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우럅! 이랴!”
“와아아!”
“받아라.”
공터에서 사내아이들의 우렁찬 고함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서당 공부를 마친 거란과 조선 출신 아이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한데 모여서 편을 갈라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뒷산에서 주운 나뭇가지를 비롯해 반죽을 할 때 쓰는 밀대나 집에서 엄마 몰래 훔쳐 온 다듬이 방망이까지, 손에 들고 있는 막대기 종류가 참으로 다양했다.
“에잇, 기습이다!”
둘이 입으로 챙챙 칼 부딪히는 소리를 내면서 겨루고 있는 사이, 한 아이가 뒤로 살짝 돌아와 상대편 아이의 엉덩이를 나뭇가지로 철썩 후려쳤다.
“앗! 비겁해! 반칙이야!”
“싸움에 그런 게 어디 있어? 무조건 이기면 끝이지!”
“우씨, 정정당당하게 승부해!”
엉덩이를 맞은 조선인 아이가 볼을 퉁퉁 부풀리며 항의했다.
“메롱~. 졌으니까 이제 우리 쪽 포로야. 이리 와!”
“쳇!”
조선인 아이는 입을 삐죽 내밀고 일찌감치 전쟁에서 죽은(?)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대충 상황은 양측이 비등비등한 편으로, 좀처럼 승부가 안 나는 가운데 한참을 정신없이 놀고 있자니 골목 저편에서 시끌시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호기심이 생긴 아이들은 전쟁놀이를 잠시 멈추고 공터를 떠나 대로와 통하는 골목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곧 저녁때라 한창 밥 짓는다고 정신없을 아낙네도, 긴 곰방대를 문 어른도 다 함께 모여 큰길 양쪽을 꽉 메우고 있었는데 포졸들까지 나와 더 이상 앞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걸 보면 뭔가 대단한 구경거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저씨, 여기서 오늘 뭐 해요?”
어른들 틈바구니 사이에서 겨우 고개를 들이민 거란족 아이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옷자락을 끌어당겨진 사내는 쪼끄만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저리 가라며 손을 내저었다.
“훠이! 애들이 볼 게 못 된다.”
“뭔데요?”
“그게…….”
사내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길 저편에서 일단의 행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맨 앞에는 멋진 갑옷을 차려입고 말을 탄 장수가 있었고, 그 뒤에는 굴비처럼 줄줄이 묶여서 터벅터벅 걷는 사내들이 있었는데, 옷차림새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탓에 꾀죄죄한 데다 찢어지고 뜯긴 자국이 적나라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에요? 왜 저렇게 묶여서 끌려간담.”
변발을 한 머리나 입고 있는 옷 모양새가 척 보기에도 조선인이 아니라 유목 민족들 쪽에 가까웠기에 이상하게 생각한 거란족 아이가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암, 죄를 지었지.”
사내는 이미 봐 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말릴 생각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주상 전하를 배신하고 청나라 놈들과 야합한 놈들이란다. 초흐타 부족이라고 하는데 벌을 받아 마땅한 것들이야!”
“야합이 뭔데요?”
아직 어려운 단어는 잘 모르는 거란족 아이가 다시 묻자 사내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음. 그게…….”
“적군이랑 몰래 손잡았다는 거 아냐?”
“뭐야, 그럼 배신자네!”
“나쁜 사람들이야, 악당!”
“훈장님이 그러셨잖아. 임금님의 명을 어기는 건 나쁜 행동이라고.”
“맞아.”
사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자기네들끼리 말하고 결론까지 다 내려 버린 아이들은 흥분해서 언성을 높였다.
“이거나 먹어라!”
비록 부족은 다르지만 같은 거란족임에도 불구하고 학당에서 조선식으로 교육을 받은 아이는 자그마한 돌멩이를 주워서 포승줄에 묶여 걸음을 옮기고 있는 초흐타 부족 사내를 향해 내던졌다.
따악-.
“윽.”
호기롭게 던지긴 했지만 설마 진짜 맞을 줄은 몰랐던 거란족 아이는 초흐타 부족의 사내가 인상을 찡그리며 노려보자 찔끔해서 친구들 뒤로 황급히 숨었다.
커다란 돌멩이도 아니고 기껏 해 봐야 손가락 한두 마디 정도의 작은 돌이었기에 맞아도 그리 아프진 않았겠지만 어쨌든 기분은 나쁜 듯 째려보는 눈빛이 매우 험상궂었다.
“얼른 움직여!”
갑자기 멈춰 선 걸 눈치챈 병사가 창끝으로 등을 쿡 찌르자 그제야 초흐타 부족 사내는 마지못한 듯 눈길을 거두고 앞 행렬을 따라갔다.
“휴우~!”
“우와, 너 대단하다!”
“저렇게 무서운 악당한테 돌멩이를 던지다니, 용감한데?”
“다시 봤어!”
친구들한테 겁쟁이라 불릴까 봐 내심 간을 졸였던 거란족 아이는 갑작스레 쏟아지는 칭찬 세례에 우쭐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헤헹,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잘난 척하기는~.”
“그래도 오늘은 꽤 멋졌으니까 그냥 봐주자.”
“그래. 이번엔 네가 대장해!”
“진짜?”
포로 행렬이 다 끝나자 아이들은 금세 흥미를 잃은 듯 왁자지껄 떠들어 대면서 다시 공터로 돌아갔다.
이렇게 포로로 끌려온 거란족이 심양성에만 무려 사천여 명이 넘었는데 도현의 지시에 따라 이들은 몇 개의 무리로 나뉘어 삼 년간 노역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노약자와 아이 그리고 부녀자 들은 별도의 마을을 만들어 이미 복속한 다른 거란 부족처럼 정착해 조선 백성으로 살도록 했다.
이런 가운데 조선군뿐만 아니라 궁지에 몰려 있던 요산타 부족과 반대 세력까지 합세해 공격을 해 대자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야율보기는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채 오백 명도 안 되는 소수의 부족민만 데리고 흑룡강 너머로 도망치고 말았다.
“야율보기가 흑룡강을 건넜다고?”
비단 보료 위에 앉은 도현의 물음에 임경업이 살짝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아군이 급히 추격에 나섰습니다만 때마침 몰아친 눈바람에 발이 묶여 안타깝게 놓치고 말았다고 합니다.”
“아쉽게 됐군.”
마지막 마무리가 제대로 안 된 것 같아 조금 찝찝했지만 이미 초흐타 부족은 예전 세력을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리멸렬한 상태였기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천인대 하나를 도강시켜 달아난 야율보기를 계속 추격할까 하옵니다.”
“흐음”
팔걸이 끝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잠시 생각을 해 본 도현은 이내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그만둬.”
“예?”
“오지에 기어 들어가 작정하고 숨은 놈을 찾아내기가 쉽겠어? 아직 청국의 위협이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런 데 신경을 쓸 여유는 없어.”
“하오나 괜히 불안 요소를 놔두기보다는 수고스럽더라도 아예 싹을 잘라 버리는 것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미 날개가 다 꺾이고 겨우 목숨만 부지해서 달아난 놈이 뭘 할 수 있겠나.”
“…….”
자신이 보기에도 재기가 불가능해 보였지만 지난번 저격 사건을 겪어서 그런지 임경업은 좀처럼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알고 있는 도현은 일부러 자연스럽게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나머지 거란 부족들의 분위기는 어떤가?”
“그렇지 않아도 그것과 관련해 한 가지 더 보고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말해 보게.”
“야율보기와 싸우던 부족 족장들이 전하께 복속하고 싶다는 뜻을 보였다고 하옵니다.”
뜻밖의 소식에 도현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앞에 있는 임경업을 봤다.
“스스로 복속을 하겠다고 했단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허어.”
살짝 헛웃음을 지어 보인 도현은 이내 자세를 바로 하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설마 거기에 요산타 부족도 포함된 건 아니겠지?”
“복속을 주도적으로 설득한 이가 바로 굴천 대족장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도현은 입가를 약간 비틀며 웃었다.
“제법 똑똑한 놈이군.”
“무슨 말씀이신지…….”
“이번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상태이니 버티고 있어 봤자 어차피 오래지 않아 우리한테 흡수될 거라는 걸 깨닫고, 먼저 머리를 숙여 몸값을 최대한 올려 받겠다는 거 아니겠나?”
그가 단번에 굴천 대족장의 속셈을 파악하자 임경업은 짧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아.”
“뭐, 어차피 남은 거란족 부족을 모두 흡수하려고 했고 강제적인 것보다 이게 남들 보기에도 좋으니 그렇게 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굴천 대족장한테 야율보기의 추격을 맡기면 되겠군.”
“그게 무슨?”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임경업과 시선을 맞추며 도현은 미소 띤 얼굴로 이야기를 이었다.
“여러 가지로 야율보기한테 쌓인 감정이 많으니까 적당한 감투를 하나 씌워 주고 놈을 잡으라고 하면, 아마 기를 쓰고 덤벼들 거야. 그러면 거란족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인물을 멀리 오지에 보내 버리고 더불어 불안 요소인 야율보기까지 처리하는 거니, 이거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니겠나?”
“역시 전하이시옵니다.”
“궁내부에 일러 어명을 써 줄 테니, 그대로 실행하도록 하게.”
“네.”
얼마 뒤 봉황도 총독이 도현을 대신해 거란 부족의 복속을 받아들였는데, 그 자리에서 수장 격인 굴천 대족장한테 정사품 군호 벼슬이 내려졌다.
다른 족장들도 적당한 벼슬이 하사됐지만 대부분 실권이 없는 명예직인 것과 달리, 굴천 대족장은 비록 원래 거느리고 있던 부족 전사들이지만 병사 천여 명을 부릴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됐다.
먼저 복속을 했던 부족들한테도 이런 대우를 해 준 적이 없었기에 굴천은 대족장으로서 어느 정도 체면을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이어서 전달된 어명에 벼슬을 받은 걸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이거 너무한 거 아닙니까?”
장님인 굴술이 분통을 터트리자 옆에 서 있던 마회도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족장님, 지금이라도 조선 국왕의 지시를 거절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제 막 복속을 하고 벼슬까지 받았는데 처음 내려진 어명을 따르지 않겠다면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의자에 앉은 굴천이 씁쓸한 표정을 짓는 걸 보고 마회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흑룡강을 넘어가서 어디로 숨은지도 모르는 야율보기와 잔당을 추격해 잡아 오라니요.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이런 일에 대족장님이 자리를 비우시면 부족민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차라리 제가 대신 갈 테니 남아 계십시오.”
충성스러운 부하답게 마회가 대신 갈 것을 자청했지만 굴천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건 알 될 말이야.”
“왜 그렇습니까?”
발끈하는 마회를 보며 굴천은 조용하게 이유를 설명해 줬다.
“어명에 추격대 지휘관으로 날 콕 짚어서 지목했는데 마음대로 그걸 바꾼다면 국왕을 능멸했다는 죄를 뒤집어쓸 수 있어.”
“그럼 총독한테 부탁을 하거나 조선 국왕에게 사람을 직접 보내서 지휘관을 교체해 달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 봤자 소용없을 거야.”
“…….”
“쉽게 바꿔 줄 거라면 애초에 날 지목했을 리가 없지.”
“대족장님.”
흑룡강을 넘어가면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기약하기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순순히 조선 국왕의 지시를 받아들이려는 굴천의 모습에, 마회는 정색을 하며 어떻게든 그를 말리려고 했다.
“다시 한 번 재고해 보십시오.”
하지만 굴천의 결심은 확고했다.
“아니, 오히려 더 잘된 걸지도 몰라.”
“그게 무슨…….”
“비록 군호라는 높은 벼슬을 받았지만 여기 계속 남아 있으면 그저 그런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겠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추격대를 지휘하는 것이 백번 나을 거야. 그리고 야율보기한테는 꼭 받아 내야 되는 혈채도 있고 말이야.”
담담하게 이야기를 하던 굴천은 이내 분기탱천해서 말소리를 높였다.
꼭 되갚아 줘야 될 혈채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마회는 더 이상 그를 만류할 수가 없었다.
며칠 뒤 굴천은 부족 깃발과 삼족오기를 나란히 앞세우고는 전사 일천 명을 이끌고 야율보기를 잡기 위해 아직도 꽁꽁 얼어 있는 흑룡강을 건넜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던 거란족을 이렇게 완전히 흡수한 도현은 만주 지역의 조선 영토를 북쪽으로 흑룡강까지 넓힐 수 있었는데,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곳곳에 커다란 기념비를 세우고 실록에도 상세히 기록하도록 조치했다.
그렇게 시끄러웠던 겨울이 지나가고 만물이 소생하는 따뜻한 사월 어느 날 별로 반갑지 않은 소식이 대궐로 날아들었다.
“명 황제가 사신을 보냈다고?”
용상에 앉은 도현의 물음에 외무대신 박노가 허리를 살짝 굽히며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봉황상단에서 운영하는 교역선을 통해 전해진 문서대로라면 늦어도 보름 안에 제물포로 도착할 것이옵니다.”
청국 때문에 조선과 이어진 육로가 끊기고 북경까지 함락당한 채 강남으로 쫓겨 내려간 명나라는, 연락을 주고받을 마땅한 방법이 없어 양국 사이를 오가는 교역선을 통해 외교문서를 보내고 있었다.
예전부터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와서 피해만 잔뜩 줬지 도움 되는 것이 없었기에 도현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특히나 이번에는 사신이 무슨 이유로 오는지 알고 있었기에 더 껄끄러웠다.
“보나 마나 명나라로 도망친 역적 놈들 때문에 오는 거군.”
“송구하옵니다.”
반란을 일으켰던 황죽표 일당이 명나라로 도망쳐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다들 알고 있었기에 박노뿐만 아니라 모든 신하들이 그의 눈치를 보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신하들의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도현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신으로 누가 온다고 하던가?”
“예부좌랑인 장계척이 정사正使라고 하옵니다.”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데?”
“남경으로 천도를 하면서 새롭게 발탁된 인물로, 학문이 높고 명나라 조정의 실력자인 대학사 황보태와 같은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라고 하옵니다.”
마지막 말에 도현은 인상을 썼다.
“황보태라면 황죽표를 보호하고 있는 자가 아닌가?”
“맞사옵니다.”
“이거 일이 고약하게 됐군.”
예전하고 달리 명나라에 무조건 순종하지 않고 철저히 실리를 챙기고 자존감을 지키는 도현과 현재의 조선에 대해 불편한 태도를 보이는 대학사 쪽 사람이 책임자로 온다는 건, 이번 사신 맞이가 순탄치 않을 거라는 걸 예고했다.
“사신이 온다고 하니 일단 맞이할 준비를 해야 되지 않겠사옵니까?”
도현을 의식해서 일부러 상국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 박황의 말에 그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지.”
“그럼 관례대로 준비를 시키겠습니다.”
그러자 도현이 고개를 삐딱하게 들며 말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나?”
“……무슨 말씀이신지?”
총리대신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도현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이야기를 했다.
“좋은 일로 오는 것도 아닌데 성대하게 맞이할 이유가 있겠냐 이거야.”
“그럴수록 더 융숭하게 접대를 해서 사신의 기분을 맞춰 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외무대신인 박노가 끼어들며 하는 이야기에 도현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이미 시비를 걸려고 작정을 하고 오는 걸 텐데 그런다고 바뀌는 것이 있겠어?”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다 쓸데없는 짓이야. 그동안 명나라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얼마나 많은 재물을 뜯겼나. 오죽했으면 사신이 한번 다녀가면 조정이 휘청거린다는 말이 다 나오겠어. 이번에는 그런 불합리한 관행을 고쳐야 되겠어.”
명나라 사신의 패악질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가뜩이나 불편한 일로 오는 사신인데 대접을 소홀히 하면 이걸로 괜한 트집을 잡지 않을까 신하들은 걱정스러웠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만 의례적으로 행하던 것을 갑자기 안 한다면 자칫 사신들이 오해를 할 수 있으니, 여유를 두고 차근차근 바꿔 나가시지요.”
“그게 좋을 것 같사옵니다.”
총리대신의 말에 다들 허리를 숙이면서 관례대로 접대를 할 것을 건의하자 도현은 앞에 있던 서탁을 손바닥으로 세게 내려치며 호통을 쳤다.
탕!
“짐이 그렇게 강조를 했는데 경들은 아직도 명나라를 상국으로 떠받드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 것이오!”
“그런 것이 아니오라…….”
“듣기 싫소. 지난 왜란의 빚은 이미 이자까지 넉넉하게 쳐서 다 갚았고, 우리 조선도 북방 땅을 되찾아 옛 고구려의 위엄을 되찾아가는 이때에 명나라 황제도 아니고 사신 따위한테 비굴하게 쩔쩔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오. 그러니 짐이 시키는 대로 왕족이 성문 밖까지 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고 접대도 간소하게 하시오.”
“…….”
“왜들 대답이 없소!”
도현의 호통에 신하들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외무대신은 사신이 오면 짐을 시해하려 한 역적을 명나라가 보호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분명히 따지도록 하시오.”
접대 문제도 어떻게 풀어야 될지 까마득한데 가장 민감한 사안인 황죽표 문제를 거론하라고 하자 박노는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저, 전하.”
하지만 그러든 말든 도현은 단단히 화가 난 목소리로 넓은 대전이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를 쳤다.
“명색이 황제국이자 아국의 우방이라는 나라가 반역도를 감싸 주고 있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그렇지만…….”
외무대신인 박노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자 도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다그치듯 쏘아붙였다.
“뭐가 그렇지만이오! 설마, 저들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거요?”
화들짝 놀란 박노는 황급히 양손을 들어 손사래를 쳤다.
“아니옵니다.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그럼 뭐가 문제요!”
여기서 말 한마디라도 잘못했다가는 그대로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었기에 좌우로 늘어서 있는 신하들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눈치만 살폈고 정색을 한 박노는 얼른 허리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하명하신 대로 행하겠사옵니다.”
그제야 도현은 마음에 든다는 듯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일체 사신 일행에게 재물을 건네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이 단장.”
“예, 전하.”
한 발짝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이는 이완 단장을 보며 도현은 단호한 음성으로 지시를 내렸다.
“일부 불충한 무리가 사신 일행에 접근해 나라에 해를 끼치는 행동을 할 수 있으니, 주작단이 책임을 지고 사전에 그런 움직임을 철저히 차단하도록 하게.”
“옛.”
이처럼 시종일관 강경하게 나오는 도현의 모습에 총리대신을 비롯한 신하들은 말을 꺼내지는 못했지만 우려를 감출 수가 없었다.
대전 회의가 끝나고 밖으로 나온 박노는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총리대신인 박황에게 다가갔다.
“대감.”
“왜 그러는가?”
“정말 주상 전하께서 지시하신 대로 사신 일행을 대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박황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전하께서 저리 강경하신데 어쩌겠나.”
“하지만 그랬다가 명나라와 관계가 완전히 틀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대감!”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치는 박노를 향해 박황은 진지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자네는 아직도 모르겠나?”
“뭘 말씀입니까?”
“영명하신 전하께서 그것도 생각을 안 하시고 말씀을 하셨겠나.”
“설마?”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박노가 눈을 크게 뜨자 총리대신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최악의 경우 명과 국교가 끊어질 걸 각오하고 계실게야.”
“당장 만류해야 됩니다.”
“아까 자네도 대전에서 봤지 않나. 결심이 확고하셔서 뜻을 되돌리기 어려울 걸세.”
“하지만 오랜 우방과 이런 식으로 틀어지는 건 좋지 않습니다.”
“글쎄…… 아까는 나도 극구 만류를 했지만 지금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먼저 원인을 제공한 건 우리가 아닌 명이지 않나?”
“……?”
“황죽표 일당이 누군가. 바로 주상 전하를 시해하고 조정을 뒤엎으려고 했던 반역도일세. 이유가 어찌 됐건 그런 자들을 데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명이 우릴 능멸하고 신의를 먼저 깬 것이야.”
“으음.”
틀린 말이 아닌 것이, 황죽표 일당의 위치가 확인되자 조정에서는 지체 없이 여러 차례 정식으로 국서를 보내 이들의 송환을 명나라에 요구했지만, 상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명나라가 상국이라지만 이건 엄청난 결례일 뿐만 아니라 도현과 현 조정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반란 세력을 옹호하는 행위였다.
“그리고 예전과 달리 청에 패해 강남으로 쫓겨 내려간 명나라가 우리에게 더 이상 위협이 될 수 없으니 눈치를 볼 필요가 없지 않겠나.”
“그렇기는 하지만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아직 명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맞네. 헌데 반대로 생각하면 그렇기에 명나라도 함부로 우리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지 않겠나. 오히려 당당하게 싸워 청을 이긴 우리보다 힘없이 패하기만 한 명나라가 더 간절한 입장이겠지. 전하께서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계실 걸세.”
“아…….”
그제야 도현이 그토록 당당하게 나올 수 있는 이유를 깨달은 박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리며 감탄성을 내뱉었다.
그러자 작게 미소를 지은 박황은 힐끗 방금 나온 대전을 쳐다본 뒤 이야기를 이었다.
“자네도 심양관저 시절부터 전하를 모셨으니, 전하의 행동이 충동적인 것처럼 보여도 항상 앞뒤를 치밀하게 재고 움직이신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걸세.”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제라도 전하의 의도를 알았으면 됐지 않나. 그러니 너무 걱정 하지 말고 하명하신 대로 따르시게.”
“알겠습니다.”
잠시 더 총리대신과 대화를 나눈 박노는 한결 밝아진 얼굴을 하고는 외무부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보름 뒤 예정대로 사신을 태운 명나라 관선 한 척이 제물포 선착장에 도착했다.
“으샤!”
덜컹.
인부들이 잔교를 설치하자 관복을 입은 명나라 사신 일행이 거들먹거리며 배에서 내렸다.
그러자 마중을 나와 있던 외부차관 이척이 정중하게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자넨 누군가?”
“외부차관을 맡고 있는 이척이라고 합니다.”
사신 일행 중 한 명이 주위를 둘러보고는 퉁명스러운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소?”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생각에 이척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누굴 찾으시는지……?”
“다른 고위 관료들은 어디가고 당신만 나와 있냐는 거요!”
“우리가 전부입니다.”
“뭐라!”
이척의 대답에 말을 하던 사신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일행들 앞에 점잖은 표정을 짓고 선 장계척도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든 말든 이척은 차분한 어조로 사신 일행을 보며 말했다.
“배를 타고 오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여기서 하룻밤 묵고 가실 객사를 준비해 뒀습니다. 절 따라오시지요.”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이척이 먼저 돌아서 가자 명나라 사신 일행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화를 냈다.
“저, 저런.”
“대인, 따라가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다시 배에 오르시지요.”
“그렇습니다. 감히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고 온 사신 대접을 이따위로 하다니 혼쭐을 내 줘야 합니다.”
표정을 굳힌 채 가만히 있던 장계척은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닐세.”
“예?”
“저들도 우리가 무슨 용건으로 왔는지 알고 있는 게지. 어디 언제까지 이렇게 건방을 떨 수 있는지 두고 보세.”
“알겠습니다.”
사신 일행은 한양으로 가서 방금 당한 수모(?)를 마음껏 화풀이할 생각을 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제물포 관아에서 하룻밤을 묵은 명나라 사신 일행은 육로를 이용해 곧장 한양으로 올라가서 남별궁南別宮에 짐을 풀었다.
남별궁은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慶貞公主가 출가해 거주하던 저택이었는데 소공주댁小公主宅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현재의 소공동이라는 지명도 소공주댁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의 소공주동에서 유해한 거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양을 점령한 왜군 장수인 우키타[宇喜多秀家]가 거처로 삼기도 하고 나중에는 원군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머물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러다가 아예 명나라 사신이 오면 머무는 객사로 정해져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었다.
“명나라 사신이 도착했다고?”
앞에 엎드려 있던 외무대신 박노는 도현의 물음에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방금 남별관에 들어갔다는 기별을 받았사옵니다.”
“분위기는 어떻다던가?”
“그게…….”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박노가 머뭇거리자 도현은 들어 볼 것도 없다는 듯이 허리를 펴며 말했다.
“보나 마나 잔뜩 화가 나 있겠지.”
“…….”
“제물포에서 한바탕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용케 한양까지 올라왔군.”
마찰이 있을 걸 알면서도 이런 행동을 하는 도현을 살짝 원망 섞인 눈으로 쳐다보며 박노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수행원들이 화를 내며 항의하려 했지만 정사인 장계척이 제지시켰다고 하옵니다.”
“호오. 그게 정말인가?”
“예.”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제일 먼저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조금 뜻밖이군.”
“예상과 달리 말이 통하는 상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희망이 섞인 박노의 말에 도현은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인내할 줄 안다는 뜻이니 상대하기 더 골치 아픈 인물인 것 같군.”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내 말이 틀림없을 테니 한번 두고 보게.”
그러자 이제부터 장계척과 사신 일행을 상대해야 되는 박노는 수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명나라 사신을 상대할 생각을 하니 걱정이 태산이옵니다.”
“심양 관저에서도 껄끄러운 청국 관리들과 무난한 관계를 유지했으니 경이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걸세.”
“……예.”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명나라 황제의 명을 받고 온 칙사라고 절대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하게 행동하게.”
정색을 하며 도현이 하는 말에 박노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알겠사옵니다.”
“만약 저들이 계속 억지를 피운다면 명나라와 국교를 단절해도 좋네.”
“……!”
너무나도 충격적인 이야기에 박노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 전하!”
저절로 음성이 떨리는 박노와 달리 비단 보료 위에 앉은 도현은 너무나도 태연한 얼굴로 그를 봤다.
“뭘 그리 놀라는가?”
“국교를 끊으신다니, 진심이시옵니까?”
지난번 총리대신인 박황과 대화를 나누면서 도현이 최악의 경우도 고려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막상 그에게 직접 얘기를 듣자 박노는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꼭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그럴 각오로 사신을 상대하라는 걸세.”
“으음.”
한발 뒤로 물러서는 것처럼 말을 했지만 박노는 국교를 단절하겠다는 이야기가 결코 빈말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애써 정신을 수습한 박노는 살짝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친견은 언제쯤 하실 생각이시옵니까?”
“글쎄, 며칠 애를 좀 태우면서 상대의 의중을 살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이제 일일이 대꾸할 기력도 없는지 도현의 말에 박노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나가 보게.”
“예.”
몸을 일으킨 박노가 뒷걸음으로 희정당을 나가자 옆에 시립해 있던 칠현이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말 이래도 괜찮으시겠사옵니까?”
“뭐가?”
“황제의 칙사를 홀대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자 도현은 몸을 뒤로 기대면서 약간 가라앉은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언젠가 한번은 명과의 관계를 다시 재정립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주변 정세가 예전과 확연히 바뀌었는데 계속해서 불평등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그때가 지금이라는 말씀이시옵니까?”
“마땅한 기회가 없었는데 명나라에서 스스로 빌미를 제공해 주니 그걸 그냥 놓칠 수는 없지 않겠어.”
황제의 칙사가 온 것이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명나라의 영향력 아래에서 완전히 벗어날 기회로 생각하며 씨익 미소를 짓는 도현의 대범함에 칠현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무튼 정말 배포가 크십니다.”
“제아무리 사대사상이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는 자라도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를 옹호할 수는 없을 거야.”
“그렇군요.”
도현의 말대로 예전처럼 제조지은을 운운하며 명나라 편을 들었다가는 그대로 황죽표 일당과 같은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었기에 사대부들 역시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 때문에 대전회의에서도 명분이 도현한테 있다는 걸 알기에 신하들이 강하게 반대를 할 수 없었다.
도현의 지시로 모든 접촉과 환영 접대가 금지되자 남별궁에 들어간 사신 일행은 마치 유배라도 온 것처럼 객사 안에 갇혀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명나라 사신이 오면 온갖 산해진미에 수많은 미녀들을 불러 하루가 멀다 하며 연회를 열고 재물과 귀한 인삼을 듬뿍 안겨 주던 걸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오죽했으면 명나라 관리들 사이에서는 조선에 한번 다녀오면 평생 호의호식할 재물을 챙길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마저 있을 정도였으니, 사신 대접에 나라 기둥뿌리가 뽑힌다는 이야기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당연히 이번에도 상당한 뇌물을 챙길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던 사신 일행은 달라진 조선의 태도에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대인, 이거 정말 너무한 것 아닙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벌써 한양에 도착한 지 사흘이 지났는데, 조선 왕은 고사하고 대신들의 코빼기도 볼 수 없으니 이건 명백하게 우리를 홀대하는 겁니다.”
“맞습니다.”
잔뜩 화가 쌓인 수행원들이 아침부터 득달같이 달려와 불평을 늘어놓자, 가뜩이나 조선의 태도에 심기가 불편하던 장계척은 인상을 찡그리고는 살짝 짜증을 냈다.
“그래서 날 보고 어찌하라는 건가?”
“조선 측에 강력히 항의를 하셔야지요.”
“이건 우리뿐만 아니라 황제 폐하를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황제를 내세우고 있지만 이들이 진정으로 분노하는 건 한참 아래로 생각하는 조선이 자신들을 홀대하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고 뒷돈을 제대로 챙겨 주지 않아서였다.
참새처럼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수행원들의 이야기를 듣다 못한 장계척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알았으니 그만 나가 보게.”
그러자 수행원들은 더 할 말이 많았지만 짜증이 가득한 장계척의 표정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
미닫이문이 닫히고 넓은 방 안에 둘만 남게 되자 측근인 왕상정이 장계척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인.”
“왜 그러나?”
“조선 측의 무례를 언제까지 두고 보실 요량입니까?”
“으음.”
인상을 찡그리며 침음성을 흘리는 장계척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왕상정은 진지한 얼굴로 계속 이야기를 이었다.
“수행원들의 불만도 크지만 자칫 조선 측에 만만하게 보일까 봐 걱정입니다.”
“안 그래도 내일쯤 외무대신이라는 작자를 불러 항의할 생각이었네.”
“그렇습니까?”
“감히 이딴 식으로 우릴 대하다니 이번에 조선 국왕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주고 말겠어.”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는 걸 자제했지만 주먹을 꽉 움켜쥐면서 말하는 게 심하다 싶을 정도의 홀대에 자존심이 크게 상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현이 역사책 편찬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긴 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났다.
그동안 송시열은 도현의 배려로 임시로 만든 벼슬을 맡아 만주 일대로 고구려 시절 유적 답사를 떠났다가 막 돌아온 참이었다.
전에 그가 찾아왔을 때 받은 탁본이 있긴 했지만 광개토대왕릉비를 직접 눈으로 보고 도현이 받았던 감동을 자신도 체험하고 싶어서였다.
게다가 답사의 목적은 그뿐만이 아니라, 근방에 있는 유목민들을 찾아가 뭔가 입으로 전승되어 내려오는 전설이나 일화를 수집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는데, 의외로 얻은 수확이 많아 자료들을 정리하는 것만 해도 꽤 많은 시간이 걸릴 듯했다.
“흐음.”
송시열은 붓으로 글자를 쓰다 말고 살짝 눈을 찌푸렸다.
이름 없는 한 소규모 유목 민족의 장로가 해 줬던 이야기를 다시 옮겨 적고 있는 중이었는데, 같이 동행했던 역관이 돕는답시고 대필해 준 것 중에 몇몇이 흘려 쓴 글자가 많아 알아보기가 힘든 탓이었다.
“어쩔 수 없군.”
한양으로 돌아올 때 역관도 같이 왔으니, 나중에 따로 불러서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한 송시열이 일단 종이를 옆으로 치워 놨을 때였다.
“대감마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하인이 문밖에서 인기척을 내며 고하는 말에 송시열은 고개를 들어 대꾸했다.
“뉘시라 하더냐?”
“남원에서 오신 차석호 어른이십니다.”
잠시 기억을 더듬던 송시열은 곧 이름을 떠올리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한창 후학 양성에 힘을 쓰고 있을 때 가르쳤던 제자 중 한 사람으로, 한동안 무난하게 관리직을 역임하다가 노쇠한 부친이 병에 걸려 봉양을 해야 하는 사정이 생겨서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로는 소식을 듣지 못하던 참이라, 그는 얼른 하인에게 일렀다.
“사랑채로 모셔라, 차도 좋은 것으로 하나 새로 끓여 오고.”
“예, 마님.”
하인이 물러가고 나서 송시열이 사랑채 안으로 들어가니,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차석호가 그를 보고 서둘러 일어나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스승님.”
“그래, 이게 얼마 만이냐?”
송시열은 약간 감회가 어린 표정으로 제자를 바라보고는 물었다.
“아버님께서는 좀 어떠하신지 모르겠구나. 아직 병이 다 낫지 않으셨다면 내 좋은 환약이 몇 개 있으니 나중에 하인에게 말해 챙겨 주마.”
스승의 호의에 차석호는 씁쓸하게 웃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이미 작년에 상을 치러서 필요 없을 듯하옵니다.”
“허어. 그런가.”
애석하게 탄식을 흘린 송시열은 재차 물었다.
“그럼 지금은 고향에서 뭘 하고 있는가?”
“작은 서당을 하나 차려 양반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있다 보니 제 젊은 시절이 떠오르면서 스승님 생각이 많이 나더군요.”
“하하! 그래?”
“예. 안 그래도 마침 한양에 볼일이 있어 올라왔다가 인사라도 하고 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찾아왔지요.”
“잘했네. 나도 적적하던 참이니 잠시 말동무나 하다 가게나.”
송시열은 차를 내온 하인에게 다시 술상을 준비하라고 말했다.
안주와 함께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옛날 추억을 떠올린 송시열은 제자와 함께 마시니 더욱 맛있다며 흐뭇하게 웃었다.
“헌데 스승님, 오랜만에 한양에 올라와 보니 그간 많은 변화가 생겼더군요.”
“흠.”
“게다가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까지 벌어지고 있으니, 처음엔 듣고도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호오. 한양에 대체 내가 모르는 어떤 해괴한 사건이 있었단 말이냐?”
“지금 한양에 명나라 사신이 와 있는 것은 아십니까?”
송시열은 대답하지 않고 그냥 고개만 까딱였다.
그리고 눈빛으로 얼른 계속하라 재촉하니 차석호가 술상 앞에 바짝 다가앉아 몸을 기울였다.
“사신을 맞이하는데 환영 연회도 열지 않을뿐더러 며칠째 대궐로 불러들이지도 않으면서 홀대를 하고 있다는데, 벌써 저잣거리에 소문이 쫙 퍼져 일반 백성마저 다들 이 일을 알고 있더군요.”
“뭐, 명나라 사신 이야기가 장안의 화제라는 건 사실이지. 이젠 조정과 별상관이 없는 나한테도 절로 귀에 들어올 지경이니까.”
“이게 말이나 될 법한 상황입니까? 감히 황제께서 보내신 사신을 그런 식으로 홀대하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인데 말이지요.”
흥분한 듯 열을 내는 말하는 차석호의 모습이 신경에 거슬렸는지 송시열은 술잔을 내려놓고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연회는 관례일 뿐이지 꼭 그래야 한다고 정해진 바가 없네. 게다가 전부터 연회를 여는 데 드는 비용이 너무 많아 호조에서 몇 번이고 상소문이 올라왔다는 걸 자네는 알고 있나? 그리고 주상 전하께서 일이 바쁘시면 좀 기다리게 할 수도 있는 거지. 명나라 황제가 직접 온 것도 아닌데 웬 호들갑인가?”
“스승님!”
당연히 자신의 말에 공감할 거라 믿었던 송시열이 반대로 역정을 내고 나서자, 차석호는 경악하여 말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흥! 요즘 젊은 사람들은 너무 머리가 굳어 있어. 아무리 상국이라 해도 그렇지, 요구하는 게 너무 도를 지나치지 않나. 일개 사신 주제에 황제라도 된 것처럼 주상 전하께서 직접 맞이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또한 황제국이면 그에 걸맞은 처신을 해야 되는 법인데, 아국에서 역모를 저지르고 도망친 대역죄인들을 숨기고 넘겨주질 않는데, 어찌 우리만 허리를 굽히고 예로써 대하여야 하는지 자네야말로 나를 설득시켜 보게나.”
서슬 퍼런 송시열의 호통에 차석호는 안색이 백짓장처럼 하얘져서 당황해하다가 그래도 뭐라 반박해 보려고 했다.
“허나…… 그것은…….”
“제대로 말하지 못할 거라면 아예 입을 벙긋하지도 말게! 자네의 말은 상국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그저 강한 자에게 굽실거리는 소인배의 짓이야.”
송시열이 손바닥으로 상을 탁 내리치자 옆에 내려놓았던 술잔이 휘청하며 엎어졌다.
“…….”
어찌 대꾸해야 할지 몰라 어두운 표정으로 엎어진 술잔을 바라보고 있던 차석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전 이만 물러가는 게 좋겠습니다.”
“내 생각도 그러하네.”
차가운 스승의 말투에 차석호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선 그대로 돌아섰다.
“여봐라!”
“예, 대감마님.”
“손님이 돌아가시니 대문까지 배웅하도록 해라. 그리고 이 술상도 치우고!”
송시열은 멀리서 대문이 여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사랑채를 떠나 본래 작업 중이던 서재로 돌아왔다.
“휴우!”
나름 전도유망하다고 생각했던 제자가 아직도 세상이 변한 걸 모르고 사대주의에 빠져 사리 분간도 못 하고 막무가내로 명나라를 옹호하는 꼴을 보니, 배 속이 뒤틀릴 것만 같았다.
송시열은 이런 사대부들의 잘못된 가치관을 바로잡기 위해 한시라도 빨리 제대로 된 역사서를 편찬해야 하는 이유를 절실히 느끼고선 붓을 들었다.
이처럼 아직도 사대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몇몇 사대부들이 도현과 조정의 행태에 불만을 가졌지만, 예전과 달리 드러내 놓고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도현이 교육을 시키고 국력을 키우며 생긴 자신감에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예전과 달리 명나라를 무조건 떠받들지 않았다.
특히 이번에는 역모를 저지르고 도망간 역적과 관련이 되어 있었기에 명나라의 행동에 부정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다.
장계척이 외무대신인 박노한테 정식으로 항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계속 감감무소식이던 조정은, 사신 일행이 한양에 도착한 지 정확히 이레째 되는 날 입궁을 허락했다.
넓은 대전 안에 대소신료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가운데 사신의 도착을 알리는 내관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칙사 일행 듭시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명나라 관복을 입은 장계척과 수행원 두 명이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걸어 들어와 도현과 서너 발자국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바닥에 엎드려 예를 갖추지 않고 포권을 한 채 간단히 허리만 살짝 숙였다가 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아무리 황제가 보낸 칙사라고 하지만 일개 신하가 한 나라의 국왕한테 하는 인사 치고는 너무나도 무례한 행동이었는데, 이것만 봐도 그동안 명나라가 조선을 업신여기고 있었으며 두 나라의 관계가 얼마나 불평등했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도현은 내색하지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먼 남경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소. 뭐, 불편한 점은 없으셨소?”
건방지게도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도현을 마주 보고 있던 장계척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했다.
“한시라도 빨리 전해야 되는 황제 폐하의 칙서를 이제야 갖다 드리게 돼서 유감입니다.”
가시가 있는 말이었지만 그럴 줄 예상했던 도현은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아주 태연하게 상대의 공격을 받아넘겼다.
“북경이 함락되는 바람에 힘들고 위험한 뱃길을 이용해서 온 사신 일행이 충분히 쉬면서 기력을 회복하라고 배려한 것이니 오해는 하지 마시오.”
“…….”
북경을 잃고 강남으로 쫓겨 내려가 있는 명나라의 곤궁한 처지를 은근히 강조하면서 마치 그동안 친견을 미뤄 왔던 것이 사신 일행을 배려해서 그런 것처럼 이야기를 하자, 장계척은 상대의 뻔뻔스러움에 어의가 없으면서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 속으로 노기를 삼켰다.
그런 장계척의 모습을 보며 얄밉게도 씨익 미소를 지은 도현은 두루뭉술하게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 버렸다.
“갑자기 황제께서 칙사를 보내시다니 우리가 여러 차례 요구한 대로 명나라에 도망쳐 있는 역적들을 송환해 주기로 허락하신 거요?”
이번에도 도현이 상대가 할 말을 가로채 먼저 선수를 쳐 버리자 장계척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흐흠. 그 문제에 대해서인 것은 맞지만 내용은 다릅니다.”
그러자 도현은 앉아 있는 용상 팔걸이 끝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내용이 다르다라…… 구체적으로 뭐가 다른지 말을 해 보시오.”
“먼저 황제 폐하께서는 오랜 우방인 조선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서 상당히 우려를 하고 계십니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맙구려.”
말을 하는데 자꾸 불쑥불쑥 끼어들어서 맥을 끊어 버리는 도현의 행동에 장계척은 짜증이 났지만, 애써 참으면서 이야기를 이었다.
“해서 남경에 와 있는 황죽표 일행을 직접 부르셔서 사정 이야기를 들으신 후 백성 된 도리로 기본 덕목인 충을 어긴 죄도 크지만, 그 전에 주상께서 독단적으로 국정을 운영하신 것이 이번 사건의 근본 원인이라는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순간 대전 안은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신하들은 연신 도현과 장계척을 힐끔거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역모의 잘못이 짐한테 있다는 것이오?”
예상과 달리 불같이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지그시 상대를 바라보며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는 것이 오히려 더 좌중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전적으로 전하의 책임이라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잘못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도현은 손바닥으로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며 참았던 분노를 터트렸다.
탕!
“그게 그거 아니오! 아무리 다른 나라 일이라고 하지만 조총을 쏴서 날 암살하려 했던 자들을 보호해 주는 것도 부족해서 역모의 원인이 이쪽에 있다는 괴변을 늘어놓다니 지금 날 우롱하는 건가?”
보통 이런 일이 생기면 조선 왕과 신하들은 어떻게든 명나라의 마음을 돌리려고 전전긍긍하기 마련인데 뜻밖에도 먼저 언성을 높이면서 상대가 세게 나오자, 오히려 당황한 건 사신 일행이었다.
“만약 명나라에서 이런 일을 일어났어도 역적의 말을 듣고 황제가 국정 운영을 잘못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황제를 거론하자 발끈하는 장계척의 모습에 도현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자신들은 이렇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우리한테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다니 이거야 말로 모순矛盾이 아니고 무엇인가!”
도현이 쏟아 내는 말에 장계척은 딱히 반론을 찾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기에 바로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의 마음을 꼬아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그저 이번 사건이 잘 마무리되어 조선이 안정을 되찾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드리는 이야기인데 전하께서 먼저 상국에 대한 예를 다하지 않고 충을 저버리는 행동을 하시니 사대부들이 이런 과격한 일을 벌인 것이 아닙니까?”
“이것 보시오. 말이 너무 과한 것 아니오!”
주도권을 빼앗기고 계속 수세에 몰려 있던 장계척이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아주 민감한 곳을 건드리면서 도현을 압박하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총리대신 박황이 발끈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제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몇 년 전부터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조공도 바치지 않고 듣자하니 매해 사대부들이 자발적으로 신종神宗 폐하의 은덕을 기리는 것도 못하게 막았다고 하던데 이게 상국에 대한 예의입니까!”
신종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파견해 준 명나라 황제로 사대주의에 빠진 사대부들이 은덕을 갚는다며 사당에 모여 제사를 지내곤 했다.
명나라의 참전이 순수하게 조선을 도와주려는 것이 아니라 북경까지 치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에 불안감을 느껴 부랴부랴 조선을 방파제로 삼으려고 했다는 걸 아는 도현은 이런 사대부들의 행동이 너무나도 한심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나라와 민족의 자존심을 되찾고 사대주의를 청산한다는 의미로 신종에 대한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어명을 내렸다.
그런데 이게 부메랑이 되어 날아온 것이다.
이건 내부의 밀고자가 있지 않다면 명나라가 알 수 없는 일이었는데 그게 누군지는 굳이 찾지 않아도 뻔했다.
바로 전남 지역 사림의 거물이자 지난번 역모 사건의 실질적 주동자인 황죽표였다.
의외의 역습에 모여 있던 신하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크게 술렁거렸고 비장의 패를 꺼내 든 장계척은 한쪽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고는 득의만만한 얼굴을 했다.
도현도 내심 뜨끔했지만 이내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태연한 얼굴로 앞에 서 있는 장계척을 봤다.
“조공이야 명나라를 도와 청과 대적하느라 큰 피해를 입은 아국의 사정을 고려해서 당분간 하지 않기로 예전에 양해를 얻은 것이고, 제사 문제는 그걸 핑계로 일부 불순 세력들이 모여 지난번 역모 같은 사건을 꾸미는 일이 빈번해서 중단하라 이른 것인데 뭐가 문제란 거요?”
“그게 지금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또 도현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고 하자 미간을 찌푸린 장계척은 약간 언성을 높이며 따지듯 말했다.
“짐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이오. 칙사야말로 역적들의 일방적인 이야기만 듣고 조선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소.”
“글쎄요. 우리한테 하는 걸 보면 방금 하신 말씀에 신뢰가 가지 않는군요.”
비아냥거리면서 장계척이 말을 하자 눈썹을 위로 치켜올린 도현은 대전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신뢰가 가지 않다니! 명에 신의를 지키기 위해 청나라와의 전쟁에 군사를 여러 번 파견했고, 그 때문에 두 번이나 침략을 당해, 급기야 선왕께서 누르하치 앞에 끌려가 삼배구고두례를 하는 치욕을 당하기까지 했는데, 그런 말이 나오는가!”
“그, 그건…….”
조선 입장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을 스스럼없이 꺼내 이야기를 하자 오히려 장계척이 당황했다.
“이런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끝까지 명나라와 신의를 지켰는데, 고작 이따위 사소한 것들로 짐을 핍박하고 큰 죄를 짓고 도망친 역적들을 감싸고돌기까지 하다니 정말 실망스럽군.”
싸늘한 눈빛으로 사신 일행을 쳐다본 도현은 용상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굳은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짐은 더 할 이야기가 없으니 칙사는 이만 객사로 돌아가시오.”
“저, 전하!”
화들짝 놀란 장계척이 그를 불렀지만 도현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대전을 나가 버렸다.
“허어.”
본론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도현한테 주도권을 빼앗긴 채 끌려가다가 친견이 끝나 버리자 장계척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당했다는 걸 깨달은 장계척은 인상을 쓰며 용상 바로 아래에 서 있는 총리대신 박황에게 분통을 터트렸다.
“이런 경우가 어디 있소!”
그러자 사신을 맞이하기 전에 도현한테 들은 이야기도 있고 시종일관 조선을 너무나도 우습게 보는 상대편의 태도에 감정이 상해 있던 박황은 지지 않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칙사께서 먼저 전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셨소이까.”
“그건…….”
“아무튼 이런 분위기에서 환영 연회를 열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국서만 주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소이다.”
“끄으응.”
퉁명스러운 박황의 말에 장계척은 얼굴을 구기며 앓는 소리를 냈다.
감히 속국 주제에 황제 폐하의 신하인 자신을 이따위로 골탕 먹인다는 생각에 속이 부글부글 끊어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다 엎어 버리고 싶었지만 이대로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간다면 자신의 경력에 오점일 뿐만 아니라 친우인 대학사 황보태와 은밀히 이야기를 나눈 것이 있었기에 화를 꾹 눌러 참았다.
“그럼 다음 만남은 언제로 할 것이오?”
“글쎄올시다. 일단 주상 전하의 화가 가라앉으시면 말을 드려 볼 테니 객사에서 기다리도록 하시오.”
“…….”
또다시 기다리라는 말에 수행원으로 따라온 왕상정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분통을 터트렸다.
“지금 우릴 놀리는 거요! 당장 조선 왕을 불러오시오.”
“뭐라! 아무리 명나라에서 온 칙사라고 하지만 일국의 지존이신 주상 전하를 오라 가라 하다니 무엄하오!”
“흥! 그렇게 예의를 잘 따지는 자들이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온 우리를 이따위로 홀대할 수 있는 거요!”
“어허. 정말 말이 안 통하는 자들이로군.”
“지금 뭐라고 했소!”
말다툼이 점점 감정싸움으로 변해 가자 얼굴을 구긴 채 서 있던 장계척이 흥분해서 대전에 있는 신하들과 대거리를 하는 수행원들을 제지했다.
“그만두게.”
“대인, 하지만 이자들이…….”
“어허.”
장계척이 눈에 힘을 주며 쳐다보자 수행원들은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조선 측 신하들도 박황이 나서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렇게 분위기가 어수선한 가운데 장계척은 박황을 보면서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대화가 안 될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겠소. 하지만 오늘 당한 무례는 절대 잊지 않을 거요.”
차갑게 말한 장계척은 수행원들과 함께 화난 발걸음으로 대전을 나갔다.
그런 사신 일행의 뒷모습을 박황이 굳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 때 외무대신 박노가 옆으로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감, 저들이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은데 정말 이대로 괜찮겠습니까?”
“이미 내친걸음이 아닌가. 주상 전하를 믿고 그대로 진행하게.”
박황의 말에도 장계척을 직접 상대하며 협상을 벌여야 되는 입장인 박노는 근심을 쉽게 지우지 못했다.
“후우. 앞으로 저들을 상대할 생각을 하니 까마득합니다.”
“다 잘될 걸세.”
골치 아픈 일을 떠맡은 박노가 측은했지만 도와줄 거라고는 이렇게 위로를 하는 것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