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충격
“어선입니다!”
높은 망루 위에 올라가 있던 견시수의 외침에 부관이 수군통제사 손억기를 보며 물었다.
“어찌할까요?”
“그냥 내버려 둬.”
“예?”
부관이 살짝 고개를 들며 되묻자 손억기는 함대가 움직이는 전방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심드렁하게 말했다.
“돛 하나 없는 고깃배에 화살이라도 날려야 된다고 생각하나? 어차피 저들이 섬에 돌아갈 즈음에는 이미 일이 다 끝나 있을 테니 놔두게.”
“아, 예.”
“그것보다 본진이 도착하기 전에 쾌속선 세 척을 내보내서 상륙 지점을 확보하라는 신호를 보내게.”
“알겠습니다, 통제사 어른.”
신호 깃발이 올라가고 얼마 있지 않아서 날렵하게 생긴 쾌속선들이 함대를 이탈해, 멀리 보이는 일기도(이키섬)를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조선군이 상륙 지점으로 잡은 곳은 일기도 서쪽 해안에 위치한 가쓰모토라는 곳이었는데 예전에 여몽 연합군이 왜국을 치기 위해 움직인 진격로와 똑같았다.
고운 모래가 깔린 백사장에는 작은 고깃배 몇 척과 햇볕에 생선을 말리기 위해 나와 있던 마을 사람들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나 다름이 없었는데 쇼군인 이에미쓰가 쇼니 스네시게를 구주로 내려보내고 각 영주들한테 병력을 모으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설마 조선이 진짜로 쳐들어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조선 수군의 등장에 주민들은 그야말로 혼비백산해서 사방으로 달아났다.
속도를 죽이지 않고 다가온 쾌속선들은 그대로 모래사장을 올라갔다.
끼이익. 쿵.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배 밑바닥이 모래톱 위에 올라서자 거란족 출신으로 이루어진 살수 부대가 물로 뛰어내렸다.
“하선하라!”
“와아아!”
“으차!”
철썩.
쾌속선들이 해안 가까이까지 접근했기 때문에 바닷물은 배에서 내린 병사들의 무릎까지밖에 안 왔다.
물기에 약한 조총 대신에 칼과 창으로 무장한 병사들은 곧장 바닷물을 헤치고 앞으로 나가 해안가로 올라섰다.
“방어 대형을 갖춰라!”
그나마 있던 주민들도 다 달아나 버려서 해안은 텅 비어 있었지만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질지 몰랐기에 병사들은 지휘관의 명령대로 황급히 방어 대형을 갖췄다.
“후우. 후우.”
방패로 몸을 가리고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는 병사들 뒤에서 천천히 주위를 살핀 지휘관은 긴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박 종사관!”
“예.”
“오십인대를 이끌고 저기 앞에 보이는 모래언덕 너머를 살펴보게.”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부하 장수는 바로 병사들을 이끌고 지휘관이 가리킨 곳으로 움직였다.
이내 병사들이 모래언덕 뒤로 사라지고 얼마 있지 않아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박 종사관은 양손을 교차해서 흔들며 크게 소리를 쳤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보입니다!”
그러자 굳어 있던 표정을 살짝 풀고는 손에 든 검을 집어넣으며 지휘관이 옆에 있던 부하에게 지시를 내렸다.
“신호를 올려.”
“옛.”
대답을 한 병사는 즉시 허리에 차고 있던 폭죽을 꺼내 위로 쏘아 올렸다.
쉬이이이익! 퍼어엉!
근위전용함인 봉황함 함교에서 망원경으로 해안을 주시하고 있던 도현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지는 폭죽에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해안이 안전한 모양이옵니다.”
옆에 함께 있던 이충민 함장의 말에 그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다행이군.”
“기함에서 상륙 신호가 떨어졌사옵니다!”
전장에 나온 만큼 관복 대신 얇은 갑주를 차려입은 칠현의 외침에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상륙 병력을 태운 판옥선 다섯 척이 함대를 빠져나와 해안으로 전진했다.
병력을 다 상륙시키지 않는 것은 이곳이 최종 목표가 아니라 왜국을 점령하기 위한 작은 디딤돌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한편 조선군이 나타났다는 급보는 해안에 있던 주민들을 통해 일기도의 주성인 세도우라 항구에 위치한 후나가쿠 성에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려졌다.
일기도 슈고다이[守護代](다이묘를 대리해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인 히다카는 한가롭게 조선에서 수입한 인삼차를 즐기고 있다가 갑자기 전해진 소식에 크게 놀라며 황급히 휘하에 있는 무사와 병사 들을 끌어모았다.
하지만 그 숫자는 삼백여 명에 불과했는데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기에 조선군이 상륙했다는 가쓰모토로 달려갔다.
이런 가운데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상륙 거점을 확보한 조선군은 가쓰모토 해안에 임시 본영을 설치한 뒤 별군 이천 명을 내보내 일기도 점령에 나섰다.
별군 지휘는 이완 단장의 동생으로, 군부에서 형 못지않은 뛰어난 활약을 하고 있는 이관 장군이 맡았다.
미리 침투해 있던 주작단 단원의 길 안내를 받아 별군은 신속하게 섬을 가로질러서 이동했다.
필연적으로 양쪽은 부딪칠 수밖에 없었고 다음 날 늦은 아침, 섬 중앙에 위치한 히츠메 성 앞에서 별군과 히다카가 이끄는 왜군이 조우했다.
행군 중에도 척후를 앞세우며 정찰하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던 이관은 히츠메 성에 왜군이 방어를 하러 나왔다는 걸 알고 부하들에게 전투태세를 갖추도록 했다.
말 등에 앉아 성을 살핀 이관은 망원경을 내리며 말했다.
“생각보다 왜군의 숫자가 적군.”
“섬에 거주하는 주민이 얼마 안 되기도 하지만 워낙 갑작스러운 공격이라 미처 모든 병력을 끌고 오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곳의 성인 남자들 상당수가 어업을 하면서도 상황에 따라 왜구로 변해 노략질을 벌이는 이들이기에 신속하게 제압하지 못하면 곤욕을 치를지도 모릅니다.”
옆에 있던 주작단 단원의 충고에 이미 남해도 점령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었던 이관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오늘 밤은 적을 몰아내고 저 성에서 묵는다. 전원 전투준비!”
잘 훈련된 정예병들답게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신속하게 전투대형을 갖추고 말을 이용해서 여기까지 끌고 온 황자총통 네 문을 언제든지 쏠 수 있도록 방열했다.
아무리 구경이 제일 큰 천자총통에 비교해 작다고 하지만 무거운 무쇠 덩어리인 화포를 야전에서 쓰는 건 상당히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대부분 성이나 군선에 고정시켜서 쓰는 것이 상식이었지만 조선군은 바퀴가 달린 포좌砲座와 수송용 말을 적극 이용해서 화포를 야전에서도 쓸 수 있도록 했다.
이미 청과의 전쟁에서 그 효과를 톡톡히 봤기에 이제는 전투 시에 조총과 더불어 화포를 사용하는 건 조선군한테 기본 전략이 됐다.
히츠메 성안에 있던 왜군은 자신들보다 많은 조선군의 모습에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오요로이라고 불리는 화려한 붉은색 갑옷을 차려입고 성루 위에 서 있던 히다카도 굳은 얼굴로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조선 놈들이 아주 작정을 하고 쳐들어온 것 같습니다.”
최측근 무사인 호리노의 말에 히다카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카다에 있는 쇼니 스네시게 장군이 지원군을 보내 주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어제 배를 띄웠으니 지금쯤이면 전령이 스네시게 장군의 군영에 도착했을 겁니다. 하지만 서둘러 온다고 해도 최소 이삼일은 지나야 될 겁니다.”
“이삼일이라…….”
솔직히 그때까지 조선군을 막아 낼 자신이 없었던 히다카는 미간을 찌푸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여기서 물러선다면 자신은 가진 모든 걸 잃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조선군이 움직입니다!”
다급한 병사의 외침을 듣고 상념에서 깨어난 히다카가 정면을 바라보자 대형을 갖추고 늘어서 있던 조선군이 성 쪽으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그러자 아랫입술을 꽉 깨문 히다카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며 소리쳤다.
“모두 전투준비를 하라!”
불리했지만 이쪽은 단단한 성벽을 가지고 있으니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 자위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조선군이 쏜 포탄이 성벽을 강타하는 것과 동시에 싹 사라져 버렸다.
“방포하라!”
꽝! 꽝! 꽝!
굉음을 울리면서 날아간 포탄은 히츠메 성을 직격해 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꽈아앙! 쿠쿵!
“으악.”
“크으윽.”
포탄에 맞은 성벽이 힘없이 깨져 나가고 파편에 피투성이가 된 적병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포격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도 컸지만 바다도 아니고 설마 조선군이 여기까지 화포를 끌고 왔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정신적인 충격이 더 심대했다.
성루 한쪽이 포탄에 박살 나면서 잔뜩 먼지를 뒤집어쓴 히다카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조선군 진형을 쳐다봤다.
“화, 화포 공격이라니…….”
“이러다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다 죽겠습니다.”
호리노의 말에 급히 주위를 둘러보자 한차례의 포격이었지만 성벽 곳곳이 무너져 있고 죽거나 치명상을 입고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부하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상태라면 하루는 고사하고 반나절도 못 버틸 것 같았다.
그렇다고 반격을 하자니 장거리 무기라곤 조총과 활밖에 없었는데 둘 다 사정거리가 미치지 않았다.
또다시 포탄들이 날아와 커다란 폭발을 일으키며 부하들의 목숨을 앗아 가자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히다카는 최후의 방법을 꺼내 들었다.
“제기랄! 어서 병사들을 성문 뒤로 집합시켜. 적진으로 돌격해 승부를 본다.”
“알겠습니다.”
무모한 방법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딱히 다른 길이 없고 무엇보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죽는 것보다 나았기에, 호리노는 굳은 얼굴로 대답을 했다.
잠시 뒤 왜병들이 모두 모이자 말 등에 올라탄 히다카는 손에 든 검을 위로 치켜들며 독려의 말을 했다.
“단번에 적진을 들이쳐서 조선군을 쫓아내자!”
“와아!”
“성문을 열어라!”
끼이이익.
“돌격!”
말을 탄 히다카와 무사들을 선두로 포격에 살아남은 왜병 이백 명가량이 함성을 내지르며 성을 뛰쳐나왔다.
기세는 사뭇 비장하고 사나웠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이렇게 나올 줄 알고 미리 장전을 한 채 대기하고 있던 조선군의 총알 세례였다.
“부나방 같은 것들. 모조리 다 쓸어버려라!”
반쯤 부서진 성문에서 쏟아져 나오는 왜병들을 보고 코웃음을 친 이관이 명령을 내리자 삼 단 사격 대형을 갖추고 있던 총병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발사!”
타타탕! 탕! 탕! 탕!
흑색화약 특유의 매캐하고 뿌연 연기가 앞을 가리는 것과 동시에 각종 무기를 들고 달려들던 왜병들이 썩은 짚단처럼 우수수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커헉.”
“끄윽.”
이히히힝.
사격을 끝낸 앞 열이 뒤로 빠지면 장전을 하고 대기 중이던 이 열과 삼 열이 차례로 연속 사격을 가하는 방법으로 육백 명이나 되는 총병이 쉬지 않고 총탄을 쏴 대자, 왜병들은 말 그대로 과녁으로 전락해 녹아내렸다.
왜군도 조총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선군이 보유한 수석식 총에 비해서 화력과 사정거리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나마도 공성전을 대비해 성벽 위에 배치했다가 초반 포격에 다 날아갔다.
“끄억!”
화려한 갑옷을 입고 말까지 타고 있어 눈에 확 들어오는 히다카는, 총병들의 집중사격으로 가슴과 어깨에 총탄을 세 발이나 맞고는 비명을 내지르면서 낙마했다.
그렇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힌 이관은 직접 거란 출신 기병들을 이끌고 나가 마지막으로 왜군의 숨통을 끊으며 마무리를 지었다.
두두두두.
“히아압!”
슈각!
“흐억.”
“꾸엑.”
츄앙. 채챙!
지휘관까지 잃고 우왕좌왕하는 왜병들 사이에 파고든 조선군 기병들은 가차 없이 무기를 휘둘러 상대를 죽였다.
그중에서 특히 이관의 활약이 대단했는데 형을 닮아 힘이 장사였던 그는 여든네 근(50kg)이나 나가는 철퇴를 자유자재로 쓰며 앞을 가로막는 왜병의 머리를 쳐서 단번에 으깨 버렸다.
그렇게 히다카를 비롯한 왜병의 대부분이 전멸하고 호리노가 몇몇 패잔병들과 함께 허겁지겁 달아나면서 전투는 불과 두 시진도 안 돼서 조선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처음 공언한 대로 당당하게 히츠메 성에 들어가 하룻밤을 묵은 이관은 다음 날 별군을 이끌고 지체 없이 동쪽으로 진격해 본성인 후나가쿠 성을 공격했다.
도망쳐 온 호리노를 통해 히다카의 죽음을 전해 들은 그의 처는, 자식들을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히츠메 성 전투에서 주력을 다 잃고 병사가 마흔 명도 남지 않은 호리노는 싸움을 포기하고 조선군이 도착하기 전에 배를 타고 스네시게가 있는 하카다로 갔다.
이로써 조선군은 중요한 전략 요충지인 일기도를 큰 희생 없이 이틀 만에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조선 함대는 세도우라 항구로 들어와 닻을 내리고 정박했고 도현은 장수들과 함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히다카가 업무를 보던 후나가쿠 성 혼마루 어전에 발을 들여놨다.
성 자체가 높다란 언덕 위에 위치한 데다 삼 층 높이로 지어진 혼마루 어전은 좌우에 있는 창을 열면 세도우라 항구와 앞바다가 훤히 다 내려다보였다.
실내를 한번 둘러본 도현은 창가로 걸어가 멀리 수평선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육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가 구주인가?”
“그렇습니다.”
수군통제사 손억기의 대답에 도현은 눈을 매섭게 번득이면서 말했다.
“가깝군.”
“배를 띄우면 두 시진도 안 돼서 당도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하카다라는 곳에 막부가 보낸 군대가 진을 치고 있다고 했지?”
“예. 여기서 동북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그렇게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우리가 순순히 그쪽으로 갈 거라 생각하다니, 미련한 놈들.”
도현이 냉소를 지으며 하는 말에 손억기 역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이미 오래전 여몽 연합군이 침공해 왔을 때 진격로로 선택했을 만큼 대규모 병력이 구주에 상륙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니 병법상으로도 나쁜 선택은 아니지 않겠사옵니까.”
“그럼 뭐 해, 우린 그쪽으로 가지 않을 텐데. 식수를 보충하고 하룻밤 휴식을 취한 뒤 바로 항구를 출발해 간몬해협으로 갈 테니 그렇게 알고 준비를 시키게.”
“알겠습니다.”
손억기의 대답을 들으며 뒤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던 도현은 늘어서 있는 장수들 사이에서 이관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멈췄다.
“이관 장군.”
“예, 전하.”
이관이 군례를 취하며 살짝 머리를 숙이자 도현은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주면서 단시간에 일기도를 점령한 걸 치하했다.
“이번에 아주 잘해 줬어.”
“황공하옵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활약을 해 주게.”
“하명만 하시면 이에미쓰의 목이라도 따 오겠나이다.”
“하하하! 역시 패기가 대단하군. 아주 마음에 들어.”
크게 웃음을 터트린 도현은 흡족한 얼굴로 이관을 쳐다보는 혼마루 한쪽에 마련된 숙소로 갔다.
한편 조선군이 일기도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허둥지둥 이동을 준비하던 스네시게군은 밤늦게 패잔병의 몰골로 도착한 호리노를 통해 이미 섬이 함락됐다는 걸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꽝!
“단 하루 만에 섬이 떨어지다니 도대체 히다카는 뭘 한 거야!”
단단히 화가 난 스네시게가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탁자를 세게 내려치며 고함을 내지르자 막사 안에 있던 장수들은 어깨를 움찔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런 모습을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던 스네시게는 말석에 앉아 있는 호리노를 노려보며 경멸하듯 말했다.
“주군이 전투 중에 목숨을 잃고 본거지마저 빼앗긴 상황에 제 몸 하나 살자고 여기까지 도망쳐 오다니! 저 비겁한 놈을 당장 끌고 나가 참수해라!”
힘들게 여기까지 와서 아군의 손에 죽게 된 호리노는 얼른 땅바닥에 엎드려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히다카 님의 뒤를 따라가지 못한 죄는 인정하지만 결코 제 목숨이 아까워서 도망쳐 온 것은 아닙니다!”
“흥! 그럼 뭐냐?”
“장군께 일기도가 함락됐다는 사실을 알리고, 얼마 남지 않은 병사들로 무의미한 저항을 하다 죽는 것보다 막부군과 함께 전장에 나가 히다카 님의 복수를 하려는 마음에, 치욕을 감수하고 온 것입니다.”
“변명은 그럴듯하군.”
“진심이옵니다. 만약 제 충심을 믿지 못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할복해 진실을 밝히겠습니다.”
상체를 일으킨 호리노는 품속에서 작은 단검을 꺼내 들고 당장이라도 할복을 하려는 듯이 상의를 벗었다.
그걸 물끄러미 쳐다보던 스네시게는 호리노가 단검을 배로 가져가자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제지했다.
“그만!”
“…….”
“좋아. 그 말을 믿어 주지. 하지만 전투가 벌어졌을 때 방금 이야기한 대로 행동을 하는지 똑똑히 지켜볼 것이야.”
차갑게 말을 내뱉은 스네시게는 팔을 내저었다.
“어찌 됐건 주군을 버리고 온 죄인이니 따로 부를 때까지 막사를 나가 근신하고 있도록.”
“……예.”
퉁명스러운 스네시게의 어투에 가까스로 위기는 넘겼지만 완전히 눈 밖에 난 것을 깨달은 호리노는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는 막사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막사 안 분위기가 더욱 무겁게 가라앉은 가운데 스네시게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기도가 함락됐으니 이제 곧 조선군이 나타나겠군.”
“조선군이 강력한 화포와 조총으로 무장을 했다고 하니 우리도 그에 대비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최측근인 나가야마의 말에 스네시게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화포가 몇 문이나 되나?”
“열 문밖에 없습니다.”
“당장 주변 번에 전령을 보내 화포를 최대한 많이 끌어모으고 병력을 보내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일기도로 이동하는 건 취소하고 이곳 해안에서 적과 맞서 싸울 테니까 밤을 새워서라도 진지를 더욱 튼튼히 보강하도록. 어떤 일이 있더라도 조선군을 상륙시켜서는 안 돼. 모두 알겠나!”
“옛.”
스네시게의 말에 장수들은 다들 결의에 찬 목소리로 크게 대답했다.
명령대로 왜병들은 밤을 새워 주변에 있던 나무를 잘라 해안에 목책을 세 겹으로 세우며 조선군의 상륙에 대비해서 하카다를 요새화했다.
그리고 전령도 각 번으로 보내졌지만 구주 내에서 가장 큰 세력인 사쓰마 번과 구마모토 번이 한창 전쟁 중인 상황이라 뒤로 빼낼 병력이 없었다.
결국 지원군이라고 도착한 건 달랑 창 하나만 쥐여 준 농민병 천 명과 구식 화포 세 문이 전부였다.
그걸 본 스네시게가 크게 화를 냈지만 조선군이 일기도를 점령했다는 소문이 번지면서 그동안 수세에 몰려 있던 구마모토 번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기에, 사쓰마 번 번주인 시마즈 미쓰히사는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자기들끼리도 서로 단결하지 못하고 분란을 일으키는 가운데 조선군은 남해도에서 도착한 후속 병력한테 일기도 방어를 맡기고 하카다가 아닌 곧장 간몬해협으로 향했다.
이런 것을 모르고 스네시게는 하카다 해변에서 조선군이 나타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쏴아아. 철썩.
거친 파도 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리는 해변에는 왜군 병사들이 아침부터 각자 모든 병기를 챙겨 들고 나와 조용히 방어 태세를 취한 채 서 있었다.
일기도가 제대로 저항조차 못해 보고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다들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 정오가 한참 지났는데도 조선군이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조금씩 자세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조선군이 바다를 건너올 것처럼 하더니만 왜 이렇게 조용해?”
장창과 방패를 들고 목책 뒤에 선 대머리 사내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리자 함께 있던 동료도 한쪽 손으로 배를 만지며 불평을 늘어놨다.
“그러게 말이야. 이럴 거면 밥이라도 주든가. 아침에 주먹밥 하나 달랑 먹고 계속 이렇게 서 있으려니까 배가 등가죽에 붙어 버릴 것 같아.”
“젠장.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던데.”
“그나저나 그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대머리 사내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혹시 주위에 상관이 없는지 둘러본 동료는 정색을 하며 이야기를 했다.
“일기도에서 도망쳐 온 놈들한테 들었는데 조선군 배가 이백 척이 넘는데.”
이백 척이라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대머리 사내는 이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렇게나 많을라고. 그 자식들이 비겁자라는 말을 듣기 싫어서 거짓말을 하는 거 아냐?”
“그것뿐만이 아냐. 화포도 얼마나 많이 가져왔는지 한 시진도 안 돼서 히츠메 성이 폐허로 변했다는 거야.”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조선 화포의 위력은 왜국 사람들에게 공포처럼 남아 있었기에 대머리 사내의 얼굴이 굳어졌다.
“돌로 쌓은 성도 단번에 박살 내 버리는 놈들인데 고작 이런 목책으로 막겠다니, 도대체 윗대가리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조선군이 나타나서 화포를 쏴 댄다면…….”
“우린 다 죽는 거지.”
“으음.”
동료의 말에 대머리 사내뿐만 아니라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병사들까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가뜩이나 조선군에 대해 이런저런 소문이 난무하는 가운데 실제 싸움을 벌였다가 참패를 당하고 쫓겨 온 일기도 출신 병사들이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인 채 퍼트린 이야기에 왜군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다.
이런 가운데 방어 진형 뒤편에 정면이 탁 트인 커다란 천막을 치고 화려하게 장식된 오요로이 갑옷을 입은 채 의자에 앉아 있던 스네시게도 아무리 기다려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조선군에 슬슬 짜증이 났다.
“늦군.”
그러자 휘하 무장 중 한 명이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상륙하는 것이 아닐까요?”
여기가 대군을 상륙시키기에 적격이었지만 다른 곳도 조금 무리를 하면 불가능한 건 아니었기에 스네시게는 미간을 좁혔다.
해안에서 조선군을 막지 못하고 내륙 진출을 허락한다면 전황이 더욱 복잡하게 꼬일 수밖에 없어 스네시게의 고민은 깊어졌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나가야마.”
“예.”
“기마대를 보내 해안을 돌아보라고 해.”
“알겠습니다.”
나가야마를 비롯한 다른 무장들도 시간이 흘러도 나타나지 않는 조선군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반대를 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 상기된 얼굴의 하급 무사 한 명이 천막 안으로 뛰어 들어와 흙바닥에 엎드렸다.
“장군, 큰일 났습니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스네시게는 안색을 살짝 굳히며 말했다.
“무슨 일이냐?”
“조선군을 발견했습니다.”
“그곳이 어디냐?”
“그게…….”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하급 무사가 머뭇거리자 스네시게는 버럭 고함을 지르며 재촉했다.
“빨리 말하지 않고 뭘 하느냐?”
“조선군이 여기가 아니라 배를 타고 동쪽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뭐야!”
화들짝 놀라 앉아 있던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스네시게를 대신해 최측근인 나가야마가 다급히 물었다.
“어디서 알아낸 정보냐!”
“근처 마을에 사는 어부들이 물질을 나갔다가 이동하는 조선 함대를 목격했다고 합니다.”
“혹시 잘못 본 것이 아니냐?”
“그들뿐만이 아니라 동쪽으로 가는 조선 함대를 봤다는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뜻밖의 소식에 막사 안에 있던 무장들이 웅성거리며 당황해할 때 얼굴을 찡그린 채 조선군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애쓰던 스네시게는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제기랄.”
“왜 그러십니까?”
“놈들이 노리는 건 여기가 아니라 에도였어!”
“서, 설마.”
“당장 막부에 전령을 띄워서 조선군이 에도를 공격하려 한다는 걸 알려. 어서!”
“알겠습니다.”
얼굴이 창백해진 나가야마는 직접 전령을 부르러 막사를 뛰어나갔고 졸지에 닭 쫓던 개 꼴이 되어 버린 스네시게는 치욕감에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놈들을 그냥.”
뒤늦게 자신이 당한 걸 깨달은 스네시게는 부랴부랴 병사들을 닦달해 조선군의 뒤를 쫓았지만 이미 한참 거리가 벌어진 데다 제대로 된 배도 부족해, 따라잡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도 그냥 손을 놓고 조선군이 에도로 가는 걸 지켜볼 수는 없었기에 허겁지겁 육로를 따라 간몬해협으로 달려갔다.
이렇게 스네시게가 독이 잔뜩 올라 뒤를 쫓아오고 있을 때 세도우라 항구를 떠난 조선 함대는 에도를 향해 쾌속 진군하고 있었다.
“간몬해협까지는 얼마나 더 가야 되나?”
회의를 하러 잠시 봉황함에 와 있던 수군통제사 손억기는 함교 난간에 서서 정면 바다를 바라보며 도현이 묻는 말에 얼른 대답했다.
“지금처럼 순풍이 계속 불어 준다면 이르면 내일 정오쯤에는 해협 입구가 보일 겁니다.”
“폭이 아주 좁다고 했지.”
“예. 가장 좁은 곳은 판옥선 세 척이 한꺼번에 빠져나가기 어려울 정도라고 합니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조수의 흐름이 빠르고 하루에도 몇 번씩 동서로 조류가 바뀔 정도로 까다로운 수로라는 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이맛살을 찡그렸다.
“온갖 악조건은 다 갖췄군.”
“솔직히 그렇습니다. 우리한테 시간이 없고 에도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었다면 절대 대함대를 이끌고 들어가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솔직한 손억기의 말에 도현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 와서 되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 있었다.
“위험한 도박이기는 해도 왜국과의 전쟁에 오래 붙잡혀 있을 수가 없으니 불가피한 선택이지 않겠나. 그저 무사히 해협을 통과시켜 달라고 하늘에 비는 수밖에…….”
모든 걸 천운에 맡기는 듯 이야기를 했지만 도현은 아군이 간몬해협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모든 조취를 취했다.
미리 해협의 지형을 파악하는 건 물론이고 수심까지 측정해 두고 요소요소마다 주작단 단원들을 배치해 만약에 있을지 모르는 위협에 대비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방안을 생각해 뒀지만 한순간의 선택에 수만 명의 목숨이 달려 있다 생각하니 도현은 좀처럼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런 심경을 눈치라도 챈 것처럼 통제사 손억기가 그를 위로하듯 말했다.
“모든 일이 다 잘될 테니 너무 심려 마십시오, 전하.”
“그렇게 되면 참으로 좋겠군. 아니, 꼭 그리 만들 걸세.”
사방이 붉게 물든 것처럼 주홍빛 노을이 어른거리는 먼바다 끝, 수평선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도현은 끊임없이 뱃머리를 치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일기도에 조선군이 나타났다는 전령이 도착하고 막부의 소란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스네시게로부터 백여 척이 넘는 조선 함대가 에도로 향한다는 급보가 날아들자 쇼군을 비롯한 막부 가신들은 대경실색하여 큰 혼돈에 빠졌다.
“조선군이 에도로 향할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두다니, 스네시게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막부 가신들이 모두 모인 어전 안에 벌겋게 상기된 이에미쓰의 화난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쇼군, 지금은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일단 이곳을 향해 밀고 들어오는 조선군을 막는 게 급선무입니다.”
“그렇습니다.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지요.”
가신들이 저마다 나서서 이에미쓰를 진정시켰다.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앉아 씩씩거리면서도 어쨌든 일단 침착함을 되찾은 이에미쓰는 날카롭게 좌중을 둘러보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음을 던졌다.
“조선군이 여기까지 오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지금처럼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일직선으로 향한다면, 아무리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당도할 것입니다.”
“일주일!”
이에미쓰는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고작 일주일이라니.
대항할 수군을 모으고, 에도 백성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기엔 너무 빠듯한 시간이었다.
생각보다 더욱 사태가 촉박한 것을 느끼고 그는 저도 모르게 딱딱하게 굳은 얼굴 표정으로 가신을 향해 물었다.
“그사이에 수군은 얼마나 모을 수 있겠나?”
“아무리 끌어모아도 쉰 척이 채 안 됩니다.”
그것도 파도가 크게 치면 뒤집어질까 불안한 작은 배까지 다 포함한 숫자였다.
“조선군은 백 척이 넘는다는데 고작 그 정도 가지곤 방패막이도 안 되겠군.”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에도를 버리고 피난을 갈 수도 없었기에 가신들은 자연히 할 말을 잃고 고개만 숙였다.
무겁게 가라앉은 방 안의 침묵에 질식할 것 같은 공기를 뚫고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쇼군, 해적들을 이용하면 어떻겠습니까?”
“해적?”
무슨 말이냐는 듯 이에미쓰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비록 노략질을 하며 먹고사는 놈들이긴 하지만 우리 수군보다 훨씬 숫자도 많고 튼튼한 배와 해전의 경험마저 풍부하니 잘만 쓰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해적이라니…….”
떨떠름한 이에미쓰의 기색에 말을 꺼낸 가신이 서둘러 덧붙였다.
“도구는 쓰기 나름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역사를 돌이켜 봐도 해적들을 전쟁에 이용한 선례가 많으니 크게 흠이 될 만한 일도 아닙니다.”
그의 설득에 조금 마음이 동했는지 이에미쓰가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하지만 해적이라면 곧 범죄자 아닌가. 흉악한 놈들이 많고, 작년엔 막부 깃발을 단 배를 습격한 적도 있는데 과연 말을 잘 듣겠나?”
게다가 그들 대부분은 수많은 소규모 집단이 모래사장에 점처럼 흩어져 있는 꼴이라 통제하기도 쉽지 않다.
그런 이에미쓰의 우려에 가신이 답했다.
“그러니까 미끼를 던져야 합니다.”
“미끼?”
“예. 조선군을 상대로 공적을 세우면 지금까지 저지른 죄를 모두 용서해 주겠다는 면죄부를 내세우는 겁니다. 그리고 특히 조선 장수의 머리를 베거나 배를 침몰시키는 자에겐 전공에 따라 관직과 재물을 하사한다는 조건이 덧붙는다면 금상첨화겠지요.”
범죄자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당당한 막부의 관리가 되는 것이니 충분히 혹할 만했다.
“과연 그것만 가지고 만족할까?”
“만약 우리 막부가 무너지고, 해적질을 엄격히 금하는 조선군이 에도를 점령한다면 그들에게도 발붙일 땅이 사라지는 격이니 협조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가만히 있으면 스스로 목을 죄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걸 놈들도 잘 알 겁니다.”
가신의 의견을 검토해 보는 듯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이에미쓰는 곧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했다.
“지금 현재로서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될 판이니 해적들을 이용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군. 당장 사람을 보내!”
“예!”
결정을 내린 이에미쓰는 손에 들고 있던 부채로 탁자를 탁 내리쳤다.
“해적을 끌어들인다 해도 여전히 조선군을 상대하기에는 수가 부족해. 각 번주들에게 연락해 최대한 많이 전선들을 모아 놓으라고 해. 절대 에도에 조선군이 발을 들여놓게 놔둬서는 안 돼!”
“알겠습니다, 쇼군!”
전쟁 시작을 알리는 나팔이 귓가에 울린 것처럼 비장한 표정을 한 가신들은 일제히 바닥에 몸을 엎드린 채 한목소리로 쇼군의 말에 답했다.
조선군이 진군해 오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은 불과 하루도 되지 않아 높은 에도 성[江戶城]의 성벽을 넘어 에도 전체에 퍼져 나갔다.
“자네 그 소문 들었나?”
“뭘?”
찻집 평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꼬치에 꿰어 파는 경단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중년 사내는 친구의 말에 고개를 들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조선 국왕이 수백 척의 군선에 군사들을 가득 태우고 에도로 오고 있다지 않나.”
주위에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춰 친구가 속닥거렸다.
중년 사내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게 정말인가? 또 어디서 헛소문을 듣고 온 거 아냐?”
“허어. 이런 답답한 친구를 봤나. 오늘 내내 그 이야기로 저잣거리가 떠들썩한데 아직도 모르고 있었단 말이야.”
“약방에 납품할 약초를 캐느라 산속에 들어갔다가 이제 내려왔는데 내가 알 턱이 있겠나.”
핀잔을 주는 친구의 말에 중년 사내는 변명하듯이 대꾸했다.
그러고 보니 길거리에 나다니는 사람 수가 좀 줄어든 것 같기도 하고, 어딘지 모르게 흉흉하면서 어수선한 분위기가 떠도는 느낌도 들었다.
“그건 그렇고 조선군이 쳐들어온다니 진짠가?”
못 믿겠다는 듯이 중년 사내가 되묻자 친구는 정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지금 그것 때문에 에도 성이 난리가 났다는군.”
에도 성은 쇼군의 거처로 막부가 가진 권세에 걸맞게 엄청 크고 화려하게 지어진 곳이다.
멀리서 봐도 그 위용에 기가 눌릴 정도인데, 그런 에도 성이 소란스럽다면 사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설마…….”
“오늘만 해도 각 번주들한테 가는 전령들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성문을 빠져나갔다고 하더구먼. 조선군이 앞바다에 나타나기 전에 짐을 싸서 피난이라도 떠나야 되는 거 아닌가 몰라.”
한가하게 경단이나 먹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듯 친구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조선군이 정말 여기까지 올지 확실한 것도 아닌데 너무 성급한 거 아닌가? 그리고 강한 막부군과 수많은 번군들이 있는데 쉽사리 에도까지 오지는 못할 걸세.”
낙관적인 중년 사내의 말에 친구는 불안하게 사방으로 주변을 살피던 시선을 바로 하고, 조금 침착함을 되찾은 듯 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렇겠지?”
“그리고 우리한테는 신의 바람이 있잖아.”
“신의 바람?”
“신풍神風 말이야. 예전 몽고군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도 한겨울에 매서운 태풍이 불어 수많은 몽고군 병사들을 모조리 바닷속에 수장시켜 버렸잖아.”
“아, 그 이야기라면 나도 들어 본 적이 있네.”
이미 백 년도 전에 있었던 일이라 실감은 안 났지만 그래도 일말의 위안은 되었다.
“우리 왜국은 아마테라스 여신의 가호를 받는 신의 나라 아닌가. 누가 감히 신이 머무는 땅을 침범할 수 있겠어.”
중년 사내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선군 역시 몽고군과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거야. 우린 그저 신에게 지켜 달라고 기도만 하면 돼.”
“그래도 혹시 모르니 공물이라도 바쳐야 하지 않을까?”
“자네 맘대로 하게나.”
그렇게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남은 경단을 입속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처럼 에도 주민들은 소문을 반신반의하면서도 설마 하는 생각에 본격적인 피난 행렬에 나서는 사람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정녕 이들의 바람대로 신풍이 왜국을 수호해 줄지 아니면 전설 속의 이야기로 끝나 버릴지 그 결과는 아직 아무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