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덜란드의 몰락 (90/104)

네덜란드의 몰락

도현의 아침은 항상 후원 연무장에서 시작했다.

임금으로서 처리해야 될 업무가 많았지만 매일 아침 한 시각씩 나와 상쾌한 새벽 공기를 마시면서 무예 수련을 빠지지 않았는데, 나태해지지 않게 심신을 단련시키고 체력을 유지하는 그만의 방법이었다.

장검을 들고 펼쳐 내는 검법은 물이 흐르듯 매끄러우며 일격에 상대를 베어 버릴 날카로움이 담겨 있었다.

가볍게 몸을 푼 뒤 곧바로 친위대장인 신철과 격렬한 대련을 해서 실전 감각을 유지했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그의 이마에는 숙안 공주가 손수 만들어 준 머리띠가 둘러져 있었다.

채챙! 챙!

내리치고 베며 수십 합의 공방을 나눈 두 사람은 거칠어진 호흡을 내쉬며 떨어졌다.

“후우. 신 대장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 힘이 넘쳐나는 것 같군.”

“전하께서 하사해 주신 홍삼을 매일 달여 먹은 덕분입니다.”

신철의 재치 있는 대답에 칠현이 건네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숨을 고르던 도현은 피식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이거, 신 대장한테 이기려면 홍삼부터 끊어야겠구먼.”

“그러시면 제 마누라가 전하를 많이 원망할 겁니다.”

“뭐? 아! 하하하하.”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도현은 이내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차리고는 연무장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트렸다.

진중하고 빈틈이 없는 성격의 신철 친위대장이었지만 오랫동안 그림자처럼 수행하고 유쾌한 그의 영향을 받아 가끔씩 이렇게 농을 던지기도 했다.

그렇게 땀을 식히며 쉬고 있을 때 붉은색 관복을 입은 이완 단장이 연무장 안으로 들어섰다.

“전하.”

“이 단장이 아침부터 어쩐 일인가?”

“긴히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 왔사옵니다.”

정보를 취급하는 주작단 단장인 이완이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 할 이야기라면 중요한 일일 것이 분명했기에 도현은 표정을 살짝 굳히며 말했다.

“뭔지 말해 봐.”

“영길리 함대가 화란의 남방 교역 중심지인 바타비아 요새를 닷새 전에 전격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으음. 결국 그렇게 됐군.”

살짝 미간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기에 도현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첩보가 하나 더 들어왔는데 영길리가 왜국에서 용병을 대대적으로 모집하고 있다 합니다.”

“용병을?”

“예.”

“이미 꽤 많은 숫자의 왜국 용병을 데리고 있는 걸로 아는데, 거기서 더 모은단 거야?”

“그렇습니다.”

“무슨 생각이지?”

머리를 갸웃거리자 이완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바타비아에 그치지 않고 기세를 살려 남방 지역에 있는 화란의 거점들을 모두 손에 넣으려는 속셈인 것 같사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겠군.”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표정을 짓던 도현은 시선을 들며 물었다.

“그래서 왜국 용병을 얼마나 모으고 있는 거지?”

“하는 행동으로 볼 때 족히 이천은 채울 것 같사옵니다.”

“이천이라…… 그 정도면 화란에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겠군.”

“가뜩이나 해로가 막히고 패배로 수군 전력이 거의 와해된 상태에서 치명적인 일이 될 겁니다.”

칼과 창 같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무기를 가진 왜병들이라지만 이천이라는 숫자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영국 함대가 측면에서 함포 지원을 해 준다면 좁은 바타비아에 고립된 네덜란드군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한 수가 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화란 측에 불리한 소식이 하나 더 있사옵니다.”

“그게 뭔가?”

“마카오에 있는 불랑기(포르투갈)군이 이 기회를 노려 대만에 다시 진출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합니다.”

“불랑기가?”

“예.”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도현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남방 진출을 위한 거점을 확보하려고 하는 판에 갑자기 포르투갈이 끼어든다니, 이건 전혀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경계 어린 눈빛으로 도현이 불평을 터트렸다.

“그놈들이 갑자기 왜?”

이완은 사뭇 진지한 태도로 대답했다.

“원래 향신료 무역을 쥐고 있던 것이 자신들이었으니 화란이 흔들리는 틈을 이용해 다시 주도권을 되찾아오려는 속셈 같사옵니다.”

설명을 들은 도현은 짧게 혀를 차며 마뜩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힘이 다 빠져 껍데기밖에 안 남은 주제에 가당치도 않는 욕심을 부리다니…… 쯧.”

“그만큼 동양과의 무역이 부를 가져다준다는 뜻이지 않겠습니까.”

“하긴.”

도현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자신만 해도 화란을 통해 인삼과 각종 공예품들을 유럽에 팔아 막대한 재물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유럽 역사를 살펴봐도 동방 무역을 장악하는 나라가 헤게모니Hegemony를 쥐고 강력한 패권국으로 떠올랐다.

그 대표적인 국가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이었다.

15세기부터 대항해시대의 첫 장을 화려하게 열며 남아메리카와 아시아,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포르투갈이었기에 누구보다 해상 무역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찰나에 자신을 밀어내고 패권국이 된 네덜란드가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자 예전 영광의 재현을 노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카오에 있는 포르투갈의 전력이 얼마나 되지?”

“전열함 한 척에 프리킷 여섯 척으로 구성된 함대가 있고 지상 병력은 사천 명가량을 보유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꽤 많군.”

“겉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어째서지?”

“일단 전열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군선이 건조한 지 오 년이 넘어가는 노후 선박인 데다 탑재된 대포도 구형에 숫자마저 영길리나 화란보다 적사옵니다. 그나마 지상 병력이 제대로 갖춰져 있다는 걸 빼고는 솔직히 큰 위협이 되지 않는 상대입니다.”

“그래도 젤란디아 요새에 있는 화란군한테는 상당한 압박이 되지 않겠어?”

“그건 그럴 겁니다.”

“영길리를 상대하기도 벅찬데 불랑기까지 덤벼든다면 정말 가망이 없겠군.”

턱을 매만지며 잠시 뭔가를 고심하던 도현은 이내 고개를 들어 앞에 서 있는 이완 단장을 봤다.

“요즘 완도에 있는 화란 상관 분위기는 어때?”

“화란 상인들이 계속 남아 있기는 하지만 영길리 함대가 교역로를 막아 버린 여파로 거래는 벌써 두 달째 중단된 상태입니다. 아국 상인들도 물건을 완도 상관으로 가져가지 않고 지금은 직접 배를 띄워 마카오나 왜국으로 가져가 판매하고 있사옵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뜸을 들이던 도현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영길리 함대가 빈탄 섬에 거점을 두고 있다 했지?”

“그렇사옵니다.”

“은밀히 사람을 보내 그쪽 분위기를 탐색해 보도록 해.”

“……!”

그러자 이완이 놀란 얼굴로 도현을 봤다.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이고 있는 현 상황에서 조선이 은밀히 양쪽에 다 손을 뻗는다는 건, 네덜란드 입장에서 보면 배신행위나 마찬가지였다.

“화란을 버리실 생각이십니까?”

“어느 한쪽을 버린다던가, 취한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그저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거지.”

도현은 오히려 그런 이완을 보고 뭘 그리 호들갑이냐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군주 된 입장에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나. 이대로 화란이 전쟁에서 패한다면 우리 조선의 해상 교역에 막대한 피해가 갈 거야. 그럴 때를 위한 방책은 마련해 둬야지.”

“알겠습니다.”

그 말에 수긍한 듯 이완이 고개를 숙이고 연무장을 물러나자, 도현은 어깨를 느슨하게 덮고 있던 용포를 단단히 부여잡았다.

“희정당으로 돌아가자.”

어쩐지 날이 흐리다 싶었더니 회색 구름 사이로 가는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펼친 손바닥 위로 눈송이가 내려앉아 녹아가는 것을 잠시 지켜보던 도현이 용포를 펄럭이며 돌아서자, 칠현과 신철 친위대장도 함께 그 뒤를 따랐다.

며칠 뒤 주작단 요원이 도현의 친서를 가지고 비밀리에 빈탄 섬을 향한 가운데 남방은 영국과 네덜란드의 싸움에 포르투갈이 끼어들면서 한층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급보가 도현에게 날아들었다.

바로 청국의 기세에 밀려 양자강 이남으로 밀려났던 명나라가 대군을 일으켜 북진에 나섰다는 소식이었다.

예상하고 있던 대로 당왕 주율건이 총사령관을 맡았고 동원된 군세는 무려 이십만이나 됐다.

북경을 잃고 쇠락한 명나라의 국력을 생각하면 말 그대로 마지막 남은 힘까지 모두 짜내 화북 탈환에 나선 거였다.

제남에 자리를 잡은 왕영의 세력과 섬서성陝西省으로 도망친 오삼계를 압박하려던 청나라는 명군이 양자강을 넘어 진격해 오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왕영과 오삼계를 정리하고 곧장 산해관을 넘어 조선을 치려던 도르곤(예친왕)은 분을 삼키며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청나라가 세 곳에서 동시에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불안감이 감돌던 요서 지역은 당분간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게 됐다.

벽돌과 흙으로 쌓아 올린 요새가 어느새 제대로 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새로 만든 성문 앞에는 소총을 어깨에 둘러맨 경비병 둘이 서 있었는데, 멀리서 봐도 군기가 바짝 든 모습이었다.

누구 보는 이 하나 없어 잠시 딴청을 피울 법한데도 빳빳한 자세로 미동 하나 없이 서 있는 두 사람의 시야에 멀리 군마를 탄 기병 하나가 먼지구름을 피워 올리며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매섭게 채찍질을 해 대며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급속히 가까워지자 경비병 둘은 재빨리 경계태세를 취했다.

“멈춰…… 음?”

막 소리를 지르려던 경비병은 군마 위에 올라탄 인영이 낯익은 얼굴임을 알아차리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경비병 둘이 소총을 내리고 비켜서는 것과 동시에, 군마는 단 한 번도 속도를 늦추는 일 없이 그대로 성문을 통과했다.

겉은 그나마 제법 번듯했으나, 요새 안은 공사가 전혀 안 돼서 번듯한 건물 하나 없이 천막들만이 거미줄처럼 여기저기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사이를 질풍처럼 가로지른 기병은 주둔지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지휘 천막 앞에 다다라서야 고삐를 잡아 쥐었다.

“워, 워!”

이히히힝.

얼마나 빠른 속도로 달려왔는지, 울음소리를 길게 내뱉으며 헐떡이는 말을 겨우 진정시킨 기병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쳐다보는 병사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 천막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장군!”

갑작스러운 부름에 휘하 장수들과 함께 탁자를 둘러싸고 회의 중이던 서지호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가?”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뭐?”

순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서지호가 눈을 껌뻑이는 가운데 소식을 전하러 온 하급 장수의 보고가 이어졌다.

“섬 중부 지역에 거주하는 한족 수천이 곽회일郭懷一이라는 자의 선동으로 반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지금 수천이라고 했나?”

“예.”

“허어.”

수천이라는 말에 서지호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유가 뭐야?”

그러자 하급 장수가 얼른 대답했다.

“최근 바뀐 화란 측의 정책 때문이라고 합니다.”

서지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옆에 있던 김진석이 설명을 해 줬다.

“급격히 늘어나는 이주를 막기 위해 화란 측에서 한족의 토지 소유를 허가해 주지 않고 세금을 늘렸다고 하더니 결국 사달이 난 것 같습니다.”

농사꾼 출신이 대부분인 한족 이주민들한테 땅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던 서지호는 짧게 혀를 찼다.

“쯧쯧. 양인들이 큰 실수를 했군.”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이곳에 거점을 확보해야 되는 우리 입장에서는 화란 측의 통제력이 흔들리면 좋은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김진석의 말에 머리를 끄덕인 서지호는 하급 장수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상황이 얼마나 더 확산될 것 같나?”

“세금을 거두러 왔던 양인 징수관을 붙잡아 때려죽이고 관청을 불태우는 걸로 봤을 때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을 분위기입니다.”

“우리 쪽에 영향은 없겠나?”

“당장은 화살이 화란 측으로 향해 있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건 다행이지만 혹시 모르니 오늘부터 요새 주변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하게.”

고개를 옆으로 돌린 서지호의 지시에 육전대 지휘를 맡고 있는 김진석이 머리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옛.”

“그리고 척후조를 더 많이 내보내서 이번에 반란을 일으킨 한족들의 동태를 면밀히 살피도록 해.”

“알겠습니다.”

서지호는 복잡한 시선으로 의자에 앉아 탁자 위에 펼쳐 놓은 대만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대만 중부에서 시작된 반란은 삽시간에 젤란디아 요새가 있는 남부까지 불길이 번져 갔다.

단순히 숫자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청군을 피해 도망쳤던 일부 명군 출신 장수와 병사들까지 반란군에 가담하면서 빠르게 조직화됐다.

그러자 합자난에 상륙한 조선군과 포르투갈의 침공에 바짝 신경을 쓰고 있던 루벨라 총독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허겁지겁 삼백 명의 무장 병력을 내보내 진압을 시도했지만 이미 만 명이 넘어가 버린 반란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진압은 고사하고 참패를 당하면서 오히려 반란군의 사기만 올려 줬다.

급기야 세력을 계속해서 불린 반란군이 젤란디아 요새까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후방 지원을 해 줘야 될 바타비아가 영국 함대에 고립되어 있는 상황이었기에 달리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었다.

결국 절벽 끝에 몰린 루벨라 총독이 고심 끝에 손을 벌린 곳은 바로 합자난에 있는 조선군이었다.

“누가 왔다고?”

“지난번에 찾아 왔던 포름 총관이라는 자가 장군님을 뵙고 싶답니다.”

부관의 말에 서지호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반란군 때문에 정신이 없을 텐데 여긴 어쩐 일이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흐음.”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을 하던 서지호는 이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이리로 데려와.”

“예.”

얼마 안 있어 포름 총관이 수행원 한 명과 함께 부관의 안내를 받아 지휘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최근 연속해서 화란 측을 덮친 악재 때문인지 포름 총관은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조금은 여윈 모습이었다.

“어서 오시오.”

“반갑습니다.”

서양식으로 가볍게 악수를 나눈 두 사람은 천막 한쪽에 있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요즘 섬 전체가 뒤숭숭한데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온 겁니까?”

탐색전도 없이 다짜고짜 서지호가 본론을 물어 오자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던 포름 총관은 당번병이 갖다 놓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한족 반란군과 관계해서 조선 측에 도움을 요청할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도움이라…….”

순간 서지호는 눈에 이채를 띠었다.

“진압에 필요한 탄약을 구매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병력도 지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건 화란 측의 항복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단으로 합자난에 상륙해 요새를 짓는 걸로 대립각을 세우던 상대를 찾아와 머리를 숙이며 도움을 요청하는 것만 봐도 현재 화란이 얼마나 다급한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서지호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를 봤다.

“그것 참 곤란한 부탁이군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일부러 잠시 뜸을 들이던 서지호는 은근슬쩍 상대를 떠봤다.

“우리보다는 바타비아에 있는 귀국 군대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빠르지 않겠소이까?”

사면초가에 놓인 네덜란드의 상황을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해서 속을 긁는 상대의 행동에 화가 치밀었지만, 지금 불리한 건 자신이었기에 포름 총관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쪽은 영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라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것 참, 아쉽게 됐소이다.”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글쎄올시다. 가능하면 도와주고 싶지만 본인이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서………… 일단 본국에 계시는 주상 전하께 장계를 올리도록 하겠소.”

서지호의 말에 포름 총관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조선까지 배를 띄우고 허락이 떨어지는 걸 기다리려면 너무 늦습니다.”

“하지만 군을 움직이는 일을 본관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지 않소이까?”

그가 난색을 표하자 포름 총관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반란군이 갈수록 세력을 확대하며 젤란디아 요새 턱밑까지 밀고 들어온 상태에서 조선군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대만에 있는 네덜란드 세력은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었다.

튼튼한 요새를 방패로 방어전을 펼치면 되지 않겠냐고 이야기할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성안의 무기고가 거의 바닥을 드러낸 상태인 데다 성문을 닫아걸고 버틴다고 해도 언제쯤 지원이 올지 장담하기 어렵다는 거였다.

영국 함대에 의해 해로가 끊기고 남방 지역 최대 거점인 바타비아가 공격당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지원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동안 양국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온 걸 생각해서 제발 도와주십시오.”

“허어. 이거 참…….”

상대가 체면도 버리고 매달리자 서지호는 짐짓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더 애를 태웠다.

그러다가 힐끗 포름 총관의 얼굴을 보며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주상 전하의 허락을 받지 않고 그쪽의 요구를 들어주려면 본관도 조정에 내세울 명분이 있어야 되지 않겠소.”

뭔가 원하는 것이 있다는 걸 눈치챈 포름 총관은 살짝 긴장을 하면서도 워낙 다급한 상황이었기에 미끼를 덥석 물었다.

“뭘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합자난을 아국에 넘겨주시오.”

“……!”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 포름 총관과 달리 서지호는 아주 태연한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번 기회에 그동안 양국이 마찰을 일으킨 원인인 아군의 주둔 문제를 깔끔히 해결하고 이 정도는 돼야 나중에라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 아니겠소.”

말은 그럴듯했지만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요구였다.

조선군이 세운 요새를 인정해 달라는 것도 속이 쓰릴 지경인데 상당한 곡창을 품고 있는 합자난 지역 전체를 넘겨 달라니 열이 머리 꼭대기까지 뻗쳤다.

다른 때라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겠지만 포름 총관은 그럴 수가 없었다.

탁자 아래로 주먹을 꽉 움켜쥐며 협상을 시도했다.

“너무 과한 요구입니다. 그러지 말고 금화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러자 서지호가 손바닥으로 탁자를 세게 내려치며 화를 냈다.

탕!

“우리가 무슨 용병인 줄 아시오!”

“그게 아니라…….”

“사정이 급한 것 같아서 기껏 도와주려고 했더니, 싫으면 그만두시오!”

서지호가 강하게 나오자 오히려 당황한 건 포름 총관 쪽이었다.

“그러지 마시고 우리 쪽 사정도 좀 이해를 해 주십시오.”

“그래서 조건을 제시했지 않소이까.”

“하지만 이건…….”

포름 총관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서지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소. 그럼 원래 요구한 것에 더해서 아군 군선 두 척을 젤란디아 요새로 보내 함포 지원을 해 주겠소이다.”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배들을 말입니까?”

“그렇소. 각각 서른 문이 넘는 대포를 탑재하고 있으니 큰 도움이 될 것이오.”

“으음.”

새로운 제안에 포름 총관은 솔깃한 반응을 보였다.

모두 합쳐 육십 문에 달하는 대포를 탑재한 군선 두 척이 해안에 바짝 붙어 요새를 지원해 준다면 반란군의 공격을 막는 것이 훨씬 수월했다.

“본관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제안이오. 이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소이다.”

마음이 흔들리던 포름 총관은 서지호의 말에 결정을 내렸다.

“일단 귀측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제 권한 밖의 일이니 젤란디아로 돌아가서 협의를 한 뒤에 다시 대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걸 잘 알기에 서지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오. 그렇지만 아군도 준비를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니 가급적이면 빨리 결정을 내려 줬으면 좋겠소이다.”

“그러지요.”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한 포름 총관은 하룻밤 쉬고 가라는 서지호의 권유를 사양하고 타고 온 쾌속선을 이용해 젤란디아 요새로 돌아갔다.

선착장까지 배웅을 나온 서지호가 점점 멀어지는 쾌속선을 바라보고 서 있을 때 김진석이 옆으로 다가왔다.

“화란에 합자난 지역을 통째로 넘겨 달라고 하셨다던데 맞습니까?”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린 서지호는 피식 웃었다.

“거참, 소문 한번 빠르군.”

“상대가 구석에 몰려 있다고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시다니 정말 배짱이 두둑하십니다.”

“어째 어려움에 처한 이의 옷까지 벗겨 먹는다고 타박을 하는 것 같구먼.”

“그럴 리가요. 냉혹한 국제 관계에서 도움을 주면 대가를 받는 것이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후후후. 그렇지.”

“한데 저들이 요구를 받아들일까요?”

약간은 회의적인 김진석과 달리 서지호는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사방이 다 꽉 막힌 저들 입장에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을걸세. 뭐 거부한다고 해도 합자난 지역을 우리가 장악하는 건 달라지지 않을 게야.”

상대가 제안을 거절하면 상황을 방관하다가 한족 반란군에 의해 네덜란드가 밀려나면 그때 나서서 합자난 지역을 확보할 생각임을 김진석은 바로 눈치챘다.

“아무튼 일이 재미있게 됐군요.”

“맞아.”

포름 총관을 통해 조선 측의 제안을 전해 들은 젤란디아 요새의 수뇌부들은 펄쩍 뛰며 화를 냈다.

어려운 상황을 이용해 상당한 넓이의 땅을 통째로 꿀꺽하려는 것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곽회일이 이끄는 반란군 이만 명이 젤란디아 요새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반란군이 요새를 반포위한 채 화살을 쏘며 사다리를 걸치고 성벽을 넘으려고 하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성벽을 방어막으로 겨우 버티고는 있었지만 병력은 물론이고 무기마저 부족한 상황이라 얼마나 오래 요새를 지킬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측의 제안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며칠 동안 갑론을박 논의를 한 끝에 반란군에 져서 대만 전체를 잃는 것보다 일부인 합자난을 넘기는 게 이익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시 포름 총관이 유일하게 열려 있는 통로인 해로를 이용해서 합자난에 주둔 중인 조선군을 찾아갔다.

완전히 두 손 두 발을 다 든 포름 총관은 상대의 요구를 전부 수용했고 루벨라 총독을 대신해 합자난을 조선에 영구히 할양한다는 협정서에 서명했다.

원하는 걸 얻어 낸 서지호는 쾌속선을 한양으로 띄워 도현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한편 즉시 약속대로 신형 판옥선 두 척을 젤란디아 요새로 급파했다.

동시에 김진석이 지휘하는 육전대 일천을 남진시켜 한족 반란군을 아래위에서 강하게 압박했다.

순풍을 타고 하루 만에 젤란디아 요새에 도착한 조선 군선 두 척은 성벽을 둘러싸고 한창 공성전을 벌이고 있던 반란군에게 뜨거운 불벼락을 안겨 줬다.

수십 문의 대포가 일제히 불을 뿜으며 포탄을 쏴 대자 반란군은 기겁을 하며 요새에서 물러났다.

바다에 떠서 포격을 퍼부어 대는 조선 군선의 출현은 마땅한 대응책이 없던 반란군에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젤란디아 요새에도 포대가 있었지만 상당수 대포가 영국 함대를 상대하기 위해 바타비아로 옮겼고 그나마 남아 있는 것도 화약이 부족해 마음껏 쓸 수 없었다.

이런 네덜란드군의 상황과 달리 조선 군선은 마치 육지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 작정인지 쉬지 않고 포탄을 쏟아부었다.

포격에 수많은 병사들이 사지가 찢기고 목숨을 잃자 반란군의 사기는 대번에 꺾여 버렸다.

여기다가 김진석이 이끄는 육전대가 남하하면서 배후를 위협하자 반란군은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분루를 삼키며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반란군이 물러서고 조선군에게 배 한 척 분량의 탄약을 넘겨받은 젤란디아 요새 수비대는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원의 대가로 합자난 지역을 조선에 영구히 할양해야 됐고 후퇴를 하긴 했지만 한족 반란군이 여전히 만만치 않은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상처뿐인 승리였다.

그 무렵 서지호가 쾌속선에 실어 보낸 장계가 한양에 있는 도현한테 전달됐다.

“호오. 서 도호부사가 제대로 한 건 했군.”

장계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도현이 감탄 어린 표정을 짓자 앞에 앉아 있던 국방대신 임경업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옵니다. 저도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화란한테서 땅을 받아 낼 거라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불만이 없지는 않겠지만 양국의 우호 관계를 최대한 헤치지 않는 선에서 원하는 것 이상을 얻어 내다니, 정말 절묘하구먼.”

원래 조선의 계획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대만에 해상 교역로의 안전을 지킬 거점을 확보하는 거였다.

요새 하나만 해도 충분히 만족했을 텐데 거기에서 더 나가 상당한 넓이의 배후지까지 손에 넣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큰 공을 세웠으니 그에 합당한 상을 내려야지. 상선.”

“하교하시옵소서, 전하.”

“도호부사 서지호를 정삼품 수군절도사로 승차시키고 새로 확보한 대남요새와 그 주변 지역을 관장토록 하겠노라. 상선을 직시 궁내부에 알려 교지를 만들어 보내도록 하라.”

“알겠사옵니다.”

대남大南요새는 조선이 대만에 새로 세우고 있는 거점에 붙인 이름이었다.

이로써 서지호는 도호부사가 된 지 일 년도 안 돼서 다시 한 품계 승차를 하는 영광을 얻었다.

“그리고 국방대신.”

“예.”

“상당한 영토가 확보된 만큼 대남요새를 정식 수영水營으로 편입시키고 전력을 추가로 배치토록 하시오. 이번에 새로 건조된 치우 급 전함도 보내는 것이 좋겠군.”

“치우 급 전함을 말씀이시옵니까?”

“그렇소. 교역을 위해 아국 상선들이 빈번하게 통행하는 곳인 데다 최근 서양 국가들의 싸움이 격화되고 있는 지역이니 그 정도는 돼야 함부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오.”

“예. 그리하겠사옵니다.”

무려 일만 냥에 달하는 거금의 건조비가 들어가는 치우 급 전함을 배치하고 수영으로 대남요새의 급을 격상시키는 것만 봐도 도현이 이곳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임경업이 물러나자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도현은 봉황상단을 맡고 있는 장 총관을 희정당으로 호출했다.

“전하, 봉황상단 장태범 총관께서 오셨사옵니다.”

“들라 하라.”

허락이 떨어지는 것과 함께 문이 좌우로 열리더니 관복을 갖춰 입은 장 총관이 살짝 허리를 굽힌 자세로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와 예를 갖췄다.

“신, 장태범 전하의 부르심을 받고 왔사옵니다.”

“바쁜데 오라고 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

“아니옵니다.”

“일단 자리에 앉게.”

“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장 총관을 보며 도현이 입을 열었다.

“경을 오라고 한 건 다른 것이 아니라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네.”

“하교하시옵소서.”

“지난번에 화란 상인을 통해 구한 사탕수수를 제주에서 재배해 보라고 한 건 어찌 되고 있나?”

임금인 도현의 관심이 각별해서 그가 직접 챙기고 있는 사업 중 하나였기에 장 총관은 머뭇거림 없이 바로 대답했다.

“크고 작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작년 한 해 동안 재배법을 어느 정도 숙달해 올해부터는 면적을 두 배로 늘릴 계획이옵니다.”

“그렇군.”

작게 머리를 끄덕인 도현은 다시 질문을 했다.

“수확량은 얼마나 되나?”

“한 마지기에 설탕 두세 가마 정도를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지역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었지만 평균적으로 밭 한 마지기는 이백 평을 뜻했다.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군.”

“예. 설탕은 아주 귀하게 팔리기 때문에 같은 면적이라면 쌀을 키우는 것보다 이윤이 더 좋사옵니다.”

어느새 이야기를 하는 장 총관의 표정이 살짝 들떠 있었다.

사실 처음 사탕수수 재배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저 도현이 좋아하는 걸 따로 조금 키워 진상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수확을 하고 몇 가지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 설탕을 보자 장 총관은 장사꾼답게 단번에 돈이 되는 물건임을 알아차렸다.

그냥 돈이 되는 게 아니라 아주 떼돈을 벌어 줄 상품이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단맛을 볼 수 있는 건 꿀밖에 없었다.

당연히 가격이 비싸질 수밖에 없었고 양반과 돈 많은 중인들만이 먹을 수 있고 일반 백성은 맛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설탕은 꿀보다 손쉽게 그리고 대량으로 생산해 낼 수 있으니 시장에 내놓으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돈을 갈퀴로 쓸어 담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물론 아무리 돈벌이가 좋다고 해도 진상품으로 올릴 물건을 함부로 시장에 내다 파는 건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일이었다.

특히나 장태범 총관 자신이 하늘처럼 믿고 떠받드는 도현에게 바쳐지는 물건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걸 미리 예상하기라도 한 듯 처음 사탕수수 재배를 맡겼을 때부터 도현이 봉황상단의 주력 상품으로 만들어 보라고 했기 때문에 그는 거리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도현의 명을 받들어 대량생산해 낸 설탕으로 왕실 곳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처음 해 보는 재배를 성공적으로 해내다니 대단하군. 하지만 원래 사탕수수가 나는 곳보다 수확량이 적은 건 아쉬워.”

상념 속을 헤매고 있던 장 총관은 조금 미련이 남는 것 같은 도현의 말을 듣고 갑작스레 깨어났다.

“그렇긴 하옵니다만, 조선에서 가장 기후가 온난하고 따뜻한 곳이 제주도이니 어쩔 수 없지요.”

“흠.”

도현이 뭔가를 생각하듯 검지로 보료 위를 톡톡 두드렸다.

“이번에 대만 북쪽에 있는 합자난 지역이 아국 영토로 편입되었네.”

“그런 일이 있었사옵니까?”

미처 그 소식을 듣지 못한 장 총관이 반문했다.

“대만이라면 제주도보다 훨씬 남쪽에 있어 따뜻하고 겨울에 눈도 오지 않지. 그곳에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을 만들어 보는 게 어떠한가?”

그러면서 도현은 슬쩍 장 총관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사시사철 재배를 할 수 있다는 이점 덕분에 지금 제주도에서 걷는 것보다 더 많은 수확량을 기대할 수 있을 걸세. 거기에 농장을 만들 땅도 충분히 여유가 있으니 이게 바로 금상첨화 아니겠나.”

“묘안이십니다, 전하.”

도현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동시에 타고난 장사꾼인 장 총관의 눈이 번뜩 빛났다.

대만까지 물자와 인력을 이동시키는 비용과 사탕수수 판매로 인한 이득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따져 봤을 때 도현의 제안이 훨씬 더 구미가 당기는 것임은 분명했다.

단번에 돈 냄새를 맡은 장 총관의 얼굴이 활기를 띠는 것을 보고, 도현은 흐뭇하게 웃었다.

“담당하는 관리에게 미리 말을 해 놓을 테니 장 총관이 알아서 계획을 세워 진행해 보게.”

“알겠사옵니다.”

의욕에 넘치는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인 장 총관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봉황상단 일에 대해 도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고받은 대화 끝에 장 총관이 마침내 자리를 물러나자 도현은 그제야 편안한 자세를 취할 수가 있었다.

앞으로 설탕이 벌어들일 막대한 이득을 생각하니 절로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돈이 없다면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지.”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튼튼한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하므로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물건이었다.

괜히 다다익선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라니까.

물론 거기엔 금괴나 보석 같은 현물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도현은 잠시 금은보화로 가득 찬 곳간을 노니는 기분 좋은 상상에 빠져들었다.

며칠 뒤 장 총관은 승차 교지를 가져가는 선전관 일행과 함께 봉황상단 직원들을 대남요새로 보내 합자난 지역이 사탕수수 농장을 조성하는 데 적합한지 면밀한 조사에 들어갔다.

훗날 생길 이야기였지만 일 년 내내 기온이 따뜻하고 강수량도 풍부한 대만은 사탕수수 재배에 최고의 조건이었고, 봉황상단은 합자난에 엄청난 넓이의 농장을 조성해 운영했다.

여기서 생산되는 설탕은 조선은 물론이고 왜와 명나라에까지 수출돼 도현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어 줬다.

한편 조선군의 도움으로 젤란디아 요새에 있던 네덜란드군은 겨우 한숨을 돌렸지만 여전히 불안한 상태를 이어 갔다.

협약에 따라 신형 판옥선 두 척은 여전히 요새 앞바다에 머물고 있었지만 후방을 압박하던 육전대 병력은 반란군이 후퇴를 하자마자 곧바로 남하를 멈추고는 견제만 했다.

그러자 젤란디아 요새 공격에 실패하면서 흔들리던 한족 반란군은 대만 중부 지역을 장악한 채 전열을 추스를 시간을 얻었다.

당연히 네덜란드 측이 크게 반발하며 항의를 했지만 서지호는 조선군 단독으로 한족 반란군을 상대하기에는 병력 차이가 크고 무엇보다 협정에 그런 내용이 없다는 걸 들어 단칼에 거부했다.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화가 날 만도 했지만 실제로 협정서에는 젤란디아 요새의 함락을 막기 위해 병력을 지원해 준다는 것만 명시되어 있지, 조선이 반란군을 진압한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대만은 젤란디아 요새가 위치한 남부는 네덜란드가 그리고 중부는 반란군이 마지막으로 합자난을 포함한 북부는 조선군이 장악하며 삼등분되어 버렸다.

비록 삼분의 일로 세력이 줄어들었지만 어찌 됐건 거점을 유지하고 있는 대만과 달리 영국군에 포위된 바타비아 요새는 시간이 갈수록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초반에는 주변 거점들을 희생시켜 끌어모은 탄약으로 그럭저럭 버텼지만, 계속되는 영국 함대의 파상공세에 방어선이 조금씩 허물어져 갔다.

특히 육지로 상륙해 요새를 둘러싼 뒤 공성전을 펼치는 왜국 용병대의 공격에 큰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무장이 빈약한 왜국 용병대였지만 영국군 포병대의 화력 지원을 받으며 달려들 때마다 요새 수비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가뜩이나 화력과 병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앞뒤로 협공을 펼치며 두들겨 대는 영국군의 공격은 네덜란드군을 더욱 힘들게 했다.

아마 젤란디아 요새의 높은 성벽과 주위를 둘러싼 깊고 넓은 해자가 아니었다면 버텨 내기 어려웠을 거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다면 언젠가는 본국에서 지원군이 올 거라는 희망이었다.

위태위태하면서도 네덜란드군이 저력을 보여 주며 견디자 전투는 누가 더 오래 버티느냐 하는 끈기 싸움으로 변해 버렸다.

이런 가운데 영국 측과 은밀히 서신을 주고받던 도현은 한양에서 정식으로 교역 협정을 체결했다.

조선이 서양 국가와 맺은 두 번째 외교 협정이었는데 별도의 상관을 두지 않고 제주도 개항장을 이용한다는 걸 빼고는 네덜란드와 맺은 내용과 거의 비슷했다.

아니, 오히려 영국보다는 조선 측에 많이 유리한 협정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데 이미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해상 교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네덜란드와 달리 영국은 이제 막 대양에 진출한 상태였기에 입장 자체가 달랐다.

그렇다고 영국에 불리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이번 협정을 계기로 영국은 조선을 통해서 황금 알을 낳는 거위나 마찬가지인 동방 무역에 끼어들 수 있었으니 서로에게 좋은 일이었다.

외무대신 박노에게서 협정서를 받아 든 영국 측 대표가 잉크를 적신 깃털 펜으로 신중하게 서명했다.

흐르는 듯한 필기체로 이름을 적고, 마침표를 찍는 순간 양측에서 미소와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앞으로도 귀국과 함께 많은 발전을 이룰 수 있길 빌겠소.”

“물론이지요. 우리로서도 기쁜 일입니다.”

박노가 건넨 말에 영국 대표가 호의를 띤 미소로 대답했다.

모두가 만족해하는 분위기 속에 이루어지는 협정도 드문 일이라, 마지막으로 나누는 악수 역시 힘이 넘쳤다.

그리고 이날 이후로 제주도 상관을 중심으로 영국과의 교역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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