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권-이간계 (64/104)

13권

이간계

시간이 흘러 어느덧 가을이 됐다.

농경지마다 사람 허리만큼 자란 벼들이 무더운 여름 동안 누렇게 잘 익어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풍년이 든 논만 봐도 저절로 배가 부른 농민들은 흥겹게 노동요를 부르면서 다 함께 모여 추수를 시작했다.

후여 후여 후여 후여 후여,

이 새야 오늘만 까먹고,

내일랑 까먹지 마라.

추수를 해 봤자 세금과 지주한테 내는 소작료로 태반을 다 빼앗기고 정작 농사를 지은 자신들은 배를 쫄쫄 굶어야 했던 예전과 달리, 노동의 대가를 확실히 챙길 수 있게 된 농민들은 신바람이 나서 힘든 줄도 모르고 벼를 수확했다.

“개똥 아부지!”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허리를 펴고 일어나 뒤를 돌아본 중년 사내는 마을 아낙네들이 음식이 든 광주리를 하나씩 머리에 이고 걸어오는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참이 왔구만. 이보게들 밥부터 먹고 하세.”

그러자 양옆에 서서 열심히 낫질을 하고 있던 마을 사내들이 이마에 묻은 땀을 소매로 훔쳐 내며 몸을 일으켰다.

“안 그래도 출출했었는데 잘됐구만.”

“나가세.”

한 손에 들고 있던 볏단과 낫을 내려놓은 사내들이 밖으로 걸어 나오자 논둑 위에 아낙네들이 가져온 음식을 펼쳐 놓고는 반갑게 맞이했다.

“아이고. 이 땀 좀 봐.”

“여기 시원한 냉수부터 한잔 마셔요.”

논둑에 털썩 주저앉은 중년 사내는 마누라의 말에 약간은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물은 됐고, 탁주나 한잔 줘 봐.”

“아이 참. 대낮부터 무슨 술이에요?”

“일할 때는 한 잔씩 해야 힘이 나지. 다들 안 그래?”

“하하하. 형님 말이 맞소.”

“으이구.”

평소 같으면 온갖 잔소리를 해 댔겠지만 추수를 하는 날이라 기분이 좋은지 마누라는 투덜거리면서도 광주리에서 막걸리가 든 술병을 꺼내 대접에다가 한가득 따라 줬다.

“여기 있어요.”

“크으. 바로 이 맛이라니까.”

막걸리를 한 모금 들이켠 중년 사내는 참으로 가져온 삶은 감자에 지난겨울 담근 묵은 김치를 한 개 쭉 찢어서 먹었다.

그때 왼편에 있던 남자가 막걸리 대접을 든 채 다른 손으로 무릎을 치면서 한가락 소리했다.

“에헤라! 벼가 누렇게 익은 논을 보며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니 여기가 바로 극락이로구나!”

“얼쑤!”

“그렇지.”

“하하하!”

그렇게 여기뿐만 아니라 조선 곳곳에서 백성들이 연신 웃음을 터트리면서 풍년과 수확의 기쁨을 누렸다.

이건 도현이 있는 대궐도 마찬가지였는데 대풍이 들었다는 농산대신 진대석의 보고에 얼굴 가득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추수가 다 끝나야 정확한 수확량이 집계되겠습니다만 현재까지 상황으로 볼 때, 어림잡아 지난해보다 두 배가량 더 늘어날 것 같사옵니다.”

“두 배라 그것참 반가운 소식이군. 안 그렇소, 총리?”

옆에 있던 총리대신 박황 역시 미소를 띤 얼굴로 대답했다.

“다 주상 전하의 은덕이옵니다.”

“맞사옵니다.”

“추수를 앞두고 삼남 지방에 비가 많이 와서 심려가 컸었는데 결과가 좋다니 정말 다행이오. 관개시설을 확충하고 개량한 농법을 장려해 내년에도 풍년이 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될 것이오.”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농산부는 무자경장을 거치며 새로 생겨난 곳이었는데, 그동안 호조를 비롯해 여러 부처에 흩어져 있던 조직을 하나로 뭉쳐 농업과 어업 관련 업무를 관장하도록 한 아문이었다.

수장인 진대석은 이름난 집안 출신도 아니고 특출 난 자도 아니었지만, 판적국 등 농사를 관장하는 부서에 오래 있으면서 실무에 능하고 농민들의 사정에 밝은 걸 높게 사서 도현이 발탁한 인물이었다.

“풍년이 들었으니 안남安南에서 들여오는 곡물량을 조금 줄여도 되겠군.”

그러자 농산대신 진대석이 살짝 목에 힘을 주며 이야기했다.

“충분히 자급자족할 수 있을 만큼 쌀 수확량이 좋은 데다 조금 있으면 봉황도와 북해도에서 겨울 감자가 나오니, 올해는 배를 띄우지 않아도 될 것 같사옵니다.”

“오호. 그래.”

매년 백성들을 먹일 식량 확보를 위해 상당한 지출을 했었는데 그걸 아낄 수 있다니 도현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돈도 돈이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식량의 자급자족을 이루어 냈다는 것이 그를 기쁘게 만들었다.

“전하, 그렇더라도 안남에서 곡물을 들여와야 하옵니다.”

국방대신인 임경업이 불쑥 말을 꺼내자 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 그렇지?”

“여유가 있을 때 청과의 전쟁에 대비한 군량미를 충분히 확보해야 하는 데다 복속하는 부족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거란족을 먹일 식량이 필요하옵니다.”

“그걸 깜빡했군. 아직도 거란 부족의 복속이 계속되고 있나?”

“예. 이번 달에도 한 부족이 통째로 넘어왔다고 하옵니다.”

“그것참.”

살짝 입맛을 다신 도현은 임경업을 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복속한 거란족이 얼마나 되오?”

“이십일만이 넘었사옵니다.”

조정의 방침에 따라 호패를 발행하고 인적부에 모든 걸 꼼꼼하게 기록한 뒤 관리하고 있었기에 귀화한 거란족이 몇 명이나 되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허어. 그렇게나 많다니.”

“아직 봉황도로 이주한 백성들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데 이렇게 많은 거란족이 들어오는 건 조금 꺼림칙하지 않습니까.”

“그러게 말이오.”

너무 많이 늘어난 거란족 숫자에 대신들이 술렁이며 우려를 나타냈다.

도현도 복속하는 거란 부족이 이렇게까지 늘어날 거라고는 미처 예상 못 했는지 약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거란족의 식량 상황이 나아지지 않은 모양이지?”

“냉해로 워낙 큰 피해를 입어서 회복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필요할 겁니다.”

“사정이 딱하기는 하지만 너무 한꺼번에 많은 이들을 받아들이다 보면 자칫 다 소화를 시키지 못할 우려가 있으니 걱정이군.”

그러자 왼편에 있던 법무대신 송준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더 이상 복속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흐음.”

지금까지 부족한 인구를 확보하기 위해 거란 부족을 받아들이는 걸 긍정적으로 생각하던 도현이 한쪽 손으로 수염을 쓸어내리며 고심하는 모습을 보이자 법무대신 송준길이 재차 이야기를 했다.

“아예 금지하자는 게 아니라 먼저 받아들인 거란족을 어느 정도 동화시켜 부작용을 최소화할 때까지 잠시 유예를 시키는 것이옵니다.”

“신도 법무대신의 의견이 옳은 것 같사옵니다.”

총리인 박황까지 법무대신의 의견에 찬성을 하고 나서자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결정을 내렸다.

“하긴 옛말에도 과한 건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지. 궁내부 대신.”

“예. 하명하시옵소서.”

“봉황도 총독에게 선전관을 보내 더 이상 거란족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궁내부 대신이 머리를 숙이며 대답하자 시선을 돌린 도현은 임경업을 보면서 말했다.

“작금의 상황을 야율보기를 비롯한 거란 대부족 족장들이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할 것 같은데, 분위기가 어떻소?”

“그렇지 않아도 기회를 봐서 전하께 말씀을 드리려고 했사옵니다.”

“무슨 문제가 있나 보군.”

“아무래도 중소 부족들이 이탈해 우리 쪽으로 넘어오면 그만큼 저들의 세력이 줄어드는 것이니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기에 도현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고 임경업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만주에서 청을 몰아낸 우리 조선군의 힘을 겁내는지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고 있었사옵니다. 헌데 얼마 전부터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고 합니다.”

“어떻게 말인가?”

“거란 기병들이 떼를 지어 국경선 주위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중소 부족에 사람을 보내서 조선에 복속을 하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며 협박한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콧등을 찡그렸다.

당장 위협이 되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가만히 있다가 이런 식으로 태도를 바꾸었다는 건 내부적으로 뭔가 변화가 있다는 징조였다.

그리고 그건 조선에 안 좋은 방향일 거라는 것이 도현의 판단이었다.

“대부족 가운데 특히 초흐타 부족이 가장 적대적입니다.”

“초흐타 부족이?”

“예. 얼마 전에는 실제로 우리 쪽에 복속하려던 소부족 하나를 야율보기가 전사들을 끌고 가 전멸시킨 일도 있었사옵니다.”

“그걸 그냥 놔뒀단 말인가!”

복속 의사를 밝힌 부족을 공격하는 건 조선을 치는 것과 똑같이 간주한다는 포고령을 내렸었기에 도현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화를 냈다.

“그것이 조금 애매한 상황이라…….”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해 봐!”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온 일부 주민들이 우리한테 복속하려 했다고 말했지, 공식적으로 뜻을 전달해 오지는 않았습니다.”

“끄으응.”

확실히 그렇다면 바로 보복에 나서는 건 조금 무리였다.

거기다가 봉황도의 안전을 책임진 도독 입장에서는 호시탐탐 심양성을 노리는 청군을 앞에 두고 상당한 전력을 가진 초흐타 부족과 싸움을 벌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었다.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도현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떻게 마무리가 됐나?”

“일단 기병 한 개 연대를 초흐타 부족과 인접한 국경 요새에 전진 배치시키고 야율보기에게 사신을 보내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경고했습니다.”

“그런데도 움츠리는 것이 아니라 자꾸 우리 신경을 건드린다 이거지.”

“……예.”

입을 꾹 다문 도현은 한쪽 손으로 팔걸이 끝을 톡톡 두드리며 잠시 고심을 하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야율보기 이놈이 아무래도 불안하군.”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황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묻자 도현은 뺨을 실룩이면서 말했다.

“우리 뒤통수를 치려 할지도 모른단 말이오.”

“……!”

총리를 비롯한 대신들이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짓는 가운데 도현은 사뭇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국경 지역 방비를 철저히 하고 주작단은 야율보기와 다른 거란 대부족장들의 움직임을 면밀히 주시하도록 하시오.”

“예.”

지시를 받은 임경업과 이완이 크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이는 걸 보며 도현은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전쟁에 승리한 도현이 청국 사람들을 모두 요하遼河 건너편으로 쫓아내자 텅 비었던 봉황도는 조선인 이주민과 복속한 거란 중소 부족민이 대거 유입되면서 다시 빠르게 활기를 되찾았다.

조정은 주민들의 정착을 적극 돕는 한편 새롭게 백성으로 받아들인 거란인들이 조선에 융화될 수 있도록 각종 교육을 통해 동질감과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데 많은 신경을 썼다.

특히 미래 세대인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마을마다 서당을 열어 이주민과 거란인 아이들을 다 함께 모아 역사와 한글을 가르쳤다.

올망졸망 모여 앉아 있는 아이들을 앞에 두고, 수염을 길게 기른 훈장은 고조선의 역사에 대해 일장연설을 해 댔다.

“예로부터 요령과 대동강 유역을 모두 발아래 두고 지배했던 나라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고조선이라 하느니라. 사내들은 충직하고 강인하여 적이 쳐들어오면 용감하게 나가 싸웠고 여인들은 아름답고 현숙하여 나라가 풍요로우니, 저 멀리 진과 한나라까지 그 이름이 널리 퍼졌다고 한다.”

훈장은 물로 입술을 축이고 다시 말을 이었다.

“본디 조선인과 거란인은 같은 땅에서 함께 발을 디디며 살았는데, 훗날 오랜 시간이 지나 고조선이 멸망하면서 반은 남하하여 한반도로 이주했고, 반은 그대로 남아 유목을 하면서 살았는데 그것이 조선과 거란이니라. 비록 아주 먼 옛날 일이라 모두가 잊고 있었지만 우리 민족의 뿌리는 같다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야.”

“훈장님, 그럼 고조선 사람들도 우리처럼 말을 잘 탔나요?”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거란족 아이가 손을 들고 물었다.

“아무렴. 기록에 따르면 말을 자기 수족처럼 부리고 화살을 아주 잘 쏘는 민족이라는 글이 남아 있단다. 거란인은 말과 친하고, 조선인 중에는 명궁이 많으니 이것 또한 우리가 한뿌리라는 것을 알려 주는 사실이지 않겠느냐.”

훈장은 아주 좋은 질문을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지막으로 어제 배웠던 것을 다시 복습해 보자꾸나. 소말타가 한번 대답해 보겠느냐?”

지명을 받은 거란족 아이는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훈장을 쳐다보았다.

“우리 조선의 일 대부터 오 대까지 계보를 순서대로 읊어 보아라.”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정종과 태종이 기틀을 닦으셨으며, 세종께서는 백성을 어여삐 여기시어 한글을 창제하셨는데…….”

“옳거니.”

“그, 그리고…… 음…….”

갑자기 생각이 안 나는 듯 막힘없이 대답하던 아이가 우물거렸다.

“침착하게 잘 생각해 보아라.”

“으…… 아! 문종이십니다. 문종께서 세종의 뒤를 이으셨어요.”

“허허, 잘했다.”

훈장은 칭찬의 표시로 약과를 하나 집어 아이에게 건넸다.

“소말타가 복습을 아주 잘했구나. 방금 말한 것처럼 세종의 뒤를 장남인 문종이 이으셨는데, 세종께서 세상을 뜨신 후 너무 슬퍼하여 옥체를 상하게 할 정도로 아주 효심이 지극한 분이셨느니라. 너희들도 옛 성군을 본받아 부모님을 성심껏 모셔야 한다. 그래야 바른 사람이 되느니라.”

“예.”

“좋아. 그럼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자꾸나.”

“수고하셨습니다, 스승님.”

“그래.”

훈장이 책을 내려놓고 일어서자 아이들은 와아 소리를 지르며 한껏 떠들어 댔다.

그동안 어떻게 참고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재잘재잘 수다를 떠는 소리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지만, 자그마한 아이들이 참새 무리처럼 모여 있는 모습은 사뭇 미소가 지어지는 풍경이기도 했다.

삼삼오오 떼를 지어서 서당을 나가는데 조선인 거란인 할 것 없이 한데 어울려 손을 잡고 어깨동무하며 왁자지껄 소란을 피워 대는 것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한마을에 섞여 살면서 별다른 갈등이나 다툼 없이 사이좋게 잘 지냈다.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진 건 기득권을 가진 사람 없이 양쪽 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함께 고생하며 정착을 했기 때문이었다.

서로 몸을 부대끼고 비지땀을 흘리며 농경지를 만들고 마을을 하나하나 꾸며 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질감이 생겨났다.

여기에 조정 차원에서 복속해 온 거란족을 차별하지 않고 조선인과 동등하게 대우해 준 것도 화합을 하는 데 큰 몫을 했다.

대대로 유목 생활만 해 온 거란족이었지만 조선인 이주민들의 도움으로 농사일을 하나씩 배워 가며 별문제 없이 조선식 생활 방식에 적응해 갔다.

그렇다고 무조선 농사만 짓도록 하지는 않았는데, 유목 민족의 장기를 살려 압록강 인근의 드넓은 초지에 대규모 목장 여러 곳을 조성해서 말과 가축을 키우도록 했다.

이제 시작하는 단계였지만 목장이 제대로 돌아가면 여기저기 쓸모가 많은 말과 육류를 공급해 백성들의 생활을 보다 윤택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난번 전쟁에서 거란족 기병의 효용성을 확인한 조선군은 복속해 온 전사들을 대거 받아들여 기존 기병에 추가 배치해 운용했다.

추적과 사냥 그리고 장기간 야외 생활에 능한 거란 출신 기병은 장점을 살려, 주로 정찰대와 국경 순찰대에 배치됐다.

아타르 부족 출신인 야미르도 그중 하나였는데, 사냥꾼 무리를 이끌었던 전적과 뛰어난 궁술 실력을 인정받아 넓은 국경을 이동하며 감시하는 국경 순찰대 십인장이 됐다.

“워워!”

이히힝.

고삐를 당겨 타고 있던 말을 멈춰 세운 야미르는 재빨리 안장에서 내려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흙바닥을 유심히 살폈다.

“야미르 십인장님, 흔적을 발견하셨습니까?”

같은 거란족 출신 기병 한 명이 옆으로 다가오며 묻는 말에 야미르는 눈가를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누가 야미르야? 개명을 한 지가 언젠데, 앞으로 박태욱이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정색을 하자 무심코 예전 이름을 불렀던 기병은 머쓱한 얼굴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쯧.”

짧게 혀를 찬 박태욱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바닥에 나 있는 발자국으로 볼 때 여길 지나간 지 얼마 안 됐어. 숫자는 양치기가 말한 대로 열 명 내외야.”

박태욱이 지휘하는 순찰대는 방목하고 있던 양 두 마리를 몰래 훔쳐서 달아난 정체불명의 거란족을 쫓고 있는 중이었다.

“이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청국 국경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렇지.”

말 발자국이 나 있는 방향을 잠시 쳐다보던 박태욱은 이내 안장을 양손으로 잡고 말 위에 오르며 이야기를 했다.

“국경을 넘어가면 말짱 꽝이니까 그 전에 잡아야 돼.”

“예.”

“이랴!”

발로 말 옆구리를 세게 걷어찬 박태욱과 기병들은 뿌연 먼지를 피어올리며 끝없이 펼쳐진 벌판을 달려갔다.

두두두두.

그렇게 반나절을 더 추적한 순찰대는 해가 어둑어둑 지는 늦은 오후쯤에 키가 낮은 잡목림 안에 야영지를 세우고 쉬고 있는 목표를 포착할 수 있었다.

“저놈들 같은데요?”

상대가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멀찌감치 말을 세워 두고 부하 두 명만 데리고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바위 무더기 뒤에서 전방을 살피던 박태욱은, 옆에 있던 부하가 나지막하게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군.”

화톳불을 피워 놓고 그 위에 가죽을 벗긴 양 고기를 굽고 있는 걸 보면 양치기가 신고한 그 도둑들이 분명했다.

“아직 우리가 온 걸 모르는 것 같은데 바로 잡아들이죠.”

“그래. 말은 세워 두고 나머지 병사들을 조용히 데려와.”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부하는 살금살금 뒤로 빠져 다른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는 고개 너머로 사라졌고 박태욱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계속 상대를 주시했다.

이렇게 조선군이 자신들을 노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거란족 전사들은 화톳불 주위에 앉아 어느새 군침이 돌 정도로 잘 구워진 양고기를 한 덩어리씩 뜯어 먹었다.

“역시 새끼라서 그런지 살이 야들야들하니 아주 좋네.”

“큭큭큭. 맞아.”

“마유주 남은 거 좀 있으면 꺼내 봐.”

“자.”

동료가 던져 준 가죽 주머니 뚜껑을 열고 벌컥벌컥 들이켠 털보는 더러운 소매로 입가에 묻은 마유주를 스윽 닦았다.

“크으. 좋다.”

“그나저나 양치기 놈을 잡아 죽이지 못한 것이 영 마음에 걸려.”

“운이 좋아 도망쳤지만 그깟 놈이 뭘 할 수 있겠어?”

털보가 가죽 주머니를 내려놓고 한 손에 들고 있던 고깃덩이를 뜯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대머리 사내는 찝찝한 얼굴로 그를 봤다.

“근처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조선군한테 신고할 수도 있잖아.”

“거기서 제일 가까운 요새가 하루 거리야. 그리고 설사 신고를 한다고 해도 양 두 마리 때문에 조선군이 출동할 리가 없잖아.”

“야수케이 말이 맞아.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술이나 한잔 해.”

동료들의 이야기에 대머리 사내는 애써 껄끄러운 마음을 떨쳐 내고는 마유주가 든 가죽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바로 그때 조용히 접근해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조선군 병사들이 박태욱의 커다란 호통과 함께 어둠 속에서 뛰어나왔다.

“모두 꼼짝 마라!”

“뭐, 뭐야?”

“헉!”

화들짝 놀라 옆에 놔둔 무기를 챙겨 들고 벌떡 일어난 거란족들은 활과 검을 들고 이쪽을 겨누고 있는 조선군을 보고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젠장!”

“살고 싶으면 무기를 버려라.”

붉은색 두정피갑을 입은 박태욱의 말에 거란족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무기를 쉽게 버리지 않았다.

“저항한다면 우리도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박태욱이 재차 강한 어조로 위협을 가하자 거란족들은 굳은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그걸 보고 뭔가 이상한 낌새를 차린 박태욱이 부하들한테 경고를 하려는 순간 거란족들이 괴성을 지르며 일제히 앞으로 달려들었다.

“죽어!”

“이야압!”

“이런, 싸워라!”

포위를 하고 위협을 가하면 순순히 항복할 줄 알았던 박태욱은 뜻밖의 상황에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고는 손에 든 검을 휘둘렀다.

채챙! 챙! 챙!

“크아악.”

“컥.”

츄악!

순식간에 한데 뒤엉킨 양쪽은 서로 가지고 있던 병장기를 휘두르면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비명과 함께 사방에서 시뻘건 피가 튀었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거란족 몇 명이 포위를 뚫고 한쪽에 묶어 둔 말을 타고 달아났다.

이히히힝.

자신한테 덤벼든 거란족 한 명의 목을 베어 버린 박태욱은 그걸 보고 와락 얼굴을 구기며 소리쳤다.

“제길! 놓치지 마라.”

그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갑작스러운 싸움에 동료를 몇 명 잃은 부하들은 악에 받쳐 거란족이 그냥 달아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말을 타고 쫓아가기에는 너무 시간이 많이 걸렸기에 조선군 병사들은 등에 메고 있던 활을 꺼내 들었다.

벌써 오십 보 이상 달아난 데다 해가 거의 져서 어두웠지만 유목 민족답게 시력이 좋은 거란 출신 병사들한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슈슉! 슉!

“으윽.”

“끄헉!”

조선군이 쏜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자 등을 보이며 도망치던 적은 피를 뿌리면서 달리던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히익.”

양옆에 있던 동료들이 쓰러지고 졸지에 혼자 남게 된 야수케이는 힐끔 뒤를 돌아보고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말에 채찍질을 가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거리를 벌려 화살 사정거리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든 조선군의 손아귀에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야수케이의 희망은 단단히 화가 난 박태욱에 의해 산산조각 나 버렸다.

그는 국경 순찰대에 있으면서 크고 작은 공을 세우자 상관이 특별히 상으로 내려 준 편전을 꺼내 들고 달아나는 야수케이를 겨눴다.

부하들이 쓰는 일반 활보다 크기가 작았지만 편전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정거리가 길고 파괴력마저 강해 장군들이 입는 비늘갑옷도 그냥 뚫고 들어가 꽂혔다.

박태욱이 호흡을 멈춘 후 당기고 있던 시위를 놓자 팅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앞으로 쭉 날아갔다.

어느새 백 보 이상 벌어진 거리를 단숨에 날아간 화살은 야수케이의 왼쪽 가슴에 정확히 명중했다.

푹.

“큭!”

답답한 신음을 토해 낸 야수케이는 중심을 잃고 힘없이 옆으로 떨어졌다.

“이야아!”

“역시 십인장님이십니다.”

마지막 남은 적이 쓰러지는 걸 보고 부하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그의 활 솜씨를 칭찬했다.

하지만 박태욱은 하나도 기쁘지 않은지 무표정한 얼굴로 편전을 집어넣고는 죽거나 다친 부하들을 보며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상처가 덧나기 전에 어서 부상병들부터 치료해.”

“예.”

부하들이 죽은 동료를 수습하며 소지하고 다니는 구급약을 가져와 부상병을 치료하는 걸 잠시 지켜보던 박태욱은, 몸을 돌려 야수케이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화살에 심장이 꿰뚫리고 낙마할 때 목이 꺾여 버린 야수케이는 시뻘건 선혈을 흘리며 즉사한 상태였다.

한쪽 발로 엎어져 있는 시신을 바로 한 박태욱은 의혹에 찬 눈빛으로 야수케이를 내려다봤다.

양을 두 마리 훔친 죄를 지었지만 관아에 끌려가도 곤장을 몇 대 맞고 강제 노역 두 달이면 풀려날 수 있는데, 죽음을 감수하고 자신들한테 덤벼든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중한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 다니는 수배범이 아닌지 야수케이의 얼굴을 천천히 들여다봤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이맛살을 찌푸린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야수케이의 소지품을 뒤졌다.

그러다가 품속에서 가죽으로 만든 엉성한 옷을 입고 있는 야수케이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을 하나 찾아냈다.

바로 한눈에 봐도 아주 고급스러운 비단 봉투였다.

봉투는 아무나 열어 볼 수 없도록 단단히 밀봉되어 있었다.

뭔가 큰 건을 잡은 것 같은 느낌에 박태욱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봉인을 뜯고 봉투를 열었다.

그러자 안에서 여러 번 접힌 편지가 세 장 나왔다.

편지를 펼치자 한문이 빼곡히 적혀 있었는데 조선군에 들어와서 한글과 함께 기본적인 한문 교육을 받았기에 박태욱은 군데군데 모르는 한자가 있었지만 어렵지 않게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건……!”

놀랍게도 편지는 초흐타 부족 족장인 야율보기가 청나라의 예친왕에게 보내는 거였다.

박태욱과 부하들이 도둑인 줄 알고 쫓았던 야수케이 일당은 사실 야율보기가 예친왕한테 은밀히 보내는 밀사였던 것이다.

놀라운 사실에 눈을 크게 부릅뜬 박태욱은 또 다른 물건이 없는지 야수케이의 몸을 샅샅이 뒤져 보고는 황급히 부하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놈들 중에 살아 있는 자가 있나?”

“없습니다.”

“제기랄!”

박태욱이 발로 땅을 차며 안타까워하자 부하 중 한 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그게…….”

야수케이 일당의 정체를 가르쳐 주려던 박태욱은 조정에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결정을 내리기 전에 많은 사람이 알아서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이내 말을 얼버무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것보다 녀석들이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른 것이 없는지 소지품을 다 뒤져 봐.”

“……예.”

상관의 행동이 어딘지 조금 이상했지만 부하들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지시대로 움직였다.

꼼꼼히 다 살펴봤지만 처음 발견한 밀서 말고는 딱히 특별한 것이 나오지 않자 박태욱은 순찰 임무를 중단하고 야수케이 일당의 시신과 짐을 모두 챙겨서는 서둘러 본대가 있는 요새로 귀환했다.

박태욱이 찾아낸 밀서는 곧장 봉황도 총독의 손을 거쳐 한양에 있는 도현한테 올라갔다.

오랜만에 업무가 빨리 끝나 전라도에서 재배한 녹차를 마시며 쉬고 있던 도현은 이완 단장과 국방대신이 가져온 소식에 크게 진노했다.

“이게 사실이오!”

밀서를 서탁 위에 내려놓은 도현이 살짝 높아진 언성으로 묻자 정색을 한 채 앉아 있던 국방대신 임경업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혹시 몰라 보관하고 있는 야율보기의 서체와 대조해 본 결과 똑같은 걸로 나왔고, 밀서를 가지고 있던 자들도 초흐타 부족원인 걸 확인했사옵니다.”

그러자 도현은 주먹을 쥔 손으로 보료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며 이를 갈았다.

“이 쥐새끼 같은 놈 감히 내 뒤통수를 노려.”

“이걸로 초흐타 부족이 최근 적대적으로 나온 이유가 모두 밝혀졌사옵니다.”

밀서에는 야율보기가 언제든 후방을 칠 준비가 되어 있으니 예친왕의 출병을 종용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초흐타 부족과 예친왕이 손을 잡은 것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건 밀서 내용으로 볼 때 이미 오래전부터 양쪽이 은밀히 교류를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으음.”

이완 단장의 이야기에 도현은 낮게 침음성을 흘리며 눈가를 찌푸렸다.

그러다 이내 눈을 날카롭게 번득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야율보기를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초흐타 부족을 치는 데 병력이 얼마나 필요할 것 같나?”

질문을 받은 임경업은 잠시 생각을 하고는 신중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북방 지역의 전력 증강이 모두 완료돼서 초흐타 부족을 치는 건 한 개 군단 정도만 동원해도 충분할 것이옵니다. 하지만…….”

“왜, 문제라도 있나?”

“이번 일에 초흐타 부족뿐만 아니라 다른 거란 대부족들이 연관되어 있다면 상황이 복잡해질 수도 있습니다.”

도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다른 대부족들의 최근 행보로 볼 때 초흐타 부족과 뭔가 교감이 있다는 의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사옵니다.”

“끄으응.”

썩어도 준치라고 지금은 명과 청에 밀려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사라졌지만, 한때 만리장성을 넘어 화북 지역까지 점령했던 거란족의 저력은 절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성인 남자들은 거의 대부분 숙련된 전사인 유목 민족의 특성상 초흐타 부족만 해도 전쟁이 벌어지면 단시간에 삼만이 넘는 기병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다른 대부족들까지 상대해야 된다면 일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질 수도 있었다.

“일이 고약하게 됐군.”

“이렇게까지 진행되기 전에 제가 미리 파악하고 막았어야 했는데, 면목이 없사옵니다.”

이완 단장이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도현은 한 손을 내저었다.

“아무리 주작단이라고 해도 은밀히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다 파악하기는 어렵겠지. 그렇지만 이번에는 모르고 넘어갔다면 자칫 큰 낭패를 볼 뻔했어.”

“송구하옵니다.”

시선을 돌린 도현은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임경업을 보며 말했다.

“건드리기 껄끄럽다고 등 뒤에서 칼을 갈고 있는 놈들을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겠나?”

“그렇지요.”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며 신속하게 상황을 정리할 방법이 없겠나?”

“글쎄요…….”

상당히 어려운 문제였기에 임경업도 바로 명쾌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얼마간 침묵이 흘렀을 때 이완 단장이 고개를 들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해 보게.”

“초흐타 부족을 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다른 거란 대부족들이 연합해서 우리에게 맞서는 것이 아니옵니까?”

“그렇지.”

“허면 저들이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도록 이간계離間計를 쓰는 것이옵니다.”

“이간계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같은 민족이지만 거란 부족들은 오랜 세월 서로 약탈과 반목을 이어 왔기에 태생적으로 하나로 뭉치기 어려운 관계입니다. 특히 패권 다툼을 벌이는 네 개 대부족은 그 정도가 더 심하지요.”

원래는 다섯 개의 부족이 거란을 지배했지만 그중 우라타 부족이 조선군에 의해 멸망해서 네 개만 남았다.

“계속해 봐.”

도현이 살짝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관심을 보이자 이완 단장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그중에 요산타 부족은 초흐타 부족과의 싸움에서 전대 부족장이 피살당한 일이 있기 때문에 더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바로 그걸 파고든다면 거란족의 연대를 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야기를 듣던 도현은 기발한 생각에 눈을 반짝이며 손바닥으로 무릎을 쳤다.

“그거 괜찮군.”

“확실히 그렇게만 된다면 초흐타 부족을 상대하기가 한결 수월해질 것 같군요.”

임경업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도현은 앞에 있는 이완 단장은 지그시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다.

“주작단에서 처리를 할 수 있겠나?”

“맡겨만 주십시오.”

이완 단장이 자신 있게 대답하자 도현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주작단에서 공작을 펼치는 동안 국방대신은 거란족이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히 초흐타 부족을 칠 준비를 갖추도록 하게.”

“옛.”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하는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보며 도현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감히 내 뒤통수를 치려 한 대가가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겠다.”

며칠 뒤 모종의 임무를 띤 주작단 단원 여러 명이 조용히 한양을 빠져나가 북방으로 사라졌고 선전관이 급히 말을 달려 봉황도와 북해도 총독에게 도현의 칙명을 전달했다.

이렇게 물밑에서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나, 그런 와중에도 잠시 한가로울 때는 있는 법이었다.

점심을 먹고 난 도현이 산책 삼아 후원을 걷고 있는데 저 멀리 숙휘 공주와 궁녀 몇몇이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 덤불을 뒤지는 모습이 보였다.

“숙휘 공주 아니냐?”

도현이 반가워하며 이름을 부르자 숙휘 공주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바마마.”

그런데 어쩐 일인지, 평소라면 마구 애교를 피우면서 달려올 아이가 오늘은 이상하게 머뭇거리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 있느냐?”

“아, 아뇨! 전혀요.”

숙휘 공주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수상한데.”

“아이, 무슨 말씀이세요. 아마마마도, 참!”

아하하 웃으며 얼버무리는 폼이 꼭 사고를 치고 난 뒤에 어떻게든 무마시키려고 하는 연의 모습과 빼다 박은 듯 똑같았다.

“과연 남매긴 남매로구나.”

“네?”

“아무것도 아니다.”

어쨌든 얘가 뭔가 일을 저질렀구나, 싶은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는 상황이라 도현은 더더욱 눈을 가늘게 뜨고 숙휘 공주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

어색하게 웃는 표정 그대로 얼어붙은 숙휘 공주는 도현의 시선을 못 견디겠는지 눈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몸을 배배 꼬았다.

‘조금만 더 압박하면 바로 실토하겠군.’

어쩐지 이 상황이 재밌어진 도현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한심하게 보고 있던 칠현이 옆에서 크흠 헛기침을 했다.

“전하, 아직 뒤에 일정이 많이 남아 있는데 슬슬 돌아가셔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헛.”

칠현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도현은 아직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일거리를 떠올리곤 혀를 찼다.

“쯧. 아쉽군.”

“전하?”

“됐다. 돌아가자.”

도현은 돌아서면서 마지막으로 숙휘 공주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활발한 것도 좋지만 바깥에서 놀다가 혹여 고뿔이라도 걸리면 중전이 걱정할 테니 대충 하고 처소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숙휘 공주가 커다란 눈동자로 도현을 올려다보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 공주를 보고 나니, 다시 의욕이 생긴 도현은 희정당에 돌아와 서탁 앞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보다가 중간에 내려놓은 서류를 다시 집어 드는데 어디서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야옹-.

“……응?”

의아한 표정으로 얼굴을 든 도현은 한구석에 서 있는 칠현이 이외에 아무도 없는 방 안을 휘휘 둘러보고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잘못 들었나.’

별것 아니라 생각하고 다시 상소문에 시선을 내리자, 다시 울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야옹-. 야옹-.

게다가 벽을 박박 긁는 소리까지…….

“야, 칠현아, 방금 그거 들었…….”

도현은 퍼렇게 질린 칠현의 얼굴을 보고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너 뭐 하냐?”

“네? 저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요? 아하하, 도통 무슨 말씀이신지!”

칠현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안색이 창백해져선 속사포처럼 말을 우다다다 쏟아 냈다.

냥-.

“히이익!”

이번엔 제법 울음소리가 크게 들리자 칠현은 감전된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이젠 심지어 식은땀까지 흘려 댔다.

“저, 전하…….”

도움을 청하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도현을 바라보는데, 그 표정이 마치 다 죽어 가는 것 같은지라 도현은 와락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지금 웃음이 나오세요?”

“아니, 네 꼬락서니가 웃긴 걸 어떡해.”

“너무하십니다!”

“알았어, 알았어. 사내자식이 고작 짐승 울음소리 가지고 호들갑 떨기는.”

“그렇지만 아무것도 없는데 소리가 났다고요!”

차마 귀신이란 말은 입에 담지도 못하고 울먹거리는 칠현의 모습에 도현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어디 구석진 데 숨어 있겠지.”

도현은 뒷짐을 지고 일어나 방 안에 있는 장롱이며 병풍 뒤를 뒤져 보았다.

“옳지. 여기 있구나.”

울음소리가 가깝게 나는 곳을 찾다가 작은 자개장 밑에서 고양이를 발견한 도현은 이것 보라며 칠현에게 내밀었다.

“봐라. 그냥 길 잃은 새끼 고양이잖아.”

냥!

도현의 말에 대꾸하듯 짧게 울음소리를 낸 새끼 고양이는 혀를 할짝대며 헝클어진 제 몸의 털을 가다듬었다.

“궁을 헤매다가 사람 오는 발소리를 듣고 급히 숨었는데 그만 좁은 틈에 끼어서 못 나오고 있던 모양이다.”

“허어. 근데 어디서 고양이가 들어왔을까요?”

대궐에서는 함부로 동물 같은 걸 키우지 않는 법이니 도현의 허락이 없으면 안 되는데, 어느 누가 간도 크게 법도를 어겼는지 참으로 궁금했다.

“흐음. 난 대충 짐작이 가는데 말이다.”

도현은 씨익 미소를 짓더니 칠현에게 명했다.

“가서 숙휘 공주를 불러오너라.”

“예.”

칠현이 급히 희정당을 나가 숙휘 공주를 찾으니 아직도 정원을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주상 전하의 부름이란 말에 사뭇 아쉬운 눈빛을 하고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질질 끌며 따라온 숙휘 공주는, 희정당에 도착해 도현이 안고 있는 새끼 고양이를 보자마자 화색을 띠고 외쳤다.

“얼룩아!”

숙휘 공주가 소리치자 작은 접시에 담긴 물을 할짝거리고 있던 새끼 고양이는 귀를 쫑긋 세우고 일어서더니 제 주인을 용케 알아본 것처럼 치마폭에 찰싹 안겨서 애교를 피웠다.

“흐음. 고놈 이름이 얼룩이로구나. 벌써 이름까지 붙였느냐?”

“아…….”

새끼 고양이의 털을 쓰다듬던 숙휘 공주는 어깨를 움찔하고 낭패한 표정으로 입을 가렸다.

“후원에서 찾고 있던 것이 바로 그 고양이지. 그렇지 않느냐?”

“으…….”

어떻게 빠져나갈 방도가 없는 것을 안 숙휘 공주는 도현의 눈치를 보다가 마침내 실토했다.

“죄송해요, 아바마마.”

불호령이 떨어질까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새에 도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게 미안할 짓을 왜 하느냐? 고양이는 어디서 났고?”

최근 들어온 진귀한 동물 선물이라곤 왜국에서 진상한 빌어먹을 원숭이밖에 없는데, 어디서 고양이가 대궐에 들어왔나 싶어 도현이 물었다.

“며칠 전에 정원을 산책하다가 덤불에 걸려서 못 나오고 있는 걸 발견했어요. 궁녀들 말로는 덩치가 작으니 담벼락에 난 작은 구멍을 통해 바깥에서 들어온 게 아닌가 하고…….”

“그렇군.”

다 큰 고양이도 주먹 하나 정도 크기의 틈만 있으면 자유자재로 들락날락거리는데, 저런 새끼 고양이라면 더 작은 구멍도 통과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몰래 키우고 있었단 말이냐?”

“어마마마께서 아시면 당장 돌려보내라 하실 것 같았단 말이에요.”

하긴 중전이라면 그럴 법도 했다.

심양에 있을 때도 길 잃은 고양이가 관저에 들어온 적이 있는데, 처음엔 귀엽다고 아끼다가 나중엔 날리는 털들 때문에 도현이 기침으로 단단히 고생했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한테 숨기는 것은 나쁜 버릇이다.”

“네. 죄송해요.”

완전히 풀이 죽어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숙휘 공주를 보니, 절로 측은한 마음이 일어난 도현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얼굴 하지 마라. 네 귀여운 고양이를 빼앗지는 않을 테니.”

“정말이세요?”

“고양이가 너를 그리 반기는 걸 보니 이미 두 사람 사이가 돈독한 듯한데, 어찌 억지로 갈라놓겠느냐.”

“와아! 감사해요, 아바마마.”

숙휘 공주는 두 볼에 홍조를 띠곤 고양이를 붙잡고 마구 기뻐했다.

“하나 중전한테는 네가 직접 말하도록 해라.”

“어마마마께서 싫다고 하시면 어떡해요?”

“뭐, 가까이 두는 게 고역이라 그렇지 원래 동물을 무턱대고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니 네가 잘 말하면 괜찮을 게다.”

도현은 근엄한 표정으로 미리 못을 박았다.

“그 정도도 못 하겠다면 아예 키울 생각을 하지 마라.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소중한 생명인 것은 똑같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보살필게요!”

숙휘 공주는 새끼 고양이를 품에 안고선 잔뜩 들뜬 표정으로 돌아갔다.

“공주마마께서 무척 신 나신 것 같네요.”

“암만, 주위에 사람이 많아도 정작 마음을 터놓을 곳은 적은 게 대궐 생활이니까. 새 친구가 생긴 듯한 기분이겠지.”

“그렇군요.”

“어쨌든 저렇게 좋아하니 됐어.”

그렇게 말한 도현은 이번에야말로 서류를 집어 들고 업무에 집중했다.

최초로 밀서를 발견해 상부에 보고한 박태욱은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별도의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모든 임무에서 해제돼 주둔지 요새 막사에 머물며 대기 중이었다.

똑똑.

“들어와.”

나무 문을 열고 들어온 박태욱은 요새 사령관인 최덕령 군호에게 절도 있는 자세로 군례를 취했다.

“충! 부르신다는 말씀을 듣고 왔습니다.”

“거기 앉게.”

“예.”

박태욱이 집무실 한쪽에 놓인 의자로 가서 앉자 책상에서 일어난 최덕령 장군이 맞은편에 자리했다.

까마득한 상관과 마주 앉아 있어서 그런지 박태욱은 바짝 긴장해서는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걸 본 최덕령 장군은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 잡아먹으니까 긴장 풀게.”

“예? 아, 예.”

“이번에 아주 큰일을 해냈네.”

최덕령 장군의 칭찬에 박태욱은 고개를 숙이며 겸손하게 대답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후후후. 운도 실력이라고 하지 않나. 아무튼 자네 덕분에 초흐타 부족의 흉계를 사전에 알아차릴 수 있었어. 국방대신은 물론이고 주상 전하께서도 크게 치하를 하셨네.”

“주상 전하께서도 제 이름을 아신단 말씀입니까?”

깜짝 놀란 박태욱의 물음에 최덕령 장군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전하께 올리는 장계에 자네 이름을 적어 넣었으니 모르실 리가 없지.”

“그렇군요.”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박태욱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자네의 공을 높이 사서 정육품 참군으로 진급시키고 따로 금화 오십 냥을 포상금으로 내리셨네.”

최덕령 장군의 말에 박태욱은 크게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내가 왜 자네한테 농을 하겠나. 자, 국방대신께서 직접 수결하신 진급 명령서와 포상금일세.”

비단으로 만들어진 두루마리와 돈주머니를 최덕령 장군이 꺼내 내밀자 박태욱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황송한 얼굴로 건네받았다.

“앞으로도 주상 전하와 조선을 위해 더욱 성심을 다해 일해 주게.”

그러자 박태욱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목숨을 다해 충성하겠습니다.”

“아주 든든하군.”

흡족해한 최덕령 장군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살짝 기대고는 정색을 하며 이야기를 했다.

“자네도 밀서 내용을 봤겠지만 이번 일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네.”

“…….”

“자칫 한동안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던 만주 지역이 다시 전화의 불길에 휩싸일 수도 있는 일이야.”

덩달아 박태욱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그래서 주상께서 모종의 조치를 취할 때까지 밀서에 대해 침묵해 줬으면 좋겠네.”

굳이 설명을 해 주지 않아도 모종의 조치가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박태욱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머리를 끄덕였다.

“제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우겠습니다.”

“고맙군. 조만간 새로운 보직 발령이 내려갈 걸세. 그때까지는 요새에서 머물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럼 가 보게.”

“옛.”

자리에서 일어난 박태욱은 들어왔을 때처럼 최덕령 장군한테 군례를 올리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한편 김근행이 이끄는 일단의 주작단 단원들은 국경에서 거란족으로 위장을 하고는 요산타 부족 영역에 몰래 침투했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짐승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거란족이었다.

“확인했나?”

김근행의 물음에 방금 정탐을 하고 돌아온 단원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정보대로 거란족 삼사십여 명이 게르를 치고 머물고 있었습니다.”

“굴천 부족장의 누이동생은 봤어?”

“비슷한 또래의 여인들이 몇 있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얼굴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으음.”

이맛살을 살짝 찡그린 김근행이 고심하는 표정을 짓자 옆에 있던 김덕생이 입을 열었다.

“이것저것 따질 거 뭐 있습니까. 그냥 계획대로 하시죠.”

“그러다가 목표가 없으면 어찌하나?”

“하지만 적진 한복판에 계속 머물 수도 없지 않습니까?”

“주위에 다른 유목민도 없으니 저들이 맞을 겁니다.”

다른 단원까지 김덕생의 의견을 거들고 나서자 잠시 머뭇거리던 김근행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좋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있어서는 안 돼. 알겠지?”

“예.”

좌우에 둘러서 있는 단원들을 스윽 훑어본 김근행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다.

“한 시진 뒤에 움직인다. 모두 준비해.”

해가 지기 시작하자 말을 타고 돌아다니며 풀을 뜯어 먹으라고 풀어 놨던 가축들을 우리 안으로 몰아넣고 있는 거란족 사내는 옆에 있던 개가 짖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야트막한 언덕 위에 처음 보는 일단의 무리가 석양을 배경으로 주욱 늘어서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왠지 불길한 느낌에 말 머리를 돌려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는 순간 바람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와 그의 가슴에 꽂혔다.

푹.

“커억.”

단말마를 내지른 거란족 사내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그대로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털썩.

화살을 맞은 곳에서 흘러나온 피가 금방 흙을 시뻘겋게 적셨고 바닥에 쓰러진 사내는 점점 감기는 눈으로 아까 봤던 정체불명의 무리가 무기를 빼 들고 말을 탄 채 가족들이 있는 게르로 달려 내려오는 장면이 볼 수 있었다.

챙! 채챙!

“꺄아악.”

“으윽!”

평화롭던 유목민 마을은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으로 인해 한순간에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여기저기서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잘려 나간 시신과 붉은 선혈이 난무했다.

거란족 사내들도 허겁지겁 가지고 있던 무기를 들고 나와 저항했지만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김근행과 주작단 단원들한테는 역부족이었다.

마을 사람들 중에는 노인과 아녀자 그리고 아이도 있었지만 주작단은 독하게 마음을 먹고 병장기를 휘둘렀다.

대적해 봤자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몇몇 부족원들이 두 손을 들고 항복했지만 주작단은 자비를 베풀지 않고 잔인하게 목을 쳐 살해했다.

마을이 있던 곳은 주위가 훤하게 트인 초원인 데다 주작단이 포위 공격을 했기에 단 한 명도 탈출하지 못했다.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고 서산 너머로 해가 질 무렵에는 주작단을 제외하고 아무도 살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상황이 끝나고 시신들 사이에 선 김근행은 착잡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단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목표가 있는지 확인해.”

“예.”

흩어져서 시신들을 살피던 단원 한 명이 뭔가를 찾았는지 한쪽 손을 들며 소리쳤다.

“여기 있습니다!”

김근행이 황급히 다가가자 중년 여인이 등에 화살을 맞고 죽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흠.”

품속에서 여러 번 접힌 종이를 꺼낸 김근행은 초상화와 쓰러져 있는 여인의 얼굴을 비교해 보고는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맞군. 다른 이들의 눈에 띄기 전에 여길 정리하고 떠난다. 어서 서둘러.”

“옛.”

짧게 대답한 단원들은 혹시 살아 있는 자들이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게르에 불을 지른 뒤 서둘러 현장을 떠났다.

말을 타고 가는 주작단 단원 등 뒤로 게르가 불타오르며 생긴 시커먼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비록 임무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약자인 부녀자들을 죽인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 주작단 단원들은 다들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워낙 외진 곳에 뚝 떨어져 있는 마을이다 보니 며칠간 참상이 벌어진 걸 아무도 모르고 있다가 주기적으로 물물교환을 위해 들르던 옆 마을 사람에게 현장이 발견됐다.

그리고 이 소식은 곧바로 요산타 부족의 대족장인 굴천에게 전해졌다.

“운다 일족이 습격을 당했다니 그게 정말이야!”

호랑이 가죽을 씌운 태사의에서 벌떡 일어난 굴천 대족장이 눈을 무섭게 부릅뜨며 게르가 떠나가라 쩌렁쩌렁 고함을 내지르자, 소식을 전하러 왔던 전사는 안절부절못하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근처에 있던 다른 마을 사람들이 찾아갔다고 습격을 받아 불타 있는 운다 일족의 거처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굴사나는 어찌 됐다고 하더냐! 무사하겠지?”

“저, 그게…….”

바로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불길한 느낌이 든 굴천 대족장은 앞에 있는 전사를 무섭게 다그쳤다.

“어서 말해 봐!”

그러자 전사는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안타깝게도 누이동생분도 흉수에게 목숨을 잃으셨답니다.”

“으아아악!”

평소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을 아끼던 굴천 대족장이었기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에 있던 탁자를 발로 차 넘어뜨리며 광분했다.

“족장님!”

“고정하십시오.”

주위에 있던 부하들이 진정을 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굴천 대족장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오히려 더 강하게 분노를 터트렸다.

“내가 지금 가만히 있게 됐어! 도대체 어떤 놈들이 그딴 짓을 저지른 거야.”

“초흐타 부족의 짓 같습니다.”

“뭐야!”

한쪽 무릎을 꿇고 앞에 앉아 있던 전사는 품속에서 부러진 화살대를 하나 꺼내 조심스럽게 굴천 대족장에게 건넸다.

“이건…….”

“현장에서 발견한 겁니다.”

각 부족마다 화살 깃털에 자신을 상징하는 표식을 해 두는데, 전사가 가져온 것처럼 검은색 까마귀 깃털은 초흐타 부족이 쓰는 화살이었다.

“이런 죽일 놈들! 연합을 하자고 해 놓고 뒤로 이딴 짓을 저질러?”

화살대를 움켜쥔 굴천 대족장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원로가 황급히 나서 입을 열었다.

“족장, 아직 확실한 것이 아니니 성급한 판단은 내리지 맙시다.”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굴천 대족장은 원로를 노려보며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다고 그러시오!”

“하지만 화살 같은 건 얼마든지 가짜로 만들 수 있는 것이지 않소.”

“내가 이게 진짜 초흐타 부족이 쓰는 건지 구분도 못 할 정도로 바보인 줄 아시오!”

“그렇지만…….”

어떻게든 싸움을 막아 보려는 원로의 말을 중간에 막은 굴천 대족장은 싸늘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흥! 초흐타 부족은 절대 믿을 수 없는 놈들이오. 선대 부족장도 협상을 하러 갔다가 저들이 비겁하게 기습을 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지 않소!”

선대 부족장은 바로 굴천 족장의 아버지였다.

“으음.”

부족의 치욕이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거론하자 신중할 것을 주장하던 원로도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굴술!”

“예, 아버님.”

건장한 덩치에 조선에서 수입한 사슬 갑옷을 걸친 큰아들 굴술이 대답과 함께 한 걸음 앞으로 나오자 굴천 대족장은 굳은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

“피는 피로 갚아야지. 초흐타 부족을 칠 것이니 전사들을 소집해라!”

“알겠습니다.”

두 손으로 화살대를 부러뜨린 굴천 대족장은 이를 부드득 갈면서 초흐타 부족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뼈까지 갈아 마셔 주겠어.”

소집령이 떨어지자 본부족과 방계 부족에서 거란족 전사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는데 그 숫자가 무려 이만에 육박했다.

전사들이 모이자 굴천 대족장은 즉시 병력을 이끌고 초흐타 부족을 공격했다.

야율보기와 초흐타 부족 입장에서는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조선과 맞닿은 국경만 신경을 쓰고 있던 초흐타 부족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방계 부족 세 개가 잿더미로 변하고 본거지도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조선과 거래를 하면서 힘을 키운 초흐타 부족은 주력이 빠진 불리한 상황에서도 본거지를 빼앗기지 않고 적을 격퇴할 수 있었다.

겨우 위기는 벗어났지만 그 과정에서 피해가 커서 전력의 삼 할을 잃고 말았다.

“고순타 부족도 당했다고.”

“예, 대족장님.”

“이익.”

전투 중에 부상을 당했는지 한쪽 팔에 붕대를 감고 있는 야율보기가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자, 셋째 아들인 야율치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아버님, 제게 전사 오백만 주십시오. 지금 당장 요산타 놈들을 쫓아가서 모조리 다 도륙해 버리고 오겠습니다.”

그러자 첫째인 야율호타가 마뜩지 않다는 듯이 눈가를 찡그리고는 상대를 깔아 보면서 말했다.

“비록 적이 물러갔지만 숫자가 수천이나 되는데 고작 오백으로 뭘 하겠다는 거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뭐요!”

후계자 자리를 두고 서로 은근히 경쟁을 하고 있던 야율치오는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형의 말에 발끈하며 눈을 치켜떴다.

“이게 오냐오냐해 줬더니 형한테 맞먹으려고 들어!”

“흥. 먼저 시비를 걸어온 건 그쪽이 아니오!”

“뭐라!”

가뜩이나 심기가 복잡한데 형제끼리 다툼을 벌이자 짜증이 폭발한 야율보기는 앉아 있던 태사의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세게 내려치며 버럭 호통을 쳤다.

탕!

“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흐흠.”

그때에야 잔뜩 일그러져 있는 야율보기의 얼굴을 본 두 아들은 찔끔한 표정으로 얼른 싸움을 멈추고는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형제끼리 기 싸움이나 하다니, 못난 놈들.”

“…….”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은 야율보기는 이내 보기도 싫다는 듯이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굴천, 이놈이 갑자기 쳐들어온 이유가 도대체 뭐야?”

“그게, 우리가 굴천 대족장의 누이동생을 죽였다는 겁니다.”

“뭐어?”

부하의 말에 야율보기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굴천 대족장뿐만 아니라 다른 요산타 부족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허어.”

황당하다는 듯이 헛바람을 내뱉자 호통을 듣고 조용히 있던 야율호타가 냉큼 끼어들었다.

“보나 마나 우리를 칠 구실을 붙인 거겠지요.”

“맞습니다.”

이번에는 용케 두 형제가 뜻이 맞았는데 게르 안에 모인 다른 이들도 비슷한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야기를 꺼냈던 부하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굴천 대족장의 누이가 죽은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확실해?”

야율보기가 의심스러운 듯 되묻자 부하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누이뿐만 아니라 정체불명의 무리에 습격을 당해 마을 전체가 학살당했다고 합니다.”

“근데 그걸 왜 우리한테 뒤집어씌우는 거야!”

“그것이…….”

바로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자 야율보기는 눈을 가늘게 뜨며 부하를 다그쳤다.

“어서 말하지 못해!”

“학살 현장에서 우리 부족이 쓰는 화살이 다수 발견됐다고 합니다.”

“……!”

이야기를 들은 야율보기는 미간을 찌푸렸고 주위에 있던 이들도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며 술렁였다.

잠시 말이 없던 야율보기는 이내 정색을 한 채 게르 안에 있는 부하들을 훑어봤다.

“나 몰래 손을 쓴 놈이 있는 거야!”

그러자 시선을 받은 이들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누가 그런 엄청난 일을 대족장님 허락도 없이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현장에서 발견됐다는 화살은 뭐야!”

화가 단단히 났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야율보기는 연신 주먹을 꽉 쥔 손을 흔들며 언성을 높였다.

“화살이야, 어떤 식으로든 구해서 갖다 놓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뛰어난 전사이자 기병 천여 명을 이끄는 지휘관인 홀타오의 말에 야율보기는 눈을 위로 치켜떴다.

“그 말은 누가 우릴 함정에 빠뜨렸다는 건가?”

“우리는 한 적이 없고 요산타 부족이 꾸며 낸 게 아니라면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밖에 의심되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다는 거야!”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지만 조사를 해 보면 꼬리가 잡힐 겁니다.”

“으음.”

야율보기가 침음성을 흘리자 원로 중 한 명이 그를 보며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굴천 대족장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 오해를 풀면 되지 않겠습니까?”

“흥. 눈이 완전히 뒤집혀 있는데 놈이 우리 이야기를 믿을 것 같아. 어림도 없지. 그리고 싸움을 벌이기 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이미 큰 피해를 입고 본거지까지 공격당한 이상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

“그럼……?”

원로가 불안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가운데 야율보기는 눈을 날카롭게 번득이며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끝장을 보는 수밖에.”

그날로 초흐타 부족은 갑작스럽게 기습을 해 온 굴천 대족장과 요산타 부족을 성토하며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도현이 한 일이라고는 소수의 인원을 보내 불과 사십여 명을 죽인 것뿐이었지만 그것이 거란족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불신과 원한을 건드리면서 북만주 지역 전체에 거센 피바람을 일으켰다.

두 거대 부족이 전쟁을 벌이자 밑에 딸려 있던 하위 부족들도 덩달아 무기를 들고 나섰고, 싸움은 시간이 갈수록 걷잡을 수 없이 크게 번져 갔다.

나머지 두 대부족은 돌발 상황에 당황하며 가만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지만 굴천 대족장의 누이가 살해되면서 촉발된 전쟁이 거란족 내부의 주도권 다툼으로 변질되어 가면서 언제 불똥이 튈지 몰랐다.

곳곳에서 거란족 전사들이 맞붙어 치열한 싸움을 벌였고 드넓은 초원은 시신과 피로 가득 찼다.

한편 원하는 대로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도현은 얼굴 가득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한동안 초흐타 부족을 걱정할 필요가 없겠군.”

앞에 앉아 있던 이완 단장이 그의 말에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저들끼리 싸우느라 이쪽으로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을 것이옵니다.”

“정말 수고했어. 나중에라도 우리가 개입됐다는 것이 밝혀지면 곤란하니까 입단속을 단단히 시켜 두게.”

“다들 입이 무겁고 믿을 수 있는 단원들이니 염려 마시옵소서.”

“그래.”

시선을 옆으로 돌린 도현은 함께 앉아 있는 국방대신 임경업을 보며 이야기를 이었다.

“병력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소?”

“거란 출신을 중심으로 기병 삼만 명을 별동대로 편성해 국경 인근 요새에 전진배치해서 언제든 출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춰 놓고 있사옵니다.”

“그 정도면 되겠소?”

“모두 혹독한 훈련을 거친 정예들인 데다 기존 병장기 외에도 권총을 소지하고 있어서 접전을 벌여도 결코 밀리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리고 거란족 전체라면 몰라도, 지금처럼 사분오열되어 있으니 초흐타 부족만 골라 치는 거라면 삼만으로도 충분하옵니다.”

임경업이 자신 있게 대답하자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는 초흐타 부족을 완전히 지워 버려야 될 것이오.”

“맡겨만 주십시오.”

“그런데 요산타 부족에서 병장기를 구매하고 싶다는 연락을 해 왔다던데, 사실이오?”

그의 물음에 북만주 지역을 돌아다니는 상인들 사이에 간자를 투입해 두고 있던 이완 단장이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아무래도 그동안 꾸준히 봉황상단과 거래를 해서 우수한 조선제 병장기로 무장한 초흐타 부족 전사들에 비해서 전투력이 열세이다 보니 이런 요구를 해 온 것 같습니다.”

“하긴 우리가 넘겨준 무기로 초흐타 부족의 무장 상태가 좋아지기는 했지.”

“이번에 굴천 대족장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본거지를 기습한 걸 막아 낸 것도 다 그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냥해서 잡은 짐승 가죽을 대충 무두질해서 만든 갑옷에 질 낮은 쇠로 만든 무기를 가진 다른 거란 부족과 달리, 초흐타 부족은 전부는 아니지만 조선에서 만든 뛰어난 병장기와 사슬 갑옷을 전사들한테 지급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요산타 부족은 상당히 고전을 하고 있었는데 만약 초반에 기습 공격을 해서 초흐타 부족 전력의 삼 할을 없애지 않았다면 오히려 역습을 당해 싸움에서 패하고 말았을 것이었다.

그러니 요산타 부족이 조선제 무기를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기를 살 돈은 있다던가?”

“요산타 부족의 영역에 광맥이 풍부한 노천 은광산이 있지 않사옵니까. 물건만 넘겨준다면 은으로 선금을 지급하겠다고 했답니다.”

“상당히 다급한가 보군.”

“서로 전력이 비슷하다면 무기의 차이는 결정적일 테니까요.”

“흐음.”

제법 길게 자란 수염을 한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잠시 고심을 하던 도현은 임경업을 보며 의견을 구했다.

“국방대신 생각은 어떤가?”

“병영 창고에 신형 조총이 배치되면서 수거한 병장기들이 가득 쌓여 있으니 이번 기회에 일부 처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거란족들한테 무기를 넘겨줘도 우리 군이 우세를 유지하는 데 지장이 없겠나?”

약간 염려스러운 듯 도현이 묻자 임경업은 문제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재고로 남아 있는 병장기를 넘겨줘도 우리 군이 보유한 화포와 신형 조총이라면 적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모조리 다 도륙해 버릴 수 있으니 상관없사옵니다. 오히려 우리한테 필요 없는 병장기를 줘서 싸움을 더 격화시켜 잠재적인 위험 요소인 거란족의 전력을 줄일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요.”

“그렇군.”

“저도 국방대신과 같은 생각이옵니다. 이대로 놔두면 초흐타 부족이 반격에 성공해 요산타 부족을 집어삼킬 수도 있으니 적절한 개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재고를 처리하고 받은 은을 군비 강화에 쓴다면 이거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니겠습니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 들은 도현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공들여 판을 벌였는데 흐지부지 끝낼 수는 없지. 은밀히 병장기를 넘기도록 하게. 물론 값은 제대로 받아야겠지.”

그러자 이완 단장은 씨익 한쪽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대답했다.

“제대로 주머니를 털어 오겠습니다.”

“기대하지.”

그 뒤로도 세 사람은 한참 동안 거란족을 어떻게 요리할지 대화를 나눴다.

며칠 뒤 주작단은 전국 각지의 군영 창고에 처박혀 있던 재고 병장기를 꺼내 대충 거미줄과 먼지를 닦아 내고는 짐마차에 실어 북방으로 가지고 올라와 요산타 부족에 팔아 넘겼다.

도현한테 장담을 한 것처럼 이완 단장은 당장 급한 요산타 부족의 처지를 적절히(?) 이용해서 시세보다 훨씬 비싼 값에 바가지를 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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