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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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

나흘 뒤.

도현이 지시한 대로 제물포 앞바다에서 대규모 관함식觀艦式이 열렸다.

며칠 전부터 저잣거리에 소문이 돌았고 원래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한민족이었기에 당일 아침이 되자 행사가 열리는 백사장 주변은 몰려온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가장 잘 보이는 장소에 세워진 행사장 주변에는 친위대와 근위군단 병사들이 전날 밤부터 빙 둘러서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예전에 지금처럼 많은 인파가 모이는 개선식에서 도현이 시해를 당할 뻔한 적이 있었기에 이런 경호는 당연한 거였다.

오히려 그 사건 이후 심하다 싶을 정도로 경호에 신경을 쓰게 된 근위군단장 박영식이 백성들을 좀 더 뒤로 물리려고 했지만, 조선 함대의 늠름하고 강한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여 줘야 된다는 도현의 지시에 어쩔 수 없이 뜻을 꺾어야 했다.

대신 박영식은 네 개 천인대 병력을 행사장 요소요소에 배치해 두고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이런 가운데 한양 객관에 머물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대표들도 관함식 이야기를 듣고는 허겁지겁 제물포에 와 있었다.

“하아. 정말 엄청나군.”

괜한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백사장이 아닌 항구에 정박해 있던 동인도회사 소유의 상선 갑판에서 구경을 하던 발데 총관은 바다 위에 강력한 위용을 뽐내며 떠 있는 조선 군함들을 보며 복잡한 얼굴로 탄성을 내뱉었다.

함께 있던 헤나로 지부장을 비롯한 다른 간부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영국에 일격을 당해 약간 주춤하기는 하지만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부와 힘을 가진 해상 패권국이었던 네덜란드이기에 당연히 막강한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웬만한 전력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이들이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조선 함대는 그들의 자신감을 꺾어 놓기에 충분했다.

스무 척에 달하는 신현 판옥선들도 대단했지만 무엇보다 이들을 주눅 들게 만드는 건 거대한 선체를 자랑하는 치우 급 전함이었다.

서양에서 사용하는 그 어느 전함보다 큰 덩치에 좌우 선체가 전부 포문으로 덮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많은 대포를 탑재한 이 배는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이미 몇 번 본 적이 있는 발테 총관은 물론이고 상회 간부와 배에 타고 있던 네덜란드 선원들은 엄청난 위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특히나 이번 관함식에는 도현의 전용함인 봉황함까지 참가해 치우 급 전함이 무려 세 척이나 바다에 떠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저런 군함이 세 척이나 있다니…….”

“도대체 대포가 몇 개나 달린 겁니까?”

“정말 괴물이 따로 없구먼.”

처음에는 놀란 얼굴로 치우 급 전함과 조선 함대를 쳐다보던 간부들은 점차 감히 대적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상대에 대한 두려움으로 변해 갔다.

“가뜩이나 전력이 약해진 남방 함대가 저들과 부딪친다면…… 결과는 보나 마나겠군.”

“후우.”

“큰일이야.”

딴에는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한다고 했지만 간부와 선원 들의 동요가 발데 총관의 귀에도 들렸다.

그렇지만 뭐라고 할 수 없는 것이 그 자신도 조선 함대의 위용을 실제로 목격하자 충격에 시선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막연히 이럴 거라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그걸 눈앞에서 목격하는 건 엄연히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아직 놀라기에는 일렀는데 더 충격적인 모습이 남아 있었다.

다른 곳보다 높게 단을 쌓아서 올린 귀빈석 왕좌에 앉아 있던 도현은 힐끗 선착장 쪽에 떠 있는 네덜란드 상선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지금쯤 너무 놀라 입을 못 다물고 있겠지.”

그러자 옆에 있던 통제사 손억기가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어깨를 펴며 말했다.

“놀라다 뿐이옵니까. 이제부터는 감히 아국에 대적할 꿈도 꾸지 못하도록 기를 팍 죽여 놓을 것이옵니다.”

“이거 말만 들어도 통쾌하구먼. 그럼 더 시간 끌 것 없이 어서 관함식을 시작하도록 하시오.”

“옛.”

힘차게 대답한 손억기가 손짓을 하자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신호수들이 커다란 뿔나팔을 입에 대고는 있는 힘껏 불었다.

부우웅! 부우웅!

넓은 백사장 가득 울려 퍼지는 뿔나팔 소리를 신호로 바다 위에서 진형을 갖춘 채 도열해 있던 수군 군함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돛을 활짝 펼친 군함들은 한 척씩 진형을 빠져나와 도현이 있는 귀빈석 앞으로 천천히 지나갔다.

정복을 입고 갑판 위에 도열해 있는 장교와 병사 들은 귀빈석을 지날 때마다 도현을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군례를 올렸다.

“추~웅!”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었지만 또렷하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군례 소리가 크게 울렸고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왠지 모르게 심장이 크게 뛰고 가슴이 벅찬 모습에 백사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백성들은 군함이 지나갈 때마다 두 팔을 들어 올리거나 목이 터져라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

“멋있다.”

“천세! 천세!”

“대조선국 천세!”

이런 열렬한 반응은 눈에 확 띄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치우 급 전함 세 척이 줄을 지어 지나갈 때 절정을 이뤘다.

커다란 돛대가 세 개나 설치된 치우 급 전함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마치 지금껏 웅크리고 있다가 날개를 활짝 펴며 비상하려는 조선의 도약을 상징하는 것 같아, 지켜보던 도현마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며 흥분된 표정을 지었다.

뜨거운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사열을 끝낸 함대는 다시 조금 떨어진 바다로 나가서 함포사격 시범을 보였다.

첫 주자로 나선 건 신형 판옥선들이었는데 다섯 척이 하나의 대형을 이뤄 길게 늘어서서는 포격 자세를 잡았다.

“수많은 백성들은 물론이고 주상 전하께서도 친히 나오셔서 우릴 지켜보고 계신다.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옛!”

“방포 준비!”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포술장의 지시에 포수들은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하며 각자 맡은 대포를 쏠 준비를 했다.

평소에도 혹독한 훈련으로 단련된 정예들이었지만 이번 관함식을 앞두고 지난 며칠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격 연습을 거듭한 결과 포수들의 움직임에는 약간의 트집도 찾을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준비가 모두 끝나고 이내 함교와 연결된 전성관을 통해 사격 지시가 하달됐다.

“방포!”

그러자 포술장은 한쪽 팔을 위로 들어 올리며 크게 외쳤다.

“쏴라!”

명령과 동시에 횃불을 손에 든 포수가 심지를 당기자 이내 천둥이 치는 듯한 폭음이 울리며 대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꽝! 꽝! 꽝!

금방 매캐한 화약 냄새와 뿌연 연기가 포실 안을 가득 채운 가운데 포술장은 포수들을 닦달했다.

“재장전!”

“어서 서둘러.”

“으쌰!”

그리고 바로 이어서 두 번째 포탄을 발사하며 조선 수군의 뛰어난 연사 능력을 보여 줬다.

슈우우웅.

콰꽈꽝!

쿠쿵!

하얀 물기둥이 솟구치며 과녁으로 놔둔 폐선박이 삽시간에 산산조각 나 버리는 모습에 구경하던 백성들은 다시 한 번 박수를 치거나 목청껏 천세를 외쳤다.

“와아아!”

짝짝짝.

“주상 전하, 천세!”

한편 동인도회사 간부들은 똑같은 장면을 보면서 조선 백성들과 전혀 다른 기분을 느끼고 있었는데 포탄에 맞아 박살 나는 폐선박이 마치 자신들의 배인 것처럼 생각되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괴물 배도 그렇지만 조선 군함들은 도대체 저 많은 대포들을 다 어떻게 싣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대충 세어 봐도 배 한 척당 대포가 서른 문 이상은 있는 것 같습니다.”

“허어.”

당시 네덜란드가 보유한 가장 크고 강력한 군함에 탑재된 대포가 마흔 문 정도인 걸 생각할 때 조선군의 화력은 가히 경악스러운 수준이었다.

양측이 맞붙는다면 치우 급은 고사하고 신형 판옥선마저 상대하기 벅차다는 결론에 네덜란드 측은 우려를 감추지 못하며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발데 총관 또한 이들과 다름이 없었는데 무시무시한 조선 함대의 위력 시위에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시아에 저런 엄청난 함대가 숨어 있었다니 우리는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나 마찬가지였구나.”

평소 오대양 육대주를 돌아다니며 유럽 최강대국의 지위에 오른 네덜란드와 동인도회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발데 총관의 입에서 이런 한탄 섞인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조선군이 보여 준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아직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압감을 주는 치우 급 전함이 사격 시범을 끝낸 신형 판옥선들 뒤를 이어 천천히 진형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제 저 괴물 배 차례인 모양입니다.”

“허. 선체를 뒤덮다시피 한 포문들을 보시오.”

“저기서 일제히 대포를 쏜다면…… 으. 생각만으로도 오금이 저리는 것 같습니다.”

두려움과 기대가 뒤엉킨 간부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면서 발데 총관은 입이 바싹바싹 마르는 가운데 전방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 배가 이번에 새로 건조된 건가?”

한쪽 눈에 망원경을 갖다 댄 채 치우 급 군함을 천천히 살펴보던 도현의 물음에 통제사 손억기가 얼른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그동안 축적된 실전 경험과 건조 기술을 바탕으로 선체를 조금 더 키우고 장갑을 두껍게 만들었사옵니다.”

“그럼 무게가 많이 나가는 만큼 속도가 줄어들었겠군.”

“자세히 보시면 선수부에 보조 돛을 추가로 설치해 기동력을 계속 유지시켰사옵니다.”

“호오. 그래?”

설명을 듣고 망원경으로 선수 쪽을 살펴보자 정말 기존 치우 급과 달리 보조 돛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폐선이 아니라 치우 급 전함의 강력한 화력을 보여 드리기 위해 멀리 왼편에 보이는 돌섬을 과녁으로 삼을 것이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앞바다에 위치한 작은 돌섬에 붉은색 대형 깃발이 세워진 채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이거 기대되는군.”

어느새 앞으로 나선 치우 급 전함은 왼쪽 측면을 드러낸 채 사격 자세를 갖췄고 백사장에 늘어선 백성들은 어떤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여 줄지 잔뜩 기대 어린 표정으로 지켜봤다.

그리고 얼마 뒤 귀빈석에서 붉은색 삼각 깃발이 흔들리는 걸 신호로 치우 급 전함은 엄청난 굉음을 울리며 일제 포격을 가했다.

콰쾅! 꽝! 꽝!

무려 오십 문에 육박하는 대포들이 한꺼번에 사격을 가하자 그 위력이 얼마나 센지 커다란 덩치를 가진 치우 급 전함이 순간 크게 들썩였고 포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섬광에 눈이 부셔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였다.

휘이이익! 꽈꽝!

쿠쿵! 쿵! 쿵!

거의 일천 보가 넘는 거리를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포탄들이 떨어지자 돌섬은 삽시간에 뿌연 연기에 휩싸이며 불기둥이 연이어 치솟았다.

시커먼 포연 속에 섬광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고 돌섬을 완전히 뒤덮어 버리고도 부족했는지 포탄들이 주위에 떨어져 하얀 물보라를 일으켰다.

잠시 뒤 안개처럼 뿌옇게 낀 포연이 바람에 흩어지면서 서서히 드러난 돌섬은 폭우처럼 쏟아진 포격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 나 두 개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 충격적인 모습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정적이 흐르던 백사장은 이내 뜨거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짝. 짝짝짝!

“우와아아아!”

“최고다.”

“정말 대단해!”

귀빈석에 있던 대소신료들도 차원이 다른 치우 급 전함의 화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도현은 박수를 치며 얼굴 가득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치우 급 전함의 함포사격 모습은 언제 봐도 감탄성이 절로 나오는군. 특히 목표를 정확히 타격한 수군 병사들의 포격 실력도 최고야! 수군 함대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든든해.”

도현의 칭찬에 통제사 손억기는 입꼬리가 귀에 걸린 채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이 다 전하께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신 덕분이옵니다.”

“아닐세. 돈만 준다고 강군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지 통제사와 여러 장수들이 부단히 애를 쓴 걸 짐도 알고 있네. 경들의 노력을 잊지 않을 것이야.”

사내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고 한 것처럼 별거 아니었지만 도현이 노력을 알아주고 치하를 하자 통제사 손억기는 크게 감동했다.

“황공하옵니다.”

머리를 끄덕인 도현은 다시 시선을 바다로 돌려 천천히 선회를 하며 진형으로 돌아가는 치우 급 전함을 바라봤다.

그렇게 모든 시범이 끝나자 도현은 기분 좋은 얼굴로 행사를 마무리했다.

“이런 강한 함대가 바다를 지키는 한 그 어떤 적도들도 감히 아국을 넘보지 못할 것이오! 국방대신.”

“예, 전하.”

“오늘 시범을 보이느라 고생한 장졸들에게 술과 고기를 푸짐히 내려 노고를 위로토록 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도현의 말에 국방대신 임경업을 비롯한 대소신료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이번 관함식을 준비하느라 꽤 많은 돈이 들어갔지만 군부의 사기를 올리고 백성들에게 조선군의 강함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값어치를 하고도 남았다.

아니 한 가지가 더 있었는데 끝까지 인삼 씨앗을 훔치려고 했던 걸 부인하며 버티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측의 기를 완전히 꺾어 버렸다.

지금도 서서히 주둔지인 영종도로 돌아가는 조선 함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다들 좀처럼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 끝났군.”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발데 총관이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헤나로 지부장이 고개를 돌렸다.

“예?”

“조선과의 줄다리기가 끝났단 말일세.”

눈을 동그랗게 뜬 헤나로 지부장은 행여나 누가 들을세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설마 이번 사건의 배후가 우리라는 걸 인정하시려는 겁니까?”

“맞네.”

“총관님!”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헤나로 지부장과 달리 발데 총관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뒷감당을 어찌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이 사실이 본사에 알려지면 발칵 뒤집힐 겁니다.”

“그럼 자네가 조선군을 상대해 보지 그러나.”

“예엣?”

경악한 외침과 함께 헤나로 지부장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발데 총관이 턱을 까딱였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게.”

“…….”

두 사람 근처에 있던 동인도회사 간부와 선원 들은 하나같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시선은 저 멀리 사라지는 조선군 함대에 고정되어 있으며, 입은 칠칠맞지 못하게 헤벌어진 것이 누가 봐도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조선 국왕이 저리 과시하듯 화력 시범까지 선보였는데, 아직도 모르겠나? 만약 일이 틀어지기라도 하면 즉시 함대를 남방으로 내려 보내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자넨 그걸 우리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 그건…….”

헤나로 지부장은 말끝을 흐린 채 대답하지 못했다.

그 자신도 무지막지한 조선 함대의 화력을 보고 엄청난 충격에 빠졌는데 선뜻 나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조선군선에 실린 대포들이 네덜란드 선박을 향해 겨눠진다고 상상만 해도 등골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발데 총관은 헤나로 총관이 주저하는 모습을 보고 씁쓸하게 말했다.

“전쟁이 벌어진다면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우리 네덜란드 함대는 순식간에 무너질 걸세. 아니, 어쩌면 오늘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들이 소문이 나,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선원들이 지레 겁먹고 도망쳐 버릴지도 모르지.”

뭐라 반박하고 싶었던 헤나로 지부장이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야 말았다.

“처음부터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조선 쪽이었던 거야.”

자조하듯 중얼거리며 이제 수평선 너머로 거의 사라진 조선 함대를 보던 발데 총관은 힘 빠진 모습으로 돌아섰다.

“그만 돌아가세.”

“……예.”

헤나로 지부장과 간부들은 마치 패잔병처럼 쓸쓸한 뒷모습으로 배에서 내려 대기하고 있던 마차를 타고 선착장을 벗어났다.

다음 날.

발데 총관은 조선 측에 만남을 요청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아무리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고 부탁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던 조선 측이 기다렸다는 듯 승낙을 하며 그날 오후 지난번과 같이 육조 거리에 위치한 외무부 청사 회의실에서 양쪽이 마주 앉았다.

참석자들의 얼굴에서 이미 승자와 패자가 확연히 갈렸다.

어깨를 펴며 기세등등한 조선 측과 달리 발데 총관을 비롯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간부들은 아직도 어제 봤던 관함식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힘이 빠진 채 표정마저 굳어 있었다.

“용건이 뭐요?”

외무대신 박노가 딱딱한 어투로 묻자 반대편에 앉은 발데 총관은 작게 한숨을 내뱉고는 입을 열었다.

“후우. 본의는 아니었지만 우리 회사가 이번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됐음을 인정합니다.”

눈에 이채를 띤 박노는 일부러 못 들은 척 시치미를 떼며 되물었다.

“너무 작게 이야기를 해서 못 들었소? 뭐라고 했소이까.”

“으음.”

확인사살을 하는 박노의 행동에 발데 총관은 침음성을 내뱉으며 살짝 눈가를 찡그렸지만 이미 모든 걸 인정하기로 한 이상 괜한 자존심을 세워 봤자 얻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다시 이야기를 했다.

“우리 회사가 이번 사건에 관여됐음을 인정한다고 했습니다.”

며칠 전 도현이 이야기한 대로 관함식을 보고 겁을 먹은 상대가 백기를 흔들자 박노는 살짝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어렵게 큰 산을 넘기는 했지만 아직 해결해야 될 것들이 많았기에 이내 미소를 지운 박노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늦게나마 배후라는 걸 인정한다니 좋소. 그럼 구체적으로 아국이 입은 피해를 어찌 보상할 것인지 말해 보시오.”

여전히 퉁명스러운 조선 측의 태도에 발데 총관은 화가 났지만 이미 주도권이 완전히 넘어가 있었다.

발데 총관이 눈짓을 하자 옆에 있던 한센이 준비해 온 서류를 한 장 조선 측에 건네줬다.

그걸 받아서 천천히 읽어 본 박노는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탕!

“이딴 걸 보상이라고 내놓다니 아국이 무슨 거지인 줄 아시오!”

앞에 있는 탁자를 손바닥으로 세게 내려치며 박노가 호통을 치자 발데 총관이 상대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을 받았다.

“우리가 해 드릴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최선의 제안을 한 겁니다.”

“그게 금화 일만 냥이라는 거요! 그것도 한꺼번에 다 주는 것도 아니고 이 년에 걸쳐서 분할해 상환하겠다니. 인삼 씨앗의 가치가 이것밖에 안 된다니 이럴 바에야 차라리 함대를 끌고 가서 바타비아 요새에 포탄을 퍼부어 주상 전하의 진노를 풀어 드리는 것이 백번 더 나을 것 같구먼.”

이젠 아예 대놓고 협박을 해 대자 어이가 없으면서도 네덜란드 측은 그것이 그냥 협박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막말로 조선 측이 협상을 다 때려치우고 어제 봤던 함대를 바타비아 요새 앞에 끌고 와 대포를 들이밀며 압박을 가한다면 네덜란드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서 협상을 할 수밖에 없었기에 발데 총관은 탁자 밑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조선 측에서 원하는 걸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잠시 앞에 있는 발데 총관을 쳐다보던 박노는 고개를 돌려 동석한 외무차관 이척을 보며 말했다.

“이 차관.”

“예.”

“그걸 건네주게.”

“알겠습니다.”

이척이 내민 두루마리를 받아 펼쳐 본 발데 총관은 자신도 모르게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준비를 해 왔는지 두루마리에는 네덜란드 어로 조선 측의 요구 사항이 죽 나열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조선 측의 요구는 발데 총관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 많았다.

“거길 보면 알겠지만 이번 사건의 배후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라는 걸 공식적으로 밝히고 주상 전하와 조정에 사죄를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을 거라는 약속과 함께 그 피해 보상으로 화란 금화 오만 냥을 일시불로 지급하고 셀레베스Celebes 섬을 아국에 할양해 주시오.”

보상금 액수도 컸지만 땅을 그것도 향신료 무역에서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는 셀레베스 섬을 달라고 하니 발데 총관으로서는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다.

“이건 너무 무리한 요구입니다.”

“뭐요!”

박노가 눈썹을 치켜 올린 가운데 발데 총관이 애써 차분한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보상금 액수도 너무 크지만 주요 무역항이 있는 셀레베스 섬을 넘기라니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입니다. 설마, 조선이 향신료 무역에 끼어들려는 겁니까?”

마지막 말에 발데 총관은 유독 힘을 주며 상대를 노려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선과의 교역도 중요하지만 향신료 무역은 네덜란드가 막대한 부를 쌓고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만들어 준 핵심적인 사업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향신료가 생산되는 몰루카 제도에 인접해 있으며 일종의 중계지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셀레베스 섬이었기에 발데 총관이 날을 세우며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상대가 강하게 반발하자 지금까지 고압적인 자세를 보이던 박노가 슬쩍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

“아국은 향신료 무역에 관심이 없소.”

“그럼 왜 이런 요구를 하시는 겁니까?”

워낙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박노가 아니라고 단정적으로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발데 총관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식량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사시사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필요한 것뿐이오.”

설득력이 떨어지는 말에 네덜란드 측의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호시탐탐 향신료 무역을 노리는 영국의 거센 도전을 막아 내는 것도 힘에 부치는 판국에 막강한 함대를 거느린 조선까지 끼어든다면 네덜란드로서는 현재의 위치를 지켜 내기가 너무나도 어려웠다.

지정학적 위치상 조선이 직접 향신료를 유럽에 가져가 팔기는 어렵겠지만 무역 전체를 독점하는 것과 단순히 이익 일부를 얻는 데 그치는 건 큰 차이가 있었다.

자칫 동인도회사의 존립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그런 거라면 차라리 대만 중부 지역을 대신 넘겨 드리지요.”

대만 역시 네덜란드가 동아시아 지역을 오가는 데 아주 중요한 곳이었지만 셀레베스 섬보다는 가치가 떨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재 한족 이주민들의 반란에 골치를 썩이며 중부 지역은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기에 솔직히 넘겨줘도 큰 손해가 아니었다.

짧은 사이에 여기까지 계산을 끝내고 제안을 던진 발데 총관이 대단했지만 조선 측 역시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대번에 상대의 의도를 파악한 박노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반란이 일어나 어지러운 곳을 선심 쓰듯 주겠다고 하다니 너무 뻔뻔한 것 아니오.”

내심 찔끔했지만 발데 총관은 노련한 상인답게 담담한 얼굴로 조선 측을 설득했다.

“조금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조선군이라면 거뜬히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농사를 짓기에는 멀리 떨어지고 정글로 뒤덮인 셀레베스 섬보다 날씨가 온난하고 조선과도 가까운 대만이 훨씬 좋지 않겠습니까.”

“골칫덩이를 은근슬쩍 아국에 떠넘기려는 걸 모를 줄 아시오!”

“셀레베스 섬을 양보할 수 없으니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과를 한다면 응당 이쪽에서 원하는 걸 들어줘야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안 된다고 하다니 진정으로 아국과 화해를 할 마음이 있는지 의심스럽소이다!”

“그건 조선 측에서 너무 과한 요구를 하니 그런 것 아닙니까.”

“애초에 인삼 씨앗을 몰래 훔치려고 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 아니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잘못을 인정했지 않습니까?”

“그런 자들이 이렇게 뻣뻣하게 나오는 거요?”

양측의 입장이 워낙 첨예하게 대립되다 보니 서로 날 선 공방이 오갔다.

하지만 지난번하고 다른 점이 있었는데 바로 일방적으로 요구를 하고 받아들이지 않자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과 달리 이번에는 조선 측이 끈기를 가지고 상대와 대화를 계속 이어 가고 있다는 거였다.

이것만 해도 큰 진전이었고 협상으로 문제를 풀어 갈 여지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입장 차이가 너무 컸기에 좀처럼 의견이 좁히지 않았고 결국 첫날은 서로의 조건을 확인하는 선에서 협상을 끝냈다.

“어찌 됐나?”

도현의 물음에 협상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희정당으로 온 외무대신 박노가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전하께서 예상하신 대로 셀레베스 섬을 할양하는 것에 크게 반발을 했사옵니다.”

“저들 입장에서는 향신로 무역을 계속 독점하기 위해서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지역 중 하나일 테니 그럴 수밖에.”

이런 그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도현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서 셀레베스 섬 대신 대만 중부를 넘기겠다는 제안을 해 왔습니다.”

“대만을?”

“그러하옵니다.”

도현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발데 총관이 그런 제안을 했다는 건가?”

“예.”

“후후후. 그런 생각을 하다니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물이군. 그래서 어떻게 했나?”

“당연히 어림도 없는 소리라고 딱 잘라 거부했사옵니다.”

“잘했네. 한족 반란군 때문에 넘겨받아 봤자 지금은 골치만 아플 뿐이고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차차 우리 쪽으로 넘어올 곳인데 구태여 이 좋은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 버릴 수는 없는 일이지.”

“맞사옵니다.”

여기서 도현이 셀레베스 섬뿐만 아니라 장차 대만을 완전히 수중에 넣으려고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반발이 크겠지만 주도권은 우리한테 있으니 밀리지 말고 과감하게 상대를 압박하도록 하게.”

“네.”

“그렇다고 너무 몰아붙이지는 말고. 쥐도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니 적당히 숨통을 틔워 주는 것도 잊지 말게.”

“알겠사옵니다.”

예전과 달리 단순히 제향祭享을 올리거나 빈객을 맞이하는 일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 크게 세력을 키워 나가는 도현의 치세에 따라 다른 나라와 적극적인 외교 업무를 수행해야 했던 박노는 이제 상대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알았다.

“저, 하온데, 전하…….”

“왜, 따로 할 이야기라도 있나?”

“반발이 클 것을 아시면서 왜 처음부터 칼리만탄(보르네오) 섬이 아닌 셀레베스를 요구하신 것이옵니까?”

여기서 또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났는데 도현이 이번 사건을 핑계로 네덜란드 측으로부터 받아 내려는 땅은 셀레베스 섬이 아닌 칼리만탄이었다.

금빛 비단 보료에 앉아 있는 도현은 박노의 물음에 짧게 혀를 찼다.

“쯧. 협상의 기본인데 그런 것도 아직 모르고 있다니 경은 아직 멀었구려.”

“송구하옵니다.”

머리를 숙이는 박노를 보며 도현이 이야기를 했다.

“잘 들으시오.”

“예.”

“경이 화란 측 대표라면 처음부터 칼리만탄 섬을 달라는 것하고 들어주기 어려운 요구를 했다가 한발 양보하는 척 조건을 바꾸는 것 둘 중에 어느 게 더 잘 먹힐 거 같소?”

그제야 도현의 의도를 파악한 박노는 무릎을 치며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렇군요.”

“칼리만탄 섬 역시 화란한테는 중요한 곳이지만 향신료 무역과 직접 연관되는 셀레베스보다는 덜할 것이오. 협상을 이어 가다 상대가 지칠 때쯤 슬쩍 칼리만탄 섬 이야기를 흘리면 상대는 썩 내키지는 않아도 거래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게요.”

“역시 대단하시옵니다.”

간단한 심리지만 이것만큼 효과가 확실한 것도 없었고 상대가 눈치를 채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아무튼 이번 협상은 아국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니 행여 잘못되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경이 꼼꼼히 챙기게.”

“염려 마시옵소서.”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도현은 어떻게 협상을 이끌어 갈지 박노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보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협상이 계속됐지만 셀레베스 섬 할양 문제에서 걸려 좀처럼 진전이 되지 않았다.

느긋한 조선과 달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는데, 다행히 올해 인삼 구입은 끝마쳤지만 완도 상관 폐쇄가 길어지면서 다른 도자기와 나전칠기 같은 조선 상품의 거래가 꽉 막혀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폐쇄 조치가 내려질 때 상관 선착장에 정박해 있던 네덜란드 상선 여섯 척의 이동까지 제한되면서 배와 선원을 그냥 놀려야 됐다.

이런 식으로 쌓이고 있는 손해가 무시하기 어려울 정도인 데다 동인도회사 상인들을 더욱 애태우는 건 바로 이 틈을 노려 잉여 물품을 싹쓸이하고 있는 영국 상인이었다.

제주 상관에 터를 잡은 영국 상인들은 조선 특산품들을 몽땅 사들여 유럽으로 가져가 큰 이익을 올렸고 조선과의 마찰을 벌이며 네덜란드가 살짝 위축된 사이 왜국은 물론이고 명나라와의 교역까지 빠르게 확장시켜 나갔다.

아직은 이제 막 대양으로 나온 영국의 능력이 부족해 확실히 치고 나오지 못했지만 이 상태로 가다가는 동아시아 교역의 주도권을 빼앗길 위험까지 있었다.

그렇다고 조선 측의 요구를 들어주고 서둘러 협상을 끝내기에는 셀레베스 섬의 중요성이 너무나도 컸다.

결국 발데 총관을 비롯한 동인도회사 간부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네덜란드 측이 머물고 있는 객관으로 평소 거래를 하며 안면이 있던 봉황상단 행수 한 명이 헤나로 지부장을 찾아왔다.

“이거, 바쁜데 제가 찾아온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중년인이 약간은 어색한 네덜란드어로 이야기를 하자 헤나로 지부장이 손사래를 치며 의자를 내줬다.

“아니오. 그렇지 않아도 답답했는데 잘 오셨소이다.”

“일이 잘 안 풀리시는 모양입니다.”

자신들이 조정과 협상을 하고 있다는 건 이미 다 소문이 나 비밀도 아니었기에 헤나로 지부장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라도 빨리 상관을 다시 열어 거래를 재개해야 되는데 계속해서 협상이 평행선만 달리고 있으니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것 같소이다.”

“그렇군요. 우리도 완도 상관이 폐쇄되는 바람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제일 빨리 물량을 제주 상관으로 가져가 영국 상인들한테 웃돈까지 받으며 팔아 큰 이익을 본 걸 알고 있는데 능청스럽게도 상대가 앓는 소리를 하자 헤나로 지부장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상인답게 내색을 하지 않았다.

“걱정이 크시겠소이다.”

하지만 빈정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는지 은근슬쩍 뼈 있는 말을 던졌지만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넘겼다.

“완도 창고에 있던 상품들을 다시 배에 실어 제주까지 옮겨 가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르실 겁니다. 다행히 영길리 상인들이 있어서 그나마 손해를 크게 보지 않고 처분했지요.”

“아, 그렇소이까.”

속이 쓰렸지만 그렇다고 화를 내기도 애매했던 헤나로 지부장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다음 인삼 판매 시기에는 거래를 재개할 수 있겠지요?”

“글쎄올시다…….”

헤나로 지부장이 말끝을 흐리자 상대는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우리야 영길리 상인들한테 물량을 처분하면 되지만 참 딱하게 되셨소이다.”

위로를 하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신경을 긁으려는 건지 도통 감이 안 잡히는 가운데 상대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런데 의견이 갈리는 부분이 뭡니까?”

딱히 대답해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헤나로 지부장은 노골적으로 귀찮은 표정을 짓고 말했다.

“셀레베스 섬을 할양하는 문제 때문이지, 그 외에 달리 뭐가 있겠소.”

그러자 행수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거기라면 그쪽에서도 귀하게 생각하는 곳이 아닙니까?”

“그러니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나도 골치가 아파 죽겠소이다.”

한탄하는 그의 말투에 상대는 동정심이 섞인 시선을 보내왔다.

“조선 측에서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어려운 요구를 하는지 모르겠소이다.”

“그만큼 조정이 이 일을 심각하게 여긴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러게 뭐하러 인삼 씨앗은 훔치려 들어서…… 쯧쯧.”

“끄응.”

어차피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꺼내서 후벼 파니 기분이 나쁜 건 당연했다.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힐끔 쳐다본 행수가 슬쩍 미끼를 던졌다.

“셀레베스 섬을 정 포기하기 힘들면 대신할 만한 다른 땅을 조정에 바치는 수도 있지 않겠소?”

그 말에 헤나로 지부장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쉬었다.

“누군들 그 생각을 안 해 봤겠소. 하지만 씨알도 안 먹히더이다.”

“대체 어디를 주겠다고 했기에 그런 반응이?”

“대만 중부 지역을 넘길 셈이었소.”

“과연.”

행수는 알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조정 대신들이 바보인 줄 아십니까? 그 지역이 멀쩡한 땅이 아니라는 걸 우리 같은 상인들도 다 알고 있는데 윗선에서 어찌 모르겠소.”

어디 그뿐이랴, 말을 꺼낸 순간 오히려 괘씸죄가 더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더 컸다.

“하지만 대만 중부 말고는 딱히 넘길 땅이 없는데 어쩌란 말이오!”

그 역시 할 말이 아예 없지는 않은 표정으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어쨌든 그것 참 어렵게 되셨소이다.”

같은 상인으로서 헤나로 지부장이 처한 상황이 안돼 보이기도 해서, 위로의 말을 던지던 행수가 순간 무언가 생각난 듯 탄성을 내질렀다.

“아! 그렇지. 거긴 어떻습니까?”

“어디를 말하는 거요?”

“그 왜, 예전이 귀국이 아국과 군사동맹을 맺으려고 했을 때 주상 전하께서 넘겨 달라 하셨던 섬이 있잖습니까.”

잠시 머리를 기울여 생각하던 헤나로 지부장이 퍼뜩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설마 칼리만탄 섬을 말하는 거요?”

“거기라면 주상 전하와 조정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꽤 좋은 생각 아닙니까?”

“하지만 그 섬 또한 우리 화란에겐 중요한 곳인데…….”

“그런 식으로 따지면 이 협상 자체가 아예 이루어질 수도 없을 겁니다. 아무리 손해를 보기 싫어하는 게 우리 상인들의 습성이라지만 때로는 각오가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지 않겠습니까.”

행수는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몸을 앞으로 굽혔다.

“그리고 향신료 무역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인 셀레베스 섬을 넘기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행수의 제안을 곱씹던 헤나로 지부장은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긴 듯 허둥거리며 일어섰다.

“말씀 잘 들었소이다. 그런데 갑자기 볼일이 생각나서 이만…….”

누가 봐도 어색한 헤나로 지부장의 태도에 행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덩달아 장단을 맞췄다.

“그러고 보니 나도 슬슬 가 봐야겠군요.”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 그의 모습에 반색하며 헤나로 지부장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급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 헤나로 지부장의 뒤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행수가 묘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지만 누구도 그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바로 이걸 노리고 도현이 행수를 보내 우연을 가장해서 상대가 칼리만탄 섬을 고려하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헤나로 지부장은 그것도 모르고 바로 부리나케 발데 총관한테 달려갔고,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네덜란드 측은 도현의 손바닥 위에서 그가 의도한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칼리만탄 섬을 대신 넘겨주자고?”

협상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아서 그런지 얼굴이 많이 상해있던 발데 총관은 뜻밖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렇습니다. 거기라면 조선 측에서 예전부터 관심을 보이던 곳이니 분명 솔깃해할 겁니다.”

“하지만 그곳 역시 남방 지역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거점이 아닌가?”

발데 총관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헤나로 지부장은 포기하지 않고 그를 설득했다.

“물론 그렇긴 해도 향신료 무역의 중계항인 셀레베스 섬을 넘겨주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긴 한데…….”

“지금 상태라면 협상이 체결되기 어렵습니다. 상관이 폐쇄되면서 입고 있는 손해도 막심하지만 행여 조선 국왕이 지난번에 본 함대를 정말 바타비아 요새로 내려 보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최악의 사태만은 막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협상을 벌이는 내내 네덜란드 측이 조선에 끌려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함대 이야기를 꺼내자 발데 총관은 미간을 찌푸렸다.

“으음. 아무리 그래도 칼리만탄 섬을 넘겨주는 건…….”

“벌써 완도 상관이 폐쇄된 지 한 달이 훌쩍 넘었습니다. 그사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손해를 입었는지 총관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손해액이 계속해서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무엇보다 영국 놈들이 이런 상황을 틈타 배를 불리고 있다는 겁니다.”

영국 상인 이야기가 나오자 발데 총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동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애써 만들어 놓은 상권을 영국이 야금야금 파고들며 큰 위협이 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장 조선과의 거래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네덜란드가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 향신료 무역까지 침을 흘리고 있으니 좋게 보일 리가 만무했다.

“섬을 넘겨준다고 해도 조선은 계속 우리와 협력 관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지만, 영국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생각해 주십시오.”

헤나로 지부장의 말대로 조선이 유럽까지 상품을 가져가 팔려고 하지 않는 이상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이익을 크게 침해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영국은 달랐는데 노리는 것이 같은 이상 애초에 공존 자체가 불가능했고 서로 어떻게 해서든 상대를 꺼꾸러뜨려야 되는 피나는 경쟁만이 존재했다.

그래도 아무리 영토에 큰 욕심이 없는 네덜란드라고 해도 칼리만탄 섬은 선뜻 넘겨주기에 그 중요성이 너무나도 컸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발데 총관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리며 한센이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왠지 불길한 느낌에 발데 총관이 묻자 한센이 창백해진 얼굴로 황급히 입을 열었다.

“조, 조선 함대가…….”

“조선 함대가 왜?”

“남방으로 출항을 한다고 합니다.”

“뭐야!”

충격적인 소식에 발데 총관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헤나로 지부장도 눈을 크게 뜨고는 다그치듯 입을 열었다.

“갑자기 그게 뭔 소린가!”

“저도 방금 들은 소식인데 지난번에 화력 시범을 보였던 함대가 남방으로 내려간다는 소문이 저잣거리에 파다하게 퍼졌다고 합니다.”

“조선이 정녕 우리와 전쟁을 벌이겠다는 거야!”

화가 난 듯 고함을 내질렀지만 발데 총관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갑자기 그런 엄청난 전력을 가진 함대를 내려 보내는 이유라면 하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경악한 외침을 터트리는 발데 총관을 향해 헤나로 지부장이 말했다.

“이러다가 정말 조선 함대가 바타비아 요새로 가기라도 하면 어쩝니까?”

“어떻게든 막아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허어…….”

허탈한 한숨과 함께 발데 총관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들에게 이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가능한 것은 오로지 조선의 의지대로 끌려가는 것뿐.

어찌할 수도 없는 무력감에 참담한 심정을 느끼면서 발데 총관은 헤나로 지부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조선 측에 연락해 약속을 잡도록 하게.”

“마음을 굳히신 겁니까?”

“최선이 불가능하다면 차선책이라도 붙잡아야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헤나로 지부장의 생각에도 그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서 외무부에 연락을 취하게.”

“예.”

지부장의 지시를 받은 한센이 급하게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묵직한 소리가 마치 암울한 미래를 암시하는 것만 같아 더욱 우울해진 발데 총관은 헤나로 지부장을 향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술이라도 한잔 먹고 싶은 기분이로군.”

그렇게 중얼거리는 발데 총관의 얼굴엔 쓰라린 패배감이 가득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육조 거리에 위치한 외무부 청사 회의실로 향하는 발데 총관 일행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참담했다.

누구 하나 쉽게 말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으니, 청사 안을 걸어가는 도중 스쳐 지나간 관리 중 몇 명은 어디서 초상이라도 났나 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일찌감치 도착한 발데 총관 일행은 조선 측 관리들이 도착할 때까지 초조한 기분으로 기다렸다.

불과 몇 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어찌나 느리게 흘러가는지 미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외무대신 박노를 비롯한 조선 관리들이 회의실로 들어섰다.

그들의 쭉 뻗은 등과 당당하게 편 어깨에선 감출 수 없는 자신감이 흘러나와, 발데 총관 일행에 비해 마치 빛과 어둠 같은 대조를 이뤘다.

비어 있던 의자에 앉은 박노는 턱을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

“갑자기 만나자고 한 연유가 무엇이오?”

잠시 머뭇거리던 발데 총관은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귀측에 제안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요?”

박노가 팔짱을 끼며 심드렁하게 묻자 발데 총관이 약간 긴장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셀레베스 섬 대신 다른 곳을 할양하면 어떻겠습니까?”

“대만 중부는 싫다고 하지 않았소.”

딱 잘라 거부 의사를 밝히자 발데 총관이 한쪽 손을 내저었다.

“거기가 아니라 다른 곳입니다.”

“흐음. 계속해 보시오.”

발데 총관이 눈짓을 하자 옆에 있던 한센이 준비해 온 지도를 탁자 위에 펼쳤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한곳을 짚으며 말했다.

“여기 칼리만탄 섬 북부를 넘겨 드리겠습니다.”

상대의 입에서 칼리만탄 섬의 이름이 나오자 눈에서 이채를 띠던 박노는 이내 담담한 얼굴로 그다지 내키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섬 전체도 아니고 고작 일부만 떼어 내서 할양하겠다는 거요?”

“그것만 해도 순수하게 면적만 계산한다면 처음 요구하신 셀레베스 섬보다 넓을 겁니다.”

그러자 박노가 다른 걸로 빈정거리면서 딴죽을 걸었다.

“지난번에 군사동맹의 대가로 주상 전하께서 요구하셨을 때는 식민지가 아닌 독립된 왕국이라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고 하더니 그사이 상황이 바뀐 모양이오.”

“그건…….”

대답이 궁해진 발데 총관이 말끝을 흐리며 당황한 표정을 짓자 약점을 잡은 박노는 매섭게 눈을 번뜩이며 상대를 몰아붙였다.

“설마 협상만 해 놓고 아국보고 알아서 정리하라고 은근슬쩍 떠넘기려는 속셈인 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발데 총관이 황급히 손사래를 치자 박노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하면 귀측이 우리한테 할양할 땅을 깨끗이 비워 줄 것이오?”

“……?”

“우리는 농사를 지을 땅이 필요한 것이지 말썽을 피울 사람은 원하지 않소.”

상당히 잔인한 이야기였지만 조선이 할양받게 될 땅을 영구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원주민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이들을 강제로 쫓아내야 되니 당연히 지저분하고 피를 볼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그걸 네덜란드에 떠넘기려는 거였다.

조선 측의 요구에 발데 총관은 오히려 반색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없었고 노예 매매는 쉽게 큰돈을 버는 유망한 사업이었기에 원주민들을 잡아들이면 이번 일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입은 손실을 어느 정도 메워 넣을 수 있었다.

“좋습니다. 협상이 끝나는 즉시 해당 지역을 우리가 말끔히 정리하지요.”

발데 총관의 대답에 박노는 허리를 펴며 머리를 끄덕였다.

“뭐, 썩 마음에 드는 제안은 아니지만 일단 주상 전하께 여쭤 보도록 하겠소.”

“감사합니다.”

시종일관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조선 측과 달리 네덜란드 쪽은 많은 걸 양보하면서도 상대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드디어 원하던 제안을 받은 박노는 회의실을 나오자마자 곧장 대궐로 들어가 도현을 알현했다.

“외무대신께서 오셨사옵니다.”

밖에서 내관이 아뢰는 소리에 도현은 보고 있던 보고서를 덮고 말했다.

“들라 하라.”

미닫이문이 열리며 방 안으로 들어서는 박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걸 보니 무슨 좋은 일이 있는가 보군.”

박노는 우선 예를 갖춘 뒤 방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머리를 조아렸다.

“역시 전하의 눈은 속이지 못하겠습니다. 방금 화란 대표들과 만났는데, 드디어 칼리만탄 섬을 할양하겠다는 말을 들었사옵니다.”

“호오. 그래?”

“봉황상단을 통해 옆구리를 찌르는 방법이 제대로 통한 것 같사옵니다.”

“잘됐군.”

“한데 조금 문제가 있사옵니다.”

“그게 뭔가?”

“섬 전체가 아니라 북부 지역만 할양해 주겠다고 하옵니다.”

박노의 말에 도현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이 상황에서도 그런 잔머리를 굴리다니 역시 상인답군.”

“어찌할까요?”

잠시 생각을 하던 도현은 크게 상관없다는 듯이 가볍게 말했다.

“어차피 칼리만탄을 통째로 받아 내도 그걸 다 감당하기에는 아직 아국의 능력으로는 벅찬 데다 필요한 건 북부 지역이니 적당히 밀고 당기다가 수용하도록 해. 대신 다른 데서 이득을 챙기는 걸 잊지 말고.”

“맡겨만 주십시오. 혼이 쏙 빠져나가게 아주 탈탈 털어 버리겠습니다.”

좀처럼 비속어를 쓰는 일이 없는 박노가 이런 말까지 하는 걸 보니 그도 도현의 성품에 아주 많이 감화된 모양이었다.

“경만 믿겠네.”

‘예.’ 하고 물러나려던 박노가 웬일인지 잠시 머뭇거렸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도현의 물음에 박노는 들썩이던 엉덩이를 다시 방석 위에 내려놓고 말했다.

“협상이 원하는 대로 되고 있으니 함대 출정은 취소시키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당연한 수순이었는데 특별한 목적이 아니고 순수하게 네덜란드 측을 압박하기 위한 행동이었기에 이제 원하는 걸 얻었으니 그만두는 것이 맞았다.

특히나 그냥 숨만 쉬고 있어도 엄청난 돈을 잡아먹는 것이 군대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운용 비용을 소모하는 함대를 한번 움직이면 들어가는 군비가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현의 생각은 다른지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냥 원래 계획대로 함대를 움직일 것이야.”

“예?”

박노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도현은 차분한 어투로 이유를 설명해 줬다.

“여기서 협상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칼리만탄 섬 같은 전략 요충지를 넘겨주는 일을 발데 총관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지 않겠나.”

“그렇지요.”

“십중팔구 바타비아에 있는 윗사람들의 허락을 받아야 될 텐데 그자들이 쉽게 승인을 해 주려고 하겠나.”

“아, 그럼 그들을 압박하기 위해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박노가 탄성을 내뱉자 도현은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맞네. 바로 코앞에 아국 함대를 갖다 놓으면 저들도 협정을 승인할 수밖에 없을 게야.”

“역시, 전하의 심계는 따라갈 수가 없사옵니다.”

“아예 화란 대표가 바타비아로 갈 때 아국 함대와 함께 보내는 것도 좋겠군.”

“그러면 확실한 압박이 되겠습니다.”

치우 급 전함을 보고 기겁할 바타비아 요새 주둔군의 모습을 떠올린 도현은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셀레베스 섬 대신 칼리만탄을 할양받기로 하자 양측은 이제 국경선을 어디에 그을 건지를 가지고 밀고 당기는 치열한 협상을 벌였다.

조선은 당연히 조금이라도 더 많이 받아 가려고 했고 네덜란드는 그 반대였다.

사흘간 이어진 피 말리는 협상 끝에 칼리만탄 섬을 동서로 가로 지르는 카푸아스 산맥을 기준으로 북쪽에 위치한 지역을 전부 조선에 할양하기로 했다.

그리고 네덜란드 금화 이만 냥을 배상금으로 조선 조정에 이 년에 걸쳐서 지급하기로 했다.

전체가 아닌 일부를 할양하는 대신 배상금 액수가 두 배로 늘어났지만, 발데 총관은 칼리만탄 섬 절반을 계속 보유하며 조선이 향신료 무역에 끼어드는 걸 견제할 수 있는 것에 만족스러워했다.

모든 조항에 합의를 본 양측은 영토 할양 문제를 발데 총관이 독단으로 처리할 수 없었기에 최종 서명은 잠시 유보했다.

오렌지 공의 전권대사인 도르네바르드 백작과 동인도회사 본사의 승인을 받기 위해 발데 총관은 며칠 뒤 바로 제물포를 거쳐 조선을 떠났다.

그런데 바타비아로 돌아가는 발데 총관의 옆에는 치우 급 전함 두 척이 포함된 조선 함대가 동행을 했다.

그로서는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었지만 조선은 대만 북부에 있는 대남요새에 물자를 수송하고 최근 기승을 부리는 해적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함대를 내려 보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이건 네덜란드 측을 압박하기 위한 것으로밖에 안 보였는데 실제로 조선 함대의 출현에 바타비아 요새는 발칵 뒤집혔다.

다행히 조선 함대가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걸 밝히면서 일단은 한시름 놨지만 발데 총관이 조선과 합의한 걸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거라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발데 총관이 가져온 합의서 읽어 본 도르네바르드 백작과 동인도회사 간부들은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었지만 항구 앞에 수백 문의 대포를 탑재한 조선 군함들이 떠 있는 상황에서 반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군사력뿐만 아니라 먼저 조선의 보물인 인삼 씨앗을 몰래 훔치려 했다는 명분마저 밀렸기에 결국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합의서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고 동인도회사 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사이 바타비아 요새 근처에서 대규모 포격 훈련까지 하며 충분히 위력 시위를 한 조선 함대는 유유히 귀환길에 올랐다.

조선 함대는 사라졌지만 산처럼 거대한 치우 급 전함이 천둥치는 소리를 내며 백여 문에 달하는 함포를 일제히 발사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은 네덜란드인들은 좀처럼 공포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런 감정이 고스란히 적힌 보고서가 쾌속선에 실려 네덜란드 본국으로 보내졌고 상당한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영국하고 해상 교역 주도권을 두고 피 튀기는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막강한 함대를 보유한 조선과 싸울 수는 없다는 판단에 최종적으로 합의서를 승인했다.

그해 유월 이번 사건의 책임을 물어 본국으로 소환된 발데 총관 대신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한양으로 가서 외무대신 박노와 합의서에 정식 서명을 했다.

이로써 조선은 금화 이만 냥의 배상금과 함께 칼리만탄 섬 북부를 영구 할양받았다.

네덜란드도 얻은 것이 아예 없지는 않았는데 막판에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협상력을 발휘해 오 년간 바타비아에서 조선 상단의 관세를 완전 면제해 주는 대신 같은 기간 동안 양국이 군사동맹을 맺기로 했다.

이걸로 네덜란드는 동아시아 해역에서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과 동시에 영국이 함부로 바타비아를 건드릴 수 없도록 만들었다.

<19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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