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권-위조화폐(2) (69/104)

14권

위조화폐(2)

관청 내부의 일이었기에 주작단이 나서서 은밀히 내사를 한 결과 실험용 틀을 빼돌렸을 것으로 가장 의심되는 인물을 찾아낼 수 있었다.

“주조소 직장 김득불이라…… 이자가 실험용 틀을 빼돌렸다, 이거지?”

“현재로서는 가장 혐의가 짙습니다.”

“자세히 설명해 보게.”

이완의 물음에 김근행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우선 실험용 틀에 손을 댈 수 있는 몇 명 되지 않는 인물 중 하나이고, 결정적으로 분실한 다음 상부에 보고를 제대로 하지 않고 폐기 처분한 걸로 조작하자고 주동한 이가 바로 김득불입니다.”

“흐음. 확실히 의심이 가긴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범인이라 단정 짓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것 같은데…….”

턱수염을 매만지며 이완이 신중한 태도를 보이자 김근행이 얼른 말을 이었다.

“그래서 좀 더 자세히 조사를 해 보니, 얼마 전에 부인 명의로 도성 밖에 일만 평이나 되는 토지를 구입한 걸 알아냈습니다.”

“땅을 샀다고?”

“그렇습니다. 그리 넉넉하지 않은 김득불의 재정 상황으로 볼 때 구입 비용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주 의심스럽지 않습니까. 거기다가 떳떳한 돈이라면 자기 이름으로 사지, 굳이 부인 이름을 쓰지는 않겠지요.”

“자네 말이 맞아.”

상석에 앉은 이완이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김근행이 상체를 살짝 앞으로 숙이며 물었다.

“잡아들일까요?”

“괜히 소문이 돌면 범인들이 꼬리를 감출 수 있으니 시끄럽지 않게 끌고 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김근행이 집무실을 나가자 혼자 남은 이완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탁자에 놓인 조사 보고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동안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갔지만 이번에는 어림도 없다.”

잔뜩 술에 취한 김득불이 집에 가야겠다며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신발을 꿰어 신고 나서자, 머리를 틀어 올린 여주인이 얼른 나와 그를 배웅했다.

“아유, 나리, 벌써 가시게요?”

“끄윽, 으음.”

김득불은 거나하게 트림을 하고선 슬금슬금 손을 내려 엉덩이를 꽉 쥐었다.

“왜, 아쉬운 게냐?”

“아이, 나리도 참.”

여주인이 능숙하게 몸을 살짝 빼내자 김득불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네년들이랑 더 놀아 주고 싶지만 집사람이 오늘도 새벽닭 소리를 듣고 들어가면 바가지를 긁어 댈 테니 이제 가 봐야지. 껄껄.”

“그래도 내일 또 오실 거지요?”

“암.”

김득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가 일어서는데도 새치름하니 본 척도 하지 않은 영란이를 떠올렸다.

콧대가 높고 도도한 게 마음에 들어, 요 며칠 계속 드나들면서 공을 들이고 있는데, 지금까지 써 젖힌 돈이 아까워서라도 내일은 꼭 영란이를 안을 작정이었다.

“영란이보고 내일은 다른 손님을 받지 말라고 해. 알았어?”

“아유, 그럼요.”

여주인은 사근사근하게 웃으면서 김득불을 문 앞까지 잡아끌었다.

“어흠.”

김득불은 흘러내린 허리춤을 크게 한번 추어올리고는 기생집 문턱을 넘었다.

그러곤 가사도 제대로 모르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어두운 골목길로 걸어갔다.

“에헤라……. 끄윽. 어, 취한다.”

그렇게 몸을 비틀거리면서 어두운 밤거리를 걸어가는 김득불을 가만히 지켜보는 인영들이 있었다.

“아주 재미가 좋구먼.”

“지금 처리할까?”

동료의 말에 주위를 둘러본 주작단 단원은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인적이 없다고 해도 대로라서 혹시 모르니까 원래 계획대로 하자고.”

“그러지.”

이야기를 끝낸 두 사람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은밀하게 김득불을 따라갔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던 김득불은 갑자기 느껴지는 요의에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왼편에 있는 담벼락 앞에 서서는 하의 끈을 풀었다.

쏴아아.

“으흐.”

시원하게 쌓여(?) 있던 걸 쏟아 낸 김득불이 몸을 부르르 떨고는 주섬주섬 바지춤을 추어올리고 있을 때 조용히 그 뒤로 접근한 주작단 단원 중 한 명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이, 김득불.”

“으응?”

술에 취해 벌게진 얼굴로 뒤를 돌아본 김득불은 처음 보는 사내 두 명이 서 있는 걸 보고 머리를 갸웃거렸다.

“딸꾹. 너희들은 뭐야?”

“우리하고 잠시 어딜 좀 가야겠어.”

그러자 상황 파악을 못 한 김득불은 배를 내밀고는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놈들이 내가 감히 누군지 알고!”

“누구긴 종칠품 주조소 직장인 김득불이지.”

“……!”

상대가 자신의 신분을 정확히 알고 있자, 그제야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김득불은 방금 전까지 기생집에서 마신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어, 어디서 나왔소?”

김득불이 말을 더듬으면서 묻자 주작단 단원들은 씨익 한쪽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

“그건 가 보면 알 거야.”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걸리는 것이 있었던 김득불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리고 여기서 잡히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다짜고짜 앞을 막고 있는 주작단 단원들을 밀치며 달아나려고 했다.

“이익!”

하지만 김득불이 눈을 이리저리 돌리는 걸 보고 미리 대비를 하고 있던 주작단 단원이 재빨리 다리를 걷어차 버렸다.

퍽.

“어이쿠.”

중심을 잃은 김득불은 비명을 내지르며 볼썽사납게 땅바닥을 뒹굴면서 넘어졌다.

“이 자식이 어디서 도망을 치려고 그래.”

“아이고. 나리, 제발 살려 주십시오.”

“누가 죽인데?”

“힘 빼기 싫으니까 이제 얌전히 가자.”

주작단 단원이 으름장을 놓으며 몸을 붙잡자 겁에 질린 김득불이 목청을 높여 고함을 내질렀다.

“사람 살려!”

“이게 미쳤나!”

“야, 입 막아.”

김득불의 돌발 행동에 눈가를 찌푸린 주작단 단원은 주먹을 들어 그의 뒤통수를 세게 가격했다.

빠각.

“컥.”

짧은 신음과 함께 시끄럽게 떠들던 김득불이 정신을 잃고 힘없이 축 늘어지자 주작단 단원들은 양쪽에서 그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끝까지 귀찮게 하는군.”

“누가 아니래.”

투덜거리며 서 있자 마차 한 대가 빠르게 다가와 멈춰 섰다.

“어서 태워.”

“으쌰!”

마차 문을 열어 김득불을 구겨 넣은 주작단 단원들은 보고 있는 사람이 없는지 주위를 살펴보고는 얼른 올라탔다.

탕탕!

“출발해.”

마차의 벽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면서 주작단 단원이 낮게 외치자 마부석에 앉아 있던 사내가 채찍을 휘둘러 마차를 출발시켰다.

“이랴!”

따각따각.

주인을 잃고 구겨진 채 바닥에 떨어진 갓만 남기고 김득불을 태운 마차는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방이 꽉 막힌 폐쇄된 공간에 정신을 잃은 김득불이 포승줄에 묶인 채 의자에 앉혀 있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며 안으로 들어온 김근행은 무표정한 얼굴로 김득불을 힐끗 쳐다보고는 짧게 입을 열었다.

“깨워라.”

“예.”

대답과 함께 옆에 서 있던 우락부락한 인상의 사내는 구석에 놓인 물통을 들어 그대로 김득불의 몸에 끼얹었다.

촤아악.

“어푸푸.”

번쩍 정신이 든 김득불은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앞에 저승사자처럼 서 있는 김근행을 발견하고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 상대를 내려다보며 김근행이 크지는 않지만 위압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가 어딘지 아나?”

“모, 모릅니다.”

“주작단 심문실이야.”

국왕 직속 기관으로 의금부보다 더 무섭다는 주작단에 자신이 와 있다는 사실에 김득불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왜 여길……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습니다.”

“착오라…… 글쎄, 우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그게 무슨……?”

허리를 숙여 얼굴을 바짝 들이댄 김근행은 상대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이걸 보고도 네놈이 잡혀 온 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나?”

김근행이 주머니에서 압수한 위조화폐를 하나 꺼내 내밀자 순간 김득불은 흠칫 놀랐다가 이내 정색을 하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시치미를 뗐지만 노련한 김근행은 아주 짧은 순간 상대가 동요하는 기색을 보인 걸 놓치지 않고 이번 위조화폐 사건에 관련이 있다는 걸 확신했다.

“아니라고 잡아떼겠다, 이거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그럼 우리가 생각을 나게 해 주지. 이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김근행이 고개를 돌리자 뒤에 우두커니 서 있던 털보 사내가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바른말이 나올 때까지 손을 좀 봐 줘.”

“알겠습니다.”

비릿한 미소를 지은 털보 사내가 손가락 관절을 꺾으며 앞으로 다가오자 잔뜩 겁먹은 얼굴로 김득불이 몸을 떨었다.

“왜, 왜 이러십니까?”

“마누라 고쟁이 숫자까지 다 토해 내게 만들어 줄 테니까 기대하라고.”

“허억.”

“뭐부터 시작을 할까?”

마치 먹잇감을 앞에 둔 포식자처럼 번들거리는 눈으로 김득불을 잠시 훑어본 털보 사내는 숯을 넣어 둔 화로에서 시뻘겋게 달궈진 쇠꼬챙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퉷!

치이이익.

쇠꼬챙이 끝에 털보 사내가 침을 뱉자 얼마나 뜨거운지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며 금방 증발해 버렸다.

그걸 본 김득불은 발작하듯 소리쳤다.

“사, 살려 주십시오!”

“흐흐흐. 아직 시작도 안 했어.”

고문 전문가인 털보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하면서 쇠꼬챙이를 김득불의 왼쪽 팔에 가져다 댔다.

“아아아악!”

살이 타들어 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김득불은 비명을 내지르며 이리저리 몸부림을 쳤다.

쇠꼬챙이를 뗀 털보 사내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김득불을 보며 물었다.

“어때? 이제 제대로 말할 생각이 생겼어?”

“정말 난 아무런 상관이 없소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김득불이 혐의를 부정하자 털보 사내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버텨 보시겠다, 이거지. 좋아. 앞으로 해 볼 것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누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고.”

그러면서 털보 사내는 다시 쇠꼬챙이로 김득불의 살을 지져 댔다.

“끄아아악!”

쇠꼬챙이로 지지는 것뿐만이 아니라 집게로 손톱을 하나씩 뽑고, 무릎 위에 커다란 돌덩이를 올려놓기도 하고, 물고문까지 한 털보 사내는, 자신이 장담한 대로 갖가지 방법을 써서 김득불을 고문했다.

그런 모습을 김근행은 한쪽 구석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담담한 얼굴로 빠짐없이 다 지켜봤다.

처음에는 오리발을 내밀며 모르쇠로 일관하던 김득불이었지만 온몸의 털이 바짝 서고 차라리 정신을 잃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극심한 고통이 계속 가해지자,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자, 잠깐, 뭐든 다 이야기할 테니 제발 이제 그만하시오!”

다섯 번째 기절을 했다가 찬물을 뒤집어쓰고 깬 김득불이 다급하게 외치자 다시 불에 달군 쇠꼬챙이를 집어 들던 털보 사내는 아쉬운 듯 살짝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진짜야?”

“살려만 주시면 뭐든 하겠소이다.”

절박함이 느껴지는 모습에 털보 사내가 힐끗 뒤를 돌아보자, 지금까지 가만히 고문하는 걸 지켜보고 있던 김근행이 의자에서 일어나 앞으로 다가왔다.

“난 두 번 이야기하는 걸 싫어하니까 째깍째깍 대답을 하도록 해.”

“……알겠소.”

“먼저 네놈이 주조소에서 제작해서 보관하고 있던 실험용 틀을 훔쳐 간 것이 맞지?”

“그건…….”

정곡을 찌르는 물음에 김득불이 바로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자 김근행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다시 고문을 시작하라는 듯이 김근행이 몸을 뒤로 돌리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김득불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마, 맞습니다!”

그 외침에 몸을 바로 한 김근행은 의자에 묶여 있는 김득불의 뺨을 세게 후려갈기고 으르렁거리는 어투로 말했다.

찰싹!

“윽.”

“잔머리를 굴릴 생각은 아예 안 하는 것이 좋아.”

“으으…….”

“제작 틀을 누구한테 넘겼지?”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입술이 터진 김득불은 피를 흘리며 힘겹게 대답했다.

“이맹우한테 줬습니다.”

“그놈은 뭐 하는 놈이야?”

처음 입을 열기가 어렵지 이미 모든 걸 체념한 듯 김득불은 힘없이 자신이 아는 걸 모두 털어놨다.

“주조소에서 쓰는 쇠를 납품하는 업자입니다.”

“그럼 그놈과 공모를 해서 위조화폐를 만들어 낸 건가?”

김득불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난 그저 돈을 받고 화폐 틀을 넘겨주기만 했지, 다른 건 관련이 없습니다. 진짭니다.”

“흐음.”

마치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으로 김득불을 한참 동안 쳐다보던 김근행은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만약 방금 한 이야기가 거짓일 때는 각오하는 것이 좋을 거야.”

“저, 정말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위조화폐와 관련해서 네놈이 한 짓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종이에 쓰도록 해.”

“……예.”

말이 끝나기 무섭게 털보 사내는 지필묵이 놓인 작은 탁자를 하나 가져와 김득불 앞에 놓고는 글을 쓸 수 있게 포승줄을 풀어 줬다.

그리고 얼마 뒤 김득불이 쓴 조서를 손에 들고 김근행은 주작단 단장인 이완의 집무실로 갔다.

어느새 새벽이 지나 동쪽 하늘이 서서히 밝아 오는 아침이었지만 이완은 퇴청을 하지 않고 집무실에서 심문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흠흠. 단장님, 저 김근행입니다.”

“들어오게.”

문을 열고 들어간 김근행이 꾸벅 허리를 숙이자 책상 앞에 앉아 뭔가를 보고 있던 이완이 머리를 들며 약간 가라앉은 어투로 말했다.

“어떻게 됐나?”

“우리 예상이 맞았습니다. 이놈이 화폐 틀을 빼내 금화 육백 냥을 받고 이맹우라는 자한테 몰래 넘겼습니다.”

설명을 들으며 김근행이 건네준 조서를 천천히 읽어 본 이완은 입술을 비틀고는 씹어뱉듯 말했다.

“이런 때려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

“이명우라는 놈을 족치면 위조화폐조직의 꼬리가 잡힐 것 같습니다.”

“머뭇거릴 것 없이 당장 체포해 와!”

“알겠습니다.”

크게 대답한 김근행은 곧장 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갔다.

위조화폐조직의 체포는 모든 일에 최우선되는 사항이었기에 연락을 받자마자 포도청에서도 포졸 오십 명을 출동시켜 김근행이 이끄는 주작단 단원들과 함께 이맹우의 상점이 위치한 마포로 달려갔다.

관청과 도성 내 대장간에 광물을 납품하는 도매업자인 이맹우의 집은 마흔 간이 넘는 아주 큰 저택이었는데, 절반은 개조해서 창고와 상점으로 쓰고 나머지는 식솔들의 생활공간이었다.

오늘은 멀리 북방에서 캔 석탄이 배편으로 들어오는 날이라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이맹우가 헛기침을 하며 방에서 나오자, 마당을 쓸고 있던 늙은 하인이 허리를 넙죽 굽히며 인사를 했다.

“어험.”

“기침하셨습니까, 주인어른.”

“그래. 가서 세숫물을 좀 떠 오라고 하여라.”

“예.”

하인은 종종걸음으로 부엌에 갔다가 커다란 놋쇠 대야에 물을 듬뿍 담아 이맹우한테 가져갔다.

마루에 걸터앉아서 세수를 한 이맹우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늙은 하인이 눈치 빠르게 무명 수건을 그에게 건넸다.

뚝뚝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옷에 묻지 않도록 조심스레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그는 됐다며 하인에게 대야를 치우라고 손짓했다.

“가져가거라.”

“네.”

막 하인이 대야를 들고 가려는 순간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이맹우의 심복으로 상점 서기 일을 하는 공상섭이 허겁지겁 안채로 뛰어 들어왔다.

“주인어른, 큰일 났습니다!”

아침부터 호들갑을 떠는 모습에 이맹우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왜, 또 나루터 일꾼들이 밤새 술을 처먹고 나오기라도 한 거야?”

“그게 아니라, 포졸들이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뭐?”

포졸이라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치켜뜬 이맹우가 다그치듯 되물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포졸들이 뭐 얻어먹을 것이 있다고 여길 와?”

“그건 저도 모르지요. 아무튼 수십 명이 잔뜩 굳은 얼굴로 우르르 몰려오는 걸 보면 뭔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으음.”

위조화폐와 관련해 구린 데가 많았던 이맹우는 어쩐지 불길한 느낌을 감추지 못했다.

어찌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대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탕탕탕!

“포청에서 나왔다. 어서 문을 열어라!”

“어쩝니까?”

바깥에서 들리는 사나운 고함 소리에 공상섭은 안절부절못하며 이맹우를 쳐다봤다.

뭔가 일이 잘못되어 단단히 틀어졌다는 걸 깨달은 이맹우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제기랄! 여길 빠져나가야겠어.”

“예?”

“어서 서둘러!”

“아, 알겠습니다.”

안방에 뛰어 들어간 이맹우는 문갑文匣 깊숙한 곳에 넣어 둔 작은 돈 궤짝을 챙겨 들고는 황급히 뒷마당으로 나갔다.

헐레벌떡 뛰어서 어른 키보다 훨씬 높은 담장 앞에 도착한 이맹우는 금방 난관에 부딪쳐 멈춰야 했다.

손을 머리 위로 한껏 뻗어서 펄쩍 뛰면 끄트머리 정도는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돈이 든 궤짝을 공상섭에게 맡기자니 이놈이 들고 튈까 봐 영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그렇다고 궤짝을 품에 안은 채 담장을 넘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얼른 옷 좀 벗어 보아라.”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리?”

갑자기 벌거벗으란 소리에 공상섭이 기겁을 하고 쳐다보자 이맹우는 오히려 버럭 화를 내며 채근했다.

“아, 윗도리 좀 벗어 보래도!”

어쩔 수 없이 공상섭이 주섬주섬 웃옷을 벗어서 주자 그는 냉큼 그것을 받아 들고 보자기처럼 펼친 다음 궤짝을 둘둘 싸서 아기를 등에 업듯 들쳐 멨다.

“뭐 하느냐? 바닥에 얼른 엎드리지 않고.”

“아니, 그게…… 밑에 흙이라서 더러운뎁쇼.”

“그럼 내가 엎드리랴? 네놈이 발받침을 해 줘야 내가 담을 타고 넘어가지!”

한시가 급한데 뭘 그리 구시렁거리냐며 이맹우가 신경질을 부렸다.

결국 반쯤 벌거벗은 모양새로 공상섭이 바닥에 네발로 엎드리자 이맹우가 웃차, 하고 등을 밟고 올라섰다.

“아구구. 나 죽네!”

“이놈, 조용히 해라! 사내놈이 엄살 하고는.”

인간 발판 덕분에 손쉽게 담장 끝을 짚고 기어오른 이맹우는 행여나 돈 궤짝이 등에서 떨어질까 노심초사하며 조심조심 반대편 바닥에 발을 디뎠다.

“주인어른, 괜찮으십니까?”

“그래. 너도 어서 넘어와.”

“예.”

‘이대로 도망치면 놈들도 쫓아올 수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궤짝을 챙겨 몸을 일으키던 이맹우는 정면에 서 있는 사람 그림자를 뒤늦게 알아차리고는 사색이 되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헉!”

앞을 가로막고 선 인영은 바로, 포졸들이 들이닥치면 이맹우가 달아날 걸 미리 예상하고 기다리고 있던 주작단 단원들이었다.

“어딜 달아나려고.”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김근행의 모습에 이맹우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았지만 이미 곤봉을 손에 든 포졸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주춤 뒷걸음질을 치다 등에 멘 돈 궤짝이 벽에 닿자 이맹우는 이내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포박해라.”

“옛.”

우렁차게 대답을 하며 앞으로 나온 포졸 두 명이 이맹우를 붙잡아 포승줄에 단단히 묶고 등에 매고 있던 돈 궤짝을 압수했다.

구석구석 샅샅이 뒤져 증거물을 확보한 김근행은 이맹우와 심복들을 조사하기 위해 포청으로 끌고 갔고 집과 창고에는 사람들의 출입을 막는 금줄이 처졌다.

이 소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위조화폐조직의 수괴인 반기성의 귀에 들어갔다.

“그게 사실이냐!”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뜬 반기성의 말에 심복인 도성구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예.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들한테 붙잡혀 이맹우가 포청으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설마 꼬리가 밟힌 거야?”

“주조 틀을 빼돌린 김 직장도 오늘 주조소에 등청을 하지 않은 걸 볼 때 뭔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이 분명합니다.”

“끄으응.”

반기성은 앓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와락 구겼다.

이제 마지막 한탕만 하고 모든 걸 깨끗이(?) 정리하려는데 이런 일이 터졌으니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이맹우가 끌려갔다면 우리도 위험한 것 아니겠습니까.”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도성구의 말에 반기성도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김득불은 몰라도 이맹우는 그의 존재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벌인 일들에 비교적 깊숙이 관여하고 있어서 포도청의 창끝이 이쪽으로 향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상황이 다급해진 반기성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지시를 내렸다.

“당장 비밀 공방에 연락해 증거가 될 만한 건 모두 없애고 물건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라고 해!”

“알겠습니다.”

“어서 서둘러.”

반기성의 재촉에 도성구는 인사를 황급히 방을 나갔다.

탕!

“젠장.”

앞에 놓인 서탁을 주먹으로 세게 내려치고는 화를 삭이던 반기성은 이내 큰 소리로 밖에 있는 하인을 불렀다.

“게 아무도 없느냐!”

“부르셨습니까요, 나리.”

“가서 마님을 이리로 오시라 해라.”

“예.”

심부름을 시킨 반기성은 방 안에 있는 문갑을 모두 열고 중요한 서류와 재물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때 반기성의 부인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부인,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그대로 실행하시오.”

몸을 일으킨 반기성이 정색을 하며 이야기를 하자 부인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지금 바로 짐을 간단히 챙겨 애들과 함께 황해도 해주로 가시오.”

황해도 해주는 그의 처가가 있는 곳이었다.

“갑자기 거긴 왜?”

“아무 말 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시오.”

“저희들만 가는 거예요?”

불안한 시선으로 그를 보며 부인이 묻자 반기성은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말했다.

“먼저 가 있으면 나도 곧 뒤따라갈 거요.”

“알겠어요.”

“그리고 남들이 알면 안 되니까 누가 됐건 행선지를 말해 주지 마시오.”

“……네.”

반기성의 모습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는 걸 눈치챈 부인은 약간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없으니 어서 서두르시오.”

재촉을 해서 부인을 내보낸 반기성은 자신도 얼른 짐 보따리를 쌌다.

동산으로 남아 있는 재산을 그대로 버려두고 떠나야 된다는 것이 너무 아까웠지만 그래도 포도청에 잡혀 곤욕을 치르는 것보다 나았기에 반기성은 금방 미련을 접었다.

만약을 대비해 그동안 재산을 꾸준히 금괴나 어음처럼 가지고 다니기 쉬운 걸로 바꿔 두기도 했고, 무엇보다 비밀 공방에서 만들고 있는 위조화폐를 유통시키면 지금 포기하는 걸 만회하고도 남을 만큼 많은 이득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반기성은 주저 없이 기반을 버렸다.

얼마 있지 않아 부인과 자식을 태운 마차가 조용히 집을 떠났고 반기성도 몇몇 심복만 데리고 수사망이 좁혀 오기 전에 급히 한양을 빠져나갔다.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아 이맹우한테 자백을 받은 주작단과 포도청 포졸들이 반기성의 저택을 덮쳤지만 이미 다 도망쳐 버린 후였다.

그러자 포도청은 바로 반기성과 측근들을 수배하는 한편 이미 체포된 자들을 추궁해 단서가 될 만한 걸 찾아내는 데 심력을 기울였다.

그런 가운데 수사를 맡고 있는 이완 단장과 포도대장 구인후는 희정당에 들어가 도현에게 일련의 상황을 자세히 보고했다.

“그러니까 반기성이라는 자가 위조화폐조직의 우두머리라 이건가?”

“그렇사옵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걸로 볼 때 최근 시중에 유통되어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위조화폐 대부분을 이자가 퍼뜨린 것으로 보이고 그 규모가 최대 금화 일만 냥이 넘는다고 하옵니다.”

“지금 금화 일만 냥이라고 했나?”

“송구스럽습니다, 전하.”

“허어. 아주 나라를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군.”

혀를 차는 도현을 보며 구인후와 나란히 앉아 있던 이완 단장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심문 과정에서 밝혀낸 정보이온데 체포된 이맹우가 최근 반기성에게 위조화폐 제작에 쓸 광석을 대량으로 팔았다고 하옵니다.”

“양이 얼마나 되기에 그러는 건가?”

잠시 머뭇거리던 이완 단장은 이내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만 냥의 위조화폐를 만들 수 있는 양이옵니다.”

“뭐야!”

말이 끝나지 무섭게 도현은 눈을 크게 치켜뜨고는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그게 사실인가!”

“……예.”

“환장하겠군.”

지금도 위조화폐 때문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수만 냥이 더 시중에 풀린다면 화폐의 유통체계 자체가 무너져 버릴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될 때까지 도현이 그냥 방치하고 있지 않겠지만 그걸 수습하려면 엄청난 심적 물적 타격을 감수해야만 한다.

어쩌면 기존에 발행한 금화와 은화가 신뢰를 완전히 잃어 화폐를 새롭게 찍어 내야 될지도 몰랐다.

생각해도 아찔해진 도현은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위조화폐가 시중에 대량으로 뿌려지는 건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해!”

“그래서 달아난 반기성의 뒤를 추적하는 한편 이맹우가 실토한 비밀 공방으로 체포조를 급파했사옵니다.”

“비밀 공방을 어디에 만들어 뒀던가?”

“북한산이옵니다.”

대답을 들은 도현은 이맛살을 찌푸린 채 짧게 혀를 찼다.

“쯧. 등잔 밑이 어두웠군.”

“송구하옵니다.”

머리를 숙이는 이완 단장과 포도대장 구인후를 보며 그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대한 빨리 위조화폐조직을 일망타진하고, 새로 찍어 낸 가짜 돈을 회수해 보고하도록.”

“알겠사옵니다.”

조치를 취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도현은 얼굴에서 쉽게 불안감을 지우지 못했다.

한편 도현한테 보고한 대로 주작단과 포졸 수십 명으로 이루어진 체포조가 황급히 북한산을 오르고 있었다.

워낙 나무가 우거져 그나마 있는 길도 상당히 험해 다들 숨이 거칠어지고 땀으로 옷이 흠뻑 젖었다.

“후우. 아직 멀었느냐?”

포도청 종사관인 양태상이 커다란 바위를 손으로 집고 서서 묻자 길 안내를 맡은 십장 최국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고는 대답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이 능선만 넘어가면 놈들이 말한 까치 계곡입니다.”

최국이 팔을 들어 가리키는 곳을 본 양태상은 눈가를 찡그렸다.

“반 시진은 더 가야 되겠구먼. 좀 평탄한 길은 없나?”

“있기는 하지만 크게 둘러 가는 길이라 여기보다 족히 한 시진은 지체될 겁니다.”

눈치를 보며 최국이 투덜거리는 상관을 달래고 있을 때 뒤따라 올라오던 김근행이 끼어들었다.

“한가하게 편한 길로 갈 여유가 없으니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읍시다.”

그러자 양태상은 괜히 헛기침을 하고는 언제 불평을 했냐는 듯이 딴청을 부렸다.

“흠흠. 뭣들 꾸물거리고 있어? 어서들 움직여라!”

“……예.”

괜히 잘 따라오고 있는 부하들한테 한 소리를 한 양태상은 머쓱한 얼굴로 성큼성큼 가파른 능선을 올라갔다.

서로 품계는 비슷했지만 김근행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무시무시한 주작단 소속이었기에 양태상이 알아서 꼬리를 내리는 거였다.

그걸 보며 피식 웃은 김근행은 한쪽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최국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

“가세.”

“예, 나리.”

고개를 푹 숙여 고마움을 표시한 최국은 앞서 가는 양태상을 따라 얼른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푸른 잎사귀가 무성하게 나 있는 나무숲을 지나 한참을 더 이동하자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면서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계곡이 나왔다.

오래전부터 까치가 많이 둥지를 틀고 산다 해서 까지 계곡이라 불리는 곳인데, 이맹우가 실토한 대로 제법 넓은 공지 한가운데 통나무로 지은 건물이 두 채 있었다.

커다란 소나무 뒤에 한쪽 다리를 꿇고 앉아 천리경으로 비밀 공방 주위를 살핀 김근행은 옆에 있는 양태상을 돌아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하지 않소?”

“뭐가 말입니까?”

고개를 옆으로 갸웃하고는 묻는 말에 김근행이 천리경을 접어 품속에 넣으면서 답했다.

“아무리 비밀 공방이라고는 하지만 인기척이 너무 없지 않소.”

조금 불평이 많기는 하지만 종사관 벼슬을 투전판에서 딴 건 아닌지 잠시 생각을 해 보던 양태상도 살짝 얼굴을 굳혔다.

“그렇군요. 이거, 설마, 눈치를 채고 다 도망친 거 아닙니까?”

“그건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면 알게 되지 않겠소.”

무겁게 머리를 끄덕인 양태상이 손짓을 하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포졸들이 병장기를 들고 재빨리 통나무 건물을 포위했다.

김근행도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고는 자신이 데려온 부하들과 함께 움직였다.

사방을 포위한 채 삼십 보 거리까지 접근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김근행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 가운데 양태상과 포졸들이 닫혀 있는 나무 문을 부숴 버릴 듯이 열어젖히며 우르르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벌컥!

“모두 꼼짝 마라!”

하지만 기세 좋게 들이닥친 것과는 반대로,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대신 일행을 반긴 것은 코끝을 찌르는 피비린내와 수북이 쌓인 시체들의 산.

불시에 급습을 당한 듯 반항도 하지 못한 채 등을 칼에 베인 시체가 가장 많았고, 도망치려고 문을 향해 달려가다가 결국 바닥에 쓰러지고 만 사람도 있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구역질을 하는 소리를 들으며 양태상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이리 들어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심상치 않은 목소리에 불길한 예감을 느낀 김근행은 안으로 들어와 눈앞에 펼쳐진 참상을 보고선 작게 신음했다.

“으음.”

“아무래도 놈이 우리보다 한발 빠르게 움직인 것 같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에 고인 피를 손가락에 묻혀 가볍게 비벼 본 김근행은 눈을 번뜩이며 입을 열었다.

“피가 아직 끈적끈적하군.”

“그럼!”

“놈들이 일을 벌인지 얼마 안 됐다는 뜻이오.”

김근행의 말에 양태상은 우두커니 서 있는 포졸들을 보며 크게 소리쳤다.

“주위를 샅샅이 뒤져라!”

“옛.”

즉시 포졸들은 네다섯 명씩 짝을 지어 사방으로 흩어졌고 양태상도 함께 움직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김근행은 포청 관리들과 함께 행동하지 않고 계속 건물 안에 남아 있었다.

그러자 주작단 단원 한 명이 그에게 다가가 조용히 이야기를 했다.

“우리도 수색을 도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힐끗 바깥을 쳐다본 김근행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다 흩어져 버리면 막상 놈들을 찾아냈을 때 도와주러 가기 어려우니 우린 그냥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나을 거야. 그것보다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이 남아 있을지 모르니 안을 살펴봐.”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주작단 단원 다섯 명은 매처럼 눈을 번뜩이면서 천천히 실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지만 좀처럼 건질 만한 것이 발견되지 않는 가운데 시신들을 훑어보던 김근행은, 등에 칼을 맞고 엎드린 자세로 죽어 있는 중년 사내가 왼쪽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는 걸 보고 옆으로 갔다.

굳어 있는 시신의 손을 억지로 펴자 안에서 금화가 하나 나왔다.

“이건!”

금화를 살펴본 김근행은 위조화폐인 걸 확인하고 표정을 굳혔다.

그때 단원 한 명이 다급하게 소리를 쳤다.

“여기 생존자가 있습니다!”

“뭐야!”

황급히 용광로 뒤편으로 달려가자 정말 온몸이 피투성이였지만 숨을 거칠게 쉬고 있는 사내가 한 명 있었다.

“칼에 찔렸지만 운 좋게 심장을 비껴간 것 같습니다.”

“어서 치료를 해 줘.”

“네.”

단원이 품에서 항상 휴대하고 다니는 금창약을 꺼내 사내의 상처 부위에 발랐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위조화폐조직의 잡을 단서를 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였기 때문에,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트는 그를 김근행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살 수 있겠나?”

“저도 의원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렸습니다.”

“끄으응.”

앓는 소리를 낸 김근행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 살려 내야 해.”

그러고는 부하 한 명을 시켜서 응급조치를 끝낸 사내를 들쳐 업고는 서둘러 의원이 있는 산 아래로 내려갔다.

“전하, 주작단 단장과 포도대장께서 오셨사옵니다.”

초조한 얼굴로 비단 보료 위에 앉아 있던 도현은 바깥에서 들리는 내관의 목소리에 얼른 입을 열었다.

“들라 하라.”

문이 열리고 관복을 입은 이완 단장과 포도대장 구인후가 들어오자 도현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다그치듯 물었다.

“어찌 됐나?”

구인후는 어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낭패한 표정을 짓다가 마지못해 이야기를 했다.

“비밀 공방을 찾아내긴 했사온데…….”

“헌데?”

도현의 날 선 추궁에 그는 고개를 숙였다.

“저희가 덮쳤을 때는 이미 놈들이 흔적을 지우고 도망친 다음이었습니다.”

그러자 도현은 팔걸이를 세게 내리쳤다.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했기에 매번 뒷북이나 치고 있는 건가!”

“송구스럽사옵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두 사람은 죄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더욱 숙였다.

애써 화를 가라앉힌 도현은 쏘아붙이듯 말했다.

“추가로 만든다는 위조화폐도 놈들이 빼돌렸소?”

“그런 것 같사옵니다.”

“허어. 그런 것 같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됐는데 포도대장은 참 태평스럽군그래!”

“그게 아니오라…….”

“듣기 싫소. 기껏 꼬리를 잡았는데 잔챙이들만 체포하고 정작 중요한 것은 다 놓쳐 버렸으니 앞으로 이일을 어찌할 거요!”

“죄송합니다.”

“에잉.”

혀를 차며 도현이 마뜩지 않다는 표정을 짓자 이완 단장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도 완전히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반기성이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헤친 장인들 가운데 운 좋게 살아남은 자를 통해 새로 제조된 위조화폐의 액수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완 단장의 말에 도현은 상체를 앞으로 살짝 숙이며 관심을 보였다.

“얼만가?”

“금화와 은화를 합쳐 오만 냥가량 된다고 합니다.”

“헉! 지금 오만 냥이라고 했나?”

“예.”

“이런 미친…….”

도현의 입에서 저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는데 그 정도의 위조화폐가 저잣거리에 풀린다면 말 그대로 재앙이었다.

화를 내던 도현은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쫓기고 있으니 가지고 있는 위조화폐를 최대한 빨리 처분하려고 들 텐데 그 많은 액수를 어떻게 들키지 않고 풀 수 있는 거지?”

아무리 점조직으로 운영하고 은밀하게 행동한다고 해도 지속적으로 위조화폐를 유통시키다 보면 흔적을 남기기 마련인데 반기성은 그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자 구인후가 답답한 마음을 하소연이라도 하듯 이야기를 했다.

“저희도 그 점을 가장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반기성이 만든 위조화폐가 한양과 인접한 경기도뿐만 아니라 멀리는 심양에서 부산포까지 거리를 가리지 않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튀어나오니 수사가 더욱 어렵사옵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한꺼번에 대량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한두 푼씩 진짜와 교묘하게 섞여 풀리고 있어서 발견해 내기가 쉽지 않사옵니다.”

옆에 앉아 있던 이완 단장도 한마디 거들며 수사의 어려움을 이야기하자 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게, 놈들이 홍길동이라도 된단 말인가!”

“송구하옵니다.”

짜증을 내기는 했지만 그도 관청의 손길이 미치는 것에 한계가 있는 이상 이런 식으로 위조화폐가 유통된다면 꼬리를 잡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표정을 굳힌 도현은 보료 팔걸이 끝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반기성 그놈이 상단을 운영했다니 그 조직을 이용한 거 아닌가?”

“그건 아닐 겁니다.”

이완 단장이 바로 고개를 내젓자 도현이 그를 쳐다봤다.

“어떻게 그렇다고 단정할 수 있나?”

“우선 무금 상단에 그만한 역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위조화폐가 큰 읍성은 물론이고 깊숙한 산골 마을과 어촌을 가리지 않고 발견되기 때문이옵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답답한 마음에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고는 투덜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그러면 놈들이 위조화폐를 싸 들고 여기저길 돌아다니며 뿌린다는 겐가!”

“죄송합니다.”

“쯧.”

머리를 숙인 이완 단장을 보며 혀를 차던 도현은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멈칫했다.

“아니지, 정말 그럴 수도 있지.”

“……예?”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신하들을 보며 도현이 입을 열었다.

“잘들 생각을 해 봐. 전국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현금 거래를 자주 할 수 있는 이들이라면 조선에 딱 하나밖에 없지 않나?”

머리 회전이 빠른 이완 단장은 그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반기성이 보부상과 손을 잡았다면 모든 의문이 한꺼번에 다 풀리지 않겠나?”

“맞사옵니다. 진작 왜 그런 생각을 못 했는지…….”

이완 단장과 구인후는 사건을 해결할 새로운 활로를 찾은 표정을 지었다.

“뒤져 보면 분명 걸려드는 것이 있을 게야.”

“당장 조사를 하겠습니다.”

마음이 급한지 엉덩이를 들썩이는 구인후를 보며 도현은 엄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이번에는 절대 실수가 없도록 해야 될 걸세.”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번 더 믿어 보지.”

묵직한 음성에 두 사람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바짝 긴장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한편 가까스로 체포당할 위기를 넘기고 도성 밖 안가에 몸을 숨긴 반기성은 심복인 도성구와 함께 수락산 자락에 있는 한 암자에 모습을 나타냈다.

불광암이라 불리는 이 암자는 수락산에서도 인적이 드문 안쪽 골짜기에 위치했는데 선대 때부터 자주 불공을 드려 반기성 가문과 인연이 깊은 곳이었다.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있던 노스님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반기성과 도성구가 암자로 들어서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양손을 내밀어 합장을 했다.

“어서 오십시오, 시주님.”

“이거, 불편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스님.”

“아닙니다. 손님분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들어가 보십시오.”

“감사합니다.”

머리를 숙여 고마움을 표시한 반기성은 도성구를 밖에 세워 두고 불당 맞은편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끼이익.

좁은 방 안에는 보부상 접장인 이주열이 혼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오셨소?”

이주열이 머리를 들어 힐끔 그를 쳐다보자 반기성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받으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빨리 온다고 했는데…… 이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이다.”

“마음 놓고 돌아다니기 어려운 형편인 걸 아니까 괜찮소.”

“…….”

겉으로는 생각해 주는 척하면서 은근히 곤경에 처한 그를 약 올리는 이주열의 말에 반기성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심계가 깊은 반기성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은밀히 만나자고 한 용건을 꺼냈다.

“일이 조금 꼬였지만 물건은 안전한 곳에 빼돌려 놨으니 거래는 차질 없이 진행될 거외다. 그걸 이야기하려고 만나자 했소이다.”

“물건이 잘 있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오. 한데 그거 말고도 이야기를 할 것이 있는 거 같은데 안 그렇소?”

“무슨 말이오?”

여유롭게 입가에 미소까지 지으면서 찻잔을 든 이주열은 녹차를 한 모금 마시며 이야기를 했다.

“지금 포도청에서 반 상단주를 잡는다고 벌집을 쑤신 듯 시끄러우니 위험수당을 조금 더 쳐줘야겠소.”

“그 문제는 육 대 사로 수입을 나누는 걸로 이미 이야기가 끝났지 않소?”

“아까도 말했지만 그때하고 상황이 바뀌었지 않소이까?”

“이익.”

약점을 잡고 돈을 더 뜯어내려는 이주열의 치사한 행동에 반기성은 얼굴을 굳히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도 포졸들이 눈을 벌겋게 뜨고 돌아다니는 판국에 굳이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으니 싫으면 다른 사람을 알아보시오.”

이주열이 자기는 아쉬운 것 하나 없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배짱을 부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딱히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반기성은 결국 숨을 크게 내뱉고 그를 노려보았다.

“뭘 어떻게 해 주길 원하는 거요?”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튀어나오자 이주열은 한쪽 손바닥을 쫙 펼치고 말했다.

“깔끔하게 반반씩 나눕시다.”

“이……!”

순간 쌍욕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눌러 참은 반기성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하지 않소?”

“위험을 부담하는 대가라고 생각하시오. 내가 그 돈 받아서 그냥 다 꿀꺽하는 줄 아시나 본데, 요즘 들어 더 엄해진 단속을 피하기 위해 포졸들 손에 쥐여 주고 여기저기 기름칠 좀 하다 보면 얼마 남는 것도 없소이다.”

이주열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랫사람을 가르치듯이 거들먹거리며 콧바람을 뀌었다.

“하지만…….”

“어허, 이거 왜 이러시나?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속담도 못 들어 보셨소?”

반기성은 손톱 끝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선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굴욕을 씹어 삼켰다.

“좋소이다, 반반. 그럼 아무 문제없겠지.”

거의 폭발 직전인 반기성을 앞에 두고 이주열은 얼굴 가득 득의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손뼉을 쳤다.

“아무렴! 역시 반 상단주는 얘기가 통하는 사람이라니까. 잘한 결정이시오.”

그러나 반기성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표정 그대로 대꾸했다.

“계획대로 사흘 후, 이 암자에서 다시 만나도록 합시다.”

“그럽시다.”

이주열은 협상이 끝났으니 이제 더 이상 여기엔 볼일이 없다는 듯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난 먼저 가 보겠소이다.”

그렇게 발걸음을 떼려던 이주열은 앉은 자세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는 반기성의 등에다 대고 한마디 덧붙였다.

“참, 반 상단주!”

“……?”

또 무슨 소릴 하려나 하고 마뜩지 않은 표정으로 반기성이 고개를 돌리자 이주열은 한 대 후려치고 싶은 면상으로 얄밉게 이죽거렸다.

“사흘 뒤에 만날 때까지 포도청 놈들한테 붙잡히면 안 되오. 운 나쁘게 걸리더라도 거래는 끝내야지. 하하! 그럼 그때까지 몸조심하시길 빕니다.”

“뭐요!”

“하하하! 농담이오, 농담.”

마지막까지 곱게 떠나는 법이 없는 이주열의 행동에 반기성은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문이 닫히고 좁은 방 안에 혼자 남게 되자 그는 주먹으로 자기 허벅지를 쿵쿵 내려치며 이를 악물었다.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놈 같으니라고!”

이렇게 반기성이 가지고 있는 위조화폐를 처분하기 위해 은밀히 움직이고 있을 때 주작단과 포도청은 독이 바짝 올라 수사망을 좁히고 있었다.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갖가지 물건을 파는 보부상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던 상인들이었다.

값어치 있는 물건과 돈을 항상 휴대하고 다니는 만큼 도적을 만나거나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걸 예방하기 위해 보부상들은 뜻이 맞는 이들끼리 서로 패를 만들어 어울려 다녔다.

많게는 수백 명의 인원을 거느린 큰 패거리에서부터 두셋이 어울려 다니는 무리까지 천차만별이었는데, 도현의 상업 우대 정책에 보부상 숫자와 조직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외지를 돌아다니며 거칠고 험한 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보부상들은 결속력이 강하고 외부인을 배척하는 성향이 강해 속사정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더군다나 괜히 어설프게 건드렸다가 상대편이 눈치라도 채면 낭패였기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상당히 골치 아픈 상황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도현이 주작단을 처음 만들 때 전국적인 탐보망을 구축하기 위해서 보부상 조직을 일부 흡수했던 그 끈이 아직 남아 있었기에 원하는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원래는 국왕이 범죄 수사에까지 관여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사건이 워낙 중한 만큼 단서가 잡히자, 이완 단장과 포도대장 구인후는 곧장 희정당으로 도현을 찾아와 보고를 했다.

“그러니까 번산패라는 보부상 조직이 의심스럽다, 이거지?”

상석에 앉은 도현의 물음에 이완이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최근 번산패에 속한 보부상들의 씀씀이가 커졌고 파는 것에 비해 많은 상품을 구입했는데, 대부분 부금상단에 넘겼다고 합니다.”

“부금상단이라면 위조화폐조직의 수괴가 상단주로 있는 곳이 아닌가?”

“맞사옵니다.”

“흐음.”

손등으로 턱수염을 쓸어내며 낮게 침음성을 흘린 도현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대충 그림이 그려지는군. 보부상을 통해 위조화폐를 풀어 상품을 사들이고, 그걸 가지고 이득을 취해 온 것이군.”

“바로 맞히셨사옵니다.”

“보통 용의주도한 놈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반기성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나?”

“아직 그것까지는 밝혀내지 못했사옵니다. 하지만 중요한 정보를 확보했습니다.”

“그게 뭔가?”

그가 쳐다보자 이완이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번산패의 우두머리인 이주열이라는 자가 소속된 보부상들한테 사흘 뒤까지 모두 모이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보부상들을 집결시키는 건 한 가지 이유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귀를 기울이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도현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새로 찍어 낸 위조화폐를 넘겨받으려고 한다, 이건가?”

“그렇사옵니다.”

예상이 맞다면 이건 위조화폐조직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긴장한 얼굴로 앞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다.

“이번에는 절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돼. 알겠나?”

“옛.”

기합이 바짝 들어간 대답에 그는 만족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정색을 하고는 범인들을 어떻게 잡아들일 건지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위조화폐를 거래하기로 한 날 밤이 됐다.

“나오셨습니까, 접장 어른.”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온 이주열은 자신을 보고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는 사내들을 거만하게 훑어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다들 휘하에 있는 보부상 가운데 가려서 뽑은 자들로 덩치가 크고 싸움에 능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충성심도 높은 자들이었다.

“다들 준비됐나?”

“예.”

힘차게 대답하는 부하들의 모습에 이주열은 흡족한 얼굴을 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럼 가 볼까.”

거드름을 피우며 휘적휘적 걸어가는 이주열 뒤로 십여 명의 사내들이 각자 커다란 등짐을 하나씩 들쳐 메고 따라갔다.

이들의 움직임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은밀히 다 지켜보는 눈이 있었는데, 바로 아침부터 잠복해 감시를 하고 있던 김근행과 주작단 단원들이었다.

“드디어 움직였군.”

“따라가야지요.”

옆에 있던 부하의 말에 김근행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따라붙으라고 해.”

“염려 마십시오.”

잠시 뒤 주작단 내에서 은신과 추격술이 뛰어난 단원 두 명이 이주열 일행의 뒤에 따라붙었고 김근행은 약간의 시간을 두고 멀리서 대기 중이던 포도청 관리들과 함께 움직였다.

어둠이 짙게 깔린 가운데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는 밤길을 타닥타닥 발소리를 내며 지나친 이주열 일행은 저 멀리 불이 훤하게 밝혀진 성문을 앞에서 멈춰 섰다.

“웬 놈들이냐!”

보초를 서고 있던 문지기들이 창을 겨누고 소리쳤다.

“아이고, 나리, 접니다, 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앞으로 나선 이주열은 아는 얼굴을 찾아 눈으로 쭉 훑었다.

“음? 아니, 자네가 이런 늦은 시각에 어인 일인가?”

선임 병사가 이주열을 알아보고 그리 묻자 그는 양손을 싹싹 비비고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나리. 사실은 좀 더 일찍 출발했어야 했는데 짐을 꾸리는 데 시간이 의외로 많이 걸렸지 뭡니까.”

“짐이라고?”

“예. 낼모레면 수원에서 큰 장이 열리는데 그때 내다 팔 물건이지요.”

그러면서 이주열은 사내들이 지고 있는 짐 꾸러미를 가리켰다.

“자네 혼자 팔기에는 양이 많지 않은가?”

“하하, 저 중 반 정도는 아는 친구들한테 부탁받아서 운반하는 것들입니다. 보부상들끼리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돕는 건 나리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사정은 잘 알겠으나, 이미 성문이 닫혔네. 내일 다시 오게나.”

그리 말하며 돌아서는 선임 병사의 소매를 이주열이 붙잡고 늘어졌다.

“에이, 한 번만 좀 봐주십시오. 날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출발하면 제시간을 맞추지 못한단 말입니다.”

“그거야 자네 사정이고.”

“우리 사이에 정말 이러시깁니까? 섭섭합니다그려.”

이주열은 재빨리 주머니에서 준비한 엽전 꾸러미를 꺼내 선임 문지기의 소맷자락에 쑥 집어넣었다.

짤랑거리는 쇳소리와 함께 묵직한 감촉이 느껴지자 헛기침을 하면서 팔짱을 끼는 척, 엽전 꾸러미의 크기를 가늠한 선임 병사는 괜히 애꿎은 수염만 만지작거렸다.

“정말 안 되는데…….”

“나리.”

“쯧, 자네 사정이 너무 딱하니 어쩔 수 없군. 이번 한 번만일세! 알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선임 병사는 아직 창을 들고 서 있는 부하들에게 쪽문을 열라며 턱을 까딱였다.

커다란 성문 아래 부분엔 유사시를 대비한 작은 문이 하나 달려 있기 마련인데, 밤이라 큰 소리를 낼 순 없으니 쪽문으로 이주열 일행을 통과시킬 셈이었다.

“감사합니다, 나리.”

짐 꾸러미를 짊어진 일행들이 서둘러 밖으로 나가는 사이, 이주열은 살살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지켜보는 일반 병사들한테도 엽전을 하나씩 쥐여 줬다.

“나중에 술이라도 한잔 하시지요.”

상관이 보는 앞에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뇌물을 받아도 되나 싶은 부하들이 선임 병사 쪽을 돌아보자, 그는 아무 말 말고 받아 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들이 모두 성문을 통과하고,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자 병사들은 다시 쪽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김근행과 포도청 종사관 양태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종사관 어른.”

이미 그들이 나타날 줄 알았는지, 선임 병사는 놀라는 기색 없이 다만 긴장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놈들은?”

“방금 전 성문을 나갔습니다.”

“꼬리가 붙은 걸 알아차린 기색은 없겠지.”

“예. 전혀 눈치 못 채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요.”

“흠.”

포도청 종사관인 양태상이 김근행을 돌아보고 물었다.

“아직까진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방심하진 말게.”

이미 한 차례 실패한 전적이 있는지라 김근행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문을 열게.”

양태상이 근엄하게 명령하자 병사들은 서둘러 빗장을 풀고 다시 쪽문을 활짝 열었다.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온통 검은 야행복을 입은 주작단 단원과 포도청에서 나온 포졸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두 열로 줄을 지어 날렵하게 문을 통과하고선, 이내 다시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신출귀몰한 그들의 움직임에 어리벙벙하게 서 있던 선임 병사는 양태상이 지나가는 것을 붙잡고 조심스레 말했다.

“종사관 나리, 저희는 이번 일에 대해서 아무런 문책도 안 받는 거겠지요?”

도둑이 제 발 저리듯이 괜히 찔끔해서 묻는 그에게 양태상은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번엔 우리 일에 협조해 줬으니 그냥 넘어가겠지만, 다음번에도 또 이런 식으로 뇌물을 받고 성문을 통과시키는 게 발각될 시에는 규율에 따라 처벌을 받을 걸세. 알겠는가!”

“며, 명심하겠습니다.”

하마터면 치도곤을 맞을 뻔한 선임 병사가 허리를 굽혀 인사한 다음 얼굴을 들어 보니, 이미 두 사람은 사라지고 없었다.

도성을 빠져나온 이주열 일행은 곧장 관도를 따라 이동하다가 수락산으로 들어갔다.

산속이라 쫓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다행히 상대가 횃불을 들고 움직였기에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다.

한참을 더 산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던 이주열 일행은 인시(새벽 3~5시) 무렵 지난번에 왔었던 암자로 들어갔다.

얼마 안 있어 도착한 종사관 양태상은 김근행을 돌아보며 약간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가 접선 장소인 모양입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오.”

밝은 보름달 아래 멀리 보이는 암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김근행이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바로 덮칠까요?”

마음이 조급해진 양태상이 금방이라도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빼 들고 앞으로 달려 나갈 것처럼 몸을 들썩이자 김근행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제지했다.

“반기성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니 조금 더 살펴보고 움직이도록 합시다.”

유통을 맡은 보부상 조직을 일망타진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이번 일을 뒤에서 꾸민 수괴 반기성은 물론이고, 새로 찍어 낸 위조화폐와 제작 틀을 찾아내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이었기에 양태상은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지요.”

한편 암자로 들어간 이주열은 먼저 와 있던 반기성과 불당 앞마당에서 각자 부하들을 뒤에 둔 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물건은 가져왔소?”

건들거리며 이주열이 묻는 말에 반기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

“물론. 그쪽도 약속한 걸 가져왔겠지.”

“후후후. 당연한 거 아니오. 그나저나 표정 좀 푸시오. 이거야 원, 무서워서 어디 말이나 붙이겠소.”

이주열의 너스레에도 반기성은 표정을 풀지 않고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해가 뜨기 전에 거래를 끝내야 되니 물건이나 보여 주시오.”

“그럽시다.”

고개를 돌린 이주열이 한쪽 손을 들어 까딱이자 뒤에 서 있던 사내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와 등에 지고 있던 짐을 내려놨다.

천을 풀고 뚜껑을 열자 반으로 나뉜 상자 안에는 달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진주와 족히 수십 년은 됨 직한 산삼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걸 구하느라 애를 좀 먹었소이다.”

상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상자를 훑어본 반기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심복인 도성구가 부하 네댓 명과 함께 커다란 궤짝 다섯 개를 앞으로 가져왔다.

그 안에 가득 든 금화와 은화를 보자마자 이주열의 눈에서 탐욕스러운 빛이 번뜩였다.

“역시 잘 만드셨구먼.”

하나를 집어 빙글 돌려보면서 꼼꼼히 살펴본 그는 혀를 내두르면서 칭찬 세례를 퍼부었다.

하지만 반기성은 그런 시시콜콜한 잡담 따윈 하기 싫은지 입을 꾹 다물고 이주열이 가져온 상자 속의 진주와 산삼을 감정하는 데만 정신을 쏟았다.

“확실하군.”

그럭저럭 만족한 반기성이 이주열에게 말했다.

“물건을 확인했으니 서로 교환하고 거래를 끝내는 게 어떻소?”

“그럽시다.”

이주열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짜 돈이 든 궤짝을 챙겨 등 뒤로 물렸다.

“이제 뭘 하고 지내실 생각이오?”

“조용해질 때까지 한동안 숨죽이고 살아야지 않겠소?”

“내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 있는 별장을 하나 아는데, 소개시켜 드리오리까.”

“됐소이다.”

이주열같이 비열한 놈에게 은신처를 알려 줬다간 언제 다른 사람에게 폭로할지 몰라 매일 전전긍긍해야 하는 나날이 이어질 게 뻔했다.

매몰차게 거절하는 반기성을 보고 이주열은 사뭇 섭섭하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저런, 그래도 연락할 방도 정도는 있어야 할 것 아니오.”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동안 거래하면서 꽤나 짭짤했는데 한동안 못 보게 된다니 아쉽구려. 그래서 말인데…….”

이주열이 은근히 말끝을 흐리자 반기성은 이놈이 또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눈을 치켜떴다.

“제안할 게 있소.”

“뭐요?”

“이제 얼굴이랑 이름도 다 팔려서 다시 물건을 찍어 내기도 힘들 것 같은데, 기왕 이렇게 된 김에 가지고 있는 제작 틀을 나한테 넘기는 게 어떻겠소?”

“허!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반기성은 크게 헛웃음을 터트리다가 이내 정색을 하고는 단칼에 거절했다.

“싫소이다. 방금 한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하겠소.”

“어허~ 그래도 한번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을 텐데…….”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으니 그만하시오.”

그는 더 이상 말을 섞기도 싫다는 듯 손을 크게 내젓고 돌아서려고 했다.

부하들에게 짐을 챙기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이주열이 반기성을 부르며 붙잡았다.

“반 상단주, 정말 안타깝소이다.”

이주열이 옆으로 손을 슥 내밀고 눈짓을 하자 그의 뒤에 서 있던 사내들이 몰래 숨기고 있던 칼을 빼내 반기성과 부하들을 겨눴다.

“기왕이면 마지막까지 좋게 끝내려고 했건만…….”

그러나 반기성 역시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흥! 역시 네놈이 딴마음을 품고 있었군. 내가 그걸 모를 줄 알았느냐?”

그리고 동시에 반기성 쪽 부하들도 각자 가지고 있던 무기를 꺼내 들었고, 암자 앞마당은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누군가 손 하나 까딱하기만 해도 즉각 칼부림이 일어날 일촉즉발의 상황.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암자 양쪽 수풀에 숨어 있던 주작단 단원과 포졸들이 벼락같이 튀어나왔다.

“모두 꼼짝 마라!”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주열과 반기성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런 썅!”

“멍청한 놈, 꼬리를 달고 오다니!”

어느새 암자를 완전히 포위한 포졸들을 보고 와락 얼굴을 찡그린 이주열은 반기성의 말에 날 선 어투로 쏘아붙었다.

“네 녀석 뒤를 따라온 걸 수도 있잖아.”

“그럼 벌써 덮쳤겠지.”

“젠장.”

그때 창을 겨누고 있는 포졸들 사이에서 융복戎服에 전립을 쓴 양태상이 앞으로 나와 호기롭게 소리를 쳤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순순히 오라를 받아라!”

이주열이 흔들리는 부하들을 다잡으려는 듯이 일부러 더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웃기지 마라!”

그러고는 반기성과 눈빛을 교환한 뒤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쳐라!”

“와아아아!”

부하들도 여기서 포청에 붙잡히면 목이 잘려 저잣거리에 내걸리거나 평생 노역형을 받아 풀려나기 어렵다는 걸 알기에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덤벼들었다.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을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던 김근행과 양태상은 당황하지 않고 수하들을 독려해 상대와 맞서 싸웠다.

“제압해라!”

“이야압!”

채챙! 챙! 챙!

“크억.”

“윽.”

순식간에 뒤엉킨 양쪽은 서로 병장기를 휘둘러 댔고 비명과 시뻘건 피 보라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기세가 사나웠지만 포도청에서도 정예만 골라서 뽑아 왔고 무예의 고수인 주작단 단원들이 요소요소에서 공격의 맥을 끊었기에 좀처럼 포위망을 뚫지 못했다.

무엇보다 상대보다 숫자가 많았기에 싸움의 주도권은 금방 이쪽으로 넘어왔다.

퍽!

“컥.”

신음을 토해 내며 부하 한 명이 창대에 어깨를 맞고 바닥에 쓰러지는 걸 본 반기성은 눈썹을 찡그렸다.

“상단주님,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어서 피하셔야겠습니다.”

“끄으응.”

상자에 든 진주와 산삼이 너무나도 아까웠지만 품속에 있는 제작 틀만 있으면 언제든 다시 재기를 할 수 있었기에 반기성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길을 열게.”

“옛.”

대답을 한 도성구는 반기성을 이끌고 대나무 숲과 바로 연결돼 도망치기 좋은 불당 왼편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처음부터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계속 반기성을 주시하고 있던 김근행이 수하 두 명과 함께 재빨리 앞을 가로막았다.

“어딜 달아나려고!”

“비켜라!”

도성구가 검을 크게 휘둘렀지만 김근행은 가볍게 쳐 냈다.

카캉!

그러고는 상대의 빈틈을 노려 옆구리와 어깨에 검을 찔러 넣었다.

“끄아악!”

생살이 찢기는 극심한 고통에 도성구는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일부러 손 속에 사정을 둬 당장 죽을 정도의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싸우기는 어려웠다.

“이런!”

믿었던 도성구가 맥없이 당하자 반기성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 상대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김근행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포기하지.”

김근행뿐만 아니라 주작단 단원 두 명이 양옆에서 도주로를 차단하고 있자 반기성은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검은 들고 있지만 무예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데다 포위까지 당해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안 보였다.

하지만 이대로 맥없이 붙잡힐 수는 없었던 반기성은 가지고 있는 검을 꽉 움켜쥐며 덤벼들었다.

“죽어!”

자못 기세는 사나웠지만 김근행이 보기에는 허점투성이였다. 슬쩍 몸을 옆으로 틀어서 상대의 공격을 피한 김근행은 검을 든 반기성의 손을 세게 내려쳤다.

퍽.

쨍그랑.

강한 충격에 반기성은 가지고 있던 무기를 놓쳐 버렸고, 김근행은 지체 없이 상대의 목에 검을 들이댔다.

“헉.”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주춤하던 반기성은 이내 더 이상 반항할 기력을 잃은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체포해.”

담담한 목소리로 김근행이 명령하자 옆에 있던 주작단 단원들이 재빨리 달려들어 무릎을 꿇리고 반기성을 오랏줄로 꽁꽁 묶었다.

검을 수습한 김근행이 주위를 둘러보자 다른 곳도 상황이 거의 끝나 있었다.

대부분의 죄인들이 피를 흘리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거나 아니면 무기를 잃고 반기성처럼 오랏줄에 묶여 있었다.

또 한 명의 핵심 용의자인 이주열 또한 사정이 다르지 않았는데,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진주와 산삼이 든 상자를 가지고 달아나려다가 양태상한테 붙잡혀 늘씬 두들겨 맞고 있었다.

반기성 앞으로 다가간 김근행은 한쪽 손을 뻗어 상대의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제작 틀은 어디 있지?”

그러자 반기성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건 없소.”

“금방 들통 날 거짓말을 하는군.”

살짝 미간을 찌푸린 김근행은 직접 반기성의 몸을 뒤졌다.

반기성이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무의미한 저항을 하자 좌우에 있던 주작단 단원들이 어깨를 꽉 붙잡았다.

“이거 놔!”

“가만히 있어.”

“크윽.”

품속을 뒤지던 김근행은 아니나 다를까 하얀 광목천에 정성스럽게 싸인 화폐 원판 네 개를 찾아냈다.

각기 금화와 은화를 찍어 내는 데 필요한 두 짝의 틀이었는데, 주조소에서 유출된 그 물건이었다.

진품인 걸 확인하고 작게 끄덕인 김근행은 틀을 다시 광목천으로 싸서 챙기고는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반기성을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이제 그동안 저지른 죗값을 받아야지.”

“…….”

“끌고 가.”

“옛.”

주작단 단원들에 의해 강제로 일으켜 세워진 반기성은 모든 걸 체념한 듯 힘없이 끌려갔다.

어느새 해가 떠서 주위가 환하게 밝아져 있는 가운데 죄인들을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모두 체포한 김근행과 양태상은 증거품까지 다 챙겨 한양으로 돌아왔다.

“전하, 주작단 단장과 포도대장께서 오셨사옵니다.”

“들라 하라.”

아직 이른 아침이었지만 체포 작전의 결과를 보고받기 위해 밤을 꼬박 새운 도현은 얼른 보고 있던 서책을 덮으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온 이완 단장과 포도대장 구인후가 예를 갖추고 자리에 앉자마자 도현이 다그치듯 물었다.

“어찌 됐나?”

그러자 포도대장 구인후가 머리를 들고는 약간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인들을 모두 일망타진했사옵니다.”

“그래? 잘됐군. 정말 잘했어!”

크게 기꺼운 표정으로 도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우두머리인 반기성과 이주열은 어떻게 됐나? 물론 붙잡았겠지?”

“예. 지금 포도청 옥사에 가둬 놓고 심문 중입니다.”

“제작 틀은?”

“전부 회수해서 가져왔사옵니다.”

구인후는 보자기에 싼 물건을 앞으로 내려놓았다.

칠현이 그것을 받아 들고 서탁 위에 올려 보자기를 푸니, 그 안에서 세밀하게 조각된 제작 틀이 모습을 드러냈다.

총 네 개를 차례대로 늘어놓고 세밀하게 조각된 표면을 살펴보던 도현은 용케 이런 걸 만들었다는 듯 혀를 찼다.

“이것 때문에 그 고생을 했단 말이지.”

중얼거린 목소리를 듣고 구인후가 말했다.

“이미 만들어진 위조화폐는 물론이고 제작 틀까지 완벽하게 회수했으니 이제 더 이상 이것 때문에 골치를 썩일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그래야지.”

머리를 끄덕인 도현은 이내 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또다시 위조화폐를 만들어 이득을 취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이번에 잡힌 죄인들의 죄를 소상히 밝힌 다음 모두 극형에 처하도록 하게.”

“예.”

위조화폐 유통은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일인 만큼 죄를 저지르면 이렇게 된다는 일벌백계의 교훈을 줄 필요가 있었기에 두 사람은 아무런 반대를 하지 않았다.

나중에 벌어지는 일이지만 도현의 지시에 따라 주범인 반기성 등은 물론이고 단순 가담자들까지 본보기로 모두 참수형을 받아 성문 앞에 일주일간 효수가 됐다.

“아무튼 그동안 수고가 많았네.”

도현의 말에 두 사람은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니옵니다. 빨리 일을 해결하지 못하고 전하께 심려를 끼쳐 그저 죄스러울 뿐이옵니다.”

“이번에 드러났다시피 어둠 속에 숨어 움직이는 놈들은 잡기가 쉽지 않았을 게야. 허나 번번이 뒷북만 치고 다닌 점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니,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될 걸세.”

최악의 경우 사직까지 생각했었던 두 사람은 도현이 실책을 덮어 주며 그냥 넘어가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조아렸다.

“명심하겠사옵니다.”

“아직 남아 있는 일이 많을 테니 이만 물러들 가게.”

“예.”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로 희정당을 나가자 도현은 서탁에 놓인 제작 틀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옆에 시립해 있는 칠현한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병기창으로 갈 것이니 이걸 들고 따라오너라.”

“……예, 전하.”

갑자기 남한산성에 위치한 병기창은 왜 가겠다는 건지 의아했지만 국왕의 지시였기에 칠현은 얼른 제작 틀을 다시 보자기에 쌌다.

원래 국왕이 행차를 하면 수많은 수행원이 따라붙기 마련이었지만 도현은 간단하게 호위를 할 위사 서른 명과 칠현만 데리고 대궐을 나섰다.

말을 탄 도현과 수행원들은 잘 정비된 도로를 달려 금방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그러자 도현의 방문을 보고받은 근위대 이 연대장과 병기장 박호가 허둥지둥 뛰어나왔다.

“미리 마중을 나갔어야 되는데 죄송하옵니다, 전하.”

급히 달려와 허리를 숙이는 이 연대장과 병기장을 보고 도현은 괜찮다는 듯이 한쪽 팔을 내저었다.

“짐이 연락도 없이 온 것이니 신경 쓰지 말게. 그것보다, 병기장.”

“예. 말씀하시옵소서, 전하.”

“용광로를 좀 봤으면 하는데, 가능하겠나?”

“물론이옵니다.”

“그럼 앞장서게.”

“네.”

길을 안내하는 박호를 따라 한참을 걸어가자 삼 층 전각 높이의 커다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병기창에서 생산하는 각종 무기를 만드는 주재료인 철을 뽑아내는 용광로가 있는 곳이었다.

철광석을 녹이려면 엄청난 화력이 필요했기에 건물 밖인데도 공기가 후끈거리고 저절로 땀이 날 정도였다.

열기를 식히기 위해선지 활짝 열려 있는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원통 모양의 커다란 용광로와 그 밑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뜨거운 불꽃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으로 범벅이 될 정도였지만 화상을 막기 위해 두꺼운 솜옷을 입고 얼굴에는 두건을 두른 장인들이 힘들게 일하고 있는 걸 본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고생이 많군.”

“병사들이 필요한 무기를 제때 보급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 일도 좋지만 너무 무리를 해서 장인들의 몸이 축나면 안 되니 관리에 신경을 쓰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상선.”

“네.”

“힘들게 일하는 병기창 장인들한테 이번에 진상품으로 들어온 수박을 푸짐하게 하사해 주게.”

“분부대로 하겠사옵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병기장 박호가 황공하다는 표정으로 얼른 머리를 숙였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고생하는 장인들한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됐으면 좋겠군.”

“전하의 마음에 장인들이 크게 감복할 것이옵니다.”

박호가 그렇게 감사 인사를 하는데, 도현이 불쑥 손가락으로 용광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용광로 밑에 불을 때는 화덕은 온도가 어느 정도쯤 되는가?”

“수천 도는 족히 될 것입니다.”

직접 온도를 잴 수 있는 기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림짐작만으로도 단 한 번도 불을 꺼트리는 일 없이 저렇게 불을 지펴 대고 있으니, 무엇이든 들어가기만 하면 뼈도 추스르지도 못할 거란 건 확실했다.

“그럼 철 정도는 간단히 녹일 수 있겠군.”

“그렇사옵니다.”

도현은 그럼 됐다는 듯 칠현에게 눈짓했다.

“가져온 그걸 저 안에 던져 넣어 버려라.”

무엇을 말하는지 금방 눈치챈 칠현은 그제야 도현이 일부러 남한산성까지 힘든 발걸음을 한 이유를 깨닫고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하기야 또다시 외부로 유출될 걱정 없이 세상에서 없애 버리기엔 두말할 것 없는 좋은 방법 아닌가.

칠현이 보자기에 싼 물건을 꺼내자 병기장 박호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힐끔 훔쳐보다가 이내 시선을 내리깔았다.

뭔지 몰라도 여기까지 일부러 들고 올 정도면 필시 중한 물건일 터.

도현이 먼저 말해 주지 않는 이상 일개 병기장인 자신이 굳이 알아야 할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용광로 쪽으로 한 걸음 내디디니, 눈을 뜨기도 힘들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피부에 확 와 닿았다.

간간이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네 명이서 열심히 화덕 안에 석탄을 집어넣던 인부들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칠현을 쳐다보았다.

이런 곳에 있을 만한 차림새가 아닌데 어쩐 일이냐는 뜻을 담은 눈빛으로 칠현을 바라보던 그는 뒤에 떨어져 있는 박호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묵인하자 경계를 풀고 어깨를 으쓱였다.

입을 열면 목구멍이 뜨거운 바람에 타 버릴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칠현은 손짓 발짓을 동원해 그에게 이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화덕에 녹여 버리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어설픈 몸짓에도 불구하고 용케 알아들은 인부가 손에 들고 있던 길쭉한 모양의 삽을 내밀고 그 위에 올려놓으라며 손끝을 까딱였다.

그러고 나서 인부는 솜씨 좋게 삽을 기울여 보자기째 이글이글 화염이 치솟고 있는 화덕 안에 던져 넣었다.

화르륵!

겉을 감싸고 있던 보자기가 순식간에 종이처럼 타올라 재가 되어 사라지고, 이내 그 안에 포개져 있던 제작 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눈 한 번 깜빡하는 동안 시뻘겋게 달아오른 쇳덩이들은 차츰 엿가락처럼 조금씩 녹아내리더니, 금방 쇳물로 변해 한 줌의 액체가 되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도현은 무거운 표정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그토록 골치를 썩이던 놈이 이제야 사라지는구나.”

그렇게 도현이 직접 제작 틀을 없애 버리고 재무부가 이미 저잣거리에 퍼진 가짜 돈 회수에 최선을 다면서 한동안 조선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위조화폐 사건이 일단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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