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적 (72/104)

해적

이제 제법 차가워진 날씨로 인한 일교차 때문인지 추수가 끝난 드넓은 벌판에는 자욱한 안개가 끼었다.

하지만 동녘 하늘에서 서서히 해가 떠오르는 것과 함께 안개는 금방 옅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벌판에는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많은 천막이 처져 있었고, 그중에 가장 크고 화려한 천막 입구를 젖히며 갑옷을 차려입은 도현이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국방대신 임경업을 비롯해 근위군단장 박영식과 수많은 장수들이 도열해 있다가 일제히 허리를 숙이면서 군례를 올렸다.

“충!”

“좋은 아침이군. 훈련 준비는 다 끝났나?”

“예. 다들 전하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갑옷을 입고 야지로 나와 약간 들떴는지 임경업의 우렁찬 대답에 도현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미적거릴 것 없이 바로 시작하도록 하지. 국방대신, 안 봐주고 제대로 할 테니, 각오 단단히 해야 될 게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하하! 그러면 이번 훈련에서 지는 사람이 나중에 벌주 석 잔을 마시는 건 어떻소?”

“좋사옵니다.”

“이거 의욕이 불끈불끈 솟구치는군.”

대항군인 청군 지휘를 맡은 임경업이 장수들과 함께 인사를 하고, 자기 진형으로 가자 도현은 칠현이 가져온 눈처럼 하얀 말 위에 올라타서는 널찍한 벌판에 도열해 있는 병사들을 사열했다.

모여 있는 근위군단 병사 일만 명은 왕국의 최정예들답게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각이 딱 잡혀 있었고 한 자루의 잘 벼린 검처럼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냈다.

병사들 앞에 말을 멈추고 서서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인 도현은 이내 정색을 하고는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군들, 오늘은 그동안 훈련을 통해 갈고닦은 실력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보여 주는 날이다. 왜 제군들이 자랑스러운 황금 삼족오 깃발을 들고 다니는지 그 이유를 확실히 알려 주도록 해라.”

“우와아아!”

도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근위대 병사들은 각자 가지고 있던 무기를 위로 치켜들며 사방이 떠나가라 커다란 함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도현도 주먹을 쥔 손을 위로 들어 올리며 크게 외쳤다.

“승리는 우리 것이다. 이기자!”

“이기자!”

그렇게 전의를 한껏 끌어 올린 도현은 근위군단장 박영식과 휘하 장수들을 돌아보며 힘차게 말했다.

“전투대형을 갖추도록!”

“옛.”

말 위에서 군례를 취한 장수들은 즉시 자기가 맡은 부대로 달려갔고 도현은 박영식과 함께 진영 가운데 이십 자(6m) 높이로 세워 놓은 전망대 위로 올라갔다.

전망대에 선 도현이 주위를 둘러보자 사방이 훤히 다 보였다.

“청군이 나타났습니다.”

“어디?”

박영식 장군이 한쪽 팔을 들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일단의 병력이 언덕을 넘어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숫자가 족히 일만은 넘을 것 같았다.

“삼 군단도 기세가 만만치 않군.”

“그래도 저희 근위군단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자신만만한 박영식 장군의 말에 도현은 씨익 웃으며 지시를 내렸다.

“당연히 그래야지. 승부를 걸고 내기까지 했는데 지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닐세.”

“벌주는 국방대신께서 마시게 될 테니 아무 염려 하지 마시옵소서.”

“그럼 어디 시작을 해 볼까. 각 부대는 갑호 태세를 갖추고 포병대와 기병대는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대기시키게.”

“예.”

뒤편에 서 있던 신호수가 깃발을 들어 이리저리 흔들자 신형 남-일식 소총으로 무장한 보병들이 일자 대형을 갖추며 앞으로 나왔다.

그사이 상대편도 대포 사정거리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멈추고는 재빨리 이쪽과 비슷한 전투대형을 만들었다.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잠시 뒤 먼저 움직인 쪽은 임경업이 지휘하는 청군이었다.

꽝! 꽝! 꽝!

슈우우웅! 쿠쿵!

청군 화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했는데 훈련이라 직접 이쪽을 겨냥하지는 않고 대형 앞에 떨어졌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날아온 포탄이 땅에 떨어져 터지는 충격이 어찌나 큰지 전망대 위에 있는 도현한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역시 화끈하게 시작을 하는군.”

“우리도 대응사격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몸이 다는지 박영식 장군이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자 도현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청군이 감히 앞으로 나올 생각조차 못하게 포탄을 날려 줘.”

“옛.”

명령을 내리고 얼마 안 있어 보병 대열 뒤쪽에 방열하고 있던 포병대가 대응 사격에 나섰다.

“발사!”

꽝! 슈우우웅! 꽈꽝!

화포를 쏜 포병들은 재빨리 포구를 청소한 뒤 새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하고는 다시 포격을 가했다.

얼마나 훈련을 많이 했는지 다섯 명이 한 조로 이루어진 포수들은 마치 한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쉬지 않고 화포를 쏴 댔다.

매년 정기적으로 하던 훈련이었지만 이제 같은 수석총을 보유하게 된 청군과의 싸움을 염두에 두고 그 대응 방법을 찾기 위해 평소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해 아까운 화약을 마구 써 가며 실전처럼 대결을 펼쳤다.

그렇게 한동안 서로 격렬하게 포격을 교환한 양쪽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사격을 딱 멈췄다.

실제 전투였다면 계속해서 포격을 가해 적군의 전력을 소모시켰겠지만 훈련이었기에 이쯤에서 중단하고 보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청군 보병이 전진해 옵니다.”

상대편 진형을 살피던 도현은 한쪽 눈에 대고 있던 망원경을 아래로 내리며 입을 열었다.

“아군도 보병을 내보내.”

명령을 들은 신호수가 깃발을 좌우로 크게 흔들자 대기하고 있던 보병들이 대열을 맞춰 전진했다.

“앞으로 갓!”

척척척!

이 열로 길게 늘어선 보병들이 군홧발 소리를 울리며 나아가는 모습은 마치 거대한 벽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보군 일 대가 전진하고 있습니다.”

“포병대는 아군이 적과 맞붙기 전에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히라고 해!”

“네.”

지시를 받은 포수들은 실제 화포를 쏘지는 않았지만 장전과 발사를 하는 것처럼 동작을 반복했다.

곳곳에 배치된 판정관들이 그런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기록해 훈련에 끝난 뒤 승패 결정에 반영했다.

실제로 몇몇 판정관들은 말을 타고 이리저리 전장을 돌아다니면서 상대편이 쏜 포격 횟수에 따라 양군 병사들한테 전사와 부상 판정을 내리고는 한쪽으로 빠지도록 했다.

그사이 천천히 앞으로 나온 양군 보병들은 오십 보쯤 거리를 두고는 전장 한가운데 마주 보고 멈춰 섰다.

비록 실전은 아니었지만 상대를 바로 눈앞에 두고 서 있자 양군 병사들은 심장이 세차게 뛰며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때 군관의 외침이 병사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거총!”

처처처척!

“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던 소총을 들어 올려 정면에 보이는 적을 겨냥한 병사들은 구령에 따라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탕! 탕! 탕! 탕!

훈련이라 총알이 발사되지는 않았지만 시큼한 냄새와 대열을 뒤덮은 뿌연 화약 연기는 마치 진짜 전장에 나와 있는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재장전!”

철컥. 철컥.

화약이 든 종이포와 총알을 꺼낸 병사들은 신속하게 재장전을 한 뒤 이내 다시 상대를 겨냥하고 소총을 발사했다.

병사들은 장전과 발사를 계속 반복했고 시간이 갈수록 판정관에 의해 전사와 부상 판정을 받고 이탈하는 인원이 늘어났다.

“전사! 중상.”

“젠장. 재수 없게.”

전사를 뜻하는 붉은색 띠를 받은 병사가 투덜거리자 판정관이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훈련에 방해되니까 어서 옆으로 빠져!”

“예.”

그렇게 병사들이 치열한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양측 지휘부는 서로 상대편의 움직임을 살피며 부산하게 명령을 내렸다.

“백군 기마대는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나?”

임경업 장군의 물음에 휘하 장수 한 명이 얼른 대답했다.

“네.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흐음.”

도현과 마찬가지로 높다란 전망대 위에 올라가 전장을 살피던 임경업 장군은 뭔가 결심을 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좌군과 우군을 출진시켜 백군을 압박하고 기마대는 틈이 생기면 곧장 돌격해 적 본진을 쓸어버릴 태세를 갖춰라!”

“강공强攻입니까?”

흥분한 듯 휘하 장수가 묻는 말에 임경업 장군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맞아. 전투는 먼저 승기를 잡는 쪽이 이기는 법이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예비대는 밀리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바로 투입할 수 있도록 대기시키고 포병대는 정면에 있는 적은 집중 공격해라!”

“예.”

명장답게 임경업 장군은 상대를 힘으로 밀어붙이면서도 예비 전력을 남겨 둬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전장 좌우측에 청군이 새로 보병대를 투입했습니다.”

박영식 장군의 다급한 외침에 도현은 약간의 동요도 없이 침착한 얼굴로 눈을 번뜩였다.

“벌써 승부를 걸어오는군.”

“빨리 병력을 내보내지 않으면 전투 중인 일 대가 청군에 의해 고립되고 말 겁니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기마대를 출격시켜 좌측을 무너뜨려.”

“옛.”

도현의 명령에 본진에서 대기 중이던 기마대가 앞으로 나오면서 청군의 공격에 맞대응을 했다.

“기마대 돌격!”

두두두두!

기마대 지휘를 맡은 흑치영의 외침에 기병 이천 명이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좌측으로 다가오는 청군 보병대를 향해 돌격했다.

“이랴!”

“하! 하!”

기병 이천이 노도와 같이 밀려오자 청군 지휘관은 와락 얼굴을 찡그렸다.

“젠장! 왜 하필 이쪽이야? 부대 거총!”

그러자 청군 보병대는 황급히 걸음을 멈추고 사격 대형을 갖췄다.

상당히 빠른 대응이었는데 밀집도가 약해 결국 돌파를 허용하겠지만 집중사격에 기병대도 괴멸적인 피해를 입는 것이 불가피했다.

바로 그 순간 맹렬히 돌격해 오던 기마대가 옆으로 방향을 틀어 버렸다.

그러더니 중앙에서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청군 보병대를 덮쳤다.

“뭐, 뭐야?”

“이야호!”

좌익과 달리 무방비 상태로 측면을 드러내고 있던 청군 보병대는 날카롭게 파고드는 기마대의 돌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전사 판정을 받는 청군 병사들이 늘어났고 설상가상 총격전을 벌이던 백군 보병대까지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자 중앙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전망대에 서서 여유로운 얼굴로 지휘를 하던 임경업 장군은 급변한 정황에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이런!”

“중앙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나도 알고 있네.”

퉁명스러운 대꾸에 휘하 장수가 어깨를 움츠렸다.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찬 그는 망루 난간을 으스러뜨릴 듯이 움켜쥐고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백군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던 임경업 장군은 마침내 손을 뻗어 전방을 가리켰다.

“지금 바로 기마대를 출진시켜.”

“예?”

“못 들었나! 기마대가 상대편의 예봉을 꺾는 사이 예비대를 내보내 전열을 유지시키란 말이다.”

“알겠습니다.”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휘하 장수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것을 귓등으로 들으며 임경업 장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전하께 크게 한 방 먹었군.”

전장의 상황을 넓게 볼 줄 알고 상대편의 빈틈을 찌르는 천부적인 도현의 감각은 그야말로 혀를 내두를 정도다.

하지만 그 역시 장군이란 직책을 거저 얻은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 줄 때였다.

기마대가 말발굽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뛰쳐나갔고 예비대로 빼놓은 보병대가 그 뒤를 따랐다.

아직 좌우익이 남아 있었지만 이대로 중앙이 뚫려 버리면 전열 전체가 무너져 패배로 이어질 수 있었기에 임경업 장군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때부터 전장의 주도권은 도현한테 넘어갔다.

망원경으로 청군의 대응을 확인한 도현은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포병대, 아군 중앙에서 일백 보. 집중사격을 가해라!”

그러자 재빨리 사격 위치를 조정한 포병대는 지휘관의 구령에 따라 집중 포격을 시작했다.

“발사!”

꽝! 꽝! 꽝!

슈우우웅! 쿠쿠쿵! 쿠쿵! 쿵!

이히히힝.

상대편이 밀고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달려오던 청군 기마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지는 포격 세례에 피해가 속출했다.

물론 실제 포탄이 발사되지 않고 화약만 터트렸기에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진짜 전장이었다면 청군 기마대는 끔찍한 지옥을 맞봐야 했다.

기마대의 고난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보병대 거총. 쏴!”

눈에 핏발이 선 지휘관의 외침에 어느새 삼 단 사격 대형을 갖추고 있던 백군 보병들이 일제히 소총을 발사했다.

타타탕! 타탕! 탕! 탕!

뿌연 화약 연기에 가려 상대가 미리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청군 기마대는 말 머리를 돌릴 틈도 없이 그대로 집중사격에 노출됐다.

이미 포격을 받아 한차례 타격을 입은 기마대는 삼 열로 늘어서서 쉬지 않고 쏴 대는 총탄 세례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있지 않아서 판정관이 청군 기마대에 전멸 판정을 내렸다.

한편 청군 기마대가 상대하려고 했던 백군 기마대는 중앙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전장을 크게 우회해서 바로 상대편 본진을 노렸다.

두두두두.

“마음껏 달려라. 돌격!”

“이랴!”

기세가 오른 기마대는 언월도를 든 흑치영을 선두로 뿌연 먼지 구름을 피워 올리면서 벌판을 가로질러 무섭게 달려들었다.

제일 먼저 들이닥친 곳은 본진 앞에 나와 있던 포병대였다.

“헉!”

“피, 피해.”

“히익.”

별다른 자위용 무기가 없던 포수들은 허겁지겁 사방으로 흩어져 돌격해 오는 기마대를 피하기에 바빴다.

예비대가 있었다면 바로 내보내 기마대의 돌격을 어떻게든 저지했겠지만, 무너진 중앙을 틀어막기 위해 이미 써 버린 상태라 본진에 있던 임경업 장군은 그저 허탈한 얼굴로 포병대가 전멸당하는 걸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포병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기마대는 곧장 청군 본진까지 돌격해 들어갔다.

흑치영이 보란 듯 애병인 언월도를 치켜들며 전망대 옆을 지나가자 임경업 장군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힘없이 말했다.

“부관.”

“예.”

“백기를 올리게.”

“아직 남은 병력이 있습니다, 장군.”

뒤편에 서 있던 휘하 장수가 깜짝 놀라 만류하자 임경업 장군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승패는 판가름이 났어.”

“하지만…….”

못내 미련이 남는 듯한 표정을 짓는 휘하 장수를 보며 임경업 장군은 씁쓸한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기마대에 이어서 포병까지 작살이 났고 이렇게 본진마저 유린을 당했는데 뭘 더 버틸 수 있겠나? 이게 실전이었다면 자네와 난 이미 죽은 목숨일 걸세.”

맞는 말이었기에 휘하 장수가 아무런 반박을 못 하고 입을 꾹 다물자 임경업 장군이 부관에게 손짓을 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전망대에 백기가 올려졌다.

“전하, 저길 보십시오. 청군이 백기를 내걸었습니다.”

“어디.”

망원경을 들어 바람에 나부끼는 백기를 확인한 도현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기뻐했다.

“하하하. 정말이군.”

“승리를 감축드리옵니다.”

박영식을 비롯해 망루에 있던 장수들이 머리를 숙이며 승리를 축하해 주자 도현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 제장들이 옆에서 성심을 다해 보필해 준 덕분이네. 상선.”

“말씀하시옵소서, 전하.”

“오늘 하루 훈련을 하느라 고생한 병사들에게 술과 고기를 넉넉히 내리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도현의 지시에 휘하 장수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병사들이 기뻐할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군.”

이긴 것도 기분이 좋았지만 무엇보다 훈련이 큰 사고 없이 무사히 끝난 것에 도현은 안도를 하고는 두 손으로 난간을 붙잡고 서서 전장을 내려다봤다.

도현이 술과 고기를 하사했다는 이야기에 환호성을 내지른 병사들은 서둘러 주위를 정리했다.

그러고는 낮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벌판에 모닥불을 피우고는 청군과 백군 구별 없이 한데 어울려 술을 마시며 훈련의 피로를 풀었다.

장수들도 수십 명이 들어가도 넉넉할 정도로 큰 지휘 막사에 따로 잔칫상을 차려 놓고 술을 마셨다.

“자! 오늘 훈련을 무사히 끝낸 걸 축하하며 건배를 하세.”

“건배!”

도현의 건배 제의에 잔칫상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앉아 있던 장수들이 각자 자신의 잔을 들어 올렸다.

“크아. 좋군.”

호기롭게 술을 다 들이켠 도현이 손으로 입 주위를 훔치며 잔을 내려놓자 오른편에 있던 임경업 장군이 술병을 들고 다가왔다.

“신이 잔을 채워 드려도 되겠사옵니까?”

“하하! 그 전에 먼저 해결해야 되는 게 있지 않소?”

“무슨 말씀이신지…….”

도현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임경업 장군의 모습이 우스운지 호기롭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 훈련에서 진 사람이 벌주 석 잔을 마시기로 했지 않소.”

그리 말하며 도현은 임경업 장군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들었다.

“자, 내가 따라 줄 테니 받으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임경업 장군은 얼른 두 손으로 공손히 술잔을 들고 연거푸 석 잔을 깔끔하게 비웠다.

“허허! 역시 대단하십니다.”

“나이가 드셨지만 왕년에 백두산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았다던 호방한 기세가 아직 살아 있으십니다.”

사방에서 박수 세례가 쏟아지며 흥이 오르자 임경업 장군은 살짝 붉어진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이젠 진짜 제가 드리는 술을 받으셔야 합니다, 전하.”

“좋소. 그럼 어디 장군이 주는 술은 얼마나 맛있을지 내 기대해 보도록 하지.”

도현은 웃는 낯으로 슬쩍 농을 던지곤 달콤하게 혀에 착 감기는 술맛을 음미했다.

그렇게 몇 순배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을 마신 도현은 다시 임경업 장군의 잔을 채워 주면서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번 훈련을 직접 지휘해 본 소감이 어떻소?”

그러자 술잔을 상에 가만히 내려놓고 자세를 바로 한 임경업 장군은 차분하게 대답을 했다.

“수석총과 화포 같은 강력한 위력을 내는 화약 무기의 발달로 기마대의 효용성이 많이 떨어졌다고 생각했지만 전하처럼 어떤 전술을 쓰느냐에 따라 여전히 위력적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허나…….”

잠시 말을 끊은 임경업 장군은 도현의 안색을 살피고는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그런 걸 다 떠나서 나중에 판정관들의 결과 보고가 나오면 알겠지만 오늘처럼 같은 수석총을 쓰는 상대와 만나 전투를 벌인다면 승리를 하더라도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된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흐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도현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에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말없이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사실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백군도 총병력에서 사 할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특히 초반에 청군 보병대와 마주 보고 총격전을 벌인 보군 일 대와 적진으로 돌격한 기마대의 손실이 컸다.

이건 아군에 비해 몇 배나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있는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었다.

“경의 지적이 맞네. 하지만 이제 적도 수석총을 보유하게 된 이상 우리 군이 극복해야 될 과제이기도 하지.”

도현의 말에 임경업 장군뿐만 어느새 잡담을 멈추고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던 장수들도 얼굴을 굳히며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자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임경업 장군이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그게 뭔가?”

“아무리 잘 훈련된 총병 부대를 보유하고 있어도 화망을 구성해 집중 운영하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기마대의 밥이 될 수 있다는 걸 말입니다.”

오늘 훈련에서 자신이 패배를 당한 이유를 정확히 짚어서 말하자 도현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결국 중요한 건 가진 전력의 장단점을 파악해 얼마나 잘 운용할 수 있느냐 하는 거지.”

시선을 들어 좌중에 앉아 있는 장수들을 훑어본 도현은 짐짓 힘이 가득 들어간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제장들은 오늘 실시한 훈련의 교훈을 잊지 말고 휘하에 있는 각 병종의 특징을 알고 적재적소에 쓸 수 있어야 될 것이야.”

“명심하겠사옵니다.”

머리를 숙이며 장수들이 막사가 떠나가라 크게 대답하자 도현은 정색한 표정을 살짝 풀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골치 아픈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다시 연회를 즐기도록 하지. 자! 모두 다시 잔을 채우게.”

“예.”

방금 전까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눠서 그런지 금방 분위기가 달아오르지는 않았지만, 도현이 나서서 휘하 장수들에게 직접 치하의 말과 함께 술을 한 잔씩 따라 주자 다시 왁자지껄하며 흥겹게 연회를 즐겼다.

이렇게 조선군은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총참모부에서 분석하며 수석총으로 무장한 청군과 벌일 전투에 대비했다.

북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어느덧 계절은 겨울로 들어섰다.

밤새 눈이 내려 대궐이 온통 순백색으로 변한 가운데 도현은 대전에서 신하들한테 국정 보고를 받고 있었다.

“올해 조세 수입은 금화 천이백만 냥으로 최종 집계됐사옵니다.”

“호오. 작년보다 더 늘어났구먼.”

한 해 동안 좋은 성과를 올린 재무대신 김육은 어깨를 펴며 당당하게 대답을 했다.

“예. 잡세 세목 상당수가 폐지돼 우려가 있었지만 상업 활성화로 관련 세수가 늘고 하삼도 지방에서 백성들한테 불하해 준 토지의 면세 혜택이 끝나 세금을 징수할 수 있어 수입이 늘어났사옵니다.”

“그렇군.”

재무대신 김육이 언급한 땅은 집권 초기 반란과 토지 개혁을 통해 확보했다가 백성들한테 나눠 준 농경지를 말했다.

오랜 착취와 가난으로 경제력이 없는 백성들을 위해서 일정 기간 세금과 땅값을 유예해 줬었는데 그걸 올해부터 받게 되면서 재정이 한결 더 좋아졌다.

“순차적으로 북해도와 봉황도에서 불하해 준 토지도 세금을 거둘 수 있어 재정 여건은 더 나아질 것이옵니다.”

“그거 참 반가운 소식이군, 수고가 많았네.”

“아니옵니다.”

살짝 머리를 숙이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지만 양쪽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가는 것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시선을 옆으로 돌린 도현은 농산대신 진대석을 보며 물었다.

“올해 작황은 어떤가?”

그러자 진대석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오며 대답을 했다.

“수확을 앞두고 남쪽 지방에 태풍이 불어 피해가 조금 있었지만 그래도 풍년이었사옵니다. 특히 북해도와 봉황도에서는 작년보다 세 배나 많은 농작물이 생산됐습니다.”

“경작지를 더 늘린다고 하더니 그게 제대로 된 모양이군.”

“예. 군부의 도움이 컸습니다.”

진대석의 말에 군부대신 임경업이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턱을 세웠다.

“허험.”

그 모습에 도현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조선 최고의 명장이라는 칭호에 어울리지 않게 가끔씩 보여 주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웃기면서도 정감이 갔다.

거란족을 받아들이고 이주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고 있지만 여전히 일반 백성보다 군병의 숫자가 많은 두 지역이었기에 경작지 개간에 군부가 많은 도움을 줬다.

물론 공짜가 아니라 이렇게 개간한 토지에서 생산된 소출 중 일정 부분을 삼 년에 걸쳐 군부가 가진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지만, 어찌 됐건 혈기 왕성하고 힘 좋은 장정과 많은 군마를 보유한 군대의 도움을 받아 수십만 결에 달하는 경작지를 새로 확보할 수 있었다.

“국고가 가득 차고 풍년으로 백성들이 배고픔을 겪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이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소. 다들 수고들 많았소.”

“다 전하의 복이시옵니다.”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이번에는 상공대신 유형원에게 시선을 줬다.

“화란 상관 설치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본국으로 돌아간 발데 총관이 얼마 전 양측이 맺은 협정을 네덜란드 공화국 정부가 인정한다는 내용이 적힌 오렌지 공의 직인이 찍힌 공식 외교 문서와 함께 조선에 다시 오면서 화란 상관 설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동인도회사 측 인사와 상관을 만들기 적당한 장소를 찾아 지난달부터 공사에 들어갔사옵니다.”

“흐음. 기존에 거주하고 있던 백성들이 있을 텐데, 어찌 처리했나?”

“시세보다 많은 돈을 주고 토지를 매입한 뒤 모두 인근 지역으로 이주를 시켰습니다. 물론 대금은 협약서에 따라 동인도회사에서 전부 부담했습니다.”

“잘했군. 그러면 상관은 언제쯤 완공이 되지?”

“인부들을 대거 모집해 공사를 벌이고 있습니다만 바다를 메워 새로운 땅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아 최소 반년은 걸릴 것 같사옵니다.”

“반년이라…….”

완도 자체가 고립된 섬이지만 생활 방식이 다른 양인과 일반 백성 들을 완전히 분리하고 효율적으로 감시하기 위해서 도현은 나가사키에 있는 상관처럼 인공 섬을 조성해 거기에 교역장을 만들도록 했다.

“화란인들의 불평이 많겠군.”

“그래서 상관이 완성되기 전까지 공사장 한쪽에 임시로 교역장을 만들어 운영을 하면 어떨까 하옵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손등으로 수염을 천천히 쓸어내리면서 잠시 생각을 해 본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괜찮은 생각인 것 같군.”

“허락만 해 주신다면 소요 비용을 화란 동인도회사에서 모두 부담하겠다고 했사옵니다.”

“이미 교역을 승인했는데 안 될 이유가 없지. 거래가 이루어지면 관세 수입도 발생할 테니 여러모로 이득이 아닌가?”

옆에 시립해 있던 총리대신 박황이 살짝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맞사옵니다.”

“그렇게 해 주도록 하게.”

“예.”

뒤를 이어 다른 대신들의 보고가 줄을 이었는데 대체적으로 모든 것이 다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었기에 도현은 기분 좋게 대전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에잇!”

냐앙~!

숙희 공주가 눈 뭉치를 던지자 고양이가 울음소리를 높게 올리며 그 뒤를 쫓았다.

하지만 기껏 달려갔더니 이미 바닥에 쌓인 눈이랑 섞여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보고 고양이가 이상하다는 듯 끼잉거리는 모습에, 숙희 공주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 귀여워라. 참 잘했어요!”

숙희 공주는 혹시나 고양이가 차가워 할까 봐 일부러 눈에 젖은 장갑을 벗고 맨손에 하아 입김을 불어넣은 뒤 강아지를 어르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침부터 일어나 열심히 뛰어논 덕분에 뽀얀 찹쌀떡처럼 통통하니 살이 오른 흰 뺨엔 사과같이 빨간 홍조가 떠올라 있었고, 머리엔 귀여운 장식을 단 털모자를 푹 눌러썼는데 그 모습이 깜찍하기 그지없었다.

은가루를 흩뿌린 듯한 새하얀 눈밭에서 아이와 고양이가 함께 놀고 있는 정경을 지켜보고 있자니 절로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지라, 공주를 모시는 궁녀들이 흐뭇한 표정으로 서 있을 때 뒤에서 사박사박 눈을 밟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은 공주가 놀고 있으니 일반 내시나 궁녀라면 반대쪽 길로 돌아가라고 하려던 상궁은 나타난 사람의 얼굴을 보고 황급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전하.”

상궁의 뒤를 따라 다른 궁녀들 역시 몸을 숙이는데 도현이 호들갑 떨지 말라는 듯 쉿, 하고 숙희 공주 쪽을 가리켰다.

고양이랑 노는 데 한창 정신이 팔린 숙희 공주는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 여전히 깔깔 웃으며 눈밭을 뛰어놀고 있었다.

“야옹아, 이리 오렴! 우리 저쪽 가서 놀자.”

그러곤 신 나서 눈밭을 가로지르려는데 신발이 순간 미끄러졌는지 숙희 공주의 몸이 앞으로 기우뚱거렸다.

“꺅!”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고 비명을 외친 순간, 단단한 손길이 뻗어 와 숙희 공주의 몸을 안아 들었다.

“요 말괄량이 녀석!”

“아바마마!”

도현의 얼굴을 확인한 숙희 공주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렸다.

“언제 오셨어요?”

“아까 전부터 네 뒤에 있었지.”

“진짜요? 전혀 몰랐어요.”

“이놈이랑 논다고 아까부터 한창 바쁘더구나.”

그러면서 도현은 어느새 발치에 다가와 몸을 비비는 고양이를 가리켰다.

“네가 돌본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럼요. 제가 매일 빗질도 해 주고 몸도 씻겨 주는 걸요!”

“허허, 언제 이렇게 부지런해졌을꼬?”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숙희 공주를 바닥에 내려놓은 도현은 소매 자락에서 길쭉한 작대기 같은 것을 꺼냈다.

“그럼 특별히 상으로 이것을 주마.”

“뭔데요, 아바마마?”

난생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에 숙희 공주가 눈을 크게 떴다.

낚싯대처럼 호리호리한 모양에 잘 휘어지도록 대나무로 몸체를 만들고, 손잡이 부분엔 가죽으로 덧대었는데 끝부분에 뭔가 솜뭉치 같기도 하고 풀 같기도 한 것이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그건 강아지풀이라고 하는 것이란다.”

“강아지풀요?”

“저기 털 난 부분을 만져 보렴.”

도현의 말에 숙희 공주는 잠시 주저하다가 에잇, 하고 손을 뻗었다.

“와아!”

“어떠냐?”

“까끌까끌한데 또 만지니까 푹신해요! 우리 고양이도 털을 만지면 이런 느낌인데.”

“하하, 비슷하구나. 원래는 강아지 꼬리 같다고 해서 강아지풀이라고 한단다. 딱히 귀한 풀은 아니기에 대궐 안에 있는 정원에서는 의외로 보기 힘들지만 저잣거리에선 발에 채일 정도로 흔한 것이지. 나도 어릴 땐 이걸 많이 가지고 놀았단다.”

“그럼 저한테도 갖고 놀라고 주시는 거예요?”

“아니, 사실은 저놈한테 줄 것이니라.”

도현은 벌써부터 눈치채고 꼬리를 흔들면서 얌전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고양이에게 씩 웃음을 날렸다.

“고양이한테요?”

이해가 잘 안 된다는 듯 숙희 공주가 되묻자 도현은 손에 강아지풀 막대를 들고 흔들었다.

냐앙! 냥!

강아지풀이 오른쪽으로 가면 고양이도 똑같이 몸을 날렸고, 위로 휙 들어 올리면 고양이도 캭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발로 서서 앞발을 쭉 내밀었다.

휙휙 이리저리 흔드는 방향에 따라 고양이가 왔다 갔다 하는 모습에 숙희 공주는 감탄사를 터트렸다.

“어머! 쟤 좀 봐.”

공을 가지고 장난칠 때도 기분 좋은 듯 가릉거리는 소릴 내긴 했지만, 강아지풀을 눈앞에 갖다 놓으니 진짜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활개 치는 모습이 참으로 신기하고도 재밌었다.

“어떠냐? 이렇게 강아지풀을 흔들어 주면 고양이가 무척 좋아하지?”

“굉장해요. 아바마마는 어떻게 이런 걸 다 아세요?”

숙희 공주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하핫! 다 이 아비가 잘나서 그런 것 아니겠…….”

존경하는 눈빛으로 숙희 공주가 쳐다보자 어깨가 으쓱한 도현이 턱을 치켜드는데 순간 맞은편에 있는 칠현과 시선이 마주쳤다.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어린애 상대로 무슨 잘난 척이냐는 듯한 시선을 받자, 도현이 크흠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뭐, 너도 어른이 되면 다 알게 될 거란다.”

그렇게 대충 얼버무린 도현은 숙희 공주의 옷에 묻은 눈을 탁탁 털어 주며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슥 쓸어 올렸다.

“추운데 고뿔이라도 걸리면 어떡하느냐? 적당히 놀고 방에서 따뜻하게 몸을 데우도록 해라. 그리고 이따 밤에 꿀물을 보내라고 할 테니 꼭 마시고 자야 한다.”

“네에.”

“그래. 착하기도 하지.”

숙희 공주는 한 손에 강아지 풀 막대를, 다른 한 손으론 고양이를 품에 안고선 도현이 돌아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얏! 왜 때리십니까, 전하?”

“네가 방금 속으로 뭐라 생각했는지 말 안 하면 모를 줄 아냐.”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데요!”

“닥쳐.”

“억울합니다, 전하!”

두 사람의 말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숙희 공주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아바마마랑 저 내관은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니까. 그치, 야옹아.”

냐옹~.

도현의 지시에 따라 임시로 만든 교역장이 열리자 조정의 허락을 받은 각 상단들이 거래를 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거기에는 봉황상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첫 거래라 직접 완도까지 내려온 장태범은 발데 총관의 환대를 받았다.

“봉황상단 이야기는 왜국에서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조선에서 제일가는 상단이라고요.”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전 세계를 상대로 장사를 하는 동인도상회에 비하면 작은 구멍가게 수준이지요.”

장태범이 슬쩍 상대를 띄워 주자 역관을 통해 말을 들은 발데 총관은 손을 내저으며 이야기를 했다.

“아닙니다. 지금은 그럴지 몰라도 조선 국왕 전하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고 여러 가지 좋은 상품을 만들어 내는 봉황상단이니 지금보다 훨씬 크게 성장할 겁니다.”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일단 앉으시지요.”

“그러죠.”

두 사람이 한쪽에 마련된 의자로 가서 앉자 함께 온 수행원들도 각자 자리에 착석했다.

“일단 뭘 가져오셨는지 말씀하시지요.”

장태범이 손짓을 하자 수행원 중 한 명이 붉은 비단 보자기 하나를 조심스럽게 들고 와 가운데 있는 탁자 위에 올려놨다.

그러자 장태범이 손수 보자기를 풀고 안에 들어 있던 상자 뚜껑을 열었다.

“오! 멋지군요.”

상자에는 청자로 만들어진 다기 세트가 포장되어 있었는데 은은한 빛깔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감탄성을 내뱉게 했다.

“서양에서 조선 도자기가 인기라고 해서 가져와 봤습니다. 특별히 왕실에 자기를 납품하는 광주 관요官窯에서 만든 물품입니다.”

“그렇습니까?”

그 자체로도 훌륭했지만 조선 왕실에서도 쓰는 물건이라고 하자 발데 총관은 더 관심을 보였다.

“한번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조심스럽게 찻주전자를 꺼내 이리저리 꼼꼼하게 살핀 발데 총관은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이 영롱한 빛깔 하며 여인의 몸매처럼 아름다운 자태가 정말, 하나의 예술품입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들다마다요. 우리가 다 구매할 테니 가지고 오신 물량을 전부 넘기십시오.”

상대가 아주 적극적으로 달려들자 장태범은 내심 고소를 짓고는 차분한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우리도 팔려고 가져왔으니 좋습니다. 하지만 가격이 맞아야 되겠지요.”

그러자 발데 총관도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얼마를 생각하십니까?”

“먼저 말씀을 해 보십시오.”

“…….”

머릿속으로 주판을 빠르게 튕긴 발데 총관은 앞에 앉아 있는 장태범에게 가격을 제시했다.

“이렇게 한 상자에 은 여섯 냥이 어떻겠습니까?”

상자에 찻잔 두 개와 주전자 하나가 들어 있으니 개당 은 두 냥으로 계산을 한 거였다.

그러자 가격이 마음에 안 드는지 장태범이 살짝 표정을 굳혔다.

“동인도회사는 이 물건의 값어치를 제대로 알아줄 거라 생각했는데 안타깝군요.”

“여섯 냥이면 왜국에 파는 것보다 개당 은 한 냥을 더 쳐 드리는 것이 아닙니까?”

발데 총관의 말에 장태범은 살짝 눈가를 찡그리고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 굳은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지금 고작 한 냥을 가지고 생색을 내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실망이군요. 그리고 이건 왜국에 넘기는 물건과는 차원이 다른 겁니다.”

확실히 오랫동안 아시아 쪽 일을 보며 각종 도자기를 취급해 본 발데 총관이 보기에도 때깔부터가 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양식으로 만들어진 다른 도자기들과 달리 상대가 가져온 물건은 서양인들이 쓰는 다기와 비슷한 모양이라 쓰기도 편했다.

원래 이런 형태의 다기는 조선에서도 만들지 않았지만, 물건을 팔아먹으려면 소비자의 취향을 반영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도현의 지시에 따라 여러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서양식 자기를 구워 낸 거였다.

“아쉽지만 그 가격에는 물건을 팔 수가 없소이다.”

딱 잘라 말한 장태범이 거래를 접으려고 하자 가격을 제시하면 밀고 당기며 흥정을 할 줄 알았던 발데 총관은 화들짝 놀랐다.

“아니, 이대로 끝내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를 발데 총관이 황급히 붙잡자 장태범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조건이 안 맞으니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지 않소.”

“그러면 서로 맞춰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지 마시고 일단 다시 앉으십시오.”

발데 총관의 말에 장태범은 못 이기는 척하며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팔짱을 낀 채 어디 다시 가격을 제시해 보라는 얼굴로 상대를 바라봤다.

장태범이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발데 총관은 내심 만만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을 버리고 진지하게 협상을 했다.

“봉황상단에서 생각하는 가격은 얼만지 말씀해 보시죠.”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장태범이 입을 열었다.

“왕실에 납품하는 최고급품인 만큼 최소 한 상자당 은 스무 냥은 받아야겠습니다.”

“스무 냥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가격에 발데 총관은 난색을 표했다.

“그건 곤란합니다.”

“가져온 물건이 그만한 값어치가 없다는 거요?”

미간을 찡그린 장태범이 살짝 언성을 높이자 발데 총관은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분명 제가 본 물건 중 최고입니다.”

“그런데 왜 안 된다는 거요?”

“우선 먼 유럽까지 가져가려면 운송비가 만만치 않게 들고 저희도 자선사업을 하는 것이 아닌 이상 어느 정도 이익이 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었기에 장태범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제가 보기에는 좋은 상품이지만 과연 유럽에 가서 팔릴지 장담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이런 점들을 감안했을 때 상자당 스무 냥은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입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스무 냥이나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장태범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차분히 이야기를 했다.

“그럼 얼마가 적당하다고 생각하시오?”

“글쎄요…….”

말끝을 흐리던 발데 총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상자당 은 열 냥은 어떻습니까?”

“흐음.”

손등으로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고심하던 장태범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은 열한 냥으로 합시다. 대신 이 물건은 거래가 계속되는 동안 왜국에도 팔지 않고 동인도회사에만 넘기겠소.”

“독점권을 주신단 말씀이십니까?”

“그렇소이다.”

이맛살을 살짝 찌푸린 채 잠시 생각을 하던 발데 총관은 이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습니다.”

“하하하! 잘 생각하셨소이다. 오늘 내린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거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군요.”

“자, 그러면 계약서를 씁시다.”

“그러시죠.”

잠시 뒤 양쪽은 한글과 네덜란드 어로 된 계약서를 작성하고 수결까지 끝마쳤다.

이렇게 첫 거래에서 봉황상단은 다기 상자 삼백 개와 연필 일천 자루 그리고 인삼차 삼백 근을, 스페인 금화 이천 개를 받고 넘겼다.

그러자 눈치를 보며 지켜보던 다른 상단들도 속속 동인도회사와 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그동안 중간에 왜국이 끼어 있어서 거래 물품에 들어가지 않았던 나전칠기와 자개 공예품들도 판로가 열렸고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조선풍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특히 인삼은 탁월한 약효뿐만 아니라 뜻밖에도 남성들의 정력제로 각광을 받아,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더 비싼데도 불구하고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나가사키를 찾는 화란 상인과 선박 숫자가 줄어들었고 왜국에 가는 조선 상품의 물량도 적어졌다.

물동량 감소는 곧장 나가사키 개항장을 운영하는 막부의 재정 수입 하락으로 연결됐다.

탕!

“갑자기 나가사키에서 걷는 세금이 절반으로 줄어들다니.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야!”

삼 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앞에 있는 서탁을 손바닥으로 세게 내려치며 호통을 치자 모여 있던 가신들은 어깨를 움츠렸다.

“이시노!”

“예, 쇼군.”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을 해 봐!”

잔뜩 화가 난 시선에 막부의 가신으로 재정 관리를 맡고 있는 이시노는 식은땀을 흘리며 어렵게 입을 뗐다.

“그게, 나가사키로 들어오는 외국 상인과 선박 숫자가 줄어들어서…….”

“그러니까 그 이유가 뭐냔 말이야!”

이에미쓰가 눈을 부라리며 쏘아보자 이시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야기를 했다.

“아무래도 조선에 새로 개항장이 생기면서 상인들이 분산된 것 같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저도 아직 정확하게 확인한 것이 아니라서 보고를 드리지 않았는데 상인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조선이 나가사키와 같은 개항장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뜻밖의 말에 이에미쓰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실이야?”

“화란 상인뿐만 아니라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조선 상인들의 숫자도 줄어든 걸 보면 확실하다 생각됩니다.”

“이런!”

“조선은 오랫동안 쇄국 정책을 유지하던 곳인데 어떻게 갑자기 개항을 할 수가 있소?”

가신 중 한 명이 믿기 어렵다는 듯이 바라보자 이시노는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대답했다.

“그거야 저도 모르지요.”

“흥! 보나 마나 뻔하지.”

“예?”

이에미쓰는 한쪽 볼을 씰룩이며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양인들과 거래를 하면 돈이 된다는 걸 알고 개항장을 만든 것 아니겠어.”

“…….”

돈보다는 주변국과의 관계와 신의를 중시하는 조선의 특성을 잘 아는 가신들은 이에미쓰의 말에 동의하기 어려웠지만, 괜히 입을 잘못 놀렸다가 분노를 뒤집어쓸까 봐 그냥 침묵했다.

그런 가운데 말보다 검이 먼저 나가는 전형적인 무사인 야마오카가 카랑카랑한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쇼군, 이건 명백한 배신입니다.”

“그렇지.”

상석에 앉은 이에미쓰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조하자 신이 난 야마오카는 어깨를 펴며 언성을 더 높였다.

“막부를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당장 제재를 가해야 됩니다.”

그러자 조선에 대해 비교적 잘 아는 미우라가 정색을 하며 반대했다.

“그건 안 될 말입니다.”

“그럼 이대로 당하고 있자는 거요!”

다혈질답게 야마오카가 눈을 치켜뜨며 으르렁거리자 미우라는 작게 한숨을 내뱉고는 차분히 설득을 했다.

“나라고 왜 분하고 화가 나지 않겠소? 하지만 국가 간의 일을 감정만으로 대처할 수는 없지 않소.”

“그러면 사신이라도 보내 항의를 하자는 거요?”

“그것이 올바른 순서가 아니겠소.”

미우라의 말에 야마오카는 콧방귀를 뀌고는 비아냥거렸다.

“작정하고 몰래 상관을 만들어 운영 중인데 잘도 들어주겠소이다. 그런 식으로 하다가 시간만 질질 끌고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을 거요.”

야마오카의 태도에 화가 치민 미우라는 발끈하며 말했다.

“그러면 지금 조선과 전쟁이라도 하자는 것이오!”

“필요하다면 못 싸울 이유도 없지 않소.”

“대마도주가 제대로 저항도 못 해 보고 조선군에 패한 걸 알고도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한단 말이오.”

“변방에 있던 한낱 번군과 싸워 이긴 걸 가지고 겁을 먹은 거라면 참으로 실망이오. 우리 막부군은 대마도 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숫자도 많고, 불과 수십 년 전에 도성까지 빼앗기고 도망쳤던 조선군 따위는 상대가 안 되는 강군들이오!”

“허약한 조선군은 전쟁으로 단련된 우리 막부군의 상대가 아니지.”

“맞소.”

임진왜란을 거론하면서 야마오카가 자신감을 보이자 몇몇 가신들도 동조하는 듯한 분위기를 보였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재정을 맡고 있는 이시노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물론 우리가 질 거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조선과 전쟁을 벌여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왜 그렇지?”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에미쓰가 시선을 돌리며 묻자 이시노는 사뭇 진지한 어조 이유를 설명했다.

“우선 전쟁이 벌어지면 조선과의 교역이 모두 끊겨 재정적으로 상당한 타격이 불가피합니다.”

“그건 다시 화란 상인들을 끌어들여 벌충하면 돼.”

“그럴 수도 있겠지만 화란 상인들이 가져올 수 없는 물건들도 있지 않습니까. 가령 인삼이나 연필 그리고 담배 같은 경우에는 수입이 막힌다면 상당한 반발을 불러올 겁니다.”

“으음.”

방금 언급한 물품들은 이에미쓰도 즐겨 사용하는 거였기에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침음성을 흘렸고, 그걸 본 이시노는 용기를 내서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임진왜란 이후 힘들게 겨우 다시 복구한 조선과의 외교 관계가 끊어진다면 막부는 또다시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지게 된다는 겁니다.”

“…….”

그러자 지금까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던 이에미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위로 천황을 두고 엄밀히 따지면 일개 신하에 불과한 막부가 통치권을 행사하는 왜국의 비정상적인 체제에서 조선과의 관계는 아주 중요했다.

조선이 파견하는 통신사를 통해 막부의 전통성을 대내외적으로 알리는 거였는데, 이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 줄기차게 사신을 보내서 외교 관계 회복을 요청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통신사 파견은 외국에서도 인정하는 왜국의 통치자는 나니까 다른 번들에게 까불지 말라는 상징적인 행사였다.

이런 이유로 한번 통신사가 오면 막대한 재정이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막부는 아낌없이 돈을 쓰며 거창한 환영 행사를 벌였다.

그런데 그것이 없어지면 자칫 막부의 전통성이 손상될 수도 있었기에 이에미쓰의 심기가 복잡해졌다.

“그러니 가능하면 좋게 대화로 이번 문제를 해결해야 됩니다.”

이제 됐다는 듯이 표정을 푼 이시노의 이야기를 중간에 끊으며 야마오카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번주들이 막부를 우습게 볼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못 들었소. 감정적으로 처리를 하다가 그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그러시오?”

답답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이시노가 말하자 야마오카는 어쩐지 기분 나쁜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공개적으로 대응을 하기 어렵다면 다른 방법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뭔가?”

솔깃한 얼굴을 한 이에미쓰가 살짝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관심을 보이자, 야마오카가 은근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다.

“예로부터 조선 남부 해안 일대는 해적들이 수시로 날뛰던 곳이지 않습니까. 무역선들이 피해를 입으면 교역소 운영이 어려워질 것입니다.”

순간 방 안에 모여 있는 막부 가신들은 하나같이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헉!”

“설마…….”

해적으로 가장해 조선을 향하는 무역선을 덮쳐 교역소 운영을 방해하자는 말에 이시노는 기겁을 했다.

“그러다가 조선이나 화란에서 우리 짓이라는 걸 눈치라도 채면 그 후폭풍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것이오!”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벌어지는 일인데 어느 누가 알겠소이까. 우리만 입을 다문다면 들킬 일은 절대 없을 거요.”

“허어.”

도저히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이시노는 상석에 앉아 있는 이에미쓰를 보며 간언했다.

“쇼군, 이건 정말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자칫하면 조선뿐만 아니라 화란과도 전쟁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에미쓰는 야마오카의 계책에 흥미를 느꼈다.

“정말 조선에 들키지 않고 일을 처리할 수 있겠나?”

그러자 야마오카는 눈을 번득이며 다다미 바닥에 넙죽 엎드리고는 힘이 가득 들어간 목소리로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허락을 해 주신다면 제 목을 걸고 조선이 세운 교역소를 완전히 고사枯死시켜 버리겠습니다.”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이에미쓰는 머리를 숙이고 있는 야마오카를 보며 입을 열었다.

“좋아. 군선 세 척과 병사 일천을 맡길 테니 감히 날 물 먹인 조선과 화란에 본때를 보여 주도록 하게.”

“예!”

이시노를 비롯한 몇몇 온건파들은 결국 악수惡手를 두고 만 이에미쓰의 결정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전에 크게 기대하지는 않지만 대화로 일이 해결된다면 그것보다 좋은 것이 없으니, 미우라 자네가 조선으로 가서 항의를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이미 무력을 쓰기로 결정을 다 내리고 그저 허울뿐인 사신행이었지만, 그래도 전쟁을 저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미우라는 무거운 얼굴로 대답했다.

며칠 뒤 미우라는 막부가 있는 도쿄를 떠나 배편으로 키타큐슈를 거쳐 부산포에 도착했다.

왜국 사신은 해로를 이용해서 제물포로 곧장 올라오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멀고 시간이 더 걸리는 육로로 한양까지 갔다.

“왜국 사신이 도착하였사옵니다.”

밖에 있던 내관이 고하는 목소리에 도현은 미간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쯧.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군.”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긴 하지만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인지라 도현은 부루퉁한 얼굴로 불평을 내뱉었다.

사신을 안으로 들이란 말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 미적거리고 있으니 칠현이 옆에서 한 소리 거들었다.

“어차피 한 번은 부딪칠 수밖에 없는 일 아닙니까.”

나름 기운을 북돋아 주려고 한 말인데 그게 또 기분에 거슬렸는지 도현이 삐딱하게 답했다.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해요. 어차피 네 일 아니다, 이거지?”

“네에? 제가 언제 그런 소릴 했습니까?”

“흥, 됐어.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 이놈아.”

“아, 왜 또 저한테 그러세요!”

칠현은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하여간 속은 배배 꼬여 가지고 어지간히도 기분 맞추기 힘든 상대가 아닐 수 없었다.

“에휴.”

“남자가 한숨 쉬는 거 아니다.”

“알았습니다요.”

도현은 끄응, 하면서 삐딱하게 눕혔던 몸을 바로 일으켰다.

“뭐,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네 말대로 한 번은 만나서 부딪쳐야 하는 일이니까.”

“전하.”

툴툴거리긴 해도 아랫사람 말을 제대로 귀담아 들을 줄 아는 건 도현의 장점 중 하나였다.

‘역시 이러니까 제가 전하 곁을 못 벗어난다니까요.’

“뭐야? 왜 싱글벙글 웃고 그래?”

“아무것도 아닙니다.”

도현은 이놈이 결국 실성을 했나 하는 눈빛으로 칠현을 쳐다보다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사신을 불러.”

“예. 왜국 사신은 대전 안으로 드시오!”

칠현이 크게 외치자 막부의 사신으로 온 미우라 아키오가 외무대신 박노와 함께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소.”

일단은 형식적인 인사말부터 건네는데 미우라는 애초부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할 생각이 없는지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하. 이번에 제가 찾아온 것은 한 가지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무례하기까지 한 도전적인 말투에 도현은 잠깐 얼굴을 굳혔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아서 좋군. 그래, 용건이란 게 무엇인가?”

“최근 조선이 새롭게 연 교역소에 대해서입니다.”

“역시 그 일 때문이로군.”

“예.”

단단히 따질 각오를 하고 온 듯 미우라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예와 인의를 중시한다는 조선이 아국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교역소를 열어 화란 상인들과 몰래 거래를 하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자 도현이 앉아 있던 의자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고는 넓은 대전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크게 호통을 쳤다.

탕!

“언제부터 우리 조선이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마다 왜국의 허락을 받았단 말인가!”

“그런 것이 아니오라…….”

“방금 사신이 그렇게 이야기를 해 놓고 뭐가 아니란 거지. 짐이 잘못 듣기라도 했다는 건가!”

“그, 그게…….”

여기서 그냥 인정을 하면 막부가 조선을 업신여긴 것이 되고, 아니라고 하자니 국왕을 능멸한 거였기에 미우라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절묘하게 꼬투리를 잡아 먼저 기선을 제압한 도현은 계속해서 언성을 높이며 왜국 사신을 압박했다.

“그리고 우리가 화란과 교역을 하든 말든 막부가 무슨 상관인가? 화란과 통교를 하려면 무조건 왜국을 거쳐야 된다는 조약이라도 맺었단 말인가?”

무조건 윽박을 지르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자 대답이 궁해진 미우라는 연신 진땀을 흘리면서도 어떻게든 반박을 하려고 애를 썼다.

“그건 아니지만 저희가 먼저 화란과 교역을 하고 있었으니, 상관을 열기 전에 최소한 미리 알려 양해를 구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습니까.”

“허어. 정말 어처구니가 없구먼. 막부의 논리대로라면 옆집 앞마당에 심어진 나무에서 열린 사과도 먼저 보고 딴다면 그 사람의 것이 되겠군.”

“비약이 심하십니다.”

그러자 도현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건 막부지 않나! 갑자기 찾아와서 상관을 개설한 걸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다니, 이건 명백한 내정간섭이자 짐을 능멸하는 행위야!”

“아, 아닙니다.”

“더 듣기 싫으니 당장 물러가게!”

“고정하시고 제 이야기를 조금만 더 들어 주십시오.”

“어서 저자를 데려가지 않고 뭣들 하고 있나!”

화가 많이 난 듯 도현이 재차 불호령을 내리자 옆에 있던 외무대신 박노가 미우라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소.”

“하지만…….”

기껏 찾아왔는데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갈 순 없었다.

미우라가 쉽게 발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박노가 뭣하고 섰느냐는 듯 채근했다.

“괜히 더 머물러 봤자 주상 전하의 화를 돋울 뿐이오. 자, 어서.”

이쪽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는 도현과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박노를 번갈아 보던 미우라는 결국 체념하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알겠소.”

거의 쫓겨나듯 해서 미우라가 대전을 물러나자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도현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흠. 이쯤 해 뒀으면 당분간 귀찮게 굴진 못하겠지?”

“그렇겠지요.”

박노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박진감 있는 연기를 펼친 두 주연배우가 태평스레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칠현은 질린 듯한 표정을 하고 혀를 내둘렀다.

“두 분 다 어쩜 그리 감쪽같으십니까? 대단하십니다.”

“허허. 나처럼 오래 살다 보면 저절로 늘게 된다네.”

“누가 들으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인 줄 알겠군.”

도현은 흐트러진 옷깃을 바로 여미면서 박노에게 핀잔을 줬다.

“그럼 당분간 막부에서 보낸 사신은 외무대신이 알아서 처리하시오.”

“맡겨만 주십시오. 헌데 어디 나가십니까?”

“오늘 할 일도 다 끝났으니 우리 공주 얼굴이나 보러 갈까 하오.”

그러고 도현은 칠현을 대동한 채 외무대신 박노의 인사를 받으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대전을 나갔다.

첫날 이후로 미우라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알현을 요청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그나마 상대를 해 주는 외무대신 박노도 이야기만 들어 줄 뿐 화란 상관을 폐지해 달라는 요구에는 이미 국가 간에 협정을 맺은 사안이기 때문에 되돌릴 수 없다며 딱 잘라 거절했다.

결국 미우라는 시간만 보내다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다시 왜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한편 쇼군이 내려 준 군선과 병력을 이끌고 규슈로 간 야마오카는 사가 번에 속한 후쿠에 섬에 은밀히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조선에 갔던 미우라가 빈손으로 돌아오자 본격적인 해적질에 나섰다.

대망호는 거창한 이름만큼이나 제법 큰 규모의 무역선이었는데 길이가 무려 오십 미터나 됐고 커다란 돛이 세 개나 달려 있었다.

선창에는 마카오에서 구입한 각종 향신료와 일명 마닐라 삼이라고 불리는 물건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마닐라 삼은 파초과의 일종인 아바카Abaca 잎이나 줄기에서 채취하는 섬유로 고르고 흡수성이 좋아 오랫동안 물에 잠겨 있어도 잘 썩지 않아서 항해에 쓰는 로프를 만드는 용도로 사용됐다.

“으차!”

쏴아악.

물통을 배 밖으로 내서 오물을 바다에 버린 털보 사내는 갑판 한쪽에서 로프를 정리하고 있는 친구를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가 손바닥으로 등을 가볍게 때렸다.

“뭐 해?”

“어, 왔어.”

뒤를 돌아본 남자가 덤덤하게 말하며 하던 일을 계속하자 옆 난간에 몸을 기댄 털보는 소매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거 하나 먹어.”

“말린 과일 아냐? 어디서 났어?”

“큭큭큭. 식료품 창고에서 몇 개 슬쩍했지.”

“그러다가 걸리면 어쩌려고?”

“아무도 모를 테니까 괜찮아.”

말을 하며 털보가 말린 과일을 씹어 먹자 남자도 얼른 하나를 받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맛있는데.”

“그렇지?”

언제 걱정을 했냐는 듯이 맛있게도 먹는 남자를 보며 씨익 웃은 털보는 슬쩍 고개를 돌려 바다를 보며 말했다.

“이제 며칠만 더 가면 육지에 도착하겠지.”

어느새 한 개를 다 먹은 남자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날씨도 좋고 바람까지 적당히 불어 주고 있으니까 빠르면 사흘 안에 제물포가 보일 거야.”

“도착하면 한잔해야지?”

“당연하지. 출항 전에 봤던 과부댁이 아직 있나 몰라.”

그렇게 잡담을 나누면서 한가롭게 시간을 때우던 털보는 멀리 수평선 부근에 갑자기 배 몇 척이 나타난 걸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 저건 무슨 배지?”

“글쎄.”

털보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본 남자는 어쩐지 불길한 느낌에 얼굴을 약간 굳혔다.

얼마 있지 않아서 견시수가 다급하게 외치는 고함에 괴선박의 정체가 밝혀졌다.

“왜국 선박이다!”

“이런!”

보고를 받고 선실에 있다가 다급히 갑판으로 달려 나온 선장은 망원경을 가지고 상대 선박을 살펴보고는 낮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왜국 선박이라고 해서 다 왜구는 아니었지만 세 척이나 떼를 지어 돌아다니고 곧장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분명 심상치가 않았다.

보통 이럴 경우는 십중팔구 뭔가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있는 거였다.

노련한 뱃사람인 선장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선원들을 보며 크게 소리를 쳤다.

“당장 좌현으로 방향을 틀고 모두 무기를 챙겨 싸움에 대비해라!”

“예.”

두려웠지만 사방이 다 트인 바다에서는 도망칠 곳이 없는 데다 왜구에 잡히면 평생 노예로 살아가야 했기에 선원들은 이를 악물었다.

안택선安宅船 누각에 서서 허둥지둥 방향을 돌리는 조선 무역선을 바라보던 야마오카는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놈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속력을 더 높여라!”

“하이!”

“노를 빨리 저어라.”

둥둥둥!

군선과 달리 노가 없고 화물을 가득 실은 교역선은 필사적으로 달아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얼마 못 가서 왜선에 따라잡히고 말았다.

“죽기 싫으면 조용히 돛을 내리고 항복해라!”

갑옷을 입고 얼굴에 흉악하게 생긴 가면을 쓴 왜장이 뱃머리에 서서 크게 소리치자 선장은 이를 악물며 외쳤다.

“여기서 잡히면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다. 왜구들이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쏴라!”

슈슈슉! 슉! 슉!

선장의 명령에 선원들은 가지고 있던 활로 화살을 날리고 좌우에 한 문씩 탑재 되어 있던 지자총통을 발사했다.

꽝!

쉬이이익! 촤아악!

이 시대의 바다는 언제든 해적을 만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장소였기에 조정에서도 특별히 원양을 항해하는 선박에 한해서 무장을 허락하고 화포도 불하해 줬다.

하지만 전문적으로 군사훈련을 받은 수군이 아니었기에 아주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발사된 포탄은 왜선을 한참 빗나가 애꿎은 바다에 커다란 물기둥만 만들어 냈다.

그나마 화살은 효과가 있어서 겁 없이 갑판 위에 서서 알짱거리던 왜구 네다섯 명이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으악.”

“컥.”

“이놈들이.”

야모오카의 측근 장수인 사토무라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 항복할 거라 생각했던 상대가 격렬하게 저항하자 눈을 치켜떴다.

“혼쭐을 내 줘라!”

“하이!”

왜선에도 함포가 있었지만 교역선에 실린 화물을 빼앗으려는 욕심에 조총 사격만 가하면서 접근해 선체를 붙였다.

타탕! 탕! 탕! 탕!

“흐익.”

“큭.”

“적들이 배를 붙이게 해서는 안 된다. 막아라!”

선장이 고래고래 고함을 내지르며 독려했지만 쏟아지는 총탄에 선원들은 갑판 난간 위로 몸을 내밀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바로 옆에 배를 바짝 붙인 왜구들은 갈고리가 달린 밧줄을 집어 던졌다.

덜컥.

“으차!”

끼이이익.

연결된 밧줄을 당겨 거리를 더 좁힌 왜구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교역선으로 뛰어넘어 갔다.

“하압!”

“이 쪽발이 놈들!”

채챙!

“크아악.”

어떻게든 도선해 온 왜구들을 밀어내기 위해서 선원들이 무기를 휘두르면서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사납게 날뛰는 왜구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느새 교역선은 왜선 세 척에 완전히 둘러싸였고 얼마 못 가 선원들은 상대에게 모두 제압당하고 말았다.

“불을 꺼라!”

진득한 피가 잔뜩 묻어 있는 검을 한 손에 든 사토무라의 말에 왜구들이 물을 퍼서 난전 중에 붙은 불을 재빨리 껐다.

그렇게 교역선은 돛대 하나가 불에 타서 부러진 걸 제외하고는 별다른 파손 없이 고스란히 왜구의 손에 들어갔다.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을 벗은 사토무라는 만신창이가 되어 한쪽에 몰려 있는 선원들을 훑어보며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노예로 팔아 넘겨야 되니까 잘 붙잡아 둬.”

“하이.”

전라수영 소속으로 제주 모슬포 만호인 서지호는 판옥선 세 척을 거느리고 해역 순찰을 돌고 있었다.

“만호 어른, 이제 슬슬 뱃머리를 돌려야 될 것 같습니다.”

부관의 말에 슬쩍 함교 한쪽 구석에 설치해 놓은 해시계를 확인한 서지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벌써 시각이 이렇게 됐군.”

“지금 안 돌리면 한밤중이 돼서야 포구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그건 곤란하지. 귀항하도록 하세.”

“예.”

어두워지면 시야가 좁아져서 자칫 암초에 부딪치는 사고가 날 수도 있었기에 별다른 일이 없다면 해가 떨어지기 전에 귀항하는 것이 좋았다.

머리를 숙이며 대답한 부관이 막 키잡이에게 명령을 전달하려는 순간 돛대 위에 올라가 있던 견시수의 외침이 들렸다.

“우현에 시커먼 연기가 하나 올라오고 있습니다.”

“……!”

견시수가 말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서지호는 정말 시커먼 연기가 수평선 너머에서 올라오고 있는 걸 보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으음. 심상치가 않군.”

“어떻게 하지요?”

그러자 서지호는 지휘봉을 꽉 움켜쥐며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우현으로 방향을 돌리고 혹시 모르니 전원 전투태세를 갖춰라!”

“옛.”

잠시 뒤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판옥선은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수군 병사들로 소란스러워졌다.

땡땡땡!

“우현으로!”

“전투준비!”

평소 혹독한 훈련으로 단련된 수군 병사들은 크게 명령을 복창하면서 각자 위치로 움직였다.

포구가 열리며 뒤로 빼놓은 화포에 언제든지 쏠 수 있도록 포탄을 장전해서 밀어 넣는 등 순식간에 전투태세가 갖춰졌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활을 주로 사용하던 조선 수군도 모두 수석총인 남-일식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거였다.

함교 위에 당당히 버티고 선 만호 서지호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전투태세를 갖춘 병사들을 훑어보며 든든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최근에 자주 출몰한다는 해적들일까요?”

약간 긴장한 듯한 부관의 물음에 서지호는 여전히 연기가 뿜어져 올라오는 지점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벌써 놈들한테 당한 선박이 여섯 척이나 된다고 했지?”

“예. 그중 두 척은 화란 배였습니다.”

“흐음.”

낮게 침음성을 흘린 서지호는 재차 명령을 내렸다.

“노를 더 빨리 저어라!”

그러자 하갑판에 있던 군관이 북을 더 빨리 쳤고 거기에 맞춰 격군들이 노를 젓는 속도가 올라갔다.

둥둥둥! 둥둥둥!

“으쌰! 으쌰!”

쏴아아아.

격군들이 기합성을 내지르며 몸을 움직이자 판옥선 좌우에 나와 있던 노 이십여 개가 번쩍 들렸다가 물속으로 들어가면서 끌어당기듯 선체를 앞으로 밀었다.

판옥선의 속력이 점점 빨라졌고 얼마 있지 않아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는 선박의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왜선 세 척이 아국 교역선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견시수의 다급한 외침이 아니더라도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금방 파악한 서지호는 눈을 번득이며 소리쳤다.

“곧장 전투에 돌입한다. 일 자 진형으로!”

이내 대장선 함교 뒤로 전투를 알리는 깃발이 내걸렸고 판옥선들은 일렬로 늘어선 채 더욱더 속력을 올려 거친 파도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천자총통을 쏴라!”

꽝! 꽝! 꽝!

포수들이 심지를 당기는 것과 동시에 뱃머리 쪽에 탑재되어 있던 천자총통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슈우우웅! 꽈아앙!

후두두둑.

아까와 달리 날아간 여섯 발의 포탄 중 한 발이 적선에 명중했고 나머지도 아주 근접해서 떨어져 갑판에 있던 왜구들에게 물벼락을 안겨 줬다.

“뭐, 뭐야?”

느긋하게 안택선 함교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 부하들이 교역선을 노략질하는 걸 바라보고 있던 야마오카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을 부릅떴다.

“조선 수군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고개를 돌린 야마오카는 화포를 쏘며 접근하는 판옥선 세척을 발견하고는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이제 막 전투를 끝내고 교역선에서 재물과 포로가 된 선원들을 옮겨 실으려는 찰나에 조선군이 나타난 거였다.

정말 절묘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는데 미리 준비를 하고 먼저 포문을 연 조선군과 달리 왜군은 노략질에 정신이 팔려 상대의 접근을 허락한 데다 전투준비도 안 되어 있는 상태였다.

“뭣들 하느냐! 어서 병사들을 배치하고 응사를 해라.”

“예.”

머리를 숙인 휘하 장수가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함교를 뛰어 내려가자 야마오카는 조선군 판옥선들을 보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흥! 선수는 빼앗겼지만 모조리 다 수장을 시켜 주마.”

이때까지만 해도 야마오카는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다.

한편 오백 보 거리까지 접근한 판옥선들은 더 이상 왜선에 가까이 가지 않고 뱃머리를 돌려 측면을 드러내고는 우세한 화포로 상대를 타격했다.

“발사!”

꽝! 꽝!

“밀어!”

“으라차.”

포가에 얹힌 화포를 안쪽으로 끌어당긴 포수들은 일사불란하게 포구를 청소한 뒤 다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하고 왜선을 공격했다.

일련의 동작을 쉬지 않고 계속 반복하자 왜선을 향해 포탄이 그야말로 비 오듯 쏟아졌다.

콰꽝!

“크아악.”

적도 화포로 대응을 하려고 했지만 탑재하고 있는 화포 수가 조선군이 몇 배나 많고 사거리와 화력 또한 월등히 뛰어났기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왜군이 쏜 포탄은 형편없이 빗나가 하얀 물기둥만 여러 개 만들어 내는 반면에 조선군은 점점 왜선에 명중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꽈아앙.

“꾸엑.”

“윽.”

포탄이 선수에 맞아 터지면서 사방으로 나뭇조각이 날아오르고 근처에 있던 왜군 병사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자 야마오카는 욕설을 내뱉었다.

“칙쇼! 우리 화포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러자 이마가 찢어져 피를 흘리는 부관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정거리 밖이라 맞힐 수가 없습니다.”

“이런 쌍!”

주먹으로 난간을 세게 내려치며 화를 토해 낸 야마오카는 악을 쓰듯 고함을 내질렀다.

“그럼 배를 붙이면 되잖아!”

“예. 옛!”

잠시 뒤 나포한 교역선에서 떨어져 나온 왜선들은 곧장 판옥선을 향해 노를 저어갔다.

“만호 어른, 적이 접근해 오고 있습니다.”

부장이 소리를 치기 전에 벌써 왜선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던 서지호는 허리에 찬 장검을 빼 들며 우렁차게 말했다.

“살수殺手들은 단병접전에 대비하고 맞붙기 전까지 최대한 피해를 입혀라!”

“알겠습니다.”

그의 지시에 검과 작은 원형 방패를 든 살수들이 갑판 위에 모였고 남-일식을 가진 총병들은 총알을 재고 난간 뒤에 몸을 숨긴 채 적을 겨냥했다.

그사이 포수들은 포신이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 포격을 해 댔다.

콰콰쾅~!

끼이익.

“허억! 배 밑으로 물이 들어온다.”

“어서 뛰어내려.”

결국 왜선 한 척이 쏟아지는 포격을 견뎌 내지 못하고 선체 여기저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옆으로 서서히 기울었다.

풍덩!

“어푸푸.”

살기 위해 바다에 뛰어내려 허우적대는 부하들의 모습에 야마오카는 이를 부드득 갈며 격군들을 다그쳤다.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것들! 더 빨리 노를 저어라.”

포격을 뚫고 나온 왜선들이 이백 보 안으로 들어오자 이때만을 기다리고 있던 조선군 총병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쏴라!”

타타탕! 탕! 탕! 탕!

요란한 총성과 함께 날아온 총탄에 미처 몸을 숨기지 못한 왜군들이 우수수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피슝!

“허억!”

설마 이 거리에서 조선군이 총을 쏠 줄은 몰랐던 사토무라는 뱃머리에 서 있다가 파공음을 내며 아슬아슬하게 옆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총탄에 화들짝 놀라 상체를 방패 뒤로 숨겼다.

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사토무라는 고개를 돌려 허둥지둥 총탄을 피해 엄폐하기 바쁜 부하들에게 호통을 쳤다.

“겁쟁이처럼 숨지만 말고 응사를 해!”

그러자 왜병들도 가지고 있는 조총으로 응사를 하기 시작했고 양측은 서로 격렬한 총격전을 벌였다.

티팅!

퍽.

“끄흑.”

어깨에 총탄을 맞은 총병이 신음을 토해 내며 주저앉자 옆에 있던 동료가 황급히 상체를 부축했다.

“괜찮아?”

“으으. 재수 없게 이게 뭐야?”

“다행히 치명상은 아니야.”

부상 정도를 살핀 동료는 총병을 안심시키고는 품속에서 예비로 가지고 다니는 붕대를 꺼내 피가 더 흐르지 않도록 상처 부위를 감쌌다.

그렇게 거리가 가까워지자 조선군 쪽에서도 하나 둘 사상자가 나왔지만 겁을 먹거나 물러서지 않고 용감하게 적과 싸웠다.

굳건히 함교에 버티고 서서 전투를 독려하던 서지호는 어느덧 왜선들이 오십 보 거리까지 접근해 오자 병사들을 둘러보며 크게 외쳤다.

“모두 충돌에 대비해라!”

잠시 뒤 속력을 줄이지 않고 계속 노를 저은 왜선들은 각각 포격을 하기 위해 측면을 드러내고 있는 판옥선을 들이받았다.

꽈아앙.

우지직.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선체가 좌우로 크게 흔들리자 갑판 위에 있던 병사 몇 명이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어이쿠.”

보통은 측면보다 뱃머리가 튼튼했기에 당파 공격에 유리했다.

하지만 이미 임진왜란에서 증명됐다시피 왜선에 비해 판옥선의 선체가 더 단단해 충돌을 하고도 큰 파손을 입지 않았다.

그렇게 양쪽 배가 바짝 붙자 이를 갈고 있던 사토무라와 왜병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판옥선으로 뛰어들었다.

“다 죽여라!”

“우와아아!”

그러자 조선군도 지지 않고 무기를 빼 들며 맞서 싸웠다.

“쳐라!”

“이야압!”

채채챙! 챙! 챙!

순식간에 갑판 위는 아수라장이 되며 비명과 피가 사방에서 난무했다.

서걱.

“크아악.”

“끄윽.”

혹독한 훈련을 받아 정예로 거듭난 조선군은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단병접전에서도 왜병에 밀리지 않았는데, 철저히 두 명씩 짝을 지어서 상대를 몰아붙였다.

거기다 뒤로 물러난 총병들이 혼전 중인데도 불구하고 정확한 사격으로 지원을 해 줘 상대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탕! 탕!

특유의 가면을 쓰고 사납게 날뛰던 사토무라도 조선군 총병의 저격에 옆구리와 어깨에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이렇게 돌격을 막아 낸 서지호는 왜병의 피가 묻은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이제 우리 차례다. 왜놈들에게 바다의 주인이 누구인지 보여 줘라!”

“와아!”

잔뜩 기세가 오른 조선군 병사들은 거센 파도가 되어 왜선으로 넘어갔고 포수들은 조란탄을 쏴서 그런 동료를 지원했다.

“발사!”

꽝!

두두두둑.

“꾸엑.”

“컥.”

건너오는 조선군을 상대하려고 기다리고 있던 왜병들은 비처럼 쏟아지는 자갈돌에 맞아 피 떡이 되어 널브러졌다.

그사이 조선군은 배를 건너와 우왕좌왕하는 왜병들을 거세게 공격했다.

만호인 서지호도 뒤에서 고함만 지르지 않고 직접 병사들과 함께 왜선으로 뛰어들어 거침없이 적을 베어 넘겼다.

양군이 뒤엉켜서 더 이상 포격이 어려운 가운데 가끔씩 총병들의 저격만 이루어지며 서로 죽고 죽이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온갖 욕설과 아우성 그리고 끔찍한 비명이 난무하는 갑판 위를 쳐다보던 야마오카는 치욕감에 벌게진 얼굴로 함교로 올라와 덤벼드는 조선군 병사에게 검을 찔러 넣었다.

“빠가야로!”

“허억.”

이미 주위에는 그가 죽인 조선군 병사가 다섯 명이나 됐다.

그런 야마오카의 모습에 서지호는 앞을 가로막는 왜군 장수의 목을 일 검에 베어 버리고는 곧장 함교 쪽으로 다가갔다.

“네놈은 내가 상대해 주마!”

붉은 수술로 장식된 투구를 머리에 쓴 서지호를 힐끔 쳐다본 야마오카는 눈을 사납게 번득였다.

“가소로운 놈, 어디 덤벼 봐라!”

“히야압!”

채챙!

서지호가 힘껏 내려친 검을 야마오카가 막으면서 싸움이 시작됐다.

막부의 수많은 무사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장수답게 야마오카는 첫 공격을 막은 뒤 바로 힘이 가득 실린 검격으로 서지호를 압박했다.

“죽어라!”

하지만 미천한 출신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게 실력으로 만호 자리에 오른 서지호도 만만치가 않았다.

뒷걸음질을 치며 검격을 모두 비껴 낸 서지호는 틈이 보일 때마다 날카로운 공격을 찔러 넣었다.

순식간에 이십 합이 넘는 공방이 오갔고 생각과 달리 서지호를 빨리 제압하지 못하자 야마오카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놈!”

더욱 거세게 몰아치는 야마오카의 공격에 서지호는 식은땀을 흘리며 정신없이 방어를 했다.

서지호는 몇 합 상대를 해 보자 야마오카가 자신보다 훨씬 윗줄을 무인이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지만 휘하 장졸들이 보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이를 악물고 상대를 했다.

약이 바짝 오른 야마오카가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러 대는 그 순간 서지호에게 다시없는 기회가 왔다.

평소보다 더 큰 동작으로 검을 내려치는 걸 서지호가 피해 내자 잠시 야마오카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야마오카와 달리 머리를 차갑게 식히고 틈을 노리고 있던 서지호는 그걸 놓치지 않고 빙글 몸을 돌리며 번개처럼 검을 내리그었다.

“하압!”

“헉!”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은 야마오카가 헛바람을 삼키며 황급히 뒷걸음질을 쳤지만 너무 늦었다.

서걱.

“끄아악.”

생살이 베이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검을 든 오른쪽 팔이 잘린 야마오카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뱉었다.

“으으윽.”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피는 금방 갑판 위를 흥건히 적셨고 다른 쪽 손으로 어깨를 감싼 야마오카는 서지호를 노려보면서 상처 입은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단번에 상황을 역전시킨 서지호는 검 끝으로 상대를 겨누며 말했다.

“항복해라.”

핏발 선 눈을 한 야마오카는 악에 받친 듯 소리를 질렀다.

“개소리하지 마라!”

그러고는 왼팔로 허리에 예비로 하나 더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더니 목으로 가져가 자결을 시도했다.

“이런!”

화들짝 놀란 서지호가 제지를 하려고 했지만 반응이 반 박자 늦었다.

바로 그때 한쪽에서 커다란 총성이 울렸다.

타앙!

“큭.”

쨍그랑.

손목에 총탄이 박힌 야마오카는 들고 있던 검을 떨어뜨리자, 서지호가 재빨리 앞으로 몸을 날려 그를 제압했다.

“아아악.”

자결에 실패한 것이 분한지 갑판에 넘어져 다가온 수군 병사들에게 포박을 당하며 야마오카는 괴성을 내질렀다.

“죄송합니다.”

옆으로 다가와 머리를 숙이는 부관의 손에 들린 웅-오식 권총을 힐끔 쳐다본 서지호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자네 덕분에 자결을 저지할 수 있었어. 잘했네.”

“예.”

부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서지호는 검에 묻어 있는 피를 털어 검집에 집어넣은 뒤 주위를 둘러봤다.

이미 전투는 모두 다 끝나 있었다.

마지막에 벌인 난전으로 인해 아군도 적지 않은 사상자가 나왔지만 분명한 조선군의 대승이었다.

사납게 날뛰던 왜병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거나 목숨을 잃고 죽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포격을 받아 중간에 침몰한 왜선에 타고 있던 적군의 신세가 가장 처량했는데,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던 왜병들 상당수가 전투 중이라 신경을 못 쓰는 사이에 물속으로 사라졌다.

여유를 찾은 서지호는 포박을 당한 채 판옥선으로 끌려가는 왜병들을 보며 살짝 얼굴을 굳혔다.

“이상하지 않나?”

“뭐가 말씀입니까.”

“그냥 평범한 왜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체계적이고 강해. 그리고 아까 두목으로 보이는 놈이 자결을 하려고 했던 것도 이상해.”

“왜국은 형편이 어려워지면 영주가 부하들을 이끌고 나가 해적질을 한다고 하니, 이놈들을 그런 부류가 아니겠습니까.”

대수롭지 않은 듯 부관이 하는 이야기에 서지호는 그래도 뭔가 찝찝한지 좀처럼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너무 수상해. 수영水營으로 돌아가면 포로들을 철저히 심문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포로들을 다 옮겨 태운 조선군은 노획한 왜선 두 척과 돛대가 부서져 항해가 어려운 교역선을 줄로 묶어서 뒤에 끌고 본거지인 모슬포로 돌아갔다.

수영으로 돌아와 포로들을 하나씩 엄중하게 심문한 서지호는 아니나 다를까 평범한 왜구가 아니라 막부 휘하의 군사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대경실색했다.

서지호는 당장 지금까지 알아낸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소상히 상부에 보고했고 전라수사는 상황의 중대함을 인식하고 한양으로 장계를 올려 보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전라수영에서 급한 소식을 보내왔다는 말에 도현은 그 자리에서 바로 장계를 뜯어 읽어 보았다.

“이게 정녕 사실이란 말인가!”

파악!

큰 고함과 함께 도현이 내던진 장계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장계를 올린 궁내부 대신 장선징은 도현의 서슬 퍼런 기세에 차마 주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죄인처럼 몸을 잔뜩 움츠린 채 머리를 조아렸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이런 천하의 몹쓸 것들 같으니라고!”

서탁을 손바닥으로 쾅 내려친 도현이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려 이를 갈자, 때마침 이야기를 나누러 와 있다가 장선징이 장계를 들고 오는 바람에 옆으로 잠깐 물러나 있던 외무대신 박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소식이기에 그러십니까, 전하?”

박노의 침착한 말투에 겨우 이성을 되찾은 도현은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관자놀이를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면서 답했다.

“모슬포 만호가 최근 남해에서 노략질을 해 대던 해적을 잡았다고 하는군.”

“그럼 좋은 일 아닙니까?”

“문제는 그 해적이 왜국 막부의 병사들이란 거네.”

“허어!”

박노는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 탁 무릎을 치며 크게 한탄했다.

“확실한 정보랍니까?”

“해적을 생포해서 심문한 결과라고 하니 틀림없겠지.”

“어찌 이럴 수가.”

도현 못지않게 인상을 찡그리던 박노는 그를 향해 물었다.

“허면 왜국에 사신을 보내 이번 일을 엄중히 따져 물어야 되지 않겠사옵니까.”

아무래도 항의 서신만으로는 끝날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해 꺼낸 말이었지만, 도현은 그것도 성에 안 차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흥! 놈들이 점잖게 말하면 알아들을 것 같으시오?”

도현은 박노의 의견을 묵살하고는 궁내부대신 장선징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지금 당장 대전 회의를 소집하고 국방대신을 불러오라!”

“예, 전하!”

장선징은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몸을 벌떡 일으켜 예를 취하고는 그야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서둘러 희정당을 뛰쳐나갔다.

그러자 박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좋은 것이 좋다고 그냥 놔뒀더니 우리가 만만하게 보인 모양인데. 이번 기회에 본때를 보여 줘야 되지 않겠나.”

“설마…….”

“직접 군대를 보내 왜놈들을 혼내 줄 것이네.”

주먹을 꽉 움켜쥔 도현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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