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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진출 (88/104)

대만 진출 

사흘 동안 도현이 아무런 대답을 해 주지 않자 도르네바르드 백작 일행은 애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초조한 마음에 하루가 멀다 하고 이척을 찾아가 어찌 되고 있는지 물었지만 그저 기다리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빨리 좀 도현을 설득해 달라고 다그치고 싶어도 부탁을 하는 입장이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저 벙어리 냉가슴만 앓으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때 드디어 나흘째 되는 날 이척이 도현의 대답을 가지고 왔다.

덜컹.

문이 열리는 순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방 안을 서성이던 도르네바르드 백작과 발데 총관의 시선이 한 군데로 쏠렸다.

“어서 오시오, 이척 공!”

금방이라도 달려가 얼싸안을 기세로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반가운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니오. 하하. 일단 이리로 와 앉으십시다.”

그러자 발데 총관이 얼른 의자를 빼서 이척이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전각에 딸린 시녀가 차를 갖다 놓고 나가자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그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됐소이까?”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두 사람을 힐끗 본 이척은 약간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절대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백작님의 정성에 주상 전하께서 이번 한 번에 한해 용서를 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오오. 정말 고맙소이다. 다 이척 공 덕분이오.”

이야기를 듣자마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굳어 있던 표정을 활짝 폈다.

옆에 있던 발데 총관도 최악의 상황을 모면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아직 할 말이 더 남았습니다.”

“……?”

두 사람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이척은 살짝 정색을 하며 이야기를 했다.

“거짓으로 아국을 속이려고 한 것을 넘어가 주는 대신 바타비아에 기항하는 아국 상단의 관세를 일 년 동안 면제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예상치 못한 조건에 두 사람은 눈을 크게 떴다.

“관세를 완전히 없애 달라고 하셨소?”

“일 년만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조선과의 교역이 늘어나면서 관세 수입 또한 무시하기 어려운 금액이었기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선뜻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렸다.

이에 이척은 더 이상 협상의 여지는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방금 말한 조건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모두 다 없던 일로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으음.”

작게 침음성을 흘린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발데 총관과 시선을 교환했다.

눈으로 많은 대화가 오갔음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상당히 손해가 나는 일이었지만 군사동맹을 맺는 데 실패해 영국이 파고들 틈을 만들어 주는 것보다 나았기 때문이었다.

결정을 내린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바로 바타비아 총독에게 서신을 보내도록 하겠소.”

그러자 이척은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전하께 아뢰도록 하지요.”

“협상은 언제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것이오?”

한시가 급한 도르네바르드 백작과 달리 이척은 느긋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제 매듭을 하나 풀었는데 자칫 일을 망칠 수도 있으니 너무 서두르지 마시고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오.”

이척의 말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살짝 인상을 썼다.

하지만 지금 조선 조정에서 유일하게 그의 의견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이척뿐이었기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화를 애써 삼켜야 했다.

“공이 노력을 해 주는 건 충분히 알고 있기는 해도 마냥 이렇게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가능한 한 서둘러 줬으면 좋겠소이다.”

“그러지요.”

짧게 대답한 이척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두 사람만 남자 발데 총관은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도르네바르드 백작을 봤다.

“관세는 바타비야 총독의 권한인데 이렇게 마음대로 결정을 해도 되겠습니까?”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피곤한 듯 한쪽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총독이 불평을 하겠지만 나중에 사정을 설명하면 이해해 줄 걸세. 그리고 오렌지 공께 이번 일에 대한 전권을 부여받은 만큼 그만한 권한은 있으니 염려하지 말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그것보다 이렇게까지 해 놓고 정작 가장 중요한 군사동맹을 맺지 못할까 걱정이군.”

“일단 협상을 시작할 수 있게 됐으니 천천히 상대를 설득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긍정적인 발데 총관의 말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랬으면 정말 소원이 없겠군. 그나저나 첫 알현 이후로 계속 조선 쪽에 끌려가는 것 같아 못내 찝찝하군.”

그렇게 왜 쓸데없이 책잡힐 일을 했냐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괜히 이야기를 꺼내 봤자 득 될 게 없었기에 발데 총관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다음 날 바타비야에서 조선 상단의 관세를 일 년간 면제해 준다는 내용의 확인서가 도르네바르드 백작의 직인이 찍힌 채 조선 조정에 전달되고 하루가 더 지나서야 도현은 알현을 허락했다.

이번에는 전과 달리 장수와 신하 들이 좌우에 도열해 있지 않고 이척을 비롯한 외교부 관리 세 명과 역관만 배석했다.

장소도 대회의실이 아니라 그것보다 작은 도현의 집무실이었다.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예를 갖추며 인사를 하자 도현은 퉁명스러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쪽에 앉으시오.”

“감사하옵니다.”

비워 놓은 왼쪽 자리에 도르네바르드 백작과 발데 총관이 앉자 도현이 두 사람을 쓰윽 쓸어 보고는 이야기를 했다.

“크게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려는 정성을 보여서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만, 또다시 이런 일이 있을 시에는 죄를 분명히 물을 것이오.”

“명심하겠습니다.”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머리를 숙이며 대답하자 도현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등받이에 몸을 살짝 기대며 이야기를 했다.

“외무차관에게 들으니 군사동맹을 맺길 원한다고 하던데 맞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사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양국의 우호 증진과 이 지역의 안정을 위해 탄탄한 동맹을 맺어 함께 미래를 열어 갔으면 합니다.”

온갖 미사여구를 써서 준비한 이야기를 했지만 도현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결국 두 나라의 싸움에 우릴 끌고 들어가겠다는 것 아닌가.”

시작부터 도현이 날카로운 지적을 하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내심 찔끔하면서도 애써 태연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오해시옵니다.”

“오해라……?”

“예. 분명 이번 군사동맹으로 저희가 영국과의 싸움에서 앞서 나갈 수 있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고 조선에도 득이 될 것입니다.”

“흐음. 어떤 득이 있는지 짐을 이해시켜 보시오.”

마치 마음속을 꿰뚫어 보듯 도현이 지그시 쳐다보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지금이 동맹을 맺느냐 맺지 못하느냐가 결정되는 중요한 순간이라는 생각에 바짝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선 동맹을 맺게 되면 양국의 관계가 더욱 공고해지면서 지역의 안정이 유지돼 지금보다 교역이 크게 늘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와 달리 상대를 존중할 줄 모르고 탐욕스러운 다른 유럽 나라들이 무분별하게 밀려 들어와 혼란에 빠지는 걸 막으며 위협에 공동 대처할 수 있으니, 서로에게 이익일 겁니다. 제가 들으니 조선 속담에 백지장도 둘이 들면 낫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처음에 오자마자 도현이 선수를 치는 것에 정신없이 당해 약간 모자란(?) 모습을 보였지만, 역시 네덜란드 궁정에서 닳고 닳은 귀족답게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조선 속담까지 들먹여 가며 그를 설득하는 유능함을 보였다.

그러자 도현은 내심 이것 봐라 하는 시선으로 상대를 슬쩍 보고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이야기를 했다.

“말은 그럴듯해도 그것만 가지고 자칫 아국이 전쟁에 휘말릴 수도 있는 협정을 맺기에는 뭔가 부족하군.”

잠시 말을 끓은 도현은 정색을 한 채 자세를 바로 했다.

“분명 화란과 먼저 교역을 시작했고 지금 상태에 그런대로 만족하고 있지만, 어차피 영국이나 그쪽이나 우리 입장에서는 다 똑같은 서양 국가일 뿐이네.”

“하지만…….”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뭐라고 반박을 하려 했지만 도현은 무시한 채 계속 자신의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아까부터 자꾸 영국이 진출하면 마치 아국이 큰 위험에 빠질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데 고작 해 봤자 배 몇 척에 군사 수천을 데려올 뿐인 상대에게 흔들릴 정도로 우리가 우습게 보이는 건가!”

마지막 말을 하며 도현은 노한 듯 언성을 약간 높였다.

그러자 당황한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건 절대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영국이 아니라 그 어떤 유럽 국가가 함대를 이끌고 온다 해도 전부 다 상대해 줄 자신이 있으니 우릴 생각해 주는 듯한 말은 하지 마시오.”

“……예.”

상당히 광오한 말이었지만 이미 영원성으로 오면서 치우 급 전열함의 어마어마한 위용과 승천하는 기세로 뻗어 가는 조선의 힘을 직접 모두 목격한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아무런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바타비야에 있는 자국 함대를 모조리 다 끌고 온다고 해도 괴물에 가까운 치우 급 전열함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더욱 조선과의 군사동맹이 절실해졌다.

이대로 맥없이 물러날 수 없었던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그를 봤다.

“조선국의 저력이 강하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 독불장군처럼 혼자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교역을 위해 한 나라와 손을 잡아야 된다면 저희가 그 상대이길 바랍니다.”

도현을 상대로 이런저런 꼼수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아예 모든 걸 툭 털어놓는 정공법으로 나갔다.

그런 도르네바르드 백작의 행동에 도현은 눈에 이채를 띄었다.

“그거 흥미로운 이야기군.”

“전하께서도 저희와의 관계에 만족하고 계신다 하셨지 않습니까. 최소한 영국보다는 저희 네덜란드가 낫다고 장담할 수 있사옵니다.”

“흐음.”

섬나라의 특성인지 이웃한 왜국처럼 남의 땅에 욕심이 많은 영국보다 상업에 더 치중하는 네덜란드와 손을 잡기로 이미 결정을 내렸지만, 도현은 바로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고 턱을 쓰다듬으면서 고심하는 모습을 보여 상대를 애태웠다.

그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도현의 한마디에 남방 지역의 패권이 결정될 수도 있었기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함께 앉아 있는 발데 총관도 초조한 얼굴로 도현을 쳐다봤는데, 만약 동맹이 좌절되고 영국 동인도회사가 본격적으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하면 가장 타격을 받는 곳이 교역을 책임진 자신들이었기에 긴장감은 도르네바르드 백작보다 더 했다.

실제로 이미 남방 지역에서 나는 향신료 교역을 두고 영국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집중된 가운데 장고를 거듭하던 도현은 이내 결정을 내렸는지 고개를 들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야. 하지만…….”

“…….”

“여전히 전쟁을 감수하기에는 뭔가 부족해.”

그러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도현이 원하는 것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원하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도르네바르드 백작의 물음에 도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위험을 감수하는 만큼 어느 정도 이득이 있어야 공평한 거래가 아니겠소.”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바짝 긴장하는 도르네바르드 백작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도현은 생각하고 있던 걸 꺼냈다.

“남방에 위치한 칼리만탄 섬(보르네오 섬) 북부를 아국에 양도해 주시오.”

전혀 예상치 못한 요구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순다열도와 필리핀 사이에 위치한 칼리만탐 섬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로 예전부터 교통의 요지였던 만큼 다양한 인종이 자리 잡고 있으며 네덜란드가 남방에 만든 중요 거점 중 하나였다.

도르네바르드 백작도 조선으로 오기 위해서 바타비야를 출발해 칼리만탄 섬에 있는 네덜란드 요새를 거쳐 항해를 했다.

동북아시아로 가기 위해서는 꼭 통과해야 되는 길목에 있어 네덜란드로서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이었다.

그런 섬을 달라니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애써 놀란 마음을 가라앉힌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그곳은 아국에게 아주 중요한 거점인 데다 식민지가 아니라 독립된 왕국이라 저희가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도현이 기분 나쁘지 않도록 돌려 이야기했지만 결국 들어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칼리만탄 섬이 여러 이슬람 왕국의 지배하에 있는 건 맞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이어 네덜란드가 해상 교역을 장악하며 내정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어서 반식민지 상태나 마찬가지였기에, 도르네바르드 백작의 말은 변명에 불과했다.

이런 속사정을 모두 알고 있는 도현은 내심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고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럼 더 잘됐군.”

“예?”

“귀국의 땅이 아니라면 더욱 부담이 없을 게 아니오.”

교묘한 언변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눈가를 찌푸렸다.

“그래도 이건…….”

도르네바르드 백작의 말을 중간에 끊은 도현은 단호한 어투로 못을 박았다.

“섬을 통째로 다 넘기라는 것도 아니고 고작 한쪽 귀퉁이만 달라는 건데 이것도 못 해 준단 말인가!”

말이 쉬워 한쪽 귀퉁이지 면적을 따지만 경상도보다 큰 땅이었지만, 도현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상대를 다그쳤다.

“방금 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동맹은 없으니 그렇게 아시오!”

딱 잘라 말한 도현은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전하!”

그러자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다급한 표정으로 부르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매몰차게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이척과 외무부 관리들도 그런 도현을 따라 방을 나가 버렸다.

덩그러니 남겨진 도르네바르드 백작과 발데 총관은 허탈한 얼굴로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게 무슨…….”

어렵게 자리를 마련해 놓고 아무런 소득도 못 건지고 돌아온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채 분통을 터트렸다.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발데 총관이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저도 이런 요구를 할 줄은 정말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젠장!”

욕설을 내뱉으며 분을 삼키지 못하는 가운데 발데 총관이 도르네바르드 백작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무리 동맹을 맺어야 한다 해도 이대로는 안 돼. 조선의 요구가 너무 심하지 않나!”

성난 목소리로 백작이 분통을 터트렸다.

도현이 요구한 칼리만탄 섬은 동인도회사로서도 중요한 거점이었기에 쉽사리 내줄 순 없었다.

“하나 조선 국왕의 뜻이 꽤 확고한 것 같습니다만…….”

발데 총관이 말끝을 흐리며 눈치를 보자마자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매섭게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걸세!”

만약 도현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본국인 네덜란드가 조선에게 머리를 숙이며 제발 동맹을 맺어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꼴이 된다.

자존심 높은 귀족인 백작으로선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실리적인 측면에서도 칼리만탄 섬의 지배권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아무리 섬 일부에 한해서라고 해도 말이다.

“그럼 동맹을 포기하시는 겁니까?”

“크읏.”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입술을 깨물었다.

미간에 깊게 파인 주름이 좀처럼 펴질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잠시 머리를 굴리던 백작은 끝내 발데 총관에게 버럭 신경질을 부렸다.

“어쨌든 그 섬은 절대 내줄 수 없어. 어떻게 해서든지 간에 다른 것으로 조선 국왕의 마음을 돌려 보는 수밖에.”

결국 도르네바르드 백작 본인도 뾰족한 수를 내놓지 못하고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과연 일이 잘 풀릴까요?”

발데 총관은 회의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껏 그가 파악한 대로라면 이런 조건을 내걸기 전에 조선 국왕이 치밀한 계산을 했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직접 얼굴을 마주 대했을 때의 태도로 미루어 보아 쉽게 뜻을 꺾을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을 타개할 방안이 생각나지 않아 눈앞이 깜깜해진 발데 총관은 깊은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음 날부터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이척을 통하거나 직접 도현을 만나 요구를 들어주기 어렵다며 다른 조건을 제안했지만 조선 측의 반응은 냉담했다.

특히 도현은 칼리만탄 섬 북부를 넘겨주지 않으면 군사동맹은 없다며 아예 면담 자체를 거부해 버렸다.

다급해진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다시 이척에게 매달렸지만 이번에는 그도 도현의 뜻이 워낙 확고해 도움을 줄 수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여기저기 줄을 대며 동분서주했지만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아무런 소득도 거둘 수가 없었다.

결국 시간만 허비한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빈손으로 바타비아로 돌아가야 했다.

“전하, 다녀왔사옵니다.”

방 안에 앉아 조용히 보고서를 읽고 있던 도현은 이척이 들어와 꾸벅 허리를 숙이자 시선을 들며 물었다.

“화란 사신 일행은 모두 떠났나?”

“예. 타고 온 배에 올라 바타비아로 가는 걸 배웅하고 오는 길이옵니다.”

“꽤 귀찮았는데 이제 좀 조용해지겠군.”

느긋한 도현과 달리 이척은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아국과 상당히 좋은 관계를 유지한 화란인데 정말 이대로 보내도 되겠사옵니까?”

“왜, 짐이 야박했던 것 같나?”

“…….”

차마 그렇다고 말을 할 수 없었던 이척이 송구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도현은 짧게 혀를 찼다.

“쯧. 지난번에 막부 관리들을 다루는 걸 보고 수완이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군.”

“예?”

“지금 친하게 지낸다고 언제까지 화란이 우리 편일 거라 생각하나!”

“그건…….”

“외교에서는 영원한 친구나 적은 없는 걸세. 철저히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거란 말이지. 당장 화란만 해도 영국이 항해조례를 선포해서 곤란한 처지에 몰리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군사동맹을 제의하고 한시적 관세 면제 같은 선물을 주며 고개를 숙였을 거라 생각하나?”

도현의 지적에 이척은 그때에야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그렇군요. 신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다른 관리들이 맡은 업무도 다 중요하지만 특히 외교관은 한 번의 실수로 나라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항상 신중하고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서는 안 될 것일세.”

“명심하겠사옵니다.”

“그래.”

실수를 인정하고 수긍하는 모습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색을 한 얼굴을 풀었다.

앞으로 화란을 어떻게 상대해야 될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밖에 있던 숙직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김 접장께서 오셨사옵니다.”

“들라 하라.”

문이 열리자 종종 걸음으로 방에 들어선 김근행은 그를 행해 절을 하며 예를 갖췄다.

심상치 않은 김근행의 얼굴에 뭔가 일이 생긴 걸 눈치챈 도현은 약간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북경성이 함락됐다고 하옵니다.”

“그게 정말이야?”

“예, 방금 급보가 당도했사옵니다.”

“으음. 결국 그렇게 됐군.”

포위된 상태에서 예친왕군의 파상 공세를 받고 있었기에 함락은 어느 정도 예상된 결과였다.

오히려 고립된 채 두 달이 넘게 버틴 것이 대단했다.

“태후와 황제는 어찌 됐지?”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혀 공개 처형을 당했다고 하옵니다.”

“황제도 같이 죽였다는 거야?”

“그렇사옵니다.”

“허어.”

아무리 칼을 들이댄 상태라고 해도 반역의 멍에를 뒤집어쓰지 않으려면 황제를 잡아서 얼마간 이용하다가 자연스럽게 양위를 받은 다음 폐기 처분(?)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런데 남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사형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에 도현은 살짝 놀랐다.

“예친왕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군.”

“태후의 선공에 자칫 모든 걸 다 잃을 뻔했고 역도로 몰려 큰 고초를 겪었으니 그 분노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옆에 있던 이척의 말에 도현은 수긍을 하면서도 의외라는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평소 냉철한 예친왕의 성격을 생각하면 상당히 이례적이군.”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 듯 김근행을 보며 물었다.

“오삼계도 함께 잡혔나?”

태후와 황제가 불미스러운 일을 당한만큼 군을 지휘한 오삼계 역시 화를 면치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김근행의 입에서는 뜻밖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탈출에 성공해 현재는 행방이 묘연한 상태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상식적으로 성벽이 무너진 상태에서 겹겹이 싸고 있을 상대편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실은 그동안 잘 버텨 오던 북경성이 무너진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오삼계 장군의 이탈이옵니다.”

“그 말은 성이 함락되기 전에 오삼계가 태후를 배신하고 도주했다는 거야?”

“맞사옵니다.”

도현은 북경성이 무너졌다는 것보다 더 충격을 받았다.

“정말 의외군.”

“전날 밤 그를 따르는 오군도독부 기병 오천을 이끌고 성문을 열고 나가 상대를 급습한 뒤 그대로 서쪽 방향으로 사라졌다 합니다. 뒤늦게 오삼계의 도주를 알아차린 예친왕이 용골대와 팔기군 칠천을 내보내 추격했지만 놓치고 말았다 하옵니다.”

“아니, 갑자기 오삼계가 변심을 하게 된 이유가 뭐야?”

“포위가 길어지면서 상황이 절망적이었던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태후와의 다툼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다툼이라고?”

“예. 토벌대를 출전시킬 때부터 크고 작은 의견 다툼이 계속되어 왔지만, 오삼계 장군이 참고 넘겼는데 도주를 결행한 바로 전날 태후가 그를 자금성으로 불러 심하게 꾸짖으며 상황이 악화된 책임을 전부 오삼계 장군에게 떠넘긴 것도 부족해 모욕까지 줬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도현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병사들을 지휘하는 장수를 그런 식으로 대하다니 태후가 스스로 무덤을 팠군.”

“그러게 말입니다.”

옆에 있던 이척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되면 우리도 예친왕이 공격해 올 걸 대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만주를 되찾겠다는 열망이 강한 예친왕이라면 태후와 달리 분명 군사를 일으켜 산해관을 나오겠지만, 아직 내부를 다 추스르지 못했으니 그렇게 호들갑 떨 필요 없네. 하지만 혹시 모르니 경계는 강화시켜야겠지. 상선.”

“말씀하시옵소서, 전하.”

“당장 제장들을 회의실로 소집하게.”

“옛.”

고개를 옆으로 돌린 도현은 김근행을 보며 말을 이었다.

“주작단은 예친왕의 움직임을 상세히 파악해서 이상이 있을 때마다 즉시 보고하도록 해.”

“알겠사옵니다.”

신하들의 대답을 들으면서 도현은 눈을 번득였다.

얼마 뒤 급히 소집된 지휘관 회의에서 도현은 북경 함락 소식을 알려 주고는 전군에 경계 태세를 강화하도록 지시했다.

동시에 진행 중인 방어 시설 공사와 병력 보충을 빨리 마무리 짓도록 했다.

이런 가운데 북경을 함락한 예친왕은 수하들의 추대를 받아 청나라 사 대 황제 위에 올라 새로운 자금성의 주인이 됐다.

하지만 내전을 벌여 수많은 생명이 희생된 데다 조카이자 전대 황제인 순치제를 공개 처형하며 피로 얼룩진 대관식을 치렀기에 그를 바라보는 백성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거기다 북경을 무너뜨리고 내전에서 승리했지만 여전히 태후파 잔존 세력들이 남아 있어 전국이 불안한 상태였다.

특히 북경을 탈출한 오삼계와 직례총독으로 근황군을 모으러 다닌 왕영이 가장 큰 위협이었다.

당장 왕영은 북경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힘들게 끌어모은 근황군 이십만을 이끌고 곧장 방향을 틀어 산동성山東省으로 내려간 뒤 제남济南성에 둥지를 틀었다.

태후파의 핵심 인물이라 항복을 한다고 해도 목숨을 건지기 어려웠던 만큼 왕영은 차라리 산동성을 거점으로 삼아 예친왕에게 대항하기로 했다.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기는 했지만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우선 이미 이십만에 달하는 근황군을 보유했고 바다를 낀 산동성은 예전부터 물산이 풍부하고 인구가 많아 대업을 펼치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그렇게 왕영이 산동성에 자리를 잡자 태후의 몰락으로 갈 곳을 잃은 관리와 장수 들이 몰려들었다.

비록 자신의 세력을 늘리기 위해서였지만 한족 출신인 이신들을 우대한 태후와 달리, 예친왕은 만주족으로 지배 계층을 이루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부 측근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차별 대우를 했다.

여기다가 처음 청군이 산해관을 넘어와 북경을 함락시켰을 당시 사령관인 예친왕이 미처 도망치지 못한 명나라 잔당들을 잔인하리만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여 버린 기억이 아직 생생히 남아 있었다.

이런 이유로 태후파 잔당뿐만 아니라 이신들 거의 대부분이 왕영에게 가서 몸을 의탁했다.

덕분에 예친왕이 황제로 등극하며 주위를 정리하는 사이에 왕영은 군세를 순식간에 삼십만으로 불리면서 덩치를 키웠다.

여기에 한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오삼계까지 사천성에 모습을 드러내며 세력을 모았다.

이렇게 북경성 함락과 함께 끝나는 것 같았던 내전은 영토가 세 등분되면서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자 중앙을 모두 정리한 예친왕은 왕영과 오삼계를 역도로 규정하고는 팔기군을 동원해서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다.

산해관 주둔군이 예친왕에게 항복하자 바짝 긴장하며 경계 수위를 높였던 조선군은 일련의 일들로 청군이 요서 쪽에 신경을 쓰지 못하자 한숨을 돌렸다.

여전히 불안 요소가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당장 전쟁이 벌어질 것 같은 상황은 진정되자 대궐을 너무 오래 비워 둘 수 없었던 도현은 해로를 이용해 한양으로 돌아갔다.

귀국과 동시에 사흘간 대대적인 개선 행사가 열렸고 이번 요서 점령전에서 공을 세운 장졸들에 대한 포상이 이루어졌다.

행사와 포상에 상당한 재물이 들어갔지만 백성들의 사기를 고취시키고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데 이것만큼 좋은 것도 없었기에 도현은 내탕금을 아낌없이 풀었다.

그리고 이미 봉황상단을 통해 매년 수백만 냥의 재물을 벌어들이는 도현은, 동아시아 제일의 부자가 되어 있었기에 이 정도 지출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연필과 도자기 그리고 인삼 등은 없어서 못 팔 정도였고 회귀 전 지식을 이용해 개발한 여러 광산들의 채굴이 본격화되면서 그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었다.

특히 제물포 인근의 부평광산富平鑛山은 매장량도 어마어마했지만 한 갱도에서 금과 은은 물론이고 납까지 생산돼 왕실의 곳간을 더욱 풍족하게 만들었다.

뜨겁게 내려쬐던 햇빛이 조금씩 기세가 수그러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세상은 수확의 계절인 가을이 됐다.

도성 밖에 위치한 농경지로 직접 행차한 도현은 누렇게 익은 벼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풍경을 둘러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올해도 풍년이로군.”

“다 주상 전하의 은덕이옵니다.”

옆에 있던 농산대신 진대석의 말에 도현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뭘 한 것이 있겠나. 경과 농산부 관리들이 불철주야 수확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농부들이 여름 내내 들판에 나와 구슬땀을 흘린 결과지. 수고들 했네.”

“황공하옵니다.”

국왕인 도현의 칭찬에 진대석과 수행하던 농산부 관리들은 얼굴 가득 자부심이 어렸다.

흙이 묻는다며 신하들이 만류하는 데도 불구하고 논두렁 아래로 내려간 도현은 직접 벼에 붙어 있는 낱알을 헤아려 봤다.

“낱알도 아주 실하게 붙어 있군.”

“벼도 많이 났고 낱알도 실해 작년보다 한 마지기당 수확량이 두세 가마 정도 더 나올 거라 예상하고 있사옵니다.”

“그래? 그거 아주 잘됐구먼. 여기서 만족하지 말고 더욱 품종을 개량해 백성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도록 하게.”

“예.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논들을 찬찬히 둘러보고 한쪽에 엎드려 있는 농민들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주며 격려한 도현은 미리 준비해 온 음식과 술을 풀어 노고를 위로했다.

오랜만에 대궐 밖으로 나온 김에 종로통에도 들러 금난전권이 없어지고 상업이 활성화되면서 더욱 번창하고 있는 상가를 살핀 도현은 오후 늦게야 환궁을 했다.

제주에서 진상한 감귤로 만든 따뜻한 유자차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고 있을 때 주작단 단장인 이완이 그를 찾아왔다.

“도성 밖 농경지를 둘러보고 오셨다들었는데 잘 다녀오셨사옵니까?”

“누렇게 익어 수확을 기다리는 벼들을 보니 근심 걱정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았네. 그건 그렇고 경의 표정을 보니 뭔가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군.”

도현의 말에 이완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입을 열었다.

“실은 바타비아에서 도착한 봉황상단 교역선을 통해 화란과 영길리英吉利(영국)에 대한 새로운 소식이 들어와서 알려 드리려고 왔사옵니다.”

갑자기 북경이 함락되면서 한동안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 청나라에 신경을 쓰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도현은 한쪽 손으로 탐스럽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관심을 보였다.

“그러고 보니 깜빡하고 있었군. 뭐 특별한 소식이라도 있나?”

“지난번에 영길리가 함대를 파견해 빈탄 섬에 요새를 건설했다고 보고드렸지 않사옵니까.”

“그랬지.”

“빈탄 섬에 자리를 잡은 영길리 함대가 주변 해역을 통과하는 선박들을 상대로 무차별적인 인검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하옵니다.”

“인검이라고?”

“그렇사옵니다. 배를 강제로 세운 뒤 병사들을 승선시켜 강제로 수색을 실시하고는 항해조례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것이 있으면 화물과 선박을 전부 몰수한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약간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국 선박도 피해를 입었나?”

“우리는 선단을 구성해 움직이고 항상 서너 척의 호위선이 붙는 데다 몇 달 전부터 전하의 지시에 따라 최대한 빈탄 섬에서 멀리 떨어진 항로를 이용하고 있어서 아직까지는 별다른 일이 없었사옵니다.”

“흐음. 다행이군.”

그러자 도현은 표정을 살짝 풀었다.

“그리고 몇몇 다른 서양 국가 선박이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이번 인검은 철저히 화란 동인도회사 소속 배들을 목표로 진행이 됐습니다.”

“바타비아에서 배를 띄워 유럽으로 가려면 빈탄 섬을 지나갈 수밖에 없으니 피해가 꽤 크겠는데.”

“잘 보셨습니다. 크고 옆으로 길쭉한 수마트라 섬과 말레이 반도 사이에 있는 말라카 해협 바로 입구에 마치 관문처럼 빈탄 섬이 위치해서 우회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옵니다. 그 때문에 벌써 화란 선박 여섯 척이 영길리 군선에 나포되어 화물을 모두 빼앗기고 선원들은 감옥에 갇혔다고 합니다.”

“저런.”

“뒤늦게 사실을 안 바타비아 총독이 교역선의 출항을 일시 중단시키고 빈탄 섬 요새에 있는 영국군 사령관에게 엄중히 항의하며 당장 화물을 포함해서 나포된 선박과 선원 들을 모두 풀어 줄 것을 요구했다 하옵니다.”

“그 정도에 물러설 것 같았으면 아예 시작도 안 했겠지.”

“바타비아 총독인 반데볼크 자작도 그걸 예상했는지 군대를 집결시키고 있다 하옵니다.”

도현은 낮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으음. 결국 그렇게 되는군. 빈탄 섬에 있는 영길리 함대의 규모가 얼마나 된다고 했지?”

“갈레온Galleon 다섯 척과 무장 상선 두 척입니다.”

갈레온은 범선의 한 종류로 삼사 층의 갑판으로 이루어져 있고 여러 개의 돛을 세워 속력이 빠르고 조정과 적재 능력이 우수했다.

“그리고 왜국 용병 이천 명을 부리고 있다 하옵니다.”

“왜국 용병이라고?”

“예.”

인도에서 세포이Sepoy라는 용병 부대를 운용했듯 본국과 거리가 멀어 충분한 병력을 유지할 수 없는 걸 보충하기 위해 영국이 용병을 고용하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배를 운용하는 선원도 아니고 이천 명이나 되는 용병을 고용한 건 시사하는 바가 컸다.

화포를 쓰기는 해도 아직까지 서로 배를 붙이고 상대편 선박으로 도선해 백병전을 벌이는 게 일반적이었기에 그걸 위한 걸 수도 있었지만, 도현은 영국이 뭔가 더 큰 걸 노린다는 것을 눈치챘다.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던 도현은 진지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어쩌면 단순히 말라카 해협을 봉쇄하는 것이 아니라 화란의 최대 거점인 바타비아를 점령할 속셈인지도 모르겠군.”

그러자 이완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으며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바타비아와 그 일대에 있는 화란의 세력이 영길리보다 족히 두 배는 넘을 텐데, 설마 그런 무모한 생각을 하겠사옵니까?”

“그럼 이천 명이나 되는 왜국 용병은 뭔 것 같나?”

도현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묻자 이완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그건…….”

“요새 방어 병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고 그렇다고 해전을 위해 전투병으로 배에 태운다는 것도 말이 안 돼. 그러면 남는 건 하나뿐이지.”

지적대로 상당히 애매한 숫자였다.

“전하의 말씀대로 바타비아를 노리는 거라면 큰일이지 않사옵니까?”

“주변 해역이 온통 전쟁터로 바뀔 테니 승패가 결정될 때까지 유럽과의 교역은 중단된다고 봐야겠지.”

“그것도 그렇지만 만약 화란이 패하고 영길리가 바타비아의 새 주인이 된다면 여러 가지로 불편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머리를 끄덕인 도현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지시를 내렸다.

“단원들을 은밀히 추가로 더 파견해서 남방 지역 상황을 보다 신속하고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멀리 남방에서 벌어지는 싸움이었지만 직간접적으로 해상무역이 활발한 조선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어 도현은 복잡한 얼굴로 입술을 살짝 비틀었다.

그날 늦은 시간이었지만 대전 회의를 급히 소집한 도현은 영국과 네덜란드가 남방에서 곧 전쟁을 벌일 거라는 사실을 알리고 대책을 논의했다.

네덜란드를 통한 유럽과의 해상무역이 조선 재정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히 컸기에 다들 크게 놀랐다.

갑론을박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간 끝에 조정에서는 몇 가지 결정을 내렸다.

제일 먼저 괜히 양국의 싸움에 휘말려 피해를 보는 걸 막기 위해 보르네오 해 아래 지역을 위험 해역으로 선포해서 당분간 교역선의 상행을 전면 금지시켰다.

그리고 빈탄 섬 요새에 있는 영국군 사령관에게 도현이 직접 쓴 칙서를 보내 조선 선박을 함부로 인검하거나 나포할 경우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는 경고를 해서 상대가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단순히 경고에 그치지 않고 도현은 총참모부의 논의를 거쳐 새로 건조한 치우 급 전열함 한 척과 신형 판옥선 세 척을 제주도에 배치해서 만약의 사태에 신속하고 강력히 대응할 수 있도록 전력을 강화시켰다.

갑작스러운 항해 금지로 봉황상단을 비롯한 각 상단들은 큰 손해를 입게 됐지만, 남방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제일 잘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반발 없이 순순히 지시에 따랐다.

들판에 바람이 불자 쏴아아, 풀잎 스치는 소리가 나면서 마을 어귀에 서 있던 커다란 소나무가 크게 가지를 흔들었다.

“와아!”

땅바닥에 떨어진 솔방울을 아이가 재빨리 집어 들고 탄성을 질렀다.

“아빠, 이거 봐요!”

“솔방울이구나. 어디에 쓰려고?”

그러자 아이는 킁킁 냄새를 맡더니 소중한 물건이라도 되는 양 품에 꼭 끌어안았다.

“아, 좋은 냄새.”

집에 가지고 가면 안 되냐는 듯 아이가 눈을 치켜뜨자 사내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네 어미가 보면 벌레 있다고 싫어할 테니 방 안에 들이려거든 나중에 개울가에서 꼭 깨끗하게 씻어 놔야 한다.”

“예.”

“그럼 얼른 가자꾸나. 늦었다고 촌장님이 혼내실라.”

아이는 넙죽 고개를 끄덕이곤 빨리 가자며 재촉하는 아버지의 손을 붙잡으러 쪼르르 달려 나갔다.

마을 입구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오래된 소나무와 함께 사람 키만 한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만들어진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소나무와 함께 마을 사람들의 애정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물건으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깨끗하고 반질반질하게 손질되어 있어 언제나 새것 같았다.

바로 국왕인 도현의 업적과 덕을 기리는 공덕비였는데 관에서 시켜서 만든 것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십시일반해서 세운 것이다.

“박 씨 왔는가. 조금 늦었군.”

“어이구, 죄송합니다.”

“괜찮네. 아직 한창 준비 중이니 편하게 있게.”

허허 웃던 촌장은 잘 지냈냐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박 씨라고 불린 사내는 아이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선 집에서부터 들고 왔던 벼 이삭을 비석 앞의 단에 나란히 올려놓았다.

“올해 저희 논에서 처음으로 추수한 이삭입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소작농에 불과했지만, 올해 봄에 처음으로 작은 논 하나를 사서 일군 결실이었기에 더욱 뜻 깊었다.

그가 자기 땅을 가지려고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아는 촌장은 온화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참으로 귀한 것이로군.”

“처음엔 기념으로 이삭 말린 걸 집 벽에 걸어 놓을까 생각도 했는데, 국왕 전하께 감사 인사를 드리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서요.”

“그래. 우리가 이렇게 평화로이 살 수 있는 것도 다 국왕 전하의 은덕 덕분이 아니겠나.”

“이 녀석이 막 태어났을 적엔 매년 보릿고개를 어떻게 넘길까 하는 걱정뿐이었는데 말이죠.”

어른들의 재미없는 이야기에 딴청을 부리고 있던 아이는 ‘내가 왜?’ 하는 표정으로 눈을 뜨고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그땐 모두가 다 힘든 시절이었지.”

촌장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눈시울을 붉혔다.

일 년 내내 힘들게 농사를 지어도 손에 남는 거 하나 없고, 굶주린 배를 채우려 짐승처럼 산을 뒤지던 때가 있었다.

“요즘 아이들은 보릿고개란 말이 뭔지도 모를 겁니다.”

사내는 뚱해 있는 아이를 달래듯이 어깨를 잡아당겨 끌어안곤 눈부신 듯 추수가 끝난 밭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금빛으로 빼곡히 들어차 있던 논밭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 휑했으나, 예전처럼 거북이 등짝처럼 갈라진 것이 아닌 아주 비옥하여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흙이 사방에 한가득이었다.

농사꾼이라면 무엇을 심어도 잘 자랄 것이란 확신이 드는 그런 풍경이었다.

잠시 후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다 모인 것을 확인한 촌장이 직접 솔선수범하여 앞에 나섰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아주 경건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로 국왕에게 바치는 세 번의 절이 끝나자 사람들은 저절로 삼삼오오 모여 마을 앞 공터로 발길을 옮겼다.

거기에는 이미 마을의 젊은 아낙들이 떡을 하고 전을 부치고 있었는데, 먹음직스러운 냄새에 들뜬 사람들 덕분에 주변이 금세 왁자지껄하게 변했다.

공덕비와 소나무가 바로 보이는 정자에는 촌장을 비롯한 연장자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술상을 받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저마다 판을 벌려 막걸리를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그 사이로 철모르는 아이들이 뭐가 그리 좋은지 꺄르르 웃으며 뛰어 다녔다.

이제 막 가을이 지나고 찬 바람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였으나, 사람들의 가슴속엔 풍요로움으로 인한 훈훈함이 따스하게 온몸을 적시는 그런 나날이었다.

이곳뿐만 아니라 조선 각지의 마을들이 수확의 기쁨을 느끼며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한편 네덜란드의 동방 교역 최대 거점이자 수마트라와 자바 등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고 향신료의 산지인 대순다열도를 관장하는 총독부가 위치한 바타비아는 최근 영국과의 대립 때문에 금방이라도 전쟁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항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요새 한쪽 이 층 벽돌 건물로 지어진 총독부 본관 회의실에는 이른 아침부터 반데볼크 총독과 도르네바르드 백작 그리고 여러 명의 중요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꽈직.

쾌속선을 통해 전달된 빈탄 섬 주둔 영국 함대 사령관의 답장을 단숨에 읽어 내려간 반데볼크 총독은 손에 든 서신을 와락 구겼다.

“이런 건방진 놈!”

“뭐라고 적혀 있나?”

아직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타비아에 남아 있던 도르네바르드 백작의 물음에 반데볼크 총독은 잔뜩 성이 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포된 선박과 선원 들을 돌려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계속 인검을 실시할 것이니 영국이 발표한 항해조례를 어기는 행위를 해서 문제가 되는 건 전적으로 우리 측의 책임이라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으며 크게 분개했다.

“이건 전쟁을 하자고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군.”

“지금까지 나포된 선박으로 피해가 큰데 말라카 해협이 막혀 버린다면 손해가 금방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입니다.”

동석해 있던 발데 총관이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이번 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은 바타비아에 거점을 두고 있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였는데, 화물을 가득 실은 선박이 통째로 나포됐을 뿐만 아니라 빈탄 섬에 있는 영국 함대 때문에 창고마다 쌓여 있는 물건들을 유럽으로 보내지 못하고 그대로 썩히고 있었다.

다행히 주요 거래 품목인 조선산 도자기와 인삼 그리고 각종 공산품 등과 향신료는 장기 보관을 해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교역 중단으로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당장 제때 유럽으로 화물을 보내지 못해 수만 굴덴GULDEN의 손실을 입고 있었다.

문제는 항로가 열리지 않는 이상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남방 지역의 식민지 운영과 해상 교역에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기에 동인도회사의 위기는 곧 총독부의 존립 자체를 흔드는 일이었다.

“이제 어찌할 생각이오?”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자 반데볼크 총독은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놈들이 싸우자고 하니 이번 기회에 다시는 남방을 기웃거리지 못하도록 본때를 보여 줘야지요!”

그러자 발데 총관이 기다렸다는 듯 지지를 표시했다.

“저희 동인도회사에서도 총력을 다해 총독 각하를 돕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소.”

네덜란드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는 남방 지역을 지키기 위해서는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도르네바르드 백작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총독의 결심에 동의하오.”

“감사합니다.”

남방 지역의 패권을 두고 영국과 결전을 벌이기로 의견이 모아지자 반데볼크 총독은 시선을 옆으로 돌려 발데 총관을 보며 말했다.

“동인도회사에서는 배를 몇 척이나 지원해 줄 수 있소?”

질문을 받은 발데 총관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옆에 있던 자와 작게 귓속말을 주고받은 뒤 대답했다.

“칠백 톤 급 무장 상선 세척과 군자금 오만 굴덴을 내놓겠습니다.”

예상보다 더 많은 지원에 반데볼크 총독은 반색을 했다.

“큰 힘이 되겠소이다.”

“그나저나 일이 이렇게 되니 지난번에 조선과 군사동맹을 맺지 못한 것이 아쉽군요.”

참석자 중 한 명이 무심코 꺼낸 말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기색을 지었다.

그걸 본 반데볼크 총독은 얼른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는 듯 자신감 가득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흥. 조선 따위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영국 놈들 쯤은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소!”

“맞는 말씀입니다. 이곳 바타비아에만 해도 십여 척에 달하는 군함들이 있으니 영국 함대를 수장시키는 건 시간문제일 겁니다.”

“이참에 빈탄 섬까지 쳐들어가서 영국 놈들이 만든 요새도 박살 내 버리지요.”

“좋은 생각이오.”

활발한 해상무역을 바탕으로 막대한 부를 쌓아 이 시대 유럽에서 최강대국이라 자부하는 네덜란드였기에 회의 참석자들 모두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조선이 보유한 치우 급 전열함의 위용을 직접 눈으로 본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사람들의 반응에 선뜻 동조를 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이날 회의에서 영국 함대와의 전투가 결정되자 네덜란드 측은 신속하게 남방 지역에 있는 전력을 집결시키며 결전 준비를 갖췄다.

이런 움직임은 얼마 있지 않아 빈탄 섬에 주둔한 영국 함대에도 전해졌고 사령관인 존슨 제독은 기다렸다는 듯이 휘하의 군선들을 이끌고 요새를 출발해 바타비아로 향했다.

상대가 준비를 갖추는 걸 기다리지 않고 미리 선수를 치겠다는 것이다.

조금은 비겁해 보일 수도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보유한 군선 숫자와 크기에서 열세를 보이는 영국 함대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승산을 높이기 위한 방법이었다.

존슨 제독이 선택한 기습 작전은 제대로 들어맞아서 네덜란드 함대가 아직 전투태세를 다 갖추지 못하고 항구에 모여 있을 때 먼저 강력한 일격을 날려 상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네덜란드 쪽도 공격에 대비해 민첩한 소형 프리깃함들을 주변 해역에 띄워 순찰을 했지만 공교롭게도 영국 함대가 바타비아로 접근하던 날 해상에 짙은 안개가 끼어 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설마 적이 여기까지 오겠냐는 방심까지 겹치면서 네덜란드 함대는 엄청난 충격을 맞이하게 됐다.

제일 처음 영국 함대를 발견한 건 바다 쪽을 향해 세워 놓은 해안 포대 병사들이었다.

평소처럼 지루한 얼굴로 포대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신기루처럼 수평선 너머에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영국 군함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저, 저게 뭐야?”

잘못 본 것이 아닌지 손등으로 눈을 몇 번이나 비볐지만 사라지기는커녕 영국 함대는 숫자가 더 늘어나더니 순식간에 항구로 접근해 왔다.

잠시 아군 군선이나 상선단이 아닌지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이내 지난달부터 교역로가 끊겨 배가 들어오지 않았고 주변의 네덜란드 군선들은 이미 모두 항구에 정박해 있다는 것이 떠오르면서 그런 희망은 빠르게 사라졌다.

그럼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적이야!”

“영국 놈들이 쳐들어왔어!”

상대의 정체를 깨달은 병사들이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지르는 것과 동시에 뒤편 망루에서 비상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땡땡땡! 땡땡땡!

평온하던 바타비아는 삽시간에 공포와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틀 뒤 출전할 함장들을 격려하기 위해 지난밤 늦게까지 연회를 벌인 반데볼크 총독은 갑작스러운 비상종 소리에 가운만 걸친 채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이게 웬 소란이냐!”

그러자 호위 장교 한 명이 다급한 표정을 뛰어왔다.

“총독 각하, 큰일 났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여, 영국 함대가 쳐들어왔습니다.”

“뭐라!”

순간 반데볼크 총독은 둔기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러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그치듯 말했다.

“빈탄에 있는 영국 함대가 어떻게 여기 있다는 거야!”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앞바다에 적선들이 잔뜩 몰려와 있는 건 사실입니다.”

“이런…….”

바로 그때 장교의 말을 확인이라도 시켜 주듯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포성이 연속해서 크게 울렸다.

꽝! 꽝! 꽝!

화들짝 놀란 반데볼크 총독이 황급히 관저를 나와 바다 쪽을 쳐다보자 어느새 돛 위에 걸린 국기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 가까이 접근한 영국 함대와 바타비아 해안 포대가 치열한 포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슈우우웅! 쿠쿵! 쿵!

“젠장 할!”

직접 눈으로 영국 함대를 보고 나서야 상황을 확실히 파악한 반데볼크 총독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고는 낭패한 얼굴로 뒤에 서 있는 장교에게 소리를 쳤다.

“당장 수비대를 소집하고 적 함대가 항구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장교는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서둘러 뛰어갔고 다시 시선을 바다로 돌린 반데볼크 총독은 희뿌연 포연에 뒤덮인 영국 함대를 노려보며 부드득 이를 갈았다.

“이놈들이!”

비상종이 울리며 바타비아에 있던 네덜란드군이 허둥지둥 방어태세를 갖추기 시작했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에 곳곳에서 문제가 속출했다.

특히나 수병 대부분이 항구에 상륙해 머물고 있던 군선들은 당장 눈앞에 영국 함대가 보이는데도 배를 몰고 나가 싸울 수가 없었다.

그나마 외곽에 설치된 해안 포대들이 아니었다면 영국 함대는 곧장 바타비아로 돌입해 들어와 항구를 엉망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쏴라!”

꽝!

포성과 함께 백이십 파운드짜리 대포가 시뻘건 불을 뿜자 좌우에서 귀를 막고 있던 포수들이 재빨리 밀대와 포탄을 가져왔다.

“더 빨리!”

장교의 재촉을 들으며 포수들이 재장전을 하려고 애를 쓰는 가운데 영국 군선에서 발사한 포탄이 포대 여기저기에 떨어져 폭발했다.

콰꽈꽝!

쿠쿵!

“흐익.”

포탄이 날아와 터지면서 흙먼지와 파편이 튀자 포수들은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한 손에 날카롭게 날이 선 군도를 든 장교가 바닥에 엎드려 있는 포수의 뒷덜미를 잡고 억지로 일으키며 고함을 내질렀다.

“당장 일어나지 못해! 적선이 방어선을 뚫고 항구로 한 척이라도 들어오면 다 끝장이다. 어서 포를 쏴.”

“예, 옛.”

장교의 독려에 엉거주춤 일어선 포수들은 다시 재장전을 하고는 영국 함대를 향해 쉬지 않고 해안포를 발사했다.

한편 기습에 성공한 영국 함대도 상대가 정신을 차리고 반격해 오기 전에 최대한 피해를 입히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측면을 드러낸 채 일렬로 길게 늘어선 군선들은 바타비아를 쑥대밭으로 만들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이 포격을 가했다.

함포가 발사될 때마다 선체가 좌우로 크게 흔들리는 가운데 영국 함대 지휘관인 존슨 제독은 함교에 서서 망원경으로 혼란에 빠진 바타비아를 살폈다.

“기습은 대성공입니다.”

옆에 있던 부관이 흥분한 얼굴로 말하자 존슨 제독은 눈에서 망원경을 떼며 무표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투는 이제 시작이야. 상대가 반격을 시작하기 전에 정박해 있는 적선에 최대한 피해를 가하지 못하면 오히려 우리가 당할 수도 있어.”

“저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데 그럴 여력이 있겠습니까?”

“상대는 전 세계 바다를 제패한 네덜란드야. 그리고 군선의 숫자도 우리보다 두 배 이상 많다는 걸 명심하게.”

“……예.”

상관인 존슨 제독이 너무 신중한 것 같아 조금 불만스러웠지만 어찌 됐건 네덜란드의 전력이 자신들보다 앞서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기에 부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고개를 돌려 전방을 쳐다보던 존슨 제독은 화염을 내뿜으며 포를 쏴 대는 해안 포대의 모습에 눈가를 찡그렸다.

정박 중인 네덜란드 함대를 박살 내기 위해서는 좀 더 안쪽으로 접근해야 됐지만 해안 포대의 격렬한 저항에 막혀 아직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부관.”

“말씀하십시오.”

“함포를 집중해 적 해안 포대부터 제압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잠시 뒤 기함 돛대에 깃발 신호가 올라가자 영국 군선들은 함포 사격을 해안 포대에 집중시켰다.

갈레온 다섯 척과 무장 상선 두 척으로 이루어진 영국 함대의 측면 함포들이 불을 뿜어낼 때마다 각종 구경의 포탄 수십 발이 길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단단한 바위로 만들어진 해안 포대 주위에 작렬했다.

퍼펑! 펑!

그러자 희뿌연 흙먼지와 포연에 온통 뒤덮인 해안 포대들도 지지 않고 대포를 쏘며 맞대응을 했다.

꽈아앙!

포탄이 포대를 직격했는지 귀를 때리는 폭음과 함께 바닥이 크게 흔들렸다.

“어이쿠.”

“크윽.”

한창 재장전을 하던 포수 몇몇이 중심을 잃고 볼썽사납게 바닥을 뒹굴었고 먼지 구름이 주위를 뒤덮었다.

“콜록. 콜록.”

뿌옇게 피어오른 먼지가 목구멍을 간질거려 말 한마디 할 때마다 기침을 몇 번이나 해야 했다.

“다들 괜찮나!”

“예.”

“여기 있습니다!”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몸을 낮춘 자세로 포대장이 크게 소리치자 이에 응답하는 목소리가 먼지 구름 너머로 들려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포대장은 황급히 뭔가를 떠올린 듯 주위를 둘러보다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대위님은 어디 계신 거야!”

당황해 허둥거리던 찰나, 누군가가 그의 물음에 답했다.

“여깁니다!”

아직 채 가라앉지 않은 먼지 사이로 손을 흔드는 그림자가 보였다.

포대장이 서둘러 달려가 보니, 그의 휘하에 있는 포수 하나가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 대위의 몸을 끌어안고 돌보고 있었다.

“이런!”

포탄이 터지면서 날아온 파편에 맞은 모양인지 옆구리의 옷이 날카로운 것에 베인 듯 길게 쭉 찢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붉은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땅히 지혈할 방법이 없어 손가락이 새하얘질 정도로 힘을 주고 압박을 하고 있던 포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는 듯 포대장을 쳐다보았다.

“어서 대위님을 치료소로 옮겨라!”

그사이에 겨우 정신을 차려 달려온 부하들에게 포대장이 급히 명령했다.

포수 둘이 대위를 들쳐 업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동안 포대장은 그 뒷모습을 황망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는 와중에 지휘관을 잃었으니 어찌해야 될지 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이대로 멍하니 있을 수는 없었기에 남은 부하들을 추슬러 다시 적과 싸우려고 할 때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쿠쿠쿵!

화들짝 놀란 포대장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왼편에 있던 포대가 시뻘건 불길에 휩싸인 채 폭발했다.

날아온 포탄이 사격을 위해 쌓아 둔 화약통에 떨어졌는지 단단한 돌을 깎아서 만든 포대가 엄청난 유폭을 일으키면서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 나 버렸다.

이백 보 이상 떨어진 곳에 있던 포대장이 후끈한 열기를 느꼈을 정도였으니 그 포대에 있던 병사들이 어찌 됐을지는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길!”

욕설을 내뱉은 포대장은 얼이 빠진 얼굴로 부서진 포대를 쳐다보고 있는 부하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뭘 멍하니 서 있어! 빨리 재장전이나 해.”

“예, 옛.”

허둥지둥 부하들이 해안포에 달라붙자 포대장도 직접 무거운 포탄을 옮기는 걸 도우며 서둘러 포를 장전했다.

그러고는 정면에 보이는 적선을 향해 포를 발사했다.

“쏴!”

꽝!

쉬이이익! 꽈앙!

날아간 포탄이 적선에 명중해 붉은 화구를 만들어 내자 포대장과 부하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맞았다!”

“좋았어. 이대로 적선을 모조리 다 수장시키는 거야!”

“옛.”

다시 사기가 오른 포수들은 누가 보면 감탄할 정도로 빠르게 재장전을 반복하며 계속 해안포를 쏴 댔다.

사방에서 포탄이 터지고 뿌연 흙먼지가 날렸지만 포수들은 포탄이 다 떨어지지 않는 한 절대 포격을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하지만 이런 해안 포대의 필사적인 저항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종말을 맞이했다.

존슨 제독의 지시에 영국군 전선들은 해안 포대에 화력을 집중했고 든든하게 포수들을 지켜 주던 석조 포대는 마치 커다란 괴물이 날카로운 손톱으로 할퀴듯 무너지고 부서졌다.

결국 마지막 남은 포대가 적선이 날린 포탄 다섯 발에 연달아 얻어맞고 침묵하는 것으로 항구를 방어하던 해안 포대들이 모두 전멸됐다.

“진격하라!”

방해 요소를 제거한 영국 함대는 함포를 쏴 대며 바타비아 항구로 일제히 돌입해 들어갔다.

비장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해안 포대들의 필사적인 저항은 충분한 값어치가 있었다.

수병이 없어 꼼짝달싹 못하던 네덜란드 군선들이 준비를 갖출 소중한 시간을 벌어 준 것이다.

만약 해안 포대가 없었다면 그대로 영국 함대가 돌입해서 닻도 끌어 올리지 못한 네덜란드 군선들을 말 그대로 표적지처럼 쏴서 다 격침시켰을 것이다.

삼십 분 넘게 이어진 격렬한 포격전 끝에 해안 포대를 모두 침묵시키고 영국 함대가 항구로 들어왔을 때에는 상륙해 있던 수병들이 비상종 소리에 황급히 복귀해 까까스로 전투 준비를 끝낸 후였다.

정말 절묘한 순간이었는데 해안 포대가 제압되는 것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도 네덜란드 군선들은 멍하니 선 채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겁 없이 쳐들어온 영국 놈들을 다 박살 내 버려라!”

“발사!”

네덜란드 함대 지휘관인 빌더스 제독의 분노에 찬 외침에 군선들은 돌입해 들어오는 적선을 향해 불을 뿜었다.

퍼펑! 꽝! 꽝! 꽝!

쉬우우웅. 꽈아앙.

이십여 척에 달하는 군선들이 발포를 하면서 항구 안은 순식간에 하얀 포연으로 뒤덮였다.

“네덜란드 군선을 부숴라!”

이에 영국 함대도 곧장 대응사격을 하면서 양측은 상대방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격렬한 포격전을 벌였다.

좁은 항구 안은 양쪽 군선들이 엉망으로 뒤엉킨 채 서로 치고받는 난투전을 벌였고 수병들의 비명과 포성이 귀를 때렸다.

갑판 널빤지가 산산조각 나고 돛대가 부러져 꺾이는 가운데서도 양측 수병들은 물러서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다.

몇몇 군선들은 배를 붙인 뒤 수병들이 머스킷을 쏘고 칼과 도끼를 휘두르면서 상대편 함선에 넘어 들어가 피를 뿌리며 단병접전을 벌이기도 했다.

채채챙! 챙! 챙!

“크아악.”

“죽어!”

“켁.”

타탕! 탕.

갑판 위는 피로 흥건했고 부상을 당한 수병들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내 다리!”

“살려 줘.”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전투는 멈추지 않고 더욱 치열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초반 기세 좋게 몰아치던 것과 달리 네덜란드군의 거센 반격에 막힌 영국 함대는 점점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미 해안 포대와 싸우며 상당한 피해를 입은 상태에서 수적으로 두 배나 많은 네덜란드 군선들이 강하게 저항하자 영국 함대는 승기를 빠르게 잃어 갔다.

“제독님, 저길 보십시오!”

비명 같은 부관의 외침에 존슨 제독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함포를 이십 문이나 탑재한 전함인 포츠머스가 시뻘건 화염에 휩싸인 채 침몰하고 있었다.

“끄으응.”

네덜란드 군선의 집중 포격을 견디지 못하고 선체 여기저기에 침수가 발생해 급격히 옆으로 기우는 모습에 존슨 제독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때 불길이 탄약고로 번졌는지 포츠머스 호는 엄청난 굉음을 울리며 폭발했다.

콰꽈꽝!

거대한 폭발에 선체는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 버렸고 작은 널빤지 조각이 사방으로 튀어 날아가며 아수라장이 됐다.

“크윽.”

후두두둑.

멀리 떨어진 기함에서도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충격파에 존슨 제독은 낮게 침음성을 흘렸고 이내 굳은 얼굴로 전장을 둘러보고는 부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후퇴 신호를 올리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참 전투가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갑작스럽게 후퇴를 지시하니 부관은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이미 기습의 유리함이 다 사라졌네. 이대로 계속 전투를 벌인다면 우리가 당하게 될 거야.”

“포츠모스가 격침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저희가 유리한 상황입니다.”

여기까지 와서 끝장을 보지 못하고 물러서야 되는 것이 아쉬운지 부관이 반대하자 존슨 제독은 단호한 어조로 재차 후퇴를 지시했다.

“괜한 욕심에 기회가 있을 때 물러서지 않고 머뭇거렸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거야. 어서 후퇴 깃발을 올려!”

여전히 불만스러웠지만 지휘관인 존슨 제독의 명령은 절대적이었기에 부관은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예.”

잠시 뒤 기함 돛대에 후퇴를 알리는 깃발이 나부끼자 상대의 거센 반격에 고전하고 있던 영국 군선들은 서둘러 뱃머리를 돌려 항구를 빠져나갔다.

그러자 복수심에 불타는 네덜란드 군선들이 즉시 뒤를 쫓아가려고 했지만 좁은 항구 안에서 전투가 벌어지면서 온갖 장애물들이 길을 막아 추격이 쉽지 않았다.

그사이 영국 함대는 유유히 바깥 바다로 나와 재빨리 전장을 벗어났다.

이날 전투로 영국 함대는 마지막에 유폭을 일으켜 산산조각 난 포츠머스 호를 포함해 두 척의 배가 격침됐고 한 척이 중파를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다른 배들도 격렬했던 포격전의 여파로 인해 선체 곳곳에 크고 작은 손상을 입어 한동안 보수가 필요했다.

네덜란드 함대의 피해는 더 컸는데 군선 다섯 척이 침몰하고 네 척이 대파를 당하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특히 해전이 벌어졌을 때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전함이 세 척이나 가라앉고 한 척이 대파를 당해 함대 전력이 크게 약화됐다.

여기다가 항구를 방어하던 해안 포대 다섯 곳이 폐허로 변해 버렸고 이천여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건 네덜란드가 아시아에 진출한 이후 입은 가장 큰 피해였기에 충격이 더 컸다.

영국 함대의 후퇴로 전투는 승패 없이 무승부로 끝났지만, 남방 지역 거점인 바타비아가 공격을 당하고 주둔 함대가 큰 피해를 입었다는 걸 생각하면 네덜란드의 패배나 마찬가지였다.

유일하게 위안거리로 삼을 만한 것은 해안 포대 병사들이 영웅적인 활약을 펼쳐 초반 영국 함대의 돌입을 막아 냈다는 것뿐이었다.

이 전투로 영국은 남방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네덜란드에 제대로 한 방을 먹이며 먼저 기선을 제압했다.

하지만 양쪽 다 상대편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지는 못했기에 조만간 또 한 차례 격돌을 예고했다.

한편 일 차 바타비아 해전으로 불린 이번 전투는 주작단을 통해 며칠 만에 멀리 한양에 있는 도현한테 보고됐다.

넓은 총참모부 회의실에 곤룡포를 입은 도현이 뒷짐을 진 채 한쪽 벽면 가득 걸려 있는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도는 한창 영국과 네덜란드의 세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남방 지역이 상세히 그려져 있었는데 바타비아와 빈탄 섬같은 주요 지역에는 작은 글씨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국가의 표시와 대략적인 전력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렇게 서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 칠현이 작은 목소리로 상념에 빠진 그를 깨웠다.

“전하, 국방대신께서 오셨사옵니다.”

도현이 몸을 뒤로 돌리자 국방대신 임경업이 군부 장수들과 나란히 서서 예를 갖췄다.

“거기들 앉으시오.”

“예.”

그가 상석으로 가서 앉자 임경업을 비롯한 장수들도 각자 자리에 착석했다.

갑작스러운 호출에 다들 약간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런 신하들을 스윽 한번 훑어본 도현은 왼편에 있던 주작단 이완 단장에게 시선을 멈추고는 입을 열었다.

“이 단장.”

“네.”

“그사이 남방에서 추가로 들어온 소식이 있나?”

질문을 받은 이완 단장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바타비아 전투에서 양쪽의 손실이 워낙 크다 보니 지금은 소강상태를 유지하면서 서로 손상당한 군선을 보수하며 전력 재정비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하옵니다.”

“그쯤 되면 둘 다 본국에서 지원 병력을 보충받을 만한데 그런 정보는 없나?”

“그건 좀 어려울 겁니다.”

“왜지?”

“최근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유럽에서도 양쪽의 충돌이 벌어졌다고 하옵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도현은 정색을 하며 물었다.

“승패는?”

“아직 본격적으로 부딪친 건 아니고 바타비아 전투가 촉매제가 되어 양국이 소규모 접전을 계속하며 긴장감이 극대화되고 있다 합니다.”

설명을 들은 도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상황이라면 둘 다 먼 남방 지역에 전력을 보강하기는 어렵겠지.”

“맞사옵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국방대신 임경업이 도현의 말에 동조했다.

“예기치 못한 기습에 된통 당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네덜란드 함대의 전력이 더 강하니 시간을 끌수록 영국이 불리해지겠군.”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도현이 통제사 손억기를 보며 눈빛으로 묻자 잠시 생각을 해 보더니 의견을 말했다.

“군선 숫자도 그렇지만 바타비아 전투에서 놀라운 감투정신敢鬪精神을 보여 준 화란 병사들의 모습을 생각할 때 제대로 맞붙는다면 영국 함대가 지난번처럼 우세를 점하기는 어려울 것이옵니다.”

“정말 대단했지.”

실제로 주작단을 통해 바타비아 전투에서 네덜란드군이 보여 준 저력을 소상히 전해 들은 그는 크게 감탄했다.

그러고는 대신과 군부 장수들에게 아국 군대도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물러서지 않고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하는 정신을 갖춰야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려스러운 첩보가 있사옵니다.”

“뭔가?”

“영길리 정부가 자국 해적들을 사면한 뒤 해군에 받아들였는데 그중 일부가 남방으로 오고 있다 하옵니다.”

이완의 말에 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사실인가?”

“아직 확인 중입니다만 영길리가 해적들을 끌어들인 건 사실일 것 같사옵니다.”

“으음.”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박살 내며 영웅이 되어 귀족 작위까지 받은 프란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도 유명한 해적 출신일 정도로 영국은 사략함대 운영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걸 모르는 신하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상황이 급하다고 해도 해적을 이용하다니 영길리가 어떤 나라인지 안 봐도 뻔하옵니다.”

“이런 자들은 겉으로 웃다가도 틈을 보이면 서슴없이 등에 비수를 꽂을 것이옵니다.”

이런 신하들의 반응에는 다 이유가 있었는데 해적이라는 말에 지난 세월 조선을 괴롭혀 온 왜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해적이라고 하지만 서양은 왜구들과 다르게 봐야 될 게야.”

“……?”

의아한 표정을 짓는 신하들을 보며 도현은 사략해적에 대해 설명해 줬다.

“사략해적은 각국 군주로부터 적국 선박을 사나포私拿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이들로 일종의 비정규 수군이라 봐야 하네.”

“하오면 국가에서 해적질을 권장한다는 말씀이옵니까?”

“그렇지. 듣기로는 그렇게 약탈한 물건 중 일부는 세금으로 바친다고 하더군.”

“허어.”

해상무역을 둘러싼 각축전이 치열한 서양에서는 일반적인 이야기였지만, 도리와 예를 중시하는 조선인들에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말이었다.

예전보다 많이 개선됐다고 해도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체면이 상하고 변칙적인 일이라도 과감히 선택해야 되는 군 지휘관들이 아직도 이런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도현은 살짝 거슬렸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일단 넘어갔다.

“주작단에서 알아낸 첩보가 사실이라면 네덜란드군이 곤경에 처할 수도 있겠군.”

영국에 악감정 같은 건 없었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그동안 교역을 하며 친분을 쌓은 네덜란드였기에 신하들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무엇보다 나름대로 질서를 유지하던 이 지역의 해상무역이 영국이라는 변수의 등장으로 크게 요동치는 것이 신하들의 신경을 건드렸다.

“오늘 경들을 모이라고 한 것은 일련의 상황들로 혼란스럽고 위험해진 해상 교역의 안전을 다시 확보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기 위해서네.”

도현의 말에 국방대신인 임경업이 눈에 이채를 띠며 물었다.

“혹시 지난번에 논의가 있었던 화란과의 군사동맹을 다시 추진하시려는 것이옵니까?”

“언제든 고려는 해 볼 수 있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위험을 감수하는 만큼 합당한 대가가 없다면 동맹은 없을 거요.”

“그럼?”

“아국의 이익은 우리 스스로 지킨다는 원칙 아래 대만에 남방을 오가는 상선을 보호할 요새를 새로 만들 것이오!”

뜻밖의 말에 임경업을 비롯한 신하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를 쳐다봤다.

“대만이라고 하셨사옵니까?”

“그렇소.”

그러자 수군 통제사였기에 남방 쪽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손억기가 얼굴을 굳히면서 말했다.

“거긴 화란이 장악하고 있는 곳이지 않사옵니까?”

예전부터 동아시아 각국들이 대만의 존재에 대해서는 인식하고 있었지만 딱히 어느 한 나라가 지배권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원주민과 한족 그리고 왜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뒤섞여 크고 작은 마을을 만들어 거주하고 있었는데, 1590년 동방무역을 위해 진출한 포르투갈 인들이 대만에 도착해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의 포르모사Formosa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후 왜국이 대만을 점령하기 위해 일군一軍을 보냈지만 거친 풍랑을 만나 전멸하고 이후 유럽의 새로운 해양 강자로 떠오른 네덜란드가 발을 들여놨다.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를 연결하는 절묘한 위치에 주목한 네덜란드는 1624년 안핑安平에 지란디아Zeelandia 요새를 세웠다.

그러자 동방무역을 두고 경쟁하던 에스파냐도 곧바로 요새를 만들며 기 싸움을 했다.

하지만 1642년에 치열한 싸움 끝에 네덜란드가 에스파냐를 누르고 대만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이런 사정을 도현이 모르지는 않을 텐데 대만에 수군 요새를 세우겠다고 하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설마 화란과 전쟁을 벌이시려는 건 아니시겠지요?”

임경업이 우려 섞인 눈으로 쳐다보자 도현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면서 입을 열었다.

“아국이 대만에 요새를 건설하는데 왜 화란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

“그야 화란이 대만을 지배하고 있으니, 당연히 우리의 행동에 크게 반발하지 않겠사옵니까.”

다른 신하들도 임경업과 같은 생각인지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런 모습에 도현은 손바닥으로 앉아 있는 의자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고는 버럭 언성을 높였다.

탕!

“언제부터 대만이 화란 땅이었나!”

“……?”

움찔한 신하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도현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남부에 화란이 해상교역을 위한 요새를 짓기는 했지만 그 어느 나라도 대만이 그들의 땅이라고 인정한 적은 없어! 그런데 아국의 행동을 누구한테 허락을 받아야 된다는 건가!”

아예 대만에 대한 화란의 권리를 부정해 버리자 신하들은 웅성거리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자 통제사 손억기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오나 어찌 됐건 화란이 대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만큼 아국의 행동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겠사옵니까?”

“통제사의 말이 맞사옵니다. 화란과는 서로 활발하게 교역을 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굳이 머나먼 곳에 요새 하나를 하나 만들자고 얼굴을 붉힐 필요가 있겠습니까.”

임경업이 손억기의 이야기를 거들고 나서자 도현은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며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고작 요새 하나라니, 경들은 여태껏 짐이 한 말을 못 들었나!”

“송구하옵니다.”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는 신하들을 보며 도현은 화난 음성으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대만에 요새를 세우는 건 교역을 위해 남방 항로를 오가는 선박을 보호하고 아국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지키려는 것에 그 목적이 있네. 그런데 경들은 그게 하찮은 일이라는 말인가!”

날 선 질책에 임경업과 손억기는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신들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화란과는 필요에 의해서 서로 손을 잡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 아국의 행사에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되는 상전이 아니라는 걸 다들 명심하게!”

“예.”

한바탕 그가 고함을 내지르고 나자 회의실 안이 무겁게 가라앉으며 신하들의 표정에 긴장감이 흘렀다.

그런 신하들을 쓸어 본 도현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요새 건설은 아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니 총참모부와 수군은 빠른 시간 안에 계획을 작성해 짐에게 보고하고, 화란과의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해 대만 남부가 아닌 북동부에 장소를 정하도록 하라.”

“옛.”

교역로 보호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괜히 좋은 관계가 악화되는 건 아닌지 우려스러웠지만, 그나마 화란의 거점인 지란디아 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요새를 만들라고 한 걸 위안으로 삼았다.

일단 도현의 명령이 떨어지자 임경업을 비롯한 장수들은 불안과 우려를 접고 요새 건설을 성공시키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이렇게 논의 과정에서는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제기하지만 결정이 내려지면 일치단결해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조선군이 가진 장점 중에 하나였다.

뚝딱뚝딱!

목수가 노련한 손놀림으로 망치를 휘두를 때마다 못을 박는 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장대만 한 널빤지를 어깨에 짊어진 일꾼들이 바삐 발걸음을 옮기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자로 치수를 재고 톱으로 자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돛의 상태는 어떠한가?”

모슬포 만호인 서지호가 그리 묻자, 그의 뒤를 따라다니던 부관이 성큼 옆에 다가와 답했다.

“오른쪽 끝 부분이 조금 찢어지긴 했습니다만 다행히 수선이 가능한 부분이라 오늘 안에 손질을 해 놓으라 명해 놨습니다.”

“잘했네. 돛은 배의 생명이나 다름없으니 항상 신경을 써야 해.”

“여부가 있겠습니까.”

두 사람은 지금 포구에 정박해 놓은 군선들을 보수하는 걸 순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른 군영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배를 다루는 수영은 바다에서 싸운다는 특수성 덕분에 특히 장비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배 밑바닥에 자그마한 구멍이 생긴 것을 모르고 그냥 출진했다간, 화포 한번 쏴 보지도 못하고 물귀신이 되기 십상이니 그야말로 자기 목숨 줄을 다루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순시를 계속하던 중, 수영 쪽에서 군관 하나가 말을 타고 달려와 서지호 앞에서 멈췄다.

이히히힝.

“만호 어른!”

갑자기 멈추는 통에 말이 투레질을 하자 갈기를 쓰다듬어 진정시키면서 군관이 급히 서지호를 찾았다.

“무슨 일인가?”

“도성에서 선전관이 내려왔습니다.”

“뭐라? 선전관이라면 왕명을 받드는 관리가 아닌가.”

왕명을 전하는 선전관은 유사시 자신보다 높은 품계의 관리도 체포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그런 자가 멀리 제주에 위치한 모슬포까지 내려왔다고 하니 깜짝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전하께서 무슨 어명을 내리신 걸까요?”

선전관이 올 목적이라면 어명을 전달하는 것밖에 없다.

부관이 당연한 의문을 입에 담자 서지호는 모르겠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쨌든 관아로 빨리 돌아가세. 주상 전하의 명을 받고 온 선전관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순 없으니.”

“예.”

서둘러 한쪽에 있는 군마를 타고 수영으로 돌아가니 정문 앞 어귀에서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병사가 재빨리 귓속말로 다들 대청마루에 모여 있다고 말해 주었다.

병사에게 말고삐를 넘겨주고 부관과 함께 모슬포 수영 안으로 들어선 서지호는 확 눈에 띄는 붉은색 옷을 입은 선전관이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선전관의 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일행인 듯한 몇몇 사람이 함께 서 있었고, 반대로 그 앞에는 수영에서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관리와 군관 들이 모두 총집합해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침묵 속에, 서지호가 흙 밟는 소리를 내며 등장하자 선전관이 그를 보고 눈인사를 했다.

“모슬포 만호 서지호 공 되십니까?”

“그렇소이다.”

등 뒤로 따갑게 꽂히는 시선들을 한 몸에 받으며 서지호가 조심스레 답했다.

“왕명을 받들고 왔으니 모슬포 만호 서지호는 예를 갖추도록 하시오.”

“예.”

선전관의 목소리가 일순 엄숙하게 변하는 것과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서지호는 곧장 예법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선전관이 손에 펼쳐 든 두루마리를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

주위에 있던 이들도 황급히 엎드렸다.

“모슬포 만호 서지호는 어명을 받으라.”

꿀꺽, 누군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모슬포 만호 서지호는 지난 영원성 전투와 왜국 원정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므로, 이를 높이 사 종사품 만호萬戶에서 종삼품 도호부사都護府使로 임명하노라.”

갑작스러운 승진에 서지호가 위로 얼굴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다가 선전관과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자신의 실책을 눈치채고 급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머리 위에서 다시 말이 이어졌다.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말고 짐과 나라를 위해 성심을 다 바치도록 하라.”

선전관이 두루마리를 접는 소리가 나자 서지호가 큰 소리로 외쳤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러곤 잠시 동안 그 자세로 멈춰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드니 선전관이 웃는 얼굴로 그에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도호부사 어른, 승진을 축하드립니다.”

“고맙소.”

얼결에 인사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아직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백주 대낮에 꾸는 백일몽과도 같은 느낌에 멍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선전관이 임명장 격인 두루마리를 그에게 내밀며 속삭였다.

“주상 전하께서 긴히 맡기실 임무가 있으니 채비가 되는 대로 빨리 도성에 올라오라 하셨습니다.”

“알겠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서지호는 두루마리를 소중히 받아 들고선 만면에 웃음을 짓고 있는 부관을 불러 명했다.

“선전관 일행이 머물 숙소를 안내해 드리도록 하게.”

“예. 이쪽으로 오시죠.”

부관이 선전관 일행을 데리고 떠나자 말을 걸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관리와 군관 들이 순식간에 그의 곁을 둘러싸고 환호했다.

“만호 어른, 아니 도호부사 어른, 감축드립니다.”

“선전관 일행이 왔을 때부터 내 좋은 소식일 줄 알고 있었지요.”

저마다 한마디씩 떠들어 대면서 사방에서 축하 인사를 건네는 통에 주변이 삽시간에 시끌벅적하게 변했다.

“하하, 고맙네.”

정신없는 와중에도 하나하나 잊지 않고 대꾸해 주는 서지호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활짝 피어 떠날 줄을 몰랐다.

이틀 뒤 서둘러 업무를 정리한 서지호는 선전관 일행이 타고 온 신형 판옥선에 함께 올라 한양으로 향했다.

제물포를 거쳐 다시 한양까지, 해로와 육로를 번갈아 가며 이동한 탓에 체력이라면 자신 있는 서지호조차 나중엔 피곤함을 느낄 정도였으니 꽤 힘든 여정이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

한양 본가에서 하루를 쉬며 여독을 풀고는 다음 날 의관을 갖춰 입고 대궐의 문턱을 넘은 순간 밀려오는 감회에 서지호는 그간의 고생이 씻은 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혹시 아는 얼굴이 있진 않은지 지나다니는 관리들을 눈여겨보던 그는 곧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리고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얼른 주상 전하를 뵈어야 하는데.’

그러면서 서지호는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사전에 미리 연통을 받았기에 그의 발끝이 향한 곳은 대전이 아니라 도현의 사적인 집무실이자 거처인 희정당이었다.

몇 개의 작은 문과 전각을 지날 때마다 주변의 소음이 점점 잦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는 관리와 궁녀 그리고 내관 들이 한데 섞여 활기찬 분위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방에 고요함이 가득했다.

마치 속세와 선계를 둘로 갈라놓은 것처럼 청아하면서도 위엄 있는 공기에 은연중 온몸이 압도되는 듯했다.

궁내를 경비하는 위사와 눈이 마주칠 때면 이곳에 나만 있는 게 아니구나 하여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될 때쯤, 칠현이 전각 처마 아래에서 그를 맞이했다.

“도호부사 어른,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입니다.”

이미 지난 원정 때 안면이 있었으므로 두 사람은 어색함 없이 인사를 나눴다.

“늦었지만 승차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감사하오. 주상 전하께서 어여삐 여겨 주시어 분에 넘치는 자리를 받았습니다. 성은이 망극할 따름이지요.”

“하하하. 전하께서 도호부사 어른의 그릇을 보시고 그에 합당한 벼슬을 내리신 것이겠지요. 그나저나 오시는 동안 별일 없으셨는지 모르겠군요.”

“배 여행은 익숙하니 괜찮았습니다. 한데…….”

서지호가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이 주변은 무척 조용하더군요.”

“예, 주상 전하께서 번잡한 걸 싫어하셔서.”

왜 그러냐는 듯 칠현이 쳐다보았다.

“조용한 건 좋으나, 너무 사람이 없는 건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오는 동안 궁궐 경비를 서는 위사를 보긴 했지만 주상 전하가 계신 곳인데 조금 더 경호를 단단히 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칠현은 가늘게 눈을 접으면서 말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다는 아니지요.”

“예?”

뒤꽁무니에 다른 사람을 줄줄 달고 다니는 걸 싫어하는 도현의 성격상 다들 숨어 있을 뿐, 희정당 주변의 경비는 대궐 어느 곳보다 삼엄했다.

칠현이야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지만 희정당에 처음 발을 들이는 서지호에게는 아무래도 미덥지 못하게 보인 듯하니 우스운 일이었다.

칠현은 뜻 모를 미소와 함께 이제 이야기는 끝이라는 듯 전각 안쪽으로 서지호를 안내했다.

“주상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절 따라오십시오.”

“아. 예.”

그러고 나서 칠현은 익숙한 몸짓으로 앞서 걸었다.

박석을 깔아서 잘 정비된 마당을 지나 돌계단에서 신발을 벗고 복도를 걷는데 약한 솔잎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희정당 뒤편에는 선비의 고고함을 상징하는 소나무와 매화 등이 한가득 심어져 있었는데 거기서부터 바람결을 타고 날아오는 듯 맡으면 심신이 편안해지는 향이었다.

“전하, 서 도호부사께서 오셨사옵니다.”

“들라 하라.”

“예.”

칠현은 마지막으로 의관을 점검하고 긴장한 기색으로 서 있던 서지호에게 눈짓했다.

“드시지요.”

스르륵, 궁녀들이 소리 없이 방문을 열자 금빛 보료 위에 앉아 있던 도현이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신 도호부사 서지호, 어명을 받잡고 왔사옵니다.”

“앉게.”

예법대로 정중하게 세 번 절을 한 서지호는 도현이 권하자 송구한 표정으로 일어나 미리 깔려 있던 방석에 조심스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 서지호를 잠시 바라보던 도현은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며칠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빨리 한양에 도착했군.”

“전하의 명을 받았는데 지체할 수가 없어 최대한 서둘러 왔나이다.”

무관답게 우렁찬 대답에 그는 흡족한 듯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경을 한양으로 급히 불러 올린 건 특별히 맡길 임무가 있어서네.”

“뭐든 하교만 내려 주시옵소서.”

파격적인 승차를 해서인지 서지호는 상당히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최근 남방 지역에 화란과 영길리가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예.”

“그로 인해서 남방으로 가는 해상 교역로가 막혀 아국의 피해가 크네. 이것뿐만이 아니라 바다를 오가는 교역선이 많아지면서 해적 등 온갖 위협들에 아국 선박들이 노출되어 있어 이만저만 걱정이 아닐세. 그래서 이번에 아예 대만에 요새를 건설해 아국 수군의 전진기지로 삼아 중요한 해상 교역로를 지키도록 할 생각이야. 그 막중한 임무를 경에게 맡길 생각인데 해낼 수 있겠나?”

순간 서지호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칫 화란과 전쟁을 벌여야 될지도 모르는 막중한 임무를 자신에게 맡긴다니 긴장이 되는 한편 남방으로 조선이 세력을 넓히는 데 선봉장이 된다는 생각에 아찔한 흥분감도 들었다.

“왜 대답이 없나?”

살짝 이맛살을 찌푸린 도현이 재차 묻자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서지호는 얼른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맡겨만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임무를 완성하겠사옵니다.”

“좋아.”

약간 굳었던 표정을 푼 도현이 손짓을 하자 한쪽에 시립해 있던 칠현이 두루마리 하나는 두 손으로 곱게 받쳐 들고 와서는 서지호한테 건네줬다.

“경을 남방 원정군 총사로 임명한다는 교지이네. 자세한 설명은 총참모부로 가서 국방대신과 통제사에게 듣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잠깐 뜸을 들인 도현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쉽지는 않겠지만 가급적이면 화란과 물리적인 충돌은 최대한 자제하도록 하게. 물론 경의 판단에 따라 피치 못할 경우가 발생하거나 아군이 위험에 처할 때는 짐이 뒤를 책임질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과감히 싸우게.”

화란의 영역에 들어가 군사 요새를 세우면서 충돌을 피하라니 정말 곤혹스러운 지시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무작정 싸우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대처할 수 있는 자율권을 보장해 주자 서지호는 내심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일은 아국이 만대의 영화를 이루는 데 꼭 필요한 것이니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해내도록 하게.”

그러자 서지호는 바닥에 몸을 엎드린 채 결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 목숨을 걸고 명을 실행토록 하겠나이다.”

“경만 믿겠네.”

도현의 격려를 받고 희정당을 물러난 서지호는 그길로 총참모부로 가서 요새 건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정확히 한 달 뒤 필요한 준비를 모두 갖춘 원정군은 보무도 당당하게 제물포항을 떠나 제주를 거쳐 곧장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번 원정에는 신형 판옥선 여섯 척과 수송선 여섯 척 등 모두 열두 척의 선박이 동원됐고, 수병을 제외하고 거점 확보에 나설 육전대 병력 이천 명이 함께했다.

여기다 요새 건설에 투입될 청군과 왜군 포로 이천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모든 병력의 지휘를 도호부사인 서지호가 맡았다.

<18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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