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락
한편 영원성을 포위한 조선군 본진은 용병대의 공격이 실패한 이후 벌써 사흘째 총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야말로 파상공세를 퍼부었지만 어째서 청 태조 누르하치가 여길 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는지 보여 주기라도 하듯 영원성은 무너질 것 같으면서도 오뚝이처럼 여전히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퇴각 명령을 내리고 지휘 천막으로 돌아온 도현은 왕좌에 털썩 앉아 약간 지친 듯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 내렸다.
“피해 상황을 보고해 봐.”
그러자 남두병 사령관의 부관이자 사직 벼슬에 있는 무장인 차학봉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했다.
“아직 정확한 집계가 나오지 않았지만 대략 일천칠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이 중 이백여 명은 치료를 받으면 금방 다시 복귀할 수 있는 경상자입니다.”
차학봉이 애써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걸 강조했지만 도현은 심기가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얼굴을 와락 구겼다.
“그래서 지금 다행이라는 거야!”
“아, 아닙니다.”
도현의 호통에 차학봉은 어깨를 움츠리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영원성의 성벽이 단단하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발생한 아군 사상자가 일만이 넘어가는데도 아직 외성조차 점령을 못 하다니 이게 무슨 창피란 말인가!”
다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지 좌우에 시립해 있는 장수들은 하나같이 침통한 표정으로 머리를 들지 못했다.
사실 요서 지역을 총괄하는 중심 지역인 만큼 쉽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영원성에 있는 청군이 이처럼 끈질기게 버텨 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오늘도 강력한 포격을 집중해서 성벽 일부를 허물어뜨리고 병사들이 내부로 진입하기까지 했지만 청군이 개조한 포탄을 대량으로 터트리는 바람에 큰 피해만 입고 허겁지겁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벌써 이런 식으로 당한 것이 여러 차례였기에 병사들의 사기가 꺾이고 은연중에 두려움까지 생기고 있었다.
“내일은 꼭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겁니다.”
남두병 사령관의 말에 도현은 앉아 있던 왕좌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세게 내려치며 언성을 높였다.
“그 말을 벌써 몇 번째 하고 있는지 아나!”
“…….”
남두병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울컥 치솟아 오르는 화를 다스리기 위해 미간을 찌푸린 채 이마에 손을 얹은 자세로 심호흡을 하던 도현은 잠시 후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이대로는 안 되겠군, 다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좌우에 시립한 장수들이 도현의 말을 듣고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 시선을 무시한 채 도현은 고개를 돌려 왼편에 서 있는 통제사 손억기를 봤다.
“손 통제사.”
“옛.”
앞을 바라보며 손억기가 대답하자 그는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수군이 나서 줘야겠어.”
“뭐든지 하명만 하십시오.”
“현재 있는 함대에 치우 급 함선이 두 척 있지?”
“그렇사옵니다.”
“영원성에 얼마나 가까이 접근시킬 수 있나?”
잠시 생각을 하던 손억기는 이내 신중한 태도로 이야기를 했다.
“판옥선과 달리 배 밑바닥이 뾰족한 침저선이라 해안에 바짝 붙였다가는 자칫 좌초의 위험성이 있어 이백 보 정도가 한계일 것입니다.”
그러자 도현은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좀 더 가까이는 안 되나?”
“송구하옵니다.”
“접안 시설이 있는 성 동쪽은 수심이 깊을 테니 그쪽으로 접근하면 되지 않겠나?”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가 재차 의견을 제시했지만 손억기는 고개를 내저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평소라면 가능했겠지만 처음 저희가 도착했을 때 선착장에 포격을 가해 정박하고 있던 선박을 모조리 다 격침시키면서 그것들이 고스란히 장애물이 되어 있기에 치우 급처럼 덩치가 큰 배가 들어가기에는 너무 위험하옵니다.”
“그렇군.”
치우 급처럼 강력한 화력을 가진 함선이 영원성 가까이 접근해 포격을 가해 준다면 내성까지 타격을 줄 수 있어 상당한 도움이 되겠지만, 무리하게 움직였다가 좌초라도 되면 큰일이었기에 그는 아쉬워도 생각을 접었다.
“대신 가능한 한 거리를 좁혀서 포격을 가할 수는 있겠지?”
“물론입니다.”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남두병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수군 함선의 포격은 지금도 하고 있지 않사옵니까?”
남두병의 말에 몸을 뒤로 기댄 도현은 한쪽 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까딱였다.
“아니지. 포격을 하기는 했지만 단순히 시선을 분산시키는 의도로 대충 시늉만 했고 가장 강력한 화력을 지닌 치우 급 함선은 나서지도 않았지.”
“……?”
“그리고 난 단순히 포격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대에 타고 있는 육전대를 동원해 양쪽에서 한꺼번에 공격을 하려는 거야.”
“육전대를 말씀이십니까?”
남두병이 깜짝 놀라 묻자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원래 산동반도 해안에 상륙해 청군의 주의를 분산시키려고 했던 만큼 영원성 앞바다에 떠 있는 함대에는 삼천 명의 육전대가 승선해 있었다.
청군의 대응이 의외로 약하자 용도가 사라져 할 일 없이 대기하고 있던 육전대를 영원성 전투에 쓰려는 것이다.
그러자 지난번 왜국 원정하고는 다르게 이렇다 할 활약 없이 그저 보급품을 나르는 역할만 하던 수군 지휘관들이 눈을 반짝이며 기대에 찬 표정을 짓는 것과 달리 육군 장수들은 우려하는 태도를 보였다.
“육지에서 저희가 이미 포위를 하고 있는데 굳이 위험부담을 지고 바다로 공격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장수 하나가 꺼낸 말에 도현은 눈썹을 위로 치켜 올리며 질책을 했다.
“그렇게 자신이 넘쳐서 여태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그 많은 사상자를 낸 건가!”
“그, 그건…….”
그가 무섭게 노려보며 추궁하듯 말하자 장수는 주춤거리며 아무런 이야기를 못 했다.
그러자 남두병 사령관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나섰다.
“분명 아직까지 적을 무릎 꿇리지 못한 저희들의 실책이 크지만 무리하게 육전대를 상륙시키는 건 자칫 더 큰 피해를 만들어 낼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그가 국왕이라고 하지만 전장에 나와서 사령관인 남두병의 의견을 그냥 깔아뭉갤 수는 없었다.
머리를 돌린 도현은 수군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통제사 손억기를 보며 말했다.
“손 통제사, 공의 생각은 어떤가?”
작게 헛기침을 한 손억기는 힐끗 반대편에 서 있는 남두병을 한번 쳐다본 뒤 크지는 않지만 자신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장에 나온 이상 위험하지 않은 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저희 수군은 전하께서 내리시는 명이라면 설사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들라고 하셔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뭐든지 명령만 내려 달라는 말에 도현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든든하군.”
자리에서 일어선 도현은 좌우에 늘어서 있는 장수들을 천천히 훑어보고는 목에 잔뜩 힘을 주며 말했다.
“가지고 있는 포탄을 몽땅 다 쏟아부어 영원성을 포격한 뒤 육지와 바다에서 한꺼번에 총공세를 펼쳐 성을 무너뜨린다.”
다들 숨을 죽이며 그를 쳐다보는 가운데 도현은 다시 손억기한테 시선을 줬다.
“청군에게 조선 수군의 용맹함을 보여 주도록 하게.”
“옛.”
“육군도 이번에는 반드시 문루에 삼족오 깃발을 꽂아 설욕에 성공할 것이라 믿네.”
계속된 공성 실패에 굴욕감이 쌓인 데다 수군과 묘한 경쟁심까지 더해진 남두병 사령관은 결연한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신이 직접 병사들을 이끌겠나이다.”
“좋아.”
필승의 각오에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선언하듯 말했다.
“내일 무슨 일이 있어도 영원성을 함락시킨다!”
도현의 말에 천막 안은 다시금 뜨거운 전의가 불타올랐다.
“충!”
다음 날 해가 뜨는 것과 동시에 새벽 일찍 일어나 밥을 지어 먹은 조선군 병사들은 전투대형을 갖추고 영원성 앞에 집결했다.
그리고 도현 역시 곧 있을 전투를 위해 커다란 지휘 천막 안에서 갑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시중을 드는 것은 칠현 한 사람뿐이었으나, 이 짓도 이제 오래해 온 탓인지 날래게 움직이는 손가락 끝이 제법 여물었다.
“다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망토를 고정시키는 어깨의 끈을 단단히 묶은 칠현이 손을 떼면서 말하자, 도현은 탁자 위에서 붉은색 수술이 달린 지휘봉을 집어 들었다.
“그럼 나가 볼까.”
“예.”
칠현은 허리를 숙여 대답하고 도현이 나가기 쉽도록 천막 입구에 늘어뜨려진 천을 활짝 벌려 젖혔다.
이른 아침의 푸르스름한 빛깔을 닮은 서늘한 공기가 코끝으로 밀려들었다.
크게 심호흡을 한 도현이 발걸음을 내딛고 천막을 나서자, 이제 막 동쪽에서 떠오르기 시작한 햇살이 시야를 밝혔다.
양옆에는 완전 무장한 장수들이 길게 열을 지어 서 있었으며 그 너머에는 전투준비를 끝낸 병사들이 운집해 있었다.
“나오셨습니까, 전하.”
“준비는 다 끝났나?”
“옛.”
“그럼 가지.”
족히 수백, 수천 쌍은 넘을 사람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은 도현은 등의 망토를 펄럭이며 장수들 사이를 걸어갔다.
그 뒤를 따르는 칠현은 피부를 찔러 오는 찌릿찌릿한 시선에 실로 오금이 저릴 정도였으니, 어쩜 저리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을 수 있냐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진형 한가운데 높다랗게 세워진 전망대에 오른 도현은 장수들을 등 뒤에 거느리듯 서서 눈앞에 전투대형으로 도열해 있는 병사들을 주변 풍경을 함께 시야에 담았다.
연이은 전투로 멀리 보이는 영원성 성벽은 어느 하나 성한 곳이 없었고 꼭대기의 톱니바퀴처럼 돋아난 부분도 아귀가 군데군데 빠진 듯 허전했다.
날이 밝았는데도 불구하고 사방은 깊은 밤처럼 고요했으며 죽은 자들의 살점을 노리는 까마귀조차도 울음소리를 내지 않고 멀찍이서 날개를 접고 관망하는 태도를 취했다.
‘마치 폐허 같군. 아니면 태풍의 눈이라고 해야 할까.’
이상하리만큼 깊이 가라앉은 정적 속에 일촉즉발의 순간처럼 긴장감이 넘쳐흘렀다.
도현은 영원성을 지그시 노려보며 힘찬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포격을 시작하라!”
“옛.”
대답과 함께 뒤편에 서 있던 장수가 소량의 폭약이 달린 화살을 활에 재고는 머리 위로 높이 쏘아 올렸다.
쉬이익.
퍼어엉!
신호탄이 굉음을 내며 터지자 방열을 모두 끝내고 기다리던 화포들이 일제히 영원성을 향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쏴라!”
꽝! 꽝! 꽝! 꽝!
포구에서 나온 흰 연기가 삽시간에 포병대를 가렸다.
이미 지난 며칠간 계속해서 포격을 해 왔기에 크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간 포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성벽 곳곳에 떨어졌다.
쿠쿵! 꽈아앙.
“으아악.”
후두두둑.
포탄에 맞은 성벽은 힘없이 터져 나갔다.
성가퀴가 부서지면서 뒤에 숨어 있던 청병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피 떡이 되어 목숨을 잃었다.
“아이고. 죽겠네.”
언제 자신도 저렇게 될지 몰랐지만 달아나도 숨을 곳이 없었기에 청병들은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지켰다.
“움직이면 더 위험하다! 최대한 몸을 숙여라.”
군관이 악을 쓰며 외치는 가운데 어느새 이런 상황에 익숙해진 청병들은 잔뜩 몸을 웅크린 채 떨어져 내리는 돌 조각을 맞으며 빨리 포격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제기랄. 조선 놈들은 지치지도 않나?”
“그러게 말이야. 이쯤 되면 화약이 떨어질 만도 한데 어디서 솟아나는지 정말 한 번도 안 쉬고 쏴 대는군.”
“그나저나 지원 병력은 오기는 하는 걸까?”
“우군장 어르신 말씀 못 들었어. 북경에서 보낸 병력이 산해관을 떠났다고 했잖아.”
“자넨 그걸 믿어?”
다쳤는지 왼쪽 어깨에 붕대를 감은 동료가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자 병사는 옷에 묻은 흙먼지를 신경질적으로 털어 내며 말했다.
“그런 희망이라도 가지지 않으면 이 지옥을 어떻게 견디겠어.”
“……하긴.”
연이어서 날아오는 포탄에 병사들은 더 이상 잡담은 여기서 끊어졌다.
이렇게 내륙 쪽에 위치한 서문이 조선군의 포격으로 정신이 없을 때 바다 쪽도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포착됐다.
바다를 봉쇄하고 있던 조선군 함대가 일출과 함께 성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측면을 드러내며 일자로 늘어서 포격 대형을 갖췄다.
“각 함 위치에 모두 자리를 잡았습니다.”
치우 급 전열함 함교에 서서 영원성을 쳐다보고 있던 통제사 손억기는 함장인 이동규의 보고에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공격 깃발을 올리게.”
“옛.”
가장 높은 돛대에 붉은색 신호기가 올라가고 얼마 있지 않아서 굉음과 함께 어마어마한 충격이 선체를 흔들었다.
꽝! 꽝! 꽝!
왼쪽 측면에 탑재된 사십 문가량의 화포가 한꺼번에 포탄을 발사한 거였는데 배는 순간 옆으로 크게 기울며 매캐한 화약 연기에 뒤덮였다.
손억기가 탄 배뿐만 아니라 일열 횡대로 길게 늘어선 조선군 전선 이십여 척이 영원성을 향해 함포에서 불을 뿜었다.
쉬우우욱! 콰꽈꽝!
쿠쿵! 쿵!
모래톱과 바다에 떨어져 하얀 물기둥을 만들어 내는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포탄이 영원성을 타격하며 성채를 부서뜨렸다.
“명중, 명중입니다!”
돛대와 갑판 위에 있던 견시수들이 신이 나서 외쳤고 수군 병사들도 영원성 성벽에 포탄이 맞아 시커먼 연기가 치솟고 섬광이 터질 때마다 환호성을 내질렀다.
함교에 있던 손억기도 약간 상기된 얼굴로 연달아 지시를 내렸다.
“청군이 무력화될 때까지 계속해서 포격을 퍼부어라!”
그의 명령에 화답이라도 하듯 탑재된 함포는 쉬지 않고 포탄을 쏴 댔다.
떨어지는 포탄에 성벽 곳곳이 부서졌고 그나마 남아 있던 접안 시설과 유일하게 남은 화물선 한 척이 산산조각 나서 물속에 가라앉았다.
수백 문의 함포가 쏴 대는 포탄은 그동안 비교적 안전했던 영원성 동쪽 구역을 맹렬하게 강타하면서 삽시간에 불지옥으로 만들었다.
“우군장 어른!”
조선군의 공격에 지붕이 날아가고 군데군데 시커먼 그을음이 묻은 문루에서 청병들을 지휘하던 이화민은 허둥지둥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전령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이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전령은 그를 보자마자 다급하게 이야기를 쏟아 냈다.
“도, 동쪽 구역이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뭐야!”
화들짝 놀란 이화민은 몸을 돌려 뒤편을 바라봤다.
그러자 멀리 보이는 동쪽 구역이 시커먼 연기로 뒤덮여 있고 포탄이 터지면서 생기는 섬광이 번쩍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어떻게…….”
“조선군이 끌고 온 배로 함포 사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지금 동쪽 구역은 완전히 난장판입니다.”
“젠장!”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꼈지만 계속된 전투로 병력이 심각할 정도로 줄어든 상태라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가 없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이화민은 불안한 얼굴로 앞에 서 있는 전령을 보며 말했다.
“여기도 곧 조선군의 공격이 시작될 상황이라 빼낼 병력이 없다. 현재 있는 인원으로 어떻게든 성벽을 사수하라고 해!”
거친 고함에도 불구하고 전령이 주춤하면서 멈춰 서 있자 이화민이 버럭 짜증을 내었다.
“뭣 하나, 빨리 움직이지 않고!”
“예, 예!”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뒤늦게 전령이 달려 나갔다.
오랜 충치를 앓고 있는 사람처럼 끄응 신음을 흘린 그는 어쩌면 오늘이 최후의 결전이 될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쿠쿵! 우르르릉.
“맙소사…….”
동쪽 구역 방어를 맡은 중랑장 혁산은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어마어마한 함포 사격의 위력에 경악했다.
직접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동안 포격이 간간이 이어지기는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무려 이십여 척이 넘는 조선군 전선들이 쏴 대는 포탄은 거센 폭풍우처럼 동쪽 구역을 몰아쳤다.
특히나 일백여 문에 달하는 화포를 탑재한 치우 급 전열함의 위력은 가히 전율스러울 정도였다.
목표가 된 곳은 수십 개의 불기둥이 치솟아 오르며 힘없이 무너졌는데 지금도 망루 하나가 여지없이 깨져 나갔다.
꽈아앙!
“히익.”
“우린 다 죽을 거야.”
귀청을 마구 때리고 몸을 울리는 폭음과 충격에 청병들은 주체하기 힘들 정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혁산도 마찬가지였는데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지휘관이라는 책임감과 그의 가족이 바로 여기 영원성에 거주하고 있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자리를 지켜라! 허락 없이 움직이는 자는 바로 즉결 처분을 하겠다.”
부하들 앞에서 애써 강한 모습을 보였지만 상당수 병력을 그동안 접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다른 구역에 보내 천여 명밖에 남지 않은 전력으로 과연 곧 있을 조선군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을지 혁산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조선군 전선에서 쏜 포탄은 쉬지 않고 날아와 곳곳에 떨어져 폭발을 일으켰다.
후두둑. 쿵!
한편 함포 사격을 가하고 있는 전선 뒤편에 떠 있던 수송선에서는 작은 상륙용 배가 바다로 내려졌다.
“하선! 꾸물거리지 마라.”
수석총을 등에 맨 육전대 병사들은 긴장한 얼굴로 군관의 지시에 따라 수송선 측면에 내려진 줄사다리를 이용해 쪽배로 옮겨 탔다.
파도와 사람들 때문에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기에 다들 줄사다리를 꽉 움켜잡고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다 탔나!”
“옛!”
앞에서 울리는 육중한 포성에 섞여 병사들의 복창 소리가 들리자 육전대 지휘관인 김진석은 긴장한 채 줄을 맞춰 앉아 있는 부하들을 돌아보며 크게 소리쳤다.
“함포 사격으로 성안에 있는 적들을 이미 다 곤죽으로 만들어 놨을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 설사 살아남은 놈들이 있더라도 우리 육전대의 상대는 안 될 것이다. 다들 안 그런가!”
“맞습니다!”
상륙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내려는지 병사들이 목이 터져라 대답하자 김진석은 듬직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뒤 한쪽 팔을 들었다.
“출발. 해안으로 간다!”
그러자 화물선에 있던 선원들이 쪽배를 연결해 놓은 굵은 동아줄을 풀고 육전대 병사들은 가지고 있던 노로 선체를 힘껏 밀어 거리를 벌렸다.
“끙차.”
바로 이어서 양쪽에 타고 있던 병사들이 군관의 구령에 맞춰 노를 저었다.
“하나, 둘. 하나, 둘.”
쏴아아.
그렇게 육전대 병사들을 가득 태운 쪽배들이 물살을 일으키며 해안 쪽으로 나아갔는데 그 숫자가 서른 척이 넘었다.
육전대가 상륙을 개시한 와중에도 조선군 전선들은 계속해서 함포 사격을 가했다.
쉬우우웅! 꽈아앙!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날아간 포탄이 정확히 명중해 성벽 일부가 와르르 허물어지는 장면에 노를 젓던 병사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
“잘한다.”
포격에 청병이 한 명이라도 더 죽을수록 자신들의 생존 가능성이 높아졌기에 온몸으로 포수들을 응원했다.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짓던 김진석은 이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딴 곳에 정신 팔고 있을 시간이 없다. 어서 노를 저어라!”
그러자 육전대 병사들은 다시금 힘을 내서 노를 움직였다.
“으쌰! 으쌰!”
무시무시한 함포 사격의 위력을 직접 확인한 병사들은 두려움이 어느 정도 가신 듯 다시금 자신감을 되찾은 표정이었다.
뱃전에 선 김진석은 손에 든 장검을 꽉 움켜쥔 채 희뿌연 흙먼지에 뒤덮인 영원성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쿠쿵! 쿵!
아직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폭음이 선명하게 들렸고 성벽이 무너지고 숨어 있던 청병이 사지가 찢겨 쓰러지는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제 곧 저 생지옥 속에 자신과 부하들이 뛰어들어 치열한 사투를 벌여야 된다고 생각하자 김진석은 심장이 터질 듯 세차게 뛰었다.
이렇게 바다뿐만 아니라 육지에 위치한 성문에서도 조선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착검!”
처처척.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직접 나선 남두병 사령관의 외침에 전투대형을 갖춘 채 늘어서 있던 조선군 병사들은 일제히 허리에 차고 있던 총검을 꺼내 총대에 꽂았다.
바로 이어서 군마에 탄 남두병 사령관은 스르릉 하는 쇳소리를 내며 도현이 하사한 장군도를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정면에 보이는 영원성을 노려보며 재차 외쳤다.
“일 제대 공격 준비!”
이 순간 병사들의 심장이 두근두근 세차게 뛰는 가운데 들어 올린 장군도를 한차례 빙글 돌린 남두병 사령관은 검 끝을 앞으로 하며 명령을 내렸다.
“오늘이야말로 성을 함락시켜 그동안 희생된 전우들의 한을 풀어 주자! 공격 개시!”
둥둥둥!
공격을 알리는 전고가 전장 가득 울려 퍼지자 대기하고 있던 조선군 병사들은 약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힘차게 발을 떴다.
“가자!”
일 제대에 속한 병사 일만 명은 처음에는 천천히 걸어가다가 이내 함성을 내뱉으며 앞에 있는 성을 향해 힘껏 내달렸다.
원래대로라면 성벽 근처까지 대형을 유지하고 가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모여 있다가 개조한 포탄이 투척되면 피해가 컸기에 변칙적인 전술을 썼다.
지난 보름간 계속된 포격으로 이미 성벽 여기저기가 마치 이가 빠진 것처럼 허물어져 있었기에 조선군은 짧은 사다리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공성 무기도 없이 달려갔다.
그러는 사이 포병대는 연막탄을 터트려 돌격해 들어가는 아군을 가려 줬다.
퍼펑! 펑.
시야를 완전히 가린 연막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청병들은 경험으로 조선군이 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황급히 몸을 일으킨 이화민은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 낼 여유도 없이 주위에 있는 청병들을 둘러보며 크게 소리쳤다.
“모두 위치로! 내가 명령할 때까지 함부로 공격하지 마라.”
그러자 포격을 피해 엄폐물 뒤에 숨어 있던 청병들이 우르르 나와 각자 맡은 자리로 뛰어갔다.
“부관.”
“예.”
“개조한 포탄이 얼마나 남아 있나?”
부관은 잠시 머뭇거리다 곤혹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서른 발이 채 안 됩니다.”
“그것밖에 없어?”
“방금 전 포격에 새로 개조한 포탄을 보관해 둔 건물이 무너졌습니다.”
부관이 한쪽 팔을 들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본 이화민은 와락 얼굴을 구기며 낮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지붕째 폭삭 주저앉아 있었는데, 언뜻 보기에도 거기서 잔해를 치우고 개조한 포탄을 찾아내는 건 어려워 보였다.
“이런!”
“꺼내 쓰기 쉽게 한다는 것이 그만…… 죄송합니다.”
“끄으응.”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미 벌어진 일인데 이제 와서 왈가왈부해 봤자 이로울 것이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질책을 하기보다 당장 들이닥칠 조선군을 막는 것이 더 시급했다.
“그건 나중에 따지고 남아 있는 포탄들이라도 어서 골고루 나눠 주도록 해.”
“옛.”
크게 대답한 부관이 명령을 내리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자 몸을 돌린 이화민은 부서진 성가퀴 너머로 뿌옇게 연막이 쳐진 정면을 바라보며 낮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일 아침 해를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군.”
하필이면 개조한 포탄을 쌓아 둔 건물이 포격을 받아 무너진 것에 어쩐지 이화민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 연막 사이로 시커먼 인영이 일렁거리는가 싶더니 조선군이 함성을 내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아!”
“돌격!”
“왔다!”
잔뜩 긴장한 채 전방을 주시하고 있던 청병들은 조선군의 등장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벌서 며칠째 계속된 전투였지만 그때마다 사납게 몰려오는 조선군의 모습은 커다란 압박감을 줬다.
타탕! 탕! 탕! 탕!
“으악.”
“큭!”
조선군이 먼저 제압 사격을 가하자 청군도 곧바로 대응을 해 왔다.
“쏴라!”
슈슉! 타타탕!
성벽에 날아온 화살과 총탄에 한 무더기의 병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지만 조선군은 상관하지 않고 더욱 거세게 돌격했다.
“앞으로! 머뭇거리지 말고 성벽을 올라라.”
“우와!”
선봉을 맡아 돌격해 들어간 병사들 사이에는 첫날 호되게 당해 큰 피해를 입었던 용병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장검을 들고 나머지 한 손에는 웅오식 권총을 움켜 쥔 전적은 실추된 자존심을 설욕하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제일 앞에서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으며 용병들을 독려했다.
“폭탄을 던져라!”
“이얍!”
단번에 성벽을 넘어올 것 같은 조선군의 기세에 이화민은 황급히 소리를 쳤다.
그러자 청병들은 개조한 포탄을 들어 성 밖으로 집어 던졌고 이내 굉음을 울리면서 폭발했다.
꽈꽝! 꽝!
앞에서 뛰어가던 왜국 용병 네다섯 명이 폭발에 휘말려 피 떡이 되어 널브러지고 적이 쏜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지만 전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날 따르라!”
그런 전적의 모습에 조선군 병사와 용병들은 사방에서 포탄이 터지는데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고 용감하게 성벽을 기어올랐다.
“하압!”
서걱.
“끄허억.”
검을 휘둘러 성가퀴를 손으로 잡고 올라오는 조선군 병사를 베어 버린 이화민은 고함을 내질렀다.
“적을 밀어내라! 절대 자리를 내줘서는 안 된다.”
타앙.
“꾸엑.”
악을 쓰며 전투를 독려하던 이화민은 바로 옆에서 활을 쏘며 싸우던 청병 한 명이 총에 맞아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걸 보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어느 때보다 거세게 덤벼드는 조선군의 공세에 청군은 반격은 고사하고 막아 내는 데 급급하며 열세에 몰렸다.
다른 날 같으면 동쪽 구역에 있는 병력을 급히 불러와 불을 끄겠지만 오늘은 그쪽도 똑같이 공격을 받는 중이라 그것도 어려웠다.
“뭘 하고 있느냐! 어서 포탄을 집어 던져라.”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부관의 다급한 대답에 이화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벌써 다 떨어졌단 말인가?”
“조선군의 공세가 워낙 거세다 보니…….”
뒷말은 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는데 당장 방어선이 무너질 것 같은 상황이라 개조한 포탄을 아낄 여유가 없었다.
이렇게 되니 건물이 무너져서 파묻힌 포탄들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젠장 할!”
한편 전망대에 선 도현은 망원경으로 전투 상황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켜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뭔가 될 것 같군.”
“다들 필사의 각오로 전투에 임하고 있으니 분명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래야지.”
남두병 사령관의 말에 도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때 군관 한 명이 다가와 군례를 취하고는 입을 열었다.
“전하, 육전대도 상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적의 저항은?”
“현재까지는 미미하다고 하옵니다.”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말고 밀어붙이라고 전하도록.”
“옛.”
머리를 숙인 군관이 물러나자 도현은 고개를 돌려 남두병 사령관을 보며 말했다.
“적이 흔들리고 있으니 이 제대와 삼 제대를 연달아 투입해 방어선을 완전히 무너뜨리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폭풍처럼 밀어붙이는 끝없는 공격.
그것이 바로 적을 완벽하게 제압하기 위해 도현이 띄우는 승부수였다.
남두병 사령관이 부하들에게 명령을 전달하는 목소리를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난간에 손을 짚은 그는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영원성을 멀리 쳐다보았다.
잠시 뒤 전망대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 대와 삼 제대 지휘관들이 장검을 뽑아 들고는 돌격 준비를 시켰다.
병사들은 총열에 착검을 모두 끝낸 상태였기에 명령만 떨어지면 언제든지 앞으로 돌격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붉은색 깃발이 오르고 뿔나팔 소리가 울리자 지휘관들은 손에 든 장검을 내밀며 크게 외쳤다.
“돌격!”
“우와아아!”
그러자 각각 만여 명에 달하는 조선군 병사들이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며 영원성을 향해 달려 나갔다.
자칫 돌격 제대 간의 간격이 너무 좁아 성벽 아래에 병력이 밀집되어 버릴 수도 있었지만 도현은 그런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과감하게 공세를 펼쳤다.
이런 도현의 도박은 제대로 들어맞아서 마침 유일하게 조선군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는 수단이었던 개조한 포탄마저 뚝 떨어진 청군은 곳곳에서 방어선에 구멍이 났다.
특히 포격에 성벽이 무너져서 임시로 목책을 세워 둔 지점은 파상 공세에 여지없이 뚫리고 말았다.
타탕! 탕!
“커억.”
제압 사격에 적이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지자 조선군 병사들은 가지고 온 사다리를 재빨리 걸치고는 목책을 뛰어넘었다.
“쳐라!”
“싹 다 작살내 버려!”
난입해 들어간 조선군 병사들은 잔뜩 악에 받친 얼굴을 하고는 총검으로 상대를 찌르거나 베었다.
“마, 막아!”
채챙! 챙!
폭.
“끄윽.”
조선군 병사들에 이어서 용병들까지 합류하며 반쯤 무너져서 목책으로 보강된 성벽 주변은 양군의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여태까지 잘 버텨 오던 청군이었지만 둑이 터진 것처럼 계속해서 밀려오는 조선군의 거센 물결에 한순간 휩쓸려 버리고 말았다.
장수 중에 가장 먼저 목책을 넘어간 전적은 자신을 향해 찔러 오는 창을 검으로 쳐 내고는 상대의 가슴을 발로 걷어차 넘어뜨렸다.
퍽.
“아악.”
벌러덩 쓰러진 청병은 전적의 검에 찔려 피를 토했다.
상대의 숨이 끊어지자 아무런 감흥도 없이 다시 검을 뽑아 든 전적은 성 안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소리쳤다.
“공격! 조금 더 힘을 내서 적을 몰아붙여라.”
“죽어!”
“꾸엑.”
타탕!
한데 뒤엉킨 양쪽 병사들은 이성을 모두 내려놓은 채 피에 취해 오직 본능만 남아 서로 죽고 죽였다.
이런 가운데 해안과 접한 동문 쪽 상황도 아주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더 빨리 저어라!”
“하나, 둘. 하나, 둘.”
쏴아아.
수석총을 어깨에 걸친 육전대 병사들은 군관의 구령에 맞춰 노를 힘껏 저었다.
다행히 파도가 그리 높지 않았기에 병력을 가득 태운 쪽배들은 오래지 않아 바닷가 근처까지 갈 수 있었다.
바닥이 뾰족한 치우 급 전열함은 어쩔 수 없지만 평저선인 판옥선들이 좀 더 가까이 접근해서 포격을 가해 주고 있기 때문인지 육전대 병사들이 해안에 거의 도착했는데도 청군은 별다른 반격이 없었다.
쉬우우웅! 꽈아앙!
또다시 날아온 포탄 한 발이 날아와 터지면서 성벽 한 귀퉁이를 무너뜨렸다.
그렇게 청군들이 격렬한 포격에 꼼짝도 못하고 몸을 웅크리고 있는 사이에 마침내 육전대 병사들이 탄 쪽배가 해안에 닿았다.
터엉.
“가자!”
아직 바닷물이 무릎까지 왔지만 육전대 병사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재빨리 배에서 뛰어내렸다.
풍덩. 첨벙.
그러고는 총검을 꽂은 수석총을 양손으로 들고는 용감하게 무너진 성벽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김진석도 부하들과 함께 크게 소리를 내지르며 앞으로 뛰었다.
“더 빨리 뛰어!”
해안에 상륙한 육전대가 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조선군 전선들은 오폭을 피하기 위해서 거세게 쏴 대던 포격을 중단했다.
성을 완전히 박살 낼 것처럼 쏟아지는 포격에 동쪽 구역 방어를 맡은 중랑장 혁산은 문루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었다.
장수 체면이 말이 아니었지만 당장 여기저기서 포탄이 터지고 파편이 마구 튀는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주위에 있는 청병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다들 얼이 반쯤 나간 얼굴로 폭음이 들릴 때마다 몸을 움찔거렸다.
배로 함포를 실고 다니는 수군은 지상 병력이 보유한 것보다 화포의 구경이 더 크고 숫자 또한 월등하게 많았기에 그걸 온몸으로 받아 내야 되는 청병들은 죽을 맛이었다.
제발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길 속으로 간절히 빌고 있을 때 갑자기 거짓말처럼 포격이 딱 멈췄다.
“…….”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혁산은 이내 황급히 몸을 일으켜 밖을 내다보고는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헉!”
해안을 가득 매운 육전대 병력이 어느새 지척까지 접근해 있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혁산은 다급한 음성으로 아직 머리를 박고 숨어 있는 청병들을 다그쳤다.
“조선군이 쳐들어온다. 어서들 일어나라!”
그때에야 주춤거리며 고개를 든 청병들은 햇볕에 번뜩이는 총검을 앞세우며 달려오는 육전대의 모습에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으으.”
타타탕! 탕! 탕!
피슝!
“으악.”
“큭.”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오는 총탄에 청병들은 기겁을 하며 다시 몸을 숙였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몇몇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성벽 위에 있는 적을 향해 권총을 연달아 쏜 김진석은 왼편에 있는 부하들을 보며 소리쳤다.
“폭탄을 던져!”
그러자 제자리에 서서 총을 쏘던 육전대 병사들은 허리춤에서 막대 모양의 쇳덩어리를 꺼냈다.
도현의 지시로 병기창에서 만들어 낸 초창기 형태의 수류탄이었다.
동료들이 옆에서 엄호를 해 주는 동안 품속에서 부싯돌을 꺼내 불을 붙인 병사들은 뒤로 상체를 젖혔다가 있는 힘껏 성벽 위로 집어 던졌다.
“이거나 받아라!”
휘이익.
다른 곳에 있던 병사들도 똑같이 수류탄을 던졌고 이내 연달아 폭음이 울렸다.
꽝! 꽈꽝! 꽝!
“커헉.”
희뿌연 먼지와 함께 돌조각이 사방으로 튀는 가운데 청병들의 비명이 구슬프게 들려왔다.
“됐다. 돌격!”
“우와아아!”
잔뜩 기세가 오른 육전대 병사들은 김진석의 명령에 재빨리 부서진 성벽을 넘어 안으로 난입해 들어갔다.
“안 돼! 조선군이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라.”
혁산이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전의를 상실한 청병들은 맞서 싸우기보다 허둥지둥 도망치기에 바빴다.
“사, 살려 줘.”
“저리 비켜!”
이미 한 번 바뀐 흐름을 사람의 손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성안으로 달아나는 청병들을 억지로 막을 방법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숨을 곳을 찾아 미칠 듯이 뛰어다니는 청병들 덕에 텅 비어 있던 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그들 중 일부는 닫힌 상가의 문을 쾅쾅 두드리며 억지로 열려고 했지만, 곧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재빠르게 후미진 골목을 찾아서 숨어들었다.
삽시간에 흩어지는 개미 떼처럼 사방을 휘젓고 다니는 그 광경에 혁산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돌아와! 돌아오란 말이다.”
애타게 소리를 질렀지만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다.
명령을 어기고 자리를 이탈한 부하들의 행동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은 어느새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조선군과 싸우는 것이 먼저였다.
채챙! 챙! 탕! 타탕.
“죽어!”
“끄헉.”
“켁.”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총성이 난무하는 가운데 양쪽 병사들은 한데 뒤엉켜 핏발 선 눈을 하고는 상대를 죽이기 위해 거친 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이미 상당수의 병력이 도망쳐 버린 상태였기에 청군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육전대에 빠르게 제압당했다.
혁산도 금방 육전대 병사 네 명한테 둘러싸이고 말았다.
“제기랄!”
날카롭게 번득이는 총검을 겨누고 있는 육전대 병사들을 보며 얼굴을 구긴 혁산이 욕설을 내뱉을 때 가벼운 가죽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장수가 한 명 나타났다.
바로 육전대 지휘관인 김진석이었는데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를 아래위로 쓸어 보고는 차가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
“다 끝났다. 항복해라.”
약간은 어색한 청나라 말이었지만 혁산이 알아듣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그나마 남아 있던 병사들 대부분이 피를 흘리며 흙바닥에 쓰러져 있고 나머지는 병장기를 버린 채 항복하고 있었다.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지금까지 청군이 버틸 수 있게 해 준 성벽이 무너지고 조선군이 안으로 들어왔으니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었다.
절망감 가득한 얼굴을 한 혁산은 이내 자신은 할 만큼 했다는 생각에 몸에서 힘을 뺐다.
쨍그랑.
쇳소리를 내며 가지고 있던 검이 바닥에 떨어지자 왼편에 있던 병사가 다가와 그의 무릎을 꿇리고는 두 손을 등 뒤로 돌려 포박했다.
혁산과 항복한 청병들은 무장을 해제당한 채 해변으로 끌려갔고 동문을 장악한 육전대는 내성을 치기 전에 잠시 숨을 고르면서 흐트러진 전열을 재정비했다.
약간의 미동도 없이 전장을 주시하고 있던 도현은 아군 병사들이 마침내 청군의 방어를 뚫고 성벽을 넘어 들어가자 주먹을 꽉 움켜쥐며 기뻐했다.
“좋아. 바로 이거야.”
“성벽이 무너졌으니 이제 영원성 함락은 시간문제일 것이옵니다.”
함께 있던 남두병 사령관도 그동안 앓던 이가 빠진 듯 후련한 기분으로 이야기를 했다.
살포시 입가에 미소를 짓던 도현은 다시 정색을 했다.
“승기를 잡은 건 맞지만 아직 전투가 끝난 것이 아니니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을 풀지 말아야 될 것이야.”
“물론입니다.”
그때 군관 한 명이 전망대로 올라와 군례를 취했다.
“전하. 육전대가 상륙에 성공해 동문을 장악했다고 합니다.”
“호오. 그래!”
연이어 들린 낭보에 도현은 흡족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 곧 내성으로 진격할 거라고 합니다.”
“그래야지. 자고로 기세를 탔을 때 끝장을 봐야 되는 거야.”
고개를 옆으로 돌린 도현은 남두병 사령관을 보며 지시를 했다.
“적이 정신을 못 차리도록 이쪽에서도 남은 병력을 몽땅 다 밀어 넣도록 해.”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남겨 둔 예비대까지 전부 쏟아부어서 확실히 승기를 굳히겠다는 뜻이었다.
고개를 숙여 대답한 남두병 사령관은 뒤편에 서 있는 군관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포병과 호위대를 제외한 삼만 명의 병력이 추가로 전투에 가세했다.
얼마 있지 않아 동문에 이어서 서문과 북문, 남문이 차례대로 조선군에 장악됐고 이제 싸움은 시가지 안으로 옮겨 갔다.
요서 전체를 관장하는 대성인 만큼 상주인구도 많아 외성과 내성 사이에 형성된 시가지는 상당히 넓고 골목골목 복잡했다.
바로 그곳에서 조선군과 청군이 치열하게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츄앙!
“이얍!”
“커컥.”
워낙 서로 가깝게 붙어 있다 보니 조선군은 총을 가지고 있었지만 재장전을 할 여유도 없이 총검으로 찌르거나 몽둥이처럼 휘둘렀다.
“죽어라!”
용병들을 이끌고 내성으로 향하던 전적은 갑자기 골목길에 숨어 있다가 뛰쳐나온 청병의 공격에 얼른 검을 들어 올렸다.
채챙!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리며 찔러 오는 창을 걷어 낸 전적은 한쪽 발을 내밀면서 그대로 검을 위에서 밑으로 내리그었다.
서걱.
“끄아악.”
길게 검상을 입은 상대는 비명을 토하며 옆으로 허물어졌다.
순식간에 청병 한 명의 목숨을 빼앗고 재빨리 주위를 훑어본 전적은 서른 명이 넘는 적이 부하들과 뒤엉켜 있는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피와 흙먼지에 더러워졌지만 다른 적들과 달리 화려한 갑옷을 입고 있는 이화민을 발견하고는 눈을 반짝였다.
일격에 덤벼드는 용병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는 것이 예사 인물이 아니었다.
“넌 내가 상대해 주마!”
크게 소리를 치며 다가온 전적이 검을 내려치자 이화민은 짧게 콧방귀를 뀌고는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채챙!
쇳소리와 함께 검을 잡고 있는 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느낌에 전적은 살짝 인상을 썼다.
그건 이화민도 마찬가지였는데 단 한 번 검을 나눴지만 서로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오히려 강한 상대인 만큼 여기서 상대를 쓰러뜨린다면 싸움을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었기에 어떻게든 꺾어야 했다.
전적은 신중히 한 손으로 들고 있던 검을 두 손으로 고쳐 잡으며 중단 자세를 취했다.
“제법 솜씨가 있는 놈이구나.”
“그쪽도.”
“괜히 아까운 목숨을 잃지 말고 이미 다 끝난 싸움이니 그만 항복하는 것이 어떤가!”
“…….”
전적의 권유에 이화민은 약간 망설이는 것 같다가 이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헛소리하지 말고 어서 덤벼라!”
“쯧. 어리석은 놈.”
짧게 혀를 찬 전적은 몸을 앞으로 날렸다.
이화민도 이를 악물며 마주쳐 왔고 이내 두 사람의 검이 맞부딪쳤다.
츄앙. 챙!
재차 검이 닿기 직전에 전적이 슬쩍 궤적을 바꿔 상대의 옆구리를 노렸다.
그러자 이화민은 급히 몸을 비틀었고 검끝이 입고 있는 갑옷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쳇!”
전적은 살짝 눈썹을 찡그리고는 연속해서 검격을 날리며 이화민을 몰아붙였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며 방어에 치중하던 이화민은 전적이 내려치기를 하려고 위로 팔을 들어 올리는 순간 틈을 놓치지 않고 앞으로 나서며 검을 쭉 찔러 넣었다.
“헉!”
헛바람을 삼키며 전적이 검을 쳐 내려고 했지만 상대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푹.
“크윽.”
마지막 순간 다급히 상체를 뒤로 빼서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왼쪽 어깨가 찔리며 시뻘건 피가 흘러나왔다.
재빨리 거리를 벌린 전적은 상처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이를 악물고는 앞에 있는 이화민을 노려봤다.
생살이 찢어졌으니 고통도 컸지만 그것보다 상대에게 먼저 한 칼을 먹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났다.
“이놈!”
“다음에는 이번처럼 운이 좋지 않을 거야.”
“이익.”
신경을 긁는 말에 눈썹을 치켜들던 전적은 상대가 은근히 자신을 도발하고 있는 걸 깨닫고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흥분을 시켜서 실수를 유도하려고 했던 이화민은 금방 평정심을 되찾는 걸 보고 아쉬운 얼굴을 했다.
“그럼 다시 붙어 보자고. 타핫!”
이화민이 간격을 좁히며 다가오자 전적도 물러서지 않고 마주 달려 나갔다.
다행히 급소는 피했지만 검상을 입은 어깨에서 출혈이 계속되고 있었기에 시간을 끌수록 불리했던 전적은 빠른 승부를 원했다.
순식간에 십여 합이 넘는 검격이 오갔는데 하나하나가 걸리면 목숨을 잃어버릴 만큼 치명적인 것이었다.
두 사람이 싸우는 와중에도 주위에서는 피가 튀는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시가지로 진입하는 조선군 병사와 용병 들의 숫자가 늘어나 청군이 밀리는 형국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화민의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고 움직임에 조급함이 묻어났다.
검격을 나누는 동안 어깨에 입은 상처 부위가 계속해서 따끔거렸고 피도 멈추지 않고 흘러나왔다.
일순간 동작이 둔해지자 이화민은 그걸 놓치지 않고 안으로 파고들며 검을 찔렀다.
“끝이다!”
검끝이 정확히 심장을 향하고 있었기에 막지 못한다면 치명상을 피하기 어려웠다.
절체절명의 순간 뜻밖에도 전적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멈칫거린 건 아까 입은 검상 때문이 아니라 일부러 상대의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 허점을 보인 것이다.
예상한 대로 이화민이 공격을 해 오자 전적은 민첩하게 상체를 틀어서 검을 피했다.
“……!”
희심의 일격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만 찌르자 이화민은 자신이 당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타합!”
힘찬 기합성과 함께 날카로운 살기를 느낀 이화민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지만 이번에는 전적의 검격이 더 빨랐다.
슈각.
전적이 휘두른 검은 상대의 가슴을 사선으로 깊숙이 베며 지나갔다.
“커억.”
입고 있던 갑옷이 쩍하고 벌어지면서 장기를 크게 다친 이화민은 울컥 검붉은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그 상태에서도 검을 놓치지 않은 이화민은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는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이내 허물어지듯 양쪽 무릎을 꿇으며 앞으로 쓰러졌다.
“헉헉.”
이기기는 했지만 만만치 않은 상처를 입은 전적은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꽂고 지팡이처럼 몸을 기댔다.
온몸의 체중을 검 하나에 의지한 채 헐떡이는 숨과 쿵쾅거리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렸다.
그사이 주위에서 벌어진 싸움도 어느새 다 끝나 있었는데 청병들 태반이 처참한 몰골로 죽어 있었다.
“군호 어른, 괜찮으십니까?”
군관 하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오자 전적은 한쪽 팔을 내저으며 몸을 바로 했다.
“별거 아니니 어서 병력을 추슬러 내성으로 가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의 재촉에 머리를 숙인 군관은 죽은 청병들의 주머니를 뒤지고 있던 왜국 용병들을 다그쳐서 시가지 안쪽으로 움직였다.
그걸 쳐다보던 전적은 안쪽 소맷자락을 길게 찢어 검상을 입은 어깨를 단단히 감싼 뒤 검을 고쳐 잡고 걸음을 옮겼다.
시가전은 동문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잠시 전열을 재정비한 삼천 명의 육전대는 곧장 성안으로 밀고 들어가 청병들과 뒤섞여 싸웠다.
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시가전에서는 장전을 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화약 무기보다는 창과 칼이 더 효과적이었다.
그래서 육전대 병사들도 주로 총검을 이용해 적을 상대했다.
퍼억.
“뒈져라!”
“크흑.”
난장판이 따로 없었는데 수군에 속한 병력이라 이런 근접전에서는 익숙지 않을 거라는 편견과 달리 혹독한 훈련을 거친 육전대 병사들은 아주 물 만난 고기처럼 골목골목을 휘젓고 다녔다. 오히려 전열이 무너진 청군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저기서 청군과 부딪쳤지만 제대로 대항하는 움직임 없이 조선군을 보면 화들짝 놀라 달아나거나 병장기를 버리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가끔 저항을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육전대의 손에 아주 작살이 나 버렸다.
서걱.
“으악!”
한쪽에만 날이 있는 도를 들고 덤벼들던 청병을 일검에 베어 버린 김진석은 뺨에 튄 피를 손등으로 닦아 내며 작게 중얼거렸다.
“더럽게 많네.”
여기까지 오면서 그가 죽인 적병의 숫자만 해도 벌써 열이 넘었다.
싸움이 벌어졌던 골목에는 서른 구가 넘는 시신으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가득 차 있었는데 대부분 청병이었지만 그사이에 육전대 병사도 한 명 보였다.
서로 죽고 죽이는 전투 중에 아군의 희생이 한 명도 없기를 바라는 건 무리였지만 그래도 힘들게 키운 부하의 시신을 보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정중히 수습해 주고 싶었지만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기에 김진석은 어쩔 수 없이 그냥 내버려 둬야 했다.
그러고는 주위에 몰려 있는 육전대 병사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내성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들 힘을 내라!”
“옛.”
계속된 싸움에 지칠 만도 했지만 육전대 병사들은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살아 있었고 그걸 본 김진석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자!”
앞장서서 걸음을 내딛는 김진석을 따라 병사들은 언제든 적과 싸울 수 있도록 총검이 꽂힌 수석총을 두 손으로 잡은 채 다시 움직였다.
그렇게 청군이 빠르게 무너지는 가운데 조선군은 내성을 향해 사방에서 압박해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도 병사들을 지휘해야 될 요서총병 공손척은 여전히 내성 안 관저에 처박혀 있었다.
밖에서 들리는 함성에 바닥이 쿵쿵 울리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벽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불안감에 시달리며 애꿎은 손톱을 물어뜯고 있던 공손척은 부관이 급히 들어오는 인기척에 서성거리던 발걸음을 멈췄다.
“총병 어른, 큰일 났습니다!”
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성문 네 곳이 모두 조선군에 뚫렸사옵니다.”
“허업!”
결국 우려하던 일이 터진 것이다.
숨을 헉 들이켠 공손척은 황급히 부관을 다그쳤다.
“이화민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우군장께서는 적과 싸우시다 전사하셨다고…….”
부관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비보를 전하자 입에서 절로 끙 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아, 제기랄.”
머릿속이 온통 엉망진창이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부관에게 어떤 명령을 내려야 할지, 아니면 성을 버리고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할지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공손척은 무의식적으로 다시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러다 손톱 밑의 여린 살갗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자, 그제야 손끝에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리는 것을 발견한 공손척은 입안에서 느껴지는 비린 피 맛에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총병 어른?”
“이제 어떡해야 하나?”
도움을 청하는 어린아이처럼 매달리는 눈빛에 부관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런 자를 상관으로 모시고 성을 방어하려 했다니.
맹렬하게 돌격해 오는 조선군에 비해 공손척은 너무나 나약했다.
“최대한 막고는 있습니다만, 곧 내성에도 적이 들이닥칠 겁니다.”
“크흑.”
공손척의 얼굴에 짙은 절망이 드리워졌다.
퇴로가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달아나겠지만 사방이 조선군으로 꽉 막혀 있었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공손척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자 부관이 그를 재촉했다.
“얼른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명나라 시절 청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증축을 거듭해 넓고 튼튼한 내성이 남아 있었지만 공손척은 얼마 안 되는 병력으로 조선군과 계속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니, 괜히 끝까지 저항했다가 전투가 끝난 뒤 분풀이 상대가 되는 것이 두려웠다.
“애초에 여길 오는 것이 아니었어.”
“예?”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불안한 듯 손을 만지작거리던 공손척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는지 고개를 들었다.
“백기를 올려.”
끝까지 싸우라고 해도 부족할 판에 공성전을 벌이는 내내 겁쟁이처럼 관저에 숨어 있다가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에 부관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총병 어른.”
“성문이 다 뚫렸는데 어떻게 더 싸우겠어. 그리고 이만큼 버텼으면 우린 할 만큼 했어.”
“아직 내성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깟 성벽쯤은 조선군이 화포를 쏘면 끝이야.”
“하지만…….”
“더 늦기 전에 어서 내 말대로 해!”
빨리 백기를 내걸라고 다그치는 공손척의 행동에 부관은 어이가 없었다.
“뭘 하나!”
“후우.”
속에서 화가 치밀었지만 여기서 난리를 피워 봤자 아무것도 변할 게 없다는 생각에 부관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알겠습니다.”
그러고는 군례를 취하지도 않고 차갑게 뒤를 돌아 나갔다.
지금까지 버텨 왔던 것이 마치 거짓말처럼 한번 틈이 생기자 청군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무너졌다.
이미 동서남북, 네 곳의 성문이 조선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됐고 남아 있는 곳은 내성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그 내성도 언제 함락될지 모를 정도로 위태로웠다.
조선군은 마치 토끼몰이를 하는 것처럼 사방에서 조여 가며 상대를 몰아붙였는데, 시가지 곳곳에 청병의 시신이 즐비했고 건물을 하나하나 이 잡듯이 뒤져 숨어 있던 이들을 밖으로 끌어냈다.
“이리 와!”
“사, 살려 주십쇼.”
문지방을 붙잡고 끌려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청군 사내를 조선군 병사 둘이서 억지로 떼어 내었다.
“뭐든 할 테니 한 번만 좀 눈 감아 주십쇼, 예?”
말만 하면 신발이라도 핥을 기세로 사내가 싹싹 빌었지만 조선군 병사들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매몰차게 몸을 잡아끌었다.
그렇게 질질 끌려간 곳은 거리 한복판이었다.
평화로운 시절이었다면 마차 한두 대쯤은 너끈히 지나다닐 수 있을 법한 대로 중앙에 족히 몇십 명은 될 법한 청병들이 붙잡혀 와 있었다.
살기등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조선군 병사의 감시 속에 포로가 된 청병들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청병들이 계속해서 잡혀 나왔고 조금이라도 반항을 하면 그 자리에서 가차 없이 목을 베어 버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도망치는 청병을 쫓아 들어가 내성을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쏴라!”
꽝! 꽝! 꽝!
보유한 화포 중에 가장 가벼운 가자 총통을 끌고 온 조선군은 굳게 닫혀 있는 내성 성문을 향해 마구 포탄을 쏴 댔다.
크기는 작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력에 내성 성벽 곳곳이 부서지며 뿌연 돌가루가 날렸다.
계속해서 화포를 발사하는 포수들 뒤로 조선군 병사들이 대열을 갖춘 채 잔뜩 모여 있었는데 성문이 깨지면 지체 없이 안으로 돌격해 들어갈 것이다.
“이제 다 끝나간다. 힘들 내!”
“옛.”
김진석이 육전대 병사들을 다독이고 있을 때 군관 한 명이 한쪽 팔을 들어 올리며 크게 소리쳤다.
“사직 어른, 저길 보십시오.”
“응?”
의아한 얼굴로 몸을 돌린 김진석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백기입니다. 적진에 백기가 올랐습니다!”
정말 희뿌연 연기에 휩싸인 문루 위로 백기가 올라갔다.
그걸 본 김진석은 환하게 얼굴을 폈다.
“하하하! 정말이군.”
포수들도 백기를 발견했는지 황급히 포격을 중단했고 대형을 갖춘 채 돌격 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승리를 기뻐했다.
“와아아!”
“적이 항복했다.”
“우리가 이겼다!”
“대조선국 만세! 만세!”
얼마 있지 않아 닫혀 있던 성문이 좌우로 열리더니 갑옷을 차려입은 청군 장수가 한 떼의 적병들을 이끌고는 직접 백기를 들고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다들 잔뜩 지치고 겁을 먹은 모습이었는데 개중에는 부상을 당해 동료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몸을 움직이는 병사도 있었다.
흥분을 가라앉힌 김진석은 부하들을 시켜 청병들의 무장을 해제토록 한 뒤 한곳에 몰아 감시를 했다.
그리고 혹시나 함정일 경우에 대비해 조심스럽게 내성으로 들어가 안을 샅샅이 수색했다.
이렇게 영원성은 정확히 십칠 일하고 반나절의 치열한 공성전 끝에 조선군에 함락됐다.
청군은 일만 명의 수비 병력 중에 절반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고 삼천 명이 포로가 됐으며 오백 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조선군도 일만 삼천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이 중에 왜국 용병이 오천 명가량 된다고 해도 엄청난 피해였다.
그만큼 전투가 치열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영원성 성벽은 곳곳이 무너지고 금이 가 웅장했던 예전 모습을 찾기 힘들었고 시가지도 절반 가까이 포격에 파괴됐다.
어찌 됐건 마지막 보루였던 영원성이 함락되면서 요서 지역은 완전히 조선군의 수중에 들어오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