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지지 않은 역모의 불씨
여름 더위는 날이 갈수록 더 기승을 부렸다.
특히 한양보다 위도가 낮은 남경은, 한낮이면 바깥출입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찜통더위가 이어졌다.
주작단 남경 지부장으로 큰 상단을 이끄는 상인으로 위장하고 있던 김하방은 어젯밤 은밀히 한양에서 전해진 밀지의 내용을 떠올리며 굳은 표정을 지은 채 방 안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장지문이 드르륵 열리며 건장한 체격에 선이 굵은 인상의 사내가 들어왔다.
“대인, 부르셨습니까?”
“어서 오게. 거기 앉지.”
“예.”
짧게 대답한 사내가 앞에 있는 의자로 와서 앉자 김하방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제 한양에서 밀지가 왔네.”
“…….”
사내의 정체는 김하방과 같은 주작단 단원으로 직책은 조장이고 여차선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일인지 여차선은 별다른 말없이 가만히 그를 바라봤고 김하방도 이런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황보 대학사의 옆에 붙어 매국 행위를 하고 있는 두 역적을 은밀히 제거하라는 지시일세.”
“죽이는 건 어렵지 않지만 바로 조선에서 손을 썼다는 의심을 받게 될 텐데요.”
처음 밀지를 확인했을 때 김하방도 이 부분이 걸렸지만 한양에서 지시가 내려온 이상 조금 무리가 따르더라도 그대로 실행을 해야만 됐다.
“어쩔 수 없지. 그만큼 두 역적의 행동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지 않겠나.”
“그렇군요.”
두 사람이 보기에도 황죽표와 최석호의 행동은 조선에 상당한 위협이었다.
지금 당장은 그리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지만 명나라 내부에서도 조선이 처음부터 돕지 않고 기회를 보다가 만주 지역을 차지했다며 불평하는 자들이 꽤 많았기에 이대로 놔둔다면 상당히 골치 아파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일을 저지를 수는 없으니 최대한 우리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고 조선이 의심받지 않을 방도를 생각해 보게.”
상당히 까다로운 지시였지만 원래 그들이 하는 일치고 쉬운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여차선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가능하면 빨리 처리했으면 좋겠군.”
“그러지요.”
“그럼 나가서 일을 보게.”
“네.”
의자에서 일어난 여차선은 허리를 숙였다가 바로 하고는 김하방의 방을 나갔다.
마당으로 걸어 나온 여차선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하가 옆으로 다가오자 낮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황보 대학사의 저택에 기어 들어간 빈대 두 마리 있지.”
“예.”
“그놈들의 동선과 주변 상황을 자세히 파악해 봐.”
“손을 쓰기로 한 겁니까?”
“그래.”
물음에 여차선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하는 눈을 반짝였다.
“하고 다니는 꼴이 계속 거슬렸는데 잘됐군요.”
“은밀히 진행해야 되는 일이니까 경거망동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움직여.”
“장사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니 염려 마십시오.”
그날 이후부터 남경에 침투해 있던 주작단 단원들은 황죽표와 최석호를 집중적으로 감시하며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자신들이 제거 대상에 오른 것도 모르고 두 사람은 여느 때와 같이 황보 대학사의 소개로 만난 명국 조정 관리와 유력자 들에게 도현의 만행(?)을 알리는 데 열을 올렸다.
이번 만남에서 원하는 성과가 있었는지 황보 대학사가 내준 별채로 돌아온 최석호의 얼굴은 잔뜩 들떠 있었다.
“조선에 진상을 파악할 칙사를 보내도록 힘을 써 주겠다니, 그렇게만 된다면 이제 반은 뜻을 이룬 것이지 않겠습니까?”
맞은편 의자에 앉은 황죽표는 빙긋 미소를 짓고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아직 갈 길이 멀기는 하지만 시작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군.”
“흐흐흐. 황제 폐하의 칙사와 함께 저희가 돌아가면 주상의 표정이 어떨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요.”
“볼 것도 없이 똥 씹은 얼굴이겠지.”
“맞습니다.”
권력과 탐욕에 눈이 먼 두 사람은 외세인 명나라를 등에 업고 도현을 무릎 꿇릴 생각에 벌써부터 희희낙락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뜻대로 된다면 조선은 더욱 명나라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딴 것은 애초에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도현에게 복수를 하고 자신들만 부귀영화를 누리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황죽표는 고려 공민왕 시절 원나라의 힘을 배경으로 온갖 권세를 누린 기철이 되고 싶은지도 몰랐다.
“저, 그런데 예조참판 대감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살짝 미간을 찡그린 황죽표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을 집어 한 모금 마시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자네는 뭐 들은 이야기라도 있나?”
“의금부에서 혹독한 문초를 받고 얼마 전에 효수되어 숭례문 밖에 내걸렸다고 하더군요.”
“대역 죄인으로 붙잡혔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겠지.”
그래도 한때는 뜻을 같이하며 거사를 진행하던 사이였는데 목이 잘려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너무나도 담담한 황죽표의 모습에, 최석호는 내심 고개를 내젓고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지금쯤이면 저희 식솔들에 대한 판결도 이루어졌을 텐데 어찌 됐을지 걱정입니다.”
“주모자의 친족이니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게. 운이 좋다면 살아남아 있겠지.”
“아무리 그래도 피를 나눈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진사 어른은 걱정도 안 되십니까?”
마치 남 이야기를 하듯 말하는 태도에 최석호가 발끈하자 황죽표는 얼굴을 잔뜩 굳힌 채 그를 쳐다봤다.
“나도 사람인 이상 왜 걱정이 되지 않겠나.”
“그런데 왜…….”
“계속 떠올려 봤자 남겨 두고 온 가족 생각에 괴로울 뿐 여기서는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지 않나. 그럴 바에야 모든 걸 다 잊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명나라 조정과 황제를 움직여서 조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하네.”
“으음.”
냉정하게 보였지만 황죽표의 말이 현실적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고 확실한 방법이었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도 역모를 가장 나쁜 죄로 규정하며 가족은 물론이고 일가친척들까지 연좌 죄를 물어 강하게 처벌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기에, 솔직히 최석호도 반쯤은 살아 있는 걸 포기하고 있었다.
“제가 괜한 이야기를 꺼내 마음을 심란하게 해 드린 것 같습니다.”
“아닐세. 우리 둘 다 똑같은 처지인데 내가 어찌 자네 심정을 모르겠나. 지금의 이 울분과 한은 나중에 조선으로 돌아가 아낌없이 다 풀도록 하세나.”
“예.”
식솔들의 목숨이 위험해지고 머나먼 명나라까지 도망쳐야 됐던 근본 원인은 따지고 보면 역모를 꾸미고 실행했기 때문이었지만, 모든 악인이 그렇듯 두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보다는 도현을 원망하며 복수심을 불태웠다.
“그런데 칙사가 간다고 주상이 고분고분 말을 들을지 모르겠습니다.”
약간 불안하다는 듯이 최석호가 말하자 황죽표는 콧방귀를 뀌며 걱정을 일축했다.
“흥. 기고만장해서 날뛰고 있지만 명나라가 나선다면 주상도 어쩔 수 없을 거네. 감히 황제 폐하의 칙명을 무시했다가는 지금까지 참고 지내던 사대부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날 테니 말이야.”
“그렇겠지요.”
“아무렴.”
황죽표는 한 가지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있었는데 도현은 애초에 청나라는 물론이고 명도 조선의 상국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는 거였다.
즉위 전부터 굴욕적인 사대주의를 청산하고 조선이 독자적으로 동아시아의 맹주로 우뚝 서는 걸 원하며 꾸준히 바닥을 다져 왔었다.
그걸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고 사대주의와 유교라는 틀에 박혀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있는 신료들과 사대부의 정신을 깨우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골수 사대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상당수의 사대부들이 예전처럼 맹목적으로 명나라를 떠받들지 않았는데, 그런 성향은 왕당파와 실용 중도파에 속한 이들일수록 더 강했고 이들이 현재 조선의 주류였다.
이건 상당히 큰 차이점이었는데 명나라 황제가 칙사를 보내더라도 황죽표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복수심과 권력욕에 신경이 한쪽으로만 쏠린 황죽표의 눈에는 그런 것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며칠 뒤 어스름하게 노을이 진 늦은 오후 여차선이 은밀히 김하방의 거처를 찾아왔다.
그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김하방은 황죽표와 최석호를 처리할 방도에 대해 물었다.
“어떻게 방법을 찾았나?”
그러자 여차선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직접 손을 쓰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흐음. 그렇겠지.”
어느 정도 예상을 했는지 김하방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생각인가?”
“현재로서는 독을 써서 죽이는 방법뿐인데 시간 여유만 있다면 서서히 중독시켜 의심을 없애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다소 위험이 따르더라도 한 번에 끝내 버릴 계획입니다.”
한 손으로 탐스럽게 기른 턱수염을 매만지며 잠시 고심하던 김하방은 이내 시선을 들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자네 생각대로 하게. 대신 절대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되네.”
“예.”
여차선은 앉은 자세로 허리를 꺾으며 짧게 대답했다.
남경 성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에 위치한 황보 대학사의 저택은 그가 가진 권력과 재력을 상징하듯 마치 작은 궁궐 같았다.
마차가 멈추지 않고 그대로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솟을대문 좌우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쭉 늘어서 있는 담장만 보더라도 저택의 규모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안에는 집주인인 황보 대학사가 머무는 삼 층짜리 전각을 중심으로 별채와 행랑채, 마구간 그리고 커다란 창고까지 전부 다 합치면 몇백 간이나 됐다.
남경 외곽에 드넓은 대농장을 소유한 거부답게 굳게 닫혀 있는 창고 안에는 수만 냥의 돈과 곡식이 가득 쌓여 있었다.
저택의 크기만큼 고용인들도 많아 항상 출입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솟을대문으로 시녀 복장의 젊은 여자가 다가가자 허리에 검을 차고 서 있던 문지기가 알은척을 했다.
“오늘은 좀 늦었네.”
“예.”
“어머니 병세는 어떠시냐?”
“여전하세요.”
시녀가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하자 문지기는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걱정이 많겠구나.”
“…….”
“총관 어른한테 혼나기 전에 어서 들어가거라.”
“네.”
살짝 고개를 숙인 시녀는 종종 걸음으로 문지기를 지나 별채로 갔다.
높다란 담벼락을 몇 번 돌아가자 별채에 딸린 작은 부엌이 나왔는데 아직 점심 준비를 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기에 아무도 없었다.
뭔가 쫓기는 듯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린 시녀는 얼른 부엌으로 들어갔다.
불을 피워 놓은 아궁이에는 커다란 솥이 하나 걸려 있었고, 그 옆에는 나무로 짜서 만든 선반에 여러 가지 그릇들이 깨끗하게 씻겨 놓여 있었다.
선반 앞에 서서 잠시 망설이던 시녀는 이내 결심을 했는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가슴 안쪽에서 작은 자기병을 꺼냈다.
얼마나 작은지 새끼손가락만 했는데 단단히 밀봉된 뚜껑을 연 시녀는 재빨리 별채 손님들한테 올릴 잉어탕에 병 안에 든 가루를 뿌렸다.
점점이 흩뿌려진 가루들을 국자로 살살 휘저어 완전히 녹은 것을 확인한 시녀는 다시 자기병을 가슴 옷자락 사이에 숨기고 식은땀을 훔쳤다.
그리고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잔뜩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펴보고선 급히 부엌을 떠났다.
어젯밤 술을 조금 과하게 먹었는지 황죽표와 최석호는 거의 정오가 다 되어서야 일어나 늦은 점심을 먹었다.
문이 열리며 시녀 두 명이 쟁반에 음식을 한가득 가져와 탁자 위에 내려놨다.
숙취가 다 안 가셨는지 살짝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최석호는 진한 우유 빛깔이 도는 탕을 보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건 무슨 음식이지?”
그러자 시중을 들던 시녀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잉어탕입니다.”
“안 그래도 속이 쓰려서 뜨끈한 게 당겼는데 잘됐군.”
입맛을 다시며 숟가락을 집어 들던 최석호는 황죽표가 국 뚜껑을 그대로 닫고 있는 걸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안 드십니까?”
“비린내가 나서 난 별로군. 자네나 많이 먹게.”
“그럼 다른 거라도 드시지요.”
“알았네.”
계속 권유하는 최석호의 말에 못 이겨 황죽표는 마지못해 숟가락 대신 젓가락을 손에 쥐었다.
밥과 반찬 몇 가지만 깨작거리는 황죽표와 달리 최석호는 진하게 우려진 잉어탕을 바닥까지 싹싹 비워 먹었다.
그렇게 식사를 거의 끝냈을 무렵 갑자기 멀쩡하던 최석호가 두 손으로 자기 목을 움켜잡으며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커컥.”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괴로워하는 모습에 황죽표는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최 진사가 왜 이러는 거냐!”
하지만 옆에서 시중을 들던 시녀들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런!”
와락 표정을 구긴 황죽표는 황급히 최석호를 부축해 일으키려 했지만 그는 다리에 힘이 완전히 풀려 똑바로 서 있지 못했다.
“끄으윽. 끅.”
급기야 입에 게거품을 물며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하자, 황죽표는 일으켜 세우는 걸 포기하고 그를 다시 바닥에 눕히며 시녀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서 의원을 데려와라. 빨리!”
“예. 예.”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시녀 한 명이 더듬거리며 대답하고는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나갔다.
한쪽 다리를 꿇고 바닥에 앉은 황죽표는 여전히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최석호의 앞섶을 풀어 주며 말했다.
“이 사람아! 정신 좀 차려 봐.”
“으으…… 사, 살려 주십…….”
“의원을 데리러 갔으니 조금만 견디게!”
애써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최석호는 바닥을 마구 긁으며 몸을 비틀었다.
급기야 방금 먹은 음식물을 토해 내기까지 했는데 황죽표는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때 연락을 받고 달려왔는지 벌컥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온 총관이 굳은 얼굴로 다가왔다.
“어찌 된 일입니까?”
“모르겠네. 밥을 먹던 중에 갑자기 쓰러지더니 숨을 제대로 못 쉬고 있네.”
“으음.”
바닥에 누워 괴로워하는 최석호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린 총관은 얼른 옆에 앉아 손을 뻗어 그의 눈꺼풀을 벌렸다.
이미 동공이 반쯤 풀려 있었고 호흡은 점점 더 가빠졌다.
급한 마음에 손가락으로 토사물을 끄집어내며 총관이 애를 썼지만 최석호의 상태는 갈수록 안 좋아졌다.
그러다 가래가 가득 찬 듯한 거친 호흡을 크게 한번 내뱉고는 최석호의 몸이 축 늘어졌다.
“커어억.”
눈을 크게 뜬 황죽표가 소리를 내지르며 최석호의 몸을 흔들었지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안 돼! 이 사람아, 어서 눈을 떠 봐.”
“숨이 끊어지셨습니다.”
“그럴 리가 없네. 다시 확인해 보게.”
못 믿겠다는 듯 황죽표가 다그치듯 말하자 총관은 쓰러져 있는 최석호의 목덜미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맥이 하나도 잡히지 않자 총관은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고 황죽표는 침통한 표정으로 힘없이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크흑.”
그때 의원을 데리러 갔던 시녀가 수염을 길게 기른 중년인을 데리고 뒤늦게 나타났다.
“총관 어른, 의원님을 모셔 왔습니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연신 가쁜 숨을 내쉬는 의원을 돌아본 황죽표는 잔뜩 날이 선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이렇게 됐는지 봐주시오.”
“아, 예.”
무거운 분위기에 위축된 의원은 쭈뼛거리면서 쓰러져 있는 최석호에게 다가갔다.
먼저 눈꺼풀을 벌려 본 뒤 바로 손목을 잡으며 지그시 눈을 감고 맥을 찾았다. 하지만 별다른 느낌이 없는지 이번에는 두 손으로 입을 벌려 안을 자세히 살펴봤다.
그러자 입안에 잔뜩 고여 있던 토사물과 함께 시커멓게 죽은피가 볼을 타고 주르륵 옆으로 흘러내렸다.
짧게 혀를 찬 의원은 최석호의 몸에서 손을 떼며 고개를 들었다.
“쯧쯧. 많이 고통스러웠겠구먼.”
“대체 원인이 무엇이오?”
황죽표의 물음에 의원은 단정하듯 대답했다.
“독입니다.”
“……!”
순간 황죽표와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치켜떴다.
“어떻게 그런 일이!”
“피부색이 새파랗게 질리고 검게 죽은피가 입안에 고여 있는 걸 보면 틀림없습니다. 증상으로 볼 때 비상이 아닌가 싶군요.”
비상은 황죽표도 익히 들어 본 극독이었기에 죽어 있는 최석호를 내려다보며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날벼락 같은 상황에 총관은 난처한 표정으로 의원을 보며 물었다.
“언제 독을 먹었다는 건가?”
“글쎄요. 정확한 시각은 알 수 없지만 비상은 효능이 바로 나타나는 독이니 증상이 나타난 그때 섭취한 것이라 보면 될 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총관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고 황죽표가 사납게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그럼 음식에 독이 들어 있었다는 거잖아!”
“일단 좀 진정을 하시고…….”
“지금 내가 그러게 됐나! 어떻게 독이 든 음식을 줄 수가 있는 거야!”
“그럴 수도 있다고 의원이 짐작한 거지,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함께 식사를 하셨는데 황 진사님이 괜찮으신 걸 보면 다른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이익.”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려는 듯한 총관의 말에 인상을 쓰던 황죽표는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맞아. 잉어탕!”
“무슨 말씀이십니까?”
“비린내 때문에 난 손을 안 댔지만, 최 진사는 먹었단 말일세.”
그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다 식은 채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잉어탕을 향했다.
의원이 허리에 차고 있던 침통에서 가느다란 은침을 하나 꺼내 탕 그릇에 살짝 담그자 오래지 않아 끝부분이 시커멓게 변색됐다.
이게 뜻하는 건 단 하나였다.
그걸 보고 표정이 구겨진 총관은 차가운 목소리로 어느새 방 한쪽에 서 있던 건장한 덩치의 하인에게 지시를 내렸다.
“오늘 음식을 만든 자들을 몽땅 잡아와!”
“예, 총관 어른.”
대답을 한 하인은 허둥지둥 밖으로 달려 나갔다.
얼마 있지 않아 별채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을 몽땅 다 불려 와서 엄하게 문초를 했지만, 별달리 의심스러운 점을 발견해 내지 못한 가운데 시녀 한 명이 사라진 걸 뒤늦게 발견하고 급히 찾아 나섰으나 어디서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황궁에서 퇴청하고 돌아온 황보 대학사가 이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해서는 당장 흉수를 찾으라는 불호령이 떨어지며 저택은 또다시 발칵 뒤집혔다.
그때 이번 일을 진행한 여차선이 상단 건물 깊숙한 곳에 위치한 김하방의 집무실을 찾아왔다.
오늘 목표를 처리한다는 걸 알고 있던 김하방은 약간 초조한 얼굴로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무실에 들어선 여차선은 의자에 앉아 있는 김하방을 보며 꾸벅 머리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일은 어찌 됐나?”
다짜고짜 질문부터 던지자 여차선은 살짝 표정을 굳히며 대답했다.
“실패했습니다.”
“뭐야!”
“독을 썼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최석호만 죽고 황죽표는 살아남았습니다.”
“아니, 도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가?”
“무슨 이유에선지 독이 든 음식을 최석호만 먹은 것 같습니다.”
“으음. 억세게 운이 좋은 놈이군.”
“제가 좀 더 치밀하게 움직였어야 했는데, 면목이 없습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김하방은 자책하는 얼굴로 여차선이 고개를 숙이자, 한쪽 손을 살짝 내저으며 나직이 말했다.
“짧은 시간 안에 자네는 최선을 다했지 않나. 단지 그놈이 살 운명이었던 거겠지. 일단 최석호는 제거했으니 절반은 성공한 거라고 할 수 있을 거야. 이번 일로 황죽표도 겁을 먹고 한동안은 얌전히 있지 않겠나?”
김하방이 애써 그를 위로했지만 이런 일은 실패 아니면 성공뿐이라는 걸 잘 아는 여차선의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지금쯤 황보 대학사의 저택은 난리가 났겠군.”
“예.”
“흔적은 남기지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이미 독을 넣은 시녀를 노모와 함께 성 밖으로 빼돌려 멀리 보냈고, 다른 증거도 철저히 인멸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김하방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이야기를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놓친 것이 있는지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피고 당분간은 분위기가 조용해질 때까지 황죽표는 감시만 하고 손을 대지 말게.”
“그냥 이대로 포기하란 말씀입니까?”
제대로 성공을 거두지 못해 자존심이 상했는지 발끈하는 여차선을 보며 김하방이 다독이듯 말했다.
“당분간이라고 하지 않았나. 털을 잔뜩 세우고 경계하고 있는 상대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자칫 꼬리를 잡혀 우리 정체가 탄로 날 위험이 있으니 일단 상황을 살피며 다시 기회를 보자는 걸세. 옛말에 쏟아지는 소나기는 피하라는 이야기도 있지 않나.”
마음 같아서는 오늘 밤이라도 황보 대학사의 저택 담을 넘어 들어가 황죽표의 목을 따고 싶었지만, 김하방의 이야기대로 그건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었기에 여차선은 미간을 모은 채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끄으응. 알겠습니다.”
“곧 다시 기회가 있을 테니 너무 상심하지 말게.”
“예.”
“그럼 가서 쉬도록 해.”
의자에서 일어난 여차선이 방을 나가자 혼자가 된 김하방은 인상을 찡그리고는 머리가 아픈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여차선 앞에서는 괜찮은 듯 대범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번 암살 실패는 상당히 뼈아팠다.
최우선 목표인 황죽표가 멀쩡히 살아 있는 데다 황보 대학사를 비롯한 반조선파 대신들한테 경각심을 줘서 상황이 더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황죽표 때문에 황제가 조선으로 칙사를 파견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에 너무 급하게 서둘러 일을 진행했다는 자책감이 들었지만, 이미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노련한 김하방은 괜한 후회와 아쉬움에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고 이내 뒷수습을 어떻게 할지 고심했다.
한편 조선은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던 잡과가 무사히 다 끝나고 도현이 강경 대처와 무시로 일관하자 사대부들의 반발이 수그러들면서 무자경장으로 조금은 어수선하고 혼란스럽던 분위기가 많이 진정됐다.
아니 사대부들의 불만은 여전했지만 도현에게 충성하는 군부와 여러 가지 개혁 조치로 즉위 당시하고 비교해 몰라볼 정도로 성장한 상인 계층과 일반 백성의 절대적인 지지에 눌려 함부로 나서지 못한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지금까지 온갖 기득권을 누리며 위에서 군림했던 사대부들이 바닥 민심의 눈치를 본다는 것 자체가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고 이제 조선을 이끌어 가는 핵심 축이 양반에서 백성으로 옮겨 가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아직까지는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불안했지만 개혁이 중단 없이 추진되고, 시간이 흘러갈수록 이런 변화는 더욱 단단해지고 대세를 이룰 게 분명했다.
개혁과 함께 도현이 각별히 신경 쓰는 것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국가 재정의 확대와 안정이었다.
아무리 좋은 이상과 목표를 제시한다고 해도 당장 백성들이 굶고 있다면 절대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강력한 왕권의 핵심인 군대를 유지하는 데에도 막대한 재화가 들어갔기에 재정 상태를 적절하게 유지하는 건 도현한테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그걸 위해 수시로 관련 책임자들을 불러 재정 상태를 점검하고 현안을 논의했는데, 오늘도 희정당에서 회의가 열렸다.
“상반기 관세 수입이 얼마나 걷혔다고 했지?”
근엄한 얼굴로 상석에 앉아 있는 도현의 물음에 재무부 회계국장인 도재성이 얼른 대답했다.
“금화 이만 삼천 냥이 조금 넘사옵니다.”
“지난번보다 더 늘었군.”
“예. 명과 왜에 진출한 상단들의 교역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는 추세라 당분간은 관세 수입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상 되옵니다.”
“안 그래도 여기저기 돈 들어갈 곳이 많은데 그거 참 반가운 소식이군. 재무 대신의 주름살이 조금은 펴졌겠어.”
도현의 농담에 김육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아직 매일 채워 넣기 바쁘게 국고에서 빠져나가는 돈을 보면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사옵니다.”
“이거, 괜히 입을 열었다가 본전도 못 건졌군.”
“송구하옵니다.”
“아니야. 재정에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항상 노심초사하며 애를 쓰는 재무부 관리들의 노고는 짐도 익히 알고 있네. 아마 경들이 없었다면 마음 놓고 국정을 운영할 수 없었을 게야.”
도현이 숨은 노력을 알아주고 치하까지 해 주자 김육을 비롯한 재무부 소속 관리들은 황공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숙였다.
“그나저나 상단들의 활약이 대단한가 보군.”
그러자 왼편에 있던 상공대신 유형원이 입을 열었다.
“정말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로 교역에 열정적이옵니다. 얼마 전에는 한상 소속 교역 선단이 루손[呂宋]까지 다녀왔을 정도이옵니다.”
“루손이라면 고산국高山國 아래에 있는 곳이 아닌가?”
“맞사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산국은 지금의 대만이었고 루손은 필리핀을 뜻했는데, 한상의 교역 선단이 단독으로 거기까지 내려갔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거기서 화란 상인뿐만 아니라 원주민과도 교역을 해서 큰 이문을 남겼다고 하옵니다.”
“뱃길이 상당히 험난했을 텐데 거기까지 내려갈 생각을 하다니, 한상에서 정말 큰일을 해냈군.”
“그러게 말이옵니다.”
상단들이 조선이라는 좁은 공간을 벗어나 밖으로 영역을 확대하는 건 아주 고무적인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서로 경쟁을 너무 치열하게 벌이거나 타국에 나가 화를 당하지나 않을지 염려가 됐다.
특히 이 시기에는 동남아시아에서 나는 후추, 설탕, 커피, 진주 같은 특산품을 노린 서양의 침략이 가열되고 해적 활동도 빈번해 더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교역이 잦아지는 만큼 그 과정에서 분쟁이 생길 수 있고 아국 상인들이 불미스러운 일을 당할지도 모르니 거기에 대한 대책을 세워 둬야 될 것이야. 이참에 봉황상단을 중심으로 한 상인 연합체를 하나 만들어 그런 것들에 대해 함께 대처를 하게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경들 생각은 어떤가?”
“확실히 그러면 각 상단들이 중구난방으로 움직이던 것이 없어지겠사옵니다.”
“좋은 생각이신 것 같사옵니다.”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도현은 바로 결정을 내렸다.
“그럼 상공대신이 각 상단 대방들을 불러 일을 한번 추진해 보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야 했지만 이걸 계기로 조선판 동인도회사가 결성되었다.
대충 오늘 논의하기로 한 안건이 다 마무리되자 상체를 편 도현은 좌우를 둘러보며 말했다.
“다른 할 이야기가 있는 사람이 있나?”
그러자 재무대신인 김육이 고개를 들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아뢸 것이 있사옵니다.”
“뭔지 말해 봐.”
“아무래도 금화를 추가로 발행해야 될 것 같사옵니다.”
“얼마나 말인가?”
“못해도 십만 냥은 필요하옵니다.”
어마어마한 액수에 도현은 눈을 크게 떴다.
“십만 냥이나?”
“예.”
“시중에서 쓸 돈이 부족하다고 해서 금화를 새로 찍어 낸 것이 불과 두 달 전인데, 또 그 많은 금액이 필요하단 건가?”
도현이 정색을 하며 묻자 김육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그렇게 됐사옵니다.”
“도대체 이유가 뭔가?”
“그게…….”
선뜻 말을 못 하고 머뭇거리자 도현이 다그치듯 물었다.
“어서 말해 봐.”
“시중에 유통되는 금화가 너무 부족하옵니다.”
“지금까지 발행한 금화가 얼마나 되나?”
“육십오만 냥가량 되옵니다.”
“그런데도 모자라다는 거야?”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도현이 쳐다보자 김육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사정 설명을 했다.
“원래 예상대로라면 충분히 수요를 채울 수 있는 액수였지만 미처 생각지 못한 변수가 하나 있었사옵니다. 재력을 가진 사대부와 부유한 상인 들이 포목이나 곡물 대신 금화를 모아 쟁여 놓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다 보니 찍어 낸 금화가 대부분 유통되지 않고 안방 장롱 속에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정작 저잣거리에는 금화를 구경하기가 힘들 정도이옵니다.”
“허어.”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기존에 조정에서 발행하던 철전들과 달리 자체로 상당한 가치를 지니는 금화였기에, 부유층이 재산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일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화폐로써 시장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겪어야 될 일이기는 했지만, 이것 말고도 여러 가지 해야 될 일이 많은 조정에 금화의 추가 제작은 상당한 부담이 됐다.
당장 주재료인 금金의 수급도 문제였는데 대유동 금광을 비롯해 여러 곳의 광산을 개발해 채굴 중이지만 한 해에 캘 수 있는 양은 한정되어 있었다.
물론 무리를 하면 시간이야 조금 걸리겠지만 채굴량을 늘릴 수 있고, 도현이 내탕금으로 가지고 있는 금괴가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비상용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유한 금을 탈탈 털어 금화를 찍어 내는 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언 발에 오줌 누는 것에 불과했다.
“또다시 금화를 발행한다고 해서 그것들이 부유층의 장롱과 곳간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 않나?”
“그렇기는 하지만 이대로 놔둔다면 은화의 유통까지 영향을 미쳐 장기적으로 화폐 사용이 큰 난관에 부딪칠지도 모르옵니다.”
“이거야, 원.”
인상을 잔뜩 구긴 채 도현은 고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이거야말로 진퇴양난이었는데 그렇다고 부유층들이 보관 중인 금화를 강제로 빼앗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 주조용으로 남아 있는 금괴가 얼마나 있나?”
“열 관(40kg)뿐이옵니다.”
원래는 거의 재고가 없었지만 지난달에 대유동을 비롯한 금광들에서 채굴한 금이 재무부로 올라와서 그나마 이 정도를 가지고 있는 거였다.
“그것 가지고는 십만 냥은 고사하고, 반도 주조하기 어렵지 않나?”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도현이 말하자 김육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해서 임시로 재무부에서 예비비로 보관 중인 금괴를 전용했으면 하옵니다.”
“으음.”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걸 보면 상황이 어지간히 급하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잠시 고심하던 도현은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는 장 총관을 돌아보며 말했다.
“국고에 있는 금괴는 말 그대로 나라에 큰일이 났을 때를 대비한 건데 함부로 쓰는 건 곤란하지. 장 총관, 이번에 채굴된 금 중에 왕실 몫으로 배당된 것이 얼마나 되지?”
“이십 관이 조금 넘사옵니다.”
“흠. 그래도 부족한데…….”
손가락으로 서탁 끝을 툭툭 두드리며 도현이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장 총관이 해결책을 하나 제시했다.
“금을 마련할 방도가 아주 없는 건 아니옵니다.”
“그게 뭔가?”
“실은 장기長崎(나가사키)에 있는 저희 상관으로 얼마 전 사쓰마 번주인 시마즈 미쓰히사[島津光久]가 보낸 상인이 하나 찾아왔었사옵니다.”
갑자기 왜국 번주 이야기가 왜 나오나 싶었지만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하는 마음에 도현은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경청했다.
“거기서 은밀한 제안을 하나 해 왔는데 화포와 화약을 대량으로 구입하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화포를?”
“예.”
전쟁 무기인 화포의 용도는 하나뿐이었기에 도현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사쓰마 번에 무슨 일이 있나?”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인접한 구마모토 번을 공격할 생각인 것 같사옵니다.”
구마모토 번이라면 임진왜란 때 조선 침공의 선봉에 섰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초대 번주가 됐던 곳으로 지금은 호소카와 가문으로 주인이 바뀌었지만, 사쓰마와 함께 구주(규슈) 지역의 유력한 번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답이 나왔는데, 철옹성으로 이름 높은 구마모토 성을 공략하기 위해 화포가 필요한 것이었다.
이 시대의 일반적인 왜국 장수들과 달리 포위 공격이나 병력을 끊임없이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화포를 쓸 발상을 했다는 것에 도현은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강한 경계심이 들었다.
“저희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래도 아군의 핵심 무기인 화포를 언제 적으로 변할지 모르는 왜국에 판다는 건 아무래도 꺼림칙하군.”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사옵니다만 아군이 쓰는 화포 말고 지난번 전쟁에서 노획한 청군의 홍이포라면 넘겨줘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홍이포?”
심드렁하던 도현이 상체를 살짝 앞으로 숙이면서 관심을 보이자 장 총관이 보다 자세히 설명을 했다.
“아군 화포에 비해 성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들이니 큰 위협이 되지 않을 테고, 제가 파악하기로 노획돼 군부 창고에 보관 중인 물량이 서른 문에 달하니 그냥 용광로에 넣어 재활용하는 것보다 사쓰마 번에 비싼 값을 받고 파는 게 더 이득이라 생각하옵니다.”
장 총관의 의견이 그럴듯하게 들리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필요한 금을 모두 마련할 수 있을 것 같나?”
“화포는 조총과 달리 왜국의 제작 기술이 형편없어 비싸게 거래되는 데다 사쓰마 번은 자체적으로 큰 금광을 소유하고 있는 부유한 곳이니, 교섭만 잘하면 가능할 것이옵니다.”
“좋아. 그 문제는 장 총관이 책임지고 군부와 협력해서 한번 일을 추진해 봐. 대신 어떤 경우에서도 아국의 화포 기술이 넘어가서는 안 될 것이야.”
“명심하겠사옵니다.”
다시 김육에게 시선을 돌린 도현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사정이 다급하다고 하니 일단 재무부가 보관 중인 것과 봉황상단에서 왕실 몫의 금을 받아 되는 만큼 금화를 찍어 내도록 하게. 사쓰마 번과 교섭이 잘돼 화포를 팔게 되면 그것도 주조용으로 쓰고 말이야.”
급한 불을 끄게 되자 김육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이번에는 이렇게 넘기지만 언제까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금화를 계속해서 만들어 낼 수는 없으니, 부유층의 주머니에 든 돈을 밖으로 꺼낼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될 것이오.”
이어진 도현의 말에 김육과 재무부 소속 관리들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문제점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만 그들로서도 마땅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임금인 도현에게 방법이 없다고 하는 건 스스로 무능력하다는 걸 인정하는 거였기에 그러지도 못했다.
관리들이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우물쭈물 눈치만 보자 도현이 살짝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자고로 돈이란 물처럼 한곳에 고여 있으면 썩어 버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니, 여기저기로 잘 흐르게 만들어야 될 것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부유층들이 꽁꽁 숨겨 두고 있는 장롱 속 돈이 밖으로 나오도록 해야 되겠지.”
“그게 쉽지가 않으니 문제 아니겠사옵니까.”
김육이 한탄하듯 말하자 도현은 버럭 호통을 쳤다.
“그래서 이대로 포기하고 그냥 놔두겠다는 겐가!”
“그, 그건 아닙니다.”
“통화량이 부족해질 때마다 다시 금화를 주조해서 계속 시장에 푸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고 장기화되면 화폐의 값어치를 떨어뜨리고 국가 재정마저 흔들리게 하는 것이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해서 은행을 설립해 돈이 정상적으로 돌도록 만들어야겠어.”
처음 들어 보는 단어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엇이옵니까?”
“간단히 말하면 백성들로부터 돈을 위탁받아 보관하면서 그걸 가지고 다른 곳에 굴려 일정한 이익금을 붙여 주고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맡긴 자금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거야.”
여각과 객주에서 상인들이 가져온 물건을 담보로 자금을 융통해 주거나 판매 대금을 받아 저리로 보관해 주기도 했고, 또 시변時邊이라고 해서 돈이 필요한 사람과 전주 사이에 끼어 다리를 놔주고 소개비를 받는 일종의 금융 행위가 조선에도 있었기에 도현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았다.
특히 상인 집안 출신인 도재성 회계국장은 이런 것이 아주 익숙했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야기를 했다.
“방금 말씀하신 것들은 이미 여각과 객주 그리고 시변을 통해 행해지고 있는 것이지 않사옵니까?”
“맞아. 하지만 그것들은 이용하는 대상이 한정되어 있고 거래 규모도 일정액을 넘기 힘드니, 화폐유통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지. 짐은 이런 기능을 모두 합친 은행을 세워 모든 백성들이 이용하도록 하려는 게야.”
“좋은 생각이긴 하옵니다만 과연 백성들한테 그만한 여윳돈이 있겠사옵니까? 그리고 설사 있다 해도 얼마 안 되는 푼돈일 텐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고 무엇보다 자기 돈을 뭘 믿고 은행에 맡기려고 하겠습니까?”
김육을 비롯한 관리들은 은행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도현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리 작은 돈이라고 해도 열 명, 백 명의 것이 모이면 태산처럼 커지는 법이지. 그리고 은행을 다른 곳이 아닌 왕실에서 직접 보증한다면 어떻겠나?”
“……!”
뜻밖의 이야기에 관리들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지만 고귀한 왕실에서 돈놀이를 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대신들 중에 개혁적인 인사에 속하는 김육마저 정색을 하며 반대 의견을 표시했다.
“왕실의 체통에 누가 되는 일이옵니다.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그러자 도현은 손바닥으로 앞에 있던 서탁을 내려치며 언성을 높였다.
“이미 봉황상단을 통해 왕실이 여러 사업에 직간접적으로 손을 대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란 말이오!”
“하오나…….”
“돈은 천한 것이 아니라 몸속을 흐르는 피처럼 나라를 유지하고 운영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라는 걸 아직도 모르겠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재무대신은 짐의 뜻을 알아줄 거라 생각했는데, 실망이오.”
“송구하옵니다.”
“경이 지적한 대로 돈을 떼일까 불안해할 백성들도 왕실이 보증을 선다면 마음이 놓이지 않겠소. 이렇게 모인 자금을 필요한 곳에 대출해 주고 이자를 받는다면 각 상단들은 돈을 쉽게 융통해서 좋고 백성들은 그냥 놔두면 장롱 속에서 잠자고 있을 쌈짓돈을 조금이나마 불려 갈 수 있으니, 이거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니오. 거기다 은행이 정상적으로 운영이 되면 부유층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곳간에 넣어 두기보다는 금화를 꺼내 예치시킬 테니 화폐 부족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오.”
도현이 제시한 것보다 좋은 대안이 없었기에 어느덧 관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도현은 결론을 내며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재무부에서는 은행 설립에 필요한 법령과 제반 사항 들을 소상히 파악해 빠른 시간 안에 일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그렇게 조선 최초의 은행인 왕립조선은행이 탄생하게 됐다.
자본금은 새로 주조하기로 결정된 금화 가운데 왕실 몫만큼을 집어넣기로 했는데 그 액수가 무려 육만 냥에 달했다.
그리고 재무부도 일만 냥가량을 투자해 지분 비율은 왕실과 조정이 팔 대 이의 비율로 나눠 가지기로 최종 결정했다.
은행의 활성화를 위해 반강제적으로 당상관 이상의 고위 관리들에게 통장이라는 걸 만들어 일정액을 예치시키도록 했다.
도현도 금화 일만 냥의 내탕금을 은행에 맡겨 솔선수범을 했다.
은행의 용도를 제일 먼저 알아본 건 금전 감각이 밝은 상인들이었다.
크고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소상인들은 재산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조금이라도 이자를 받기 위해 돈을 맡겼고 한상이나 만상 같은 대규모 상단들은 나날이 성장하는 대외교역을 늘리기 위한 자금을 은행에서 빌려 충당했다.
바로 도현이 원하던 자본의 선순환이었는데, 이걸 통해 예전보다 쉽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된 상단들은 대외교역을 보다 활발하게 추진했고, 이제 막 가내수공업에서 벗어나 태동하기 시작한 공장들도 덩치를 키워 나갈 수 있었다.
정말로 약속한 날짜에 단 한 푼도 떼먹지 않고 이자가 지급되자 긴가민가하던 백성들도 은행에 돈을 맡기기 시작했다.
여기서 도현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그동안 꾸준한 개혁과 민초들의 삶을 쥐어짜는 여러 가지 폐단을 척결한 결과 백성들이 움켜쥐고 있던 돈이 예상보다 훨씬 많다는 거였다.
온갖 구실을 붙여 수탈해 가던 탐관오리들이 사라지고 혹독한 계약 조건으로 겨우 입에 풀칠만 할 수 있게 해 주던 대지주의 횡포가 근절되자, 백성들은 조금씩이나마 돈을 주머니에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타고난 근면 성실성으로 백성들은 조그만 텃밭에 야채며 담뱃잎을 키워 내다 팔거나 추운 겨울철이면 방 안에서 새끼를 꼬아 짚신을 만드는 등, 한시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그렇게 해서 한 푼 두 푼 모아 둔 돈을 백성들이 소문을 듣고 은행으로 가져왔는데, 그 금액이 금화 일만 냥이 넘어 도현과 재무부 관리들을 놀라게 했다.
이렇게 은행이 인기를 끌자 왕실에서 돈놀이를 한다며 비아냥거리던 사대부들도 어느 순간부터는 은근슬쩍 가지고 있던 재물을 맡기고 이자를 받아 갔다.
이 모든 일은 시간이 한참 지난 뒤의 이야기였고, 지금은 이제 막 은행을 설립하기 위해 준비를 하는 단계에 불과했다.
한편 무자경장으로 촉발된 여러 가지 개혁 작업을 진행하고 내정을 안정화시키느라 관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때 군부도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를 상당히 알차게 보내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조선군은 규모와 전력이 전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쉴 틈 없이 계속 이어진 전쟁으로 인해 한계 상황에 봉착해 있었다.
병사들은 피로가 가득 쌓여 있었고 전력의 거의 대부분이 청과 국경을 마주 보고 있는 봉황도에 몰려 있어 도성을 제외하고는 방어가 상당히 취약했다.
그나마 수군이 든든하게 바다를 지켜 주고 있었기에 다행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왜구라도 쳐들어올까 봐 전전긍긍해야 될 정도였다.
그래서 도현이 더 필사적으로 심양을 사수했는지도 몰랐는데, 봉황도가 무너지면 도성인 한양까지 말 그대로 무인지경이었다.
물론 후방에 편성된 다른 군단들이 있었지만 서류상으로만 존재할 뿐 대부분의 병력과 장비를 심양 방어전에 몰아준 상태였기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만약 청나라가 태후와 예친왕으로 갈려 권력 다툼을 벌이지 않고 대군을 동원해서 재차 공격해 왔다면 아무리 도현이라도 심양을 지켜 내기 어려웠을지도 몰랐다.
아무튼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전쟁에서도 승리한 조선군은 천금 같은 시간을 단 일각도 허투루 쓰지 않고 취약점을 보강하고 전열을 재정비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조선군은 다시 싸울 수 있는 상태로 체력을 회복할 수 있었고 병력도 충원돼 후방 군단들도 이제 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정도가 됐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 들어온 신병들이 제대로 한 사람 몫을 하도록 만들기 위해 각 군영마다 훈련이 계속해서 실시됐다.
“발사!”
더운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갑옷에 투구까지 쓴 유혁연의 우렁찬 구령에 신형 조총을 들고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전방 과녁을 겨누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탕! 타탕! 탕! 탕!
콩 볶는 듯한 소리와 함께 주위를 뒤덮은 새하얀 화약 연기가 강에서 불어온 바람에 금방 옆으로 흩어졌다.
병기창 장인들의 노력으로 총격 시에 발생하는 화약 연기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스무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한꺼번에 조총을 쏴서 그런지 순간적으로 시야가 가릴 정도로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잠시 뒤 과녁을 살핀 유혁연은 와락 인상을 썼다.
“명중을 못 시킨 놈들은 당장 옆으로 빠져!”
그러자 절반을 약간 넘긴 인원이 고개를 숙인 채 사대射臺 옆으로 갔는데 거기에는 이미 비슷한 처지의 병사들이 조총을 한쪽에 세워 두고는 땡볕에 땀을 뻘뻘 흘리며 기합을 받고 있었다.
“이것도 하나 못 맞히면 어쩌자는 거야!”
구멍 하나 없이 깨끗한 과녁을 보며 유혁연이 한심하다는 듯이 투덜거리자 옆에 있던 부관이 애써 좋은 쪽으로 이야기를 했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좋아졌지 않습니까.”
“하긴.”
불과 얼마 전 보충 병력이라고 한양에서 신병들이 도착했을 때를 떠올린 유혁연은 절로 이맛살을 찡그렸다.
잔뜩 겁먹은 얼굴로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모습에 한숨만 나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처음 강변 백사장에 데려와 사격 훈련을 실시하자 명중은 고사하고 제대로 방아쇠를 당기는 놈이 없었고 몇몇은 총성에 놀라 엉덩이를 들어 올린 채 땅에 머리를 파묻고 벌벌 떠는 추태까지 보였다.
거기다가 오늘처럼 사대에서 직접 훈련을 지휘하던 유혁연은 오발된 총탄에 맞아 죽을 뻔했다.
그런 거에 비하면 과녁에 명중은 못 시켰지만 총을 똑바로 들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만으로도 크게 발전한 거였다.
“후우! 이것들을 언제 군인으로 만들어서 써먹으라는 건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으며 푸념을 늘어놓은 유혁연은 다시 보충병들을 닦달해 반복해서 사격 훈련을 시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화약 보급이 원활해서 사격 훈련을 충분히 시킬 수 있다는 거였다.
“이번에 또 엉뚱한 곳에다 쏘면 성벽을 한 바퀴 돌게 만들 테니까! 각오들 단단히 해.”
“옛!”
유혁연의 으름장에 병사들은 바짝 얼어서 대답했다.
잠시 뒤 휘하 군관들의 엄격한 통제 속에 사격 훈련이 재개됐다.
타탕! 탕! 탕! 탕!
그래도 아까보다는 조금 나은 자세로 사격을 하는 병사들을 보며 굳어 있던 표정을 조금 풀었을 때 옆에 있던 부관이 말을 걸었다.
“사직 어른.”
“왜?”
“저기 좀 보십시오.”
부관이 한쪽 팔을 들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자 일단의 병사들이 포가 위에 놓인 화포를 튼실한 군마와 연결해 나루터로 옮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요?”
“창고에 보관 중인 홍이포를 봉황상단에 매각한다더니 그건가 보군.”
“홍이포라면 청군한테 노획한 화포 말씀입니까?”
“맞네.”
이야기를 들은 부관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상단에서 화포는 뭐에 쓰려고 가져간답니까?”
“난들 알겠나. 우리가 쓰기에는 성능이 떨어지니까 녹여서 재활용이라도 하려나 보지.”
“옮기는 비용이 더 들겠습니다.”
그러자 유혁연은 한쪽 손을 내저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병사들 훈련이나 잘 지켜봐.”
“……예.”
괜히 한 소리를 들은 부관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사격 훈련이 한참인 병사들 옆을 지나간 화포 행렬은 강변 나루터에서 정박해 있는 봉황상단 소속 대형 화물선에 선적됐다.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묶어.”
“염려 마십시오.”
청동으로 만들어진 홍이포는 포신 무게만 무려 팔십 관(300kg)이 넘어 사람이 손으로 옮기기 어려웠다.
다행스럽게도 뱃길로 운반되는 보급품 등을 손쉽게 하역하기 위해서 나루터에 거중기가 설치되어 있어 선원들은 무거운 홍이포를 큰 어려움 없이 화물선에 선적할 수 있었다.
“더 세게 당겨!”
“으차! 으차!”
행수로 승진해 이번 사쓰마 번과의 거래를 맡게 된 임지혁은 단단한 쇠사슬에 묶여 하나씩 화물선에 실리고 있는 홍이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성능에는 이상이 없겠지?”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상단 직원이 얼른 대답했다.
“창고에서 꺼내 일일이 한 발씩 쏴 보고 확인했고 아군 포병들이 깔끔하게 손질도 해 줬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수고 많았네.”
“아닙니다.”
금 이십 관을 받는 대신 봉황상단은 홍이포 삼십오 문과 화약 그리고 포탄으로 쓸 철환을 사쓰마 번에 넘겨주기로 했다.
원래 사쓰마 번에서 원했던 건 화포와 화약뿐이었지만, 교섭에 나선 임지혁은 조선군이 쓰지 않아 대량의 재고가 남아 있는 철환을 마치 선심을 쓰듯 떠넘기면서 판매 금액을 올려 받았다.
조선은 화폐를 주조할 금을 더 확보할 수 있고 사쓰마 번도 어차피 화포를 쓰려면 포탄이 필요했기에 서로가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흘러 선적이 모두 끝나자 작업을 감독하던 선장이 임지혁에게 다가왔다.
“행수님, 출발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알겠소.”
고개를 끄덕인 임지혁은 혹시 빠진 것이 없는지 나루터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상단 직원과 함께 화물선에 올라탔다.
잠시 뒤 홍이포와 다른 화물을 나눠 실은 배 두 척은 천천히 흐르는 강물을 따라 하류로 내려갔다.
바다와 만나는 강 하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군 판옥선 세척과 합류한 선단은 곧장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사쓰마 번이 다스리는 녹아도鹿兒島(가고시마)로 향했다.
그리고 팔월이 되기 전에 대금으로 받은 금을 가득 싣고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다.
더위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는 가운데 예전 같으면 작년에 추수한 곡식이 다 떨어져 한참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어야 했지만, 새로 재배하기 시작한 감자와 안남국安南國에서 들여오는 쌀 덕분에 백성들은 배를 곯지 않고 오히려 풍족하게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국경 지역도 예친왕과 태후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면서 청나라가 외부에 눈을 돌릴 상황이 아니었기에, 불안하지만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그런 어느 날 우의정 자리를 내려놓고 낙향해 있던 송시열한테 대궐에서 선전관이 나와 도현이 그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갑자기 자신을 왜 찾는지 의아했지만 국왕의 부름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송시열은 부랴부랴 선전관과 함께 한양으로 올라왔다.
푸르름이 가득한 창덕궁 후원 길을 지난 송시열은 부용정에 도착했다.
두 개의 기둥이 연못 안으로 들어간 특이한 형태로 지어진 부용정은 통풍이 잘돼 무더운 여름날에도 시원했는데, 도현이 휴식을 취하거나 가끔씩 신하들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때 애용하는 곳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창가에 앉은 도현은 송시열이 정자 위로 올라온 것도 모르고 연못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 있었다.
그러자 칠현이 작게 헛기침을 해서 인기척을 냈다.
“흐흠. 전하, 우암 대감께서 오셨사옵니다.”
그제야 고개를 돌린 도현은 절을 하며 예를 갖추는 송시열을 반겼다.
“어서 오시오.”
“그동안 옥체 편안하셨사옵니다.”
“덕분에, 우암 대감도 건강이 좋아진 것 같소?”
“낙향해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다 보니 마음이 편해서 그런 것 같사옵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야인으로 돌아갔지만, 역시 산당의 영수이자 이름 높은 대학사답게 속에 뼈가 있는 말을 하는 송시열의 모습에 도현은 내심 실소를 머금으며 이야기를 태연히 받아넘겼다.
“이거, 내가 괜히 잘 지내고 있는 경을 멀리 한양까지 불러 온 건 아닌지 모르겠군.”
“아니옵니다.”
이런 걸 보면 아직 젊은 도현이었지만 수십 년간 정계에서 굴러먹은 능구렁이 같았다.
그때 궁녀 두 명이 시원한 수정과를 내오면서 대화가 잠시 중단됐다.
은은한 계피향이 나는 수정과를 한 모금 마신 도현은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번 역모 사건 처리로 짐한테 섭섭한 점이 많을 것이오.”
“…….”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가장 민감한 문제를 거론하자 송시열은 당혹감과 함께 긴장하며 몸이 살짝 굳었다.
“허나 왕실의 기강을 흔들고 나라를 어지럽히는 큰일을 저질렀으니 그냥 놔둘 수는 없었소.”
“알고 있사옵니다. 다 저희들이 전하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이옵니다.”
“이해해 주니 고맙소.”
다 자업자득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있던 응어리와 섭섭함이 도현의 다독임에 전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풀렸다.
그 뒤로 이런저런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 가던 도현은 뜻밖의 화제를 꺼냈다.
“경은 혹여 고구려에 대해서 아시오?”
스스로 많은 학식을 쌓았다고 자부하는 송시열이지만, 고구려에 대해서는 아는 별로 없는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아주 먼 옛날 이 땅에 있던 나라라는 정도만 알고 있사옵니다.”
“그럴 거요. 짐도 심양 관저에 머물 적에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라는 책을 읽고 고구려라는 나라에 대해서 알게 됐소.”
“그러셨습니까.”
갑자기 왜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는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송시열이 맞장구를 쳤다.
도현은 옛날 기억을 더듬는 듯 잠시 먼 곳을 쳐다보았다.
“통거우에 가면 그 고구려의 역대 왕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광개토대왕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거기에 가 본 적도 있소. 사람 키의 두세 배 높이에 절벽에서 뚝 떼어 낸 듯 단면이 울퉁불퉁한데, 그토록 오랫동안 비바람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거기 새겨진 글자 하나하나를 읽을 수 있을 만큼 보존이 잘되어 있더군. 근처에 사는 시골 사람들은 호태왕비라고 부르며 경외시하고 있었소.”
도현은 지금도 눈을 감으면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있는 커다란 비석의 모습을 생생히 떠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거기 새겨진 글귀를 찬찬히 읽어 보니 나 혼자만 알고 있기엔 아까워서 친히 탁본까지 떠 왔소. 마침 경에게 보여 주려고 들고 왔으니 한번 보지 않겠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송시열은 조정의 관료이자 정치계의 거물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그 전에 지식을 탐구하는 학자이기도 했다.
비록 그 지식이란 것이 성리학에 치우치긴 했으나 어쨌든 학자의 습성이란 기본적으로 몸에 배어 있는 법.
당연히 송시열이 도현의 제안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여봐라.”
“예, 전하.”
칠현은 목곽의 뚜껑을 열고 탁본 두루마리를 송시열에게 내밀었다.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중앙에 묶여 있는 금색 실을 신중한 몸짓으로 풀어 낸 송시열은 학자다운 날카로운 눈초리로 글귀들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이내 탄성을 내뱉었다.
“아! 참으로 훌륭합니다.”
“하하. 경이 그런 칭찬을 하다니 드문 일이로군.”
“단순히 왕의 업적을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건국된 배경과 그 과정을 상세히 설명해 놓아 마치 하나의 역사서처럼 만들어 놓았군요. 그 시절에 이 정도의 비석을 만들 만한 여력이 있었다면 필경 강한 무력과 뛰어난 문화를 겸비한 강대국이었을 겁니다.”
송시열은 연신 감탄을 금치 못하며 탁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는 그중에서도 특히 중간 단락이 마음에 드오.”
도현의 말에 송시열은 시선을 옮겨 광개토대왕의 업적에 대해 칭송한 부분을 읽어 보았다.
거기에는 비석의 주인인 고구려 19대 왕 광개토가 만주를 발아래 정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남쪽 지방에 있던 백제를 정벌하고, 왜구에 시달리던 신라를 구원하여 소국에 대한 드넓은 아량을 보여 줬다고 기술되어 있었는데, 연대순으로 세밀하게 구분되어 있어 기록에 대한 신빙성을 드높여 주었다.
“만약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광개토라는 자는 대왕이란 칭호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군주로군요.”
“흠. 경은 비석의 내용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허나 여기 적힌 것들은 도저히 한 사람이 다 해냈다고는 믿기 힘든 업적이지 않사옵니까.”
송시열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탁본을 두 번 세 번 꼼꼼히 뜯어보더니 이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만약 대왕을 칭송하기 위해 허위로 꾸며 낸 문구라면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연도와 세부 사항들을 기록할 수는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럼 경도 과거 고구려란 나라에 광개토대왕이란 위대한 영웅이 살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거로군.”
“그렇사옵니다.”
“허면 뭔가 느껴지는 것이 없나?”
“무슨 말씀이신지…….”
송시열은 도현의 의중을 읽어 내려는 듯 가는 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우리에게 이런 역사가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그걸 기억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는 못할망정 까맣게 잊은 채 대국을 사대하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 않는가 이 말이오.”
“…….”
송시열은 차마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짐은 우리 한민족의 자긍심을 만대에 드높이고 찬란한 역사를 널리 알리기 위해 책을 하나 편찬할 생각이오.”
“역사서 말씀이십니까?”
“역시 경은 머리가 좋군. 내가 말하지 않아도 금방 깨달으니 훨씬 편해.”
“과찬이십니다.”
겸손하게 대꾸한 송시열은 궁금한 듯 도현에게 물었다.
“허면 누구에게 맡기실 생각이옵니까? 춘추관은 사관의 기록을 정리하는 데만도 바빠 그럴 여유가 없을 테고, 역사서는 보통 서책과는 다르니 그에 마땅한 학식을 가진 자를 추려 내야 할 텐데…….”
머릿속으로 몇 명의 얼굴과 이름이 떠올랐지만 다들 하나씩 부족한 점이 있어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을 가려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 송시열을 보고 도현이 은근한 웃음을 지었다.
“마침 내 눈앞에 딱 적당한 사람이 있지 않소.”
“전하!”
송시열은 아니 된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좋지 않은 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자숙의 시간을 갖고 있는 죄인이지 않사옵니까. 조정엔 저 말고도 다른 인재들이 많으니 부디 재고해 주시옵소서.”
“조선 천지에 경만큼 학식 높고 명망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키워 낸 제자만도 수백이오, 그중 태반은 조정에서 고위 관리직에 올라 있고, 낙향한 지금도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유생이 수도 없이 발걸음을 한다는 소문을 내가 못 듣고 있는 줄 아시오.”
“하오나…….”
“경 말대로 역사서는 다른 일반 서책들과 달라 그에 따른 풍부한 학식과 명망이 없는 자가 맡으면 아무런 권위도 가지지 못하오. 하지만 송시열이 편찬을 맡았다? 분명 만들어지자마자 책을 구하려는 유생들로 난리가 나겠지. 나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우리 민족에 대한 역사서를 읽고 널리 퍼뜨려 줬으면 좋겠소.”
송시열은 깊이 고민하는 표정으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입이 열릴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린 도현은 마침내 송시열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슴없이 기쁜 기색을 드러냈다.
“가진 재주가 미천하오나 그렇게까지 말씀을 하시니 전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잘 생각하였소!”
도현은 자신의 뜻이 통한 것에 매우 흡족해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후대에 길이 남을 역사서를 만들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소.”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솟아나는지 모르겠지만, 언제나처럼 당당하게 단언하는 도현의 말에 송시열 역시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1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