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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벌 (73/104)

남벌

긴급회의가 소집된 대전은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신료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이건 절대 묵고할 수 없는 명백한 도발 행위요!”

손바닥으로 앉아 있는 왕좌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고는 넓은 대전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도현이 커다랗게 소리를 치자 외무대신 박노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일단 사신을 보내 막부에 엄중히 항의를 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비겁하게 몰래 칼을 들이민 놈들한테 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이럴 때일수록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의연함과 아량을 보여 주는 것이…….”

“듣기 싫소!”

눈썹을 치켜 올린 도현은 박노가 채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싹둑 잘라 버렸다.

강제로 말문이 막힌 채 입만 벙긋거리던 그는 이글거리는 도현의 눈빛을 마주하고선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지난 임진년에도 온갖 패악질을 일삼는 왜국을 넓은 아량으로 감싼 결과가 뭔가? 몰래 칼을 갈고 있던 풍신수길에게 뒤통수를 맞고 수년간 왜적의 더러운 발에 전 국토가 짓밟히는 치욕을 당하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 나갔네. 그런데도 또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하는 것인가!”

병조호란과 더불어 임진왜란은 조선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뼈아픈 치욕이었기에, 박노는 물론이고 대전에 모여 있는 대신들은 아무런 말도 할지 못했다.

“송구하옵니다.”

정색을 한 도현은 좌우를 훑어보고는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정체를 숨기고 몰래 해적질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면 속에 감춰진 막부의 음흉한 본모습을 알 수 있지 않겠나!”

“허면 어쩌실 생각이옵니까?”

총리대신인 박황이 조심스럽게 묻자 그는 눈을 날카롭게 뜨며 선언하듯 입을 열었다.

“미친개한테는 몽둥이가 약이라고 하지 않나. 다시는 이딴 수작을 하지 못하도록 혼쭐을 내 줘야지. 이번 기회에 임진년의 빚도 말끔히 갚고 말이야.”

“……!”

순간 대전 안은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크게 술렁거렸다.

“저, 전쟁을 벌이시려는 것이옵니까?”

그저 약간의 무력시위 정도만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가 너무 놀라 말까지 더듬는 외무대신 박노를 보며 도현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어디에 있겠나?”

“하지만 전하, 청나라가 호시탐탐 북방을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바다 건너에 있는 왜국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자칫 더 큰 화를 불러올 수도 있사옵니다.”

“외무대신의 말이 맞사옵니다. 전쟁을 재고해 주시옵소서.”

“재고해 주시옵소서.”

박황이 박노의 말을 거들자 다른 신하들도 대부분 전쟁에 반대를 했다.

강경파에 속하는 국방대신 임경업마저 드러내 놓고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회의적인 얼굴이었다.

그러자 이맛살을 찌푸린 도현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왜국의 도발을 그냥 이대로 참으란 건가!”

“물론 잘못된 것은 엄중히 따져야 되겠지만 어찌 됐건 우리가 화란 상관을 설치함으로써 촉발된 일이니 서로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가는 것이 낫지 않겠사옵니까.”

재무대신 김육의 이야기에 도현은 버럭 호통을 내질렀다.

“지금 우리가 잘못을 했다는 건가!”

“그게 아니옵고…….”

“경은 방금 전에 내가 한 이야기를 뭐로 들었나! 이미 등에 비수를 꽂으려는 자들을 상대로 무슨 대화를 한다는 거야!”

도현의 일갈에 김육은 찔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이런 식으로 하나 둘 물러서기 시작하면 종국에는 조선 땅 전체를 집어삼키려고 들 거야. 벚꽃은 피기 전에 가지를 꺾어 버려야 돼.”

결심을 단단히 굳힌 것 같은 도현의 모습에 지금까지 입을 닫고 있던 임경업이 한 발짝 앞으로 나오며 이야기를 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충분히 이해가 가옵니다만 현실적으로 청군을 앞에 두고 왜국에 대군을 보내는 것은 무리이옵니다.”

화를 낼 줄 알았던 도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왜국 정벌은 북방에 있는 병력을 빼내지 않고 청국이 개입하기 전에 속전속결로 치를 것이니 걱정들 마시오.”

“어떻게 그런단 말씀이시옵니까?”

중간에 바다가 가로막고 있어 어찌 보면 청나라보다 더 까다로운 상대가 바로 왜국이었기에 임경업을 비롯한 신료들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갸웃거리자 그는 짐짓 정색을 하며 말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절대 외부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될 것이오.”

“……예, 옛.”

“어찌할 것이냐 하면…….”

한참 동안 이어진 도현의 계획을 모두 듣고 나자 전쟁에 회의적이던 대전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정말 그렇게 해서 막부의 굴복을 받아 낼 수 있겠사옵니까?”

쉽게 믿기지 않는 듯 총리대신 박황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도현은 대답 대신 아까부터 연신 감탄성을 터트리고 있던 임경업을 보며 되물었다.

“국방대신, 경의 생각은 어떤가?”

“완전히 상대의 허를 찌르는 계획이옵니다. 말씀하신 대로만 된다면 막부는 손을 들고 항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태도를 완전히 바꿔 잔뜩 흥분한 얼굴로 대답하는 임경업의 모습에 그는 흡족한 표정을 짓고는 좌우에 늘어서 있는 신하들을 훑어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조선은 더 이상 은자의 나라가 아니다. 하늘 높이 비상해 그 옛날 대고구려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며 천하의 패자로 우뚝 설 것이다.”

도현이 가슴속에 품고 있던 웅심을 드러내자 신하들은 놀라 눈을 크게 뜨면서도 심장이 뜨거워졌다.

이미 명나라를 몰락시킨 청을 몰아내고 거란족까지 굴복시켜 옛 고구려 땅인 동북 지방을 장악했으니, 결코 이루지 못할 꿈이 아니었다.

“막부를 대조선제국의 첫 번째 제물로 삼을 것이오!”

강한 기세를 내뿜으며 도현이 제국이라는 말을 입에 담자 신하들은 전율을 느꼈다.

드넓은 만주를 호령하던 고구려를 마지막으로 수백 년간 한 번도 쓰지 못했던 제국이라는 단어에 지금까지 억눌려 있던 뜨거운 감정이 폭발했다.

연륜이 깊은 총리대신 박황마저 두 눈에서 희열에 찬 눈물을 흘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숙이며 크게 외쳤다.

“주상 전하 만세! 대조선제국 만세!”

그러자 다른 신하들도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며 황제만이 쓸 수 있는 만세를 목청껏 크게 소리쳤다.

“만세! 대조선제국 만세!”

그런 모습에 도현도 꽉 움켜 쥔 주먹을 위로 치켜들었다.

전쟁이 결정되자 도현은 총참모부를 중심으로 구체적인 공격 계획을 세우는 한편 막부에 이번 일을 엄중히 따지는 국서를 보냈다.

원래는 그런 것 없이 바로 선전포고를 할 생각이었지만 막부와 똑같은 무도한 무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형식은 갖춰야 된다는 총리대신과 신하들의 의견에 국서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대신 원래대로라면 어명을 받은 사신이 직접 국서를 가지고 막부가 있는 에도까지 가서 전달해야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국서만 부산포 왜관에 있는 막부 관리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난데없는 날벼락에 기겁을 한 막부 관리는 황급히 제일 빠른 배편을 수배해 국서를 에도로 보냈다.

며칠 뒤 도현이 보낸 국서가 에도에 도착하자, 막부 가신들 사이에 긴장된 분위기가 떠돌았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사신을 파견하는 것이 당연한데 가타부타 말도 없이 달랑 국서 한 장만 보내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또한 예를 중시하는 조선 국왕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쇼군 이에미쓰가 상석에 앉아 국서를 읽는 동안 소집된 막부 가신들은 과연 안에 무슨 말이 적혀 있을지 궁금해하면서 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이런 무례한!”

국서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내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이에미쓰는 마침내 호통을 치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곤 국서를 찢어발길 기세로 양손에 힘을 주어 구겨 버리자, 그 광경을 지켜본 신료들이 크게 경악하여 이에미쓰를 말렸다.

“쇼군, 진정하십시오.”

“대체 조선 국왕이 뭐라 하였습니까?”

이에미쓰는 꼴 보기도 싫다는 듯 국서를 옆으로 치워 버리곤 가신들을 향해 잔뜩 성난 눈빛을 번뜩거렸다.

“바보 같은 야마오카 놈이 조선군에 잡혔다는군!”

“네에?”

“설마요!”

“흥, 못 믿겠으면 자네들이 직접 읽어 보든가.”

그러면서 이에미쓰가 국서를 들어 앞으로 내던졌다.

아무렇게나 던진 국서가 바닥을 맞고 튕겨 나와 나뒹구는 광경에 가신들은 감히 손을 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조선 국왕이 마침내 정신이 나간 모양이지! 감히 나를 가만히 안 두겠다고 협박을 해?”

이에미쓰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것처럼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국서에는 비겁하게 해적으로 위장해서 조선을 향하는 교역선들을 습격한 막부의 행동을 꾸짖으면서 더 이상 이걸 좌시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경고가 구구절절 공들여 쓴 긴 문장에 적혀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네들이 맞을 짓을 했으니 혼 좀 나야겠다는 아주 간단명료한 내용이었는데, 그걸 교묘하게 상대방의 속을 벅벅 긁는 식으로 써 놨으니 이에미쓰의 화를 돋우기에는 효과 만점이었다.

“야마오카 놈, 안 들키고 조선으로 가는 무역선들을 다 막을 수 있을 거라며 자신만만해하더니, 이 무슨 추한 꼴이야!”

지금 당장이라도 야마오카의 부하와 식솔 들을 불러내 참수시켜 버릴 기세로 이에미쓰가 버럭 고함을 내지르자, 눈치를 보던 막부 가신 중 한 명이 겨우 용기를 내 말했다.

“쇼군, 조선 국왕이 이렇게까지 강하게 나오는 걸 보면 일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에 조선의 사정에 밝은 미우라도 수긍하고 나섰다.

“그렇습니다. 공작을 하던 걸 들키고 말았으니 조선 국왕의 진노가 엄청난 모양인데 이걸 어떻게 무마시켜야 할지 걱정입니다.”

“무조건 우린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야지!”

당연하다는 얼굴로 이에미쓰가 그리 말하자 미우라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야마오카가 포로로 잡혔는데 가능하겠습니까?”

“야마오카? 그게 누군가? 우리 막부 가신들 중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자가 없네.”

“……!”

“쇼, 쇼군.”

“아아, 그러고 보니 야마오카란 자가 있긴 했지. 하지만 건강이 나빠져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그 이후론 본 적이 없는 것 같네만.”

야마오카란 이름을 자기 입으로 내뱉은 게 불과 몇 분 전인데, 지금은 아예 금시초문인 듯이 모른 척을 하는 걸 보고 미우라와 막부 가신들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실 해명을 위해 서둘러 조선에 사신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신은 무슨! 저쪽도 이런 국서 한 장만 딸랑 보냈는데 우리만 예를 차릴 필요 따위 없지 않나.”

“그럼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필요하다면 내 지금 당장 국서를 적어 주지.”

그러면서 이에미쓰가 소매를 걷어 올렸다.

“쇼군!”

“그러시면 안 됩니다.”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그렇지 지금 이에미쓰처럼 반응하는 건 진흙탕 싸움으로 끌고 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정황상 불리한 것은 조선이 아니라 막부 쪽이지 않은가.

“더 이상 조선 국왕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까딱 잘못하다간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조선이 언제부터 우리가 눈치를 봐야 할 대국이었다고!”

“허나 쇼군, 대마도 번주가 조선을 우습게 보다가 크게 당한 일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변두리의 일개 작은 번과 감히 에도를 비교하는 건가!”

이에미쓰는 잘 들으라며 막부 신료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 왜국은 신이 깃든 선택받은 나라일세. 설령 조선인들이 군사를 이끌고 본토에 침입하려고 해도, 바다를 다 건너기도 전에 신풍에 의해 모조리 수장되고 말 것이야!”

신풍이란 말이 튀어나오자 막부 가신들의 얼굴에 희망적인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바다를 지배하는 변덕스러운 바람, 신풍.

예측할 수 없는 바람의 방향과 거친 물살 때문에 얼마나 많은 배들이 침몰하였는지는 셀 수조차 없으며 한평생을 바다에 바친 어부도 신풍을 뚫고 지나가기란 힘들었다.

“그래도 어쨌건 최소한의 조치는 취해야 합니다. 저쪽이 무례하게 군다고 해서 우리도 똑같이 행동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반쯤 설득당한 다른 막부 가신들과 달리 조선이 결코 만만치 않은 존재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미우라는 어떻게든 이에미쓰를 달래려고 애썼다.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미우라, 자네가 가서 내 뜻을 전하게. 막부에는 야마오카란 자가 없으며 그들이 행한 일은 우리와 절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예, 쇼군.”

결국 사신을 보내는 걸 허락하기는 했지만 이에미쓰는 내내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미우라 역시 임진년의 교훈을 잊고 너무 조선을 만만하게 생각하는 이에미쓰의 과도한 자신감에 불안함을 지우지 못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쇼군의 친서를 받은 미우라는 곧장 관선을 타고 에도를 출발해 조선 땅이 된 남해도(대마도)에 도착했다.

거기서 부산포를 거쳐 육로나 바닷길로 한양까지 올라가는 것이 일반적인 경로였다.

하지만 미우라는 남해도에서 발목이 잡혀 한양으로 갈 수가 없었다.

“입국을 허락할 수 없다는 그게 무슨 말입니까?”

포구 한쪽에 마련된 객사에서 조선 국왕의 입국 허락을 기다리고 있던 미우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눈을 크게 뜨며 상대를 쳐다봤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해 총독부 관리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는 사무적인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진정성이 없는 사과는 받아들일 의향이 없으니 한양까지 괜히 올 필요 없다는 조정의 전언입니다.”

“아니, 쇼군께서 직접 친서를 적어 주셨는데 그게 무슨 소리요!”

미우라가 따지듯 묻자 관리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친서만 가지고 오면 뭘 합니까. 해적으로 위장해 남해에서 노략질을 한 걸 막부의 지시가 아니었다고 부인을 하신다는데, 그게 바로 우리 조선을 능멸하는 행동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건…….”

“비겁한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과할 기회를 줬는데 또다시 조선을 무시하는 태도에, 주상 전하께서 크게 진노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그 화를 풀려면 그따위 친서로는 어림도 없고, 쇼군이 직접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야 될 겁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미우라를 놔두고 자기 할 말을 다 끝낸 관리는 냉정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그렇게 알고 돌아가십시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미적거리며 여기 남는다고 해서 입국 허락은 떨어지지 않을 테니 미련을 가지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으음.”

문이 닫히고 넓은 방 안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미우라는 지금까지 봐 오던 것과 달리 조선이 너무나도 강경한 태도로 나오자 불안감에 휩싸였다.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아.”

총독부 관리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한 미우라는 며칠을 더 객사에 머물면서 남해도 총독을 찾아갔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퇴짜를 맞았고 급기야 총독부 출입까지 제지당했다.

마지막에는 이에미쓰의 친서만이라도 접수해 달라고 사정했지만 그것마저 거절됐다.

그렇게 치욕을 당한 미우라는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뱃머리를 돌려 에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같은 시각 한양에서는 왜국을 정벌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예전 비변사 건물에 자리를 한 총참모부에서는 도현의 주재하에 군 핵심 지휘관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현재 동원 가능한 병력은 전라와 경상수영 군선 팔십 척과 장병 이만 명이옵니다.”

현재의 해군참모총장 격인 수군통제사 손억기의 말에 도현은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생각보다 적군.”

“북방군은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제외했고 경기도와 한양의 중앙군도 예비 전력으로 빼다 보니 남은 병력이 이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왜국 본토에 상륙해 거점을 하나씩 점령해 가는 것이 아니라 속전속결로 적 수군 주력을 격파하고 곧장 에도를 공략하는 데에는 이 병력으로도 충분할 것이옵니다.”

그러자 도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

손억기는 손에 든 지시봉으로 한쪽에 걸어 놓은 커다란 지도를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 갔다.

“준비가 끝나는 즉시 우선 원정에 참가하는 군선과 병력을 거제에 모두 집결시킬 것이옵니다. 여기서 배후 시설이 잘 갖춰지고 이동이 용이한 부산포가 아닌 거제도를 첫 출발지로 삼은 것은 왜관에 거주하는 왜인들이 정보를 누설하는 걸 막기 위해서입니다.”

조만간 왜관을 폐쇄하고 출입을 엄격히 통제할 것이지만 틈이 생길 수 있었기에 조금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아예 그런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 나았다.

“함대가 떠난 이후에도 거제도는 일 차 보급 거점이 되어 계속 원정군을 지원할 것입니다. 공격로는 남해도를 거친 뒤 구주와 본주 사이에 있는 간몬[關門]해협海峽을 지나 곧장 에도로 향하는 걸로 잡았습니다.”

다들 아주 진지한 얼굴로 설명을 들었다.

팔짱을 낀 채 앞에 있는 지도를 찬찬히 살피던 도현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간몬해협이라는 곳을 꼭 지나가야 되나?”

“예, 여길 통과하지 않는다면 구주를 크게 우회해 돌아가야 돼서 이동 거리가 두 배 가까이 길어지게 되옵니다.”

“흐음.”

원정을 가는 입장에서 이동 거리가 길어지는 건 상당한 부담이었는데 특히나 육지가 아닌 바다였기에 떠안아야 될 위험이 더 컸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울돌목처럼 폭이 상당히 좁은 해역을 대함대를 이끌고 지나가야 된다는 것이 꺼림칙했다.

그러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국방대신 임경업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뭘 염려하시는지 모르지 않습니다만 전쟁을 길게 끌고 가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옵니다.”

“그건 알지만 아무래도 찝찝한 건 어쩔 수가 없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도현이 좀처럼 떨떠름한 기분을 떨쳐 내지 못하자 통제사 손억기가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설사 왜적들이 이곳에 함정을 파고 기다린다고 해도 그걸 모조리 다 깨부수고 전진할 수 있으니 염려 마시옵소서.”

“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방심은 금물이야.”

따끔한 질책에 손억기는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불안감이 없지는 않지만 제장들의 의견이 그러니 일단 간몬해협을 진격로로 잡도록 하지.”

“예.”

“적 함대와는 어디쯤에서 조우할 것 같나?”

통제사 손억기는 지도의 한 부분을 지시봉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계획대로 된다면 이곳이나 여기쯤에서 첫 전투가 벌어질 것입니다.”

그가 짚은 곳은 사국四國을 가운데 두고 양옆에 위치한 분고수도豊後水道와 가이수도紀伊水道였다.

두 곳 다 간몬해협 못지않게 아주 좁은 수로였는데 분고수도의 경우 양쪽의 폭이 가장 좁은 지점이 삼십 리(14km)에 불과했다.

지도를 본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끄으응. 산 너머 또 산이군.”

“여기서 왜군 주력을 격파하면 막부가 있는 에도까지 곧장 갈 수 있습니다.”

그 말에 그나마 조금 위로가 됐다.

한참 지도를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린 도현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관건은 상대가 준비를 하기 전에 간몬해협을 지나고 두 수로에서 적 수군 주력을 어떻게 괴멸시키느냐는 거군.”

“그렇습니다. 일단 에도 앞까지만 가면 막부는 스스로 무너질 것이옵니다.”

도현이 택한 작전은 바로 수군 함대를 끌고 막부가 있는 에도를 직접 공격하는 거였다.

다른 나라와 달리 막부라는 아주 독특한 통치 체계를 가진 왜국을 상대하기 위한 맞춤 전략이었다.

일단 해로를 이용하면 육지에 상륙해 진격할 때보다 훨씬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고 단 몇 번의 전투만으로 중심인 에도까지 바로 직행하는 것이 가능했다.

여기서 왜국의 취약점이 드러나는데 보통 적군이 코앞까지 진격해 와서 공격을 퍼부으면 결사항전을 하거나 그도 아니면 다른 곳으로 본거지를 옮겨 가 계속 전쟁을 이어 가는 것이 정석이었다.

하지만 각 지방 번주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고 한 나라라는 응집력이 약한 데다 절대 권력을 가진 국왕이 아니었던 막부는 상징과도 같은 에도를 버릴 수가 없었다.

자칫 다른 곳으로 피난이라도 간다면 막부의 허약함을 알려지며 지방 번주들의 반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다분했다.

바로 이 점을 노리고 도현은 단시간에 적을 제압한 뒤 에도로 가서 막부를 굴복시키려는 거였다.

“좋아. 계획대로 진행해. 그리고 이번 원정은 짐도 함께할 것이니 그렇게들 알고 있도록.”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다들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봤다.

“친정을 하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눈을 크게 뜬 국방대신 임경업의 물음에 도현은 태연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소. 짐이 직접 쇼군에게 항복을 받아 낼 것이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장수들이 우려 가득한 시선으로 쳐다보며 반대했다.

“너무 위험하옵니다.”

“비록 성에 안 차시겠지만 이번 원정은 장수들에게 맡기십시오.”

국왕인 도현의 안위는 조선 전체의 운명과 직결되는 문제인 데다 육전과 달리 해전은 만에 하나 패배라도 했을 경우 후퇴하기가 더 어려웠기에 장수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만류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결심을 단단히 굳힌 듯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북방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청군과 치열한 전투도 벌였는데 왜국이라고 못 갈 건 없지. 짐이 함께한다면 장병들의 사기가 오르지 않겠나.”

“하오나…….”

장수들이 우려를 표시했지만 도현은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결정을 지었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짐의 결심을 바꿀 수 없을 것이오.”

“…….”

너무나도 확고한 태도에 장수들은 더 이상 반대를 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임경업을 통해 직접 친정을 한다는 걸 알게 된 대신들이 반대했지만 그의 결심을 꺾지 못했다.

한편 사신으로 보낸 미우라가 조선 본토에 발도 들여놓지도 못하고 다시 되돌아오자 이에미쓰는 크게 분노했다.

“이이…… 뭐 어쩌고 어째!”

보고를 받은 이에미쓰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호통을 치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미우라는 얼른 상체를 엎드리면서 말했다.

“쇼군, 다 제가 부족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듣기 싫네! 직접 와서 사과를 하라니 감히 날 뭐로 보고 그딴 소리를 하는 게야!”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알고 가능하면 숨기고 싶었지만, 수행원 중에 쇼군의 부하가 있어 그럴 수가 없었던 미우라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자 미우라와 함께 온건파에 속하는 막부 재정 담당 이시노가 눈치 빠르게 나서 이에미쓰가 더 화를 내기 전에 화제를 살짝 돌렸다.

“이렇게 되면 당분간 조선과 관계가 경색될 것이 분명하니 걱정입니다. 벌써 이번 달부터 나가사키에 들어오는 조선 상인들의 숫자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져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흥! 조선 따위는 필요 없어.”

콧방귀를 뀌며 잘라 말하는 이에미쓰와 달리 막부 재정에서 나가사키 상관을 통해 들어오는 관세가 만만치 않은 비중을 차지했기에 이시노의 표정은 상당히 어두웠다.

“문제는 야마오카가 건드린 교역선이 조선 상선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당장 화란 상인들도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나카사키 관청에 동인도회사 대표가 찾아와서 항의를 하고 돌아갔다 합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이에미쓰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다 제 놈들이 우릴 속이고 조선과 몰래 배를 맞춰서 벌어진 일이잖아. 우리와 관련이 없는 일이라 말하고 그냥 무시해 버려.”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옵니다. 저쪽에서는 합당하게 손해를 배상해 주지 않으면 상관을 철수할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뭐야!”

눈썹을 치켜 올린 이에미쓰는 옆에 있는 팔걸이를 손으로 세게 내려치며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이놈들이 교역을 허락해 달라고 온갖 아부를 떨 때는 언제고 뭐가 어째! 계속 헛소리를 지껄이면 이쪽에서 먼저 나가사키 상관을 폐쇄해 버린다고 해.”

“쇼군.”

극단적인 이야기에 이시노가 기겁을 했지만 화가 난 이에미쓰는 막무가내였다.

“오냐오냐해 줬더니 슬금슬금 기어오르는데 이번 기회에 다시는 까불지 못하도록 콧대를 꺾어 놔야겠어. 나가시키 행정관에게 내 뜻을 분명히 전달해!”

“옛.”

한쪽에 앉아 있던 서기가 크게 대답하는 걸 들으며 이시노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벌써부터 골치가 지끈거렸다.

그때 막부의 대표적인 무장인 쇼니 스네시게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조선의 태도가 심상치가 않은데 저희도 대비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이에미쓰가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조선이 전쟁이라도 일으킨다는 거야?”

“저번에 보낸 국서도 그렇고 사신을 아예 거부한 것까지 하나같이 여태껏 보여 준 조선의 모습과 판이하게 다르지 않습니까. 이게 뭘 뜻하겠습니까?”

날카로운 지적에 쇼니의 지적에 순간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이에미쓰도 막상 조선과 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고 하자 껄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 조선이 그렇게까지 할까?”

“힘을 쓰는 걸 즐겨하지 않고 안정을 중시하던 조선이지만, 현재 국왕은 선대와 달리 청국과 전쟁을 벌일 정도로 상당히 호전적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자라면 충분히 바다 건너까지 군대를 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으음.”

낮게 침음성을 흘린 이에미쓰는 고개를 미우라에게 돌리며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다른 가신들의 시선이 모두 집중되는 가운데 잠시 고심을 하던 미우라는 굳은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전쟁을 벌일지 확신은 하지 못하지만 이번에 대마도를 갔을 때 조선 측의 태도가 분명 다른 때와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한숨과 탄성이 터져 나오며 가신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허어.”

“이거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구먼.”

이에미쓰도 얼굴을 있는 대로 구겼다.

하지만 이제 와서 조선에 숙이고 들어갈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는지 이에미쓰는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자존심을 내세웠다.

“어디 마음대로 해보라지. 이번 기회에 아예 조선 국왕의 콧대를 꺾고 빼앗긴 대마도도 다시 되찾아오면 되겠군.”

극단적으로 치닫는 이에미쓰의 태도에 미우라는 한숨이 나왔지만 대놓고 말은 하지 못하고 우회해서 이야기를 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대화를 시도해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됐어. 저쪽에서도 거절을 하는데 더 이상 숙이고 들어갈 필요 없어. 쇼니.”

“예, 쇼군.”

“각 번에서 병력과 물자를 징발해 대비하고 있다가 조선군이 쳐들어오면 몽땅 바다에 다 수장시켜 버리도록 해.”

“알겠습니다.”

몸을 앞쪽으로 돌려 앉은 쇼니 장군은 이에미쓰의 지시에 상체를 숙이며 크게 대답했다.

다음 날 각 번에 막부의 소집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실제로 전쟁이 터진 것도 아니고 그냥 우려만 되는 상황인 데다 흉년까지 들어 사정이 어렵던 각 번주들은 막부의 지시에 미적거리며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았다.

부산포 외곽에 위치한 왜관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상거래를 하러 찾아온 사람들로 활발하게 붐볐다.

조선인과 왜국인이 한자리에 앉아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술자리 약속을 잡고 있었고, 일행을 따라왔는지 느긋하게 주변을 구경하는 사람도 있어 그야말로 가지각색이었다.

직접 나가사키 상관으로 가는 큰 상단을 제외하고 조선과 왜국 사이에 벌어지는 크고 작은 거래가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그중 왜관에서 주로 취급하는 물품은 바로 곡식이었는데 토지가 부족한 왜국이라 매년 상당한 양의 곡물을 조선에서 수입해 갔다.

특히 올해는 수확철에 불어닥친 태풍으로 인해 왜국 내의 농사가 흉작이 되어 버렸기에 곡물 거래가 더 활발했다.

그렇게 떠들썩하던 시장은 이내 바닥을 쿵쿵 울리는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창과 검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나타나자, 왜관은 순식간에 벌집을 들쑤신 듯 소란스러워졌다.

“길을 비켜라!”

“모두 하던 일을 멈추시오!”

병사들이 큰 목소리로 외치며 돌아다니자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거래를 마치고 막 돌아서던 조선인도, 바깥에 물건을 내놓고 팔다가 바닥에 떨어트려서 울상을 짓던 왜관 상인도, 단순히 자기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던 행인도 모두 투덜거리는 입을 다물고 시선을 집중했다.

“뭔 일이래?”

“글쎄?”

웅성거리며 불안한 얼굴로 병사들을 보고 있을 때 허리에 장검을 찬 군관 한 명이 나와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시간부로 왜관은 폐쇄하오! 그러니 조선인들은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모두 이곳을 떠나시오.”

청천벽력 같은 말에 몰려든 사람들이 크게 술렁거렸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런 소린 듣지 못했네.”

“왜관을 폐쇄하면 미리 선금을 지불한 물건은 어떡하란 소리요! 당장 낼모레까지 납품하지 못하면 우리 상단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손해를 보는지 아시오?”

처음엔 뭐가 뭔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들판에 불이 번져 나가듯이 여기저기서 크게 항의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특히 제일 크게 반발하고 나선 것은 조선 상인들이었는데, 왜국 상인들은 아무래도 남의 나라에서 땅을 빌려 장사를 하고 있는 처지인지라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일단 눈치를 살피기로 한 듯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어명이니 잠자코 따르시오, 만약 불복하는 자가 있으면 국법으로 엄히 다스릴 것이오. 여봐라!”

“……!”

어명이라는 이야기에 시끄럽게 항의하던 조선 상인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러자 군관이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왜관 내에 있는 조선인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바깥으로 이동시키도록 해라. 반항하거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바로 체포하도록 해.”

“예!”

상관의 지시가 떨어지자 병사들은 시장을 중심으로 사방에 흩어져 갓과 한복을 입은 조선인들을 붙잡고 억지로 잡아끌었다.

“이것 놔라! 내 발로 걸어갈 테다.”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긴 해도 순순히 명령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나마 나았지만, 개중엔 억지로 버티며 반항하는 자들도 꽤 있어 여기저기서 소동이 일어났다.

“아이고, 나리! 요 물건들만 챙기면 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니, 저쪽 가게에 내 봇짐을 놔두고 왔는데 그건 어쩌란 말입니까?”

이것저것 핑계를 대며 소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통에 군사들이 양쪽에서 팔다리를 붙잡고 운반하는 웃지 못할 광경까지 펼쳐졌다.

그와 동시에, 군사들이 왜관 안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낌새를 채고 후미진 골목에 피신해 있던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요 며칠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니 결국 일이 터졌군.”

그렇게 중얼거린 것은 턱 아래에 흉터자국이 있는 남자로, 왜국에서 파견된 간자 중 한 사람이었다.

평범한 상인처럼 위장하고 있지만 멀찍이서 병사들을 노려보는 눈빛이 날카로운 것이 제법 실력자라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났다.

“빨리 막부에 이 사실을 알려야 되지 않을까?”

“지금 움직이면 병사들한테 발각될 거야. 게다가 왜관 바깥에도 이미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겠지.”

동료의 의견을 침착하게 맞받아친 그는 아직도 소란스러운 시장 쪽을 흘낏 쳐다보고 말했다.

“일단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 각자 알아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나중에 이 자리에 다시 모이도록 하지.”

“알았어.”

순식간에 결정을 내린 사내와 그 동료들은 발소리조차 나지 않는 날렵한 움직임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어두운 밤을 틈타 탈출을 시도하던 왜국 간자들은 그럴 걸 미리 예상하고 왜관 주위에 매복해 있던 조선군 병사들에게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붙잡히고 말았다.

그렇게 꼬리가 잡힌 왜국 간자들은 주작단이 나서 철저하게 조사를 한 끝에 깨끗이 일망타진됐다.

일월 열째 날 날씨가 맑고 바람도 불지 않아 잔잔한 간몬해협에 작은 고깃배 하나가 떠 있었다.

선체 옆에 그물을 내려놨지만 선원들은 잔뜩 주위를 경계하면서 물고기를 잡는 것보다 다른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여기는 십육 자 반입니다.”

무거운 추를 달아 물속에 빠뜨린 밧줄을 끌어 올린 선원의 말에 털보 수염을 기른 사내가 옆에 서서 붓으로 얼른 기록을 했다.

“여긴 이쯤하면 됐으니 다음 지점으로 가세.”

“예.”

그러자 선원들은 재빨리 그물을 걷고 노를 저어 배를 움직였다.

이들은 바로 왜국에서 활동하는 주작단 단원들로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주요 진격로인 간몬해협의 수심을 은밀히 측정하고 있는 거였다.

노를 잡고 젓던 사내가 옆에 서서 주위를 살피고 있는 털보를 보며 말을 걸었다.

“대장.”

“왜 그래?”

“정말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까?”

살짝 미간을 찌푸린 털보는 정색을 한 채 질문을 한 사내를 쳐다봤다.

“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

“에이. 이 짓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니고 딱 하면 척이지요. 나가사키 상관 분위기도 그렇고 갑자기 우리보고 여기로 와서 바다 깊이를 재라는 걸 보면 뻔하지 않습니까.”

능청스러운 사내의 말에 털보는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행여 그런 말을 다른 곳에서 하지 마.”

“제가 바봅니까. 그나저나 대장이 이렇게 정색을 하는 걸 보니까 진짜로 왜놈들이랑 한판 붙는 모양이지요?”

“나도 정확하게는 몰라. 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건 사실이야.”

“심심하면 저들끼리 치고받고 하는 놈들인 데다 바다까지 건너와야 돼서 만만치가 않은데, 조정에서는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막부에서 왜구로 위장해 조선으로 가는 교역선을 마구 노략질했는데 그냥 놔둘 수는 없잖아.”

그러자 사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면 정말 막나가는 놈들 아닙니까? 아무리 바다에 수장시키면 증거가 안 남는다고 하지만 어떻게 그딴 짓을 벌일 수 있는지. 그것 때문에 제대로 탐보 활동을 못 했다고 접장님이 엄청 깨졌다죠?”

“그러니까 이번에는 더 확실하게 일을 처리해야 돼. 꼭 그게 아니라고 해도 진짜로 전쟁이 벌어진다면 지금 우리가 측정한 이 기록지에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이 달려 있어.”

“끄으응. 이거 괜히 어깨가 무거워지는데요.”

앓는 소리를 내는 부하를 보며 피식 미소를 지은 털보가 말했다.

“이쯤에서 측정을 하게 그만 멈춰.”

“예.”

잠시 뒤 배가 멈추자 주작단 단원들은 위장용 그물을 내린 뒤 추를 매단 밧줄을 물속에 빠뜨렸다.

그렇게 주작단은 공격로인 간몬해협과 분고, 가이수도의 수심을 세밀하게 측정해 총참모부에 알려 줬고 이건 원정 계획 수립에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삼월 첫째 날 도현이 제물포에서 치우 급 군함을 타고 출항하는 걸로 왜국 정벌이 시작됐다.

파도가 잔잔한 가운데 치우 급 군함 한 척과 판옥선 세 척으로 이루어진 함대는 순풍을 받으며 쾌속항진하고 있었다.

왕실 전용함 봉황호 함장이자 충무공 가문의 자손인 이충민은 자는 시간을 빼고는 한시도 함교를 떠나지 않고 함대를 지휘했다.

“우측 판옥선이 대열에서 뒤처진다. 속력을 더 올리라고 신호를 보내라.”

“예.”

지시를 받은 신호수가 수기를 이리저리 흔들자 이내 해당 판옥선이 앞으로 나와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그렇게 이충민이 지휘에 여념이 없을 때 가벼운 무복 차림의 도현이 칠현을 대동하고 함교로 올라왔다.

“고생들이 많군.”

그러자 이충민과 함교에 있던 인원들이 황급히 허리를 숙이면서 예를 갖췄다.

“오셨사옵니까.”

“오늘도 날씨가 아주 좋군.”

“전하께서 친히 나오신 걸 알고 바다에 있는 용왕님이 편안히 인도를 하는 것 같사옵니다.”

“하하하! 강직한 줄만 알았던 경이 그런 농담도 할 줄 아는구먼.”

살며시 입가에 미소를 짓는 이충민의 어깨를 두드려 준 도현은 함교 난간에 서서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제도까지 얼마나 남았나?”

“저기 보이는 것이 초도이니 늦어도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도착할 것이옵니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이충민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수평선 위에 제법 큰 섬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그렇군. 왜국에 건너갈 때도 지금처럼 날씨가 나쁘지 않았으면 좋겠군.”

“겨울에는 이쪽 지방에 큰 바람이 불지 않으니 너무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러고 보니 경이 이쪽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다고 했지?”

금방 생각났다는 얼굴로 도현이 쳐다보자 이충민은 머리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초관 시절 경상수영에서 삼 년간 있었습니다.”

“그럼 이쪽 바다에 대해서 잘 알겠군.”

“토박이만큼은 아닙니다만,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사옵니다.”

“허면, 왜군과도 싸워 봤나?”

“지난번 남해도 원정 때 참전했었습니다.”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대답에 도현은 감탄성을 내뱉었다.

“오, 그래. 전적이 화려하군.”

“송구스럽사옵니다.”

도현의 칭찬을 들은 이충민은 쑥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럼 한번 진지하게 물어볼까. 자네가 생각하기에 우리 조선군과 왜군 어느 쪽이 더 강하다고 생각하는가?”

“글쎄요.”

어느새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운 도현이 그를 바라보며 묻자 이충민은 잠시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답했다.

“병사들 개개인의 기량은 비슷하오나, 아무래도 왜군 쪽이 실전 경험이 많기 때문에 임기응변에 능합니다. 그러므로 직접 몸을 부딪치는 단병접전은 왜군이 우세하겠지만, 거리를 두고 싸운다면 뛰어난 성능의 화포를 가진 우리 쪽이 일방적으로 타격을 입힐 수 있기에 서로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흠.”

도현은 이충민의 대답을 곱씹듯이 음미하고는 말했다.

“자네 말은 어떤 전투 상황을 만드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것이라는 뜻이군.”

“그렇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수긍한 이충민은 순간 너무 주제넘었다고 생각했는지 서둘러 덧붙였다.

“하지만 이는 제 개인의 생각일 뿐이니 너무 귀담아 듣지는 마십시오. 괜한 말로 어심을 어지럽혔을까 싶어 두렵사옵니다.”

“아니야. 자네 의견을 들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네.”

그때 한쪽에 있던 군관이 바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크게 소리쳤다.

“전방에 정체불명의 선박 두 척이 있다는 신호이옵니다.”

깜짝 놀란 두 사람은 군관이 한쪽 팔을 들어 가리키는 전방 수평선을 쳐다봤다.

그러자 정말 수평선에 까만 점 같은 것이 두 개 보였는데 거리는 최소 팔십 리가 넘었다.

조선 영해 내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적이나 불순한 무리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기에 이충민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견시수!”

“옛.”

“돛대 위로 올라가서 상대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해!”

“알겠습니다.”

명령이 떨어지자 수군 병사들 중에 가장 눈이 밝은 자를 골라 뽑은 견시수가 다람쥐처럼 돛 줄을 잡고 가장 높고 큰 중앙 돛 위로 기어 올라갔다.

출렁거리는 돛 줄을 붙잡고 견시수가 용케 균형을 잡아 가며 성큼성큼 올라가자 이충민은 재차 지시를 내렸다.

“나머지는 경계 태세를 취한다. 다른 군선에도 신호를 보내고 속도를 줄여라!”

그러자 동료함에 이충민의 지시를 알리는 깃발이 올라가고 비상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땡땡땡!

병사들이 각자 위치로 바쁘게 뛰어가는 가운데 바짝 긴장한 표정의 이충민이 도현을 보며 말했다.

“전하, 어떤 돌발 사태가 벌어질지 모르니 잠시 선실로 내려가 계시지요?”

안전을 위해서 건넨 이야기였지만 힐끗 미확인 선박을 쳐다본 도현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좁은 배 안에서 선실로 간다고 해서 위험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방해가 안 된다면 그냥 여기에 있겠네.”

“방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황공하다는 듯 이충민이 손을 내젖자 도현은 어깨를 펴며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 짐은 신경 쓰지 말고 지휘를 하게.”

“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임금인 도현을 그냥 방치할 수는 없었기에 이충민은 부관을 불러 겉에 쇠를 두른 커다란 사각 방패를 든 병사 네 명을 함교로 올려 대기시켰다.

여차하면 방패병들로 하여금 총탄과 파편으로부터 그를 지키게 하려는 거였다.

그런 이충민의 생각을 도현도 눈치챘지만 그것마저 못하게 하면 자신을 신경 쓰느라 지휘를 제대로 못 할 것 같아 모르는 척했다.

그러는 사이에 수군 병사들은 언제든 포를 쏠 수 있도록 포문까지 열며 전투태세를 다 갖췄고 미확인 선박과의 거리가 계속 좁아졌다.

긴장된 시간이 지나고 서로 상대를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돛대 위에 올라가 있던 견시수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고함을 질렀다.

“아군 판옥선입니다.”

함교에서 망원경으로 전방을 살피던 이충민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경상수영 전선이다. 명령이 있을 때까지 사격은 금하고 전투태세는 계속 유지하도록.”

아군이라는 말에 표정을 풀던 도현은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조심하는 이충민의 모습에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잠시 뒤 백 보쯤 떨어진 곳에 멈춰선 판옥선 두 척은 삼족오기와 함께 경상수영 소속임을 알리는 깃발이 돛대에 걸려 있었다.

쪽배를 타고 건너온 군관을 통해 도현이 온다는 걸 알고 통제사가 마중을 보낸 군선임을 확인하자, 이충민은 전투태세를 해제하고는 경상수영 소속 판옥선을 길잡이로 앞세우고 다시 거제도로 항해를 했다.

거제도 동남쪽에 있는 한적한 어촌 고을에 불과했던 지세포는 원정군의 일 차 집결지가 되면서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수만 명의 원정군 병사들을 수용할 막사와 보급품 창고가 수없이 세워져 있었고 포구 앞에는 크고 작은 군선 팔십 척과 보급선 육십 척이 빽빽하게 바다를 뒤덮었다.

말 그대로 엄청난 장관이었는데 군선 중에 여덟 척가량의 치우 급 함은 마치 커다란 성채가 바다에 떠 있는 것 같은 위압감을 줬다.

함교에 선 도현은 앞에 보이는 대함대를 보고 감탄성을 터트렸다.

“대단하군.”

“저도 이렇게 많은 군선이 한곳에 모여 있는 건 처음 봤습니다.”

이충민의 이야기에 도현은 동의하듯 머리를 끄덕이면서 약간 흥분한 어투로 말했다.

“이 정도면 막부쯤은 단숨에 무릎 꿇릴 수 있지 않겠나.”

“아마 저희 함대의 위용만 봐도 오금이 저릴 겁니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감탄한 것이 그대로 느껴지는 이충민의 표정에 도현은 흡족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지.”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군선들을 지나 선착장에 기함이 멈추자 병사들이 얼른 잔교棧橋를 놓았다.

그리고 도현이 수행원들과 함께 아래로 내려가자 미리 연락을 받고 마중을 나와 있던 통제사 손억기와 장수들이 깍듯이 군례를 하며 예를 갖췄다.

“충! 어서 오십시오, 전하.”

집결지에 모여 있는 함대의 위용을 보고 기분이 좋아진 도현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장들을 여기서 보니 아주 반갑군,”

“저희도 그렇사옵니다.”

옆으로 비켜선 손억기는 포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진 전각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했다.

“지휘소에 간단한 다과를 마련해 놨으니 그리로 가시죠.”

“그럴까.”

손억기의 안내를 받으며 선착장 안으로 걸음을 옮긴 도현은 장수들과 함께 말을 타고 지휘소로 이동했다.

원정군 지휘부가 머무는 곳이지만 시간도 없고 어차피 오래 있지 않을 곳이라 통나무로 대충 지었다.

하지만 넓이는 아주 넓어서 도현과 덩치가 큰 장수 수십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도 여유가 있었다.

“좀 더 좋은 곳에 모셔야 되는데 송구하옵니다.”

화병도 가져다 놓고 나름 신경을 썼지만 그래도 국왕을 모시기에는 부족한 곳이었기에 손억기가 죄스럽다는 표정을 짓자 도현은 상관없다는 듯 한쪽 손을 내젓고는 상석으로 가서 앉았다.

“유희를 나온 것도 아니고 전쟁을 하러 가는 마당에 이 정도면 됐지. 짐은 괜찮으니 다들 좌정들 하시오.”

“예.”

그러자 손억기와 장수들이 각자 자리에 착석했다.

보기만 해도 듬직한 장수들을 찬찬히 훑어본 도현은 오른편에 앉은 손억기한테 시선을 주며 입을 열었다.

“집결은 다 끝난 건가?”

“나주에서 군량을 실고 오기로 되어 있는 수송선만 도착하면 되옵니다.”

“언제쯤 오나?”

“이르면 오늘 밤 늦어도 내일 정오까지는 도착할 것입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던 도현은 이어진 이야기에 표정을 풀었다.

“막부의 움직임은 어때?”

“그건 저보다 김 접장이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손억기의 말에 시선을 옆으로 옮기자 도현도 안면이 있는 주작단 간부인 김근행이 장수들 사이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자네가 이완 단장 대신 왔나 보군. 이름이…… 김근행이라고 했던가?”

도현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자 김근행은 황공하다는 듯이 머리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미력하나마 제가 원정군과 함께하게 됐습니다.”

“이완 단장이 언제고 주작단 내에서도 실력이 뛰어난 인재라고 말하던 것이 생각나는군. 아무튼 원정군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주게.”

“옛.”

칭찬에 얼굴이 잔뜩 상기된 김근행은 이내 자세를 바로 하고는 막부의 대응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로는 막부의 가신이자 명장으로 알려진 쇼니 스네시게가 병력 사천을 이끌고 구주 북부에 위치한 하카다에 진을 친 채 아군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사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남해도에서 사신의 입국이 거절됐을 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대비를 하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도현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의아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사천이라…… 적은 병력은 아니지만 상당히 애매한 숫자군. 혹시 다른 곳에 복병을 둔 것이 아니야?”

“그런 건 아니고 원래는 더 많은 병력을 모으려고 했지만 막부의 소집령에 각 번주들이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바람에 그렇게 됐습니다.”

“듣기로는 이에미쓰가 힘으로 번주들을 압박하며 상당한 통제력을 구축했다던데, 그거 의외로군.”

“원래는 그렇지만 흉년으로 각 번의 사정이 안 좋은 데다 아직 전쟁이 터지지 않았기에 번주들이 미적거리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막부에서 강하게 독려를 하고 있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군세는 늘어날 것이옵니다.”

“그러면 당분간은 우릴 저지할 적군이 그 사천 명뿐이라 이거지?”

“네, 구마모토 번군과 내륙에 막부군 이천 명이 더 있기는 하지만, 사쓰마 번과의 전쟁에 묶여 있고 모두 육군이라 해로를 통해 움직일 우리 원정군에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할 겁니다.”

“사쓰마 번이 그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군.”

예상과 달리 막부의 대응이 약한 걸 확인한 도현은 고무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통제사 손억기가 힘이 넘치는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병력도 적지만 군선도 절반 이상이 규모가 작은 고하야[小早]로 구성되어 있어 우리 함대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겁니다.”

고하야는 왜국이 보유한 군선 중에 가장 작은 규모로 노가 사십 개 정도뿐이고 방책이 낮아 공격에 아주 취약했다.

당연히 화포도 탑재되지 않았는데 오로지 조총을 쏘거나 접근전을 벌여 상대편 갑판에 뛰어오르는 것이 다였다.

“첫 전투에서 하카다에 있는 병력을 패퇴시킨다면 막부의 나머지 함대를 차례차례 각개격파시킬 수도 있겠군.”

“충분히 가능하옵니다. 그리고 주작단에서 조사를 한 결과 사국 양옆에 위치한 수도水道 모두 함대를 운용하기에 충분한 수심이지만, 상대가 매복할 수 있는 크고 작은 섬이 많고 좁은 수로를 며칠간 지나가야 되는 기이수도보다는 간몬해협을 통과하면 곧장 연결되어 넓은 바다로 나올 수 있는 분고수도를 진격로로 결정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가운데 있는 넓은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지도를 지휘봉으로 짚으면서 손억기가 하는 설명을 들은 도현은 머리를 끄덕였다.

“괜히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겠지. 그대로 실행하도록 해.”

“예.”

현황 보고가 모두 끝나자 도현은 좌우에 앉아 있는 장수들을 보며 묵직하고 진지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검을 뽑아 들었으니 임진년의 치욕과 왜적이 쏜 총탄에 불같이 산화한 충무공의 복수를 할 때가 왔다. 제장들은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아낌없이 발휘해, 왜국이 다시는 덤벼들 생각조차 할 수 없도록 조선 수군의 무서움과 기백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끼도록 만들라!”

도현의 말에 장수들은 전의를 뜨겁게 불태우며 방 안이 떠나가라 우렁차게 대답했다.

“목숨을 바쳐 적과 싸우겠습니다!”

승리에 대한 열망과 왜국에 복수를 하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장수들의 모습에 흡족한 표정을 지은 도현은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이틀 뒤 해가 뜨는 것과 함께 출정할 테니 모두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옛.”

드디어 도현의 최종 출정 명령이 떨어졌다.

이틀 뒤 기함 함교에 올라선 도현은 동쪽 수평선 너머로 찬란하게 떠오르는 일출을 맞으며 주욱 늘어서 있는 군선들을 든든한 얼굴로 쳐다본 뒤 한쪽 팔을 들며 크게 외쳤다.

“전 함대 출항하라!”

뿌우우웅!

신호수들이 고동나팔을 길게 부는 걸 신호로 지원 함선까지 합쳐서 무려 백 척이 훌쩍 넘는 대함대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는데 그 모습만으로도 엄청난 장관이었다.

구주 마쓰우라반도 북서쪽에 위치한 이키 섬(일기도壹岐島)은 현무암으로 둘러싸인 낮고 평평한 형태로 인구가 천여 명이 넘는 제법 규모가 있는 섬이었다.

지금은 조선에 병합된 대마도와 함께 해마다 한양에 조공을 보내는 곳이었는데 고구마나 콩, 보리를 키우는 밭농사도 짓지만 주로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 갔다.

오늘도 어김없이 어부들은 작은 배를 몰고 가까운 바다로 나와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으쌰! 오늘은 고기가 좀 많이 잡혀야 될 텐데 안 그래?”

“그럼 뭐 해. 만선을 하고 돌아가도 절반 넘게 윗대가리들한테 세금으로 다 빼앗기는데, 뭐.”

옆에서 같이 그물을 내리던 동료 어부가 불평을 쏟아 내자 머리띠를 하고 있는 사내도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러게 말이야. 힘들게 잡은 것 중에 크고 좋은 건 죄다 가져가 버리니…….”

“우리같이 힘없는 것들 피나 빨아먹고 살면서 관리네 무사네 하며 어깨에 힘을 주고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정말 더러워서. 에이, 퉤.”

“여긴 우리밖에 없지만 그렇게 말을 함부로 하다가 행여 윗사람들 귀에 들어가면 어쩌려고 그래?”

“흥. 그래 봤자 죽기밖에 더 하겠어.”

“이 사람, 집에 있는 마누라하고 자식들 생각도 해야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어서 일이나 하세.”

“알았어.”

그래도 가족 걱정은 되는지 그물을 올리던 어부는 뭘 봤는지 갑자기 동작을 멈추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어서 안 내리고 뭐 해? 이러다가 물때를 놓친다고.”

“저, 저길 봐!”

“뭔데 그래?”

귀찮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린 사내는 수평선을 가득 메우며 떠 있는 배들을 보고는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헉!”

마치 거대한 해일이 몰려오는 듯한 위압감을 줬는데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두 어부도 평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왜선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배 모양을 확인한 어부는 기겁을 하며 외쳤다.

“조, 조선군이야!”

<15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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