 높고 두꺼운 것으로만 여겨졌었다.

그리고 언젠가 당당하게 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신분까지 올라가서, 위로는 주상 전하를 모시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살피는 청렴결백한 관리가 되겠다고 마음속으로 목표를 세운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남몰래 품었던 꿈은 현실적인 신분의 벽에 부딪쳐 나날이 바래졌다.

이제 적당히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헛된 생각이 머리에 맴돌던 와중에 찾아온 기적 같은 순간.

도재성은 이게 꿈인지 생신지 마치 도깨비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김육의 뒤를 따라 대전 문턱을 넘었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자 먼저 도착해 있던 몇몇 사람들이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저 사람들은…….”

“아마 자네처럼 이번에 승진해서 임명장을 받기 위해 불려 온 자들이겠지.”

김육의 말을 듣고 보니 다들 도재성과 비슷한 나이 또래의 사내들인 것이 눈에 띄었다.

그중에서도 몇 명은 개인적인 친분은 없지만 육조거리에서 오다가다 낯을 익힌 사람도 있었는데, 대부분 도재성과 비슷한 중인 출신이었다.

조용히 그들 뒤에 자리를 잡고 있자 잠시 후, 도현의 행차를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상 전하 납시오.”

내관이 또박또박 명확한 발음으로 고하는 것과 함께 장지문이 스르륵 열리고, 도재성을 비롯한 중인 관리들은 일제히 바닥에 몸을 숙이고 머리를 조아렸다.

숨 막힐 듯한 침묵이 가라앉은 가운데 사락사락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나더니 곧 청아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도현이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라.”

주상 전하의 용안을 보게 되다니, 다들 쉽사리 고개를 들 수가 없는지 서로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 이어졌다.

하나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도 주상의 명에 어긋나는 일이라 쭈뼛쭈뼛 조심스럽게 숙였던 몸을 일으키니, 인자한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는 도현의 미소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흠.”

도현은 대전에 모여 앉은 관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듯하더니 이내 옆에 선 칠현에게 임명장을 가져오라 눈짓으로 일렀다.

그러고 나서 임명장을 수여하는 짧은 의식이 진행되었는데, 이때쯤 되니 너무 긴장하고 무슨 실수를 저지르지나 않을지 불안한 마음이 극에 달한 도재성은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겨우 그 자리를 버텼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둘둘 만 두루마리 형태의 임명장이 손에 쥐여 있었고, 김육이 옆에서 그를 부르고 있었다.

“이보게, 괜찮나?”

“아, 예.”

허둥지둥 대답하자 김육은 진정하라는 듯 어깨를 툭 치고 돌아가자며 앞장섰다.

“이제 정식으로 임명장까지 받았으니 그렇게 붕 뜬 표정 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게나.”

“걱정을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하기야 놀라서 정신이 없는 것도 이해하네.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대전 밖으로 나오자 그제야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깊게 심호흡을 하고 한 손에 든 임명장을 매만지니 그때야 차츰 이게 현실이라는 실감이 몰려왔다.

“가는 방향이 다르니 여기서 헤어져야겠군. 내일 호조 아니, 이제부터 재무부였던가. 갑자기 부르는 이름이 바뀌니 좀처럼 입에 익지 않는단 말이야.”

김육은 머쓱한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어쨌든 내일 관청에서 보세나.”

“예. 들어가십시오.”

허리 숙여 김육을 배웅한 도재성은 이 일을 어떻게 부인에게 말해야 할지 즐거운 고민을 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오셨어요. 오늘은 꽤 늦으셨네요.”

“어, 볼일이 좀 있었어.”

도재성의 집은 안방 하나와 작은 방 두 개가 딸린 적당한 크기로, 가난하진 않지만 부유하지도 않은 딱 평균적인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겉옷을 벗는 걸 도와주던 부인은 지나가듯이 스치는 투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 아주버님이 왔다 가셨어요.”

“형님이?”

“예.”

그러곤 슬쩍 눈치를 살피는 식으로 그를 흘낏거렸다.

“뭐라 하셨는데?”

“항상 똑같은 말씀이죠, 뭐. 저번 설날 때도 봉록도 얼마 못 받는 관리 노릇 그만하고 장사하는 거 도우라고 닦달하셨잖아요.”

그의 아버지도 그랬지만 가게를 물려받은 형님도 제법 장사 수완이 있는 편이라서 일개 하급 관리에 불과한 도재성에 비하면 집안 형편이 꽤 넉넉했다.

형님으로서는 동생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겠지만, 그래도 관리로서의 꿈이 있는지라 줄곧 거절해 왔던 제의를 그의 부인은 이젠 받아들였으면 하는 눈치였다.

맏아들은 벌써 서당에 다닐 나이이고 뒤늦게 들어선 둘째 덕분에 슬슬 배가 불러 오는 형편이었으니, 아이를 둘이나 먹여 살릴 생각을 하면 슬슬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시기였던 것이다.

“됐어. 당신은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몸이나 잘 챙기도록 해.”

“그래도, 여보…….”

평소라면 남편의 기분을 거스를까 싶어 이쯤에서 물러났을 터다.

하지만 부인도 이젠 대답을 꼭 들어야겠다는 듯 순순히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자 도재성은 여유가 가득한 미소로 답했다.

“그만하고 내일 시간이 되면 방앗간에 좀 다녀와.”

“거긴 왜요?”

“같이 일하는 동료들한테 떡을 좀 돌려야 되겠어.”

관직을 그만두니 마니 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떡을 해 가야 되겠다고 하니 부인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걸 봐.”

얼떨결에 남편이 내미는 두루마리를 받아 들기는 했지만 이 시대의 여자들이 다 그렇듯 까막눈인 부인은 이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부인의 모습에 도재성은 어깨를 펴며 말했다.

“나 승진했어.”

“예에? 지금 뭐라고 했어요?”

믿기지 않는 듯 부인이 되묻자 도재성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했다.

“승진했다고.”

그렇게 애를 써도 어렵던 승진을 난데없이 했다고 하자 부인은 큰 눈을 깜빡이며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서 있었다.

“그것도 종오품 국장이 됐어.”

“높은 거예요?”

관리들의 품계에 대해서 잘 모르는 아내의 물음에 도재성은 목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그럼, 예전에 내가 상관으로 모시던 교수보다 한 단계 위야.”

“어머나.”

“오늘 대궐에 들어가서 주상 전하께 직접 임명장까지 받았어.”

“그럼 이게…….”

“맞아.”

놀란 얼굴을 손에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손으로 쓰다듬어 보던 부인은 이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왜 그래?”

“내일 떡을 돌리려면 빨리 방앗간에 가서 쌀을 빻아야죠.”

“천천히 해도 돼.”

“아니에요. 오면서 막걸리 한 항아리도 받아 올게요.”

“그거 좋지.”

그러면서 두루마리를 마치 신주단지처럼 조심스럽게 방 한쪽에 가져다 놓은 부인은 서둘러 집을 나섰다.

신이 나서 방앗간으로 달려가는 부인의 뒷모습을 보며 도재성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도재성처럼 대대적인 행정체계 개편과 함께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한 별과 출신 중인들은 무려 서른 명이 넘었다.

이번 개혁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상당수 대신과 사대부 들은 도현에게 대놓고 불평을 하지는 못하고 뒤에서 이들이 제대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할 거라며 폄하했다.

하지만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이들은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서 맡은 업무를 문제없이 척척 해내며 도현의 주장이 옳았다는 걸 증명했다.

그리고 이들로 인해 지금까지 너무나도 높은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능력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승진도 안 되자, 좌절하고 나태함에 빠져 있던 중인 출신 하급 관료들은 크게 고무되어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이렇게 밑바닥에서부터 형성된 새로운 바람은 행정부 전체로 급격히 번져 가며 기존 기득권층을 이루는 사대부 출신 고위 관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사실 대신들 상당수는 왕명으로 어쩔 수 없이 진행하기는 하지만 무자경장이 실패하기를 은근히 바랐다.

그래서 대놓고 반대는 못해도 개혁 작업을 은근슬쩍 지연시키고 일부러 문제를 만드는 등 태업怠業에 가까운 행동을 했다.

하지만 정작 실무를 맡고 있는 하급 관리들이 뜻과 달리 평소보다 더 의욕적으로 일을 하면서 이런 대신들의 꼼수는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

주작단과 감사원을 통해 대신들의 행동을 모두 파악하고 있던 도현에게 괜히 일을 제대로 못한다는 핀잔만 들었다.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어 버린 개혁에 대신들은 힘없이 떠밀려 내려가는 신세가 됐다.

이렇게 도현이 주도하는 개혁이 착착 진행되는 가운데 무자경장을 촉발시킨 역모 사건 조사가 한 달 만에 모두 끝나고 가담자들의 처벌이 결정됐다.

조선 시대에 역모는 사돈에 팔촌까지 삼족을 멸해 버릴 만큼 가장 엄하게 처벌되는 범죄였고 이번에는 직접 조총을 써서 임금인 도현을 저격하려고 했었기에 죄가 더욱 가중됐다.

이익치를 비롯한 주모자들은 당연히 참형에 처해졌고 단순 가담자라도 죄를 엄히 적용해 가진 재산을 모두 빼앗고 멀리 외딴 섬으로 귀양을 보냈다.

그리고 연루자의 가족들은 일반 평민으로 신분이 강등된 뒤 멀리 발해도로 내쫓겨 삼십 년간 노역을 살게 됐다.

이런 식으로 형벌을 받은 이들의 숫자가 무려 사백 명에 달했는데, 아쉬운 점은 역모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황죽표와 최석호를 붙잡지 못하고 아쉽게 놓쳤다는 거였다.

이건 나중에 또 다른 위기의 시발점이 됐는데, 아직은 아무도 그걸 몰랐다.

역모 사건의 여파로 송시열이 스스로 사퇴하며 산당은 중앙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났고 그나마 아직 세를 유지하고 있던 지방 유림도 크게 위세가 꺾여 버렸다.

여기에 무자경장의 추진으로 사대부들은 조선 건국 이후로 누리던 주류 계층의 지위에서 빠르게 밀려났고, 그 빈자리는 그동안 소외됐던 중인과 일반 평민 그리고 서출 들로 채워졌다.

이제 세상이 변했다는 걸 알고 이런 변화에 순응한 사대부들은 나름 살길을 찾았지만, 그러지 않고 예전 행태를 버리지 못한 자들은 그대로 도태되어 갔다.

한편 역모 가담자들의 죄가 확정되고 하루가 멀다 하며 형이 집행되고 있는 가운데 딱 한 사람 인평대군에 대한 판결은 도현의 지시에 따라 잠시 보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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