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경장 2
빨갛게 물든 노을이 대궐 처마 뒤편으로 천천히 지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현은 정자 아래에서 들리는 칠현의 목소리에 몸을 뒤로 돌렸다.
“전하, 인평대군 마마를 모셔 왔사옵니다.”
“들라 하라.”
“예.”
인평대군이 칠현의 안내를 받아 정자 위로 올라왔는데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초췌한 모습이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아니옵니다.”
이익치가 체포된 날 다른 가담자들처럼 의금부로 끌려와 문초를 받지는 않았지만, 의금부 병사들의 삼엄한 감시 속에 가택 연금을 당하고 조사를 받아야 했던 인평대군은 핏기 없는 얼굴로 연신 그의 눈치를 봤다.
“이리로 앉아라.”
“예.”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자리하자 미리 이야기를 해 뒀는지 이내 간단한 주안상이 나왔다.
“한 잔 받아라.”
얼른 두 손으로 따라 주는 술을 받은 인평대군은 주전자를 넘겨받아 조심스럽게 그의 잔도 채웠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것도 참 오랜만인 것 같구나. 한 이삼 년 됐지?”
“주상께서 청나라에서 돌아와 세자 위에 올랐을 때 마시고 처음입니다.”
“그렇군. 형제끼리 이런 자리를 자주 가지며 우애를 다졌어야 했는데, 국정에 바빠 내가 신경을 못 썼다. 미안하구나.”
“아, 아닙니다.”
말을 더듬으면서 손사래를 치는 인평대군을 보며 도현은 술잔을 집어 들었다.
“자, 마시자.”
“……네.”
인평대군은 몸을 옆으로 돌려 술을 살짝 입에만 댔다.
그에 비해 한 잔을 다 마신 도현은 직접 주전자들 들어 술을 채우면서 약간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랬느냐?”
“……!”
“이 형의 등에 칼을 꽂아서라도 가지고 싶을 만큼 보위가 탐이 나더냐?”
크지는 않았지만 날카롭게 패부를 찌르는 듯한 이야기에 순간 인평대군은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이내 바닥에 넓죽 엎드려 빌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이유를 묻지 않느냐!”
비록 연금 상태에 있지만 다른 이들이 줄줄이 판결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데도 그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자, 내심 용서해 주지 않을까 기대를 품고 있던 인평대군은 차가운 도현의 말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제아무리 왕족이라도 역모에 관련이 되면 인정사정이 없었는데, 오히려 왕족이기 때문에 더 혹독한 처벌이 가해졌다.
“역적들의 꼬임에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나 봅니다.”
“보위에 욕심을 가진 건 아니고?”
“언감생심 제가 감히 어떻게 그런 불충한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믿어 주십시오.”
여기서 말 한마디를 잘못하면 그대로 끝이었기에 인평대군은 필사적이었다.
도현은 마시던 술잔을 탁 하고 내려놓고는 버럭 한마디 쏘아붙였다.
“사저에서 데리고 있던 황 집사라는 놈이 네가 역적들과 일을 벌이기 전부터 빈번하게 만남을 가졌다는 걸 이미 다 실토를 했는데도 아니라고 우길 것이냐!”
“그, 그건…….”
말문이 막힌 인평대군이 창백해진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 하자 도현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정말 역모와 무관하다는 것이냐?”
자신을 낱낱이 다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에 인평대군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바닥에 엎드렸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형님.”
눈물범벅이 되어 잘못했다며 용서를 구하는 모습에 도현은 눈가를 찡그리고는 길게 혀를 찼다.
“쯧쯧. 그러게 후회할 짓을 왜 한 거냐?”
“흑흑.”
“아무리 같은 피를 나눠 가진 동생이지만 역모에 가담하고 보위를 욕심낸 죄는 당장 숭례문 밖에 끌고 나가 능지처참을 해도 결코 과하지 않을 것이다.”
추상같은 말에 인평대군은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허나,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고 해도 어찌 혈육을 내 손으로 죽일 수 있겠느냐. 목숨을 거두는 대신 왕실 족보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가족과 함께 멀리 강원도로 귀양을 가서 평생 근신하며 지내도록 해라. 만약 또다시 역모에 관여가 된다면 그때는 짐에게 정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대로 꼼짝없이 대역 죄인으로 죽는 줄 알았던 인평대군은 비록 더 이상 종친宗親의 지위와 권리를 누리지는 못하지만, 목숨을 살려 준다고 말에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가, 감사합니다, 형님.”
“조만간 선전관을 따라 귀양지로 내려가게 될 테니 이만 사저로 돌아가 떠날 준비를 하도록 해라.”
“예.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가 봐라.”
“이 못난 아우를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옥체 보전하시고 형님께서 품은 큰 뜻을 이루시길 멀리서나마 기원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인평대군은 그에게 큰절을 올리고는 정자를 내려갔다.
그런 인평대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도현은 쓸쓸한 표정으로 빈 잔을 만지작거렸다.
한쪽에 시립해 있던 칠현이 슬그머니 잔을 채워 주며 그를 위로했다.
“잘하셨습니다.”
“정말 그럴까?”
“귀양지에서도 주작단 단원들이 지속적으로 지켜볼 테니 다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지 않을 겁니다.”
칠현의 이야기에 쓰게 웃은 도현은 잔에 든 술을 단번에 털어 넣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외딴 곳에서 여생을 외롭게 보내야 되겠지만, 대역 죄인으로 죽는 것보다 낫겠지.”
며칠 뒤 인평대군은 가솔들과 함께 의금부 병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한양을 떠났다.
원래 귀양을 가는 죄인은 신분에 상관없이 짚신을 신고 자기 발로 걸어서 목적지까지 가야 했지만, 도현의 배려로 말과 가마를 타고 편히 이동했다.
이렇게 이익치의 역모가 모두 마무리되자 도현은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했는데, 중앙에 이어 지방의 행정 체계도 손질을 했다.
새로 총리대신에 임명된 박황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옥좌에 앉아 있는 도현을 쳐다봤다.
“지방관의 재판 권한을 회수하신다고 하셨사옵니까?”
어리둥절해하는 좌중 분위기와 달리 도현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럼 지방에서 일어나는 송사訟事는 어찌 처리한단 말씀이옵니까?”
“지방관의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가 바로 송사 해결이온데 그걸 못한다면 큰 혼란이 올 것이옵니다. 재고하여 주시옵소서.”
박황에 이어 법무대신을 맡고 있는 송준길이 나서 반대를 하자 도현은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경들은 짐이 지난번에 나눠 준 개혁 안을 제대로 읽어 본 거요?”
“물론이옵니다.”
“그런데도 그딴 소리를 하다니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소.”
“…….”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 대신들을 보며 도현이 약간 퉁명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개편 안에 보면 법무대신 밑에 법원이라는 새로운 관청을 설치하지 않았소.”
“예.”
“앞으로는 바로 그곳에서 모든 송사를 처리하고 지방관은 오직 행정 업무만 수행할 것이오.”
좌중이 술렁거리는 가운데 송준길이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하오나 송사가 있는 사람을 모두 한양으로 올라오게 한다면 너무 번거롭고 문제가 많지 않겠사옵니까.”
그러자 도현이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쯧쯧.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단순해서야. 누가 법원을 한양에만 둔다고 했소.”
“그럼……?”
“기본적으로 각 도의 감영監營마다 지방법원을 설치하고 한양에는 대법원을 둬서 누구든 억울한 일이 없도록 최소 두 번씩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이오.”
그제야 조금 이해가 되는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총리대신인 박황은 여전히 걸리는 것이 있는지 조심스럽게 문제점을 지적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사오나, 감영에서 멀리 떨어진 고을도 있을 텐데 재판을 받기 위해 먼 길을 오가는 건 여러 가지로 불편하지 않겠사옵니까?”
“그건 순회재판소巡回裁判所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소.”
“순회재판소가 무엇이옵니까?”
“지방법원까지 오기 힘든 백성들을 위해 말 그대로 판관들이 관할 구역을 순회하면서 재판을 하는 것이오.”
그러자 총리대신 박황은 이해했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이렇게 하면 지방관들은 오롯이 행정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고 너무 과도한 권한을 가지면서 생기는 비리도 사라질 것이오.”
여기에 대신들한테 밝히지 않은 도현의 숨겨진 의도가 하나 더 있었는데, 관할 지역 군 지휘권과 사법 그리고 행정권까지 한 손에 다 쥐고 있어 해당 고을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지방관의 자율권을 대폭 축소하고, 국왕이 깊은 두메산골까지 속속들이 다 들여다보고 영향력을 미치고 통제하는 완벽한 중앙집권 체제의 확립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방관의 권한 축소와 함께 전국에 거미줄처럼 퍼진 통신 수단의 확보도 중요했는데, 새로 내무부 산하에 우정국郵政局이라는 걸 만들어 기존 역참과 봉수 신호에 더해 우편 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서신이나 물건들을 주고받을 수 있는 우편은 이미 전국에 깔려 있는 역참을 활용하면 됐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업무를 담당할 관리를 뽑아 가을부터 실제로 우편 업무를 실시하는 걸 목표로 계획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법원의 운용과 관리를 맡아서 해야 될 송준길이 진지한 얼굴로 질문을 했다.
“전하의 말씀대로 실행하려면 재판을 할 판관이 상당히 많이 필요할 텐데, 그건 어찌하실 생각이옵니까?”
그러자 도현은 미리 생각해 둔 걸 차분히 이야기했다.
“우선은 법무부 내에 있는 관리들 가운데 청렴결백하고 법에 해박한 자를 선발해 쓰고 차후에는 별도의 시험으로 판관을 선발할 것이오. 이를 위해서 당분간 지방관의 재판권을 유지하면서 한양의 대법원만 운용하다가 모든 준비가 끝나면 지방 법원을 설치하고 제도를 실행할 생각이오.”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방법이었기에 대신들은 별다른 반발을 보이지 않고 수긍했다.
“상공 대신.”
도현의 부름에 경장 단행과 함께 공조참의에서 상공 대신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한 유형원이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병기창 장인들이 개발한 증기기관 설치는 어떻게 되고 있나?”
“일 호기를 화포 생산 공장에 설치해서 보름 전부터 시험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가동하고 있사옵니다.”
부족한 공업 생산력을 획기적으로 늘려 줄 기계였기에 도현은 상체를 살짝 숙이며 큰 관심을 보였다.
“어떻던가?”
“아직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겠지만 현재까지는 사람이 손으로 작업을 하는 것보다 두세 배 이상 능률이 올라갔사옵니다.”
기대한 대로 결과가 나오자 도현은 기꺼운 표정을 지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
“하오나 문제가 하나 있사옵니다.”
“그게 뭔가?”
“증기기관을 돌리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석탄이 필요한데 그걸 수급하는 것이 어렵사옵니다.”
“석탄이라면 초흐타 부족의 영역에서 가져오는 것이 있지 않소?”
옥좌 바로 아래에 서 있는 박황의 말에 유형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제철소 원료로 쓰기에도 부족합니다.”
“그러면 나무를 베서 땔감으로 사용하는 건 어떻소?”
법무대신 송준길이 슬며시 끼어들며 한마디 했지만 역시 반응이 탐탁지 않았다.
“장작을 연료로 쓴다면 아마 얼마 못 가서 도성 주변의 산은 모두 민둥산이 되어 버릴 겁니다.”
“허. 그것참. 아무리 증기 뭐라고 하는 기물이 장정 서너 사람 몫을 해낸다고 하더라도 쓸 수가 없다면 말짱 헛일이지 않소.”
“그러게 말이오.”
좌중의 분위기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렀지만 유형원 스스로도 딱히 해결책이 없었기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가장 속이 타들어 가야 될 사람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던 도현이 해결책을 내놨다.
“이미 해결책을 마련해 뒀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네.”
“어떻게 하실 생각이옵니까?”
이 문제로 혼자 며칠을 골머리를 앓았던 유형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도현을 봤다.
“시험 가동을 위해 짐이 보내 준 석탄을 계속 쓰면 되지 않겠나.”
“혹시 문경 광산을 염두에 두시고 하시는 말씀이시옵니까?”
“맞아.”
그러자 기대에 부풀었던 유형원은 이내 시무룩한 얼굴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문경 광산에서 나오는 석탄은 화력도 좋고 매장량이 풍부해서 연료로 쓰기에 안성맞춤이지만, 한양까지 대량으로 가져오는 것이 쉽지 않아서 역시 무립니다.”
“육로를 이용한다면 그렇겠지.”
“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유형원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은 도현은 계속 이야기를 이었다.
“새로 개발 중인 탄광이 있는 문경에서 한양까지 거리가 대략 사백십오 리里가 조금 넘지?”
“그쯤 되옵니다.”
“이 거리를 경이 말한 것처럼 우마차에 석탄을 실어 가져오는 건 어렵기도 하지만 아주 비효율적이지. 한데 말이야. 육로가 아닌 수로를 이용한다면 어떻겠나?”
“아니 어떻게…….”
산골짜기에 있는 탄광에서 캔 석탄을 수로를 통해 가져오겠다니 유형원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고 대전에 모여 있던 다른 대신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문경에서 조금만 나오면 한수寒水와 이어지는 커다란 강이 있지. 탄광에서 나루터까지만 우마차로 석탄을 옮기고 거기서부터는 배를 이용한다면 훨씬 손쉽게 대량으로 운송을 할 수 있지 않겠나. 마침 치우함과 신형 판옥선의 배치로 예비로 돌려지는 수군 판옥선이 꽤 있으니 따로 화물선을 건조하거나 구입할 필요 없이 그걸 재활용한다면 따로 비용이 들어가지 않을 거야.”
설명을 들은 대신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을 내뱉었다.
“정말 기발한 생각이십니다.”
“확실히 수로를 이용한다면 비용과 노력이 현저히 줄어들 것이옵니다.”
“지난번 전쟁에서 잡힌 청군 포로 일천 명을 여기에 투입해 험준한 산속에서 강변까지 이어지는 가도를 닦고 충분한 크기의 나루터와 석탄을 야적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도록 하시오. 야적장은 비가 오거나 물이 불었을 때 석탄 가루가 강으로 흘러들어 가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될 것이오.”
골치를 썩이던 문제가 해결되자 유형원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분부하신 대로 실행하겠사옵니다.”
대답을 들으며 고개를 돌린 도현은 박황에게 시선을 주면서 입을 열었다.
“잡과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소?”
박황은 낮게 기침을 한번 하고는 바로 대답했다.
“각 부처별로 필요한 인원 산정이 모두 끝났고 조만간 공표를 해서 계획대로 다음 달 말에 시험을 볼 수 있도록 할 것이옵니다.”
“선발 인원이 몇 명이라고 했지?”
“칠십 명이옵니다.”
“숫자가 꽤 되는군.”
“아무래도 행정 기구 개편으로 늘어난 자리도 많고 이런저런 사유로 공석인 것도 있어서 그렇게 됐사옵니다.”
도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돌려 말했지만 빈자리가 생긴 이유가 바로 이익치의 역모 때문이라는 걸 대신들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역모에 관련돼 상당수 산당 인물들이 파직됐고 그나마 남아 있던 이들은 송시열과 함께 사직서를 내고 낙향해 관직의 삼 할이 공석인 상태였다.
이런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도현은 잡과 시험을 치르기로 했다.
예전 같으면 과거를 봐서 사대부 중에 새로운 관리를 뽑거나 천거를 받았겠지만, 경장을 단행하며 천명한 것처럼 해당 부서에 필요한 전문 지식과 능력을 가진 이를 선발하기 위해 잡과를 선택했다.
당연히 대신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도현은 행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당장 실무에 투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가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며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시험에 차질이 없도록 준비를 철저히 해야 될 것이오.”
“명심하겠사옵니다.”
대체적으로 큰 문제없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듯하자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도현은 좌중을 둘러보며 슬슬 마무리를 지었다.
“더 이야기할 것이 있소?”
“…….”
대신들이 별다른 말이 없자 도현은 근엄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서 끝내겠소.”
옥좌에서 일어난 도현은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추는 대신들을 놔두고 칠현과 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대전을 나갔다.
이틀 뒤 총리대신 박황이 대전에서 보고한 대로 잡과 시행을 알리는 방문이 한양과 전국 팔도에 붙여졌다.
“갑자기 또 무슨 방문이래?”
“누구 글 읽을 줄 아는 사람 없어?”
포졸들이 장터와 거리 곳곳을 들쑤시며 방문을 붙이고 돌아다니자 주변에 있던 행인들이 궁금증에 담벼락 앞으로 와글와글 모여들었다.
“바깥이 소란스럽군.”
흐트러진 옷섶을 가다듬고 갓끈을 묶던 박문식은 살짝 열린 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흘러들어 오는 소리를 듣고 홀로 중얼거렸다.
그때, 기녀 소월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나. 일어나셨군요.”
“햇빛이 눈을 찔러 대서 영 잘 수가 있어야지.”
“그렇게 하루 종일 누워 있는데 나리는 허리도 안 아프신 가 봅니다.”
“흥,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마라. 다른 건 몰라도 내 허리 건강만큼은 각별히 챙기고 있으니. 행여나 못 쓰게 되면 길바닥에 나앉아 통곡을 해 댈 여인네들이 많거든.”
“아무렴 어련하시겠어요.”
소월은 비뚤하게 메어진 갓끈을 다시 매만져 주고 싱긋 웃었다.
“자, 슬슬 나가실 시간이에요.”
가볍게 등을 떠미는 손길에 이끌려 밖으로 나온 박문식은 따갑게 내리쬐는 햇빛이 눈부신지 손바닥으로 눈앞을 가렸다.
“쯧. 이렇게 일찍 일어나서 돌아다니는 건 별로 안 좋아하는데.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되나?”
“무슨 소리예요. 빈둥거리는 것도 한도가 있지.”
“언제는 일 안 해도 자네가 먹여 살리겠다며?”
“그거야 뭘 모를 때 이야기죠.”
소월은 새침하게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곤 얼른 가기나 하라며 매몰차게 손을 흔들었다.
전날 밤에 마신 술이 아직 덜 깼는지, 조금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돌계단을 내려가는 박문식의 뒷모습을 소월이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는데, 근처를 지나가던 기생 하나가 그 모양새를 보고 혀를 쯧쯧 찼다.
“열녀 나셨네, 열녀 나셨어. 어쩐지 요 며칠간 손님도 제대로 안 받고 방에 틀어박혀 있더니 또 그 양반이 왔다 가셨구나?”
“아침부터 왜 시비야?”
“네가 불쌍해서 그런다. 얼굴 예뻐, 노래도 춤도 어디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어서 제일 돈도 많이 버는 년이 웬 한량한테 코 꿰여서 사는 꼬락서니를 보니, 열불이 안 터지고 배기겠냐고.”
같은 시기에 애기 기생부터 시작해서 오랜 친분이 있는 사이이니만큼 하는 말도 거침이 없었다.
“저 남자의 어디가 그렇게 좋아? 말만 양반이지, 서출이라 아무것도 못 하고 술과 계집질로 인생을 낭비하는 사내인데.”
“잘생겼잖아.”
“뭐?”
“평양 안을 이 잡듯이 뒤져도 저렇게 훤칠하니 잘생긴 사내는 드물다고. 게다가 머리도 좋아서 가끔씩 기분 좋을 때 써 주는 시를 보면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야.”
그러고서 소월은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차라리 무늬만 양반이 아니라 중인이었으면 다른 길이 있었을 텐데…… 정말 서출로 태어난 게 너무 아까운 사내라니까.”
소월은 평양 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이름 있는 기생이다.
단순히 용모가 빼어난 것뿐만 아니라 서화, 춤, 노래, 가야금까지 높은 교양을 쌓아 올린 여자라 고관대작이나 큰 상단의 주인 정도가 아니면 상대하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인정하며 돈이 없어도 밤을 같이 지내곤 하는 남자가 바로 박문식이다.
이목구비가 번듯하니 잘생긴 데다 넉살 좋은 성격에 순간순간 번뜩이는 재치가 실로 매력적인 사내라, 산전수전 다 겪은 소월도 단숨에 함락될 정도였으니 더 이상 말해 봤자 뭐하랴.
“어쨌든 대낮부터 넋 놓고 있지 말고 얼른 정신 차려.”
“알았다니까.”
소월이 뒤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며 안타까워하는 사이, 기생집을 나와 저잣거리로 나선 박문식은 사람들이 방 앞에 구름같이 몰려 있는 것을 보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까부터 시끄럽다 했더니 저것 때문이었나.”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박문식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어차피 나랑 상관없는 일일 텐데 봐서 뭐하겠다고.”
그냥 집에 돌아가서 낮잠이나 늘어지게 자자, 하며 돌아서는 박문식의 귀에 누군가가 날카롭게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과거가 아니라 잡과라니, 주상 전하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거야!”
방문 앞에 몰려든 사람들 사이에는 일반 평민뿐만 아니라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서생 한 무리도 섞여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울분을 참지 못하는 표정이었는데, 그 기세가 워낙에 사나워서 평민들은 조금씩 주춤거리며 자리를 피했다.
“이보게, 목소리를 좀 낮추시게나.”
“지금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는데 어찌 침착하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주위 동료들이 모두 잔뜩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가운데, 그나마 좀 성격이 온화해 보이는 유생 하나가 말리는 시늉을 하자 여기저기서 비난하는 소리가 빗발쳤다.
“전하께서 여태껏 해 오신 일들 중에도 이번 건은 해도 해도 너무하네!”
“과거가 아니라 잡과라니, 여태껏 기다려 온 우리들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
“게다가 더러운 서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당장 주상 전하께 올릴 상소문을 쓰러 가세.”
“맞아. 아무리 어명이라 해도 전국 각지의 유생들이 동시에 상소를 올리면 함부로 무시하진 못할 걸세.”
한참 분통을 터트린 유생들은 싸움이라도 하러 나가는 것처럼 발소리를 쿵쿵 울리며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 덕분에 구경꾼들로 빽빽이 들어찼던 방문 앞에 크게 빈 공간이 생기자 박문식은 재빨리 틈을 타 글자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자리를 꿰찼다.
“이보게, 자네 문식이 아닌가?”
“음? 아, 오랜만이로군.”
알은척을 하며 다가온 사내는 박문식과 비슷한 처지의 서출인 청년이었다.
같은 나이 또래라 한창 흥청망청 놀 때는 종종 어울려 다니곤 하던 사이였는데,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어디서 또 진탕 마시고 왔는지 가까이 붙어 있으니 술 냄새가 진하게 훅 끼쳤다.
“얼굴이라도 좀 씻고 나오지 그 꼴이 뭔가. 냄새가 너무 독해서 나까지 취할 지경이네.”
“그러는 자네도 간밤에 술 좀 마신 것 같은데 뭘. 게다가 계집 분내까지 잔뜩 묻히고 있으면서 누가 누구한테 큰 소리야.”
“흥.”
딱히 반박할 말이 없는 탓에 박문식은 고개를 돌리고 방문을 가리켰다.
“방문에 뭐라 적혀 있기에 이 소란인가?”
“뭐야? 아직 안 읽어 봤나 보군.”
“이제 막 도착한 참이네.”
“그럼 내가 말해 주는 것보다 자네가 직접 눈으로 보는 게 더 나을 걸.”
그는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살짝 턱을 까딱였다.
그냥 말해 주면 될 것이지 뭘 또 읽어 보라는 건지.
귀찮다는 표정으로 방문에 적힌 글귀를 읽어 내려가던 박문식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방문에는 곧 잡과를 시행한다는 공고가 쓰여 있었는데, 원래 몇 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시행되던 것이라 대체 뭐가 그리 유생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는지 이해가 안 됐다.
“잡과를 하는 게 뭐가 어떻다고 난리들인가?”
“허어, 이 사람. 소월이 치마폭에 폭 감싸여서 정신 못 차리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로구만.”
“난데없이 소월이 얘기는 왜 꺼내나!”
“이보게, 아무리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귀 정도는 좀 열어 놓고 살게.”
그는 혀를 쯧 차면서 박문식을 흘겨보았다.
“뽑혀 봤자 하급 관리밖에 못 되는 예전의 그런 잡과가 아니란 말일세. 주상 전하께서 이번에 경장을 단행하시면서, 잡과 출신 관리들도 높은 지위에 등용되고 있단 말이야. 누구는 벌써 종오품까지 올라갔다는 말도 있는데.”
“그래?”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양반들 심기가 안 좋은데, 역모 때문에 공석이 된 자리를 대과가 아니라 잡과로 채운다고 하니 유생들이 저 난리를 치는 거 아닌가.”
그 말을 듣고 나니 과연, 화를 낼 만도 하다 싶었다.
과거가 일 년에 한 번씩 열리는 것도 아니고,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단 한 번의 기회를 붙잡기 위해서 매일 사서삼경을 붙잡고 씨름하는 유생들의 입장에선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다.
“놈들도 불쌍하게 됐지 뭔가.”
“난 전혀 안 불쌍한데. 오히려 쌤통이지, 뭘.”
“하하! 역시 문식이 자네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네.”
껄껄 웃어 대던 그는 은근슬쩍 박문식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속닥였다.
“자네도 이번 잡과에 응시해 보는 게 어떤가. 왜국어를 잘하니 혹시 아나, 떡하고 붙을지.”
“…….”
여태껏 열린 잡과에는 단 한 번도 응시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아예 시험이라는 걸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일단 응시만 했다 하면 뽑히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평생 남의 밑에서 허드렛일만 할 바에야 차라리 한량으로 재능을 낭비하며 살겠다고 그렇게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왠지 다를 거라는 기대 섞인 예감이 들었다.
한동안 멈춰 있었던 심장이 다시 두근두근 맥박 치는 소리를 들으며, 박문식은 그대로 못 박힌 듯이 서서 방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렇게 방문이 곳곳에 나붙자 박문식처럼 능력은 있어도 신분의 벽 때문에 꿈을 접어야 했던 많은 이들이 새로운 희망을 품고 잡과를 치기 위해 한양으로 몰려들었다.
이런 가운데 그동안 오리무중이었던 황죽표와 최석호 두 역모 주모자의 흔적이 엉뚱한 곳에서 발견됐다.
“지금 명나라라고 했나?”
도현이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소식을 가져온 이완 단장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남경에 있는 김하방 지부장이 긴급 보고로 두 사람이 대학사인 황보태의 식객으로 머물고 있다는 걸 알려 왔사옵니다.”
“황보태라면 명나라의 실력자 아닌가?”
“맞습니다. 강남 토박이로 대학사에 오를 만큼 학식도 높고 향사들의 지지를 받아 태감인 왕승 못지않은 권력을 쥐고 있는 자이옵니다.”
설명을 들은 도현은 미간을 좁히며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그런 자 옆에 역도들이 붙어 있다니 이거 왠지 느낌이 좋지 않군.”
“아뢰옵기 송구스러우나, 파악된 바에 의하면 명나라 조정 대신들에게 주상 전하께서 사대부의 뜻에 반하며 황제와 군신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독자 노선을 가려 한다면서 정벌에 나서 줄 것을 주장하고 있다 합니다.”
와락 얼굴을 구긴 도현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방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노호성을 터트렸다.
“이런 때려죽일 놈들이 있나! 역모를 꾸민 것도 부족해서 타국으로 도망가 그따위 헛소리를 하고 다녀.”
도현이 발끈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는데 청나라에 밀려 쫓겨나다시피 강남으로 내려간 명이 현실적으로 조선을 공격할 능력은 없었지만, 호시탐탐 복수를 하려는 예친왕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형식적이나마 양국이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한데 이 두 사람이 끼어들어 이런 식으로 훼방을 놓으면 세상이 바뀐 걸 모르고 여전히 조선을 자신들의 속국이라 생각하는 숭정제와 명나라 대신들이 노발대발하며 날뛸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명나라로 가기 전에 붙잡았어야 되는데, 면목이 없습니다.”
“지금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것보다 명나라 조정 분위기는 어떻다고 하던가?”
“아직까지는 김하방 지부장을 통해서 확보해 놓은 친조선파 대신들이 근거 없는 이야기로 격하시키고 있지만, 명나라 조정 내부에서도 심양을 함락시킬 군사력이 있으면서 북경이 공격당할 때 나서지 않고 일부러 어부지리를 노린 것 아니냐는 식으로 저희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라, 계속 이대로 방치한다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을 것 같사옵니다.”
“골치 아프게 됐군.”
아직 성에 차지는 않지만 청나라와 한판 붙어도 꿀리지 않는 군사력을 확보했고 꿈에 그리던 북벌도 절반가량 성공한 상황에서 이빨 빠진 호랑이도 되지 않는 명나라가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건 별로 겁나지 않았다.
아니 안중에도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할 거였다.
문제가 된다면 아직 명나라를 상전으로 생각하고 무조건 떠받드는 일부 자존심도 없는 사대부들이 동요하는 것과 청과 다시 전쟁이 벌어졌을 때 명나라를 이용해 전력을 분산시키기 어렵다는 정도였다.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던 도현은 한쪽 뺨을 실룩이며 짜증을 냈다.
“우리가 심양을 공략하지 않았으면 벌써 청군 팔기의 말발굽에 남경이 짓밟히고 말았을 것들이 고마운 줄은 모르고 아직도 우릴 저희들 똘마니로 여기고 있다니 하여튼 정이 안 가는 놈들이라니까.”
도현에 의해서 사대의식을 말끔히 털어 낸 이완 단장은 내심 동의를 하면서도 정보 단체의 수장답게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냉철한 태도로 이야기를 했다.
“화는 나지만 아직까지 명나라와 사이가 틀어져서 좋을 건 없지 않겠사옵니까.”
“그건 그렇지.”
도현은 서탁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고심을 했다.
지금 명나라와 관계가 악화된다면 청나라만 좋아할 뿐이었다.
아니꼽고 짜증이 났지만 청나라가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명나라를 잘 어르고 달래서 옆에 놔두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면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고개를 든 도현은 정색을 하며 앞에 있는 이완 단장을 봤다.
“위험 요소는 빨리 제거해 버리는 것이 상책이지.”
“……!”
“어차피 여기서 잡혔으면 대역 죄인으로 목이 잘려 효수됐을 거 아니야. 명나라에서 형을 집행하는 셈 치면 되겠군.”
내심 암살을 염두에 두고 있던 이완은 도현의 지시에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명령하신 대로 처리하겠사옵니다.”
“명나라의 유력 권력가인 황보태가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만큼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신중하게 움직여야 될 거야.”
“알겠사옵니다.”
두 사람이 암살을 당한다면 제일 먼저 조선을 의심하겠지만, 아무런 흔적을 남기 않는다면 제아무리 명나라라고 해도 어쩔 수가 없을 거였다.
“그 문제는 그렇게 처리하고 요즘 지방 유림의 분위기는 어떻지?”
“아무래도 대과 대신 잡과로 관리를 뽑는다는 발표에 젊은 유생들을 중심으로 반발이 큰 상황입니다.”
예상이라도 한 듯 도현은 별다른 반응 없이 머리를 작게 끄덕였다.
“과거를 봐서 입신양명하는 것이 사대부들의 꿈이자 목표이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며칠 안에 지방 향교를 중심으로 상소가 빗발칠 것이옵니다.”
“어차피 각오했던 일이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도현이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이완은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지금 같은 시기에 내부가 혼란스러우면 자칫 예친왕이 오판을 할 수도 있으니, 그러지 마시고 대과를 작게나마 열어 유생들의 반발을 무마시키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나름 고심 끝에 꺼낸 이야기였지만 도현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이 단번에 잘라 버렸다.
“그럴 수는 없네.”
“하지만…….”
도현은 이완의 이야기를 중간에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식으로 하나씩 뒤로 물러서다 보면 기껏 추진한 개혁이 흐지부지되고 말 것이야. 그리고 이제 방구석에 틀어박혀 공자 왈 맹자 왈 하고 있으면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걸 유생들도 깨달아야 할 때가 됐어.”
같은 사대부로서 목표를 잃고 좌절할 유생들의 처지는 너무나도 안타까웠지만, 국왕인 도현의 결심이 확고한 걸 확인한 이완은 충성스러운 신하답게 더 이상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그대로 수긍했다.
“신이 괜한 이야기를 꺼내 어심을 어지럽힌 것 같아 송구스럽사옵니다.”
“아닐세. 무조건 지시대로 따르는 것보다 필요하다면 목을 내걸고 간언할 수 있는 자가 진실한 충신이지 않겠나.”
금세 화사한 봄처럼 표정을 부드럽게 풀며 도현이 다독여 주자 이완은 황공한 마음에 머리를 깊이 숙였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황공할 따름이옵니다.”
“경이 지적한 대로 어느 정도 반발은 감수해야 되겠지만 도를 넘어 나라를 어지럽힌다면 그건 절대 용납할 수 없으니 포도청과 연계해서 잘 관리해야 될 것이야.”
상당히 어려운 지시였지만 세 번의 반란과 지속적으로 추진 중인 개혁에 이제 빈껍데기만 남은 사대부들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내부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꼭 해내야 되는 일이었다.
한번 결심을 굳히면 거치적거리는 걸 다 부숴 버려서라도 목표를 이루는 도현의 성격과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사대부들이 집단행동에 나서며 국정 운영에 방해가 된다면 과감하게 손을 쓸 것이 분명했다.
그걸 알기에 대답하는 이완 단장의 표정에는 비장감마저 감돌았다.
“알겠습니다.”
그 뒤로도 도현과 이완은 한참 동안 국내외 현안들을 가지고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다.
예상대로 며칠 뒤부터 전국에서 유생들이 작성한 상소문이 수십 수백 장씩 뭉치로 올라왔지만 이제 궁내부로 이름이 바뀐 예전 승정원 소속 관리들은 이미 몇 번이나 경험(?)한 일이었기에 당황하지 않고 아주 능숙하게 처리했다.
“안동에 있는 병산서원屛山書院 유생 사십여 명이 연명해서 보낸 상소문이 도착했는데 어찌할까요?”
병산서원이라면 광해군5년(1613년)에 유성룡을 기념해서 지어진 경상도 일대에서는 영향력이 상당히 큰 서원이었지만,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참서관은 심드렁한 얼굴로 어린아이 팔뚝보다 굵은 상소문 두루마리를 힐끗 보고는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자네가 대충 살펴보고 정해진 대로 답장을 써서 보내.”
“알겠습니다.”
상소문은 국왕에게 무조건 올리는 것이 원칙인데도 명령을 내리는 참서관이나 머리를 끄덕이며 두루마리를 가져가는 하급 관리나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했다.
보통 때라면 당장 파직을 당하고 의금부에 끌려가 엄히 문책을 받아야 되는 큰 죄였지만, 잡과 시행에 관한 상소는 보고할 필요 없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어명이 있었기에 이러는 거였다.
원래는 읽을 가치도 없으니 그냥 몽땅 다 불쏘시개로 쓰라고 지시했지만 그나마 궁내부 대신인 장선징이 간곡하게 만류해서 답장이나마 보내는 거였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주사(궁내부 소속 하급 관리) 한 명이 다급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대신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안쪽 집무실에 계신데, 무슨 일인가?”
궁내부에 속한 상급 관리인 참서관이 물었지만 주사는 대답도 하지 않고 황급히 안쪽으로 뛰어갔다.
“뭔데 저러지…….”
“글쎄.”
그걸 보며 실내에 있던 관리들은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감, 안에 계시옵니까?”
“들어오게.”
집무실에 들어간 주사가 허리를 꾸벅 숙이자 도현에게 올릴 보고서를 정리하고 있던 장선징이 손에 든 붓을 벼루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뭔가?”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지금 한양부 유생 팔십여 명이 대궐 앞에 몰려와 자리를 깔고는 잡과 대신 대과를 실시해 달라며 농성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장선징은 와락 얼굴을 구겼다.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 기어코 복합伏閤(대궐 앞에서 엎드려 호소하는 시위 행위)을 벌인다 이거지.”
“이대로 놔두면 일이 시끄러워질 텐데 어쩌지요?”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주사가 묻자 장선징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이내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지. 지금 바로 포도청에 연통을 넣어서 유생들을 다 치워 버리라고 하게.”
“반발이 심할 텐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최근 들어 위세가 예전만 못 하다고 해도 까닥 잘못했다가는 벌통을 건드린 것처럼 시끄러워지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선징의 태도는 단호했다.
“주상 전하께서 잡과 시행에 관계된 시위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말라는 어명을 내리셨으니 염려할 것 없네. 어서 지시한 대로 시행하게.”
“……알겠습니다.”
여전히 껄끄러운 마음이 남아 있었지만 어명이라니, 주사는 대답을 하고는 뒤돌아서 방을 나갔다.
그렇지만 주사는 포도청까지 안 가도 됐는데 대궐 주위를 순찰하던 포졸의 보고를 받은 포도대장 구인후가 벌써 백인대 병력을 투입해 시위를 벌이고 있던 유생들을 체포해 해산시켜 버렸다.
이처럼 대과를 열지 않는 것에 유생들의 반발이 큰 가운데 잡과 준비는 차질 없이 착착 진행돼서 시험을 치기 위해 고향을 떠난 각 계층의 사람들이 속속 한양에 도착했다.
여분의 짚신이 대롱대롱 매달린 봇짐을 등에 멘 박문식은 평양에서부터 함께 출발한 동료 네 명과 함께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에 땀을 뻘뻘 흘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후아. 이거 날씨가 보통 더운 것이 아니군.”
소맷자락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며 한 명이 말을 꺼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옆에 있던 사내가 손부채질을 하며 대꾸했다.
“그러게 말일세. 아주 푹푹 찌는구먼.”
날씨도 더운 데다 걸어오느라 고생을 해서 그런지 다들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제 도성 안에 들어왔으니 고생은 다 끝난 것이 아닌가.”
“그렇지.”
“땀도 식힐 겸 저기 보이는 주막에서 좀 쉬었다 가세.”
“그거 좋지.”
박문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일행은 길 한쪽에 위치한 주막으로 들어갔다.
숙식과 주점을 겸하는 제법 규모가 있는 주막이었는데 초가지붕을 얹은 건물 두 채가 ‘ㄱ’ 자 형태로 붙어 있고 마당 한쪽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마당에 놓인 대나무 평상 네 개에 모두 손님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는데, 때마침 안쪽에 있던 사람이 식사를 끝내고 일어나자 박문식과 일행은 얼른 그리로 가서 앉았다.
“으차.”
봇짐을 한쪽에 내려놓은 박문식은 부엌 쪽을 보며 큰 소리로 주모를 불렀다.
“주모! 주모!”
“예. 갑니다요.”
음식을 하고 있었는지 머리를 둥글게 틀어 올린 중년 여인이 대답과 함께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다가왔다.
“뭘 드릴까요?”
“국밥 하나씩 하고 시원한 막걸리도 한 병 갖다 주시오.”
“예.”
손님이 많아서 그런지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주모는 앞 사람이 먹은 상을 치우면서 얼른 부엌으로 갔다.
새 손님이 오건 말건 주막 안은 시끌벅적한 소리로 가득했는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 대부분이 박문식 일행처럼 봇짐을 가진 외지인이라는 거였다.
주막에 뜨내기손님이 오가는 것이 뭐가 이상하냐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박문식은 어쩐지 계속 신경이 쓰였다.
때마침 막걸리와 간단한 안주가 놓인 개다리소반을 들고 조심스럽게 걸어와 평상 위에 내려놓는 주모를 보며 물었다.
“원래 이렇게 손님이 많소?”
“호호호. 그러면 벌써 떼부자가 됐게요.”
“그럼 왜 이런 거요?”
“이게 다 보름 뒤에 열리는 잡과 덕분 아니겠어요.”
“……!”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일행과 달리 박문식은 바로 뜻을 알아차리고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 사람들이 다 잡과를 보러 온 거란 말이오?”
“그럼요. 정말 요즘 같으면 장사할 맛이 난답니다.”
신이 나서 떠드는 주모와 달리 박문식과 일행은 생각보다 많은 잡과 응시자에 눈을 크게 뜨고는 새삼스럽게 주위를 둘러봤다.
“손님들도 시험을 보러 오신 거 아닙니까?”
“맞네.”
일행 중 한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어느새 옆에 걸터앉은 주모는 막걸리 병을 들어 빈 잔에 따라 주면서 이야기를 이었다.
“시험 날까지 아직 많이 남았는데 그동안 머무실 곳은 정하셨어요?”
“일단 요기부터 하고 천천히 둘러볼 생각이네.”
그러자 주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왜 그러오?”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잡과를 보러 올라오는 사람들로 주막마다 손님이 가득해서 까딱 잘못하면 시험 날까지 노숙을 하셔야 될지도 몰라요.”
주모의 이야기에 일행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저런.”
“그 정도란 말인가?”
“보세요. 저희도 방마다 손님들이 계시잖아요.”
그러고 보니 부엌 좌우로 있는 작은 방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더위 때문에 문을 반쯤 열어 놓고 책을 보고 있었다.
“아직 시험 날까지 보름이나 남았는데 노숙이라니…….”
“주모, 혹시 남는 방 하나 없나?”
“에휴. 저희는 벌써 다 찼지요.”
한쪽 손을 내저으며 주모가 하는 말에 일행은 크게 당황했다.
“이 일을 어쩌지?”
“아무래도 요기는 나중에 하고 머물 곳부터 알아봐야겠군.”
“그게 좋겠네.”
다급해진 일행이 서둘러 일어서려고 하자 주모가 소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
“지금 돌아다녀 봤자 방 구하기는 힘들 거예요.”
“그럼 어쩌란 말인가?”
“방이 하나 있기는 한데 네 분이 주무시기에는 조금 좁고 잡동사니를 넣어 두고 창고처럼 쓰던 곳이라…….”
주모가 슬쩍 말끝을 흐리며 미끼를 던지자 당장 방 하나가 아쉬운 입장인 일행은 넙죽 받았다.
“그거라도 어딘가 우린 상관없으니 방을 내주게.”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렇대도.”
일행의 말에 주모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식사하시는 동안 방을 치워 놓으라고 하지요.”
“고맙네.”
“대신 방값은 보름 치 선불이에요.”
“얼만가?”
“식사까지 포함해서 은화 한 냥이에요.”
그리 비싼 것도 아니었기에 일행은 선뜻 받아들였다.
“알겠네.”
박문식이 주머니에서 은화를 꺼내 건네려고 하는데 주모가 냉큼 눈을 치켜떴다.
“그게 아니고 두당 은화 한 냥인데요.”
“뭐요?”
당연하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주모의 태도에 박문식은 기겁해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박문식 일행이 총 다섯 명이니까 결국 은화 다섯 냥을 내란 소린데, 그 정도 가격이면 평양에서 제일가는 으리으리한 기생집에서 온종일 여자와 술을 끼고 살아도 남을 정도다.
바가지도 아주 제대로 씌우는 거였기에 어이가 없었지만 당당하게 손을 내미는 주모의 태도는 뻔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싫으면 관두세요. 댁들 아니라도 재워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은 많으니까. 다른 손님들은 모르는 사람들끼리 막 섞여 자기도 하는데 방 하나라도 쓸 수 있는 게 얼마나 귀한 건지 알아요?”
아닌 게 아니라 혈혈단신으로 상경한 사람 몇몇은 주모 말대로 아무 데나 막 집어넣기도 하는지 간혹 주위를 둘러보면 일행인 것 같으면서도 어색하게 떨어져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보게, 문식이.”
암만 그래도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는 박문식의 옆구리를 일행 한 사람이 슬며시 쿡 찔렀다.
어쩔 수 없으니 얼른 돈 내주고 쉬자는 동료들의 표정에 그는 작게 한숨을 쉬고 주머니에서 은화를 더 끄집어냈다.
“옜소.”
“아유, 진작 그럴 것이지. 잘 생각하셨어요.”
주모는 은화를 냉큼 받아 들고 희희낙락하면서 일행을 빈방으로 안내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다른 방들과는 달리 주모가 일행에게 내준 방은 조금 떨어져 있었다.
평소에 창고처럼 쓰던 방이라 하더니 그래서 그런가 보다, 하고 가만히 있는데 주모가 문을 열자마자 확 풍기는 고약한 냄새에 박문식은 물론이고 일행 모두 코를 막고 얼굴을 와락 찡그렸다.
“이, 이게 무슨 냄새요?”
“오호호. 아니, 그게…… 원래 사람을 재울 용도로 쓰던 방이 아니라서 말이죠.”
“먼지 냄새치고는 너무 심하지 않소!”
고작해야 퀴퀴한 곰팡이 냄새 정도를 상상하고 있던 박문식은 주모에게 거침없이 항의했다.
“작년 여름에 메주 쑨 것을 보관하는 용도로 썼더니 냄새가 좀 배긴 했지요. 에이, 그래도 조금만 참고 견디면 금방 코가 마비되어서 아무것도 못 느낄 텐데 그리 난리치실 필요는 없잖아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이것 보세요. 창문을 활짝 열어 놓으면 바람이 잘 통해서 시원하고, 햇빛도 잘 들어오니 그럭저럭 지내기엔 괜찮지 않겠어요? 청소는 미리 다 해 놨으니 이부자리는 이따 사람을 불러서 갖다 드릴게요.”
뭐라 말할 틈도 없이 혼자 다다다 쏘아붙이곤 허겁지겁 사라지는 주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박문식은 당했다는 기분으로 불만스럽게 혀를 찼다.
“욕심쟁이 여편네 같으니라고. 아주 이때다 싶어 돈독이 잔뜩 올랐군.”
“하하, 세상에 자네 얼굴을 보고 해롱거리지 않는 여자도 있구먼.”
멀끔하니 잘생긴 얼굴 덕분에 항상 어딜 가도 여자한테 푸대접을 받는 일은 없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맞는 모습을 보니 쌤통이라며 일행 중 한 사람이 낄낄 웃었다.
“닥치시게. 그나저나 정말 이 방에서 잘 생각인가?”
“별다른 수가 없지 않나. 상황을 보아하니 다른 데 간다고 해서 방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 맞아. 낯선 한양 땅에서 헤매다가 밤이라도 되면 어쩌려고 그러나?”
“거기다가 돈도 이미 줬지 않나.”
하긴 일행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차가운 땅바닥에서 이슬을 맞으며 노숙하는 것보다야 좁아도 벽과 천장이 있는 곳에서 묵는 게 훨씬 나은 건 당연했다.
“그래도 이 냄새는 정말 고약하군.”
박문식은 가급적 냄새를 맡지 않도록 코를 틀어막은 채 입술을 삐죽거렸다.
서출 출신이라 속으로 마음고생은 했지만 적어도 몸 고생은 하지 않고 편하게 자란 그에게 코를 탁 쏘면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메주 냄새는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창과 문을 활짝 열어 놓긴 했으나 이미 사방에 깊숙이 배어들어 있는 냄새는 가실 기미가 없어, 하룻밤만 자도 일행의 옷과 소지품에 다 찌든 내가 밸 게 틀림없었다.
피곤해 죽겠다고 벌써 벌렁 드러누운 사람도 있는 일행과는 달리, 박문식은 어릴 때부터 차림새나 겉모양에 신경을 쓰는 깔끔하고 세심한 성격이었는지라 더욱더 방이 맘에 안 들었다.
“정 그러면 자네 혼자라도 나가서 다른 방이 있는지 알아보고 오던가?”
이런 성격을 잘 아는 한 사람이 걱정스레 묻자 박문식은 땅바닥이 꺼져라 재차 한숨을 쉬고 봇짐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됐네. 그런 일에 허비할 시간이 아까워.”
실력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재능이 있다는 걸 스스로 잘 알았기 때문에 현실의 벽에 더더욱 좌절했던 게 아닌가.
하나 이렇게 구름처럼 몰려든 경쟁자들을 보니 역시 조금은 불안한 마음이 들어 평양에 있을 때처럼 여유로운 태도를 언제까지나 유지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내가 방문 앞에서 잘 걸세.”
바깥 공기가 제일 잘 들어오는 곳에서 자는 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박문식이 말하자, 일행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 마음대로 하게나.”
“자, 얼른 짐을 풀고 밖으로 나가세. 모처럼 한양까지 올라왔는데 첫날은 술이라도 한잔해야지.”
“어어, 자네도 바른말을 할 때가 있군.”
“하하하!”
일단 방을 구했다는 안도감 덕분에 일행은 모두 밝은 표정으로 농을 지껄이며 시끌벅적 떠들어 대었다.
희정당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도현은 재무대신 김육이 관리 한 명을 대동하고 들어오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경이 어쩐 일이오?”
“보고드릴 일이 있어 찾아왔사옵니다.”
그러자 도현은 상체를 펴며 말했다.
“표정이 밝은 걸 보니 나쁜 일은 아닌 것 같구먼.”
“그렇습니다.”
“어디 뭔지 이야기를 해 보시오.”
“지난번 조회 때 시험 재배에 성공한 감자를 겨울 동안 북해도에 심는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감자는 벼가 나오는 가을까지 보릿고개를 넘기고 병사들의 비상식량으로 쓰기 위해 그가 재배를 권장하도록 한 거였기에 도현은 금방 기억을 떠올리고는 기대 어린 얼굴로 몸을 앞으로 당겨 앉았다.
“그랬지.”
“다행히 대풍을 거뒀다는 소식과 함께 첫 수확물을 보내왔사옵니다.”
도현은 양쪽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며 반색을 했다.
“그거 참 기쁜 소식이로군. 어디, 보내왔다는 감자를 가져와 보게.”
“예.”
김육이 고개를 돌려 눈짓을 하자 한걸음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관리가 비단 보자기로 덮어 놓은 소쿠리를 다가온 칠현에게 건네줬다.
“함께 온 자는 누군가?”
“감자 재배를 관장한 판적국版籍局 국장이옵니다.”
“오. 그런가.”
판적국은 경장 전에 호조의 삼 대 기관 부서였던 판전사版籍司가 명칭을 바꾼 것으로, 가호와 인구의 파악, 토지 측량과 관리, 조세, 부역, 공물의 부과와 징수, 농업과 양잠의 장려, 풍흉 조사, 진휼과 환곡 관리를 담당했다.
황송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판적국 국장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손을 뻗어 칠현이 서탁 위에 올려놓은 소쿠리 보자기를 벗겼다.
그러자 깨끗하게 흙을 씻은 감자가 소쿠리 가득 들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는데 얼마나 알이 굵은지 한 개가 성인 남자 주먹보다 컸다.
“정말 크구먼.”
“흑해도의 토질이 워낙 좋다 보니 강원도에서 키운 것보다 감자가 두 배 정도 더 크게 나왔다고 하옵니다.”
“그래, 수확량은 얼마나 되나?”
“그건 신보다 고 국장이 아뢰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김육의 말에 도현이 시선을 옆으로 옮기자 고 국장이라고 불린 관리가 약간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총 이십오만 포대를 수확했사옵니다.”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오는군.”
도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고 국장은 얼른 보충 설명을 했다.
“봉황도와 북해도에 거주하는 주민과 병사 들을 한 달 동안 먹일 수 있는 양이옵니다.”
“대단하구먼.”
“토질이 비옥하고 날씨가 좋은 덕분에 기대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을 수확할 수 있었사옵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감자의 크기도 대부분 강원도에서 처음 재배한 것보다 훨씬 크게 나와서 두 알이면 한 끼 식사를 대신할 정도이옵니다.”
그가 보기에도 이 정도 크기면 두 개만 먹어도 충분히 배가 부를 것 같았다.
봉황상단이 매년 먼 안남과 명나라에서 엄청난 양의 쌀을 가져와 저렴한 가격으로 시중에 풀어서 예전처럼 보릿고개에 백성들이 굶주리는 일은 없었지만, 식량을 확보하는 데 들어가는 자금을 줄이고 수입로가 끊기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자체적으로 수요를 충당할 방법이 필요했다.
여기에 영향소가 풍부하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으며 일 년에 최대 두 번까지 수확이 가능한 감자는 훌륭한 대안이었다.
특히 재배를 할 때 손이 그리 많이 안 가기 때문에 드넓은 농토에 비해 거주하는 주민이 적은 봉황도와 북해도에서 집중적으로 키운다면 조선 백성들을 다 먹이고 남을 정도의 양을 수확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도현은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앞에 있는 김육과 고 국장의 노고를 칭찬했다.
“수고들 많았네.”
“아니옵니다. 저희는 그저 전하께서 하명하신 대로 따랐을 뿐이옵니다.”
기분이 좋아진 도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재무대신.”
“하교하시옵소서, 전하.”
“이번 감자 재배에 참여한 판적국 관리들에게 각각 금화 오십 개를 상금으로 내리도록 하시오.”
뜻밖의 포상에 김육과 고 국장은 상체를 바닥에 엎드리면서 말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리고 판적국은 감자 재배를 더욱 확대해 백성들의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도록 하라.”
“알겠사옵니다.”
감자를 집어 든 도현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지워질 줄을 몰랐다.
이번에 수확한 것들은 두 달 뒤 씨로 쓸 것들을 제외하고 전량 봉황상단에서 매입해 시중에 판매했다.
시장통 곡물 상점 매대에 감자가 진열되자 초반에는 난생처음 보는 작물에 다들 구입을 꺼려 했다.
그러다가 호기심과 너무나도 저렴한 가격에 조금씩 사 가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기더니, 오래가지 않아 의외로 먹을 만하고 한두 개면 배가 든든할 정도로 포만감이 든다는 소문에 불티나게 팔렸다.
한편 잡과 일자가 점점 다가오자 하루가 다르게 사람들의 신경이 예민해지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밤이면 같은 숙소에 모였다는 이유 하나로 낯선 사람들끼리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소리도 뚝 끊겼고, 잠잘 시간도 아껴 가며 중얼중얼 책을 읽어 대는 통에 마당에 서 있으면 방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으로 대낮처럼 훤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는 박문식과 함께 상경한 일행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다섯 명이 같이 앉아 있으면 다리를 펼 공간도 없을 정도로 협소한 방 안에서 저마다 다른 책을 소리 내어 읽으려고 하니 하루에도 몇 번이나 사소한 말다툼이 벌어지곤 했다.
박문식은 그런 답답한 공기가 싫어서 낮에는 한양 곳곳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히고, 밤에는 시원한 바람이 부는 강가나 정자를 찾아서 술 한 병을 허리에 끼고 드러누워 시를 읊거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당장 시험일이 코앞에 닥친 와중에 이제 와서 책 몇 권 더 읽는다고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이럴 때야말로 평상시에 쌓아 왔던 자신의 실력을 믿고 마음을 평온하게 가다듬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잡과 시험을 치르는 당일.
글자 하나라도 더 머릿속에 집어넣으려고 전날 밤을 새운 일행은 눈 밑에 검은 기미를 축 늘어뜨린 채 기운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반면에, 마음껏 먹고 마시며 돌아다닌 박문식은 피부에 반지르르하니 윤이 흐르고 눈빛엔 총기가 넘쳤으며 양 볼엔 설렘으로 인한 홍조까지 떠올라 있어서 그야말로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자네들 괜찮은가?”
“끄응. 걱정하지 말게나.”
주모가 갖다 준 국밥을 앞에 두고 계집애처럼 깨작거리던 일행은 벌써 한 그릇을 뚝딱 비운 박문식을 보고 부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자넨 아침부터 식성이 좋군그래.”
“아무렴. 오늘을 위해 일부러 멀고 먼 한양까지 와서 기다린 게 아닌가. 결전의 날이 닥쳤으니 꼭 승부를 앞둔 무인처럼 마음이 설레는군.”
“목검 한 번 손에 쥐어 본 적도 없는 주제에 무인은 무슨.”
“말이 그렇다는 거지.”
기분이 저기압이라 슬쩍 시비를 거는 친구의 말도 가볍게 농담으로 웃어넘긴 박문식은, 일행이 식사를 마치는 동안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 이른 아침의 맑은 공기를 깊숙하게 들이마셨다.
일행을 재촉해 잡과 시험장으로 가는 길을 나선 박문식은 아직 해가 제대로 뜨지도 않은 이른 새벽녘인데도 불구하고 길거리에 행인들이 많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세히 살펴보니 대부분 등에 작은 봇짐을 메고 의관을 정갈하게 갖추고 있어, 한양에 사는 일반 서민들이 아니라 박문식처럼 잡과를 치르기 위해 일찍 나선 사람들임에 틀림없었다.
새벽의 옅은 안개를 가르며 많은 사람들이 다 똑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니 그제야 뒤늦게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대궐까지 가는 길 내내 일행은 아무런 말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도 긴장감이 섞인 침묵을 지키며 묵묵히 발만 움직였다.
그리고 이윽고 입구에 다다르자, 각자 응시하는 아문衙門별로 시험장이 나뉘어 있어 거기서부터 몇 갈래로 다시 사람들의 행렬이 갈라졌다.
왜국어 실력을 살리고 싶은 박문식은 외무부로, 다른 일행은 각자 특기나 희망 사항에 따라 행정부나 재무부 쪽으로 응시하고자 했기에 함께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여기까지였다.
“시험 잘 치르게.”
“행운을 비네.”
입구 앞에서 일행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박문식은 등에 짊어진 작은 봇짐의 끈을 단단히 여미고 기운차게 발을 내디뎠다.
위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 시험장 안으로 들어가니 여태껏 본 것 중에서 가장 넓은 마당에, 딱 한 사람이 양반다리를 하고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멍석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가지런히 배치되어 있었다.
이미 자리는 반 이상 차 있었고, 박문식이 두리번거리고 있는 사이에도 뒤에서 속속 사람들이 들어와 공석을 채웠다.
적당히 빈자리를 찾아 등에 진 봇짐을 옆에 내려놓는데 때마침 붉은색 관복을 입은 감독관이 마루에 올라와 쩌렁쩌렁한 큰 목소리로 고했다.
“곧 외무부 잡과 시험이 시작될 예정이니 혹시 시험장을 잘못 찾았거나, 측간에 다녀오고 싶은 사람은 징이 치기 전에 갔다 오도록 하시오.”
감독관의 말에 주위가 웅성웅성 소란스러워졌다.
옷자락을 부스럭거리며 괜히 꼼지락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한 자라도 더 외우겠다는 심산으로 입속으로 글귀를 중얼대는 자도 있어 다들 이번 시험에 필사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피부로 느껴졌다.
“조용히!”
감독관이 다시 한 번 크게 소리치자 그렇게 부산스러웠던 장내 소음이 순식간에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런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감독관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하급 관리에게 신호를 보냈다.
“폐문하라!”
“문을 닫아라!”
하급 관리가 커다란 징을 손에 들고 내리치는 것과 동시에 시험장 입구를 지키고 있던 위사들이 활짝 열려 있던 문을 닫고 빗장을 가로질렀다.
이제 감독관을 비롯한 관리들이 사용하는 작은 쪽문을 제외하곤 모든 출입구가 막혀 버린 것이다.
“이제 종이를 나눠 줄 테니 응시자들은 각자 들고 온 붓과 벼루를 꺼내 먹을 갈도록 하시오.”
사람들은 감독관의 말에 따라 일제히 먹을 갈기 시작했다.
박문식 또한 고향에서부터 일부러 낑낑거리며 들고 온 낡은 붓과 벼루를 꺼내 시험을 칠 준비를 끝마쳤다.
나란히 앉아 있는 응시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하급 관리가 나눠 준 종이는 일반적으로 서예 연습을 할 때 쓰는 질 낮은 것보다 훨씬 부드럽고 품질이 좋았다.
그리고 미리 바깥에서 써 온 답안지와 바꿔치기 하는 수법을 쓸 수 없게 왼쪽 하단에는 감독관의 네모난 도장까지 찍혀 있었다.
“지금 나눠 준 종이는 다시 지급되지 않으니 실수로 훼손하거나 글을 잘못 쓰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하도록 하시오.”
마지막 주의 사항까지 읊은 감독관은 크흠 헛기침을 하고 이제 진짜 시험 시작을 알리는 징을 직접 내리쳤다.
“주제는 이것이오!”
하급 관리가 주제가 적힌 종이를 가리고 있던 천을 걷어 내자 단번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정해진 시간 내에 주어진 주제를 담아 글을 작성해야만 하는 것이었기에, 대부분은 저마다 고심하는 표정을 지으며 섣불리 붓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대범하게 쓱쓱 써 내려가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박문식이었다.
주제를 보자마자 머릿속으로 재빨리 생각을 정리한 박문식은 자신 있는 손짓으로 붓을 놀리며 텅텅 빈 흰 종이를 막힘없이 채워 나갔다.
단상에서 매같이 날카로운 눈동자로 아래를 주시하고 있는 감독관이나 주변 사람 들이 놀란 표정을 짓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끝까지 다 써 내려간 박문식은 참았던 숨을 후 내뱉으며 붓을 내려놓았다.
“음?”
아직 시험지를 반도 못 채운 사람들이 대다수인 것을 깨닫고 박문식은 눈썹을 올렸다.
‘시간이 꽤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나?’
먹물이 다 마를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리려니 지루함에 절로 하품이 나왔다.
물론 감독관이 보면 미운털이 박힐까 봐 꾸역꾸역 눌러 참긴 했지만.
“시간이 다 됐소! 모두 붓을 놓으시오.”
“으윽.”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이거 한 자만 더 적고!”
감독관이 시험 종료를 알리자마자 뒷줄에서부터 하급 관리들이 시험지를 걷어 갔다.
다리가 저려서 신음성을 내뱉는 소리, 끝까지 시험지를 붙잡고 늘어지며 애원하는 소리 등 여러 가지 소음들로 주위가 소란스러운 가운데, 박문식은 붓과 벼루를 다시 봇짐에 집어넣고 일행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걸어갔다.
“저기 문식이 왔구먼.”
“시험 잘 쳤나?”
벌써 약속 장소에 와 있던 일행이 박문식을 보고 알은척을 했다.
“그저 그렇지, 뭐.”
“우리는 아주 망했네. 문제가 정말 어렵게 나왔어.”
“확실히 예전 잡과 시험 수준이 아니라고들 하더군.”
“망할. 이래서야 합격되는 사람이 있기는 하겠어?”
벌써 어디선가 소문을 듣고 왔는지 주막까지 돌아가는 내내 일행은 각자 치렀던 시험에 대해 이야기하며 혀를 내둘렀다.
어쨌거나 막상 시험을 치르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면서, 아침보다 훨씬 밝은 표정으로 돌아온 일행은 간만에 주모에게 부탁해 얻은 술을 마시며 그간의 고생을 달랬다.
그리고 사흘 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시험 결과를 기다린 일행은 방이 나붙었다는 소식에 다 같이 모여 날 듯이 달려갔다.
벌 떼같이 몰려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방 앞에 선 박문식은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보게, 문식이! 축하하네!”
“드디어 우리 동네에서 합격자가 나오는구먼.”
친구들은 박문식의 어깨를 두들기고 손뼉을 치기도 하면서 아낌없이 축하를 보냈다.
“다들 고맙네.”
하지만 함께 고향에서 올라온 일행 중에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오른 것은 박문식 한 사람뿐이었다.
웃고는 있지만 그 속이 어찌 편하겠는가.
그래도 시샘하거나 질투하는 마음 없이 축하 말을 건네는 친구들이 너무나 고마워 박문식은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좋은 날인데 웃어야지,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
“아무렴, 친구가 출셋길에 오르게 됐으니 우리도 든든한 연줄이 생긴 거나 다름없지 않나.”
“나중에 혹시 볼일이 생기면 모른 척하면 안 되네!”
아쉬운 기색이 남아 있긴 해도 친구들은 박문식을 향해 잘됐다며 연신 흐뭇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들 역시 박문식의 뛰어난 능력을 알고 있었던지라 서출이라는 출신의 벽 때문에 그 재능이 꽃을 피워 보지도 못하고 사그라지는 것을 아쉬워하던 참이었기에, 더욱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하지만 아직 시험이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실기 능력을 평가하는 이 차 시험이 남아 있었기에 박문식은 일행이 떠난 휑한 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냈다.
이제 한양에 더 있어 봤자 할 일도 없다면서 시험에 떨어진 다른 일행은 일찌감치 짐을 싸서 고향으로 돌아간 뒤였다.
불과 일이 주 전만 해도 투숙객들로 북적거렸던 주막 역시 반 이상 손님이 떠났기에 예전의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유, 나리, 그런 골방에 계시지 말고 다른 방으로 옮기시지그래요.”
처음엔 야박하게 대하던 주모도 박문식이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태도를 싹 바꿔 사근사근 말을 걸며 방을 옮겨 주겠다고 자진해서 나서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미 코를 찌르는 고약한 메주 냄새에도 익숙해진 데다 다른 방들과 떨어져 있어 조용한 것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박문식은 주모의 제안을 거절하고 여유롭게 뒹굴뒹굴했다.
외국어 실력을 가늠하는 이 차 시험 날에는 전에 필기시험을 치렀던 마당 대신 작은 방에서 시험관과 왜국어에 능한 외무부 소속 역관을 앞에 두고 시험이 치러졌다.
정면에 있는 큰 책상에는 가장 품계가 높아 보이는 근엄한 표정의 고위 관리를 중심으로 양옆에 한 사람씩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오른쪽에 있는 사내는 필기시험을 감독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박문식이 안으로 들어오자 감독관이었던 관리가 상급자에게 뭔가 귓속말을 했고, 미리 자기네들끼리 오간 이야기가 있는지 누군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음. 자네가 평양에서 온 박문식인가?”
“그렇습니다.”
“필기시험에서는 좋은 답안을 내놓았더군.”
“감사합니다.”
눈앞에서 칭찬을 들으니 다소 쑥스러운 느낌에 박문식은 겸손하게 대꾸했다.
짧은 인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왜국어로 질문이 쏟아졌다.
어디서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 집안은 어떤지 하는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향후 조선과 왜국이 어떻게 교류와 발전을 해 나가야 올바른가 하는 어려운 질문까지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박문식은 그때마다 침착한 태도를 잃지 않고 꼬박꼬박 아는 대로 답변했다.
“이만 됐네. 나가서 내일 있을 최종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게나.”
박문식을 내보낸 다음 관리들은 서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빛을 교환했다.
“초야에 이런 인재가 파묻혀 있었다니 정말 놀랍군.”
“아직 젊은데도 학식이 무척 뛰어나더군요.”
그들은 고개를 내저으며 도현의 혜안에 거듭 감탄했다.
“주상 전하의 결단이 없었다면 저렇게 재능 있는 청년들이 그저 무위도식하며 살았을 거라 생각하니 오싹하기까지 합니다그려.”
“음. 이번 합격생들 중에선 방금 나간 박문식이란 자가 가장 으뜸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다들 쓸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더군.”
“조금만 더 다듬으면 금방 실무도 담당할 수 있을 겁니다.”
안 그래도 지금은 어느 관청이나 다들 일손이 부족해 난리를 치고 있는 지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괜찮은 인재를 발견했다는 생각에 관리들은 희희낙락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합격자 명단을 작성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봐요, 평양에서 온 나리!”
“왜 그러시오?”
가벼운 마음으로 이 차 시험까지 다 끝마친 박문식은 그 동안 쌓인 피로를 한꺼번에 풀려는 듯 바로 주막에 돌아와서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떠서도 도통 이불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꼼지락거리고 있던 박문식은 바깥에서 호들갑을 떨며 이름을 부르는 주모의 고함에 겨우 일어나 눈곱도 떼지 않은 얼굴을 내밀었다.
“그만 주무시고 얼른 나와 봐요. 관청에서 나온 사람이 손님을 찾고 있어요.”
등을 떠미는 손길에 못 이겨 마당으로 나온 박문식은 심부름꾼이 전해 준 두루마리를 펼치고 읽어 보았다.
“뭐래요? 응?”
“어허, 거참, 야단스럽기는.”
뒤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채근하는 주모를 향해 박문식이 눈을 흘겼다.
“아이 참, 궁금한 걸 어째요.”
“별거 아니니까 신경 끄시오.”
주섬주섬 두루마리를 챙긴 박문식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다 주모를 불러 세웠다.
“참, 이제 사람도 많이 빠졌으니 방값 좀 싸게 해 주면 안 되겠소?”
“그거야…… 왜요, 좀 더 묵다 가시게요?”
“음. 앞으로 대궐에 드나들게 될 테니 적당한 집을 찾을 때까지 묵을 장소가 필요해서 말이오.”
“대궐에 출입하다니 그게 무슨 말…… 어머나!”
주모는 팔짝팔짝 뛰며 박문식을 붙잡고 늘어졌다.
“잡과에 합격하신 거유? 아이고! 세상에! 경사 났네!”
마구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주모를 보고 박문식은 껄껄 웃었다.
“경사라고 생각하면 공짜 술이나 한잔 주시던가.”
“당연히 우리 집에서 제일 좋은 술이랑 안주를 준비해 드려야죠.”
주모가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 마당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동안 박문식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루에 앉아 주안상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