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에도(1)
조선군의 등장으로 막부가 발칵 뒤집혔을 때 도현은 원정군 지휘부와 함께 봉황함 함교에 서서 멀리 보이는 에도 성을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도착했군.”
함교 난간 앞에 선 도현이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통제사 손억기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받았다.
“그러게 말이옵니다. 치밀하게 작전 계획을 세우기는 했습니다만, 정말 전력을 거의 그대로 보존해 에도 앞바다까지 올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사옵니다.”
“다 경들과 병사들이 일치단결해서 열심히 싸워 준 덕분일세.”
“망극하옵니다.”
도현이 웃는 얼굴로 모든 공을 부하들한테 돌리자 함교에 있던 지휘부 장수들은 머리를 숙였다.
“막부가 성립되고 지금까지 에도에는 한 번도 타국 군대가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다고 했지.”
“그렇사옵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써 주상 전하의 손에 의해 깨지게 됐습니다.”
“맞습니다.”
장수들이 그를 추켜세우자 도현은 내심 흐뭇해하면서도 표시를 내지 않고 오히려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직 에도를 완전히 함락시킨 것이 아니니 그 말은 나중에 듣도록 하겠네. 그것보다 통제사.”
“예, 전하.”
몸을 옆으로 돌린 도현은 통제사 손억기를 보며 여유 가득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그래도 명색이 왜국을 통치하는 자가 있는 곳인데 무턱대고 포탄부터 날릴 수는 없지 않겠나. 항복을 권유하는 사신을 보내도록 하게.”
도현의 말에 통제사 손억기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대가 센 사람으로 골라서 보내겠습니다.”
“이왕이면 지난번 해전에서 활약했던 중군 만호가 가면 좋겠군.”
“모슬포만호 말씀이시옵니까?”
손억기가 되묻는 말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왜병들이 떼로 덤벼드는데도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 걸 보면 베짱이 보통 두둑한 것이 아니더군. 그 정도면 막부의 심장이나 마찬가지인 에도 성 한가운데 들어가서도 꿀리지 않고 이에미쓰한테 당당히 항복을 요구할 수 있을 거야.”
“예. 하교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아래로 내려가서 상륙을 어떻게 할 건지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네.”
몸을 돌려 선실로 걸음을 옮기는 도현을 통제사 손억기와 장수들이 우르르 뒤따라갔다.
그리고 그날 오후 모슬포만호 서지호는 도현이 직접 써 준 서신을 품에 가지고 당당하게 에도에 있는 쇼군을 만나러 떠났다.
한편 갑자기 나타나 앞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는 조선 함대의 모습에 에도는 큰 혼란에 휩싸였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처음 깨달은 건 에도 앞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려 나가는 어민들이었다.
이른 새벽 어망을 회수하러 쪽배를 타고 나갔다가, 집채만 한 배들이 바다에 빽빽하게 떠 있는 것을 보고 기겁해 그 자리에서 자지러진 사람까지 있을 지경이었다.
허겁지겁 뱃머리를 돌려 뭍에 올랐을 땐 이미 바닷가 근처에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상가나 무武가에까지 소식이 쫙 퍼져 에도 전체가 들썩이고 있었다.
“와아! 저게 뭐야?”
“구경 가 보자.”
습자소에 가는 길이었던 아이들이 철없는 소리를 하자 이를 듣고 있던 보따리장수가 크게 호통쳤다.
“예끼, 이놈들! 괜한 말 떠벌리지 말고 얼른 집에 돌아가거라.”
“에이.”
“재미없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동네 개구쟁이들은 불평불만을 내뱉었지만 어른들이 주변에서 수군거리며 술렁이는 분위기에 곧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세상에. 저런 흉흉한 물건은 처음 보는군.”
“이를 어쩌나.”
전전긍긍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부 눈치 빠른 상인들은 재빨리 짐을 챙겨 에도를 떠날 준비를 했다.
온갖 패물과 비단은 물론 곳간 문을 열고 수레에 쌀이며 온갖 물건을 싣는 소리가 요란하니 자연히 너도나도 떠나는 분위기가 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윗동네 아랫동네 할 것 없이 모두 들썩거리는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주택도 예외 없이 소문이 흘러들었다.
값나가는 물건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화를 면해 보겠다고 저마다 이불과 옷가지를 꺼내 보자기로 싸서 품에 안고 갓난쟁이는 등에 업으며 야단을 떠는데, 관리인이 침착하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아무도 들어먹질 않았다.
혼란 그 자체인 에도에 첫발을 내디딘 서지호는 막부에서 나온 무사와 병사 들에 둘러싸여 고작 수행원 네다섯 명만을 거느린 채 쇼군이 기다리는 에도 성으로 향했다.
“어이쿠!”
“눈이 있으면 똑바로 다녀, 이 사람아.”
“이런 길가에 수레를 세워 놓으니 그렇지!”
“뭐야?”
마음이 바쁘다 보니 저절로 자그마한 일에도 언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곳곳에서 크고 작은 말다툼이 벌어졌다.
서지호가 막부 무사들과 함께 에도를 가로지르는 길에도 여기저기서 서로 멱살을 부여잡고 싸우는 광경이 많이 보였는데, 말 등에 앉아 있다 보니 더욱 눈에 잘 띄었다.
그럴 때마다 무사들은 떫은 감을 씹은 것 같은 표정으로 불편한 기색을 내보였지만, 서지호는 짐짓 모른 척하고 무심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면서도 이제 곧 전장이 될지도 모르는 에도 지리를 천천히 살피며 머릿속에 기억해 두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가던 부장이 슬쩍 좌우에 있는 막부 무사들을 쳐다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완전히 난리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에미쓰가 항복을 거부하면 곧 전쟁이 벌어질 테니 주민들이 동요할 수밖에.”
“하긴 그렇군요. 아무튼 분위기만 보면 금방 에도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적진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하던 부장이 겁에 질려 피난 짐을 싸기 바쁜 주민들의 모습에 자신감을 되찾았는지 호기롭게 말하자 서지호가 정색을 하며 부하를 나무랐다.
“아까 배에서 내렸을 때 선착장과 해안에 있는 막부군 병사들을 못 봤나. 주민들은 겁을 먹었는지 몰라도 막부는 호락호락 우리한테 굴복할 생각이 아닌 게 분명해. 그러니 자네도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될 거야.”
“……예.”
해안에서 본 광경을 떠올린 부장이 살짝 얼굴을 굳히자 서지호는 가볍게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그렇다고 너무 긴장 할 필요는 없어. 우리는 주상 전하의 칙명을 받고 온 사신이니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행동하면 되는 거야. 설사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더라도 복수는 주상 전하와 원정군 동료들이 넘치도록 해 줄 테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전쟁 중에 사신으로 가는 건 목숨을 걸어야 되는 일이었지만 뒤에 도현이 있다는 말에 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풀리면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렇게 혼란에 빠진 에도 거리를 가로지른 서지호 일행은 중심부에 위치한 에도 성에 도착했다.
왜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쇼군의 거처답게 에도 성은 상당히 크고 화려했는데, 사신의 기를 꺾으려고 그러는지 중무장한 무사와 병사 들이 늘어서서 날카로운 살기를 보냈다.
하지만 이미 시가지를 거쳐 오며 겁에 질려 허둥지둥 피난을 떠나는 주민들의 모습을 봤기 때문에 서지호와 일행들은 막부의 꼼수에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허장성세虛張聲勢를 보여 상대를 압박해야 될 만큼 막부가 다급하다는 걸 눈치채고는 느긋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을 데려온 무사는 도열해 있는 병사들을 보고도 태연한 서지호 일행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성문을 지나 내성으로 들어간 일행은 말에서 내린 뒤 쇼군의 가로라고 밝힌 중년인을 따라 좀 더 깊숙한 곳에 위치한 내실로 안내됐다.
“쇼군, 조선군 사신이 도착했습니다.”
“들이게.”
“예.”
드르륵.
대답과 함께 검을 허리에 찬 채 좌우에 앉아 있던 무사 두 명이 미닫이문을 당겨 활짝 열었다.
그러자 드러난 널찍한 방에는, 상석에 굳은 표정의 이에미쓰가 앉아 있고 양옆으로 가신들로 보이는 중년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방은 특이하게도 벽이 아니라 미닫이문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보나 마나 그 뒤에 호위 무사들이 대기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짧은 시간 동안 실내를 훑어본 서지호는 일행과 함께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쏟아지는 시선을 받으며 중간쯤에 멈춰 선 서지호는 정면에 앉아 있는 이에미쓰를 똑바로 쳐다봤다.
상당히 무례한 행동에 막부 가신들은 눈살을 찌푸렸고 사신으로 조선을 자주 다녀 조선말을 할 줄 아는 미우라가 불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신은 예를 지키시오.”
하지만 서지호는 먼저 고개를 숙일 생각을 하지 않고 어깨를 펴며 말했다.
“본인은 지금 조선국 국왕 전하를 대신해서 온 것이오. 그런데 천왕도 아니고 그 아래인 쇼군에게 어찌 무릎을 꿇을 수 있겠소.”
“뭐요!”
배석해 있던 역관을 통해 서지호가 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막부 가신들은 벌 떼처럼 일어나 화를 냈다.
“닥쳐라!”
“이런 오만방자한!”
“쇼군, 당장 저자의 목을 치십시오.”
금방이라도 밖으로 끌고 나가 죽일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가 만들어졌지만,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온 서지호와 일행들은 약간의 동요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꼿꼿이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막부 가신들을 더욱 자극했고 이에미쓰가 말 한마디만 던지면 바로 칼부림이 날 상황이었다.
가만히 조선 사신들을 쳐다보던 이에미쓰는 손에 든 부채로 앞에 있는 서탁에 가볍게 탁 내려쳤다.
“그만!”
묵직한 음성에 가신들이 시끄럽게 떠들던 걸 멈추자 이에미쓰는 상체를 펴며 말을 이었다.
“예로부터 아무리 칼부림이 오가는 전장이라도 사신은 죽이지 않는다고 했으니 모두 그만하게.”
“하오나…….”
“어허, 내 말을 못 들었나!”
불만 섞인 표정을 지으며 쳐다보던 무장 한 명은 이에미쓰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자 이내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그렇게 장내가 정리되자 이에미쓰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서지호한테 시선을 주며 입을 열었다.
“에도 앞바다까지 함대를 끌고 온 이상 양국 사이에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을 텐데 무슨 일로 왔소?”
함께 온 역관이 재빨리 통역을 해 주자 서지호는 상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마주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에도 주민들이 희생되는 걸 막고자 하시는 주상 전하의 친서를 전하러 왔습니다.”
“친서라…….”
이에미쓰가 살짝 말꼬리를 흐리는 걸 보며 서지호는 뒤에 있던 부장한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부장은 품속에서 단단히 봉인되어 있는 친서를 꺼내 몇 발자국 앞으로 나와 가로한테 건네주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가로는 지체 없이 친서를 이에미쓰한테 전했고 그는 잠시 도현의 인장이 선명히 찍힌 봉투를 바라보다가 봉인을 뜯고 안에 있던 서신을 꺼내 읽었다.
친서의 내용은 간단했는데 이미 전세가 기울었으니 무의미한 저항을 하지 말고 내일 아침까지 해안으로 나와 백기를 올리고 항복하라는 거였다.
이미 예상한 일이지만 실제로 항복 요구를 받자, 이에미쓰는 솟구치는 화에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들었다.
“살고 싶으면 항복하라 이건가.”
목소리를 깔며 이에미쓰가 노려봤지만 서지호는 전혀 위축되지 않은 모습으로 차분히 말을 받았다.
“소식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막부군 주력이 스루가만에 모두 수장된 이상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지 않겠습니까.”
“흥! 분명히 타격은 있었지만 에도에 있는 병력만으로도 조선군쯤은 얼마든지 막아 낼 수 있고 며칠 뒤면 연락을 받은 수만 명의 지원 병력이 도착할 텐데 오히려 그쪽이 급한 것이 아닌가.”
“과연 그럴까요? 수만이 아니라 수십만의 막부군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승리한다는 건 변하지 않을 겁니다.”
“오만하군.”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목만 뻣뻣이 세운다면 그건 오만이지만 실제로 내뱉은 말을 실행할 능력이 있다면 그건 자신감이지 않겠습니까.”
“…….”
성에 들어올 때 무사와 병사 들을 일부러 늘어세워 전력을 과시하는 듯한 막부의 행동을 살짝 빗대면서 서지호가 항복을 종용하자, 이에미쓰는 입가를 살짝 떨며 얼굴을 구겼다.
그러고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디 그 자신감이 얼마나 오래가는지 두고 보도록 하지.”
“결국 우리와 싸우시겠다는 겁니까?”
서지호가 여전히 흔들림 없는 얼굴로 되묻자 이에미쓰는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고는 날 선 어투로 말했다.
“여기까지 온 걸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지.”
“쉬운 길이 있는데도 굳이 악수를 두겠다니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내일 아침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심사숙고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일 아침, 해가 떠도 내 결심은 변하지 않을 테니, 조선 국왕한테 괜한 기대를 품지 말고 그냥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하라.”
“유감이군요.”
“내 인내심이 다하기 전에 이만 물러가라.”
이에미쓰의 말에 서지호는 의미심장하게 한마디를 더 내뱉고는 미련 없이 몸을 뒤로 돌렸다.
“명심하십시오. 내일 아침까지입니다. 그때까지 에도 성에 백기가 내걸리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일을 겪게 되실 겁니다.”
“저, 저!”
“허어.”
명백한 협박에 막부 가신들이 분노하는 가운데 서지호와 일행은 마지막까지 당당함을 잃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 사신들의 뒷모습을 이를 부드득 갈며 노려보던 이에미쓰는 미닫이문이 닫히자마자 가지고 있던 부채를 반으로 부러뜨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미츠오!”
“예, 쇼군.”
이름을 불린 중년의 무장이 무릎걸음으로 나와 머리를 숙이자 이에미쓰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경의 목을 걸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조선군이 해안에 상륙하지 못하도록 하게.”
“네. 옥쇄玉碎의 각오로 지키겠습니다.”
“좋아. 그리고 이시노는 번주들한테 전령을 다시 보내 최대한 지원군을 빨리 끌고 오라고 재촉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가신들의 대답을 들으면서 이에미쓰는 방금 사신들이 나간 방을 무섭게 노려보며 얼굴 가득 살기를 피워 올렸다.
“감히 날 협박해.”
위로 천황이 있었지만 그저 허수아비 같은 존재일 뿐 왜국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이에미쓰였기에 그가 느끼는 치욕감은 더 컸다.
에도 성에서 물러나 다시 조선군 기함인 봉황함으로 돌아온 서지호는 갑판에 발을 내딛자마자 바로 선실로 내려가 도현을 알현했다.
“모슬포만호가 돌아왔사옵니다.”
“들라 하라.”
통제사 손억기와 함께 자리에 앉아 지도를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도현은 서지호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수고했네.”
“아니옵니다, 전하.”
“그래, 갔던 일은 어떻게 됐나?”
“친서는 무사히 전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순순히 항복할 것 같지는 않아 보였사옵니다.”
그러자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놀라는 기색도 없이 도현이 수긍했다.
“역시 그렇군.”
항복은 곧 막부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일이었으니 쉽게 굴복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아서인지 도현은 그다지 실망한 기색 없이 가볍게 콧방귀로 흘려 넘기곤 화제를 돌렸다.
“에도 상황은 어떻던가?”
“일반 주민들은 에도 앞바다에 나타난 우리 함대의 위용을 보고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서둘러 피난을 떠나는 사람이 많았사옵니다. 그리고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상가는 문을 다 닫았고 길거리엔 황급히 에도를 떠나는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아직 막부에서는 공식적인 피난령을 내리진 않았지만, 이미 대부분의 주민들은 조선 함대가 에도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제각기 자기 살길을 찾아 짐을 챙겨 달아나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막부도 딱히 이들을 막을 구실이 없었기에, 에도는 지금 극심한 혼란과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다행이로군. 아무리 왜국 사람이라 해도 일반인이 전투에 휘말리는 것만은 피하고 싶으니 말이야.”
전쟁이란 총칼을 든 군사들끼리 싸우는 것이다.
애꿎은 민간인의 희생은 최소로 줄여야 한다는 것이 도현의 굳건한 신념 중 하나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주민들이 피난을 떠난다면 아군이 에도 성으로 진격하기도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하지만 해안과 선착장에는 상당수의 막부군이 진을 치고 방어선을 구축하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음, 그렇단 말이지.”
어쨌든 이에미쓰 측도 마냥 손 놓고 있진 않다는 뜻이다.
“어쨌든 수고했네. 피곤할 텐데 그만 물러가서 쉬게.”
“예.”
서지호가 정중하게 군례를 올리고 나간 뒤에 도현이 손억기를 향해 물었다.
“전투준비는 잘되고 있나?”
“네. 지금 당장이라도 명령만 내리시면 해안에 상륙할 수 있습니다.”
통제사 손억기의 든든한 대답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래도 일단 내일 아침까지는 시간을 주기로 했으니 기다려 보세.”
“알겠습니다.”
또 한 번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피하기 힘든 상황이었으나, 그래도 가능하면 막부의 항복을 받아 에도에 무혈입성하는 것이 낫기도 하지만 병사들한테도 휴식이 필요했기에, 도현은 막부에 제시한 대로 다음 날 아침까지 기다려 주기로 했다.
시야를 가리며 바다 위를 가득 채우고 있던 뿌연 물안개는 수평선 너머로 서서히 떠오르는 일출과 함께 모두 깨끗이 사라졌다.
그러자 새벽 일찍부터 함교에 나와 있던 도현은 물안개와 어둠이 걷히면서 드러난 해안가 풍경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역시 백기는 안 보이는군.”
“조금 더 기다려 보시겠습니까?”
옆에 있던 통제사 손억기의 물음에 도현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이걸로 충분해. 더 이상 막부군한테 대비할 시간을 줄 이유가 없지.”
“그럼…….”
“지금 바로 공격을 시작하게.”
도현이 단호한 어조로 명령을 내리자 통제사 손억기는 바로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통제사 손억기가 자신의 기함으로 돌아가고 얼마 있지 않아서 봉황함을 제외한 일곱 척의 치우 급 군함들이 신형 판옥선 십여 척과 함께 천천히 함대를 빠져나와 해안 쪽으로 다가갔다.
바닥이 모래톱에 닿지 않는 지점까지 접근한 전선들은 옆으로 선회해 해안을 보고 길게 늘어섰다.
그러자 밤새 해안과 선착장에 목책을 세우며 방어 준비를 한 막부군이 소란스러워졌다.
“조선군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뭣이!”
선착장 한쪽에 위치한 허름한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미츠오는 다급한 부하 무사의 보고에 벌떡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병풍처럼 늘어선 치우 급 군함과 신형 판옥선 들을 보고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런! 적이 공격을 해 올 거다. 병사들을 모두 깨워서 해안으로 집결시켜!”
“예? 옛!”
지시를 내린 미츠오는 얼른 투구를 챙겨 들고는 황급히 해안 목책 쪽으로 뛰어갔다.
바로 그때 오랫동안 왜병들이 조선군이라면 진저리를 치게 만들고 막부의 상징이었던 에도를 잿더미로 만든 무시무시한 불벼락이 시작됐다.
“발사!”
통제사 손억기의 명령을 신호로 수백문의 화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꽝! 꽝! 꽝!
귀가 멍할 정도로 큰 굉음과 매캐한 화약 연기가 포실 안을 가득 채우는 가운데 포수들은 묵묵히 훈련받은 대로 능숙하게 재장전을 해서 목표인 해안을 행해 화포를 쉬지 않고 쏴 댔다.
슈우우우웅.
콰쾅! 쿠쿵! 쿵!
비단을 찢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수백 발의 포탄이 해안과 선착장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이내 붉은 섬광을 일으키며 여기저기 떨어져 폭발했고 왜병들은 어설프게 만든 목책과 함께 온몸이 찢겨 나갔다.
“으아악!”
“크윽.”
“포격이다!”
“어서 피해.”
공포에 질린 왜병들은 몸을 숨길 곳을 찾아 사방으로 흩어졌고 미츠오도 한쪽에 있는 바위 뒤에 바짝 엎드렸다.
왜병들은 폭발에 휩쓸려 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고 근처에 있던 군마들은 폭음에 놀라 마구 날뛰었다.
이히히힝.
쉬지 않고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포탄은 바닷가를 완전히 불지옥으로 만들었는데, 사방에서 구슬픈 비명과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해안에는 조선군의 함포 사격에 대응하기 위해 에도 성에서 가져온 화포 이십 문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무지막지한 포탄 세례에 막부군 포수들은 감히 몸을 일으켜 화포를 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사이 포대는 공격을 받아 파괴되거나 튀어오른 흙과 모래에 화포가 파묻혀 버리며 당장 쓸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차라리 그냥 망가지기만 하면 나았을 텐데 포대 근처에 잔뜩 쌓아 둔 화약에 불이 붙어 대폭발을 일으켜 커다란 불기둥과 함께 주위를 몽땅 날려 버렸다.
꽈꽈꽝!
충격파가 어찌나 큰지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해안 전체가 흔들렸고 솟구쳐 오른 불기둥과 시커먼 버섯구름은 봉황함 함교는 물론이고 멀리 떨어진 에도 성 혼마루에서도 육안으로 똑똑히 보일 정도였다.
화약이 유폭돼 일으킨 큰 폭발에 조선군 포수들은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신경을 끄고는 계속해서 재장전과 발사를 반복했다.
거의 일 분에 두세 발 꼴로 화포를 쏴 대자 미리 가져다 둔 화약과 포탄이 빠르게 소진됐고, 다른 수병들이 아래쪽 무기고에서 얼른 소모된 만큼 가져와 채워 줬다.
길게 늘어선 조선군 전선들이 일제히 포문을 열며 만들어 내는 불벼락의 향연이 에도 해안을 뒤덮었다.
봉황함 함교에 선 도현은 망원경을 사용할 필요도 없이 육안으로 잘 보이는 해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해안이 깨끗하게 청소되겠지.”
그러자 옆에 있던 이충민 함장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물론입니다. 막부군이 아무리 방어선을 잘 만들어 뒀어도 이렇게 함포 사격을 해 대면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옵니다.”
“맞아.”
조금은 과하다 싶을 정도의 공격이었지만 초반에 상대의 기를 확 꺾어 놓으려는 의도도 있었고 무엇보다 아무리 조선군이 정예들이라고 해도 상륙 시에는 여러모로 취약할 수밖에 없었기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해안을 완전히 제압할 필요성이 있었다.
도현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포탄에 화염과 먼지로 가득한 해안을 똑바로 서서 바라봤다.
그렇게 약 반 시진 동안 거의 천여 발에 가까운 포탄을 쏴 댄 조선군은 본격적으로 상륙을 시도했다.
뒤편 수송선에서 내려진 수십 척의 상륙용 배에 완전무장을 하고 서른 명씩 탄 병사들은 해안을 향해 힘차게 노를 저었다.
“으쌰! 으쌰!”
“더 힘차게, 박자를 맞춰서 노를 저어라!”
쏴아아아.
상륙용 소선에 탄 병사들은 머리 위를 지나 해안에 떨어지는 포탄을 쳐다보면서 일부러 긴장을 풀려는 듯이 잡담을 했다.
“아주 작살을 내 놓는구먼.”
“그러게 말이야. 이거, 우리가 상륙해도 할 일이 없겠는걸.”
“안 싸우고 해안을 점령할 수 있으면 우리야 좋지, 뭐.”
그대 앞쪽에 앉아 있던 별장이 뒤를 돌아보며 묵직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했다.
“다들 잘 들어라. 함포 사격으로 막부군 방어선이 대부분 무력화되었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놈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방심하지 말고 상륙 즉시, 날 따라 움직인다. 어영부영하다가 칼 맞으면 자기만 손해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도록.”
“옛.”
“좋아.”
힘차게 대답하는 부하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별장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단단히 쥐었다.
마치 해안에 있는 모든 걸 다 불태워 버릴 듯이 무지막지하게 퍼붓던 포격이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고요한 정적이 다시 찾아온 가운데 여기저기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고 매캐한 화약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으윽.”
숨어 있던 바위 뒤에서 겨우 몸을 일으킨 미츠오는 지난밤 동안 해안과 선착장에 힘들게 만들어 놓은 방어선이 완전히 풍비박산 난 걸 볼 수 있었다.
근처 숲에서 베어 온 통나무로 어설프게나마 만들어 놨던 목책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화포를 배치해 둔 포대는 시커먼 연기만 피워 올리고 있었다.
지금도 계속해 남은 화약이 유폭을 일으키며 터지는 모습을 볼 때 포대에 있던 병사들이 살아 있는 걸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여기저기 널려 있는 수많은 시신은 그를 더욱 절망에 빠뜨렸다.
단 반 시진 동안 이어진 포격에 조선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나와 있던 막부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렇게 미츠오가 허탈감에 빠져 있을 때 한 병사가 바다 쪽을 가리키며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조, 조선군이 온다!”
“헉.”
바다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정말 길게 늘어선 조선군 전선들 사이로 소선 수십여 척이 떼를 지어 해안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뜩이나 지옥 같았던 함포 사격에 얼이 반쯤 빠져 있던 왜병들은 조선군이 온다는 소리에 순간 온통 공포에 휩싸여서는 가지고 있던 병장기를 팽개치고 뒤로 달아났다.
“히익.”
“도, 도망쳐!”
그걸 본 미츠오가 황급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도주를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겁을 집어먹은 왜병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명령 없이 도망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즉결 처분하겠다. 모두 멈춰라!”
실제로 손에 든 검을 휘둘러 도망치는 왜병 몇 명을 베기까지 했지만 병사들을 돌려세울 수는 없었다.
그들한테는 더 이상 쇼군이 내린 명령도, 도주병으로 낙인찍혀 큰 벌을 받게 될 거라는 두려움도, 막부에서 녹봉을 받는 병사로서의 의무도 아무 소용없었다.
머릿속에는 그저 한 발자국이라도 멀리 여기서 벗어나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장군, 아무래도 틀린 것 같습니다.”
측근 무사의 말에 미츠오는 발로 흙을 걷어차며 분통을 터트렸다.
“화살 한 대 제대로 못 날려 보고 이처럼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무사도 참담한 심정이었지만 조선군이 바로 지척까지 접근한 상황이었기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곧 조선군이 들이닥칠 겁니다. 일단 성으로 피하시지요.”
“쇼군께 목숨을 걸고 해안을 지키겠다고 했는데 그럴 수는 없어.”
미츠오가 고개를 흔들며 고집을 피우자 무사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설득했다.
“병사들이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이미 다 달아나 버려 남아 있는 인원이라고는 저를 포함해서 몇 명 되지도 않는데 뭘 가지고 조선군을 막는단 말입니까?”
주위를 둘러보자 무사의 말대로 함포 사격에 살아남은 왜병 대부분이 도망치고 남아 있는 병사라고는 마흔 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미츠오와 근처에 있는 무사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아 있는 거지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가망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차피 이대로 에도 성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이에미쓰한테 질책을 받고 불명예스럽게 할복할 처지인지라, 미츠오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이대로 도망칠 수는 없어. 우리는 쇼군의 명령대로 여기서 옥쇄를 한다!”
“자, 장군.”
깜짝 놀라 쳐다보는 무사한테 고개를 돌린 미츠오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번 말하지 않겠네. 어차피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이상 에도 성으로 돌아가 봤자 우린 죽은 목숨이야.”
“큭!”
무사는 신음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숙였다.
한편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병사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춤거렸다.
무사들에겐 자신들이 섬기는 주군과 가문을 위해 죽는다는 명예로운 이유라도 있지, 그들에겐 아무 해당 사항이 없었다.
말 그대로 개죽음이나 마찬가지.
그들의 눈에 두려움과 뒤섞인 반항적인 빛이 깃드는 것을 보고 미츠오는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을 보란 듯이 앞으로 들이밀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도주할 낌새를 보이면 내가 제일 먼저 네놈들의 목을 칠 테다.”
“히익!”
미츠오의 말은 단순한 엄포가 아니었다.
이미 그의 손에 들린 검에는 앞서 도망치는 시도를 하려다가 죽은 자들의 피가 진득하게 묻어 있어, 진한 혈향이 풍겨 나왔다.
당장이라도 가차 없이 검을 휘두르겠다는 듯이 살기를 내뿜는 미츠오의 모습에 병사들은 진저리를 치면서 주눅 든 모습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소선이 해안에 도착해 조선군 병사들이 내리는 걸 본 미츠오는 광기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모두 돌격해!”
“…….”
명령을 내렸는데도 왜병들이 머뭇거리며 움직이려고 하지 않자 눈썹을 치켜 올린 미츠오는 다짜고짜 제일 가까이 있던 병사의 목을 쳤다.
츄악.
“커컥.”
“헉!”
단칼에 목이 잘린 병사가 피를 뿌리면서 모래사장에 쓰러지자 왜병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미츠오를 쳐다봤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어서 돌격해!”
그러면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위협적으로 휘두르자 겁에 질린 왜병들은 억지로 함성을 내지르며 허둥지둥 앞으로 뛰쳐나갔다.
“와아아!”
선봉을 맡아 병사들과 함께 제일 먼저 해안에 상륙한 사직 이관은 마치 자살 공격이라도 하듯 일단의 적군이 이쪽으로 달려드는 걸 보고 눈가를 찡그렸다.
“저것들은 뭐야?”
그러자 뒤따라 소선에서 내린 부장이 앞을 보고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함포 사격에 머리가 돌아 버린 모양입니다.”
아무리 상륙할 때가 가장 취약한 순간이라고 해도 고작 마흔 명 남짓한 인원으로 오백 명도 넘는 아군을 향해 돌격해 오는 왜병들이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어찌 됐건 미친놈들이라고 해도 병장기를 들고 있는 이상 아군에 위해를 가할 수 있었기에 이관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궁수대, 저것들을 처리해라!”
“옛.”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활을 가진 궁수들이 전통에서 활을 꺼내 시위에 걸고는 바로 쐈다.
슈슉! 슉!
이제 막 상륙을 한 참이라 한곳에 모여 집중사격을 가하지는 못했지만 궁수들이 날린 화살은 절반이 넘는 왜병들을 맞혀 쓰러뜨렸다.
“으윽.”
“케켁.”
화살 세례에 상대가 주춤거리자 이관은 마무리를 짓기 위해 튕기듯 뛰쳐나가며 소리쳤다.
“적을 제압해라!”
그 뒤를 부장과, 병장기를 든 병사들이 따랐고 이내 양쪽이 충돌했다.
츄앙.
“꾸엑!”
창을 들이대던 왜병 하나가 이관이 휘두른 주먹에 맞아 턱이 부서진 채 그대로 나자빠졌다.
전의에 불타는 조선군 병사들은 거세게 상대를 몰아붙였고 적은 허둥대며 공격을 막기에 바빴다.
채챙! 챙! 챙!
“으악.”
“컥.”
“히이익.”
숫자도 적은 데다 기세까지 밀린 왜병들은 순식간에 수세에 몰리며 조선군의 공격에 속절없이 목숨을 잃었다.
앞으로 내민 검에 가슴이 꿰뚫린 적을 한쪽 발로 밀어낸 이관은 바로 이어서 몸을 빙글 돌려 옆에 있던 왜병의 얼굴을 딱딱한 검 손잡이로 찍어 버렸다.
“크헉.”
피가 튀며 안면이 완전히 함몰된 상대는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면서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단번에 두 명을 처리하고 잠시 호흡을 고르던 이관은 뒤에서 섬뜩한 기운이 느껴지자 지체 없이 돌아서며 검을 사선으로 치켜 올렸다.
“이놈!”
아니나 다를까 얼굴 가득 광기가 어린 미츠오가, 어느새 다가왔는지 바로 뒤에서 기합을 내지르며 두 손으로 잡은 검을 아래로 힘껏 내려치는 걸 간발의 차이로 막아 낼 수 있었다.
채앵!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상대를 밀어낸 이관은 두세 발자국 거리를 두며 미츠오를 노려봤다.
“오호라. 갑옷을 보니 네놈이 우두머리인 모양이구나.”
이관의 말에 미츠오는 대답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다시 덤벼들었다.
“죽어!”
“흥! 누구 마음대로.”
그러자 이관도 콧방귀를 뀌고는 마주 달려가 검을 휘둘렀다.
막부 가신 중 하나로 에도 수비라는 막중한 직책을 맡고 있는 미츠오의 검술 솜씨는 어디 가서 절대 빠지는 실력이 아니었지만, 이관도 만만치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합을 부딪치고 서로 상대가 범상치 않은 실력을 가졌다는 걸 깨달을 때쯤 미츠오가 먼저 틈을 보였다.
측근이자 그의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인 무사가 조선군 병사들한테 둘러싸인 채 저항을 하다 창에 꼬치처럼 꿰여 비명을 내지르는 소리에 그만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만 것이다.
지금처럼 고수들끼리의 대결에서 순간의 집중력 상실은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시선이 돌아가는 걸 보자마자 거리를 좁히며 들어간 이관은 들고 있는 검에 체중을 그대로 실어 사선으로 길게 내려쳤다.
“받아라!”
“이런.”
대경실색한 미츠오가 황급히 검을 들어 올리며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이관보다 한 박자 늦었다.
창!
미츠오의 검을 살짝 스친 이관의 검격은 상대의 왼쪽 어깨를 자르고 들어가 갈비뼈를 모조리 부수고는 오른쪽 옆구리까지 길게 찢어발겼다.
츄아악!
오요로이라고 불리는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힘이 가득 실린 이관의 검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뻘건 피가 뿜어져 나오고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치명상을 입은 미츠오는 고통에 찬 비명을 내뱉고는 썩은 통나무처럼 그대로 쓰러졌다.
“아아악!”
넘어진 미츠오의 몸에서는 피가 한가득 쏟아져 나오며 모래사장을 붉게 물들였는데 머리가 힘없이 처지고 별다른 미동이 없는 걸로 봐서 단번에 절명한 것 같았다.
“후우.”
죽은 미츠오를 내려다보며 이관이 크게 한숨을 내뱉자 부장이 옆으로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사직 어른?”
“그냥 잠시 호흡을 고른 것뿐이네.”
“예. 그나저나 남해도 군영에서도 무술 실력으로 첫 손가락에 꼽는 사직 어른과 비등하게 대결을 벌인 것도 그렇고 갑옷이 다른 무사들보다 화려한 걸 보면 상당히 높은 직책에 있는 놈 같습니다.”
부장이 죽은 미츠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호들갑을 떨자 이관은 힐끗 한번 시선을 주고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럴지도 모르지.”
“정말 높은 직책의 장수라면 큰 공을 세우신 건데 기쁘시지 않습니까?”
“전투가 완전히 끝났다면 모를까 아직 적과 싸우는 중인데 지휘관이라는 자가 자기 전공이나 챙기고 있으면 어찌 되겠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병사들을 모아 교두보를 확보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살짝 미소를 지은 부장은 군례를 취하고는 한쪽에 모여 있는 병사들을 큰 소리로 불러 모았다.
이관은 혹시나 남아 있는 적이 있는지 주위를 둘러봤지만 멀쩡히 서서 돌아다니는 건 몇몇 포로를 제외하고는 전부 조선군 병사들뿐이었다.
그리고 드넓은 해변 여기지기에 수많은 왜병들의 시신이 끔찍하게 훼손된 채 널려 있어 함포 사격이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 알려 줬다.
그렇게 조선군은 에도에 첫발을 내디뎠다.
함포 사격을 시작할 때부터 함교를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전투를 지켜보던 도현은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깃발 신호가 보이자 그때야 굳어 있던 표정을 풀었다.
“청색 깃발이 올라왔습니다.”
“나도 봤네.”
빠른 상황 전달을 위해 예전부터 조선군은 거울로 햇빛을 반사시키거나 깃발, 연기 그리고 불빛 등으로 신호를 보냈는데 청색기는 별다른 저항 없이 적을 물리치고 해안을 점령했다는 뜻이었다.
“저항이 크지 않았다니 다행이군.”
“해안을 완전히 뒤집어 놓을 정도로 함포 사격을 해 댔으니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도현은 동의하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본대가 상륙할 차례인가.”
“예. 저길 보십시오. 벌써 뒤편에 있던 수송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사옵니다.”
이충민 함장의 말에 몸을 돌린 도현은 원정군 지상 병력을 가득 태운 수송선들이 해안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걸 볼 수 있었다.
이제 본격적인 에도 성 공략이 시작되었다.
그 모습에 도현은 지난 임진왜란 때 도성인 한양을 왜적들한테 빼앗기고 정궁인 경복궁이 불에 타 소실된 치욕을, 이제야 되갚아 줄 순간이 왔다는 것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본대와 함께 짐도 해안에 상륙할 것이니 준비를 하게.”
“전하께서 직접 가신단 말씀이십니까?”
이충민 함장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자 도현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
“끄으응.”
지난번 해전에서는 워낙 상황이 다급했기도 하지만 도현의 기세에 자신도 모르게 봉항함을 끌고 최선두에 나서 전투를 벌였다.
그걸 후회하는 건 아니었지만 임금인 도현이 탄 친위함 함장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그것 때문에 해전이 끝난 다음 통제사 손억기한테 불려 가 주상 전하가 위험에 처할 뻔했다고 크게 야단을 들어야 했다.
그런데 또다시 안전한 봉황함이 아니라 해안에 상륙해 지상군과 함께 에도 성 공략에 참가하겠다니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서 배를 준비하지 않고 뭘 하고 있나?”
왜국 원정을 위해 도성인 한양을 떠나올 때부터 그를 모시며 어느 정도 성격을 파악한 이충민 함장은 자신이 만류한다고 해서 듣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도현이 재촉을 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언제 적이 반격을 해 올지 모르니 일단 본대가 다 상륙한 다음에 가시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흐음.”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을 해 본 도현은 괜히 자신이 빨리 갔다가 전투라도 벌어지면 오히려 아군에게 방해가 될 수도 있었기에 한발 뒤로 물러섰다.
“좋아. 그럼 조금 더 기다렸다가 가도록 하지.”
“잘 생각하셨사옵니다.”
비록 오래는 못 붙잡고 있겠지만 임금인 도현을 언제 왜병과 접전이 벌어질지 모르는 해안으로 지금 당장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이충민 함장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사이 봉황함의 좌우를 스쳐 지나간 수송선들이 해안에 도착해 병력과 물자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지금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기에 통제사 손억기는 배 밑바닥이 평평해 수심이 낮은 곳까지 어렵지 않게 접근이 가능한 신형 판옥선들을 전진 배치시켜 언제든 함포 사격을 가할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조금이라도 적대적인 무리가 해안으로 다가올 조짐이 보인다면 지체 없이 불벼락을 날려 보낼 것이다.
엄청났던 함포 사격에 기존에 있던 선착장 시설이 모두 박살 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수송선들은 해안 모래사장에 그대로 진입해서는 하역 작업을 했다.
이히히힝.
아슬아슬하게 설치된 잔도로 끌고 내려오던 군마가 몸부림을 치자 고삐를 잡고 있던 기병이 얼른 갈기를 쓰다듬으면서 달랬다.
“괜찮아. 괜찮아.”
그러자 아래에 보이는 바다를 보고 겁을 내던 군마는 조금 진정이 됐고 기병은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는 천천히 아래로 이끌었다.
푸르릉.
“옳지, 잘한다.”
생긴 것하고 달리 의외로 겁이 많고 예민한 동물이 바로 말이라, 높다란 배 갑판에서 나무판자 몇 개를 붙여 만든 잔도를 이용해 아래로 끌고 내려가는 일이 보통 힘들지 않았다.
이렇게 기병들이 말과 씨름을 하는 사이 한쪽에서는 무장을 갖춘 병사들이 각자 장비를 가지고 질서 정연하게 하선하고 있었다.
“여기가 너희 집 안방인 줄 아냐. 빨리 움직이지 못해!”
하급 군관의 호통에 줄을 지어 내리는 병사들의 행동이 조금 더 빨라졌다.
수송선에서 내린 병사들은 각 백인대별로 집결한 뒤 방어대형을 갖추며 주위를 경계했고 일부는 시가지 쪽으로 움직여 교두보를 넓혔다.
온갖 물자와 병사 들 그리고 군마까지 한데 뒤섞인 해안은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북새통이었다.
상륙전에 미리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지만 막상 실행을 하자니 여러 가지로 실수가 많이 일어났다.
교두보 확보 임무를 맡은 이관은 한쪽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짧게 혀를 찼다.
“엉망이군.”
“이런 대규모의 상륙은 처음 해 보는 거니. 어쩔 수 없을 겁니다.”
부장의 말이 이해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나도 혼잡하고 무질서한 모습에 이관은 좀처럼 얼굴을 펴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막부군이 반격을 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다행이지. 이러고 있는데 교두보를 공격해 온다면 어찌 됐겠나?”
“그건 그렇습니다.”
“다음에도 이렇게 운이 좋을 거란 보장은 없으니, 또다시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지휘부에 문제를 보고해야겠어.”
“지금쯤이면 윗분들도 상황을 파악하고 계실 겁니다. 저기 보십시오. 물자를 실은 배들이 뒤로 빠지고 있지 않습니까.”
시선을 바다 쪽으로 돌리자 정말 아직 하역이 다 끝나지 않았는데도 교두보의 혼잡을 줄이기 위해서 당장 급하지 않는 보급 물자를 실은 수송선들이 작업을 중단하고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진작 저렇게 했어야지.”
툴툴거리면서도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자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지 않고 신속하게 대처하는 지휘부에 신뢰가 갔다.
“아 참. 그리고 한 가지 더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가?”
“조금 있다가 주상 전하께서 상륙하시니 주변 경계를 더욱 철저히 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주상 전하께서 오신다고?”
크게 놀란 듯 이관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부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예. 원래는 본대와 함께 오시려고 했지만 해안이 혼잡할 걸 우려해 뒤로 조금 미루셨다고 합니다.”
“이것 참. 그냥 봉황함에 계셔도 되는데…….”
“원래 뒤에서 구경만 하는 걸 싫어하시는 분이시잖습니까.”
“그렇긴 해도…….”
이관도 이충민 함장처럼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최전방에 임금인 도현이 나오는 걸 크게 염려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얼른 병사들에게 목책을 더 빨리 세우라고 하게.”
“옛.”
선봉에 서서 교두보를 확보한 병사들은 주변 경계를 하는 한편, 여기저기 부서진 채 널려 있는 막부군의 방어 시설을 재활용해서 모래사장이 끝나는 야트막한 언덕에다가 적군의 반격에 대비한 목책을 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보급 물자 하역을 중단하자 한결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는 상륙 현장을 힐끗 쳐다본 이관은 이내 부장과 함께 걸음을 옮겨 목책 작업을 독려했다.
“뭐? 뭐라고 다시 말해 봐!”
상석에 앉은 이이메쓰가 눈썹을 위로 치켜 올리고는 다그치듯 말하자 전령은 눈치를 보면서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해, 해안을 지키던 병력이 모두 전멸하고 미츠오 수비대장도 전사하셨습니다. 현재 조선군이 주변을 장악하고 상륙 중입니다.”
“이럴 수가.”
말을 들은 이에미쓰의 얼굴은 핏기가 싹 빠져나가며 창백해졌다.
솔직히 해안에 배치한 병력이 조선군의 상륙을 다 막아 낼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며칠은 버틸 줄 알았는데 불과 한나절도 안 되어서 무너지다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방 안에 있던 가신들도 놀라고 당황스러운지 다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며 웅성거렸다.
“조선군이 해안에 상륙했다면 조만간 에도 성으로 진격해 올 텐데, 큰일입니다.”
“쇼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성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가시지요.”
“적이 코앞에 있는데 어딜 간단 말이오? 그러다가 놈들한테 붙잡히기라도 하면 공이 책임을 질 거요!”
미츠오가 죽음으로써 이제 현재 에도 성에 있는 무장들 중에 가장 서열이 높은 아카기 신노스케가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반대하자 미우라도 지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그러니까 애초에 내가 피난을 떠나야 한다고 했을 때 막부를 옮겼으면 이런 상황은 없었을 거 아니오!”
“뭐요!”
“왜, 내 말이 틀렸소?”
금방 멱살잡이라도 할 것처럼 두 사람의 감정이 격해지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에미쓰가 손바닥으로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며 호통을 내질렀다.
탕!
“그만들 못 하겠나! 조선군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판국에 이게 무슨 추태야.”
“죄,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잔뜩 화가 난 이에미쓰의 얼굴에 두 사람은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미우라.”
“예.”
“당장 조선군을 상대하는 것이 시급한데 이미 지나간 일로 분란을 일으키지 말도록 해.”
“……알겠습니다.”
불만이 있었지만 그래도 쇼군의 말에 토를 달 수는 없었기에 미우라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좌우에 앉아 있는 가신들을 바라보면서 이에미쓰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원 병력은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나?”
그러자 에도에 남아 싸울 것을 주장했던 이시노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령을 보낸 지 하루밖에 안 돼서 아무리 빨라도 이삼일은 더 있어야 될 겁니다.”
“미치겠군.”
대답을 듣자마자 이에미쓰는 와락 인상을 구겼다.
“면목이 없습니다.”
“신노스케, 지금 성에 남은 병력이 얼마나 되지?”
이에미쓰의 물음에 신노스케는 약간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삼천 명가량이 있습니다만 그중 절반이 어제 급히 징집한 병사들입니다.”
“끄으응.”
생각보다 많은 병력에 살짝 표정을 풀던 이에미쓰는 상당수가 그저 화살받이 정도로밖에 쓸 수 없는 징집병이라고 하자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굳은 얼굴로 앉아 있던 미우라가 이에미쓰를 보며 말했다.
“쇼군, 이 병력 가지고 공성전을 벌이는 건 무립니다. 기회가 있을 때 안전한 곳으로 탈출하셔야 됩니다.”
“이미 적이 해안에 상륙했는데 그게 가능할까?”
“성안에 있는 인원 전부를 데려가는 건 어렵지만 중요 요인들만 말에 태워 신속히 이동한다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흐음.”
막부의 상징인 에도 성을 버리는 걸 부정적으로 생각하던 이에미쓰였지만 당장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자 미우라의 이야기에 솔깃해했다.
바로 그때 갑옷을 입은 무사 한 명이 황급히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이에미쓰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쇼군, 급보입니다.”
“또 무슨 일이야!”
“일단의 조선군 기병이 성 근처에 나타났습니다.”
“그게 사실이냐?”
“네. 북쪽 망루에서 적을 관측했고 혹시 공격해 올 것을 대비해 급히 성문을 모두 폐쇄했습니다.”
“제기랄! 이제 꼼짝없이 갇혔군.”
조선군 기병이 성 근처에 출몰했다는 건 이제 피난을 떠날 길이 완전히 막혔다는 뜻이었기에 이에미쓰뿐만 아니라 함께 있던 가신들의 표정이 모두 어두워졌다.
수심이 얕아 봉황함이 해안 근처까지밖에 갈 수 없었기에 중간부터는 작은 배를 내려서 갈아타고 가기로 했다.
짠 내가 섞인 바람 냄새를 크게 들이쉬면서 점점 가까워지는 뭍을 바라보고 있던 도현은 감개무량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육지에 발을 디디면 처음으로 막부의 심장인 에도에 온 조선 국왕이 되는 것이다.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던 몽골의 대군도 차마 견뎌 내지 못하고 신풍에 물러가야만 했던 길을 그가 새롭게 개척한 셈이니 가히 역사에 길이 남을 첫걸음이 되리라.
“전하, 신발이 젖사옵니다.”
“상관없다.”
도현은 옆에서 걱정하는 소리를 가볍게 물리치고 성큼 배에서 내렸다.
바닷물에 발을 담그자 순식간에 옷이 축축하게 젖는 것이 느껴지며 서늘한 기운이 몰려왔다.
하지만 발목 정도 높이에서 파도치며 와 닿는 바닷물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시원해서 딱 좋을 정도였다.
무겁게 축 늘어진 망토를 칠현이 들어 올려 주려 했으나 도현은 상관없다는 듯 기운차게 발을 내디뎠다.
몸에 휘감기는 망토자락과 바닷물을 가르며 도현이 먼저 앞으로 나서니 칠현을 비롯한 다른 장수들이 그를 호위하듯 뒤에 늘어서서 함께 움직였다.
개선장군처럼 어깨를 쫙 펴고 허리를 꼿꼿하니 세운 채 당당하게 향한 그 앞에는, 이관이 부하들을 이끌고 도현을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이관이 우렁찬 목소리로 씩씩하게 군례를 올리자 도현이 환한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선봉을 맡아서 부담이 컸을 텐데, 잘 싸워 줬네.”
“아니옵니다. 오히려 제게 큰 역할을 맡겨 주셔서 영광이었습니다.”
대답하는 이관의 얼굴에도 반짝거리는 생기가 넘쳐흘렀다.
“어쨌든 수고했네.”
그렇게 말하며 도현은 저 멀리 우뚝 솟아있는 에도 성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저것이 바로 막부를 지탱하는 중추.
지금쯤 이에미쓰는 선조들이 몇 대에 걸쳐 쌓아 올렸던 자신의 왕국이 모래성처럼 스러지는 기분을 철저히 맛보고 있을 터였다.
“임진년의 빛을 이자까지 쳐서 확실히 받아 내고 말겠어.”
훗, 하며 작게 웃는 것과 동시에 이관이 도현에게 고했다.
“전하, 임시 지휘소로 안내하겠습니다. 가시지요.”
“그러지.”
“이쪽입니다.”
도현은 에도 성을 일별하고 돌아서서 이관이 안내하는 대로 장수들과 함께 임시로 천막을 쳐서 만든 지휘소를 향했다.
상석에 앉은 도현은 이관을 보며 말했다.
“현재 상황을 설명해 보게.”
“예.”
대답을 하며 일어선 이관은 뒤편에 서 있던 부장한테 인근 지형이 상세하게 그려진 지도를 받아 탁자에 펼치고는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집어 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기가 지금 아군이 교두보로 확보한 해안입니다. 상륙 저지에 실패한 적은 현재 이쪽에 있는 에도 성으로 들어가 농성전을 준비 중인 것으로 보이고 피해가 컸는지 아직까지는 반격을 해 올 움직임이 없습니다.”
“퇴로 차단은 실시했나?”
“네. 본대와 함께 상륙한 기병 오백 기가 시가지를 우회해서 에도 성 주위를 맴돌고 있으니 쉽게 나올 수 없을 겁니다.”
“잘했어. 에도를 점령하는 것도 좋지만 이번 원정의 핵심은 이에미쓰를 붙잡아 막부의 항복을 받아 내는 것이니, 어떤 일이 있어도 놈이 도망치게 해서는 안 돼.”
“물론입니다.”
도현은 원정군 지상병력 지휘를 맡은 도총관 엄황에게 시선을 돌렸다.
“도총관, 상륙은 언제쯤 다 끝날 것 같나?”
“병력은 오늘 중에 내릴 수 있겠지만 보급 물자까지 하역을 끝내려면 빨라도 하루는 더 걸릴 것 같사옵니다.”
생각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리자 도현은 살짝 미간을 모았다.
“더 빨리할 수는 없나?”
“그게, 포격으로 선착장 시설이 다 부서지는 바람에 하역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엄황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자 도현은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로 팔짱을 끼고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최대한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팔을 푼 도현은 좌우에 앉아 있는 장수들을 쓸어 보며 이야기를 했다.
“일단 준비가 갖춰지는 대로 곧장 에도 성으로 진격해 공성전을 벌이도록 하지.”
“옛.”
“전하, 한 가지 말씀드릴 것 있습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이관이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말해 봐.”
“현재 확보한 교두보는 우리 원정군 병력을 다 수용하기에는 너무 폭이 짧고 비좁습니다. 거기다가 막부군이 복잡한 시가지를 거점으로 저항하거나 야습이라도 해 오면 대응하기가 어려우니, 최소한 바로 앞에 위치한 선착장 배후지라도 병사들을 보내 먼저 장악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이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걸 지적하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도총관.”
“하교하십시오, 전하.”
“이 사직의 말대로 병력을 내보내 교두보를 방어할 외부 장벽을 확보하도록 해.”
“네.”
잠시 말을 멈춘 도현은 손에 든 지휘봉으로 작전 지도에 있는 에도 성을 가리키면서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라는 걸 명심하고, 적의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에도 성 혼마루에서 봉황기를 휘날리도록 하라.”
그러자 천막 안에 있던 장수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군례를 취하며 크게 대답했다.
“옛.”
회의가 끝나자마자 도총관 엄황은 도현의 지시대로 보병 두 개 천인대를 전진시켜 선착장과 붙어 있는 시가지 일부를 신속하게 장악했다.
그 과정에서 패잔병과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주민 일부와 약간의 충돌이 있었지만 어렵지 않게 제압했다.
그렇게 외부 장벽을 확보하고 교두보를 넓히는 걸 마무리 지었을 때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며 밤이 됐다.
왜국의 중심답게 항상 불야성을 이루며 화려한 야경을 자랑하던 에도는 오늘만큼은 사방이 암흑으로 변해 있었다.
아직도 상당수의 주민들이 피난을 가지 못하고 남아 있었지만 혹시나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겁을 잔뜩 먹고는 숨을 죽인 채 집 안에 틀어박혀 있어 거리는 쥐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반대로 조선군이 상륙한 해안은 대낮처럼 사방에 횃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어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조선군이 불을 밝히고 있는 건 야습을 막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아직 한참 남은 하역 작업을 밤새 계속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대규모 상륙은 처음 하다 보니까 초반에는 약간의 시행착오와 문제가 있었지만, 모두가 합심해서 움직인 덕분에 이제 병력은 모두 내렸고 보급 물자와 화포 같은 중장비를 하역하는 중이었다.
화포 같은 경우는 통짜 쇠로 만들어져 있고 신기전 수레도 상당히 부피가 크고 무게가 많이 나가는 데다 자칫 실수를 해서 바닷물에 빠뜨리기라도 한다면 장비를 못 쓰게 될 수도 있었기에 다들 조심스럽게 작업을 했다.
“거기! 수평이 안 맞잖아. 더 당겨.”
“으차.”
“좋아. 그대로 천천히 내려.”
끼릭. 끼릭.
무거운 장비와 보급품은 도현의 지시에 따라 각 보급선마다 한 대씩 설치된 거중기擧重機를 이용했는데 기존에 순수하게 인력으로만 물건을 싣고 내릴 때보다 몇 배나 효율적이고 일이 쉬워졌다.
쿵.
바로 옆에 대어 둔 널찍한 뗏목에 신기전 수레가 내려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고정시켜 둔 밧줄을 재빨리 풀었다.
대여섯 명의 병사들이 한꺼번에 움직인 데다 때마침 파도까지 쳐서 뗏목이 크게 출렁이며 신기전 수레가 기우뚱거리자, 작업을 감독하던 하급 군관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정신 똑바로 못 차려! 그러다가 신기전 수레가 물에 빠지면 어쩌려고 그래?”
“죄송합니다.”
“거중기에 연결된 밧줄을 풀기 전에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부터 시켜야지!”
“예.”
“어서 서둘러.”
쉬지 않고 계속 이어진 작업에 지쳐 약간 긴장이 풀려 있던 병사들은 하급 군관의 호통에 다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일을 했다.
이윽고 고정 작업이 모두 끝나자 신기전 수레를 실은 뗏목은 천천히 해안 쪽으로 노를 저어 갔다.
“후우.”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 정면을 바라본 하급 군관은 여기저기 횃불을 밝힌 채 온갖 보급품과 장비가 뒤엉켜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해안 모습에 혀를 끌끌 찼다.
저 많은 걸 언제 다 정리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아직도 하역해야 될 보급품과 장비가 한가득 남아 있었다.
실제로 주위에 십여 척이 넘는 뗏목들이 쉴 새 없이 해안과 보급선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지만 거중기는 끊임없이 새로운 물품을 내려놨다.
한편 어두운 시가지 한쪽에 우뚝 서 있는 에도 성은 화려하고 웅장하다는 느낌 대신 외롭고 쓸쓸한 분위기를 풍겨 현재 막부가 처한 상황을 잘 보여 줬다.
불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앞두고 있는 에도 성은 성벽 위에 드문드문 횃불을 밝힌 채 무거운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인적 하나 없이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굳게 닫혀 있는 성문 한쪽에 설치된 작은 쪽문이 경첩 소리를 내며 슬그머니 열렸다.
끼이이익.
그리고 시커먼 야행복을 입고 얼굴까지 복면으로 가린 일단의 무리가 조용히 성을 빠져나와 시가지로 스며들었다.
인원은 서른 명 정도로 얼마 되지 않았지만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바로 쇼군인 이에미쓰 가문에서 은밀히 부리는 이가 유에 속한 닌자[忍者]들이었다.
순식간에 시가지를 가로질러 조선군이 있는 해안 근처까지 접근한 닌자들은 주인이 피난을 떠났는지 텅 빈 포목점 지붕에 모여 환하게 불이 켜진 교두보를 쳐다봤다.
“지금부터 조를 나눠 움직인다.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이고 조선군이 가진 화포를 최대한 많이 파괴하도록 해.”
“예.”
이들의 목표는 바로 조선군이 보유한 각종 화포들이었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함포 사격에 큰 충격을 받은 이에미쓰와 막부 가신들은 아무리 성안에 있어도 그런 공격이 가해진다면 얼마 버틸 수 없을 거라는 판단에, 닌자를 이용해 미리 화포를 없애 버리려는 거였다.
포목점 지붕에서 내려온 닌자들은 어둠을 방패삼아 발소리도 내지 않고 빠르게 조선군 진형으로 침투했다.
이들을 이끄는 건 이가 닌자 가문의 후계자인 사사키라는 자였다.
조선군도 야습에 대비해서 경계병들을 세워 뒀지만 은신과 유격전에 특화된 닌자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닌자들은 경계병이 있으면 옆으로 피해 가거나 피치 못할 상황이면 조용히 제거해 버리면서 경계망을 뚫었다.
쉬익.
푹.
“으윽.”
“응? 뭐, 뭐야…… 컥!”
같이 근무를 서고 있던 동료가 신음을 흘리면서 갑자기 쓰러지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던 병사는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사사키가 휘두른 검에 목이 잘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순식간에 병사 두 명의 목숨을 앗아 간 우두머리는 부하들이 시신을 눈에 잘 안 띄는 곳으로 옮기는 동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주위를 둘러봤다.
“긴테쓰.”
“예.”
옆에 있던 닌자 한 명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기서부터 갈라지자.”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긴테쓰가 부하 절반을 데리고 조용히 사라
지자 사사키도 나머지와 함께 움직였다.
임시 지휘소 천막 안, 도현을 중심으로 원정군 장수들이 모두 모여 탁자를 둘러싼 채 열띤 기세로 에도 성을 어떻게 함락시킬지 작전 회의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낮부터 계속된 회의에도 모인 사람들의 면면엔 지친 기색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하면 아군의 희생을 최대한으로 줄이고 효과적으로 성을 공략할지 머리를 짜내느라 피곤할 법도 한데, 오히려 즐거운 듯 눈을 형형하게 빛내는 모습이 열의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럼 방금 말한 대로 작전을 짜고 내일 아침 일찍 에도 성을 향해 진격할 테니 모두들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예, 전하.”
장수들이 모두 입을 모아 대답하자 도현은 어깨의 힘을 빼고 얕은 숨을 내쉬었다.
“다른 할 일도 많을 테니 다들 나가 봐.”
그러자 장수들은 저마다 군례를 한 뒤 천막을 빠져나갔다.
어지러운 선이 그어진 지도와 각종 문서 들을 앞에 두고 도현이 끄응 기지개를 펴고 있자니,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한쪽에 조용히 시립해 있던 칠현이 다가와 말했다.
“전하, 지금이라도 야식을 대령할까요?”
낮에 봉황함에서 하선한 이후로 교두보를 둘러보고 장수들을 불러 모아 작전 회의를 벌였으니 배 속에 든 거라곤 점심에 먹은 게 다였다.
틈틈이 차로 마른 목을 채우긴 했지만 이러다가 쓰러지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되었다.
“벌써 한밤중인데 먹긴 뭘 먹어.”
“그래도 뭘 좀 드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됐어. 지금 먹으면 소화가 덜 돼서 나중에 배만 더부룩해진다고.”
듣고 보니 좀 출출하긴 했지만 중요한 일을 앞뒀으니 몸도 머리도 가벼운 상태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렇게 거절하고 나서 문득 옆을 보니, 칠현이 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꼭 야단맞은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
“전하께서 몸이라도 상하시면 나중에 중전 마마께 제가 혼난단 말입니다.”
출정 전에 중전이 따로 불러서 잘 보필하라고 단단히 다짐을 받은 듯, 전전긍긍하는 칠현의 표정에 도현은 결국 피식 웃고야 말았다.
“알았어. 정 그렇다면 뭐 간단하게 마실 거나 들고 와.”
“정말이십니까? 그럼 당장 수정과를 대령하겠습니다. 단걸 드셔야 기운이 나지요.”
칠현이 평상시처럼 촐싹거리는데, 무거운 가죽 갑옷을 덧입고 있는 탓인지 입에서 절로 끙 신음이 터져 나왔다.
“에구구.”
“괜찮냐?”
“무, 무거워 죽겠습니다. 장군님들은 대체 어떻게 이런 갑옷을 입고 아무렇지도 다닐 수 있는 거죠?”
“체력이 다르잖아, 체력이.”
그러면서 도현은 훗, 하고 웃는 표정으로 가슴팍을 탁 쳤다.
“너도 나처럼 근육을 키우면 돼.”
“어유, 전 적성에 안 맞아서 그런 거 못 합니다.”
한창 도현이 검술 수련을 할 때, 하도 몸 자랑을 해 대면서 체력이 없다고 놀리기에 칠현도 팔근육을 한번 키워 볼까 싶어 남몰래 기왓장을 들어 보기도 했지만 결국 사흘 만에 때려치우고 말았다.
“사람마다 다 타고난 재능이 따로 있는 거죠.”
“하여간 말은 잘해요. 구시렁거리지 말고 얼른 갔다 와.”
“예이.”
잠시만 기다리고 있으라며 칠현이 천막을 나간 뒤, 혼자 남은 도현은 뻑뻑한 한쪽 눈을 비비면서 다시 나무 탁자 위에 흩어져 있는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하역 작업을 하느라 교두보 전체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도현이 있는 곳은 그리 시끄럽지 않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밖에 켜 놓은 횃불이 타닥타닥 타는 소리가 들렸고, 멀리 있는 숲 저편에서는 밤새가 낮게 울고 있었다.
궁 안에서는 자주 들을 수 없는 자연의 소리에 흠뻑 취해 있던 도현은 문득 어느 순간 정적이 찾아든 것을 깨닫고 이상함을 느꼈다.
조용하다.
너무 조용하다.
아무리 한밤중이라 해도 순찰을 도는 병사의 발소리, 또는 곤충의 울음소리 정도는 들려야 할 텐데 마지 주변의 모든 생물체가 깊은 잠에 빠져든 것처럼 너무나 짙은 정적이었다.
“……?”
‘그러고 보니 칠현은 왜 안 돌아오는 거지?’
벌써 돌아오고도 한참 남을 시각인데 뭔가가 이상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도현이 무의식적으로 반쯤 자리에서 일어선 순간, 머리 위에서 뭔가 부욱 찢기는 소리와 함께 온통 검은색으로 몸을 감싼 사람의 모습이 뚝 떨어져 내렸다.
“이런 쌍!”
고귀한 신분에 맞지 않는 쌍소리를 내뱉으며 도현은 황급히 정수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검격을 피해 바닥을 굴렀다.
우당탕!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친 검은 정확히 그가 앉아 있던 의자에 내리꽂혔다.
만약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도현이 미리 대비를 하고 있지 않았다면 아무리 무예 훈련으로 단련된 그라도 공격을 피해 내기 어려울 정도였다.
“웬 놈이냐!”
재빨리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든 도현의 외침에 첫 공격을 실패한 사사키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다짜고짜 다시 덤벼들었다.
“죽어라!”
“어딜.”
마치 몸에 용수철이라도 달린 듯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오는 사사키의 공격은 상당히 위협적이었지만, 평소 이완과 흑치영 등 주위에 있는 장수들과 꾸준히 대련을 해 온 그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다.
채채챙! 챙!
칼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오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십여 합 이상을 서로 주고받았다.
사사키의 칼 솜씨는 그야말로 현란하기 그지없었다.
언제 꺼내 들었는지 짧은 삼지창을 왼쪽 손에 들고 육안으로 좇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무기를 휘둘렀다.
쌍검을 쓰는 무인과도 대결을 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사사키의 공격은 쾌검일 뿐만 아니라 상당히 변칙적이라 상대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크윽.”
그래도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고 나름 잘 막아 내던 도현은 검을 휘둘러 시선을 빼앗은 뒤에 찔러 온 삼지창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왼쪽 어깨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다행히 갑옷을 걸치고 있는 데다 재빨리 몸을 뒤로 빼서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고작 자객 따위한테 당했다는 것에 도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여기서 흥분하면 불리한 건 자신이라는 걸 알기에 도현은 애써 냉정을 유지하고는 검을 크게 휘둘러 상대를 뿌리친 다음 살짝 거리를 벌려 숨을 골랐다.
“후우. 자객 주제에 제법이구나.”
그러자 사사키 역시 그를 날카롭게 노려보면서 약간 어색한 조선말로 입을 열었다.
“흥. 그러는 너야말로, 글만 읽는 샌님인 줄 알았더니 정말 의외야. 하지만 오늘 여기서 죽는다는 건 변함이 없을 것이다.”
어느새 이 몸의 원래 주인인 효종과 완전히 동화된 도현은 감히 반말을 찍찍 해 대는 사사키의 행동에 이를 부드득 갈며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건방진 놈,”
“곧 죽을 사람한테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지 않겠어.”
자신만만한 사사키의 태도에 도현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필요 이상으로 긴장한 몸을 살짝 풀었다.
“내 명이 의외로 길어서 말이야.”
“호위들을 믿고 시간을 끄는 거라면 포기하는 것이 좋을 거야.”
“……!”
사사키의 말에 도현은 그때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에도 항상 친위대 위사 다섯 명이 그를 따라다니며 지킬 정도로 경호가 삼엄했는데, 특히나 지금은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전장이라 더욱 경계가 심했다.
그런데 아까 처음 공격을 받았을 때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일부러 고함까지 내질렀는데, 지금까지 개미 새끼 한 마리 나타나지 않는 걸 보면 밖에도 뭔가 변고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사키와 대결을 펼치느라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새 천막 밖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자 사사키는 복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후후후. 내가 혼자 왔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끄으응.”
“자, 그럼 이제 마무리를 짓자고.”
왼쪽 손에 든 삼지창을 혓바닥 끝으로 살짝 핥은 사사키는 이내 표범처럼 날렵하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도현도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는 피하지 않고 맞상대를 했다.
“어디 해보자!”
채챙! 챙! 챙!
쇳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연달아 불꽃이 튀었다.
사사키는 닌자 특유의 쾌검으로 그를 사정없이 몰아붙였지만 도현은 부상을 당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아슬아슬하게 모두 다 막아 냈다.
방어를 하다가 간간이 해 대는 치명적인 공격에 오히려 사사키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아무리 부하들이 밖에서 위사들을 상대하고 있다지만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지는 건 사사키였기에 점점 초조해졌다.
그러다 보니 무리하게 공격을 하는 것이 많아졌고 점점 상대의 수법이 눈에 익기 시작한 도현한테 틈을 보이고 말았다.
방어에 집중하면서 차분히 기회를 노리던 도현은 이걸 놓치지 않았다.
“이야압!”
츄앙.
“헉.”
검날로 상대의 삼지창을 튕겨 낸 도현은 그대로 사사키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화들짝 놀란 사사키는 이내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뜨리며 다른 쪽 손에 든 검을 사선으로 내려쳐 그를 베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도현의 검이 한 박자 빠르게 휘둘렸다.
서걱!
끔찍한 소리와 함께 사사키의 가슴이 길게 찢어지며 피가 튀었다.
“끄헉.”
가슴이 쩍 벌어지며 피를 엄청나게 쏟아 낸 사사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앞에 있는 도현을 쳐다보면서 힘없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털썩.
비록 이기기는 했지만 도현도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았는데 부상을 당한 왼쪽 어깨를 손으로 감싸면서 검을 지팡이처럼 짚었다.
그때 여전히 바깥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입구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걷히며 친위대장인 신철이 일단의 위사들과 황급히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전하!”
신철과 위사들은 엉망인 천막 안 광경과 한쪽에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사사키의 시신을 보고는 입을 딱 벌렸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도현이 부상을 입고 있는 걸 발견하자 대경실색해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으음. 조금 찔린 거니까 호들갑 떨 필요 없어.”
그가 한쪽 손을 가볍게 내저으며 별거 아니라고 했지만 신철의 표정은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피가 이렇게 많이 나는데…… 안 되겠습니다. 이봐, 당장 어의를 불러와라!”
“예.”
신철의 말에 위사 한 명이 얼른 대답을 하고는 천막을 나갔다.
그리고 다른 위사들은 검을 빼 든 채로 도현을 둘러싸고는 매섭게 눈을 번득이며 주위를 경계했다.
“일단 어의가 올 때까지 이쪽으로 앉으시죠.”
“그래.”
티는 내지 않았지만 죽은 사사키를 상대하느라 심력을 많이 소모했던 도현은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말을 들었다.
“잠시 상처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전에,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의자에 앉은 도현이 정색을 하며 묻자 신철은 죄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신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해 이런 불미스러운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죽여 주십시오.”
“경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니, 그만 고개를 들고 어찌 된 건지 자초지종을 설명해 봐.”
“이에미쓰가 보낸 자객들이 포병대 쪽에 소란이 일어난 틈을 이용해 전하를 노린 것 같사옵니다. 거처를 지키던 위사들이 바로 대응을 했지만 워낙 공격이 거센 데다 기습으로 다섯이나 먼저 당해 버리는 통에 그만, 전하를 위험에 처하게 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최우선으로 지켜야 될 도현이 오랫동안 혼자 방치됐고 거기다가 자객과 직접 맞닥뜨려 부상까지 입었으니 신철은 처벌을 각오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도현은 그것보다 다른 것에 더 신경을 썼다.
“지금 포병대에 소란이 벌어졌다고 했나?”
“예. 이곳처럼 야행복을 입고 머리에 복면을 쓴 적이 침투해서 하역해 놓은 화포를 망가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찌 됐어?”
화포를 노렸다는 말에 도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그게 전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이리로 와서…….”
“당장 알아보고 와! 아니, 내가 직접 가지.”
상처를 입은 데다 아직 이에미쓰가 보낸 자객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가 움직이려고 하자 신철은 극구 만류했다.
“너무 위험합니다.”
“지금 공성전에 꼭 필요한 포병대가 습격을 받았다는데 그냥 있을 수 없어.”
“이미 이관 장군이 병력을 이끌고 갔으니 자객 놈들을 다 제압했을 겁니다. 그러니 진정하십시오.”
“맞습니다. 부상까지 당하셨는데 무리하게 움직이셨다가 상처가 깊어지기라도 한다면 원정군 전체가 흔들릴 것이옵니다.”
언제 들어왔는지 잔뜩 울상을 짓고 있는 칠현의 말에 그는 더 이상 고집을 피우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끄으응.”
칠현의 이야기대로 자기가 싸울 것도 아니었고 괜히 가 봤자 아군 병사들을 더 신경 쓰게 할 뿐이었다.
차라리 이럴 때는 상황이 모두 다 정리될 때까지 가만히 있는 것이 나았다.
그렇게 도현이 얼굴을 구기고 있을 때 낯익은 얼굴의 어의가 위사 두 명과 함께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게. 전하께서 부상을 입으셨으니 빨리 상처를 봐주게.”
“예.”
신철의 재촉에 어의는 가져온 보따리를 한쪽에 내려놓고는 앞으로 다가왔다.
“잠시 상처를 좀 살펴보겠사옵니다.”
“그러게.”
그가 허락을 하자 어의는 칠현의 도움을 받아 조심스럽게 도현이 입고 있던 갑옷과 상의를 벗겼다.
그러자 부상을 입은 부위가 드러났는데 피부 안쪽 근육까지 살짝 드러날 정도로 상처가 깊었다.
“으음.”
신철 등이 낮게 침음성을 흘리자 도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전장에서 이 정도 상처는 흔한 거 아냐.”
“하오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치료하는 데 방해가 되니 조용히 있게.”
“후우. 알겠습니다.”
그냥 전투는 장수들한테 맡기고 다시 봉황함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하려던 신철은 도현이 눈치를 채고 먼저 선수를 치자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어의는 깨끗한 명주 천으로 상처 부위에 난 피를 모두 닦아 낸 뒤 보따리를 풀고 약 상자에서 가루로 된 지혈제를 꺼내 골고루 뿌렸다.
그런 다음 이것저것 약재를 섞어 시커먼 고약을 만들어서는 그걸 상처에 잘 붙이고 붕대로 왼쪽 어깨 전체를 꽁꽁 감았다.
“다 끝났나?”
“예. 하지만 상처가 다시 벌어질 수도 있으니 당분간은 격렬하게 움직이시면 절대 안 됩니다.”
“알겠네.”
치료가 끝나자 도현은 칠현이 준비해 놓은 새 상의와 갑옷으로 갈아입었다.
그사이 사사키의 시신은 밖으로 치워졌고 친위대 위사 오십여 명이 천막 주위를 둘러싸고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습격을 막아 내고 상황을 정리한 장수들이 속속 지휘 천막으로 모여들었다.
다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비록 소규모 인원이 침투해서 벌인 습격이라고 하지만 원정군이 처음으로 당한 치욕인 데다 자칫하면 임금인 도현이 시해될 뻔했으니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이 당연했다.
이 정도 사안이라면 도총관 엄황을 비롯해 원정군 수뇌부 전체가 문책을 당해도 아무런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나름 경계를 철저히 한다고 했는데도 당한 습격이었기에 더욱더 참담했다.
“피해 상황을 보고해 봐.”
그러자 오른편에 앉은 도총관 엄황이 송구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상자 숫자는 쉰일곱 명입니다. 그리고 하역해서 놔둔 화포 여덟 문이 완전히 망가져 못 쓰게 됐습니다.”
사상자 숫자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공성전에서 성벽을 부술 화포가 부서졌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꽝!
웬만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도현이었지만 이번에는 얼굴까지 벌겋게 상기시킨 채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탁자를 세게 내려치며 호통을 쳤다.
“적이 군영 안으로 들어와 활개를 치고 돌아다닐 때까지 다들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다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왜들 말이 없어!”
“죄송하옵니다. 제가 지휘를 제대로 하지 못해 전하를 큰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도총관 엄황이 책임을 통감한다는 얼굴로 꾸벅 허리를 숙이며 벌을 청하자 도현은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는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지금 그딴 소리나 듣자는 것이 아니잖아! 그리고 공성전을 앞두고 지상군을 책임진 자가 그만두겠다니, 경이 그렇게 무책한 사람이었나?”
도현의 따끔한 질책에 도총관 엄황은 죄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신은 그저…….”
“됐어, 지금은 수습이 먼저야. 김 집장.”
부름을 받은 김근행은 얼른 머리를 들며 대답했다.
“예.”
“자객 놈들의 정체를 알아냈나?”
“아무래도 이가 가문의 닌자들 같사옵니다.”
“이가 가문?”
처음 들어 보는 말에 도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김근행이 자세히 설명을 해 줬다.
“네. 정보 수집과 추적 그리고 요인 암살에 특화된 자들로 그중에서도 이가 닌자는 쇼군인 도쿠가와 가문의 밑에서 온갖 더러운 일을 수행하기로 유명합니다. 이런 닌자들이 나섰으니 아무리 경계를 철저히 했어도 막아 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겁니다.”
“이것들을 그냥…….”
작정을 하고 그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사실에 도현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고는 여전히 표정이 굳어 있는 도총관 엄황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망실한 화포는 내일 공성전에 지장이 없게 통제사한테 말해 수군 전선에 탑재되어 있는 걸 빌리도록 해.”
“예.”
좌우에 앉아 있는 장수들을 쓸어 본 도현은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한번 실수는 병가의 상사라고 했네. 이번 일은 불문에 붙일 테니 다시는 똑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고. 다들 에도 성 공략에서 큰 전공을 세워 오늘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도록 하라!”
도현의 말에 모두들 넓은 아량에 감복하면서 전의를 활활 불태웠다.
“목숨을 걸고 성을 함락시키겠사옵니다.”
에도 성 깊숙한 곳에 있는 내실, 이에미쓰는 주변 사람들을 다 물리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혼자 자리에 앉아 있었다.
길게 처진 발 위에 한 겹 드리워진 얇은 비단 휘장이 한순간 바람에 살랑인다 싶더니 기척도 없이 나타난 긴테쓰가 이에미쓰의 맞은편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쇼군.”
“이제야 왔군.”
이에미쓰는 손에 쥐고 있던 작은 부채를 탁 접어 쥐고는 말했다.
“그래, 일은 어떻게 됐나?”
묻는 말에서 희미한 기대감이 느껴졌지만 아무래도 헛된 희망이었던 듯, 긴테쓰는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적 군영에 침입해 화포를 못 쓰게 망가뜨리는 것까진 계획대로 진행되었습니다만, 조선 국왕을 암살하는 건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사사키 대장이 조선 국왕을 상대하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쳇.”
이에미쓰는 낮게 혀를 찼다.
공성전을 앞두고 화포를 망가뜨린 건 분명 좋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이익이지, 가장 중요한 도현의 목숨을 빼앗지 못했기 때문에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절반의 성공.
아니, 오히려 상대의 화를 돋우기만 했을 테니 실패한 작전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더니 결과가 이 모양인가? 이가 닌자의 명예도 바닥에 떨어졌군!”
“…….”
노골적으로 빈정거리는 이에미쓰의 말에 긴테쓰가 짙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가 닌자에게 있어 유파의 명예는 목숨과도 같은 것.
만약 이에미쓰가 쇼군이 아니었으면 벌써 목이 몇 번은 잘리고 남았으리라.
게다가 그는 사사키가 죽었다는 말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가 류의 전승을 이어야 할 후계자가 명령을 따르다 죽었는데, 어찌 안타까운 기색 하나도 내비치지 않는단 말인가.
긴테쓰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속으로 삼키고 겉으로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냉정한 태도를 지키며 한껏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쇼군.”
“애초에 네놈들을 믿은 내가 잘못이지. 됐다! 그만 물러가라.”
“예.”
이에미쓰가 한 번 눈을 감았다 뜨자, 긴테쓰의 모습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혼자 한숨을 푹 내쉰 이에미쓰는 그의 몸을 감추고 있던 발을 젖히고 나와 열린 창문 너머로 휘영청 높게 뜬 달을 바라보았다.
“내일은 긴 하루가 되겠군.”
오늘따라 유독 밝은 달이 이상하게 원망스러워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