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권
다시 몰려오는 먹구름
조선이 함대를 남방으로 내려보내 힘을 과시하며 서양 국가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한 지 육 년의 세월이 흘렀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여름날 아침.
아직 조금은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대궐 한쪽에 위치한 연무장에서는 우렁찬 기합성과 함께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채챙! 챙!
단단한 박석이 촘촘하게 깔린 넓은 연무장 위에는 아직 앳된 모습이 남아 있는 청년과 이제 중후한 품격이 느껴지는 도현이 진검을 들고 대련을 펼치고 있었다.
“하압!”
적당히 기른 수염에 조금은 낡아 보이는 머리띠를 질끈 동여맨 도현은 여전히 젊었지만, 혈기 가득했던 예전과 달리 차분하고 절제된 분위기를 풍겼다.
“허리가 비었지 않느냐!”
따끔한 지적과 함께 도현은 칼등으로 청년의 옆구리를 세게 내려쳤다.
퍽.
“큭.”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꽤 강한 힘이 실린 공격에 숨이 턱 막힌 청년은 얼굴을 찡그리며 두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상태에서도 손에 든 검 끝을 단단히 세우고 있는 것이 아직 승부를 포기하지 않은 모양새였다.
그걸 보고 도현은 흡족한 마음이 들었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담담히 말했다.
“더 하겠느냐?”
“물론입니다, 아바마마.”
“좋아, 덤벼라.”
도현과 똑같이 왕실을 상징하는 황금 봉황 자수가 화려하게 새겨진 흑색 무복을 입은 청년은 바로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자 장차 왕좌를 이어받아 조선을 다스릴 왕세자 이연이었다.
선물로 받은 조랑말을 타고 좋아하며 천진난만하게 웃던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 훌쩍 자라 아버지인 도현과 진검을 들고 대련을 할 정도가 됐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세를 바로 한 연은 힘차게 기합성을 터트리며 앞으로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이얍!”
이연 왕세자가 찔러 오는 검격은 제법 날카로웠다.
하지만 아직 수련이 깊지 않고 실전 경험이 한 번도 없어서 그런지, 마치 약속 대련을 하는 것처럼 교과서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당연한 결론이었지만 무수한 실전을 거쳤고 왕좌에 있으면서도 수련을 쉬지 않은 도현은 그런 이연 왕세자의 공세를 아주 쉽게 막고 흘리며 잘못된 점을 따끔히 지적했다.
“멧돼지처럼 무조건 덤벼든다고 해서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딱.
“현란한 허초에 속지 말고 상대의 움직임을 주시해야지!”
아직은 어린 아들이었기에 조금은 봐줄 수도 있었지만, 지금 흘리는 땀방울 하나가 훗날 실제 전장에 나가서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도현은 가슴이 아파도 더욱 엄하고 강하게 가르쳤다.
이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이연 왕세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실력을 내보였다.
그렇게 한동안 더 검격을 나눈 뒤 두 사람 다 무복이 땀에 젖고 숨이 거칠어지자 도현은 이연 왕세자의 검을 쳐 내고는 대련을 멈췄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꾸나.”
“후우, 후우. 예, 아바마마.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납검納劍을 한 이연 왕세자가 숨을 고르며 머리를 숙이자 그제야 도현은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아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줬다.
“검로가 너무 정직한 것이 흠이지만, 제법 매서운 게 많이 늘었구나.”
“아직 멀었습니다.”
“그래, 장차 넌 내 뒤를 이어 이 나라를 이끌어 가야 될 왕세자이니 그런 마음가짐으로 더욱 정진하도록 해라.”
“옛.”
두 사람이 나란히 연무장 밖으로 나오자 한쪽에서 시립하고 있던 궁녀들이 얼른 땀을 닦아 낼 수 있게 깨끗한 무명천을 가져다줬다.
“아바마마, 서연書筵(학사들이 왕세자에게 유교 경전을 강론하는 자리) 시간이 다 돼서 소자는 이만 먼저 가 보도록 하겠사옵니다.”
상선인 칠현한테 검을 맡기고 준비된 의자에 앉아 잠시 쉬고 있던 도현은 이연 왕세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를 익히는 만큼 학문도 게을리해서는 안 되지. 어서 가 보아라.”
“그럼…….”
나무랄 데 없는 자세로 예를 취한 이연 왕세자는 수행원들과 함께 연무장을 떠나 거처인 동궁으로 향했다.
“정말 늠름하게 자라나셨사옵니다.”
친위대장 신철이 옆으로 다가와 하는 말에 도현은 마음과 달리 짐짓 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직 부족한 것이 많아.”
“전하의 눈에는 안 차실지 모르겠사옵니다만,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재목이라며 대궐 안팎으로 칭송이 자자하옵니다.”
“흐음.”
자고로 자식 칭찬을 하는데 싫어할 부모는 아무도 없기에, 도현은 심드렁한 얼굴을 하면서도 한쪽 입꼬리가 살짝 위로 말려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아직 멀었어.”
“저 정도면 훌륭하시지요. 제가 듣기로 벌써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다 떼고 시강원侍講院 학사들과도 자유롭게 토론을 벌일 정도로 학문도 뛰어나시다더군요.”
“뭐, 그렇긴 하지. 아무튼 주위에서 너무 띄워 주면 괜히 헛바람이 들어갈 수 있으니 세자 앞에서는 그런 말들을 하지 않게 주의를 주게.”
“염려 마시옵소서.”
“그러면 땀이 더 식기 전에 신 장군과 한번 겨뤄 볼까.”
“하하하, 좋사옵니다.”
도현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신철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따라 연무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을 더 연무장에서 몸을 단련시킨 도현은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대전으로 나갔다.
“주상 전하 납시오!”
상선인 칠현이 목에 잔뜩 힘을 주며 소리치자 대전 좌우에 관복을 입고 시립해 있던 대신들이 일제히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화려한 용포를 입고 당당한 걸음으로 대신들 사이를 지나간 도현은 높게 단을 쌓아 만든 왕좌에 앉았다.
위엄이 가득한 시선으로 대신들을 천천히 쓸어 본 도현은 크지는 않지만 힘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다들 고개를 들라.”
그러자 허리를 굽히고 있던 대신들은 자세를 바로 하면서도 시선은 감히 국왕인 도현을 보지 못하고 바닥을 향했다.
“조회를 시작하시오.”
은퇴한 박황을 대신해 작년부터 총리대신직을 맡은 임경업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을 받았다.
“먼저 경복궁 중건 현황부터 아뢰겠나이다.”
“그러시오.”
임경업이 살짝 시선을 옆으로 돌려 쳐다보자 영건도감의 도제조 신정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신 영건도감 도제조, 보고를 드리겠나이다.”
주변 정세가 안정되고 나라의 기틀이 잡히자 도현은 그동안 미루어 왔던 경복궁 중건에 나섰는데, 이 일을 맡아서 처리하기 위해 임시로 만들어진 관청이 바로 영건도감이었다.
“지난달까지 궁궐터의 정리를 모두 끝내고 며칠 전부터 각지에서 골라 뽑아 온 장인 이천여 명이 본격적인 중건 작업에 들어갔사옵니다.”
“대궐을 지으려면 목재가 많이 필요할 텐데 수급에는 문제가 없나?”
“예. 다행히 북해도(현재의 연해주) 지역에 대궐 기둥으로 쓰기에 충분한 아름드리나무들이 많아 목재를 구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사옵니다. 거기다 전하의 지시대로 새로운 공법을 적용해 목재 사용량이 예전에 비해 현격히 줄어들었사옵니다.”
목재가 주재료라서 화재에 취약한 조선 건축물들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도현은 이번 경복궁 중건 때는 석재 사용 비율을 늘리라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
임진왜란 이전에 있던 원래 모습과는 약간 달라지겠지만, 그래도 다시는 화재나 여타의 사유로 경복궁이 소실되지 않고 오래도록 보존되길 바라는 그의 바람이 들어간 것이었다.
자칫 아름답고 위엄이 있어야 될 대궐이 이상하게 지어질 수도 있다는 일부 우려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손재주를 가진 조선의 장인들은 다루기 어려운 석재를 가지고도 누가 봐도 감탄성을 터트릴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냈다.
물론 이건 나중 일이었고, 아직은 주춧돌을 이제 막 세우는 등 바닥 기초를 다지고 있어 갈 길이 멀었다.
“공역이 본격화됐으면 그만큼 들어가는 자금이 커졌을 텐데 예산은 부족하지 않나?”
“전하께서 내려 주신 내탕금 금화 십만 냥이 아직 절반가량 남아 있고 경복궁을 중건하는 영광스러운 일에 미력하나마 정성을 보태려는 이들의 참여가 많아 자금 운용에 여유가 있사옵니다.”
“그것 참 갸륵한 일이군.”
조선 왕실의 정궁인 경복궁을 중건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양반 사대부들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까지 자발적으로 많은 돈과 물건을 바쳤다.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아 그가 가진 돈으로도 공사 비용을 충당하고 남았기에 도현이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때만큼은 어명도 통하지 않았다.
재물을 받지 않으면 공사판에 나와 허드렛일이라도 하겠다는 백성들의 간청에 결국 도현은 손을 들고 말았다.
대신 공역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탠 이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새로 짓는 경복궁 정문 벽에다가 이름을 새겨 후대에 기록으로 남기도록 했다.
이처럼 누가 강제로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왕실 공역에 동참할 정도로 도현은 백성들에게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었다.
“왜국 막부에서도 왜은 오만 냥을 보내왔사옵니다.”
외무대신 박노의 말에 도현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막부가?”
“그렇사옵니다.”
“능구렁이 같은 이에미쓰가 그냥 은을 갖다 바칠 리는 없고, 무슨 꿍꿍이지?”
“몇 달 뒤에 있을 자신의 생일날 사절단을 보내 주길 원하는 것 같사옵니다.”
“사절단을?”
“예, 지방 번주들한테 아국과의 관계를 과시하려는 목적인 것 같사옵니다.”
“아직도 막부가 제대로 주도권을 못 잡고 혼란스러운 모양이지?”
어느새 대화는 경복궁 중건에서 왜국 정세로 넘어갔다.
“여러 가지로 애를 쓰고 있습니다만 한번 무너진 위신을 다시 세우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옵니다. 최근에는 가장 중요한 통치 수단 중 하나인 참근교대마저 대부분의 번주들이 거부해 유명무실해졌다 합니다.”
“그 말뜻은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막부가 거의 상실했다는 거군.”
“그렇사옵니다. 조슈번[長州藩] 같은 경우에는 공공연하게 막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세력을 키우는 상황입니다.”
“예전부터 조슈번이 반골 기질이 강하기는 했지만, 막부와 대놓고 신경전을 벌일 정도로 세력이 컸나?”
그러자 정보를 담당하는 주작단 이완 단장이 슬쩍 끼어들며 이야기를 했다.
“수많은 지방 번들 중에서도 상위권에 들어가는 경제력을 지닌 데다가 휘하에 보유한 무사들의 숫자만 일만 명이 넘어 예전부터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이옵니다. 거기다 지난 몇 년간 막부가 휘청거리는 사이에 본주 서부 지역 번주들의 구심점으로 떠올라 이에미쓰가 크게 경계를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사옵니다.”
“무사만 일만이라면 실제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더 많다는 거잖아?”
“저희가 파악한 정보에 의하면 조슈번 자체적으로 최소 삼만에서 오만 명의 병력을 일으킬 능력이 되고, 추종하는 세력까지 다 합치면 십만은 너끈히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보고 있사옵니다.”
도현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십만이라, 막부가 신경이 예민해질 만하군.”
“그러게 말이옵니다. 일개 지방 영주가 그만한 세력을 가지고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옵니다.”
“어차피 저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든 말든 왜국이 분열되면 아국에 좋은 것이지 않겠습니까?”
상공대신 유형원의 말에 다른 대신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하지만 왕좌에 앉아 있는 도현은 생각이 다른지 표정이 조금 굳었다.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계속 분열과 다툼에 빠져 혼란 속에서 헤어 나오지 말아야지, 누군가 주도권을 장악하고 왜국을 일통한다면 오히려 더 큰 위협이 될 수도 있어. 그 상대가 조슈번처럼 호전적인 가문이라면 더욱 위험하겠지.”
왜국이 내부를 일통했을 때 얼마나 위험한지 이미 임진왜란을 통해 뼈저리게 겪었던 대신들은 그의 이야기에 표정이 무거워졌다.
“잔꾀를 쓰기는 했지만 어찌 됐던 은도 상납했고, 조슈번을 견제하는 의미에서 이번에는 막부에 힘을 실어 주도록 하지. 외무대신.”
“하교하시옵소서.”
“경이 적당히 인선을 해서 축하 사절을 보내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말이 나온 김에 남명 상황은 어떤가? 신양 전투에서 대패를 당했다면서.”
아무래도 왜국보다 더 관심이 크고 조선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는 일이다 보니 대신들의 시선이 이완 단장에게 몰렸다.
“청 황제가 직접 지휘하는 군대에 성을 함락당한 남명군 패잔병들은 뿔뿔이 흩어져 양자강 이북 지역의 거점을 모두 잃고 우한武漢으로 퇴각 중입니다.”
그의 말에 좌우 대신들의 입에서 안타까움이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때는 금방이라도 북경을 수복할 것처럼 기세를 올리더니, 이리 허무하게 무너질 줄이야.”
“그러게 말이오.”
“쯧쯧.”
웅성거리는 소리에 대전이 시끄러워지자 도현이 의자 팔걸이를 탁 내리쳤다.
잠시 후 조용해진 틈을 타 그가 물었다.
“주율건은 어떻게 됐나?”
“이번 패배로 화북 지역의 수복을 완전히 포기했는지, 군사를 양자강 이남으로 물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인도 총사령관인 정성공한테 모든 일을 맡기고 황궁이 있는 남경으로 돌아갔다 합니다.”
오 년 전 숭정제가 북경을 잃은 화병과 좌절감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병사하자 유약한 황태자 주자량 대신 당왕 주율건이 젊은 장수와 대신 들의 지지를 받아 새로운 황제로 등극했다.
“하긴, 이미 국력이 바닥이니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없을 테지.”
이해한다는 듯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화북 지역에 더 이상 청나라를 위협할 세력이 없는 것 아니옵니까?”
사뭇 걱정스러운 얼굴로 임경업이 끼어들었다.
“그렇지.”
직례 총독이었던 왕영을 중심으로 모여 새롭게 나라를 세우며 독자 생존을 모색했던 태후파 잔존 세력은 제일 먼저 도르곤의 손에 무너졌다.
산서성山西省으로 들어간 오삼계도 청군을 상대로 몇 번 크게 승리를 거두며 선전했지만 결국 힘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왕영처럼 모든 것을 잃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비극은 면했어도 척박한 사천 땅으로 밀려나 겨우 명맥만 유지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남명군마저 신양 전투의 패배 이후로 세력이 급격히 쪼그라들어 양자강 이남으로 퇴각하면서, 이제 화북 지역은 청나라가 완전히 장악하게 됐다.
“내부 정리를 끝낸 청나라가 다시 창끝을 아국으로 향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옵니다.”
재무대신 김육이 우려하는 얼굴로 말을 하자 좌중이 크게 술렁였다.
청 황제인 도르곤이 제위에 오른 이후 지금까지 틈만 있으면 이제 조선 땅이 된 만주의 수복을 외치고 다녔기에, 여유가 있으면 군대를 일으키리라는 것을 누구나 다 예상할 수 있었다.
“이제 막 오랜 전란이 끝나 가는데 또다시 대규모 전쟁을 벌일 여력이 있겠소이까?”
“맞소이다.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되겠지만 근시일 안에는 청군이 산해관을 나오기는 힘들 겁니다.”
큰 승리를 여러 차례 거뒀지만 그래도 여전히 껄끄러운 상대인 청나라와의 전쟁을 가급적이면 피했으면 하는 마음에 대신들은 낙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국방대신 이시영이 약간 굳은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청국이 지쳐 있는 건 사실이지만 호전적인 청 황제의 성정으로 볼 때 무슨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르오. 당장 산해관 일대에서 아국의 서천도(요서 지역)를 호시탐탐 노리는 청군 병력만 십만이 넘소이다. 거기다가 지금까지 전란을 거치며 단련된 팔기군이 가세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절대 방심하지 말고 철저히 방비를 해야 될 것이오.”
“흐음.”
“그것참.”
청나라의 장차 행보를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은 가운데,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도현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총리대신이자 조선이 자랑하는 명장인 임경업을 보며 입을 열었다.
“총리대신.”
“예, 전하.”
“경은 도르곤이 어찌 움직일 것 같소?”
질문을 받은 임경업은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잠시 고심을 하더니 신중한 태도로 이야기를 했다.
“개구리가 튀는 방향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사람 마음인데 제가 어찌 그걸 정확히 알 수 있겠사옵니까. 하오나 지금까지 청 황제가 해 온 행적으로 볼 때 분명 아국과의 전쟁을 오래 미루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그 말뜻은 조만간 도발을 해 올 것이라는 건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도현이 묻자 임경업은 그의 시선을 마주 보며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그 시기가 당장 내일일지 아니면 내후년일지 장담할 수 없사오나, 어느 한쪽이 꺾여 부러지지 않는 이상 청과 아국은 함께 양립하기 불가능한 사이일 것이옵니다.”
그러자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조선은 이제 힘없는 변방의 소국이 아니야. 그렇게 혼이 나고도 도르곤이 정신을 못 차리고 다시 전쟁을 걸어온다면 그때는 짐이 용맹한 군사들을 이끌고 산해관을 넘어 자금성 지붕 위에 봉황 깃발을 친히 꽂을 것이야!”
광오한 말이었지만 예전하고 달리 대전에 있던 대소 신료들은 우려보다는 자신감과 전의를 가득 피워 올렸다.
“모든 것이 전하의 뜻대로 되실 것이옵니다.”
“국방대신은 즉시 서천도 지역을 방어하는 군대의 경계를 강화하고 적이 쳐들어오면 즉시 격퇴할 수 있게 만반의 태세를 갖추도록 하라.”
“옛.”
“다른 대신들도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청과의 충돌에 대비한 준비를 철저히 하도록 하라.”
“알겠사옵니다, 전하.”
그 뒤로도 도현은 여러 가지 국내외 현안들을 가지고 대신들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복잡한 마음을 안고 대전을 나온 도현은 자연스레 중전의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신들 앞에서는 의연한 태도를 보였지만 결코 쉽지 않은 상대인 청나라와 또다시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여야 될지 모른다는 중압감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만들었다.
이대로 희정당으로 돌아가면 또 산더미 같은 서류들과 씨름을 해야 했으니, 잠시나마 아리따운 부인의 얼굴을 보고 기운을 차릴 생각이었다.
미리 기별도 없이 온 것이라 도현을 알아본 궁녀들이 황급히 허리를 숙여 예를 차렸다.
“소란 피울 것 없다. 중전은 안에 있느냐?”
“예, 전하.”
“마침 잘되었군.”
후원에 산책이라도 나갔으면 길이 엇갈려 헛걸음을 할 뻔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안으로 드는데, 방에는 중전 말고도 두 사람이 더 있었다.
“공주 아니냐?”
“아바마마를 뵈옵니다.”
얼기설기 얽힌 곰보 자국이 있는 얼굴을 당당하게 들어 올리며 숙안이 방긋 웃었다.
오 년 전 총리대신 임경업의 막내아들과 혼인하여 궁을 나간 숙안 공주는 이제 어엿한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결혼 생활이 만족스러운 듯 약간 살이 오른 얼굴이 복스러워 보였고, 행동거지는 예전보다 훨씬 더 느긋해졌으며 대갓집 마나님다운 기품이 흘러넘쳤다.
워낙 어렸을 적부터 야무진 아이라 어떻게든 잘살 거라 생각은 했지만,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더욱 흐뭇하기만 했다.
처음으로 품에서 떠나보내는 자식이라 그런지 결혼 준비를 할 때 중전과 도현 두 사람 다 허둥지둥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는 미소 띤 표정으로 딸의 인사를 받아들였다.
“오랜만이로구나. 요즘 몸은 편안하느냐?”
“그럼요, 아바마마. 작년에도 고뿔 한 번 안 걸리고 겨울을 보냈답니다.”
“하하.”
“게다가 어마마마께서 철마다 보약을 몇 첩씩 보내 주시니 건강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 말에 도현은 중전을 돌아보았다.
“그랬소?”
“보약까진 아니고, 그저 가끔씩 먹는 탕약이 저 혼자 먹기엔 너무 많아 숙안에게도 좀 나눠 준 것뿐입니다.”
얘는 별걸 다 말한다는 눈빛으로 중전이 헛기침을 했다.
“뭘 그리 부끄러워하오, 어미가 자식을 챙기는 건 허물이 아니거늘.”
“다 자란 자식을 싸고돈다 여기실까 봐 그런 거지요.”
“내가 그런 말을 할 위인처럼 보이오? 결혼 생활이 몇 년 차인데 중전은 아직도 나란 사람을 잘 모르는군.”
도현이 장난스레 농을 하며 얼굴을 들이밀자 중전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분께선 금슬이 여전하시네요.”
자기 부모지만 눈앞에서 닭 털을 날려 대는 광경이 과히 보기 좋진 않은지라 숙안이 슬쩍 끼어들어 이쪽도 좀 봐 달라며 말했다.
“손녀인 율이도 모른 척하시고, 너무하십니다.”
숙안이 흑흑 우는 시늉을 하자 엄마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율이도 그 모양을 보고 따라 했다.
“어마, 어마!”
아마 엄마라고 하고 싶은 듯 혀 짧은 발음으로 말하는 품새가 참으로 깜찍해, 보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저절로 헤실거리는 미소가 떠올랐다.
아직 제 발로 걷기도 힘든 어린 아이였으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제 어미인 숙안을 쏙 빼닮았고, 대대로 많은 무장들을 배출한 명문가의 여식답게 눈동자도 제법 또랑또랑했다.
“뉘 집 딸인데 이리도 귀여울까. 나중에 크면 제법 여러 공자들을 홀리고 다니겠구나.”
“전하!”
“아니, 그냥 칭찬한 건데…….”
머쓱해서 뒷머리를 긁적이는 도현에게 중전이 핀잔을 주었다.
“그래도 어린애한테 무슨 말씀입니까.”
“어마마마, 참으셔요. 아바마마께서 가끔 험한 말투를 쓰시긴 하지만 본심은 그게 아닌 것을 다 알고 있잖습니까.”
“그래, 숙안아! 역시 내 편은 너밖에 없구나.”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우리 딸이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도현에게 숙안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밖에서는 유능한 군주이고 안으로는 자상한 가장이었으니 어느 모로 보나 최고의 아버지이긴 하나, 때때로 보이는 예측불허의 행동엔 도통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 그보다 아바마마, 우리 율이가 이젠 제법 말도 한답니다.”
“호오, 그러냐?”
“네.”
숙안이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좋아, 그럼 무슨 말을 시켜 볼까…….”
잠시 행복한 고민에 빠진 도현의 모습에 두 여인은 서로 시선을 맞추며 피식 눈웃음을 흘렸다.
한편 남명군을 파죽지세로 몰아붙인 청군 본진은 드넓은 양자강을 앞에 두고 잠시 숨 고르기를 하고 있었다.
휘하 장수들과 독한 마유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청 황제 도르곤은 최측근이자 심복인 야골타가 천막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반겼다.
“오, 야골타, 갔던 일은 어떻게 됐나?”
그러자 야골타는 한쪽 손에 들고 있던 것을 탁자 위에 턱 하니 올려놓으며 말했다.
“명군 우군장 반개의 수급首級입니다.”
야골타가 가져온 것은 바로 명군 장수의 머리였는데, 상투가 풀려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칼 아래 자리 잡은 얼굴에는 죽음에 임박하여 느낀 공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섬뜩한 모습이었지만 도르곤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뻗어 수급을 들어 올려 이리저리 둘러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반개라면 명군에서도 제법 이름이 있는 자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폐하. 명 황제인 주율건이 각별히 아끼는 자라고 들었습니다.”
옆에 있던 왕태봉의 설명에 도르곤은 더욱 기쁜 얼굴로 말했다.
“하하하! 이 소식을 들으면 주율건이 충격이 크겠군. 지금까지 야골타 장군이 벤 적장의 수급이 열이 넘었지?”
“이것까지 합치면 열다섯입니다.”
어깨를 펴며 야골타가 자랑스럽게 말하자 도르곤은 장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청군 제일의 선봉장답군. 자! 공을 세웠으니 내 술을 한 잔 받게.”
“감사합니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잔에 도르곤이 마유주를 가득 부어 주자 두 손으로 받은 야골타는 단번에 쭉 다 들이켰다.
“반개군이 무너졌으니 이제 양자강 이북은 완전히 평정이 됐사옵니다.”
또 한 명의 청군 명장인 용골대의 말에 다른 장수들도 얼굴 가득 미소를 지은 채 한마디씩 했다.
“이걸로 예전 성세를 모두 회복했습니다.”
“모두가 다 황제 폐하의 용맹과 지도력이 만들어 낸 결과이옵니다.”
좌우에서 쏟아지는 찬사에 도르곤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중간에 잠시 휴식기도 있었지만 무려 육 년을 넘게 끌어온 긴 전쟁을 청군의 승리로 끝냈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군들도 고생이 많았네.”
“아니옵니다.”
그때 책사인 왕태봉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어쩌실 생각이옵니까, 폐하?”
“뭘 말인가?”
“여기서 전쟁을 끝내실 건지, 아니면 양자강을 넘어가 계속 명군을 밀어붙일 생각이신지 궁금하옵니다.”
향후 청군의 행보를 결정할 중요한 선택이었기에 천막 안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으며 다들 상석에 있는 도르곤의 입을 주목했다.
그러자 미리 생각해 둔 것이 있는지 도르곤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강을 건너가 껍데기만 남은 명나라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 버리고 싶지만, 그러려면 우리가 익숙지 않은 수전을 치러야 되고 자칫 전쟁이 길어질 수도 있으니, 아쉽지만 이번에는 여기서 만족할 생각이야.”
야골타를 비롯한 몇몇 강경파들은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지만 대부분의 장수들은 안도한 얼굴을 했다.
오랜 전쟁으로 병사들이 지쳐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바다처럼 넓고 깊은 양자강 줄기가 굽이굽이 뻗어 있는 강남은 화북 지역과 완전히 다른 싸움터였기 때문이었다.
기병이 주력이라 물 위에서 싸우는 것이 익숙지 않은 청군이었기에 자칫 유명한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처럼 큰 곤욕을 치를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공격을 하더라도 많은 준비가 필요했는데, 다행히 도르곤이 승리감에 취해 성급하게 덤비지 않고 전쟁을 이쯤에서 끝내겠다니 용골대를 비롯한 온건파 장수들은 크게 티는 내지 않아도 내심 안도했다.
하지만 바로 이어진 이야기에 이런 분위기는 급반전됐다.
“이제 승냥이 떼를 다 몰아냈으니 잃어버린 땅을 되찾으러 가야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조선을 쳐서 그동안 당한 치욕을 되갚고 심양과 만주 벌판을 수복해 태조 폐하의 영광을 재현할 것이야!”
폭탄선언에 좌중은 크게 술렁였다.
특히 이제 전쟁을 끝내고 나라를 추스를 시간을 갖게 됐다고 생각하던 온건파 장수들은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표정이었다.
반면 야골타를 비롯한 강경파들은 눈을 빛내며 도르곤의 말에 적극 동조했다.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조선을 그냥 둬서는 안 되지요.”
“심양은 물론이고 한양까지 군대를 몰아가 예전에 태조 폐하께서 하신 것처럼 조선 왕의 무릎을 꿇려야 될 것입니다.”
금방이라도 한양을 함락시킬 수 있는 것처럼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강경파들의 모습에 용골대가 어두운 얼굴로 도르곤을 봤다.
“폐하, 조상들의 땅을 회복해야 된다는 말씀에는 십분 공감을 합니다만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사옵니다.”
“때가 아니다?”
도르곤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쳐다보자 식은땀이 절로 났지만 용골대는 애써 몸을 곧추세우며 이야기를 이었다.
“예, 오랜 전쟁으로 병사들이 지쳐 있는 데다가 무엇보다 조선군은 지금껏 상대한 적들과는 질적으로 다르기에, 지난번 심양 전투와 같은 패배를 답습하지 않으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야골타가 작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그렇게 겁이 나면 용골대 장군께서는 여기 계시오. 폐하, 소장을 선봉으로 삼아 주신다면 단숨에 한양까지 밀고 들어가 청국에 덤빈 대가가 무엇인지 만천하에 똑똑히 보여 주도록 하겠습니다.”
조선군을 상대로 큰 곤욕을 치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면서도 그걸 잊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야골타의 모습에 용골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리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닐세. 자네도 조선군과 싸워 몇 번이나 낭패를 보지 않았나.”
“뭐요!”
“왜, 내가 없는 말을 했나?”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요!”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크고 작은 감정이 쌓여 있는 둘은 기회를 만난 듯 설전을 벌이며 다퉜다.
용골대를 따르는 온건파는 대부분 나이가 지긋한 노장들인 반면 야골타가 중심인 강경파는 혈기 넘치는 젊은 장수들이 주축이었다.
대승을 거두며 명군을 양자강 이남으로 쫓아낸 이후라서 그런지 분위기는 강경파 쪽이 좀 더 우세했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도르곤은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탁자를 세게 내려쳐 주의를 환기시켰다.
탕!
“모두 조용!”
묵직한 호통에 시끄럽게 떠들던 장수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을 다물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천막 안에 있는 장수들을 천천히 쓸어 본 도르곤은 크지는 않지만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미 수년을 허비했다. 더 이상 심양과 만주를 조선 놈들의 손에 둘 수가 없으니 대군을 일으켜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을 것이다!”
“훌륭한 결단이시옵니다.”
“폐, 폐하!”
반색을 하며 환영하는 강경파들과 달리 용골대를 비롯한 온건파 장수들은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다급히 뭐라고 말을 하려던 용골대를 한쪽 팔을 들어 막은 도르곤은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하나 오랜 전쟁으로 병사들이 지쳐 있으니 일단은 북경에 돌아가 전열을 재정비한 다음에 대군을 몰아 산해관을 나설 것이다. 제장들은 그렇게 알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라!”
“옛!”
무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하는 도르곤의 지시에 장수들은 더 이상의 논란을 벌이지 않고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용골대는 당장 조선과 싸움을 벌이는 최악의 상황만은 피하게 돼서 안도했지만, 그래도 이제 겨우 전쟁이 끝났는데 또다시 만만치 않은 적수와 맞붙을 준비를 해야 된다는 것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며칠 뒤 얼마 남지 않은 명군 패잔병들마저 전부 정리한 도르곤은 양자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한 다음 군대를 물려 북경으로 돌아갔다.
행여나 청군이 기세를 몰아 양자강을 건너 강남 지역을 노리지나 않을지 안절부절못하던 명나라는 도르곤이 군대를 물리자 겨우 한숨을 돌렸다.
이 소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양에 있는 도현의 귀에도 들어갔다.
“도르곤이 북경으로 군대를 물렸다고?”
도현의 말에 이완 단장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국경을 지킬 병력 일부만을 잔류시키고 주력 대부분이 회군 중이라고 하옵니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기는 해도 청이 양자강을 건너 명과 계속 전쟁을 벌이길 기대했었는데 조금 아쉽군.”
동석한 국방대신 이시영도 입맛을 다시며 동조했다.
“그러게 말이옵니다.”
“혹시라도 다른 움직임은 없었소?”
박황이 신중한 어투로 묻자 뭘 염려하는지 바로 알아차린 이완 단장은 고개를 살짝 좌우로 흔들며 이야기를 했다.
“다행히 아국을 노리려는 낌새는 아직까지 보이지 않습니다. 한데…….”
“뭐 걸리는 것이라도 있나?”
“아뢰옵기 송구스러우나, 도르곤의 측근 중 하나인 야골타가 두만강을 피로 물들이고 한성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며 수하들한테 떠들고 다닌다 하옵니다.”
이완 단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희정당 안에 모여 있던 대신들이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분노했다.
“이런 죽일 놈 같으니라고!”
“감히 그딴 소리를 하다니.”
도현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국왕답게 감정을 내보이지 않은 채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그자야 심양 관저 시절부터 안하무인으로 유명했으니 그딴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도르곤의 막사에서 측근 장수들이 모여 모종의 회의를 한 바로 뒤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마음에 걸립니다.”
“흐음.”
“그리고 한 가지 더 미심쩍은 것이 있사옵니다.”
“그게 뭔가?”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팔기군은 물론이고 향용병까지 해산시키지 않고 계속 유지할 것 같다는 겁니다.”
“짐이 알고 있기로 향용병만 해도 사십만이 넘는데 그걸 그대로 유지한다고?”
“예.”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재화를 잡아먹는 군대를 정리하지 않고 계속 가져간다는 건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었기에, 도현은 한쪽 손으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신이 보기에도 확실히 수상한 행동이옵니다.”
“맞사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봐도 그 많은 병력을 계속 안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사옵니까?”
잠시 고심을 하던 도현은 작게 침음성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결국 전쟁인가.”
“청 황제가 아국을 노리는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이옵니까?”
외무대신 박노가 조심스럽게 묻자 도현은 약간 가라앉은 얼굴로 시선을 줬다.
“그게 아니라면 나라 곳간을 축내 가며 병력을 유지할 필요가 없지 않겠나.”
“하오나 앞서 이완 단장이 말하길 분명 침략의 낌새는 없다고 하지 않았사옵니까.”
그러자 대신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완 단장에게 모였다.
조금 당황스러울 만도 했지만 주작단을 이끌며 능구렁이가 다 된 이완 단장은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드러난 정보와 청군의 움직임으로 봤을 때 당장 산해관을 넘어 아국을 공격해 오는 일은 없을 거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추수가 끝난 가을이나 내년에는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은……?”
“청군의 침략이 있을 것 같냐고 물으신다면, 제 대답은 분명히 머지않은 때에 청 황제가 군대를 일으킬 것이라는 겁니다.”
“허어.”
확신에 찬 이완 단장의 대답에 박노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전쟁을 피하고 싶은 외무대신의 마음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오. 하지만 상대가 몽둥이를 들고 쳐들어오려는데 그걸 외면하고만 있다면 결국 피를 보는 건 내 가족들이 아니겠소이까. 그럴 바에는 힘이 들더라도 언제든 맞서 싸울 수 있게 대비를 하는 것이 진정 평화를 위한 길일 게요.”
총리대신인 임경업이 타이르듯 이야기를 하자 박노도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대신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임경업을 흡족한 시선으로 쳐다본 도현은 이내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도르곤이 언제쯤 칼을 뽑아 들 것 같나?”
아주 민감한 문제였기에 대신들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국방대신인 이시영이 먼저 이야기를 했다.
“전쟁이라는 것이 병력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니, 이런저런 준비를 갖추려면 아무리 빨라도 내년은 지나야 되지 않겠사옵니까?”
“신도 같은 생각이옵니다. 회군 중인 병력을 재정비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재무대신 김육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이 이시영의 의견에 동의했다.
“총리대신의 생각은 어떻소?”
도현의 시선을 받은 임경업은 신중한 태도로 이야기를 했다.
“소신도 청군이 올해는 대군을 일으키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되옵니다. 하지만 빠른 기동력을 가진 팔기군의 존재를 고려할 때 언제든 기습을 가해 아국의 허를 찌를 수 있으니 방심은 금물일 것이옵니다.”
“맞는 말이야.”
전원 기병으로 이루어져 빠르게 기동하는 팔기군 때문에 병자호란 때 조선군이 제대로 방어도 못 해 보고 한양까지 무너진 뼈아픈 기억이 있었다.
그때와 지금은 조선군의 체질 자체가 달라졌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국방대신.”
“예.”
“서천도의 방비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자세를 바로 한 이시영은 자신 있는 어투로 대답했다.
“영원성을 비롯한 서천도 주둔 병력 전체에 을호乙號 경계령이 내려지고 전쟁 물자 비축에 들어갔사옵니다.”
조선군은 갑을병정의 네 단계로 경계 체계를 만들어 운용하고 있었는데, 을호는 두 번째로 높은 경계 수준으로 평상시보다 정찰과 주둔지 경비를 강화하고 물자를 비축하며 언제든 전쟁에 투입될 수 있도록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병력은 충분한가?”
“기존 방어군에 추가로 기병 일 개 사단을 보충했고 다음 달까지 신형 화포 육십 문이 보강될 예정이옵니다.”
넓은 평원을 질주하며 기동전을 펼칠 기병대도 중요했지만 방어전에서는 무엇보다 막강한 화력으로 상대의 예봉을 일거에 꺾어 버릴 화포야말로 꼭 필요한 무기였다.
“그 정도면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는 있겠군. 물자 비축은 얼마나 되어 있나?”
“지난번 심양 전투의 교훈을 살려 일 년 동안 외부의 지원 없이 병사와 주민 들이 버틸 수 있는 물량을 비축해 두고 있사옵니다.”
너무 적으면 막상 전쟁이 터졌을 때 효과가 없고 그렇다고 과도하게 물자를 비축하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부담과 낭비가 될 수 있었기에 딱 이 정도가 적당한 수준이었다.
“전하, 이참에 북해도 병력 일부를 서천도로 이동시켜 놓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일 군단을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그러면 방어 병력이 두 배로 늘어나게 되니 청군도 함부로 도발을 해 오지 못할 것이옵니다.”
국방대신의 말에 임경업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전하, 그건 신중히 결정해야 될 문제 같사옵니다.”
“왜 그렇지?”
“일 군단을 이동시키면 서천도의 방비는 더 튼튼해지겠사오나 괜히 청나라를 자극할 우려가 있사옵니다.”
“어차피 벌어질 전쟁인데 그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그러자 짧게 혀를 찬 임경업은 이시영을 보며 질책하듯 말했다.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닐세. 아군도 준비가 덜 된 상태인데 쓸데없이 긴장감을 높여 전쟁을 앞당길 필요는 없지 않겠나.”
“그건 그렇지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자 도현이 나서서 중간에 정리를 했다.
“흠, 짐이 생각해도 일 군단을 이동시키는 건 조금 빠른 것 같군. 일단 보류를 하는 대신 언제든 서천도로 이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춰 놓게.”
약간 아쉬웠지만 국왕인 도현이 결정을 내리자 이시영은 별다른 반발 없이 지시를 받아들였다.
“알겠사옵니다.”
“각부 대신들은 전쟁 준비를 완벽히 할 수 있게 국방대신을 돕고 주작단은 청군의 움직임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철저히 감시토록 하라.”
“옛, 전하.”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대신들을 쳐다보는 도현의 얼굴에 살짝 근심이 서렸다.
이처럼 청나라와의 전쟁 위험이 높아지자 도현은 많은 재물과 인력이 소모되는 경복궁 중건을 잠시 중단하려고 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 공역으로 백성들을 결집시켜야 한다며 대신들이 크게 반대하는 바람에 중건 공사를 계속 진행했다.
뚝딱. 뚝딱.
넓은 공사장은 이른 아침부터 망치질 소리로 시끄러웠다.
커다란 주춧돌을 깔고 아름드리나무로 만들어진 대궐 기둥을 세우는 작업은 참으로 고되고 어려웠지만 누구 하나 불평 없이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일했다.
“국왕 전하께서 머무실 곳이니까 약간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돼!”
감독관의 독려가 아니더라도 장인들은 일생일대의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각오로 심혈을 기울여 작업에 임했다.
그런 장인들 사이로 총리대신 임경업이 영건도감 도제조 신정의 안내를 받으며 공역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제 얼추 기본 틀이 갖춰져 가는 것 같구먼.”
“예, 주춧돌은 다 깔렸고 본격적으로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올리는 작업을 진행하는 중입니다.”
“전하의 지시로 석재를 써서 건물을 짓는 건 어려움이 없었나?”
사실 이 부분에서 도현과 대신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화재와 기타 자연재해로 인한 소실을 막기 위해 석조 건물을 많이 지으려는 그와 달리 대신들은 기존 건축양식과 다른 것에 거부감을 느꼈고, 다른 건물도 아닌 대궐을 짓는 데 제대로 만들어 낼 수 있을지 큰 우려를 했다.
오랜 논의 끝에 결국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을 비롯한 주요 건물은 전통양식대로 짓고 도현과 왕실 가족들이 머무는 공간은 새로운 양식을 도입해 석조 건물로 짓기로 했다.
“처음에는 약간의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지금은 큰 문제 없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처음 석조 건물을 짓기로 했을 때 투박한 모양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지만, 장인들이 뛰어난 손재주를 발휘해 목조건물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답고 유려한 조선의 선이 살아 있는 건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가 돌아보는 와중에도 석공들이 정과 망치만 들고 자신보다 큰 바윗돌을 섬세한 손놀림으로 깨며 조각을 새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고생을 하는 만큼 부족함 없이 장인들을 챙기도록 하게.”
“물론입니다.”
“그리고 행여나 화재가 나면 지금껏 한 일이 모두 헛수고가 되니 조심을 하고.”
“순라군을 배치해 밤낮으로 공역장 주변을 지키고 곳곳에 방화수를 충분히 준비해 뒀으니 염려 마십시오.”
“잘했네.”
실제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려고 했을 때 여러 번 크고 작은 화재가 발생해 곤혹을 치른 기록이 있을 정도로 목조건물을 지을 때는 불만큼 치명적인 것이 없었다.
이렇게 임경업뿐만 아니라 대신들이 돌아가면서 수시로 경복궁 중건 공역장을 찾아와 작업 상황을 점검하고 애로점을 해결해 줬다.
임진왜란 이후 바닥까지 떨어졌던 조선의 자존심을 다시 세우는 상징과도 같은 일이었기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됐고, 경복궁이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하루빨리 완성되기를 바라는 열망이 높았다.
지난 육 년 동안 가장 크게 변화하며 발전한 분야가 바로 경제였다.
봉황상단을 통해 주도한 상공업 육성 정책은 큰 성과를 거둬 이제 조선은 농업국을 완전히 벗어나 곳곳에서 대규모 공장이 돌아가고 각지의 재화가 유통되고 있었다.
경제 발전의 성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한양 도성 중심가에 위치한 종로 시장이었다.
사람이 구름처럼 몰린다고 해서 운종가雲從街라고도 불렸는데 예전부터 육의전이 있었으며 한양의 중심 상업 구역 역할을 했다.
그러던 것이 도현에 의해 금난전권이 없어지고 상업이 활성화되면서 규모가 커져 안국동에서 광교 일대까지 시장이 확장됐다.
단순히 규모만 커진 것이 아니라 통상적인 유기와 곡물, 포목은 물론이고 멀리 서양과 남방 지역에서 가져온 상품까지 유입되어 사고팔면서, 종로에 가면 세상에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상점들도 기존에 지어진 목조 기와집이 아니라 화재의 피해를 막기 위해 이 층 석조 건물로 바꾸고, 바닥에는 자갈을 깔고 배수로를 만들어 비가 아무리 와도 침수가 되지 않도록 만들었다.
대로를 중심으로 양옆으로 길게 뻗은 상점들은 저마다 취급하는 품목에 따라 천을 늘어뜨리거나 등을 달거나 하며 다른 가게보다 더 눈에 띄려고 애를 썼는데, 그 덕분인지 낮에도 밤처럼 화려한 느낌이 났다.
“한 번만 딱 뿌려도 거짓말처럼 맛이 좋아지는 향신료 있습니다!”
“아가씨, 명나라산 비단은 어떠십니까? 자르르 윤기가 도는 게 이걸로 옷을 지어 입으면 선녀가 날개옷을 입은 것 같을 겁니다!”
“한정 판매! 이제 스무 개밖에 안 남았습니다!”
목이 터져라 외쳐 대는 상인들의 호객 행위에 길거리를 꽉 메운 행인들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부산하게 움직여 댔다.
그 와중에 서너 살 난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등에는 머리통에 뽀송한 솜털이 자란 갓난쟁이를 업은 여인네가 종종걸음을 치며 걷다가 문득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는지 좌판 앞에 서서 재빨리 물건을 훑어보았다.
“캬, 아주머니 눈썰미가 있으시네. 오늘 막 남방에서 들어온 귀한 식재료인데, 여간해선 하루 만에 다 팔려 버리니 물건 있을 때 가져가시죠.”
“으음, 가격이…….”
“어허, 사람이 다 먹고살자고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딴건 몰라도 먹는 것에 돈을 아껴선 안 되죠.”
“한번 맛볼 수 있어요?”
“예, 그럼요.”
상인이 향신료를 조금 덜어 놓은 그릇을 들이밀자 여인네는 약지로 콕 찍어서 입에 갖다 대더니 코를 찌르는 강한 냄새와 맛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하, 처음엔 다들 이게 뭐냐고 하지만 일단 한번 요리할 때 쓰고 나면 향신료를 넣지 않은 건 음식 같지도 않게 느껴질 겁니다.”
“그래요?”
안 그래도 요즘 부인들 사이에서 향신료를 쓴 요리가 입소문을 타고 있는 중이라, 여인네도 이참에 한번 시도해 볼까 하며 마음이 동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인네가 아예 가게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건 어떻게 쓰는 거냐, 밥에도 넣어 먹는 거냐 하면서 이것저것 질문 공세를 펼쳐 대자 손을 잡고 있던 아이가 지루했는지 칭얼거렸다.
“엄마아.”
“아유, 가만히 좀 있어!”
“나 엿 사 줘어!”
아이가 손가락으로 엿장수를 가리키며 엄마를 졸랐다.
가위를 쩔그렁거리며 엿과 떡을 팔러 다니는 사내의 뒤를 이미 몇몇 동네 아이들이 흉내를 내면서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고, 아이는 바람을 타고 실려 오는 달콤한 냄새에 허기가 지는지 제 엄지손가락을 빨아 댔다.
“지지야, 지지!”
더럽게 빨지 말라며 아이의 팔을 붙잡은 엄마는 엉덩이를 찰싹 때리면서 얌전히 있으라고 혼쭐을 내었다.
결국 주인이 추천해 주는 걸로 한 주먹을 산 여인이 값을 치르고 나가자, 곧이어 또 다른 손님이 흥미를 보이며 그 자리를 채웠다.
“어서 오십시오~! 이 물건이 무엇이냐 하면, 남만에서 가져온 귀한 향신료인데…….”
아침부터 계속 이어지는 손님들의 발걸음에 주머니가 묵직해진 주인은 밝은 표정으로 버릇처럼 입에 찰싹 달라붙은 접객용 말을 끊임없이 주절거렸다.
그렇게 물건과 사람이 가득 넘치는 종로 시장은 도현의 치세하에 풍요를 구가하고 있는 조선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이제 희끗희끗 흰머리가 난 봉황상단 총관 장태범은 상단 행수들과 함께 마포 나루에 위치한 창고를 둘러보고 있었다.
비단옷을 입어도 될 만큼 지위와 재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사꾼이 좋은 것을 탐하기 시작하면 끝이라는 평소 지론대로 그는 수수한 무명옷에 갓을 쓰고 있었다.
유일한 사치라면 몇 해 전에 도현이 친히 하사해 준 수정으로 만든 안경이었다.
“이 물건들은 언제 들어온 건데 아직 여기에 있는 겐가?”
“내일 화물선이 도착하면 전부 제주 상관으로 실어 갈 겁니다.”
“시간이 곧 돈이라는 것을 모르나! 지체 없이 거래를 끝내야지, 물건을 보름이나 창고에 썩혀 두면 어쩌자는 거야!”
오십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젊은이보다 더 나을 정도로 팔팔한 모습으로 따끔하게 질책을 하자 담당 행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쩔쩔맸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했는데 못 알아듣고 실수를 반복하면 그때는 행수 자리를 내놔야 될 거야.”
“옛.”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제대로 일을 못 하면 가차 없이 쳐 낸다는 것을 잘 아는 행수는 바짝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건 그렇고 지난번에 지시한 일은 어찌 되고 있나?”
그러자 수염을 짧게 기른 중년 행수가 얼른 대답했다.
“코자에몬 상단과 거래를 해서 유황 만 관(37.5톤)을 다음 달까지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대금은?”
“당초 은화로 지불하려고 했습니다만 상대편에서 연필과 포목으로 받기를 원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가격은 열 관당 은화 넉 냥입니다.”
“나쁘지 않군.”
“시간이 있었다면 더 괜찮은 가격에 거래를 끝낼 수 있었을 겁니다.”
“지금은 가격보다 화약을 만들어 낼 재료를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니 어쩔 수 없지. 아무튼 수고했네.”
“예.”
“가능하면 추가로 이번 물량만큼 유황을 더 확보하도록 하게.”
“또 말씀입니까?”
“그래. 어렵겠나?”
장 총관의 시선에 중년 행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바로 선을 넣어 알아보겠습니다.”
“급하다고 너무 서두르지는 말고. 이럴 때일수록 꼼꼼히 처리를 해야 실수가 없을 게야.”
“명심하겠습니다.”
“봉황도에 있는 철광산들도 채굴량을 늘렸겠지?”
이어지는 물음에 다른 행수가 나서며 대답했다.
“네, 광부들을 추가로 투입해서 주야간 쉬지 않고 광석을 캐고 있습니다.”
“다음 달부터 제물포 제철소에 설치된 네 번째 용광로가 가동을 시작하니까 원료 수급에 차질이 생기지 않게 각별히 신경을 쓰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렇게 장 총관은 창고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면서 상단 업무를 챙겼다.
유황부터 철광석까지 하나같이 전쟁에 관련된 물자들이었기에 지시를 받는 행수들의 표정에서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내수사 노비 출신으로 여러 전투를 거쳐 승진을 거듭한 돌쇠는 이름을 천억근으로 개명하고 어엿한 고위 무관인 사직이 되어 복무하고 있었다.
“하나 둘! 하나 둘!”
척척척. 척척척.
“줄 똑바로 못 맞춰! 그딴 식으로 해서 어떻게 적과 싸우겠나.”
단상 위에 선 천억근은 열을 맞춰 제식훈련을 하는 병사들을 내려다보며 동작이 틀릴 때마다 연병장이 떠나가라 호통을 내질렀다.
벌써 한 시진 넘게 이어진 훈련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온몸이 무거웠지만 상관인 천억근이 눈을 부릅뜬 채 쳐다보고 있었기에 병사들은 요령을 피우지 못하고 몸을 계속 움직였다.
“좋아, 바로 그거야. 이제 좀 군인 같군.”
그렇게 병사들을 독려하며 직접 훈련을 시키고 있는 천억근에게 군관 한 명이 다가왔다.
“사직 어른.”
“왜 그러나?”
“병기창에서 신형 소총이 도착했습니다.”
한창 훈련 중인데 방해를 받아서 그런지 심드렁한 얼굴로 쳐다보던 천억근이 군관의 말에 반색을 했다.
“오, 그래! 지금 어디에 있나?”
“군영 병기고 앞에 내려 뒀습니다. 가 보시겠습니까?”
“아무렴 그래야지. 오 군관.”
“옛.”
“금방 다녀올 테니 자네가 대신 훈련을 시키도록 해.”
“알겠습니다.”
군영 안쪽에 위치한 병기고로 가자 길쭉한 나무 상자들이 가득 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작업을 감독하고 있던 군관이 천억근을 발견하고는 얼른 군례를 취했다.
“충. 대대장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신형 소총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지.”
“하하하, 그러시군요.”
“이게 새로 만들어진 남-삼식인가?”
“한번 살펴보시겠습니까?”
“그래도 되겠나?”
“당연하지요.”
제일 가까이에 있는 상자 뚜껑을 연 군관은 미끈하게 잘 빠진 소총을 한 정 꺼내 천억근한테 넘겨줬다.
“여기 있습니다.”
“어디 볼까.”
소총을 받아 든 천억근은 마치 새로운 장난감이 생긴 아이처럼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이리저리 꼼꼼하게 살펴봤다.
전체적으로 현재 주력인 남-일식과 비슷한 모양새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우선 부싯돌을 이용한 격발 방식은 똑같았다.
하지만 화승총과 같이 총구에 화약을 쏟아 넣어 다지고 그 위에 탄환을 넣은 다음 불을 붙여 화약을 터트려서 쏘는 전장식이 아니라, 격발장치가 있는 뒷부분에 탄환과 화약이 일체화가 된 총알을 장전한 다음 공이쇠로 강하게 화약을 쳐서 발사하는 후장식이었다.
큰 차이가 아닌 것 같았지만 실제 전장에서는 하늘과 땅 차이의 효과를 발휘했다.
전장식에 비해 빠르게 쏠 수 있고 재장전이 쉬울 뿐만 아니라 일반 병사들도 정확한 조준 사격이 가능했다.
그리고 사정거리 또한 늘어나서 남-일식보다 오십 보 이상 긴 유효사거리를 가졌다.
이건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요소였는데, 적보다 먼 거리에서 많은 총탄을 쏟아붓는다면 훨씬 유리한 상태에서 싸움을 벌일 수 있었다.
직접 사격 자세를 취해 본 천억근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확실한 건 직접 쏴 봐야겠지만 잘 만들어진 것 같군.”
“남-일식을 한 발 쏠 때 이건 네 발 이상을 발사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소총을 바꾸는 것만으로 부대의 화력이 네 배 이상 상승하는 거니까 더 바랄 게 없겠지.”
“전 무엇보다 탄환 주머니와 화약포를 주렁주렁 몸에 지니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거추장스럽기는 했지. 아무튼 새 소총에 익숙해지려면 사격 훈련을 많이 해 봐야 되는데 총알은 충분한가?”
“오늘 오천 발이 들어왔고 보름 뒤에 다시 그만큼을 가져올 예정입니다.”
“도합 만 발이라……. 넉넉한 편은 아니군.”
“아직 생산 초반이라 총알 제작이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아! 그리고 사격 뒤에 나오는 탄피는 재사용을 해야 되니 가능하면 회수를 하라는 지시입니다.”
“알겠네.”
화약을 넣고 귀한 동으로 동그랗게 감싼 총알은 한눈에 봐도 만들기가 쉽지 않았기에 천억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처럼 강력한 위력을 가진 남-삼식 소총이었지만 탄약을 대량생산하는 체계를 아직 갖추지 못했기에 근위군단 일부에만 소량으로 배치됐다.
이것 말고도 병기창에서는 사거리가 이천 보가 넘고 천자총통보다 위력이 두 배나 강력한 충무포라는 것도 개발해 생산했다.
이들 신무기를 얼마나 빠르고 많이 실전 배치하고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벌어질 청과의 전쟁에서 승패가 결정될 공산이 컸다.
전쟁 준비로 바쁜 와중에 도현한테 뜻밖의 인물이 찾아왔다.
“전하, 그동안 강녕하셨사옵니까?”
백발에 길게 수염을 기른 우암 송시열이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추자 도현은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덕분에 잘 지냈소. 우암도 정정한 모습을 보니 좋구려.”
“다 전하의 은덕 덕분이옵니다.”
“조정을 떠난 이후로 대궐에 일절 발걸음을 하지 않아서 짐이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를 거요. 앞으로는 자주 찾아와 국정에 대한 조언을 해 주시오.”
“지금도 무척 잘하고 계신데 소신이 무슨 도움이 되겠사옵니까.”
“그런 말 하지 마시오. 경처럼 경륜이 많은 노신들이 옆에서 도와준다면 짐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지지 않겠소.”
빈말이라도 도현이 자신을 조정의 원로로 대우해 주자 송시열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숙였다.
“말씀만이라도 황공하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대전 상궁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가지고 와 두 사람 앞에 내려놓고 나갔다.
“화란 상인이 진상한 용정차龍井茶요. 인삼차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제법 향이 깊고 맛이 괜찮으니 한번 드셔 보시오.”
“예.”
높은 학문만큼 차에도 일가견이 있는 송시열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셔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맑은 녹색에 은은한 향이 나는 것이 상등품의 절강성 용정이군요.”
“그렇소. 입맛에 맞는 것 같으니 갈 때 한 꾸러미 챙겨 가시오.”
“아니옵니다.”
“짐의 마음이니 사양하지 마시오. 상선.”
“예, 전하.”
“우암이 갈 때 용정차를 잘 포장해서 주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칠현한테 차를 챙겨 주라고 지시를 해 버리니 송시열은 더 사양을 하지 못했다.
“이것 참…… 감사하옵니다.”
“그건 그렇고, 들리는 소문에 전국의 명승고적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즐겼다고 하던데 그것참 부럽소이다.”
“관직을 내려놓고 무료한 생활을 달래기 위해 이곳저곳 가 보다 보니 그런 소문이 났나 봅니다.”
“그래, 어디가 제일 좋더이까?”
그의 물음에 송시열은 약간의 고민도 없이 입을 열었다.
“풍광이 좋고 수려한 곳들이 많다고 하지만 신이 느끼기에는 백두산 천지가 그중 으뜸이었사옵니다.”
“호오, 그렇소?”
“뾰족한 산봉우리들 사이에 넓은 천지 호수가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져 있는 광경은 지금도 잊지 못할 일생일대의 장관이었사옵니다.”
마치 천지를 눈앞에 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한 송시열의 설명에 도현은 작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경의 이야기를 들으니 짐도 꼭 한번 가 보고 싶구려.”
“기회가 되신다면 들러 보십시오. 그럼 왜 백두산을 민족의 영산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러리다.”
회귀 전에도 백두산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기에 도현은 언젠가는 천지에 올라 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럼 계속 유람만 다닌 것이오?”
“작년부터는 사저에서 그동안 신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수집한 자료들을 엮어 미력하나마 글을 쓰고 있사옵니다.”
도현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상대를 봤다.
“경처럼 학식이 높은 사람이라면 가진 바 지식을 글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 그래, 어떤 내용이오?”
“고조선의 통치 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부터 삼국시대까지 한민족의 전통적인 철학과 사상에 관한 것이옵니다.”
주자학의 대가였기에 당연히 유교에 관한 책일 거라고 지레짐작하던 도현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 의외구려.”
그러자 송시열이 씁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도 신이 주자학과 관련된 글을 쓸 것이라 생각하셨사옵니까?”
“솔직히 아니라고는 못 하겠소.”
“예전의 소신이라면 그랬을지 모르겠사오나 전하를 만나고 한민족의 역사에 대해 깊이 있게 공부를 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반만년을 이어 온 찬란한 역사와 어디에 내놔도 뒤처지지 않을 뛰어난 사상과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저 한족들이 만든 학문이 최고다 생각하고 거기에 매몰돼 다른 건 돌아보지 않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말이옵니다.”
일반 유학자도 아니고 대가라고 불리는 사람이 지금껏 자신이 쌓아 온 학문을 모두 부정하는 말을 하자 도현은 크게 놀랐다.
“역사서를 저술하면서 많이 변한 건 알았지만 이거 참 놀랍구려.”
“좀 더 빨리 진실에 눈을 뜨고 잘못된 것을 깨우치지 못해 한스러울 뿐이옵니다.”
진심이 가득 느껴지는 송시열의 모습에 그는 기꺼운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는 송시열 같은 대학자가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그동안 많이 청산했다고 하지만 아직 곳곳에 남아 있는 사대주의를 깨끗이 털어 버리는 데 큰 힘이 될 게 분명했다.
“어려운 결단을 내렸소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뭔지 말씀해 보시오.”
자세를 바로 한 송시열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앞에 있는 도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한민족의 역사를 가르치고 아국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면서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양반들 사이에서 명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여기고 섬기는 잘못된 풍조가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옵니다.”
“흐음, 그렇지.”
지금까지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조선 건국 이후 유교의 전파와 함께 뿌리 깊게 박힌 사대주의를 없애는 것이 쉽지 않아 도현의 근심거리 중에 하나였다.
“신이 글을 쓰며 느낀 것은 조선이 진정한 동방의 강자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이런 낡아 빠진 사대주의부터 버리고 민족의 자긍심을 되찾아야 된다는 거였사옵니다.”
“맞는 말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예전의 저처럼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있는 양반들의 벽을 단숨에 깨어 버릴 계기가 필요하옵니다.”
“그게 무엇이오?”
그가 상체를 앞으로 당겨 앉으며 관심을 보이는 가운데 잠시 뜸을 들이던 송시열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께서 제국을 선포하고 황위皇位에 오르시는 것이옵니다.”
“……!”
설마하니 황제가 되라고 말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도현은 너무 놀라 입이 안 다물어졌다.
“진심이시오?”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그가 되묻자 송시열은 바닥에 엎드리며 이야기를 했다.
“그 옛날 고구려 때도 독자적인 연호를 쓰고 황제와 동격인 태왕이라는 호칭을 썼다고 알고 있사옵니다. 이미 오래전에 명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북으로는 드넓은 만주 벌판을 차지하고 남으로 멀리 대만 섬에까지 아국 영토를 넓혀 조선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영광스러운 시절을 만들어 가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이만하면 제국을 선포하시고 황제가 되셔도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이것 참…….”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도현이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자 송시열은 재차 진심을 다해 황위에 오를 것을 주장했다.
“새 시대를 열어 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황제가 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순히 호칭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형식적이나마 유지하고 있던 명나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새로 정립해야 되는 건 물론이고 나라 안팎으로 큰 변화가 불가피했다.
하나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고 조선이 진정한 동북아의 강자가 되기 위해서는 한 번은 꼭 거쳐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경의 말뜻은 알겠으나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소.”
“왜 그렇게 생각하시옵니까?”
“경이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곧 청과 한판 승부를 벌여야 되는데, 이런 중요한 시기에 자칫 큰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는 일을 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크지 않겠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하루빨리 제국을 선포하셔야 된다고 생각하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큰 국난을 앞두고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신다면 백성들을 하나로 일치단결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겠사옵니까.”
단단히 마음을 먹고 왔는지 송시열이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적극적으로 주장을 펼치자 도현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했사옵니다. 승천의 기세로 국력을 키워 나가는 이때에 전하께서 황제가 되신다면 그 기운이 더욱 배가되어 조선의 영향력이 사방으로 뻗어 나갈 것이옵니다.”
단순한 개인적인 영광을 넘어 조선이 제국으로 우뚝 서는 모습을 상상하자 도현은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만주 벌판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던 만주족도 황제라 칭하는데 도현이라고 못 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늘어난 영토와 국력을 생각하면 오히려 아직까지 제국을 선포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나라의 근본을 바꾸는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였기에 도현은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경의 뜻은 잘 알겠소. 심사숙고를 해서 결정을 내리겠소.”
“부디 현명하신 판단을 하시길 바라옵니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두 사람은 대화를 계속 이어 갔지만 도현의 머릿속에는 황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다른 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