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율보기의 몰락 (65/104)

야율보기의 몰락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기 일보 직전처럼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북경 자금성의 대전 안.

대신들이 좌우로 시립한 가운데 예친왕이 장승처럼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서 있고, 그 정면에는 커다란 옥좌에 어린 황제와 태후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금색 곤룡포를 둘렀으나 바닥에 발도 제대로 닿지 않는 어린 황제는 형형하게 빛나는 예친왕의 눈빛을 차마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그를 정면으로 상대하는 것은 날이 갈수록 화려한 치장이 더해지는 태후였다.

“그럼 섭정께서는 꼭 군대를 출정시켜야 하겠다는 말씀이시오?”

“그렇습니다.”

예친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명의 위협도 많이 사그라졌으니 심양을 탈환해 땅에 떨어진 제국의 위엄을 다시 세울 최적의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허나 명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 않소? 게다가 지난 전쟁의 피해가 다 복구된 것도 아닌데 또다시 군사를 일으키려 하다니, 섭정께서는 지난번에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미련을 못 버리신 모양이오.”

태후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예친왕은 굵은 눈썹을 위로 꿈틀 치켜 올렸다.

“나라의 사정이 어려우니 지금 당장 전쟁을 일으키는 건 불가하오.”

그러자 예친왕은 눈을 부릅뜨고 와락 덤벼들 듯 말했다.

“그럼 이대로 조상들의 땅인 심양과 만주를 조선에 넘겨준 채 포기할 생각이십니까!”

“누가 그런 말을 했소?”

버럭 소리 지르는 예친왕을 향해 태후는 여유로운 태도로 대꾸했다.

“다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뿐이오. 충분히 재정비할 시간을 가진 뒤 다시 탈환에 나서면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 적당한 때가 대체 몇 달, 몇 년 후란 겁니까? 결국 포기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소!”

“그게 어떻게 같은 말입니까? 섭정께서는 참 비약도 심하시오.”

반발하는 예친왕을 가볍게 물리친 태후는 두 사람의 험상궂은 말다툼에 차마 끼어들지도 못하고 숨죽이고 있는 다른 대신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보다 우리한테는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대신들의 주의가 태후한테로 쏠리자, 그녀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화제를 꺼냈다.

“한 나라를 이끌어 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통을 잇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소?”

태후가 백발이 성성한 노대신을 향해 물었다.

“당연히 그렇사옵니다.”

전 황제 시절부터 대신 자리에 앉아 있던 그는, 태후가 난데없이 자신을 지목하며 물은 것에 속으로 당황했지만 일단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대신들이 어찌 이리도 태평하단 말입니까!”

태후가 갑자기 팔걸이를 탁치며 노기 어린 외침을 내뱉었다.

“비록 내명부를 내가 임시로 이끌고 있다고 하나, 본래는 황후가 맡아서 해야 할 일. 황제께서 즉위하신 지도 꽤 시간이 오래 지났는데 아직까지 국모 자리가 비어 있다는 게 말이 되오!”

“허, 허나 태후마마, 폐하께서는 아직 어리시어…….”

노대신은 당황한 표정으로 애써 변명했다.

황궁에서 태어나고 자라, 보고 듣는 것이 있는지라 또래 아이들보다는 정신적으로 조금 성숙할지 모르나 아직 발판이 없으면 옥좌에 앉지도 못하는 어린 아이였다.

황후를 맞이한다고 해도 최소한 이삼 년 후의 일이라고 다들 예상하고 있었기에 난데없이 떨어진 태후의 불호령이 곤혹스럽기만 했다.

“갓난아기도 아닌데 그게 무슨 상관이오? 게다가 대대로 황실의 혼사는 이른 나이에 치르는 것이 관례였으니 대통을 잇기 위해서는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고 생각하오만…….”

태후의 말처럼, 성인이 된 이후에 혼례를 치르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 정도로 황실에서는 자손을 번창시키기 위해 조혼을 권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나 그것도 서로 남녀의 정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어느 정도 나이가 찼을 때의 일이지, 지금의 황제 같은 어린 나이에 혼사를 치른 전례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노대신은 태후의 억지에 할 말을 잃은 듯 말끝을 흐렸다.

“한시라도 빨리 황후를 맞이해 내명부의 기강을 바로잡고, 대통을 잇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하오. 여러분들도 모두 동의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태후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대전에 모인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유일하게 예친왕만이 그 시선을 정면으로 맞받아칠 뿐, 다른 대신들은 태후의 기세등등함에 눌려 반박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황제를 등에 업은 그녀에게 맞설 수 있을 정도로 동등한 권위와 능력을 가진 사람은 섭정인 예친왕이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동안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예친왕이 우세했지만, 심양 전투를 계기로 권력의 추가 한번 기울어지고 나니 태후가 조정을 이리저리 제 입맛대로 주무르는 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태후는 아무리 노려봤자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냐는 듯, 이빨 빠진 호랑이를 보는 것처럼 예친왕을 향해 비웃음이 섞인 눈빛을 보내고선 일어서서 단언했다.

“대신들은 지금부터 황후 간택을 위한 준비를 시행하시오!”

“예, 태후 마마!”

대신들이 모두 허리 굽혀 엎드리는 가운데, 예친왕은 황제와 함께 앉아 미소를 짓고 있는 태후의 모습을 불꽃이 타오르는 듯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무섭게 노려보았다.

전국에 금혼령이 내려지고 황후 간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심양 탈환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 버렸다.

“이대로 그냥 보고만 계실 겁니까?”

성격이 급한 용골대가 답답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상석에 앉은 예친왕은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황실의 대통을 잇기 위해서 황제 폐하를 혼인시키겠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나?”

“다 좋은데 왜 하필 지금이냐 이겁니다. 심양을 탈환하고 나서 국혼을 추진해도 되지 않습니까!”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야골타가 책망하듯 말했다.

“자네 정말 이유를 몰라서 이러는 건가? 폐하를 혼인시켜 황권을 공고히 하려는 것도 있지만 태후가 진정으로 노리는 건 다시 조선과 전쟁을 하게 되면 군권을 가지신 섭정께 힘이 실릴 수밖에 없으니 그걸 견제하겠다는 속셈이지 뭐겠나.”

“젠장! 요망한 계집 같으니라고.”

화를 참지 못한 용골대가 대놓고 욕을 하자 야골타가 살짝 눈가를 찌푸리며 나무랐다.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말을 가려서 하게. 행여나 자네의 경거망동 때문에 섭정께 누가 되면 어쩌려고 그러나?”

“우리끼리 있는데 뭘 그렇게 까다롭게 구는 거요?”

“어허, 이 사람이. 평소에 조심해야지 그러다가 밖에서 실수를 하면 자네만 다치는 것이 아니야.”

“야골타 장군 말이 맞아. 입조심을 하게.”

예친왕까지 야골타의 말을 거들며 지적하자 용골대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대로 두고 보실 겁니까? 황후 간택에 들어가면 못해도 일 년은 군사를 일으킬 수 없을 겁니다.”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딱히 반대할 명분이 없지 않나.”

“후우.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시간이 갈수록 심양에 주둔한 조선군의 방비가 더 튼튼해질 텐데 걱정입니다.”

야골타의 말에 예친왕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문밖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섭정 전하, 신 왕태봉입니다.”

“들어오게.”

허락이 떨어지자 문을 열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왕태봉은 정면에 있는 예친왕을 보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자네가 어쩐 일인가?”

“급히 알려 드릴 소식이 있어서 왔습니다.”

“흐음. 뭔지 말해 보게.”

“일단 이걸 한번 읽어 보시지요.”

왕태봉이 내미는 비단 두루마리를 받아서 펼친 예친왕은 눈으로 빠르게 적혀 있는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점점 얼굴이 어두워지던 예친왕은 이내 짧게 침음성을 흘리며 두루마리를 내려놨다.

“이게 사실인가?”

“예. 방금 산해관 총병이 직접 작성해 보내온 장계입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옆에 있던 야골타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예친왕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입을 열었다.

“태후가 아니더라도 당장 심양을 치기 어렵게 됐어.”

“예?”

“거란족들끼리 내분이 발생해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고 하네.”

순간 야골타는 물론이고 방 안에 있던 이들 모두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가…….”

“설마 초흐타 부족이 관련된 겁니까?”

“산해관 총병이 올린 장계를 보면 전쟁을 벌이고 있는 부족 중 하나가 바로 초흐타 부족이라는군.”

“끄으응.”

“이게 무슨…….”

다들 초흐타 부족을 중심으로 한 거란족과 연계해 조선군을 앞뒤에서 협공하겠다는 계획을 알고 있었기에 충격이 컸다.

예친왕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멍청한 것들 큰일을 앞두고 이딴 짓거리를 하다니…….”

“처음부터 거란 놈들을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상황 파악을 못 하고 화를 더 부추기는 용골대를 슬쩍 째려본 야골타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 되면 공격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예친왕은 팔짱을 낀 채 잠시 고심을 하고는 말했다.

“일단 상황이 어찌 될지 모르니까 조금 더 두고 보세. 하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거란족을 배제한 계획을 하나 더 짜놓는 것이 좋겠지.”

“알겠습니다.”

의자에 등을 기댄 예친왕은 심양을 탈환해 땅에 떨어진 명예를 다시 회복할 기회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한편 초흐타 부족과 요산타 부족의 전쟁은 결국 나머지 두 대부족까지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 끌어들이면서 북만주 일대가 모두 거센 전화의 불길에 휩싸였다.

우수한 조선제 병장기로 무장한 전사들을 앞세워 초반 기습을 견뎌 내고 반격에 성공해 요산타 부족을 조금씩 밀어붙이고 있던 초흐타 부족은 뜻밖의 복병을 만났다.

어찌 된 영문인지 요산타 부족도 자신들과 똑같은 조선제 병장기로 무장하고 싸움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예전에 노획한 것이나 일부 개인적으로 구매한 장비를 사용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조선제 병장기로 무장한 적들이 늘어나자 요산타 부족에 무기가 대량으로 넘어간 걸 깨달았다.

퍽!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놈들!”

쓰고 있던 투구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야율보기가 분통을 터트리자 주위에 있던 부하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욕을 쏟아 냈다.

“정말 비열한 놈들입니다.”

“이딴 식으로 우리를 엿 먹이다니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맞습니다. 당장 늑대계곡을 폐쇄하고 거기에 있는 조선 놈들을 몽땅 다 쫓아내 버리시지요.”

늑대계곡은 용광로 운영에 필요한 코크스를 캐기 위해서 도현이 초흐타 부족과 협상해 확보한 노천 광산이었다.

“늑대 계곡을?”

“예. 조선 놈들이 애지중지 아끼는 곳이니 거길 폐쇄시킨다면 크게 당황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광산 폐쇄를 지시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야율보기는 방금 전까지 불같이 화를 내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계곡을 지키고 있는 녀석들도 문제지만 우리가 광산을 강제로 폐쇄시키면 조선이 가만히 안 있지 않을까?”

“원래 우리 땅이었던 걸 돌려받겠다는데 놈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반발을 한다면 얼마든지 덤벼 보라지요.”

호기롭게 이야기하는 셋째 아들의 모습에 야율보기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멍청한 놈! 요산타 부족과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군까지 적으로 만들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자는 거야?”

괜히 나섰다가 호통을 들은 야율치오는 어깨를 움츠리고는 아버지인 야율보기의 눈치를 봤다.

“전 그저…….”

“듣기 싫으니까 입 닥치고 있어!”

“……예.”

야율치오가 힘없이 쪼그라드는 모양새에 형인 야율호타는 맞은편에 서서 고소하다는 듯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애써 눈치 못 채게 한다고는 했지만 이미 비웃는 기색을 느낀 야율치오는 분을 꾹꾹 눌러 참으며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멱살을 잡고 싶은 걸 안간힘을 써서 삭였다.

“그러면 이대로 조선의 행태를 두고 보실 겁니까?”

오늘 출전했다가 새롭게 무장을 갖춘 요산타 부족 전사들과의 싸움에서 고전을 했던 홀타오가 약간 불만 어린 얼굴로 묻자 야율보기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인상을 쓰며 한쪽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젠장! 일단 늑대계곡에 나와 있는 조선 관리와 접촉해 이번 일을 정식으로 항의하고 당장 병장기 판매를 중단해 달라고 해.”

“알겠습니다.”

지시를 내리면서도 대놓고 병장기를 넘기고 있는 조선이 과연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지 회의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항의를 받은 조선 관리는 불필요한 병장기를 불하받은 상단들이 독자적으로 다른 거란 부족과 거래를 하는 거라 자신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럼 상단들에게 더 이상 병장기를 판매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 달라고 하자 관리들은 그건 국왕인 도현이 허락해야 되는 일이라며 즉답을 피했다.

그렇게 시간을 질질 끄는 동안 조선은 요산타 부족뿐만 아니라 다른 거란 부족한테도 재고로 가지고 있던 병장기와 화살을 몽땅 다 팔아 넘겼다.

물량도 많았지만 바가지를 엄청나게 씌운 결과 판매 금액이 자그마치 금화로 십만 냥이 넘었는데, 이걸로 거란 부족 간의 내분은 더욱 치열해졌고 조선은 군비 확장에 필요한 여유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흰 눈송이가 떨어지는 겨울이 되자 거란 부족들의 전쟁은 자연스럽게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하얗게 눈이 내린 북한산 아래 보이는 한양의 모습은 처음 도현이 즉위했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우선 왕도인 한양을 방어하는 두 축인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이 대대적인 보수와 증축을 통해 보기만 해도 든든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각각 족히 오만의 병력과 백성들을 수용할 수 있는 각종 시설을 갖춰 여러 구경의 화포를 설치해 놓은 건 물론이고 높이 4미터에 폭이 2미터나 되는 단단한 성벽은 두 산성을 철옹성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넓은 경복궁 터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주거지는 정비 작업을 통해 큰길을 내고 양옆에 네모반듯한 거주와 상업 구역을 설치했다.

또 한강에는 긴 배다리를 두 개나 놔서 통행이 용이하도록 했는데, 태풍이 풀거나 날씨가 안 좋으면 사용하기 어렵다는 단점을 해소하기 위해서 바로 옆에 새롭게 석재로 교량을 건설 중이었다.

뚝딱뚝딱.

따뜻한 담비 털로 만든 외투를 걸치고 수행원들과 함께 말을 탄 채 강변으로 나온 도현은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한창 공사 중인 교량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었다.

“완공까지 얼마나 남았나?”

도현의 물음에 약간 뒤에서 말을 타고 따라오던 한성부윤이 얼른 대답했다.

“워낙 강폭이 길고 수심마저 깊어서 앞으로 족히 일 년은 더 걸릴 거라 예상되옵니다.”

“그렇군.”

길게 느껴졌지만 공사 규모를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갔다.

길이만 100미터가 넘고 밑으로 배들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수면에서 5미터 위로 올려 교량을 만들고 있었는데, 이건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토목공사였다.

그래서 처음 교량을 짓겠다고 했을 때 대신들의 반대와 우려가 많았었다.

하지만 도현은 특유의 뚝심으로 계획을 밀어붙이며 전국에서 최고의 장인들을 불러들이고 오늘날 서울시장과 같은 한성부윤한테 직접 공사를 감독하도록 했다.

꽁꽁 얼어붙은 강물 위로 우뚝 솟아 있는 교각에 개미처럼 달라붙어 일하고 있는 인부들의 모습에 도현은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추운 날씨에 일을 하려면 고생이 많을 텐데 동복은 모두 지급했겠지?”

“예. 전하께서 하명하신 대로 솜을 두껍게 넣은 겉옷과 장갑은 물론이고 발싸개까지 첫눈이 내리기 전에 나눠 줬습니다.”

“잘했네. 아무리 공사가 중하다고 해도 백성들이 힘들거나 다쳐서는 안 되지. 앞으로도 경이 인명 사고가 나지 않게 각별히 신경을 쓰도록 하게.”

“명심하겠사옵니다.”

“고생하는 인부들을 위해 짐이 고기와 술을 조금 가져왔으니 오늘은 작업을 이쯤에서 끝내고 하루 쉴 수 있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한성부윤한테서 시선을 돌린 도현은 이제 한창 교각을 세우고 있는 공사 현장을 한동안 더 둘러보고는 다시 대궐로 돌아갔다.

그날 오후 교량 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인부들은 평소보다 일찍 작업을 끝마치고는 환호성을 지르며 국왕인 도현이 푸짐하게 하사한 고기와 술로 잔치를 벌였다.

대궐로 돌아온 도현이 거처인 희정당으로 들어가자 국방대신인 임경업과 이완 단장이 기다리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많이 기다렸소?”

“아니옵니다.”

“앉읍시다.”

“예.”

외투를 벗어 칠현이에게 건네준 도현이 비단 보료 위에 앉자 상궁이 따뜻한 감차 세잔을 가져다 놓고 나갔다.

“으음. 뜨끈한 차가 들어가니 속이 다 녹는 것 같군.”

“교량 공사 현장에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임경업의 말에 도현은 차를 한 모금 더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사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확인차 다녀왔지.”

“그러셨군요.”

“그나저나 두 사람이 함께 날 찾아오다니 무슨 일인가?”

“실은 거란족과 관계해서 한 가지 여쭤 볼 것이 있어 왔사옵니다.”

“말해 보게.”

자세를 바로 한 임경업이 사뭇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다.

“신이 보기에는 이제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은 것 같은데, 언제 초흐타 부족을 치실 생각이옵니까?”

“눈이 쌓이는 겨울이라 어차피 지금은 병력을 움직이기 어렵잖아.”

“그렇긴 하옵니다만 삼만이나 되는 병력을 별다른 명령 없이 계속 한곳에 대시시켜 놓으면 자칫 긴장이 풀릴 수도 있어서 드리는 말이옵니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었다.

야율보기의 밀서를 중간에 가로챈 이후 벌써 석 달 가까이 기병 삼만을 소집해 국경 요새에 전진 배치해 두고 있었는데, 비상 대기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어 병사들의 피로도가 큰 상황이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나란히 앉아 있는 이완 단장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내분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현재는 겨울에 접어들면서 소강상태를 이루고 있지만 소규모 접전을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초흐타 부족으로 기울던 전세는 우리가 반대편에 병장기를 판매하면서 현재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흐음.”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잠시 고심을 한 도현은 이내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대규모 병력 운용이 어려운 계절이고 조금 더 저들끼리 치고받고 싸워 피해가 늘어나게 당분간은 그대로 놔두도록 하지.”

“하오면 집결시켜 놓은 기병들은 어찌하옵니까?”

“계속 주둔시키면서 대기 상태만 경계 수준으로 낮추도록 하게.”

그 정도만 해도 병사들의 부담을 상당히 낮춰 줄 수 있었기에 임경업은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알겠사옵니다.”

“왜국 쪽 분위기는 어떤가?”

허리를 펴며 도현이 묻자 이완 단장이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사쓰마 번과 구마모토 번이 전쟁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렇게 됐군. 막부의 반응은 어때?”

“각 번 사이의 다툼은 왜국에서는 예전부터 비일비재한 일이기에 딱히 특별한 움직임은 없사옵니다.”

“그래?”

“오히려 잠재적인 위험 요소인 번주들의 힘을 소모시킬 수 있으니 은근히 싸움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재미있군.”

막부도 엄밀히 따지면 세력이 큰 번주에 지나지 않았기에 쇼군 입장에서는 지방의 번주들이 세력을 키우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다가 양쪽 중 어느 하나가 승리하면 막부 입장에서는 상대하기 껄끄러운 대영주가 만들어지는 건데 그걸 그냥 내버려 둔단 말인가?”

“그 전에 끼어들어서 적당히 균형을 잡으려고 하겠지요.”

“우리한테 은밀히 화포와 조총까지 대거 사들여 전쟁을 벌인 사쓰마 번인데 아무리 막부가 중재를 한다고 해도 호락호락 승복할지 모르겠군,”

도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임경업이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를 했다.

“반발이 있겠지만 그래도 막부의 뜻을 거역해서 좋을 것이 없으니 결국에는 따르지 않겠사옵니까?”

“글쎄, 그건 두고 봐야지. 이 단장.”

“예.”

“왜국의 정세 변화는 좋건 싫건 우리한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으니까 돌아가는 상황을 면밀히 살피도록 하게.”

“그러겠사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고 차가 다 식었군. 상선.”

“네, 전하.”

얼른 허리를 숙이며 대답하는 칠현을 보며 도현은 근엄하게 말했다.

“차를 다시 내오라고 하라.”

“알겠사옵니다.”

잠시 뒤 상궁이 다시 끊인 감차를 내오자 도현은 두 신하와 함께 마시며 가벼운 담소를 나눴다.

큰 풍년이 들고 나라에 바치는 세금도 줄어들어 백성들이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겨울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쉬지 못하고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이들도 있었는데 용산에 위치한 육군사관학교 생도들도 그중 하나였다.

“하나 둘! 하나 둘!”

“왼발. 왼발. 똑바로 발을 못 맞추나!”

머리를 짧게 자르고 군장까지 짊어진 생도들에게 제식훈련을 시키던 교관은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쓰며 외쳤다.

“그 자리에 서!”

처척.

바로 옆 화단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는데도 흠뻑 땀에 젖은 생도들이 발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줄 똑바로 못 맞추나!”

잠깐 숨 돌릴 틈도 없이 이어진 교관의 호통에 생도들은 얼른 흐트러진 대형을 바로 맞추고는 긴장한 얼굴로 앞을 바라봤다.

“이제 며칠 뒤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별장으로 군에 부임할 녀석들이 제식 하나 제대로 못해서야 어쩌자는 거야! 이래 가지고 병사들을 지휘할 수 있겠나?”

“…….”

비록 한 시간이나 계속 이어진 제식훈련에 약간 발이 어긋난 것뿐이었지만 어찌 됐던 잘못한 건 사실이었기에 생도들은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모두 엎드려뻗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생도들은 무거운 군장을 등에 멘 채 연병장 흙바닥에 엎드렸다.

“하나에 진충盡忠, 둘에 보국保國이다. 알겠나!”

“옛.”

“하나!”

“진충!”

“둘!”

“보국!”

군장 무게가 몸을 눌렀지만 생도들은 이를 악물고는 구령에 맞춰 팔굽혀펴기를 했다.

그렇게 이십여 회를 하자 땀이 비 오듯 흘러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기상.”

타타탁.

“힘드나?”

“아닙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아니라고 크게 대답하는 생도들을 천천히 훑어본 교관은 진지한 어투 입을 열었다.

“지금 흘린 땀 한 방울이 전장에서 너희들의 목숨을 지켜 줄 것이다. 그리고 모든 훈련의 기본인 제식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야 어찌 임관을 해서 병사들을 지휘할 수 있겠나? 몸에 완전히 익을 때까지 계속 반복한다. 알겠나?”

“옛.”

“앞으로 갓!”

척척척.

“발맞추고 팔을 가슴까지 올려야지! 그래.”

다시 시작된 제식 훈련은 두 시진이 더 지나서야 겨우 끝났다.

겨우 숙소로 돌아와 몸을 녹일 수 있게 된 생도들은 혹독한 훈련에 군장만 벗은 채 그대로 침상에 널브러졌다.

“아이고. 삭신이야.”

“오후 내내 밖에 있었더니 몸이 완전히 얼었어.”

“젠장. 얼마 안 있으면 졸업식인데 정말 너무한 거 아냐?”

“누가 아니래.”

투덜거리는 생도들 사이에 어쩐지 조선말이 어색한 이들이 섞여 있었는데 바로 복속한 거란 부족장의 자식들이었다.

대략 이십여 명 정도로 딱히 조선에서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복속한 부족장들이 자신들의 관습에 따라 스스로 일종의 볼모처럼 도현에게 보냈다.

나름 충성을 보인다고 한 행동인데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던 도현은 고심을 하다가 이들을 모두 육군 사관학교에 편입시켰다.

군관을 육성하는 교육 과정에 임금인 도현에 대한 충성과 복종을 가르치니 각 부족에서 상위 계급에 속하는 이들을 자연스럽게 친조선파 인사로 만들고, 더불어 부족장들의 아들을 천대하지 않고 좋은 교육을 시켜 주고 관직까지 내린다고 생색을 낼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삼조의 수였다.

아무튼 이들은 몇 달간 조선말과 기본적인 학문 교육을 받은 뒤 사관학교 일 기생으로 편입했다.

다른 동기들과 달리 일 년만 교육을 받고 졸업하는 특혜를 받았지만 특별한 사정을 감안해 그다지 큰 불만은 없었다.

“처음 왔을 때는 일 년을 어찌 견디나 했는데 벌써 졸업이네.”

바로 옆자리를 쓰는 야수난의 말에 굴가는 감개무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어.”

야수난은 웅도리 부족장의 셋째 아들로 서로 나이도 같고 죽이 잘 맞아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맞아. 처음 사격 훈련을 받으러 가서 총성 소리에 놀라 부들부들 떤 걸 생각하면 아직도 창피하다니까.”

“그랬었지.”

지금은 추억처럼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처음 사관학교에 들어와서 굴가와 친구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콩 볶는 듯한 소리와 함께 눈에 보이지도 않게 날아가 상대를 살상하는 조총은 물론이고, 단번에 커다란 집 한 채를 날려 버리는 화포 등은 혼이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중에 압권은 바로 폭약을 단 화살 수십 발을 한 번에 쏴 광범위한 지역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는 신기전이었다.

처음 한양에 왔을 때 특별히 보여 준 발사 시범을 보고는 경악에 찬 표정을 지으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것만 봐도 조선군이 어떻게 강대한 청나라를 만주에서 몰아내고 심양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인상 깊은 화력 시범에 두려움이 들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이내 조선군이 가진 힘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임금인 도현이 아량을 베풀어 자신들을 사관학교에 입교시켜 주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들 크게 기뻐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뭘 말이야?”

“졸업을 하면 부족으로 돌아갈 거냐고?”

“아…….”

그제야 무슨 소리인지 이해했다는 듯이 짧게 탄성을 흘린 굴가는 미리 거취를 생각해 뒀는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임관을 할 거야.”

“안 돌아가고?”

굳이 볼모가 없더라도 복속한 거란 부족을 충분히 제압하고 흡수시킬 자신이 있었던 도현은, 사관학교에 들여보낸 이들한테 졸업 후 부족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군관이 되어 조선군에서 복무하든지 진로를 알아서 결정할 수 있게 선택권을 줬다.

“응.”

“가족들이 안 보고 싶어.”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임관을 한 뒤 휴가 때 찾아가 보면 되지. 그리고 부족에 돌아가 봤자 조정에서 내려 준 관직은 위에 있는 형님한테 세습될 테니까 딱히 할 일도 없잖아.”

“하긴…….”

복속한 거란 부족을 정착시키면서 도현이 기존 부족장과 원로들한테 명예직 성격이 강한 하급 관직을 하사했는데, 이 벼슬은 특별히 이 대까지 세습할 수 있도록 해 줬다.

“넌 어쩔 생각이야?”

굴가가 되묻자 야수난은 살짝 고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직 결정을 못 했어.”

“졸업식까지 한 달 정도 여유가 있으니까 너무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신중하게 판단해.”

“그래야지.”

그렇게 잡담을 나누면서 쉬고 있을 때 생도 한 명이 내무반 문을 열고 들어와 큰 소리로 말했다.

“일다경 뒤에 역사 수업을 받으러 가야 되니까 다들 서둘러서 준비해.”

“끄으응.”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늦으면 혼나니까 어서들 일어나.”

“알았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 생도들은 훈련으로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은 뒤 줄을 맞춰 역사 수업을 받으러 갔다.

사관학교에서는 군사학뿐만 아니라 역사와 각종 인문 교육을 시켰다.

특히 고조선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자세하게 가르쳐서 자부심을 일깨워 주는 한편, 거란을 비롯한 만주 지역에 흩어져 사는 유목민들과 동질성을 강조해 점령의 정당성을 심어 줬다.

이런 역사 교육은 어명에 따라 사관학교뿐만 아니라 전국의 교육기관에서 공통적으로 실시하고 있었다.

타탕!

귀청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백 보쯤 떨어진 곳에 세워 둔 과녁 옆에 있던 내관이 손에 든 깃발을 좌우로 흔들며 소리쳤다.

“관중이오!”

총을 쏜 도현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제대로 잘 만들었군.”

그러자 약간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던 병기장 박호가 얼른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옵니다.”

“확실히 무게도 기존 총보다 줄어들었고 장착된 부싯돌이 더 잘 작동하는 것 같아.”

“개량을 하며 점화장치에 제일 신경을 썼사옵니다.”

현재 조선군이 주력으로 쓰고 있는 신형 조총은 심지를 꽂아 불을 붙이던 화승방식이 아니라 부싯돌을 장착해 방아쇠를 당기면 불꽃이 튀어 총알이 발사되는 수석식이었다.

총을 쏠 때마다 일일이 불을 붙이지 않아도 돼서 조총의 약점인 발사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비가 와도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처음 개발한 수석식 소총이다 보니 문제도 있었는데, 바로 부싯돌이 달린 점화장치의 강도가 약해 종종 부서지거나 불발이 발생한다는 거였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 박호와 병기창 장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오랜 시간 연구를 거듭한 결과 이번에 개량된 조총을 만들어 냈다.

“점화장치 내구성이 더 좋아졌다고?”

“네. 여러 번 시험을 해 본 결과 천 번 이상 사격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사옵니다.”

자부심 가득한 박호의 대답에 도현은 가지고 있던 조총을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생산 단가는 얼만가?”

“한 정당 은 열여덟 냥이옵니다.”

“조금 비싸군.”

현재 주력으로 쓰는 신형 조총이 대량생산을 하고 있는 덕분에 한 정당 은 열 냥까지 떨어져 있는 걸 생각하면 꽤 비싼 가격이었다.

“신형 조총처럼 대량생산을 한다면 은 열다섯 냥까지는 가격을 낮출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래도 싼 건 아니지만 그만큼 조총의 성능이 개선됐으니 부담할 값어치는 있을 것 같군.”

“맞사옵니다.”

행여라도 어렵게 개발한 조총이 생산 단가 때문에 빛도 보지 못하고 사라질까 봐 노심초사하던 박호는 화색을 띠며 말했다.

“그러면 기존에 쓰던 신형 조총을 다시 교체해야 되겠군.”

“안 그러셔도 되옵니다. 점화장치만 새롭게 바꿔 주면 무게는 이것보다 많이 나가도 똑같은 성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오. 그래.”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눈을 크게 뜨며 반색을 했다.

사실 새로 개량한 조총의 성능이 탁월하기는 해도 이제 겨우 많은 예산을 쏟아부어서 모든 군단에 신형 조총 배치를 거의 끝내 가고 있는데 또다시 그걸 다 새로 교체하기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그런데 기존에 배치한 조총을 적은 자금만으로 개량해 쓸 수 있다니 여러 가지를 다 고려해서 결정을 내려야 되는 도현 입장에서는 이것보다 좋은 일이 없었다.

“점화장치를 교체하는 건 한 정당 은 넉 냥이면 충분하옵니다.”

“그 정도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군. 국방대신.”

“예.”

“경이 보기에는 어떤가?”

옆에 서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사격을 지켜본 임경업은 질문을 받자마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군에 꼭 필요한 무기이옵니다.”

“좋아. 그럼 일단 근위군단에 배치를 해 보고 성능이 만족스러우면 기존 조총을 모두 개량하도록 하지. 재무대신.”

“예, 전하.”

“지난번 거란 부족에 재고 병장기를 넘기고 받은 대금이 얼마나 남아 있지?”

“군부에서 필요하다는 곳에 쓰고 현재 금 삼만 냥가량이 있사옵니다.”

“남은 자금을 모두 병기창에 줘서 새로운 조총을 생산하는 데 쓰도록 하게.”

“그렇게 하겠사옵니다.”

재무대신의 대답을 들으며 시선을 옆으로 돌린 도현은 생산이 결정되자 약간 들뜬 표정을 짓고 있는 박호를 보며 말했다.

“참. 새로 개발한 조총의 이름이 뭐라고 했지?”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았사옵니다.”

박호의 대답에 임경업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 전하께서 이름을 붙여 주시지요.”

“그럴까.”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고심하던 도현은 이내 괜찮은 이름이 생각났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남한산성에 있는 병기창에서 새로 개발한 첫 조총이니 앞 글자를 따서 남南-일식이 어떤가?”

“괜찮은 것 같사옵니다.”

“전하께서 직접 이름을 하사해 주셨다고 하면 장인들이 모두 기뻐할 것이옵니다.”

“그러면 앞으로 개량 조총을 남-일식이라 부르도록 하게.”

“예.”

새로 만든 남-일식이 마음에 드는지 도현은 그 뒤로도 몇 번을 더 직접 사격을 해 보며 성능을 점검했다.

어명에 따라 남-일식의 대량 생산이 결정되자 기존에 만들어지고 있던 신형 조총 제작이 모두 중단됐다.

한 달간 생산 공장을 재정비하고 소량 시범 생산을 거친 후 신년부터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갔다.

남-일식은 수석 총을 처음 발명하고 전쟁에 사용한 유럽 국가들과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은 성능을 자랑했다.

1690년이 넘어서야 유럽에서 총검이 쓰이기 시작한 것과 달리 조선은 벌써 총 끝에 대검을 꽂아서 창병 역할을 대신하고 있으니, 어떤 측면에서는 오히려 더 발전된 형태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았다.

기존 조총의 문제점을 대부분 개선한 남-일식의 개발과 배치로 조선군에서는 그나마 남아 있던 창병이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

그렇게 추위 속에 모두가 깊은 동면에 들어가는 겨울이었지만 조선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뜨겁고 활기차게 미래를 준비하고 있을 때, 북방에서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급히 소집된 대신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용상에 앉은 도현의 심각한 목소리가 넓은 대전을 울렸다.

“요산타 부족이 수세에 몰려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렇사옵니다. 오늘 아침 파발로 급히 전해진 소식에 따르면 보름 전 초흐타 부족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서 요산타 부족과 다른 적대 부족에 치명적인 타격을 안겼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손바닥으로 앉아 있던 용상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며 언성을 높였다.

탕!

“아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양쪽이 서로 팽팽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밀릴 수가 있는 건가!”

“굴천 대족장이 방심을 한 것 같습니다.”

“방심을 했다?”

“예. 보통 겨울철이 되면 군마의 이동이 어려워서 싸움을 멈추기 마련이라 소집해 놓고 있던 전사들을 절반가량만 남겨 두고 각 마을로 돌려보냈다가 초흐타 부족의 기습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런 멍청한.”

너무나도 황당한 굴천 대족장의 실책에 도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속절없이 당하다니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직접 야인 토벌에 나선 적도 있어 거란족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는 임경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시하자 이완 단장이 심각한 얼굴로 궁금증을 해소해 줬다.

“연합한 부족들 중 일부가 배신하고 적에게 붙어 뒤를 치는 바람에 제대로 방어를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역시 그랬군.”

설명을 들은 임경업은 그때에야 이해가 된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고 도현은 이맛살을 찡그렸다.

“방심에 배신까지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그래서 현재 어떤 상황인 건가?”

“마을 열아홉 곳이 불타거나 초토화되고 동북평원 서쪽 끝까지 밀려났습니다.”

“요산타 부족의 본거지까지 빼앗겼다는 말이야?”

깜짝 놀란 도현이 상체를 앞으로 당기면서 다그치듯 묻자 이완 단장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러자 대전에 모여 있던 대신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크게 술렁였고 인상을 찌푸린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끄으응.”

단순히 크게 패해 수세에 몰린 정도가 아니라 그대로 전쟁이 끝나 버릴 위기였다.

“굴천 대족장이 전력을 총동원해서 상황을 역전시켜 보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이 상태라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옵니다.”

“공격에 나선 초흐타 부족의 전력이 얼마나 되나?”

“연합을 한 부족까지 다 합쳐서 오만이 훌쩍 넘는 데 비해 요산타 부족 쪽은 이만이 채 안 됩니다.”

이 정도 병력 차이라면 요산타 부족이 독자적으로 위기를 벗어나는 건 거의 가망이 없다고 봐야 했다.

“최근 들어 잠잠하다지만 언제 다시 공격을 해 올지 모르는 청나라를 앞에 두고 우리에게 적대적인 초흐타 부족이 거란족의 패권을 쥐는 건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지 않사옵니까?”

총리인 박황의 말에 다른 대신들도 하나같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우려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냥 방치하면 나중에 큰 위협이 될 것이옵니다.”

“맞사옵니다.”

대신들이 이러는 건 야율보기가 예친왕한테 보내려던 밀서를 비밀로 할 것을 약속받고 은밀히 공개했기 때문이었다.

입을 꾹 다문 채 어떻게 할지 잠시 고심하던 도현은 이내 눈을 날카롭게 번뜩이면서 입을 열었다.

“국방대신.”

“말씀하시옵소서, 전하.”

“지금 당장 대기시켜 놓은 병력을 출정시켜 감히 짐을 속이고 청과 손을 잡은 초흐타 부족을 벌하도록 하시오!”

지시를 받은 임경업은 군례를 취하면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명을 받자와 북방에 주상 전하의 위엄을 세우도록 하겠나이다.”

“믿겠소.”

도현이 출정을 결정하자 순간 대전 안은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누구도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청과 야합한 야율보기를 벌한다는 명분까지 있는 싸움이었기에 단 한 명의 반대도 없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군령을 전하기 위해 출발한 전령은 한양을 떠나 곧장 봉황도를 향해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참군 어른.”

마구간에서 직접 자기가 타는 군마의 털을 빗어 주고 있던 박태욱은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뭔가?”

그러자 가벼운 가죽 갑옷 차림의 병사 한 명이 앞으로 다가와 이야기를 했다.

“군호 어른께서 찾으십니다.”

“연대장님이?”

“예.”

갑자기 무슨 일인지 의아했지만 직속상관의 호출에 박태욱은 머뭇거리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솔을 마구간 관리병한테 건네줬다.

“마무리는 자네가 좀 해 주게.”

“염려 마십시오.”

“연대장님은 어디에 계신가?”

박태욱이 마구간을 나서며 묻자 병사는 얼른 뒤따라 걸으면서 대답했다.

“집무실에 계십니다.”

넓은 연병장을 가로질러 간 박태욱은 붉은색 벽돌을 써서 지어진 본부 건물로 들어갔다.

똑똑.

“들어와.”

박태욱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벌써 다른 장교들이 모여 있었다.

“충! 찾으신다는 연락을 받고 왔습니다.”

“빈자리에 앉게.”

“예.”

그가 자리를 찾아가자 가운데 앉아 있던 신인석이 좌중을 한번 둘러보고는 진지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제장들을 급히 소집한 건 조금 전 한양에서 주상 전하의 군령이 도착했기 때문이네.”

“……!”

지난 몇 달 동안 계속 비상대기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군관들은 본능적으로 뭔가 큰일이 벌어졌다는 걸 느끼고는 긴장된 표정을 지으며 이어지는 말에 집중했다.

“군령을 받은 즉시 국경을 넘어 초흐타 부족을 공격하라는 지시이네.”

“초흐타 부족을 말씀입니까?”

“그래.”

고개를 끄덕인 신인석은 힐끗 끝자리에 앉아 있는 박태욱을 쳐다보고는 이야기를 했다.

“이놈들이 주상 전하의 은덕을 배신하고 청국과 은밀히 내통을 하고 있었다는군.”

“그럴 수가.”

“허어.”

충격적인 이야기에 놀란 표정을 짓던 군관들은 이내 초흐타 부족에 대한 적개심을 강하게 불태웠다.

“죽일 놈들.”

“뒤로 그런 음흉한 짓을 하고 있었다니 당장 달려가서 다 박살 내 버려야 됩니다.”

군관들 중에는 박태욱처럼 거란 출신이 꽤 있었지만 부족별로 생활하며 같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희박하기 때문인지, 불편해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열을 내면서 야율보기의 비겁한 행동을 성토했다.

한쪽 팔을 들어 부하 군관들을 진정시킨 신인석은 차분하지만 힘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내일 아침 해가 뜨는 것과 동시에 출정한다. 모두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옛!”

지시를 받은 군관들은 결연한 얼굴로 동시에 머리를 숙이며 크게 대답했다.

이미 작년부터 언제든지 출정할 수 있도록 대비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연대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신속하게 모든 준비를 끝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여명과 함께 신인석이 지휘하는 기병연대는 긴 행군 대형을 이루고 요새를 떠나 거란족 영역으로 진격했다.

어제까지 적군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 내기는 했지만 본거지를 잃고 조선과의 국경선 근처까지 쫓겨 온 요산타 부족의 사기는 바닥을 기고 있었다.

퇴각하는 와중에도 계속 이어진 초흐타 부족의 공격에 여기까지 오는 길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하고 비참했다.

허겁지겁 도망치다 보니 가지고 있던 가축 대부분을 잃은 건 물론이고 부족민도 절반 넘게 죽거나 적에게 잡히고 말았다.

부족의 근간이 다 무너져 운 좋게 초흐타 부족의 공격을 저지한다고 해도 예전 같은 세력을 유지하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다.

“으윽.”

의자에 앉은 굴천 대족장이 인상을 쓰며 신음을 내뱉자 어깨에 박힌 화살을 빼내던 마회가 동작을 멈추고는 걱정스럽게 그를 봤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어서 화살이나 빼.”

퉁명스럽게 대꾸한 굴천 대족장은 헝겊을 입에 물고 얼른 하라는 듯 눈짓했다.

그러자 요산타 부족을 대표하는 전사이자 굴천 대족장의 측근인 마회는 화살대를 잡고 끝부분을 안으로 힘껏 밀어 넣었다.

날카로운 화살촉이 근육과 살갗을 찢고 튀어나오자, 굴천 대족장의 입에서 고통을 참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고는 화살대 중간을 부러뜨려 조심스럽게 화살을 빼냈다.

“팔을 움직여 보십시오.”

마회의 말에 굴천 대족장은 식은땀이 한껏 밴 이마를 찡그리면서 어깨를 천천히 빙글 돌려 봤다.

“뼈는 다치지 않은 것 같아 다행입니다.”

“흥! 야율보기 놈한테 내가 쉽사리 당할 것 같아.”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아직 자존심은 살아 있는지 굴천 대족장이 벅벅 이를 가는 동안, 마회는 독한 화주로 상처 부위를 소독한 다음 금창약을 뿌리고 붕대를 감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대충 상황이 정리되어 가자, 게르 안에 있던 원로들 중 한 사람이 대표로 나서서 말했다.

“대족장, 우리 전사들의 피해가 참으로 막심합니다. 게다가 급하게 도망쳐 오느라 식량도 넉넉하지 못한 형편인데,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오?”

“그래서 뭐? 야율보기 놈한테 항복해서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고 평생 노예처럼 살란 말이오?”

가시 돋친 말투에 원로가 주춤 뒤로 물러서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게 아니라…….”

“설령 남은 전사가 단 한 명밖에 없다 해도 야율보기 밑에 기어들어 가는 일은 절대 없을 거요. 그런 수치를 당하느니 최후의 한 사람까지 맞서 싸워서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하는 게 우리 부족의 긍지를 지키는 일이니까!”

가슴을 탕탕 치면서 한껏 소리 높여 외치는 굴천 대족장의 말에 원로는 차마 반박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잠시 답답한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바로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굴술이 조심스레 나와 제안했다.

“아버님, 그러지 마시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국경을 넘어 조선에 몸을 의탁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조선에?”

굴천 대족장이 흥미를 보이자 굴술은 이때다 싶어 마른 입술에 침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일단 국경을 넘어가면 야율보기도 함부로 추적해 오지 못할 거 아닙니까. 그 틈에 부족민과 전사를 수습해 재기를 하는 겁니다.”

“음…….”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란 말인가.

솔직히 여기서 바락바락 악을 쓰고 버텨 봤자 이미 희망이 없다는 것은 굴천 대족장이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밀릴 대로 밀려서 한 발짝만 더 뒤로 가면 바로 낭떠러지인 상황.

지금까지 그를 믿고 용감히 싸워 준 전사들을 그라고 좋아서 사지로 떠밀겠는가.

아주 희박하긴 해도 기사회생할 방도가 있다면 거기에 일말의 희망을 걸어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굴천 대족장이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벌컥 게르 입구를 막아 놓은 천막이 젖혀지더니 전사 하나가 다급한 표정으로 뛰어 들어왔다.

“대족장님, 큰일입니다. 적들이 다시 공격해 옵니다!”

불현듯 날아든 소식에 굴천 대족장은 분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망할, 잠시도 쉴 틈을 안 주는군!”

그가 한쪽에 세워 둔 애병인 도끼를 다시 집어 들고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듯하자 마회가 서둘러 성한 쪽 팔을 붙잡았다.

“아직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상처가…….”

“에이, 놔라! 그깟 화살에 맞은 게 뭐가 대수라고!”

굴천 대족장은 마회를 세게 뿌리치고 큰 목소리로 호통 쳤다.

“상처가 벌어지면 또 어때서! 어차피 이 전투에서 야율보기 놈한테 지면 태평하게 아물기를 기다릴 시간도 없을 텐데!”

그는 도끼를 한 바퀴 휭 휘둘러 멀쩡하다는 것을 과시한 뒤 콧김을 씩씩 내뿜으면서 장수들을 이끌고 게르를 나섰다.

채챙! 챙! 챙!

“크아악.”

“큭.”

초흐타 부족의 공격에 재개된 전투는 밤을 넘기고 그 다음 날 아침까지 계속 이어졌다.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 적을 상대하고 있었지만 수적으로 열세인 데다 연이은 패배로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져 있던 요산타 부족 전사들은 시간이 갈수록 피를 흘리며 죽어 나가는 숫자가 늘어났고 전열이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후퇴를 하고 싶어도 적이 주위를 다 포위한 상태라 그럴 수도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꼼짝없이 그대로 전멸당할 위기였다.

어느새 본진까지 적이 밀고 들어와 대족장인 굴천까지 직접 애병인 도끼를 들고 싸움을 벌여야 했다.

덤벼드는 적을 찍어 넘기기를 수차례 체력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고 가뜩이나 어깨에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몸을 무리하게 움직인 굴천 대족장은, 손에 든 도끼를 휘두르는 것도 이제 벅찼다.

방금 전도 적 기병 한 명을 도끼로 쳐서 쓰러뜨렸지만 자신도 왼쪽 옆구리에 부상을 입고 말았다.

“크흑.”

신음을 흘린 굴천 대족장은 휘청거리는 몸을 말 위에서 간신히 균형을 잡고는 한쪽 손으로 피가 배어 나오는 상처 부위를 눌렀다.

다행히 부상이 크지는 않았지만 견고한 조선제 갑주를 입고 있지 않았다면 자칫 치명상을 당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잠시 숨을 돌리며 전장을 둘러본 굴천 대족장은 점점 뒤로 밀리며 적의 칼날에 속수무책으로 목숨을 잃고 있는 부하들의 모습에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굴천 대족장은 입술에서 피가 날 정도로 이를 꽉 깨물고는 도끼를 치켜들며 크게 외쳤다.

“자랑스러운 요산타 부족 전사들이여! 어차피 죽을 거라면 당당히 적과 맞서 전사답게 용맹스러운 최후를 맞이하자. 자! 모두 나를 따르라!”

“와아아!”

이미 패색이 짙어 있는 상황이었지만 굴천 대족장의 독려에 요산타 부족 전사들은 호응하듯 고함을 내지르며 마지막 힘을 내서 적에게 달려들었다.

“죽어라!”

“너나 뒈져.”

슈각.

채챙. 챙!

용감하게 덤벼들기는 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잠시 주춤하던 적은 이내 더 사납게 요산타 부족 전사들을 밀어붙였고 전장은 죽은 이들에게서 흐른 피로 붉게 물들었다.

말을 탄 채 기세등등한 얼굴로 전장을 바라보고 있던 야율보기는 승리를 확신하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흥. 마지막 발악을 하는구나. 한 놈도 남겨 놓지 말고 다 죽여 버려라!”

이대로 요산타 부족이 최후를 맞이하며 야율보기가 거란족의 패권을 쥐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뒤편 언덕에서 한 무리의 기병이 불쑥 나타나더니 해일처럼 앞으로 달려 내려와 요산타 부족을 포위 공격 중인 초흐타 부족 전사들의 후방을 쳤다.

두두두두!

타타탕! 타탕! 탕!

전장을 뒤흔드는 충성이 울리자 초흐타 부족 전사들이 피를 뿌리며 썩은 짚단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콩 볶는 소리에 몇몇 적들이 황급히 방패를 들어 올렸지만 어설프고 별로 두껍지도 않은 나무 방패로 총탄을 막는 건 역부족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초흐타 부족은 물론이고 요산타 부족도 혼란에 빠졌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새로 나타난 기병들을 쳐다보던 굴천 대족장은 이내 눈을 크게 치켜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 저들은!”

붉은색 바탕에 검은 삼족오가 그려진 대형 수기를 앞세우고 마상에서 권총을 쏘며 전투를 벌이는 집단은 단 한 곳뿐이었다.

“조선군이다!”

“조선군이 나타났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외침은 금방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조선군이 갑자기 여기에 왜 나타났는지는 몰라도 공격을 받게 된 초흐타 부족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전멸 위기에서 기적적으로 벗어난 요산타 부족 전사들은 이제 살았다는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돌격! 배덕자들에게 정의가 무엇인지 보여 줘라.”

“우와아아~!”

권총 사격으로 기선을 제압한 조선군 기병들은 이내 커다란 함성을 내뱉으며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초흐타 부족을 덮쳤다.

“죄다 쓸어버려라!”

이미 한 명당 대여섯 발씩 발사된 총탄에 대열이 흐트러진 초흐타 부족은 날카로운 창이 되어 파고드는 조선군 기병을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특히나 이번에 출정한 기병 대부분이 상대와 같은 거란 출신이었기에 마상 전투술에서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잘 만들어진 갑옷과 병장기로 무장하고 지난 일 년간 혹독한 훈련을 거친 정예들답게 눈에 띄는 족족 적을 찌르고 베서 넘어뜨렸다.

“어억.”

“꾸엑.”

“멈추지 말고 그대로 돌파해라!”

박태욱도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초흐타 부족 전사들을 마구 베어 넘기면서 말을 달렸다.

“이런 젠장! 막아, 막으란 말이다.”

승리를 눈앞에 두고 놓치게 된 야율보기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전사들을 다그쳤지만 조선군 기병대의 개입으로 급변한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삼족오 깃발을 든 조선군 기병대는 어느새 후미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초흐타 부족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던 전투를 뒤엎어 버렸다.

전혀 대비를 못 하고 있다가 당한 것도 있지만, 조직적이고 뛰어난 전투력을 보이는 조선군 기병대에 초흐타 부족 전사들은 그야말로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다급해진 야율보기가 황급히 대기 병력까지 투입했지만, 그때뿐 기세를 올리고 있는 조선군 기병대를 막을 수 없었다.

거기다가 기진맥진해 있던 요산타 부족 전사들까지 다시 힘을 내며 공격에 가세하면서 상황은 더 안 좋아졌다.

사상자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대로 가다가는 거꾸로 자신들이 전멸당할 것 같았다.

결국 야율보기는 극심한 피해를 견디지 못하고 분을 삼키면서 퇴각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퇴각! 퇴각하라.”

뿌우우웅.

후퇴를 알리는 뿔나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지자 힘겹게 전투를 벌이고 있던 초흐타 부족 전사들은 이제 살았다는 얼굴로 황급히 말 머리를 뒤로 돌려 물러섰다.

그 모습에 조선군 기병대를 이끌고 전투를 지휘하던 신인석이 휘하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달아나는 놈들은 나중에 또 박살 내면 된다. 적을 쫓지 말고 대형을 재편성하라!”

“옛.”

후퇴하는 적군을 추격해서 피해를 더 늘리고 싶은 욕심도 살짝 생겨났지만, 이제 첫 전투이고 초흐타 부족의 전력이 완전히 와해된 것이 아니었기에 신인석 장군은 무리를 하지 않기로 했다.

불붙은 망아지처럼 적들이 꽁지 빠지게 언덕을 넘어 달아나고 부하들이 전장 정리를 시작하자 신인석 장군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모여 있는 요산타 부족 수뇌부들을 힐끗 보고는 그리로 말을 몰았다.

죽음을 각오한 채 최후의 저항을 하고 있던 순간 구원을 받게 된 굴천 대족장과 수뇌부들은 아직도 약간 얼이 빠진 얼굴로 후퇴하는 적을 보고 있다가 신인석 장군 일행이 가까이 다가오자 살짝 긴장했다.

그런 상대의 모습에 신인석 장군은 먼저 미소를 지으며 약간 어색한 거란 말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굴천 대족장님 되십니까?”

“그, 그렇소.”

“반갑습니다. 전 이십이기병연대를 이끌고 있는 군호 신인석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굴천 대족장은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도움을 준 건 고맙소만 조선군이 어떻게 여길……?”

“국경을 넘어 이동하고 있던 중에 여기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척후 보고에 곧장 달려와 끼어들게 됐습니다. 잘 싸우고 계신데, 우리가 괜히 방해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전멸 직전에 몰려 있었다는 걸 다 알고 있으면서도 신인석 장군이 상대를 배려하자 굴천 대족장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흐흠. 아니오.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소.”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군요.”

슬쩍 굴천 대족장 뒤편에 서 있는 부족 수뇌부들을 훑어본 신인석 장군은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말을 이었다.

“이제 초흐타 부족은 우리가 상대할 테니 아무런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게 무슨 말이오?”

깜작 놀란 굴천 대족장의 물음에 신인석 장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주상 전하의 은혜를 저버리고 감히 청나라와 몰래 손을 잡아 아국을 칠 음모를 꾸민 초흐타 부족을 벌하라는 어명이 있었습니다.”

조선을 치려 했다는 말에 굴천 대족장은 뜨끔했지만 마지막에 초흐타 부족을 정벌할 거라는 이야기에 그는 반색을 했다.

“정말이오?”

“이렇게 우리들이 여기 와 있는 걸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신인석 장군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본 굴천 대족장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대충 봐도 족히 수만은 넘을 것 같은 정예 기병들의 모습에 초흐타 부족을 그냥 두지 않겠다는 조선군의 의지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벼랑 끝에서 다시 살아날 기회를 잡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굴천 대족장은 이제 거란족의 운명은 조선이 좌지우지하게 됐다는 걸 깨닫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전쟁으로 거란족을 대표하던 사 대 부족의 힘이 급격히 줄어든 상태에서, 가장 강성한 세력을 자랑하던 초흐타 부족이 조선군의 손에 멸족당한다면 자연스럽게 거란족 전체가 조선에 예속되는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앞날이 뻔히 보였지만 그렇다고 굴천 대족장은 조선군에 협조를 하지 않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보일 입장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코가 제대로 꿰인 거였다.

씁쓸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초흐타 부족에 의해 세력 기반이 다 망가진 굴천 대족장이 그나마 부족의 명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선군에 머리를 숙이고 현실에 순응하는 방법뿐이었다.

한편 신인석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 말고도 또 다른 기병 연대가 북해도에서 국경을 넘어 초흐타 부족을 앞뒤로 협공했다.

“돌격 앞으로!”

두두두두.

지휘관의 외침이 떨어지자 번쩍거리는 갑주를 갖춰 입고 일렬로 늘어서 있던 기병 일만여 명이 땅을 울리며 일제히 앞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막아라!”

“우오오~!”

그러자 맞은편에 서 있던 거란 전사들도 괴성을 내지르면서 마주 달려 나오며 전의를 불태웠다.

이대로 양쪽이 충돌한다면 누가 이기든 서로 상당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 하늘을 가르는 섬뜩한 바람 소리와 함께 신기전에서 발사한 화살 수천 발이 비 오듯 적 대형에 떨어져 내렸다.

슈슈슉! 슈슈슉!

“흐억.”

“화살 공격이다.”

“피해!”

조선군 기병이 가진 권총만 신경을 쓰고 있었지 상대가 이런 식으로 허를 찌를 줄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적군은 허둥거리며 손에 든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하지만 조선군이 신기전으로 쏜 화살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는데, 거란족 전사들 머리 위에서 폭발하며 작은 쇠구슬을 마구 뿌렸다.

퍼펑! 펑!

후두두둑.

“크악.”

“윽.”

이히히힝.

손톱보다 작은 쇠구슬은 거란족 전사들이 가진 방패와 가죽 갑옷을 간단히 찢어발기며 한순간에 적을 피 떡으로 만들어 버렸다.

상대가 타고 있던 말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쇠구슬에 맞아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쓰러지거나 몸부림을 치면서 마구 날뛰었다.

그렇게 선두 열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에서 조선군 기병대는 권총을 쏜 뒤 검을 뽑아 들고 만신창이가 된 상대의 목줄을 사납게 물어뜯었다.

시작과 동시에 기선을 제압당한 적은 병장기를 휘두르며 마구 짓밟아 오는 조선군 기병대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적 지휘관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어떻게든 전열을 재정비하려고 애를 썼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과 쇠구슬 세례에 몸이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만큼 갈가리 찢겨 널브러져 있는 시신 그리고 살려 달라 울부짖는 동료의 외침에 거란족 전사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공포는 삽시간에 적군 전체로 퍼져 나갔고 이내 도주로 이어졌다.

“흐익. 살려 줘.”

그 뒤부터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날카롭게 대형을 파고 들어온 조선군 기병들이 마구 병장기를 휘둘러 대자 거란족 전사들은 오직 도망만이 살길이라는 듯이 그대로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바빴다.

거란족 전사들은 도망치는 데 방해가 되는 무거운 방패와 무기까지 다 바닥에 내팽개쳐 버렸다.

이들을 제지하고 다시 싸우게 만들어야 될 지휘관들마저 분위기에 휩쓸려 같이 도주하면서 전세는 조선군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졌다.

“달아나는 적을 놓치지 말고 추격해 섬멸해라!”

“가자!”

짧지만 치열한 전투를 벌여 입고 있는 갑옷 여기저기에 적군의 육편과 피를 잔뜩 묻히고 있던 조선군 기병들은 연대장의 명령에 더욱 기세를 올리며 도망치는 거란족을 쫓아 말 옆구리를 찼다.

거란족 전사들은 전장을 채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하나씩 조선군 기병대에 사냥당하는 신세가 됐다.

빠르게 조선군 기병대들이 쫓아오자 전의를 상실한 거란족 전사들은 무기를 버린 채 두 손을 머리 위로 들며 항복했고, 그러지 않고 끝까지 달아나던 이들은 피를 뿌리면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적에게는 불행하게도 전투가 벌어진 곳이 사방이 탁 트인 눈 덮인 초원이었기에 도망치는 것이 더 어려웠다.

이날 하루만 조선군은 오백이 넘는 적을 포로로 잡고 천여 명을 죽이는 큰 전과를 올렸다.

포로가 된 거란족은 즉시 호송 병력과 함께 후방으로 끌려갔고 조선군 기병들은 계속 파죽지세로 거란족 영역 깊숙이 밀고 들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