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압박 (67/104)

압박

그날 오후 남별관에 머물고 있는 명나라 사신 일행은 대전에서 당한 수모에 언성을 높이며 분을 참지 못했다.

“이걸로 조선이 우리 명나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분명해졌습니다.”

“당장 남경으로 돌아가 황제 폐하께 조선 왕이 불측한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걸 고해 벌을 내리도록 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상석에 앉은 장계척도 좀처럼 화를 삭일 수 없을 만큼 분하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쩐지 자꾸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얼굴을 굳힌 채 묵묵히 이야기만 듣고 있는 장계척의 모습에 측근인 왕상정이 슬쩍 다른 수행원들에게 눈치를 주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인, 표정이 안 좋으십니다.”

그러자 상념에서 깨어난 장계척은 고개를 들며 한쪽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아까 신경을 많이 썼더니 조금 피곤한 것 같군.”

“탕약이라고 하나 달여 오라고 할까요?”

“아닐세.”

장계척이 살짝 손을 내젓자 왕상정이 이야기를 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다시 약속을 잡는다고 했으니 일단 기다려 봐야지.”

당장 짐을 싸라는 지시까지 내리지 않아도 조선 측에서 먼저 머리를 숙이고 들어올 때까지 회담을 거부하고 자존심을 세울 거라 생각하고 있던 왕상정은 뜻밖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진심이십니까?”

“그러네.”

그러자 수행원 중 한 명이 발끈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늘 그 수모를 당해 놓고 또 조선 왕을 만나시겠다는 겁니까?”

“그럼 이대로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가자는 건가?”

“그나마 남은 자존심이라도 세우려면 그렇게 해야지요. 사정을 설명드리면 황제 폐하께서도 충분히 이해하실 겁니다.”

다른 수행원들도 그 말에 찬성인지 다들 고개를 주억거리자 장계척은 인상을 찡그리고는 짧게 혀를 찼다.

“쯧쯧. 자네들은 우리가 이 먼 조선까지 온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장계척의 말에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제일 먼저 꺼낸 염소수염 사내가 약간 불만 어린 어투로 대답했다.

“그야 최근 들어 우리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불온한 조짐을 보이는 조선에 강력한 경고를 하고, 가능하다면 문제가 되고 있는 국왕을 교체시키거나 황제께 충성하겠다는 서약을 받아 오는 것이 아닙니까?”

“잘 알고 있군. 그런데 둘 중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그냥 빈손으로 돌아간다면 폐하께서 좋아하실 것 같나!”

날카로운 지적에 염소수염은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건…….”

“황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로 멀리 유배를 가거나 운이 좋으면 관직이 떨어지는 벌을 받겠지.”

“으음.”

조금 과장한 측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황제의 명을 받고 온 공식 사절인 만큼 성과를 내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문책을 피할 수 없는 건 분명했다.

그제야 사안의 심각성을 깨달은 수행원들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오늘 보인 조선 측 태도로 볼 때 어느 것도 쉽지 않아 보이는데 어쩝니까?”

“그래서 고민일세.”

“대학사 댁에 머물고 있는 황죽표라는 자가 일러 준 대로 사림과 은밀히 접촉을 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정색을 한 장계척은 왕상정을 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주변 경계가 삼엄한데 가능하겠나?”

“호위 무관 중에 몸이 날랜 자들을 몇 뽑아 뒀습니다.”

“흠…….”

손등으로 길게 자란 수염을 잠시 쓰다듬으며 고심하던 장계척은 이내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게. 대신 조선 측에 들키면 절대 안 되네.”

“염려 마십시오.”

장계척의 당부에 왕상정은 눈을 번득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날 밤 남별관 주위를 지키고 있는 조선 군졸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움직이는 인영들이 있었다.

바로 왕상정이 말했던 호위 무관들이었는데 어디서 구했는지 다들 사대부가 입는 도포 차림에 머리에는 갓까지 썼다.

“아무도 없습니다.”

후원에 서 있는 제법 커다란 소나무 위로 올라간 사내의 말에 우두머리인 언가충은 뒤에 모여 있는 부하들을 돌아보며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각자 목적지를 머릿속에 넣어 뒀지?”

“예.”

“예부좌랑의 서신은 꼭 당사자한테만 전달하고 조선 관헌의 눈에 띄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해라. 피치 못할 경우가 생긴다면 흔적이 남지 않게 상대를 없애 버리도록 해.”

“알겠습니다.”

부하들의 대답에 언가충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숨어 있던 전각 뒤에서 몸을 일으켰다.

“좋아. 그럼 가자.”

사사삭.

십여 명이 한꺼번에 움직였지만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재빨리 후원을 가로지른 언가충과 부하들은 지체 없이 어깨까지 오는 담을 타고 넘어갔다.

일반인들한테는 조금 벅찬 높이였지만 무예를 익힌 무관답게 밑에서 받쳐 주는 동료의 손을 밟고 단번에 뛰어넘었다.

반대편에 착지한 언가충과 부하들은 동료가 다 넘어올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이내 두세 명씩 짝을 지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이들이 떠나고 얼마 있지 않아 근처에 있던 어두운 골목길에서 주작단 간부인 김근행이 무표정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쯤 움직일 줄 알았지.”

“지금 바로 덮칠까요?”

옆에 있던 김덕생의 물음에 김근행은 놈들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남별관에 있는 명나라 사신들이 꼼짝 못 하도록 좀 더 확실한 증거를 잡아야지. 꼬리를 붙여 놨지?”

“네.”

“눈치 못 채도록 따라가다가 불온 세력과 접촉하면 현장을 덮쳐서 증거를 확보하고 놈들을 모두 체포하라고 해.”

“예.”

“오늘은 긴 밤이 되겠군.”

머리 위에 밝게 떠 있는 보름달을 보며 의미심장한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김근행은 단원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사실 주작단은 도현의 지시로 명나라 사신 일행이 한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밀착 감시를 하고 있었는데, 이런 줄도 모르고 황죽표가 남경에서 제안한 대로 사림과 접촉을 시도하고 있으니, 스스로 호랑이 입속에 머리를 들이미는 꼴이었다.

어둠이 고요하게 가라앉은 가운데, 북촌에 사는 백석천은 안방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가끔씩 아내가 옆에서 이가는 소리에 뒤척거리기도 했지만, 혼인을 한 지 이십 년을 훌쩍 넘으니 귓등으로 듣고 흘리는 요령이 생겨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렇게 그가 단잠을 꾸고 있을 때, 창호지 문밖에서 조심스럽게 하인이 백석천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어른, 주인어른.”

“으음…….”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덮는 시늉을 하던 그는 끈질기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결국 눈을 뜨고 비척비척 일어났다.

“무슨 일이냐?”

짜증이 잔뜩 묻어 있는 말투로 백석천이 말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요.”

“이런 야심한 시각에 대체 누가?”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어디 사는 누구인진 모르나 아침에 다시 오시라고 해라. 예의가 없어도 유분수지, 어찌 한밤중에 사람을 깨우고 난리야.”

백석천이 툴툴거리면서 다시 누우려는 낌새를 보이자, 하인이 곤혹스러운 어조로 서둘러 덧붙였다.

“저도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만, 남원진사 어른이 보내셨다 하면 주인마님께서 아실 거라 하기에…….”

“뭐?”

남원진사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백석천이 하품을 하던 손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남원에 진사가 한둘이겠냐만, 그에게 있어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냥 남원진사라는 말로 통하는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손님은 지금 어디 있느냐?”

“일단 사랑채에 모셔 놨습니다.”

“내가 가 보마.”

백석천은 주변을 더듬어 초롱불을 켠 뒤,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응, 누가 왔어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깬 모양인지 아내가 졸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계속 주무시게.”

아내가 다시 잘 수 있도록 초롱불을 훅 하고 불어 끈 백석천은 조심조심 문지방을 넘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인과 함께 사랑채로 향했다.

주위가 모두 어두운 가운데 유독 등불이 켜져 있는 사랑채만 눈에 띄어 보였다.

어른거리는 불빛 너머로 갓을 쓴 두 사람의 그림자가 비쳐 보이자 백석천은 뒤를 돌아보고 일렀다.

“이만 됐으니 너는 물러가거라.”

“차는 올리지 않아도 될깝쇼?”

“음.”

혹시 남원진사라는 게 그가 생각하는 사람이 맞다면, 오늘의 이 만남은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을 터.

게다가 대화 내용이 새어 나가서도 안 될 테니, 일찌감치 하인을 멀리 떼어 두는 게 상책이었다.

“됐으니 그냥 가 보게.”

“예.”

“크흠.”

밖에서 헛기침을 한 번 한 백석천은 사랑채 문을 열고 들어가 상석에 앉으면서 손님이랍시고 찾아온 두 사람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못 보던 얼굴인데……?”

비단 방석에 위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반쯤 걸친 자세로 백석천이 의뭉스럽게 말하자,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이내 눈빛이 더 매서운 쪽 사내가 입을 열었다.

“언가충이라고 합니다.”

“허어. 그래도 모르겠소만…….”

난생처음 듣는 이름에 백석천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옷은 제대로 양반처럼 갖춰 입었지만, 왠지 모르게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데다 말투는 약간 어눌한 것이 아무튼 수상하기 짝이 없는 상대였다.

백석천이 의심스런 눈빛을 하자 언가충이 덧붙였다.

“남경에서 예부좌랑 어르신과 함께 왔소.”

“예부좌랑? 아!”

그제야 백석천은 두 사람이 명나라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무릎을 탁 쳤다.

“헌데 남별관에 계셔야 할 분들이 어인 일로 나를 찾아오셨소?”

게다가 남원진사라는 말을 들먹거리다니, 이 명나라 사람들이 대체 대역죄를 짓고 도망친 황죽표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참으로 궁금했다.

언가충은 품에서 서찰 두 개를 꺼내어 서탁 위에 올려놓았다.

“하나는 예부좌랑께서 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황죽표 공이 쓴 것이오.”

“……!”

백석천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하인을 멀리 떼어 두길 잘했다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모를 저지른 사람의 서찰을 전해 받다니, 누가 들으면 대번에 공범으로 몰려 지금 당장 관아에 끌려가도 모자랄 판이 아닌가.

그는 눈앞에 놓인 서찰 두 장을 노려보기만 할 뿐 좀처럼 손을 뻗질 못했다.

“열어 보지 않을 생각이오?”

은근히 재촉하는 언가충의 말에 백석천은 끄응 앓는 소리를 내더니 결국 서찰을 들고 안을 펼쳐 보았다.

서찰 두 개를 서둘러 읽은 백석천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탁에 내려놓고 언가충을 향해 말했다.

“그래서 나한테 원하는 게 뭐요?”

“간단하오. 황제 폐하께 불충하며 무례하기 짝이 없는 조선 국왕의 횡포를 사대부들이 합심하여 바로잡아 주었으면 좋겠소이다. 조정 대신들 또한 국왕과 한패니 지금 사대부들이 떨쳐 일어나지 않으면 어찌하겠소.”

“허어…….”

백석천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언가충과 서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곤혹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는데 이들의 말대로 한다면 도현과 현 조정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꼴이 됐다.

예전처럼 신권이 살아 있고 사대주의가 팽배하다면 또 모르겠지만, 이미 도현이 절대 왕권을 구축한 데다 민족의 주체성과 자부심을 찾자는 움직임이 큰 상황에서 상대가 원하는 대로 나서기는 어려웠다.

거기다 계속된 역모로 인해 사림 세력이 지리멸렬해 있는 상태라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지금 이렇게 역적인 황죽표의 서신을 몰래 전해 받은 것만으로도 역모를 꾸몄다는 오해를 받기에 충분했다.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거절 쪽으로 마음이 기운 백석천이 정색을 한 채 막 입을 열려는 순간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죄인들은 순순히 나와 오라를 받으라!”

“……!”

마당에서 들리는 사내의 우렁찬 목소리에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던 백석천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관인들을 달고 오면 어떡하란 말이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백석천이 원망에 찬 시선을 보내는 걸 무시하고 벌떡 몸을 일으킨 두 사람은 손에 들고 있던 대나무 지팡이로 위장한 검을 뽑아 들고는 문 앞에 붙어 바깥 동태를 살폈다.

마당에는 횃불을 든 포졸 수십 명이 환하게 불을 밝힌 채 사랑채 건물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젠장!”

“이제 어쩝니까?”

함께 온 부하의 다급한 물음에 욕설을 내뱉은 언가충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어떻게든 여길 탈출해야 돼.”

그러고는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서 서탁 위에 놓여 있던 서찰을 얼른 집어 한쪽에 있는 호롱불로 가져갔다.

불을 붙이려는 순간 방문과 창이 부서지면서 무복을 입은 주작단 단원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와당탕!

“끄윽.”

문 앞에 붙어 있던 적은 김덕생이 휘두른 곤봉에 얼굴을 맞고 피를 뿌리며 뒤로 넘어졌고 바로 이어서 들어온 김근행은 상대가 증거인 서찰을 태우려는 걸 보고 지체 없이 품속에서 표창을 꺼내 날렸다.

“멈춰라!”

쉬익.

바람을 가르며 일직선으로 곧장 날아간 표장을 정확하게 서찰을 든 언가충의 왼쪽 손목에 박혔다.

“큭!”

후두둑.

서찰은 가까스로 불이 붙지 않은 채 바닥에 떨어졌고 언가충은 표창에 맞은 왼손을 감싸 쥐고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사이에 다른 주작단 단원들이 들어와 언가충에게 검을 겨눴고 김근행은 허리를 숙여 서찰을 집어 들었다.

“하마터면 큰 낭패를 당할 뻔했군. 다 끝났으니까 순순히 무기를 버리는 것이 어때?”

분한 얼굴로 이를 부드득 간 언가충은 얌전히 잡힐 생각이 없는지 기합성을 내지르며 덤벼들었다.

“이익. 어디 한번 잡아 봐라!”

“어딜.”

채챙! 챙!

달려드는 언가충의 앞을 단원 두 명이 가로막으면서 순식간에 검격이 오갔다.

“잡아라!”

함께 있던 부하는 이미 김덕생한테 제압당해 밖으로 끌려 나갔고 좁은 방 안에서 주작단 단원 두 명의 협공을 받으니 아무리 언가충의 무예가 뛰어나다고 해도 금방 수세에 몰렸다.

거기다가 방금 전 표창에 맞아 한쪽 팔까지 쓸 수가 없어 더 불리한 상태였다.

“컥!”

결국 언가충은 옆구리에 깊은 상처를 입고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등을 벽에 기댄 채 상처 입은 짐승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언가충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며 김근행이 차갑게 말했다.

“항복해.”

그러자 언가충은 눈을 치켜뜨며 소리쳤다.

“네놈들 뜻대로는 안 될 거다.”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목으로 가져가며 자결을 시도하자, 상대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김근행은 욕설을 내뱉으며 재빨리 몸을 날렸다.

“이런 썅!”

퍽!

“크헉.”

순식간에 앞으로 다가간 김근행이 검집을 휘둘러 상대의 검을 쳐 내고는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하지만 거리가 있던 데다 워낙 언가충의 행동이 빨라 목에 큰 상처를 입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으으…….”

바닥에 널브러진 채 목덜미에서 시뻘건 피를 흘리며 숨을 헐떡거리는 언가충을 내려다보면서 얼굴을 찡그린 김근행은 옆에 있는 단원들에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어서 의원한테 데려가지 않고 뭣들 하고 있어!”

“예, 옛.”

돌발 상황에 엉거주춤 서 있던 단원들은 김근행의 호통에 화들짝 놀라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도록 헝겊으로 대충 상처 부위를 누르고는 어느새 정신을 잃은 언가충을 들쳐 엎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지독한 놈.”

그걸 보며 짜증스럽게 말을 내뱉은 김근행은 겁에 질린 얼굴로 방 한구석에서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는 백석천한테 다가갔다.

“이봐.”

“히익. 사, 살려 주십시오.”

말 한마디에도 기겁을 하며 바닥에 몸을 엎드려 두 손을 싹싹 비는 백석천을 한심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김근행은 차갑게 말했다.

“방금 네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겠지?”

“전 그냥 손님이 찾아왔다고 해서 만난 것뿐입니다. 정말입니다.”

까딱 잘못하면 역적으로 몰려 목이 달아날 판이었기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백석천은 양손을 내저으며 다급히 변명을 늘어놨다.

하지만 김근행은 상대를 싸늘하게 바라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흥!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 네놈이 정녕 아무 관련이 없다면 이자들이 어떻게 여길 찾아왔겠느냐?”

“그, 그건…….”

말문이 막힌 백석천이 더듬거리며 눈치를 보자 김근행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고는 부서진 방문 밖에 서 있는 군관을 돌아보면서 지시를 내렸다.

“이보게.”

“예.”

“이자를 당장 의금부로 압송해 가게.”

“알겠습니다.”

의금부라는 말에 백석천은 까무러칠 듯이 펄쩍 뛰면서 김근행의 바지를 붙잡고 늘어졌다.

“아이고! 나리, 저는 진짜 아무것도 모릅니다.”

“놔라!”

“제, 제발 한 번만 봐주십시오!”

김근행은 끈덕지게 달라붙는 백석천을 호되게 뿌리치고서 큰 소리로 외쳤다.

“뭣들 하고 있는가, 죄인을 끌고 가지 않고!”

“예!”

“나리, 제 말 좀 들어 주십시오!”

눈물 콧물을 뽑아내며 다시 김근행에게 매달리려던 백석천은 포졸들의 억센 손아귀에 붙잡혀 그야말로 짐짝 다루듯이 질질 끌려 나갔다.

김근행은 엉망이 된 방 안을 슥 둘러보고는 옆에 있던 김덕생에게 물었다.

“다른 쪽은 어떻게 됐나?”

“지금쯤이면 그쪽도 일이 벌어졌을 겁니다.”

“음…….”

생각한 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김근행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사랑채를 나섰다.

그날 밤 주작단은 의금부의 도움을 받아 사림 잔당과 은밀히 접촉을 하려던 명나라 사신 일행을 모조리 다 체포했다.

짹짹짹.

어느새 아침이 되어 창밖에서 새들이 시끄럽게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남별관 내실에서는, 밤을 꼬박 새웠는지 장계척이 약간 초췌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지금까지 안 돌아오는 걸 보면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그러자 앞에 있던 왕상정이 애써 초조한 기색을 지우며 대답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조금 더 기다려 보시지요, 대인.”

“이 사람아, 벌써 해가 떴네. 단순히 서찰을 건네주고 답장만 받아 오면 되는 일인데 이렇게까지 지체될 이유가 없지 않나!”

“…….”

짜증 섞인 장계척의 말에 왕상정은 대답이 궁해졌다.

답답한 마음에 장계척이 담배를 피우려고 장죽을 꺼내 막 불을 붙이려는 순간, 수행원 한 명이 다급한 얼굴로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 대인!”

“뭔데 이 호들갑이야!”

“지금 바깥에 조선 관헌들이 잔뜩 몰려와 있습니다.”

“뭐라!”

그렇지 않아도 사림 잔존 세력과 접촉을 하기 위해 몰래 나간 호위 무관들이 감감무소식이라 초조해하고 있던 장계척은, 수행원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사실인가!”

“예.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달려온 겁니다.”

“그자들이 아침부터 무슨 일로 온 건가?”

“그게…….”

마음이 급해 죽겠는데 수행원이 얼른 대답을 하지 않고 우물거리자 장계척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빨리 말해 봐!”

“우리 사신단 수행원 중 몇 명이 어젯밤 역도들과 몰래 접촉을 하다가 의금부에 잡혔다고 합니다.”

“끄으응.”

결국 가장 피하고 싶었던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장계척은 앓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와락 구겼다.

“이럴 수가.”

함께 있던 왕상정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저들이 대인을 찾고 있습니다.”

“날?”

“예.”

그러자 왕상정이 급히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번 일에 대인까지 휘말려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대신 나가 볼 테니 여기에 계십시오.”

“자네 혼자서 괜찮겠나?”

“감히 대명제국의 신하인 저를 어찌하지는 못할 겁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장계척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며 말했다.

“자네만 믿겠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두 사람은 조선이 아무리 확실한 물증을 잡았다고 해도 황제의 신하를 심하게 핍박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며 굳어 있던 표정을 조금 풀었지만, 과연 일이 생각대로 진행될지는 두고 봐야 했다.

정문으로 나가자 병장기를 든 포졸 수백 명이 남별관 주위를 완전히 포위하고 있는 가운데 붉은색 관복을 차려 입은 의금부 도사 고용태가 명나라 호위 무관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들이오!”

왕상정이 먼저 기선을 제압할 요량으로 크게 호통을 치며 앞으로 나왔지만, 고용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기별을 넣어 달라고 한 지가 언제인데 정사께서는 왜 안 나오시는 겁니까!”

“고뿔이 걸리셔서 자리에 누워 계시니 나한테 대신 이야기를 하시오.”

어설픈 핑계에 고용태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흥. 어제까지 멀쩡하시더니 갑자기 아프다는 거요?”

“사신행의 피로가 쌓여서 그런 것이오.”

“뭐, 그다지 믿음은 안 가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니 그렇다고 칩시다.”

비웃듯 바라보는 시선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지금 수세에 몰린 건 이쪽이었기에 왕상정은 한쪽 뺨을 실룩이며 화를 참았다.

“그럼 그쪽과 이야기를 하면 되는 거요?”

“그렇소.”

“어젯밤 사신단에 속한 인물들이 불온 세력과 은밀한 만남을 하다가 체포되는 일이 있었소이다. 그래서 이와 관련된 조사를 해야 되니 협조해 주시오.”

그러자 왕상정은 바로 정색을 하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자들을 만나러 간 것뿐일 텐데 대명제국 관리를 체포했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소! 당장 조선 국왕에게 항의를 할 것이오.”

뻔뻔스럽게도 되레 화를 내면서 도현을 거론해 윽박지르는 왕상정의 행동에 고용태는 겁을 먹기는커녕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사신단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이거요?”

“물론이오. 그러니 썩 물러들 가시오.”

“그러면 이건 뭐요.”

고용태가 품속에서 증거로 확보한 장계척과 황죽표의 서찰을 꺼내 들자 목에 핏대를 세우며 떠들어 대던 왕상정은 헛바람을 삼키면서 얼굴이 창백해졌다.

“헉!”

“여기에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많이 쓰여 있더이다.”

“조, 조작된 것들이오!”

왕상정이 발악을 하듯 소리쳤지만 이미 주도권은 고용태에게 넘어갔다.

“그건 조사를 해 보면 다 드러날 것이고 이제 어명을 집행해야 되니 비켜 주시겠소?”

“지금 어명이라고 했소?”

“그렇소이다. 주상 전하께서 이번 일을 아주 중하게 보시고 직접 철저히 조사를 해 사실을 밝히라는 엄명을 내리셨소.”

“이런…….”

낭패한 표정을 짓는 왕상정을 보며 득의만만한 얼굴을 한 고용태는 고개를 뒤로 돌려 대기 중인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뭣들 하고 있느냐? 어서 조사를 시작해라!”

“옛.”

의금부 소속 포졸들이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긴장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던 호위 무관들이 검을 빼 들며 정문 앞을 막았다.

그 모습에 고용태는 왕상정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계속 이렇게 나오면 강제로 조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소이다.”

대명제국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상대의 강경한 어투에 얼굴을 구기며 낮게 침음성을 흘리던 왕상정은 이내 호위 무관들을 보면서 이야기를 했다.

“길을 열어 주게.”

“……예.”

바짝 긴장한 얼굴로 서 있던 호위 무관들은 왕상정의 말에 내심 안도한 표정을 지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잘 생각하셨소이다.”

약 올리듯이 왕상정에게 한마디를 던진 고용태는 부하들과 함께 기세등등하게 남병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록 이번에 체포된 호위 무관들의 거처로 한정이 됐지만 황제의 칙명을 받고 온 자신들이 묵는 곳을 속국의 관헌들이 뒤졌다는 것만으로도 사신들은 큰 굴욕감을 느꼈다.

한편 도현은 희정당 안에서 측근들과 차를 마시며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의금부 관헌들이 남별관에 도착했겠군.”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도현의 말에 이완 단장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것이옵니다.”

“세상이 달라진 것도 모르고 황제만 믿고 목을 뻣뻣하게 세우던 사신들의 얼굴이 구겨지는 걸 직접 봤어야 되는데 아쉽구먼.”

“그러게 말이옵니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도현과 달리 외무대신 박노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좀처럼 펴지 못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도 뒤탈이 없겠사옵니까?”

그러자 도현은 보료 등받이에 몸을 살짝 기대며 자신만만한 어투로 말했다.

“꼼짝 못 할 물증을 손에 넣었는데 저들이 무슨 변명을 하겠나.”

“하오나…….”

“설사 이번 일에 반발해서 황제가 분노한다고 해도 예전과 달리 청나라에 가로막혀 있는 이상 저들이 우릴 직접 제재할 수단은 없을걸세. 뭐, 배에 병력을 잔뜩 실어 띄울 수는 있겠지만 우리 수군이 그걸 그냥 두고 보지 않을 테고, 청과 대치 중인 상태에서 그러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일 테지.”

확실히 도현이 지적한 대로 현재의 명나라는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 있는 조선을 제재할 힘과 능력이 없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어리석게도 아직 사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부 사대부들을 부추겨 나라를 소란스럽게 만드는 것인데, 그것도 이번 일로 명분을 완전히 잃게 됐으니 쓸 수 없는 패가 되어 버렸지.”

“…….”

어느 사이엔가 명나라 사신 일행이 꼼짝달싹할 수 없는 함정을 파 두고 기다린 도현의 무서운 심계에 모여 있던 신하들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총리대신.”

“말씀하십시오.”

“의금부에 사신단을 책임지고 있는 장계척도 조사하라고 명하시오.”

말을 들은 박황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며 되물었다.

“정사를 말씀이시옵니까?”

“그렇소. 그래도 명나라 대신이라는 이름값이 있으니 직접 조사는 하지 말고 서면으로 대신하라고 하시오.”

딴에는 상대를 배려해 주는 것 같았지만 명나라 사신들의 거처를 수색한 것에 이어서 수장이자 고관인 장계척을 조사하는 건 엄청난 치욕을 주는 행위였다.

당연히 외무대신 박노를 비롯한 여러 대신들이 우려감을 표시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맞사옵니다. 지금까지 한 것으로도 저들의 기를 충분히 꺾었다고 생각하옵니다.”

“자칫 저들이 크게 반발할 수도 있으니, 이쯤에서 참으시지요.”

하지만 도현은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지 고개를 내저으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들 대가 약해서야 어찌 국정을 운영할 수 있겠소이까! 어설프게 건드려 놓으면 손을 쓰지 않은 것만 못하다는 걸 왜 모르시오? 이왕 상대를 압박하기 시작했으니 다시는 건방을 떨지 못하도록 코를 완전히 눌러 놔야 뒤끝이 없을 것이오.”

걱정이 됐지만 도현의 기세에 눌린 신하들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총리는 지시대로 짐의 명을 의금부에 전하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그 뒤로도 몇 가지 현안에 대한 대화가 오갔지만 사신단 문제에 비하면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오후 사신단은 의금부의 조사에 화를 내며 외무부에 공식적으로 항의를 했다.

상당히 곤혹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마음을 굳게 먹은 외무대신 박노는 의금부 도사 고용태와 함께 남별관을 방문했다.

“대인, 조선 외무대신께서 오셨습니다.”

“들여보내라.”

안에서 들리는 장계척의 목소리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들어가시지요.”

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서니 맞은편에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장계척을 가운데 두고 명나라 관리들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흐흠.”

괜히 헛기침을 한번 하며 걸음을 옮긴 박노는 함께 온 고용태와 비어 있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붉은색 무관복을 입고 있는 고용태를 힐끔 쳐다보던 장계척은 옆에 있던 왕상정이 귓속말로 뭔가를 속삭이자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이 자리에 의금부 관리는 왜 대동하고 온 것이오? 또 조사할 게 남았소이까!”

말투가 사나웠지만 박노는 당황하지 않고 여유롭게 미소 띤 얼굴로 상대를 했다.

“이번 일로 칙사께서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이군요.”

그 모습이 더 비위를 거슬렀는지 장계척은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탁자를 세게 내려치며 언성을 높였다.

탕!

“우릴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어찌 그럴 수가 있소! 이건 대명제국과 황제 폐하에 대한 도전이오.”

“일단 진정하시고 제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내가 지금 진정하게 됐소이까!”

“오해를 풀려면 서로 대화를 나눠야 되지 않겠습니까.”

박노의 말에 장계척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허어. 오해라…… 그래, 어디 한번 변명을 해 보시오.”

무섭게 노려보는 장계척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박노는 힘겨운 심양 관저 생활도 헤쳐 온 인물답게 위축되지 않고 어깨를 펴며 당당히 이야기를 했다.

“먼저 사신단의 거처를 포졸들이 들어가 수색한 건 우리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숙이고 들어가는 듯한 말에 장계척과 수행원들은 턱을 치켜들며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바로 이어진 이야기에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하지만 우리 측이 그런 강수를 쓸 수밖에 없었던 건 일정부분 사신단에도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뭐요!”

장계척 옆에 앉아 있던 왕상정이 발끈하며 소리쳤지만 박노는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계속 이어 갔다.

“애초에 그쪽 호위 무관들이 몰래 남별관을 빠져나가서 불온 세력과 은밀한 만남을 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같은 일도 없었을 겁니다.”

“이이…….”

사과를 하러 온 줄 알았던 박노가 오히려 화를 더 돋우는 이야기를 하자 장계척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이를 부드득 갈았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이야기인데 아국에서 대역죄를 저지르고 달아난 역적들을 데리고 있는 것도 부족해 이런 불미스러운 일까지 저지른 명나라와 사신단의 행동에 전하께서 아주 실망하고 계십니다.”

“그건 단순히 호위 무관들이 여유 시간을 이용해 개인적인 만남을 한 것뿐이라고 벌써 이야기를 했지 않소!”

왕상정의 궁색한 변명에 박노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왜 정문을 이용하지 않고 도둑놈처럼 몰래 담을 넘었으며, 대역죄인인 황죽표과 칙사의 서찰을 소지하고 있던 이유는 무엇이오?”

“다 조작된 거요!”

“조작이라…… 뭐, 좋습니다. 사신단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조사는 필요하니 부디 우리 쪽 사정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으음.”

교묘하게 상대의 술수에 말려들고 만 장계척과 수행원들은 침음성을 흘리며 똥 씹은 표정이 지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끊고 힐끗 앞에 있는 장계척을 쳐다본 박노는 약간 긴장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칙사께서 쓴 걸로 의심되는 서찰이 체포 당시 여러 개 나왔으니 어쩔 수 없이 조사를 받으셔야겠습니다.”

박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왕상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반발을 하고 나섰다.

“그게 무슨 망발이오!”

“지금 대인을 심문이라도 하겠다는 거요?”

단순히 호위 무관들의 거처를 뒤지는 것과 사신단의 수장이자 명나라 고관대작인 장계척을 심문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기에, 상대가 이렇게 격렬하게 반응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확실히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그게 좋겠지만 칙사의 체면도 있으니 서면으로 조사를 대신했으면 합니다.”

그러면서 박노가 눈짓을 하자 옆에 있던 의금부 도사 고용태가 비단으로 만들어진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놨다.

그걸 본 장계척은 눈썹을 치켜 올리고는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서 기가 다 막히는구려.”

“회답을 주시는 걸 강요하지 않겠지만 양국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서 심사숙고해 주길 바랍니다. 그럼 우리는 이만 가 보지요.”

일방적으로 자기 할 말만 하고 박노와 고용태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 버리자 왕상정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분통을 터트렸다.

“저자들이! 대인 그냥 개가 짖는 소리라 생각하시고 다 무시해 버리십시오.”

“맞습니다.”

그러자 얼굴을 굳히고 있던 장계척이 눈을 치켜 올리며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

잔뜩 화가 난 장계척의 모습에 왕상정과 다른 한 명은 어깨를 움츠리고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저들이 호위 무관을 현장에서 체포한 데다 서찰까지 확보한 상태에서 이번 일이 더 확대된다면 그 뒷감당을 누가 할 텐가!”

“그건…….”

“이 사실이 황궁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나는 물론이고 자네들까지 다 끝장이다. 저들은 그걸 알고 칼자루는 자기들이 쥐고 있다는 걸 강조하며 우릴 압박하는 거야.”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두 사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에잉. 문제없을 거라 호언장담을 하더니 이게 무슨 꼴이야!”

따가운 질책에 처음 사림들을 통해 도현과 조선 조정을 압박하자는 의견을 냈던 왕상정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또 괜히 꼬투리를 잡히는 일이 없게 서면 조사서나 확실히 써서 돌려주도록 해.”

“……예.”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장계척은 왕상정한테 시선도 주지 않고 의자에서 일어나 자신의 거처로 가 버렸다.

횃불을 훤히 밝힌 의금부 마당에는 역적과 내통한 죄목으로 잡혀 온 다섯 명의 죄인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불과 하룻밤 사이에 온갖 고초라는 고초는 다 겪은 사람처럼 얼굴이 해쓱한 데다, 머리는 봉두난발로 망나니처럼 풀어 헤쳐 있었으며 본래 입고 있던 비단옷 대신 거친 무명으로 짠 남루한 옷으로 바뀐 죄인들은 의금부 도사인 고용태가 모습을 드러내자 허겁지겁 소리를 질렀다.

“도사 어른!”

“저희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부디 아량을 베풀어 주시오!”

하지만 고용태는 그들의 하소연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오히려 귀신처럼 엄한 표정을 지었다.

“조용히 해라! 대역죄인 주제에 뚫린 입이라고 말들은 많구나.”

쩌렁쩌렁한 호통 소리에 죄인들은 억울하단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너희들의 죄를 네놈들이 잘 알고 있으렷다.”

“아이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쩌다가 재수 없이 휘말린 것뿐인데 역적이라니요?”

빗발치는 아우성에 고용태는 손으로 팔걸이를 탁 내리쳤다.

“모든 죄상이 명백한데 아직도 발뺌을 하려 들다니, 괘씸한지고.”

고용태는 손가락으로 죄인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럼 어찌하여 야심한 밤에 사신단의 호위 무관들과 은밀히 만나고 있었단 말이냐? 그것도 대역죄인인 황죽표의 서찰을 가지고.”

그러자 마당에 무릎 꿇은 죄인들 중에서 백석천이 목소리를 높여 반박했다.

“그자들이 품에 뭘 가지고 있을 줄 저희들이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저 손님이 찾아와서 상대를 해 주고 있었을 뿐입니다.”

“흥! 미리 알던 사람이 아니면 자다가 일어나서 집에 들일 이유가 없지 않느냐. 보통은 날 밝을 때 다시 찾아오라고 돌려보내는 것이 세간의 상식 아닌가!”

“그, 그건…….”

대꾸할 말이 없어진 백석천은 힘겹게 억지주장을 펼쳤다.

“실례인 줄 알면서도 늦은 시각에 방문할 정도니 아주 급한 용건이라 생각하고…….”

“헛소리!”

고용태가 크게 일갈하자 백석천은 히익 소리를 내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네 말이 모두 사실이라 치자. 허면 명나라의 호위 무관들은 너희들을 어찌 알고 찾아간 것이냐? 대역죄인 황죽표와 네놈들이 은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증거이지 않겠느냐!”

“도사 어른, 그건 말도 안 되는 오해입니다.”

백석천의 옆에 있던 사내가 무릎으로 땅을 기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역적인 황죽표와 다소 친분이 있었던 건 사실이오나 그건 단순히 같은 사대부끼리 어울려 다녔던 것뿐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온화한 표정 아래 얼마나 간사한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저희들로선 전혀 알 도리가 없었지 않습니까?”

사내는 바싹 마른 입술을 침으로 축였다.

“그가 역모를 저질러 대역죄인이 된 이후에는 단 한 번도 접촉이 없었사옵니다. 어떠한 소식도 전해 듣지 못했을 뿐더러 일체 연락을 취한 적도 없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믿어 주십시오, 나리!”

“억울합니다!”

높은 담장 너머까지 죄인들의 곡소리가 울려 퍼질 정도로 입을 모아 무죄를 호소했지만 고용태의 얼굴은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허면 그동안 연락도 없었는데 명나라 호위 무관들이 황죽표의 서찰을 들고 먼저 불쑥 찾아왔다는 것이냐!”

“그렇사옵니다.”

어떻게든 죄를 명나라 호위 무관들에게 떠넘겨야 자신들이 살 수 있었기에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들이 너희들한테 뭘 시키더냐?”

“그게…….”

머뭇거리며 바로 대답을 못 하자 고용태는 엄한 얼굴로 호통을 쳤다.

“아무래도 네놈들이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구나.”

“아, 아닙니다.”

“그럼 바른대로 말해 보라.”

“저희들한테 사림들을 규합해 조정에 명나라 사신들을 홀대하는 걸 성토하는 상소를 올리라고 종용했습니다.”

백석천의 말에 고용태는 눈을 반짝이며 재차 물었다.

“그게 사실이냐?”

“예.”

“다른 사람들도 이자와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느냐?”

“그, 그렇습니다.”

나머지 네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지옥에서 죄인을 심판하는 염라대왕처럼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고용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허면 네놈들의 하는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다고 맹세할 수 있겠느냐?”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당연합니다.”

“하지만 말로는 뭔들 못 할까.”

고용태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자 죄인들은 몸이 달아서 허겁지겁 말했다.

“뭐든 하겠으니 제발 믿어 주십시오!”

“좋다! 정 그렇게 결백을 주장한다면 네놈들이 직접 지금까지 했던 말들을 거짓 없이 똑바로 글로 써 보아라. 그리한다면 내 조금은 정상을 참작해서 선처해 주도록 하지. 여봐라! 이들에게 지필묵을 나눠 주어라.”

“예!”

의금부에 속한 포졸들이 미리 준비해 놓은 것처럼 흰 종이와 붓, 벼루를 바로 가져와 앞에 내려놓자 포박이 풀린 죄인들은 허겁지겁 종이에 글을 써 내려가기 바빴다.

여기서 까딱하다 황죽표와 함께 역적으로 몰리면 사형을 당하는 것은 물론 온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가문이 몰락할 판이었기에 더욱 절박하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을 마루 위에서 내려다보던 고용태는 모든 것이 다 생각대로 되어 간다는 듯 희미하게 입가에 작은 미소를 떠올렸다.

얼마 뒤 백석천과 죄인들이 쓴 자백서는 곧장 대궐에 있는 도현에게 보내졌다.

자백서를 읽어 본 도현은 얼굴 가득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의금부에서 일을 제대로 했군.”

“증거로 인정 못 하겠다고 우기겠지만 이걸로 명나라 사신들을 압박할 거리가 하나 더 생겼사옵니다.”

얼른 말을 받는 이완 단장을 보며 도현은 치하를 잊지 않았다.

“주작단의 활약이 컸네.”

“아니옵니다.”

“경과 주작단 단원들이 이렇게 뒤에서 버텨 주고 있으니 짐의 마음이 든든하네.”

“망극하옵니다.”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이완 단장의 모습에 도현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명나라 사신단 분위기는 어떤가?”

“외무대신께서 다녀가신 이후로 바깥출입을 일체 중단한 채 쥐 죽은 듯 조용하옵니다.”

“후후후. 이제야 누구한테 칼자루가 쥐여 있는지 깨달은 모양이군.”

“그런 것 같사옵니다.”

“음흉한 놈들이라 또 어떤 꼼수를 부릴지 모르니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될 게야.”

“명심하겠사옵니다.”

시선을 옆으로 돌린 도현은 외무대신 박노를 보면서 이야기를 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명나라와의 관계를 수평적인 위치로 바꿨으면 좋겠지만 한 번에 다 이루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많으니, 최소한 우리 조선이 예전처럼 맹목적인 굴종을 하지 않는다는 걸 확실히 인식시켜 줘야 하오. 알겠소?”

백여 년 넘게 이어져 오던 명과의 사대 관계를 끊어 내는 첫 단추를 꿰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 박노는 긴장한 표정으로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그 정도로는 안 되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해내시오.”

“……예.”

“이완 단장도 외무대신이 명나라 사신단의 항복을 받아 낼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게.”

“알겠사옵니다.”

어깨가 무거웠지만 그래도 조선의 자존심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맡았다는 생각에 박노는 마음속으로 어떻게든 이번 일을 성공시키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수시로 박노가 찾아와 압박을 가하고 주작단에서 일부러 흘리는 불리한 정보에 초조해진 장계척은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원하는 것이 뭐요?”

“뜬금없이 무슨 말씀이시오?”

자신을 계속 궁지에 몰아넣고 뻔뻔하게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는 박노의 모습에 장계척은 이를 부드득 갈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뭘 해 주면 이번 일을 그냥 묻어 주겠냐 이거요.”

“누가 보면 제가 칙사를 괴롭히기라도 한 것 같소이다.”

“그럼 아니오!”

죽일 듯이 노려보는 장계척의 시선에 박노는 허허 웃음을 지어 보이다가 이내 자세를 바로 하며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서로에게 불편한 현재 상황을 풀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요.”

“그러니까 그게 뭐냔 말이오?”

“간단합니다. 귀국에 있는 역적들을 송환해 준다면 얽혀 있는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겁니다.”

“역적이라면…….”

“칙사께서 생각하시는 바로 그들 말입니다.”

“으음.”

박노의 말에 장계척은 얼굴을 굳히며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황죽표 일당을 돌려보내는 건 스스로 자신들의 주장이 잘못됐다는 걸 자인하고 원래 의도와 달리 국왕인 도현의 권위를 세워 주는 거였다.

만약 조선 측이 요구하는 걸 들어준다면 황제한테 받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 되기 때문에 책임 추궁과 문책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거부하자니 그것도 곤란했는데 말 그대로 장계척과 사신단은 진퇴양난, 사면초가에 빠진 꼴이었다.

상대가 선뜻 대답을 못 하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그럴 걸 예상한 박노는 느긋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선심이라도 쓰듯이 이야기를 했다.

“고민이 되시나 봅니다?”

“……솔직히 그렇소.”

“그럼 여기서 제가 제안을 한 가지 더 하지요.”

“…….”

또 뭔 소리를 해서 혈압을 올리려고 저러나 하는 얼굴로 장계척이 바라보자 박노는 손등으로 길게 자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칙사의 체면도 있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빈손으로 돌아가면 문책을 피할 수 없을 테니, 전하께서 친서를 하나 써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뜻밖의 제안에 장계척은 상체를 살짝 앞으로 숙이며 관심을 보였다.

“친서라고 했소?”

“그렇습니다. 솔직히 딱 까놓고 이야기해서 칙사께서 이 먼 곳까지 온 이유는 조선이 변함없이 명나라를 상국으로 생각하는지 알아보려는 거 아닙니까?”

“흠흠.”

정곡이 찔린 장계척은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도 박노의 이야기를 딱히 부인하지 않았다.

“칙사가 문책을 당하지 않도록 전하께서 친서를 적당히 써 주신다면 우리 쪽의 요구를 들어준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으음.”

상당히 솔깃한 제안이었는데 비록 친우인 대학사 황보태와 이야기한 건 지키지 못하겠지만 조선 측의 말대로 한다면 두 가지 골칫거리를 한 번에 다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동석해 있던 왕상정과 다른 수행원들도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황보태와의 의리 때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망설이던 장계척은 이내 결정을 내렸는지 굳은 얼굴로 시선을 들었다.

“좋소. 제안을 받아들이겠소이다.”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인 내용을 논의해 볼까요.”

“그럽시다.”

그때부터 양쪽은 처음보다 훨씬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서 조금이라도 자신들이 유리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협상을 벌였다.

그리고 그날 오후 의금부 옥사에 갇혀 있던 명나라 호위 무관들은 모두 방명되어 사신단이 머무는 남별관으로 돌아갔다.

협상을 염두에 두고 그냥 가둬 놓기만 했지 별다른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기에 마음고생을 해서 약간 초췌한 것을 제외하고는 다들 멀쩡했다.

며칠 뒤 도현이 써 준 친서를 받은 사신단은 올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으로 마치 패잔병처럼 도망치듯 조용히 한양을 떠나 제물포에서 곧장 명나라로 가는 관선에 올랐다.

친서에는 명나라 황제인 숭정제를 떠받드는 온갖 미사여구가 가득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조공과 군신 관계를 계속 유지한다는 부분은 교묘하게 빠져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