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조화폐
“거총!”
군관의 외침에 넓은 벌판 한가운데 일렬로 늘어서 있던 병사들이 심지에 불을 붙인 조총을 들어 올렸다.
“조준!”
치치치칙.
바로 옆에서 심지가 빠르게 타들어 가고 있는 가운데 조총 개머리판을 어깨에 댄 병사들은 한쪽 눈을 감은 채 백 보 정도 떨어진 위치에 세워 놓은 과녁을 노려봤다.
“발사!”
명령과 함께 병사들이 방아쇠를 당기자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음이 주위에 울렸다.
타탕! 타탕! 탕! 탕!
흑색화약 특유의 매캐한 냄새를 풍기는 연기가 가시고 드러난 과녁에는 총탄에 맞은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약간 떨어진 곳에 햇빛을 가리는 커다란 천막을 치고 사격 시범을 지켜보던 예친왕은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조선군이 쓰는 총은 이것보다 사정거리가 더 길고 재장전을 해서 쏘는 것도 빨랐는데, 지금 이걸 개량한 거라고 내 앞에 가져온 거야!”
그러자 조총 개량을 책임지고 있던 중년인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황급히 허리를 굽혔다.
“죄, 죄송합니다.”
“에잉! 꼴도 보기 싫으니까 썩 꺼져.”
역정을 부린 예친왕이 한쪽 팔을 내저으며 뒤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자 중년인은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 얼른 천막 밖으로 나갔다.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그래도 전에 보유하고 있던 조총보다 사거리가 서른 보 정도 더 늘어났지 않습니까.”
용골대 딴에는 위로를 한답시고 한 이야기였지만 그게 오히려 더 예친왕의 비위를 건드렸다.
“그래 봤자 조선 놈들이 가진 총의 성능보다 훨씬 뒤떨어진 거잖아. 저걸 가지고는 제대로 붙기도 전에 병력의 절반이 날아가고 말 거야!”
괜히 나섰다가 욕만 한 바가지 얻어먹은 용골대는 머쓱한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지난 심양 전투에서 조선군이 가진 화포와 개량 조총에 큰 피해를 입었던 예친왕은, 그동안 등한시했던 화약 무기를 보강하고 성능을 향상시키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이를 위해서 한인 화포 장인 수십 명을 끌어모으고 청은 수만 냥을 쏟아부으며 일 년이 넘는 시간을 투자했다.
하지만 예친왕이 원하는 만큼 결과를 내지 못하고 개량을 한 것이라 가지고 오는 조총은 번번이 그를 실망시켰다.
이번 역시 혹시나 하고 참관했는데 기대한 성능을 보이지 못하자 결국 참고 있던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특히나 심양으로 진격하면 적군의 후방을 치기로 약조했었던 초흐타 부족이 도현에게 박살 나고 거란족이 조선에 완전히 흡수됐다는 소식을 들은 후라 더 심기가 불편했다.
“도대체 그 많은 인력과 재물을 투입하고도 조선 놈들도 만드는 걸 왜 못 해내는 거야!”
좌우에 잔뜩 늘어서 있던 측근들은 짜증이 가득한 예친왕의 모습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저 눈치만 살폈다.
그때 한쪽에 있던 만월개가 슬쩍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와 입을 열었다.
“그러시지 마시고 방법을 바꿔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슨 말이야?”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예친왕을 보며 만월개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었다.
“조선군에 필적하는 조총을 만든다고 벌써 일 년이 넘는 세월을 허비했습니다. 거기다 들어간 재물은 또 얼맙니까?”
“그래서 포기라도 하자는 거야?”
이마에 핏줄을 돋우면서 예친왕이 화를 내려고 하자 만월개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섭정께서 원하시는 대로 심양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인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뭐야!”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것이 어렵다면 다른 방법으로 비슷한 성능의 무기를 확보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흥미가 도는지 의자에 기대고 있던 예친왕은 상체를 바로 하면서 이야기를 재촉했다.
“계속해 봐.”
“우연히 북경에 들어와 있는 서양 승려(신부)를 만날 일이 있었는데 대화를 나누던 중에 조선군의 조총이 바로 서양인들이 쓰는 머스킷Musket이라는 총과 비슷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머, 뭐라고?”
발음이 어려운지 예친왕이 살짝 인상을 쓰자 만월개가 알기 쉽게 천천히 다시 이름을 말해 줬다.
“머스킷입니다.”
“그럼 조선 놈들이 그 머스킷인가 뭔가를 입수해서 쓰고 있다는 거야?”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흐음.”
그럴듯한 이야기에 예친왕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기자 만월개가 은근슬쩍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비슷한지 직접 보시지요.”
“가지고 왔나?”
“그 서양 승려한테 어렵게 한 정을 구했습니다.”
“어서 가져와 보게.”
“예.”
만월개가 손짓을 하자 하인 두 명이 커다란 나무 상자를 가져와 바닥에 내려놓고는 뚜껑을 열었다.
“이게 그 머스킷이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스스로 뛰어난 장군이자 진정한 여진 전사라고 자부하는 예친왕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직접 나무 상자 안에 들어 있던 머스킷을 꺼내 들고는 이리저리 자세히 살펴봤다.
심양 전투에서 조선군한테 대패를 당한 이후 청군이 보유한 조총을 여러 번 쏴 본 그는 어렵지 않게 기존 조총과의 차이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호오. 심지를 꽂는 곳에 부싯돌이 달려 있군?”
“잘 보셨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그 부싯돌이 불꽃을 튀겨 안에 든 총알을 발사시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선군의 총이 심지를 꽂아 쓰는 아군 조총보다 연사 속도가 훨씬 뛰어났던 거군.”
공성전에서 청군 병사들을 섞은 짚단처럼 무더기로 쓰러뜨렸던 총의 비밀을 하나 발견했다는 듯이 예친왕은 눈을 반짝 빛내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어디 시험 사격을 해 보게.”
“네.”
잠시 뒤 만월개가 데려온 하인 한 명이 머스킷을 들고 아까 병사들이 사격 시범을 보였던 장소에 섰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만월개가 손짓을 하자 하인은 서양인한테 배운 대로 허리 밸트에서 카트리지라고 불리는 종이포를 꺼내서는 입으로 찢어 안에 든 화약을 쇠구슬 모양의 총알과 함께 총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긴 꼬챙이를 가지고 총구에 넣은 화약을 잘 다진 뒤 바로 총을 들어 올려 앞에 보이는 과녁을 겨냥하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앙!
일직선으로 날아가 총알은 정확히 과녁에 명중했고 하인은 만월개한테 미리 지시받은 대로 곧장 방금 전 했던 동작을 반복해 재차 머스킷을 발사했다.
시범을 모두 지켜본 예친왕은 감탄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짝짝짝!
“그래. 바로 이거야!”
“마음에 드십니까?”
“제대로 잘 가져왔어.”
단지 심지를 쓰지 않은 것뿐이지만 아까 쐈던 조총보다 연사 속도가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빨라졌다.
“이걸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
“제가 말씀드렸던 승려가 머스킷을 제작할 줄 안다고 합니다.”
“오호. 그래?”
크게 고개를 끄덕인 예친왕은 약간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당장 데려오게.”
“예.”
드디어 조선군을 상대할 무기를 손에 쥐게 됐다는 생각에 예친왕은 잔뜩 고무된 모습으로 다시 가져온 머스킷 총신을 쓰다듬었다.
그날 오후 예친왕은 미구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중년의 이탈리아 출신 가톨릭 신부를 만나 북경 지역에서 신자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할 수 있는 걸 허락해 주는 대신 머스킷 제작 기술을 전수받기로 합의했다.
태후가 대전에서 황후 간택을 한다고 천명한 이후, 각 대신들 사이에선 치열한 눈치작전이 벌어졌다.
자신의 딸을 후보로 밀어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
황후 자리를 차지할 수만 있다면 외척으로서 커다란 권력을 차지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이 적장자로서 대를 이어 황제의 보위를 이으면 이 대에 걸쳐 가문의 권세를 떨칠 수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론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밀어 넣으려고 기를 쓰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은 대신들 대부분이 태후파와 예친왕파로 나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황제가 아직 어리니 못해도 향후 십 년간은 대전에 치맛바람이 계속 불 텐데, 그렇다면 장래의 권력 구도가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장담을 못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로 떠올랐다.
만약 예친왕이 독한 마음을 품고 반란이라도 일으킨다면 어린 황제와 그 식솔을 가만 둘 리가 없고, 태후는 또 어디 만만한 사람인가.
모든 걸 손에 쥐고 휘두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여자니 황제의 배필이자 국모로서 황후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꼭두각시 역할을 할 사람을 뽑으리라는 건 누구나 다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일부 중도파 대신들은 딸의 얼굴에 곰보 자국이 있다느니, 갑자기 병에 걸렸다느니 핑계를 대면서 간택을 피하려고 했으나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딸을 추천하는 사람도 꽤 있었다.
치열한 눈치 싸움이 계속되는 가운데 마침내 궁내부에서 황후에 적합한 가문과 교양, 미모를 가진 적정 연령대의 소녀들을 추려 명단을 작성했다.
태후는 인적 사항이 적힌 명단을 받아 들고 훑어보더니,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하면 누가 뽑혀도 황후로 어울리겠구나.”
그러고 나서 태후는 길일을 택해 소녀들을 황궁으로 불러들이라고 내관에게 명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화려하게 장식된 가마가 황후 후보들을 궁으로 데려가기 위해 각 가문으로 보내졌고, 부모로부터 가문의 명예를 드높여야 한다고 단단히 교육받은 소녀들은 잔뜩 긴장한 마음으로 초조하게 태후의 부름이 있기를 기다렸다.
“저것 좀 보세요, 폐하. 하늘이 맑고 청명하니 배필을 뽑기에 참으로 어울리는 날씨 아닙니까?”
태후가 웃으면서 말을 걸었으나 황제는 부루퉁한 얼굴로 다리를 흔들었다.
“어마마마, 전 여자 따위 관심 없습니다. 황후가 꼭 필요하시면 그냥 알아서 정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아직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도 잘 모를 어린 나이인 황제는 마냥 놀고만 싶은지 투정 부리듯 말했다.
몸에 걸친 곤룡포는 무겁고 불편하기만 할뿐더러, 전날 밤 늦게까지 놀다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약간 짜증이 나 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호호, 암만 그래도 부인이 될 사람인데 폐하께서 얼굴은 한번 보셔야지요.”
“끄응. 그냥 예쁘면 되는 거 아니에요?”
“뭐, 미모도 황후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긴 하지요.”
태후는 알 듯 말 듯 미소를 짓고선 내관에게 일렀다.
“후보들을 들이도록 해라.”
“예.”
내관이 손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후보로 간택된 소녀들이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걸어 나와 일렬로 태후와 황제의 앞에 섰다.
비록 얼굴은 얇은 비단 천으로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발걸음은 마치 나비와 같고 허리는 버들가지처럼 낭창하니 가늘고 길며, 행동거지에도 우아함이 묻어나는 것이 과연 심혈을 기울여 뽑은 황후 후보다웠다.
“흐음.”
태후는 소녀들을 평가하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보다가 이내 손을 앞으로 살짝 내저었다.
“얼굴을 보여 보라.”
태후의 승낙이 떨어지자 소녀들은 각자 손을 들어 얼굴을 덮은 천을 위로 올려 넘겼다.
“호오.”
등 뒤에 활짝 피어 있는 정원의 꽃들이 무색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에, 태후는 물론이고 간택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내시와 궁녀 들의 입에서도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황제와 나이를 맞추기 위해 황후 후보는 열 살에서 열다섯 살 사이의 소녀들이었는데 복숭앗빛으로 발그스레하게 달아오른 뺨, 윤기가 좌르륵 흐르는 검은 머리칼과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싱그러운 젊음 그 자체를 발산하고 있어서 보는 사람 누구나 그 아름다움을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이런, 대체 어디에 이런 미녀들이 숨어 있었단 말이냐? 이 아이들이 십 년만 더 일찍 태어났다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지 못했을지도 모르겠군.”
아무리 꽃잎으로 목욕을 하고 좋은 화장품을 바른다 해도 어린 여자 특유의 젊음만은 이겨 낼 수가 없다.
아들의 부인, 즉 며느리를 뽑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질투심을 드러낸 태후는 칭찬하는 척하면서 비꼬기를 빼먹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태후의 말에 숨은 뜻을 알아차릴 정도로 나이를 먹지 않은 순진한 소녀들은 단순히 미모를 칭찬하는 말인 줄 알고 수줍어하면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어떠세요, 폐하? 눈에 들어오는 아이가 있습니까?”
태후가 묻자 황제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다들 예쁘긴 하네요.”
썩 시원치 않은 대답에 태후는 흠, 하고 손톱 장식을 매만졌다.
“그럼 일단 내가 먼저 보도록 하지요.”
태후는 무작위로 한 사람씩 찍어 춤은 출 줄 아느냐, 금을 어느 정도로 타느냐, 하면서 제대로 교양을 몸에 익혔는지 물어본 다음에 가끔은 직접 해 보라고 시키기도 했다.
그 뒤로도 계속 질문이 이어졌지만 황제는 이따금 하품을 크게 하기만 할 뿐,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황제의 표정을 살피던 태후는 결국 황후 후보들을 평가하던 것을 잠시 멈춘 뒤 말했다.
“그렇게 괜찮은 아이가 없습니까, 폐하?”
“저는 누굴 봐도 다 그게 그거인 것 같아 별다른 감흥이 없습니다.”
황제의 너무 솔직한 대답에 소녀들은 민망하기도 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을 붉혔다.
하기야 아직 어린아이일 뿐인 황제가 미녀를 보고 어른처럼 마음이 크게 동할 리도 없는 데다 노래를 잘하고 금을 잘 탄다고 해서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태후가 옆에 붙어 있어서 말을 못 할 뿐이지 이미 속으로는 지루해서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황제가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계속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자 태후는 머리가 아프다며 관자놀이를 짚는 시늉을 하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어서 잘 보이시지가 않나 봅니다. 황제께서 직접 앞으로 내려가 저 아이들을 잘 살펴보는 게 어떻습니까.”
“그런다고 해서 소용이 있을까요?”
“황상.”
태후가 엄한 표정으로 노려보자 황제는 찔끔하여 어깨를 으쓱였다.
“어마마마께서 정 그리 말씀하신다면…….”
황제는 발판을 밟고 의자에서 내려와 소녀들 쪽으로 향했다.
허락이 있기 전까지는 황제와 직접 눈을 마주치면 안 되기 때문에 소녀들은 다들 눈을 내리깔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자그마한 발이 앞을 스쳐 지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응?”
아무 생각 없이 어슬렁거리던 황제가 돌연 코를 킁킁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페하?”
내관이 무슨 일인가 싶어 묻자 황제는 가만히 있어 보라는 듯 손을 들고선 눈을 감고 냄새를 맡았다.
“어디서 좋은 냄새가 나는데…….”
갑자기 냄새 운운하는 소리에 소녀들이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는데, 황제가 왼쪽 맨 끝에 선 소녀 앞에 딱 서더니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찾았다, 바로 너구나!”
“예?”
지적을 당한 여자애가 당황해하는 사이 황제는 그런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소녀의 한쪽 소매를 붙잡더니 맛있는 냄새가 난다며 달라붙었다.
“호호, 폐하께서 드디어 맘에 드는 아이를 찾으셨나 보군요.”
“네. 저 여자애로 할래요.”
철없는 황제의 대답에 태후는 겉으로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속으로는 자신의 계략이 맞아떨어진 것에 크게 만족했다.
황제가 선택한 것은 태후의 최측근이자 통정사 벼슬에 있는 이제갑의 막내딸로, 황후로 내세우려고 이미 두 사람이 뜻을 맞춘 사이였다.
딱 하나 문제가 되었던 것은 황제의 마음이었는데, 만약 이제갑의 딸을 외면하고 다른 여자를 선택한다면 그 뜻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태후가 머리를 짜낸 것이 바로 이제갑의 딸한테 황제가 좋아하는 향을 몸에 배게 하는 것이었는데 그게 보기 좋게 들어맞은 것이다.
황제는 어릴 때부터 유독 계피 가루를 넣고 물엿을 졸여 만든 단 간식을 좋아했는데, 지금도 하루에 한 번씩은 꼬박 챙겨 먹을 정도이니 그 향이 나는 여자애한테 관심과 호감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제갑이 고생한 보람이 있겠군.’
달콤한 향이 몸에 배게 하기 위해서 궁에 입고 갈 옷을 널어놓고 매일 그 밑에서 계피를 끓이며 연기를 피워 댔을 이제갑의 마누라와 영문도 모르고 매일 간식을 먹어 대야 했던 그 딸을 생각하니, 태후는 속으로 웃음을 금치 못했다.
이제갑의 여식 외에도 후궁이 될 소녀 두 명을 더 뽑았는데, 모두 황후의 측근이나 우호적인 인사의 딸이었다.
특이한 건 세 명의 소녀 모두 한인 출신으로 청 조정에 출사한 이신들의 딸이라는 거였다.
이건 태후의 권력 기반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히 보여 주는 것과 동시에 여진 출신과 팔기군이 주축을 이루는 예친왕하고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그렇게 어린 황제를 앞세운 태후는 자금성을 장악하며 점점 더 세력을 키워 나갔다.
한편 여름 장마철이 되어 오락가락 비가 내리는 어느 날 명나라에서 대역죄를 저지르고 도망쳤던 황죽표 일당을 송환해 왔다.
사신 일행이 귀환하자 명나라 조정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온갖 미사여구로 포장된 도현의 친서와 여전히 조선이 상국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는 장계척의 왜곡된 보고에 흡족해한 숭정제는 반대 의견을 묵살하고 송환 결정을 내렸다.
굵은 포승줄에 묶인 채 명나라 관선 화물칸에 갇혀 있던 황죽표 일행은 제물포 항구에 내리자마자 대기 중인 함거에 태워졌다.
지저분한 옷에 망건이 찢어져 봉두난발이 된 황죽표는 오랜만에 고향 땅을 밟는 거지만, 이제 곧 사형을 앞두고 있다는 생각에 얼굴이 하얗게 죽어 있었다.
“바로 한양으로 가는 거요?”
황죽표의 물음에 의금부에서 나온 젊은 군관이 눈을 무섭게 부라리면서 호통을 쳤다.
“감히 주상 전하를 시해하려 한 대역죄를 짓고 도망쳤던 놈들이 무슨 할 말이 많으냐! 치도곤을 내기 전에 입 닥쳐라.”
그와 동시에 양쪽에 있던 의금부 소속 포졸들이 황죽표를 거칠게 함거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어서 들어가!”
“역적 놈이 뭔 말이 많아.”
“으윽.”
발길질에 차인 황죽표는 치욕스럽게 나무로 만들어진 함거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다들 황죽표 일행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알고 있었기에 평소보다 더 손 속이 거칠고 사정을 전혀 봐주지 않았다.
죄인들을 다섯 개의 함거에 나눠 태운 군관은 말에 올라 굳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출발!”
그러자 양옆으로 병장기를 든 포졸들이 삼엄한 경계를 펼치는 가운데 소가 끄는 함거들이 삐걱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나다니던 행인들은 의금부 관헌들과 함거를 보고는 수군대며 포승줄에 묶여 있는 황죽표 일행을 손가락질했다.
“저놈들이 지난번에 주상 전하를 시해하려 했다가 명나라로 도망친 것들이라며?”
“그래, 아까 포졸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어.”
“에이.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은 놈들!”
“튓!”
하나 둘 모여든 행인들은 급기야 욕설과 침을 내뱉는 건 물론이고 일부는 함거를 향해 돌까지 집어 던졌다.
“저런 것들은 다 사형시켜 버려야 돼!”
“맞아!”
“이거나 먹어라!”
퍽.
“큭.”
급기야 날아온 돌에 맞아 죄인들이 상처를 입는 경우까지 생겨났지만 성난 군중들을 제지해야 될 의금부 관헌들은 못 본 척 방관했다.
그렇게 죄인들은 제물포에서 한양 의금부에 도착할 때까지 큰 곤욕을 치러야 했다.
궁내부 대신 장선징이 희정당 안으로 들어서자 비단 보료 위에 앉아 각 부서에서 올린 보고서를 읽고 있던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인가?”
“방금 대역죄인 황죽표와 그 일당들이 의금부 옥사에 수감됐다는 보고가 올라왔사옵니다.”
기다리던 소식이었기에 도현은 머리를 살짝 숙인 채 앞에 앉아 있는 장선징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한 놈도 빠짐없이 모두 다 송환됐겠지?”
“그렇다고 하옵니다.”
“약점을 잡힌 것이 있으니 약조를 어기지는 않겠지만 시간을 질질 끌거나 죄인 일부를 빼돌릴까 봐 염려했었는데, 잘됐군. 놈들의 상태는 어떻다고 하던가?”
“그게…….”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장선징의 모습에 도현이 살짝 눈가를 찌푸리며 말을 재촉했다.
“왜 그래?”
“압송되어 오는 중간에 성난 백성들이 죄인들이 탄 함거를 향해 돌을 던지는 등 과격한 행동을 해서 여기저기 상처를 좀 많이 입었다고 하옵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또 뭐라고, 어차피 며칠 있다가 참수될 놈들인데 좀 다치면 어때. 그리고 행여 불충한 마음을 품고 있는 자들이 있다면 그런 모습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을 테니 오히려 잘됐어.”
“아, 예.”
“의금부에 일러서 지난 역모 사건 때 놓친 역적들이 없는지 죄인들을 상대로 샅샅이 조사하라고 해.”
“알겠사옵니다.”
“더 할 말이 없으면 나가 봐.”
“네.”
도현이 서탁에 내려놨던 서류를 다시 집어 들자 장선징은 꾸벅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고는 뒷걸음으로 방을 나왔다.
의금부 옥사에 갇힌 황죽표와 일당들은 도현의 지시대로 온갖 혹독한 방법으로 심문을 받았다.
처음에는 완강히 입을 다물었지만 잠도 제대로 재우지 않고 밤새 이어지는 문초에 결국 굴복해 하나 둘 자백을 하기 시작했다.
그 진술을 바탕으로 운 좋게 빠져나갔던 역모 가담자들과 황죽표 일행이 명나라로 도주하는 데 도움을 줬던 이들이 추가로 드러나 체포됐다.
얼마 뒤 이들은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을 받았는데, 제일 가벼운 벌이 멀리 외딴 무인도로 유배를 가는 거였다.
역모의 수괴라고 할 수 있는 황죽표와 명나라로 함께 도망쳤던 이들은 마포 나루터 옆 백사장으로 끌려가 모두 효수를 당했다.
잘린 목은 역적의 최후가 어떤지 보여 주기 위해 성문 밖에 사흘간 내걸린 후 시신조차 남길 수 없도록 불에 태워졌다.
사림에 속한 사대부들은 도현이 이걸 핑계로 또다시 피바람을 일으킬까 봐 노심초사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더 이상 일을 확대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속담처럼 연이어서 역모를 일으켰던 사림은 한동안 바짝 몸을 엎드린 채 도현의 눈치를 봤다.
“후우. 덥구나.”
희정당을 나와 사방이 탁 트이고 그늘이 진 후원 정자에 앉아 있었지만 그래도 더운지 도현은 연신 부채를 부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기온이 높은데, 그놈의 체통 때문에 옷을 몇 겹이나 입고 있으니 안 더우면 그게 더 이상할 정도였다.
“전하, 시원한 식혜라도 한잔 드십시오.”
“마침 목이 말랐는데 잘 가져왔다.”
빙고氷庫에서 가져온 얼음을 둥둥 띄운 식혜를 건네받아 바로 한 사발을 다 비운 도현은 그제야 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더우시면 냉수욕이라도 하시지요?”
칠현의 말에 잠시 망설이던 도현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 그래 봤자 시원한 건 얼마 안 가고 또 이놈의 옷들을 걸치면 다시 더워질 거잖아. 정말 에어컨이 그립다.”
“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무 더운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헛소리가 튀어나온 도현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는 칠현에게 한쪽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냐.”
“그럼 궁녀들을 불러 부채질이라도 시킬까요?”
힐끗 정자 아래에 서 있는 궁녀들을 쳐다본 도현은 한쪽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리 와 봐.”
그동안 함께한 짬밥에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든 칠현은 약간 께름칙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여기서 말씀하시지요.”
“이게 날씨도 더운데 지금 반항이야?”
“그런 것이 아니오라…….”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칠현의 모습에 도현은 눈을 부라렸다.
“어쭈. 이제 좀 컸다고 내 말이 우습게 들리나 보지. 빨리 안 와.”
“끄으응.”
앓는 소리를 낸 칠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쭈뼛거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도현이 손에 가지고 있던 부채를 접어 그의 머리를 가볍게(?) 툭 때렸다.
“아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연약한 여자들을 불러서 부채질을 시키라니, 그게 남자가 할 말이냐?”
“덥다고 하시니까 그렇죠.”
맞은 머리를 감싸면서 칠현이 투덜거리자 도현이 다시 부채를 든 손을 들어 올렸다.
“이게 그래도!”
“어어어.”
맞은 데 또 맞기는 싫었는지 칠현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그 모양새가 왠지 모르게 더 얄미워 보인 탓에 도현은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며 칠현을 불렀다.
“어쭈, 이게 피해?”
“아프다니까요.”
혹 난 것 좀 보라며 칠현이 울상을 지어 보였지만 도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부채를 휘둘렀다.
타다닥!
경쾌하게 박을 두드리는(?) 소리가 연달아서 울려 퍼지자 칠현이 팔다리를 파닥거리며 아우성을 쳤다.
“전하아~!”
“아, 됐고 그냥 네가 부쳐.”
“저는 안 더운 줄 아십니까?”
“넌 남자잖아. 참아!”
“그리 따지면 전하께서도 남자신데요.”
“……너 또 맞을래?”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도현이 조금만 더 건드리면 폭발한다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잔뜩 깔고 협박하자 그제야 칠현이 후다닥 부채를 들고 부쳤다.
“아,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부쳐 드려야죠.”
“진작 그러지. 하여튼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도현은 칠현을 놀리듯 말했다.
“아~ 시원하다.”
싫다는 사람을 붙잡고 굳이 시켜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도현도 그렇지만, 한마디도 지지 않고 따박따박 대꾸하는 칠현도 만만치 않아, 어디 가서 성격 좋다는 소리는 절대 들을 일이 없는 두 사람이었다.
“…….”
한편 두 사람 곁을 지키는 위사와 궁인 들은 감히 일개 내관이 국왕에게 대드는 발칙한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에 매우 익숙한 듯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한 귀로 듣고 흘렸다.
그때 붉은색 관복을 입은 장태범이 조심스럽게 정자 위로 올라왔다.
“아직 월말 보고를 할 때도 아닌데 장 총관이 어쩐 일이야?”
한쪽 팔을 정자 난간에 기대고 비스듬히 앉은 도현의 말에 장태범은 무릎을 꿇고 앉으며 입을 열었다.
“긴히 말씀드릴 일이 있어서 찾아왔사옵니다.”
“그래, 말해 보게.”
“나가사키 지부에서 연락이 왔는데 사쓰마 번에서 화약과 화포를 추가로 구매하고 싶어 한답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장태범을 봤다.
“아니, 얼마 전에 상당량의 화약과 무기를 판매했는데 그것 가지고 부족하단 말이야? 그리고 이번에는 화포까지 원한다고?”
“구마모토 번과의 싸움이 예상보다 치열하고 길어져서 그런 것 같사옵니다.”
“뭐, 저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거야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화포를 넘겨주는 건 조금 꺼림칙하군.”
“이미 한 차례 판매를 한 적이 있고 아군이 보유한 것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것들을 넘기는 거니까 크게 상관없지 않겠사옵니까?”
“…….”
평소와 달리 무기 판매에 상당히 적극적인 모습에 도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상대를 지그시 바라봤다.
“사쓰마 번과 꼭 무리 거래를 해야 될 이유라도 있는 거야?”
“실은 판매 대금으로 돈 대신 오쿠치 지역에서의 금광 채굴과 목재 벌목권을 받기로 했습니다.”
금광이라는 말에 도현은 자세를 바로 하며 관심을 보였다.
“자세히 설명해 봐.”
“사쓰마 번 북부에 위치한 오쿠치는 예전부터 금맥과 산림이 풍부하기로 유명한 곳으로 번주 외에는 광산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무기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우리에게 허락한 겁니다.”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니야?”
너무나도 좋은 조건에 도현이 의심을 하자 장태범은 자신 있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상단 직원을 보내 알아봤는데 아직 개발되지 않은 금맥이 곳곳에 있고 숲도 울창해 산판을 벌이기 안성맞춤이라고 하옵니다.”
“아무리 무기가 필요하다지만 그런 노른자위 사업을 일부라도 다른 이에게 넘기려고 하다니 이상하지 않나?”
“전황이 사쓰마 번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구마모토 번을 밀어붙이는 중이라고 하지 않았나?”
“예. 그랬사온데 궁지에 몰린 구마모토 번주 미쓰나오의 구원 요청에 막부가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면서 전세가 뒤집혔습니다.”
뜻밖의 이야기에 도현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각 번 간의 싸움에는 막부가 관여하지 않는 것이 관례 아니었나?”
“그렇지요.”
“한데 왜 관례를 깨는 부담을 지면서까지 구마모토 번을 도와주는 거지.”
“그건 왜국 내부의 복잡한 정치 상황 때문에 그렇사옵니다.”
“그게 뭐야?”
“삼 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 입장에서는 사쓰마 번주인 시마즈 미쓰히사가 구마모토 번을 꺼꾸러뜨리고 규슈를 장악하는 걸 그냥 두고 보기 껄끄러웠을 겁니다.”
“하긴 이번 전쟁에서 이긴다면 사쓰마 번이 규슈를 통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신경이 쓰이겠지.”
입장은 조금 다르지만 한 국가의 수장으로서 통치권을 위협하는 강력한 세력의 등장을 꺼려 하는 도쿠가와 이에미쓰 태도가 어느 정도 이해됐다.
“쇼군이라는 감투를 쓰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도쿠가와 가문도 일개 번주에 불과하니, 강력한 힘을 가진 대영주의 탄생을 달가워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이치겠지요. 거기다가 구마모토 번은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이라고 놀림을 당할 만큼 예전부터 막부와 친밀한 곳이기에 더욱 외면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사쓰마 번의 군세가 만만치 않다고 알고 있는데, 도대체 막부에서 지원 병력을 얼마나 보냈기에 전세가 이렇게 급변한 건가?”
“기병 이천에 창병 삼천이옵니다.”
“고작 그것밖에 안 돼?”
“예.”
생각보다 적은 병력에 도현은 현재 사쓰마 번의 상황이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력은 서로 비슷했습니다만 사쓰마 번 쪽에 운이 지독히도 없었습니다.”
“운이라니?”
“결전을 벌인 곳은 화산인 아소 산 부근 벌판이었는데, 불행히도 전투 전부터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순간 사쓰마 번이 뭣 때문에 고전을 했는지 짐작된 도현은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조총 심지에 제대로 불이 안 붙었겠군.”
“바로 맞히셨습니다. 잘 간수한다고 했지만 심지가 비에 젖고 부싯돌마저 습기 때문에 잘 켜지지 않자 사쓰마 번이 대규모로 운영하던 조총 부대가 한순간 무용지물이 되며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따로 발화장치가 달린 머스킷과 달리 심지를 꽂아 직접 불을 붙인 뒤 사격을 해야 되는 화승총의 가장 큰 약점이 바로 이거였다.
머스킷도 습기와 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심지가 젖으면 아예 발사조차 불가능해지는 화승총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가 짙게 낀 안개 때문에 본진 바로 앞까지 적 기병대가 접근하는 걸 모르고 있다가 전투 초반에 큰 타격을 입으면서 결국 대패를 당했다고 합니다.”
“쯧쯧. 사쓰마 번도 조총을 한두 해 써 본 것이 아닐 텐데 비가 내리면 전술을 바로 바꿨어야지.”
운이 없었다기보다 지휘부의 안이한 대응과 무능함이 만들어 낸 결과라고 생각한 도현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짧게 혀를 찼다.
“그 전투에서 급하게 후퇴하느라 우리한테 구입했던 화포와 화약 재고 대부분을 상실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미 승패가 결정 난 거 아닌가?”
회의적인 도현의 태도에 장태범이 얼른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비록 그동안 점령했던 땅은 도로 다 토해 냈지만 서둘러 병력을 재정비한 뒤 방어선을 구축해 상대를 막아 내고 있는 중입니다.”
“자네는 우리가 무기를 판매하면 사쓰마 번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는 건가?”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방어전에서 큰 역할을 하는 화포를 필요한 수만큼 넘겨준다면 최소한 현 상태는 계속 유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가능성이 아예 없는 이야기도 아니고 사쓰마 번에서 제시했다는 당근도 탐이 났지만, 도현 입장에서는 막부와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나 북방에서 청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인데 돈 몇 푼 더 벌겠다고 막부를 적으로 돌리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도현은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확실히 사쓰마 번의 제안이 매력적이긴 해.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관계가 좋은 막부와 척지면서까지 덤벼들 정도는 아니야.”
기대 어린 표정을 짓던 장태범은 이내 이어진 도현의 이야기에 실망했다.
“병장기를 판매하는 건 대충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직접 사쓰마 번에 투자하고 광산과 벌목장을 운영하려면 지금보다 왜국 내부 문제에 더 깊이 관여해야 되는데, 그걸 막부가 좋게 볼 리 없지 않겠나?”
“그렇기는 해도…….”
미련이 남아 보이는 장태범을 보며 도현은 딱 잘라 말했다.
“아쉽지만 이번 일은 없던 걸로 해.”
“알겠습니다.”
장태범이 많이 실망한 모습을 하자 도현은 부드러운 어투로 그를 달래 줬다.
“다음에 더 좋은 기회가 올 테니 너무 상심하지 말고, 여기까지 왔으니 시원한 식혜나 같이 마시면서 오랜만에 편히 이야기나 나누세.”
“예.”
조용히 옆에서 부채질을 하고 있던 칠현은 눈치 빠르게 손짓을 해서 대기 중인 궁인한테 식혜를 가져오도록 시켰다.
비록 무기 판매는 좌절됐지만 상재가 뛰어난 장태범은 나가사키에 있는 봉황상단 지부를 통해서 전쟁으로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한 규슈 지역에 대량의 식량을 팔아 상당한 차익을 올렸다.
그리고 의외로 금방 끝날 것 같았던 싸움은 사쓰마 번이 가고시마 성에 틀어박혀 농성전을 벌이는 한편, 별동대로 빼놓은 기병대가 치고 빠지는 식으로 상대의 거점인 구마모토 성 근처를 기습 공격하면서 장기전 양상으로 흘러갔다.
공성전에서 구마모토 번의 공격을 막아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조선에서 수입한 화포와 조총이었다.
방어용으로 성에 남겨 뒀던 천자총통 열 문은 강력한 화력으로 적군의 공격을 어렵게 했고, 피해를 감수하고 어렵게 접근하면 조총으로 무장한 병력이 총알 세례를 마구 퍼부어 상대를 벌집으로 만들어 버렸다.
바로 전 전투에서 제대로 역할을 못 해 큰 피해를 안겨 줬던 조총과 화포가, 이번에는 구석까지 몰린 사쓰마 번을 살렸으니 정말 세상일은 알 수 없었다.
도현의 상업 장려 정책에 기존 종로 육의전 말고도 한양 곳곳에 상설 시장들이 생겨났는데 마포 선착장 옆에 형성된 어시장도 그중 하나였다.
“자! 싸요, 싸. 방금 물에서 잡아 올려 싱싱한 잉어가 단돈 닷 냥. 어서들 오세요.”
“매기 팔아요, 매기!”
시장 안은 물건을 팔려는 상인과 오늘 식탁에 올릴 음식 재료를 사러 나온 손님들로 활기가 넘쳤다.
“장어 물 좋아요?”
살집이 좀 있는 중년 아낙네의 물음에 상인은 미소 띤 얼굴로 물통에서 장어 한 마리를 꺼내 들며 말했다.
“그럼요. 아직까지 살아서 이렇게 팔딱팔딱 뛰는 것 보세요.”
상인 말대로 물 밖으로 끄집어진 장어는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고 몸을 마구 비틀어 댔다.
“이거 한 마리 푹 삶아서 낭군님한테 드리면 밤에 아마 한숨도 못 잘 겁니다.”
“에구머니나.”
짓궂은 농담에 아낙네는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도 은근슬쩍 힘(?) 좋게 생긴 장어한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한 마리 얼마예요?”
“원래 여섯 냥은 받아야 되는데 딱 잘라서 다섯 냥만 내세요.”
“뭐가 그렇게 비싸요?”
“이렇게 물이 좋은데 이건 비싼 것도 아니에요.”
“에이, 그냥 넉 냥에 주세요.”
“이것도 손해 보고 파는 거라는데 그러시네.”
“앞으로 자주 올 테니까 그 가격에 줘요.”
그렇게 한참 흥정을 벌이던 상인은 졌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알았어요. 대신 또 사러 오셔야 됩니다.”
“그럼요.”
새끼줄을 꼬아서 만든 바구니에 상인이 장어를 넣어 주자 아낙네는 동전 넉 냥을 꺼내 값을 치렀다.
“맛있게 드세요.”
“네.”
그렇게 생선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시장이 한창 북적일 때 갑자기 한쪽에서 고성이 들리며 소란이 일었다.
“이 사람이 가짜 돈을 주고는 어디서 배짱이야!”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어부가 한 상인을 붙잡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쪽이야말로 갑자기 웬 행패요? 왈패야 뭐야!”
“뭐어? 아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어부는 소란을 듣고 주위에 몰려든 구경꾼들을 향해 이것보라는 듯 말했다.
“다들 내 억울한 사정 좀 들어 보시오. 생선을 납품하고 여기 이 상인한테 물품 대금을 받았는데, 은행에 가 보니 글쎄, 은 함량이 적은 가짜 돈이 섞여 있다고 하지 뭐요? 덕분에 거기서 개망신을 당한 것은 물론 어디서 이런 걸 들고 왔냐고 죄인처럼 의심까지 받았는데, 화가 나지 않고 배기겠소!”
“어이구, 쯧쯧.”
“그럴 만도 하네! 아무리 돈에 죽고 못 사는 상인이라지만 그런 걸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되지.”
“그러게 말이야.”
사방에서 동정의 말소리가 터져 나오자 상인 역시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흥! 그쪽 말이 사실이라는 법이 어디 있어? 어디서 돈이 섞였는지도 모르고, 막말로 자기가 이득 좀 보려고 살짝 장난쳤다가 은행에서 걸리니까 괜히 애먼 사람 잡는지 누가 알아!”
상인의 말을 듣고 보니 또 그럴 법도 한지라, 이번에도 역시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 이놈이 그래도!”
성격이 불같은 어부가 와락 덤벼들어 멱살을 부여잡자, 만만치 않게 열이 받은 상인도 똑같이 주먹을 쥐고 휘둘러 결국 싸움판이 벌어졌다.
“야, 이 사기꾼아!”
“누가 누구더러 사기꾼이래!”
우당탕.
걸쭉하게 흘러나오는 욕설과 함께, 두 사람의 발길질에 차여 좌판에 올려놨던 생선들이며 건어물들이 바닥에 마구 흩어졌다.
“아유, 저걸 어째?”
“누가 좀 말려야 되는 거 아냐?”
괜히 싸움에 휘말릴까 봐 웅성거리기만 할 뿐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못하는데, 군중들 사이에서 삐익 하는 요란한 호각 소리를 울리며 포졸들이 등장했다.
“개판이로구먼.”
아직도 이놈아, 저놈아 하면서 싸우고 있는 상인과 어부를 뜯어말린 포졸들은 한바탕 태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어질러진 현장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대체 뭐 때문에 싸운 거요?”
“저 상인 놈이 나한테 가짜 돈을 주고선 오리발을 내밀지 않소, 포졸 나리!”
“아니, 이 사람이 뚫린 입이라고 막말을 해도 되는 줄 알아? 증거 있어, 증거!”
기껏 떼어 놓았더니 또 서로 핏대를 올리며 시비가 붙으려고 하자 포졸들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가짜 돈이라고 했소?”
“아, 그렇다니까요.”
“으음. 이건 여기서 해결할 문제가 아닌 것 같으니 둘 다 포청으로 갑시다.”
보는 눈을 생각해서 침착하게 대응하긴 했지만 사실 진짜로 시중에 가짜 화폐가 유통되고 있는 거라면 매우 큰일이었다.
“포, 포청요?”
“아니, 이놈만 잡아가면 되지, 저까지 왜 가야 됩니까요?”
포청이라는 말에 덜컥 겁이 나는지 어부가 한풀 꺾인 표정으로 쳐다보자 포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누가 잘못을 했건 일단 가짜 돈이 나온 이상 관련자들은 모두 포청으로 압송하는 것이 원칙이야. 이봐!”
“예, 십장 어른.”
“어서 데려가고 증거품도 빠뜨리지 않고 챙겨.”
“알겠습니다.”
잠시 뒤 포졸들이 싸움을 벌였던 장사꾼과 어부를 끌고 가는 걸로 시장통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소동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가짜 화폐로 인한 진짜 소동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지금 가짜 화폐라고 했나?”
도현이 눈가를 찌푸리며 되묻는 말에 포도대장 구인후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대답했다.
“예. 이게 이번에 적발한 동전들이옵니다. 은 함유 비율을 삼 할로 줄이고 나머지는 무게만 나가는 잡철을 썼는데, 눈으로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도록 교묘하게 만들었사옵니다.”
칠현이 가짜 은화 네 개가 놓인 쟁반을 가까이 가져오자 그중 하나를 집어 들고 이리저리 자세히 살펴본 도현은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고 보는데도 잘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정교한 솜씨에 감탄했다.
“허어. 이게 가짜라고?”
“그렇사옵니다. 은행에 가져와서 정확히 감정해 보기 전에는 진위를 판별하기 어려울 정도여서 피해가 더 큰 상황입니다.”
“으음.”
포도대장의 이야기가 충분히 이해됐는데 자신이 보기에도 너무 똑같아서 속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이게 시중에 얼마나 깔린 거지?”
“현재까지 포청에서 회수한 것만 백오십 냥이 넘고 보셨다시피 워낙 진위를 구별하기 어려워, 백성들이 모르고 그냥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신고하지 않고 쓰는 가짜 돈이 상당할 거라 생각되옵니다.”
나란히 앉아 있던 재무대신 김육이 아주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 겨우 새로 만든 화폐들이 자리를 잡아 가는데 이처럼 가짜가 돌아다닌다면 백성들이 돈에 대한 신뢰를 잃고 사용을 기피하게 만들어서 제 역할을 못 하게 될 수도 있사옵니다. 그리고 더 우려되는 건 가짜의 유통이 늘어나고 위조 금화까지 나오는 겁니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자 도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동안 어렵게 구축한 화폐 체계가 백성들의 외면을 받고 예전처럼 물물교환을 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는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기껏 활성화시켜 놓은 상업과 공업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는 뜻이었다.
동전 대신 무거운 옷감이나 쌀을 등에 지고 시장으로 가서 물건을 구입해야 된다면 아무리 조정에서 장려한다고 해도 상업이 활성화될 수 없었다.
그러면 자연히 공급자의 요구에 따라 물품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업 또한 위축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대책은?”
도현의 물음에 포도대장은 고개를 숙이며 얼른 대답했다.
“현재 탐보망을 총동원해 위조화폐를 만드는 조직의 뒤를 쫓고 있사옵니다.”
“저희 재무부에서도 조선은행에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돈을 더 철저히 감별하라는 지시를 내려 뒀습니다.”
나름 당장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한 상태였지만 도현은 미흡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거 가지고 되겠소? 짐이 지시를 내려놓은 테니 포도청은 주작단과 협력해 위조화폐조직을 최대한 빨리 잡아내고 재무부는 백성들이 돈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지 않게 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하시오.”
주작단까지 동원하겠다는 말에 두 사람은 약간 놀랐지만 그만큼 도현이 이번 사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었기에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사옵니다.”
도현은 손에 들린 가짜 은화를 꽉 움켜쥐고는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당장 다음 날부터 주작단과 포도청은 대대적인 위조화폐조직 색출에 나섰다.
하지만 워낙 은밀하게 점조직 형태로 운영되다 보니 꼬리를 잡기가 쉽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에 결국 우려하던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꽝!
“지금 뭐라고 했나!”
눈썹을 위로 치켜 올린 도현이 손바닥으로 서탁을 세게 내려치며 언성을 높이자 앞에 엎드려 있던 포도대장 구인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입을 열었다.
“가, 가짜 금화가 나왔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현은 방 안이 떠나가라 버럭 호통을 내질렀다.
“더 이상 상황이 악화되지 않도록 막으라고 한 것이 언제인데 위조화폐조직을 잡는 건 고사하고 가짜 금화까지 돌아다니게 만들어!”
“면목이 없습니다.”
“주작단도 도대체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이래 가지고 짐이 누굴 믿고 두 다리를 뻗고 편히 쉴 수 있겠나!”
포도대장과 나란히 있던 이완 단장은 매서운 질책에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했다.
“포도청과 주작단이 나서고도 위조화폐조직 하나 못 잡는 것이 말이 돼!”
다른 사람 같았으면 진즉 물건을 던지고 발을 구르며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다.
그러나 간신히 붙잡고 있는 이성의 끈마저도 곧 끊어질 듯 위태로웠다.
두 사람은 할 말이 없어 침묵만 지키고, 도현은 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 다물고 있는 모습이 답답해서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듯했다.
“이거라도 드시고 좀 진정하시지요.”
잠시 말이 끊어진 사이, 눈치 빠른 칠현이 잽싸게 차가운 식혜를 건넸다.
안 그래도 목이 타던 차라 식혜를 들고 벌컥벌컥 들이켠 도현은 몸속에서 찬 기운이 돌자 그제야 조금 화를 가라앉히며 숨을 내뱉었다.
“재무대신.”
두 사람이 호되게 질책을 당하는 걸 보고 행여나 자신한테 불똥이 튈까 봐 마른침을 삼키며 앉아 있던 재무대신 김육은 도현이 그를 지목하자 얼른 고개를 들었다.
“예.”
“지금까지 발견된 가짜 돈이 얼마나 되나?”
도현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김육은 이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은화 천 냥에 금화는 오십 냥가량입니다.”
액수를 듣자마자 도현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본격적으로 단속에 나서면서 찾아낸 위조화폐가 늘어난 것도 있었지만, 불과 보름도 안 되는 사이에 이렇게 액수가 커진 건 그만큼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가짜 돈이 많다는 방증이었다.
“미치겠군. 백성들 분위기는 어떤가?”
“처음에는 별다른 동요가 없었습니다만 위조화폐가 빈번하게 발견되다 보니 돈을 주고받을 때마다 가짜가 아닌지 확인하는 이들이 부쩍 늘어났습니다.”
운이 나빠 위조화폐를 받게 되면 그만큼 손해를 보는 거니까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만큼 백성들이 불안해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조정에서 발행하는 화폐에 대한 불신으로 발전된다면 그때는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는 거였다.
“끄으응.”
앓는 소리를 낸 도현은 손가락 끝으로 보료 팔걸이를 툭툭 두드리면서 인상을 썼다.
그러고는 방 안에 모여 있는 신하들을 훑어보면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딱 일주일을 주지.”
“……예?”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든 신하들을 향해 도현이 성난 사자가 되어 으르렁거렸다.
“그 안에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번 일을 해결해. 만약 그러지 못하면 그때는 다들 각오 단단히 해야 될 거야!”
“아, 알겠습니다.”
도현의 으름장에 신하들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올해 마흔다섯 살인 반기성은 부금상단이라는 중소 상단을 소유한 상단주로 처진 눈꼬리에 수더분한 인상을 가진 중년인이었다.
부금상단은 대대로 한상에 소속되어 소금과 어패류를 취급해 큰돈을 벌어 왔는데, 봉황상단이 싼 가격에 천일염을 풀면서 수입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거기다 얼마 전에서는 군선으로 쓰던 판옥선 한 척을 불하받아서 명나라와 교역에 나섰다가 재수 없이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하는 아픔을 겪었다.
다행히 육지가 가까운 근해에서 사고를 당해 선원들은 모두 무사히 빠져나왔지만 배와 선적했던 화물을 몽땅 다 잃어 금화 오백 냥에 달하는 금전적 손해를 입어 상단 상황이 안 좋았다.
그런 반기성이 오늘은 어쩐 일인지 상단 집무실이 아니라 측근인 직원과 호위만 데리고 이른 아침부터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쉬지 않고 산을 오르던 반기성은 중턱쯤 와서 걸음을 멈추며 한숨을 돌렸다.
“휴우. 이제 다 왔군.”
무성하게 우거진 숲 한가운데 제법 넓은 공지가 있었는데 반기성의 시선이 향한 곳에 통나무로 지은 건물이 두 채 서 있었다.
그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뭘 하는 곳인지 쇠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건물 앞으로 다가가자 험악한 인상의 사내 두 명이 검을 들고 있다가 반기성을 보고는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어르신.”
“수고들 하는군.”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받은 반기성은 힐끔 건물을 쳐다보며 물었다.
“박 가는 안에 있나?”
“예.”
대답을 들은 반기성은 굳게 닫혀 있는 나무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후끈한 열기와 진한 쇠 냄새가 그를 반겼다.
“이건 몇 번을 와도 익숙해지지가 않는군,”
실내에는 웃통을 벗은 일꾼 여러 명이 커다란 화덕을 가운데 두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살짝 인상을 찡그린 채 주위를 둘러보던 반기성은 한쪽에서 일꾼들을 감독하고 있는 중년인을 찾아내고는 가까이 다가갔다.
“이보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무심코 옆으로 고개를 돌린 중년인은 반기성을 보고는 깜짝 놀라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아이고.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도착했네. 작업은 잘 진행되고 있나?”
“네. 그런데 재료가 다 떨어져 갑니다.”
“얼마나 남았나?”
중년인은 허리에 매달아 둔 수건을 꺼내 이마에 묻은 땀을 훔쳐 내며 대답했다.
“이틀 정도 작업할 양밖에 없습니다.”
“흐음. 요즘 포도청의 단속이 심해서 재료 수급이 쉽지 않지만 그 안에 가져다주겠네.”
“알겠습니다요.”
잠깐 그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던 중년인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나리.”
“왜, 할 말이라도 있나?”
“저, 이 일을 언제까지 해야 되는지…….”
눈가를 찌푸린 반기성은 약간 굳은 얼굴로 중년인을 바라봤다.
“무슨 뜻이지?”
수더분한 인상에 항상 미소를 지으며 다니지만 그 모습 뒤에 얼마나 잔인한 심성이 숨어 있는지 잘 아는 중년인은 제대로 눈을 못 마주치며 우물쭈물 겨우 말을 이었다.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포청에서 단속이 심한 것도 있고 벌써 여기에 갇혀 지낸 지 넉 달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그만두고 싶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말끝을 흐리는 중년인의 모습에 반기성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다가 이내 바로 하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
“산속에 처박혀서 일만 했으니 지겹기도 하겠지. 그렇지 않아도 포청의 수사망이 좁혀 와서 나도 잠시 쉬려고 했었네.”
“그렇습니까?”
“원래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하지 않나. 이쯤에서 여길 정리하고 한동안 바짝 엎드려 있다가 좀 잠잠해지면 다시 적당한 곳에다가 작업장을 차려야지.”
뒷짐을 지고 선 반기성은 은근한 시선으로 앞에 있는 중년인을 보며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말인데 정리를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물건을 각각 열 궤짝만 더 만들도록 하게.”
반기성의 말에 중년인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 열 궤짝이나요?”
“그래. 잠수해 있는 동안 버티려면 그 정도는 있어야 되지 않겠나. 그리고 자네들도 고생했는데 집에 돌아가기 전에 한몫 두둑이 챙겨야지.”
“하지만 열 궤짝이면…….”
살짝 겁먹은 얼굴로 중년인이 주저하자 반기성이 상대를 살살 구슬렸다.
“많게 느껴지지만 그 정도는 넓은 바다에 물 한 바가지 더 쏟아 넣은 정도에 불과해. 유통은 내가 책임지고 할 테니 아무 염려하지 말고 자네들은 물건만 만들어 주면 돼.”
“그렇기는 해도…….”
“이번에 작업한 물량에 대해서는 특별히 돈을 두 배로 쳐주도록 하지.”
“지금 두 배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어떤가?”
“으음.”
흔들리는지 고민하는 표정을 짓던 중년인은 이내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약속하신 돈은 꼭 주셔야 합니다.”
그러자 반기성은 흡족한 듯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잘 생각했네. 그리고 내가 언제 약속을 안 지킨 적이 있던가.”
“없으셨지요.”
“그러니 아무 염려하지 말고 물건이나 잘 만들어 주게.”
“알겠습니다.”
“그 문제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이번에 만든 물건 구경 좀 해 볼까?”
“절 따라오십시오.”
중년인은 반기성을 작업장 바로 옆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뭔가 중요한 것이 들어 있는지 두꺼운 나무 문에 자물쇠가 두 개나 달려 있었는데 중년인은 허리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잠금장치를 풀었다.
끼이익.
방 안은 한쪽 벽에 창살이 처져 있는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 말고는 별다른 조명 장치가 없어 한낮인데도 앞이 잘 안 보일 정도로 어두컴컴했다.
반기성과 함께 온 호위가 어디서 가져왔는지 등을 하나 들고 와서 밝히자 실내 모습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바로 정면에 커다란 궤짝이 하나 놓여 있는 걸 본 반기성은 거침없이 그리로 걸어갔다.
“열쇠는?”
궤짝이 달려 있는 자물쇠를 본 반기성의 고개를 돌리며 묻자 중년인이 얼른 꾸러미에서 열쇠를 하나 빼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어디…….”
열쇠를 넣고 돌리자 자물쇠는 쇳소리를 내며 풀렸다.
철컥.
그러고는 궤짝 뚜껑을 열어 본 반기성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안에는 등불에 반사돼 번쩍이는 은화가 한가득 들어 있었는데 못해도 천 냥은 족히 넘을 것 같았다.
이곳이 바로 포도청과 주작단이 찾아내려고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는 위조화폐 제조 공장이었다.
선박 침몰로 인한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반기성은 위조화폐 제조라는 절대 해서는 안 될 범죄에 손을 댄 것이다.
반기성은 손끝으로 은화의 차가운 감촉을 만끽한 뒤 고개를 들어 중년인을 봤다.
“아주 잘 만들었군.”
“헤헤.”
“다음 것도 잘 부탁하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짧은 대화를 끝내고, 반기성은 뒤편에 서 있던 하인을 손짓으로 불러 궤짝을 옮기도록 지시했다.
지게를 위에 궤짝을 올리고 단단히 묶은 다음 등에 짊어지자 절로 어이쿠 소리가 나올 정도로 묵직한 무게가 가해졌다.
작업장을 나와 구불구불한 산길을 내려가는 동안 반기성은 살짝 발걸음을 늦춰 궤짝을 진 하인한테 떨어져, 뒤에 있는 호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속삭였다.
“이보게.”
“말씀하십시오, 나리.”
“일이 다 끝나면 작업장에 있는 놈들은 모두 조용히 없애 버리게.”
“예.”
범죄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비밀을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았다.
힐끔 이제 작아 보일 정도로 멀어진 작업장을 쳐다본 반기성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와 똑같이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 거리.
하나 요 며칠 사이에 여기저기서 기묘한 풍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얼마요?”
“은화 한 냥하고 닷 푼만 주시오.”
곧 있을 할아버님 제사에 쓸 제기가 낡아 군데군데 이가 빠졌다며 그릇 장수를 찾은 중년 사내는 이것저것 따진 끝에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골랐다.
쌈지 주머니 속에서 사내가 은화 두 냥을 꺼내자 상인은 동전을 햇빛에 비춰 보고, 양옆 톱니바퀴의 수를 세어 보기도 하면서 별스럽게 굴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은화랑 양손에 각각 하나씩 놓고 인간 저울 노릇까지 하던 상인은 결국 제대로 된 동전이라고 판단했는지 그제야 잔돈을 거슬러 주었다.
“여기 있소.”
“으흠.”
헛기침을 하면서 잔돈을 받아 든 사내는 상인이 보따리에 그릇을 담아 주는 사이 자기도 비슷한 흉내를 내려는 듯 어금니로 콱 깨물었다가 비명을 내질렀다.
“아야야.”
“무슨 일이오?”
“제길, 하마터면 이 부러질 뻔했네.”
사내가 바닥에 퉤 침을 뱉고선 혹시나 흔들리진 않는지 손가락으로 송곳니를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끌끌. 그러게 왜 멀쩡한 동전을 깨물고 그러나.”
“자기도 똑같이 한 주제에 왜 나만 가지고 그러시오?”
“예끼, 나야 요즘 워낙 가짜 돈이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녀서 그런다지만 이런 동전은 아무 상관없지 않소.”
상인은 혹시 누가 들을까 봐 작은 목소리로 낮추어 말했다.
어차피 주변에 장사하는 사람이라면 다들 암암리에 가짜 동전이 나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자랑스레 떠들어 댈 화젯거리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괜히 포졸들한테 걸리면 유언비어를 퍼뜨린다고 치도곤을 당할 수도 있었다.
“흥. 은화든 몇 푼 안 되는 동전이든 돈인 건 마찬가진데 혹시 아남.”
사내가 고집스레 주장하자 상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상인은 시장 인파 사이로 사라지는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혼자 한숨을 쉬었다.
“에구구. 세상이 이리 각박해서야 어찌 살꼬.”
하지만 그렇게 한탄한 것도 잠시, 그는 곧 놋쇠 그릇을 사러 온 아낙네 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비단 그릇 장수나 포목점처럼 큰 가게를 내놓고 장사하는 상인이 아니더라도, 시장 곳곳에 작은 좌판을 놓고 손님을 끄는 보따리 상 앞에서도 역시 똑같은 풍경이 벌어졌다.
덕분에 불똥이 튄 것은 은행으로, 진짠지 가짠지 판별해 달라며 동전을 싸 들고 오는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기진맥진해 나중엔 거의 업무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가짜 은화 소문과 더불어 은화 테두리의 톱니바퀴 수가 쉰 개가 아니면 가짜라느니, 진짜 은화랑 가짜 은화는 서로 나란히 놓고 대보면 두께에서 차이가 난다느니 하면서 근거 없는 엉터리 말이 나도는 통에, 이젠 멀쩡한 은화도 못 믿고 가짜라며 우기는 사람까지 생겨났으니 참으로 복장이 터질 일이었다.
이렇게 백성들 사이에서 화폐에 대한 불신이 점점 쌓여 갔지만 위조화폐조직 수사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가져가게.”
“예.”
손에 든 붓을 벼루에 내려놓으며 도현이 말하자 허리를 반쯤 숙인 채 한쪽에 서 있던 궁내부 관리가 막 수결한 서류를 조심스럽게 챙겨 방을 나갔다.
“으음.”
피곤한 듯 도현이 한쪽 손을 들어 미간을 주무르자 벼루를 치우던 칠현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몸이 안 좋으십니까?”
“머리가 조금 지끈거리는군.”
“어의를 불러오겠습니다.”
칠현이 몸을 일으키려는 걸 도현이 만류했다.
“됐어. 그 정도는 아니야.”
“그래도…….”
“그것보다 포도청에서는 아직 별다른 보고가 없어?”
하루에도 몇 번씩 물어보는 질문에 칠현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예.”
“도대체 뭣들 하고 있는 건지…….”
“다들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조만간 잡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한가하게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거 아냐. 에잇.”
짜증을 낸 도현은 품속에서 포도대장이 가져왔던 가짜 은화를 꺼내 쳐다보면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 이딴 걸 찍어 내서…… 응?”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도현은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맞아. 그거야!”
“왜 그러십니까?”
갑작스러운 행동에 칠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든 말든 도현은 은화를 올려놓은 손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내가 왜 이걸 진작 생각해 내지 못했지.”
“전하?”
“빨리 포도대장과 이완 단장을 이리 오라고 해!”
“아, 예.”
얼른, 하면서 재촉하는 도현의 등쌀에 칠현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허둥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그래, 바로 이거야!”
도현은 절묘한 방책이라도 생각해 낸 듯 혼자 무릎을 탁 치면서 감탄했다.
한편 위조화폐조직을 잡기 위해 포도청에서 골머리를 썩고 있던 포도대장 구인후는 도현이 찾는다는 전갈에 급히 일어섰다.
대궐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머릿속으로 이번엔 또 무슨 일로 부르시는가, 하며 전전긍긍해하던 차.
그런 포도대장의 시야에 마침 희정당 정문을 막 넘고 있는 이완 단장이 보였다.
“이보게, 이완 단장!”
“아니, 포도대장 아니십니까.”
반가워하는 것도 잠시,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어두워졌다.
“자네 혹시 주상 전하께서 부르셨는가?”
“그럼 대감께서도?”
“어찌나 서두르라고 하는지 하던 일도 팽개치고 뛰쳐나왔네.”
“하하, 저돕니다.”
이완 단장은 실소를 머금으면서 반쯤 풀린 옷고름을 바로잡았다.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자넨 짐작이 가는가.”
“보나 마나 뻔하지요. 위조화폐조직에 대해서 물으시려는 것 아니시겠습니까? 기쁜 소식을 하나라도 전할 수 있으면 마음이 편할 텐데, 그렇지 못해서 뵙기가 영 죄송스럽습니다.”
“나도 마찬가질세. 매일 한양과 경기도 일대를 이 잡듯이 뒤지곤 있지만 이거야 원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없으니.”
두 사람은 한숨이 절로 푹푹 나오는 것을 겨우 눌러 참았다.
위조화폐 사건이 터진 이후부터 희정당에 불려 가기만 하면 아직도 범인을 붙잡을 단서를 찾지 못했냐는 호된 질책과 불호령을 듣기 일쑤니 저절로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들어가 보세나. 괜히 꾸물거렸다간 늦었다고 또 화를 내실지 몰라.”
축 처진 구인후의 말에 이완 단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전하, 포도대장과 이완 단장께서 오셨습니다.”
문 밖에서 두 사람의 도착을 고한 칠현은 얼른 들어가 보라며 눈짓했다.
“이제야 왔군.”
방금 떠오른 묘책을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던 참이라, 도현은 밝은 표정으로 둘을 맞이했다.
요 근래 내내 미간을 찡그리고 있거나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 얼굴밖에 보지 못한 터라, 포도대장과 이완 단장은 웬일인가 싶어 엉거주춤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찾으셨다고 하셔서 왔사옵니다, 전하.”
“그래, 수사에 진척은 좀 있나?”
두 사람은 질문을 받자마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구스럽게도 아직 별다른 성과가 없사옵니다.”
불벼락이 떨어질 걸 알면서도 벌써 며칠째 똑같은 대답밖에 할 수가 없었다.
“점조직으로 운영되는 놈들이니 잡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을 거야.”
“……?”
호통 대신 부드러운 목소리로 수사의 어려움을 이해한다는 듯이 말하자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수사는 어디까지 진행됐나?”
“아, 예. 저희 포도청은 시중에 풀린 가짜 돈의 유통 경로를 역추적하는 방식으로 수사 중이고, 주작단은 주조장인들 가운데 최근 수상한 행보를 보인 자가 있는지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자네들도 숙련된 장인이 이걸 만들어 내고 있다 생각하는구먼.”
어느새 가짜 은화 하나를 꺼내 든 도현의 이야기에 두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 정도로 정교한 물건을 제작하려면 당연하지 않사옵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
과거형의 말에 두 사람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도현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이 화폐들은 하나하나 장인들이 손으로 깎아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본 틀을 제작한 뒤 그냥 대량으로 찍어 내는 거란 말이지.”
“아……!”
그때야 도현의 말을 이해한 두 사람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틀이 있고 기본적인 설비만 갖추면 아무나 쉽게 화폐를 찍어 낼 수 있는데 그걸 모르고 장인들만 뒤지고 있었으니 아무것도 안 나올 수밖에 없지.”
수사 방향이 처음부터 완전히 잘못됐다는 사실과 그걸 도현이 지적하고 나서야 깨달았다는 것에 부끄러워진 두 사람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면목이 없사옵니다.”
“짐도 우연히 떠올린 걸세. 하지만 두 사람은 수사와 감찰 기관의 책임자들이니 앞으로는 시야를 좀 더 넓게 해야 될 게야.”
“명심하겠사옵니다.”
그는 크게 질책하지는 않았지만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잘못된 점을 분명히 지적했다.
“이제 문제는 위조화폐조직이 제작 틀을 어떻게 구했느냐 하는 건데, 뭐 짚히는 것이 없나?”
그러자 포도대장 구인후가 수사 방향을 잘못 잡은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시중에 나돌고 있는 가짜 돈의 완성도로 볼 때 어설픈 이가 만든 건 절대 아닐 겁니다.”
“그렇지.”
동의하듯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구인후와 나란히 앉아 있던 이완 단장이 조심스러운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재무부 주조소에서 흘러나간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주조소라고?”
재무부 주조소라면 조정에서 유통시키는 동전을 제작하는 곳이었기에 도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의심될 만한 일이라도 있나?”
자세를 바로 한 이완 단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실은 위조화폐조직을 찾아내기 위해 주조소에 있는 장인들을 감찰하던 중에 한 가지 의심스러운 걸 찾아냈사옵니다.”
“그게 뭔가?”
도현은 자리를 당겨 앉으며 관심을 보였다.
“처음 화폐를 발행할 때 최종 완성본을 만들기 전에 견본으로 여러 개의 실험 틀이 제작됐는데 그것들 중 일부가 분실됐다고 합니다.”
“이거 냄새가 나는데…….”
“그러게 말이옵니다.”
눈을 가늘게 뜬 도현은 손에 쥐고 있던 가짜 은화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없어진 틀을 가지고도 이처럼 최종 완성본과 거의 흡사한 물건을 찍어 낼 수 있다는 거야?”
“실험 틀도 세밀한 부분에서 조금 다른 것이 있어도 일단은 기본 도안이 같으니 약간만 손을 본다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진지한 얼굴을 한 도현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렇군. 이완 단장.”
“말씀하십시오.”
“섣불리 움직였다가 놈들이 눈치채고 꼬리를 잘라 버리면 큰일이니, 최대한 은밀하게 사라진 틀을 누가 어디로 빼돌렸는지 조사하도록 해.”
“예.”
“그리고 포도대장은 계속 가짜 돈이 유통되는 통로를 찾으면서 주작단이 흔적을 발견하면 합께 힘을 합쳐 모두 일망타진할 수 있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전하.”
두 사람이 크게 대답하는 걸 들으면서 도현은 이제 위조화폐조직을 검거할 실마리를 잡았다는 생각에 가짜 은화를 꽉 움켜쥐며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늦은 오후, 이주열은 짐꾼으로 쓸 젊은 하인 하나와 함께 반기성의 자택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나리.”
이미 몇 번 오간 적이 있었기에 안면이 익은 반기성 집의 늙은 하인이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상단주께서는 안에 계시는가?”
“예. 안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인은 안채 바로 앞까지 이주열을 안내하고선 자긴 여기까지라는 듯 꾸벅 목례를 하고 사라졌다.
“이거,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오셨소.”
넉살 좋게 인사말을 건네며 방 안으로 들어서자 반기성이 그를 보고 반갑게 맞이했다.
“먼저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보니 목이 빠질 것 같습니다그려.”
“하하! 이거 미안하군요.”
“그런데 물건은?”
이주열의 물음에 반기성은 등 뒤에 둘러쳐져 있던 병풍 안쪽에서 궤짝 하나를 들고 나왔다.
“여기 있소.”
“제가 한번 확인해 봐도 되겠지요?”
“아무렴, 여부가 있겠소이까.”
이주열은 크흠 헛기침을 하고는 소매를 걷은 손으로 궤짝 뚜껑을 열었다.
궤짝 안에 가득 들어찬 은화를 본 순간, 이주열의 얼굴에 탐욕스러운 미소가 스쳤다.
“훌륭하구먼.”
그는 매처럼 날카로운 눈초리로 은화를 요모조모 뜯어보고선 마침내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관아 놈들도 웬만해선 구분하지 못할 게요.”
“아무렴 그래야지요.”
정교함을 유지하느라 궤짝 하나 이상은 생산하지 못하는 게 아쉽긴 했으나,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이주열은 마흔 명 정도로 이루어진 소규모 보부상 조직의 우두머리였는데 반기성이 만든 가짜 돈을 작게 나눠 전국에 뿌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보부상들이 주로 다니는 오일장들은 아무래도 진짜인지 돈을 확인해 보는 사람들이 적은 데다 여러 곳에 분산시켜 퍼트릴 수 있기 때문에, 관아의 눈을 피하기에는 적격이었다.
“그런데 반 상단주, 내 드릴 말씀이 하나 있소이다.”
이주열은 궤짝을 닫고 몸을 돌려 말했다.
“이번부터 배분은 육 대 사로 바꿨으면 좋겠소이다.”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면서도 반기성은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여태껏 반기성이 칠, 이주열이 삼으로 아무 문제 없이 잘 해 오던 참이 아닌가.
그런데 난데없이 자기 몫을 더 챙기려고 드니 다소 언짢은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요즘 관아에서 가짜 돈이 나도는 걸 크게 단속하고 있지 않소. 그쪽이야 물건만 만들면 땡이지만, 우리는 직접 물건을 들고 돌아다니면서 유통을 시켜야 한단 말이오. 붙잡힐지도 모르는 위험부담이 늘어났으니 그만큼 배분을 올려 줘야 되는 건 당연하지 않소이까.”
이주열은 반기성의 눈치를 살살 살피면서 교활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핑계야 이것저것 많아도, 결국은 돈을 더 달라는 소리였으니 그 얄팍한 속내가 참으로 가소로웠다.
반기성은 이주열을 흘끗 쳐다보고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 말에도 일리가 있으니…… 알겠소이다.”
“반 상단주가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 다행이구려.”
“어쨌든 오늘까지만 이전대로 하고, 다음 거래부터는 육 대 사로 하지요.”
그러자 이주열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번부터 그리해 주시오.”
“으음.”
짜증이 났지만 당장 궤짝에 있는 물건을 유통시키려면 보부상 조직을 이끄는 이주열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반기성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알겠소.”
“크크크. 고맙소이다. 여봐라! 밖에 아무도 없느냐?”
그러자 목소리를 듣고 마당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주열의 부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물건을 먼저 챙겨라.”
“예.”
하인이 궤짝을 보자기로 싸서 짊어지는 사이, 이주열은 반기성을 향해 한껏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소이다.”
“음. 다음에 또 보십시다.”
반기성은 멀리 나가지 않겠다며 늙은 하인에게 대신 배웅을 시킨 뒤, 베개에 팔을 얹고 비스듬히 앉아 혀를 찼다.
“쯧쯧. 던져 주는 것이나 고맙게 받아먹을 것이지. 감히 내 밥그릇에 눈독을 들여? 저놈도 오래 사귈 작자는 못 되는군.”
돈 맛을 조금 봤다고 해서 금방 욕심을 부리다니.
저런 놈은 아무리 많은 걸 줘도 만족하지 않고 욕심을 부릴 것이 뻔했고 그러다 보면 실수가 생길 수밖에 없으니, 괜히 곁에 두면 이쪽에까지 불통이 튀게 하고도 남을 위인이다.
조만간 가짜 은화 유통을 대신 맡을 인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반기성은 차갑게 식은 찻물을 홀짝였다.
<1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