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사 번 (81/104)

도사 번

도사 번에 위치한 고치 성에서는 험악한 설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계속 이렇게 고집을 부리실 겁니까!”

미우라가 붉어진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좀처럼 목소리를 크게 하는 법이 없는 그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막부에서 무슨 말을 하건 내 생각은 변함없으니 그리 아시오.”

하지만 고치 성의 성주이자 도사 번 번주인 야마우치 타다요시는 그런 미우라의 모습을 보고서도 어디서 뉘 집 똥개가 짖느냐는 식으로 대꾸했다.

“정녕 조선인들을 돌려보내지 않겠다, 이겁니까?”

“당연하오. 그자들도 엄연히 내 개인 재산 중 일부인데 어찌 순순히 내보낼 수 있겠소.”

“막부의 명령을 거스르겠다는 말을 아주 당당히 하시는군요.”

“막부와 군신 관계를 맺긴 했으나 아무런 명분도 없이 사유재산에 손을 대려는 것도 당당히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막부의 이름을 내세워 압력을 가하려고 한 미우라는 배짱 좋게 튕겨 대는 타다요시의 말에 그저 분한 속내를 애써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다.

도사 번의 야마우치 가문은 도자마 다이묘로, 일반 다이묘들하고는 그 배경이 달랐다.

통일 후에 막부로 영입되었기 때문에 정사를 논하는 자리에는 끼지 않고 그저 무력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군사를 보내는 정도의 협력 관계만 있을 뿐, 군신 사이의 의리라든가 충성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주군의 집안에 내분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이 생겨 힘이 약해지면 무단으로 세력을 이탈해도 암묵적으로 용인될 정도이니, 조선군에 에도를 점령당해 무력해진 막부가 이래라저래라 해 봤자 타다요시에겐 귀찮은 종알거림에 불과했다.

“그럼 조선군은 어찌 상대하실 생각입니까. 조선인들을 이대로 계속 붙잡고 있는 걸 알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조선군? 흥.”

타다요시는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만약 놈들이 우리 도사 번까지 쳐들어올 생각이라면 그때는 따끔한 맛을 보여 줄 테니 어디 마음대로 해 보라고 하시오.”

“이……!”

아무리 쇠고집이라도 정도가 있지, 도통 다른 사람 말을 들어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 타다요시의 태도에 미우라는 눈을 질끈 감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못 말리겠군. 저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마를 짚었다.

타다요시를 설득하기 위해 이미 며칠 동안이나 도사 번에 머무르며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었으니 피곤이 쌓일 대로 쌓인 상태였다.

끝이 없는 대화에 지친 미우라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십시오.”

그렇게 말을 남기고 미우라가 나가 버리자 옆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가신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정말 이래도 되겠습니까?”

“무엇을?”

“막부에서 온 자를 이렇게 홀대해도 되는 것인지…….”

도사 번이 막부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는 하나, 그동안 꼬박꼬박 참근 교대도 하면서 겉으로나마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을 타다요시가 단번에 깨트려 버린 셈이니 앞으로 막부가 어떻게 나올지 걱정스럽긴 했다.

“어차피 이빨 빠진 호랑이인데 뭘 그리 두려워하나?”

에도를 점령당한 후부터 도쿠가와 막부의 권위는 진흙탕에 처박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지금이라면 도사 번 무사들을 모두 끌어모아 도쿠가와 가문을 끌어내리고 야마우치 가문이 쇼군 자리에 앉는 상황을 그려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실제로 사국의 패자인 도사번은 도쿠가와 막부에 맞서 싸울 의지와 능력이 충분히 있었다.

“벌써 조약을 체결한 지 수십 일이 지났는데 약탈해 간 물품과 아국 백성 들을 보내지 않는 번들은 어찌 된 겁니까!”

연신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탁자를 내려치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이척의 추궁에 막부 대표로 나온 미우라는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조약을 이행하도록 압박을 가하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오.”

“그 말을 들은 지가 벌써 보름이 지났습니다. 듣자 하니 미우라 공께서 직접 도사 번에 다녀왔다던데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니 정말 실망입니다.”

“그게, 워낙 반발이 심하다 보니…….”

“그래서 이대로 손을 놓고 있겠다, 이겁니까?”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언제까지 기다리란 겁니까! 막부의 영향력이 이거밖에 안 되다니 정말 실망이군요.”

비아냥거리는 듯한 이척의 말에 미우라는 순간 발끈했다.

“애초에 수십 년이 지났고 이미 각 번주들의 사유재산이 된 것을 다시 내놓으라니 반발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소!”

“지금 조약 이행을 거부하는 번주들을 두둔하시는 겁니까?”

눈을 가늘게 뜬 이척이 목소리를 착 내리깔며 말하자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미우라는 당황스러운 표정 지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번주들을 설득해야 될 미우라 공께서 그런 생각하고 계시니 저들이 더 배짱을 부리는 것이 아닙니까? 막부가 진정으로 조약을 성실히 이행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군요.”

상대가 꼬투리를 잡고 일을 키우려고 하자 미우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오해요. 본인은 물론이고 막부도 추호도 그런 생각이 없소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성과가 없는 겁니까? 약탈해 간 물품과 아국 백성들의 송환도 처음에 반짝하다가 지금은 지지부진하고 또 강제로 왜국까지 끌려온 것에 대한 보상금 지불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건 어쩔 작정입니까?”

기선을 잡고 몰아치는 이척의 추궁에 미우라는 식은땀을 흘리며 궁색한 변명을 늘어놨다.

“은괴를 마련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번주들도 설득을 하고 있으니 조만간 다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자 이척이 크게 선심이라도 쓰듯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딱 보름을 더 주지요.”

“그건 너무 짧소이다. 당장 번주들을 설득해 물품과 조선인들을 돌려받는다고 해도 그것보다 오래 걸릴 거요.”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일단 철군을 하면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약속한 대로 다 이행하도록 하겠소이다.”

“그걸 지금 말씀이라고 하는 겁니까!”

버럭 고함을 내지른 이척은 이내 정색을 하며 상대를 쳐다봤다.

“막부가 못한다면 우리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겠군요.”

“무슨 뜻이오?”

미우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이척은 살짝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매를 들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

얼마 뒤 미우라는 쇼군인 이에미쓰를 찾아가 조선 측의 움직임을 보고 했다.

쪼르르륵.

찻잎을 걸러 낸 뒤 주전자를 기울여 찻물을 따른 이에미쓰는 양손으로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조선군이 도사 번을 직접 토벌하겠다고 했다, 이 말이지?”

그러자 긴장한 얼굴로 앞에 앉아 있던 미우라가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뭐 나쁠 건 없지.”

“예?”

내정간섭이라고 불같이 화를 낼 줄 알았던 미우라는 뜻밖의 반응에 의아한 시선으로 이에미쓰를 봤다.

찻잔을 내려놓은 이에미쓰는 담담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번주들을 부추겨서 감히 내 지시를 거역하려는 타다요시가 눈에 거슬렸지만 딱히 제재를 가할 수단이 없어 분을 삭이고 있었는데 조선군이 알아서 정리해 주겠다니 우리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 아니겠나?”

“그렇긴 합니다만 이 일로 인해 조선이 아국 내정에 간섭을 하는 빌미가 되는 건 아닌지 염려됩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날 이빨 빠진 호랑이로 보고 여기저기서 반기를 들 조짐을 보이는 번주들을 찍어 누르는 것이 우선이야.”

조선군보다 막부의 위치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번주들에 대한 경계심이 더 큰지 이에미쓰는 말을 하는 중간중간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승냥이 같은 조선 놈들이 그냥 도사 번을 무너뜨려 준다고 하지는 않았을 테고 내건 조건이 있겠지?”

“네. 사국 내륙에 위치한 주석 광산 소유권과 이와미 지역에서 조선이 은광을 하나 개발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습니다.”

“으음.”

담담하게 이야기를 듣던 이에미쓰는 이와미 은광 이야기가 나오자 와락 얼굴을 구겼다.

“이와미 지역이라고 했나?”

“예.”

“이것들이!”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 발견된 이와미 은광은 산 전체가 은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산출이 많았는데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까지 전 세계에서 유통되는 은의 삼분의 일이 여기서 나왔을 정도였다.

많이 채광될 때는 한 해 오천 관(19톤)에 이르는 은을 생산하며 막부의 든든한 자금줄 역할을 해 오고 있었다.

바로 이 은광이 있기에 매년 은괴 일천 관(4톤)을 십 년 동안 조선에 넘기기로 한 조약도 체결할 수 있었다.

이처럼 막부로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은광에 조선이 욕심을 내자 이에미쓰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건 절대 안 돼!”

“그럼 조선군의 출병을 반대할까요?”

“으음.”

눈가를 찌푸린 이에미쓰는 팔짱은 낀 채 잠시 고심을 했다.

조선군이 그의 말을 들을지도 의심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막부에 반기를 들 조짐을 보이는 번주들을 제압할 기회를 놓치기도 아까웠다.

만약 이대로 조선군이 출병해 도사 번을 무너뜨리고 거기에 눌러앉기라도 한다면 막부에 너무나도 큰 위협이었다.

당분간 조선군 일부를 에도 근처에 주둔시키기로 했지만 그건 순전히 막부의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언제든지 배상금 지불이 완료되면 철수할 병력이었기에 이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미우라.”

“예, 주군.”

“조선 측 대표와 만나 은광 개발 대신 출정 비용으로 은괴 오백 관을 넘겨주겠다고 하게.”

“그렇게나 많이 말씀이십니까?”

“이와미 은광에 대한 관심을 돌리려면 그 정도는 안겨 줘야 되지 않겠나?”

“그렇긴 하지만…….”

너무 많은 대가를 주는 것이 아니냐는 얼굴로 미우라가 말끝을 흐리자 이에미쓰는 한쪽 손을 살짝 내저었다.

“이번 일을 꼬투리 잡아 조선군이 에도와 가까운 사국에 자리를 잡기라고 한다면 턱 밑에 검을 두는 것처럼 껄끄러울 테니 그걸 미연에 막는 대가라고 생각하자고. 그러면 그리 아까울 것도 없지 않겠나?”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미우라가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자 방 안에 혼자 남은 이에미쓰는 무표정한 얼굴로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이에미쓰의 뜻은 곧바로 미우라를 통해 도현에게 전달됐다.

“은괴 오백 관이라고?”

상석에 앉은 도현이 되묻자 앞에 엎드려 있던 이척이 얼른 대답했다.

“예. 그리고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들에 대한 보상금으로 주기로 한 금 열네 관도 이달 말까지 함께 넘겨주겠다고 합니다.”

보료 등받이에 몸을 기댄 도현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도사 번을 무너뜨리고 거기에 주저앉기라도 할까 봐 애가 단 모양이군.”

“금이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질질 미뤘다니 괘씸하지 않습니까.”

도총관 엄황이 눈가를 찌푸리며 투덜거렸지만 도현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넘겼다.

“어찌 됐건 돈을 받았으니 된 것 아니겠어.”

“그러면 이와미 지역에 은광을 개발하는 건 이대로 포기하시는 겁니까?”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어.”

그러자 윤찬의 장군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봤다.

“그럼 왜……?”

“이와미 은광을 거론하지 않았다면 욕심 많은 이에미쓰가 순순히 은괴를 오백 관이나 더 내놨겠어.”

“하면 처음부터 은괴를 노리시고……?”

“맞아. 기회가 있을 때 막부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야지.”

도현의 말에 동석해 있던 도총관 엄황이 우려 섞인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만 단지 그런 이유로 도사 번을 공격하는 건 막부만 좋지, 우리한테는 크게 득 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신도 도총관의 의견에 같은 생각이옵니다. 이런 일로 어렵게 키운 정예 병력을 소모하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통제사 손억기까지 엄황의 이야기에 동조를 하며 출정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자 도현은 허리를 바로 하고는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막부의 재정을 축내려는 것도 있지만 가장 큰 목적은 도사 번을 본보기로 삼아 번주들이 조약을 이행하도록 압박하려는 거야. 그리고 성을 공격하는 데 굳이 아군 병사들을 앞세울 필요는 없지.”

마지막 말에 모여 있던 신하들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봤다.

“그럼 어떻게 성을 공략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설마 막부의 도움을 받으시려는…….”

“남아 있는 전력이라고 해 봤자. 스네시게의 군대뿐인데 마지막 남은 보루나 마찬가지인 병력을 이에미쓰가 내줄 리가 없지.”

“그러면?”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신하들을 쓰윽 훑어본 도현은 한쪽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면서 이야기를 했다.

“우리 손아귀에 화살받이로 내세워도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 병력이 무려 일만 명이나 있지 않나.”

“……?”

금방 이해를 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신하들은 이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혹시 왜군 포로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깜짝 놀란 도총관 엄황의 말에 도현은 머리를 끄덕였다.

“이미 한차례 전투를 경험한 인원들이니 노획한 병장기로 무장을 시켜서 공성전에 내보낸다면 아군 병사들의 희생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거야.”

“포로들한테 무기를 주다니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윤찬의 장군이 걱정스러운 듯 말하자 도현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턱대고 싸우라고 하면 반발이 있겠지만 적당한 미끼를 내걸면 아마 필사적으로 전투에 임할 거야.”

“미끼라고 하시면……?”

“도사 번을 점령하면 포로 신분에서 풀어 준다고 하는 거지. 어차피 데리고 있어 봐야 더 이상 쓸데도 없고 식량만 축내는 것들이니 이렇게 생색이나 내면서 알뜰하게 써먹는 거지.”

탈탈 털어 내다 못해 아주 사골까지 우려먹겠다는 도현의 말에 엄황과 윤찬의 장군을 비롯한 다른 신하들은 오싹한 기분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철저하게 이용당할 왜군 포로를 향해 동정심을 금치 못했다.

“그래도 받아 낼 수 있는 건 다 긁어내야 하니까 주겠다는 은괴는 감사히 접수하도록 하지. 오백 관이 전부는 아닐 테니까 적당히 튕기면서 살살 구슬려 봐.”

“예.”

명을 받은 외무차관 이척이 고개 숙여 대답했다.

그날 오후 바로 미우라를 만난 이척은 밤새 서로 밀고 당기는 협상을 벌인 끝에 야마우치 가문을 토벌하고 도사 번을 막부에 넘겨주는 대신 사국에 있는 주석 광산과 출정 비용으로 은괴 팔백 관을 받기로 했다.

며칠 뒤 이에미쓰는 약속대로 휘하에 있는 번주들을 닦달해 급히 끌어모은 금과 은을 조선군에 넘겨줬고 도현은 곧장 흑치영에게 일군을 맡기고 출정 명령을 내렸다.

도사 번 공격에 동원된 병력은 총 오천 명으로 그중 일천 명이 화포를 운영하는 포병대였고 나머지는 거란 출신 기병이었다.

그리고 별도로 일만에 달하는 왜군 포로들이 전투에 투입됐다.

갑작스러운 집합 명령에 수용소 내에 있는 커다란 공터에 모인 포로들은 연단에 올라선 조선 장수의 이야기에 크게 술렁거렸다.

“모두들 소문을 들어 알고 있겠지만 이틀 뒤 감히 양국이 추인한 조약 이행을 거부하는 도사 번을 징벌하기 위해 출정에 나선다. 주상 전하의 명을 받아 나가는 영광스러운 출정에 그대들도 함께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번 전투에서 적과 용맹하게 싸운다면 특별히 너희들의 죄를 모두 용서하고 자유롭게 풀어 주겠다는 어명이 계셨다.”

“……!”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던 포로들은 이내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우릴 풀어 준다는 거야?”

“그런가 봐.”

“대신 전쟁터에 나가야 된다잖아.”

“달콤한 말로 꼬여서 화살받이로 쓰려는 거 아니야?”

“글쎄…….”

“아무렴 어때. 이대로 조선으로 가서 평생 노예로 사는 것보다 눈 한번 딱 감고 전쟁터에 가서 자유를 되찾는 것이 백번 나을 거야.”

“그럼 자네는 갈 건가?”

“그래.”

고개를 끄덕인 털보 사내는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가서는 단상 위에 있는 조선군 장수에게 손을 들어 질문을 했다.

“도사 번과 싸우면 정말 우릴 풀어 주는 겁니까?”

그러자 조선군 장수는 약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이다. 자유롭게 풀어 줄 뿐만 아니라 일인당 은화 열 개씩 돈도 지급하라는 명령서를 주상 전하께서 이렇게 직접 쓰셨다.”

이야기를 하며 조선군 장수가 손짓을 하자 옆에 있던 군관이 손에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쫙 펼쳐서 앞으로 내보였다.

대부분 까막눈인 데다 거리가 있어 무슨 글이 적혀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국왕인 도현이 직접 어명을 내렸다고 하자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보통 전쟁 중에 포로가 됐을 경우 보상금을 주고 데려오지 않으면 노예가 되어 평생 광산처럼 위험한 곳에서 강제 노역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현대와 달리 인명 경시 분위기가 팽배한 이때에는 높은 직책에 있는 것도 아닌 일반 병사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어떻게 되든지 신경조차 안 썼기에 노예가 되는 걸 피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이런 험하고 고된 일을 하다 보면 아무리 건강한 사내라고 해도 삼사 년을 넘기기 어려웠다.

전투에 나가면 목숨을 걸어야 됐지만 단 한 번의 모험으로 자유와 약간의 금전까지 챙길 수 있으니 왜군 포로 입장에서는 하늘이 준 기회였다.

여기에 더해서 그 전까지 소속되어 있던 막부가 아니라 도사 번을 공격하는 거였기에, 번이 다르면 딴 나라 취급을 하는 왜국의 특성상 포로들이 가질 부담도 없었다.

“좋소. 하리다. 평생 노예가 되어 죽도록 일만 하는 것보다 시원하게 칼춤 한번 추고 자유를 되찾는 것이 백번 낫지.”

“나도 하겠소!”

질문을 던졌던 털보 사내는 시작으로 포로들은 너도나도 전투에 참가하겠다고 나섰다.

풀려날 수 있다는 희망과 어차피 이대로 노예가 되면 끝이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뒤섞인 결과였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도현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후. 짐이 의도한 대로 되는군.”

속임수가 아닌지 끝까지 의심을 버리지 못한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포로들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틀 뒤 흑치영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에 배속되어 배를 타고 에도를 출발했다.

조선군의 출병 소식은 오래지 않아 고치 성에 있는 야마우치 타다요시에게 전해졌다.

“병력이 모두 얼마라고?”

“조선군 오천에 막부군 일만 명이 가담했다고 합니다.”

정면에 무릎을 꿇고 앉은 무사의 보고를 듣던 타다요시는 눈썹을 추어올렸다.

“막부군이라니! 쇼군이 조선과 배꼽이라도 맞췄다는 거냐?”

“그게 조금 애매한 것이 막부군 병사들은 맞지만 쇼군이 지원해 준 것이 아니라 지난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잡혀 있던 이들이 전투에 참가한다고 합니다.”

“흥. 정말 포로인지 아니면 그렇게 위장한 건지 누가 알겠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우리 왜국의 상징인 삼신기를 조선 왕한테 팔아넘기더니, 이제는 조선군을 앞세워 우릴 치려고 꼼수를 부리는군. 어디 올 테면 얼마든지 덤벼 보라고 해!”

이를 부드득 갈며 타다요시가 막부와 조선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자 가신인 미야무라가 옆에 앉아 있다가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주군, 우리 번의 군사들이 강병이기는 하지만 무려 일만 오천에 달하는 대군이 쳐들어온다니 대비를 철저히 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지.”

호전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름 머리를 쓸 줄 알았던 타다요시는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좌우에 모여 있는 가신들을 쓸어 보며 말했다.

“바다에서 놈들을 막는 건 아무래도 어렵겠지?”

“스루가 만에서 막부 함대를 전멸시켰던 괴선怪船이 포함된 군선 수십 척이 호위를 한다고 하니 수전은 피해야 될 것입니다.”

미야무라가 말하는 괴선은 바로 조선군이 운용하는 치우 급 전함이다.

무려 구십육 문에 달하는 화포를 탑재하는 전열함인 치우 급 전함은 왜선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크기뿐만 아니라 스루가 만 해전에서 보여 준 무시무시한 위력에 왜국 사람들은 괴물 배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럼 결국 육지에서 승부를 봐야겠군.”

“예.”

“이곳 고치 성에서 수성전을 벌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동석해 있던 다른 가신의 말에 타다요시는 눈가를 찡그리며 핀잔을 줬다.

“막부가 그러다가 조선군의 화포 공격에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무너진 걸 모르나!”

“죄, 죄송합니다.”

“그러면 성 밖에서 회전을 벌이실 생각입니까?”

“그래. 적들보다 주변 지형에 익숙하고 성과 달리 빠른 기동으로 화포 공격에 대한 피해도 최소화할 수 있지 않겠어.”

“좋은 생각이십니다.”

회전을 선택한 결정에 가신들도 찬성을 하자 타다요시는 허리를 펴며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번 전체에 비상령을 내리고 무사와 병사 들을 모두 고치 성으로 소집하라!”

“옛.”

좌우에 앉아 있던 가신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대답했다.

그날 오후, 성에서 출발한 전령들이 깃발을 나부끼며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 사방에 흩어졌고 그와 함께 전쟁의 기운도 점점 고조되어 갔다.

에도 성을 출발한 조선 함대는 닷새간의 항해 끝에 고치 성이 있는 도사 만에 들어섰다.

“방금 귀환한 척후선의 보고에 의하면 해변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보일 정도로 조용하다고 합니다.”

부관의 보고에 함대 호위를 맡은 서지호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함께 있던 흑치영이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적들이 해안을 비우고 내륙에서 회전을 준비한다는 주작단의 이야기가 맞는 모양이오.”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직급이 자신보다 높았기에 서지호가 경어를 써서 묻자 흑치영은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여기까지 와서 머뭇거릴 것이 뭐가 있겠소. 곧장 상륙할 테니 준비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서지호가 손짓을 하자 부관이 즉시 주변 함선에 깃발 신호를 보냈다.

갑판이 분주해진 가운데 흑치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멀리 보이는 해안을 지그시 노려봤다.

잠시 뒤 군선들이 언제든지 사격을 할 수 있도록 해안 쪽으로 포문을 열고 늘어서 있는 상태에서 작은 협선들이 병사와 물자를 육지로 상륙시켰다.

이미 한차례 에도 성에서 대규모 상륙을 경험해 본 덕분에 이번에는 큰 문제없이 아주 빠르게 작업이 진행됐다.

제일 먼저 거란 출신 기병들이 상륙해 거점을 확보하고 뒤를 이어 왜군 포로들이 수송선에서 내렸고 마지막으로 무거운 화포와 함께 포병들이 해안에 발을 디뎠다.

그때까지도 비무장 상태였던 포로들은 해안에 상륙하고 나서야 갑옷과 무기를 지급받았다.

모두 막부와의 전쟁에서 조선군이 노획해 보관하고 있던 병장기들이었기에 포로들 손에 익숙한 것들이었다.

감시 임무를 맡은 조선군 병사들은, 막부군 포로들이 갑옷을 착용하고 지급받은 무기를 이리저리 휘둘러 보는 걸 묘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저것들 창을 거꾸로 들고 우릴 공격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일이 벌어지면 우리가 제일 먼저 당하는 거야.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쩝. 하도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그래. 도대체 윗대가리들은 무슨 생각으로 저놈들한테 무기를 쥐여 주는 건지…….”

“아군 희생을 줄이려는 거 아냐.”

“아무리 그래도 이거 영 뒤통수가 찝찝해서…….”

“아까 군관 나리가 하는 말 못 들었어. 그러니까 우리에게 눈을 부릅뜨고 잘 감시하라고 하셨잖아.”

“미치겠네.”

병사들의 이야기처럼 막부군 포로들이 무장을 하자 조선군은 혹시 모를 돌발 사태에 대비해 바짝 긴장하며 적군보다 더 신경을 썼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막부군 포로들은 무기를 받고도 고분고분 지시에 잘 따랐다.

도사 번을 함락시키면 자유롭게 풀어 준다는 희망이 있기도 했지만, 지난 전투에서 워낙 조선군이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며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기에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던 막부군 포로들은 감히 반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덕분에 조선군은 훨씬 수월하게 포로병단을 운용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상륙을 모두 끝낸 조선군은 잠시 병력을 정비하고는 곧장 적군이 진을 치고 있는 고치 성 근처 평야로 진격했다.

평소 농작물을 길러 도사 번을 풍요롭게 하던 드넓은 평야에는 작은 실개천을 사이에 두고 수많은 깃발을 나부끼며 양측 군대가 대치했다.

실개천 동쪽에 위치한 타다요시의 군대는 무려 이만 명으로 조선군보다 더 많았다.

왜 도사 번이 사국의 패자라 불리고 막부도 함부로 못하는지 병력을 동원한 것만 봐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낯선 지형에다가 숫자도 적고 충성심이 의심되는 병력을 데리고 싸워야 되는, 아주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흑치영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승리를 확신했다.

“아주 보란 듯이 진형을 펼쳐 놨군.”

군마에 탄 흑치영이 강 건너에 위치한 적군 진형을 보며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무트차한이 말을 받았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 자만심을 오늘 완전히 꺾어 주자고. 홍 장군, 자신 있지?”

홍종수라는 조선 이름으로 개명한 무트차한은 흑치영이 고개를 돌리며 묻자 씨익 한쪽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면서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적군 한가운데로 돌격해 들어가서 다 쓸어버리겠습니다.”

“좋아.”

흡족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인 흑치영은 얼마간 더 적군 진영을 살펴본 뒤 본진으로 말 머리를 돌렸다.

하루 동안 서로 탐색전을 벌인 뒤 전투는 조선군의 선공으로 시작됐다.

“어떻게 됐나?”

흑치영의 물음에 백기를 들고 적군 진영을 다녀온 군관이 바로 대답했다.

“항복을 거부하고 무단으로 영지에 침입한 건 우리라며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공격하겠다며 으름장을 놨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흑치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제도 모르는 하루살이 같으니라고.”

“어차피 항복을 할 거라 기대도 안 했지 않습니까.”

홍종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흑치영은 막사 안에 모여 있는 장수들을 쓸어 본 뒤 입을 열었다.

“저 건방진 도사 번 놈들을 단번에 박살 내 버리고 주상 전하의 뜻을 거역하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히 보여 준다. 다들 알겠나!”

“옛.”

“일단 포격으로 적들을 혼란에 빠뜨린 뒤 포로병단을 내보내 상대를 압박하고 기병대가 마무리를 짓는다. 모두 위치로!”

이미 지난밤 작전 회의에서 충분히 논의를 하고 숙지한 내용이었기에 장수들은 군례를 취하고는 막사를 나가 각자 맡은 병력이 있는 곳으로 갔다.

얼마 뒤 전투 대형 뒤편에 방열해 놓은 화포들이 적군을 향해 불을 뿜었다.

“목표는 전방에 보이는 적군이다. 발사!”

지휘관의 외침에 포수들이 심지에 불을 붙이자 천자총통 이십 문이 일제히 굉음을 울리며 포탄을 날려 보냈다.

꽝! 꽝! 꽝!

쉬이이익! 꽈꽈꽝!

쿠쿵!

“으아악!”

“컥.”

조선군이 화포를 전투에 적극 사용한다는 건 알았지만 정확한 사거리는 모르고 있던 왜군은 설마 칠백 보가 넘는 거리까지 날아오겠냐며 마음을 놓고 있다가 갑자기 시작된 포격에 크게 당황했다.

실개천을 넘어온 포탄은 왜군 대형 곳곳에 떨어져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히히힝.

폭음에 놀라 날뛰는 군마를 겨우 진정시킨 타다요시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당장 적을 공격해!”

“예, 주군.”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던 가신들은 타다요시의 명령에 허겁지겁 공격 지시를 하달했다.

그러자 아직까지는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대기하고 있던 보병대가 앞으로 전진을 시작했다.

“적 보병대가 움직입니다.”

부관의 보고에 군마를 타고 전방을 주시하고 있던 흑치영은 지체 없이 지시를 내렸다.

“우리도 포로병단을 내보네!”

“알겠습니다.”

본진에서 붉은색 삼각 깃발이 올라가자 포로병단 지휘를 맡은 조선군 장수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와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막부군 포로들을 보며 크게 외쳤다.

“다들 두렵나? 생과 사가 오가는 전투를 앞두고 그런 마음이 들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잠시간의 두려움을 이겨 내고 적과 싸워 승리를 거두게 되면 그대들은 포로의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된다. 그러니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싸워라!”

조선군 장수의 독려에 막부군 포로들의 얼굴에는 어느새 긴장과 두려움 대신 자유에 대한 열망이 가득 찼다.

“삼족오 깃발과 함께하면 오직 승리뿐이다. 진격 앞으로!”

“우와아아!”

두려움을 떨쳐 내려고 일부러 더 크게 함성을 내지른 막부군 포로들은 적과 싸우기 위해 힘차게 발걸음을 뗐다.

“일단 지금까지는 명령을 잘 듣는군요.”

무표정한 얼굴로 적군을 향해 나아가는 포로병단을 쳐다보던 흑치영은 부관의 말에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전투가 완전히 끝나기 전에는 안심할 수 없어. 독전대로 투입된 병력에게 허튼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하라고 해.”

“예.”

그러는 사이에 실개천 근처까지 포로병단이 접근하자 적군이 화살 공격을 가해 왔다.

쐐액!

슈슈슉!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으며 날아오는 화살 세례에 막부군 포로들 사이에 배치되어 전투를 독려하던 조선군 군관들이 급히 소리를 내질렀다.

“화살 공격이다. 방패를 들어 올려 막아라!”

그러자 포로병단 병사들은 황급히 나무판자를 붙여서 만든 방패를 위로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정점을 찍은 화살들이 아래로 내리꽂히면서 포로병단 병사들 머리 위로 마구 쏟아졌다.

후두두둑.

방패를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상당수의 화살이 빈틈을 파고들어 병사들에게 부상을 입혔다.

“크악.”

“윽.”

그 모습에 지휘 장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재차 명령을 내렸다.

“전군 속보로!”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최대한 다가오는 왜군과 거리를 좁혀 화살 공격에서 벗어나려는 의도였다.

한편 왜군 보병들도 전진이 순탄치 않은 건 마찬가지였는데 화살 세례 대신 조선군의 화포 공격에 엄청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슈우우웅! 꽝!

쿠쿵!

폭음과 함께 흙먼지가 솟아오를 때마다 한꺼번에 서너 명의 적병이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예상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치명적인 포격에 왜군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이런……!”

사방에서 비명이 난무했고 벌써 백이 넘어가는 숫자가 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었다.

그러자 왜군 지휘부도 조선군과 똑같은 선택을 했다.

“더 빨리 움직여라! 조선군과 섞이면 상대도 더 이상 포격을 못 할 것이다.”

가장 단순했지만 현재로서는 이것만큼 포격을 피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도 없었다.

“각 포대가 맡은 구역에 급속 사격을 가해 적 보병대를 박살 내 버려라!”

지휘관의 외침에 포수들은 미리 정해 놓은 지점을 향해 쉴 새 없이 포탄을 발사했다.

뒤편에 위치한 적 궁수대도 충분히 타격을 가할 수 있었지만 조선군의 포격은 철저하게 다가오는 상대편 보병대에 집중됐다.

시큼한 화약 냄새가 코를 자극했고 폭음이 터질 때마다 수많은 목숨들이 허무하게 사라져 갔다.

화살과 포격을 피해 죽기 살기로 달려간 양쪽 보병대는 종아리밖에 안 오는 실개천에서 만나 격렬하게 충돌했다.

“죽여라!”

“우와아아!”

퍼걱.

슈걱.

이미 피를 봐서 잔뜩 흥분한 양쪽은 서로 엇갈리는 것과 동시에 상대를 죽이기 위해 마구 병장기를 휘둘러 댔다.

채챙! 챙! 챙!

“꾸엑.”

“컥.”

시뻘건 선혈과 함께 터져 나오는 비명에 살육의 공포가 뒤섞이면서 전장은 전쟁의 광기에 휩싸였다.

비록 같은 왜국 사람이었지만 죽이지 않으면 내가 먼저 죽는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필사적으로 손에 든 무기를 휘둘렀다.

사람을 한 명 베어 넘길 때마다 손끝에 와 닿는 끔찍한 감촉에 진저리가 처졌다.

하지만 도망치고 싶어도 돌아갈 곳은 없었고,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겨우 버티고 서 있으면 그 틈을 노리고 덮쳐 오는 날붙이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싸워야만 했다.

양쪽 다 같은 왜국 사람이었지만 정말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서로 피 터지게 격전을 벌였다.

특히 막부군 병사들은 목숨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자유도 걸려 있었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덤벼들었다.

시신으로 바닥이 가득 찼고 흘러내린 피가 강물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걱정과 달리 포로들이 잘 싸우는데요.”

“그렇군.”

부관의 말처럼 막부군 포로들이 분전을 펼치고 있었지만 흑치영은 어차피 한번 쓰고 버릴 소모품이라고 생각하는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이쯤에서 기병대를 투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잠시 고심하던 흑치영은 이내 머리를 내저었다.

“조금 더 기다려 봐.”

“적 측면이 훤히 다 드러나 있는 지금이 적기입니다.”

“나도 알아.”

“그런데 왜……?”

“아직 적군도 기병대를 내보내지 않은 데다 무엇보다 대놓고 막부에 반기를 든 놈치고 너무나도 단조로운 공격이 어쩐지 의심스러워.”

“그럼 뭔가 숨겨 둔 패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글쎄, 그건 조금 더 두고 보면 알겠지.”

평소 돌격대장처럼 힘으로 밀어붙이는 걸 선호하던 것과 달리 흑치영이 아주 신중한 태도를 보이자 부관도 좀 더 긴장하며 전장을 주시했다.

그런 가운데 전투는 계속 이어져서 숫자는 적지만 강력한 포격 지원을 등에 업은 포로병단이 조금씩 우세를 점해 나가자 적진이 뭔가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쯧. 조선군도 아니고 비겁한 배신자들한테 밀리다니 이게 무슨 꼴이야!”

얼굴을 굳힌 타다요시가 혀를 차며 질책을 하자 주위에 있던 가신들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한심스러운 모습에 짜증이 났지만 그가 봐도 이제 지자와 황자총통까지 가세해 무려 육십 문에 달하는 화포를 쏴 대는 조선군의 화력은 무시무시했기에 타다요시는 길게 화를 내지 않고 시선을 돌려 옆에 있는 미야무라를 봤다.

“조선군 기병대를 상대할 때 쓰려고 했지만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지. 미야무라.”

“말씀하십시오, 주군.”

“준비한 걸 사용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미야무라가 손짓을 하자 뒤편에 있던 신호수가 붉은색 삼각 깃발을 꺼내 좌우로 크게 흔들었다.

그러자 본진 한쪽에 늘어선 병사들이 좌우로 비켜서자 타다요시가 지금까지 숨겨 두고 있던 비장의 패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조선군한테도 아주 익숙한 물건이었는데 바로 화포였다.

일명 컬버린Culverin이라고 불리는 서양식 대포로 뱀처럼 앞으로 가늘고 긴 포신을 가진 것이 특징이었다.

사정거리는 삼백에서 칠백 보 정도였는데 조선군이 주력으로 쓰는 천자총통과 비교해도 그다지 떨어지지 않았다.

보통 포신 크기에 따라 세 가지로 나뉘는데, 가장 위력이 큰 것은 그레이트 컬버린Great Culverin이었다.

강선을 파지 않아 천자총통에 비해 사정거리가 조금 적고 위력도 약했지만 바퀴가 달린 포가를 써서 이동이 편했고 무엇보다 조선군에 없는 각도 조절 장치가 있어서 조준을 끝냈더라도 각도를 조정해 탄착점을 수시로 바꿀 수 있었다.

평소 서양 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타다요시가 나가사키에 들어온 화란 상인에게서 거액을 주고 막부 몰래 구입한 것으로 무려 열 문이나 됐다.

“어디 한번 당해 봐라. 발사!”

정면으로 포구를 드러낸 컬버린 열 문이 일제히 불을 뿜었고 포물선으로 그리며 날아간 포탄은 타다요시군을 한참 밀어붙이며 기세를 올리고 있던 포로병단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쉬이이익! 콰꽝!

꽈아앙!

기존에 쏘던 단순한 쇠구슬이 아니라 컬버린에서 발사된 포탄은 지상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요란한 폭음을 내며 사방으로 파편을 뿌렸다.

“커컥.”

“끄헉!”

파편에 맞은 병사들은 너덜너덜 걸레 조각처럼 온몸이 찢겨 나갔고 부상을 입은 이들은 바닥에 쓰러져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악.”

“도, 도와줘!”

떨어져 나간 왼쪽 팔을 붙잡고 병사가 절규했다.

아직 앳된 기색이 남아 있는 얼굴은 절망으로 일그러졌고, 전신은 완전히 피로 뒤덮여 있어 온통 새빨갰다.

그야말로 지옥의 악귀처럼 보이는 그 모습을 보고 주위에 있던 병사들은 뒤로 물러설 생각조차 못한 채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전신을 덜덜 떨었다.

분수처럼 사방으로 흩뿌려진 핏방울이 땀과 섞여 비릿한 철 냄새를 풍겼고, 팔을 붙잡고 통곡하는 병사의 잘려 나간 왼쪽 어깻죽지 아래로 너덜너덜하게 붙어 있는 살점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당장이라도 눈을 돌리고 싶을 정도로 오금이 저렸지만 어쩐 일인지 손발이 공포로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연이어서 날아온 포탄에 한창 왜군을 몰아붙이던 포로병단 선두는 완전히 생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그걸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지켜본 흑치영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화포를 사용하다니.”

서양 대포인 컬버린을 하나도 아니고 열 문이나 보유한 것도 놀라웠지만 그것보다 단단한 쇠구슬에 불과한 기존 포탄이 아닌 상대편에 더욱 큰 피해를 안겨 주는 파편형 포탄을 쓴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사이에도 적군이 쏜 포탄은 계속해서 날아와 막부군 포로들로 이루어진 보병대에 작렬했고 흑치영은 다급한 목소리로 부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당장 적 화포들을 제압하라!”

“옛.”

“그리고 기병대는 전장을 후회해 적 본진을 친다. 서둘러라!”

전령들은 황급히 말을 몰아 흑치영의 명령을 전달했고 이내 조선군 화포의 대응 포격이 시작됐다.

“쏴라!”

각도를 올려 사정거리를 최대로 늘린 조선군 포수들은 심지에 불을 붙여 적진으로 포탄을 쏘아 보냈다.

“포, 포탄이다!”

“어서 피해.”

한참 포탄을 재장전하고 있던 적군 포병들은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며 포탄이 날아오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 손에 든 걸 다 내팽개치고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꽈꽝! 쿵! 꽝!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진동하고 사방에서 파편과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미처 피하지 못하고 폭발에 휘말린 적병들은 사지가 갈가리 찢겨 나갔다.

땅이 움푹움푹 파이고 화염과 폭발음이 일대를 가득 메우면서 적 포대가 있던 곳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사정거리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던 적군에게는 날벼락이 따로 없었는데, 개량을 거친 천자총통의 가공할 위력과 목표를 정확하게 타격하는 노련한 조선군 포수들의 실력이 제대로 빛을 발한 결과였다.

순식간에 적 포병대를 무력화시킨 것에 이어서 홍종수가 이끄는 거란 출신 기병 오천 명이 일제히 땅을 박차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거치적거리는 것들은 모조리 다 짓밟아 버려라. 돌격!”

“우오오!”

“이랴!”

두두두두.

오천 명의 기병이 대형을 갖춰 일제히 돌격하는 모습은 엄청난 장관이었는데 마치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자 타다요시도 부랴부랴 기병대를 출전시켰지만 숫자는 일천 명이 채 안 됐다.

거기다가 여기저기에서 끌어모은 병력이라 조선군과 달리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없고 대형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 한눈에 봐도 엉성했다.

양측은 급격히 가까워졌고 이내 조선군 기병대가 만든 삼각 대형 맨 앞에 선 홍종수가 한쪽 손에 든 장창을 옆구리에 딱 붙이며 크게 외쳤다.

“거창!”

뒤를 따르던 조선군 기병들은 홍종수가 한 것처럼 장창을 겨드랑이에 끼고 단단히 힘을 줬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양군 선두가 서로 교차하는가 싶더니 거세게 충돌했다.

콰콰쾅!

서로가 부딪치는 순간 적 기병들은 길이가 훨씬 긴 조선군의 장창에 꿰뚫려 시뻘건 피를 뿌리거나 그대로 낙마했다.

요행히 급소를 빗나가 큰 부상을 입지 않은 적 기병들은 빠르게 달리는 말에서 떨어진 충격에 목뼈가 부러지거나 말발굽에 밟혀 절명했다.

“으아악.”

이히히힝.

“아, 안 돼!”

빠각.

으쩍.

뒤에서 계속해서 밀려든 군마들은 쓰러진 자들을 짓밟아 뭉개 버렸고 그로 인해 바닥은 선혈과 살점으로 온통 더럽혀졌다.

하지만 상대도 그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는데 장창을 피하거나 쳐 낸 적 기병들은 아군에게 바짝 붙어 손에 든 장검을 휘둘렀다.

“크학.”

푸르릉.

채챙.

거친 말 투레질 소리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비명에 섞여 전장 가득 울렸다.

분전에도 불구하고 왜군 기병들은 수적 열세와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는 조선군의 거센 공세에 그대로 삼켜졌다.

그렇게 상대를 짓밟아 버린 조선군 기병대는 지체 없이 적 본진을 향해 말을 내달렸다.

“적 지휘부를 쓸어버려라!”

입고 있는 갑옷 여기저기에 적군의 피를 묻혀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 같은 모습을 한 홍종수가 부러진 장창 대신 뽑아 든 검 끝으로 적 본진을 가리키면서 외치자 뒤따르던 부하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기세를 올렸다.

“우와아아!”

“이, 이런!”

숫자는 조선군보다 적었지만 대부분 일반 기병이 아니라 왜국에서는 지배 계층에 속하며 무예를 익히는 것이 일인 무사들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이기지는 못해도 충분히 시간을 끌면서 상대의 전력을 소모시켜 줄 거라 생각했던 기병대가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너지자 타다요시는 큰 충격을 받았다.

말발굽 소리를 울리면서 빠르게 다가오는 조선군 기병대의 모습에 당황한 타다요시는 가신들을 보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어서 저놈들을 막아!”

“예, 옛.”

말을 더듬으며 대답한 미야무라는 직접 본진에 남아 있는 조총병들을 독려해 황급히 사격 대형을 갖췄다.

“삼 열 사격 대형으로! 서둘러라.”

“빨리 와!”

무사들의 다그침을 들으며 앞으로 나온 조총병들은 허겁지겁 사격 대형을 갖췄다.

이백 명씩 삼 열로 늘어서서 돌아가며 연속 사격을 가하는 대형으로 제대로만 된다면 조선군 기병대에 큰 타격을 안겨 주면서 돌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급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아직 제대로 대형을 갖추지 못한 데다 무엇보다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으며 노도처럼 달려오는 조선군 기병대의 모습에 적 조총병들은 싸워 보기도 전에 위축됐다.

미야무라도 조총병들이 긴장한 걸 느끼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쳤다.

“조총으로 조선군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맞서 싸워라!”

미야무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군 기병대와 마주 선 조총병들은 좀처럼 두렵고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조총을 든 손에는 식은땀에 맺혔고 마음은 급한데 몸이 떨려 장전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으음.”

눈가를 찌푸린 미야무라는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고 했지만 어느새 홍종수가 이끄는 조선군 기병대가 사정거리 안까지 들어왔기에 황급히 사격 명령을 내렸다.

“쏴라!”

타탕! 탕! 탕! 탕!

거친 총성과 함께 타다요시군의 조총이 불을 뿜었다.

일직선으로 날아간 총탄은 조선군 기병대를 덮쳤다.

피슝.

“큭.”

“아악!”

오른쪽 손목에 찬 원형 방패로 최대한 몸을 방어했지만 틈을 비집고 들어온 총탄에 기병들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선두에서 부하들을 이끌던 홍종수도 아슬아슬하게 총탄이 귓불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나마 적 조총병들이 겁을 먹어 제대로 조준을 하지 못해 상당수가 엉뚱한 곳으로 빗나갔기에 피해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됐건 형제 같은 부하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구는 걸 본 홍종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박살 내 버려라!”

“우오!”

뒤따르던 부하들도 총격에 주춤하기는커녕 오히려 전의를 불태우면서 말 옆구리를 발로 차 속도를 올렸다.

두두두두!

그러자 당황한 건 적 조총병들이었다.

“뭐, 뭐야?”

“히익.”

“어서 조총을 쏴!”

미야무라와 무사들이 큰 소리로 다그치며 조총병들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공포심은 급격하게 확산됐다.

급기야 두려움을 이겨 내지 못하고 가지고 있던 조총을 내팽개치며 무단으로 대열을 이탈해 도망치는 병사까지 생겨났다.

“이대로 있으면 다 죽을 거야.”

“도망쳐야 돼!”

“자리를 지켜라!”

무사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대형을 지키도록 독려했지만 이미 공포에 질린 조총병들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미야무라가 검으로 도망병들을 베어 죽이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적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잔뜩 독이 오른 조선군 기병대가 들이닥쳤다.

콰콰쾅!

“이얍!”

서걱. 푹.

“꾸엑.”

“컥.”

거칠게 밀고 들어온 조선군 기병대는 거침없이 장검을 휘둘렀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피가 뿌려지며 적군 전열이 무너져 내렸다.

“죽어라!”

휘익.

군마에 탄 채 홍종수가 내려 그은 검에 등을 보이면서 달아나던 조총병은 비명을 토해 내며 그대로 엎어졌다.

아까 충돌했던 기병까지 합쳐 벌써 열 명이 넘는 적을 죽인 홍종수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손에 든 채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쪽에 타다요시를 비롯한 적 지휘관들이 몰려 있는 걸 보고 곧장 말을 몰아갔다.

“저기 적 지휘관들이 있다. 날 따르라!”

“이랴!”

“하.”

그러자 일부 조총병들을 상대하고 있는 병력을 제외한 나머지 기병들이 얼른 홍종수 뒤로 따라붙었다.

“마, 막아라!”

“어딜!”

채챙! 챙! 챙!

미야무라가 남아 있는 병사들을 동원해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홍종수와 거란 출신 기병들은 눈에 띄는 적들을 가차 없이 베어 넘기거나 말발굽으로 짓밟아 버리며 적 지휘부를 향해 돌격했다.

그 모습에 타다요시는 크게 당황했다.

“저, 저…….”

“주군, 어서 피하셔야 됩니다.”

다른 때 같으면 무슨 소리냐며 화를 냈겠지만 타다요시도 눈이 있었기에 자신을 노리고 흉신 나찰처럼 달려드는 조선군 기병대의 모습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성으로 퇴각한다. 후퇴 나팔을 불어라!”

“옛.”

뿌우웅. 뿌우웅.

곧바로 뿔 나팔 소리가 울렸고 타다요시는 측근들과 함께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황급히 전장을 탈출하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걸 그냥 두고 볼 조선군이 아니었는데 홍종수와 부하들은 다른 잔챙이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직 적 지휘부만 노렸다.

“절대 놈을 놓쳐서는 안 된다!”

“잡아라.”

호위 무사들이 앞을 막아서며 어떻게든 타다요시가 도주할 시간을 벌어 보려고 했지만 헛된 노력이었다.

조선군 기병대라는 거센 파도에 휩쓸린 호위 무사들은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중에는 타다요시의 최측근 무장인 미야무라도 있었는데 홍종수가 내지른 검에 심장이 관통당해 힘없이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안장 옆에 매달아 둔 예비 장검을 꺼내 든 홍종수는 부하들을 이끌고 악착같이 타다요시를 쫓아갔다.

그 기세에 혼비백산한 타다요시는 필사적으로 타고 있는 말 엉덩이에 채찍질을 하며 달아났다.

“이랴! 이랴!”

하지만 조선군 기병대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는데 얼마 못 가서 거리를 좁혀 온 홍종수와 부하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좋은 말로 할 때 순순히 항복해라!”

“이익!”

냉소를 짓고 선 홍종수의 말에 타다요시는 이를 부드득 갈았지만 사방을 둘러싼 조선군 기병들이 언제든 덤벼들 것처럼 검을 겨누고 있자 이내 힘없이 고개를 아래를 떨궜다.

그 자리에서 무장해제를 당한 타다요시와 측근들은 포로 신세가 됐다.

그러는 사이에 보병들 간의 전투도 모두 끝나 있었다.

타다요시군이 컬버린을 쓰자 잠시 주춤했던 막부군 포로들은 적 지휘부가 기병대에 유린되면서 혼란에 빠지자 그걸 놓치지 않고 강하게 압박해 상대를 패퇴시켰다.

이겼지만 밀고 당기며 악전고투를 펼쳐 피해도 컸는데 무려 삼천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도사 번주인 타다요시를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오. 그래.”

“지금 홍 장군님이 직접 본진으로 압송해 오고 있답니다.”

부관의 이야기에 흑치영은 얼굴 가득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홍 장군이 큰 공을 세웠군.”

“그러게 말입니다.”

“포로병단의 피해는 얼마나 되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흑치영이 묻자 부관은 약간 얼굴을 굳히며 대답했다.

“아직 정확한 집계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래도 적군이 비장의 수로 숨겨 뒀던 서양 대포에 당한 것이 컸습니다.”

아군 포병대의 신속한 대처로 바로 제압을 했지만 그사이 포로병단은 최소 백여 발의 포탄을 온몸으로 견뎌 내야 했다.

“으음.”

낮게 침음성을 흘린 흑치영은 이내 부관을 보며 말했다.

“어찌 됐건 우리와 함께 싸웠으니 차별 대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부상병을 치료해 주라고 하게. 그리고 죽은 자들은 한데 모아 후하게 장례도 치러 주고.”

“알겠습니다.”

“서둘러 전장 정리를 하고 홍 장군한테 기병 일천 기를 이끌고 먼저 가서 고치 성을 장악하라고 해.”

“옛.”

지시를 받은 부관이 전령에게 명령을 전달하는 동안 흑치영은 곳곳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화약 냄새가 가득한 전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날 오후 늦은 시간 흑치영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 부대가 도사 번의 영주성인 고치 성 아래 마을에 들어섰다.

“조용하군.”

지나다니는 행인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고양이나 개 같은 동물까지도 전혀 보이지 않는 스산한 거리를 보고 군마에 탄 흑치영 장군이 중얼거렸다.

스산한 바람만이 불어오는 것이, 마치 유령 마을 같은 모양새였으나, 이따금씩 덧문이 덜컥거리는 소리나 좁은 창문 틈새로 이쪽을 훔쳐보는 시선이 느껴지는 걸 보면, 다들 집 안에 숨어 조선군이 지나갈 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적진 한가운데이니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

흑치영 장군은 행여나 민간인을 괴롭히는 일이 없게 병사들을 단속하도록 휘하 군관들에게 미리 단단히 일러둔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며 해자에 놓인 다리를 건너 고치성의 정문을 당당하게 통과했다.

본대보다 앞서 달려와 미리 성을 장악하고 있던 홍종수 장군이 거란 출신 기병 몇 명을 이끌고 흑치영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장군.”

“저항은 없었나?”

“소수의 병력이 남아 있었지만 저희가 오는 걸 보고는 모두 달아나 버렸습니다.”

“다행이군.”

흑치영 장군은 무뚝뚝한 얼굴에 보기 드문 미소를 매달고 홍종수와 인사를 나눴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 성 내부를 살펴보니 전투가 없어서 그런지 문짝 하나 부서진 것 없이 다 말짱했다.

병사들이 흙발로 밟고 다닌 덕분에 다다미 바닥이 더럽혀져 있는 것을 제외하면 누구도 하룻밤 새에 성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을 모를 정도였다.

“창고는 이쪽입니다.”

홍종수는 흑치영 장군을 이끌고 본성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커다란 창고로 안내했다.

사국의 패자인 도사번의 본성답게 족히 십여 개는 될 법한 커다란 창고 건물이 주르륵 늘어서 있었는데, 입구에는 사람 주먹보다 더 큰 자물쇠가 달려 있고 벽 위쪽에 환기를 위한 작은 창 하나만 붙어 있을 뿐이어서 열쇠가 없으면 출입하기가 매우 힘들어 보였다.

“열쇠는?”

“난리통에 어디 갔는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

“하지만 뭐, 상관없지 않습니까.”

홍종수는 어깨를 으쓱하고 부하에게 턱짓을 했다.

언제 준비했는지 커다란 도끼를 들고 병사가 나타나자, 홍종수는 명령을 해 주길 바라는 듯 흑치영 장군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부숴라.”

“예!”

퍼억! 퍽!

도끼로 이음새 부분을 몇 번 내리치자, 덜컥하는 소리가 나면서 철 자물쇠가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그리고 문 한 짝에 각각 병사 한 사람이 달려들어 양옆으로 활짝 열어젖혔다.

끼이익.

“오오.”

쌀을 보관하는 곳간인지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을 열자마자 누런 곡식 가마니가 바닥부터 천장까지 닿을 기세로 잔뜩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차례차례로 다른 창고들을 다 열어 본 결과, 흉년을 대비해 축적해 놓은 쌀이나 보리 같은 곡식들이 가장 많았고, 그다음으로 무명이나 비단 같은 천, 또는 도자기를 비롯한 귀금속 종류도 속속들이 발견되었다.

“개미처럼 잘도 쌓아 놓았군요.”

“막부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사국의 패자였으니 이 정도 재물은 당연하겠지.”

꽤 신난 듯한 홍종수와는 달리 흑치영 장군은 별반 달라지지 않은 표정으로 쌓여 있는 재물들을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본국으로 운반해야 될 것들이니 하나도 빠짐없이 목록을 작성하고 잘 밀봉해 놓도록.”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이걸 다 옮기려면 손이 많이 가겠습니다.”

“그래도 우물쭈물할 시간 따윈 없으니 최대한 빨리 작업을 진행시키게.”

“맡겨만 주십시오.”

홍종수 장군이 부하들을 이끌고 그 자리를 떠나자 흑치영 장군은 널찍한 마당 한복판에 서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한 발짝 뒤에 조용히 서 있는 부관을 보며 말했다.

“지금 즉시 에도에 계시는 주상 전하께 장계를 띄우게.”

“뭐라고 올릴까요?”

“잡설은 다 치우고 그냥 고치 성에 삼족오 깃발이 내걸렸다고만 적게.”

“알겠습니다, 장군.”

부관의 대답을 들으며 다시 고개를 돌린 흑치영의 시선에는 성문 위에 걸린 삼족오 깃발이 보였다.

흑치영의 지시대로 고치 성 창고에 쌓여 있던 재물은 하나도 빠짐없이 목록을 작정한 뒤 곧바로 대기하고 있던 조선군 수송선으로 옮겨졌다.

양이 어찌나 많은지, 많은 인력을 동원하고도 꼬박 이틀이 걸렸다.

쌀이 오천 석이나 됐고 포목 사천 필에 철괴는 열네 관이나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성 깊숙한 곳에 위치한 비고에서 은자가 십만 냥이나 나와서 흑치영과 조선군 장수들을 놀라게 했다.

전부 타다요시가 막부와 한판 자웅을 펼치려고 수년 동안 은밀히 마련해 둔 재물로, 애써 모아 두고도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조선에 고스란히 다 갖다 바치게 됐다.

그렇게 고치 성을 점령한 흑치영은 며칠 뒤 병력을 세 개로 나눠서 나머지 지역으로 보내 도사 번을 완전히 장악했다.

주위에 있던 번들은 사국의 패자로 군림하던 도사 번과 야마우치 가문이 너무나도 힘없이 무너지자 화들짝 놀라 행여나 조선군이 자신들도 공격할까 봐 허둥지둥 사신과 공물을 보내왔다.

흑치영은 이들을 포로가 된 타다요시와 그 측근들과 함께 배에 태워 도현이 있는 에도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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