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동하는 조선
위이이잉~!
쿵! 쿵!
쉬이이익.
하얀 증기를 내뿜으며 집채만 한 쇳덩이가 돌아가는 모습에 도현이 감탄성을 터트렸다.
“이게 새로 만든 증기기관인가?”
옆에 서 있는 병기장 박호가 자부심 가득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기존에 있던 것에 비해 효율은 삼 할이 더 좋아졌고 크기는 절반으로 줄였습니다.”
증기기관을 좀 더 좋게 개선시키기 위해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을 했을지 아는 도현은, 박호와 한쪽에 도열해 있는 병기창 소속 장인들을 보며 치하를 했다.
“애들 썼어.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이렇게 해내다니 정말 대단해. 다들 안 그런가?”
그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묻자 함께 온 대신들이 얼른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맞사옵니다, 전하.”
“신들도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사옵니다.”
“그럴 게야. 상공대신.”
“예, 전하.”
그의 부름에 상공대신 유형원이 대신들 사이에 있다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증기기관을 개선하는 데 공을 세운 장인들의 명단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작성해 궁내부로 올리도록 하게. 짐이 상급을 내릴 것이야.”
“알겠사옵니다.”
도현의 말을 들은 장인들은 감격한 얼굴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두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하하. 다 그대들이 열심히 노력해 준 결과이네.”
장인들을 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인 도현은 개량 증기기관을 좀 더 살펴보고는 병기창 내에 있는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증기기관의 성능이 좋아진 만큼 더욱 많은 곳에서 사용이 가능하겠군.”
찻잔을 내려놓으며 도현이 말하자 상공대신 유형원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제물포 제철소는 물론이고 각 지역의 병기 공장에 새로 만든 개량형 증기기관을 올해 안에 추가로 열 기 이상 설치할 계획이옵니다. 그리고 봉황상단을 비롯한 민간 상단에서도 증기기관을 쓸 수 없냐는 문의가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민간 상단에서?”
“예.”
조금 더 시간이 지난다면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용도가 제한되고 가격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 증기기관이었다.
그런데 이런 걸 민간 상단에서 필요로 한다고 하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도현의 생각을 눈치챈 유형원은 얼른 보충 설명을 했다.
“봉황상단을 본떠서 다른 민간 상단들도 대량생산이 가능한 공장을 하나둘 짓다 보니 수요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특히 각종 철제품이나 대형 광산 그리고 얼마 전 발명된 방적기紡績機가 보급되면서 동력을 전달하는 증기기관에 대한 수요가 더욱 커지고 있사옵니다.”
“호오. 그렇군.”
그제야 도현은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적기는 말 그대로 실을 뽑아내는 기계였는데 예전부터 물레를 사람이 손으로 돌려서 하던 일이었다.
그러던 것을 병기창에서 근무하던 장인 중 한 명이 증기기관을 이용하면 수작업으로 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고 대량으로 실을 만들어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연구를 거듭한 끝에 발명해 냈다.
몇 개의 원통을 장착해 실을 늘리는 아주 초기 단계의 기술이었지만, 도현은 시제품을 보고 아주 기뻐하고는 금화 일천 냥이라는 거금을 주고 기계에 대한 권리를 왕실에서 사들였다.
특허 개념이 아직 희박하고 발명자가 국가 기관인 병기창 소속이었기에 굳이 이러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아무리 전제주의 사회라고 해도 개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만들어 낸 걸 대가도 없이 가져가 버린다면 장인들의 의욕이 저하된다는 생각에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보상을 했다.
그러고는 발명자한테 높지는 않지만 작은 벼슬과 함께 십여 명의 장인과 실학자를 붙여 줘서 연구를 계속하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도현의 행동은 장인들에게 강한 동기부여가 됐다.
얼마 안 있어 처음 만들어 낸 제품에 방추紡錘가 부착되는 등 개량이 거듭됐고 어느새 방적기는 공장에서 충분히 쓸 수 있을 만큼 실용화가 됐다.
그러자 제일 먼저 제물포에 있는 군수공장에 설치돼 실을 뽑도록 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수작업으로 할 때보다 훨씬 많은 물량을 단시간에 생산해 냈다.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 상단주들이 이걸 그냥 넘길 리 없었고 바로 상공부를 통해 민간에도 넘겨 달라고 요청했다.
산업화를 권장하던 도현은 당연히 이걸 받아들였고 수백 대의 방적기를 만들어 판매하면서 다시 상당한 액수의 금화를 벌어들였다.
그렇게 판매된 방적기들은 질 좋고 값싼 면사를 대량으로 뽑아내며 조선의 산업화를 가속화시키는 동시에 각 상단들이 많은 돈을 벌게 해 줬다.
한번 재미를 본 상단들은 면직물 생산뿐만 아니라 철제품과 광산 등 여러 분야로 증기기관의 사용을 넓혀 갔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산업혁명의 시대가 백여 년 가까이 빨리 영국이 아닌 조선에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거였다.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일인데 머뭇거릴 이유가 없지. 필요하다는 곳이 있으면 몇 대가 됐건 판매하도록 해. 대신 증기기관과 관련된 기술이 타국으로 유출되는 건 철저히 막아야 될 것이야.”
마지막 말은 유형원이 아니라 동석해 있던 이완 단장을 쳐다보면서 했다.
시선을 받은 이완 단장은 살짝 머리를 숙이며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철저히 단속하고 있으니 아무 염려 마시옵소서.”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다시 유형원을 보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증기기관의 사용이 늘어나면 자연히 연료인 석탄의 소비가 커질 텐데 수급에는 이상이 없겠나?”
“제물포에 대규모 석탄 하역장이 있고 새로운 공장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는 마포 인근에도 올해 안에 보관소를 조성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봉황상단에서 운영하는 석탄 광산들도 생산 여력이 충분하옵니다.”
“그렇다면 안심이군.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증기기관의 사용이 폭증할 테니까 그에 맞게 석탄 공급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도록 신경을 써야 될 거야.”
“명심하겠사옵니다.”
그 뒤로도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어려운 점을 직접 들어 준 도현은 대궐 수라간에서 만든 음식과 술을 풍성하게 내려 병기창 장인들의 노고를 풀어 줬다.
얼마 뒤 도현의 지시로 개량된 증기기관이 각 군수공장과 민간에 공급되면서 조선의 산업화는 더욱 속도가 붙었다.
더불어서 증기기관을 이용한 여러 가지 기계들이 속속 발명되며 생산력이 점점 커졌고 백성들의 생활 또한 윤택해졌다.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민간 소비도 커졌지만 가장 큰 수혜를 받게 된 곳은 다름이 아니라 군대였다.
증기기관을 이용한 기계들이 만들어져 군수공장에 하나둘 설치되면서 예전에는 장인 여러 명이 달라붙어 꼬박 하루를 작업해야 될 일도 불과 한두 시진 만에 끝이 났다.
말 그대로 대량생산과 분업화 체계가 갖춰진 거였다. 덕분에 조선군은 새로 개발한 무기들을 짧은 시간에 대량으로 만들어 내서 일선 부대에 배치할 수 있었다.
아직 쌀쌀한 바람이 불고 처마 밑에 소복이 눈이 쌓인 겨울이었지만 남산 병기창 내에 위치한 대포 공장 안은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흔들리면 안 되니까. 단단히 고정시켜!”
“예.”
작업반장의 말에 단단한 체격의 장인 네 명이 쇠사슬로 육중한 무게의 대포를 작업대에 꽁꽁 묶었다.
“다 됐습니다.”
“어이, 시작해.”
눈으로 고정된 부분을 확인한 작업반장이 신호를 주자 커다란 기계 앞에 서 있던 장인이 툭 튀어나와 있는 손잡이를 밑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포신 안에 끼여 있던 드릴이 증기기관과 연결돼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강선을 파냈다.
끼끼끽!
“이제 뒤로 빼!”
우우웅.
기계를 끄고 드릴을 천천히 뒤로 빼자 작업반장은 포신 안에 머리를 넣어 강선이 제대로 파였는지 직접 눈으로 꼼꼼하게 확인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그리고 깔끔하게 파인 강선에 몸을 바로 한 작업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음 거 가져와!”
“네.”
“으쌰!”
대답과 함께 고정되어 있던 쇠사슬을 푼 장인들은 공장 천장에 달리 도르래를 이용해서 완성된 포신을 다음 공정으로 넘겨줬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새 포신을 가져와 아까 했던 작업을 반복했다.
윙!
드릴 소리를 들으며 포신을 작업반장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때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장인 하나가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뭐가?”
“저 기계들 말입니다. 예전에는 두세 명이 달라붙어서 종일 작업을 해도 대포 한 문을 완성하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서른 문도 너끈하지 않습니까.”
“난 또 뭐라고.”
심드렁하게 말은 하지만 작업반장도 감탄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증기기관 덕분에 일은 더 쉬워지면서도 작업 효율은 몇 배나 높아졌으니 놀랍지 않으면 그게 이상했다.
“좀 편해졌기는 했지만 결국 마무리는 우리가 해야 되니까 실수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 강선 하나 잘못 파면 애써 만든 대포를 그대로 다시 용광로에 집어넣어 녹여야 된다는 거 알지!”
“예.”
작업반장의 말에 장인들은 잡담을 멈추고 다시금 작업에 집중했다.
그렇게 남산의 대포 제작 공장은 매일 각종 구경의 대포를 마흔 문씩 새로 만들어 내 일선 부대로 보냈다.
하루에 두세 문을 겨우 만들어 내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생산력이었는데, 다 증기기관과 그걸 이용한 여러 공작기계들이 설치되면서 이루어진 성과였다.
대포뿐만 아니라 신형 머스킷 소총과 포탄도 이런 식으로 대량생산이 이루어지면서 조선군은 하루가 다르게 더욱 강력한 군대로 변모해 갔다.
산업화와 더불어 도현이 중점적으로 힘을 쏟는 것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인구 증가였다.
강대국의 요건 중 하나가 바로 인구하는 걸 누구보다 잘 알던 도현은 등극 초기부터 여기에 신경을 많이 썼다.
특히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면서 화수분처럼 끊임없이 병력을 만들어 내는 상대와 달리 번번이 병사 수에 발목이 잡혀 마음껏 전술을 펼치지 못했던 그는 더욱 인구 증가에 관심을 가졌다.
단순히 군사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인구가 많으면 경제에도 큰 이득이었다.
아무리 대외 교역을 통해 물건을 내다 판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기에 탄탄한 내수는 경제 발전에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 이유로 거란족을 백성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최근 점령한 요서 지역에 거주하는 한족들도 만리장성 너머로 쫓아내지 않고 선별적으로 품어 조선화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여기에 국가 재정이 풍성해지며 여유가 생기자 도현은 출산을 적극 권장하며 아이를 셋 이상 낳은 가정에는 여러 가지 혜택을 줬다.
혜택 중에 대표적인 것이 아이를 가지면 무조건 임신과 동시에 각 지역의 혜민서惠民署에서 의원과 의녀 들이 정기적으로 임산부를 진료해 주며 출산을 하면 쌀 두 섬과 미역 그리고 몸을 보양하는 약제들을 나라에서 지어 줬다.
그리고 넷째 이상을 낳으면 나라에서 두 달마다 쌀을 한 섬씩, 아이가 다섯 살이 될 때까지 공짜로 지급했다.
점차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은 걸음마 단계여서 자식이 곧 일손인 상황이라 많은 아이를 낳던 백성들은 이런 혜택들이 주어지자 보통 한 집에 예닐곱 명씩 자식들을 가지게 됐다.
도현은 단순히 아이를 많이 낳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때까지만 해도 온갖 질병으로 많은 갓난아이들이 안타깝게 죽었던 걸 상기하고는 의료체계 정비에도 힘을 쏟았다.
특히 마마媽媽 또는 두창痘瘡, 포창疱瘡으로 불리며 유아는 물론이고 어른들도 걸리면 목숨이 위험해지는 천연두 예방을 위해 세계 최초로 종두법을 실시했다.
종두법이란 소의 두창을 살짝 사람의 피부에 접종해서 약하게 앓게 만든 다음에 천연두에 대한 면역력을 얻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원래 영국의 외과의사 E. 제너가 1796년에 알아내 보급하게 되는 거였지만 도현은 그것보다 백 년 가까이 일찍 조선에서 보급을 했다.
이것뿐만 아니라 다른 각종 질병에 대해서도 예방과 치료를 실시해 백성들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줬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도현이 원하는 대로 인구 또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성과를 얻었다.
물론 처음 종두법을 실시하자 반발이 적지 않았다.
우두를 맞으면 사람이 소로 변한다는 헛소문이 돌 정도였는데 그런 이유로 백성들이 접종을 기피하자 도현은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어의에게 접종을 받았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중전과 자식들한테도 우선 우두를 맞히고 종친들 또한 무조건 접종을 받게 하자 반발은 자연스럽게 사그라들었다.
조선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인 도현이 먼저 우두를 맞으며 솔선수범을 보였는데 계속 거부하는 건 대역죄였기 때문이었다.
“여깁니다요.”
혜민서 관리로 봉사奉事 벼슬을 가지고 있는 젊은 의원은 앞에 보이는 초가집을 쳐다보고는 관아 아전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이제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꼬마 하나가 쭈그리고 앉아 작대기로 바닥에 낙서를 하고 있다가 의원 일행을 보며 일어섰다.
“누구세요?”
아전이 집을 둘러보며 말했다.
“부모님 어디 가셨냐?”
“안에 계세요.”
바깥에서 주고받는 목소리가 안에까지 들리기라도 한 듯, 아이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바로 방문을 열고 사내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게 누구요?”
나이는 이제 한 서른 후반에서 사십 대 초 정도 됐을까.
다 해진 소매 끝을 몇 번이나 기운 자국이 있긴 하나 아내가 부지런한 덕인지 그럭저럭 깔끔해 보이는 옷차림을 한 보통 체구의 평범한 사내였다.
“이보게, 덕구.”
“어, 아전 나리, 오셨습니까.”
이리저리 오가며 친근하게 인사를 주고받을 정도로 안면이 있는지라 사내가 금방 일어서서 아전을 맞았다.
“아침부터 미안하구먼. 밥은 먹었나?”
“예. 한데 어쩐 일이십니까?”
“전에 이야기는 한번 했지? 오늘은 자네 집 식구들이 종두 접종을 받을 차례라네.”
“아…….”
그러자 덕구라 불린 사내의 눈이 아전 뒤에 서 있는 의원과 의녀를 향해 향했다.
행여나 실례가 될까 봐 금방 시선을 돌리긴 했지만 반가워하는 기색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축인 소한테서 난 걸 사람 몸에 집어넣는다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덕구는 쭈뼛거리는 몸짓으로 아전에게 슬쩍 속닥였다.
“진짜 괜찮은 겁니까?”
“예끼, 이 사람아. 아무렴 나라님은 물론이고 대궐에 계신 왕자 공주님께서도 다 맞으셨다는데 무슨 소릴 하나.”
아전의 꾸중에 사내가 풀이 죽어 물러났다.
그 모습이 안타까웠던지, 뒤에서 지켜보고만 있던 의원이 웃으면서 그를 달랬다.
“맞아도 아무 이상 없으니 걱정일랑 하지 마시오.”
의원까지 덩달아 두둔을 하고 나서는 데야 더 이상 이길 재간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덕구는 방문을 열고 사람들을 안으로 들였다.
“어쨌든 밖에 서 있는 것도 뭐하니 이리 들어오시지요. 얘야, 너도 얼른 손 씻고 와라.”
아버지의 말에 계속 마당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던 아이가 고개를 냉큼 끄덕였다.
“네에.”
얼른 우물가로 달려가 찬물에 손을 참방거리며 대충 적시곤 달려오자, 의원 일행까지 합해서 총 여섯 명이 한방에 모여 앉게 되었다.
“일단 몸부터 녹이시지요.”
“고맙네.”
덕구가 숯이 든 화로를 의원 일행 쪽으로 밀어 양보하자, 의원이 고맙다며 답하곤 들고 온 보따리를 바닥에 늘어놓았다.
“어디 보자. 부인께서 배가 많이 부르셨구먼. 산달이 언제인가?”
“산파가 다음 달 중순이면 나올 거라 했습니다.”
불룩 솟아오른 배를 보이는 게 부끄러운 것처럼 부인이 수줍어하며 말했다.
“그런가? 맥 좀 한번 짚어 보세.”
그러고선 부인의 손목을 잡고 눈을 지그시 감은 상태로 몇 번 손가락을 대더니 이내 밝은 표정을 지었다.
“몸에는 별 이상이 없는 것 같군. 그래도 애를 낳을 때까진 조심하셔야 하네.”
의원은 그리 당부하고선 고개를 돌려 남편 쪽을 바라보았다.
“부인은 산달이 가까웠으니 이번엔 안 되고 다음에 하세.”
“예.”
부인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벽 쪽으로 물러앉자, 의원은 남편을 손짓해 불러 가까이 오게 했다.
“조금 따끔할 걸세.”
“많이 아픈가요?”
“하하, 그냥 모기한테 물린다고 생각하게나.”
의원은 옆에 앉은 의녀에게서 잘게 자른 깨끗한 무명천을 건네받아 소독약에 적시고는 팔뚝 위쪽에 살살 문질렀다.
시원한 느낌에 사내가 잠시 긴장을 푼 순간, 무언가 뾰족한 것이 살갗을 파고드는 느낌이 전해졌다.
“으.”
이상한 감촉에 미간을 찡그리고 있던 그는 금방 의원이 손을 떼고 다시 새로운 무명천으로 둘둘 감아 주는 것을 보고 의외라는 듯 말했다.
“끝났습니까?”
“그러네. 별것 아니지? 그러니까 너도 나중에 울지 말고 씩씩하게 있어야 한다.”
의원은 아빠 옆에 딱 붙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보고 있던 아이를 향해 쾌활하게 덧붙였다.
“너도 얼른 맞자꾸나. 오늘 이 집뿐만 아니라 앞집 뒷집 가야 할 곳이 많으니 나도 바쁜 몸이란다.”
어린아이를 대할 때면 으레 그러하듯 의원은 너스레를 떨면서 아이를 붙잡아 앉혔다.
아버지와 똑같이 차가운 천으로 팔뚝을 닦고, 침을 놓는 솜씨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기 짝이 없었다.
“흐앙. 으아앙!”
하지만 지레 겁을 먹은 아이가 불현듯 울음을 터트리자 덕구는 난처한 얼굴로 허둥거렸다.
“어허, 이 녀석이 왜 이래? 뚝!”
“아파, 아파요오~!”
엄마를 찾으며 서럽게 울어 대는데, 덕구가 암만 으름장을 놓아도 울음소리는 더 커져만 갈 뿐 전혀 잦아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의녀가 소맷자락에서 손가락만 한 엿을 꺼내 들었다.
“자아, 착하지.”
말한테 당근을 주는 것처럼 아이의 눈앞에서 엿을 흔들어 대는 품세가 제법 익숙했다.
마치 이 정도쯤은 항상 있는 일이라는 것처럼 능숙하게 상냥한 목소리로 살살 달래니, 어느새 아이의 울음은 뚝 그쳐 있었고 눈동자는 엿에 고정되어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때를 노려 의원이 재빨리 침을 놓았고, 이를 눈치챈 아이가 인상을 일그러뜨리자마자 의녀가 신속하게 엿을 물려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대, 대단하십니다.”
두 사람의 손발이 척척 맞는 모습에 덕구는 무슨 진기명기라도 본 듯 넋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뭘, 아무것도 아니라네.”
“침 때문에 우는 아이들을 달래다 보니 생긴 요령이지요.”
존재감 없이 평범하게만 보였던 의녀가 새삼 위대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럼 난 이만 가 보겠네. 부인, 몸조리 잘하십시오.”
“제가 저 앞까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봤자 기껏해야 한두 걸음밖에 안 되는 앞마당까지였지만, 덕구는 허리를 숙이며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의원 나리. 아전 어른.”
“어여 들어가 보게.”
멀리 가지도 않으니 배웅해 줄 필요 없다며 아전이 손을 내저었다.
그 말을 듣고 덕구가 지켜보니, 과연 몇 걸음 걷지도 않고 아전과 의원 일행이 바로 근처 이웃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 여기저기 돌 데가 많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어쩐지 침놓은 자리가 근질근질한 느낌에 무의식중에 긁으려던 덕구는 며칠 동안 물 닿게 하지 말고 손대지도 말라던 의원의 당부를 떠올리고는 쩝 소리와 함께 뒤로 돌아 집으로 들어갔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동장군의 위세가 한풀 꺾이며 남쪽에서 살랑살랑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봄이 됐다.
오늘도 어김없이 도현은 가볍게 아침 수련을 끝낸 뒤 희정당에서 업무를 봤는데 얼마 있지 않아 바깥에서 대기하던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국방대신과 주작단 단장께서 오셨사옵니다.”
“들라 하라.”
“예.”
미닫이문이 열리고 약간 굳은 얼굴의 임경업과 이완이 나란히 안으로 들어와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며 예를 갖췄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오?”
도현의 물음에 연장자이자 품계도 높은 임경업이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급히 아뢸 일이 있어서 왔사옵니다.”
“이거 두 사람이 정색하며 앉아 있으니 괜히 겁부터 나는군. 그래, 뭔지 말해 보시오.”
“최근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구라파歐羅巴(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영길리가 화란을 이겼다고 하옵니다.”
“그게 사실인가?”
회귀 전 기억 덕분에 이렇게 될 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그는 담담한 얼굴로 이완 단장을 보며 확인했다.
“예. 마카오에 그런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다 하옵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은밀히 알아본 결과 틀림없는 사실이었습니다.”
“바타비아에 있는 네덜란드군이 더욱 궁지에 몰리겠군.”
“그러게 말이옵니다. 가뜩이나 포위를 당한 상태로 몇 달째 어렵게 농성 중인데 이런 사실이 전해지면 사기가 크게 떨어질 것이옵니다.”
“지금까지는 잘 버텨 왔지만 이렇게 되면 조만간 함락을 당하거나 스스로 백기를 걸고 항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완의 이야기에 잠시 생각을 하던 도현은 머리를 좌우로 내저으며 다른 의견을 보였다.
“아니, 짐의 생각은 다르네.”
“예?”
두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몸을 바로 한 도현은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구라파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며 기세를 올리고 있지만 이번 한 번의 전쟁으로 영길리가 화란을 완전히 꺾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게야. 지금까지 그렇게 주목받지 못하던 나라로 좁은 섬 안에서만 갇혀 있던 영길리와 달리 화란은 대양을 누비고 다니며 그동안 해상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아 놓은 저력이 있으니까 말이야.”
“하면 전하께서는 아직 화란에 승산이 있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임경업의 물음에 도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좀 더 두고 봐야 되겠지만 해상 교역의 패권을 영길리가 틀어쥐었다고는 할 수 없을 걸세. 굳이 따진다면 이제 서로 동등한 입장이 됐다고 할까. 화란도 대패를 당했다고는 해도 자신들의 돈줄이 달린 일인데 이대로 호락호락 물러서지는 않을 거야.”
“듣고 보니 그렇사옵니다.”
도현의 말대로 전력의 열세를 이겨 내고 극적인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아직 전쟁을 지속시킬 여력이 남아 있는 네덜란드와 달리 영국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아마 양국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면 바타비아에 대한 포위도 조만간 풀릴 거야. 물론 그때까지 함락되지 않고 버텨야 되겠지만 말이야.”
“그렇군요.”
실제로 얼마 뒤 양국은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체결해 신대륙에 위치한 식민지인 뉴네덜란드New Netherlands를 네덜란드가 영국에 양도하는 걸로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면 한동안 두 나라의 다툼이 계속되겠사옵니다.”
“맞아. 이런 때일수록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줄다리기를 잘해 아국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필요해.”
“예.”
방금 들은 말을 곱씹으며 머릿속으로 남방 문제를 어찌 대처해야 될지 고민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도현은 입가에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화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대남요새에 전력을 증강하는 건 다 마무리됐나?”
“네. 하교하신 대로 치우 급 전함 한 척을 포함해서 세 척의 군선을 추가로 배치했고 육전대도 일천 명을 더 증강했사옵니다.”
“육전대에 거란 출신 기병 오백 명이 포함됐다고?”
“아무래도 한족 반란군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서는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이 필요할 것 같아 신이 중원 병력에 넣었사옵니다.”
“잘했어. 대남요새는 아국이 제주도 이남의 해상 교역로를 장악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거점이니 각별히 신경을 쓰도록 하게.”
“명심하겠사옵니다.”
“참. 포르투갈이 젤란디아 요새를 노린다고 하더니 어째 잠잠하군.”
시선을 받은 이완 단장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런 움직임이 있었사옵니다만 한족 반란이 일어나고 우리가 섬 북부를 장악한 걸 보고 싸움을 벌여 봤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지금은 출정을 포기한 것으로 아옵니다.”
“마카오 총독이 그래도 제법 상황 판단을 할 줄 아는 것 같군.”
“젤란디아 요새에서 자꾸 한족 반란군 토벌을 도와 달라고 요청한다는데 이건 어떻게 처리할까요?”
도현은 심드렁한 얼굴로 임경업을 봤다.
“아무런 이득도 없는 일에 귀한 병사들을 희생시킬 수 없으니 그냥 무시해 버리게.”
“예.”
병사들을 아끼는 마음도 있었지만 도현은 궁극적으로 대만을 지금처럼 삼등분시켜서 네덜란드의 시선을 한족 반란군에게 돌리려는 속셈이었다.
그 뒤로도 남방 상황에 대해 얼마간 더 이야기를 나눈 뒤 두 사람은 희정당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채 보름이 안 돼서 도현이 말한 대로 영국과 네덜란드가 강화조약을 체결하면서 바타비아 요새를 공격하던 영국 함대는 포위를 풀고 빈탄 섬으로 철수했다.
동시에 그동안 꽉 닫혀 있던 뱃길도 열렸는데 대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배들은 말라카 해협으로 진입할 때마다 영국에 일정액의 세금을 내기로 했다.
네덜란드로서는 비용 측면은 물론이고 자존심에 큰 상처가 생겼지만 남방 함대가 괴멸되고 본국의 사정이 어려운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영국도 향신료 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더 이상 전쟁을 이끌어 갈 능력이 안 됐기에 이쯤에서 만족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양쪽이 다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기에 언제 다시 전쟁의 불길이 되살아날지 몰랐다.
전쟁이 끝나자 다시 해상 교역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는데 그동안 해로가 막혀 제대로 장사를 하지 못했던 상인들은 그걸 다 벌충이라도 하려는 듯이 바쁘게 뛰어다녔다.
개점휴업 상태였던 완도 상관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배와 상인들로 다시금 북적였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네덜란드의 독점이 아니라 영국이 조선 물건 구매에 끼어드는 바람에 상품값이 크게 올랐다.
“홍삼 한 근에 금화 열 냥이라고 했소?”
수염을 길게 기른 네덜란드 상인이 놀란 얼굴로 되묻자 송상에서 나온 중년인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아니,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한 근에 금화 여섯 냥이면 됐는데 갑자기 넉 냥이나 더 내놓으라니 너무한 거 아니오!”
역관을 통해 네덜란드 상인의 말을 들은 중년인은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싫으면 마시오. 우린 당신이 아니라도 제주 상관에 가져가서 영길리 상인들과 거래를 하면 되오. 그쪽은 열한 냥에도 없어서 못 사는 판이오.”
“끄으응.”
제주 상관에 와 있는 영국 상인들을 거론하며 배짱을 부리자 네덜란드 상인은 앓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구겼다.
그냥 가격을 올리기 위해 튕기는 것이 아닌 게 실제로 많은 영국 상인들이 유럽에서 인기가 많은 조선 상품들을 구입하기 위해 잔뜩 몰려와 있었다.
물건은 한정이 되어 있는데 수요가 크게 늘어나며 경쟁까지 붙자 경제 논리에 따라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이런 현상은 홍삼뿐만 아니라 도자기와 연필, 각종 인삼 제품 그리고 자개 가구까지 조선에서 만들어지는 특산품 전반에 적용됐다.
이렇게 되자 그동안 유럽으로 가져가서 팔아 보통 세네 배씩 많은 시세차익을 올리던 네덜란드 상인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익이 대폭 줄어드는 건 물론이고 물량을 두고 영국 상인과 경쟁해야 되는 골치 아픈 상황에 놓인 것이다.
“더 할 이야기가 없을 것 같으니 이만 일어나겠소이다.”
상대가 협상을 끝내려고 하자 네덜란드 상인은 다급하게 중년인을 붙잡았다.
“이렇게 가시면 어쩝니까?”
“가격을 제시했는데 그걸 못 맞춰 주겠다니 더 앉아 있을 필요가 없지 않소.”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랬다고 그러지 마시고 그동안 거래해 온 정이 있는데 가격을 조금만 낮춰 주시지요. 열 냥이나 주고 사면 남는 게 정말 없습니다.”
네덜란드 상인이 통사정을 했지만 중년인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나마 계속 거래를 해 왔기에 이렇게 물량을 남겨 둔 것이오. 그리고 자꾸 이윤이 안 떨어진다고 하는데, 그럼 열한 냥에 사가는 영길리 상인들은 뭐요? 아무튼 이 가격 밑으로는 절대 팔 수 없으니 그렇게 아시오.”
중년인이 딱 잘라 말하자 네덜란드 상인은 낮게 침음성을 삼켰다.
한꺼번에 너무 가격이 올랐지만 그렇다고 빈 배로 돌아갈 수는 없었기에 네덜란드 상인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런 상대와 달리 송상에서 나온 중년인은 시종일관 느긋한 태도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마시는 여유를 보였다.
어차피 결과는 나와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참 머릿속으로 주판을 튕겨 보던 네덜란드 상인은 떨떠름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 가격에 매입을 하지요.”
“하하하. 잘 생각하셨소이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빙긋 미소를 짓는 중년인과 달리 네덜란드 상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번 거래로 네덜란드 상인은 가격 결정권이 완전히 조선 측에 넘어간 걸 뼈저리게 느끼는 것과 동시에 상황을 이렇게 만든 영국 상인들한테 이를 갈았다.
봉황상단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조선 상단들은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들의 경쟁을 교묘하게 부추기면서 물량을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적절히 분배해 큰 이익을 올렸다.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들도 손해를 보지는 않았는데 오른 가격만큼 유럽으로 가져가 비싸게 팔아 차익을 메웠다.
원래부터 조선에서 가져가는 물건의 소비자가 대부분 귀족이나 부유한 자본가 들이었기에 이 정도 가격 상승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교역로가 봉쇄돼 물건이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는 바람에 수요가 더 커져,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덕분에 조선은 곳간 가득 금과 은을 채워 넣을 수 있었고 도현은 이렇게 벌어들인 재물을 그냥 썩혀 두는 것이 아니라 산업화와 군비 강화에 투자했다.
“작년보다 십만 냥이나 더 벌어들였군.”
완도와 제주 상관에서 행해진 거래 결과를 받아 든 도현이 흡족한 표정을 짓자 장 총관 역시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거래 물량은 비슷했지만 두 나라가 경쟁이 붙어 가격이 폭등한 영향이 컸사옵니다.”
“바람직한 일이야. 화란이 아국 물건을 구라파에 소개한 공은 있지만 솔직히 그동안 독점을 하며 돈을 많이 챙긴 게 사실이지. 안 그런가?”
“맞사옵니다.”
“값이 오른 데 대해 불만은 없던가?”
“왜 없겠사옵니까. 하지만 예전과 달리 영길리 상인들이 물건을 받아 가기 위해 잔뜩 몰려와 있는 걸 의식해서인지 대놓고 표현은 못 하고 어떻게든 물량을 더 확보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었습니다.”
“뭐든지 경쟁이 있어야 제값을 받는 법이지.”
작게 머리를 끄덕이던 도현은 이내 정색을 하며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고 너무 값을 올려 버리면 자칫 아국 물건에 대한 수요를 줄여 버리는 자충수가 될 수도 있으니 장 총관이 상단들을 잘 관리하도록 하게.”
“예. 염려 마시옵소서.”
“그래. 옆에 그대가 있어서 짐이 항상 든든하네.”
도현의 말에 장 총관은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황송하옵니다.”
시선을 옆으로 돌린 도현은 조용히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완 단장을 보며 입을 열었다.
“청나라 분위기는 어때?”
“여전히 전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모습이옵니다. 특히 당왕 주율건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가 양자강을 넘어 하남성河南省까지 진격해 들어가자 황제인 도르곤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친정에 나섰다고 하옵니다.”
그러자 도현은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요즘 청군이 전력을 제대로 집중시킬 수 없다고 하지만 벌써 하남성까지 치고 들어가다니 대단하군.”
“혼란스러운 틈을 노린 것이 주효했지만 당왕 주율건이 상당히 뛰어난 통솔력을 보이고 있사옵니다.”
청나라의 시선을 다른 곳에 돌려줘서 고맙기는 했지만 명나라가 다시 예전 국력을 회복하는 것 역시 조선 입장에서는 그리 탐탁지 않은 일이었기에 도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대륙에서 일어선 나라들은 대부분은 중원을 통일하면 넘쳐나는 힘을 주변 국가에 쓰기 마련이었다.
특히나 명나라는 쇠락의 길로 접어든 처지는 생각하지 않고 여전히 조선을 조공국으로 여기는 경향이 컸기에 마찰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이 단장.”
“말씀하옵소서.”
“명군의 상승세가 얼마나 이어질 것 같나?”
질문을 받고 잠시 고심하던 이완 단장은 고개를 들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지금까지는 비교적 순탄하게 진격을 해 왔지만 청 황제인 도르곤이 직접 팔기군을 이끌고 나선 이상 상황이 달라지지 않겠사옵니까.”
“확실히 타고난 무장인 도르곤이 친정을 한다면 무게감부터 다르겠지.”
“그렇사옵니다. 제남에 있는 왕영군과 서부로 간 오삼계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약간의 변수가 있겠습니다만 명군이 더 이상 치고 올라오기는 어려울 겁니다.”
“짐도 같은 생각이네. 하면 전선이 당분간은 하남성에서 고착화될 가능성이 크겠군.”
“예.”
“가장 좋은 건 지금처럼 대륙이 네 등분 나 있는 건데 말이야.”
보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도현은 문득 생강이 난 듯 이완 단장을 봤다.
“왕영군이 명나라와 손을 잡을 낌새는 없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현재로서는 희박하옵니다.”
“왜 그렇지?”
“기본적으로 왕영과 그를 따르는 세력들은 청 황제를 모셨던 이들이었기에 명나라 입장에서는 배신자들이기 때문이옵니다.”
“그런 문제가 있었군.”
“명군한테는 청나라와 함께 타도 대상일 뿐이지 결코 속에 품을 상대가 아닐 겁니다. 이런 걸 잘 알고 있는 왕영군도 조만간 개국을 선포하며 독자 생존의 길을 모색할 거라 생각 되옵니다.”
“그럼 두 세력이 손을 잡게 될 여지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니 청나라 입장에서는 희소식이겠군.”
“꼭 그렇지만도 않사옵니다.”
“왜지?”
“청나라 내부의 이신 세력이 속속 도르곤을 떠나 왕영 쪽에 가담하고 있는 데다 그쪽도 싸움이 계속 이어지고 있어 청군 전력이 분산되기 때문이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명나라로 넘어갈 수 없는 이들이 왕영 쪽을 선택한다는 것이군.”
“바로 맞히셨사옵니다.”
이완 단장의 수긍에 도현은 잠시 침묵하며 생각했다.
“아국의 내정이 안정될 때까지 청나라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릴 여력이 없게 만들어야 해. 그럴 수 있겠나?”
“맡겨만 주십시오.”
깊게 머리를 숙이는 것으로 세 사람의 대화가 끝났다.
크게 늘어난 수익에 기뻐하는 조선과 달리 지난번보다 더 비싼 값에 물건을 구입해야 되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인들은 불만이 가득했다.
거래를 모두 끝마친 뒤 완도 상관 내에 위치한 동인도회사 지부에 모인 상인들은 저마다 잔뜩 얼굴을 구긴 채 불만을 토로했다.
“인삼 한 근을 얼마에 산 줄 아십니까! 열 냥입니다, 열 냥!”
“도자기와 자개장도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세 냥씩 올려 받았습니다. 그것도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어서 화물칸 절반을 겨우 채웠습니다.”
“우리가 아니었으면 유럽에 물건을 팔지도 못했을 거면서 어찌 이럴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도 동감이오!”
“조선도 그렇지만 더 큰 문제는 영국 놈들입니다. 사실 그자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우리가 독점하던 것이 깨지고 경쟁이 붙는 바람에 상품값이 천정부지로 오른 것 아니겠소이까.”
조선과의 거래뿐만 아니라 뒤늦게 해상 교역에 뛰어든 영국이 곳곳에서 네덜란드의 이권을 넘보며 사사건건 부딪치고 있었기에 긴 탁자를 가운데 두고 모여 앉아 있던 상인들은 다들 분풀이라도 하듯 거친 말들을 쏟아 냈다.
“영국 촌놈들…….”
“그냥 섬에 처박혀 양이나 키우고 있을 것이지 주제도 모르고 여기까지 기어와서 물을 온통 다 흐려 놓는구먼.”
“내 말이 그거요.”
그때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상인 한 명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값이 오른 거야 유럽에 가져가서 우리도 그만큼 올려 받으면 되지만 더 심각한 건 다음 거래 때 원하는 만큼 물량을 확보할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는 거요.”
날카로운 지적에 방 안 분위기가 무거워지며 다들 우려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이번에도 영국 놈들이 값을 비싸게 불러 물량을 다 차지하려는 걸 겨우 막았지 않습니까.”
“지금도 이런데 한번 물건을 팔아 재미를 보면 경쟁이 더 치열해질 거요.”
“끄응.”
암울한 전망에 상인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자 말을 꺼냈던 중년 상인이 가운데 앉아 있는 발데 총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뭔가 대책을 세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상인들의 시선이 모이자 팔짱을 풀며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웃돈을 조금 더 줘서라도 다음 거래 물량을 선매수해 놓을 생각이오.”
“가능하겠습니까?”
자신들의 이익과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상인들은 앞으로 몸을 바싹 당겨 앉으며 관심을 보였다.
“쉽지는 않겠지만 어떻게든 협상을 해 볼 생각이오.”
기대 어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과연 조선 측이 선매수를 받아들일지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매수자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하나뿐이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영국 상인들이 있었기에 가만히 있어도 더 좋은 값을 받을 수 있는데, 굳이 선매수를 해서 물량을 묶어 둘 이유가 없었다.
서로 눈치만 보는 가운데, 중년 상인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운 좋게 선매도를 한다고 해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안 되지 않겠습니까?”
“나도 알고 있지만 지금 당장 다른 방법이 없지 않소.”
그렇지 않아도 만족스럽지 않은 거래에 심기가 불편하던 발데 총관은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조선 놈들의 눈치를 보며 노심초사할 것이 아니라 저들이 파는 상품 중에 가장 인기가 좋은 인삼을 자체적으로 재배하는 게 어떻습니까?”
“……!”
뜻밖의 말에 발데 총관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다른 상인들도 눈을 크게 뜨며 술렁였다.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뿐이었고 발데 총관은 머리를 좌우로 내저으면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라고 왜 그런 생각을 못 했겠소. 하나 조선 측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인삼 씨앗을 순순히 넘겨줄 것 같소. 우리한테 파는 것도 생인삼은 하나도 없고 전부 바짝 말린 거나 아니면 아예 홍삼으로 만들어서 넘기는 걸 보면 모르겠소.”
실제로도 조선은 가장 중요한 특산물인 인삼이 외부로 유출되는 걸 막기 위해 씨앗은 물론이고 재배하는 농사꾼들까지 철저하게 관리했다.
이걸 위해 송상에서 하던 인삼 재배를 국가가 넘겨받아 농산부와 주작단이 직접 운영하고 있었다.
인삼 재배권을 포기하는 대신 송상은 구형 판옥선 십여 척을 불하받아 외국과 교역에 나서게 됐고 십 년 동안 홍삼 생산량의 삼 할을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그리고 담뱃잎 생산에도 관여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저도 압니다. 하지만 성공만 한다면 조선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막대한 이익을 거둘 수 있지 않습니까.”
“으음.”
자신도 모르게 인삼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을 계산해 본 발데 총관은 낮게 침음성을 흘렸고 좌우에 앉아 있던 상인들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인삼을 재배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모험을 걸어 볼 만합니다.”
“저도 찬성입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지 않습니까?”
몇몇 상인들이 바짝 몸이 닳아 말했지만 발데 총관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렇게 성급하게 말할 일이 아니오. 씨앗을 구하기도 어려운 데다 자칫 이런 움직임이 조선 측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뒷감당하기 어려워질 것이오.”
그러자 처음 말을 꺼냈던 중년 상인이 얼른 말을 받았다.
“무슨 일이든 큰 수익을 얻으려면 위험부담이 따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무서워서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시간이 갈수록 주도권을 빼앗기고 조선 측에 질질 끌려 다녀야 될 겁니다.”
이미 그런 조짐이 보이고 있었기에 마지막 말이 발데 총관과 모여 있는 상인들의 가슴 깊숙이 박혔다.
사실 발데 총관도 남방 향신료 무역에 이어 조선 특산물까지 영국 상인들이 치고 들어오는 것에 상당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도 위험부담이 너무 크지 않소?”
하지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조선과의 교역을 총괄하는 직책에 있는 발데 총관은 섣불리 결정을 내지 못하고 망설였다.
“조선 측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최대한 조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인삼 씨앗을 구하려고 해도 우리 같은 서양인들은 상관 구역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되어 있는 데다 외모부터 확 차이가 나는데 은밀히 일을 추진하는 것이 가능하겠소?”
발데 총관의 말에 중년인이 은근한 어투로 말을 했다.
“그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뭐요?”
“왜국인을 이용하는 겁니다.”
그러자 한쪽에 앉아 있던 상인이 무릎을 치며 감탄성을 내뱉었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왜국인이라면 조선 사람하고 똑같이 생겼으니 의심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만약 일이 잘못되더라도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고 시치미를 떼기 좋지요.”
꼬리를 자르기 쉽다는 이야기에 발데 총관은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상단과 관련된 왜국인을 쓰면 금방 들통이 날 텐데 적당한 이가 있소?”
“예.”
머리를 끄덕인 중년 상인은 좌중을 둘러보고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혹시 이가 닌자 가문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이가 닌자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발데 총관은 문득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막부를 어둠 속에서 지킨다는 그 닌자 가문을 말하는 거요.”
“맞습니다. 허락을 하신다면 그자들한테 의뢰를 할 생각입니다.”
“어떻게 그자들과 인연이 닿은 거요?”
발데 총관뿐만 아니라 다른 상인들도 모두 궁금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저도 우연치 않게 그들과 끈이 닿게 됐습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요즘 형편이 궁해져 돈만 충분히 준다면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이가 닌자라면 쇼군인 도쿠가와 가문을 직접 모시는 자들인데 돈이 궁하다니 그게 정말이오?”
“저도 의아하게 생각하지만 사실입니다.”
“거참…….”
조선군이 왜국을 정벌했을 때 도현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일로 이가 닌가들이 도쿠가와 가문에서 내쳐진 걸 모르는 발데 총관과 네덜란드 상인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유야 어찌 됐건 왜국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닌자들을 우리가 쓸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참을 고심하던 발데 총관은 이내 사뭇 진지한 얼굴로 중년 상인을 보며 말했다.
“정말 조선에 안 들키고 인삼 씨앗을 구해 올 자신이 있소?”
“예, 틀림없이 해낼 수 있습니다.”
발데 총관은 의자에 앉은 자세 그대로 주위의 상인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이 의견에 찬성하시오?”
그 물음에 상인들 사이에서 긍정하는 답변이 흘러나왔다.
“한번 해볼 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목소리를 듣곤 발데 총관이 알겠다는 듯 다시 중년 상인에게 시선을 줬다.
“좋소. 대신 만에 하나 발각이 되더라도 절대 우리가 개입됐다는 사실이 드러나서는 안 될 것이오.”
“염려 마십시오.”
며칠 뒤 구매한 물건들을 다 선적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배들은 선단을 꾸려 완도 상관을 떠나 일 차 목적지인 바타비아 요새로 향했다.
중간에 작은 쾌속선 한 척이 선단을 이탈해 나가사키長崎로 갔다.
왜국 유일의 개항장인 나가사키에는 외국 상인들을 주로 상대하는 여관이나 가게들이 많았다.
거리로 나가 보면 노란 머리 파란 눈을 한 서양인들이 행인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들려오는 것은 각국의 독특한 억양이 섞인 이국의 언어였기에, 간혹 여기가 왜국이 아니라 어디 다른 나라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상인 로만은 그런 번화가 한복판을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간혹 무언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는 했지만 목적지를 향한 그의 발끝은 거침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 한쪽, 주변 건물들에 비해 화려한 느낌이 드는 가게를 발견하자 로만은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아직 밝은 대낮이라 가게 앞에 매달린 홍등엔 불이 꺼져 있었으나 열린 문 앞에 서니 안에서 달콤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누구?”
긴 담뱃대를 물고 나른한 눈빛으로 입구를 지키고 있던 여자가 나와서 로만을 맞이했다.
그녀는 첫눈에 그가 돈 많은 상인이라는 것을 알아챈 듯 이내 눈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손님을 맞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뭐, 상관없어요. 우리 가게는 처음 같은데, 어떤 아이가 취향이에요? 말만 하면 원하는 대로 다 맞춰 드리죠.”
“여자는 됐소.”
로만은 그보다 중요한 용건이 있다는 투로 대꾸했다.
“어떤 사내를 찾고 있는데…….”
“훗. 유곽에서 사내라니.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거 아녜요?”
“아마 손님으로 이곳에 묵고 있을 거요. 긴테스라는 사람이오만.”
“아…….”
그제야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는 알겠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유메.”
여자의 부름에 열두세 살쯤으로 보이는 작은 소녀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이 층 안쪽 방이야. 긴 씨한테 안내해 드리렴.”
“예.”
긴이라는 여자의 말에 로만은 잠시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내 여자가 사내를 부르는 별명 같은 것이라는 걸 깨닫고 로만은 얌전히 기모노를 입은 소녀의 뒤를 따랐다.
“이쪽입니다.”
격자무늬 장지문 앞에 소녀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기척이 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소녀가 소리 없이 열어 준 장지문을 넘어 성큼 발을 내딛은 로만은 방 안 풍경을 보고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제법 넓은 다다미방 한복판엔 아직 이불이 그대로 깔려 있는 상태였고, 그 위에 반쯤 벌거벗은 여자가 비스듬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유곽 아가씨들 중 한 명으로 보이는 그녀는 로만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당황하지 않은 표정으로 느긋하게 머리맡에 벗어 놓은 겉옷을 들어 상체를 가렸다.
그리고 창가엔 긴테스가 벽에 등을 대고 앉아 홀로 술을 홀짝이며 로만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오랜만이오.”
“내가 방해한 것 같아 미안하군.”
“뭘, 종일 빈둥거리는 것도 이제 지겨워지던 참이니 잘됐지.”
그러면서 긴테스는 옷을 입는 여자의 목선을 진득한 시선으로 훑었다.
“다 입었으면 이리 와서 술 좀 따라 봐.”
“아이 참, 피곤한데…….”
“돈을 받았으면 일을 해야지.”
“어머, 어젯밤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그래요.”
새침하게 말대꾸를 하면서도 여자는 순순히 긴테스의 말을 따랐다.
어느새 소녀가 가져다 놓은 새 술병과 잔을 받아 들고선 이불을 치우고 간단하게 로만이 앉을 자리를 마련하는 솜씨가 제법 노련했다.
“계속 여기 있을까요? 아님…….”
“나가 있어.”
이만하면 됐다는 듯 긴테스가 턱짓으로 여자를 내보냈다.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론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는 음흉한 행동에 여자는 찰싹 소리 나게 손등을 때려 떼어 놓고선 살랑거리는 몸짓으로 로만을 지나쳐 나갔다.
“제법 괜찮은 여자 아뇨? 이 가겐 물이 좋은 편이니 나중에 한번 이용해 보시오.”
로만은 그 말엔 대답하지 않고 여자가 깔아 놓은 방석 위에 앉았다.
“한데, 잘나가는 상인께서 어쩐 일로 나를 찾으셨나?”
술을 물처럼 꿀꺽 마셔 대는 긴테스지만 상대방을 탐색하는 눈빛은 예리했다.
“의뢰를 맡길 게 있네.”
“흐음. 얘기해 보쇼.”
“조선에 가서 인삼 씨앗을 가져와 줬으면 하네.”
술잔을 기울이던 긴테스의 손이 우뚝 멈췄다.
“뭐라고?”
“두 번 말해 줘야 되나.”
똑같은 말 반복하긴 싫다는 듯 로만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아니, 알아들었소. 그런데 너무 갑작스러운 얘기라…….”
긴테스는 술잔을 내려놓고 무릎에 손을 얹었다.
“조선에서 인삼이 타국으로 유출되는 걸 무척 싫어하는 건 그쪽이 더 잘 알 텐데.”
“그러니 자네한테 부탁하는 거지. 정상적인 방법으로 손에 넣을 수 있으면 굳이 이런 수고를 하지 않아.”
“쉬운 일이 아니오.”
“자네 같은 실력자도 약한 소리를 할 때가 있다니, 의외인걸. 이가 닌자 가문의 명성도 땅에 떨어졌군.”
순간 긴테스의 눈동자에 불꽃이 확 피어올랐다.
“입조심하시오.”
그가 뿜어내는 서릿발 같은 날카로운 살기에 방 안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져 내렸다.
누군가가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피부가 따끔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로만은 얼굴 표정을 흐트러트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등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그는 품속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꺼냈다.
로만이 주머니를 바닥에 툭 던지자 금속이 부딪히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느슨하게 풀린 끈 사이로 번쩍거리는 금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선수금이네. 의뢰를 무사히 끝마친다면 그것의 두 배를 보수로 주지.”
긴테스는 주머니 안의 내용물을 대충 가늠하듯이 손바닥 위에서 툭툭 치고는 로만을 바라봤다.
“단단히 작정을 하고 나오셨구먼?”
그가 피식 웃는 것과 동시에 방 안을 가득 메우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좋아, 좋아.”
“받아들여 주는 건가?”
“쉬운 것보다는 어려운 게 더 깨부수는 재미가 있지.”
긴테스는 주머니를 받아들고 히죽 한쪽 입가를 끌어 올렸다.
“그 의뢰, 내가 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