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권대사
요서 장악이 끝나고 상황이 안정되자 어느 순간부터 도현은 엄청난 서류 더미와 마주하게 됐다.
점령지의 각종 행정 업무와 공역 진행 보고서 그리고 원정군 관련 서류까지 종류가 아주 다채로운 종이 뭉치들이 그의 방을 가득 채웠다.
하나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는 것들이었기에 꼼꼼히 살피고 가부를 결정하다 보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끼익.
조용히 문이 열리며 칠현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서류 더미 속에 머리를 파묻고 있던 도현이 시선을 들고는 피곤한 듯 한쪽 관자놀이를 문지르면서 입을 열었다.
“그건 또 뭐야?”
그러자 칠현은 두 손 가득 가지고 온 두루마리를 한쪽에 내려놓고는 담담한 어투로 대답을 했다.
“주작단에서 올린 명나라의 동향 보고서와 영원성 복구 작업에 지금까지 들어간 지출 내역서들입니다.”
“에휴. 이러니까 선대왕들이 오래 못 살고 다 빨리 요절했지.”
아무리 처리를 해도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안 보이는 서류 더미에 도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칠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힘드시면 좀 쉬었다가 하시지요. 그러시다가 몸이 상하시겠습니다.”
“어차피 해야 될 일인데 미뤄 봤자 나중에 더 힘들지.”
“하지만 수라도 거르시고…….”
“괜찮아. 이런 일을 한두 번 해 본 것도 아니고.”
그래도 칠현의 표정에선 근심스러운 기색이 가시질 않았다.
“피곤하신 상태에서 글을 보시는 것보다 잠시 쉬었다가 맑은 정신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거듭되는 만류에 결국 도현이 먼저 손을 들었다.
“어쩔 수 없군. 네가 계속 옆에서 징징거리니까 영 집중도 안 되고.”
버릇처럼 튀어나오는 핀잔에도 불구하고 칠현의 입가에 띤 미소는 부드러웠다.
“그럼 뭐라도 한 잔 마실까.”
“차를 올리겠습니다.”
“시원한 게 더 좋겠어.”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가운 걸로 준비하지요.”
그러고서 잠시 나갔다 돌아온 칠현의 손에는 맑은 수정과가 들려 있었다.
어지러이 놓여 있던 서류들을 옆으로 치우고 자리를 만든 도현은 칠현에게도 옆에 같이 앉으라며 손짓했다.
“혼자 먹으면 무슨 맛이야. 너도 한잔해.”
“제가 어찌 감히…….”
“뭐 어때. 어차피 지금은 우리 둘뿐인데. 그리고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예법을 따졌다고 그래?”
“저는 항상 예의 바른 사람인데요.”
툴툴거리면서 칠현이 마지못해 의자를 가져와서 앉자 도현이 비웃듯이 한쪽 입술을 끌어 올렸다.
“웃기고 있네. 왕 앞에서 투덜거리는 내관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어.”
그러면서 도현은 자화자찬했다.
“아랫사람 잘 돌봐줘, 유머 감각도 탁월해, 일도 참 잘해. 내가 생각해도 난 너무 완벽하다니까.”
“정말요? 진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행여나 일하다가 과로로 쓰러질까 봐 걱정하던 따스한 온기는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온데간데없고, 싸늘한 눈동자로 칠현이 반문했다.
“어쨌든 네 말대로 좀 쉬니까 낫긴 하네.”
뻑뻑한 눈가를 손가락으로 비비면서 도현이 말했다.
“그렇지요? 아, 참 그런데 봉황상단에서 영원성에 상점을 열겠다고 했지 않습니까.”
칠현의 말에 도현은 수정과를 한 모금 마시며 살짝 머리를 끄덕였다.
“그랬었지.”
“며칠 안에 화물선 세 척 분량의 물품을 가져온다고 합니다.”
“안 그래도 산해관이 막히면서 기존에 유지되던 물자 유통 체계가 멈춰서 물건 값이 오를 조짐이 보였는데 잘됐군.”
“그러게 말입니다. 봉황 상단에 이어서 다른 아국 상단들이 진출을 하게 되면 물가가 바로 안정을 찾게 될 겁니다.”
치안을 확립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점령지 주민들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전쟁으로 인해 크게 뛴 물가를 낮추는 게 꼭 필요했다.
“그나저나 대궐 후원에 단풍이 들면 다 함께 소풍을 가기로 숙휘와 약속을 했는데, 아무래도 못 지키겠군.”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도현이 중얼거리자 칠현이 위로를 했다.
“공주 마마도 이해를 하실 겁니다.”
“그런 걸 보면 난 참 안 좋은 아버지인 것 같군.”
“…….”
“원정을 다닌다고 대궐을 비우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한양에 있을 때도 정사를 본다고 바빠서 제대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했으니 말이야.”
“다 치욕의 역사를 씻고 영광된 국가를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신 것이지 않습니까. 왕자님과 공주님들도 전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래 줬으면 좋겠군.”
“모두들 총명하신 분들이니 분명히 그럴 겁니다.”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수정과를 마저 다 마시고는 한쪽에 치워 둔 서류를 집어 들었다.
“좀 쉬었으니 다시 일을 해 볼까.”
그러자 칠현은 조용히 잔을 치우고는 언제든 부르면 달려갈 수 있도록 약간 떨어져서 대기했다.
한편 청국의 내전은 예친왕이 북경으로 진격해 성을 포위하면서 서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성전을 벌였다.
“쏴라!”
슈슈슉!
비처럼 화살이 쏟아진 뒤 얼마 있지 않아서 병사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공성용 사다리를 들고 돌격해 왔다.
“와아아아!”
“쳐라!”
그러자 성벽 위에 있던 태후군은 화살을 쏘거나 뜨거운 물을 붓고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돌을 집어 던지며 맞섰다.
“이거나 먹어라!”
쏴아악.
“끄아악!”
성벽에 걸친 사다리를 올라가다가 펄펄 끓는 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병사는 비명을 내지르며 아래로 떨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돌에 맞아 머리가 터지거나 화살에 죽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몇몇은 공성추를 끌고 가 성문을 부수려다가 상대가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이는 바람에 실패하기도 했다.
“뜨, 뜨거워!”
불길에 휩싸인 병사는 고통스럽게 몸부림을 치다 이내 바닥에 쓰러져 미동이 없었다.
비명과 함성 그리고 살이 타는 거북한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피 비린내 나는 전투가 계속 이어졌다.
어느 한쪽이 다 죽을 때까지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싸움은 예친왕군 진영에서 퇴각을 알리는 뿔나팔 소리가 길게 울리는 걸로 갑자기 끝났다.
뿌우웅. 뿌우웅.
시신만 잔뜩 남겨 놓은 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예친왕군을 보며 성벽 위에 있던 태후군 병사들은 오늘도 또 한고비 넘겼다는 생각에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문루에서 전투를 지휘한 오삼계도 병사들처럼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이틀째 이어진 전투에 성벽은 곳곳이 부서지거나 죽은 자들의 피로 붉게 칠해져 있었고 성 밖에 있던 민가들은 불에 타 모조리 폐허로 변해 시커먼 연기만 피워 올렸다.
오삼계는 방금 전투에서 상대가 쏜 포탄에 맞아 박살 난 왼편 포대를 보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계속 남아 있었다면 적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데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박살 나 있었다.
오히려 포대 안에 쌓아 둔 포탄이 유폭을 일으키는 바람에 망루가 통째로 절반이나 무너져 내려 방어선에 큰 구멍이 되어 버렸다.
“젠장.”
인상을 찡그린 오삼계가 박살 난 포대를 보고 있자 왕추용이 옆으로 다가와 나란히 섰다.
“운이 없었습니다. 석재로 포대 지붕을 단단히 보강까지 해 뒀는데 하필이면 포격을 위해 뚫어 둔 구멍으로 포탄이 날아들어 오다니…….”
“그러게 말일세.”
오삼계는 착잡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내일은 적들이 분명히 저곳을 노리고 덤벼들 테니 밤을 새워서라도 단단히 보강을 해 두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시간이 별로 없어 기껏해야 목책을 세우거나 부서진 잔해로 장벽을 쌓는 것밖에 할 수 없었는데,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미지수였다.
그래도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부서진 채로 그냥 방치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슬쩍 주위를 둘러본 왕추용은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소린가?”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오삼계가 쳐다보자 잠시 머뭇거리던 왕추용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금이야 아직 초반이라서 그럭저럭 버티고 있지만 포위가 길어지면 아무리 북경성의 성벽이 높고 견고하다고 해도 결국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닥치게! 명색이 장수라는 자가 어찌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겐가?”
오삼계가 화를 냈지만 왕추용도 물러서지 않았다.
“현실을 직시하자는 겁니다, 도독.”
“어허. 이 사람이…….”
“지금 대비를 해 두지 않으면 나중에 큰 곤욕을 치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 날보고 예친왕에게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라는 건가?”
“그게 아니오라…….”
말끝을 흐리는 왕추용을 보며 오삼계는 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가 내게 보인 충성을 생각해서 이번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할 테니 앞으로는 말조심을 하게.”
“도독.”
“내 말 알아들었나!”
“…….”
오삼계가 정색을 하며 되묻자 잠시 대답이 없던 왕추용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숙였다.
“예.”
“그럼 어서 가서 성벽 보수를 감독하도록 하게.”
“네.”
군례를 취한 왕추용이 문루 계단을 내려가자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오삼계는 작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으음.”
화를 내며 이야기를 더 못 하게 했지만 사실 오삼계도 과연 기세를 올리고 있는 예친왕군을 상대로 북경을 지켜 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태후의 지시대로 북경에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보정에 머물면서 상황에 따라 유기적으로 대응을 펼치는 것이 나았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랬다면 예친왕군의 전력을 분산시킬 수 있고 아직 태후를 지지하는 지역에서 올라올 병력과 힘을 합쳐 상대를 역으로 포위하거나 뒤를 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좁은 북경 성안에 들어와 스스로 갇혀 버리면서 전부 허사가 되어 버렸다.
태후의 계속된 재촉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오삼계는 새삼 자신의 결정이 후회되고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대한 적군의 공격을 막아 내면서 황명을 받아 근황군을 모으러 간 직례 총독 왕영이 하루라도 빨리 포위를 뚫어 내길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지친 표정으로 죽은 동료의 시신을 치우고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오삼계의 얼굴에 짙은 어둠이 드리워졌다.
석달개가 급히 태후전으로 들어서니, 앉지도 못하고 초조한 표정으로 서성거리던 태후가 그를 보자마자 대뜸 물었다.
“전투는 어찌 되었나?”
초승달처럼 가느다란 호선을 그리는 짙은 눈썹을 찌푸린 태후의 미모는 이런 상황에서조차 빛을 발했다.
“성벽을 넘지 못하고 모두 물러났사옵니다.”
“그래?”
휴우, 안도의 한숨이 붉은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그러나 표정이 순간 밝아진 것도 잠시.
이내 태후는 쥐고 있던 손부채를 우그러뜨리며 분한 듯 발을 굴렀다.
“장군이란 작자들이 하나같이 다 쓸모가 없어! 역도들이 북경까지 넘볼 틈을 주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냔 말이야.”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는 태후의 반응에 석달개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정작 본인은 가장 안전한 곳에 숨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주제에, 목숨을 걸고 북경을 지키려는 장수들을 욕보이는 것은 아무리 속물인 석달개라 하더라도 순순히 동조하긴 힘들었다.
그런 심정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듯, 행여나 태후의 눈에 띌까 싶어 유령처럼 구석에 숨죽이고 있던 궁녀들조차 경멸 어린 시선을 던졌으니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지 않아도 훤히 내다보일 정도였다.
젊었을 적 온갖 계략을 써서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겨우 올라 차지한 것이 바로 태후란 자리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으로 치장하고 비단 옷을 둘러, 좋은 것만 먹고 보며 장밋빛으로 가득한 앞날만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는데, 어찌하여 또다시 이런 시련을 맞닥뜨려야 하는지 참으로 원통하기 짝이 없었다.
‘왜 나만……!’
불공평하다며 입속으로 그렇게 몇 번을 되 뇌인 태후는 문득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의 시선을 눈치라도 챈 것처럼 얇은 소맷자락을 흔들었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다 나가!”
뾰족하게 날이 선 외침에 석달개가 궁녀들을 눈짓해 데리고 방을 나갔다.
“내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무너질 순 없어!”
아예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았다면 어쩔 수 없지, 하며 포기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권력의 그 황홀할 정도로 달콤한 맛에 이미 중독되어 버린 그녀는 이미 태후가 아닌 삶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아니, 그 전에 성문이 열리고 자금성이 역도들의 발에 더럽혀진다면 사나운 예친왕이 그녀와 황제를 그냥 놔두지 않을 터였다.
절로 덜덜 떨리는 어깨를 손으로 꽉 억누르고 뭔가를 중얼거리는 태후의 주변에 서서히 어둠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밤이 되고, 다시 태양이 뜨면 또 새로운 하루가 찾아온다.
하지만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태후를 괴롭히는 기나긴 밤은 이제야말로 진짜 시작이었다.
최대한 서두르고 있지만 워낙 공성전 과정에서 무너지고 부서진 곳이 많다 보니 영원성 복구 작업은 전투가 끝난 지 한 달째가 되어 가는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었다.
공사는 포로가 된 청군 병사 삼천 명이 동원돼 삼엄한 감시 속에서 진행되었다.
촤악!
“꾸물대지 마라!”
감독관이 채찍을 휘두르며 소리를 치자 굼뜨던 포로들의 움직임이 다시 빨라졌다.
도르래를 써서 커다란 바윗돌을 반쯤 무너진 성벽에 끼워 넣고 석회로 틈을 단단히 메워 넣었다.
꾀를 부리거나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매질을 당하고 음식마저 주지 않았기에 포로들은 행여나 감독관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눈치를 보며 서둘러 작업을 했다.
포로들을 너무 무자비하게 다루는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병자호란 때 조선 땅을 침탈한 청군은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수십만이나 되는 주민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는 가축처럼 팔아먹었기에 아무도 이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작업 상황을 둘러보러 나온 남두병도 그런 포로들을 힐끔 쳐다보기만 할 뿐 딱히 감독관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완성까지 얼마나 더 걸릴 것 같나?”
뒤에 서 있던 장수가 남두병의 물음에 얼른 대답했다.
“늦어도 다음 달 말까지는 다 끝날 겁니다.”
“고생하고 있는 건 알지만 청국 상황이 심상치가 않으니 최대한 날짜를 앞당기도록 하게.”
“노력해 보겠습니다.”
“성벽 구조는 전하께서 지시하신 대로 하고 있겠지?”
“네. 심양성처럼 백오십 보마다 석재로 단단히 지붕을 씌운 포루를 만들고 있습니다.”
“포루에 화포가 몇 문이나 들어간다고 했나?”
“각 구경별로 모두 네 문이 배치되도록 설계했습니다.”
“그럼 대충 오십에서 육십 문 정도가 설치되는 거군.”
“그렇습니다.”
“그 정도 수량의 화포 여유분이 있나?”
그러자 측근 장수인 차학봉이 대신 이야기를 했다.
“우선 원정군이 보유한 화포를 배치해 두고 본국 병기창에서 생산되는 물량을 먼저 이쪽으로 돌려주기로 했습니다.”
“혹시나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자네가 챙기게.”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작업 현장을 훑어본 남두병은 수행원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해가 지고 짙은 어둠이 내리자 내관과 궁녀 들이 등불을 켜서 대궐을 환하게 밝혔다.
“흠흠.”
짧게 헛기침을 하며 총리대신 박황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업무를 보고 있던 재무대신 김육이 그를 보고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감께서 여길 어떻게?”
“지나가다가 아직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 들렀네. 이거, 내가 괜히 일을 하는 데 방해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
“아닙니다. 이리로 앉으시지요.”
“그러세.”
방 한쪽에 있는 의자로 박황을 안내한 김육은 손수 찻물을 내려 가져왔다.
“대감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잘 마시겠네.”
박황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녹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일이 많은가 보지?”
“예. 원정군에 들어간 비용을 정산하고 다음 달에 보내 줘야 되는 물자 수급 계획을 세운다고 조금 바쁩니다.”
“이번에도 꽤 많은 재정이 들어갔다고 들었네.”
그것 때문에 근심이 큰지 김육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얼추 금화 이십만 냥이 넘는 전비가 들어갔고 앞으로도 그 정도가 더 들어갈 걸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도합 사십만 냥이라…… 정말 큰돈이군.”
“그렇지요.”
“전비를 충당하는 데 어려움은 없나?”
“아직까지는 그런대로 여유가 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내심 걱정을 하던 박황은 진심으로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전쟁이 여기서 끝나지 않고 청국이 다시 요서 지역을 탈환하려 한다면 상당히 힘든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정색을 하며 김육이 하는 이야기에 박황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되지 않기를 빌어야겠지.”
“청나라 내전에 대해서 새롭게 들어온 소식은 없습니까?”
아무래도 원정을 나가 있는 도현을 대신해서 국정을 총괄하는 박황이니만큼 자신보다 중요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을 것이기에 김육이 은근히 물었다.
그러자 박황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김육을 힐끔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딱히 특별한 건 없네. 여전히 예친왕군이 북경을 포위한 채 공성전을 벌이고 있다는구먼.”
“그럼 의외로 장기전이 될 수도 있겠군요?”
“태후 쪽에 붙은 신하들이 근황군을 모으고 있다니 그럴지도 모르지.”
“더도 말고 요서 지역이 완전히 안정될 때까지만이라도 내전이 계속됐으면 원이 없겠습니다.”
김육의 푸념 섞인 말에 박황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신경이 많이 쓰이는 모양이구먼.”
“왜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나라 살림이 크게 늘어나서 아직은 여유가 있지만 뭉칫돈이 나갈 때마다 심장이 다 떨릴 지경입니다.”
“사람 하고는…… 하긴 나 같아도 그런 큰돈이 빠져나가는데 태연하지는 못할 것 같군.”
“요즘은 아주 지출 장부를 보기가 겁 날 정도입니다.”
“설사 내전이 빨리 끝나더라도 전력이 크게 상한 청나라가 당장 요서로 군대를 보내기는 어려울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말게.”
“정말 그럴까요?”
“확답은 못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클걸세.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박황은 목소리를 살짝 낮추며 이야기를 이었다.
“나도 어제서야 들은 소식인데 명나라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다더군.”
“지금 명나라라고 하셨습니까?”
“맞네.”
“강남으로 밀려나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까?”
놀란 듯 김육이 묻자 박황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북경을 빼앗기고 쪼그라들어 아무리 예전만 못하다고 해도 한때 중원을 호령했던 대국인 만큼 아직 저력이 남아 있지 않겠나. 그리고 이야기를 들으니 노쇠한 숭정제 대신 새로운 이가 떠올라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 중이라더군.”
“명나라가 싸움에 끼어든다면 상황이 좀 더 복잡해지겠군요.”
“그렇겠지.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그만큼 청국이 요서 지역에 신경 쓸 수가 없을 테니 나쁜 일은 아닐 걸세.”
박황의 의견에 동의를 하는지 김육은 머리를 끄덕였다.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는 제쳐 두고 당장 재정에 큰 부담이 되는 전쟁이 일단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을 거라는 것에 안도했다.
그 뒤로도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도현이 요서 지역을 안정화시키느라 심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 한양에서 뜻밖의 사람이 찾아왔다.
“누구를 데려왔다고?”
왕좌에 앉은 도현이 약간 놀란 얼굴로 묻자 오늘 아침 배를 타고 도착한 외무차관 이척이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화란 귀족인 도르네바르드 백작이옵니다.”
발음을 하기 어려운지 약간 더듬거리며 이척이 하는 말에 도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듣는 이름인데.”
“완도 상관을 관장하는 발데 총관의 말에 따르면 화란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는 자라고 하옵니다.”
“용건이 뭐라던가?”
“아국과 군사동맹을 체결하길 원한다고 하옵니다.”
“군사동맹이라고?”
“예.”
기껏해야 교역 물품이나 물량을 늘려 달라는 요구를 해 올 줄 알았던 도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이거 뜻밖이군.”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잠시 상대가 무슨 의도로 이러는 것인지 고심하던 도현은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지금쯤 영국 수상인 크롬웰이 항해조례를 발표하면서 네덜란드와 본격적으로 마찰을 일으키는 시기이지.”
항해조례(Navigation Act)는 당시 대외무역을 좌지우지하던 네덜란드를 견제하고 자국의 해운과 무역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실시한 일종의 무역 보호법이었다.
간단히 말해 유럽 외의 지역에서 나오는 산물을 영국이나 식민지로 가져올 때는 무조건 영국 선적의 배로 수송해야 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해상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고 있던 네덜란드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정책이었고, 때마침 영국의 활발한 대외 진출과 맞물리며 양국은 첨예한 대치를 벌이고 있었다.
얼마 뒤 영국이 네덜란드 선박에 대한 임검수사권臨檢搜査權까지 요구를 하면서 갈등이 폭발해 조만간 전쟁까지 터진다는 걸, 회귀 전 기억으로 알고 있던 도현은 갑작스러운 네덜란드의 군사동맹 제안이 이해가 됐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그가 혼자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이척이 쳐다보자 도현은 팔을 살짝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서 지금 사신은 어디에 있나?”
“임시로 관저 한쪽에 마련한 숙소에서 머물고 있사옵니다.”
“흐음.”
손가락으로 앉아 있는 왕좌 팔걸이를 두드리면서 도현은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 생각했다.
단순히 협정을 맺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칫하면 떠오르는 새로운 강자인 영국과 척질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신중해야 됐다.
“일단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이 쌓였을 테니까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만나도록 하지.”
“알겠사옵니다.”
대답과 함께 이척이 뒷걸음으로 물러나자 도현은 한쪽에 시립해 있는 칠현에게 시선을 줬다.
“상선.”
“예, 전하.”
“김 접장을 불러와.”
“네.”
그날 오후 도현은 다른 업무를 미루고 화란과 남방 지역의 동태에 대해 파악을 했다.
예전과 달리 적극적인 대외무역을 장려하면서 봉황 상단을 비롯해 여러 상단들이 대륙과 왜는 물론이고 멀리 남방 지역까지 활발히 오가며 교역을 하고 있었다.
주작단은 이런 상단들을 통해 유럽과 남방 지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어느 정도 돌아가는 정세를 알고 있었다.
김근행이 가져온 정보와 자신이 알고 있는 기억을 비교해 보며 도현은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심사숙고했다.
한편 네덜란드 정부의 전권대사 자격으로 한양을 거쳐 멀리 영원성까지 온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숙소로 배정된 방에서 동행한 발데 동인도회사 총관과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직접 대군을 이끌고 원정까지 나오다니 듣던 대로 조선 국왕은 상당히 호전적인 인물 같군.”
그러자 발데 총관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왜국 원정을 끝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또다시 전쟁을 일으킨 걸 보면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본 조선 국왕의 인상은 조금 다릅니다.”
“호오? 어떻게 말인가?”
조만간 직접 만나 협상을 해야 됐기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발데 총관의 말에 큰 관심을 보였다.
“치밀함과 뛰어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상황을 보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그리고 한번 결정을 내리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밀고 나가는 과감함도 가지고 있지요. 왕위에 등극한 지 십 년도 안 돼 변방의 소국이었던 조선을 이만큼이나 키운 걸 보면 바로 알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자네는 조선 국왕을 상당히 좋게 본 모양이군.”
“길지는 않지만 그동안 조선에 머물면서 제가 느끼고 본 것을 그대로 말씀드린 겁니다.”
애써 상대를 설득하려 들지 않고 담담히 이야기하는 발데 총관의 모습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신뢰가 갔다.
더불어 이 시대의 유럽인 특히 귀족들이 가지고 있던 편견을 수정했다.
그러고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하긴 동인도회사가 만들어진 이후로 가장 안 좋은 조건으로 교역 협정을 맺은 나라가 바로 조선이라고 했지.”
그러자 발데 총관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바로 그 협정을 체결한 당사자이기도 하지요. 체면과 겉치레만 중시하고 상업에 어두운 다른 나라들과 달리, 마치 닳고 닳은 노련한 상인처럼 실실 웃으면서도 철저하게 실리를 다 챙기는 것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조선에서 수입하는 인삼과 도자기 같은 상품들이 큰 인기를 끌어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전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발데 총관을 보며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조선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간에 체결한 협정은 한동안 유럽 각국에 큰 이슈가 될 정도였다.
그 전까지만 해도 유럽 각국들은 세계 곳곳에 진출하면서 헐값에 거의 약탈이라도 하듯이 물건을 쓸어 왔었다.
그런데 평등을 넘어 몇몇 조항은 아예 조선에 상당히 유리하게 체결된 무역 협정에 상당한 충격이었다.
이건 그 전까지 이 지역의 패자로 군림하던 명나라도 맺지 못한 것이다.
처음 협정 내용이 알려지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인도회사가 미쳤다며 비웃었지만, 얼마 안 있어서 인삼과 도자기 그리고 연필 같은 조선의 특산품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만병통치약인 인삼의 효능과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에 유럽인들은 매료됐고, 너무나도 쓰기 편한 연필의 과학적 창의성에 금방 반해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 상류층에서는 일련의 물품들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고, 조선을 동양에 있는 신비한 나라라고 부르며 환상을 가지게 됐다.
도르네바르드 백작도 본국에 있을 때 매일 아침 조선에서 만든 찻잔으로 인삼차를 마시고 펜 대신 연필로 업무를 봤을 정도니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들의 요구를 조선 국왕이 받아들일 것 같나?”
발데 총관은 도르네바르드 백작의 물음에 잠시 고민을 하더니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
“조선 입장에서는 우리와 군사동맹을 맺는 것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조선 국왕이라면 굳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은 하려고 들지 않을 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낭패한 얼굴을 했다.
“그럼 큰일이지 않나.”
사실 처음 네덜란드의 동방 진출 기지인 바타비아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조선을 신기한 물건들을 만들어 내는 나라 정도로만 인식했지, 마음속에 크게 비중을 두지 않았다.
군사동맹도 처음에는 조선이 아니라 명이나 왜국과 맺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이곳에 와서 보자 명은 청국에 밀려 자기 앞가림을 하는 것도 급급해 보였고, 왜국은 조선에 의해 아주 박살이 나 있었다.
그러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원래 계획을 변경해서 동방의 신흥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조선과 동맹을 맺기로 했다.
화란 상관이 있는 완도를 거쳐 한양에 도착한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그사이 조선이 명나라를 밀어내고 북경을 함락시킨 청국과 전쟁을 벌여 네덜란드 본국의 몇 배가 넘는 넓은 영토를 점령했다는 이야기에 또다시 깜짝 놀랐다.
하지만 진짜로 도르네바르드 백작을 충격에 빠뜨린 일은 도현을 만나기 위해 다시 한양을 떠나 영원성으로 가는 길에 벌어졌다.
조정에서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우연하게도 치우 급 전열함 두 척이 보급과 가벼운 정비를 위해 잠시 귀환했다가 다시 함대로 복귀하는 일정이 맞물려서 네덜란드 전권대사 일행의 호위 임무를 맡게 됐다.
일백 문가량의 화포를 탑재한 어마어마한 크기의 치우 급 전열함을 처음 본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그 규모와 강렬함에 충격을 받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암스테르담에서부터 타고 온 황금바다 호도 일천 톤이 넘어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선박에 들어갔지만, 치우 급 전열함 옆에 있자 너무 초라해 보였다.
특히나 항해를 하는 도중에 조선 측의 호의로 직접 치우 급 전열함에 올라 배를 둘러볼 기회를 가졌던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결코 유럽의 최신 군선에 뒤지지 않는 성능에 내심 침음성을 흘렸다.
어떤 부분에서는 오히려 더 뛰어난 것도 있었는데,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일백 문에 달하는 함포가 일제사격을 벌이는 시범을 봤을 때에는 얼굴이 창백해지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지경이었다.
하얀 물기둥을 한꺼번에 수십 개나 만들어 내는 모습에 치우 급 전열함의 공격을 받으면 유럽의 어떤 군함도 살아남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이걸로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은연중에 조선을 자신들의 아래라고 깔보던 생각을 완전히 고치게 됐다.
아울러 영국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동양에서 네덜란드가 계속 영향력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서든 군사동맹을 체결해야겠다고 내심 굳게 다짐했다.
그런데 수행원들 중에서 조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발데 총관이 군사동맹 체결이 쉽지 않을 거라고 하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심계가 깊은 조선 국왕을 설득하려면 저쪽이 솔깃할 만한 이득을 제시해야 될 겁니다.”
“그런 것이 뭐가 있겠나?”
애가 단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앞으로 바짝 당겨 앉으며 다그치듯 묻자 발데 총관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카드 중에 조선 국왕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지난번에 들으니 사탕수수와 향신료를 받고 좋아했다고 하던데 그건 어떤가?”
그러자 발데 총관은 고개를 내저었다.
“사탕수수는 조선 측이 종자를 구해 제주도라는 곳에서 재배를 하고 있고, 후추도 굳이 우리를 통하지 않아도 자체 상단들을 통해 마카오 등지에서 충분히 구매할 수 있으니 협상 카드가 안 될 겁니다.”
“이거 큰일이군.”
낭패한 기색이 역력한 도르네바르드 백작의 얼굴에 발데 총관 역시 표정을 굳히며 이야기를 했다.
“지금으로서는 일단 동맹 제의를 한 다음에 조선 측의 반응을 보고 대처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후우.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발데 총관 자네가 저쪽 인사들과 안면이 있으니 많이 도와주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일이 생각대로 안 풀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찻잔을 집어 들었다.
다음 날 오후 미리 통보를 받고 기다리고 있던 도르네바르드 백작 일행은 이척의 안내를 받아 도현이 업무를 보는 전각으로 향했다.
많이 안정됐다고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적국의 영토였던 곳이었기에 전각 주변은 완전무장을 한 근위대 병사와 위사 들이 눈을 무섭게 뜨고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무겁고 팽팽한 분위기에 이척을 따라 바닥에 놓인 박석을 밟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도르네바르드 백작 일행은 자신도 모르게 위축됐다.
문 앞에 도착하자 대기하던 내관이 큰 소리로 외쳤다.
“화란국 사신 듭시오!”
요서총병이 장수들과 회의를 하던 곳이라 상당히 넓은 실내에는 좌우로 갑옷을 갖춰 입은 장수들이 도열해 있고 맞은편 상석에 도현이 앉아 있었다.
사전에 설명을 들은 대로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조선의 예법에 맞춰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발데 총관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도현이 앉아 있는 단에서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는 네덜란드 식으로 예를 갖췄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렌지 공 전하의 칙명을 받은 도르네바르드 백작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조선국 국왕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원래대로라면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려야 했지만, 조선과 풍습이 다른 유럽에서 왔고 네덜란드 왕의 전권을 위임받은 고위 귀족이라는 점을 참작해 서양식으로 예를 갖추는 걸 허락했다.
옆에 있던 역관이 도르네바르드 백작의 말을 통역해 주자 도현은 근엄한 얼굴로 상대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소.”
“아니옵니다. 조선 측에서 편의를 많이 봐줬고 오면서 이런저런 곳들을 구경하며 견문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그랬다니 다행이오.”
“약소하지만 전하께 드릴 선물을 준비해 왔는데 보여 드려도 되겠습니까?”
“뭘 그런 걸 다…… 가져와 보시오.”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몸을 살짝 뒤로 돌리며 손짓을 하자, 함께 온 수행원들이 커다란 궤짝 두 개를 가져와 단 밑에 내려놨다.
“열어 봐라.”
“옛.”
위사들이 궤짝 뚜껑을 열자 안에 든 내용물이 눈에 들어왔다.
발데 총관의 조언을 받아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상아 한 쌍과 각종 향신료 한 상자 그리고 진주 한 주머니를 선물로 가져왔다.
“고맙게 잘 쓰겠소.”
“더 가져오지 못해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아니오.”
도현이 한쪽 손을 내젖자 위사들이 궤짝들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듣자 하니 아국에 제안할 것이 있다던데 뭔지 이야기를 해 보시오.”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살짝 고개를 들며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본국 오렌지 공께서 보내신 서찰이 있는데 그걸 먼저 봐 주셨으면 하옵니다.”
“줘 보시오.”
그러자 칠현이 얼른 발데 총관이 두 손으로 들고 있는 두루마리를 건네받아 도현에게 갖다 줬다.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치자 네덜란드어로 뭐라고 적혀 있고 마지막에 오렌지 공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옆에 시립해 있던 역관이 눈으로 글을 읽고는 귓속말로 내용을 알려 줬다.
두루마리는 일종의 신임장이었는데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네덜란드의 군주인 오렌지 공을 대신해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경이 전권대사라고 하는데, 맞소?”
“그렇습니다. 영광스럽게도 오렌지 공의 권한을 대행할 수 있는 임무를 부여받았사옵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도현은 신임장을 내려놨다.
“그래서 제안하려는 것이 무엇이오?”
“양국의 우호 관계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군사동맹을 맺었으면 합니다.”
“흐음…….”
예상대로 상대가 군사동맹을 제의하자 도현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몸을 등받이에 기댔다.
“군사동맹을 맺고 해적이나 기타 적대적인 세력에 공동 대응을 한다면 양쪽에 다 이익이 될 것이옵니다.”
영국을 견제하려는 진짜 목적을 숨기고 괜히 해적을 부각시키며 은근슬쩍 넘어가는 도르네바르드 백작의 꼼수에 도현은 내심 콧방귀를 꼈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을 하지 않고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거라면 아국 수군이 수시로 주변 해역을 순찰하고 교역선의 호위를 해 주니 굳이 군사동맹을 맺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도현이 별로 내켜 하지 않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도 협약을 맺고 서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더 낫지 않겠사옵니까?”
“일리가 있긴 하지만 각자의 영역이 있어 아국 수군이 남방까지 내려갈 일이 거의 없는데, 별로 필요하지 않을 것 같구먼.”
“전하, 그러지 마시고 한 번만 더 생각을 해 주십시오. 한 해에 해적들로 인해 나포되거나 침몰하는 배가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이 때문에 발생하는 인적 물적 피해를 줄이지 못한다면 앞으로 양국 사이의 교역을 더 크게 늘리기는 어려울 겁니다.”
도르네바르드 백작의 말이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조선이 유럽과 대외 교역을 활발히 하자 파리가 꼬이듯 동중국해 일원에 많은 해적들이 모여들었다.
멀리 교역을 나갈 때는 항상 열 척 이상 선단을 꾸리고 중무장한 신형 판옥선 서너 척이 붙어 호위를 해 주는 조선 측은 해적들이 쉽게 건드리지 못했지만, 다른 나라 선박들은 그렇지가 못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만 해도 거의 한 달에 거의 한 척 꼴로 해적에게 당해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것 때문에 도현이 직접 수군에 지시를 내려 해역 순찰을 강화하고 해적 토벌도 빈번하게 실시하고 있었지만, 그때만 반짝할 뿐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다.
“하긴 해적들이 너무 설치고 있기는 하지.”
도현이 이쪽의 제안에 수긍하는 듯한 이야기를 하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반색을 했다.
“더 심각해지기 전에 양국이 서로 협력해 뿌리를 뽑는다면 지금보다 교역이 더욱 활발해질 것이옵니다.”
다른 동양의 군주들과 달리 도현이 상업에 관심이 많다는 걸 들은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일부러 그 부분을 강조하며 관심을 이끌어 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도르네바르드 백작의 속셈을 이미 다 파악하고 있는 도현은 내심 가소로운 표정을 지으며 상대를 쳐다봤다.
“그러면 해적에 한해서만 서로 협력을 하면 되겠구먼.”
“……예?”
뜻밖의 이야기에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자 도현은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해적 퇴치와 교역로 보호가 목적이니 그렇게 해도 상관이 없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괜히 협정에 너무 포괄적인 내용을 담으면 나중에라도 문제가 될 수 있으니 그게 좋겠소.”
그러자 도르네바르드 백작의 눈에 낭패감이 어렸다.
해적 문제도 심각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최근 해상 교역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네덜란드와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영국을 견제하는 것이다.
포괄적인 개념의 군사협정을 맺어 두면 조만간 전쟁이 터졌을 때 적국인 영국의 상선이 조선에서 관장하는 해역에 들어올 수 없게 되는 걸 노렸다.
왜국을 정벌한 조선은 황해를 넘어 제주도 이남과 동중국해 전부를 영향력 아래 두고 있었기에, 네덜란드의 계책대로 된다면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교역로가 완전히 막히게 되는 것이다.
여기다가 바타비아를 중심으로 동남아시아 지역을 장악한 네덜란드가 해로를 꽉 틀어막는다면 영국은 동양으로 진출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을 빼자고 하니 도르네바르드 백작으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내 노련한 정치가답게 애써 태연한 척하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양국의 공동 이익을 지키기 위해 협력해야 될 일들이 많을 텐데 그때마다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건 번거로우니 그냥 이번 한번으로 끝내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사건마다 처한 상황과 입장이 다를 텐데 그걸 어찌 일률적인 잣대로 처리할 수가 있겠소.”
“하지만 양국의 거리가 멀어서 일이 벌어질 때마다 협상을 하기가 어렵지 않사옵니까.”
어떻게든 상대의 동의를 얻어 내려고 애를 썼지만 도현은 거기에 넘어가지 않았다.
“화란 본국과는 바닷길로 몇 달을 가야 해도 그쪽 총독부가 위치한 바타비아는 가까우니 그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오.”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살짝 눈가를 찡그리자 도현은 그런 상대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자꾸 그리 중요하지 않는 것에 집착을 하는 걸 보니,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 게 아니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하자 도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더욱 의심에 찬 얼굴을 했다.
“최근에 항해조례 발표로 영국과 불편한 관계에 있다고 하던데 혹여 그것 때문에 군사동맹을 맺으려는 것이오?”
“……!”
순간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헛바람을 삼켰다.
동양에서도 제일 구석에 있는 조선이 멀리 떨어진 유럽의 일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다 알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가 당황해하는 모습을 내심 즐기면서 도현은 정색을 한 채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만약 내 짐작이 맞다면 정말 실망이오. 그래도 완도에 상관도 열게 허락하고 지금껏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거짓으로 짐을 속이려고 했다니 이래서야 어찌 그대들을 믿을 수 있겠소!”
“오, 오해시옵니다.”
“오해라…… 그러면 우릴 내세워 영국을 견제하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고 경이 믿는 신께 맹세할 수 있겠소?”
“그건…….”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머뭇거리며 바로 답을 못 하자 도현은 손바닥으로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며 화를 냈다.
탕!
“계속 짐을 우롱하겠다는 건가!”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지면서 양옆에 도열해 있던 조선군 장수와 신하 들이 전권대사 일행을 무섭게 노려봤다.
“멀리 떨어진 유럽의 일이라고 짐이 아무것도 모를 거라 생각했는가!”
어느새 말투까지 달라진 도현은 정신을 차릴 틈을 주지 않고 상대를 몰아붙였다.
그러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물론이고 함께 있던 발데 총관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조선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기는 고사하고 자칫 불편한 관계가 될 상황이었다.
다급해진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체면도 잊고 황급히 머리를 숙이며 용서를 빌었다.
“제 실수입니다. 그저 원만하게 일을 처리해 보려는 욕심에 무리수를 뒀습니다. 하지만 절대 국왕 전하를 능멸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으니 제발 노여움을 거둬 주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
네덜란드 군주의 측근이자 고위 작위를 가진 귀족으로서 이 정도면 상당한 굴욕이었지만,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에 그런 걸 따지지 않았다.
하지만 도현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
“오늘은 더 이상 이야기를 하기 싫으니 물러들 가시오.”
“전하!”
“어허! 짐의 말을 못 들었소.”
눈을 치켜뜨며 도현이 버럭 짜증을 내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어쩔 수 없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집무실로 돌아와 의자에 앉자 눈치 빠른 칠현이 시원한 수정과를 갖다 주며 입을 열었다.
“잘하셨습니다. 감히 전하를 속이려고 들다니, 정말 상종 못 할 자들입니다.”
“화란 사신들이 크게 당황한 것 같았지.”
수정과를 한 모금 마시며 그가 묻자 칠현이 얼른 대답했다.
“예. 가뜩이나 귀신처럼 허연 얼굴이 아주 핏기가 싹 가신 것 같은 표정이었습니다. 전하께서 호통을 칠 때마다 찔끔하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얼마나 우습고 통쾌한지 몰랐습니다.”
“상선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니, 기선은 제대로 잡은 것 같군.”
“그런데 저쪽이 그런 꿍꿍이가 있다는 걸 어찌 아셨사옵니까?”
진심으로 궁금한 듯 칠현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묻자 도현은 작게 헛기침을 했다.
“흠. 크고 작은 정보를 모두 모아 살펴보면 뒤에 가려진 것이 보이기 마련이야.”
회귀하기 전에 알고 있던 역사적 사실이라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대충 그럴듯해 보이는 말로 포장해 둘러대니 칠현이 감탄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하하. 내가 좀 그래.”
칭찬이라면 절대 사양하는 법 없는 도현이 크게 웃어 젖혔다.
“…….”
가끔은 겸양의 미덕이란 것도 좀 갖췄으면 좋으련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칠현이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런데 이대로 저쪽에서 제안한 군사동맹은 거절하실 생각이시옵니까?”
조심스레 묻는 말에 도현이 웃던 것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답했다.
“두 나라 간의 싸움에서 아예 발을 뺄 수 있다면 그게 최고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영국보다는 어느 정도 서로를 알고 있고 신뢰도 쌓인 화란과 손을 잡는 것이 낫지 않겠어.”
둘 다 똑같이 식민지 경영을 해서 원주민의 고혈을 쥐어짜는 나라이기는 해도 영토에 상당한 집착을 보이는 영국과 달리 네덜란드는 해상 교역에만 관심이 있을 뿐 땅과 해당 지역을 지배하는 건 크게 상관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래를 생각하면 영국보다는 네덜란드가 계속 해상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 조선에 이득이었다.
“그런 생각이시라면 어째서 아까 화란 사신들을 모질게 대하셨습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칠현이 반문했다.
“감히 날 속이고 은근슬쩍 협정을 맺으려고 한 게 괘씸하잖아.”
놀부처럼 심술궂은 표정으로 답하는 말에 칠현이 에엑, 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진짜 그 이유 하나뿐이신 건 아니시겠지요?”
설마 그 정도로 단순하진 않을 거라고 믿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도현이라면 얼마든지 기상천외한 일을 저지르고도 남을 인간이란 불신감이 뿌리 깊었기에 긴가민가하는 심정이었다.
“너 진짜 날 못 믿는구나?”
“믿으니까 하는 소립니다.”
단지 그 믿음의 방향이 조금 어긋났을 뿐이다.
상처받았다며 혼자 꿍얼거리던 도현은 뚱한 얼굴로 이어 말했다.
“일단 한번 세게 기를 꺾어 놔야 차후 협상을 할 때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지. 외교란 건 남녀 간의 기 싸움과도 같다는 말 몰라? 먼저 상대방을 안달 나게 해야 꽃이든 돈이든 뭘 받아먹을 수 있는 법이거늘.”
손에 부채라도 들었다면 탁 소리 나게 접으면서 한바탕 약을 팔 기세였다.
어디 소설책에라도 나올 악당 두목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는 도현을 보면서 칠현은 감탄인지 한탄인지 모를 한숨을 내뱉었다.
“전하, 왠지 모르게 점점 사악해지시는데요.”
“뭔 소리야?”
“지금부터라도 중전 마마처럼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는 게 어떻습니까? 생전에 덕을 쌓아야 내세가 편하다고 합니다.”
“너 어디 아프지? 어의라도 불러 주랴?”
애가 갑자기 뜬구름 잡는 소릴 한다면서 드물게 당황하는 사이, 칠현은 계속 도현을 붙잡고 하다못해 시주라도 하라며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그렇게 두 군신(?)이 서로 투덕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관저 한쪽에 위치한 화란 사신들의 숙소는 무거운 침묵에 빠져 있었다.
“후우. 일이 이렇게 꼬이다니.”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한 일이 제대로 말도 못 꺼내 보고 난관에 부딪쳤으니 이만저만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발데 총관도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선이 유럽 상황을 그렇게 상세히 파악하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게 말일세. 차라리 솔직하게 사정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 더 나을 뻔했어.”
후회를 했지만 돌이키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이대로 양국 관계가 틀어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이번 일로 도르네바르드 백작을 수행한 발테 총관마저 같이 거짓으로 조선 국왕을 속이려고 한 것이 되었으니, 동인도회사에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면 최대한 빨리 이걸 무마시켜야 됐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나?”
“글쎄요…….”
급한 마음과는 달리 딱히 떠오르는 해결책이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똑똑.
“누구야!”
불편한 심기를 반영하듯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약간 짜증스러운 어투로 말을 하자 수행원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와 꾸벅 허리를 숙였다.
“백작님, 손님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이라니? 누가 왔단 말이냐?”
“한양에서부터 동행을 하셨던 조선국 외무 차관님이십니다.”
조선 관리 중 그나마 친분이 있는 이척이 왔다는 말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벌떡 일어나 다급히 말했다.
“어서 안으로 모셔라!”
“옛.”
수행원이 다시 밖으로 나가자 발데 총관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봤다.
“이척 공이 무슨 일일까요?”
“나도 모르지. 하지만 어떻게든 다시 조선 측과 협상을 벌여야 되는 우리 입장에서는 만나서 나쁠 건 없지 않겠나?”
“맞는 말씀입니다.”
잠시 뒤 아까 왔었던 수행원이 이척을 안내해 왔다.
그러자 두 사람은 반색을 하며 그를 맞이했다.
“이 공, 어서 오시오.”
완도 화란 상관 개설 업무를 맡아서 처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네덜란드어를 익히게 돼 이제 의사소통을 하는 데 지장이 없는 정도의 실력이 된 이척은 서양식대로 가볍게 악수를 나누며 입을 열었다.
“쉬고 계신데 방해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아니오. 낮에 알현을 하며 그 난리를 쳤는데 어떻게 발을 뻗고 편히 쉴 수가 있겠소이까.”
“흐음.”
도르네바르드 백작의 말에 순간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발데 총관이 눈치 빠르게 끼어들었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지요.”
“그럽시다.”
탁자를 가운데 두고 세 사람이 둘러앉자 아까 안내를 한 수행원이 차를 가져와 내려놨다.
탁.
문이 닫히고 방안에 세 사람만 남자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맞은편에 있는 이척을 보며 먼저 이야기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보내 만나자고 청할 생각이었는데, 잘 오셨소이다.”
그러자 이척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군사동맹 때문에 그러시는 모양이군요.”
“맞소이다. 잘해 보려는 욕심에 실수를 하기는 했지만 조선에도 득이 되는 것이니, 다시 전하를 알현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주선을 좀 해 주면 안 되겠소?”
도르네바르드 백작의 이야기에 이척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게 왜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셨습니까.”
“으음. 안 그래도 후회하고 있소이다.”
약간(?)의 잘못이 있었다고 해도 유럽의 강국인 네덜란드의 유력한 고위 귀족이자 전권대사인 자신이 질책 어린 이야기를 들어야 되는 것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지금 아쉬운 건 자신이었기에 참고 넘겼다.
그런 상대편의 얼굴을 힐끔 쳐다본 이척은 혀를 차면서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을 하면 뭘합니까. 전하의 진노도 크지만, 신료들이 아국을 우습게 본 거라며 이번 일에 크게 분노하면서 화란과 맺은 통상협정을 파기하고 영국과 손을 잡자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헉!”
충격적인 이야기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헛바람을 삼켰고 발데 총관은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러자 이척은 굳은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만큼 이번 일에 대한 반감이 크다는 뜻입니다.”
“이런…….”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탄식을 내뱉는 가운데 졸지에 항신료 무역과 함께 동인도회사의 가장 큰 수익원으로 떠오른 조선과 교역이 막히게 된 발데 총관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이거야말로 혹을 떼려다가 더 큰 혹을 붙인 격이었다.
동아시아의 새로운 맹주인 조선과 관계가 틀어지는 것도 문제였지만 적대국인 영국하고 가까워진다면 네덜란드로서는 엄청난 타격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아시아에 영국이 발도 붙이지 못하게 막는 건 고사하고, 오히려 네덜란드가 두 나라의 협공에 곤란을 겪게 될 수도 있었다.
다급해진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바싹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이척에게 매달렸다.
“그동안 두 나라가 쌓아 온 신뢰가 얼만데 어찌 이렇게 단칼에 끊어 버릴 수가 있소이까.”
“먼저 잘못을 한 건 그쪽이지 않습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다시 조선 국왕께 사죄를 드리겠소이다.”
“워낙 진노가 크셔서…….”
이척이 곤란하다는 모습을 보이자 옆에 있던 발데 총관도 부탁을 했다.
“그러지 마시고 이번 한 번만 좀 도와주십시오.”
“부탁하오이다.”
두 사람이 간절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자 이척은 못 이기는 척 입을 열었다.
“후우. 좋습니다. 화란과는 지금까지 이어 온 인연이 있으니 제가 전하를 한번 설득해 보도록 하지요.”
“정말 고맙소.”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도와준다는 말에 반색을 한 두 사람이 연신 고마움을 표시하자 이척은 살짝 한쪽 팔을 내저었다.
“제가 나선다고 해서 전화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니니 벌써부터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찌해야 될지 암담했었는데 이척 공이 도와준다니 희망이 생긴 것 같소이다.”
“이것 참, 부담스럽군요.”
어깨를 으쓱한 이척은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와 말했다.
“일단 화란에 대해 화가 나 있는 걸 누그러뜨리고 협상 자리를 다시 만들려면 그쪽에서 어느 정도 성의를 보이셔야 될 겁니다.”
이척의 말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한데 어떻게 해야 국왕 전하의 노기가 풀리겠소?”
“글쎄올시다.”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이척은 이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전하께서 마닐라 삼과 향신료 수입을 늘리라는 말씀이 있으셨는데, 그걸 선물로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정말 그거면 되겠소이까?”
“금은보화도 좋겠지만 딱 필요로 하던 걸 가져오면 더욱 흡족해하시지 않겠습니까.”
“흐음.”
고개를 끄덕인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시선을 돌려 발데 총관을 봤다.
그러자 재빠르게 머릿속으로 주판을 튕긴 발데 총관은 입을 열었다.
“배 두 척 분량은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팔짱을 낀 채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몸을 슬쩍 앞으로 기울였다.
“바타비아 총독에게 내가 서신을 써 줄 테니 거기에서 배 한 척을 더 추가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발데 총관의 대답을 들으며 다시 시선을 이척에게 돌린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사뭇 진지한 어조로 이야기를 했다.
“이 정도면 국왕 전하의 마음에 들겠소?”
“말씀을 드려 봐야 되겠지만 조금은 노기를 풀어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잘 좀 부탁하겠소. 이번 일이 잘되면 공한테는 따로 사례를 하겠소이다.”
“뭘 그런 걸 다…….”
도르네바르드 백작의 말에 이척은 점잖을 떨면서도 사양하지는 않았다.
“오늘 바로 완도로 배를 띄우면 늦어도 한 달 안에 물건을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마닐라 삼과 향신료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 거래 품목으로 항상 바타비아 창고에 여유분을 쌓아 두기 때문에 빠르게 가져올 수 있었다.
발데 총관의 이야기에 이척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전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척 공만 믿겠소이다.”
따라 일어선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거듭 부탁을 했다.
“그럼…….”
인사를 나눈 이척이 방을 나가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후우.”
그러자 발데 총관이 살짝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걸로 조선 국왕의 마음을 풀 수 있을까요?”
“제발 그리되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자네는 아까 말한 물건들을 차질 없이 가져올 수 있도록 신경을 써 주게.”
“염려 마십시오.”
두 사람은 행여나 도현이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찌해야 될지 밤새 전전긍긍했다.
한편 화란 사신이 머물고 있는 전각을 나온 이척은 그길로 도현을 찾아가 방금 전까지 나눈 이야기를 전부 다 소상히 보고했다.
“배 세 척 분량의 마닐라 삼과 향신료를 가져오기로 했다고?”
“그렇사옵니다, 전하.”
앞에 엎드린 이척의 대답에 도현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흐음. 뭐 나쁘지는 않군.”
“좀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할까요?”
잠시 생각을 해 본 도현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이제 시작인데 너무 몰아붙일 필요는 없지. 쥐도 도망갈 구멍을 놔두고 쫓으라고 했잖아.”
“예.”
“그래도 달랑 그것만 받고 화를 풀면 너무 가벼워 보일 수도 있으니까 적당한 조건을 하나 더 내걸도록 해.”
“어떤 걸 말씀이시옵니까?”
“뭐가 좋을까…….”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던 도현은 적다한 것이 생각났는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일 년간 바타비아에서 아국 상단이 거래할 때 내는 관세를 면제해 달라는 건 어때?”
“그거 괜찮은 생각이시옵니다.”
바타비아는 동남아시아 지역을 관장하는 네덜란드 총독부와 함께 동인도회사 지사가 위치한 곳이었기에 상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봉황상단을 비롯한 조선 상단들도 완도 화란상관에서 거래를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끔씩 직접 배를 띄워 바타비아까지 내려가 상품을 팔거나 구입해 오곤 했다.
보통 물건 값에서 일 할을 관세로 매겼는데 워낙 한 번에 거래되는 규모가 크다 보니 적지 않은 비용이 지출됐다.
그걸 한시적이지만 한 푼도 안 내도 된다면 상단 입장에서는 상당한 이득이었다.
“어차피 애가 단 건 우리가 아니라 저쪽이니까 너무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적당히 조율을 하도록 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전하.”
“그럼 그 문제는 경이 알아서 처리하고. 김 접장.”
“네.”
“알아보라고 한 건 어찌 됐나?”
도현의 시선을 받은 김근행은 살짝 머리를 숙이면서 입을 열었다.
“화란 사신과 함께 온 수행원들에게 알아본 결과 상황이 우리 예상보다 더 심각한 것 같았사옵니다.”
“자세히 말해 봐.”
도현뿐만 아니라 한쪽에 있던 이척도 귀를 쫑긋 세우며 관심을 보였다.
“항해조례라는 걸 만들어 영국이 본토와 식민지 항구에 네덜란드 선박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면서 양국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하옵니다. 가뜩이나 남방 향신료 무역을 두고 경쟁을 해 오던 참인데, 불에다가 기름을 가져다 붓는 격이 된 것이지요. 수행원들의 말을 들으면 당장 전쟁이 터져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남방 지역에서는 양국의 선박들이 서로 만나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지경이라고 합니다.”
“그렇군.”
대충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고 있는 도현과 달리 이척은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아니, 군함도 아니고 상선들이 싸움을 한다는 게요?”
“예. 서양의 상선을 아국 배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도 자위 수단으로 약간의 총기와 화포를 탑재하지만, 저들은 그런 수준을 뛰어넘어서 막말로 바다를 항해하다가 깃발만 바꿔 달면 언제든지 해적으로 돌변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김근행의 이야기는 사실이었는데 서양 국가들이 배를 타고 사방으로 뻗어 나가던 대항해시대에는 상선과 군함의 경계가 애매모호했다.
그래서 바다 위에서 다른 배를 만날 때는 항상 경계를 했는데 상대가 적대국의 선박일 경우에는 바로 싸움을 벌여 약탈하거나 심할 경우 배를 나포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허어.”
하지만 이런 걸 모르는 이척은 눈가를 찡그리며 헛바람을 내뱉었다.
비록 도현의 영향을 받아 사고방식이 많이 열려 있다고 해도 도의를 중시하는 성리학을 배운 유생으로서 무법천지와도 같은 해상 상황과 유럽인들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마뜩하지 않았다.
그런 이척을 놔두고 도현은 약간 굳은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서양인들이야 예전부터 그래 왔으니 별로 특별할 건 없고. 먼 남방까지 영국이 군대를 파견하게는 어려울 테니 전쟁이 벌어진다고 해도 유럽에 국한되겠군.”
실제 역사에서도 이 시절의 영국은 아직 그저 그런 유럽의 이류 국가였기에, 주로 양국 사이에 위치한 북해가 주요 전장이 됐다.
물론 이것도 1차 영란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며 세력을 외부로 뻗쳐 나가자 세계 각지의 식민지로 싸움이 번져 갔다.
도현의 예상은 이어진 김근행의 대답에 여지없이 깨졌다.
“그게 수행원들한테 들은 이야기로는 영국이 함대를 보내 남방에 위치한 빈탄Bintan이라는 섬을 점령했다고 하옵니다.”
“뭐? 그게 사실이야?”
“예.”
자신의 기억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에 도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바타비아와 가까운 데다 유럽으로 가는 항로 한가운데 위치해 있어 화란이 영국의 행동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합니다.”
머릿속으로 빈탄 섬의 위치를 떠올린 도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절묘한 곳에 자리를 잡았군.”
“화란이 다급하게 군사동맹을 맺으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사옵니다.”
김근행의 말에 도현은 동의하는 얼굴로 했다.
“영국이 더 이상 영역을 확대하지 못하도록 미리 막아 버리겠다 이거겠지.”
“바로 보셨사옵니다.”
몸을 뒤로 기댄 도현은 손가락 끝으로 보료 팔걸이를 두드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거 일이 아주 재미있어지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