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에도(2)
다음 날 해가 뜨자 지난밤 있었던 습격으로 독이 바짝 오른 조선군은 지체 없이 교두보를 나와 에도 성을 향해 진격했다.
군대가 움직일 넓은 대로 양옆은 미리 이관이 지휘하는 병력이 하나도 빼놓지 않고 샅샅이 다 수색을 했기에 조선군은 거칠 것이 없었다.
도현도 부상을 입었으니 쉬라는 장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말을 타고 병사들과 함께 에도 성으로 갔다.
“워워.”
푸르르릉.
고삐를 뒤로 당겨 말을 멈춰 세운 도현은 앞에 있는 에도 성을 보며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동서로 육 킬로미터 남북으로 오 킬로미터에 달하는 에도 성은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가 쇼군이 되어 건설을 한 이후 증축을 거듭해 그 자체로 하나의 큰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여러 겹으로 된 성벽에 넓고 깊은 해자까지 외부를 두르고 있어서 적이 쳐들어와도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다.
가히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불릴 정도였지만 도현은 여전히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옆에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는 도총관 엄황에게 고개를 돌렸다.
“공격 대형을 갖추도록 해.”
“옛.”
명령이 떨어지자 뒤에 늘어서 있던 병사들은 질서 정연하게 움직여 공격 대형을 갖추면서 에도 성을 둘러쌌다.
새벽부터 성벽 위에 올라가 대기하던 왜병들은 그런 조선군의 모습을 바라보며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젠장. 더럽게 많네.”
“그러게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동네 친구로 이번에 조선군이 나타나자 강제로 징집돼 창을 들게 된 털보 사내의 말에 눈이 옆으로 찢어진 남자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사들이 하는 말 못 들었어. 얼마 안 있어서 지원군이 올 테니까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고 했잖아.”
“과연 그때까지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
털보 사내의 말에 친구는 아무런 이야기도 못 하고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왜병들이 앞으로 벌어질 전투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을 때 이에미쓰는 화려한 갑옷을 입고 휘하 가신들과 함께 내성 혼마루에 서서 조선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선군이 모두 얼마라고 했지?”
이에미쓰의 물음에 신노스케가 얼른 대답했다.
“지상 병력만 이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많군.”
해자 앞을 가득 메우고 있는 조선군을 바라보며 이에미쓰가 무겁게 말하자 신노스케가 어깨를 펴며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만이 아니라 그 몇 배가 되는 병력을 끌고 와도 에도 성을 쉽게 함락시킬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야지. 지원군은 어떻게 됐나?”
고개를 돌리며 이에미쓰가 쳐다보자 가로가 허리를 살짝 굽히며 이야기를 했다.
“시모사 국[下総国]과 가즈사 국[上総国]의 번주들이 병력 오천을 이끌고 내일 오후쯤에 도착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도 순차적으로 병사를 보내온다고 합니다.”
오랜만에 전해진 기쁜 소식에 이에미쓰는 반색을 했다.
“그거 반가운 소식이군.”
“이렇게 번주군이 사방에서 모여들고 우리가 성을 굳건히 지킨다면 조선군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결국 몽고군처럼 꼬리를 말고 쓸쓸히 철수할 수밖에 없을 테니 아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신노스케가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치면서 말하자 이에미쓰는 듬직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만 믿겠네.”
하지만 충분히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은 잠시 뒤 조선군의 포격이 시작되면서 산산이 깨졌다.
“포병대 방열이 모두 끝났습니다.”
전령의 보고에 여전히 말을 탄 채 정면에 위치한 에도 성을 바라보고 있던 도현은 그리 크지 않는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바로 포격을 시작하라고 해.”
“옛.”
지시를 받은 전령이 다시 말에 올라타 포병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얼마 있지 않아서 길게 늘어서 있던 천자총통 서른 문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쏴!”
꽝! 꽝! 꽝!
천지를 뒤흔드는 육중한 포성과 함께 발사된 포탄이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해자를 건너 성벽에 틀어박혔다.
콰아앙! 콰르르르.
조선군이 보유한 화포 중에 가장 위력이 큰 놈답게 날려 보낸 포탄은 망루 하나와 성벽 상당 부분을 무너뜨리며 유감없이 존재를 과시했다.
망루 성가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왜병 여러 명이 피투성이가 되어 해자로 떨어지는 모습에 막부군 병사들은 크게 동요했다.
“저, 저…….”
“흐익.”
“망루가 단번에 박살 나 버렸어.”
직접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사실 아무리 강력한 천자총통이라도 단 한 발로 이런 위력을 낼 수는 없었고 열 문이 한꺼번에 집중 타격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걸 알 리가 없는 막부군 병사들은 충격을 넘어 공포에 휩싸였다.
전투가 벌어진다고 해도 튼튼한 성벽 뒤에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으니 절망감이 큰 건 당연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막부군 병사들을 지옥으로 빠뜨리는 무기는 화포뿐만이 아니었다.
“장전 끝!”
“발사!”
군관이 장검을 뽑아 들며 크게 외치자 건장한 덩치의 병사들이 두 손으로 커다란 망치를 잡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가 힘껏 내려쳤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팽팽하게 밧줄을 당기고 있던 걸쇠가 풀리자 투석기가 뭔가를 에도 성 쪽으로 날려 보냈다.
휘이이익.
조총과 화포를 가지고 싸우는 전장에서 투석기는 생뚱맞을 정도로 시대에 뒤떨어진 무기였지만, 어떤 걸 날려 보내느냐에 따라 존재감이 완전히 달려졌다.
성벽을 넘어 안쪽에 떨어진 건 바로 비격진천뢰를 개량한 폭뢰였다.
꽈꽝! 쿠쿵! 쿵!
무려 여든네 근(50kg)이나 되는 화약이 들어간 폭뢰는 엄청난 굉음을 울리며 터지면서 파편을 사방에 마구 뿌렸다.
“크악!”
“으윽.”
얼마나 위력이 강력한지 폭뢰가 한번 터질 때마다 가까운 곳에 있는 성벽이 마구 흔들렸고 튼튼하게 지어진 석조 건물도 단번에 폭삭 주저앉았다.
“흔적조차 남지 않도록 철저히 부숴 버려라!”
냉정한 얼굴을 한 도현은 지휘봉을 흔들며 공격을 독려했고 계속되는 포격과 폭뢰 투척에 에도 성은 뿌연 먼지와 화염으로 뒤덮였다.
콰쾅!
또다시 집중 포격에 성벽 한쪽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자 대형을 갖춘 채 대기하고 있던 조선군 병사들은 각자 소지한 병장기를 위로 치켜들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
무시무시한 화력전에 절로 감탄이 나오는 것도 있었지만, 공성전에서 가장 큰 걸림돌인 성벽과 망루가 부서지면 그만큼 돌격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살아날 가능성이 컸기에 병사들은 아군 포병대의 활약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이와 반대로 성벽에 있는 왜병들은 쉬지 않고 떨어지는 포탄과 폭뢰에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꽈꽝! 쿵!
후두두둑.
“으으…….”
“이러다가 다 죽겠어.”
이미 소문으로 해안에 있던 병력이 조선군의 함포 사격을 받아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었기에 왜병들은 더 겁이 나고 사기가 떨어졌다.
또다시 폭음이 터지자 왜병들은 머리를 박고 엎드린 채 몸을 벌벌 떨었다.
마음 같아서는 에도 성이고 뭐고 그냥 다 내팽개치고 도망치고 싶었다.
솔직히 그동안 지배를 하며 세금만 뜯어 갔지 막부가 자신들한테 뭘 해 준 것이 있다고 목숨을 걸고 에도 성을 지켜야 된단 말인가.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이런 생각이 치밀어 올랐지만 뒤편에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을 들고 그들을 노려보는 무사와 독전대 놈들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쇼군의 직속 병력으로 구성된 독전대는 조금이라도 징집병들이 이상한 조짐을 보이면 가차 없이 목을 베어 버릴 것이다.
그렇게 두려움을 꾹꾹 눌러 참으며 빨리 조선군의 포격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징집병 한 명이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내지르면서 몸을 일으켜 뒤로 도망쳤다.
“사, 살려 줘!”
그러자 얼굴에 붉은색 가면을 쓰고 있던 무사가 으르렁거리며 소리를 쳤다.
“당장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겠느냐?”
하지만 징집병은 반쯤 혼이 나간 얼굴로 무사의 지시를 듣지 않았다.
“흐흐. 이대로 있으면 다 죽는다고.”
그 모습에 다른 왜병들까지 웅성거리며 동요하자 무사는 도망치려는 징집병을 막아서고는 검으로 인정사정없이 내려쳤다.
“이놈!”
츄악!
“으……!”
단칼에 목이 베인 징집병은 제대로 비명도 질러 보지 못하고 분수처럼 피를 뿜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헉!”
“저, 저…….”
그냥 두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독전대 무사가 도망병을 죽이는 장면을 본 징집병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런 징집병들을 보며 무사는 살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압적인 목소리로 으름장을 놨다.
“또 명령 없이 자리를 이탈하는 놈이 있으면 이 꼴이 될 테니 다들 똑똑히 봐 두는 것이 좋을 거야!”
당장이라도 다가와 검을 휘두를 것 같은 무사의 서슬에 징집병들은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 와중에도 조선군이 쏜 포탄과 폭뢰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와 에도 성 곳곳을 부쉈다.
쿠쿵! 콰르르르.
커다란 굉음과 함께 이미 반쯤 부서진 망루가 또다시 쏟아진 직격탄을 맞아 와르르 무너졌다.
중간에 넓은 해자가 가로막고 있어 삼백 보 이상 떨어져 있었지만 뿌연 먼지를 피워 올리며 돌무더기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도현의 귀에까지 들렸다.
“포수들이 아주 잘해 주고 있군,”
도현이 중얼거리듯 이야기하자 옆에 있던 도총관 엄황이 얼른 말을 받았다.
“그러게 말이옵니다. 이 상태라면 어렵지 않게 성을 함락시킬 수 있겠습니다.”
“그럼 얼마나 좋겠어. 하지만 쇼군이 있는 곳이니 막부군도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방심은 하지 말도록 해.”
“예.”
바로 오늘 새벽 이가 닌자들의 습격을 받아 자칫 큰일을 당할 뻔했던 기억이 생생했기에 도총관 엄황은 표정을 다시 굳히면서 대답했다.
“그런데 병력 투입은 언제쯤 하실 생각이십니까?”
화포와 폭뢰로 아무리 성을 부숴 놔도 결국은 마지막에 보병을 투입해 깃발을 꽂아야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희뿌연 화약 연기와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섬광에 휩싸인 에도 성을 바라보며 잠시 고심을 하던 도현은 이내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일단 오늘 하루는 포격만 하도록 하지.”
“예? 그럼 화약 소모가 클 텐데요.”
우려 섞인 엄황의 말에 도현은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에도 성을 함락하고 이에미쓰를 무릎 꿇리면 모든 것이 다 끝나니 여기서 화약을 아낄 필요가 없지 않겠어? 그리고 괜히 어설프게 포격을 하고 병사들을 돌격시킨다면 피해만 커질 뿐이야.”
휘하에 있는 병사들의 피해를 줄이려는 것도 있지만 도현이 이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화력전을 지시하는 건 스루가만에서 막부군 수군이 전멸하면서 보급로가 확보돼 조만간 남해도를 출발한 보급 선단이 도착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도현의 속마음을 재빨리 헤아린 도총관 엄황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슬쩍 문제점을 이야기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만 너무 시간을 끌었다가 자칫 적군에 지원군이라도 도착한다면 상황이 골치 아파지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고개를 옆으로 돌린 도현은 입가에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흑치영 장군과 기병대가 당분간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신도 흑치영 장군의 무용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기병대만으로 적 지원군을 오래 붙잡고 있기는 어려울 겁니다.”
“짐도 이번 공성전을 길게 끌 생각은 없어.”
“예?”
눈을 번뜩 빛낸 도현은 오른쪽 주먹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지루하게 공방전을 벌여 피해를 늘리기보다는 막부군의 방어 태세를 포격으로 철저히 무력화시킨 다음에 단 한 번 세차게 몰아쳐 성을 함락시키는 거야.”
쾅! 콰쾅!
일렬로 늘어선 화포에서 벼락같은 굉음과 불꽃이 쉬지 않고 터져 나왔다.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전방을 주시하면서 전황을 살피고 있는데, 병사들을 관리하고 있던 포술장이 군호에게 달려와 보고했다.
“군호 어른, 이제 화포를 교체해 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 지금까지 몇 발이나 쐈나.”
“딱 서른 발째입니다.”
화포가 뜨겁게 달아오르면 장전하는 화약이 유폭을 일으킬 수도 있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바꿔 줄 필요성이 있었다.
“그럼 앞으로 한 발만 더 쏘고 교체하도록 하게.”
“예!”
군호의 지시를 받은 포술장은 다음 포격을 위해 한창 재장전 중인 병사들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화포가 다시 한 번 불꽃을 뿜어 낸 후, 병사들은 미리 훈련을 받은 대로 포차 바퀴 하나에 두세 명이 달려들어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끼익.
“으쌰!”
“뭣들 해! 아침에 피죽도 못 먹었나! 더 세게 밀어.”
“영차.”
그러자 후열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포수들이 새로운 화포가 얹어진 포차를 밀고 와 자리를 잡고 지지대를 고정시켰다.
“반동에 포차가 뒤로 밀리지 않도록 제대로 말뚝을 박아!”
“예.”
순식간에 포수들이 방열을 모두 끝마치자 포술장은 얼른 지휘관한테 뛰어가 보고를 했다.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그럼 다시 포격을 시작해.”
“옛.”
명령이 떨어지고 얼마 있지 않아서 새로 방열된 화포들이 다시 불을 뿜으며 에도 성을 향해 포탄 세례를 퍼부었다.
그렇게 포수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을 무렵,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병들은 화포 교체를 하느라 잠시 조용해지자 귀를 막고 있던 손바닥을 떼고 눈치를 살폈다.
“뭐야, 끝났나?”
“아냐. 화포를 새것으로 바꾸고 있는 모양인데.”
“쯧쯧. 저게 완전 철 덩어리라서 엄청 무겁다 하던데, 고생들 하는구먼.”
“이 사람아,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 쟤네들은 뒤에서 뻥뻥 쏘면 끝이지만 우린 진짜 칼에 베어 죽을 수도 있는 몸이라고.”
동료의 핀잔에 사내는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우린 언제까지 대기야? 이러다 날밤 새우겠어.”
은근슬쩍 화제를 바꾸자 동료도 뿌연 연기에 휩싸인 에도 성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잠을 못 자도 좋으니 계속 이러고 있었으면 좋겠네.”
“아니, 왜?”
“지휘소에서 돌격 깃발이 올라가면 진짜 전투가 벌어지게 되잖아. 그럼 우리가 내일까지 살아 있으리란 보장이 어디 있나.”
“뭐, 하긴 그렇군.”
사내는 갑자기 침울해진 기색으로 수긍했다.
“니미, 하늘에서 갑자기 벼락이라도 떨어지지 않으려나.”
“불나서 다 타 버리게?”
“그렇게 되면 놈들도 항복하고 나올지 모르잖아.”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문득 고향에 두고 온 부모님이랑 짝사랑하는 여인네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 코끝이 시큰해졌다.
돈 많이 벌어서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몸 건강히 잘 있을까 궁금했다.
“밖에서 이렇게 화포를 쏴 대는데 어지간하면 그만 포기하고 나오지, 좀.”
동료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는지 짜증 섞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괜찮아. 설사 적이 항복을 하지 않더라도 아군 포병대가 성을 쑥밭으로 만들어 놓으면 우리가 공격하기 한결 편할 거야. 이 정도쯤은 식은 죽 먹기라고.”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으면 우울한 생각만 들 것 같아 사내가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자네는 참 낙천적일세, 그려.”
“조급해하면 뭐하나. 이런 때일수록 아군을 믿고 마음 편하게 가져야지.”
“그래, 그 말이 맞아.”
동료도 사내의 말에 굳었던 얼굴을 펴고선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다시 전방에 있는 에도 성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한편 흑치영이 이끄는 기병 이천 명은 에도 성을 공략 중인 본대에서 떨어져 나와 별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두두두두!
교두보를 출발한 기병대는 에도 시가지를 크게 우회해서 넓은 벌판을 거침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와 함께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기병대는 마치 앞을 막는 건 어떤 것이라도 다 짓밟아 버리겠다는 무시무시한 기세를 내뿜었다.
“장군, 이대로 달리면 네 시진쯤 뒤에 적 지원군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김근행이 길잡이로 붙여 준 주작단 단원의 이야기에 기병대 맨 앞 열에 서서 말을 달리던 흑치영은 고개만 살짝 옆으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상대할 적군 병력이 얼마라고 했지?”
“오천입니다.”
자신이 지휘하는 병력의 배가 넘었지만 흑치영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조금 되는군.”
“숫자는 많지만 대부분 창을 가진 보병들이고 기병은 무사까지 포함해서 백 명도 채 안 되니 충분히 이길 수 있으실 겁니다.”
“당연하지. 대조선국 정예 기병대가 고작 그런 허접쓰레기를 처리 못 한다면 말이 안 되지.”
“맞습니다.”
뒤를 돌아본 흑치영은 한쪽 손에 든 커다란 언월도를 위로 치켜들면서 우렁차게 소리를 쳤다.
“더 빨리 달려라! 오늘 왜국 놈들한테 조선군 기병대의 무서움을 똑똑히 보여 주자.”
“우와아!”
흑치영의 독려에 대부분 거란 출신들로 이루어진 기병들은 크게 함성을 내지르고는 더욱 빨리 말을 달렸다.
말 등에 탄 기병들은 전부 활과 검 그리고 허리에는 웅-오식 권총으로 무장했고 안장 뒤에는 모포와 함께 얼마간의 식량을 실었다.
이들은 앞으로 며칠 동안 에도 부근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며 이에미쓰를 구원하기 위해서 달려오는 지원 병력을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흑치영이 이끄는 별동대의 첫 번째 제물은 사쿠라 번 번주인 홋타 미사노부가 이끄는 군대였다.
사쿠라 번은 지금의 치바현 부근에 위치했는데 에도 근처라는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예전부터 도쿠가와 가문에 충성하는 인물을 번주 자리에 앉혔다.
현 번주인 홋타 미사노부도 쇼군인 이에미쓰의 최측근이었다.
이런 이유로 이에미쓰가 보낸 전령이 도착하자마자 급히 병력을 소집한 뒤 주위 번들을 규합해 밤낮없이 에도로 달려왔다.
강행군을 해 온 미사노부 군은 에도를 반나절 정도 남겨 둔 지점에 도착하자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전열을 재정비했다.
그러자 한 시진 정도 먼저 도착해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흑치영은 그걸 보며 희심의 미소를 지었다.
“정말 여기서 행군을 멈추는군.”
그러자 옆에 있던 주작단 단원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병사들이 지친 상태에서 곧장 전투를 벌일 수는 없으니 조금은 쉬었다가 가야 되는데 이곳만큼 대군이 머물기에 좋은 장소가 없으니까요.”
“하긴, 바로 옆에 작은 개울도 있고 군데군데 있는 야트막한 언덕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다 틔어 있으니 나라도 여기서 휴식을 취할 것 같군.”
“지금 바로 공격하시겠습니까?”
주작단 단원의 물음에 흑치영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처럼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부장.”
“말씀하십시오, 장군.”
얼른 옆으로 다가온 부장을 보며 흑치영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일각 뒤에 공격을 할 테니 모두 준비시키게.”
“옛.”
머리를 숙이며 대답한 부장이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자리를 뜨자 흑치영도 잠시 더 아무것도 모른 채 휴식을 취하고 있는 미사노부 군을 찬찬히 살펴본 뒤 언덕 아래로 내려가 말에 올라탔다.
“에고고. 죽겠네.”
동료 한 명이 옆자리에 앉으면서 앓는 소리를 내자 신발을 벗고 강행군에 엉망이 된 발바닥을 보고 있던 사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나도 발바닥이 온통 물집투성이야.”
사내의 발바닥을 힐끗 쳐다본 동료는 쯧쯧 혀를 차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가지고 걸을 수 있겠어?”
“기어서라도 가야지. 안 그러면 무사들이 가만히 두겠나.”
“하긴, 치료는 고사하고 꾀병 부리지 말라며 욕이나 안 들으면 다행이지.”
동료의 말에 얼굴을 찡그린 사내는 강가에 저들끼리 모여 앉아 하인이 챙겨 온 간식을 먹고 있는 무사들을 보면서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씨부럴.”
“그나마 조금만 더 가면 에도라고 하니까 힘들더라도 참아 봐.”
“그래야지.”
시무룩하게 대답한 사내는 낡은 옷가지를 하나 찢어 물집이 더 생기지 않도록 발바닥을 꽁꽁 감쌌다.
그때 조금이라도 편하게 쉬려고 흙바닥에 몸을 누이고 있던 동료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이봐.”
“왜 그래?”
“혹시 땅이 흔들리는 거 못 느끼겠어.”
“갑자기 그게 뭔 소리야?”
가뜩이나 물집 때문에 신경이 날카롭던 사내가 귀찮은 듯 말하자 동료는 정색을 하며 이야기를 했다.
“이거 봐 봐.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잖아.”
“……그러게.”
정말 앉아 있는 엉덩이에 진동이 느껴지자 사내도 지진이 난 줄 알고 당황한 얼굴을 했다.
주위에 있던 다른 왜병들도 두리번거리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는데 그때 한쪽에서 비명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기, 기병대가 이쪽으로 달려온다!”
“뭐?”
화들짝 놀란 왜병들은 벌떡 일어나 진동이 울리는 방향을 쳐다봤다.
그러자 정말 태산이 무너질 듯한 엄청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수천 기의 기병들이 뿌연 먼지구름을 피워 올리며 이쪽으로 곧장 달려오고 있었다.
임시로 친 천막에서 함께 온 번주들과 휴식을 취하고 있던 미사노부도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와 그 모습을 보고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어디서 오는 기병들인가?”
미사노부의 물음에 최측근 장수인 시노자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먼지구름 때문에 소속을 알기 어렵습니다.”
“설마 조선군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쇼군께서 보내신 전령에 의하면 이제 막 상륙을 했다는데 여기까지 진출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아닐 거라고 하면서도 시노자키는 자신감 있게 말을 하지 못했다.
“으음.”
왠지 불안한 느낌에 미사노부가 작게 침음성을 흘리는 가운데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왜병들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지르는 무사들의 독촉을 들으며 허둥지둥 대형을 갖췄다.
아니, 그러려고 했지만 그 전에 오백 보 정도 되는 거리를 단숨에 달려온 조선군 별동대가 미사노부군을 덮쳤다.
적들은 별동대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서야 적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헉!”
“조, 조선군이다.”
“젠장!”
“당황하지 말고 모두 창을 앞으로 세워라!”
무사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어떻게든 방어 대형을 갖추려고 했지만 혼란에 빠진 병사들을 수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으아악.”
“우린 이제 다 죽었어.”
우왕좌왕하는 미사노부군과 달리 별동대는 언월도를 들고 선두에 선 흑치영을 따라 이천 명의 기병이 마치 한 몸처럼 쐐기 대형을 갖춘 채 달려왔다.
두두두두!
“궁격弓擊!”
흑치영의 외침에 기병들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려가면서 고삐를 놓고는 적을 향해 각궁을 쐈다.
슈슈슈슉!
이천 개의 화살은 하늘에 떠 있는 해를 가리면서 왜병들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피, 피해!”
“끄헉.”
“윽.”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 세례에 아무런 대비가 없던 적들은 비명을 내지르면서 무더기로 쓰러졌다.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지만 기병의 장거리 공격에는 아직 활만큼 강력한 것이 없었다.
연속해서 세 차례 화살을 쏴서 먼저 기선을 제압한 흑치영은 재차 명령을 내렸다.
“거검!”
그러자 기병들은 활을 등에 매고는 장검을 뽑아 들어 앞으로 내밀며 마상 돌격 자세를 취했다.
“한 놈도 남겨 두지 말고 모두 다 짓밟아 버려라!”
“우오!”
어느새 바로 지척까지 접근한 별동대는 커다란 함성을 내지르며 더욱 말에 박차를 가했다.
이내 장검을 내민 별동대 기병들의 거친 돌격이 왜병들 사이를 날카롭게 파고들어 갔다.
으적!
콰콰쾅!
이히히힝.
충돌과 동시에 엄청난 파열음이 사방에서 마구 터져 나왔다.
군마들의 울음과 비명 그리고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전장을 가득 메웠고 병사들이 흘린 피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채챙!
“컥.”
슈칵!
흑치영이 크게 휘두른 언월도에 등을 보이며 도망치던 왜병 한 명이 답답한 신음을 토하면서 피를 뿌렸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흑치영은 말을 탄 채 마치 고구려의 철기병처럼 쇠못을 박아 넣은 철신발로 옆에 있던 또 다른 적병의 얼굴을 밟아 버렸다.
빠각!
“크어억.”
안면이 그대로 함몰되면서 온통 시뻘건 피투성이가 된 적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흑치영뿐만 아니라 별동대 기병들은 마치 양 떼 사이에 뛰어든 사나운 늑대처럼 적을 마구 사냥했다.
특히나 별동대에 속한 기병 대부분이 이런 난전에 능하고 실전 경험까지 흘러넘칠 정도로 풍부한 거란 출신들이었기에 완전히 물 만난 고기처럼 적진을 헤집고 다녔다.
채챙! 챙! 챙!
“끄헉.”
“아악!”
방금 전까지 평화롭던 들판은 쇳소리와 비명으로 뒤덮였고 바닥에 내처럼 흐르는 핏물과 사방으로 튀는 육편, 거기에 더해 무시무시하게 덤벼드는 별동대 기병들의 모습은 상대편에 공포를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이건 미사노부와 적군 지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천의 기병이 한 덩이리가 되어 상대를 찢어발기고 헤쳐 놓는 모습은 두렵다 못해 온몸이 덜덜 떨리게 만들었다.
“겁먹지 말고 적과 싸워! 싸우란 말이다.”
공포심을 떨쳐 내려는지 별동대한테 거의 유린을 당하다시피 하고 있는 왜병들을 보며 미사노부가 연신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내질렀지만 전열의 붕괴를 막는 건 불가능했다.
별동대 기병들이 장검을 휘두를 때마다 뿌려지는 피와 비명성에 질겁한 왜병들은 명령이고 뭐고 서로 앞을 다퉈 도망치기에 바빴다.
“사, 살려 줘.”
“도망쳐야 돼!”
“으아악.”
최소한의 피해로 적을 섬멸하기 위해서 흑치영과 별동대 기병들은 잔인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과감하게 손을 썼다.
달아나는 왜병들을 쫓아가 뒤에서 장검을 내려치는 건 물론이고 쇠못이 박힌 철신발로 찍어 버리거나 하다못해 부상을 입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적도 그냥 놔두는 것이 아니라 말발굽으로 밟아 버리며 지나갔다.
“아, 안 돼!”
꽈직.
“끄어억.”
찢어발겨 주르륵 흘러내린 내장을 주워 담으려 버둥거리는 병사와 말발굽에 밟혀 머리가 터져 뇌수가 나와 있는 시신에, 상대는 전의를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이, 이게…….”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너무도 쉽게 무너지는 병사들의 모습에 얼굴이 창백해진 미사노부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건 주위에 있는 다른 번주와 무사 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다들 무섭게 치고 들어오는 별동대를 보며 기겁했다.
“이보시오, 미사노부 공. 상황이 안 좋은 것 같으니 일단 후퇴를 하는 것이 어떻겠소?”
번주 중 한 명이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다가와 말하자 미사노부는 이쪽 진형을 이리저리 누비면서 마치 양을 몰듯이 왜병들을 유린하고 있는 별동대 기병을 흘끗 쳐다보고는 다급히 소리쳤다.
“제기랄! 말을 가져와라. 여기서 빠져나간다.”
“옛.”
지시를 받은 시노자키는 얼른 호위 무사들을 불러들였고 다른 번주들도 허둥지둥 부하들이 끌고 온 말에 올라탔다.
“병사들은 어떻게 할까요?”
안장에 앉아 시종이 건네주는 고삐를 잡아 쥐던 미사노부는 시노자키의 물음에 짜증스러운 음성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냥 놔둬.”
“예?”
“조선군이 우릴 쫓아오지 못하도록 발목이라도 잡고 있게 내버려 두라고!”
“아, 예. 알겠습니다.”
병사들을 소모품처럼 생각하며 자신의 안위를 위해 후퇴 명령조차 내리지 않는 미사노부의 이기적인 행동에 시노자키는 불만을 표시하기는커녕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잠시 뒤 미사노부를 비롯한 번주 다섯 명은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허겁지겁 말을 타고 도주했다.
이렇게 지휘부가 자신들을 버려둔 채 먼저 내뺐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 왜병들은 큰 충격과 배신감에 빠졌다.
그러자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계속 남아 저항하던 병사들까지 몸을 뒤로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고 미사노부군 진형은 완전히 붕괴됐다.
“패잔병들을 추격한다. 나를 따르라!”
한껏 기세가 오른 기병들은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고는 흑치영의 뒤를 따랐다.
그다음부터는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졌는데 흑치영은 적이 패잔병을 수습해 다시 공격해 오지 못하도록 끝까지 뒤를 쫓아가 화살과 검으로 상대를 죽였다.
금방 거리를 좁혀 와 날려 대는 별동대 기병들의 화살에 도망치던 왜병들이 썩은 짚단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그리고 바로 등 뒤로 다가온 흑치영과 기병들이 내려치는 병장기에 또다시 수많은 패잔병들이 목숨을 잃었다.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릴 때마다 피와 비명이 요란하게 터져 나왔고 별동대 기병들은 이미 전장 가득 시신이 널려 있었지만 그걸로 부족하다는 듯이 다른 먹잇감을 찾아 눈을 번득였다.
추격전은 해가 완전히 져서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됐는데 이날 전투로 미사노부군은 무려 사천 명의 사상자를 냈고 나머지는 후퇴 중에 뿔뿔이 흩어져 사실상 와해됐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는데 흑치영이 이끄는 별동대는 이에미쓰가 보낸 연락을 받고 서둘러 달려오던 번주군을 차례차례 각개격파 했다.
나중에 무려 다섯 번이나 당하고 나서야 별동대의 존재를 알아차린 번주들이 급하게 에도로 가지 않고 근처에 모여 서로 연합을 했지만 그때는 이미 시간이 한참 흘러 버린 뒤였다.
아무튼 그건 나중 일이었고 이에미쓰가 애타게 기다리던 미사노부군이 별동대에 박살 난 걸 전혀 모르는 가운데 새로운 날이 밝았다.
수우우웅! 꽈앙!
쿠쿵!
밤새 계속된 조선군의 포격과 폭뢰 투척에 에도 성은 여기저기 성벽이 무너지고 부서져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처음처럼 격렬하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화포 삼십여 문과 투석기 네 대가 돌아가면서 공격을 하고 있는 가운데 갑옷을 차려입은 도현이 말을 타고 해자 너머에 보이는 에도 성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밤새 적들이 토벽을 쌓으려고 한 모양이군.”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보자 무너져 내린 성벽 사이에 사람 허리 정도까지 오는 흙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예. 새벽에 그런 움직임이 보여서 즉시 포병대를 동원해 집중사격을 가했더니 이내 포기를 했습니다.”
도총관 엄황의 대답에 도현은 머리를 작게 끄덕였다.
“잘했어. 기껏 부숴 놨는데 그걸 헛일로 만들어서는 안 되지.”
고개를 돌려 전투대형을 갖춘 채 좌우에 도열해 있는 조선군 병사들을 본 도현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정도면 에도 성의 방어 시설을 웬만큼 무력화시킨 것 같으니 이제 슬슬 보병대를 투입해 볼까 하는데, 도총관의 생각은 어때?”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져 있는 지금, 성을 친다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겁니다.”
엄황이 적극 찬성을 하자 도현은 다시 정면에 있는 에도 성을 잠시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에도 성 꼭대기에 봉황기를 내걸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 도총관 엄황은 큰 소리로 대답하면서 상체를 깊숙이 숙였다.
잠시 뒤 명령을 하달 받은 병사들은 약간 흐트러진 대형을 재정비했고 포수들도 뒤로 빼 놨던 화포들을 모두 앞으로 끌고 나와 서둘러 방열을 시켰다.
그리고 지난번 해전에서 신기전 재고를 거의 소진해 아껴 두고 있던 신기전 수레까지 공성전을 지원하기 위해 등장했다.
그런 조선군의 모습에 막부군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바로 눈치챘다.
“장군, 조선군이 곧 쳐들어올 것 같습니다.”
포격을 피해 석재로 단단하게 지어진 건물 안에서 쉬고 있던 신노스케는 휘하 무사의 다급한 보고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게 정말이냐!”
“예.”
“젠장!”
황급히 탁자 위에 놔둔 투구를 챙겨서 쓴 신노스케는 머리끈을 묶으면서 성벽으로 달려갔다.
외성 성벽에는 벌써 휘하 무사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며 병사들을 닦달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원래는 성문 문루 위에서 전투를 지휘해야 됐지만 조선군의 포격에 무너져 어쩔 수 없이 근처 망루로 올라가자 신노스케의 최측근 무장인 노무라가 붉은색 오요로이를 입고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상황 보고를 해라!”
뛰어오느라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며 신노스케가 급히 묻자 노무라는 한쪽 손을 들어 정면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했다.
“보시다시피 조선군이 공격 대형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포격도 멈췄습니다.”
“……!”
그러고 보니 지겹도록 계속 이어지던 포격이 없었다.
낮게 침음성을 흘린 신노스케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병사들은 다 배치가 됐나?”
“예. 이상 조짐을 확인하자마자 병사들을 모두 성벽 위로 올려 보냈습니다.”
“잘했어.”
좌우를 둘러보자 막부군 병사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성벽 뒤에 숨어 공격에 대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신노스케는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 가지 그가 놓친 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병사들의 표정이었다.
곧 시작될 공성전에 대한 공포로 막부군 병사들은 초조함과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이를 딱딱 부딪치는가 하면, 자꾸만 손바닥에 땀이 차올라 신경질적으로 몇 번이고 옷자락에 손을 닦았다.
그러나 조선군의 동태에 정신이 팔린 신노스케는 방어 태세를 갖추는 데 급급해 부하들의 이런 상태를 끝내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편 말에 탄 채 반쯤 허물어진 성문을 바라보고 있는 도현에게 도총관 엄황이 약간 긴장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전하, 공격 준비가 모두 끝났사옵니다.”
고개를 돌려 도열해 있는 병사들과 포병대를 찬찬히 살펴본 도현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시작해.”
“옛.”
머리를 숙이며 대답한 도총관 엄황이 손짓을 하자 뒤에 있던 신호수가 뿔나팔을 입에 대고 길게 불었다.
뿌우우웅!
이번 원정의 마지막 방점을 찍는 에도 성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뿔나팔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방열되어 있던 화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발사!”
꽝! 꽝! 꽝!
화포뿐만이 아니라 투석기들도 공 모양의 폭뢰를 에도 성을 향해 날려 보냈다.
쉬이익.
콰콰쾅! 퍼펑! 쿵!
이미 하루 동안 계속된 포격에 반쯤 허물어진 에도 성은 또다시 화염과 뿌연 먼지구름에 휩싸였다.
특히 공격이 집중된 성문 주위는 그야말로 불지옥으로 변했다.
떨어진 포탄은 주위에 있는 모든 걸 날려 버렸고 매캐한 화약 냄새 속에 사방을 가득 메운 건 비명과 흙먼지뿐이었다.
포격을 오래 지속하기 위해서 화포를 돌아가며 쏘던 것과 달리 한꺼번에 화력을 다 쏟아붓자 적들은 감히 성가퀴 위로 고개를 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포탄이 터질 때마다 심한 충격에 성벽이 흔들렸고 어떤 곳은 직격을 당해 무너지면서 왜병들이 그대로 매몰되어 버렸다.
그 모습에 막부군 병사들은 두려움에 떨며 더욱 몸을 움츠렸고 신노스케도 여기저기서 터지는 포탄과 폭뢰에 머리를 숙이고 성가퀴 뒤에 숨어야 했다.
“젠장!”
돌로 된 성벽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신노스케가 분통을 터트렸지만 몇 문 있지도 않던 화포마저 공성전 초반에 조선군의 공격을 받아 파괴된 상태였기에 막부군은 그저 온몸으로 포격을 견뎌 내며 어서 빨리 끝나기만을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또다시 포탄이 날아와 성벽을 때렸다.
이번에는 바로 근처에 떨어졌는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성벽이 흔들리자 두려움을 참지 못한 왜병 서너 명이 벌떡 일어나더니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달아나려고 했다.
“으아악!”
“이렇게 있다간 다 죽을 거야!”
“이놈들 어서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해!”
근처에 있던 무사가 검을 빼 들며 소리를 쳤지만 이미 공포에 이성을 상실한 왜병들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어서 빨리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도망쳐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저것들이!”
눈썹을 추켜 올린 무사가 도망병들을 처단하기 위해 뒤를 쫓아가는 순간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날아온 포탄이 성벽 바로 위에서 폭발했다.
꽈아앙!
지척에서 터진 포탄은 도망치던 왜병들은 물론이고 무사까지 휩쓸어 버렸다.
“끄악!”
“꾸엑.”
제일 가까이에 있던 왜병은 충격에 머리가 으깨진 수박처럼 되어 버렸고 나머지 도망병과 무사도 사방으로 쏟아진 파편이 온몸에 박혔다.
그쯤에서 이미 숨이 끊어졌지만 폭압에 몸이 붕 떠오른 무사와 도망병들은 한참을 날아가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그 끔찍한 모습에 막부군 병사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쓸데없이 움직였다가는 저 꼴을 당하니 모두 그 자리에 대가리를 처박고 있어!”
동료가 죽은 것에 화가 치밀어 오른 무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무섭게 병사들한테 소리쳤다.
하지만 그 일갈마저 연이서 터진 폭음에 묻혀 버렸고 방금 전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 생생한 무사는 체면도 잊고 얼른 바닥에 엎드렸다.
그 모습이 아주 우스꽝스러웠지만 아무도 비웃음을 짓지 않은 채 온몸으로 느껴지는 포탄의 충격에 부들부들 떨며 더욱 몸을 움츠렸다.
콰꽝! 쿠웅!
“아아악!”
극심한 공포에 병사 한 명이 귀를 막은 채 비명을 내질렀지만 다행히도 아까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지는 않았다.
아니, 달아날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그렇게 성벽 위에 있는 막부군 병사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쥔 채 빨리 포격이 끝나기만을 빌었다.
이런 막부군 병사들의 기도와 달리 에도 성을 불바다로 만들 또 다른 조선군 병기가 발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거리 백오십 보!”
“좌로 한 바퀴 반을 돌려.”
끼릭끼릭.
“돌렸습니다.”
신기전 수레 우측에 달린 손잡이를 돌려 발사 각도를 조정한 포수가 큰 소리로 보고를 하자 앞쪽에 서 있는 군관이 오른쪽 팔을 들었다가 내리며 명령을 내렸다.
“전 포대, 발사!”
지시를 받은 포수는 지체 없이 가지고 있던 횃불로 심지에 불을 붙였다.
치지지직.
심지는 순식간에 타들어 갔고 이내 장전되어 있던 신기전들이 시뻘건 불꽃과 연기를 내뿜으면서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쉬이익.
쉭! 쉭! 쉭!
다서 개의 수레에서 모두 백오십 발이 넘는 신기전이 발사됐는데 단숨에 해자를 건너 포격과 폭뢰 투척으로 엉망이 된 성문 주위를 집중 타격했다.
꽈꽈꽝!
퍼펑! 펑!
왜병들 머리 위에서 터진 신기전은 엄청난 파편과 함께 특별히 제조된 인화성 물질을 뿌려 성벽 위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화르르륵!
“으아악!”
“부, 불이야.”
몸에 불이 붙은 왜병들이 바닥을 뒹굴고 갑옷을 털어 내며 난리를 피웠지만 송진과 유황 등을 섞어서 만든 불은 아무리 해도 꺼지지 않았다.
“흐이익. 이게 뭐야!”
“끄아악!”
바로 눈앞에서 동료가 불에 타 죽어 가는 끔찍한 모습에 막부군 병사들은 더욱 공포에 질렀다.
“아주 작살을 내놓는군.”
갑옷을 입고 투구까지 머리에 깊게 눌러쓴 이관은 아군의 포격에 만신창이가 된 에도 성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하루 넘게 계속된 포격에 이미 반쯤 무너진 성문은 굉음을 울리며 또다시 한쪽 귀퉁이가 허물어졌다.
포병대의 활약을 질투하거나 성안에서 떼로 죽어 나갈 막부군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따위는 없었다.
그저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이는 포병대의 화력에 감탄하고 성벽이 무너지는 만큼 자신과 부하들이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에 감사할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 정면을 주시하던 이관은 신기전이 발사돼 성문 주위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자 허리에 찬 검을 빼 들며 옆에 있던 부장을 돌아봤다.
“곧 돌격 명령이 하달될 테니 병사들을 준비시키게.”
“옛.”
부장이 군례를 취하며 크게 대답하자 고개를 끄덕인 이관은 다시 시선을 바로 했다.
두 차례에 걸친 신기전 일제 사격이 모두 끝나자 말 등에 앉아 전황을 살피던 도현은 손에 든 지휘봉을 위로 들어 올리며 크게 외쳤다.
“성을 함락시켜라!”
그러자 뒤에 있던 신호수가 뿔나팔을 길게 불었다.
뿌우우웅! 뿌우우웅!
돌격 신호에 이관을 비롯한 각 제대 지휘관들은 손에 든 검을 흔들며 부하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돌격 앞으로!”
“우와아아!”
오늘 성을 공격할 거라는 이야기를 미리 하급 군관들한테 전해 듣고 아침부터 잔뜩 날을 세우고 있던 원정군 병사들은 기다리던 명령이 떨어지자 전장이 떠나라가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 기세가 마치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처럼 아주 사나웠다.
에도 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벽 주위를 빙 돌며 파여 있는 해자부터 건너야 했는데, 안에 물까지 가득 채워져 있어 여간 까다로운 장애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선군은 도현의 지시로 공성탑을 응용해서 만든 장비로 손쉽게 해자를 극복했다.
드르르륵.
“다리를 내려라!”
“으차!”
하급 군관의 지시에 병사가 도끼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가 내려쳐 동아줄을 끊자 공성탑 한쪽 벽이 그대로 분리되며 밑으로 떨어졌다.
쿠웅!
육중한 소리와 함께 피어오른 먼지구름이 가라앉자 떨어져 나온 벽이 해자를 가로질러 놓인 훌륭한 다리가 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리가 모두 여섯 개나 됐고 조선군 병사들은 그걸 통해 거침없이 해자를 통과한 뒤 에도 성을 공략했다.
그때쯤 에도 성을 지도에서 완전히 지워 버릴 기세로 마구 쏴대던 포격이 거짓말처럼 뚝 멈췄다.
“으으…….”
포격을 피해 엎드려 있던 신노스케는 커다란 함성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가 새카맣게 몰려오는 조선군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오 미터 높이로 튼튼하게 쌓아올린 성벽은 하루 넘게 이어진 조선군의 포격에 반 이상 무너진 상태였다.
그나마 적이 한꺼번에 공격을 해 오지 못하도록 장애물 역할을 해 줄 해자마저 조선군이 다리를 만들어 무력화시켜 버리자 신노스케는 어떻게 성을 지켜야 될지 막막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기에 신노스케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보병이 돌격해 오면서 오폭을 피하기 위해 조선군의 포격이 멈췄고, 허물어지고 부서져 제 역할을 거의 못 하겠지만 아군한테는 성벽이 있으니 백병전을 벌이면 어느 정도 승산이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궁수대, 조선군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화살을 쏴라.”
성문이 박살 나고 좌우 성벽도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는데도 신노스케가 외치자 왜병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며 나타났다.
얼핏 봐도 숫자가 꽤 됐는데 그렇게 무지막지한 포격을 받고도 이렇게나 많이 살아남아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망원경으로 에도 성을 살피던 도현은 그런 모습을 보고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더럽게도 많이 살아남았군.”
그러자 옆에 있던 도총관 엄황도 표정을 살짝 굳히며 말했다.
“포탄과 폭뢰를 사백 발 넘게 쏟아부었는데도 저렇다니 이거, 의외군요.”
무혈입성까지는 아니더라도 포격으로 적이 거의 와해됐을 거라 생각했던 엄황과 장수들은 예상외의 상황에 약간 당혹스러워했다.
하지만 도현은 이럴 걸 어느 정도 짐작했는지 금방 담담한 얼굴을 하고는 전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야기를 했다.
“이걸로 포격만 해서는 적을 분쇄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군. 그래도 공성전에서 가장 큰 걸림돌인 성벽 대부분을 무너뜨려 놨으니 효과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 안 그런가?”
“맞습니다.”
도총관 엄황이 도현의 말에 수긍했다.
“아무리 막부군 병사들이 요행히 살아남았다고 해도 포격을 받아 사기가 떨어진 적을 상대하는 것은 어린애 손을 비트는 것만큼이나 손쉬운 일이지요. 전공을 세울 기회가 더 늘어난 셈이니 우리 병사들은 오히려 반가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흐음.”
도현은 가는 눈을 뜨고 이제 곧 난전이 벌어질 에도 성을 바라보았다.
“그럼 도총관의 말대로 우리 병사들이 얼마나 활약할지 기대해 볼까.”
막부군의 유일한 방어막이었던 성벽은 이미 거의 무너져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깃발을 높이 올리고 승자로서 당당히 전진하는 것뿐.
도현은 사냥감을 맘껏 포식할 준비가 된 사자처럼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한편 황급히 전열을 재정비한 막부군은 조선군의 돌격을 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쏴라!”
신노스케의 외침에 부서진 성벽 위로 고개를 내민 왜병들은 조선군을 향해 활과 조총을 발사했다.
슈슈슉! 슈슉! 슉!
타탕! 탕! 탕!
“아악!”
“큭.”
포격으로 피해가 큰 막부군의 저항이 그리 거세지는 않았지만 날아오는 화살과 총탄에 앞장서서 돌격하던 병사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하지만 고된 훈련으로 단련된 정예들이었던 조선군 병사들은 바로 옆에서 동료가 화살에 맞아 피를 뿌리며 넘어지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지 말고 계속 돌격해라!”
이관을 비롯한 군관들도 뒤에서 명령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목이 터져라 독려를 하며 병사들과 함께 성문을 향해 달려갔다.
피슝!
“응사해라!”
탕! 탕! 탕!
해자를 넘어와 사정거리를 확보한 아군 총병들이 응사를 시작하자 부서진 성벽 위로 몸을 드러내고 있던 왜병들이 비명을 토하며 옆으로 쓰러졌다.
“커학!”
“윽.”
마치 조준 사격을 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날아오는 총탄에 수십 명의 왜병들이 부상을 입거나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졌다.
순식간에 총성과 비명이 한데 뒤섞인 성벽 위는 아비규환으로 변했고 자신도 총탄에 맞을까 봐 겁을 집어먹은 막부군 병사들은 반쯤 무너진 성벽 뒤에 몸을 숨긴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사이 수석총 끝에 총검을 장착한 선두 열은 포격으로 반쯤 허물어진 성문 앞에 도착했다.
“폭탄을 설치해라!”
“옛.”
여기까지 뛰어오느라 거칠어진 호흡을 잠시 가다듬을 틈도 없이 이관이 소리치자 성문 벽에 등을 기댄 병사들 중에 세 명이 가지고 있던 폭약 보따리를 풀어 굳게 닫혀 있는 성문 아래에 설치했다.
주머니에서 부싯돌을 꺼낸 병사는 동료가 폭약 보따리에서 빼낸 기다란 심지에다가 바로 불을 붙였다.
탁탁.
화르륵.
불꽃이 튀며 심지가 빠르게 타들어 가자 이관이 다급히 외쳤다.
“모두 피해!”
이관과 병사들은 재빨리 성문을 벗어나 파편을 막아 줄 든든한 벽에 몸을 숨긴 후, 머리를 웅크린 채 귀를 양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커다란 폭음이 연이어서 터져 나왔다.
꽈아앙! 꽝!
굉음과 함께 돌조각이 섞인 먼지구름이 성문에서 쏟아져 나왔다.
후두두둑.
자욱한 흙먼지가 가라앉자 드러난 성문은 굳게 닫혀 있던 양쪽 문짝이 모두 떨어져 나가 있었고 그 너머에 족히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 왜병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아군이 성문을 깨고 들어가면 곧장 반격해 밀어내기 위해서 뒤에 병력을 대기시켜 놨다가 몽땅 폭발에 휘말린 거였다.
그걸 본 이관은 부서진 성문 앞에 서서 검을 앞으로 내밀며 크게 소리쳤다.
“돌격! 성을 함락시켜라.”
“우와아!”
여기까지 오면서 적이 쏜 화살과 총탄에 동료를 잃은 병사들은 살기 가득한 눈을 번뜩이며 성안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성문이 뚫렸다!”
“적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라!”
타탕! 탕! 탕!
“크악.”
“꾸엑.”
성문을 통과한 조선군은 자신들을 막기 위해 달려오는 적을 향해 장전시켜 놓은 총을 발사했다.
그리고 이내 적과 뒤엉켜서 총검으로 찌르고 베며 난전을 벌였다.
“계속 밀어붙여라!”
목이 터져라 전투를 독려하던 이관은 검은색 삼족오가 수놓인 군기를 든 병사가 왜국 무사가 휘두른 검에 가슴을 베여 앞으로 고꾸라지는 걸 보고는 지체 없이 허리에 차고 있던 웅-오식 권총을 빼 들어 방아쇠를 당겼다.
타탕!
“컥!”
명중률이 낮은 권총이었지만 워낙 가까운 거리였기에 왜국 무사는 이마에 구멍이 뚫리며 뒤로 나자빠졌다.
쓰러져 있는 군기병한테 달려간 이관은 상체가 온통 피투성이가 된 채 이미 숨이 끊어져 있는 걸 확인하고 이맛살을 찡그렸다.
왼쪽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을 허리에 꽂은 이관은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군기를 직접 집어 들고는 악을 쓰듯 소리를 질렀다.
“승리는 우리 것이다! 공격!”
지휘관인 이관의 분전에 병사들은 더욱 용기백배해서 막부군을 몰아붙였다.
“전하, 선봉대가 성문을 돌파했사옵니다.”
전투 상황을 계속 지켜보고 있던 도현은 등에 전령 깃발을 맨 기병이 굴러떨어지듯 말에서 내려 한쪽 무릎을 꿇고 하는 보고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좋았어. 도총관!”
“말씀하십시오, 전하.”
“지금 바로 후속 부대를 출전시켜 승기를 완전히 가져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노련한 장수인 엄황도 지금이 승부수를 띄울 때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며 크게 대답했다.
“이제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주제도 모르고 건방을 떨던 이에미쓰의 얼굴을 볼 수 있겠군.”
도현은 말고삐를 단단히 거머쥔 채 막부군과 조선군이 뒤엉켜 싸우고 있는 전장을 향해 눈을 빛냈다.
바람결에 날려 오는 짙은 피 냄새와 매캐한 화약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고, 병사들이 내지르는 함성과 비명이 천지 사방에 가득했다.
봉황이 금색 수실로 수놓인 망토를 표표히 휘날리며 도현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잠시 뒤 도현의 명령을 전달받은 보병 팔천 명이 해자를 건너 공성전에 가세했다.
가뜩이나 성문이 뚫려 곤경에 처해 있던 막부군은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조선군 후속 병력이 밀어닥쳐 공격을 해 대자 거센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조선군이 성내로 들어온다!”
“아악!”
사방을 뒤흔드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성문에서 뿌연 먼지구름이 피어오르자 본능적으로 조선군한테 성문이 부서졌음을 직감한 신노스케는 만약을 대비해 후방에 대기시켜 둔 병사 오백여 명을 즉각 투입시켰다.
제아무리 죽을힘을 다해서 성벽을 지켜 낸다고 해도 성문을 통해 조선군이 에도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면 다 헛일이 되기에 위기 때 투입할 예비 병력이 소모된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위험을 감수하고 예비 병력까지 밀어넣었지만 조선군을 쫓아내기는커녕 점점 뒤로 밀리고 있었다.
총성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가득한 가운데 성안으로 들어오는 조선군의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났고 이제는 계단을 이용해 성벽 위까지 올라왔다.
“적을 성 밖으로 몰아내고 성문을 사수해라!”
타탕! 탕!
“끄헉!”
신노스케가 악을 쓰며 전투를 독려하는 가운데 갑자기 총성에 요란하게 울리더니 왼편에서 총탄 십여 발이 날아와 주위에 있던 왜병들을 맞혀 쓰러뜨렸다.
“이런! 장군을 지켜라.”
화들짝 놀란 노무라의 외침에 호위병들이 커다란 사각 방패를 가지고 와 신노스케의 몸을 가렸다.
피슝!
퍽! 퍼퍽!
급히 엄폐를 하기는 했지만 귓전을 파고드는 파공음과 총탄이 방패에 박히면서 나는 둔탁한 소리에 신노스케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적들을 죽여라!”
앞으로 나가 싸우라는데도 왜병들이 머뭇거리며 움직이려고 하지 않자 눈썹을 치켜 올린 노무라는 손에 든 검을 가까이 있는 병사의 목에 가져다 대고는 무섭게 윽박질렀다.
“어서 움직이지 못하겠느냐!”
“히익.”
눈을 부라리면서 노무라가 위협을 해 대자 창을 든 왜병 이십여 명은 어쩔 수 없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반대편 성벽 위에 있는 조선군을 향해 달려갔다.
“우아아아!”
스스로 용기를 내기 위해 크게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 나가는 왜병들을 맞이하는 건 콩 볶는 듯한 총성과 함께 날아오는 총탄이었다.
타타탕! 탕! 탕! 탕!
총탄에 맞은 왜병들은 피를 뿌리며 그대로 고꾸라졌다.
대부분 두세 발 이상을 맞고 바로 절명했는데 몇몇 아직 살아서 꿈틀대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입에서 피를 게워 내는 것이 오래 견디기는 어려워 보였다.
순식간에 이십여 명을 벌집으로 만들어 버린 조선군 병사들은 재빨리 총알을 다시 재고는 망루에 있는 신노스케 등을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피슝! 슝!
병사들이 들고 있는 방패와 망루 기둥에 날아와 박히는 총탄에 기겁을 하며 다시 고개를 숙인 신노스케는 놀란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저놈들은 도대체 어떻게 조총을 저리 빨리 쏠 수 있는 거야!”
막부군이 보유한 조총은 아무리 숙련된 총병이라고 해도 일 분에 두 발을 연달아 쏘기 어려웠기에 금방 재장전을 하며 연속해서 총탄을 날리는 조선군의 모습이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성문뿐만 아니라 성벽 곳곳이 뚫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으니 일단 여길 포기하고 내성으로 가시지요.”
노무라가 다급히 건네는 말에 신노스케는 노한 표정으로 버럭 소리를 쳤다.
“죽더라도 여기서 죽어야지, 어딜 간단 말이냐? 무사라는 놈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무사니까 하는 말입니다! 주군을 지킬 수 있다면야 지금 여기서 할복 자살도 할 수 있습니다만, 계속 이러고 있으면 무사의 명예는커녕 한낱 개죽음에 불과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뭐야!”
“지금은 여기서 무의미한 저항을 하다 죽는 것보다 내성으로 가서 지원 병력이 올 때까지 최대한 버티는 것이 쇼군을 위한 길일 겁니다.”
“으음…….”
신노스케는 노무라의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그도 이대로 죽기보다는 살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고 지금 이 순간만 잘 넘기면 곧 인근 번에서 보낸 지원 병력이 도착할 테니 쇼군인 이에미쓰한테 질책을 듣지 않아도 됐다.
고민할 시간도 없이 또다시 총탄이 날아와 방패를 들고 서 있던 왜병의 머리를 맞히자 신노스케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좋아. 내성으로 가세!”
“예.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두 사람은 잠시 총성이 멈춘 틈을 타 망루를 나와 반대편 성벽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던 순간, 또 다른 조선군 무리가 밑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멈춘 신노스케는 절망적인 신음을 내뱉었다.
“젠장!”
“저기 적장이 있다!”
“잡아라!”
계단을 올라오던 조선군 병사들은 신노스케 등을 보자마자 바로 가지고 있던 총을 쐈다.
탕! 탕! 탕!
“꾸엑!”
“흐윽.”
양옆에 있던 왜병들이 비명을 내지르면서 나자빠지자 신노스케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한쪽 손에 군기를 든 이관이 큰 소리로 외치며 앞장서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나를 따르라!”
“가자!”
계단을 두세 개씩 뛰어오르던 이관은 오요로이를 입은 무사가 앞을 가로막자 지체 없이 손에 든 군기를 마치 창처럼 내질렀다.
푹.
“컥.”
날카롭게 되어 있는 깃대 끝부분은 무사의 복부 깊숙이 박혔다.
이관이 기합을 내지르며 깃발을 옆으로 내젓자 무사는 힘없이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아아아악.”
그렇게 길을 막던 무사를 처치하고 성벽 위로 올라서자 신노스케와 호위병들이 맞은편에서 온 아군과 벌써 한데 뒤엉켜 싸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본 이관은 오른쪽 손에 든 장검을 꽉 움켜쥐고는 바로 싸움에 끼어들었다.
“이야압!”
츄앙.
이관이 기합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자 제일 가까이 있던 노무라가 화들짝 놀라며 검을 찔러 왔지만 그는 가볍게 걷어 내고는 사선으로 검을 내려쳤다.
서걱.
“크악!”
그가 휘두른 검은 상대의 오른쪽 팔을 정확히 잘라 냈다.
잘린 어깨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고 노무라는 부상 부위를 움켜쥐고는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이관은 머뭇거리지 않고 그대로 검을 옆으로 그어 노무라의 목을 베어 버렸다.
“끄억.”
툭.
목뼈와 함께 깔끔하게 잘린 노무라의 머리는 눈을 부릅뜬 모습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성벽 한쪽 구석으로 굴러갔다.
그러자 앞쪽에서 아군 병사 두 명과 싸우고 있던 신노스케가 노성을 터트리며 이관한테 달려들었다.
“이놈 죽어라!”
“이크.”
황급히 몸을 뒤로 빼서 검격을 피한 이관은 큰 동작을 취하느라 자세가 무너진 신노스케의 품으로 재빨리 파고들며 가슴팍에다가 검을 찔러 넣었다.
“받아라!”
“헉!”
푹.
둔탁한 소리를 내며 이관의 장검은 상대방의 심장을 그대로 꿰뚫고는 등 뒤로 끝부분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이관이 검을 빼내자 신노스케는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지 연거푸 기침을 해 대며 두세 발걸음 뒤로 물러섰다.
“콜록. 콜록…… 으.”
기침을 할 때마다 시뻘건 피가 섞여 나와 입 주위를 온통 지저분하게 만들었고, 신노스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검상을 입은 부위를 더듬었다.
“내, 내가 이리 죽다니…….”
끈적끈적한 피가 묻은 손을 내려다보며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짓던 신노스케는 이내 앞에 서 있는 이관을 무섭게 노려보다가 털썩 쓰러졌다.
그렇게 신노스케를 죽인 이관이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주위를 둘러보자 어느새 아군 병사들이 왜병들을 모두 제압한 상태였다.
성벽 아래도 저항을 대부분 물리치고 조선군이 외성을 거의 장악했고 부서진 성문을 통해 후속 병력이 계속해서 성 안으로 꾸역꾸역 들어오고 있었다.
막부군 패잔병들은 허둥지둥 안쪽에 위치한 내성으로 도망치는 중이었다.
기선이 완전히 조선군 쪽으로 넘어와 이제 에도 성 함락은 시간문제 같았다.
벅차오르는 감동에 이관은 망루에 서서 들고 있던 군기를 양손으로 잡고 이리저리 힘차게 흔들었다.
그러자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군데군데 적군과 아군의 피로 붉게 물든 삼족오 기가 활짝 펴지며 나부꼈다.
“전하, 저길 보십시오. 망루에 삼족오기가 올랐습니다.”
“어디?”
도총관 엄황이 한쪽 팔을 들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본 도현은 정말 뿌연 흙먼지 사이로 여기저기 부서진 망루 위에 삼족오 깃발이 흔들리고 있자 고삐를 쥔 손을 꽉 움켜쥐었다.
“하하하! 정말이군.”
“후속 병력까지 성안으로 진입했으니 이제 곧 내성도 무너질 것이옵니다.”
“그래야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자신도 병사들과 함께 에도 성으로 들어가 싸우고 싶었지만 그러면 오히려 방해가 될 가능성이 컸기에 애써 참으면서 빠르게 성을 장악해 나가고 있는 아군을 지켜봤다.
이런 가운데 전투는 이제 외성을 벗어나 내성을 향하는 방향에 늘어서 있는 건물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외성을 돌파하느라 온통 피와 땀으로 얼룩진 조선군 병사들은 건물들 사이에 난 통로를 지나가면서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이 있거나 적이 보이면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저기 도망가는 놈들이 있다. 쏴라!”
타타탕! 탕! 탕!
하급 군관의 외침에 조선군 병사들이 들고 있던 수석식 소총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발사됐다.
조선군을 피해 내성으로 도망치던 왜병 십여 명은 쏟아진 총탄에 금방 피투성이가 되어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총을 쏜 병사들은 재빨리 허리에 차고 있는 주머니에서 화약이 든 종이 뭉치와 총탄을 꺼내 재장전을 하고는 다시 내성 쪽으로 뛰어갔다.
곳곳에서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는데 외성 주위와 길마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적군의 시신이 널려 있었고 이들이 흘린 피가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너무나도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살육과 광기에 취하고 당장 먼저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임을 당했기에 조선군 병사들은 그딴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렇게 막부군을 몰아붙이던 조선군 앞에 또 다른 난관이 나타났다.
바로 이에미쓰와 그의 일족을 지키는 마지막 방어선인 내성이었다.
높이는 열 자(3m) 정도로 외성보다는 낮고 규모도 작았지만 어엿한 성벽이었기에 쉽게 돌파하기는 어려웠다.
거기다가 일반 징집병이 아니라 이에미쓰를 측근에서 호위하는 친위 병력들이 결사의 각오로 지키고 있었기에 더욱 공격이 쉽지 않았다.
이대로 공격을 강행한다면 상당한 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애초에 에도 성을 계속 점령하고 있을 생각 따위는 없었던 조선군은 상당히 과격한 방법을 사용했다.
덜컹. 덜컹.
정면에 있는 내성을 노려보며 조선군 병사들이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바퀴 굴리는 소리와 함께 뒤편에서 포수들이 천자총통을 실은 포차 세 대를 끙끙대며 끌고 왔다.
바로 병사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위력을 가진 화포를 쏴서 내성 성문을 날려 버리려는 거였다.
건물들과 내성 사이에는 널찍한 공터가 있었기에 화포를 방열시키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대로 하루만 버티면 번주들이 보낸 지원군이 도착해 조선군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 애써 희망을 가지던 적은 화포의 등장에 기겁을 했다.
“허억! 저게 뭐야?”
이미 외성에서 화포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충분하다 못해 뼈에 사무칠 정도로 겪었기에 적들의 충격은 더했다.
“이제 끝장이야.”
“으으…….”
내성 방어를 맡고 있던 막부군 장수는 바로 코앞에서 방열 작업 중인 조선군 화포와 겁에 질린 부하들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소리쳤다.
“어떻게든 지원군이 올 때까지 여길 지켜야 된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화살과 조총을 쏴라!”
발악을 하듯 막부군 장수가 외치자 왜병들은 각자 가지고 있던 원거리 공격 무기를 발사했다.
슈슉! 슉!
타탕! 탕! 탕!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화살은 물론이고 조총으로 쏜 총탄도 포수들이 있는 곳까지 날아왔다.
상당히 위협적인 공격이었지만 이럴 줄 알고 미리 대기시켜 둔 방패병들이 자기 몸만 한 사각 방패로 막아 줬기에 포수들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작업을 계속했다.
“어서 서둘러! 저 개자식들한테 한 방 제대로 먹여 줘야 될 거 아니야.”
포술장이 독려를 하는 가운데 포수들도 방패병이 막아 주고는 있지만 화살과 총탄이 빗발치는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기에 평소보다 더 빨리 손을 움직였고 어느새 화포 고정이 모두 끝났다.
“다 됐습니다.”
“사격 준비!”
포술장의 말에 포수들은 재빨리 뒤에 있는 나무 상자에서 포탄과 화약을 꺼내 화포에 장전했다.
“장전 끝!”
“목표는 정면에 보이는 내성 성문이다. 단번에 박살 낸다! 만약 백 보밖에 안 되는 과녁을 제대로 명중시키지 못하는 멍청이가 있으면 내가 밤새도록 갈굴 테니까 알아서 하도록 해.”
“옛.”
한쪽 팔을 들어 내성 성문을 가리키며 으름장을 놓은 포수는 이내 큰 소리로 사격 지시를 내렸다.
“발사!”
꽝! 꽝! 꽝!
쉬우우웅.
직사로 발사된 포탄은 곧장 앞으로 날아가 내성 성문을 맞혔다.
꽈꽝! 쿠쿵! 쿵!
“으윽.”
천지를 진동시키는 폭음과 함께 강한 충격이 내성 성문을 뒤흔들었다.
후두두둑.
단단한 소나무에 철판까지 덧대서 만든 외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대도 나름 튼튼하게 만들어진 성문은 단 한 번의 일제사격에 직격탄을 맞고 완전히 박살 나 버렸다.
뿌옇게 피어오른 흙먼지가 가시고 나뭇조각으로 변해 부서진 성문이 모습을 드러내자 숨을 죽인 채 지켜보던 조선군 병사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돌격!”
“우와아아아!”
“막부군 놈들을 싹 쓸어버려라!”
잔뜩 기세를 올리며 덤벼드는 조선군과 달리 그나마 믿고 있던 성문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뚫리자 적들은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퍼억.
“끄아악.”
달려오는 기세 그대로 조선군 병사가 내지른 총검에 복부를 찔린 왜병은 목이 찢어질 듯 비명을 내질렀다.
총탄만 쏘는 조총과 달리 조선군은 총신에 날카로운 총검을 달아 지금 같은 근접전에는 마치 창처럼 사용해 상대를 제압했다.
채챙! 챙! 챙!
“막아라! 조선군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된다.”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전투를 독려하던 막부군 장수는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에 머리를 맞고는 시뻘건 피를 허공에 흩뿌리면서 쓰러졌다.
“커억.”
그 장수뿐만 아니라 막부군 병사들은 거의 일방적으로 살육을 당했다.
“안 돼!”
“아악.”
순식간에 내성 성문 주위는 막부군 병사들이 흘린 피와 비명으로 가득 찼다.
잠시 뒤 적을 모두 제압한 조선군은 내성 깊숙한 곳으로 밀고 들어갔다.
조선군이 파죽지세로 내성을 장악해 가는 가운데 이에미쓰와 막부 가신들이 모두 모여 있는 천수대 안은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이에미쓰는 바람이 불어오는 천수대 난간 앞에 서서 자신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통감했다.
에도 성 곳곳에서 올라오는 검은 연기와 병사들의 함성 소리, 어디선가 병장기가 부딪치는 금속음까지 한데 섞여 메아리처럼 사방을 울렸다.
활기차게 북적여야 할 거리에는 막부군의 시체가 즐비했고 화포가 쓸고 간 흔적으로 성벽엔 온전한 곳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가 비참한 심정을 속으로 곱씹고 있을 때, 갑옷을 입은 무사가 다급하게 달려와 목청껏 외쳤다.
“조선군이 방금 내성 성문을 돌파했습니다!”
“……!”
이에미쓰는 휘청거리는 몸을 난간에 기대 가까스로 버텼다.
“그게 정말이냐!”
미우라가 무사를 호되게 추궁했다.
하지만 그을음으로 까맣게 변한 뺨과 끈 하나로 간신히 매달려 있는 너덜너덜한 갑옷.
그리고 끈적끈적하게 말라붙은 핏자국들 모두가 필사적으로 소식을 알리기 위해 사선을 넘어 달려왔음을 말없이 대변해 주었다.
“예, 조금 있으면 이곳 천수대도 안전하지 못할 겁니다.”
“끄으응.”
“주군, 더 이상은 시간이 없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뒤쪽에 시립해 있던 미우라가 절박한 표정으로 이에미쓰에게 말했다.
다른 가신들 역시 같은 마음인 듯 입을 모아 그가 도망치기를 진언했다.
그러나 모두가 머리를 숙여 한목소리로 말해도, 허탈한 표정을 지은 이에미쓰는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미 조선군이 사방을 에워쌌는데 어디로 도망친단 말이냐?”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적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성만 빠져나갈 수 있다면 근처에 있는 번주들의 지원 병력과 만나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겁니다.”
미우라는 최대한 희망적인 말로 이에미쓰의 기운을 북돋으려 했다.
“다 부질없는 짓이야.”
이에미쓰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묘하게 후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꽃은 필 때뿐만 아니라 질 때도 아름다워야 하지 않겠나. 내 선조께서 천하통일을 이루고 천 년의 번영을 꿈꾸며 자리 잡으신 곳이니, 절대로 이 성을 떠나지 않겠네.”
그렇게 말하는 이에미쓰의 눈은 꿈이라도 꾸는 듯 몽롱했다.
현실도피라도 할 생각인가!
미우라는 믿음직스럽지 못한 주군의 모습에 깊은 실망감을 느끼며 속으로 한탄했다.
아이처럼 칭얼거리며 연약함을 그대로 내보이는 이에미쓰에 비하면 조선의 국왕은 얼마나 당당하고 패기로웠던가.
자신도 모르게 두 사람을 비교하던 미우라는 잡념을 쫓으려는 듯 머리를 크게 흔들고 이에미쓰에게 말했다.
“선조의 뜻을 생각하신다면 더욱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기셔야 합니다. 초대 쇼군께선 이보다 더 힘든 상황에서도 고난을 이겨 내고 승리를 쟁취하셨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은 열세일지라도 결국 마지막에 웃는 자가 이긴다는 말을 명심하십시오.”
미우라의 이야기에 이에미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력이라면 오다 노부나가를 이길 자가 없었다.
머리를 쓰는 간교한 계책을 꾸미는 일이라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제일 뛰어났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천하를 움켜준 것은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바로 그의 선조였다.
모든 걸 포기하려는 이에미쓰의 마음에 균열이 생긴 틈을 타 미우라가 재차 말했다.
“이에야스 님의 뜻을 계속 이어 나가기 위해서라도 주군께서 지금 무너지시면 안 됩니다.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쇼군!”
“부탁드립니다!”
미우라를 비롯한 가신들이 한목소리로 외치자 이에미쓰는 혼란스러운 듯 미간을 크게 찌푸렸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여기서 죽음을 맞이할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살아서 도망갈 방책을 강구할지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부담감의 그의 양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이럴 때조차도 남자답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니.
새삼스럽게 자신의 우유부단함이 참으로 원망스러워졌다.
“나는…….”
마침내 결단을 내린 이에미쓰가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은 잔혹해서, 그가 마음을 다잡았을 땐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채챙! 챙!
“아악.”
우당탕!
갑자기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들리더니 피투성이가 된 병사들이 나무로 만든 장지문을 부수며 안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살기 가득한 얼굴을 한 조선군이 병장기를 든 채 쏟아져 들어왔다.
“이런!”
“쇼군을 지켜라!”
츄앙.
그러자 천수대 안에 있던 호위 무사와 가신 들이 화들짝 놀라 소지하고 있던 검을 빼 들고 조선군과 맞섰다.
순간 실내는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서로 아무런 말없이 상대를 노려보며 조금만 낌새가 이상해도 바로 격돌할 정도로 날카로운 살기가 주변 공기를 가득 채울 때 이관이 검을 겨눈 자세로 약간은 어색한 왜국말로 먼저 입을 열었다.
“다 끝났다.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으면 순순히 항복해라!”
그러자 이에미쓰를 측근에서 지키는 호위장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을 받았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딴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네놈들이나, 살고 싶으면 조용히 물러나라.”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저리 핏대를 세우다니. 하여튼 꼭 좋게 말할 때는 안 듣고 두들겨 맞고 나서야 울고 불며 비는 멍청한 것들이 있다니까.”
“뭐야!”
발끈하는 호위장을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쳐다본 이관은 이내 표정을 굳히며 차갑게 말했다.
“권주를 마다하고 굳이 벌주를 택하겠다면 우리도 더 이상 권할 생각 따위는 없어. 이에미쓰와 고분고분한 가신들만 놔두고 나머지는 모두 쓸어버려라!”
“옛!”
“저들을 막아라!”
“와아아!”
사나운 함성과 함께 격돌한 양쪽은 좁은 천수대 안에서 한데 뒤엉켰다.
채챙! 챙! 챙!
개인적인 무위는 이에미쓰의 호위 무사들이 앞섰지만 조선군 군관과 병사 들은 철저히 두세 명씩 짝을 이뤄 싸움을 벌이는 방법으로 실력 차이를 극복했다.
“으악!”
“컥.”
순식간에 시뻘건 피가 허공에 흩뿌려지고 비명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며 실내는 아수라장이 됐다.
호위 무사들이 나름 분전했지만 애초에 수적 차이를 극복하기 어려운 데다 철저히 협공을 하는 조선군에 하나둘씩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해 내며 쓰러졌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호위장도 수평으로 휘두른 이관의 검에 상체가 길게 잘려 나가 내장을 주르륵 쏟아 내며 주저앉았다.
그렇게 막부 호위 무사들을 모두 쓸어버린 이관은 앞으로 걸어가 찐득하게 피가 묻어 있는 검 끝을 이에미쓰에게 겨누며 차갑게 말했다.
“어디 더 발버둥 쳐 보시지.”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걸 깨달은 이에미쓰는 수치심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힘없이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로써 이틀간에 걸친 공성전이 끝났다.
어느덧 머리 위에 떠 있던 해가 서산 너머로 뉘엿뉘엿 지는 가운데 성안 정리가 모두 끝나자 도현은 전마를 탄 채 휘하 장수들을 이끌고, 뒤로 늘어뜨린 망토를 휘날리며 당당하게 에도 성에 입성했다.
때마침 그의 뒤로 내려앉는 붉은색 노을은 후광처럼 비추며 도현을 더욱 돋보이고 위엄이 넘치게 만들었다.
그런 도현의 모습에 길 양옆으로 도열해 있던 조선군 병사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각자 가지고 있던 병장기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
“주상 전하 만세! 만세!”
“대조선국 만세! 만세!”
그 뜨거운 열기에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었지만 도현도 심장이 크게 뛰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결국 흥분을 참지 못한 도현은 약간 거만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한쪽 팔을 들어 올려 병사들의 환호에 답했다.
그러자 병사들의 함성은 더욱 커졌고 도현이 외성을 지나 내성 성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됐다.
포격에 여기저기 무너지고 검게 그을린 성문 앞에는 쇼군인 이에미쓰가 가신들과 함께 서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에도 성 천수대에 앉아 왜국 전체를 호령하다가 전쟁에 패해 포로가 되어 승자인 도현을 직접 맞이해야 되는 비참한 처지가 된 이에미쓰는 굴욕감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춘 도현은 그런 이에미쓰와 막부 가신들을 천천히 훑어보고는 위엄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놈이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냐!”
“…….”
아무리 전쟁에서 졌다지만 그래도 왜국을 통치하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에 있던 자신을 마치 일개 번주처럼 취급하는 도현의 말에 이에미쓰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상대가 치욕감을 느끼든 말든 도현은 싸늘한 눈빛으로 이에미쓰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감히 짐을 능멸하고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모습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렇게 직접 벌을 주기 위해 수천 리 바닷길을 달려왔다! 자고로 은혜를 모르면 금수禽獸보다 못한 인간이라고 했다. 오늘날 왜국이 있기까지 삼한시대부터 많은 도움을 주었거늘, 그에 대한 보답은 하지 못할망정 검과 창을 들이민단 말이냐!”
분노로 이글거리는 얼굴을 하고 추상같은 호통을 내지르자 이에미쓰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네놈과 가신들뿐만 아니라 도쿠가와 가문에 관계된 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전부 멸하고 에도 성은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부순 다음 이 땅에 잡초조차 나지 않도록 소금을 뿌려 일벌백계하고 싶지만, 상국上國으로서 아량을 베풀어 다시는 아국에 반기를 들지 않고 영원한 충성을 맹세한다면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항복과 굴종을 요구하는 도현의 말에 이에미쓰는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에 몸을 가늘게 떨었다.
마지막 자존심에 이에미쓰가 쉽게 무릎을 꿇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옆에 있던 이관이 사납게 눈을 부라리면서 낮은 음성으로 다그쳤다.
“어서 복종의 예를 취하지 않고 뭘 하고 있소!”
그러자 이에미쓰는 체념한 표정으로 어렵게 몸을 움직였다.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린 이에미쓰는 오연한 자세로 말 등에 앉아 있는 도현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대조선국 만세! 국왕 전하 만세!”
이마에서 피가 날 정도로 흙바닥에 머리를 세게 찧으며 세 번 고개를 조아린 이에미쓰는 다시 일어났다가 엎드리면서 도현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동작을 계속 반복했다.
청국 못지않게 조선을 상대로 온갖 패악질을 벌여 온 왜국의 실질적 통치자인 쇼군이 자신의 발아래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에 도현은 강한 쾌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