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서 공략
조선은 은밀하면서도 신속하게 요서 공략을 위한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처음 도현이 조정 대신들한테 영원성을 함락시켜 요서를 장악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반대 의견이 많았지만 내전 상태에 들어간 청국의 내부 사정을 이야기해 주자 분위기는 급반전했다.
물론 재무대신 김육을 비롯한 몇몇 신중파들이 아직 왜국 정벌이 다 마무리되지 않은 걸 이유로 들며 반대했지만, 청나라에 대한 원한이 깊고 그동안 치른 전쟁에서 계속 승리를 거둬 자신감이 생긴 신하들은, 도현이 강력하게 주장을 하고 군부가 성공 가능성이 높은 계획을 보여 주자 전쟁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그런 가운데 반가운 정보가 북경에서 날아들었다.
“그래. 요서방면군이 움직였다면서?”
도현이 약간 들뜬 얼굴로 묻자 예를 갖추고 앞에 앉은 이완 단장 역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예. 절반인 오만이 황제의 칙서를 받고 북경으로 떠났다고 하옵니다.”
“후후후. 계획대로 일이 착착 맞아 들어가는군.”
“남은 병력도 영원성에 있는 일만을 제외하고는 예비대 개념인 향용들이니 아군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더 잘됐군.”
흡족한 듯 머리를 끄덕인 도현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이완 단장을 봤다.
“시기적절하게 상대편 전력을 분산시키다니 역시 경은 날 실망시키지 않는구먼.”
“운이 좋았습니다.”
“주작단 단원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만들어 낸 결과라는 걸 잘 알고 있네.”
“전하.”
도현의 말이 메마른 토양에 쏟아지는 빗줄기처럼 이완 단장의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주군에 대한 충성이란 이름 아래 덧없이 목숨을 잃는 신하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으나, 그 무게를 알고 진심 어린 감사를 할 줄 아는 군주는 이 세상에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도현을 섬기고 있는 것에 다시 한 번 큰 기쁨을 느끼며 이완 단장은 크게 감복한 듯 머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오늘날 우리 조선이 이렇게 성장한 데에는 주작단의 공이 크네.”
“황공하옵니다.”
“그럼 이제 좀 더 뜸을 들였다가 요서로 출정하면 되겠군.”
“예.”
“내전은 어찌 진행되고 있나?”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서로 북경과 석가장에서 자기 세력을 불리고 있는 중입니다. 팔기군도 반쪽이 나서 만주 팔기는 예친왕 쪽에 그리고 한인 팔기는 태후 편에 붙었다고 합니다.”
“그렇단 말이지.”
내전이 격화될수록 국경 지역의 방비가 약화될 수밖에 없었기에 도현은 얼굴 가득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마지막까지 상대가 우리의 공격 계획을 알지 못하도록 연막을 확실히 치도록 하게.”
“맡겨만 주십시오.”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이완 단장을 보며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이 지시한 대로 주작단은 내전의 진행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는 한편 태후파와 예친왕이 요서 쪽에 신경을 쓰지 않도록 교묘하게 연막을 치며 정보를 교란했다.
그로 인해 양쪽은 조선이 봉황도에 전력과 물자를 집중시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설사 알았다고 해도 이미 내전이 벌어져 서로 피를 본 상태였기에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봉황도의 주도이자 요서 공략전의 핵심 거점인 심양은 며칠 전부터 본토에서 올라오는 병력과 보급 물자 행렬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이건 뭐야?”
“포병대에서 쓸 포탄입니다.”
짐마차를 끄는 병사의 대답에 보급품 관리를 맡은 군관은 이마를 찡그리면서 고함을 질렀다.
“그걸 여기로 가져오면 어떻게 해!”
“세워 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
“사고라도 나서 터지면 네놈이 책임질 거야!”
“아, 아닙니다.”
병사가 기겁을 하며 대답하자 군관은 한쪽 팔을 들어 성 외곽에 세워진 임시 군영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당장 군영 안에 있는 무기고로 가져가!”
“예.”
찔끔한 병사는 허둥지둥 포탄이 실린 짐마차를 끌고 임시 군영 쪽으로 갔다.
칠칠치 못한 뒷모습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찬 군관은 매서운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또 버럭 소리쳤다.
“야야! 거기 어리바리한 놈, 넌 또 뭐야?”
그렇게 한꺼번에 많은 보급품이 도착하다 보니 수령을 해서 적절히 보관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봉황도 도독인 남두병은 심양성 문루에 서서 그런 모습을 모두 지켜봤다.
“오늘은 또 얼마나 왔나?”
살짝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묻자 부관인 차학봉이 얼른 대답했다.
“병력 이천 명과 짐마차 육백 대 분의 각종 보급 물자가 도착했습니다.”
“많군.”
“사흘 안에 또 이만큼이 더 올 예정입니다.”
“전쟁을 하러 나서는 입장에서 병력과 물자가 많을수록 좋기는 하지만, 이거 창고가 부족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
“얼마 전 성 밖에 세워 둔 임시 군영에다가 대형 창고 마흔 동을 새로 지어서 그럭저럭 다 넣어 둘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
작게 고개를 끄덕이던 남두병 도독은 이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군 부대에 생명과도 같은 물자들이니 행여나 이상이 생기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를 해야 될 것일세.”
“예. 따로 천인대 세 개를 차출해서 보급품 관리과 경비 임무를 맡겨 놨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자네가 수시로 점검을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도 직접 친정에 나서시는 주상 전하를 모실 준비는 다 끝났나?”
“연락을 받자마자 심양행궁을 깨끗이 정비하도록 했습니다.”
심양행궁은 예전 청나라의 황제가 머물던 황궁을 가리키는 것으로 심양 점령 후에도 철거하지 않고 도현이 봉황도에 왔을 때 머무는 행궁行宮으로 썼다.
“잘했네. 평소에도 궁내부 인력이 상주하며 관리를 하지만 그래도 주상께서 안 계신 곳이니 이것저것 미흡한 것이 많을 거야.”
“예.”
“왜국 원정을 다녀오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친정을 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항상 솔선수범하시며 의욕적으로 움직이시는 그런 모습이 오늘날 승천의 기세로 뻗어 나가는 조선을 만든 것이지 않겠습니까?”
부관의 이야기에 남두병 도독은 동의하듯 머리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네. 아무튼 주상 전하께서 직접 오시는 만큼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야.”
“옛.”
도현이 친정 의사를 밝히자 당연히 조정대신들의 반대가 쏟아졌다.
본인의 의사가 워낙 확고한 데다 직접 전장에 나서는 일이 워낙 많다 보니 대신들도 예전처럼 강하게 만류하지는 않았다.
너무 쉽게 친정을 받아들이자 오히려 도현이 섭섭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순조롭지는 않았는데 한참 요서 공략전 준비로 바쁘던 도현은 뜻밖의 암초(?)를 만나 곤욕을 치렀다.
“아바마마!”
다닷.
마룻바닥을 밟는 발소리와 함께 숙휘 공주가 희정당으로 뛰어 들어왔다.
“어떻게 저한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상기된 뺨과 분한 듯 앙다문 입술이 단단히 화가 난 상태임을 알려 주었다.
마침 잠시 휴식을 취하던 참이라 혼자 있던 도현은 당황한 얼굴로 숙휘 공주의 뒤를 쫓아온 칠현을 보았다.
“죄송합니다. 공주님이 워낙 막무가내시라…….”
말려도 소용없었다는 표정으로 칠현이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까지 어인 일로 왔느냐?”
하지만 숙휘 공주는 물음에 답하지도 않고 오히려 도현에게 원망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어지간해선 꼼짝도 안 할 것 같은 모습에 결국 도현은 작게 한숨을 쉬고 양손을 가볍게 벌렸다.
“이리 오렴. 우리 막내가 오늘은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 게냐?”
“아바마마!”
그제야 숙휘 공주는 도현의 품에 달려들어 어리광을 부려 댔다.
“저랑 약속하셨잖아요.”
“무슨 약속?”
“여름이 되면 후원에서 꽃놀이를 해 주신다 하셨잖아요. 사람들도 많이 불러서 왁자지껄하게 놀자고, 한양에서 제일 유명한 소리꾼의 노래 솜씨도 보고 싶다고 하셔 놓고선…….”
숙휘 공주는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꼽아 가며 종알거렸다.
“연못에 배를 띄우고 물놀이를 하고 가을엔 단풍 구경 그리고 제가 좀 더 크면 사슴이랑 토끼 사냥하는 곳에도 데려가 주신다고 했는데…….”
“내, 내가 그랬나?”
그러고 보니 떨어지기 싫다고 칭얼거리는 숙휘 공주를 달래기 위해 돌아오면 이것저것 다 해 준다고 입방정을 떨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직 어리니 하루 이틀만 지나면 다 잊어버리겠지 했는데, 설마 그걸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근데 또 멀리 나가신다면서요? 너무해요. 저랑 한 약속은 하나도 안 지키시고!”
“아니, 누가 그런 말을…….”
“흥, 저는 뭐 귀도 없는 사람인가요.”
보나 마나 궁 안에 있는 상궁들이 숙덕거리는 대화를 엿들은 것이겠지만, 대단한 능력이라도 가진 양 으쓱거리는 숙휘 공주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간 본전도 못 건질 게 뻔했다.
“아바마마, 제발 안 가시면 안 돼요? 네?”
“이것 참.”
졸지에 진퇴양난의 상황에 내몰린 도현은 도움을 청하듯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칠현은 자업자득이라는 표정으로 모른 척 고개를 돌렸고, 숙휘 공주를 따라온 보모상궁 역시 자기가 나설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난감한 웃음을 흘렸다.
숙휘 공주가 단단히 결심을 하고 찾아왔으니 똑같은 수법을 쓸 수는 없고, 그렇다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막내딸에게 매몰차게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도현은 속으로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그때,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듯이 구원의 손길이 내밀어졌다.
“전하, 총리대신 박황과 국방대신께서 알현을 청하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도현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짐짓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하필이면 이럴 때…… 공주, 지금은 내가 바쁘니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꾸나.”
“싫어요, 아바마마!”
“어허. 대전에서 어리광을 피우면 안 된다고 중전이 그랬을 텐데.”
“그래도…….”
보다 못한 보모상궁이 숙휘 공주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공주 마마, 전하께선 매우 바쁘신 분이니 일하시는 데 방해하시면 안 됩니다. 오늘은 일단 물러나셔요. 처소에 맛난 간식거리를 준비해 놨으니 드시고 낮잠을 주무시면 기분이 한결 좋아지실 겁니다.”
“간식?”
“예. 수라간에서 꿀 강정을 만들어 올렸다고 했습니다.”
“알았어.”
꿀 강정이라는 말에 숙휘 공주는 언제 떼를 썼냐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냉큼 일어났다.
그 모습에 도현은 약간 어이가 없으면서도 귀여운지 자신도 모르게 살포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보모상궁이 어린 숙휘 공주를 달래서 거처로 데려가자 밖에서 기다리던 총리대신 박황이 국방대신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공주 마마께서 주상 전하가 다시 친정을 나서신다고 하니 많이 슬프신 모양입니다.”
“그러게 말이오. 이것 참, 백만 대군과 싸우는 것보다 어린 딸을 달래는 것이 더 힘드니…….”
마음이 안 좋은 듯 조금 침울한 표정을 짓던 도현은 이내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보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두 사람이 어쩐 일이오?”
“왜국에 있던 아국 백성들의 귀환이 모두 끝나 보고를 드리러 왔사옵니다.”
박황의 말에 도현은 반색을 했다.
“다음 달이나 돼야 다 마무리가 될 것 같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예상을 했습니다만 지방 번주들이 아국 백성과 약탈해 간 물품을 빨리 보내 줘서 시일이 앞당겨졌습니다.”
“잘됐군.”
큰일을 앞두고 왜국 원정이 마무리되면 그만큼 역량을 요서 정벌에 집중할 수 있었기에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해서 아군이 장악하고 있는 도사 번을 막부에 넘겨주려고 하는데, 괜찮겠사옵니까?”
박황과 나란히 앉은 임경업의 물음에 도현은 순순히 승낙을 했다.
“그리하기로 막부와 약조를 했으니 이행해야지.”
“그럼 군령을 내리겠습니다.”
“그러게. 하면 원정군 본대도 곧 개선을 하겠군.”
“예. 늦어도 다음 달 중순까지는 도착할 것이옵니다.”
“왜국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온 병력들이니 적절한 포상을 해 줘야 될 거야.”
도현의 말에 임경업이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재무부와 협의해 포상 금액을 결정했사옵니다.”
“내용을 말해 봐.”
“원정을 다녀온 병사들 모두에게 은화 오십 냥을 일괄 지급하고, 전공에 따라 다섯 등급으로 나눠 은화 서른 냥을 차등해서 주기로 했습니다.”
오십 냥이면 병사 봉급 두 달 반치에 해당했다.
“적당하군. 바로 재가를 해 줄 테니 서류를 올리게.”
“옛.”
“그리고 말씀드릴 것이 하나 더 있사옵니다.”
“뭔가?”
“귀환한 백성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상당수가 고향이 아닌 다른 곳에 집단으로 이주하기를 원했습니다.”
“호오. 그래?”
뜻밖의 결과에 도현은 의외라는 얼굴로 박황을 봤다.
“아무래도 고향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이 있는 자들은 나이가 들어 노환이나 질병으로 세상을 뜨고, 그 자손들이 많다 보니 뿔뿔이 흩어지는 것보다 친한 마을 사람들끼리 거주하길 희망하는 것 같사옵니다.”
“그것도 그렇군.”
낯선 곳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그래도 지금까지 살을 부대끼며 살아온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안심이 되고 정착하는 데 도움이 될 터였다.
“그럼 어느 지역에 정착을 시키는 것이 좋겠나?”
“전하를 뵈러 오기 전에 내무대신과 잠시 이야기를 해 봤는데, 본토는 기존 주민들로 포화 상태이니 봉황도나 북해도 쪽이 어떨까 하옵니다. 아니면 새로 영토로 편입된 동해도도 괜찮겠지요.”
“흐음. 왜국에서 지금까지 고생만 하다 돌아왔는데 그렇게 멀리 보내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는군.”
그러자 총리대신 박황이 얼른 이야기를 했다.
“척박한 개척지로 가는 만큼 대신 여러 가지 특혜를 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특혜라고?”
“예. 기존 이주민들한테 주는 혜택에 더해 토지를 무상으로 나눠 준다면 아마 모르긴 해도 서로 가려고 할 겁니다.”
산업화가 많이 진척됐다고 해도 여전히 땅은 부의 척도이자 근원이었기에 그가 생각해도 충분히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그리고 본토 밖 영토에는 귀환한 백성들한테 충분히 나눠 주고도 남을 만큼 땅이 많았다.
“장악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아국 백성들이 많이 거주할수록 좋으니 적극 추진하도록 하게.”
“예.”
시선을 옆으로 옮긴 도현은 국방대신 임경업을 보며 말했다.
“요서 공략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나?”
“지금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이 잘 진행되고 있사옵니다.”
“왜국 원정에서 경험했다시피 아국 군대는 예전보다 훨씬 많은 물자를 소모하니 그에 따른 대비를 철저히 해야 될 걸세.”
“안 그래도 왜국에서의 경험을 참조해 보급품 물량을 더 늘렸고 유사시 해상을 통해 신속하게 수송하는 대책도 이미 세워 뒀습니다.”
“잘했어. 그럼 이제 출정 날짜를 결정하는 일만 남았군.”
“그렇습니다.”
며칠 뒤 북경에서 기다리던 소식이 날아들었다.
“오삼계가 군대를 이끌고 석가장으로 향했다고?”
아침 조회를 끝내고 대궐에 위치한 연무장에서 간단히 몸을 풀고 있던 도현은 급히 찾아온 이완 단장의 말에 눈을 치켜떴다.
“예. 방금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병력은 모두 이십만이라고 합니다.”
“꽤 많군.”
“자금성을 지키는 금군을 빼고 북경에 집결시켰던 병력을 전부 끌고 갔다고 합니다.”
칠현이 건넨 수건으로 땀을 닦던 도현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끝까지 금군을 안 내놓다니 태후도 정말 대단하군.”
“덕분에 오삼계가 병력의 우위를 제대로 살리기 어려워 내전이 길어질 수밖에 없으니 우리한테는 잘된 일이지 않사옵니까.”
“하긴.”
피식 웃은 도현은 이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럼 이제 우리도 출정을 해야지.”
“너무 빨리 움직이면 후방이 위태로워지는 걸 우려한 오삼계가 자칫 군대를 돌릴 수도 있으니 일단 출정을 하시더라도 양측이 본격적으로 전투에 들어가면 요서로 진격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래야지.”
도현도 내심 가장 위협적인 적수라 여기는 예친왕에게 어부지리를 안겨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상선.”
“예, 전하.”
옆에 있던 칠현이 허리를 숙이며 대답하자 도현은 손에 든 수건을 궁녀한테 넘겨주면서 지시를 내렸다.
“당장 대신들을 소집해.”
“알겠사옵니다.”
그날 급히 소집된 대전 회의에서 도현은 출정을 선언했다.
하지만 청나라에 소식이 알려지는 걸 막기 위해서 외부에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고 출정식도 생략했다.
그러고는 이틀 뒤 도현은 근위군단 소속 일 개 사단 병력을 이끌고 심양으로 올라갔다.
수년간 막대한 재원과 인력을 투입해 깔아 놓은 가도를 이용해 신속하게 이동을 한 도현과 근위대 병력은 정확히 보름 만에 공략군 사령부가 설치된 심양성에 도착했다.
한양에서 수만 리나 떨어진 거리를 생각하면 예전에 비해 소요되는 시간이 엄청나게 짧아진 거였다.
석회와 자갈을 이용해서 만들어진 넓고 평탄한 가도는 무거운 짐을 가득 실은 마차가 손쉽게 지나갈 수 있어 보급에도 큰 도움이 됐다.
“심양성에 오신 걸 환영하옵니다, 전하.”
성 밖까지 마중을 나와 있던 남두병 도독과 휘하 장수들이 허리를 깊이 숙이면서 군례를 취하자 도현은 군마에 탄 채 머리를 끄덕였다.
“반갑소, 남 도독.”
“왜국 원정을 가셔서 대승을 거두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조금 늦었지만 감축드리옵니다.”
“고맙소. 왜국 원정은 함께 가지 못했지만, 이번 전쟁에서는 남 도독이 선봉을 맡아 줘야겠소.”
“제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하겠나이다.”
“든든하구려.”
그렇게 간단히 인사를 나눈 도현은 남두병 도독의 안내를 받아 심양성으로 들어갔다.
곳곳에 병사들과 보급 물자가 가득 쌓여 있고 빽빽하게 임시 주둔지가 세워진 심양성은 전쟁의 기운이 가득했다.
하지만 얼핏 둘러봐도 사기가 높고 군율이 엄정하게 서 있는 것이 곧 있을 전쟁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승리에 대한 열망과 자신감으로 충천해 있었다.
곧장 심양행궁으로 들어간 도현은 이제 충의전으로 현판을 바꿔 단 예전 숭정전 옥좌에 앉았다.
단 아래 좌우로 늘어서 있는 장수와 봉황도 관리 들을 천천히 쓸어 본 도현은 사뭇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먼저, 단시간 내에 전쟁 준비를 모두 끝마치느라 남 도독과 경들이 수고가 많았소. 그대들이 한 노력은 전장에 나서는 아군 병사들의 생명으로 되돌아올 것이오.”
“황공하옵니다.”
“남 도독.”
“예.”
“준비 상황을 보고해 보시오.”
그러자 한 발자국 앞으로 나온 남두병 도독은 시선을 약간 아래로 내린 채 이야기를 했다.
“이번 요서 공략전에 동원되는 병력은 봉황도 주둔 이 군단 팔만과 새로 충원된 사만을 합쳐 모두 십이만 명입니다. 여기서 한 개 사단 이만 명은 예비대로 심양과 봉황도를 지키기 위해 남겨 두고 실제 요서로 진격하는 병력은 십만이 될 것입니다.”
얼마 전 끝낸 왜국 원정에 삼만이 조금 넘는 병력을 동원한 걸 생각하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현재 조선이 가진 국력을 생각하면 가용할 수 있는 전력을 모두 끌어낸 거였다.
“특별히 이번 공략전에서는 요새화된 영원성을 깨뜨리기 위해 포병대 전력을 강화해 각종 구경의 화포 백오십 문을 가져가고 보급 물자도 충분히 준비해 놨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고 아군은 화약을 주로 쓰니 특히 보급에 신경을 써야 될 거야.”
“그렇지 않아도 보급을 전담할 병력을 따로 빼 놨을 뿐만 아니라 최악의 경우 해상을 통해 본토에서 물자를 전장까지 바로 실어 올 계획도 세워 놨습니다.”
“혹시 모르니 보급 문제는 다시 한 번 더 점검해 보도록 해.”
“옛.”
보급에 대해 한 번 더 강조를 한 도현은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적군의 동향은 어떤가?”
“얼마 전부터 낌새를 챘는지 접경 지역에 대한 정찰이 부쩍 늘어났습니다.”
“이렇게 많은 물자와 병력이 집결하는데 눈치를 채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지.”
“죄송합니다.”
남두병 도독이 허리를 굽히자 도현은 한쪽 팔을 내저었다.
“아니야. 어차피 며칠 뒤면 요하를 넘어갈 테니 크게 상관이 없어. 지금까지 움직임을 숨긴 것만 해도 대단한 거야.”
질책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격려로 남두병 도독과 장수들의 기를 살려 준 도현은 계속 말을 이었다.
“강을 건너갈 부교는 어떻게 됐나?”
“네. 언제든 명령만 떨어지면 여섯 시진 안에 다섯 개의 부교를 놓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놨습니다.”
“좋아.”
흡족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인 도현은 자세를 바로 하며 입을 열었다.
“이번 전쟁은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차후에 만리장성을 넘어 대륙을 정복할 초석을 다지는 일이다. 조선이라는 이름의 대제국을 건설하는 선봉에 그대들이 있음을 명심하고 최선을 다해 싸워 주길 바란다.”
고구려 이후 한민족이 한 번도 쓰지 못했던 제국이라는 말에 대전을 가득 메우고 있는 신하들은 다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뭔가 뜨거운 열기가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남 도독.”
“예, 전하.”
“이틀 뒤 일출과 함께 출병할 것이니 그렇게 알고 준비하시오.”
“충!”
주먹을 쥔 팔을 왼쪽 가슴에 가져다 대고 군례를 올리며 남두병 도독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틀 뒤 휴식을 취하며 마지막 점검을 끝마친 조선군은 새벽 일출과 함께 보부도 당당하게 심양성을 떠나 요서로 향해 진격했다.
굽이굽이 수만 리나 이어지는 큰 강인 요하遼河는 동북 지방의 젖줄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풍부한 수원은 주변 지역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지금은 청국과 조선의 국경 역할을 하며 양측 간에 크고 작은 충돌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아직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 있는 강변에 새벽부터 조선군 병사들이 무언가를 급히 만들고 있었다.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작업을 끝내야 된다. 어서 서둘러라!”
군관의 독려에 부교를 건설하고 있는 병사들의 손놀림이 더욱 빨라졌다.
탕탕!
“젠장, 어두워서 더 힘드네.”
“누가 아니래.”
같은 조를 이뤄 작업을 하는 동료의 투덜거림에 널빤지를 잡고 있는 사내가 맞장구를 쳤다.
곳곳에 화톳불을 피워 놨지만 그래도 시야를 다 밝힐 수는 없었기에 병사들은 혹시라도 잘못해 자기 손을 찧을까 봐 망치를 내려치는 손놀림이 조심스러웠다.
망치질을 다 하고 새 널빤지를 가지러 가려고 줄곧 웅크리고 있던 허리를 펴는데, 그 순간 눈에 들어온 풍경에 무의식적으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어느덧 일출 시간이 됐는지 동쪽 하늘에선 둥그스름한 태양이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고, 주변이 온통 푸르스름하게 물든 가운데 그림처럼 강 표면에 떠오른 다섯 개의 부교가 거의 다 완성되어 가고 있는 순간이었다.
부교는 백 미터 길이에 폭만 오 미터가 넘어 한꺼번에 짐을 가득 실은 마차와 기병이 강을 건너갈 수 있었다.
신속한 설치를 위해서 조선군은 목재와 널빤지를 미리 잘라 놔 조립만 하면 바로 쓸 수 있도록 해 놓고 심양성 근처에 위치한 개천에서 수십 번이나 반복 훈련을 실시했다.
그 덕분인지 자정부터 시작된 작업은 동이 터 올 무렵이 되자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 있었다.
예정보다 속도가 빨랐지만 기병으로 이루어진 본대 선두가 벌써 근처까지 왔다는 소식을 전달받은 군관은 마음이 급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물안개가 걷히고 해가 완전히 뜬 가운데 병사들은 마지막 연결 작업을 하고 있었다.
“더 세게 당겨!”
“으쌰! 으쌰!”
군관의 외침에 병사들이 붙잡고 있던 밧줄을 힘껏 당기자 십 미터 길이의 부교 조각이 놓인 나룻배가 천천히 끌려왔다.
“조금만 더! 됐어.”
널빤지 바닥이 맞춰지자 병사들은 재빨리 양쪽 끝을 연결하는 요철을 끼워 넣고는 쇠못을 단단히 박았다.
탕! 탕!
못을 박고 밧줄로 매듭을 지어 묶자 드디어 마지막 부교가 완성됐다.
“다 끝났다!”
“우와아!”
망치를 든 병사가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내지르자 주위에 있던 다른 병사들도 환호성을 질렀다.
감독을 맡은 군관도 어려운 작업을 시간 내에 모두 끝냈다는 성취감에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병사들과 함께 기뻐했다.
“모두들 수고했다.”
“하하하!”
그렇게 서로 얼싸안으며 기뻐하고 있을 때 병사 한 명이 팔을 들어 후방을 가리키며 소리를 쳤다.
“저기 아군이 오고 있습니다!”
“어디…….”
잠시 동안 소리를 내며 웃던 군관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뒤편을 살피자 정말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한 무리의 기마가 이리로 곧장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모두 진정하고 마지막으로 이상이 없는지 살펴보고 아군이 지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빠진다. 알겠나!”
“예.”
잠시 뒤 선두를 맡은 거란 출신 기병 수천 명이 말에 탄 채 이 열로 부교 위를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건너갔다.
따각따각.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올라갔지만 부교는 약간의 흔들림이 있는 걸 제외하고는 전혀 끄떡없이 서 있었다.
초조한 얼굴로 첫 도하를 지켜보던 군관과 병사 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때야 긴장을 완전히 풀었다.
기병대에 이어서 속속 본대 병력이 도착하면서 강변과 부교 위는 사람으로 새까맣게 뒤덮였다.
중군과 함께 도착한 도현은 군마를 몰아 강둑 위로 올라갔다.
야트막한 언덕을 이루고 있는 강둑은 주위 풍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는데, 군마를 멈춘 그는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자신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아.”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공간이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똑같은 복장을 한 십만 명의 조선군이 차례대로 요하 위에 놓인 부교 다섯 개를 통해 건너편으로 넘어가는 모습이 마치 거대한 파도가 몰아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조선군이 장장 이틀에 걸쳐 강을 도하하면서 요서 공략전의 막이 올랐다.
제일 처음 요서 땅에 발을 디딘 기병대는 곧장 서남쪽으로 진격해 근처에 있는 성읍을 습격했다.
이상 징후를 포착하기는 했지만 설마 하며 미처 대비를 못 하고 있던 청군은 갑자기 들이닥친 조선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순식간에 요하 주변 열일곱 곳의 성읍이 함락됐다.
꽝!
“총병 어른, 급보입니다!”
느긋하게 몸에 좋다는 조선산 인삼차를 마시고 있던 요서 총병 공손척은 황급히 정자 안으로 뛰어 들어와 부복하는 군관을 보고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뭔가?”
자신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것에 짜증이 났는지 공손척의 어투는 상당히 퉁명스러웠다.
하지만 군관은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는지 가쁜 숨을 내쉬며 얼른 입을 열었다.
“조, 조선군이 요하를 건너 쳐들어오고 있답니다.”
“뭐야!”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공손척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앞에 부복해 있는 군관을 보며 다그치듯 되물었다.
“그게 정말이냐!”
“예. 벌써 강 주변 열일곱 곳의 성읍이 조선군에 점령당했다고 합니다.”
“이런…… 조선군이 강을 넘어올 동안 아군 병력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새벽에 기습적으로 부교를 설치한 데다 기병을 동원해 순식간에 밀고 내려와서 미처 손을 쓸 틈이 없었다고 합니다.”
“젠장! 적군의 병력은 얼마라고 하더냐?”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최소 십만은 넘을 거라고 합니다.”
“뭐라? 지금 십만이라고 했나?”
“예.”
엄청난 숫자에 공손척은 일순간 말문이 막혔다.
가뜩이나 절반이나 되는 병력이 북경으로 빠져나간 상태에서 정예로 알려진 조선군이 십만 명이나 쳐들어왔다니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공손척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적군은 지금 어디에 있나?”
“곧장 이곳 영원성으로 진격해 오고 있다 합니다. 그리고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군 대열에서 황금 봉황기가 목격됐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
황금 봉황기는 바로 조선 국왕을 상징하는 깃발이었기에 공손척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조선 국왕이 직접 나섰다는 거야!”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미치겠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안절부절못하던 공손척은 이내 군관을 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장수들을 소집해, 어서!”
“옛.”
지시를 받은 군관이 급히 물러가자 공손척은 조선군과 맞서 싸울 생각보다는 두려움에 전각 안을 서성였다.
얼마 뒤 영원성 전체에 비상령이 내려지고 조선군의 공격을 알리는 전령이 북경으로 달려갔다.
한편 요하를 도하한 뒤 주변 열일곱 개의 성읍을 점령한 도현은 기동성이 뛰어난 거란 출신 기병들을 최대한 활용해, 요서 지역에 흩어져 있는 향용병들이 영원성으로 집결하기 전에 하나하나 찾아 각개격파를 했다.
많아 봤자 천 명 단위로 분산되어 있던 향용병들은 조선군의 공격에 제대로 힘 한번 못 써 보고 지리멸렬했고 몇몇 성읍은 싸우기도 전에 백기를 내걸며 항복하기도 했다.
주변 지역이 빠르게 무너져 갔지만 공손척은 병사를 내보내 구원에 나서기는커녕 더욱더 꽁꽁 문을 잠그고는 성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기병대를 활용한 작전과 공손척의 소극적인 대응이 연쇄 작용을 해서 조선군은 요하를 건너온 지 스무 날 만에 영원성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광활한 요서 지역의 땅을 생각하면 정말 거침없이 점령을 해 나간 거였다.
그렇게 가지치기를 모두 끝낸 조선군은 마지막으로 영원성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전력을 집결시켰다.
요서 지역을 관장하는 중심 지역이자 오랫동안 청나라의 침략을 막아 온 곳답게 영원성은 무려 서른세 자(10미터)에 이르는 두껍고 높은 성벽을 자랑했다.
예친왕에 의해 함락되고 청나라가 만리장성을 넘어 화북 지역을 장악하면서 잠시 쇠락의 길을 걷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조선이 만주를 점령하자 다시금 중요성이 부각돼 요서 총병부가 들어서고 외성을 쌓아 방어력을 높이는 한편 많은 병력을 주둔시켰다.
예친왕이 군권을 잡고 있을 때만 해도 심양 탈환을 위해 십만이 넘는 병력과 만주 팔기군까지 상주해 있었지만, 태후의 견제로 전력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지금 총병을 맡고 있는 공손척도 태후파 인물이었는데, 부임과 동시에 제일 먼저 한 일이 예친왕 쪽 장수들의 숙청이었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최근 주작단의 공작으로 그나마 있던 병력마저 절반이나 빠져나간 상태라 요서방면군의 전력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영원성이군.”
황금 봉황기를 앞세우고 도착한 도현은 군마를 탄 채 정면에 있는 영원성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출병 전에 도현에게 요서 정벌군 사령관이라는 직책을 하사받은 봉황도 도독 남두병이 감개무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청 태조 누르하치가 몇 번이나 함락을 시키려고 했다가 실패하고 부상을 입어 목숨까지 잃은 곳이라고 하더니, 과연 성이 아주 견고해 보입니다. 전하께서는 두 번째로 오시는 것이지요?”
남두병의 물음에 도현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심양 관저 생활 때 예친왕의 요구로 참전한 아국 군대와 함께 왔었지.”
“감회가 남다르시겠습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끌려온 거였지만 이번에는 짐의 군대를 이끌고 요서를 아국의 영토로 만들기 위해서 왔으니 정말 감개무량하군.”
“이제 곧 영원성 문루 위에 봉황기가 내걸리게 될 것이옵니다.”
“후후후. 기대하고 있겠네.”
미소를 지은 도현은 영원성을 한 번 더 쳐다보고는 이내 말 머리를 돌려 성 앞에 만들어 놓은 진지로 들어갔다.
여봐란 듯이 당당하게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조선군과 달리 영원성 안에 있는 청군은 말 그대로 적이 새까맣게 몰려와 성을 포위하자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당장 병사들을 다독여 전투태세를 갖춰야 될 공손척마저 조선군이 왔다는 보고에 황급히 문루로 나왔다가 엄청난 규모를 보고 기가 질려 있었다.
“뭐가 이렇게 많아?”
“십만이라고 하더니 정말인 모양입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부관의 말에 공손척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할!”
실력이 뛰어나서 요서 총병이라는 중책을 맡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태후파에 줄을 잘 선 덕분에 요직을 차지하게 된 경우였기에, 막상 큰일이 닥치자 공손척은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지휘관이 그런 모습을 보이자 병사들까지 덩달아 불안감이 증폭되며 전투를 시작하기 전부터 청군은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공손척은 병사들이 다 지켜보는데도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북경에서는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나?”
“예. 아직…….”
“설마 조정이 여길 포기한 건 아니겠지?”
설사 진짜로 그렇다고 해도 병사들의 사기를 생각해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말아야 될 이야기를 생각 없이 내뱉자 부관은 내심 한숨을 쉬며 주위를 둘러봤다.
아니나 다를까 아까부터 공손척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병사들은 버림을 받았을 수도 있다는 말에 웅성거리며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자 부관은 동요하는 병사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곳은 요서 지역을 지키는 핵심이자 북경으로 가는 관문이나 마찬가지이니 황제 폐하께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겠지.”
부관의 단호한 말을 듣고 공손척이 그나마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미 주변으로 퍼져 나간 병사들의 불안함은 좀처럼 지울 수가 없어 마치 엎질러진 물과도 같았다.
“내성에서 방어 대책을 세우셔야 하니 이만 돌아가시죠.”
공손척이 또 엉뚱한 말을 해서 사태를 악화시키기 전에 밑으로 내려 보내야겠다 생각한 부관은 일부러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힐끗 뒤로 곁눈질을 해 보니 병사들이 다들 할 말이 가득한 기색이라 부관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믿음직한 장수가 와도 부족할 판에, 오히려 이쪽이 돌봐 줘야 할 상관이라니.
이 나이에 애 돌보기를 해야 되냐며 툴툴거리고 싶은 지경이었다.
공손척과 부관이 문루에서 사라지자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병사들은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듯 편한 표정으로 조금씩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저런 놈을 믿고 싸워야 되는 거야?”
병사 중 한 명이 퉤하고 침을 바닥에 뱉으며 투덜거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태후 밑구멍을 닦아 주다가 출세를 한 놈이라고 하더니 정말인가 보네.”
“두고 봐. 전투가 벌어지면 제일 먼저 도망칠 놈이야.”
“맞아.”
“예전에 오삼계 장군이 총병으로 계실 때가 좋았는데.”
“누가 아니래.”
“그나저나 이러다가 조선군에 다 죽는 거 아냐?”
“끄응.”
청나라 병사들은 불안감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처럼 청군은 지휘부와 병사들 간에 불신이 생겨나며 내부에서부터 조금씩 무너져 갔다.
다음 날 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진지 구축까지 끝낸 조선군은 약간의 여유도 주지 않고 청군을 몰아붙이겠다는 듯이 아침부터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발사!”
지휘관의 외침과 함께 성을 향해 길게 늘어뜨려 놓은 조선군 화포들이 불을 뿜었다.
꽝! 꽝! 꽝!
시큼한 화약 냄새가 진동을 하고 포대 주변이 뿌연 연기로 뒤덮인 가운데 바람을 가르며 포탄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쉬이이익!
그리고 잠시 뒤 요란한 폭음을 내며 성벽 곳곳에 포탄이 떨어져 폭발했다.
꽈아앙! 쿠쿵! 쿵!
돌로 단단하게 쌓아 올린 영원성이었지만 강력한 화약의 위력에 무력하게 부서져 나갔다.
“명중! 명중이오!”
일시에 포탄이 터지며 높다란 영원성 성벽을 뒤덮는 모습은 엄청난 장관이었는데, 흥분한 포수 한 명이 펄쩍펄쩍 뛰면서 소리를 쳤다.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미리 포격으로 상대의 전력을 무력화시키는 건 이제 조선군에 공성전의 기본처럼 되어 버렸다.
진영 한 곳에 세운 전망대 위로 올라가 포격을 지켜보던 도현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초탄부터 목표에 명중을 시키기 어려울 텐데, 거의 대부분의 포탄이 성벽에 떨어지다니 대단하군.”
그러자 옆에 있던 남두병 사령관이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출정 전에 맹훈련을 시킨 효과가 나타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
실제로 공략군에 속한 포병들은 출정 바로 전날까지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혹독한 사격 훈련을 받았다.
“이제 곧 청군의 반격이 있겠군.”
“아마도 그럴 겁니다.”
“준비는 확실히 되어 있겠지?”
도현의 물음에 남두병 사령관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했다.
“대응사격을 하려고 포대 위치를 노출시키는 순간이 놈들한테는 마지막이 될 겁니다.”
“좋아.”
작게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시선을 돌려 섬광과 먼지로 뿌옇게 뒤덮여 있는 영원성을 쳐다봤다.
씨우우웅.
퍼펑!
작렬하는 포탄에 성벽 뒤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던 청군 병사들이 한꺼번에 산산조각 나 사라졌다.
“끄아악.”
“꾸엑.”
“컥.”
포격에 목숨을 잃은 병사만 백여 명이 넘어갔는데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병력 손실도 문제였지만 성벽이 얼마나 버틸지 미지수였다.
벌써 여기저기에 마치 이가 나간 것처럼 성벽 일부가 부서져 있었다.
또다시 폭음과 함께 서너 명의 목숨이 덧없게 사라지는 순간 청군 홍이포가 대응사격에 나섰다.
그 옛날 욱일승천의 기세로 만리장성을 향해 쳐들어오던 누르하치를 홍이포로 박살 낸 일이 있을 만큼 영원성은 오래전부터 포대를 활용한 방어전에 능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전력이 약해진 지금도 홍이포 오십 문이 배치되어 있을 정도였는데, 이건 공격을 하는 조선군 입장에서는 상당히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래서 공략군 지휘부는 본격적인 공성전에 앞서 이 홍이포 포대들을 완전히 제압하는 데 중점을 두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벽 곳곳에 숨겨진 포대 위치를 먼저 확인해야 했는데 눈이 밝은 견시수들이 그 역할을 맡았다.
꽈꽈꽝! 꽝! 꽝!
성벽 높이 덕분에 사거리의 불리함을 극복한 청군의 포탄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와 조선군 포대 주위에 떨어졌다.
시커먼 흙먼지가 튀고 진동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정확한 사격을 보여 준 조선군과 달리 청군은 위협을 가하기는 했지만 명중탄을 하나도 내지 못하고 포대 근처에 커다란 흙구덩이만 여러 개 만들어 내는 데 그쳤다.
그리고 이건 홍이포를 쏘는 청군 포병들에게 엄청난 악몽으로 되돌아왔다.
“기준점에서 우로 오십, 이백 당겨서. 효력사!”
“좌로 백, 삼십 당겨.”
“쏴!”
견시수들이 크게 소리를 치자 첫 사격에 동참하지 않고 포탄을 장전한 채 대기 중이던 화포들이 할당된 좌표대로 재빨리 고각을 조정하고는 바로 포탄을 날렸다.
제일 먼저 청군 포병들을 덮친 건 내부에 강력한 화약과 함께 백여 개의 철환이 들어가 있는 파편탄이었다.
파편탄은 목표 상공에 도착해 터지며 철환을 마구 뿌렸다.
심양성과 달리 단단한 유개진지의 보호를 받지 않고 성벽 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던 청군 포병들에게 철환 세례는 끔찍한 지옥을 선사했다.
퍼엉! 펑!
후두두둑.
“흐억!”
“도, 도망쳐!”
“커억.”
위협을 느낀 청군 포병들이 허겁지겁 포대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쏟아진 철환은 청군 포병들의 머리와 온몸에 박혔다,
걸레 조각처럼 갈기갈기 찢긴 육신은 포대 여기저기에 널브러졌고 요행히 목숨을 건졌다고 해도 중상을 피할 수가 없었다.
“으아악!”
“내 다리!”
“살려 줘.”
바닥에는 피가 흥건하게 고였고 누군지 알 수도 없는 육편 조각이 널려 있는 모습은 지옥이 따로 없었다.
일부 살아남은 포병들이 부상당한 몸을 질질 끌고 필사적으로 포대를 기어 나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때 연이어서 날아온 포탄이 마치 자로 잰 듯 정확히 청군 포대를 직격했다.
쿠쿵! 쿵!
성벽이 움푹움푹 파이고 섬광과 연기 그리고 폭음이 주위를 가득 채웠다.
그 상태에서 사방으로 튄 화염과 불꽃이 한쪽에 가득 쌓아 둔 포탄에 옮겨붙으면서 포대는 폭죽이 터진 것처럼 대폭발을 일으켰다.
꽈르르릉!
폭발이 얼마나 큰지 시커먼 버섯구름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고 석재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는 진동은 멀리 떨어진 조선군 진영에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잠시 뒤 연기가 가시고 드러난 광경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는데, 포대가 있던 망루 상부는 통째로 날아가 흔적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다른 포대들도 마찬가지 운명이었는데 이걸로 청군의 홍이포들은 겨우 두세 발밖에 쏴 보지 못하고 모두 고철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아군 포병대가 거둔 성과에 전투대형을 갖춘 채 지켜보던 조선군 병사들은 손에 든 병장기를 위로 치켜들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지는 가운데 병사들은 서로 어깨를 두드리고 주먹을 부딪치면서 기쁨을 나눴다.
“아주 박살을 내 놨구먼!”
“헹, 건방진 청군 놈들. 이제 코가 납작해졌겠지!”
밑에서 끊임없이 소란을 떨어 대는 소리가 떠들썩하게 이어지는 가운데, 전망대 위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도현은 함박웃음을 짓고 손뼉을 쳤다.
“정말 대단하군!”
여태껏 전장을 종횡무진하면서 작전이 생각대로 맞아들어 갈 때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곤 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크게 좋아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가장 걸림돌이 되던 홍이포도 완전히 쓸모없어졌군. 안 그런가?”
“이제 본격적으로 성을 공략하기가 한결 수월할 것이옵니다.”
남두병 사령관이 옆에서 말을 거들었다.
“그래. 제대로 임무를 수행한 포병들한테 포상을 두둑하게 줘야겠어.”
그러면서 도현은 고개를 돌려 칠현을 불렀다.
“상선.”
“예.”
“포병들에게 은화 열 냥씩 지급하도록 해.”
“알겠사옵니다.”
“전하의 성은에 병사들도 기뻐할 것이옵니다.”
이처럼 조선군 진영에서 환호성을 울리고 있을 때, 영원성 문루에서 전투를 지휘하고 있던 공손척은 이제야 겨우 부관의 부축을 받아 엉덩방아를 찧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크윽.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갑자기 덮쳐 온 폭음에 아직도 귀가 멍멍했다.
무의식적으로 귓바퀴를 문지르며 먼지구름이 안개처럼 뿌옇게 일어난 틈 사이를 꿰뚫어 보려 노력하던 그는 잠시 후 눈앞에 드러난 참상에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포, 포대가!”
조선군의 파상공격을 유일하게 저지할 수 있는 수단이었던 홍이포가 한낱 쇳덩어리로 변해 버리다니.
그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공손척은 말까지 더듬으며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부관을 붙잡고 매달렸다.
“이게 어찌 된 일이야!”
“조선군의 계략에 당한 것 같습니다.”
부관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대답하자 공손척은 다급히 물었다.
“설마 홍이포 포대가 몽땅 다 당해 버린 건 아니겠지? 몇 개는 남아 있을 거야. 안 그런가?”
하지만 돌아온 것은 침통한 침묵뿐이었다.
“이럴 수가…….”
공손척은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순식간에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아무도 대답해 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공손척은 아득한 절망감에 휩싸였다.
조선군이 아무리 사전에 철저히 계획을 하고 정확하게 대포병 사격을 실시했다고 해도 완벽할 수는 없었기에 십여 문 가량의 홍이포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겁 없이 나섰다가 된통 뜨거운 맛을 본 후였기에 청군 포병은 물론이고 장수들까지 함부로 대응사격을 하지 못하고 그냥 꽁꽁 숨겨 두기만 했다.
아무튼 그 이후로 조선군이 영원성을 일방적으로 포격하는 걸로 전투가 진행됐다.
한편 그 시각 북경 자금성은 영원성에서 날아온 급보에 대전이 발칵 뒤집혔다.
꽝!
“조선군의 공격이 없을 거라고 하더니 이게 뭔가!”
앉아 있는 의자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세게 내려치며 태후가 호통을 치자 석달개는 황급히 바닥에 엎드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죽여 주시옵소서, 마마.”
“한 줌 가치도 없는 네놈의 목 따위를 쳐서 무엇하겠느냐!”
태후는 석달개를 거세게 몰아붙이다가 볼품없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 덜덜 떨고 있는 그를 보고 못마땅한 듯이 크게 혀를 찼다.
“꼴도 보기 싫으니 냉큼 나가거라. 당분간은 내 눈앞에 얼씬도 하지 마!”
한겨울에 내리는 서리와도 같은 냉기를 풀풀 풍기며 소맷자락을 휘두른 태후의 명령에 석달개는 몇 번이고 이마를 대전 바닥에 쿵쿵 찧고는 죄송하다며 사죄했다.
하늘이 무너진 듯한 창백한 표정으로 눈물까지 흘려 대던 석달개가 결국 위사들에 의해 대전에서 질질 끌려 나가자 곧 이어 무거운 침묵이 찾아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후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태감이 저 정도로 크게 문책당했으니 당연히 아무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있는 태후는 겉으로는 아직 분이 삭지 않은 듯 씩씩거렸으나 속으로는 냉정하게 좌중의 분위기를 살피며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석달개가 저지른 짓은 당장 목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큰 실책이다.
하지만 수족처럼 부리는 석달개가 옆에 없으면 불편한 것은 오히려 태후 쪽이었으니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일부러 신랄하게 문책하고는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수작이었다.
황궁에서 몇십 년을 버틴 능구렁이답게 크게 벌을 내리지 않을 것을 알아챈 석달개가 덩달아 장단을 맞춰 주었기에 다행히 대신들도 그에 대해서는 이제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지금 한창 기세등등하게 공격해 오고 있는 조선군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였다.
“이 일을 어찌해야 될지 대책을 말해 보시오!”
태후가 다그치듯 말하자 왼편에 서 있던 대신 한 명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오며 입을 열었다.
“신 예부시랑 황보출,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해 보시오.”
“요서 지역은 산해관과 함께 북경을 지키는 울타리와도 같으니 이곳이 조선군한테 점령당한다면 앞으로 큰 위협이 될 뿐만 아니라 자칫 자금성까지 쳐들어올지도 모르옵니다. 그러니 속히 지원병을 보내 적을 물리치도록 해야 될 겁니다.”
원론적인 이야기에 태후는 살짝 고운 이마를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누가 그걸 모르오! 지금 당장 병력이 없으니 이러고 있는 것 아니오.”
“금군이 있지 않사옵니까.”
황보출이 자금성을 지키는 군대인 금군을 거론하자 태후는 바로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금군은 황상을 보위해야 되는 군대이니, 다른 곳으로 보낼 수 없소.”
“물론 그래야 되겠지만 지금은 비상시국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보내도 요서 지역을 방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재차 설득을 하자 태후는 짜증을 내며 거부했다.
“아, 글쎄, 금군은 안 된다고 하지 않았소! 만약 그랬다가 황상의 안위에 문제라도 생기면 경이 책임을 질 거요?”
“그게…….”
서릿발 같은 기세에 황보출은 주춤거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석가장에 나가 있는 토벌군 일부를 빼서 요서 지역으로 보내시오.”
그러자 최측근인 이제갑이 굳은 얼굴로 반대를 했다.
“그건 아니 되옵니다.”
“왜 그렇소?”
자신의 말에 반대를 하는 것이 기분 나쁜지 태후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며 쳐다보자 이제갑은 진지한 얼굴로 이유를 설명했다.
“최악의 경우 요서 지역을 잃더라도 만리장성이 있으니 조선군도 쉽게 내지로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겠지만, 지금 역도들을 토벌하지 못한다면 금방 세를 불려서 북경으로 밀고 올 것이옵니다.”
“으음.”
예친왕이 북경으로 쳐들어올 거라는 이야기에 태후는 안색을 딱딱하게 굳히면서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사실 만리장성 코앞까지 세력을 넓히는 조선군도 위협이 됐지만, 그것보다 태후에게는 내부의 적인 예친왕이 더 두려운 존재였다.
그녀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황보출이 급히 말했다.
“그럼 요서가 이대로 조선군에 떨어지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자는 게요!”
“둘 다 막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일에 경중을 따지자는 거지요.”
“요서를 잃는 건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우를 범하는 결과가 될 게요.”
“지원을 해 주고 싶어도 그럴 병력이 없지 않소.”
갑론을박 대전이 시끄러워지자 얼굴을 찡그리던 태후는 이내 크게 호통을 쳐서 주위를 조용히 시켰다.
“모두 조용히들 하시오!”
시끄럽게 떠들던 대신들이 입을 다물자 태후는 단호한 음성으로 결정을 내렸다.
“조선군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감히 황상의 자리를 노리고 역모를 일으킨 도르곤과 그 일당을 벌하는 것이 더 급하니, 오삼계 도독이 이끄는 토벌대는 그대로 놔두도록 하시오. 대신 요서 정벌군은 향용병을 모아서 지원해 주고 만약을 대비해 산해관과 만리장성 방어에 징집한 병력 절반을 배치해 대비토록 하시오.”
태후의 말에 대신들은 크게 술렁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만이나 되는 금군을 놔두고 훈련과 장비가 부족한 향용병을 지원군으로 보내는 것도 기가 막힌데, 그나마 절반을 만리장성에 배치하라니 사실상 요서 지역을 포기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서슬 퍼런 태후의 기세에 아무도 잘못된 결정이라고 나설 수가 없었다.
“왜들 대답이 없소!”
눈을 치켜뜬 태후의 다그침에 대신들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아, 알겠사옵니다.”
이날 내려진 결정에 따라 청 조정은 북경과 직례성 일대에서 대대적인 징집을 실시했다.
기존에 있던 향용병들이 이미 토벌대로 나간 상태였기에 어쩔 수 없는 조치였는데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아무나 닥치는 대로 데려가다 보니 병사들의 질이 떨어지는 건 물론이고 가뜩이나 내전으로 안 좋던 민심이 더욱 흉흉해졌다.
이렇게 억지로 칠만 정도의 징집병을 끌어모았지만, 병사들에게 지급할 병장기가 부족했기에 그냥 입고 있던 옷에 창만 하나 달랑 쥐어 주고는 북방으로 올려 보냈다.
아예 없는 것보다 낫겠지만 조선군을 보면 당장이라도 도망칠 것 같은 징집병들이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지 미지수였다.
이처럼 청국 조정이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짓을 하고 있을 때 영원성에서는 전투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발사!”
꽝! 꽝! 꽝!
성벽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던 조선군 화포들이 차례대로 육중한 포성을 울리며 불을 뿜었다.
그때마다 영원성에서는 화염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벌써 사흘째 쉬지 않고 계속된 포격에 성벽 곳곳이 무너지고 부서진 것이 멀리서도 똑똑히 보일 정도였다.
씨우우웅.
꽈르릉!
“아악.”
“큭.”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과 더불어 충격파가 성벽을 뒤흔들 때마다 성가퀴 뒤에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는 청군 병사들은 움찔거리며 두려움에 떨었다.
홍이포 포대가 박살이 나고 그나마 겨우 살아남은 것들은 꽁꽁 숨겨 둔 상황에서 마땅히 대응할 수단이 없는 청군 병사들은 그저 성벽 뒤에 숨어 제발 포탄이 자신이 있는 곳에 떨어지지 않기를 비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후두둑.
폭발에 솟구쳤던 석재 부스러기가 머리 위로 떨어지는 가운데 사방에서 부상을 당한 병사들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살려 줘!”
“내 다리……!”
“끄아악.”
사지 중 한 곳이 잘리거나 몸에 파편이 박혀 시뻘건 피를 울컥울컥 쏟아 내는 부상병들의 모습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는데, 차라리 폭발에 휩쓸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죽은 자들이 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의원님께 데려다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으…….”
성벽 안쪽에 부상병을 치료하는 곳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지만, 그저 붕대를 감아 주고 약초를 갈아서 만든 지혈제나 고통을 잊게 아편을 먹이는 정도였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동료를 그냥 놔둘 수는 없었기에 청군 병사들은 부축을 하거나 들것을 이용해 부상병들을 치료소로 옮겼다.
그렇게 빈자리는 성벽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대신 채웠다.
“빨리 와서 여기 서! 뭘 꾸물거리고 있나!”
군관이 새된 목소리로 호령했다.
찔끔해서 후다닥 뛰어오긴 했지만 채 마를 틈도 없이 바닥에 홍건하게 고여 있는 핏물이 신발 바닥에 질척하게 달라붙는 느낌에 찜찜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서 있던 동료가 팔이 날아가고 비명을 질러 대는 모습을 봤으니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몇 분 뒤엔 자기가 그 꼴이 되지 말란 법이 없는 것이다.
“이러다가 다 죽는 거 아냐?”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중얼거림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절대 싫어. 이렇게 개죽음을 당할 바엔 차라리 도망치는 편이 낫다고.”
병사들 사이에선 이미 탈영한 놈들을 부러워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왜 저도 같이 따라나서지 않았을까, 진심으로 후회하는 사람도 있었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뒈지기 싫으면 다들 대가리 숙이고 있어!”
경험이 많은 십인장의 으름장에 수군거리던 청군 병사들은 찔끔한 얼굴로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걸 보고 부서진 망루 한 귀퉁이에 몸을 숨기며 자리를 잡은 십인장은 뿌연 화약 연기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조선군 진영을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차라리 한바탕 뒤엉켜 싸우는 것이 낫지…….”
그뿐만 아니라 영원성에 갇힌 청군 병사들 대부분의 바람이었는데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포격 세례는 그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사이에 또 다른 포탄이 날아와 성벽 한쪽을 부수며 엄폐해 있던 청군 병사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끔찍한 지옥 속에 몸을 떨고 있는 청군과 달리 조선군 진영은 너무나도 다른 분위기였다.
세 개 대로 나눠 돌아가면서 언제든지 공격에 나설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는 가운데 시끄럽게 울리는 포성만 아니라면 다들 그냥 훈련을 하러 나온 것처럼 아주 평온했다.
“웬만큼 청군의 방어선이 무너진 것 같으니 이제 슬슬 공성을 시작하는 게 어떻사옵니까?”
전망대에 서서 영원성을 살피던 도현은 남병두 사령관의 말에 들고 있던 망원경을 아래로 내렸다.
“오늘이 사흘째인가?”
“그렇사옵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도현은 병참을 맡고 있는 장수한테 시선을 주며 물었다.
“화약 재고는 얼마나 남았나?”
“지금처럼 소모를 해도 앞으로 열흘 분량이 남아 있고 나흘 뒤에는 화약이 포함된 보급대가 심양에서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럼 재고가 충분하단 말이군.”
“예.”
가끔씩 터지는 섬광과 뿌연 연기에 휩싸여 있는 영원성을 바라보며 잠시 고심을 하던 도현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사흘을 더 포격을 가해 외성을 확실히 무력화시킨 다음에 보병들을 투입하도록 하지.”
“이미 전의가 많이 꺾인 상태인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빨리 영원성을 함락시키고 싶은 마음에 조급해하는 남병두 사령관과 달리 도현은 느긋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작금에 와서 위세가 많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청 태조의 이십만 군대를 막아 낸 영원성이야. 괜히 섣불리 나섰다가 병사들의 피해가 커지면 우리만 손해니까 조금 더 상황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말을 하려던 남병두 사령관은 그가 병사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고, 눈앞의 영원성이 최종 목표가 아니라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을 함락시키기 위해서는 쓸데없이 전력을 낭비하지 않아야 된다는 생각에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고집을 피우지 않고 알아서 뭐가 더 중요한지 깨닫고 머리를 숙이는 남두병 사령관의 모습에 도현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렇고 지금쯤이면 자금성에서 뭔가 반응이 올 때가 됐는데, 어때?”
도현의 물음에 왜국 원정 이후 또다시 이완 단장을 대신해 친정에 따라나서게 된 김근행이 얼른 살짝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보고를 드리려고 했는데 태후가 지원군을 보내기 위해 징집령을 내렸다고 하옵니다.”
“징집령이라고 했어?”
“예.”
“도대체 병력을 얼마나 보내려고 그딴 명령을 내린 거야?”
“그게, 대군을 일으키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딱히 지원군으로 보낼 병력이 없어 고육지책으로 징집을 실시하는 것이옵니다.”
“병력이 왜 없어? 오삼계가 대부분의 군대를 이끌고 갔어도 아직 금군이 오만이나 남아 있는 걸로 아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도현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짓자 김근행이 의문을 풀어 줬다.
“제대로 알고 계신 것이 맞습니다.”
“……?”
“정보에 의하면 태후가 금군의 이동을 절대 불가하다고 못을 박았다 하옵니다.”
“허어.”
대략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한 도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헛바람을 내뱉었다.
“그래서 당장 쓸 수 있는 정병을 오만이나 놔두고 얼뜨기 징집병을 끌어모으고 있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미쳤군.”
태후의 멍청한 행동에 도현이 차갑게 독설을 하자 옆에 있던 남두병 사령관이 슬며시 대화에 끼어들었다.
“덕분에 우리는 청군 지원 병력에 대한 부담을 덜게 됐으니 잘된 일이지 않사옵니까.”
“하긴, 잘 훈련된 금군이 아니라 오합지졸 징집병이라면 박도치 장군 혼자서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겠군.”
“그럴 겁니다.”
국방대신인 임경업 장군의 부관 출신인 박도치는 공성전에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기병 대부분을 이끌고 본대와 떨어져 산해관 인근 지역의 청군 잔당을 소탕하고 있었다.
북경에서 지원군이 오면 중간에서 요격하거나 치고 빠지는 전술로 시간을 끄는 임무도 함께 맡고 있었다.
“아무리 얼뜨기들이라도 쪽수가 많으면 부담이 될 수도 있는데 지원군 규모는 얼마 정도나 될 것 같나?”
“무차별적으로 강제징집을 실시하고 있지만 십만 이상은 어려울 걸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중 절반은 만리장성과 산해관에 배치될 예정이라 실제로 요서 지역에 들어올 병력은 많아 봐야 오만 남짓일 겁니다.”
그 말에 도현은 헛웃음을 지었다.
“요서 지역을 포기할 생각인가 보군.”
주위에 있는 다른 장수들도 황당한 얼굴을 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거 참…….”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짧게 코웃음을 친 도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흥. 정말 한심스럽군. 하지만 호랑이도 사냥을 할 때는 아무리 작은 먹잇감이라도 최선을 다한다고 했으니 박 장군한테 절대 방심하지 말고 북경에서 오는 지원 병력을 철저히 박살 내라고 전하도록 해.”
“옛.”
명령을 내린 도현은 다시 망원경을 눈에 가져가 포격이 계속되고 있는 영원성을 지켜봤다.
한편 요서 총병 공손척은 포격에 청군 병사들이 죽어 나가고 있는데도 지휘소가 아닌 내성 관저 방 안에서 불안한 얼굴로 이리저리 서성이고 있었다.
쿠쿵! 쿵!
밖에서 폭음이 들릴 때마다 공손척은 몸을 움찔거렸다.
“젠장. 이제 어쩌지?”
그나마 믿고 있던 홍이포 포대가 첫날 조선군의 대포병 사격에 박살 난 이후로 공손척은 겁에 잔뜩 질려 싸울 의지를 완전히 잃고 말았다.
아마 퇴로가 마땅치 않고 벼슬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면 벌써 줄행랑을 쳐 버렸을 거였다.
답답한 마음에 탁자 위에 있던 술을 병째 집어서 벌컥벌컥 마시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우군장을 맡고 있는 중년 장수가 들어왔다.
“총병 어른.”
“어, 이 장군.”
요서방면군에서 잔뼈가 굵은 천생 무인인 이화민은 군을 지휘할 생각은 하지 않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공손척의 모습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어찌 됐건 상관인 공손척을 나무랄 수는 없었기에 애써 표정을 풀며 군례를 취했다.
“북경에서 칙사가 도착했습니다.”
이화민의 말에 공손척은 눈을 크게 뜨며 반색을 했다.
“그게 정말인가?”
“예.”
“어서 들여보내게.”
공손척의 재촉에 이화민은 반쯤 열린 문 밖을 향해 입을 열었다.
“들어오게.”
그러자 갑옷을 차려입은 군관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총병 어른을 뵙습니다.”
“어서 오시게.”
기다리고 있던 소식을 가져왔기도 했지만 아무리 직급이 낮다고 해도 칙사라면 황제의 명을 대리하는 거였기에 공손척은 존대를 해줬다.
“먼저 칙서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알겠네.”
얼른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공손척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그러자 군관은 손에 들고 있던 비단 두루마리를 펼쳐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요서 총병 공손척은 들으라. 패악무도한 조선이 감히 짐의 땅을 겁도 없이 침탈해 빼앗으려고 하니 그 배은망덕함에 분노가 하늘을 찌를 것 같노라. 당장이라도 백만 대군을 내보내 모조리 다 징벌하고 싶지만, 대역 죄인들을 단죄하는 일이 남아 있어 그것이 어려우니 총병 공손척은 휘하에 있는 군사로 사력을 다해 영원성을 지키고 보내 주는 지원군이 도착하면 함께 지휘를 해 조선군을 몰아내도록 하라.”
기대에 찬 표정을 짓고 있다가 점점 얼굴이 일그러진 공손척은 군관의 말이 끝나자 실망감 가득한 모습으로 절을 했다.
“명을 받잡겠나이다. 만세! 만세! 만세!”
“여기 칙서가 있습니다.”
두 손으로 건네주는 칙서를 받아 든 공손척은 살짝 굳은 얼굴로 군관을 쳐다보며 물었다.
“지원군은 얼마나 보내 주시는 건가?”
“향용병 삼만이 산해관을 통해 다음 달 중순까지 도착할 겁니다.”
“……지금 향용병이라고 했나?”
“예.”
그래도 가지고 있던 일말의 기대감마저 산산이 부서진 공손찬은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허어…….”
감히 황명을 전하는 자리에서 한숨을 쉬다니 당장 호통을 쳐야 될 일이었지만 어려운 임무를 맡은 공손찬의 심정을 이해하기에 칙사로 온 군관은 그냥 넘어가 줬다.
“태후께서 이곳에 뼈를 묻을 각오로 적과 맞서 싸우라 하셨습니다.”
“으음.”
이제 빼도 박도 못하고 꼼짝없이 여기서 죽게 생겼다는 생각에 공손척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잠시 뒤에 배를 띄워 북경으로 돌아갈 것이니 조정에 보내실 것이 있으면 주십시오.”
칙사로 오면 잘 대접을 받으며 며칠 쉬었다가 가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군관은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곳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눈치챈 공손척은 부러운 듯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네.”
지원 병력을 더 받아 내거나 최악의 경우 성을 포기하고 도주했을 때 면책을 받기 위해 공손척은 책상 앞에 앉아 처한 상황을 좀 더 과장에서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쯤 써 내려갔을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부관이 다급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크,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 이 호들갑인가?”
중요한 순간에 방해를 받은 공손척이 짜증을 내며 묻자 부관은 급히 달려오느라 거칠어진 호흡을 채 가다듬지 못하고 이야기를 했다.
“선착장 쪽에 조선 수군이 나타났습니다.”
“뭐야!”
이야기를 들은 공손척은 화들짝 놀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삼면이 조선군에 완전히 포위된 가운데 바다는 영원성이 외부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방금 온 칙사도 배를 타고 영원성에 올 수 있었다.
청군에는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인 바다가 조선 수군에 막혔다고 하니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방을 나와 선착장 쪽 망루로 달려간 공손척은 정말 조선 수군 전선 수십 척이 앞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럴 수가…….”
이제 청군은 독 안에 든 쥐처럼 영원성에 완전히 갇혀 버렸다.
“충. 주상 전하를 뵙사옵니다.”
수군 선발대를 이끌고 도착한 황해도 수사 유상헌의 군례에 도현이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반겼다.
“어서 오게, 유 수사. 예정보다 더 빨리 도착했군.”
“다행히 파도가 잔잔하고 항해하는 중에 계속 순풍이 불어 줘서 시일을 단축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랬군. 오자마자 전과를 올렸다면서?”
도현의 물음에 유상헌은 약간 멋쩍은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전과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렇고, 선착장에 배 몇 척이 정박해 있기에 인사도 할 겸 화포를 쏴서 침몰시켰습니다.”
“어찌 됐건 청군이 해로를 이용하지 못하게 배를 수장시켰으니 전과가 아닌가.”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황공할 따름입니다.”
별거 아닌 것처럼 이야기를 했지만 유상헌이 도착하자마자 실시한 포격으로 선착장이 크게 부서졌을 뿐만 아니라 때마침 천진에서 군량미를 가득 실고 도착해 있던 수송선 세 척이 화물과 함께 그대로 가라앉아 버렸다.
더불어 칙사가 타고 온 쾌속선도 침몰시켜, 칙사 역시 영원성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이런저런 피해도 상당했지만 무엇보다 심리적인 타격이 컸는데, 유일하게 남아 있던 통로인 바다가 막힘으로써 청군 병사들의 고립감을 더욱 심화시켰다.
“수송선단도 일찍 도착하겠군?”
“예. 내일쯤이면 본대와 함께 모습을 보일 겁니다.”
“손 통제사가 직접 선단을 이끌고 온다고?”
“그러하옵니다.”
“왜국 원정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또다시 전장에 나오다니, 다들 고생이 많군.”
“아니옵니다.”
“나중에 손 통제사가 도착해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지만, 상황이 변해 준비한 계책을 쓰지 않아도 될지 모르니 그렇게 알고 대기하도록 해.”
원래 도현은 요서 지역을 공략하는 동안 청군의 전력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수군을 동원해 화북과 산동성 해안 지대를 공격해 혼란을 초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태후가 금군 대신 전투력이 극히 떨어지는 징집병을 지원군이랍시고 보내며 요서 지역을 포기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후방 교란을 실행할 필요가 사라졌다.
조선군 전체로 보면 여러 가지로 부담이 사라진 거였지만 왜국 원정에 이어서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 주려고 벼르던 수군 입장에서는 아쉬운 결정이었다.
그걸 반영하듯 도현의 말에 유상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예.”
그런 마음을 눈치챈 도현은 부드러운 어투로 유상헌을 다독였다.
“바다를 봉쇄하고 해상 보급선을 탄탄히 유지하는 것만 해도 아주 큰일을 하는 것이니 너무 아쉬워하지 말도록 해.”
“알겠사옵니다.”
표정을 푼 유상헌은 다시 군례를 취하고는 조심스럽게 지휘 천막을 나갔다.
다음 날 유상헌이 이야기한 대로 보급품을 가득 실은 수송선단이 수군 전선들의 호위를 받으며 영원성 앞바다에 나타났다.
도착한 수송선들은 마치 영원성에 있는 청군이 보라는 듯이 해안에 임시로 만든 선착장에 배를 대고는 실고 있던 화물을 내렸다.
그리고 수군 전선들은 약간 떨어진 곳에서 청군이 조금이라도 이상한 조짐을 보이면 언제든지 함포를 쏠 수 있도록 태세를 갖췄다.
수송선들은 보급품만 실고 온 것이 아니었는데 잔뜩 긴장한 얼굴의 왜국 출신 용병들도 한 무더기 내려놨다.
“뭘 꾸물거리나! 어서 빨리 움직여라.”
덜컹덜컹.
인솔을 맡은 군관이 왜국어로 크게 소리치자 갑옷을 입고 각자 병장기를 휴대한 왜국 용병들이 줄을 지어 잔교를 내려왔다.
이들은 막부군부터 도사 번까지 출신이 아주 다양했는데 한 가지 공통점이라면 왜국 원정 때 조선군에 잡힌 포로 출신이라는 거였다.
아무리 포격으로 상대를 무력화시킨다고 해도 결국 마지막에 성으로 돌격해 깃발을 꽂는 건 보병이었다.
공성전 과정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던 도현은, 도사 번 공략 때 막부군 출신 포로들을 써 피해를 최소화시킨 걸 떠올리고는 총참모부에서 논의를 거쳐 왜국 용병을 쓰기로 했다.
즉시 포로에서 풀어 주고 돈까지 준다고 하자 너도나도 지원을 했고 도사 번 점령 후에 약속대로 자유의 몸이 된 막부군 출신들도 한몫을 잡아 볼 생각에 다시 참가했다.
이렇게 모인 왜국 용병 숫자가 무려 칠천 명이나 됐다.
“저게 영원성인가 보군.”
한 왜국 용병이 이마 위로 손바닥을 펼쳐 햇볕을 가리며 눈을 찡그린 채 중얼거렸다.
멀리 보이는 영원성의 성벽은 이미 삼분의 일 이상이 계속된 포격으로 금이 가 있고 한쪽 귀퉁이가 무너져 있는 등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고, 걸어가는 와중에도 쿵쾅하는 포격음과 함께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뿌연 화약 연기가 사라질 줄을 몰랐다.
“대륙이라서 그런가 성도 엄청 크구먼.”
“그래 봤자 조선군의 화포에 당해 낼 수 있겠어?”
이미 화포의 위력을 절실하게 느끼고 패배의 쓴맛을 본 뒤였기에, 누군가가 회의적으로 대꾸했다.
“누가 이기든 우리하곤 상관없지.”
“맞아. 돈만 제대로 챙기면 장땡이지 않아.”
“흥. 하기야 그렇긴 하군.”
“이 사람들, 조선군이 지면 우린 누구한테 돈을 받아?”
멍청한 소리도 작작하라며 한 사람이 핀잔을 주자, 잡담을 하던 일행들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 끝까지 살아남아서 한몫 챙기면 자네들은 어떡할 건가?”
“일단 고향에 돌아가서 포목점을 차릴까 싶어. 동생이 에도에 있는 큰 상가에서 일을 배우고 있는데, 형제 둘이서 힘을 합치면 어떻게든 해 나갈 수 있겠지.”
“난 그냥 땅이나 사서 속 편하게 농사나 지을까 해.”
“그것도 좋지.”
용병들이 잡담을 하며 임박한 전투에 대한 긴장을 풀고 있을 때 인솔 군관이 다가와 호통을 쳤다.
“떠들지 말고 대열을 제대로 갖추고 걸어라!”
“이크.”
찔끔한 왜국 용병들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수송선에서 내린 왜국 용병들은 긴 대열을 이루며 조선군 진영 한쪽에 마련된 숙영지로 이동했다.
일부러 보여 주듯 성 앞 벌판을 따라 행군하는 왜국 용병들의 모습에 가뜩이나 해로가 막혀 가라앉아 있던 청군의 사기는 이제 바닥까지 떨어져 버렸다.
그 뒤로 이틀을 더 포격을 가해 외성 방어선을 꾸준히 무력화시킨 조선군은 포위를 한 지 정확히 일주일이 되는 날 본격적인 공성전에 나섰다.
준비가 끝났다는 보고에 도현은 지휘 천막을 나와 진영 앞쪽에 설치된 전망대로 올라갔다.
위에 서자 드넓은 전장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양옆에 늘어서 있는 조선군 병사들의 모습에 든든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 일주일간 충분히 휴식을 취한 병사들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밥을 지어 먹고는 선두에는 총병이 그리고 바로 뒤로 기병대가 서 있는 전투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포병대는 대형 앞에 각 포대 별로 약간씩 거리를 두고 방열을 한 채 언제든 포를 쏠 태세로 대기 중이었고, 오늘 전투에서 선봉을 맡은 왜국 용병은 왼쪽 측면에 섰다.
“모두 정위치를 했사옵니다.”
약간 긴장한 얼굴의 남두병 사령관이 보고를 하자 도현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잠시 정면에 있는 영원성을 바라본 뒤 명령을 내렸다.
“공격을 시작하게.”
“옛.”
군례를 취하며 대답한 남두병 사령관이 손짓을 하자 대기하고 있던 신호수가 붉은색 삼각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는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자 포탄을 장전해 놓은 화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콰꽈꽝! 꽝! 꽝!
조선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에 황급히 문루로 달려온 우군장 이화민은 새벽안개가 걷히며 드러난 상대편 진영의 모습에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벌써 두 시진째 포격이 뚝 그친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오늘 끝장을 보려는 모양이군.”
“예?”
옆에 있던 군관이 눈을 끔뻑이면서 되묻자 이화민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조선군이 보병을 투입할 거란 말일세.”
“그럼 큰일이지 않습니까?”
군관이 당황하자 이화민은 엄한 목소리로 나무랬다.
“싸워서 막아 내면 되는데, 왜 호들갑이야! 자네는 병사들을 지휘하는 군관이라는 걸 명심하게.”
“예, 옛.”
“일단 총병께 상황을 보고하고 어서 이리로 모셔 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군관이 막 발을 떼려는 순간 한쪽에 있던 청군 병사가 찢어질 듯 소리를 내질렀다.
“포, 포격이다!”
익숙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공포가 더 커진 청군 병사들은 포격이라는 말에 기겁을 하며 허둥지둥 엄폐물을 찾아 몸을 숨겼다.
쉬이이익!
꽈광! 꽈르르릉. 쿠쿵!
성 여기저기에 시커먼 연기가 치솟았고 폭음이 울리며 성벽이 깨져 나갔다.
“끄아악!”
“크허억.”
폭발에 휩쓸린 병사들의 비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화민도 포격을 피해 반쯤 부서진 성가퀴 뒤에 등을 기댔다.
우수수 떨어지는 돌조각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이화민은 옆에 엎드려 있는 군관에게 소리를 질렀다.
“조선군이 본격적으로 공성전을 시작했다고 총병께 알려, 빨리!”
“예.”
크게 대답한 군관은 한쪽에 있는 계단을 냅다 뛰어 내려갔다.
퍼펑!
지근거리에서 포탄이 터지며 문루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흔들거렸다.
“으으…….”
양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잔뜩 겁을 먹고 있는 청군 병사들의 모습에 이화민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높고 단단한 성벽이 있는 이상 우리가 유리하다. 두려워하지 말고 각자 자리를 지켜라!”
죽음을 각오하고 용기를 내서 병사들을 독려했지만 곳곳에 포탄이 날아와 작렬하는 폭음에 묻히며 이화민의 목소리는 어쩐지 애처롭게 느껴졌다.
포격은 쉬지 않고 계속됐고 영원성은 자욱한 연기와 섬광으로 뒤덮였다.
지금까지 골고루 포격을 퍼붓던 것과 달리 조선군은 북문에 모든 화력을 집중해서 타격했다.
급보를 전달받은 공손척은 다른 성문에서 천여 명의 병력을 급히 차출해 보내 주고는 현장에 나타나지도 않고 전투 지휘를 이화민한테 다 맡겼다.
최고 지휘관으로서 정말 어이가 없는 행동이었지만, 북문에 와 봤자 크게 도움이 안 되고 괜히 병사들 사기만 떨어뜨릴 것이 뻔했기에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갑자기 시작된 포격은 한 시진 가까이 아주 맹렬하게 계속 이어졌다.
꼿꼿하게 서서 포연에 휩싸인 영원성을 쳐다보고 있던 도현은 망원경을 내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만하면 된 것 같으니 왜국 용병들을 투입하도록 해.”
“옛.”
이미 어떻게 성을 공략할지 계획을 다 세워 놨기에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뿌우웅! 뿌우웅!
뿔 고동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지자, 심양 관저 시절 도현의 개인 호위대 출신으로 잠시 감사원에서 근무하다가 군부로 옮겨 군호 벼슬을 하고 있는 전적이 군마를 탄 채 장검을 위로 치켜들며 외쳤다.
“용병대 공격 개시!”
“돌격!”
“우와아아!”
그러자 왜국 용병 칠천여 명이 함성을 내지르면서 힘껏 앞으로 내달렸다.
쿠쿵! 쿵!
희뿌연 연기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문루에 있던 이화민은 뿔 고동 소리에 이어 들리는 함성에 조선군의 공격이 시작됐다는 걸 알아차렸다.
급히 주위를 둘러보자 계속해서 떨어지는 포탄에 몸이 잔뜩 얼어붙은 채 성벽에 붙어 있는 병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대로라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성을 빼앗길 판국이었다.
바로 그때 성을 아주 박살 내 버릴 것처럼 쏟아지던 포격이 거짓말처럼 딱 멈췄다.
순간 너무나도 고요한 정적이 흘렀고 윙윙거리는 청각이 다시 돌아오자 폭음에 묻혀 있던 조선군의 함성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왜국 용병들의 모습이 포연 사이로 보이자 이화민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전원 전투준비! 적이 온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일으켜 성 밖을 쳐다본 청군 병사들은 새까맣게 몰려오는 왜국 용병들을 보고 기겁을 했다.
“헉!”
“적이다.”
“이제 어쩌지?”
그동안 계속된 포격에 얼이 반쯤 빠진 청군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이화민은 얼굴을 찡그리며 버럭 호통을 쳤다.
“뭘 멍청히 서 있는 거야! 어서 적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아!”
그때야 겨우 정신을 차린 청군 병사들은 허겁지겁 가지고 있던 활과 조총을 꺼내 쏘기 시작했다.
슈슉! 슉!
탕! 탕!
요란한 총성과 함께 화살이 날아오자 앞서 달려가던 왜국 용병 수십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포격 지원이 멈추면 청군의 반격이 있을 거라는 걸 예상했기에 왜국 용병들은 큰 동요 없이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멈추지 말고 계속 달려라!”
어느새 말에서 내려 왜군 용병들 틈에 섞여 성 앞까지 와 있는 전적은 손에 든 장검을 흔들며 목이 터져라 독려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성을 함락하면 두둑한 포상금을 약속받은 왜국 용병들은 빗발치는 총탄과 화살 세례를 뚫고 필사적으로 공격을 했다.
성벽 아래에 다다른 왜국 용병들은 재빨리 가지고 온 공성용 사다리를 걸치고 위로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청군도 황급히 사다리를 밀어내거나 병장기를 휘둘러 왜국 용병들이 성벽 위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애를 썼다.
“막아!”
“컥.”
방패로 머리 위를 막으며 빠르게 올라가던 왜국 용병은 청군 병사들이 사다리를 밀어 쓰러뜨리자 구슬픈 비명을 내질렀다.
“어어, 으아악!”
퍽.
“끄으으.”
높은 곳에서 추락한 왜국 용병은 몸을 버둥거리기는 했지만 바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 동료들은 그러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넘어진 공성용 사다리를 집어 들고 다시 성벽에 세웠다.
그렇게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가운데 성벽을 두고 벌이는 양쪽 병사들의 치열한 혈전이 이어졌다.
<17권에서 계속>
17권
요서 공략
“공격! 공격하라!”
어느새 군마에서 내려 성벽 근처까지 온 전적이 검을 허공에 흔들며 독려를 하는 가운데 왜국 용병들은 필사적으로 성벽을 기어올랐다.
그중 몇 명은 등에 화약을 가득 채운 궤짝을 지고는 성문으로 달려갔다.
쉬이익.
“컥.”
“으으.”
노비 출신으로 도현의 개혁 정책 덕분에 면천을 받고 군문에 투신해 여러 차례 공을 세워 별장 자리까지 오른 꺽쇠는, 옆에서 따라오던 왜국 용병 하나가 화살에 맞아 앞으로 고꾸라지자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등짐을 대신 짊어지며 소리쳤다.
“더 빨리 뛰어!”
그 뒤로도 용병을 세 명이나 더 잃고 빗발치는 화살과 투석을 피해 겨우 성문 앞에 도착한 꺽쇠는 목숨을 걸고 가져온 궤짝을 바닥에 내려놓고 재빨리 심지를 꺼내 연결했다.
에도 성에서 했던 것처럼 화약을 써서 성문을 날려 버리려는 것이다.
화약이 가득 들어 있는 궤짝이 다섯 개나 되니 아무리 단단한 소나무에다가 철판을 덧댄 성문이라도 단번에 박살 낼 수 있었다.
탁탁.
치치직.
준비해 온 부싯돌로 심지에 불을 붙인 꺽쇠는 용병들과 함께 황급히 몸을 일으켜 반대편으로 뛰었다.
“됐다. 피해!”
폭발을 피해 최대한 멀리 달아나야 했지만 한참 전투 중이라 그럴 수가 없었던 꺾쇠와 용병들은 며칠간 계속된 포격으로 생긴 포탄 구덩이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귀청을 먹먹하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폭음과 함께 강한 압력이 몰려왔다.
꽈아아앙!
바로 뒤를 이어 흙먼지가 쏟아져 나와 엎드려 있는 꺽쇠를 덮쳤다.
“콜록. 콜록.”
먼지에 숨이 막혀 기침이 나왔지만 화약을 제대로 터트렸다는 생각에 꺽쇠는 희열에 찬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뿌옇게 시야를 가리던 흙먼지가 가라앉고 영원성 성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꺽쇠의 얼굴은 있는 대로 구겨졌다.
“이런 쌍!”
성문은 폭발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 나 부서졌지만 이럴 걸 미리 예상했는지 청군이 쌓아 둔 커다란 바위와 흙무더기로 통로가 꽉 막혀 있었다.
그리고 문루도 크게 흔들리기만 했을 뿐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서 있었다.
전망대에서 그걸 하나도 빼 놓지 않고 다 지켜본 도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호락호락 성을 넘겨주지 않겠다 이거지. 남 사령관.”
“옛, 전하.”
시립해 있던 남두병 사령관이 얼른 머리를 숙이며 대답하자 도현은 영원성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지시를 내렸다.
“보병대를 동원해서 성벽 위에 있는 적들을 모조리 다 쓸어버리게!”
“알겠습니다.”
신호가가 휘날리자 대기하고 있던 한 개 연대 육천 명의 병력이 대열을 갖춰 앞으로 움직였다.
한참 성벽을 두고 전투가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는 와중인 데다 원거리 타격을 가할 수단이 마땅치 않았기에 청군은 조총이나 화살을 몇 발 날리기만 할 뿐 별다른 제지를 하지 못했다.
그사이 유효사정거리 안인 이백 보까지 접근한 보병대는 전진을 멈췄다.
“거총!”
군마를 탄 지휘관의 외침에 병사들은 일제히 소총을 들어 올리고는 성벽 위에 있는 청군을 조준했다.
“사격!”
명령이 떨어지자 삼 열로 늘어서 있던 병사들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탕! 타타탕! 탕!
귀청을 찢는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지고 삽시간에 희뿌연 화약 연기가 사격 대열 앞을 가렸다.
동시에 정면 높다란 성벽 위에 있던 청군들이 피를 뿌리며 우수수 꼬꾸라졌다.
피슝!
“크악.”
“큭!”
공기를 가르며 날아온 총탄은 석벽과 문루 나무 기둥에 섬뜩한 소리를 내며 박혔고 상당수가 청군 병사들에게 치명적인 위해를 가했다.
화살을 쏘려고 성가퀴 위로 몸을 내밀었던 이는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넘어졌고, 창으로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국 용병들을 찔러 대던 병사는 가슴에 흉탄을 맞고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내성에 틀어박혀 있는 요서총병을 대신해 전투를 지휘하던 이화민도 바로 옆을 스친 총탄에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장군!”
놀란 부관이 눈을 크게 뜨며 다가오자 이화민은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도 얼굴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난 괜찮네.”
그러면서 힐끗 고개를 뒤로 돌린 이화민은 나무 기둥에 총탄이 박혀 있는 걸 발견하고 간담이 서늘해졌다.
정확히 그의 머리 높이에 자국이 나 있어서 만약 조금만 옆으로 날아왔다면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없었을 터였다.
“쏴라! 적이 성벽 위로 머리카락도 내밀지 못하게 해라.”
지휘관의 외침에 조선군 병사들은 길게 늘어선 채 총알을 장전한 뒤 곧바로 방아쇠를 당기며 사격을 계속 이어 갔다.
탕! 탕! 탕!
한 발씩 총성이 울릴 때마다 청군 병사들의 목숨이 사라졌다.
그러자 청군의 저항은 급격히 약해졌고 힘을 얻은 왜국 용병들은 함성을 내지르면서 더 거세게 성을 공략했다.
“성벽을 넘어라!”
“우와아아!”
간헐적으로 총탄과 화살이 날아왔지만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결국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왜국 용병들이 성벽 일부를 장악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저길 보십시오! 왼편 망루에 적이 올라왔습니다.”
“이런.”
비명과도 같은 부관의 말에 시선을 돌린 이화민은 이삼십 명가량의 왜국 용병들이 망루에 올라 청군 병사들과 싸우고 있는 걸 보고 혀를 차는 말을 잇새로 내뱉었다.
작은 구멍에 큰 제방이 허물어지는 것처럼 아직은 소수지만 적에게 공간을 허용한다면 이내 상대가 봇물 터지듯 밀고 들어와 방어선이 와해되어 버리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어떻게든 성벽을 지켜 내야 된다! 왕 군관.”
“옛.”
“자네가 병사들을 끌고 가서 적을 몰아내게!”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는 것과 동시에 군관 하나가 병사들을 이끌고 급히 망루로 달려갔다.
급한 대로 지휘부에 있던 예비 병력까지 써서 구멍을 틀어막았지만 빗발치는 총탄과 멧돼지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왜군 용병들의 공격에 청군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서쪽 망루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금방이라도 뚫릴 것처럼 위태위태해 뭔가 결단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좌우를 둘러본 이화민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좀 더 결정적인 때에 쓰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지. 부관.”
“말씀하십시오.”
“준비한 계책을 써서 적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주도록!”
“예.”
명령을 내린 이화민은 반쯤 부서진 성가퀴 끝을 손으로 잡고는 끝도 없이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상대를 보며 매섭게 눈을 치켜 올렸다.
“이제 다 됐다! 조금만 더 밀어붙여라.”
“올라가!”
귀청이 멀 것 같은 커다란 고함이 사방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독촉에 떠밀리듯 왜국 용병이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랐다.
“헉, 헉!”
땀 때문에 자꾸 미끄러지는 손을 꽉 부여잡고 힘겹게 오르던 그는 마침내 성벽 위에 이빨처럼 듬성듬성 쌓아 놓은 끄트머리가 코앞에 다가온 것을 보고 환희에 찬 표정을 지었다.
높은 곳에 있어 후들거리는 다리에 재차 힘을 주고 몸을 끌어 올리려던 순간,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시야가 어두워진 것을 눈치챈 왜국 용병이 고개를 들었다.
“……!”
성벽 위에는 청국 병사가 한 명.
다만 양손에 들린 것은 무기가 아니라 커다란 공처럼 보이는 무엇이었다.
설마 돌인가 싶었지만 거의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크기의 돌덩이를 저렇게 손쉽게 들어 올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왜국 용병의 얼굴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의아함이 가득 뒤덮이는 것과 동시에, 청국 병사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그를 향해 내던졌다.
“뒈져라!”
“흐어억?”
반사적으로 기겁해서 사다리에 몸을 딱 붙여 피하니, 등 뒤로 무언가 무거운 것이 떨어지는 듯 휘잉 거센 바람이 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왜국 용병은 결코 아래를 내려다보지 말라는 철칙도 잊은 채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대체 저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그때 커다란 폭음과 함께 환한 섬광이 시야를 가득 메웠고 그것이 이승에서 그가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꽈아앙!
폭발이 일어나며 성벽에 걸쳐져 있던 공성용 사다리가 부서지고 주변에 있던 왜국 용병들의 사지가 찢겨 나갔다.
그거 하나뿐이 아니라 청군 병사들은 연이어서 시커먼 쇠공을 아래로 던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폭음을 울리며 터졌다.
“으윽!”
“크어억.”
청군 병사들이 집어 던지는 건 바로 홍이포에서 쓰는 포탄에다가 심지를 붙여서 만든 폭탄으로, 마치 조선군이 쓰는 비격진천뢰와 비슷했다.
공성전 초반 벌어진 포격전에서 홍이포 포대가 조선군한테 제압당하자 쓸모가 없어진 포탄을 보고 이화민이 생각해 낸 거였는데, 지연신관이 달린 비격진천뢰에 비해 모양은 아주 조잡했지만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원래는 조선군을 최대한 많이 성벽으로 끌어들인 다음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비장의 한 수로 준비한 거였지만 상황이 너무 급격하게 악화되자 어쩔 수 없이 쓰게 됐다.
이화민이 희심의 한 수로 준비한 패인 만큼 효과는 확실했는데 청군이 집어 던진 포탄들이 터지면서 성벽 아래는 한순간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지축이 흔들리는 폭발과 함께 끔찍한 폭풍과 파편 세례가 사방을 휩쓸었다.
폭발에 허공으로 붕 떠오른 용병은 이십 보나 떨어진 곳에 사정없이 내팽개쳐졌고 섬광에 휘말린 이들은 사지가 갈가리 찢겨졌다.
“아아악. 내 팔!”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일어선 용병 한 명이 한쪽 팔을 부여잡으며 목이 터져라 비명을 내질렀다.
날카로운 파편에 맞아 왼쪽 팔이 찢겨 어깨 부위에서부터 어디로 가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상처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고 용병은 사라진 팔을 찾아 이리저리 넋 나간 얼굴로 돌아다녔다.
그 용병뿐만 아니라 공격을 하던 병력 모두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특히나 사격 지원을 받으며 성벽을 넘기 위해 왜국 용병들이 잔뜩 몰려 있던 순간이었기에 피해가 더욱 컸다.
멀리 후방에 위치한 전망대에서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도현은 예상치 못한 역습에 눈을 부릅뜨고는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으음.”
남두병 사령관을 비롯한 장수들도 당혹스러워하긴 마찬가지였다.
“저런!”
“허어.”
적군의 전의를 거의 다 꺾었다고 생각했을 때 불의의 일격을 받은 것이었으니 충격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그리고 이내 화약 연기가 걷히고 드러난 참상에 할 말을 잃었다.
방금 전까지 기세를 올리며 공성용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오르던 용병들은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찢기고 불에 탄 시신들이 산을 이루며 엉망으로 널려 있는 가운데 요행히 살아남은 용병들은 공격을 이어 갈 생각을 하지 못한 채 공포에 질려 명령도 없이 뒤로 후퇴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남두병 사령관이 눈가를 찡그리며 그에서 물었다.
“독전대를 내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불같이 화를 낼 거라는 예상과 달리 도현은 약간 굳은 얼굴로 한쪽 팔을 내저었다.
“그냥 내버려 두게.”
“예?”
“이대로 공격을 강행해 봤자 피해를 더 늘릴 뿐일세.”
“하오나…….”
마지막 순간 청군의 방어선을 거의 뚫을 뻔한 것에 미련이 남는지 남두병 사령관이 말끝을 흐리자 도현은 단호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야 후퇴 신호를 보내도록 해.”
“……알겠사옵니다.”
남두병 사령관이 고개를 숙이자 다시 시선을 돌려 정면에 버티고 선 영원성을 바라보며 도현은 낮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역시 영원성이라 이건가…… 어디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한번 해보자고.”
나무 난간을 손으로 꽉 움켜쥔 도현은 포격으로 군데군데 부서진 채 시커먼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는 영원성을 노려보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런 도현의 뒤로 후퇴를 알리는 뿔나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이날 전투에서 용병대는 사천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는데 이 정도면 오 할이 넘는 병력을 반나절도 안 되는 사이에 잃은 것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잔존 병력도 충격이 너무 심하고 지쳐 당장 다시 전투에 투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성벽 아래에는 아직 무수히 많은 전사자들의 시신이 널려 있었지만 전투 중이었기에 수습할 생각을 못 하고 그냥 방치해 둘 수밖에 없었다.
막 더위가 찾아오는 시점이었기에 금방 시신들이 부패하기 시작하며 냄새를 맡고 어딘가에서 까마귀 떼가 잔뜩 몰려왔다.
오늘 전투는 끝났지만 군영 한쪽에 설치된 치료소에서는 생과 사가 오가는 치열한 사투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아아악.”
“살려 줘.”
“움직이지 못하게 몸을 붙잡아!”
의원의 지시에 의무병들이 양쪽에서 달라붙어 부상을 당해 실려 온 용병의 사지를 꽉 붙었다.
급히 입고 있는 옷을 찢고 상처를 살핀 의원은 상태가 안 좋은지 미간을 찌푸렸다.
“파편이 너무 깊이 박혔어. 당장 끄집어내야 되니까 자해를 못하도록 입에 재갈을 물리게.”
“네.”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진통 효과가 있는 약초를 달여 먹여야 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기에 의원은 바로 날카롭게 갈린 단도를 집어 들고는 상처 부위를 째서 벌렸다.
“끄악!”
생살이 베이는 고통에 용병이 몸을 버둥거리며 비명을 내질렀지만 의원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고는 근육 사이에 박혀 있는 포탄 파편을 힘들게 찾아내 빼냈다.
손톱보다 작은 쇳조각이었지만 그대로 놔뒀다면 상처가 곪아 결국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 됐을 것이다.
지혈제를 꺼내 골고루 뿌린 의원은 깨끗한 광목천으로 상처 부위를 여러 번 감싼 뒤 단단히 매듭을 묶었다.
용병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해 죽은 듯이 몸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이마에 묻은 땀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 몸을 편 의원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지만 아직 천막 안에 그의 손을 필요로 하는 부상병들이 차고 넘쳤기에 마냥 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준비된 침상이 부족할 정도로 가득 들어찬 부상병들이 내는 신음과 비명에 치료소 안은 생지옥 같았다.
전망대에서 내려온 도현이 치료소 밖에서 얼굴을 굳힌 채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옆에 있던 남두병 사령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용병들한테는 안 된 일이지만 본국 병사들이 나서기 전에 적이 패를 드러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인간의 목숨에 값어치를 매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왜국 용병과 조선군 병사들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당연히 후자였기에 도현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묵직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했다.
“출신이 어떻든 아군에 속해 전투를 치른 이들이니 최선을 다해 치료를 해 주라 하게.”
“예.”
그때 용병대 지휘를 맡았던 전적이 전투 중에 부상을 당했는지 왼쪽 팔에 붕대를 감고 군데군데 찰과상을 입은 참담한 몰골로 걸어와서는 도현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신을 죽여 주시옵소서!”
“전 군호는 고개를 들라.”
“전하…….”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한 데다 휘하 병력 태반을 날려 버린 자책감에 전적이 머리를 들지 못하자 옆에 있던 남두병 사령관이 나무라듯 말했다.
“주상 전하의 말씀을 못 들었는가!”
살짝 머뭇거리던 전적은 침통한 얼굴로 상체를 바로 했지만 감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아래를 봤다.
“많이 다쳤는가?”
따가운 질책이 쏟아질 거라는 예상과 달리 도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자 전적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패장이 무슨 할 말이 있겠사옵니까.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몸을 사리는 것 없이 제일 앞에서 병사들을 독려하고 잠시지만 성벽 일부를 장악하기까지 했는데, 어찌 경을 패장이라 욕하며 벌을 줄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 용맹을 치하하고 상을 줘야 될 것이야.”
“하오나 성을 넘지 못하고 수많은 병사들을 잃었으니 어떻게 전하 앞에 고개를 들 수 있겠사옵니까.”
그의 이야기에 황공해하면서도 전적이 재차 벌을 청하자 도현은 머리를 좌우로 내저으며 말했다.
“청 태조인 누르하치도 이곳을 여러 번 공격했지만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목숨까지 잃었는데, 단 한 차례 맞붙어 싸워 성을 무너뜨리려는 건 크나큰 욕심이야. 그리고 적이 쓴 계책은 짐과 여기 있는 장수들 모두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거였네. 상황이 이러한데 오늘 전투에서 진 것을 어떻게 전부 경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겠나?”
“전하…….”
“그러니 경은 자책을 하지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를 당당히 펴도록 하게. 대신 오늘 겪은 것을 뼈에 새겨 다시는 똑같은 방법으로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될 거야.”
그러자 전적은 감격한 얼굴로 이마를 바닥에 대며 크게 대답했다.
“전하의 말씀을 평생 가슴에 간직하겠나이다!”
“그래, 짐이 지켜보겠네. 다시 전장에 나서 청군한테 진 빚을 갚으려면 몸부터 추스르도록 하게.”
“옛.”
손수 무릎을 꿇고 있던 전적을 일으켜 세운 도현은 황송해하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줬다.
전투에서 졌다고 무조건 질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넓은 마음으로 다독여 주자 주위에 늘어서 있던 장수들은 하나같이 존경하고 감복한 눈빛으로 도현을 바라봤다.
이런 행동 하나로 자칫 침체될 수 있었던 조선군의 분위기가 다시 살아났다.
지휘소로 자리를 옮긴 도현은 왕좌에 앉아 아까의 여운이 계속 남아 있는 전적을 보며 물었다.
“전 군호.”
“예.”
“청군이 집어 던진 것이 뭐였나?”
그러자 전적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면서 대답했다.
“처음에는 뭔지 몰랐는데 후퇴를 하다가 요행히 불발된 것을 하나 발견해 가져와서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호오. 그래?”
도현이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보이는 가운데 전적이 손짓을 하자 입구 쪽에 서 있던 위사 두 명이 밖으로 나갔다가 이내 시커먼 쇠공을 하나 조심스럽게 들고 들어왔다.
물건을 보자마자 정체를 파악한 도현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건! 화포에 넣고 쓰는 포탄이 아닌가?”
“그렇사옵니다. 여길 보시면 겉에 구멍을 뚫은 뒤 심지를 꽂아 아국의 비격진천뢰처럼 사용한 걸 알 수 있습니다.”
“허어.”
상당히 조잡했지만 현 상황에서 이것만큼 효과가 확실한 것이 없어 보이는 무기에 도현은 짧게 헛바람을 내뱉었다.
놀란 건 좌우에 늘어서 있는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다들 황당하면서도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모양을 보니 홍이포에 쓰는 포탄인 것 같구먼.”
“포대가 무력화돼서 쓸모가 없게 된 포탄을 이런 식으로 활용하다니, 그것참.”
“이런 걸 던졌으니 용병대가 아작이 날 수밖에…….”
미리 이럴 경우를 대비해 준비를 한 건지 아니면 임기응변으로 만들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어도, 그동안 만만하게 생각했던 청군이 이런 기발한 발상을 했다는 것에 도현은 내심 크게 감탄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금까지 벌여 온 전쟁에서 조선군이 우위에 설 수 있게 해 준 무기의 우수함이 언제든 추월당할 수 있다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다.
사실 청국 내부의 혼란으로 상대를 칠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지만, 상당히 무리를 해서 이번 전쟁을 결정한 이유도 바로 예친왕이 서양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수석총을 대량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장은 그 수효가 제한되어 있지만 시간이 흘러 청군에 상당한 숫자가 보급된다면 조선군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요소가 될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가 왜국의 도사번처럼 서양식 대포까지 들여온다면 그동안 누리던 이점을 상당 부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전에 최대한 청국을 압박하고 언제든 북경으로 진격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려는 것이 도현의 생각이었다.
개조된 포탄을 지그시 바라보던 도현은 이내 정색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적에게 이런 물건이 얼마나 더 있을 것 같나?”
웅성거리기만 할 뿐 다들 선뜻 답을 내놓지 못하는 가운데 김근행이 약간 가라앉은 음성으로 이야기를 했다.
“저희 주작단에서 파악한 정보에 의하면 영원성에는 대략 일만 발의 포탄이 비축되어 있는데, 그중 화약이 들어 있는 파편탄은 삼 할가량이옵니다.”
“삼 할이라면 삼천 발이나 된다는 건가?”
남두병 사령관이 눈을 크게 뜨며 묻자 김근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잠시 뜸을 들인 김근행은 왕좌에 앉아 있는 도현을 보며 이야기를 이었다.
“포탄을 개조하는 데 손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확인해 봐야 되겠지만 아직 상당한 수량이 남아 있고 당분간은 보충도 손쉽게 이루어질 것이옵니다.”
“끄으응.”
말을 듣자마자 도현은 낮게 앓는 소리를 내뱉었고 장수들도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성벽을 넘어가기 위해 달려들 때마다 적군이 개조한 포탄을 집어 던진다면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고, 이건 최소한의 피해로 요서 지역을 장악하려던 당초 계획에서 완전히 빗나가는 일이었다.
병력 소모도 문제였지만 자칫 여기서 발목이 잡혀 전쟁이 길어지기라도 한다면 누가 이기든 청국 내전에서 승리한 세력이 대군을 몰아 달려와 양쪽에서 협공을 당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면 지금까지 애써 점령한 땅을 모두 토해 놓고 허겁지겁 다시 요하를 넘어 요서로 후퇴해야 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휘 천막 안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때 수군 지휘를 맡은 통제사 손억기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오며 침묵을 깼다.
“전하, 신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그러자 도현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게.”
허락이 떨어지자 손억기는 묵직하면서도 힘이 가득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김 접장의 말대로라면 시간을 끌수록 우리에게 불리한 것이니 지금이라도 당장 총공격을 펼쳐 영원성을 함락시켜야 된다고 생각하옵니다.”
“섣불리 덤벼들었다가 오늘처럼 성은 무너뜨리지도 못하고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면 그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그러십니까?”
장수 한 명이 반대 의견을 내자 손억기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럼 병사를 잃는 것이 무서워서 이대로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자는 건가! 어차피 아무런 피해도 없이 끝나는 전쟁은 없네. 다만 상황에 맞춰 손실을 최소화시키려고 노력을 할 뿐이지.”
몸을 바로 한 손억기는 도현을 보며 상기된 얼굴로 열변을 토했다.
“요서 지역을 완전히 손에 넣기 위해서는 영원성을 꼭 떨어뜨려야 하옵니다. 그리고 시간은 결코 아국의 편이 아니옵니다. 평소 전하께서 병사들을 아끼시는 건 신도 아옵니다만 지금은 결단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에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남두병 사령관이 손억기의 말에 동조를 하고 나섰다.
“소신도 같은 생각이옵니다. 청국이 내전에 빠져 요서를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지금 다소 피해가 생기더라도 영원성을 하루빨리 함락시킨 뒤 방어 태세를 단단히 굳혀야 될 것입니다.”
그 뒤로 다른 장수들의 의견이 이어졌지만 대세는 총공세를 펼쳐 영원성을 무너뜨리자는 것이다.
물론 신중론을 주장하는 장수도 몇몇 있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해 금방 묻혀 버렸다.
왕좌에 앉아 휘하 장수들의 이야기를 듣던 도현은 잠시 고심에 찬 표정을 짓더니 이내 마음을 굳힌 듯 몸을 일으켜 날카로운 눈빛으로 좌우를 둘러봤다.
“소중한 병사들이 아까운 피를 흘려야 된다는 것이 가슴 아프지만 대의를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한 법. 오늘 하루 동안 전열을 재정비한 뒤 내일부터 전력을 다해서 공세를 펼쳐 영원성 문루 위에 삼족오 깃발을 휘날리도록 하라!”
도현의 명령에 시립해 있던 장수들은 결연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충!”
이번 전쟁의 승패를 결정할 영원성 전투는 진한 피비린내를 풍기며 본격적으로 막이 올랐다.
그 시각 본진에서 떨어져 나온 박도치 장군의 별군 이만 명은 산해관 인근 야트막한 야산 아래 진을 치고 있었다.
한쪽 휘장을 활짝 열어 둔 천막 안에서 박도치 장군이 휘하 장수들과 함께 지도를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척후병 한 명이 말을 타고 급히 달려왔다.
“장군, 청군 지원 병력을 발견했습니다.”
“어디냐?”
상체를 세운 박도치가 눈을 반짝이고는 다그치듯 묻자 말에서 내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척후병이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며 서둘러 보고를 했다.
“오늘 아침 산해관을 나와 곧장 영원성으로 향해 가고 있습니다.”
“병력은 얼마나 되지?”
“삼만입니다.”
예상보다 적은 숫자에 박도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며칠 전 산해관에 향용병 칠만 명가량이 도착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자 옆에 있던 부관이 얼른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런데 고작 삼만밖에 안 나왔다고? 혹시 뭔가 속임수를 쓰는 거 아냐?”
박도치가 이맛살을 찡그리면서 의심 가득한 표정을 짓자 척후병이 머리를 들며 말했다.
“나머지는 산해관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설마 전부 그쪽 수비대와 합류한 건 아니겠지?”
주작단에서 제공한 정보로 일부가 산해관 수비대에 배치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사만은 너무 많았다.
정예도 아니고 무장이 빈약한 데다 훈련마저 제대로 안 된 향용병 삼만 명만 달랑 지원군이랍시고 보내는 건 요서 지역을 포기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거 말고는 굳이 병력을 분산시킬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한쪽 손으로 탁자를 짚고 선 박도치는 잠시 생각을 해 보다가 부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설사 함정이라고 해도 산해관 수비대가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아군을 위협하기는 힘들겠지.”
그러고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전과도 올리고 청군 전력을 크게 줄일 수 있었는데 조금 아깝군.”
“또 기회가 있겠지요. 그것보다 산해관을 나온 적들을 쓸어 버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지.”
시선을 내려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지도를 살핀 박도치는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이었다.
“아침에 산해관을 나왔다면 이쯤에서 숙영을 하겠지?”
“들판에서 숙영하지 않는 이상 그 정도 병력을 다 수용하려면 여기 있는 길상촌밖에 없습니다.”
왼편에 서 있던 흑치영의 말에 박도치는 한쪽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거긴 어떤 곳인가?”
그러자 직접 기병을 이끌고 주변 지역을 정찰했던 흑치영이 박도치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한족 삼백여 가구 일천여 명이 거주하는 곳으로 오래된 성벽이 마을을 감싸고 있지만 여섯 자(2m) 정도밖에 안 돼서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 성벽의 존재가 상당히 성가셔질 텐데.”
“마을 서쪽에 있는 숲을 이용해 은밀히 병력 일부를 침투시켜서 혼란을 일으킨 다음 허둥지둥 밖으로 뛰쳐나오는 적을 매복군으로 전멸시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호오. 토끼몰이를 하자 이거지.”
“그렇습니다.”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을 해본 박도치는 눈을 반짝이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거 괜찮은 방법이군.”
“허락하신다면 제가 마을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흑치영 자네가?”
“예. 난장판을 치는 건 제가 또 일가견이 있지 않습니까.”
주먹을 쥔 손으로 가슴을 툭 치며 흑치영이 하는 말에 박도치는 신뢰 가득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최고의 용장인 자네가 나서 준다면 나야 고맙지.”
“과찬이십니다.”
“겸손은…… 자, 그럼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볼까.”
박도치와 장수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적을 요리할 것인지 논의를 했다.
조선군의 예상대로 산해관을 나온 청군 지원 병력은 행군을 하다가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자 숙영을 하기 위해 길상촌으로 들어갔다.
영원성 상황이 급했기에 조금 더 이동해서 야영을 할 수도 있었지만 탈영병이 발생할 것을 두려워해 청군 지휘관인 천태보는 부족하나마 성벽이 있는 곳에 들어가 밤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전쟁이 나자 현령과 아전들이 재물을 챙겨 도망쳐 버려 텅텅 빈 현청에 자리를 잡은 천태보가 탁자에 투구를 벗어 놓고 의자에 앉아 쉬고 있을 때 부관이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경계 병력은 다 배치했나?”
머리를 든 천태보가 약간 피곤해 보이는 목소리로 묻자 부관이 바로 대답했다.
“예. 전부 장군 직속 병력들로 해서 이 교대로 경계를 서도록 했습니다.”
“수고했어. 조금 힘들더라도 탈영을 할 수 있는 향용병에게 경계 임무를 맡길 수는 없으니 전장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그렇게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어처구니가 없게도 전장에 나서는 천태보가 제일 염려하는 것은 조선군과의 싸움이 아니라 강제징집을 통해 억지로 끌어모은 향용병들의 탈영이었다.
애초에 제대로 훈련도 안 된 향용병들만으로 군대를 구성해서 전장에 내보낸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결정이었다.
거기다가 더욱 절망적인 것은 그나마 끌어모은 병력도 절반 넘게 떼어 내서 산해관 방어에 투입하고 고작 삼만 명만 요서로 내보낸 것이다.
요하를 건너온 조선군이 십여만이 넘고 영원성만 남겨 두고 요서 방면군이 거의 괴멸한 상황에서 한 줌도 안 되는 병사들을 이끌고 전장으로 가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천태보한테 영원성을 제외한 요서 지역 군대를 모두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줬지만 과연 잔존 병력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비관적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가뜩이나 군기가 제대로 안 잡힌 향용병들이 크게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예전부터 데리고 있던 직속 병력들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하고 탈영병이 속출해 군대가 와해되어 버렸을 것이다.
불안에 떨며 언제든 도망칠 기회만 보는 병사들을 감시하면서 어렵게 끌고 온 지난날들을 떠올린 천태보는 한쪽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입을 열었다.
“남아 있는 주민들한테 조선군의 위치를 알아봤나?”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고 다만 이틀 전에 수백 기의 기병들이 마을에 와서는 현령이 도망치면서 방치한 창고를 열고 안에 보관되어 있던 곡식과 여러 물자를 모두 가져갔다고 합니다.”
이미 처음 도착했을 때 입구가 부서진 채 텅 비어 있는 현청 창고를 확인했기에 천태보는 짧게 혀를 찼다.
“쯧. 멍청한 현령 놈 같으니라고 도망칠 거면 최소한 조선군이 노획하지 못하도록 창고에 불을 질러 다 태워 버릴 것이지.”
“그러게 말입니다. 여기뿐만 아니라 근처 다른 성읍들도 다 그런 식으로 조선군이 물자를 쓸어 갔다고 합니다.”
“요서 방면군 잔존 병력에 대한 정보는 없었나?”
그러자 앞에 선 부관은 약간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조선군이 요하를 건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며칠 지나지 않아 동쪽으로 칠십 리쯤 떨어진 들판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때 이 지역에 있던 향용군이 대패를 당했다고 합니다. 겨우 살아남아 도망친 패잔병에게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지휘부가 전멸하고 남은 병사들도 다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되면 수습할 잔존 병력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끄으응.”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며 막막한 표정을 지은 그는 힘없이 한쪽 팔을 내저었다.
“알았으니 나가 봐.”
“예.”
군례를 취한 부관이 몸을 돌려 나가자 방 안에 혼자 남겨진 천태보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정말 미치겠군.”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우거진 풀숲은 몸을 숨기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위로 높이 솟은 나뭇가지는 달빛을 막는 지붕이 되어 주었고, 굵은 나무 밑둥은 다른 사람의 이목을 피해 이동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좋은 엄폐물이었다.
누구도 관리하지를 않아 제멋대로 길게 자란 잡초와 덤불 들 사이에서 날카로운 눈동자를 빛내던 흑치영이 조용히 말했다.
“저기로군.”
그러자 근처에서 흑치영을 호위하듯 따르던 장수가 답했다.
“경계가 생각보다 삼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바로 치실 겁니까?”
“음.”
길상촌을 둘러싼 성벽은 이곳이 전략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곳이라는 걸 증명하듯 다른 군현 급 마을보다 현저히 낮았다.
게다가 군데군데 보수를 제때 하지 않아 금이 간 곳까지 있었고, 야간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들의 무장도 극히 기본적인 것이었다.
흑치영이 등 뒤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짙은 어둠 속에 기척을 숨긴 채 그의 명만 기다리고 있는 부하들이 있었다.
일반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겠지만 흑치영은 커다란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 예민한 귀와 감각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부하들의 가는 숨소리 하나하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이제 마음껏 날뛰어 볼까?”
흑치영은 발 옆에 늘어뜨리고 있던 언월도를 꽉 다잡으면서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부르르르.
함께 성벽을 지키고 있던 병사가 불현듯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을 보고 동료가 물었다.
“뭐야, 오줌이라도 마려운 거야?”
병사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갑자기 소름이 쫙 끼쳐서…… 쩝. 이상한 일도 다 있네.”
“그럼 고뿔이로구먼. 여름 고뿔은 바보도 안 걸린다던데.”
“어허, 이 사람. 내가 어딜 봐서 고뿔에 걸린 것처럼 보여?”
“훠어이, 다가오지 말게. 괜히 옮을라.”
나병 환자라도 대하는 양 동료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런데 아까 하던 얘기 말인데…….”
“향용병들 말인가?”
“아무리 생각이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저런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사납기로 소문이 난 조선군과 싸우라고 하는지 도통 이해가 안 돼.”
“나도 한숨만 절로 나오네.”
두 사람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경계를 해야 할 성벽 바깥이 아닌 안쪽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향요병들이 쳐 놓은 군막이 넓은 공터를 가득 매우고 있었다.
“완전 개죽음이 따로 없지.”
“불안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다른 방법이 없지 않아?”
체념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옆에 있던 병사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이판사판인데 그냥 탈영을 해 버릴까?”
“뭐어!”
동료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쳐다보는 가운데 병사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었다.
“여기서 더 깊숙이 들어가면 도망칠 기회가 없을 거야.”
“그러다가 잡히면 어떡하려고?”
“어차피 이대로 남아 있어 봤자. 살아남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야. 그럴 바에야 스스로 길을 찾는 것이 백번 낫지 않겠어?”
“하지만…….”
“전투가 벌어지면 다 죽은 목숨이라니까.”
“으음.”
낮게 침음성을 흘리며 갈등하던 바로 그 순간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애기살 두 대가 빠르게 날아와 두 사람의 가슴에 정확히 꽂혔다.
쉬이익.
푹. 푸푹.
“큭!”
“끄르륵.”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애기살에 맞은 적병 두 명이 털썩 아래로 떨어지자 우거진 수풀 속에서 흑치영과 조선군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자!”
흑치영이 한쪽 손을 들어 앞으로 내밀며 낮게 말하자 뒤에 있던 병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길상촌의 성벽은 가장 높은 곳이 여섯 자밖에 안 돼 손쉽게 넘을 수 있었는데, 조선군은 사다리까지 준비해 오는 철저함을 보였다.
먼저 병사들이 성벽에 접근해서는 사다리를 기대 세운 뒤 양쪽에서 단단히 잡고 있자 흑치영을 비롯한 나머지 인원들이 재빨리 그걸 밟고 단번에 안으로 넘어 들어갔다.
탁탁탁.
사다리를 이용해 성벽을 넘는데 채 일 분도 걸리지 않았다.
성안으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짚을 얼기설기 엮어서 지붕을 씌운 작은 집들이었다.
그런 집들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한쪽 공터에 군막이 새까맣게 처져 있는 것이 보였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군데군데 화톳불을 피워 놔서 적진의 모습을 훤히 다 볼 수 있었다.
번들거리는 눈으로 적진을 둘러본 흑치영은 손에 든 언월도를 고쳐 잡으면서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적이 혼란에 빠지도록 최대한 요란하게 공격한다. 알겠나?”
“옛.”
몸을 숨긴 채 잠시 동안 기다린 흑치영은 병사들이 성벽을 모두 넘어오자 늘어서 있는 집들을 지나 신속하게 적진으로 접근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찢어지는 듯한 비명으로 전투의 첫 신호탄이 올랐다.
“끄아아악!”
화살과 단도로 아주 은밀하게 침투하던 조선군은 발각되자 그때부터는 거칠게 적진 안으로 난입해 들어가며 닥치는 대로 적을 베어 넘겼다.
“다 쓸어버려라!”
“우와아아!”
“헉! 야습이다.”
“조선군이 쳐들어왔다.”
행군의 피로에 곤히 잠을 자고 있던 청군은 갑작스러운 소란에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군막 밖으로 뛰쳐 나왔다.
화르르륵!
조선군이 집어 던진 횃불은 보급품이 잔뜩 실려 있는 마차와 군막에 옮겨붙어 곳곳에서 시뻘건 불길이 솟구쳤다.
“불이야!”
“히익.”
빨리 불을 꺼야 했지만 사납게 들이치는 조선군의 공격에 청군은 화재를 진압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급히 무기를 챙겨 들고 맞서 싸우기에 급급했다.
채챙! 챙! 챙!
“막아라!”
“죽어.”
“크윽.”
“꾸엑.”
사방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난무했다.
부하들과 함께 전투에 나선 흑치영은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기다란 언월도를 마치 한 몸처럼 휘두르면서 적병을 눈에 띄는 족족 도륙했다.
츄악!
덜덜 떨면서 어설프게 창을 들이미는 적병의 몸을 길게 내리그어 버린 흑치영은 시뻘건 피가 얼굴에 튀었지만 전혀 계의치 않고 부하들을 독려했다.
“볼 것 없다. 전부 다 짓밟고 불태워 버려라!”
“우오!”
병력은 이천 명밖에 안 됐지만 조선군은 기습의 이점을 철저히 살리며 상대를 정신없이 몰아붙였다.
그러자 처음에는 병장기를 가지고 나와 맞서 싸우던 청군 병사들은 겁을 먹고 주춤주춤 물러서는가 싶더니 이내 이때가 기회라는 듯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도, 도망쳐.”
“살려 줘.”
“물러서지 말고 적과 싸워라!”
당황한 청군 장수들이 검을 빼 들고 흔들리는 병사들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애초부터 싸울 의지가 빈약한 데다 습격이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맞물려 전열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조선군이 기습을 해 왔습니다.”
머물고 있던 방에서 다급히 뛰쳐나온 천태보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부관의 보고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경계병들은 뭘 하고 있었기에 조선군이 숙영지 안까지 들어오는 걸 모르고 있었던 거야!”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닙니다. 적이 벌써 현청 근처까지 밀고 들어왔습니다.”
부관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낮은 현청 담 너머로 시뻘건 불길이 일렁이고 비명과 온갖 악다구니가 계속해서 들렸기에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일단 여길 피하시지요.”
말을 듣자마자 천태보는 눈썹을 치켜 올리고는 크게 호통을 쳤다.
“맞서 싸워 적을 격퇴시킬 생각을 하지 않고 대뜸 도망부터 치자니 그게 장수로서 할 말인가!”
“상황이 녹록하지가 않습니다.”
“어허!”
잔뜩 화가 난 천태보의 모습에 부관은 답답하다는 얼굴로 빠르게 상황을 설명해 줬다.
“이미 외곽 경계선이 무너졌고 혼란에 빠진 병사들이 명령을 듣지 않고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고 있어 도저히 전투를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뭐야!”
“이대로 군을 와해시키지 않고 유지하려면 아직 통제력이 미치는 병력이나마 신속하게 철수를 단행해서 재편성을 하는 길뿐입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말에 천태보는 순간 몸을 휘청거렸다.
“장군!”
놀란 부관이 황급히 달려와 부축하자 천태보는 겨우 자세를 바로하며 힘없이 말했다.
“괜찮네.”
“송구스럽지만 여유가 없습니다. 어서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재차 재촉을 하는 가운데 때마침 현청 담 너머에서 조선군의 함성이 들려오자 천태보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지. 철수 명령을 내리게.”
“옛.”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부관은 주위에 있던 군관들을 시켜 천태보의 명령을 전파하도록 지시했다.
사실 외곽 경계선이 무너지고 청군 병사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는 가운데 도주병이 속출해 위기에 봉착한 건 맞았다.
하지만 당장 군이 와해되거나 전면 패주의 극단적인 상황에 몰릴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몇몇 군데에서는 군관들이 병사들을 수습해 반격에 나선 곳도 있었다.
그런데도 병력이 실제보다 많은 것처럼 사방에서 요란하게 습격을 가한 조선군의 전략과 혼란으로 연락 체계가 일시 마비되자 제대로 휘하 부대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던 부관은 상황을 오판하고 말았다.
그 결과 청군은 진영을 버리고 후퇴하는 최악의 패를 선택하게 됐다.
일렁이는 불길 속에 여기저기 흩어져서 정신없이 전투를 벌이고 있던 청군은 전령들을 통해 전달된 후퇴 명령에 가지고 있는 병장기만 든 채 허둥지둥 뒤로 물러섰다.
“서문이다! 모두 서문으로 후퇴해라.”
조금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찬찬히 주위를 둘러봤다면 조선군보다 자신들이 훨씬 더 많다는 걸 알았을 테지만 불행히도 청군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행여나 뒤처져서 조선군에 잡힐까 봐 청군 병사들이 앞을 다퉈 달아나면서 혼란이 더욱 가중됐고, 이건 다시 공포를 키우며 악순환을 반복했다.
“와아아!”
“적들이 도망친다.”
먼저 기선을 제압하기는 했지만 워낙 청군의 숫자가 많다 보니 조금씩 힘에 붙이고 있던 조선군은 절묘한 시점에 상대가 알아서 후퇴를 해 주자 다시금 기세를 올렸다.
푹.
“끄르륵.”
복부를 깊숙이 찔려 몸을 기역 자로 꺽은 청병을 발로 차서 넘어뜨린 흑치영은 적군의 피를 잔뜩 머금은 언월도를 앞으로 치켜들며 크게 외쳤다.
“승리는 우리 것이다. 적들을 쫓아라!”
“우오!”
흑치영의 독려에 우렁찬 함성으로 화답한 조선군 병사들은 군막 사이를 뛰어다니면서 도망치는 청병을 주살했다.
하지만 요란하게 소리를 질러 대는 것과 달리 적극적으로 상대를 쫓아가지 않고 마치 토끼몰이를 하듯 청군을 서문 쪽으로 몰아갔다.
가지고 있던 모든 물자를 유기하고 후퇴한 청군은 서문을 통해 황급히 길상촌을 빠져나와 곧장 산해관이 위치한 방향으로 계속 달아났다.
“온다.”
산해관으로 가는 길에 있는 야트막한 협곡에 병력을 이끌고 매복해 있던 박도치 장군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청군이 후퇴해 오는 걸 발견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성을 발했다.
그러자 양쪽에 몸을 숨기고 있던 병사들이 저마다 활을 들고는 약간 긴장한 얼굴로 전방을 주시했다.
협곡을 중심으로 커다란 말발굽 모양의 함정을 파 놨는데 제대로 걸려든다면 전멸을 면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말을 탄 천태보를 선두로 지치고 초라한 몰골을 한 청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힘없이 발을 움직이는 것이 전형적인 패잔병의 모습이었는데 그나마 안전지대라고 할 수 있는 산해관으로 향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의 탈주병 없이 대열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태보와 휘하 장수들이 애를 쓴 덕분인지 이만 남짓한 병력을 수습해 후퇴할 수 있었다.
“요서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하루를 채 버티지 못하고 이런 참담한 꼴을 당하다니.”
천태보의 탄식에 따라가던 부관이 애써 그를 위로했다.
“기습을 당해 큰 낭패를 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병력을 절반 이상 살렸으니, 산해관으로 돌아간다면 다시 재정비를 해서 오늘 당한 일을 복수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예?”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는 부관을 보며 천태보는 힘없이 이야기를 했다.
“애초에 고작 삼만 명밖에 안 되는 병력을 가지고 수십만 조선군을 뚫고 포위된 영원성을 구원하라는 건 불가능한 명령이었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란 말일세.”
“장군.”
자칫 항명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말을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서 하자 부관은 기겁을 했다.
“주위에 귀들이 많습니다.”
안절부절못하는 부관과 달리 천태보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했다.
“어차피 제대로 병력을 지휘하지 못한 죄로 벌을 받게 될 것이 뻔한데 이제 와서 못할 말이 뭐가 있겠나. 이대로 계속 영원성으로 향했다면 전멸을 면치 못했을 텐데 이렇게 목숨이나마 건질 수 있게 됐으니 차라리 잘된 것일지도 모르지.”
“……장군.”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천태보의 모습에 부관은 안타까운 표정만 지을 뿐 더 이상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앞서 걸어가던 청병들이 당황한 목소리를 내며 걸음을 멈췄다.
“길이 막혔다.”
“이게 뭐야?”
“무슨 일이냐!”
말을 몰아 앞으로 나온 천태보는 굵은 통나무와 바위로 길이 꽉 막혀 있는 걸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건…….”
경험 많은 장수답게 단번에 함정이라는 걸 알아차린 천태보는 그냥 우두커니 서 있는 청병들을 돌아보며 급히 소리쳤다.
“매복이다. 어서 협곡을 빠져나가야 돼!”
“……!”
바로 그 순간 박도치가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쏴라!”
명령과 동시에 협곡 좌우와 장애물 뒤에 숨어 있던 조선군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일제히 화살과 총격을 가했다.
타타탕! 타탕! 탕!
슈슈슉! 슉! 슉!
섬뜩한 파공음과 함께 청군 대열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악!”
“컥.”
채 일백 보가 안 될 정도로 거리가 가까운 데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 횃불까지 들고 있었기에 조선군이 쏜 화살과 총탄은 여지없이 청병의 몸을 꿰뚫었다.
휘익.
챙!
날아오는 화살을 급히 손에 든 검으로 쳐 낸 천태보는 좌우를 둘러보면서 목이 터져라 외쳤다.
“퇴각! 퇴각하라.”
“으히익.”
“사, 살려 줘.”
순식간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병사와 겁에 질려 허둥지둥 뒤로 도망치는 이들이 한데 뒤엉키면서 협곡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끄허억,”
바로 옆에 있던 청병 하나가 피를 뿌리며 바닥에 엎어지는 걸 본 천태보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황하지 말고 군관들의 통제대로 움직여라!”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천태보가 재차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잔뜩 공포에 질려 반쯤 제정신이 아닌 청병들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서로 조금이라도 먼저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을 치면서 혼란은 극에 달했다.
그런 가운데 집중사격은 계속 이어졌고 청병들은 섞은 짚단처럼 무더기로 쓰러졌다.
“더럽게 많네.”
“떠들 틈이 있으면 한 놈이라도 더 쏴!”
“예.”
군관의 질책에 수석총을 손에 든 조선군 병사는 커다란 바위 뒤에 몸을 기댄 채 쉴 새 없이 총알을 재며 방아쇠를 당겼다.
화살촉에 헝겊을 감고 기름을 잔뜩 묻힌 불화살을 적 대열 곳곳에 쏴서 시야를 확보한 데 반해 이쪽은 어둠 속에 들어가 있어 상대가 위치를 파악하기 힘들었기에, 조선군 병사들은 마치 사격 연습을 하듯 마음껏 화살과 총탄을 날렸다.
아주 일방적인 학살이나 다름없었다.
반대편 출구 쪽으로 달아나기 위해 청병들이 우르르 몰리고 있을 때 뒤쫓아온 흑치영과 거란 출신 기병대가 노도처럼 밀려들며 상대를 절망에 빠뜨렸다.
두두두두.
“적들의 숨통을 끊어 버려라!”
“우와아아!”
“이랴!”
“저, 저건 또 뭐야!”
화살과 총탄 세례를 피해 허겁지겁 도망쳐 나오던 청병들은 거친 말발굽 소리를 울리면서 달려오는 기병대를 보고 기겁을 하며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돌격 대형으로 어둠을 헤치며 달려오는 기마대의 모습은 상대를 공포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어어…….”
“피해!”
정신을 차린 청병들이 몸을 다시 돌려 도망치려고 했지만 불행히도 기병대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쳐라!”
“이야압!”
달려오는 속도 그대로 청병들 사이로 파고든 흑치영과 기병들은 가차 없이 각자 가지고 있던 병장기를 휘둘렀다.
쉬익.
퍽!
“크악.”
“꾸에엑.”
몇몇 청병들이 나무를 붙여 만든 조잡한 방패를 들어 올리거나 창을 내밀어 저항을 시도했지만 기병들의 날카로운 공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창을 간단히 쳐 낸 기병들은 특별히 제작돼 바닥에 송곳이 가득 박힌 신발로 청병을 찍어 버렸다.
철 신발이 눈앞 가득 다가오는 것이 살아서 청병이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우직.
“끄흑.”
안면이 박살 난 청병은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조선군 기병은 아무런 감흥도 없이 다른 상대를 찾아 말을 몰아갔다.
행렬 선두에 있다가 가까스로 뒤쪽으로 온 천태보는 말 그대로 청병들을 짓밟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허어. 조선군이 쳐 놓은 함정에 제대로 걸려들었구나.”
“이, 이제 어쩌지요?”
그나마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부관도 마지막 남은 퇴로마저 막혀 버렸다는 사실에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뒤에서는 요란한 총성과 구슬픈 비명이 계속해서 울리고 있고 앞에는 사나운 조선군 기병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으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주위를 천천히 둘러본 천태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힘없이 입을 열었다.
“다 끝났군.”
“예?”
부관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천태보는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졌단 말일세.”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릅니다. 분명 찾아보면 활로가 있을 겁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부관이 다급히 이야기를 했지만 천태보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조선군밖에 없는데 어찌 여길 빠져나간단 말인가. 괜히 머뭇거려 봤자. 애꿎은 병사들만 죽일 뿐일세.”
“장군!”
“백기를 올리게.”
“크흑.”
명령을 내린 천태보는 굳은 얼굴로 눈을 감았다.
잠시 뒤 부관은 하얀 광목천을 창대에 매달아 들어 올렸다.
때마침 떠오른 붉은 새벽 일출에 백기는 멀리서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똑똑히 보였고 일방적으로 전개되던 전투는 박도치 장군이 병사들을 조금 뒤로 물리면서 중단됐다.
잠시 고요한 정적이 전장 가득 무겁게 가라앉은 가운데 날이 밝아 오며 드러난 협곡 안 풍경은 생지옥 그 자체였다.
처참한 모습으로 죽은 청병들의 시신이 산을 이루고 있었고 흙바닥은 피로 온통 붉게 물들었다.
그 사이로 살아남은 청군 병사들이 잔뜩 지친 얼굴로 힘겹게 서 있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침묵을 깨고 협곡 좌우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와아아아!”
처음에는 한두 명이 소리를 치는 것 같더니 이내 수없이 늘어나 귀가 먹먹할 정도로 사방을 울렸다.
“우리가 이겼다!”
“대조선 만세! 만세!”
협곡 위와 들판에 늘어선 조선군 병사들은 각자 가지고 있던 병장기를 위로 들어 올리며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이날 전투로 청군은 삼만 명의 병력 중에 절반이 넘는 일만 육천여 명이 전사했고 나머지는 포로가 되거나 중간에 도주해 실종 처리가 됐다.
조선군도 오백여 명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이건 청군에 비하면 아주 경미한 피해였다.
이로써 그나마 지원군으로 가던 병력마저 기습에 이은 매복 공격을 받아 요서에 발을 디딘 지 채 하루도 안 돼 전멸하면서 영원성은 더욱 고립무원의 상황에 빠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