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경 풍운(1) (82/104)

북경 풍운(1)

어두운 밤, 에도 성 천수각 안에 등불을 밝히고 앉은 도현이 앞에 있는 외무차관 이척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영주들이 보낸 사신은 모두 객사로 돌아갔나?”

“예.”

“지금쯤 이에미쓰가 잔뜩 애가 닳아 있겠군.”

“그렇지 않아도 막부 가신인 미우라가 절 만나자고 하는 걸 바쁘다고 거절했습니다.”

이척의 대답에 도현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잘했어. 지금 급한 건 막부니까 서둘 필요 없어.”

도현의 말대로 사국에 위치한 영주들이 막부가 아닌 도현을 찾아가 공물을 바치자 쇼군인 이에미쓰는 크게 분노하는 한편 행여나 조선이 약속을 어기고 도사 번에 아예 주저앉아 버릴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막부는 바로 턱밑에 날카로운 비수를 놔두고 있는 형세가 되는 거였다.

“여차하면 우리가 도사 번을 계속 장악하고 있을 것처럼 분위기를 풍겨서 이에미쓰가 안달 나게 만들어 봐.”

“아주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도록 해 놓을 테니 맡겨만 주십시오.”

“그래. 아, 참, 그리고 흑치 장군이 도사 번 영주인 타다요시도 함께 보내왔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아군 병사들이 피를 흘리며 잡아 온 놈이니 아주 비싸게 받고 넘기도록 해.”

“염려하지 마십시오.”

밑에 있으면서 점점 닮아 가는지 도현의 말에 이척이 음흉한(?) 표정을 짓자 한쪽에 서서 지켜보던 칠현이 절레절레 머리를 내저었다.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미우라가 이척을 찾아왔다.

이른 아침부터 왜 그를 찾아왔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이척은 일부러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는 떼며 상대를 맞이했다.

“공께서 이렇게 이른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미우라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따지듯 이야기를 했다.

“사국에 있는 영주들한테 공물을 받았다던데 어찌 조선이 이럴 수가 있소이까!”

“저들이 공물을 가져와 바친 건 맞지만 미우라 공께서 왜 이렇게 역정을 내시는지 모르겠군요.”

그러자 미우라는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탁자를 세게 내려치며 언성을 높였다.

탕!

“모르는 척하지 마시오! 사국 영주들한테 충성 맹세를 받아 은근슬쩍 도사 번을 차지하려는 비열한 술수가 아니오!”

상대의 말에 이척도 정색을 했다.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정곡이 찔리니 할 이야기가 없소이까. 불과 얼마 전에 서로 약조를 해 놓고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이런 치사한 짓을 하다니 이러고도 상국이라고 할 수가 있소!”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아국에서 공물을 바치라고 요구한 것도 아니고 사국 영주들이 스스로 여기까지 가져온 걸 우리한테 따지면 어쩌자는 겁니까! 그리고 영주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 건 막부에서 제대로 지방을 통제하지 못하니까 이런 것 아니겠소. 정말 적반하장賊反荷杖이 따로 없구먼.”

이척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자 미우라는 괜히 설레발을 친 것이 아닌지 멈칫하다가 이내 다시 의심에 찬 시선으로 상대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조선군이 도사 번에 계속 주둔할 의사가 없다는 걸로 받아들여도 되겠소?”

“아국은 처음부터 도사 번 따위에 관심도 없소이다. 하지만…….”

“……!”

내심 안도하던 미우라는 이척이 뭔가 단서를 붙이려고 하자 살짝 미간을 모았다.

“아직도 아국과 막부가 합의한 조약을 이행하지 않고 버티는 영주들이 있으니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 당분간 이대로 병력을 주둔시킬 생각이오.”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미우라가 발끈했다.

“그건 말이 다르지 않소!”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것처럼 흥분한 미우라와 달리 이척은 느긋한 얼굴로 말했다.

“도사 번에 아주 주저앉겠다는 것도 아니고 체결한 조약이 모두 성실히 이행될 때까지만 머물러 있겠다는데 그게 뭐가 약속을 어긴 것인지 모르겠군요.”

“비협조적인 영주들을 압박하는 거라면 에도에 있는 병력으로도 충분한데 굳이 도사 번을 점령하고 있겠다는 건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오!”

“미우라 공은 외교에는 뛰어날지는 몰라도 군사적인 문제는 잘 모르시는 것 같군요.”

“뭐요!”

“멀리 떨어진 에도에 있는 것보다 이렇게 떡하니 아국 군대가 지방 번을 하나 장악하고 있으면 영주들이 가지는 부담감이 더 클 수밖에 없지 않겠소이까. 이번에 사국 영주들이 허둥지둥 사신 보내온 것만 봐도 그 효과를 바로 알 수 있겠지요.”

“그건…….”

확실히 에도 근처는 대부분 막부에 충성하는 번들이었기에 조선군이 도사 번을 점령하고 있는 것이 타다요시처럼 반골 기질이 강한 영주들에게 더 강한 압박이 되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조선 측의 논리를 인정해 주면 자칫 장기 주둔의 빌미가 될 수도 있었기에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지방 영주들을 압박하는 건 막부 병력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소이다.”

그러자 이척은 팔짱을 끼며 앞에 있는 미우라를 쳐다봤다.

“정말 막부에 그만한 병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물론이오.”

미우라가 자신 있게 대답하자 이척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짓고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스네시게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남아 있는 병력의 전부인데 그거로는 우리가 철수한 다음에 에도를 지키기에도 부족할 텐데요. 그래서 아국 병력 일부를 잔존시키기로 했지 않습니까.”

순간 말문이 막힌 미우라는 이내 억지를 피우듯 입을 열었다.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문제니 조선 측에서 신경 쓸 필요가 없소이다.”

자세를 바로 한 이척은 얄밉게 한쪽 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죠. 막부가 흔들리면 조약을 제대로 이행하기 어려워지니 아국과도 분명히 관련이 있지요.”

“억지요!”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마시고 현실을 직시하시지요. 당장 아국이 도사 번을 넘겨준다고 해도 막부에서는 그걸 감당할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막부를 무시하는 거요!”

“무시가 아니라 현실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익.”

미우라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화난 표정을 짓자 이척은 비웃는 듯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불안하시면 미적거리는 지방 영주들을 다그쳐서 약탈해 간 물품과 아국 백성 들을 빨리 내놓게 만드시든지요. 그럼 막부에서 붙잡아도 우리가 알아서 철수를 할 겁니다.”

이척의 이야기에 미우라는 와락 얼굴을 구겼다.

따지러 왔다가 오히려 비아냥거리는 소리만 잔뜩 들은 미우라는 아무런 소득 없이 쓸쓸히 돌아갔다.

그래도 한 가지 얻은 것이 있다면 조약 내용이 다 이행되면 조선군이 도사 번에서 물러난다는 거였다.

하지만 이것도 따로 문서를 작성하거나 최종 결정권자인 도현이 확답해 준 것이 아니라 외무부의 그것도 차관이 말한 거였기에 완전히 믿기는 어려웠다.

더군다나 우려한 대로 조선군이 도사 번에 장기 주둔할 것을 은근히 내비쳤기에 막부는 그야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막부 측에서 항의를 했지만 조선군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이에미쓰는 조선군을 철수시키고 도사 번을 접수하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약탈 물품 회수하고 노예로 끌려온 조선인들을 되돌려 보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판단에 총력을 다해 비협조적인 지방 영주들을 압박했다.

이에미쓰가 보다 강경한 내용의 친서를 보내고 그래도 말을 안 듣는 영주는 에도 근처에 머물고 있는 스네시게군을 동원해 징벌할 거라며 경고했다.

그러자 가뜩이나 도사 번이 조선군에 점령됐다는 소식에 몸을 사리며 이리저리 눈치를 보고 있던 영주들은 더 버티지 못하고 하나둘 막부의 지시에 따랐다.

잠시 정체를 보이던 조약 이행은 다시 활기를 띠며 약탈 물품을 잔뜩 실은 수레와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들이 줄을 지어 에도로 이동해 왔다.

이런 가운데 조선군은 포로로 잡고 있던 타다요시와 그 측근들을 모두 막부에 넘겨줬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는데 공식적으로 막부에 반하는 행동을 한 이들을 대신 처단해 준 것에 대한 사례라고 그럴싸하게 포장했지만, 은자 일만 냥과 유황 서른 관을 몸값으로 받아 챙겼다.

막부는 이들을 넘겨받자마자 화근을 제거하고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지방 영주들에게 경고의 의미로 모두 효수형에 처한 뒤 에도 성 밖에 목을 내걸었다.

왜국의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한양을 오래 비워 둘 수 없었던 도현은 도총관 엄황에게 뒷일을 맡기고 근위대 병력과 함께 배를 타고 먼저 조선으로 귀환했다.

근위대 병사들의 삼엄한 경계가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이른 아침부터 조정 대소 신료들이 마포 선착장에 나와 있었다.

뒷짐을 진 채 한참 강을 쳐다보던 총리대신 박황은 고개를 돌려 함께 있는 국방대신 임경업에게 물었다.

“이보게, 고송孤松.”

“예, 대감.”

“전하께서는 도착하시려면 아직 멀었는가?”

“제물포에서 아침 일찍 배를 띄웠다고 봉화가 왔으니 이제 곧 도착하실 겁니다.”

“그렇구먼. 아, 참, 전하께서 환궁하시는 길은 문제없이 준비를 철저히 해 놨겠지.”

임경업은 표정을 살짝 굳히며 대답했다.

“예. 근위대뿐만 아니라 경기도 삼 군단에서도 보병 천인대 두 개를 차출해 물 샐 틈 없이 경계를 펼치고 있습니다.”

“잘했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두 번 세 번 확인을 해야 될 것일세. 절대 지난번과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서는 안 돼.”

“물론입니다.”

조정의 이인자인 박황이 입에 거론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하는 일은 바로 일부 불만 세력에 의해 벌어진 도현의 저격 사건이었다.

다행히 도현이 곤룡포 안에 갑옷을 입고 있어서 크게 다치지 않았고 위기를 기회로 살려 슬기롭게 잘 이겨 냈지만 자칫 역도들이 의도한 대로 시해라도 당했다면 조선이 크게 요동쳤을 엄청난 일이었다.

모든 조정 대신들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던 이 사건 이후로 도현에 대한 경호는 한층 더 강화됐고 오늘처럼 외부에서 공개적인 행사가 열릴 때면 근위대는 물론이고 군부 전체가 신경이 아주 날카로워지며 초긴장 상태에 들어갔다.

지금도 도현이 도착할 마포 나루 주위를 근위대 병력이 완전히 에워싸고 여기서 대궐까지 이어지는 길도 철통같은 경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햇볕을 가리기 위해 쳐 놓은 천막 아래에서 대신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기다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하류 쪽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저기 전하께서 타신 어선御船이 보입니다!”

“어디?”

그러자 대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돌아갔고 이내 돌아쳐 나오는 강줄기에서 근위선인 봉황함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이군. 다들 전하를 맞이할 준비를 하세.”

“예.”

다들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드디어 봉황함이 천천히 속도를 줄이고 선착장 옆에 커다란 선체를 가져다 댔다.

대기하고 있던 위사들이 서둘러 잔교를 설치하고 대신들이 양쪽 옆에 나란히 도열해 서서 도현이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

이내 금빛 곤룡포를 걸친 도현이 갑판에 모습을 드러내고, 잔교 위로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주상 전하를 뵙습니다.”

“개선을 감축드리옵니다.”

대신들이 모두 한데 입을 모아 목소리를 드높였다.

그리고 총리대신인 박황이 대표로 나서서 깊이 허리를 숙이며 도현에게 인사를 올렸다.

“전하, 건강해 보이시는 것 같아 다행이옵니다.”

“고맙네.”

“왜국에서의 활약은 이미 장계를 통해 다 전해 들었사옵니다. 중전 마마는 물론이고, 조선의 모든 백성들이 전하의 용감한 활약을 듣고 다들 기뻐하고 있습니다.”

도현은 쑥스러운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대신들을 둘러보았다.

“비단 나 혼자만의 공이라고 할 순 없소. 목숨을 걸고 싸워 준 우리 군사들, 그리고 뒤에서 든든하게 한양을 지켜 준 경들이 아니었다면 어찌 왜국 정벌을 성공시킬 수 있었겠나.”

그러고 나서 도현은 거기 모인 사람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췄다.

“정말 수고들 하셨소.”

그 한마디에 잔뜩 긴장해 있던 주변 분위기가 눈 녹듯 사르르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아버지에게 칭찬 받은 어린애처럼 무언가 인정받은 느낌이 드는 것은 물론 그간의 피로나 불안, 고생 같은 것이 단번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신하들에게 이만큼이나 큰 영향력을 끼치는 군주가 과연 몇이나 있으랴.

“전하, 마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근위대 사령 박영식이 다가와 말했다.

길 끝에는 큼직한 육두마차가 있었는데, 바깥은 왕이 타고 다니는 것임을 암시하는 봉황과 왕실 문장이 새겨져 있었고 마차를 이끄는 말들은 특별히 지구력과 속력이 뛰어난 것들로 엄선되었으며, 마차 안은 솜을 잔뜩 넣은 푹신한 의자와 비단 천으로 장식되어 있어 자갈밭을 달려도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이 최대한 편하게 지낼 수 있게 꼼꼼히 설계된 물건이었다.

본래는 어가라는 것을 사용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무게가 많이 나가는 것을 어깨에 지고 다녀야 하는 가마꾼에게 못할 짓이라 생각한 도현이 직접 명하여 새로 제작하였는데, 실용성과 기능성을 중시하는 그의 취향이 다분히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벌써 다 완성되었나?”

“예. 장인들이 스스로 회심작이라고 장담하였으니 마음에 드실 것입니다.”

“그렇군.”

들뜬 눈빛으로 마차를 살펴본 도현은 먼저 올라탄 후 총리대신 박황에게도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제가 어찌 감히…….”

“내가 괜찮다는데 무슨 상관인가. 가만히 입 다물고 앉아 있는 것도 지루하니 이리 와서 말동무나 좀 해 주게.”

계속되는 재촉에 주저하던 박황도 결국 마차에 올라탔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마차 문을 닫고 호위 태세가 완벽한 것을 재차 점검한 박영식이 신호로 손을 들어 올리자 완전무장하고 군마에 탄 위사 수십 명이 주위를 둘러싸며 마침내 궁궐로 향하는 긴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각따각.

흔들리는 마차의 움직임을 느끼면서 자리에 앉아 있던 도현은 맞은편에 있는 총리대신 박황을 보며 입을 열었다.

“다시 하는 말이지만 짐이 없는 동안 조정을 잘 이끌어 줘서 고맙네.”

그러자 박황은 황공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니옵니다. 부족한 제가 전하의 치세에 누를 끼친 건 아닌지 걱정스러울 뿐입니다.”

“겸손하기는, 경이 각부의 일을 꼼꼼히 살피고 짐의 지시를 성실히 했다는 건 궁내부와 주작단을 통해 다 들었네.”

“그러셨사옵니까.”

한양과 왜국은 수천 리 이상 떨어져 있었지만 도현은 그의 수족인 궁내부와 주작단을 통해 수시로 보고를 받으며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조정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해 예전 김자점 일파처럼 누군가 반역을 기도했다면 그동안 비상태세를 유지하고 있던 근위대와 군부에 의해서 바로 진압됐을 것이다.

도현을 지지하는 왕당파의 수장으로 애초에 그를 배신할 생각 따위가 전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를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는 이야기에 박황은 내심 마른침을 삼키며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런 박황의 모습을 보고 도현은 모르는 척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왜국에서 보낸 약탈 물품과 귀환한 백성 들은 어떻게 조치를 했나?”

“하명하신 대로 돌려받은 물품들은 모두 한양으로 가져와 목록을 작성한 뒤 원래 있었던 곳으로 보내거나 주인이 불분명하면 국고에 귀속시켰사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부산포에 마련한 임시 거주지에 수용을 한 뒤 두 달 동안 적응에 필요한 교육을 실시하고 원하는 곳에 정착을 시켜 줄 계획입니다.”

“오랫동안 타국에서 고생한 이들이니 어려움이 없도록 잘 살펴서 챙겨 주라고 담당 관리에게 지시하게. 특히 인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자손들은 왜국에서 나고 자라 아국의 문물이 낯설 테니 그 점에 신경을 써야 될 게야.”

“알겠사옵니다, 전하.”

“화폐 주조는 문제없이 잘 이루어지고 있겠지?”

“예. 왜국에서 배상금으로 받은 금과 은을 모두 녹여 화폐로 만드느라 주조소 장인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중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엄청난 전쟁 비용에 시름이 깊던 재무대신이 산더미처럼 만들어진 금화와 은화를 보고는 연신 얼굴에 웃음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더군요.”

“하하하. 그래.”

왜국에서 들여온 금과 은괴는 전쟁 비용을 모두 충당했을 뿐만 아니라 조정의 재정을 더욱 튼실하게 만들어 줬다.

그리고 주조소에서 만들어진 금화와 은화가 시장에 대거 풀리면서 위조 화폐 사건으로 약간 위축된 화폐 유통에도 도움이 됐다.

앞으로 몇 년간 막부에서 상당한 양의 은괴가 계속 들어오게 되어 있으니 한동안 돈 걱정을 덜 수 있게 됐다.

“함께 들어온 유황은 모두 병기창으로 보내 화약 생산에 쓰도록 했사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전쟁에 화약 재고가 상당히 많이 축났다고 했지?”

“네.”

“그걸 다 채워 넣으려면 시일이 상당히 소요되겠군.”

그가 걱정스러운 듯 말하자 박황이 염려하지 말라는 얼굴로 얼른 대답했다.

“소모가 크기는 했지만 다음 달이면 재고를 모두 확보할 수 있다고 하니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지금 다음 달이라고 했나?”

“그렇사옵니다.”

“아니, 전쟁 중에 쓴 화약이 모두 얼만데 그렇게 빨리 충당할 수 있다는 건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도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 전에 보낸 물량까지 합치면 총 일천 관이 넘는 화약이 원정군에 보내졌습니다.”

조선군 자체가 화약 무기에 상당 부분 의존하는 데다 스루가 해전에서 함포 사격을 벌여 대량으로 소모를 했기에 그 정도는 충분히 쓰고도 남았을 터였다.

“예전 같으면 그 정도 물량을 채워 넣으려면 병기창을 쉬지 않고 가동하더라도 반년 이상이 걸렸겠지만, 지난달에 부산포 화약 공장이 완공된 덕분에 시간이 대폭 줄어들었사옵니다.”

“오. 그것 참 반가운 소식이군.”

설명을 듣자마자 도현은 반색을 했다.

부산포에 만들어진 화약 공장은 연간 팔백 관이 넘는 화약을 생산할 수 있는 시설로 갈수록 늘어나는 소모량을 충당하기 위해서 도현이 직접 건설을 지시한 곳이었다.

가장 필요한 시점에 화약 공장이 완성됐다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국에서 유황이 안정적으로 들어오고 이제 두 곳에서 생산을 하게 됐으니 화약이 부족할까 봐 노심초사할 일은 없을 것 같사옵니다.”

“그렇겠구먼. 하지만 앞으로 계속될 군비 증강을 생각하면 그것도 부족하니 서둘러 이 단계 공사를 시작해야 될 것이야.”

“안 그래도 병기장이 소요되는 예산을 재무부에 올린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럼 하루빨리 검토해서 승인을 내라고 하게.”

“예.”

오랜만에 한양으로 돌아온 데다 모든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자 도현은 흡족한 얼굴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때 바깥이 조금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백성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주상 전하 만세!”

“만세!”

“전하께서 귀환하시는 걸 알고 백성들이 환영을 나온 모양입니다.”

“그런 것 같군.”

말을 하며 도현이 닫혀 있던 창문을 열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백성들이 두 손을 들고 만세를 외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전하시다!”

“우와아아!”

그가 모습을 보이자 백성들은 감히 용안을 볼 엄두를 못 내며 허둥지둥 흙바닥에 엎드렸다.

“흑흑흑.”

얼마나 흠모하고 존경하는지 어렴풋이나마 도현을 봤다는 것에 감격해 눈물을 흘리는 이들까지 있었다.

“전하, 혹시 모르니 창문을 닫으시지요.”

군마를 몰아 옆으로 다가온 박영식 장군의 말에 그는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하오나…….”

“경이 뭘 걱정하는지 아네. 하나 그런 불온한 무리가 무서워 마차 안에 꽁꽁 숨어 있기만 한다면 어찌 군왕으로서 체통이 설 수 있겠나. 그리고 경과 근위군단 병사들이 든든히 주위를 지켜 주고 있는데 뭐가 무섭겠나.”

도현의 말에 박영식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닫았다.

“……알겠사옵니다.”

괜찮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호위를 맡은 입장에서 마냥 마음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박영식 장군은 친위대 대장인 신철과 함께 바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마차 주위에 있던 친위대와 근위군단 병력도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불온한 움직임이 없는지 사방을 철저히 경계했다.

그런 가운데 도현은 마차 창문 밖으로 몸을 약간 내밀고는 귀환을 열렬히 환영해 주는 백성들에게 손을 흔들어 줬다.

환영 나온 백성들의 행렬은 대궐 정문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개선식은 나중에 아직 왜국에 있는 원정군이 돌아오면 대대적으로 거행하기로 했기에 도현은 간단히 신하들을 접견한 뒤 중전의 거처로 가서 오랜만에 가족들과 만나 회포를 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며칠 푹 쉬면서 여독을 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한 나라의 지존이라는 자리가 그럴 수 없는 위치였기에 도현은 다음 날 바로 조정 대소 신료들을 대전에 소집해 그동안 미뤄 뒀던 업무를 봤다.

“이번에 막부로부터 할양받은 영토 관리는 어찌하기로 했는지 보고해 보게.”

허리를 깊숙이 숙인 신하들의 예를 받으며 왕좌에 앉은 도현이 묻는 말에 총리대신인 박황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막부와 체결한 조약 내용을 전해 듣자마자 고토열도[五島列島]에 주둔군 이천과 관리들을 파견했고 북해도에도 곧 인원을 보낼 예정이옵니다.”

“북해도는 땅이 넓어서 군대와 관리를 많이 보내야 될 게야.”

“안 그래도 거기에 관련해서 신들이 논의를 해 본 결과 북해도는 최소 사단 급 이상의 병력이 필요할 것 같아 따로 주둔군을 편성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되옵니다.”

북해도가 얼마나 넓은 땅인지 잘 알고 있는 도현은 박황의 이야기에 동의한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야 될 게야. 국방대신.”

“예.”

“사단 병력을 새로 편성할 여력이 되나?”

그의 물음에 국방대신 임경업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그동안 병력 자원이 꾸준히 늘어나 충분히 가능합니다.”

“다행이군. 그럼 당장 북해도에 보낼 사단을 편성하고 고토열도에 주둔하는 병력도 하나로 묶어 단일 지휘 체계를 구축하도록 하게. 명칭은 큰 섬이 다섯 개가 있으니 오성여단이라 부르면 되겠군.”

“바로 시행하겠사옵니다.”

여담이지만 북해도(동해도)에 주둔하는 병력은 동해사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나중에 군단 급으로 확대됐다.

그리고 오성여단과 함께 언제든지 왜국을 공격할 수 있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막부를 압박했다.

“관청을 세우고 아국의 영향력 아래 확실히 두기 위해서는 행정 구역을 정리해야 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나?”

그러자 한쪽에 서 있는 내무대신이 고개를 들며 이야기를 했다.

“고토열도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남해도에 편입을 시키고 북해도는 땅이 넓으니 따로 독립적인 도道로 운영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생각되옵니다.”

“흐음. 총리대신의 생각은 어떤가?”

“신도 그게 좋을 것 같사옵니다.”

“다들 같은 생각인가?”

“예, 전하.”

미리 이야기가 됐는지 대전에 모인 신하들이 별다른 반대 없이 전부 찬성하고 그가 생각해 봐도 합리적인 방법이었기에 도현은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그럼 내무대신이 낸 의견대로 행정구역을 정하도록 하지. 대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대적인 왜국의 영토였던 곳인 만큼 이 년 동안은 주둔군 지휘관이 군정을 실시한 연후에 상황이 안정되면 정상적으로 관리를 파견하는 것이 좋겠군. 또 이름이 기존에 있는 북해도와 똑같으니 앞으로는 동해도라 부르도록 하시오.”

“그리하겠습니다.”

확실히 말도 다르고 주민들의 성향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무턱대고 조선의 행정 체계를 적용시키는 것보다는 일단 군정을 실시해 해당 지역을 장악한 뒤 천천히 조선화를 시키는 것이 여러모로 잡음이 적었다.

이미 그동안 도현이 벌인 정복 전쟁으로 조선의 영토가 된 여러 지역에서 이런 방법을 실시해서 효과를 본 거였기에 신하들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나중에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해서 올리도록 하고. 농산대신.”

“예.”

“감자와 고구마의 경작지를 확대하는 건 어찌 됐나?”

“겨울 동안 북해도와 봉황도에 새로 다섯 곳의 대규모 직할 농장을 조성해서 다음 달에 첫 수확을 할 예정이옵니다.”

“백성들의 식생활을 보다 풍족하게 해 줄 작물들이니 생산에 더욱 신경을 써야 될 것이야.”

“판적국(농사를 담당하는 관청) 관리들을 상주시켜 농사를 관리하고 있으니 염려 마시옵소서.”

“농산대신만 믿고 있겠네. 아, 그리고 가축을 키우는 농장을 만드는 것도 잘 진행되고 있겠지?”

“네. 봉황상단이 북해도에 두 곳의 농장을 만들어서 모두 육만 두가 넘는 소와 양을 사육하고 있사옵니다.”

“백성들이 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가축 사육 수를 더 늘려야 될 거야. 이번에 영토로 편입한 동해도는 땅이 넓고 비옥해 가축을 키우기 적합하다고 하니 봉황상단과 논의를 해서 그쪽에도 농장을 조성하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도현은 재무대신 김육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재정 상황은 어떤가?”

그러자 김육은 몸을 살짝 도현 쪽으로 틀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당초 왜국 원정으로 큰 폭의 적자가 예상됐사오나 다행히 막부에서 막대한 금액의 배상금을 받아 내면서 오히려 흑자를 기록할 것 같사옵니다.”

“호오. 그래?”

이미 어제 총리대신한테 들은 이야기였지만 돈은 많을수록 좋은 거였기에 도현의 입꼬리가 절로 위로 올라갔다.

“현재까지 왜국에서 가져온 금과 은괴를 녹여 금화 오만 냥과 은화 삼십만 냥을 제조했고 앞으로 한 달 이내에 그만한 액수가 더 만들어질 것이옵니다.”

왜국에서 전쟁 배상금으로 엄청난 양의 재물이 들어오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구체적인 액수는 처음 듣는 거였기에 모여 있던 신하들 모두 크게 놀라며 감탄성을 내뱉었다.

“삼십만 냥이라니…… 대단하군.”

“허어.”

도현 역시 흡족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라의 곳간이 풍족해졌다니 다행이구먼. 앞으로도 왜국에서 들어오는 금과 은은 모두 화폐로 주조해 유통을 시키고 남는 물량은 재무부 창고에 보관해 뒀다가 필요한 곳에 쓰도록 하게.”

“예.”

재무부 창고에 금화와 은화가 가득 쌓여 있기 때문인지 대답을 하는 김육의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그 뒤로도 각 부서의 현안과 추진 중인 업무에 대해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눈 도현은 마지막으로 주작단 단장인 이완에게 시선을 줬다.

“걱정과 달리 의외로 청나라가 잠잠한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왜국에 원정을 떠나면서 도현이 가장 신경 쓴 것은 막부의 저항보다 조선의 주적인 청나라가 빈틈을 노리고 쳐들어오는 거였다.

그래서 일부러 원정군을 구성할 때 북방 병력을 배제시켰고 전쟁 중에도 군부에 비상령을 내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했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청나라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자 안도하는 한편 무슨 꿍꿍이인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저희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철저한 정보 통제로 원정군이 에도를 함락시켰을 무렵에서야 겨우 상황을 알게 돼 청국이 한발 늦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내부의 권력 다툼이 격화되면서 밖으로 시선을 돌리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태후와 예친왕의 사이가 더 악화된 모양이지?”

도현이 상체를 살짝 앞으로 숙이며 관심을 보이자 이완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그 정도가 아니옵니다.”

“자세히 설명을 해 봐.”

두 사람의 권력 투쟁은 청나라뿐만 아니라 조선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에 모여 있던 대신들 하나같이 귀를 쫑긋 세우고는 이완의 말에 집중했다.

“양쪽의 대립이 격화되어 가다가 얼마 전 태후파에 속한 직례총독이 예친왕을 따르는 팔기군이 보유한 토지를 전부 몰수하려 하면서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팔기군은 청군의 핵심 전력이자 예친왕 세력의 중추였는데, 대부분 직업 군인으로 황제한테 하사받은 대규모 토지를 기반으로 거기서 산출되는 재물을 가지고 필요한 재원을 모두 충당하면서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런데 팔기군이 누리는 부의 원천인 토지를 모두 몰수하려고 했다니 충돌과 반발은 당연한 거였다.

“아무리 예전에 비해 세력을 크게 불렸다고 하지만 팔기군 전체와 척져서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는데 도대체 태후는 무슨 생각인 거지?”

“최근 근황군을 대거 늘리고 측근 무장인 왕영을 직례 총독으로 임명하면서 자신감이 붙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인 출신들로 이루어진 팔기군이 태후에게 충성 맹세를 했다고 합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황궁이 있는 직례성直隷省을 장악하고 기존 만주족으로만 이루어진 팔기보다 약간 뒤처지기는 하지만 숫자가 훨씬 많은 한인 팔기군이 태후 쪽으로 돌아섰다는 이야기에 도현은 눈을 반짝였다.

이게 사실이라면 충분히 태후가 도박을 걸어 볼 만했다.

“이신(한인 출신 청국 관리)들을 주축으로 한 군부의 지지에 자신감을 얻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야골타를 비롯한 몇몇 팔기군 장수들이 공공연히 유약한 현 황제를 폐하고 예친왕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 위기감을 느꼈을 겁니다.”

“그런 이야기는 예전부터 있던 걸로 아는데?”

선황인 홍타이지가 죽었을 때부터 현재의 어른 황제가 아니라 그때 당시도 권력을 한 손에 잡고 휘두르던 예친왕 도르곤이 황좌를 이어받아야 된다는 말들이 있었다.

실제로도 야골타와 용골대가 주축이 된 예친왕의 친위 세력들이 강력하게 그걸 주장했지만 숙부가 어린 조카의 자리를 탐내 황위를 찬탈했다는 비난을 의식한 도르곤이 태후와 모종의 협정을 맺고 한발 물러났었다.

지금은 서로 못 죽여서 안달일 정도로 앙숙이 됐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양쪽은 서로 상부상조하며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그렇습니다만 이번에는 태후가 느끼는 위기감이 더 컸을 겁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모양이군.”

“예.”

한쪽 팔을 들어 턱을 매만지며 도현이 쳐다보자 이완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예친왕의 친위 세력뿐만 아니라 황실 원로들 일부가 여기에 동조를 하며 힘을 실어 줬다고 합니다.”

“황실 원로들이?”

“네.”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고 대전에 있던 대신들도 서로 소곤소곤 귓속말을 하며 술렁였다.

이제까지 황족들은 전통성을 이유로 홍타이지의 아들인 현 황제를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며 태후가 예친왕과 맞서는 데 상당한 힘이 됐기에 시사하는 바가 아주 컸다.

“황족들은 태후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었나?”

“맞습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황족은 여전히 태후와 손을 잡고 있습니다.”

“그럼 방금 한 이야기는 뭐야?”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일부가 예친왕 지지로 돌아선 겁니다. 한데 문제는 그 몇몇이 황족 가운데서도 영향력이 크고 실질적인 힘을 가진 자들이라는 거지요.”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가 뭐지?”

“예친왕을 견제하기 위해서라지만, 태후가 만주족보다 한족 출신을 더 많이 등용하고 저희에게 빼앗긴 심양을 탈환할 노력은 하지 않고 남명과의 싸움만 신경을 쓴다는 것에 불만이 쌓인 모양입니다.”

“만주 땅에 집착이 강한 자들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일부이기는 하지만 황족들까지 예친왕 쪽에 붙으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태후가 먼저 칼을 뽑아 든 겁니다.”

“팔기군이 보유한 토지를 몰수하는 걸로 말이지.”

“예. 애초에 황제가 내려 준 땅이니 황명으로 다시 거둬 간다는 것이지요. 대신 팔기군 운영에 필요한 재원은 황실에서 지원해 준다는 했답니다.”

단번에 태후의 의도를 파악한 도현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돈으로 팔기군을 장악하시겠다.”

“바로 맞히셨습니다. 제아무리 용맹한 군대라도 그걸 유지할 재물이 없으면 무용지물이지 않겠사옵니까.”

“그렇지.”

당장 조선군만 해도 각종 보유 장비와 병력을 유지하는 데 매년 수십만 냥의 예산이 들어갔다.

“예친왕이 태후의 술수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도현과 함께 심양 관저 생활을 해서 예친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총리대신 박황이 우려 가득한 표정을 짓자 이완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바로 보셨습니다. 그런 황명이 떨어지자마자 예친왕이 강력하게 반발하며 황제 앞에서 당장 철회해 달라고 요구했고 그 일로 현재 북경은 양측의 대립이 극한까지 치달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자 도현은 사뭇 진지한 어조로 이완을 쳐다보며 물었다.

“일이 어디까지 번질 것 같나?”

“…….”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잠시 고심하던 이완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전까지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완의 말에 조용하던 대전은 다시 한 번 크게 술렁였다.

“허어.”

“내전이라니…….”

한쪽 손을 들어 주위를 조용히 시킨 도현은 의외로 차분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그 정도로 심각하단 건가?”

“예. 북경에 있는 예친왕부로 진충군이 들어와 경계를 하고 있고 태후도 금군 외에 충성을 맹세한 한족 팔기군들을 성안으로 들여 양측이 일촉즉발의 대치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솔직히 지금 이 순간 북경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다고 해도 이상치 않을 정도이옵니다.”

진충군은 예친왕이 조선군을 상대하기 위해서 새로 심혈을 기울여 조련하고 있는 군대로, 전원 서양식 머스킷 소총으로 무장한 정예 부대였다.

이런 부대를 왕부 경비로 배치했다는 건 그만큼 상황이 위중하다는 반증이었다.

팔짱 낀 도현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자 국방대신 임경업이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청국이 분열되고 내분에 휩싸이면 우리에게는 좋은 일이 아니옵니까?”

그러자 고개를 든 도현은 좌중을 둘러보고는 약간 가라앉은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 하지만 시기가 너무 안 좋은 것이 문제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국이 충분히 준비가 된 상태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청나라를 꺼꾸러뜨릴 기회로 여기겠지만 지금은 공교롭게도 왜국 원정으로 전력이 분산되어 있어 만리장성을 넘어갈 입장이 아니지 않소.”

“전하의 말씀대로 준비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북방군의 전력이라면 사분오열된 청군쯤은 간단히 무너뜨리고 북경성을 함락시킬 수 있습니다.”

임경업이 강한 자신감을 보였지만 도현은 회의적은 태도를 보였다.

“국방대신의 말대로 북경을 함락시킨다고 해도 전쟁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 않소.”

“…….”

“여전히 넓은 땅과 많은 병력을 가진 청군이 전력을 재정비한 뒤 대대적인 반격을 해 오면 보급선이 길어지고 적진에 고립된 아군이 오히려 적에게 포위 섬멸을 당할 수도 있다는 걸 왜 모르시오?”

질책 어린 도현의 지적에 임경업은 명장답게 금방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신이 경솔했습니다.”

“아니야. 짐이 보기에도 그냥 놓치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기회이니 군대를 몰고 청나라에 일격을 먹이고 싶은 경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가네. 하지만 선봉에 서서 칼만 휘두르는 돌격장이 아니라 일국의 군권을 쥔 국방대신인 만큼 대국을 넓게 봐야 될 것이야.”

“명심하겠사옵니다.”

진심을 담아 임경업이 허리를 숙이자 도현은 다시 시선을 이완에게 돌렸다.

“이 단장.”

“예.”

“어찌 됐건 일이 벌어졌으니 청나라의 내분을 이용해서 최대한 이득을 취해야겠지. 북경을 상황을 주시하면서 아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상황을 끌어갈 방법을 강구해 봐.”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국방대신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당분간 북방군에 내려진 경계 태세를 계속 유지하게.”

“옛.”

왜국 원정을 시작할 때부터 벌써 몇 달째 이어진 경계령에 병사들의 피로가 상당했지만 방금 이야기를 나눴다시피 청나라의 사정이 심상치 않았기에 임경업은 별다른 이의 없이 고개를 숙였다.

“더 보고할 것이 있나?”

상체를 바로 한 도현이 좌우를 쓸어 보며 묻자 신하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없사옵니다.”

“그럼 오늘 조회는 여기서 끝내지.”

“예.”

몸을 일으킨 도현은 당당한 발걸음으로 대전을 나갔고 그가 완전히 모습을 감출 때까지 허리를 숙이고 있던 신하들도 각자 일터로 흩어졌다.

도현이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궁녀와 내시 들이 그 뒤를 따랐다.

대전부터 함께 있던 칠현은 상선이란 직책 덕에 도현에게서 제일 가까운 반보 뒤에 있었고, 나머지 수행원들은 제각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긴 행렬을 만들었다.

행여나 귀에 거슬리지 않도록 돌바닥을 밟는 발소리 하나에도 조심하면서 희정당을 향해 가는데, 돌연 도현이 방향을 틀어 후원의 연못 쪽으로 향했다.

족히 전각 두서너 채는 들어갈 법한 커다란 연못 앞에 서자 도현은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길게 가지를 늘어뜨린 수양버들이 쏴아아 하는 소리를 내면서 흔들거렸고, 사람 기척을 알아챈 비단 잉어가 수면 아래를 헤엄치며 잔잔한 파문을 만들어 냈다.

“전하,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연못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서 있으니 걱정이 된 칠현이 물어 왔다.

“기껏 전장에서 돌아왔는데 복잡한 일이 연달아 생기니 머리가 아파서 그래.”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쟁터에 있을 때가 차라리 마음이 더 편하다니, 착잡한 기분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다 잘될 것이옵니다.”

“그래야지.”

도현은 뜻 모를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선 멈췄던 발끝을 돌렸다.

“오늘 점심엔 중전이 아이들을 데리고 온다 하였으니 기다리게 할 순 없지. 이만 가지.”

그에게 있어 유일하게 마음 놓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이란 가족들과 함께하는 짧은 순간밖에 없었다.

삭막한 일상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중전이나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가슴 깊숙한 곳에서 떠오르는 푸근함만이 그를 굳세게 지탱해 주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었지만 북경성은 예친왕과 태후의 대립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이 정말이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예친왕이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묻자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군관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오늘 밤 문을 닫으면 각 성문 수문장들은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그 누구도 출입을 시키지 말라는 오군도독의 명이 있었습니다.”

오군도독부의 동태를 은밀히 보고하는 자는 남문 수문장으로 있는 예친왕의 밀정이었다.

“섭정 전하, 뭔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야골타의 말에 때마침 함께 있는 용골대도 굳은 얼굴로 동조를 했다.

“저도 조짐이 이상한 것 같습니다. 이건 북경을 완전히 봉쇄하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으음.”

낮게 침음성을 흘리며 다시 의자에 앉아 잠시 골똘히 생각을 하던 예친왕은 고개를 들어 탁자에 놓인 작은 목함에서 비단 주머니를 하나 꺼내 아직 남아 있는 수문장에게 던져 줬다.

툭.

돈주머니였는데 제법 묵직한 소리가 나는 것이 상당히 많은 은자가 들어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수고했다. 근무지로 돌아가 있다가 또 다른 움직임이 있으면 지체 없이 바로 알리도록 해라.”

얼른 비단 주머니를 품에 챙겨 넣은 수문장은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만 가 보라는 듯이 예친왕이 한쪽 팔을 내젓자 수문장은 냉큼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 탁자 위에 있던 술병을 집어 잔에 따른 뒤 한 모금을 마신 예친왕은 한족 출신이지만 곁에서 군사 역할을 하는 왕태봉한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왕 책사.”

“예, 섭정 전하.”

태후에 의해 섭정 자리에서 물러난 지 꽤 됐지만 여전히 예친왕의 수하들은 친왕의 호칭 대신 섭정이라 불렀다.

“자네가 보기에 이게 무슨 뜻인 것 같나?”

“좀 더 정보를 모아 봐야 되겠지만 두 분 장군님의 말씀처럼 좋은 징조는 아닌 것 같습니다. 특히 태후의 측근이자 북경성 내에 가장 많은 병력을 거느린 오군도독 오삼계가 움직였다는 건…….”

왕태봉이 말끝을 흐리자 예친왕은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이야기를 재촉했다.

“망설이지 말고 어서 말해 봐.”

“아뢰옵기 송구스럽습니다만, 섭정 전하를 치려는 사전 작업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야골타가 약간 언성을 높이며 흥분한 듯 소리쳤다.

“그것 보십시오!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이 자리에서 가장 크게 분노해야 될 사람이었지만 의외로 예친왕은 너무나도 침착한 모습으로 말했다.

“진정해.”

“전하!”

“이럴 때일수록 머리를 차갑게 식히고 상황을 파악해야지. 흥분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어.”

“…….”

크지는 않았지만 묵직함이 느껴지는 음성에 야골타는 예친왕이 표시는 내지 않지만 속으로 엄청나게 분노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예친왕은 착 고개를 돌려 왼편에 있는 용골대를 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지금 당장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있나?”

예친왕의 물음에 용골대는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백기단과 청기단 사만이 있지만 모두 북경성 밖에 주둔해 있어서 실제로 태후 쪽이 일이 벌였을 때 바로 맞설 수 있는 병력은 진충군 육천과 저하고 야골타 장군이 거느리고 있는 팔기군 병력 오천이 전부입니다.”

적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황궁을 지키는 금군을 제외하더라도 오문도독부에 속한 병력만 칠만에 달하는 걸 생각하면 정면 승부를 벌였을 경우 무조건 필패라고 봐야 했다.

이런 이유로 팔기군을 장악한 예친왕이 전체적인 무력은 더 강함에도 불구하고 북경에서는 열세였기에 태후가 강경하게 나올 수 있는 거였다.

“도합 일만이라…….”

“너무나도 불리한 싸움입니다. 일단 저들이 성문을 모두 봉쇄하기 전에 북경을 잠시 떠나 세를 규합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용골대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자 예친왕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누가 봐도 열세인 상황에서 이것 말고는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걸 아는지 다혈질인 야골타도 별말 없이 용골대의 이야기에 동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방법밖에 없겠나?”

“내키지 않으시겠지만 병력 차이가 너무 큽니다. 거기다가 오삼계가 장악하고 있는 오군도독부가 성문을 모두 닫아걸어 버리면 우리는 외부에 있는 병력과 연락이 끊겨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가 되지 않겠습니까.”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외부와 차단된 채 성안에 갇혀 싸워야 된다는 점이었다.

상황이 불리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예친왕이었지만 한번 물러서면 주도권을 빼앗기고 다시 북경으로 돌아오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음.”

예친왕이 굳은 얼굴로 망설이자 왕태봉이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섭정 전하,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해 보게.”

“용골대 장군의 말씀대로 일단 위기를 피하시는 것이 최선이지만, 그게 싫으시다면 그리 권하고 싶지는 않으나 차선책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가?”

예친왕이 솔깃한 얼굴로 묻자 왕태봉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야기를 했다.

“지금 우리한테 가장 문제가 되는 게 바로 북경성 안에 고립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피신을 하지 않고 북경에서 태후파에 맞서시겠다면 상대가 봉쇄를 하기 전에 선수를 쳐서 성문 중 하나를 장악하고 외곽에 있는 우군을 끌어들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왕태봉의 말에 예친왕은 무릎을 치며 눈을 반짝였다.

“그런 수가 있었군.”

“하지만 왕 책사의 말대로 한다고 해도 백기단과 청기단이 오려면 최소 반나절 이상 우리들만으로 버텨야 됩니다. 거기다 자칫 먼저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누명을 써 태후파에 전하를 칠 명분을 주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려를 나타내는 용골대와 달리 다혈질이고 성격이 단순한 야골타는 적극 찬성을 했다.

“까짓 거 태후파 오합지졸쯤은 반나절이 아니라 하루도 막아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에 칼이 들어오는 판국에 지금 명분을 따질 때요?”

“그렇게 단순히 생각할 문제가 아닐세. 명분에서 밀리면 나중에 전하께서 황제가 되셨을 때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지.”

그러자 같은 장수면서 평소 혼자 똑똑한 척에 잘난 척을 하며 자신보다 더 인정을 받는 용골대에 반발심을 품고 있던 야골타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싹 다 쓸어버리면 바짝 엎드려 입도 뻥긋 못 할 텐데 뭐 하러 그딴 걸 신경 쓰는지, 겁이 나면 그렇다고 솔직히 말하시오.”

“지금 뭐라고 했나?”

“정곡을 찔렸나 보지.”

“이놈!”

발끈한 용골대는 눈을 무섭게 부라렸고 야골타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노려봤다.

풍전등화와도 같은 위기의 순간에 서로 힘을 합쳐 난간을 헤쳐 나가도 부족할 판에 그의 오른팔, 왼팔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해묵은 감정을 드러내며 다툼을 벌이자, 예친왕은 와락 얼굴을 찡그리고는 앞에 있는 탁자를 손바닥으로 세게 내려쳤다.

탕!

“지금 뭐 하는 거야!”

“흠흠.”

“그게…….”

“이래 가지고 내가 두 사람을 믿고 대사를 벌일 수 있겠어!”

단단히 화가 난 예친왕의 호통에 용골대와 야골타는 찔끔한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야단을 치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에 예친왕은 이 정도에서 넘어갔다.

“또다시 이런 모습을 보이면 그때는 용서치 않을 테니까 조심들 해!”

“예.”

정색을 한 예친왕은 진지한 어조로 이야기를 이었다.

“그리고 비겁하게 피하지 않고 태후와 맞서 싸우겠으니 왕 책사가 낸 의견대로 성문을 장악하고 성 밖에 있는 우군을 최대한 빨리 불러들이도록 해.”

“너무 위험한 도박입니다.”

용골대가 반대를 했지만 예친왕의 결심을 번복시키지는 못했다.

“나도 알아.”

“그런데 왜……?”

“최소한의 피해로 내전을 끝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네. 만약 내가 북경을 떠난다면 보다 안전하겠지만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거야. 그러면 승리를 거둬 자금성의 주인이 된다고 해도 상처가 너무 커.”

단호하게 말한 예친왕은 좌우에 있는 측근들을 날카롭게 쓸어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이미 결심을 굳혔으니 더 이상의 반론은 용납하지 않겠어. 모두 알겠나!”

“옛.”

그러자 야골타와 왕태봉은 물론이고 용골대도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성문이 닫힐 때까지 시간이 얼마 없었기에 네 사람은 서둘러 어떻게 태후파에 맞설 것인지 대책을 세웠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예친왕부의 커다란 문이 열리더니 말을 탄 전령 네다섯 명이 한꺼번에 빠져나와 어딘가로 바삐 달려갔다.

한편 태후의 최측근인 오삼계가 수장으로 있는 오군도독부도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각 성문 수문장들한테 내 지시를 다 하달했겠지?”

마치 전쟁에 나온 장수처럼 갑옷을 차려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오삼계의 말에 부관이 얼른 대답했다.

“예. 본대 군관들이 직접 가서 수문장에게만 은밀히 장군의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잘했어.”

보통은 전령을 통해 지휘관의 명령을 전달했지만 이번에는 예친왕이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히 일을 처리해야 됐기에 믿을 수 있는 수하 군관들이 직접 움직였다.

“병사들은?”

“전원 무장을 갖추고 막사에서 대기 중입니다.”

“거사 전까지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철저히 단속해야 되네.”

오삼계가 정색을 하며 말하자 부관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자신 있게 이야기를 했다.

“장군님께서 불시에 훈련 점검을 하시는 거라고 적당히 둘러댔고 아무도 위치를 이탈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다시 한 번 점검을 해.”

“옛.”

요동 총병 시절부터 함께해 온 부관이었기에 잘 처리했을 거라 믿었지만 실수 한 번에 모든 일이 어그러질 수 있었기에 오삼계는 재차 주의를 줬다.

부관한테서 시선을 뗀 오삼계는 긴 탁자를 가운데 두고 좌우에 늘어앉아 있는 휘하 장수들을 천천히 훑어보고는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 해가 새로 뜨면 우리는 황제 폐하의 충신으로 역사에 길이 남으며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 영광을 위해 마지막 한순간까지 긴장을 풀지 말도록.”

“옛, 도독.”

눈을 매섭게 빛낸 장수들은 일제히 머리를 숙이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얼마 뒤 유시酉時가 되자 시각을 알리는 종각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며 북경에 있는 각 성문들이 폐문을 했다.

“폐문!”

끼이이익.

쿵.

닫힌 성문에 병사 네다섯 명이 한꺼번에 달라붙어야 움직일 수 있는 빗장을 서너 개나 질러 단단히 잠갔다.

하지만 단 한 곳 내성 동쪽에 위치한 동직문東直門만은 폐문을 하지 않고 성문을 활짝 열어 두고 있었다.

“수문장 어른, 정말 이래도 괜찮겠습니까?”

하급 군관 하나가 불안한 얼굴로 쳐다보자 오군도독부에서 내려온 명령을 예친왕한테 몰래 알린 수문장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예친왕 전하께서 뒤를 봐주실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마라.”

“하지만…….”

“이미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어. 지금은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예친왕 전하를 도와 드려야 해.”

“후우. 알겠습니다.”

다그치듯 수문장이 이야기를 하자 하급 군관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시신은 한곳에 치워 두고 사방을 경계하도록 해.”

“예.”

군례를 취한 하급 군관은 이내 한쪽에 서서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던 병사들을 재촉해 성문 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시신을 정리했다.

죽은 이들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로 성문을 확보하라는 예친왕의 밀명에 따라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을 불시에 습격해 제거해 버린 거였다.

예친왕이 약속한 벼슬과 재물에 눈이 멀어 일을 벌이기는 했지만 혹시라도 아직 성문이 닫히지 않았다는 걸 오군도독부에서 알게 되면 바로 병력을 보내올 것이기에 초조한 마음으로 사방을 주시하고 있을 때 일단의 기마가 다가왔다.

“수문장 어른, 누가 옵니다!”

“나도 알고 있어.”

바짝 긴장한 채 성문 아래를 내려다보던 수문장은 밑에 피워 놓은 화톳불에 드러난 기마가 들고 있는 깃발을 확인하고는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백기단이다.”

예친왕의 친위대나 마찬가지인 백기단의 등장에 수문장과 병사들은 이제 살았다는 얼굴을 했다.

이들은 성 밖에 있는 우군이 들어오고 최악의 경우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예친왕이 황급히 보낸 병력으로, 모두 두 개 천인대나 됐다.

이런 가운데 동직문이 열려 있다는 걸 아직 모르는 오삼계는 시간이 되자 군영에 대기시켜 놨던 병력을 이끌고 예친왕 세력 소탕에 나섰다.

“이 대와 삼 대는 내성 안에 있는 반당 세력을 모두 찾아내 잡아들이고 나머지는 나와 함께 예친왕부로 간다. 반항하는 자들은 황명에 의해 그 자리에서 즉결 처분해도 좋다. 알겠나!”

“옛.”

“출발!”

오삼계의 명령이 떨어지자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오군도독부 소속 장수들은 각자 휘하 병력을 이끌고 맡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군영을 출발했다.

도독인 오삼계도 본영에서 지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예친왕부로 향했다.

이 소식은 오군도독부를 감시하고 있던 병사를 통해 곧장 예친왕에게 전해졌다.

예친왕과 그를 따르는 인물들이 모두 커다란 방 안에 모여 회의를 하고 있을 때, 구르듯이 달려온 군관이 벼락같은 말을 내던졌다.

“전하, 방금 오군도독부 병력이 본영을 나섰다고 합니다.”

자신이 기거하는 처소 안인데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전투를 대비해 갑옷을 몸에 걸치고 있던 예친왕은 그 얘기를 듣고 마치 올 것이 왔다는 듯 큰 동요 없이 말했다.

“오군도독부 전 병력이 움직인 거냐?”

“예.”

“목표는?”

차분한 물음에 군관은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고는 전해진 소식을 소상히 보고했다.

“모두 세 개 대로 나뉘어서 이 대와 삼 대는 내성에 있는 귀족 거주 지역으로 향했고 나머지는 오삼계 도독이 직접 이끌고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방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상대가 귀족 거주 지역으로 병력을 보냈다는 말에 크게 동요했는데 거기에 자신들의 저택이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사전에 연락을 받고 황급히 가족들을 피신시키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당할 뻔한 상황이다.

다들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가운데 상석에 앉은 예친왕은 한쪽 입술을 씰룩였다.

“머리를 노리는 것과 동시에 손발을 함께 쳐 내겠다, 이거군. 역시 오삼계다워.”

“만약 일이 잘못되더라도 중앙 정계에서 전하를 지지하는 세력을 모두 정리하거나 치명타를 입힐 수 있다면 완전히 주도권을 쥐는 것이니까요.”

바로 옆자리에 서 있던 왕태봉의 이야기에 예친왕은 동의하듯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도 호락호락 당해 줄 수는 없지. 동직문에서는 연락이 왔나?”

“예. 백기단 이천을 보내 장악을 했다고 합니다.”

“그럼 일단은 최악의 경우 퇴로는 확보가 된 거군.”

“네.”

그러자 웅성거리던 소리들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도망칠 길 하나 없이 벼랑 끝에 몰린 것과, 그래도 여차하면 어떻게든 할 방법이 있다는 것은 천양지차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들으라고 입 밖에 꺼낸 말이었으나 정작 안도하는 그 모습을 보자 예친왕은 속이 뒤틀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냥 넘어가며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다른 병력들은 어찌하고 있나?”

“지금쯤 연락을 받고 야골타와 용골대 장군께서 병력을 움직이셨을 겁니다.”

“좋아.”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지시한 대로 수하들이 재빨리 잘 대처하고 있는 것에 흡족한 표정을 짓던 예친왕은 이내 사납게 눈을 치켜뜨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감히 나한테 이빨을 들이대다니 오늘 일을 평생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겠어.”

예친왕이 뿜어내는 살기와 분노에 사람들은 두려운 얼굴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왔군.”

오삼계는 약간 긴장한 얼굴로 낮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앞을 쳐다봤다.

예친왕부는 섭정의 자리에 있었던 주인의 권세를 보여 주듯 저택이 아니라 하나의 성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다.

입구는 이두마차 한 대가 그대로 들어가도 여유가 있을 정도로 컸고 좌우에 길게 뻗은 담의 높이는 열 자(尺, 3미터)나 돼서 마치 성벽과도 같았다.

“주위를 다 포위했습니다.”

부관의 보고에 상념에서 깨어난 오삼계는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바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역적 도르곤을 내 앞으로 끌고 와라!”

“옛.”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나온 오삼계는 작위 대신 이름으로 예친왕을 불렀다.

지시를 받은 부관이 손짓을 하자 대기하고 있던 하급 군관이 병사 십여 명과 함께 앞으로 나가 굳게 닫혀 있는 왕부 정문을 요란하게 두드렸다.

탕탕탕!

“거기 아무도 없느냐!”

그러자 안쪽에서 횃불이 어른거리며 묵직한 음성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웬 놈이냐?”

“황명을 받고 왔다. 어서 문을 열어라!”

“지금 황명이라고 했나?”

“그렇다.”

“웃기고 있군.”

“뭐야!”

감히 황명을 무시하는 발언에 하급 군관이 놀라 두 눈을 치켜뜨는 가운데 옆에 있는 쪽문이 벌컥 열리며 텁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건장한 체격의 장수가 한 명 나오더니 다짜고짜 손에 들고 있던 철퇴를 휘둘렀다.

“황궁에 있는 요망한 계집의 지시를 받고 섭정 전하를 해하러 온 것을 내가 모를 줄 알고. 이거나 먹어라!”

휘이익.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철퇴에 맞은 하급 군관은 안면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박살 나 그대로 쓰러졌다.

“꺼헉.”

“히익.”

“악!”

연이어서 옆에 서 있던 동료 두 명이 장수가 휘두른 철퇴에 피 떡이 되어 널브러지자 병사들은 기겁을 하며 허겁지겁 뒤로 달아났다.

“사, 살려 줘.”

그 모습에 군마를 탄 채 모든 걸 다 지켜본 오삼계가 미간을 모으며 짧게 혀를 찼다.

“쯧. 멍청한 것들 같으니라고.”

“저자는 도르곤의 측근인 홍다구가 아닙니까!”

“흐음.”

홍다구의 이름은 오삼계도 소문으로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군문에 속한 장수는 아니었지만 예친왕의 사병이라고 할 수 있는 진충군의 지휘관으로 방금 봤듯 힘이 장사고 잔인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저놈을 그냥 놔둘 건가?”

“아, 아닙니다.”

짜증스럽게 오삼계가 하는 말에 부관은 얼른 한쪽에 대기 중이던 장수들한테 소리를 쳤다.

“뭣들 하느냐! 홍다구라는 놈을 잡아 죽이고 감히 황상의 명을 받고 온 군관을 해한 역도들을 모조리 다 잡아들여라.”

“옛!”

부관의 호통에 정신을 차린 장수들은 사나운 얼굴로 휘하에 있는 병사들을 이끌고 예친왕부로 몰려갔다.

“쳐라!”

“우와아아!”

원래 무리를 이루면 두려움이 희석되기 마련이었는데 철퇴로 잔인하게 사람 머리를 깨서 죽인 홍다구의 모습에 겁을 먹었던 오군도둑부 병사들은 우레와 같은 함성을 내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얼굴에 튄 피를 소매로 대충 닦아 낸 홍다구는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더니 한쪽 팔을 머리 위로 들며 소리쳤다.

“사격 준비!”

그러자 높다란 담벼락 위로 수많은 인영이 불쑥 머리를 내밀더니 새로 생산한 머스킷 소총을 들고 사격 자세를 잡았다.

처처척. 척!

바로 그동안 예친왕이 조선군을 이기기 위해서 수많은 재물과 노력을 들여 키운 진충군이었다.

“응!”

그걸 보고 불길한 느낌이 든 오삼계가 이맛살을 찌푸리는 순간 요란한 총성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쏴!”

타타탕! 탕! 탕! 탕!

“으악!”

“꾸엑.”

“컥.”

수만금을 들여 키운 노력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진충군이 쏜 머스킷 소총은 충격적인 위력을 선보이며 달려들던 오군도독부 병사들은 순식간에 벌집으로 만들어 버렸다.

한꺼번에 백여 명이 넘는 병사들이 피를 뿌리며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에 오삼계는 눈을 부릅뜨며 경악성을 터트렸다.

“이럴 수가!”

“조, 조총입니다.”

“이놈들이 미리 대비를 하고 있었구나!”

단번에 상황을 알아차린 오삼계는 이를 부드득 갈며 큰 소리로 직접 지시를 내렸다.

“궁수대, 저것들을 벌집으로 만들어 버려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궁수대가 재빨리 시위에 화살을 재고는 예친왕부를 향해 발사했다.

슈슈슉! 슈슉! 슉!

시커먼 밤하늘 위로 솟구친 화살들은 이내 정점을 찍고는 곡선을 그리며 아래로 떨어져 진충군이 있는 왕부 담벼락을 덮쳤다.

후두둑. 두둑.

궁수대가 나서는 걸 보고 진충군 병사들이 얼른 담벼락 뒤로 몸을 숨겼지만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 세례를 다 피하기는 어려웠다.

그 결과 여기저기에서 고통에 찬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으아악!”

“큭.”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성난 조자룡처럼 기세등등하게 왕부 정문 앞에 서 있던 홍다구도 황급히 안으로 피신했다.

그러자 다시 기선을 잡았다고 판단한 오삼계는 손에 들고 있던 지휘봉을 앞으로 내밀며 소리쳤다.

“다 쓸어버려라!”

“우와아아!”

아까 있었던 무시무시한 총격에 잠시 주춤했던 오군도독부 병사들은 다시 용기백배해서 예친왕부로 돌격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병사들이 뛰어나가려는 순간 좌우에서 엄청난 함성과 함께 말에 탄 기병 수천 명이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 나왔다.

“태후의 개들을 다 죽여라!”

“이랴!”

“하하!”

바로 예친왕을 지지하는 또 다른 팔기대인 청기단이었다.

“이런!”

수많은 시간을 전장에서 보내고 한때는 요동총병으로 청나라의 파상 공세를 홀로 막아 냈던 명장인 오삼계는 이내 어찌 된 건지 상황을 파악하고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제기랄! 함정이었군.”

“예?”

의아한 얼굴로 부관이 쳐다보자 오삼계는 상처 입은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우리가 올 줄 알고 놈들이 미리 함정을 파고 있었다고!”

“어떻게…….”

오삼계 자신이 가장 알고 싶은 질문이었다.

그런 가운데 용골대가 이끄는 청기단은 오군도독부군의 양쪽 측면을 날카로운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두두두두!

“이야압!”

슈각.

“끄윽.”

“죽어라!”

“끄르르륵.”

좁은 시가지 안이라 기병이 기동하기 불편했지만 예친 왕부 앞은 높은 권세를 보여 주듯 드넓은 공터인 데다 상대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태였기에 청기단은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었다.

거기다가 화살 세례를 피해 담벼락 뒤에 숨어 있던 진충군 총병들까지 다시 사격을 개시하면서 오군도독부 병사들은 썩은 짚단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탕! 탕! 탕!

피슝!

유탄 하나가 날아와 오삼계 옆을 스치고 지나가자 부관이 기겁을 했다.

“도독, 괜찮으십니까?”

자칫 큰 부상을 입거나 목숨이 위험할 뻔한 상황이었는데 오삼계는 사방에서 들리는 총성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에 얼굴을 와락 구겼다.

“뭣들 하는 거야! 우왕좌왕하지 말고 대열을 정비해서 맞서 싸워라.”

목에 핏대를 세우며 오삼계가 고함을 질러 댔지만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다.

숫자는 혹시 모를 변수를 대비해서 천인대 여섯 개를 끌고 온 오삼계 쪽도 결코 적지 않았지만 기습의 충격이 너무 컸다.

더군다나 어두운 밤에 상대가 달려들며 내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총성은 오군도독부 병사들을 더욱 공포스럽게 만들었고 그 결과는 혼란과 도주로 나타났다.

아직 일부에 불과했지만 명령도 없이 무단으로 등을 보이며 달아나는 병사들의 모습에 오삼계는 화를 내며 전투를 독려했다.

“도망치는 놈은 반역자로 규정해 즉결처분하겠다. 물러서지 말고 싸워라!”

오삼계뿐만 아니라 휘하 장수들도 어떻게든 전열을 유지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러자 다급한 표정이 역력한 부관이 옆으로 와서 급히 입을 열었다.

“도독,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일단 뒤로 물러서시지요.”

“무슨 헛소리야!”

일이 예상 밖으로 흘러가자 잔뜩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오삼계가 눈을 무섭게 치켜뜨며 언성을 높이자 부관이 얼른 그를 설득했다.

“이 상태로는 더 이상 예친왕부를 공격하기 어렵습니다.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잠깐 물러섰다가 전열을 재정비한 다음 다시 와도 늦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북경에 있는 성문이 모두 닫혀 저들은 독 안에 든 쥐가 아닙니까.”

“으음.”

자존심이 상했지만 부관의 말이 맞았다.

날이라도 밝았다면 함정에 빠졌더라도 최대한 병력을 수습해서 반격을 하거나 아님 방어라도 굳혀 지원 병력이 올 때까지 버텼겠지만 지금은 그것이 어려웠다.

어둠 속에서 메아리치는 함성과 비명 그리고 총성은 공포를 극대화했고 오삼계가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는 걸 힘들게 만들었다.

그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했지만 그렇다고 어리석지는 않았던 오삼계는 이내 침음성을 내뱉으며 말했다.

“후퇴 명령을 내리게.”

“알겠습니다.”

계속 고집을 부릴까 봐 염려하던 부관은 반색을 하며 대답했고 얼마 있지 않아서 병사들에게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퇴각! 퇴각하라!”

고전을 하고 있던 오군도독부 병사들은 후퇴 명령에 황급히 뒤로 몸을 뺐다.

하지만 비록 기습을 당해 우왕좌왕하기는 했어도 오삼계가 심혈을 기울여 조련한 정예병들답게 자기부터 살겠다며 무질서하게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대열을 갖추고 장수들의 지시에 따라 체계적으로 물러섰다.

그러자 상대편도 더 이상 쫓아오지 않고 일단 오군도독부 병력의 공격을 격퇴하고 왕부를 지켜 낸 것에 만족했다.

직접 군마를 타고 적군의 목을 벤 용골대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검을 손에 든 채 휘하 장수를 보며 말했다.

“보고해 봐.”

“옛. 장군. 정확한 건 조금 더 기다려 봐야 되겠지만 대략 육백오십 명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여기서 중상자는 삼백육십 명 정도고 나머지는 간단히 치료를 하면 다시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경상입니다.”

“진충군의 피해도 합친 건가?”

“아닙니다.”

청기단에서만 그만큼의 사상자가 나왔다는 이야기에 용골대는 이맛살을 찡그렸다.

“적은 못해도 이천이 넘는 피해를 입었고 먼저 기선을 제압했으니 아군의 승리가 아니겠습니까.”

휘하 장수의 이야기에 용골대는 짧게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쯧. 분명 이긴 것은 맞지만 아직 많은 병력이 남아 있는 적과 달리 우리는 성 밖에 주둔한 우군이 도착할 때까지 열세인 전력을 가지고 버텨야 된다는 걸 명심하게.”

그때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휘하 장수는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소장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우선 병력을 수습해 적이 다시 쳐들어오는 것에 대비하고 경상자들을 빨리 치료한 뒤 복귀시키도록 해.”

“알겠습니다.”

“난 섭정 전하를 뵙고 올 테니 잠시 자네가 지휘를 맡고 있게.”

“예.”

군례를 취하는 장수를 뒤로하고 용골대는 예친왕에게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말 머리를 돌렸다.

한편 예친왕부에서 물러난 오삼계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천문을 살피기 위해 만든 천구단까지 후퇴한 뒤 거기서 병력을 재편성했다.

천구단 건물을 빙 둘러싸며 후퇴해 온 오군도독부 병력이 빽빽하게 모여 있었는데 처음 군영을 나설 때의 당당한 기세는 다 어디로 가 버리고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축 늘어져 있는 병사들의 모습을 쓸어 보던 오삼계는 부관에게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피해 상황은?”

“사상자 천여 명에 실종 팔백 명입니다.”

“실종은 뭐지?”

바로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던 부관은 이내 그의 눈치를 보며 이야기를 했다.

“미처 전사를 확인하지 못한 인원이 있고 그리고…….”

“그리고 또 뭔가!”

짜증을 내며 오삼계가 다그치자 부관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전투 중에 무단으로 이탈한 병사들입니다.”

오삼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탈영한 놈들이 그리 많단 말인가!”

불같이 화를 내는 그의 호통 소리에 부관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예.”

“이런 무책임한 것들 같으니라고. 사내자식이 어찌 적을 보고 꽁무니를 뺄 수가 있어!”

오삼계는 적에게 당한 것보다 아군을 배신하고 도망친 탈영병들에 대한 분노가 더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제 와서 탈영병들을 잡아 오라고 소중한 병력을 분산시킬 수도 없는 노릇.

홧김에 발로 바닥을 쿵쿵 구르며 분을 삭인 그가 겨우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리며 부관에게 물었다.

“예친왕파 인사들을 잡아들이러 간 이 대와 삼 대에서는 연락이 왔나?”

“……아까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어찌 됐다던가?”

“그게, 몇몇 피라미들을 잡아들이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저택이 비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익.”

말을 듣자마자 오삼계를 주먹을 꽉 움켜쥐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처음부터 우리가 움직일 것을 알고 있었군.”

설마설마했던 것이 예친왕 세력을 체포하러 갔던 병력마저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는 이야기에 확실해졌다.

“계획이 누설됐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것 말고는 이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잖나.”

이 정도도 못 알아듣겠냐는 듯 오삼계가 핀잔을 주었다.

“그렇군요.”

부관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번뜩 무슨 생각이 떠오른 것처럼 오삼계가 눈을 크게 떴다.

“성문을 모두 봉쇄한 건 분명하겠지?”

“예. 각 수문장들한테 확실하게 지시를 내렸습니다.”

“문이 닫히는 것까지 똑똑히 확인했느냔 말이야!”

“그, 그것까지는…….”

당황한 듯 딸꾹질까지 하면서 부관이 겨우 대답하자, 오삼계는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적이 매복해 있고 예친왕 세력들의 집이 모두 다 텅텅 비어 있는데, 성문이 닫혔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

네 눈은 천리안이라도 되냐고 오삼계가 길길이 날뛰었다.

“당장 병사들을 보내 확인해 봐!”

“예, 예!”

뒤꽁무니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관이 다급하게 달려갔고, 뒤에 남은 오삼계는 자신의 예상이 부디 틀렸음을 기도하며 자꾸만 엄습해 오는 불길한 예감을 뿌리치려 머리를 흔들었다.

오군도독부에 속한 다섯 명의 만인장급 고위 장수 중 한 명인 이장천은 얼굴을 구긴 채 연신 욕설을 내뱉으며 말을 몰았다.

“젠장 할!”

그러자 뒤에 따라가던 장수가 그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형부시랑을 잡았지 않습니까.”

“그럼 뭐 해! 그놈 하나를 제외하면 죄다 잔챙이뿐인 걸.”

목표로 했던 예친왕 측근들을 대부분 놓친 것에 짜증을 내는 거였는데, 그나마 형부시랑이 가족만 데리고 왕부로 급히 들어오라는 지시를 어기고 욕심을 부려, 가지고 있던 재물을 챙기느라 꾸물대다가 잡히지 않았다면 정말 빈손으로 돌아갈 뻔했다.

돌아오는 길 내내 이장천이 온갖 욕설을 중얼거리며 투덜대자 줄곧 그의 눈치를 보고 있던 부하 장수 하나가 슬쩍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무슨 말이야?”

뚱하니 대꾸하는 이장천을 향해 부하가 답했다.

“우리가 덮친 예친왕 측 사람들의 저택이 하나같이 텅 비어 있지 않았습니까. 아무래도 정보가 샌 것 같습니다.”

“음. 들어 보니 그런 것도 같군.”

부하의 말이 제법 그럴듯해 이장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본대와 합류하면 뭔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지.”

퉁명스럽게 넘기긴 했지만 말하는 그의 얼굴 역시 그리 밝진 않았다.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게 없고, 번번이 허탕만 치게 되니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 해도 이쯤 되면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간다는 걸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밤거리를 휘하 병력을 이끌고 얼마쯤 더 갔을까 갑자기 함성과 함께 양옆에 위치한 건물 옥상에서 시커먼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화살을 날렸다.

“공격!”

슈슈슉! 슈슉! 슉!

“뭐, 뭐야?”

“으악.”

“컥.”

쏟아지는 화살 세례에 아무것도 모르고 이동하던 오군도독부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며 크게 당황했다.

“매, 매복이다!”

어느새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빼 들고 날아오는 화살을 쳐 내던 이장천은 목이 터져라 고함을 내질렀다.

“방패를 들어서 화살을 막아라!”

그의 외침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병사들은 허둥지둥 방패로 몸을 가리고는 방어 대형을 갖췄다.

투투툭! 투툭!

푹.

“꾸엑.”

방패 사이로 파고드는 화살에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지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피해가 덜했다.

얼굴을 와락 구긴 이장천은 이 상태로 있으면 불리하다는 판단에 좌우를 둘러보면서 소리쳤다.

“방패를 세우고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뒤로 물러서라!”

어둠 때문에 상대가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기 어려웠기에 뭘 하든 일단 매복 지역을 벗어나려는 의도였다.

그러자 병사들은 곳곳에 있는 하급 군관들의 독려 속에 비교적 대오를 유지하면서 왔던 길로 후퇴했다.

이대로 물러선 뒤 전열을 재정비하면 곧장 반격을 가해 매복해 있던 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싹 다 쓸어버리라 다짐하며 이장천은 속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뒤편에서 들리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무참히 깨져 버렸다.

두두두두!

“쳐라!”

“우와아아!”

야골타가 이끄는 백기단 병력이 무서운 기세로 덮쳤다.

오군도독부 병사들 사이로 파고든 야골타와 백기단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병장기를 휘둘렀다.

“이야압!”

슈악.

“컥!”

상대는 장창과 방패를 들어 어떻게든 방어를 해 보려 했지만 군마에 탄 채 다가와 내려치는 백기단의 장검에 속수무책으로 목숨을 잃었다.

서걱.

“끄으윽.”

푸화아악.

여기저기에서 피가 튀고 비명성이 울려 퍼졌다.

병장기가 부딪치고 살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가 들릴 때마다 하나의 생명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오군도독부 병사들의 대오가 흔들렸다.

“겁먹지 말고 맞서 싸워라!”

이장천이 목이 터져라 부하들을 독려했지만 오군도독부 병사들을 덮친 공포를 극복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오는 급격히 무너져 내렸고 어느 틈에 아군 병사들의 피를 갑옷 곳곳에 묻힌 야골타가 그를 발견하고는 사나운 기세로 달려왔다.

채챙!

“네놈이 이 버러지들의 우두머리구나!”

“야골타 장군,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가슴을 노리고 날아오는 검격을 가까스로 막아 낸 이장천은 깜짝 놀란 얼굴로 야골타를 쳐다봤다.

“큭큭큭. 놀랬느냐?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빌면 목숨만은 살려 주지.”

비웃음을 지으며 여유를 부리는 야골타의 모습에 이장천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죽여 버리겠다!”

“얼마든지.”

분노한 이장천이 말 옆구리를 발로 차며 달려들었다.

그 기세가 제법 사나웠지만 야골타는 전혀 긴장한 기색 없이 여유만만하게 맞받아쳤다.

챙!

검을 맞대는 순간 이장천은 묵직한 충격에 절로 신음성을 내뱉으며 팔이 쩌릿쩌릿해지는 걸 느꼈다.

“끄응.”

지금껏 어디 가서 완력에서 밀려 본 적이 없었기에 당혹감이 더 컸다.

“허접스럽군.”

냉소를 지은 야골타는 호선을 그리며 장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쳤다.

황급히 검을 들어 올려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이미 기가 눌려 버린 이장천은 과연 자신이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야골타의 힘을 이기지 못한 이장천은 검을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헉!”

쨍그랑.

검은 쇳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고 이장천은 경악한 얼굴로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야골타의 검을 쳐다봤다.

“아, 안 돼.”

슈칵.

시뻘건 선형이 튀고 사선으로 가슴이 베인 이장천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부릅뜬 눈으로 야골타를 노려보다 그대로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끄르르륵.”

이장천을 죽인 야골타는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 움직였다.

그런 가운데 한데 뒤엉킨 양쪽의 혈투는 어둠 속에서 한층 더 치열해졌고 시간이 갈수록 백기단 쪽으로 전세가 기울었다.

기습을 받아 먼저 기선을 빼앗긴 데다 지휘관인 이장천의 전사는 큰 타격이었다.

악전고투를 펼치며 끝까지 저항하는 병사들이 많았지만 안타깝게도 고립되고 협공을 받아 그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결국 얼마 있지 않아 오군도독부 병사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모두 병장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무기를 버려라!”

툭툭.

야골타의 고함에 오군도독부 병사들이 하나둘 가지고 있던 무기를 바닥에 버리자 백기단도 더 이상 공격을 하지 않았다.

비록 무기를 맞대고 싸웠지만 윗대가리들의 권력 다툼 때문일 뿐 어차피 같은 청군이니 목숨을 살려 줄 거라 생각했기에 오군도독부 병사들은 순순히 말을 들으며 시키는 대로 순순히 한곳으로 모였다.

잠시 포로 신세가 되겠지만 태후와 예친왕의 싸움이 끝나면 바로 풀려나 원래 자리를 찾을 거라 다들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처절한 배신으로 돌아왔다.

“이봐, 괜찮아?”

전투 때 입은 상처를 부여잡고 아픈 듯이 신음성을 흘리고 있는 동료의 모습에 병사가 물었다.

입고 있던 옷을 대충 찢어 지혈을 하긴 했으나 제대로 의원에게 치료를 받은 것이 아니라 불안했는데 입술까지 퍼래져서 몸을 덜덜 떠는 게 영 심상치 않아 보였다.

“괜찮아. 몸이 식어서 그런지 좀 추울 뿐이야.”

“어디 봐.”

병사는 동료의 이마에 손바닥을 얹고 열을 쟀다.

“세상에! 열이 펄펄 끓잖아.”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높은 체온에 병사가 깜짝 놀라 말했다.

“그 몸을 해 가지고 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두 발로 서 있었나?”

“헤헤. 살려면 별수 있어.”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지.”

그렇게 핀잔을 주긴 했으나 그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알았다.

만약 몸에서 열이 좀 난다고 말을 해도 적들이 그걸 들어 줄 리가 없을뿐더러 괜히 흠씬 두들겨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던 동료가 외마디 신음과 함께 몸을 휘청거렸다.

“어이!”

황급히 동료를 부축한 병사는 정신 차리라며 뺨을 찰싹 때렸다.

“이보게, 설마 여기서 기절하는 건 아니지? 눈 좀 떠 봐!”

하지만 그는 가는 숨소리만 힘겹게 내뱉을 뿐,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까보다 훨씬 더 식은땀을 흘리는 것 하며 시체처럼 힘없이 몸을 축 늘어뜨리고 고개조차 가누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선 병사는 이거 큰일 났다고 속으로 혀를 찼다.

“무슨 일이야?”

“뭐야, 병자냐?”

“포로로 잡힌 판국에 송장까지 치우게 생겼구먼.”

웅성웅성 모인 주변 사람들이 무책임하게 내뱉는 말을 듣고 눈을 부라린 병사는 어쩔 수 없이 동료를 들쳐 업고 앞줄로 나섰다.

사정을 설명하면 하다못해 약이라도 하나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막상 백기단을 마주하자, 이상하게 거리가 벌어진 것을 보고 병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포로들을 한데 모아 놨으니 당연히 다음 순서는 예친왕부나 아니면 임시 수용소 같은 곳으로 데려가는 것일 텐데, 어쩐 일인지 멀찍이 떨어져서 이쪽의 기색을 엿보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뭐 하는 거야, 저놈들?”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을 중얼거리던 순간, 군마에 탄 채 오연히 서 있던 야골타가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가 아래로 내리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처리해.”

그러자 어느새 활을 꺼내 화살을 재고 있던 백기단 병사들이 포로들을 향해 시위를 놨다.

슈슈슉! 슉! 슉!

“사, 살려 줘!”

“으악!”

아까부터 뭔가 수상한 분위기에 불안해하던 포로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달아나려고 했지만 백기단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서 불가능했다.

쏟아지는 화살 세례에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고 포로들은 절망에 몸부림쳤다.

한순간에 공터는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무장을 완전히 해제한 상태로 한곳에 몰려 있었던 포로들을 모두 학살하는 데 걸린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걸 지켜보던 야골타는 비릿한 혈향이 진동하는 장내를 쓸어 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전장을 정리하고 다음 목표로 움직인다. 어서 서둘러.”

“옛.”

그렇게 오군도독부 휘하 한 개 만인대를 전멸시켜 버린 야골타와 백기대는 적이 압송하고 있는 친예친왕파 인사들을 구해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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