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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풍운(2) (83/104)

북경 풍운(2)

자금성 내원 깊숙한 곳에 위치한 전각에서는 늦은 밤이었지만 태후가 초조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게요?”

짜증이 가득한 어투로 태후가 묻자 최측근인 통정사 이제갑이 옆에 있다가 얼른 대답했다.

“예친왕 세력이 워낙 뿌리가 깊고 강하니 처리를 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겁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지요.”

“아무리 그래도 어찌 되고 있는지 중간보고라도 해야지, 이거 원 답답해서.”

“하면 오군도독부로 사람을 보내 상황을 알아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시오.”

이제갑이 의자에서 막 일어나려고 할 때 내관 한 명이 들어와 태후한테 허리를 숙였다.

“마마, 오군도독부에서 사람이 왔사옵니다.”

“어서 들라 하라.”

“예.”

잠시 뒤 무기를 밖에 맡겨 둔 장수 한 명이 갑옷을 입은 채 걸어 들어와서 정중히 군례를 올렸다.

“태후 마마를 뵙사옵니다.”

“그대는 누군가?”

“오군도독부 만인장인 손왕이라 하옵니다.”

“반군 소탕은 어찌 되고 있나?”

태후가 아예 예친왕 세력을 반군이라 못 박으며 묻자 손왕은 약간 머뭇거리다가 그녀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문제가 생겼사옵니다.”

“문제라니!”

중년의 나이였지만 여전히 고운 태후는 붓으로 그려 놓은 듯 가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앞에 있는 손왕을 무섭게 쏘아봤다.

그러자 손왕은 등줄기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말을 이었다.

“계획대로 도독께서 군사를 이끌고 예친왕부를 공격했습니다만, 적들이 미리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뭐라고!”

“그래서 어떻게 됐나?”

화가 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태후를 대신해 옆에 있던 이제갑이 묻자 손왕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예친왕을 사로잡는 데 실패했습니다.”

쨍그랑!

말이 끝나자마자 태후가 집어 던진 찻잔이 손왕을 스치고 지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부딪쳐 깨졌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마마, 진정하십시오.”

“통정사는 저 말을 듣고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요!”

“신도 당황스럽지만 이미 엎질러진 일이지 않사옵니까. 지금은 벌을 내리기보다 상황이 더 꼬이기 전에 최대한 빨리 수습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제갑의 말에 태후는 끓어오르는 화를 겨우 가라앉혔다.

그녀가 간신히 진정된 틈을 타 이제갑이 손왕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오 도독은 어찌한다던가?”

“병력을 재편성한 다음에 다시 공격을 할 거라 하셨습니다.”

“흥. 당연히 그래야지.”

태후가 잔뜩 짜증이 난 얼굴로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는 가운데 이제갑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아무리 정보가 샜다지만 오 도독이 예친왕부를 단번에 제압하지 못한 걸 보면 다른 군영 병력이 저쪽에 가담한 것 같은데, 맞나?”

“그렇사옵니다. 일단 확인된 건 예친왕부 휘하의 진충군과 청기단이고, 정황상 백기단도 역도들의 편에 섰을 가능성이 크옵니다.”

“으음.”

이제갑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침음성을 흘렸고 군사에 대해 잘 모르는 태후마저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진충군이야 양쪽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아예 예친왕부 안으로 들어와 경계를 섰기에 충돌을 예상했지만 팔기군인 백기단과 청기단은 문제가 달랐다.

예친왕의 개인 사병인 진충군과 달리 두 군대는 청나라의 최정예인 팔기군 중에서도 가장 많은 실전 경험을 갖추고 전투력 또한 강해 태후가 항상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정면 대결을 피하고 기습적으로 예친왕과 추종 세력을 일소해 두 팔기군 부대가 움직이는 걸 막으려고 했는데 일이 완전히 꼬인 거였다.

“이 일을 어찌해야 된단 말인가?”

태후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자 이제갑이 얼른 입을 열어 안심시켰다.

“애초 계획보다 일이 틀어지기는 했지만 우리 쪽의 병력이 훨씬 많고 성문을 모두 단단히 봉쇄해 역도들은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이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그러자 여장부답게 빠르게 신색을 회복한 태후는 앞에 있는 손왕을 쳐다보면서 차갑게 말했다.

“손왕이라고 했지.”

“예, 태후 마마.”

“오 도독한테 어떤 희생을 치러도 좋으니 예친왕과 그 수하들을 단 한 명도 빼놓지 말고 모두 잡아들이라고 하게.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오군도독부 장수들은 전부 목을 내놔야 될 것이야. 알아들었나!”

날카롭게 날이 선 태후의 말에 손왕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얼른 허리를 숙였다.

“옛.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럼 물러가 보게.”

“네.”

금과 작은 보석을 써서 만든 기다란 손톱 장식으로 잔뜩 치장한 손을 태후가 살짝 들어 내젓자 손왕은 군례를 취한 뒤 뒷걸음질을 쳐서 방에서 물러났다.

“일이 이렇게 꼬이다니.”

고운 이마를 찡그린 태후가 탁자 한쪽에 놓여 있던 장죽長竹을 입에 물자 시녀가 얼른 불을 붙였다.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은 태후는 이제갑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통정사.”

“하교하십시오.”

“지금 당장 황제 폐하를 내 처소로 모셔 오고, 금군에 일러 예친왕이 반역을 일으켰으니 황궁을 엄중히 지키라 하시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권력의 원천인 황제를 옆에 두고 예친왕을 반역 세력으로 확실히 못 박아 두려는 태후의 생각을 읽은 이제갑은 경직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직까지는 자신이 유리한 걸 알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에 태후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한편 북경에 잠입해 있던 주작단 단원들은 갑작스러운 급변 사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상황을 파악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북경 지부장인 함길현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 밀실 안에 모여 있던 단원들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오셨습니까.”

“어떻게 됐나?”

비어 있는 가운데 자리에 가서 앉은 함길현이 다짜고짜 묻는 말에 도석재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현재로서는 북경 성문이 모두 봉쇄됐고 오군도독부와 진충군이 예친왕부에서 충돌해 유혈사태가 벌어졌다는 것 외에는 아직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자 함길현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이맛살을 찡그렸다.

“이런 중차대한 상황이 벌어질 때까지 전혀 낌새를 차리지 못했다니 다들 일을 어떻게 한 거야!”

“죄송합니다.”

아무리 상대가 은밀히 움직였다지만 대립이 격화된 이후부터 양쪽을 면밀하게 감시하고 있었던 만큼 미리 수상한 조짐을 파악하지 못한 건 분명한 실책이었기에 모여 있는 단원들은 얼굴을 들지 못했다.

중요한 정보를 놓친 것에 이어서 잔뜩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호통이나 치고 있을 때가 아니었기에 함길현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꾹 눌러 참고 입을 열었다.

“정보가 너무 없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북경에 있는 조직망을 총동원해서 상황을 파악해!”

“옛.”

그때 단원 한 명이 다급한 얼굴을 한 채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지부장님, 급보입니다.”

“뭔지 말해 봐.”

“예친왕부로 갔던 오삼계가 진충군과 청기단이 파 놓은 함정에 걸려 큰 피해를 입고 물러섰고 오군도독부 소속 병력 일만이 내성 안에서 야골타가 이끄는 백기단한테 전멸당했다고 합니다.”

“젠장!”

주작단에서 잔뼈가 굵은 함길현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당장 본국에 상황을 알려!”

“예, 예!”

도재성이 황급히 밖으로 나가자 함길현은 이마를 손으로 짚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골치 아프게 됐군.”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는 사태에 지끈지끈 두통이 밀려오는 듯했다.

주작단 단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상황은 더욱 급박하게 돌아갔다.

이장천이 이끌던 만인대가 백기단의 습격으로 전멸됐고 동직문의 수문장이 배신해 예친왕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걸 알게 된 오삼계는 크게 분노했다.

만인대를 잃은 것도 큰 타격이었지만, 동직문을 빼앗겼다는 건 상대가 언제든 성을 빠져나갈 퇴로를 확보했고 더불어 시간이 지나면 지원 병력과 합류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기에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대노한 오삼계는 예비로 빼 둔 병력까지 모두 동원해 예친왕부를 재차 공격하는 한편 일군一軍을 보내 동직문 탈환에 나섰다.

이에 예친왕 측도 적극 방어에 나서며 곳곳에서 충돌이 벌어져 북경 시가지는 삽시간에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살벌한 전장으로 변해 버렸다.

압도적인 병력을 앞세운 오삼계의 파상 공세에 예친왕군은 한때 왕부 바로 앞까지 밀리며 위기의 순간을 맞았지만, 일출과 함께 가까스로 지켜 낸 동직문을 통해 외곽에 주둔하고 있던 팔기군이 북경성 안으로 들어오면서 전세는 급변했다.

지원군이 도착하자 기세가 오른 예친왕군은 공세로 전환해 황제가 있는 자금성을 향해 진격했지만, 얼마 못 가서 태후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직례총독 왕영의 병력이 합류하면서 또다시 전세가 요동쳤다.

이렇게 양쪽이 밀고 당기며 전투를 계속 이어 가는 동안 화려했던 북경 시가지는 폐허로 변해 갔다.

그러는 사이 함길현이 보낸 급보는 천진에 있는 주작단 거점을 통해 배편으로 한양에 보내졌다.

그날도 어김없이 도현은 대궐에서 밀려드는 보고서와 상소문을 상대로 씨름을 하고 있었다.

잠시 쉬자고 하면서 칠현이 가져온 식혜를 홀짝거리고 있던 그는 문득 생각난 듯이 고개를 치켜들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연이는 뭘 하고 있어?”

얼마 전 중전과 함께 식사를 할 때 얼굴을 보긴 했지만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어 그저 몸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것만 확인한 것에 불과했다.

“지금쯤이면 한창 공부하는 중일 것이옵니다.”

언젠가는 세자 책봉이 될 몸.

아직 어리다곤 하지만 평범한 양반집 아이들도 대충 예닐곱 살쯤에는 책을 읽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교육을 받으니, 이제 어느 정도 나이가 찬 연이가 매일 스승과 함께 공부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하, 요즘엔 장수가 되겠다고 검을 휘두르고 다니지 않는 모양이지?”

언젠가 망아지를 선물했던 일을 떠올리며 도현이 웃었다.

“검술 훈련이라면 체력 단련도 겸해서 꾸준히 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중전 마마께서 조건을 달으셨다고 하던데요.”

“무슨 조건?”

“말을 타려면 하루에 쉰 개 이상 한자를 외워 와야 한다고요. 보는 눈앞에서 직접 글자를 쓰게 한 다음 하나라도 틀리면 마구간에 가지도 못하게 금지하셨다고 합니다.”

“중전도 참.”

애초에 검술 훈련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나 망아지를 선물한 것도 다 도현이 한 일이니, 엄밀히 말하자면 중전에겐 금지시킬 권한이 없었다.

하지만 자식들에겐 다소 무른 경향이 있는 도현을 대신해 스스로 엄한 부모 역할을 자처한 중전을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

오히려 계속 놀고만 싶어 하는 연이를 책상머리 앞에 딱 붙들어 놓은 공로를 칭찬해야 마땅했다.

“그럼 어디 한번 구경하러 가 볼까.”

서책을 펴 놓고 잔뜩 울상을 짓고 있을 아들 녀석의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유쾌해진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바로 가시게요?”

“당연하지. 자고로,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하잖아.”

그건 이런 경우에 쓰는 속담이 아닐 텐데.

칠현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도현을 안내했다.

희정당을 나가 연이가 거처로 삼고 있는 전각에 도착하니, 입구에 서서 경비를 맡고 있던 위사들이 그가 걸치고 있는 곤룡포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머리를 숙였다.

“저, 전하!”

“소란 피우지 말거라.”

방 안에 있는 행여나 연이가 알아차릴까 봐 병사들을 조용히 시킨 도현은 연이가 어디 있는지를 물었다.

“마마께오선 제일 오른쪽 온돌방에서 공부를 하고 계시옵니다.”

“그래?”

역시 예상대로라며 희희낙락하던 도현은 얼른 안으로 들어가자며 칠현을 재촉했다.

방 앞에 다다를 때까지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와중에도 전각에서 일하는 궁녀며 내관 들이 두 사람을 알아보고 대경실색했지만, 그때마다 칠현이 쉿, 쉿 하면서 반대로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게 연이가 있다는 방문 앞에 도착하자, 안에서 낭랑하게 뭔가를 암송하는 목소리가 작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헌물부모거든 궤이진지하며, 여아음식하거든 궤이수지하라. 행물만보하고 좌물의신하라…….”

한자를 소리 나는 그대로 읽고 나더니, 이윽고 크흠 목을 가다듬는 것과 동시에 계속해서 이번엔 경전의 뜻을 해석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부모님께 물건을 드리거든 꿇어앉아서 올리며, 나에게 음식을 주시거든 꿇어앉아서 받아라. 다닐 때 거만하게 걷지 말고, 앉을 때 몸을 기대지 말라…….”

귀를 기울여 연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도현은 깜짝 놀란 듯 칠현을 향해 속닥였다.

“저건 사자소학이지 않느냐? 벌써 연이가 저런 책을 읽고 있다고?”

“곧 천자문과 소학을 다 떼고 나면 이제 논어를 공부하신다 합니다. 지금은 그저 복습 차원에서 혼자 읽고 계신 것이겠지요.”

그러고 보니 방에 다른 기척이 없는 것으로 보아 연이 혼자서 소리 내어 읽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천방지축이던 연이가 말이지.”

도현은 새삼스레 세월의 흐름을 느끼며 시원섭섭한 듯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마마께서 공부에 매진하는 게 싫으십니까?”

“물론 기쁘지. 당연히 해야 될 일이기도 하고. 하지만 왠지 모르게 자식이 벌써 다 커 가지곤 내 품을 떠나는 느낌이라 이상한 기분이 든단 말이야.”

아버지의 심정이 딱 이런 감정일까.

바깥일 때문에 얼마간 집을 떠나 있었더니 품에서 재롱을 부리던 어린아이는 어디로 사라지고, 어느새 훌쩍 커서 소년이 되어 버린 자식을 깨달았을 때처럼 묘한 기분이었다.

“이러다가 몇 년 더 지나면 어엿한 청년이 되어서 장가도 가고 그러겠지.”

언젠가는 이 손에 손자를 안게 되는 일도 있을까, 하며 도현이 흐뭇하면서도 조금은 복잡한 심경을 느끼고 있을 때 갑자기 한 내관이 두 사람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전하, 여기 계셨습니까?”

“쉿, 조용히 하라.”

칠현이 황급히 내관의 입을 막으며 험악하게 대꾸하자 그는 영문을 몰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자세히 보니 도현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녔는지 이마에 땀이 배어 있고 숨을 헐떡이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칠현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

“전하께 긴히 전해 드릴 일이 있사옵니다.”

진짜 급한 일인지 내관이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말해 보아라.”

“예, 사실은…….”

“목소리는 낮추고.”

연이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방 안을 도현이 힐끔 눈짓하며 주의를 주자 내관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 작게 속닥였다.

“주작단 이완 단장께서 전하를 뵙기 위해 지금 희정당에서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용건은?”

“그것까진 잘…….”

사소한 일로 도현을 찾을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가 직접 왔다는 건 분명 중요한 용건 때문임이 확실했다.

“알았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갈까 싶어 손을 뻗던 도현은 이내 쓰게 웃으며 돌아섰다.

“자식이 모처럼 열심히 공부를 하겠다는데 그걸 방해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지.”

앞으로 점점 더 커 갈수록 그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만 하는 아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럽다곤 하나 자식이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있게 뒤에서 지켜봐 주는 것도 부모가 해야 할 일이었다.

“연이에겐 내가 왔다는 걸 알리지 마라.”

“예. 여기서 일하고 있는 궁인들에게 단단히 일러두겠습니다.”

도현의 내심을 헤아린 칠현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돌아갈까.”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자식을 뒤에 남겨 놓고, 도현은 다시금 본래의 일상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희정당으로 다시 돌아오자 주작단 단장인 이완이 초조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얼른 일어났다.

“전하.”

“많이 기다렸나?”

“아닙니다.”

“앉지.”

“예.”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상궁 한 명이 차를 가지고 들어와 앞에 내려놨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도현은 앞에 있는 이완 단장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그래, 무슨 일인가?”

“북경에서 급보가 도착했습니다.”

북경이라는 말에 도현은 차 마시던 걸 멈추고 미간을 살짝 모았다.

“드디어 일이 터진 건가?”

“옛. 닷새 전에 예친왕과 태후가 각기 따르는 병력을 동원해 싸움을 벌였다고 합니다.”

“으음.”

이미 주작단을 통해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양측의 무력 충돌이 그리 충격적인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침음성이 새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심각한 수준인가?”

“자금성이 불에 타고 양측 군대가 벌인 치열한 시가전에 북경이 쑥대밭이 됐다고 합니다.”

“으음.”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낮은 침음성을 내뱉었다.

“단순한 충돌이 아니군.”

“그렀습니다. 양측이 완전히 갈라져 내전 상태에 돌입한 것이옵니다.”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이 스친 도현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입을 열었다.

“어느 쪽이 우세한 상황인가?”

아주 중요한 문제였는데 누가 승기를 잡아 청나라의 새로운 주인이 되느냐에 따라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크게 요동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북경에 변고가 생긴 그 순간부터 이미 조선과 청 그리고 명나라는 엄청난 태풍의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간 거였다.

“이번에 도착한 정보만으로는 아직 섣불리 판단을 내리기 어렵사옵니다.”

“청군의 주력인 팔기군의 지지를 받는 예친왕이 유리한 것 아닌가?”

“얼핏 생각하면 그렇습니다만 태후가 금군과 오군도독부를 장악하고 있고 직례성 총독도 수하에 두고 있어 북경에서는 예친왕보다 무력이 더 강하다고 봐야 됩니다.”

“태후도 예친왕을 치기 위해 나름 착실히 준비를 해 놨군.”

도현이 무겁게 머리를 끄덕이자 이완 단장이 말을 받았다.

“힘으로 부딪쳐도 자신이 있으니 먼저 칼을 빼 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군.”

손가락 끝으로 앞에 있는 서탁을 툭툭 두드리며 잠시 고심을 하던 도현은 고개를 들며 사뭇 진지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경이 보기에 이번 내전에서 누가 이길 것 같나?”

그러자 이완 단장은 항상 명쾌한 답을 내놓던 평소와 달리 상당히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신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그 정도로 막상막하라는 말인가?”

“예. 팔기군을 장악한 예친왕이 무력은 한 수 위라 생각하지만 태후는 그걸 충분히 상세할 만한 병력을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황제를 데리고 있으니 대의명분에서 확실히 앞서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야.”

“어떻게든 승자가 결정되겠지만 누가 됐건, 인적 물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는 건 불가피할 것이옵니다.”

“청을 치려면 지금이 기회인데 아쉽군.”

도현은 혀를 차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출정 명령을 내리고 싶었지만 아직 왜국 원정이 다 마무리되지 않은 데다 광활한 청나라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조선군의 준비가 완벽하지 않았기에, 절호의 기회였지만 그냥 지켜만 봐야 했다.

“딱 일 년만 늦게 일이 터졌어도 좋았을 텐데…….”

계속해서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자 이완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전하, 성에 차지는 않으시겠지만 신한테 조금이나마 기회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사옵니다.”

“그게 뭔가?”

그가 상체를 살짝 앞으로 숙이면서 관심을 보이자 이완은 생각해 온 계책을 이야기했다.

“북경성 대신 영원성을 함락시키는 겁니다.”

“영원성을?”

“네. 봉황도와 가까워 병참에 큰 부담이 없고 영원성을 점령한다면 유사시 북경으로 향하는 관문인 산해관에 바로 직행하는 길을 확보하며 동시에 만리장성 이북 지역을 모두 아국의 세력권에 집어넣을 수 있으니 일석삼조가 아니겠습니까.”

설명을 다 들은 도현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을 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생각이야. 헌데 요서를 관장하는 대성大城인 영원성을 쉽게 함락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군.”

청 태조인 누르하치가 수차례 여길 함락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하며 엄청난 피해만 입고 목숨까지 잃은 곳이었기에 도현이 염려하는 건 당연했다.

“성벽이 높고 주둔하는 병력이 많다고 하지만 이미 한차례 함락된 곳이 아니겠습니까.”

이완 단장의 말에 도현은 눈을 반짝 빛냈다.

“그렇지.”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영원성이었지만 명 조정의 무관심 속에 외로이 고군분투하다가, 청군의 피로 성벽을 온통 붉게 물들이며 결국 예친왕한테 무너졌었다.

그때 심양 관저 생활을 하던 도현도 형인 소현세자를 대신해 직접 종군을 했었기에 누구보다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경의 말이 맞아. 예친왕도 했는데 짐이라고 못 할 것이 없지.”

“맞사옵니다.”

영원성을 공략하기로 마음을 굳힌 도현은 허리를 펴며 힘이 가득 들어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전 상황을 상세히 파악해 보고하고 영원성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수집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이완 단장이 머리를 바닥에 대며 대답하는 걸 보며 도현은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날 오후 도현은 급히 총참모부 회의를 소집한 뒤 청나라에 내전이 터졌다는 걸 알리고 영원성을 함락시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말이 끝나자마자 회의실 안은 폭탄이라도 터진 듯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그런 일이…….”

“아직 왜국 원정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입니다.”

“북경은 몰라도 영원성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생각합니다.”

“그렇게 성급하게 덤빌 일이 아닐세. 자칫 누르하치의 전철을 밟게 되면 어찌하려고 그러나!”

“그럼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보고만 있자는 거요?”

“신중하자는 거지.”

“그렇게 미적거리다가는 백 년이 지나도 산해관 성문 앞에 가 보지 못할 겁니다.”

“지금 뭐라고 했나!”

참석자들이 두 패로 갈려 서로 갑론을박 말을 쏟아 내자 도현은 손바닥으로 앉아 있는 의자 팔걸이를 내려쳤다.

탕!

“조용히들 하게!”

다들 입을 다물자 도현은 좌우에 앉아 있는 장수들을 훑어보다가 새로 삼 군단장에 임명된 이상규를 보며 말했다.

“이 군단장.”

“예.”

“영원성 공략이 불가한 이유를 말해 봐.”

가장 극렬하게 반대를 한 이상규는 도현의 물음에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이야기를 했다.

“북경에 비해 가깝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양에서 수만 리나 떨어진 곳인데 거기까지 대군을 보내고 병참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아국 수군 대부분이 왜국에 나가 있는 상태라 해상 보급이 불가능해 전부 육로를 이용해 옮겨야 되는데, 이건 너무나도 큰 부담입니다.”

“이미 아국의 영토가 된 봉황도에서 병참을 지원한다면 보급로가 그리 길지 않으니 그건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렇긴 하오나 화약과 포탄 같은 물자는 심양 병기창만으로 다 감당하지 어렵지 않겠사옵니까. 그리고 얼마 전 있었던 왜국 원정으로 인해 그동안 비축해 놓은 보급품을 상당수 소모한 상태라 또다시 대규모 전쟁을 치르는 건 위험 부담이 너무 크옵니다.”

그러자 도현은 고개를 돌려 오른편에 앉아 있는 국방대신 임경업을 봤다.

“북방군의 비축 물자 상태가 어떤가?”

질문을 받은 국방대신 임경업은 막힘없이 바로 대답했다.

“왜국 원정은 경기도 이남의 남방군을 주축으로 병력과 물자를 차출했기에 당장 전쟁을 치러도 이상이 없을 정도의 비축분이 있사옵니다.”

“들었지.”

도현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다시 시선을 옮기자 이상규가 급히 말을 덧붙였다.

“일반 보급품은 그렇다고 해도 화약은 공성전을 시작하면 순식간에 소모되지 않겠습니까?”

이상규의 반박에 임경업이 담담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봉황도에는 청군의 공격에 대비해 항상 한 달 분의 화약 재고를 보관 중이고 두 달 뒤면 왜국에서 수군 함대가 귀환을 할 테니 보급선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 걸세.”

임경업의 말에 도현이 바로 덧붙였다.

“청국을 완전히 정복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만리장성 밖 요서 지역과 영원성을 장악하는 거라면 현재 북방군 전력만으로도 충분할 게야. 그리고 무엇보다 장차 청국 내지를 공략하고 기존 영토를 지킬 안전지대를 확보하는 차원에서도 이번 출정은 꼭 필요해.”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제기하는 문제를 조목조목 반박한 뒤 출정이 필요한 이유를 조리 있게 설명하자 이상규를 비롯한 장수들은 더 이상 반대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반대하던 장수들을 진정시킨 도현은 반박의 여지를 주지 않는 단호한 말투로 못을 박았다.

“북방 영토를 확보한 것이, 아국이 짙은 어둠 속에서 벗어나 새롭게 태어나는 밑거름이 됐다면, 이번 요서 공략은 대제국으로 가는 첫 발걸음이 될 것이야. 청국의 내전이 어떻게 결론이 나건 한 달 뒤 출정을 할 것이니 그렇게 알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서로 찬반이 갈려 시끄럽게 목소리를 높였지만 도현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만큼 결정을 내리자 다들 조금의 불만이나 이의 없이 고개를 숙이며 명령을 받았다.

“충!”

“국방대신.”

“예.”

“총참모부에서 논의를 해 사흘 안에 구체적인 공략 방안을 만들어 짐한테 보고하시오.”

“알겠사옵니다.”

모여 있는 장수들을 바라보는 도현의 눈에는 영원성을 함락시키겠다는 열의가 활활 뜨겁게 타올랐다.

이렇게 영원성 공략전이 결정되자 조선군의 전략을 총괄하는 총참모부는 또다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북방군이 빠져나갔을 때 해당 지역을 대신 지킬 병력의 추가와 진격 경로 그리고 후방 지원 문제에 대한 열띤 조율과 논의를 벌였다.

이런 세세한 문제까지 도현이 관여하면 일이 복잡해지기에, 실무자들한테 모든 걸 맡기고 그는 한발 뒤로 물러서 큰 밑그림만 그렸다.

한편 청나라 내전은 시간이 갈수록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한때 자금성까지 위협하며 상대를 몰아붙였던 예친왕은 태후가 오군도독부에 이어서 직례성 병력까지 동원해 인해전술을 펼치자 더 이상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석가장石家莊으로 퇴각했다.

비록 승리를 거두며 북경과 자금성을 지켜 냈지만 태후파는 가장 큰 목표였던 예친왕 세력 제거에 실패했기에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거기다가 후퇴는 했어도 예친왕이 전력을 상당수 보존하고 있었기에 아직 내전이 끝난 게 아니었다.

첫 번째 충돌을 끝낸 양쪽은 숨 고르기를 하며 각자 지방에 있던 지지 세력을 끌어모으고 있었기에 내전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봐야 했다.

보름간의 전투로 북경 시가지는 화려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모두 사라지고, 불에 타고 부서져 온통 폐허로 변해 버렸다.

하지만 처참한 바깥과 달리 황궁의 담벼락 안쪽만은 마치 딴 세상인 것처럼 여전히 호사스러운 생활이 이어졌다.

그런 자금성 깊은 곳에 위치한 내전에서는 아침부터 짜증이 가득한 태후의 고성이 터져 나왔다.

“강남에 있던 팔기군 병력이 예친왕에게 합류하기 위해 전선을 이탈해 북상 중이라는 말이 사실이오!”

방 안에 모여 있던 신하들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눈치만 봤다.

“왜 다들 대답이 없소!”

고운 아미를 사납게 치켜 올린 태후가 재차 다그치자 오군도독인 오삼계가 마지못해 나서며 입을 열었다.

“황黃, 홍紅, 남藍 기단이 역도들 편에 섰다고 합니다.”

“저들이 무단으로 움직일 때까지 지휘관들은 도대체 뭣들 하고 있었던 거요!”

“그게, 팔기군은 중앙군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병력인 데다 미처 손을 쓰기 전에 군영을 이탈했다고 합니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거요!”

자신의 잘못도 아니고 지금 거론된 병력은 처음부터 예친왕을 지지하는 세력이었기에 충분히 이런 사태를 예견했었기에 오삼계는 야단을 듣는 것이 억울했다.

하지만 초반에 북경을 제대로 봉쇄하지 못하고 예친왕을 잡지 못한 원죄(?)가 있었기에 오삼계는 불만이 있어도 표현을 하지 못하고 꾹 눌러 참았다.

그러자 통정사 이제갑이 끼어들어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었다.

“그놈들은 어차피 처음부터 역도들과 한패였고 그래도 한인 팔기들이 그대로 남아 황제 폐하께 충성을 맹세했으니 다행이지 않사옵니까.”

“그래 봤자 만주 팔기의 상대가 되겠소?”

“한인 팔기도 수십만 황군 중에 고르고 골라서 만든 정예들이니 충분히 만주 팔기와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겁니다.”

“통정사의 말이 맞사옵니다. 지난 수년간 강남에서 명군과 싸우며 단련된 병력이라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직례 총독인 왕영까지 나서 말을 거들자 태후의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

“한인 팔기를 이끄는 자가 누구라고 했나?”

“손옥 장군입니다.”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태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옆에 있던 통정사 이제갑이 얼른 이야기를 해 줬다.

“오군도독부 만인장인 손왕 장군의 친형입니다.”

“호오. 그래?”

머리를 끄덕인 태후는 오삼계를 보며 말했다.

“팔기는 같은 팔기로 상대해야 되지 않겠소?”

“그럴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통정사.”

“예, 마마.”

“손옥을 상장군에 임명하고 한인 팔기를 지휘해 예친왕을 따르는 만주 팔기들을 토벌하라는 칙서를 보내도록 하시오.”

칙서는 옥쇄를 가진 황제만이 내릴 수 있는 거였지만 태후는 상관없다는 듯 거리낌 없이 지시를 내렸고 신하들도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약간 뜸을 들이며 주위를 둘러본 태후는 군 지휘권을 맡고 있는 오삼계를 보며 입을 열었다.

“역도들이 있는 석가장 공격에 금군은 내줄 수가 없으니 그렇게 아시오.”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오삼계는 놀란 얼굴로 황급히 말했다.

“그럼 제대로 토벌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 전투로 오군도독부와 직례성 병력의 피해가 큰 상황에서 자금성에만 틀어박혀 있었던 덕분에 전력을 고스란히 보존한 금군이 토벌에 참가하지 않는다면 계획에 엄청난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예친왕 쪽에는 강남에서 올라온 팔기군과 각지의지지 세력이 속속 합세하고 있었기에 오만이나 되는 금군이 빠지는 건 너무나도 큰 손실이었다.

“폐하가 있는 자금성을 비워 둘 수는 없지 않겠소.”

“그거라면 이만 정도만 남겨 둬도 충분할 겁니다.”

단 한 명의 제대로 훈련된 병사가 아쉬운 입장이었기에 오삼계가 설득을 했지만 태후는 요지부동이었다.

“금군은 폐하의 안위를 지켜야 되는 군대이니 단 한 발자국도 자금성에서 나갈 수 없소. 대신 요서방면군 절반을 내주겠소.”

“지금 요서방면군이라고 하셨습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오삼계와 달리 태후는 너무나도 태연한 표정이었다.

“맞소.”

“그건 절대 안 됩니다.”

정색을 하며 오삼계가 반대하자 태후는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요동총병 시절부터 이름난 명장으로 태후파 내에서 예친왕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수하고 해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건 그냥 넘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오삼계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이 아니었다면 애써 세운 계략에 실패해 예친왕을 놓쳤을 때 벌써 죄를 물어 벌을 받았을 터였다.

“역도들을 토벌할 병력이 부족하다고 말한 건 도독이 아니오.”

“그렇긴 합니다만 요서방면군을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왜 안 되는지 이유를 말해 보시오.”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뒤로 몸을 기대면서 태후가 묻자 오삼계는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요서방면군에서 병력을 뺀다면 대조선 방어선에 틈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가뜩이나 내전으로 인해 국경 지역의 방비가 약해질 수밖에 없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한다면 만에 하나 적이 쳐들어왔을 때 속수무책으로 당할게 될 겁니다.”

그러자 내실에 모여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오삼계의 이야기에 동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심양을 빼앗기고 민족의 고향인 만주 지역을 잃은 청국 입장에서는 가장 큰 적이 바로 조선이었고, 수도인 북경과 아주 가까운 곳에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기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옳은 말이었지만 신하들이 자신보다 오삼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 태후는 배알이 뒤틀렸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연스럽게 태후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워졌다.

“당분간은 조선이 국경을 넘어올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삼계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태후는 금으로 만든 길쭉한 손가락 장식을 까딱이며 말했다.

“석 태감, 자네가 설명을 해 주게.”

“예, 마마.”

거세를 한 내시 특유의 간드러진 음성으로 대답을 한 태감 석달개는 살짝 숙이고 있던 상체를 들며 입을 열었다.

“오 도독께서 아직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만 조선은 얼마 전에 왜국과 전쟁을 벌인 상태라 우리 쪽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을 겁니다.”

중차대한 논의를 하는 자리에 내관이 나서는 걸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보던 오삼계는 이야기를 듣고 눈을 반짝였다.

“그게 정말인가?”

“네. 확실한 경로를 통해 입수한 정보입니다.”

“으음.”

오삼계가 침음성을 흘리자 태후가 득의만만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조선군의 위협이 없는데 십만이나 되는 정예 병력을 그냥 놀려 두는 건 낭비 아니겠소.”

“그렇기는 하지만…….”

전쟁으로 단련된 요서방면 군이 가세한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되겠지만 어쩐지 찝찝한 느낌에 오삼계는 말끝을 흐렸다.

태후는 그런 그를 비웃으며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지금은 어떻게든 역도들을 빨리 처단하고 나라를 안정화시켜야 되는 때이니 아무 말하지 말고 지시한 대로 따르시오.”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태후가 강하게 이야기를 하는 데다 팔기군을 앞세운 예친왕군에 맞서기 위해서는 머릿수만 채우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훈련받은 병사가 필요했기에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자 태후는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손옥을 상장군으로 임명하고 요서방면군 절반을 차출하는 칙서가 작성됐고 태후가 직접 보관하고 있던 옥쇄를 꺼내 찍었다.

회의가 끝나고 해가 어스름히 질 무렵, 태감인 석달개가 자금성 후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태감이란 지위 덕분에 그는 자금성에서 도보로 일다경(15분)이 조금 넘게 걸리는 적당한 거리에 커다란 저택을 구입해 출퇴근을 하였는데, 요즘 들어 옆구리가 스산한 게 아무래도 조만간 첩이나 양자를 들여 노후 대책을 세워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런 하릴없는 생각을 하며 마차를 타고 저택에 도착하니, 하인이 나와서 그를 맞이하며 손님이 왔다고 알렸다.

“누구라 하더냐?”

“이름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번에도 몇 번 오신 상인분이십니다.”

“아, 그래.”

석달개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겉옷을 채 벗지도 않은 채 곧장 손님을 만나기 위해 안채로 향하던 발길을 돌렸다.

“차가 식었을 텐데, 새로 타서 올리겠습니다.”

“됐다. 어차피 금방 끝날 용건이야.”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하인을 돌려보내고선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태감 어른, 이제 돌아오십니까.”

“음. 많이 기다리셨소?”

“아닙니다.”

석달개에게 공손하게 인사하는 사람은 바로 주작단 북경 지부장을 맡고 있는 함길현이었다.

북경에서는 부유한 상인으로 위장해 있는지라 깔끔하게 수염을 다듬고,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붉은색 비단 장포를 입고 있는 세련된 차림새였다.

석달개가 맞은편 의자에 앉자 함길현이 그를 바라보며 슬쩍 운을 던졌다.

“제가 전에 부탁드린 건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그러자 석달개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꽤나 급한 모양이시오.”

“재촉하려던 건 아닙니다.”

“어쨌든 상관없소. 어차피 오늘은 좋은 소식을 전해 주려 했으니.”

“좋은 소식이라 하시면?”

“요서방면군 절반이 북경으로 이동하게 되었소.”

“그렇습니까?”

함길현이 반색을 하며 기꺼워했다.

“결국 요서 지역의 방비가 자연스럽게 약해질 거요.”

“오삼계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태후께서 말을 꺼내자마자 반대하긴 했지만, 그쪽이 알려 준 정보를 활용해 왜국 원정으로 인해 조선이 또다시 전쟁을 할 상황이 아니라고 하니 금방 꼬리를 내리더이다. 그 표정이 참으로 볼만했지.”

그는 지금 생각해도 우습다는 듯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태감께서 참으로 큰일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건 약조한 돈입니다.”

함길현이 은근하게 목소리를 낮추며 탁자 아래에 내려놓았던 작은 궤짝을 꺼냈다.

안에 뭐가 잔뜩 들었는지 묵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들은 석달개는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냈다.

“허허. 뭐 이런 걸 다…… 어쨌든 주는 것이니 감사히 받겠소.”

입술을 살짝 핥고 슬쩍 뚜껑을 열어 보니 금색 찬란한 금원보가 가득 차 있는 것이 보였다.

재빨리 눈으로 숫자를 센 석달개는 크게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궤짝을 받아 챙겼다.

“요긴하게 잘 쓰도록 하지.”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러시오. 멀리 배웅은 안 나가겠소.”

하인이 대문을 닫는 소리를 뒤로한 채 석달개의 집을 나온 함길현은 버릇처럼 주변을 둘러본 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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