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풍은 없다(2)
“지금이다. 우향 전타!”
돛을 활짝 펼친 봉황함은 왜선과 한데 뒤엉켜서 난전을 벌이고 있는 중군 판옥선 바로 뒤에서 크게 선회하며 왼쪽 측면을 드러냈다.
“닻을 내려라!”
도현의 명령에 이충민 함장이 깜짝 놀라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전하, 그러면 신속히 움직일 수 없고 배가 여기에 발이 묶이게 됩니다.”
“알고 있어.”
“한데 왜……?”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이충민 함장의 시선을 받으며 도현은 단호하게 이야기를 했다.
“단 한 발자국도 여기서 물러서지 않고 싸우려는 걸세.”
“전하!”
“경과 말싸움을 벌일 시간이 없으니 어서 지시한 대로 해!”
“후우. 알겠습니다. 닻을 내려라!”
아군 병사들과 운명을 함께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보이는 그의 태도에 이충민 함장은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드드득.
이내 선수와 선미에서 무거운 닻이 내려졌고 봉황함은 중군 판옥선 뒤편에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
“함포 사격 준비!”
덜컹.
끼릭.
재차 이어진 도현의 명령에 현측 포구가 일제히 열리면서 탑재되어 있던 각종 구경의 화포들이 길쭉한 포신을 내밀었다.
“목표는 전방에 보이는 모든 적선이다. 먹잇감이 널려 있으니 실수하지 말고 모조리 다 바닷속에 수장시켜 버려라. 발사!”
목이 터져라 소리를 치며 도현이 위로 치켜들었던 지휘봉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수십 문의 화포가 한꺼번에 불을 뿜었다.
꽈꽈꽝! 꽝! 꽝!
쉬이익.
쿠쿵! 꽈앙! 우지끈.
긴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간 포탄은 힘겹게 버티고 있는 중군을 무너뜨리려고 다가오던 번주군 안택선들 위에 떨어졌다.
하얀 물기둥이 무수히 많이 솟구치는 가운데 왜선에 명중한 포탄은 선체를 부수며 크고 작은 구멍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폭발과 파편에 휩쓸린 왜병들은 비명을 내지르거나 피 떡이 되어 널브러졌다.
“끄억.”
“큭.”
봉황함 단 한 척이 가세한 것뿐이었지만 다른 군선들을 월등히 뛰어넘는 화력은 상대의 기세를 꺾어 놓기에 충분했다.
중군을 돌파해 조선군 진형을 무너뜨리려던 오카도와 번주군 수군들은 대열을 마구 헤집으며 쏟아지는 포탄에 큰 충격을 받았다.
“으윽.”
대장선에 타고 있던 오카도도 포탄이 함교 바로 옆에 떨어져 터지는 충격에 중심을 잃고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황급히 달려온 요시라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난 오카도는 다행히 포탄이 선체에 맞은 것이 아니라 간발의 차이로 빗나가 바다에 떨어진 덕분에 별다른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부하들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칙쇼! 당장 반격을 해.”
“옛.”
잔뜩 화가 난 오카도의 고함에 무사들은 함교를 내려가 포수들을 닦달했다.
그러자 안택선들도 선수부에 탑재된 화포를 정면에 태산처럼 서 있는 봉황함을 향해 쏴 댔다.
꽝! 꽝! 꽝!
한편 선체 곳곳이 부서지고 피로 흥건하게 물들어 있었지만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전열을 사수하고 있던 중군 병사들은 새롭게 나타난 안택선들을 보고 절망에 찬 표정을 짓고 있다가 엄청난 폭음과 함께 왜선들이 형편없이 깨져 나가자 어리둥절해했다.
그러다가 어느새 자신들 뒤에 나타나 든든하게 서 있는 봉황함을 발견하고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헉헉. 어디서 쏜 포탄이지?”
“저기 뒤를 보십시오!”
몇 번이나 도선을 시도하는 왜병들과 싸워 격퇴하느라 입고 있는 갑옷이 더러워지고 여기저기 작은 부상을 당한 모슬포만호 서지호는 부장의 말에 뒤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높다랗게 솟은 돛대 위에 황금빛으로 펄럭이는 봉황기를 내건 치우 급 군선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저, 저건!”
“봉황함입니다. 주상 전하께서 우리를 도우러 오셨습니다.”
“이런 황망한 일이 있나. 행여나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시면 어쩌시려고 여기까지 나오신 건지.”
지원군이 왔다는 기쁨보다 서지호는 임금인 도현의 안위가 먼저 염려됐다.
“뒤에서 지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군이 위험에 처하니 직접 구하러 싸움에 뛰어드시다니 역시 주상 전하십니다.”
얼굴 가득 감격한 표정을 지은 부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지호가 탄 판옥선은 물론이고 진형 중앙에서 혈전을 치르고 있던 조선 수군 병사들은 언제 지쳐 있었냐는 듯 함성을 내지르며 다시 힘을 냈다.
“와아아!”
“주상 전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더 물러설 곳이 없었기에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지만 이제 한계라고 생각하고 있던 병사들에게 도현이 탄 봉황함의 등장은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과 함께 큰 용기를 불어넣어 줬다.
사기가 오른 병사들은 갑판 위에 올라온 적을 다시금 거세게 밀어붙이면서 배를 사수했다.
츄앙.
채챙! 챙! 챙!
“으악.”
“끄헉.”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다가 갑자기 돌변해 무섭게 몰아치는 조선 수군 병사들의 공격에 왜병들은 크게 당황했다.
“칙쇼!”
“이것들이 왜 이래?”
“다 덤벼라, 이놈들아!”
일대일로 싸우면 단병접전에 능한 왜병들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독이 바짝 올라 있는 데다 도현이 나타나면서 용기백배한 조선 수군 병사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덤벼들자 오히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야압!”
“컥.”
마치 죽음을 도외시한 듯 한쪽 팔이 잘려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악착같이 반으로 부러진 검을 휘두르고 바닥에 쓰러지면 발목이라도 붙잡고 늘어지는 조선 수군 병사들의 독기에 왜병들은 겁을 집어먹었다.
이런 가운데 봉황함은 어느새 고로가 지휘하는 막부 수군까지 가세한 적군의 집중 포격을 혼자 견뎌 내며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슈우우웅! 꽈아앙!
“크헉.”
포탄에 맞아 깨진 나무 파편이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솟아오른 물기둥에 짠 바닷물을 온통 뒤집어쓰면서도 봉황함 수병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히 적과 맞섰다.
쏴아아.
바로 옆에 포탄이 떨어져 물기둥이 솟구쳤지만 도현은 갑판 아래로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고 함교에 서서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
“전하, 전투는 저한테 맡기시고 선실로 내려가십시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경이 맡은 일을 하라!”
밑으로 피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는 듯한 도현의 모습에 이충민 함장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행여 다칠까 봐 노심초사하는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현은 커다란 방패를 들고 양옆에 서 있는 위사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가 목청을 높여 연신 명령을 내렸다.
“신기전 발사 준비!”
그러자 수병들이 육지에서나 쓰는 신기전 수레를 끌고 나와 갑판 한쪽에 세웠다.
“움직이면 큰일이니까 단단히 고정해!”
“옛.”
포술장의 말에 신기전 운용을 맡은 수병들은 특별히 제작한 고정 장치를 수레바퀴 앞뒤에 끼웠고 그것도 부족해 단단한 밧줄로 본체 양옆을 고정했다.
아무도 신기전을 배에서 쓸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회귀 전 기억을 가진 도현의 지시로 시험 발사를 해 보고는 의외로 효과가 좋아 봉황함에 두 문을 탑재했다.
“준비 끝!”
“사격 개시!”
도현의 명령에 포술장이 손에 들고 있던 횃불로 심지에 불을 붙이자 장전되어 있던 신기전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하늘로 솟구쳤다.
쉬이익.
쉬익!
꼬리에서 하얀 연기를 뿜어내며 날아오른 신기전들은 격전을 벌이고 있는 아군 판옥선들을 넘어 왜선들이 있는 곳에 떨어졌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왜병들은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가 신기전들이 머리 위까지 날아와 떨어지자 그때야 기겁을 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저게 뭐지?”
“헉! 여기로 떨어진다.”
“어서 피해!”
하지만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신기전은 마치 저승사자처럼 왜병들에게 뜨거운 지옥불을 선사했다.
투투툭.
꽈앙! 쾅!
화르르륵.
신기전에 달려 있던 대나무 통이 공중에서 폭발하면서 불덩어리들이 쏟아져 왜선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화, 화공이다!”
“으아악.”
불덩어리의 정체는 동물 기름과 송진 그리고 유황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서 만든 거였는데, 끈적끈적한 액체에 불이 붙으면 아무리 물을 끼얹어도 잘 꺼지지 않았다.
“물을 뿌려라!”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왜병들은 나무통에 물을 담아 불을 끄려고 했으나, 오히려 기름을 뿌린 듯 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고 놀라 달아났다.
“사, 사람 살려!”
“끄악.”
“저, 저리 가!”
불길을 제압하려 덤벼들었다가 반대로 불똥이 옷과 갑옷에 튀어 번지자 목숨을 구걸하는 비명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뭣들 하는가, 어서 불을 끄지 않고!”
바람을 타고 불꽃이 더욱 거세게 일어나며 배를 집어삼키는 광경에 오카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채를 던졌다.
“주군, 아무리 물을 끼얹어도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뭐가 어째?”
오카도는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조선 놈들이 사악한 술수라도 부렸단 말이냐? 어찌 세상에 꺼지지 않는 불이 있단 말이야!”
그렇게 고함을 내지르는 와중에도 불은 점점 더 기세를 올려 왜선을 통째로 집어삼킬 듯이 활활 타올랐다.
불길은 아래쪽 선실까지 빠르게 번졌고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상태에 이르자 요시라가 다급한 얼굴로 말했다.
“안 되겠습니다. 배를 버려야겠습니다.”
“뭐야!”
“이미 선실까지 불이 번져 진화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익.”
오카도는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주군.”
“젠장! 알았네.”
욕설을 내뱉으며 오카도가 머리를 끄덕이자 요시라는 주위에 있던 무사와 호위병 들을 보면서 소리쳤다.
“주군을 모셔라!”
“옛.”
“가시죠.”
마치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태산처럼 앞을 막고 서 있는 중군 판옥선들과 봉황함을, 이를 부드득 갈며 노려본 오카도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요시라와 호위들을 따라 이미 지붕에 불이 붙기 시작한 함교를 내려갔다.
그러고는 줄사다리를 타고 연락용으로 쓰는 잡은 협선에 옮겨 탔다.
오카도의 대장선뿐만 아니라 중군을 돌파하려던 안택선 상당수가 연속해서 발사된 신기전 공격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타올랐다.
아무리 물을 끼얹어도 잘 꺼지지 않는 데다 바짝 마른 갑판과 선실 목재 들이 화마가 더 잘 타오를 수 있도록 먹이를 제공했다.
거기다가 선실에 불이 옮겨붙으면서 화물칸에 보관하고 있던 화약이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꽈아앙! 꽝!
폭발에 선체 옆구리가 터져 나간 왜선은 시뻘건 화염에 휩싸인 채 급격히 옆으로 기울어지다니 이내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수많은 왜병들을 끌어안고 바닷속 깊이 가라앉았다.
“으아악!”
“살려 줘.”
왜병들은 몸에 불이 붙은 채 바다에 뛰어들거나 필사적으로 헤엄을 쳤지만 배가 침몰하면서 일으킨 소용돌이에 휩쓸려 사라졌다.
그렇게 선체가 온통 불길에 뒤덮인 채 침몰하는 왜선들이 속출하며 중군을 압박하던 적군의 기세가 급격하게 사그라졌다.
계속 신기전을 사용하면 좋았겠지만 가지고 있던 신기전 화살이 모두 바닥난 봉황함은 함포 사격으로 적선을 하나하나 조준해 깨뜨렸다.
“오카도 번주가 탑승한 전선이 침몰하는 중이고 선두에 나섰던 번주군 안택선들이 불에 타고 있습니다.”
하급 무사의 비명 섞인 보고에 함교 난간을 잡고 서 있던 구루시마 고로는 참담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보고를 듣지 않더라도 눈앞에 보이는 참상에 번주군의 괴멸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불에 타거나 부서져 가라앉고 있는 배들은 전부 아군이었다.
그에 반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던 조선군 진형은 여전히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었고 그 뒤로 난생처음 보는 엄청난 덩치의 군선은 무시무시한 화력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아군 함선을 박살 내고 있었다.
특히 방금 전까지 봉황함에서 쏟아 내던 화염의 비는 정말 염화 지옥을 보는 것처럼 끔찍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꽝!
“다 저놈 때문이야!”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고로는 주먹으로 난간을 세게 내려치며 노성을 터트렸다.
“이노우에!”
“옛.”
“돌격 깃발을 올리고 각 전선들한테 포위망을 돌파하라고 해! 누가 이기나 아주 끝장을 내고 말겠어.”
악에 받친 듯한 고로의 명령에 이노우에가 황급히 그를 만류했다.
“장군, 진정하십시오. 지금 돌격을 했다가는 괴멸된 번주군 꼴이 될 겁니다.”
“어차피 이판사판이야. 지금 포위망을 뚫어 내지 못한다면 이대로 꼼짝없이 갇혀 조선군이 쏘아 대는 포격에 먹잇감이 될 뿐이다.”
“하지만…….”
이노우에가 머뭇거리며 움직이려고 하지 않자 고로는 눈썹을 치켜 올리고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내 말이 안 들리나!”
“아, 아닙니다.”
“그럼 어서 돌격 깃발을 올리지 않고 뭘 꾸물대는 거야!”
“예.”
눈을 무섭게 부라리며 노려보는 고로의 서슬에 이노우에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든 고로는 앞에 보이는 봉황함을 노려보면서 목청을 높여 병사들을 독려했다.
“저기만 뚫으면 희망이 있다. 전 함대 돌격! 북을 치고 노를 저어라.”
조선군 역시 거듭된 공격에 선체 여기저기가 망가져 있고 양쪽 병사들이 흘린 피가 붉게 묻어 있어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기에, 고로의 말대로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진형을 깨뜨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바로 이때 불행하게도 왜군이 안고 있던 가장 큰 불안 요소 중 하나인 일원화되지 않은 지휘 체계가 문제를 일으켰다.
돌격 명령에 따르는 건 막부 수군 소속 전선 몇 척에 불과했고 나머지 왜구와 번주군 출신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눈치를 보며 육지 쪽으로 슬금슬금 물러서거나 대놓고 뱃머리를 돌려 달아나는 배까지 생겨났다.
“전선들이 따라오지 않고 있습니다!”
“좌측에 있던 해적단 군선들이 뒤로 도망칩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무사들의 보고에 고로는 크게 분노했다.
“이런 때려죽일 놈들!”
“이제 다 글렀습니다. 우리들만으로는 포위망을 돌파할 수 없습니다.”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이노우에의 말에 고로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울분을 토했다.
“크흑. 내가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다니…….”
“장군.”
분노와 수치심에 몸을 부들부들 떠는 고로를 착잡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을 때 하급 무사 한 명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적함에서 쏜 포탄이 날아옵니다.”
“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든 이노우에와 무사들은 푸른 하늘을 가로질러 대장선으로 곧장 떨어지는 시커먼 포탄들을 보고는 경악했다.
“피해!”
“으아악.”
슈우우웅! 꽈아앙!
쿠쿵!
으적. 쿵!
미처 피할 틈도 없이 포탄 수십 발이 고로가 탄 대장선을 완전히 뒤덮다시피 하며 떨어졌다.
“명중입니다!”
시커먼 연기와 화염에 휩싸인 대장선을 보고 이충민 함장이 잔뜩 고무된 표정으로 소리치자 도현도 얼굴에 화색을 띠면서도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어. 우측에 떠 있는 안택선을 향해 함포 사격을 가하게!”
“알겠사옵니다.”
그의 명령이 갑판 아래 포실로 전달되자 미리 재장전을 끝내 놓고 있던 포수들은 지체 없이 새로운 목표를 조준하고는 일제히 화포를 발사했다.
“발사!”
꽝! 꽝! 꽝!
봉황함 측면에 탑재된 마흔 문의 화포가 한꺼번에 불을 뿜자 목표가 된 왜선은 순식간에 박살이 나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렇게 신기전을 써서 적군의 일제 돌격을 막아 낸 봉황함이 함포 집중사격으로 한 척씩 차근차근 산산조각을 내자 그나마 전열을 유지하고 있던 왜선들도 전투를 포기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흐익. 도저히 상대가 안 돼.”
“저놈들은 악마야.”
“도, 도망쳐야 해.”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자 홍수에 둑이 터지듯 막부 함대의 붕괴는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거기다가 제일 먼저 뱃머리를 돌려 도망친 왜구 두목 조키치는 둘째치더라도 지휘관인 고로와 오카도가 격전 중에 대장선을 잃는 바람에 지휘 체계가 마비되면서 혼란은 더욱 커졌다.
“적군이 와해되고 있습니다!”
중군이 위기에 처하는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뚝심 있게 원래 계획대로 전투를 이끌어 가던 통제사 손억기는 부장의 외침에 눈을 번뜩이며 외쳤다.
“지금이다! 함포 사격으로 적을 계속 몰아붙이면서 좌우 날개를 좁혀라.”
“옛.”
통제사 손억기의 명령에 지금까지 포위망을 형성한 채 다가오는 왜선만 함포 사격을 가해 상대하던 좌우군이 천천히 만 안쪽으로 좁혀 들어가며 적을 압박했다.
그러자 도현도 선체에 불이 붙은 채 떠 있거나 여기저기 부서져 반쯤 기울어진 왜선들만 잔뜩 남아 있는 전방을 바라보며 크게 소리쳤다.
“이제 우리 차례다. 앞으로 돌격해 적선을 깨부숴라!”
“우와아!”
갑판 위에 있던 수병들은 도현의 외침에 주위가 떠나가라 함성을 내질렀고 이충민 함장도 잔뜩 상기된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
“닻을 올려라! 적진으로 들어간다.”
잠시 뒤 선체를 고정시키고 있던 닻을 회수한 봉황함은 천천히 선회해 뱃머리를 육지 쪽으로 하고는 지리멸렬한 막부 함대를 향해 돌격했다.
그러자 악전고투 끝에 도선해 온 왜병들을 전부 몰아내고 포위망을 지켜 낸 중군 판옥선들도 도현의 공격에 가세했다.
“만호 어른, 봉황함이 앞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뭣이?”
적과 싸우는 와중에 왼쪽 팔을 크게 베어 붕대를 감은 모슬포만호 서지호는 부장의 말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돛대 위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봉황 깃발을 나부끼면서 태산만큼이나 큰 봉황함이 옆을 지나가는 걸 감격에 찬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던 서지호는 이내 한쪽에 세워 둔 자신의 검을 찾아 손에 쥐고는 입을 열었다.
“주상 전하께서 친히 적과 싸우러 가시는데 우리가 뒤에 있을 수는 없지. 모두 일어나 다시 무기를 잡아라!”
서지호의 외침에 완전히 지쳐 갑판 여기저기에 늘어져 있던 병사들은 다시금 힘을 내 자리에서 일어나 전의를 불태웠다.
“퉤. 받은 건 되돌려 줘야지.”
“맞아. 아주 아작을 내 버리자고.”
“전고를 울려라!”
둥둥둥.
“우리는 주상 전하와 함께한다!”
“와아아!”
“가자!”
병사들의 함성과 함께 전고가 크게 울렸고 갑판 아래에 있는 격군들은 반나절 가까이 거센 파도를 버티느라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다시 힘차게 노를 저었다.
“하나, 둘!”
“하나, 둘!”
봉황함을 선두로 한 중군 판옥선들은 순식간에 전열이 흐트러진 막부 함대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우왕좌왕하는 왜선들에 지옥을 선사했다.
“전 함포 발사!”
함교에 선 도현의 외침과 동시에 봉황함 양쪽 선체에 탑재된 수십 문의 화포가 노성과도 같은 굉음을 토해 냈다.
꽈꽈꽝! 꽝! 꽝!
단 한 번의 사격에 좌우측에 있던 왜군 안택선 두 척이 말 그대로 종이처럼 찢겨 나가며 침몰했다.
안택선에는 수백 명의 왜병이 타고 있었지만 바로 지척에서 쏘아 댄 집중포화에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목숨을 잃거나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 바다에 뛰어드는 인원은 몇 명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벌집이 된 왜선이 침몰하면서 일으킨 와류에 휩쓸려 버리고 말았다.
봉황함뿐만 아니라 중군 판옥선들도 지금까지 당한 걸 복수라도 하듯 지근거리에서 잔존해 있던 왜선들을 향해 화포를 마구 날려 댔다.
그 기세가 얼마나 사나운지 통제사 손억기를 비롯해 학익진의 양 날개를 구성하던 아군 함선들이 도와주러 접근했다가 감히 끼어들 생각을 못 하고 뒤로 물러서 도망가는 배들만 사냥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백삼십오 척이나 되던 막부군의 대함대는 단 반나절 만에 바닷속 깊이 완전히 침몰하고 말았고 격전이 벌어졌던 스루가만에는 조선 수군 병사들이 내지르는 승리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마치 바다가 불타고 있는 것처럼 붉은빛과 매캐한 검은 연기가 주변을 완전히 뒤덮은 가운데,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살겠다고 배를 버리고 뛰어들어 간신히 목숨을 건진 자들이 있었다.
“푸하!”
떨어져 나온 판자 조각을 간신히 부여잡고 물 밖으로 머리를 내민 이노우에는 근처에 있을 고로를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장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손발을 허우적거리며 버둥대고 있는 고로를 발견하고 이노우에가 크게 소리쳤다.
불길을 피해 바다로 뛰어든 것까지는 좋았지만, 몸에 걸치고 있던 갑옷이 마치 무거운 추 같은 역할을 해 자꾸만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이노우에는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숨을 크게 들이쉰 후 물 밑으로 잠수해 고로 쪽으로 헤엄쳐 다가갔다.
정신없이 버둥거리는 고로의 몸을 등 뒤에서 단단히 부여잡고, 머리만 물 밖으로 내놓게 한 다음 반쯤 덜렁거리며 붙어 있는 갑옷 끈을 단검으로 끊어 버리자 그제야 무게가 가벼워졌다.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그사이에 너무 물을 많이 먹은 탓인지 고로는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컥컥하는 소리만 내었다.
다행히 숨은 붙어 있는 것 같았기에 이노우에는 안도하는 한숨을 쉬었다.
물에서 누군가를 구하려면 차라리 의식을 잃고 있는 편이 더 쉽다.
만약 고로가 아까처럼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르고 살려고 발버둥을 쳤다면 적어도 두 배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
이노우에는 힘없이 늘어진 고로의 턱 밑에 팔을 끼우고 가까이 보이는 뭍을 향해 한 손으로 열심히 헤엄쳤다.
“하아, 하아…… 큭!”
턱까지 차오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겨우 발이 땅에 닿자, 이노우에는 기력이 다해 모래사장에 드러누웠다.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낸 덕분인지,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눈을 감으면 그대로 자 버릴 것만 같아 이노우에는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나 고로의 상태를 살폈다.
“장군, 장군, 정신 차리십시오.”
어깨를 흔들며 이름을 부르자 겨우 의식이 돌아오는지 고로의 몸이 꿈틀하면서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커헉! 콜록, 콜록…… 하!”
이윽고 그는 발작을 일으키듯이 등을 둥글게 말고 새된 기침과 함께 물을 토해 냈다.
한동안 그렇게 몸을 들썩이던 고로는 입가에 엉겨붙은 침과 흙모래를 손등으로 닦고 탁한 눈으로 이노우에를 쳐다보았다.
“여기가 어디야? 내 배는!”
그러자 이노우에는 말없이 바다 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마치 화룡이 승천을 하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거대한 화마가 온갖 깃발로 화려하게 장식된 그의 대장선을 집어삼키고 있었고, 바다고 하늘이고 할 것 없이 주변은 온통 노을이 진 것처럼 새빨갰다.
우지끈!
커다란 소리와 함께 깃발이 달린 커다란 돛대가 반으로 뚝 부러지며 바다 밑으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대장선은 물론이고 출병할 때는 그렇게 많았던 배들이 지금은 부서진 잔해만 남았다.
아직 남아 있는 배가 있을까 찾아보려고 했지만, 일렁거리는 불꽃과 연기 덕분에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제길! 빌어먹을!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피가 날 정도로 꼭 쥔 주먹으로 모래바닥을 쾅쾅 내리치던 고로는 원한이 가득한 눈동자로 조선군 군선들을 노려보았다.
위풍당당하게 깃발을 휘날리고 있는 조선군 군선은 마치 수많은 적들의 시체를 밟고 선 승자처럼 패기 넘치는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사방이 온통 검고 붉은 가운데 유달리 선명하게 보이는 깃발의 색은 두려움을 넘어 외경심까지 들게 했다.
가늘게 떨리는 손끝을 꽉 거머쥔 이노우에는 고로를 부축해 일으켰다.
“장군, 지금은 일단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여긴 아직도 전장이다.
잠시 조선군의 시야에서 벗어났을 뿐, 우물쭈물하다간 금방 추격당할 게 뻔했다.
모래사장에는 두 사람 말고도 간신히 목숨을 건진 일반 병사들과 무사가 상당수 있었고 지금도 겨우 도망친 이들이 필사적으로 뭍을 향해 헤엄쳐 오고 있었다.
이노우에는 사지가 멀쩡하고 체력이 남은 자들을 규합해 말을 구해 오도록 지시했다.
다행히 바로 옆에 오늘 아침까지 왜군이 머물던 군영이 있었기에 거기서 필요한 말을 끌고 왔다.
헤엄쳐 오느라 기력이 떨어지고 옷이 다 젖어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든 상황이었기에 말을 타지 않으면 멀리 도망치기가 어려웠다.
“서둘러라!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최대한 멀리 가야 한다.”
“예.”
이노우에는 고로를 말에 타게 하고 지친 병사들을 억지로 끌어당기며 바삐 해안에서 벗어났다.
갑옷도 없이 초라한 행색을 한 고로는 막부 함대의 무덤이 된 바다에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훗날 스루가 대첩이라고 불리는 이번 해전에서 막부는 백여 척이 넘는 군선이 격침당하고 서른다섯 척이 나포당하는 대패를 당한 데 반해 조선 함대는 침몰한 배는 없고 신형 판옥선 여섯 척이 파손됐을 뿐이다.
그나마도 두 척은 현장에서 간단히 수리를 한 뒤 바로 다시 항해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머지 네 척은 침몰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고치는 데 상당한 시일이 걸릴 정도로 파손 상태가 심해 어쩔 수 없이 화포와 각종 물품을 모두 회수한 뒤 배 밑바닥에 구멍을 내서 자침시켰다.
사상자 숫자도 구천 명 이상이 죽거나 다친 막부군과 달리 조선군은 희생자가 채 오백 명이 되지 않았다.
조선군 사상자의 대부분이 중군에서 나왔는데 그만큼 거기서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단 뜻이었다.
이렇게 스루가 대첩은 누가 봐도 반론의 여지가 없는 조선군의 완벽한 승리였고 이걸로 왜국의 수군 전력은 거의 괴멸상태에 이르렀다.
하지만 전투가 격렬했던 만큼 조선군의 피해도 컸기에 도현은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보급선들을 불러 하루 동안 휴식과 재정비를 한 뒤 이튿날 아침 해가 뜨는 것과 함께 다시 돛을 활짝 펼치고 에도를 향해 진격했다.
사각사각사각.
조용한 다실 안에 찻물을 젓는 소리만이 고즈넉이 울렸다.
이에미쓰는 어렸을 적에 엄격하게 배운 예법 그대로 방석에 정좌를 하고 앉아, 능숙한 솜씨로 차에 거품이 일어날 정도까지 손목을 저었다.
따뜻한 물을 끓이는 풍로에서는 하얀 김이 뭉게뭉게 올라왔고, 방 한쪽 벽에 자리하고 있는 도코노마 앞에는 아침에 정원에서 꺽은 하얀 꽃이 달린 나뭇가지가 장식되어 있어 은은한 꽃향기가 풍겨 나왔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이에미쓰가 손을 떼자 다실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다과를 먹던 손을 멈추고 자세를 바로 했다.
이에미쓰는 제일 가까이에 앉은 이시노에게 먼저 차를 권했고, 이윽고 미우라에게 잔이 돌아갈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가라앉은 침묵 속에서 마침내 손님 역할인 이시노가 답례를 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을 때, 정적을 깨뜨리듯이 서둘러 마루를 달려오는 발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쇼군!”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납작 엎드린 것은 대대로 도쿠가와 일족을 모시는 늙은 가로였다.
소위 후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여자들의 구역인 오오쿠를 제외하고 집안의 온갖 대소사를 처리하는 집사 같은 역할이니만큼 언제나 침착하게 행동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체면을 차리는 인물인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크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쇼, 쇼군, 큰일 났습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어깨를 크게 들썩이고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보고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이에미쓰가 벌떡 일어섰다.
“무슨 일인데 이 호들갑인가?”
“조, 조선 함대가…….”
평소와 달리 말을 더듬으며 제대로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가로의 모습에 이에미쓰는 눈가를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조선 함대가 뭘 어쨌기에 이러나?”
그렇지 않아도 요즘 그를 밤에 제대로 자지 못하게 하고 있는 조선 함대가 거론되자 이에미쓰는 눈썹을 치켜 올렸고 다행히도(?) 화를 터트리기 전에 가로의 입이 다시 열렸다.
“에도 앞바다에 조선 함대가 나타났습니다.”
“……!”
너무 당혹스러운 말이라 금방 알아듣지 못하고 잠시 멍하니 있던 이에미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경악성을 내뱉었다.
“뭣이!”
함께 있던 이시노와 미우라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충격에 눈을 크게 뜨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끌고 있던 군선을 모두 잃고 겨우 목숨을 건진 고로가 정신이 없어 에도로 전령을 보내지 못해 조선 함대가 먼저 나타났기에 이들이 받은 충격과 당혹감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게 정말인가?”
이시노가 황급히 되묻자 가로 역시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대답했다.
“예. 항구를 관리하는 무사가 직접 말을 타고 와 보고를 한 겁니다.”
“이런.”
“도대체 조선 함대가 어떻게 여기에…….”
미우라는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했는데 조선 함대가 나타났다는 건 고로 장군이 이끌고 나간 막부 수군이 패배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조선 군선 한두 척이 정찰을 온 걸 가지고 호들갑을 떠는 것 아니야?”
아무리 정찰이라도 적 군선이 에도 코앞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기겁할 일이었지만 그래도 함대 전체가 온 것보다는 나았기에 이에미쓰가 희망 섞인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가로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그의 기대를 무참히 꺾었다.
“바다를 새까맣게 뒤덮을 정도로 많은 군선이 나타났고 그중에는 태산보다 더 큰 배도 있다고 합니다.”
태산보다 큰 배는 바로 치우 급 전함을 가리키는 거였다.
왜국 사람들이 보기에 판옥선도 상당히 컸는데 그것보다 몇 배나 되는 덩치를 가진 치우 급 전함은 말 그대로 산이 하나 바다에 떠 있는 느낌을 줬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소식에 애써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이에미쓰는 가로의 이야기에 분노가 폭발했다.
와장창!
평소 애지중지하며 아끼던 조선제 백자 찻잔을 바닥에 집어 던져 산산조각 낸 이에미쓰는 얼굴을 새빨갛게 상기시킨 채 노성을 내질렀다.
“무려 백여 척이 넘는 대함대를 이끌고 가서 며칠도 버티지 못하고 조선군이 에도에 나타나게 하다니 고로 이 한심한 놈 같으니!”
“쇼군, 고정하십시오.”
“고정? 당장이라도 에도 성에 조선군이 쏜 포탄이 날아올 판국인데 내가 지금 고정하게 됐나!”
화를 가라앉히려던 이시노가 불벼락을 맞자 동석해 있던 미우라와 가로는 어깨를 움츠리며 그의 눈치를 봤다.
이처럼 쇼군인 이에미쓰가 길길이 날뛰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천혜의 방어선인 바다로 둘러싸인 왜국은 자기들끼리 다투고 수없이 많은 싸움을 벌였지만 타국 군대가 수도인 에도 코앞까지 진격해 온 경우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
유럽까지 침략하며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대제국을 건설한 몽고군도 두 번이나 전쟁을 벌였지만, 모두 격퇴했고 왜국의 심장인 본주本州에는 발을 들여놓지 못했는데, 자신의 대에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졌으니 화를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를 더 분노케 하는 건 막부의 상징인 에도가 이제 곧 전쟁터가 되고 자신의 목숨도 경각에 달렸다는 거였다.
병사들이라도 많았다면 몰라도 두 번에 걸쳐 조선군을 막기 위해 군대를 출정시키는 바람에 에도 성에 남아 있는 병력은 평소보다 더 적었다.
그나마도 근처 지역에서 급히 끌어모아 머릿수만 채워 넣은 농민병이 대부분이었고, 잘 훈련된 무사와 정예병은 일천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이것 가지고는 아무리 단단한 성을 방어막 삼아 버틴다고 해도 강력한 화포를 운용하는 조선군의 전술로 볼 때 하루를 넘기기 어려웠다.
“이 일을 도대체 어찌해야 된단 말인가?”
한탄 섞인 목소리로 이에미쓰가 이야기를 하자 이시노가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고 당장 에도를 지켜 내는 것이 우선이지 않겠습니까.”
“남아 있는 병력이 별로 없는데 가능하겠나?”
머리에서 김이 날 정도로 화가 났지만 한 나라를 이끌어 가는 인물답게 어느새 냉정을 되찾은 이에미쓰는 이시노를 보며 물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주변 번에 급히 전령을 보내 지원군을 요청하고 병사를 징집해 적이 해안에 상륙하지 못하도록 막으며 최대한 시간을 끈다면 어느 정도 승산이 있을 겁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미우라가 불안해하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했다.
“스네시게 장군이 보낸 보고서를 못 봤소이까. 백여 척이 넘는 배에 병사가 수만이라는데 무슨 수로 조선군을 막아 낸단 말이오. 차라리 기회가 있을 때 안전한 곳으로 피하는 것이 상책일 겁니다.”
“지금 에도를 버리자는 게요!”
이시노가 언성을 높이자 미우라도 지지 않고 말했다.
“이대로 있다가 조선군에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소.”
“에도를 포기함으로써 실추될 막부의 권위는 어떻게 할 것이오? 그렇지 않아도 전력이 분산되어 있고 병력 피해가 큰 상황에서 무력하게 에도까지 빼앗긴다면 조선군이 물러가더라도 그 뒷감당을 하기 어려울 것이오이다.”
이시노의 말은 단순한 기우가 아니었는데 삼 대를 걸쳐 내려오며 어느 정도 기반을 다지기는 했어도, 천황이 아니라 단순히 여러 번주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가져 쇼군이라는 직책을 받아 통치만 하는 존재라는 한계가 있었다.
지금이야 고분고분 말을 듣지만 힘이 약해지고 권위를 잃는다면 구마모토 번의 호소카와 가문처럼 그동안 숨겨왔던 발톱을 드러내고 막부를 한입에 집어삼키려는 번주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에미쓰도 바로 그 점이 염려되는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아무리 그래도 조선군에 항복하거나 포로가 되는 것보다는 나을 게요. 피난을 떠나면 뒷일을 기약할 수라도 있지만 에도가 무너지는 것과 함께 적에게 잡힌다면 그런 기회마저 없을 것이오.”
그러자 이시노가 반박을 했다.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시오. 아무리 조선군이 강하다고 해도 에도는 우리의 터전인 데다 단단한 성벽과 병사로 징집할 충분한 숫자의 인구도 있으니, 우리가 결사항전의 자세로 버틴다면 충분히 상대를 막아 낼 수 있을 거요.”
이야기를 들은 미우라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숫자가 아무리 많아 봤자 제대로 훈련조차 받지 않은 징집병들은 그저 화살받이에 불과할 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조선군이 쓰는 화포라면 단단한 에도 성 성벽이라고 해도 단번에 깨져 나갈 텐데, 그래도 공성전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하루가 아니라 반나절도 버티지 못할 거요.”
“강력한 화포를 보유한 건 나도 인정하지만 그건 군선에 실려 있지 않소. 최대한 배를 육지에 가까이 붙인다고 해도 이곳 에도 성까지 포탄을 날릴 수는 없을 게요.”
“그거야 화포를 군선에 내려 성 앞으로 끌고 오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지 않소이까!”
“병사들을 이용해서 그걸 방해하며 시간을 끌면 근처 번에서 보낸 지원군이 도착할 테니 원정이라는 약점을 가진 조선군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을 거요.”
“글쎄 그런 희박한 가능성을 믿고 쇼군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소!”
두 사람의 언쟁이 격해지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에미쓰가 한쪽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손바닥으로 탁치며 말했다.
“둘 다 그만하게.”
“쇼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 이에미쓰는 정색을 하고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미우라 자네의 말도 일리가 있어. 하지만 비록 불리한 상황이라도 막부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에도 성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네.”
이에미쓰가 피난 대신 에도에 남기를 선택하자 미우라는 다급한 표정으로 그를 봤다.
“쇼군, 한 번 더 심사숙고를 해 주십시오.”
“몇 번을 생각해도 내 결정은 변하지 않을 걸세.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에도 앞바다에 조선군 함대가 나타났다고 바로 꼬리를 말고 도망친다면 번주들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겠나?”
“작은 치욕을 피하시려다가 더 큰 걸 잃을 수도 있습니다.”
미우라가 생각을 되돌리려고 애를 썼지만 이에미쓰는 요지부동이었다.
“아니, 막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에도를 지켜 내야 되네.”
쐐기를 박는 이에미쓰의 발언에 반색을 한 이시노는 머리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그러자 이에미쓰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이시노한테 시선을 주며 이야기를 했다.
“번주들의 지원군이 오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나?”
“거리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겠지만 근처 사이타마나 지바 번에서는 늦어도 삼사일 안에 지원군을 보내올 겁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아주 애매한 시간이었기에 이에미쓰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사흘이라…….”
“일단 이들이 도착해 성안과 밖에서 협공을 가하며 시간을 끌다가 나머지 멀리 떨어져 있는 번주들이 이끌고 달려올 병력까지 합세한다면 조선군도 물러설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리고 스네시게의 군대도 교토를 지나 쉬지 않고 행군해 오고 있으니 모두 모이면 십만 대군도 가능할 겁니다.”
십만 대군이라는 말에 이에미쓰의 얼굴에는 어느새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소의 자신감을 되찾았다.
“좋아. 왜 천하제일이라는 몽고군도 우리 왜국을 굴복시키지 못했는지 조선군한테 똑똑히 보여 주자고. 가로.”
“말씀하십시오, 쇼군.”
한쪽에 시립해 있던 가로가 얼른 허리를 굽히며 대답하자 이에미쓰는 목에 힘을 주며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에도 전체에 비상령을 내리고 미츠오한테 병력을 이끌고 조선군이 상륙을 못 하도록 부두와 해안을 철통같이 지키라고 해. 그리고 각 번주들한테 전령을 보내게.”
시마다 미츠오는 막부 휘하의 장수로 에도 수비를 책임진 자였다.
“알겠습니다.”
“어서 서둘러.”
“예.”
이에미쓰의 재촉에 가로가 뒷걸음질을 쳐서 다실을 나가자 그는 손에 든 부채를 꽉 움켜쥐며 혼잣말을 했다.
“조선 놈들 겁 없이 여기까지 온 걸 후회하게 해 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