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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 씨앗을 지켜라 (92/104)

인삼 씨앗을 지켜라

로만이 제공한 배를 타고 나가사키를 떠난 긴테스와 이가 닌자들은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북상해 곧장 인삼 산지인 개성으로 잠입하려고 했다.

하지만 조선 수군의 삼엄한 순찰에 전라도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야밤을 이용해서 변산반도에 긴테스 일행을 몰래 상륙시켰다.

조선인으로 변장한 이들은 전주와 천안을 거쳐 조심스럽게 이동한 끝에 일주일 뒤 목적지인 개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 밖 한 야산 기슭에 있는 버려진 암자에 숨어 있던 긴테스는 바깥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동작을 멈추고는 대나무 작대기로 위장한 검을 집어 들었다.

다른 일행 두 명도 긴장한 얼굴로 발검 자세를 잡았다.

긴장된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누군가 문밖에 와서는 낮게 말했다.

“저, 요헤이입니다.”

정보를 수집하러 갔던 일행의 목소리에 긴테스와 부하들은 긴장을 풀었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삿갓을 쓴 젊은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늦었군.”

“죄송합니다. 관아의 눈을 피해 멀리 돌아오느라고 시간이 지체됐습니다.”

검이 숨겨진 대나무 작대기를 옆에 내려놓고 바닥에 앉은 긴테스는 약간 굳은 얼굴로 사내를 보며 말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나?”

“들은 대로 이곳에 인삼 재배 농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 뿌리를 구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지?”

“농장 주위를 조선군 세 개 천인대가 완전히 둘러싼 채 삼엄한 경계를 펼치는 데다 개성부 포졸들이 수시로 검문과 순찰을 해서 접근 자체가 어려웠습니다. 저도 외곽까지만 겨우 들어가 농장을 멀리서 확인만 했습니다.”

전문적으로 침투술을 익힌 부하가 접근에 실패했다고 하자 긴테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예 침투도 못 할 정도란 말이야?”

“무리를 하면 가능은 하겠지만 흔적을 남기지 않긴 어려울 겁니다.”

“농장에서 일하는 자들은?”

“안에 마을이 하나 있어 거기서 생활했습니다.”

“그럼 바깥으로 전혀 안 나온다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웬만해서는 농장 바깥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으음.”

매년 조선에 엄청난 돈을 벌어다 주는 작물인 만큼 보안이 철저할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까다로운 상황에 긴테스는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눈가를 찡그렸다.

그러자 후미오라는 이름을 가진 부하가 옆에 있다가 입을 열었다.

“망설일 것이 뭐 있습니까? 그냥 오늘 밤에라도 농장에 숨어들어서 밭에 있는 인삼을 몇 뿌리 챙겨 여길 빠져나가지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오래 머물수록 노출될 가능성이 커지니 최대한 빨리 치고 빠지는 것이 상책입니다.”

부하들의 말에 긴테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기껏 가지고 나왔는데 중요한 인삼 씨를 받지 못하는 거라면 어떻게 할 거야. 일을 확실히 처리하기 위해서는 농장 내부 정보가 더 필요해.”

“그렇기는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한참을 고심하던 긴테스는 고개를 들어 정탐을 하고 온 부하를 봤다.

“요헤이.”

“옛.”

“농장 일꾼들이 가끔 밖으로 나온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놈들 중 한 명을 포섭해서 정보를 캐내도록 하지.”

“그러면 너무 늦어지지 않겠습니까?”

후미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긴테스는 짧지만 단호한 어투로 대답했다.

“조선 놈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두 번은 기회가 없을 거야. 그럼 조금 지체되더라도 확실하게 하는 것이 나아.”

“알겠습니다.”

수긍하는 표정을 짓자 긴테스는 지체 없이 지시를 내렸다.

“우리들 중에 조선말을 제일 능숙하게 하는 요헤이가 적당한 먹잇감을 물색하고 나머지는 농장 주위를 살펴 침투로와 도주 방법을 세운다. 조선 놈들한테 들키지 않게 다들 조심해서 움직이는 걸 명심하도록 해.”

“예.”

긴테스의 말에 부하들은 눈을 날카롭게 번득이며 고개를 숙였다.

오덕팔은 할아버지 때부터 송상에서 인삼 재배 일을 하며 살아온 사람으로 그 역시 소속은 국가로 바뀌었지만 인삼을 키우는 걸 천직으로 알고 있었다.

오랜 경력을 인정받아 작업반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휘하에 서른 명이나 되는 일꾼을 거느린 채 인삼밭을 가꾸는 일을 했는데, 노는 날이면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거나 탁주를 마시러 개성부 안에 있는 저잣거리로 나왔다.

오늘도 몇몇 동료들과 어울려 개성부로 들어왔다.

“난 주막에서 먼저 탁주 한 사발을 하고 있을 테니까 필요한 것들 사서 그리로 와.”

“같이 안 가고?”

“목구멍이 칼칼한 게 한 사발 마셔야겠어.”

“사람 하고는.”

“내가 부탁한 것도 사 오는 거 잊지 말고.”

“대신 술은 자네가 사는 걸세.”

“알았네.”

동료들과 헤어진 오덕팔은 익숙한 걸음으로 단골 주막에 들어갔다.

“주모, 여기 탁주 한 사발이랑 국밥 한 그릇 말아 주게.”

그러자 손님들이 먹고 간 상을 치우고 있던 주모가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다른 분들은 어쩌고 혼자 왔어요?”

“섭섭하게 나보다 그 친구들이 더 보고 싶었나 봐.”

“호호호. 그럴 리가 있어요. 금방 상을 차려서 나올 테니까 조금만 앉아서 기다려요.”

“탁주부터 한잔 먼저 갖다 주게.”

“알았어요.”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부엌으로 간 주모는 이내 막걸리가 든 호리병과 대접을 가져와 그가 앉은 평상 위에 내려놨다.

“크으. 좋다.”

막걸리를 시원하게 한 사발 쭉 들이켠 오덕팔은 입가에 묻은 술을 손등으로 닦아 내고는 안주로 나온 김치를 우적우적 씹었다.

잠시 뒤 나온 국밥까지 떠먹으며 어느새 술병을 반쯤 비웠을 때 봉놋방 문이 벌컥 열리며 웬 사내가 한 명 시끄럽게 떠들면서 밖으로 나왔다.

“뒷간에 금방 다녀올 테니까 그대로 놔둬!”

“알았으니까 어서 갔다 오기나 해.”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반쯤 닫힌 문 사이로 서너 명의 사내가 둘러앉아 투전판을 벌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떴다!”

“어서 패 다시 돌려.”

왁자지껄한 모습에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던 오덕팔은 마침 지나가던 주모를 붙잡고 물었다.

“저치들은 누구야?”

“아, 전라도에서 온 보부상들이라는데 장사는 안 하고 며칠째 저렇게 판을 벌리고 놀고 있다우.”

“그래.”

“투전판에 끼어서 좋은 꼴 난 사람을 본 적 없으니 행여나 관심 가지지 마시우.”

“누가 뭐랬나.”

그래도 단골손님이라고 충고를 해 줬지만 오덕팔은 방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그걸 본 주모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자기 할 일을 하러 갔다.

막걸리를 마시며 계속 힐끗힐끗 투전을 벌이는 걸 곁눈질하고 있을 때 아까 뒷간에 갔었던 사내가 돌아오다가 그걸 보고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뭐 하시오?”

“아, 아니오.”

“거, 계집처럼 훔쳐보지 말고 보려면 안에 들어와서 구경하시오.”

“그래도 되겠소?”

반색을 하며 묻자 사내는 심드렁한 어투로 대답했다.

“구경하는 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생각 있으면 따라오시오.”

“그럼.”

안 그래도 호기심이 동하던 오덕팔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내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뒷간에 갔다가 아예 똥까지 푸고 왔나? 왜 이렇게 늦어.”

“재촉은…….”

퉁명스럽게 말을 받으며 사내가 비어 있는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자 패를 돌리던 털보가 문 쪽에 멀뚱히 선 오덕팔을 쳐다봤다.

“누구야?”

“아, 지난번에 장사를 하러 왔을 때 안면을 튼 사람인데 밖에서 우연히 만났어.”

태연스럽게 둘러대며 고개를 옆으로 돌린 사내가 한쪽 눈을 깜빡이자 오덕팔도 얼떨결에 장단을 맞췄다.

“오가요.”

“관아 끄나풀 같은 건 아니겠지?”

“어딜 봐서.”

“하긴.”

피식 웃은 털보는 오덕팔을 보며 말했다.

“형씨도 낄 거요?”

잠시 망설이던 오덕팔은 이내 머리를 끄덕이며 한쪽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털보는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작게 미소를 지었다가 금방 지우고는 다시 손으로 죽패를 섞었다.

“어디 보자, 뭐가 들어왔을 라나?”

서로 패를 확인하는 가운데 오덕팔도 앞에 놓인 죽패 두 개를 집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적혀 있는 글자를 봤다.

“자, 돈들 걸어.”

“두 냥.”

왼편에 앉은 남자가 구리돈 두 개를 가운데 던지자 오덕팔을 데려온 사내가 바로 판돈을 키웠다.

“쩨쩨하게, 열 냥으로 올려.”

“돈 없는 놈 서러워서 살겠나. 살살 좀 해.”

“겁나면 죽든가.”

“쳇.”

쨍그랑.

사내의 말에 다른 이들이 투덜거리며 판돈을 넣었다.

“형씨는 어쩔 거요?”

“첫판인데 패는 봐야 되지 않겠소.”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놨다.

“난 세 끗.”

“젠장, 두 끗이야.”

“그걸 가지고 어딜 따라와 이 정도는 돼야지.”

“그쪽도 패를 까야지.”

눈이 쭉 찢어진 사내가 팔뚝으로 툭 치며 하는 말에 오덕팔은 손에 든 패를 내려놨다.

“이게 뭐야!”

“다섯 끗이잖아.”

“젠장!”

이겼다고 좋아하던 사내의 얼굴이 바로 일그러졌고 첫 판부터 돈을 딴 오덕팔은 웃음을 숨기지 못하며 가운데 쌓인 판돈을 가져왔다.

“이거 첫판부터 운이 따르는 모양이네.”

“혹시 꾼을 데려온 거 아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패나 다시 돌려!”

운이 따라 주는 날인지 오덕팔은 그 뒤로도 계속 돈을 땄고 아쉽게 두세 번 지기도 했지만 판돈을 몇 배로 불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새 해가 지고 바깥이 어두워졌다.

“일곱 끗이오!”

“에이 썅!”

“패도 더럽게 안 붙네.”

“졌소.”

“판돈도 다 털렸고 밤도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하세.”

희희낙락하며 판돈을 가져가던 오덕팔은 털보의 말에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술시戌時(저녁 7~8시)밖에 안 됐는데 벌써 끝내려고요.”

그러자 힐끗 오덕팔을 쳐다본 털보는 품에서 짧은 곰방대를 꺼내 담뱃가루를 채우며 말했다.

“새벽 일찍 까막골에 물건을 팔러 가야 돼서 안 되오.”

“그러시오.”

중간에 장을 보고 온 일행도 먼저 보내고 돈 따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르던 오덕팔이 못내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자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털보가 은근한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대신 내일 오후에 다시 돌아오니까 더 놀 생각이 있으면 그때 오시구려.”

또 판이 벌어진다는 말에 오덕팔은 반색을 했다.

“알겠소. 꼭 오리다.”

앞에 쌓여 있던 돈을 챙겨 주머니에 넣던 오덕팔은 판돈을 쓸어 가는 것이 미안했는지 슬그머니 은화 두 냥이 내려놨다.

“밤에 술이나 한 잔씩들 하고 자시오.”

“고맙소.”

“그럼.”

묵직한 돈주머니를 품에 챙긴 오덕팔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봉놋방을 나갔다.

덜컹.

문이 닫히고 오덕팔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벽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있던 털보가 정색을 하며 곰방대를 내려놨다.

“제대로 미끼를 문 것 같군.”

“일부러 져 주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보부상으로 위장해 오덕팔과 투전판을 벌인 사내들은 바로, 인삼 씨앗을 훔쳐 가기 위해 잠입한 긴테스와 부하들이었다.

수염을 붙여 변장한 긴테스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작업이 다 끝날 때까지 놈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들 해.”

“저런 놈 하나 속이는 건 일도 아니니 염려 마십시오.”

“요혜이.”

“예.”

“저자가 농장 작업반장인 것이 확실하지?”

그러자 뒷간에 다녀오는 척하면서 오덕팔을 자연스럽게 투전판으로 끌어들인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몇 번이나 확인을 했습니다.”

“좋아.”

긴테스는 눈을 서늘하게 번득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날 이후 주막 봉놋방에서 매일 밤 투전판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패가 딱딱 달라붙으며 돈을 따 가던 오덕팔은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잃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가져온 돈을 다 털리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불과 보름도 안 돼서 오덕팔은 그동안 땄던 건 물론이고 조금씩 모아 둔 돈까지 전부 다 잃는 것도 모자라서 빚까지 졌다.

“열 냥!”

“열 냥 받고 금화 다섯 냥.”

긴테스가 금화 다섯 개를 집어 가운데로 던지자 왼편에 앉아 있던 요혜이가 괜히 엄살을 부리며 분위기를 잡았다.

“너무 지르는 거 아냐?”

“다 할 만하니까 그러는 거지. 자신 없으면 패를 내려놔.”

“쳇. 지금까지 넣은 본전이 아까워서라도 그럴 수는 없지.”

그러면서 요혜이가 오른 판돈만큼 돈을 집어넣자 사람들의 시선이 오덕팔에게 향했다.

“갈 거요, 말 거요?”

며칠 사이에 사람이 몰라보게 초췌해지고 눈까지 붉게 충혈된 오덕팔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손에 든 패를 확인했다.

기다란 죽패 두 개에 적혀 있는 숫자는 구九였다.

가장 높은 패 중 하나를 쥔 오덕팔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힐끗 앞에 있는 판돈을 봤다.

다들 괜찮은 패가 들어왔는지 처음부터 판돈이 계속 올라 상당한 금액이 되어 있었다.

부담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액수였으나 지금 그의 손에 쥔 패라면 이길 확률이 꽤 높았다.

하지만 처음으로 맞이한 절호의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오덕팔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지금 요헤이의 도발에 응해 따라가면 수중에 있는 돈을 다 쏟아부어야만 했다.

만에 하나라도, 그가 쥔 패보다 더 높은 패가 나온다면?

그런 일말의 망설임이 오덕팔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갑자기 벙어리가 되었나, 왜 말을 못 해?”

머뭇거리는 오덕팔의 행동이 답답했는지 요헤이가 인상을 찡그리며 재촉했다.

“큭.”

더 이상 생각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던 오덕팔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간다, 가!”

이제 와 물러나기에는 이미 잃은 돈이 너무 컸다.

한동안 어찌할지 갈등하던 그는 결국 일확천금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판에 뛰어들고야 말았다.

쫘르륵.

오덕팔이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밀어 넣자 긴테스는 눈을 번뜩였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나머지 사람들도 판돈을 걸고는 한 명씩 패를 까 보였다.

“난 이땡.”

“씨팔. 여섯 끗인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양옆에 앉은 이들이 내민 패를 본 오덕팔은 자신보다 한참 낮은 점수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고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손에 쥔 패를 바닥에 탁 내려놨다.

“하하하! 구땡이오. 이번 판은 내가 먹은 것 같소.”

오덕팔이 가운데 놓인 돈을 가져가려고 할 때 맞은편에 있던 긴테스가 그의 팔을 잡았다.

“잠깐.”

“뭐요!”

“아직 내 패는 확인 안 했지 않소.”

“…….”

순간 불길한 느낌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상대가 내려놓은 죽패에는 십十이라는 숫자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십땡이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말과 다르게 긴테스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멍한 얼굴로 상대가 판돈을 가져가는 걸 보고 있던 오덕팔은 이내 정신이 반쯤 나간 모습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도 안 돼. 너희들 다 짜고 치는 거 아니야! 맞아. 그게 아니면 이렇게 될 리가 없어!”

“오 형, 말이 좀 지나친 것 같은데.”

긴테스가 정색을 하며 노려봤지만 이미 돈을 다 잃은 오덕팔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놈들아. 내 돈 내놔!”

실성이라도 한 듯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자 긴테스는 작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안 되겠구먼. 정신 좀 차리게 해 줘.”

“예.”

대답과 함께 양쪽에 앉아 있던 요헤이와 후미오는 악을 쓰는 오덕팔의 발을 걸어 쓰러뜨린 뒤 봉놋방 한쪽에 놓인 이불을 가져와 덮어씌우고는 마구 두들겨 팼다.

“어디서 행패질이야!”

“어이쿠!”

퍽! 퍽퍽!

“아이고. 나 죽네!”

죽는다고 소리를 쳐 댔지만 두 사람은 인정사정없이 계속 구타를 가했고 긴테스는 곰방대에 불을 붙여 입에 물고는 그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봤다.

그렇게 한참을 두들겨 맞은 오덕팔은 아까 고함을 지르며 덤벼들던 기세는 다 사라지고 잔뜩 겁에 딜린 얼굴로 긴테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제 정신 좀 차렸어.”

“……예. 옛.”

“그러게 왜 진상을 부려서 매를 버나.”

긴테스가 곰방대를 뒤집어서 바닥에 탁탁 쳐 다 탄 담뱃가루를 털어 내자 오덕팔은 그걸로 자신을 때릴까 봐 몸을 움찔거렸다.

“돈을 잃은 건 잃은 거고 계산은 정확히 끝내야지.”

그러면서 긴테스가 눈짓을 하자 왼편에 서 있던 요헤이가 품속에서 종이를 하나 꺼내 오덕팔의 눈앞에 펼쳤다.

“자, 거기 적혀 있는 걸 보면 알겠지만 오늘까지 오 형이 나한테 빚을 진 게 모두 금화 오십 냥이야. 많이도 가져갔군. 이걸 어떻게 할 거야?”

오십 냥이라는 말에 오덕팔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꽤 많은 봉급을 받는 오덕팔의 수입으로도 몇십 년을 일해야 겨우 벌 수 있는 돈이었기 때문이었다.

“시, 시간을 주면 어떻게든 갚겠소.”

“사흘이면 되겠어?”

“그렇게 빨리는…….”

“그럼 언제까지 되는데?”

인상을 쓰며 긴테스가 다그치듯 묻자 오덕팔이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게…….”

“아직 매를 덜 맞은 모양이군.”

“아, 아닙니다!”

그가 기겁을 하며 황급히 손을 흔들자 긴테스는 곰방대 끝으로 오덕팔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며 으름장을 놨다.

“사흘이야. 그 안에 못 갚으면 어찌 될지 알아서 생각해.”

“…….”

“항상 지켜보고 있을 거니까 행여나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말고. 그리고 사정을 봐주는 만큼 우리도 챙기는 것이 있어야겠지. 이자는 하루에 이 할이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왜 싫어 그러면 지금 당장 돈을 갚든가.”

하루에 금화 한 냥이 붙는 엄청난 고금리에 발끈하던 오덕팔은 긴테스가 눈을 부라리자 이내 고개를 숙였다.

기가 완전히 꺾인 오덕팔은 긴테스가 시키는 대로 새 차용증에 지장을 찍고는 봉놋방에서 내쫓겼다.

“놈이 기간 안에 돈을 구해 오면 어쩌지요?”

오덕팔을 보내고 다시 방으로 돌아온 후미오의 말에 긴테스는 새로 쓴 차용증을 접어 품속에 넣으면서 걱정 말라는 듯이 피식 웃었다.

“한두 푼도 아니고 제깟 놈이 어디서 그 많은 돈을 마련하겠어.”

“하긴 그렇습니다.”

“그것보다 엉뚱한 짓 못 하도록 감시나 잘해 어렵게 작업을 해 놨는데 괜히 야반도주라도 한다면 말짱 헛일이니까 말이야.”

“예.”

오덕팔은 돈을 구하기 위해 농장도 나가지 않고 동분서주했지만 금화 오십 냥이라는 거금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관아에 고발을 할까 생각도 했지만 사기도박에 걸려들었다는 심증만 있지 억울함을 보일 증거가 없었고 이런 사실이 밝혀지면 농장에서 쫓겨나고 긴테스 일당한테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겁이 났다.

그렇다고 야반도주도 할 수 없었는데 어디서 감시를 하는지 농장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일당 중 한 명이 아주 보란 듯이 따라다녔기에 꼼짝달싹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가운데 결국 약속된 날짜가 되고 말았다.

덜컹.

문이 열리며 그사이 얼굴이 반쪽이 된 오덕팔이 요헤이한테 반쯤 끌려 들어오자 한쪽에 앉아 탁주를 마시고 있던 긴테스가 고개를 들었다.

“왔군, 어떻게 돈을 가져왔어?”

오덕팔은 그의 눈치를 보며 품속에서 주머니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여기…….”

“어디 볼까.”

주머니를 받아 열어 본 긴테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게 뭐야?”

그러자 오덕팔은 바닥에 엎드리며 사정을 했다.

“어떻게든 해 보려고 했는데 그것밖에 못 구했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꼭 다 갚겠습니다.”

오덕팔이 가져온 돈은 금화 다섯 개가 전부였다.

그것도 마누라가 시집왔을 때 손가락에 끼워 줬던 금가락지와 큰딸이 시집가면 해 주려고 틈틈이 모아 둔 비단과 그릇 같은 걸 탈탈 다 털어서 마련한 거였다.

피눈물을 삼키며 구해 온 돈이었지만 긴테스는 그런 걸 상관하지 않았다.

“이건 이자밖에 안 돼!”

“시간을 더 주면…….”

“우리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아무래도 안 되겠구먼. 이봐.”

“예.”

“이놈한테 다 큰 딸이 하나 있다고 했지?”

긴테스의 말에 요헤이가 일부러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예. 제법 얼굴도 반반하고 엉덩이도 튼실한 계집년이 있습니다.”

왠지 불길한 느낌에 고개를 번쩍 든 오덕팔의 눈이 흔들리는 가운데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조금 손해는 보지만 돈이 없으면 딸이라도 대신 데려가는 수밖에.”

“아,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

순간 이성을 잃은 오덕팔이 고함을 내지르며 긴테스한테 달려들려고 하자 뒤에 있던 요헤이와 후미오가 그의 어깨를 잡아 억지로 다시 앉혔다.

“놔, 이 자식들아!”

“이게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먼.”

거칠게 몸부림을 치자 후미오가 주먹을 휘둘러 오덕팔의 얼굴과 복부를 마구 때렸다.

퍽! 퍼퍽.

“끄헉.”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긴테스는 오덕팔이 배를 부여잡은 채 엎드려 거친 숨을 토해 내자 한쪽 팔을 살짝 들었다.

그러자 주먹질을 하던 후미오가 구타를 멈추고 한쪽으로 물러섰다.

자리에서 일어난 긴테스는 얼굴이 엉망이 된 오덕팔 앞에 쭈그리고 앉아 한쪽 손으로 상대의 턱을 잡아 위로 들었다.

“으으윽.”

“하루에 이자가 이 할인데 그걸 벌어서 갚겠다고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해?”

“크흑.”

그도 시간을 번다고 해도 원금을 갚기는 고사하고 이자만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라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큰딸을 대신 팔수는 없었다.

“대신 날 노비로 데려가시오.”

“계집도 아니고 너 같은 늙다리를 어디다 쓰라고.”

“내 딸은 안 돼! 차라리 날 죽여.”

악에 받친 듯 오덕팔이 소리치자 긴테스는 품속에서 작고 날카로운 단검을 꺼내 상대의 뺨에 갖다 댔다.

“헉.”

“죽는다고 빚이 없어질 것 같나? 네놈 가족들한테 찾아가 이자까지 다 쳐서 받아 낼 거야. 마누라에 자식들까지 끌고 가 멀리 북방에 가져다 팔면 그럭저럭 돈이 떨어지겠군.”

“흑룡강 너머에 있는 노서아露西亞(러시아) 놈들한테 넘기면 제법 값을 짭짭하게 쳐준다고 합니다.”

“그 전에 딸년은 우리가 맛을 좀 봐야지.”

“큭큭큭. 이거 기대되는데.”

일당들이 지껄여 대는 말에 오덕팔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런 끔찍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투전판에 끼어든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스럽고, 죽패를 들었던 손을 작두로 잘라 버리고 싶을 정도로 후회가 됐지만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제발…….”

오덕팔은 절망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흐느꼈다.

그걸 물끄러미 쳐다보던 긴테스는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짓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딸을 생각하는 마음이 정말 애틋하군. 그래서 말인데 내 부탁 한 가지를 들어주면 돈을 안 갚아도 차용증을 돌려주지. 어때 관심이 있나?”

“……!”

한 가닥 구원 동아줄과도 같은 말에 오덕팔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게 뭡니까?”

“농장 상세 지도와 인삼 씨앗을 보관하는 곳을 가르쳐 주면 돼. 어때, 간단하지?”

순간 오덕팔은 눈을 크게 떴다.

“서, 설마 처음부터 이러려고!”

계획적으로 접근한 걸 눈치챘지만 긴테스는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그걸 이제 알았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어려운 일도 아니잖나? 그냥 우리한테 이야기만 해 주면 빚에서 벗어날 수 있어. 그리고 돈도 주지. 어때?”

그러면서 긴테스가 금화가 가득 든 주머니를 꺼내 그에게 보여 줬다.

“오십 냥이야. 이 정도면 그까짓 농장 일 따위 다 때려치우고 남은 인생을 편히 살 수 있잖아.”

의도적으로 함정에 빠뜨린 것에 분노하던 오덕팔은 어느새 반쯤 열린 주머니 사이로 번쩍이는 금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잘 생각해 봐. 이건 흔히 오는 기회가 아니야.”

“하지만 그러다가 만약 관아에 발각이라도 되면…….”

쉽게 뿌리치기 어려운 제안이었지만 나라에서 얼마나 인삼이 외부로 유출되는 걸 철저히 막고 엄히 처벌하는지 잘 알고 있던 오덕팔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자 긴테스가 지금까지 보여 주던 위압적인 모습과 달리 부드러운 어투로 그를 설득했다.

“직접 창고에서 인삼 씨앗을 훔쳐 오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는 걸 말해 달라는 건데 걸릴 것이 뭐가 있겠나? 설사 일이 잘못되더라도 오 형의 이름은 절대 발설치 않을 테니 안심해도 좋아.”

“정말이오?”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바로 차용증부터 불태워 없애도록 하지.”

“으음.”

오덕팔은 크나큰 갈등에 휩싸였다.

들켰을 경우 받게 될 처벌이 두렵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양어깨를 짓누르는 빚을 단번에 없애 버리고 더불어 금화 오십 냥이라는 거금을 손에 쥘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흔들렸다.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긴테스가 은근하게 재촉했다.

“고민할 거 뭐 있나. 그냥 눈 딱 감고 해 버리는 거야.”

“으…….”

설령 세상에서 제일가는 미녀가 알몸으로 유혹한다 해도 이보다 더 뿌리치기 힘들 수는 없으리라.

이리저리 방황하던 그의 시선이 일순 긴테스의 손에서 팔랑거리는 차용증에 닿았다.

“조, 좋소.”

“하겠다는 소린가?”

“그렇소.”

오덕팔은 마치 사약이라도 삼킨 죄인처럼 쓰디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어.”

긴테스의 입가에 걸린 비릿한 웃음을 본 순간 뭔가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으나, 이미 한번 내뱉은 말은 결코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긴테스는 보란 듯이 차용증을 크게 흔들고는 그대로 옆에 있는 화로에 던져 버렸다.

화르륵.

순식간에 재로 변해 스러지는 차용증을 보고 오덕팔의 눈에 안도하는 기색이 깃들었다.

“그럼 이번엔 자네가 약속을 지킬 차례야.”

긴테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을 지키고 있던 부하 중 하나가 지필묵을 가져와 오덕팔의 앞에 내려놓았다.

하얀 백지를 마주하고 나니, 새삼스레 양심의 가책이 밀려왔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어차피 이제 차용증도 사라졌겠다, 어떻게든 그냥 이 자리를 모면할 방법이 없을까 하는 약삭빠른 생각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런 심경의 변화를 눈치라도 챈 것처럼 긴테스가 그의 앞에 다시 쭈그리고 앉았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긴테스의 시선이 오덕팔의 몸을 한번 훑을 때마다 그는 고양이 앞에 쥐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오덕팔은 덜덜 떨리는 팔을 다른 한쪽 손으로 꽉 부여잡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따끔한 아픔과 함께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 퍼졌다.

“제기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욕설을 속으로 삼키면서 오덕팔은 거칠게 붓을 잡고 종이 위로 몸을 굽혔다.

얼마 뒤 오덕팔은 품에 금화 오십 냥이 든 돈주머니를 가지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터벅터벅 주막을 나섰는데, 어둠 속에서 그런 그를 주시하는 눈동자가 하나 있었다.

국왕인 도현의 직속 기관으로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주작단은 국내외에 거미줄처럼 촘촘한 탐보망을 가지고 있었다.

정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수집하기 위해 주작단은 주요 도시는 물론이고 거점 지역마다 지부를 설치해 은밀히 운영했다.

전조의 도읍지인 데다 지금은 많이 쇠락했다고는 해도 여전히 수만의 인구가 거주하는 큰 성읍이고 특히나 조선의 주요 수출품인 인삼을 재배하고 가공하는 시설이 밀집한 개성은 그 중요도만큼 당연히 주작단 지부가 만들어져 있었다.

주작단 개성 지부를 삼 년째 맡아 오고 있던 김상용은 오늘도 어김없이 밤늦은 시간이었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집무실에 남아 수집된 각종 정보들을 살펴봤다.

무작위로 수집된 정보들을 하나로 취합해 버릴 건 제외시키고 꼭 필요한 것만 골라 상부로 올려 보내는 게 그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언뜻 앉아서 서류만 보면 되니까 쉬워 보일지 몰라도 하루에도 수십 장씩 보고되는 정보들 가운데 옥석을 가려내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칫 국가의 존망에 영향을 끼칠 중요한 정보를 실수로 놓칠 수도 있었고 잘못된 자료를 보내 큰 위기를 초래할지도 몰랐기에 고도의 집중과 분석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 시간만큼은 웬만한 일이 아닌 이상 단원들도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그 불문율을 깨는 사람이 있었다.

“지부장님.”

한참 집중해서 보고서를 읽고 있던 김상용은 문밖에서 들린 소리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뭔가?”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

그가 이 시간에 방해를 받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을 텐데도 보고를 하러 왔다는 말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는 걸 눈치챈 김상용은 표정을 굳혔다.

“들어와.”

끼익.

경첩 소리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온 이는 개성 지부 소속 조장인 진성준이었다.

탁자 앞까지 다가온 진성준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가 바로하자 김상용은 읽고 있던 보고서를 덮으며 말했다.

“급한 일이라는 것이 뭔가?”

“인삼 농장에 관한 겁니다.”

들어 보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면 화를 내려던 김상용은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런 생각은 저 멀리 사라져 버린 채 미간을 좁혔다.

“자세히 설명해 보게.”

“갑 급 보호 대상인 인삼 농장을 감시하던 중에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이는 이가 있어 며칠 전부터 집중 관찰에 들어갔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수상한 무리와 만나는 걸 포착했습니다.”

인삼 농장에 문제가 생겼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기에 김상용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구체적으로 뭐가 수상하다는 거지?”

“일단 이자들이 전에는 한 번도 개성부에 왔던 적이 없었고 무엇보다 보부상이라고 하면서 물건을 팔러 다니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노린 것처럼 인삼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유인해 투전판을 벌인 것까지 어느 것 하나 의심이 가지 않는 게 없습니다.”

“흐음.”

팔짱을 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김상용은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이 정도면 의심을 넘어 충분히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냄새가 풍겼다.

“놈들한테 걸려든 자가 누구지?”

“오덕팔이라고 인삼 재배를 담당하는 작업반장입니다.”

“양쪽 다 감시를 하고 있겠지?”

“예. 우리 조원들을 배치해 뒀습니다.”

주작단은 보통 조장까지 포함해 열한 명이 한 조를 이뤘다.

“만약 인삼 재배에 관한 걸 외부로 유출시키려는 거라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야. 인원을 더 증원시켜 줄 테니까 자네가 책임지고 움직임을 철저히 감시하고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려 들면 바로 다 체포해 버려. 알겠나?”

“옛.”

“지금부터 이 일과 관계된 건 최우선적으로 나한테 바로 보고하도록 해.”

“그러겠습니다.”

“그럼 나가 봐.”

진성준이 방을 나가자 다시 혼자가 된 김상용은 두 눈을 매섭게 번득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겁도 없는 놈들 감히 인삼 농장을 노렸다 이거지.”

한편 긴테스와 부하들은 필요한 정보를 모두 알아내자 행여나 오덕팔이 변심하기 전에 일을 벌이기로 했다.

다음 날 바로 짐을 싸서 그동안 머물던 주막을 나와 지난번에 은신처로 삼았던 성 밖의 버려진 암자로 옮긴 뒤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밤이 되자 긴테스와 부하들은 산등성이를 타고 인삼 농장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인적이 없는 험한 산을 헤치며 갔지만 특수훈련을 받았기에 큰 어려움 없이 아주 빠르게 움직였다.

그렇게 한 시진가량 산길을 내달린 긴테스와 부하들은 인삼 농장을 둘러싸고 있는 토벽을 앞에 두고 멈춰 섰다.

조선은 인삼의 외부 유출을 막기 위해서 토벽을 쌓아 농장 전체를 아예 외부와 차단시키고 국왕 직속의 근위군단 병력 삼천 명을 배치해 요새처럼 만들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교대 시간입니다.”

그동안 개성부에 머물면서 오덕팔을 함정에 빠뜨리는 한편 농장 경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철저히 파악해 뒀다.

아니나 다를까 병사들이 교대를 한다고 토벽 위가 조금 소란스러워지며 경계 순간적으로 느슨해졌다.

이걸 기다리고 있던 긴테스는 지체 없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자.”

긴테스를 선두로 검은색 야행복을 입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부하들이 재빨리 숨어 있던 덤불을 밖으로 나와 토벽 밑에 바짝 등을 붙이고 섰다.

힐끗 고개를 들어 위를 살핀 긴테스가 수신호를 하자 언제 꺼냈는지 어깨에 둘러매고 있던 줄을 풀어 손에 든 후미오가 팔을 크게 돌리며 앞에 달린 갈고리를 던졌다.

휘리릭. 탁!

갈고리가 성가퀴에 걸려 단단히 고정되자 후미오는 재빨리 줄을 잡고 토벽을 올라갔고 나머지도 그 뒤를 따랐다.

토벽 위에 올라선 긴테스와 부하들은 줄을 다시 회수해서 침투한 흔적을 지우고는 교대를 끝낸 경비병들이 오기 전에 얼른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농장 안에도 네 명씩 짝을 지은 경비병들이 수시로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긴테스와 부하들은 어렵지 않게 들키지 않고 더욱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물론 가끔씩 눈에 띄지 않게 설치된 감시 초소에 걸릴 뻔하기도 했지만 오덕팔이 그려 준 지도를 보고 사각지대로 교묘히 빠져나갔다.

지금 같은 밤에는 뭔지 구분이 어렵게 위장이 되어 있었기에 오덕팔의 도움이 없었다면 발각돼 벌써 비상종이 울렸거나 어쩔 수 없이 처리를 했어야 됐다.

아무튼 그렇게 한참을 이동한 긴테스와 부하들은 농장에서도 가장 안쪽에 만들어진 한 창고에 도착했다.

“저깁니다.”

요헤이의 말이 아니더라도 다른 건물과 달리 주위를 화톳불로 환하게 밝히고 경비병 다섯 명이 지키고 서 있는 걸 보면 뭔가 중요한 걸 보관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속하게 처리하고 물건을 확보한다.”

“예.”

짧게 대답한 부하들이 독이 발린 표창을 양손에 하나씩 꺼내 들자 긴테스도 시퍼렇게 날이 선 단검을 꽉 움켜쥐었다.

손을 쓰려는 순간 커다란 고함과 함께 횃불이 여기저기서 켜지며 주변이 환하게 밝아졌다.

“멈춰라!”

갑작스러운 상황에 멈칫하며 긴테스가 주위를 둘러보자 언제 포위를 한 건지 완전무장한 병사 수십 명이 창을 겨눈 채 그와 부하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검은색 무복을 입고 검을 뽑아 든 채 병사들 앞에 나와 있던 진성준이 당황한 긴테스를 보며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다 끝났다. 무기를 버리고 순순히 항복해라!”

“제길!”

긴테스가 낮게 욕설을 내뱉자 부하들이 그를 보며 다급히 말했다.

“이제 어쩌지요?”

그러자 긴테스는 이를 악물며 손에 든 단검을 진성준에게 던지며 외쳤다.

“어차피 잡히면 죽은 목숨이야. 이렇게 된 거 힘으로 강행 돌파한다!”

“옛.”

대답과 함께 부하들도 가지고 있던 표창을 힘껏 투척하고는 등 뒤에 매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휘이익. 챙!

날아오는 단검을 재빨리 검으로 쳐 낸 진성준은 상대가 항복을 하지 않고 덤벼들자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

“부나방 같은 놈들. 한 놈도 놓치지 말고 모두 제압해라!”

“와아아!”

채챙! 챙! 챙!

“꾸엑.”

“컥!”

순식간에 양쪽이 한데 뒤엉키며 창고 앞마당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으로 가득 찼다.

과연 막부의 숨은 검이라는 이야기를 듣던 이가 닌자 가문 출신답게 다들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가져 병사들이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으면서도 쉽게 상대를 제압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닌자들의 무술이 침투와 암살 등에 특화된 거였기에 시간이 갈수록 밀리는 기색을 보였다.

거기다가 이들 못지않은 무술의 고수인 진성준과 주작단 단원들이 가세해 압박하자 금방 수세에 몰렸다.

결국 부하인 요헤이와 후미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치명상을 입은 채 제압당했고 긴테스도 옆구리 깊숙이 검상을 입고 말았다.

“크흑.”

한쪽 손으로 시뻘건 피가 배어나는 옆구리를 감싼 채 긴테스가 주춤 뒤로 물러서자 진성준이 검 끝을 겨누면서 차갑게 말했다.

“포기해.”

“흥! 죽어도 네놈들 손에는 안 죽는다.”

“……!”

불길한 느낌에 진성준이 눈을 치켜뜨자 긴테스가 입을 오물거리더니 뭔가를 깨무는 행동을 했다.

긴테스가 자결을 하려는 걸 알아차린 진성준은 얼굴을 구기며 소리쳤다.

“젠장 할! 놈을 잡아.”

진성준이 앞으로 몸을 날리는 것과 함께 근처에 있던 주작단 단원들도 긴테스한테 덤벼들었고 상대는 크게 저항을 하지 않고 누군가 휘두른 주먹을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지독한 놈!”

벌써 독기가 돌기 시작했는지 눈이 하얗게 뒤집힌 채 긴테스가 거품을 물자 상태를 본 단원이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하지요?”

“일단 입부터 벌려!”

소리를 친 진성준은 다급한 마음에 단원들이 움직이는 걸 기다리지 않고 한쪽 다리를 꿇고 앉아서는 쓰러져 있는 긴테스의 입을 억지로 벌리고는 손가락을 안으로 넣었다.

“커. 컥.”

어렵지 않게 이빨 사이에 있던 작은 독약 주머니를 찾아냈지만 이미 절반 이상 삼킨 뒤였다.

얼굴을 구긴 진성준은 재빨리 품속에서 검은색 환약을 하나 꺼내서는 긴테스의 목구멍에 밀어 넣었다.

만약을 위해 주작단 단원들이 소지하고 다니는 해독약이었는데 긴테스가 먹은 독약에도 효과가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뿐이었다.

“여기 의원이 있지?”

“예.”

“어서 그리로 옮겨라. 배후를 알아내려면 어떻게든 살려야 돼!”

“알겠습니다.”

굳은 얼굴로 대답한 단원들이 긴테스를 양쪽에서 들어 황급히 의원으로 옮기자 몸을 일으킨 진성준은 고개를 돌려 나머지 두 명의 상태를 살폈다.

큰 부상을 입고 제압당한 요헤이와 후미오는 방금 전 상황을 본 단원들에 의해 자결을 하지 못하도록 입에 재갈이 물려 있었다.

살아는 있었지만 피를 많이 흘렸는지 얼굴이 온통 하얗게 창백해진 채 숨을 헐떡이고 있는 것이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인삼 씨앗을 훔쳐 가려던 놈들을 잡아 배후까지 몽땅 다 캐내려던 계획이 어그러진 것에 진성준은 인상을 쓰며 짧게 혀를 찼다.

충격적인 사건에 인삼 농장은 비상이 걸렸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에 퇴근을 하지 않고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던 김상용은 보고를 받자마자 바로 현장으로 달려왔다.

“여기에 있었군.”

초조한 얼굴로 농장 내 치료소 마당을 서성이던 진성준은 단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서는 김상용 지부장을 보고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어떻게 됐나?”

다짜고짜 던지는 물음에 진성준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셋 중에 하나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죽었고 독단을 깨문 놈은 의원이 애를 쓰고 있습니다만 아직 인사불성입니다.”

“중독된 놈이 우두머리라고 했지?”

“예.”

힐끗 앞에 서 있는 진성준 너머에 있는 치료소를 쳐다본 김상용 지부장은 정색을 하며 재차 물었다.

“그놈 살릴 수 있는 거야?”

“그게, 독이 이미 전신에 다 퍼진 상태라…….”

“어렵다 이거군.”

“죄송합니다.”

“거기서 자결을 할 거라고 누가 생각을 했겠나. 그나저나 배후를 알아내야 되는데 큰일이군.”

김상용 지부장이 고심에 찬 표정을 짓자 진성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왜국에서 건너온 닌자들 같습니다.”

그러자 김상용 지부장은 눈에 이채를 띠며 진성준을 봤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놈들이 쓰는 무술이 왜국 닌자들의 것과 유사했습니다.”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아나?”

“지난번 왜국 원정 때 저도 참전을 했었지 않습니까.”

“그랬지.”

“그때 입에 담기도 송구스럽지만 막부가 국왕 전하를 암살하려고 침투시킨 닌자들과 맞부딪쳐 싸운 적이 있는데 오늘 잡은 놈들하고 움직임이 똑같았습니다.”

“으음.”

뭔가 부족하다는 얼굴을 하자 진성준이 쐐기를 박는 말을 했다.

“그리고 과다출혈로 죽은 자가 마지막 순간에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분명 왜국 말이었다.”

“확실한 거겠지?”

“저뿐만 아니라 다른 단원들도 똑똑히 들었습니다.”

김상용 지부장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럼 막부가 꾸민 일이라는 거야!”

“그렇게 확정짓는 건 아직 성급한 것 같습니다.”

진성준의 말에 김상용 지부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쏘아봤다.

“방금 자네가 습격해 온 놈들이 왜국의 닌자라고 하지 않았나!”

“그랬습니다만 지금 막부가 처해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아무리 아국의 인삼이 탐난다고 해도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을 겁니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에도 성 바로 옆에 주둔 중인 아군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막부와 맺은 협정에 따라 조선군 수천 명이 에도 성 부근 요새에 장기 주둔 중이었기에 진성준의 말처럼 언제든지 상대의 목줄을 틀어쥘 수 있었다.

무엇보다 현재 막부는 조선군한테 에도성을 함락당한 이후 권위가 땅에 떨어지며 각지에서 반란과 항명이 속출해 예전처럼 힘을 못 쓰고 있었다.

한마디로 내부를 추스르기에도 정신이 없는 상황이라는 거였다.

그런 상태에서 왜국과 청나라를 연파하며 강대국으로 올라선 조선의 콧수염을 뽑는 무모한 짓을 벌일 가능성은 낮았다.

“그럼 배후가 어디라는 거야?”

“막부보다는 그에 반하는 지방 번주이거나 상단 아님 왜국과 전혀 상관이 없는 제삼의 곳일 수도 있습니다.”

김상용 지부장은 낮게 침음성을 흘리며 인상을 썼다.

“음. 결국 원점인 거잖아.”

“…….”

짜증 섞인 김상용 지부장의 말에 진성준 역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시는 이딴 짓을 벌이지 못하도록 확실히 뿌리를 뽑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배후를 알아내야만 돼.”

“알고는 있습니다만 열쇠를 쥔 놈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상태라…….”

“다른 한 녀석이랑 술수에 걸려든 오덕팔은 심문을 해 봤나?”

진성준의 회의적인 얼굴로 대답했다.

“오덕팔은 처음부터 이용만 당한 것이고 나머지 한 놈은 부상이 심해 아직 본격적으로 심문을 하지 못했지만 나올 것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끄응. 자결을 시도한 놈의 입을 열어야 된다 이거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모든 걸 알고 있는 긴테스가 겨우 생명을 붙여 놓고 있었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정말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이대로 사건이 마무리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미간을 좁힌 채 잠시 고심하던 김상용 지부장은 뭔가 결정을 내렸는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 우두머리라는 놈이 오래 버티기 어렵다고 했지.”

“예.”

“아편을 써서 놈한테 자백을 받아 내도록 해.”

김상용 지부장의 지시에 진성준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까딱 잘못하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릅니다.”

“알고 있어. 하지만 배후를 알아내야 되는데 다른 방법이 없잖아. 그리고 어차피 이대로 놔둬도 죽을 녀석이라면서 그러니 되든 안 되든 모든 수단을 써 봐야지!”

상당히 잔인한 명령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방법으로라도 어떻게든 정보를 캐내야 된다는 사실 또한 모르지 않았기에 결심을 굳힌 진성준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결정이 내려지자 다음 일은 아주 신속하게 진행됐다.

즉시 치료소 방 안에 누워 사경을 헤매고 있는 긴테스에게 아편이 투여됐고, 왜국 말을 할 줄 아는 진성준이 직접 그를 심문했다.

처음에는 이가 닌자 가문을 보호하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긴테스가 입을 다물고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자 진성준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치사량에 가까울 정도로 아편을 더 먹였다.

그러자 아편에 완전히 취한 긴테스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묻는 대로 모든 걸 실토하고 말았다.

무리하게 약을 쓰는 바람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숨이 끊어지고 말았지만, 진성준은 배후가 누군지 어느 정도 윤곽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알아낸 정보를 모두 취합한 김상용 지부장은 지급으로 보고서를 한양에 위치한 주작단 본부로 보냈다.

“인삼 씨앗을 훔쳐 가려고 했다니 그게 사실인가!”

도현이 무섭게 눈을 부릅뜨며 묻자 앞에 앉아 있던 이완 단장 역시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꽝!

손바닥으로 앞에 놓인 서탁을 세게 내려친 도현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누구 짓이야!”

“농장에 침투한 흉수들을 붙잡아 조사한 결과 왜국 이가 닌자인 걸로 판명됐사옵니다.”

지난번 왜국 원정 때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었던 도현은 이가 닌자라는 말에 바로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이에미쓰 이놈이 감히!”

도현이 바로 막부가 이번 일을 꾸민 것이라 생각하자 이완 단장이 신중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막부가 아니라 제삼의 세력이 일을 꾸몄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흉수들을 붙잡아 심문하는 과정에서 로만이라는 이름의 서양 상인에게 사주를 받았다는 자백을 받아 냈다고 하옵니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도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서양 상인이라고?”

“예. 씨앗을 훔치면 동래 왜관을 통해 나가사키로 빠져나가서 넘겨줄 계획이었다고 하옵니다.”

“막부가 관련이 없는 건 확실한 거야? 혹시 우릴 교란시키려고 일부러 거짓말을 한 걸 수도 있잖아.”

“그것도 고려를 해 봤습니다만 지난번 왜국 원정 때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로 책임 추궁을 받는 걸 두려워한 막부가 이가 닌자 가문을 가혹하게 내팽개쳐서 둘 사이의 인연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하옵니다.”

도현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가운데 이완 단장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요 몇 년 사이에 인삼의 효능이 알려지면서 서양으로 많이 팔려 나간 걸 고려해 볼 때 서양 상인 가운데 누군가 씨앗을 훔쳐 내 재배를 시도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옵니다.”

“으음.”

낮게 침음성을 내뱉은 도현은 머리를 차갑게 식히며 드러난 정보를 하나씩 차분히 정리해 봤다.

그가 생각을 해도 이미 큰 타격을 입고 내부 소요를 정리하기에도 벅찬 막부가 잘못되면 조선과 전면전을 각오해야 되는 일을 벌일 가능성은 아주 낮았다.

거기다가 정보대로 막부와 이가 닌자 가문이 서로 등을 돌린 상태라면 더욱 아귀가 안 맞았다.

그럼 서양 상인이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싼 인삼을 손에 넣기 위해 일을 꾸민 것으로 무게추가 기울어졌다.

이럴 경우 이가 닌자들이 개입된 것은 외모에서 차이가 나는 서양인들이 직접 조선 내로 들어와 씨앗을 훔치기는 어려우니 거액을 주고 의뢰를 했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다.

대충 어떻게 된 상황인지 가닥이 잡힌 도현은 크지는 않지만 분노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정도 일이라면 일개 상인 혼자서 꾸미기는 어려웠을 테고 영길리와 화란 둘 중에 어딘 것 같나?”

그러자 이완 단장의 사건의 심각성을 잘 알기에 아주 신중한 태도로 이야기를 했다.

“물건을 넘겨받기로 한 장소가 다른 곳이 아닌 나가사키라는 것에서 실마리를 찾았사옵니다.”

“계속해 봐.”

“왜국 유일의 개항장으로 서양 상인들의 출입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곳이지만 십 년 전부터 막부가 취한 크리스트교 금교와 통상 수교 금지 정책으로 인해 아국과 명나라를 제외하면 포교 활동을 하지 않는 화란 상인만이 유일하게 출입이 허용되고 있사옵니다.”

“그럼!”

“화란 동인도회사가 배후이거나 최소한 화란인이 일에 개입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옵니다.”

주작단 수장답게 아주 논리적인 추리에 도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거기다가 최근 아국이 대만 북부를 장악하고 영길리 상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걸로 상황이 여의치 않아 침묵하고 있지만, 화란이 심기가 크게 상해 있으니 이런 짓을 벌였을 동기가 충분하지 않겠사옵니까?”

“이놈들을 그냥!”

서탁 위에 올린 주먹을 꽉 움켜쥔 도현은 고개를 들어 이완 단장을 보며 말했다.

“이완 단장.”

“옛.”

“이번에 확실히 버릇을 고쳐 놓지 않으면 언제고 또다시 이런 짓을 벌일 거야. 분명 저 뻔뻔한 것들은 항의를 하면 아니라고 오리발을 내밀 테니 화란이 그러지 못하도록 확실한 증거가 필요해. 확보할 수 있겠나?”

“맡겨만 주시옵소서.”

자신 있게 대답하는 이완 단장의 모습에 도현은 신뢰가 가득한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면서 강한 어조로 지시를 내렸다.

“놈들이 누굴 건드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도록 해!”

“알겠사옵니다, 전하.”

고개를 숙이는 이완 단장의 눈에서는 진한 살기가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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