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추궁 (93/104)

추궁

희정당을 나온 이완 단장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본단 간부들을 모두 소집해 방법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가 닌자들에게 일을 맡긴 로만이라는 상인에게 직접 자백을 받아 내는 것이 가장 낫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그리고 이완 단장은 김근행을 책임자로 하여 특수조를 꾸리게 한 다음 왜국으로 파견하는 수순을 밟았다.

코를 찌르는 향신료의 냄새.

바람을 타고 흘러드는 바다의 짠 냄새와 먹이를 찾아 지붕 위를 선회하는 갈매기들.

국적 불명의 외국어로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사내들의 웃음소리와 손님을 유혹하는 상인들의 외침이 모두 한데 섞여 오늘도 나가사키의 항구 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행인들로 북적거렸다.

인종도 성별도 심지어 옷차림새도 전혀 다른 사람들이 활기찬 발걸음으로 오가는 가운데, 별다른 특징 없는 한 중년 사내가 어떤 건물에서 나와 손을 들어 인력거를 잡아탔다.

흥정을 하는 모양인지 인력거꾼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뒷자리에 올라타곤 출발 신호를 보냈다.

인력거가 사람들을 헤치며 어디론가 향하자, 그 뒷모습을 집요하게 따라붙는 두 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저자입니다.”

길 건너편, 차와 경단 등을 파는 찻집 바깥 평상에 앉아 부른 배를 두드리며 이를 쑤시고 있던 사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대꾸했다.

“다행히 호위 같은 건 없군.”

“예. 가끔씩 상단 직원을 데리고 다니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 지금처럼 혼자 돌아다닌다고 합니다.”

“우리한테는 잘된 일이지.”

“예.”

그의 말에 대답하는 청년 역시 주위에 흔히 지나다니는 왜국인들과 비슷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늦은 점심을 즐기는 평범한 두 친구처럼 보였지만 실상 이들은 이완의 명을 받고 왜국으로 파견된 김근행과 그 부하였다.

주변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그래도 둘은 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좋아. 그럼 가 볼까.”

두 사람이 소리 없이 사라진 그 자리에는 먹은 값을 정확히 계산한 동전만이 접시 위에 놓여 작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이틀을 더 지켜보며 목표의 동선을 파악한 김근행은 나가사키에 도착한 지 나흘째 되는 날 작전을 결행하기로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선착장 근처에 위치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지부에서 이런저런 업무를 처리한 로만은 신시申時(오후3~5시)가 되자 건물을 나와 숙소로 가기 위해 인력거를 잡아탔다.

덜그럭. 덜그럭.

흔들리는 인력거에 몸을 기댄 채 멍하니 거리 풍경을 바라보던 로만은 원래 다니던 길이 아닌 다른 골목으로 들어가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를 삐죽 내밀어 주위를 둘러본 로만은 능숙한 왜국 말로 인력거꾼을 불렀다.

“이봐, 이 길이 아니잖아.”

하지만 인력거꾼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뛰어가자 로만은 눈가를 찡그리며 화난 어투로 소리를 쳤다.

“내 말이 안 들리는 거야!”

그러자 인력거꾼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서더니 천천히 뒤로 몸을 돌렸다.

얼굴을 드러낸 인력거꾼은 바로 얼마 전 김근행과 함께 있던 주작단 단원이었다.

“긴테스라고 알지?”

“……!”

인력거꾼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나오자 로만은 흠칫 눈을 치켜떴다.

“깜작 놀라는 걸 보니 네놈이 시킨 것이 맞나 보군.”

“넌 누구냐?”

“조선에서 왔다.”

“뭣이!”

조선이라는 말에 로만은 일이 잘못됐다는 걸 바로 깨달았다.

“다치기 싫으면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흥! 미친놈, 내가 얌전히 따라갈 줄 알았냐?”

버럭 고함을 내지른 로만은 몸을 앞으로 일으키면서 감춰 놓고 있던 권총을 꺼내 들었다.

아무런 대책 없이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렇게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기에 혼자 움직이던 거였다.

위기의 순간이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인력거꾼으로 위장한 사내는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여유로웠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바로 그때 언제 몰래 접근했는지 왼편에서 다른 주작단 단원 한 명이 재빨리 덤벼들어 권총을 든 로만의 손을 세게 내려쳤다.

퍽!

“크윽.”

극심한 고통에 로만은 그만 권총을 놓치고 말았다.

떨어진 권총을 집어 든 사내는 가소로운 얼굴로 금방 퉁퉁 부어오른 오른쪽 손목을 부여잡고 있는 로만을 봤다.

“이럴 줄 알았지.”

“워, 원하는 것이 뭐요? 돈이라면 얼마든지 주겠소!”

“그냥 조용히 따라오기만 하면 돼.”

이들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는지 몰랐지만 로만은 본능적으로 좋은 꼴을 보기 힘들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유일한 자위 수단인 권총을 너무나 어이없이 빼앗겨 버린 그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급해진 로만은 주위의 도움이라도 구하려고 있는 힘껏 소리를 내질렀다.

“사람 살려!”

“이 자식이.”

그러자 사내가 얼굴을 구겼고 왼편에 있던 단원이 인력거 안으로 뛰어올라 하얀 무명천으로 로만의 입을 강제로 막았다.

“읍. 읍.”

팔과 다리를 거칠게 움직이며 마구 발버둥을 치던 로만은 이내 무명천에 묻혀 둔 약물에 취해 정신을 잃고 축 늘어졌다.

뺨을 때려 로만이 완전히 쓰러진 걸 확인한 사내는 눈가를 살짝 찡그린 채 주변을 둘러봤다.

일부러 인적이 거의 없는 후미진 골목길로 들어왔지만 조금만 나가면 번화가였기에 혹시라도 로만의 고함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오면 큰일이었다.

다행히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사내는 살짝 안도한 표정을 짓고는 옆에 있는 동료를 보며 말했다.

“귀찮은 일이 생기기 전에 어서 여길 빠져나가자고.”

“그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밧줄로 손과 다리를 단단히 묶은 두 사람은 로만을 인력거에서 빼내 미리 준비해 둔 짐마차로 옮겼다.

짐마차에는 나무 상자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열어 정신을 잃은 채 늘어져 있는 로만을 구기듯 집어넣었다.

“으쌰!”

“더럽게 무겁네.”

혹시나 누가 열어 보지 않게 못까지 쳐 버린 두 사람은 인력거를 골목길 한쪽에 버려두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짐마차를 끌며 다시 큰길로 나갔다.

상인들의 호객 소리와 지나다니는 행인들로 북적거리는 번화가를 느릿느릿 지난 짐마차는 곧장 바닷가에 위치한 선착장으로 향했다.

왜국 유일의 개항장답게 넓은 선착장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각양각색의 선박들이 가득 정박해 있었다.

그중에는 당연히 조선에서 온 배들도 있었다.

판옥선을 개조해서 만든 조선 상선들은 다른 나라 배들과 확연히 차이가 났는데 봉황상단 깃발을 돛대 위에 높이 매단 배 한 척이 이제 곧 출항을 하려는지 분주히 물건을 선적하고 있었다.

주작단 단원들은 자연스럽게 짐마차를 그쪽으로 몰고 갔다.

그러자 상인으로 위장한 김근행이 두 사람을 보고는 가까이 다가오며 일부러 호들갑을 떨었다.

“이제 오면 어떻게 해!”

“아이고. 죄송합니다. 물건이 늦게 도착해서 그만…….”

“에잉. 어서 배에 올리게 저리로 가져가!”

“예.”

허리를 굽실거리며 두 사람이 짐마차를 상선 쪽으로 끌고 가려고 하자 한쪽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막부 관리가 다가왔다.

“이건 뭐요?”

“아, 예. 조선으로 가져갈 구리괴입니다.”

“한데 왜 지금에서야 오는 거요?”

막부 관리가 트집을 잡자 김근행이 미소를 띤 얼굴로 슬쩍 시선을 가리며 말했다.

“제가 서두르라고 했는데 느려 터져서 이거, 죄송합니다.”

“금수품이 아닌지 확인을 해 봐야 되니 상자를 열어 보라고 하시오.”

“이제 조금 있으면 배가 출항해야 되는데 그러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규칙이니 어쩔 수 없소.”

언제부터 원리원칙대로 일을 했다고 상대가 깐깐하게 나오자 김근행은 소매에서 작은 돈주머니를 하나 꺼내 막부 관리의 품에 찔러 줬다.

“해가 떨어지면 배를 띄우기 어렵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시지 마시고 고생하시는데 이걸로 목이나 축이십시오.”

처음부터 이걸 노렸는지 뇌물을 주자 막부 관리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바로 태도를 바꿨다.

“흠흠. 사정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대신 다시는 이러지 마시오.”

“물론이지요.”

“그럼 난 가 보겠소.”

뒷짐을 진 막부 관리가 휘적거리며 수행원들과 함께 선착장을 떠나자 얼굴에서 미소를 지은 김근행이 차갑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쥐새끼 같은 놈.”

“접장님, 물건을 배에 실었습니다.”

인력거꾼으로 위장했던 사내가 옆으로 다가와 조용히 이야기를 하자 김근행은 머리를 작게 끄덕였다.

“흔적은 안 남겼겠지?”

“물론입니다.”

“좋아. 시끄러워지기 전에 여길 뜨자고.”

“예.”

몸을 돌린 김근행이 사내와 함께 배에 승선하고 얼마 있지 않아서 상선은 닻줄을 끌어 올리고는 천천히 선착장을 빠져나와 먼 바다로 나갔다.

바다로 나오자 김근행은 약에 취한 채 나무 상자에 들어 있던 로만을 꺼내 선실에 가두고는 본격적인 심문을 벌였다.

처음에는 이번 일이 얼마나 파급력이 클지 잘 알고 있던 로만이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떼며 인삼 씨앗을 훔쳐 오라고 한 걸 부정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혹독한 고문이 가해지고 김근행이 증거를 하나둘 보여 주며 협박하자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한번 의지가 무너지자 그다음부터는 붓물 터지듯 아는 걸 전부 다 실토했고 주작단은 이번 사건의 전후 사정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추가로 결정적인 증거들을 몇 개 더 수집한 이완 단장은 며칠 뒤 대궐로 가서 도현에게 최종 보고를 했다.

“그러니까 화란 동인도회사가 꾸민 일이라 이거지!”

엄밀히 말하면 발데 총관의 묵인 아래 동인도회사 소속 상인 중 하나인 로만이 독자적으로 추진한 거였지만 상대의 책임을 더 무겁게 하려는 도현의 의도를 파악한 이완 단장은 굳이 지적을 하지 않았다.

“그렇사옵니다. 사주를 받은 닌자들이 인삼 씨앗을 훔쳐 내면 그걸 자신들의 세력 아래에 있는 남방 섬으로 가져가 몰래 재배하려고 했다 하옵니다.”

“이런 배은망덕한 자들이 있나!”

이야기를 들은 도현이 보료를 연신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분을 삼키지 못하자 왼편에 앉아 있던 총리대신 박황이 역시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에 대해 화란 측에 엄중히 항의를 해야 될 것이옵니다.”

그러자 희정당 안에 있던 다른 대신들도 이구동성으로 화란 동인도회사의 행동을 지탄했다.

“총리대신의 말씀이 맞사옵니다.”

“그냥 있어서는 절대 아니 될 것이옵니다.”

도자기와 자개장, 연필 등 여러 가지 수출품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인삼이 가장 중요한 물품이었고 오직 조선에서만 만들어지는 거였기에 이런 반응은 당연한 거였다.

도현 역시 이번 사건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만.”

손을 들어 대신들을 조용히 시킨 도현은 이완 단장에게 물었다.

“보고서에 적힌 내용이 정말 확실한가?”

“예.”

“이 사실을 공론화시키면 양국 사이에 큰 분쟁이 일어날 거야. 행여나 상대편한테 책을 잡히는 일이 없어야 될 걸세.”

정색하고 말하는 도현에게 이완 단장이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옵니다.”

그런데 이때 상공대신 유형원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전하, 중차대한 일이긴 하오나, 좀 더 사정을 두고 보았다가 판단을 내리시는 것이 어떻사옵니까.”

그 말을 들은 이완 단장이 날카롭게 상공대신을 노려보았다.

“상공대신께서는 우리 주작단의 정보가 미덥지 못하단 말씀이시오.”

“그런 게 아니라, 이번 사건이 끼칠 파장이 막대하니 신중하게 다루자는 것이외다.”

신중론을 제기하는 윤원형에게 또다시 반대 의견이 날아들었다.

“이미 모든 것이 만천하에 드러난 마당에 망설일 이유가 어디 있소?”

그리고 성격이 불같은 국방대신 임경업 장군은 도현에게 직접 호소했다.

“전하, 그들이 다시는 이딴 짓을 하지 못하게 단단히 본때를 보여 줘야 합니다.”

“국방대신은 무조건 힘으로 다 해결하실 작정이시오? 청나라와 전쟁을 마무리 지은 게 불과 얼마 전인데 또 병사들을 불러 모은단 말입니까?”

“그럼 상공대신은 그냥 참고만 있자는 소리요?”

“어허, 그러니까 아까부터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고 있지 않소. 일이 막중하니 일단 대화로 먼저 해결해 보자는 것이지요.”

잠시 잠잠했던 방 안이 다시 대신들의 갑론을박으로 시끄러워질 기미를 보이자 도현은 앞에 있는 서탁을 내리쳐 이목을 집중시켰다.

“다들 그만하시오!”

서릿발 같은 호령에 대신들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가 시장 바닥도 아니고, 어찌 이리 경망스럽게 군단 말인가.”

도현은 기분 나쁜 듯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겉으론 웃고 있어도 뒤로 비수를 숨기고 있는 자하곤 절대 신뢰를 나눌 수 없는 법. 설사 화란과 전쟁을 벌이는 한이 있어도 이번 일은 반드시 시시비비를 확실히 가릴 것이오. 이게 나의 뜻이니 경들은 그리 알고 계시오!”

“예.”

도현의 결정에 반색을 하는 대신들과 달리 화란 동인도회사와 관계가 틀어지면서 발생할 피해를 처리해야 되는 상공대신 유형원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 역시 조선의 핵심 수출품인 인삼 씨앗 유출 시도를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도현의 명령이었기에 더 이상 반대 의견을 내지 않고 받아들였다.

“국방대신.”

“하교하시옵소서, 전하.”

“힘을 써야 되는 경우가 생긴다면 함대를 동원해야 될 테니 총참모부는 그에 따른 계획을 수립하시오!”

“알겠사옵니다.”

대답을 하는 임경업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충분한 응징을 가해 어느 누구도 다시는 이런 짓을 못하도록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줘야 되겠지만, 그에 따른 명분을 쌓고 저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이야기를 들어 봐야 될 테니 외무대신은 완도 상관에 있는 화란 측 대표를 불러 이번 일에 대해 추궁토록 하시오!”

비둘기파에 속하는 외무대신 박노는 무조건 힘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여지를 두는 도현의 지시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겠사옵니다.”

그렇게 결정이 내려지자 어명을 받은 선전관이 배를 타고 곧장 완도 상관으로 내려갔다.

아직 일이 모두 다 들통 났다는 걸 모르고 있던 완도 상관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지부는 갑작스러운 소환 명령에 발칵 뒤집혔다.

비상회의를 소집한 지부장 헤나로는 상관 관리소를 통해 전달 받은 소환장을 앞에 두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한양으로 올라오라니 무슨 일인지 모르겠구먼.”

“그러게 말입니다. 거기다가 소환장을 줄 때 분위기가 어쩐지 평상시와 달랐던 것이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무슨 이유인지 조금이라도 짐작되는 것이 없나?”

방 안에 모여 있던 간부들은 헤나로의 물음에 선뜻 대답을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걸 보며 헤나로가 답답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루고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 상인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혹시 그 일이 잘못된 게 아닐까요.”

“무슨 일을 말하는 건가?”

“인삼 씨앗을 빼내 오기로 한 거 말입니다.”

흠칫 놀란 표정을 지은 헤나로 지부장은 자신들밖에 없는데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목소리를 낮춰 책망하듯 말했다.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함부로 입에 담는 건가!”

“하지만 그거 말고는 딱히 조선 측이 소환장을 보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것도 상공부가 아닌 외무대신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으음.”

타당성이 있는 주장에 헤나로 지부장과 간부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행여나 사실이라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기에 애써 부정을 했다.

“이쪽이 드러나지 않도록 신중에 신중을 기했는데 그건 아닐 걸세.”

“저도 그러기를 바라지만 소환장이 온 것도 그렇고 여태까지 개성에 간 이들이 아무런 소식도 없는 게 불안합니다.”

“뭔가 사정이 있겠지. 그리고 인삼 씨앗을 훔쳐 내는 것이 쉬웠으면 다른 데서 벌써 수를 썼지 않겠나.”

“맞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잡혔다면 조선 측에서 가만히 있겠소이까? 일이 벌어져도 벌써 터졌을 것이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불길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이 전부 아닐 거라고 말하자 루고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니라면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분위기가 약간 흐트러진 가운데 지부 간부 한 명이 헤나로를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시선을 내려 앞에 놓인 소환장을 쳐다본 헤나로 지부장은 낮게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일단 가 봐야겠지.”

“무슨 용건인지 파악할 때까지 출발을 조금 뒤로 미루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잠시 고심을 하던 헤나로 지부장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이렇게 날짜까지 명시가 되어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그거야 적당히 핑계를 대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들통이라도 나면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꼴이 될 수도 있으니 그냥 저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

“그럼 만약을 대비해서 바타비아 요새에 가 계시는 발데 총관께 연락이라도 해 두시지요.”

“뭐라고 말인가?”

“그냥 사실대로 이런 일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랬다가 별일이 아니면 어쩌려고?”

괜히 문제를 키우는 것 같아 헤나로 지부장이 썩 내켜 하지 않자 간부가 다시 그를 설득했다.

“소환장까지 보냈다는 건 뭔가 중요한 일이 있다는 뜻이지 않겠습니까.”

“흠.”

팔짱을 낀 채 어찌할지 망설이던 헤나로 지부장은 머리를 들며 말했다.

“어차피 좀 있으면 정기 연락선을 띄울 때가 됐으니 그 편에 편지를 써서 보내도록 하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나가사키에 사람을 보내서 은밀히 로만을 만나 일이 어찌 되고 있는지 한번 알아보도록 하게.”

“예.”

아닐 거라고 하면서도 헤나로 지부장 역시 마음 한편으로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 내지 못한 거였다.

다음 날 배를 띄워 나가사키로 간 루고는 벌써 며칠째 로만이 실종 상태인 걸 알고 화들짝 놀랐다.

워낙 은밀히 진행되는 일이었기에 로만이 뭘 하고 있었는지 까맣게 모르던 나가사키 지부에서는 그가 실종되자 백방으로 손을 써 찾고 있으면서도 정작 바타비아나 완도 상관으로는 연락을 전혀 해 주지 않았던 거였다.

불길한 느낌을 받은 루고는 바로 완도 상관으로 돌아가 이 사실을 헤나로 지부장한테 알리려고 했지만 갑자기 날씨가 안 좋아져서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출발 날짜가 임박해 왔는데도 루고가 돌아오지 않자 헤나로 지부장은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모른 채 한양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수도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예전부터 전략적인 중요성을 인식해 수군만호를 두고 지켰던 제물포는 도현의 치세에 들어서면서 물류의 중심지로 더욱 성장해 몰라볼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넓은 선착장에는 각지에서 온 배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물건을 하역하고 선적하기 위해 수많은 일꾼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런 가운데 다른 배들과 달리 뱃머리가 뾰족하게 생긴 서양 범선 한 척이 선착장 한쪽에 도착해 닻을 내렸다.

예전에 발데 총관과 함께 제물포를 방문한 적이 있던 헤나로 지부장은 난간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며 작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여긴 그사이에 더 커진 것 같군.”

그러자 수행원으로 온 한센이라는 이름의 상인이 말을 받았다.

“왕성인 한양으로 들어가는 모든 물자가 모이는 곳이니 그럴 수밖에요. 이걸 보면 조선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군.”

확실히 조선이 발전해 나가는 걸 보면 놀라울 정도였다.

인삼과 도자기 등 여러 가지 귀한 상품을 생산해 내기도 하지만 몇 년 사이에 왜국을 누르고 청나라를 만리장성 너머로 밀어내며 명실상부한 동아시아의 패자로 우뚝 선 조선은 이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입장에서는 결코 놓칠 수 없는 중요한 국가가 됐다.

그래서 이번 소환 명령이 더욱 그의 마음을 무겁고 복잡하게 만들었다.

“지부장님, 잔교가 설치됐습니다. 이제 내려가시죠.”

“알겠네.”

선장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난 헤나로 지부장은 수행원들과 함께 잔교를 이용해 배에서 내렸다.

가져온 물건들이 하역되길 기다리며 조금 서 있자 조선 관리로 보이는 일단의 무리가 다가왔다.

“헤나로 지부장 되시오?”

“아, 예. 그렇습니다.”

“도성으로 올라가야 되니 어서 마차에 오르시오.”

상당히 퉁명스러운 조선 관리의 말에 헤나로 지부장과 수행원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바로 가자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아니, 이제 막 도착했는데 그건…….”

옆에 있던 한센이 가볍게 항의를 했지만 조선 관리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난 내일까지 그대들을 한양 객관으로 데리고 오라는 지시를 받았을 뿐이오.”

“이것 참.”

꽉 막히고 어쩐지 딱딱한 조선 관리의 태도에 헤나로 지부장 일행은 크게 당황스러웠다.

“그럼 짐이라도 다 내릴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상대가 살짝 인상을 찡그리자 한센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조선 국왕 전하께 진상할 물건들이라 우리가 가지고 가야 됩니다.”

“흠.”

다른 것도 아니고 진상품이라고 하는데 그냥 놔두고 갈 수는 없었기에 조선 관리는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신 오래 기다릴 수 없으니 최대한 서두르시오.”

“알겠습니다.”

선원들이 화물을 서둘러 하역하는 가운데 약간 떨어진 곳에 서서 감시하듯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조선 관리를 힐끗 보며 한센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지부장님,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그러자 아까부터 표정이 굳어 있던 헤나로 지부장이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느꼈네.”

“정말로 로만이 추진하던 일이 탄로 난 게 아닐까요?”

“…….”

잠시 말이 없던 헤나로 지부장은 경직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럴지도 모르겠어.”

“그럼 큰일이지 않습니까.”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섣불리 나서지 말게. 그리고 일행한테도 행동을 각별히 조심하라고 지시해 둬.”

“예.”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헤나로 지부장 일행은 몸을 잔뜩 사린 채 조선 관리를 따라 준비된 마차에 나눠 타고 한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갑갑한 희정당이 아닌 후원 정자로 나온 도현은 따뜻한 봄바람과 함께 파릇파릇 새싹을 틔우고 있는 식물들을 바라보며 향기로운 차를 마시고 있었다.

“벌써 겨울이 다 지나갔군.”

동석해 있던 총리대신 박황이 도현의 말에 정자 밖 풍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옵니다.”

“백성들이 배를 곯지 않으려면 올해도 농사가 잘돼야 될 텐데 걱정이오.”

“서설瑞雪이 아주 많이 내려 줬으니 풍년이 될 것이옵니다.”

“그럼 얼마나 좋겠소.”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나라 살림에서 농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차를 마시던 박황은 몇 번을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왜 그러시오?”

“송구스러우나 제가 한 가지 여쭤 봐도 되겠사옵니까?”

“말해 보시오.”

“화란과 정녕 전쟁이라도 벌이실 생각이시옵니까?”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앞에 있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도현은 박황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되물었다.

“경은 짐이 어찌했으면 좋겠소?”

그러자 박황은 자세를 바로 하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분명 이번에 화란이 저지른 일은 용서하기 어려운 큰 잘못이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바다 건너 멀리 떨어져 있는 저들 나라에 군대를 보내 징치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사옵니까? 그리고 상공대신이 우려하는 것처럼 양국 사이에 분쟁이 발생할 경우 입게 될 경제적인 손실도 만만치 않사옵니다.”

“그래서 그냥 넘어가자는 거요?”

“그게 아니오라, 저들을 불러 따끔히 혼을 내기는 하되 무력을 사용하는 건 자제해야 된다는 것이 신의 생각이옵니다.”

“깊숙한 내지까지 들어와 아국의 보물을 훔쳐 가려고 했는데 말로 끝을 내자고?”

화가 난 듯 그가 약간 언성을 높였지만 박황은 물러서지 않고 충언을 계속했다.

“무조건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 않겠사옵니까? 때로는 한마디 말이 수만 군대보다 큰 압박이 될 때가 있사옵니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박황에게 도현은 정색하고 말했다.

“우리가 관용을 베풀어도 상대가 그것을 쉬이 여기면 그 때는 어찌할 텐가? 때로는 과도한 아량이 모자란 것보다 나쁠 때가 있다는 걸 모를 사람이 아닐진대 답답하군.”

그러나 박황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청원했다.

“신 또한 한 가지 길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만약 그들이 아국을 업신여기고 분수에 맞지 않게 날뛴다면 그때는 철저하게 응징하는 것이 옳겠지요. 다만, 먼저 손을 내밀어 베푸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옵니다.”

허공에서 도현과 박황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냉엄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도현에 반해, 박황의 눈빛은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맑은 호수처럼 잔잔하여 곧게 뻗은 대나무처럼 곧은 심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긴장된 침묵 속에, 불현듯 도현이 정자가 떠나가라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무척 즐거운 듯 무릎을 두드려 가며 웃는 도현의 모습에 박황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

“아, 미안하오. 총리대신 같은 충신이 내 곁에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그만.”

“과찬이시옵니다.”

방금 전까지 주변에 충만했던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마치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총리대신의 충언은 잘 들었소.”

도현은 그제야 웃음을 멈추고 살짝 누그러진 얼굴로 박황을 바라보았다.

“그럼 경의 충언에 따라, 일단 힘으로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은 잠시 접어 두도록 하지. 어차피 곧 있으면 저들의 대표가 한양으로 올라올 테니 어떤 변명을 늘어놓는지 구경해 보는 것도 좋은 여흥거리가 되겠군. 그 뒤에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보고 모든 걸 결정하겠소.”

“참으로 현명하신 선택이시옵니다, 전하!”

박황은 고개를 숙여 절하면서도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딱딱한 이야기는 되었으니 편히 앉아 차라도 즐기시오. 모처럼 이렇게 좋은 날 밖에 나왔는데 즐기지 않으면 아깝지 않겠소.”

그러면서 도현은 따사로운 햇볕이 한가로이 내리쬐는 정자 주변을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오늘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에 바람도 살랑살랑 불고, 정자 아래를 졸졸 흐르는 물소리 또한 청아하니 참으로 좋은 날이었다.

“그렇군요. 전하의 말씀대로입니다.”

박황 또한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고 답했다.

받아 든 찻잔에서는 코끝을 간질이는 파릇한 새싹의 향기가 나, 차와 여유를 즐기는 데엔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듯했다.

한편 도성 내에 위치한 객관에 도착한 헤나로 지부장 일행은 다음 날 바로 육조 거리에 있는 외무부 청사로 불려 나왔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관청들이 길게 늘어선 육조 거리는 조선 정치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었다.

여기서 나라를 움직이는 실질적인 모든 행정 업무들이 처리됐고 조금만 더 나아가면 상업 중심지인 운종가가 있어 평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원래는 그냥 흙길이었지만 도현의 도성 정비 계획에 따라 지금은 바닥에 두꺼운 박석을 깔아 깔끔하게 포장이 되어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헤나로 지부장 일행은 예전에 예조였던 외무부의 커다란 솟을삼문을 지나 안채 깊숙한 곳에 위치한 회의실로 안내됐다.

대놓고 표시를 내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계속해서 느껴지는 적대적인 시선에 헤나로 지부장 일행은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

아니나 다를까 회의실 안 분위기도 상당히 무겁고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덜컹.

“화란인들을 데려왔습니다.”

“들이게.”

“예.”

끼익하고 열린 커다란 방문을 지나쳐 들어가는 순간, 송곳처럼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기다란 탁자 맞은편에 앉아 헤나로 지부장 일행을 맞이하는 것은 역관을 대동한 외무대신 박노와 차관인 이척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예전에 상관 설치 문제로 몇 번 만나 안면이 있었던 헤나로 지부장의 살뜰한 인사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반응은 냉랭했다.

보통 예의상 고개를 끄덕이거나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는 말을 할 법도 한데, 그런 것도 전혀 없으니 먼저 입을 연 헤나로 지부장이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눈치를 보다가 일단 비어 있는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외무대신 박노가 선공을 날렸다.

“그대들이 왜 이곳까지 불려 왔는지 아는가?”

앞뒤 다 싹둑 자르고 본론부터 꺼내는 직설적인 화법에 헤나로 지부장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난색을 표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정녕 무고하다 여길 만큼 일품인 연기였다.

아니, 실제로 어렴풋이 짐작되는 건 있어도 무슨 이유로 소환장을 받았는지 아는 것이 없었으니 거짓은 아니었다.

“참으로 뻔뻔한 자들이로군.”

이에 박노가 노골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자 헤나로 지부장은 억울함과 불쾌함이 반반 섞인 얼굴로 반박했다.

“대체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 말씀을 해 주셔야 알 것 아닙니까?”

“흥!”

박노는 크게 코웃음을 치고선 한껏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

“과연 그 입을 언제까지 놀릴 수 있을까?”

그러면서 박노는 탁자 중앙을 향해 문서 한 장을 던졌다.

의아한 얼굴로 문서를 받아 들어 앞의 몇 줄을 읽는 순간 헤나로 지부장의 눈에 낭패한 기색이 스쳤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로만의 자백을 정리한 서류로, 화란이 조선의 뒤에서 몰래 꾸미고 있던 일들이 낱낱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내심 절대 이것만은 들키지 않았으면 했던 것이 바로 눈앞에 들이밀어진 꼴이었으니 헤나로 지부장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명백한 증거가 여기 있는데도 계속 잡아뗄 생각인가!”

외무대신 박노의 서슬 퍼런 호령이 채찍처럼 공기를 갈랐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던 헤나로 지부장은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든 수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 이건…….”

“명색이 아국의 우방이라 하면서 뒤로 이런 치졸한 짓을 꾸몄다니 정말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자들이 아닌가!”

아주 모욕적인 말들을 해 대는데도 불구하고 헤나로 지부장과 한센은 너무나도 큰 충격에 한마디도 반박을 하지 못했다.

외무부 청사로 오며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인삼 씨앗을 훔치려던 것이 발각됐을 수도 있다는 예상은 했지만, 나가사키에 있어야 되는 로만의 자백서가 튀어나올 줄은 정말 상상조차 못한 거였다.

“자, 어디 변명을 해 보시오.”

박노가 매서운 시선으로 노려보자 헤나로 지부장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애써 이야기를 꺼냈다.

“오해십니다.”

“오해라?”

“예.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적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동인도회사가 아니라 로만, 이 사람이 혼자서 벌인 일입니다.”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생각에 헤나로 지부장은 로만의 단독 범행으로 몰고 가려 했다.

하지만 뻔히 다 눈에 보이는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조선 측이 아니었다.

비둘기파에 속하며 가능하면 화란과 대화로 일을 해결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박노였지만 상대가 뻔뻔하게 오리발을 내밀며 관련된 걸 부정하려고 들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맛살을 찌푸린 박노는 손바닥으로 탁자를 세게 내려치며 상대를 다그쳤다.

꽝!

“이미 로만이 화란 동인도회사의 지시를 받았다고 모든 걸 다 털어놨는데 이제 와서 발뺌을 하겠다, 이건가!”

“그게 아니라…….”

“다 필요 없고. 인삼은 아국의 보물로 왕실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품목이자 씨앗은 물론이고 생 뿌리마저 유출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런 것을 왜국의 닌자까지 동원해 몰래 훔쳐 가려고 했다는 것에 국왕 전하께서 크게 진노하시고 계시오!”

헤나로 지부장이 연신 식은땀을 흘리는 가운데 박노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우리가 듣고 싶은 건 단 한 가지요! 이번 사건에 대해서 귀측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이야기를 해 보시오.”

“갑자기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

“변명은 필요 없다 하지 않았소!”

말을 중간에 자른 박노가 그를 매정하게 다그쳤지만 헤나로 지부장은 사과 말고는 다른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한 시진 넘게 상대를 몰아붙인 박노는 일방적인 통보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한 달의 시간을 주겠소. 만약 그때까지 공식적인 사과와 함께 충분한 보상과 사후 처리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아국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오!”

“필요한 조치라고 하시면……?”

잔뜩 긴장한 채 쳐다보는 헤나로 지부장의 시선을 받으며 박노는 단호하면서도 아주 차가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대가 생각하는 모든 종류의 제재를 가하게 될 것이오. 물론 여기에는 무력 사용도 포함되어 있소.”

“헉!”

“그, 그런…….”

무력 사용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조선 측의 태도에 헤나로 지부장과 한센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대로 내쫓기듯 나온 헤나로 지부장은 어떻게든 조선 정부를 달래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여기저기 손을 썼지만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어느 누구도 상대를 해 주지 않았다.

의금부에 잡혀 있다는 로만도 겨우 사정을 한 끝에 면담은 못하고 잠시 얼굴만 확인하는 걸로 만족해야 됐다.

그러면서 로만이 포도청이 아니고 중대한 국사범들을 주로 다루는 의금부에 잡혀 있다는 것에 사태의 심각성을 다시 한 번 확실히 깨달았다.

헤나로 지부장은 즉시 타고 왔던 배를 완도 상관으로 내려 보내서 바타비아에 있는 발데 총관에게 상황을 알리도록 했다.

그사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압박하는 조선 측의 첫 번째 제재가 전격적으로 취해졌는데 완도 지역을 관할하는 전라수영 병력이 상관을 봉쇄하고는 네덜란드 상인과 배의 출입을 막았다.

동시에 조선인들의 출입 또한 금지돼 상관 내에서의 모든 상거래가 중단되어 버렸다.

하루라도 빨리 가져온 상품을 처분하고 인삼과 도자기 같은 조선의 특산품을 구입해 유럽으로 돌아가 팔아야 되는 화란 상인들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수뇌부가 인삼 씨앗을 몰래 훔쳐 내려고 했다가 조선 정부에 발각당했다는 소문이 급속히 퍼지면서 네덜란드 상인들은 반발은 고사하고 불똥이 자신들한테 튈까 봐 전전긍긍했다.

이런 가운데 봉황상단을 비롯해 송상과 만상 등 조선 측 상단들 역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갑자기 거래가 중단되면 손해가 상당했지만 중요한 상품인 인삼을 상대가 훔쳐 내려고 했다는 사실에 공분하며 조정의 지시에 적극 협조했다.

그만큼 인삼이 조선 상단들한테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상품이라는 뜻이기도 했지만, 예전과 달리 네덜란드 대신 영국 상인들에게 물건을 팔면 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영국 상인들이 이용하는 제주 상관이 활기를 띠며 거래가 크게 늘어났다.

이런 가운데 헤나로 지부장이 보낸 편지가 바타비아에 도착했다.

가능하면 자체적으로 해결하려 했겠지만 조선 측이 제시한 시간이 촉박한 데다 무엇보다 무력 사용을 언급했기에 발데 총관은 어쩔 수 없이 도르네바르드 백작과 반데볼크 총독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어렵게 바타비아 요새를 지켜 내기는 했어도 영국과의 전쟁에서 판정패를 당해 침울해 있는 상황에서 전해진 충격적인 소식에 다들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인삼 씨앗을 빼내려고 했던 거요?”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정색을 하며 묻자 발데 총관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예.”

“아니, 가뜩이나 사정이 안 좋은데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한 거요!”

“영국이 조선과의 교역에 끼어들면서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그걸 만회하려고 하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됐습니다.”

“그럴 거면 들키지나 말 것이지, 이게 뭐요?”

“면목이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화가 나고 곤혹스러운 사람이 바로 그였지만 어찌 됐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실수를 한 건 분명한 사실이었기에 발데 총관은 묵묵히 쏟아지는 질책을 들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요?”

“어떻게든 조선을 달래야 되겠는데 워낙 태도가 강경해서…….”

발데 총관이 말끝을 흐리자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반데볼크 총독이 끼어들며 입을 열었다.

“아니라고 딱 잡아떼는 건 어떻소? 증거라고 해 봤자 그 로만이라는 상인의 증언뿐이니 단독 범행으로 몰아가면 조선도 계속 우릴 압박하지는 못할 것 아니오.”

로만한테는 잔인한 이야기였지만 그 하나를 희생시키고 이번 일을 묻어 버릴 수 있다면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훨씬 이익이었다.

하지만 발데 총관은 머리를 내저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통보와 동시에 완도 상관을 봉쇄해 버리며 아주 강경하게 나오는 조선의 태도를 보면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럼 어쩌자는 거요?”

답답하다는 듯이 이맛살을 찡그린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약간 언성을 높이자 발데 총관은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일단 적절한 보상을 해 주며 저들을 최대한 달래 볼 생각입니다.”

“하면 동인도회사가 벌인 일이라는 건 인정하겠다는 것이오?”

상당히 민감한 문제였는데 금전적인 손해는 물론이고 도덕적으로 큰 타격을 감수해야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네덜란드 정부 입장에서도 국가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거였다.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발데 총관은 이내 깊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가능하면 그것만은 피하고 싶지만 협상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면 각오를 해야 된다 생각합니다.”

“이보시오, 발데 총관,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소리요!”

“물론입니다.”

발데 총관이 무겁게 머리를 끄덕이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짧은 탄성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허어.”

그러자 반데볼크 총독이 못마땅한 얼굴로 발데 총관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저자세로 나가야 되겠소?”

“총독께서도 조선과의 교역이 동인도회사 매출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이건 너무 굴욕적이지 않소! 하찮은 것들의 눈치를 보며 머리를 숙여야 된다니, 이거 참 자존심이 상해서…….”

발끈해서 툴툴거리는 반데볼크 총독을 발데 총관이 살살 달랬다.

“어찌하겠습니까, 상황이 이리 불리한데. 그렇다고 가뜩이나 영국 상인들이 치고 들어오는 요즘 정세에 조선과의 교역을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그러게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벌여서는…… 쯧.”

투덜거림을 멈출 기미가 없는 반데볼크 총독의 태도에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했지만 발데 총관은 애써 화를 내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했다.

점점 과열돼 가는 방 안 분위기를 보고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흠. 발데 총관의 이야기대로 조선과의 교역은 우리로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니 자존심은 잠시 접어 두고 우선 사태를 수습하는 것에 집중하는 게 좋겠소. 협상은 어떻게 할 것이오?”

도르네바르드 백작의 물음에 발데 총관은 약간 지친 얼굴로 대답했다.

“제가 직접 조선으로 갈 생각입니다.”

“하긴 일개 지부에서 처리할 문제가 아니니 그게 좋겠군. 다른 건 도와줄 것이 없소?”

“지금으로서는 없습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진지한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동인도회사가 타격을 입으면 아국의 남방 경영 전체가 흔들리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주저하지 말고 이야기를 하시오.”

“그러겠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식민지 확장과 해상 교역의 첨병이자 중심이 바로 동인도회사였기에 이들이 타격을 받는 건 곧 네덜란드의 몰락이었다.

한시가 급한 발데 총관은 본사에 현재 상황을 알리는 보고서를 보낸 뒤 다음 날 바로 배를 타고 완도 상관으로 향했다.

한편 도현은 수년간의 공역 끝에 드디어 완성된 한양과 부산포 간 가도 개통식에 참여했다.

동시에 마차 넉 대가 마주 보며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넓게 만들어진 가도는 바닥을 일명 로마 콘크리트라고 불리는 석회와 화산재를 적절히 섞어서 만든 회반죽으로 깔았다.

그 덕분에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진창이 되지 않고 사람과 마차가 문제없이 다닐 수 있었다.

길이는 무려 일천백 리에 달했는데 이건 아직 긴 터널을 뚫는 기술이 부족해 산을 둘러가는 식으로 가도를 냈기 때문이었다.

시원하게 쭉 뻗은 가도를 직접 걸어 보며 도현은 공사에 참여한 이들을 치하했다.

“아주 멋진 길이 만들어졌군. 다들 수고가 많았네.”

“아니옵니다, 전하.”

도로를 관리하고 만들기 위해 만든 가도청 소속 관리들은 도현의 말에 엎드린 자세 그대로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상공대신.”

“예, 전하.”

“그동안 고생한 관리와 인부들에게 술과 고기를 푸짐히 내려 위로하고 공이 있는 자들은 푸짐한 상급을 하사해 치하토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상을 내리라는 말에 관리들은 크게 기뻐하며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공사 중에 크게 다치거나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백성들이 많다고 들었네.”

“예. 안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워낙 난공사들이 많아…… 송구스럽사옵니다.”

상공대신 유형원이 고개를 숙이며 죄스러운 표정을 짓자 도현이 가볍게 팔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닐세. 이런 큰 공사를 하다 보면 다소간의 희생은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불행한 사건을 겪은 이들이니 각별히 신경을 써 줘야 될 게야.”

“그러지 않아도 충분한 보상과 함께 남은 가족들이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고 있사옵니다.”

“잘했네.”

힘들고 위험한 일은 대역죄를 짓고 노예가 된 이들이나 청과 왜군 포로들이 도맡아서 했지만 워낙 규모가 큰 공사이다 보니까 일반 백성들도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다치거나 심할 경우 목숨을 잃는 일이 흔하지는 않지만 가끔 발생했고, 이렇게 희생된 이들은 도현이 정한 법률에 따라 나라에서 보상을 해 주고 있었다.

자칫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걸 외면하지 않고 하나하나 챙기고 어루만져 주는 도현의 행동에 백성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

그 때문인지 아무리 치세를 잘한다고 해도 이렇게 대규모 공사를 한꺼번에 여러 개 추진하다 보면 불만이 터져 나오기 마련이었지만 전혀 그런 것 없이 오히려 백성들의 지지는 갈수록 높아져 갔다.

그리고 진시황처럼 자신의 권위를 세우거나 사치를 부리기 위해서 대규모 공사를 벌이는 게 아니라 대부분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고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었기에 국력이 쇠하기는커녕 더욱 기반이 탄탄해져 갔다.

한쪽에 준비된 대형 천막 아래로 자리를 옮긴 도현은 개통식에 참석한 신하들과 함께 간단히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계속 나눴다.

“그대가 공사를 총감독한 도제조라고?”

신하들이 따라 주는 술에 살짝 취기가 오른 도현이 묻자 바짝 긴장한 얼굴로 앞에 선 관리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이런 큰 공사를 맡아서 진행한다고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구먼. 자! 그런 의미에서 짐이 술을 한잔 따라 줄 터이니 가까이 오게.”

직접 어주를 하사받은 큰 영광에 중년의 도제조는 감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아래로 내리깐 채 조심스럽게 가까이 다가갔다.

“받게.”

황공스럽다는 얼굴로 도제조가 양손으로 잔을 내밀자 도현은 칠현이 건네준 주전자를 들어 술을 한가득 따라 줬다.

쪼르륵.

“앞으로도 짐과 나라를 위해 지금처럼 열심히 일해 주길 바라겠네.”

“신명을 다하겠나이다.”

“어서 마시도록 해.”

“예.”

살짝 얼굴을 옆으로 돌린 도제조는 감격한 마음에 손을 부들부들 떨며 술을 넘겼다.

그 뒤로도 도현은 가도 공사에 크고 작은 공이 있는 관리들을 일일이 앞으로 불러 치하의 말을 하며 어주를 손수 따라 줬다.

별거 아닌 것 같았지만 이런 행동 하나하나에 임금을 직접 알현할 기회가 거의 없는 하급 관리들은 큰 감명을 받으며 충성심이 커졌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신하들과 대화를 나누던 도현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상공대신 유형원을 보며 말했다.

“가도를 이용하면 한양에서 부산포까지 며칠이나 걸리나?”

“마차를 탄다면 넉넉잡아서 나흘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하하하. 나흘이라 정말 대단하군.”

회귀 전과 달리 기차나 자동차는 고사하고 말도 귀한 시대였기에 한양에서 멀리 남쪽 끝인 부산포까지 나흘 안에 간다는 건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었다.

막말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양에 한번 가려면 괴나리봇짐에 갈아 신을 짚신을 네다섯 개씩 준비하고 한 달 가까이를 죽어라 걸어만 가야 됐다.

하지만 지금은 오십 리마다 하나씩 역참이 세워져 있고 나라에서 운영하는 여객 마차를 타고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이처럼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손쉬워지면서 자연적으로 상업 발달이 촉진됐다.

여기에 잘 닦인 가도를 이용해서 어디든 반란이나 외적의 침입이 발생하면 중앙에 있는 정예군을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가도 하나를 깔아서 일석삼조의 효과를 동시에 얻는 거였다.

“의주와 평양을 잇는 가도는 언제쯤 완성이 될 것 같나?”

“거친 산악 지형이 많아 공사가 쉽지 않지만 이제 곧 날이 완전히 풀리면 정상적으로 작업을 할 수 있을 테니 늦어도 올해 안에는 개통이 가능할 것이옵니다.”

“오호. 그래?”

“그리고 한양과 광주를 연결하는 가도도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완공이 될 것이옵니다.”

“그것 참 반가운 소식이군. 앞으로 가도는 나라의 핏줄과도 같은 역할을 할 아주 중요한 것이니 길을 닦는 데 만전을 기하도록 하게.”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궁극적으로 도현은 그 옛날 로마처럼 한양을 가운데 두고 조선의 모든 도시와 마을 들을 가도로 연결하는 계획을 품고 있었다.

힘든 계획이었지만 완성이 된다면 수양제隋煬帝가 대운하大運河를 만들어 대륙 남북을 연결한 것처럼 길이 평가될 역사적인 업적이 될 것이다.

물론 수양제처럼 악명이 아닌 현군으로서 이름을 남기게 될 게 분명했다.

그렇게 개통식을 모두 끝낸 도현은 하급 관리와 인부 들이 편하게 잔치를 즐길 수 있도록 대궐로 돌아가는 왕실 마차에 올랐다.

딸그락. 딸그락.

말발굽 소리에 맞춰 좌우로 가볍게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기대고 있던 도현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완도 상관 분위기는 어떤가?”

그러자 맞은편에 앉은 이완 단장이 자세를 바로 하며 대답했다.

“여전히 크게 당황스러워하고 있습니다만 저들이 잘못한 걸 알고 있는지 봉쇄 조치에 대한 반발 없이 바짝 웅크린 채 우리의 눈치를 보는 중이옵니다.”

“흥. 당연히 그래야지. 아국 상단들의 피해는?”

“봉황상단을 중심으로 출하 물량을 적절히 조절해 제주 상관에 있는 영길리 상인들한테 좋은 값에 물건 대부분을 넘긴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아무래도 인삼이 외부로 유출되면 조정뿐만 아니라 상인들도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 비교적 협조가 잘됐다고 합니다. 그래도 중간에서 장 총관이 조율을 한다고 애를 많이 썼다고 하옵니다.”

“나중에 따로 불러서 수고했다는 말이라도 해 줘야겠군.”

“그러시면 크게 기뻐할 것이옵니다.”

“아직까지는 대화에 별다른 진전이 없지?”

“예. 아무래도 헤나로 지부장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이 되어 있지 않겠사옵니까.”

“하긴.”

“하지만 조만간 바타비아에서 발데 총관이 올 테니 뭔가 제안이 있을 것이옵니다.”

이완 단장의 말에 도현은 눈에 이채를 띠었다.

“발데 총관이 온다고?”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전권을 가지고 이번 일을 해결하려면 최소한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듣고 보니 그렇군.”

정보를 다루는 이완 단장은 도현을 제외하면 조정 대신들 중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실체를 가장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이런 예측이 가능했다.

“상황이 더 심각해지면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올지도 모르겠사옵니다.”

귀에 익은 이름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도현은 이내 누군지 떠올리며 말했다.

“그자라면 예전에 오렌지 공의 전권 대사라고 찾아와 동맹 체결을 요구했던 자가 아닌가?”

“맞사옵니다.”

“아직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었나?”

“예. 급작스럽게 터진 영길리와의 전쟁으로 귀로가 막힌 것도 있지만 화란 국왕에게 남방 지역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옵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렌지 공이 직접 통치에 나선 건가?”

“그건 아니고 일종의 대리인 격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이옵니다.”

“동인도회사 주도로 이루어지는 식민지 경영에 이제부터라도 간섭을 하겠다 이거군.”

“솔직히 일개 상단이 국가를 대신해 식민지를 운영한다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이상한 게 사실이었사옵니다.”

모든 것이 군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중앙집권적 사고방식이 강한 조선인들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는데 도현도 그걸 알기에 굳이 지적을 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건 그렇고 화란 측이 이번 사건을 어떻게 대응해 나갈 것이라 예상하나?”

잠시 고심하는 표정을 짓던 이완 단장은 신중한 태도로 이야기를 했다.

“일단 어떻게 해서든 동인도회사가 사주한 일이 아니라 의금부에 붙잡혀 있는 상인의 단독 범행으로 몰고 가려 할 것이옵니다.”

“그렇겠지. 그게 덜 부담스러울 테니 말이야.”

“맞사옵니다. 하지만 자국 상인이 붙잡혀 있고 인삼 씨앗을 몰래 훔쳐 가려 했다고 자백까지 한 마당인 데다 무엇보다 아국과 등을 돌려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기에 가능하면 많은 걸 양보하더라도 대화로 일을 해결하려 들 것이옵니다.”

“끝까지 아니라고 우기며 버티지는 않을 거라는 건가?”

“예. 영길리와의 전쟁으로 남방 지역에서 보유하고 있던 전력을 거의 다 상실한 지금 아국과 싸움을 벌여 봤자 이길 수 없다는 걸 저들도 잘 알고 있지 않겠사옵니까.”

“전쟁 이후로 화란의 전력 보충이 여전히 지지부진한 모양이지?”

“최근 화란 본국에서 군선 두 척이 도착하긴 했사오나 그 정도로는 바타비아 요새를 방어하기에도 벅찰 지경이옵니다. 거기다가 강화조약을 체결했다고 해도 바로 코앞에 영길리 함대가 둥지를 틀고 있으니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겁니다.”

“그러면 당분간 바타비아 요새 북쪽 해역은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군.”

“그것 때문에 해적들의 노략질이 극심해져 상선들의 피해가 크다고 하옵니다.”

그러자 도현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국도 피해를 입고 있나?”

“우리들은 중무장한 군선의 호위 속에 여러 척이 선단을 이뤄 움직이기에 아직까지는 그런 일이 없사옵니다만 안심할 상황은 아닙니다.”

“다행이군.”

“해적 이야기가 나왔으니 드리는 말씀인데 왜국 상황이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사옵니다.”

“각지에서 반막부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면서?”

도현의 말에 이완 단장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보충 설명을 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대놓고 불만을 토로하며 막부가 지방 영주들을 통제하는 핵심 수단인 참근교대參勤交代마저 거부하는 곳이 늘어나고 있사옵니다.”

참근교대란 막부가 지방 영주들을 통제하고 힘을 빼기 위해 만든 제도로 영주가 가신들과 함께 일 년은 에도에 그리고 다음 일 년은 영지에서 머물게 하는 걸 말했다.

이걸로 영주의 가족을 인질로 잡아 두는 것과 동시에 에도를 오갈 때마다 막대한 재물을 쓰게 만들어 지방이 힘을 키울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막부의 핵심 통치 수단인 참근교대제가 흔들린다는 건 곧 도쿠가와 가문을 중심으로 한 왜국식 중앙집권제가 무너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에미쓰가 골치를 좀 썩고 있겠군.”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옵니다.”

“또 뭐가 있지?”

“지난번에 있었던 아국과의 전쟁 이후 가뭄과 홍수가 반복해서 일어나는 바람에 현재 왜국의 식량 사정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사옵니다.”

“어느 정도이기에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왜국 최대의 쌀 생산지인 에치고 국越後国(현재의 니가타)에서마저 주민들이 먹을 게 없어 나무껍질을 벗기고 유리걸식을 한다 하옵니다.”

“으음.”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한 도현은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자국도 아니고 바다 건너 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왜 신경 쓰냐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이웃한 나라인 만큼 예전부터 문제가 생기면 어떤 식으로든 조선에 영향을 끼쳐 왔기에 주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우리 민족에게 큰 상처가 되고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린 임진왜란도 따지고 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국을 통일한 이후 넘치는 지방 영주들의 힘을 소모시키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다.

“이 문제로 인해 조만간 막부에서 사신을 보내올 것 같사옵니다.”

“사신을?”

“그렇사옵니다.”

“곡물 수출을 늘려 달라는 요청을 하겠군.”

“그것도 있고 현재 에도 근처에 위치한 아군의 주둔 기간을 더 연장해 달라는 요청을 할 것으로 예상되옵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손등으로 길게 자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주둔 연장이라…….”

“언제든 반막부군이 결성돼 에도로 진격해 올 수 있다는 불안감이 크다는 반증일 것이옵니다.”

“경의 생각은 어떤가?”

“무엇이 말씀이옵니까?”

“아국 군대를 왜국에 계속 주둔시키는 것이 좋을지 묻는 걸세.”

이완 단장은 성급하게 대답하지 않고 신중한 태도로 잠시 생각을 해 보고는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를 했다.

“장단점이 있사옵니다. 우선 단점으로는 잘 훈련된 정예병력이 적절히 활용되지 못하고 왜국에 장기간 발이 묶여 있어야 된다는 것이옵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이들이 적진 한가운데 고립되어 아국의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계속해 봐.”

“반대로 아국 군이 왜국의 심장인 에도를 언제든지 노릴 수 있는 위치에 주둔해 있으면서 막부가 허튼짓을 꾸미지 못하도록 제어하고 영향력을 끼치는 장점도 있사옵니다. 둘 중 어느 쪽에 무게가 더 쏠리느냐고 물으신다면 신은 막부를 통제하기 위해서라도 가능하면 주둔군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입니다.”

도현은 머리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짐도 같은 생각이야. 그 문제는 막부에서 사신을 보내오면 다시 조정대신들과 심도 깊게 논의토록 하지.”

“예.”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새 마차는 대궐에 거의 다 도착했고 도현은 희정당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며칠 뒤 이완 단장이 예상한 대로 동인도회사에서 아시아 지역 무역을 총괄하는 발데 총관이 급히 완도 상관을 거쳐 한양에 도착했다.

조선 측의 강경한 태도에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하던 헤나로 지부장은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상급자의 등장에 반색을 하며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굳은 표정의 발데 총관은 지부 간부들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으며 자리에 앉자마자 상황 파악부터 했다.

“로만이 조선 측에 잡혀 있다는 것이 사실이오?”

“예. 그것도 중죄인을 주로 다루는 의금부라는 곳에 투옥되어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아니, 나가사키에 있던 사람이 어쩌다가 조선 측에 붙들린 건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입장에서는 정말 난감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는데 로만만 아니라면 그런 일이 없다며 오리발을 내밀겠지만 그의 존재로 인해 관련성을 부정하기가 어려워졌다.

“나가사키 지부에 알아본 결과 얼마 전에 갑자기 실종됐었다는 걸 보면 조선 측에 의해 납치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끄응. 그런 일이 있었으면 재깍재깍 보고를 했어야지!”

“그게…… 로만이 이번 일을 추진 중이었다는 건 비밀이었기에 사정을 모르고 있던 나가사키 지부에서는 미처 그것까지 생각을 못 한 것 같습니다.”

“젠장!”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발데 총관은 각 지부 간에 손발이 제대로 맞지 않아 조기에 사건을 수습할 기회를 놓친 것에 짜증이 났다.

“로만이 어디까지 실토를 한 건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헤나로 지부장은 이내 발데 총관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조선 측이 제시한 자백서를 보면 거의 다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전부 다 말인가!”

“예. 완도 상관에서 열렸던 회의 중간에 일이 결정됐고 상관 운영 자금 중 일부를 빼내 지원해 준 것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정도면 이미 감추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이쪽의 행적이 다 노출됐다는 뜻이었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에 얼굴을 와락 구긴 발데 총관은 머리가 아픈지 한쪽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놈을 믿는 것이 아니었는데. 아무도 모르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니 이게 무슨 꼴이야!”

이제 와서 후회를 해 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최대한 피해를 줄이며 사태를 수습하는 거였다.

“저쪽의 요구 사항이 뭔가?”

“일단 우리가 인삼 씨앗을 몰래 훔치려고 했다는 걸 인정하라는 겁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에 발데 총관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건 안 돼!”

“저도 계속해서 동인도회사가 아니라 로만 개인의 일탈 행동이라고 주장했습니다만 조선 측이 요지부동입니다. 만약 이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떤 협상도 없다며 아주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게 대화의 전제 조건이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미치겠군.”

가장 껄끄러운 문제를 상대가 전제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말에 발데 총관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요구 조건은?”

“먼저 배후임을 인정하고 조선 국왕한테 사죄를 한 다음에 배상 내용을 제시하라고 합니다.”

“끄으응. 차라리 이리저리 해 달라고 요구를 받는 것이 낫지 정말 골치 아프게 됐군.”

여러 가지로 불리한 상황에 발데 총관이 한숨만 나왔다.

“상대가 뭘 원하는지 잡히는 것이 전혀 없나?”

“여기저기 끈을 대 알아봤습니다만 아무도 이야기를 해 주지 않습니다. 다만…….”

“답답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 보게.”

“조선 국왕의 분노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어서 웬만한 걸로는 화를 달래기 어려울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냥 엄포를 놓는 게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대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보복을 가하기 위해 함대를 준비 중이라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헤나로 지부장의 말에 발데 총관은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하, 함대라고 했나!”

“예. 보복에 나서게 되면 목표는 바타비아 요새가 될 거라고 합니다.”

“이런!”

조선 수군의 강력한 전력을 익히 알고 있고 며칠 전 완도 상관에 도착할 때에도 먼 바다에서부터 감시하듯 따라온 치우 급 전함을 보며 위협을 느꼈던 발데 총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영국과의 전쟁으로 전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네덜란드 남방 함대가 조선군을 막아 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굳이 바타비아에 상륙을 하지 않더라도 백여 문 가까이 되는 대포를 탑재한 치우 급 전함이 앞바다에서 포격만 가해도 요새는 쑥대밭이 될 게 뻔했다.

가뜩이나 영국과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며 남방 지역의 해상 교역권을 쥐고 있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게 조선과의 충돌은 엄청난 재앙이었다.

신대륙에 있던 식민지를 영국에 빼앗긴 상황에서 향신료 무역 거점인 남방 지역의 패권까지 밀린다면 네덜란드로서는 나라의 존립 자체를 걱정해야 될지도 몰랐다.

“그것만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돼.”

다급해진 발데 총관은 헤나로 지부장을 보며 말했다.

“최대한 빨리 조선 측과 만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게.”

“알겠습니다.”

요청을 받은 조선 정부는 일부러 하루가 지난 뒤 네덜란드 측과 만남을 가졌다.

헤나로 지부장과 함께 외무부 청사를 찾은 발데 총관은 약간 긴장한 얼굴로 조선 측 대표들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다시 뵙는군요.”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예를 갖췄지만 반대편에 앉은 외무대신 박노는 심드렁한 얼굴을 한 채 건성으로 인사를 받았다.

“별로 안녕하지 못하오. 일단 거기에 앉으시오.”

“아, 예.”

시작부터 냉담한 태도에 발데 총관 일행은 머쓱한 표정으로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잠시 뒤 청사에 속한 여시종이 차를 갖다 놓고 나갈 때까지 양쪽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말 한마디 없이 침묵만 지켰다.

발데 총관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지만 선뜻 먼저 말을 꺼낼 입장이 아니었기에 애꿎은 차만 마시며 상대의 눈치를 봤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더 흘렀을까 외무대신 박노가 그를 쳐다보며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이제 이번 사건의 배후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오?”

다짜고짜 민감한 이야기를 꺼내 들자 순간 당황하던 발데 총관은 이내 표정을 수습하며 차분히 말했다.

“우선 본의 아니게 양국 사이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게 돼서 심심한 유감을 표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결코 우리가 나쁜 마음을 먹고 의도적으로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동석한 역관을 통해 발데 총관의 이야기를 들은 박노는 대번에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 말은 왜국 닌자를 시켜 인삼 씨앗을 훔치려고 하지 않았다는 건가!”

넓은 회의실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박노의 목소리에 발데 총관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건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동인도회사가 아닌 로만이라는 자가 개인적인 욕심에 저지른 일이라는 겁니다. 이 점에 대해서 부디 오해가 없으셨으면 합니다.”

발데 총관이 개인적인 문제로 분명히 선을 그으려고 하자 외무차관인 이척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미 로만과 직접 행동에 나섰던 왜국 닌자들이 모든 걸 다 실토했는데도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낯짝이 두껍구먼!”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도 몇 명 없는 총관 자리에 오를 정도로 능력이 뛰어난 발데는 초반에 당황한 기색을 보였던 걸 벗어나 어깨를 펴며 당당하게 말했다.

이왕 우기기로 한 마당이니 얼굴에 철판을 단단히 깔 작정이었다.

그런 발데 총관의 태도에 이척은 기가 막힌지 연신 헛바람을 내뱉었다.

“허어.”

동인도회사의 관련성을 철저히 부인한 다음에 적당히 상대가 혹할 만한 당근을 제시해 조선을 설득하려는 계책이었다.

하지만 나름 고심 끝에 생각해 낸 발데 총관의 계획은 회담을 나서기 전에 도현한테 모종의 언질을 받고 나온 외무대신 박노가 아예 판을 뒤집어 버리면서 허무하게 깨져 버렸다.

“그래서 배후라는 걸 인정 못 하겠다 이건가?”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한 상인 개인적인 일탈 행동이었을 뿐입니다. 어찌 됐건 우리 동인도회사 소속이었던 만큼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그만!”

발데 총관의 말을 중간에 끊은 박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들의 잘못도 인정하지 않고 계속 변명만 해 대는데 계속 이야기를 듣고 있을 필요는 없지. 대화는 이것으로 끝이오! 이 시간 이후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적으로 화란 측에 잘못이 있으니 그렇게 아시오.”

“……!”

반발은 있겠지만 그래도 밀고 당기며 협상을 계속 이어 나가면서 적당히 합의점을 찾으려고 할 거라 생각했던 발데 총관은 자신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상대의 반응에 크게 당황했다.

“이렇게 일어나시면 어쩝니까?”

“아국이 사죄를 요구했는데 그걸 할 수 없다니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는 것 아니오!”

“그래도 양쪽이 툭 터놓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서로 만족할 만한 합의점을 찾지 않겠습니까?”

다급한 나머지 발데 총관이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뱉는 실수를 하자 그걸 바로 알아차린 박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더욱 강경하게 나갔다.

“몰랐다 시치미를 떼다가 적당히 재물을 던져 주면 아국이 혹할 줄 알았소! 그랬으면 아국에 대해 단단히 오판하고 있었다는 걸 똑똑히 보여 주겠소.”

차갑게 일갈한 박노는 발데 총관의 손을 뿌리치고 조선 측 대표들과 함께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꽝.

큰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자 옆에 있던 헤나로 지부장이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발데 총관을 봤다.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은데 이제 어쩝니까?”

지금 이 순간 제일 곤혹스럽고 정신이 없는 건 바로 발데 총관이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멍하니 문을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회의실을 박차고 나온 박노는 그길로 곧장 대궐로 들어가 도현에게 네덜란드 측과 있었던 일을 소상히 보고했다.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자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군.”

보료에 앉은 도현이 짧게 혀를 차며 중얼거리자 박노가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명하신 대로 강하게 나가기는 했사옵니다만 계속해서 저들이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어쩌실 생각이시옵니까?”

상체를 편 도현은 박노를 보며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어야겠지.”

“설마 정말로 무력을 사용하실 것이옵니까?”

“가능하면 대화로 해결하는 것이 좋겠지만 그게 안 될 경우에는 수군을 출정시키는 걸 머뭇거리지 않을 걸세.”

단호한 도현의 어투에 박노는 그냥 엄포를 놓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느끼고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거 같으니 이참에 짐의 각오를 보여 주는 것도 괜찮겠군.”

“어쩌시려고……?”

“저들이 타고 온 배가 정박해 있는 제물포 앞바다에서 함대를 모아 놓고 사열식을 거행하는 거야. 마침 새로 건조를 끝낸 치우 급 전함의 시운전이 예정되어 있으니 그걸 겸해서 함포사격 연습까지 같이하면 되겠군.”

막강한 화력을 보유한 치우 급 전함이 백여 문에 가까운 함포를 일제히 쏴 대며 훈련을 한다면 단순한 무력시위를 넘어서 네덜란드 측은 큰 위협을 느낄 것이 분명했다.

박노가 질린 표정을 짓는 가운데 고개를 돌린 도현은 왼편에 앉아 있는 임경업을 보며 말했다.

“국방대신.”

“말씀하시옵소서, 전하.”

“방금 말한 것들을 준비할 수 있겠소?”

그러자 아까부터 열기 가득한 눈을 번득이던 임경업은 머리를 숙이며 힘차게 대답했다.

“물론이옵니다. 이미 통제사가 지휘하는 기동함대가 영종도에서 대기 중이니 하명만 하신다면 언제든 사열식과 훈련을 실시할 수 있사옵니다.”

“좋소. 그럼 당장 통제사에게 명령을 내리도록 하게. 이번 훈련은 짐이 직접 참관할 것이오.”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외무대신.”

“예.”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하던 박노가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자 도현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당분간 화란 측과의 접촉을 일체 중단하시오.”

“……?”

시선을 든 박노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도현은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설프게 다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몸을 바짝 닳게 만든 다음에 만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겠소.”

“아, 예. 그러겠사옵니다.”

“후후후. 며칠 뒤 화란 측 인사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되는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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