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 선포 (96/104)

제국 선포

송시열이 돌아간 뒤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은 도현은 예정된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희정당에 혼자 틀어박혀 고심을 거듭했다.

상선인 칠현이 입단속을 철저히 시켜 둘 사이에 오간 이야기가 밖으로 한마디도 새어 나가지 않아,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는 대소 신료들은 갑작스러운 도현의 칩거에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렇게 하룻밤을 꼬박 새운 그는 복잡한 머리를 잠시 식히기 위해 희정당을 나와 후원으로 향했다.

최대한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자연스러운 미를 간직한 후원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줬다.

정자에 오른 도현은 잔잔한 호수 위에 둥실 떠 있는 연꽃잎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역시 이곳에 오니 좋구나. 식물이 많아서 그런지 공기가 참 맑아.”

뒤따르는 수행원들을 모두 저만치 물린 상태라 주변은 참으로 고즈넉했다.

느긋하면서도 평온하게 흐르는 시간의 여유로움을 마음껏 만끽하면서 도현이 모처럼 풀어진 표정을 하고 있으니, 칠현이 슬그머니 물었다.

“여러 가지로 피로가 쌓이셨나 봅니다.”

“으음.”

도현의 입에서 작게 긍정하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차를 준비하라고 이를까요?”

아무리 상쾌한 공기가 좋다 해도 찬 기운 옆에 있으면 몸이라도 상할까 염려되었다.

“그러게.”

잠시 뒤 상궁이 향긋한 향이 풍기는 녹차를 쟁반에 받쳐 들고 왔다.

비단 방석 위에 앉아 차를 마시며 풍경을 감상하던 도현은 편안해 보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러고 있으니 모든 근심이 다 사라지는 것 같군.”

벌써 이 시대로 온 지도 수년이 흘렀다.

처음 눈을 떠서 봉림대군이라 불렸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그땐 정말로 꿈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게다가 조선도 아니고 청나라 한복판에 뚝 떨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만약 도현이 역사학 전공이 아니었더라면 혼자서 살아남기는 무척 어려웠을 것이었다.

“역시 사람은 공부를 하고 봐야 해.”

각종 사료와 문헌으로 다져진 지식 덕분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역시 가족이 그립긴 하지.”

도현은 쓴 미소를 베어 삼켰다.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심양에 있던 시절엔 때때로 먼 미래에 놔두고 온 가족을 떠올리며 홀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땐 중전이 지금처럼 마음을 열기 전이라 각방을 쓸 때가 많았는데, 생각해 보면 그게 오히려 잘된 일인 것 같았다.

만약 중전이 그런 모습을 보았다간 대경실색하여 무슨 일이냐고 캐물었을 테니, 분명 대답할 말이 궁해져 거짓말로 그 자리를 모면해야만 했을 테니까.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고, 이젠 그런 그리운 기억도 점점 추억으로 희미해져 갔다.

지금도 가끔씩은 가슴이 멍든 것처럼 아리지만, 중전의 햇살 같은 미소나 자식들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보면 이제 자신은 조선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이라고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어쩐지 후련해진 기분으로 어느새 미지근하게 식은 녹차를 크게 한 모금 삼켰다.

“이젠 여기가 내 고향이지, 내 가족이 있는 곳이고.”

도현은 따뜻한 바람이 소매를 흔들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마음이 편안해지자 그동안 고민을 거듭하던 문제도 명확하게 풀렸다.

“억울하게 죽은 형님을 대신해 왕위를 물려받으며 처음 결심한 것이 바로 조선과 한민족을 만대에 영광을 누릴 수 있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거늘.”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건원칭제를 해 오랫동안 이어지던 제후국의 족쇄를 끊고 오롯한 자주국이 되어 제국으로 거듭나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도 없었다.

아무런 능력도 없이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조선은 제국이 될 자격과 능력이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여기까지 생각을 하자 도현은 더 망설이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

“그래, 언제까지 변두리에 있으라는 법은 없지. 이제부터 아국과 한민족이 역사의 주역이 되는 거야.”

제국을 선포하기로 결심을 굳힌 도현은 곧장 최측근인 총리대신 임경업과 상공대신 유형원 그리고 이완 단장을 희정당으로 불러들였다.

“전하, 총리대신과 두 분 대감께서 오셨사옵니다.”

“들라 하라.”

문이 열리고 방 안으로 들어온 세 사람은 금색 비단 보료 위에 앉아 있는 도현에게 예를 갖췄다.

“찾으셨사옵니까, 전하.”

“어서들 오시오. 경들을 오라고 한 것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본능적으로 지난 하루 동안 갑자기 그가 칩거를 한 것과 관련된 일임을 눈치챈 임경업은 약간 긴장한 얼굴로 도현을 봤다.

“하교하시옵소서.”

앞에 있는 세 사람을 찬찬히 쓸어 본 그는 이내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고구려의 정기를 이어받아 건원칭제建元稱帝를 할 생각이오.”

“……!”

순간 방 안은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큰 충격에 빠졌다.

뭔가 큰일이 있다는 건 짐작했지만 설마 이런 이야기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세 사람은 너무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장 연륜이 깊은 임경업이 그나마 제일 빨리 정신을 차리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국을 선포하시겠다는 말씀이옵니까?”

“그렇소. 명나라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자적인 연호를 쓰고 짐은 황제 위에 오를 것이오.”

확고한 도현의 모습에 세 사람은 이미 그가 마음을 단단히 굳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의 충격과 당혹감이 사라지자 세 사람은 우려보다는 적극적으로 그의 결단을 지지했다.

“잘 생각하셨사옵니다.”

“진즉에 해야 될 일이었사옵니다.”

“다들 찬성하는 건가?”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사실 전하께서 이룩하신 업적과 아국의 국력을 생각하면 벌써 황제 위에 오르셨어야 하옵니다.”

약간 들뜬 얼굴로 임경업이 힘을 줘 이야기하자 옆에 있던 유형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맞사옵니다. 신들이 먼저 주청을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할 따름이옵니다.”

“신도 같은 생각이옵니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내심 걱정하던 도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지지를 보내는 측근들의 모습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경들이 그렇게 말을 해 주니 마음이 든든하오.”

“당연한 일이옵니다.”

“다른 이들도 이렇게만 해 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그게 아니라서 걱정이오.”

그러자 임경업이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말했다.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시는 데 어느 누가 반대를 하겠사옵니까!”

“그렇사옵니다. 제대로 정신이 박힌 이라면 절대 그럴 리가 없을 것이옵니다.”

측근들의 반응에 미소를 지으면서도 도현은 냉철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많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사대주의를 버리지 못한 신하와 양반 들이 많다는 것을 경들도 알지 않나.”

“그거야…….”

인정하기 싫지만 엄연한 현실이었기에 임경업은 눈가를 살짝 찌푸린 채 말을 얼버무렸고, 이완 단장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반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전하의 말씀처럼 상당한 논란이 벌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아국이 고토를 회복하고 천하에 힘을 떨치고 일어난 것이 언제인데 아직까지 다 망해 찌그러진 명나라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다니. 쯧.”

“그러게 말입니다.”

대표적인 실학자로 도현을 만나 오래전에 사대주의에서 벗어난 유형원은 혀를 차는 임경업의 말을 거들며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또한 우리가 극복해야 될 일이 아니겠나.”

“그렇사옵니다.”

“여유가 있다면 천천히 설득을 해 나가겠으나 청과의 전쟁을 앞두고 국론이 분열되면 자칫 큰 낭패를 볼 수도 있을 게야. 그래서 경들이 날 좀 도와줬으면 하네.”

“뭐든지 하교만 하시옵소서.”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세 사람을 보며 도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조정에서 이 일을 공론화시키기 전에 밑바닥부터 분위기를 조성해, 명나라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대세를 따르도록 만드는 걸세.”

설명을 들은 임경업은 무릎을 치며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것 참 좋은 생각이시옵니다.”

“아무리 명을 상국으로 여기는 마음이 남아 있다고 해도 건원칭제에 대한 여론이 들불처럼 일어난다면 감히 드러내 놓고 반대를 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바로 그거요. 어떻게, 할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임경업과 다른 두 사람이 눈을 빛내면서 한목소리가 되어 대답했다.

믿음직스럽다는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도현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경들만 믿겠소.”

어떤 방식으로 분위기를 조성할 것인지 좀 더 구체적인 지시를 받은 세 사람은 한참이 지나서야 희정당을 나왔다.

며칠 뒤 젊은 유생들과 백성들 사이에서 이제 명나라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나 조선이 제국으로 우뚝 서야 한다는 주장이 급속히 퍼지기 시작했다.

탕.

“이만한 힘을 가졌는데 아직 제후국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말이 돼. 주상 전하가 누르하치나 명 태조보다 못한 것이 뭐가 있어!”

막걸리를 한입에 털어 넣은 유생이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맞아, 자네 말이 옳네!”

옆에 있던 친구가 크게 맞장구를 치자 흥이 오른 유생이 더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맞은편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약간 고지식하게 생긴 사내가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예전부터 상국으로 모셔 왔고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 준 은혜가 있는데, 상황이 안 좋아졌다고 한순간에 태도를 바꾸는 건 조금 그렇지 않나?”

유생은 콧방귀를 뀌며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흥, 그놈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은 지겹지도 않나?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하도 여러 번 우려먹어서 이제 사골도 안 남았을 것 같구먼.”

“이 친구가…….”

“솔직히 왜란 때 원군을 보낸 것이 우리 조선을 위해선가! 따지고 보면 그렇게 도와 달라고 애원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다가 조선을 점령하고 명까지 치겠다는 왜놈들의 기세에 겁을 먹고는 허겁지겁 나선 것이 아니냔 말일세. 그리고 명군 놈들이 이 땅에 와서 한 일이 뭐가 있나. 식량만 축내고 패악질이나 부렸지, 실제로 왜놈들과 싸워 쫓아낸 건 충무공과 의병들이 아니냐고.”

“흠흠.”

왜란 당시 명군의 무능과 행패는 유명한 이야기였기에 사내는 딱히 반박을 하지 못하고 괜히 헛기침만 했다.

“백번 양보해서 도움을 받아 나라를 구했다고 해도, 그건 이미 명나라가 후금과 싸우는 데 군대를 보내고 그 때문에 병자호란을 겪고 선왕께서 남한산성에서 치욕을 당한 일로 이자까지 쳐서 다 갈음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틀렸나!”

여기서 아니라고 하면 삼전도의 치욕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에 사내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명나라와 맺어 온 관계가 있는데…….”

“이런 답답한 친구를 봤나.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왜 모르나! 그리고 자꾸 상국이라고 하는데, 그거야 필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관계를 유지했을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세. 이제 아국이 그 누구도 무시 못 할 강국이 됐는데 구태여 그런 족쇄를 차고 있을 이유가 없지.”

논리적으로 딱딱 따지고 드는 유생의 말에 그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또 다른 평상에서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거 젊은 사람이 말 한번 시원하게 하는군!”

“하하! 맞아. 우리 나라님 같은 분이 황제가 되어야지, 그 외에 누가 자격이 있겠나!”

“암, 그럼!”

주막에 모여 앉아 있던 중인들 사이에서 왁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졸지에 몰리는 형국이 되어 놓고 보니, 이 사내도 더 이상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떫은 감을 씹은 표정을 지었다.

“끄으응.”

그런 사내와 달리 유생은 그것 보라며 우쭐해 어깨를 들썩였다.

이처럼 건원칭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곳마다 약간의 논란이 있었지만 대부분 도현이 황위에 올라야 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뜨거운 반응은 의도적으로 분위기를 조성한 주작단에서도 깜작 놀랄 정도였는데, 그동안 꾸준히 진행시킨 자주 의식 고취가 일반 백성들과 젊은 유생들 사이에 폭넓게 퍼지고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반응의 밑바탕에는 영광스러운 시대를 만들어 가고 있는 도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존경심이 있었다.

딱히 분위기를 크게 만들어 갈 필요도 없이 불씨만 살짝 당기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도현을 황제로 추대하자는 주장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급기야 젊은 유생들을 중심으로 건원칭제를 해야 된다는 상소문이 궁내부에 산더미처럼 쏟아졌다.

이완 단장과 상공대신 유형원을 육조거리에 있는 총리 집무실로 불러들인 임경업은 상소문 이야기를 듣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일이 아주 잘 풀리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찬성 여론이 많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뜨거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평양과 평안도 지역의 젊은 유생들이 주도하여 만인소萬人疏(만 명이 연대 서명을 해서 뜻을 전하는 것)를 작성하고 있다 합니다.”

“허어, 만인소라.”

“대단하구려.”

역사적으로 1792년(정조 16년) 영남 유생들이 사도세자를 복권시켜 달라고 만인소를 써서 올린 것이 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이니, 만약 이완 단장의 말대로 진행이 된다면 무려 백 년이나 빨리 만인소가 생겨나는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라면 슬슬 조정에서 공론화를 시켜도 되지 않겠습니까?”

유형원의 말에 임경업이 시선을 옆으로 돌려 이완 단장을 봤다.

“이 단장의 생각은 어떻소?”

“나쁘지 않은 생각 같습니다. 대신 이왕이면 만인소가 접수되고 난 직후에 말을 꺼낸다면 더 효과적이겠지요.”

상대가 감히 어찌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의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이완 단장의 의도를 눈치챈 임경업은 한쪽 입꼬리를 살짝 위로 말아 올렸다.

“후후후, 나도 그러는 게 좋을 것 같군.”

“그럼 왕당파에 속한 대신들한테 슬쩍 귀띔을 해 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임경업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일을 벌이기 전에 말이 새어 나가면 안 되니까 입단속을 단단히 시키도록 하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진행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유형원이 자신 있게 이야기를 하자 임경업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나서면 괜히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으니 자네가 수고를 해 주게.”

“맡겨만 주십시오.”

“이 단장도 마지막까지 분위기를 우리 쪽에 유리하게 조성해 주길 바라네.”

시선을 받은 이완 단장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지금 같아서는 굳이 제가 나설 필요도 없어 보이지만, 상대편에서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조선과 주상 전하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다들 끝까지 최선을 다해 주게.”

“예.”

대답하는 두 사람의 눈동자에 의욕이 넘쳐흘렀다.

며칠 뒤 대전에서는 어김없이 대소 신료들이 모인 가운데 도현에게 국정 현안을 보고하고 논의하는 회의가 열렸다.

“영남 지방에 나흘간 큰 비가 내렸지만 다행히 치수공사를 잘해 둔 덕분에 별다른 피해가 없었사옵니다.”

“그거 다행이군. 하면 가을에 벼를 수확하는 것에는 이상이 없겠군.”

왕좌에 앉은 도현의 물음에 농산대신 진대석이 허리를 살짝 굽히며 대답했다.

“예, 좀 더 기다려 봐야겠지만 벼마다 이삭이 가득 들어차서 올해도 대풍이 될 것 같사옵니다.”

“풍년이 든다면 그것만큼 좋은 소식이 없지. 이번 일을 거울삼아 치수 관리에 더욱 만전을 기하도록 하라.”

“알겠사옵니다.”

얼추 현안 보고가 다 끝나자 도현은 몸을 등받이에 살짝 기대며 말했다.

“더 할 이야기가 없으면 오늘 대전 회의는 여기서 끝내지.”

그러자 오른편에 서 있던 상공대신 유형원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오며 입을 열었다.

“전하, 신 유형원, 말씀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해 보게.”

자세를 바로 한 유형원은 슬쩍 좌중을 둘러보고는 사뭇 진지한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건원칭제에 관한 일이옵니다.”

“……!”

유형원의 폭탄 발언에 순간 넓은 대전 안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가 이내 웅성거리며 시끄러워졌다.

놀라고 당혹스러워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올 게 왔다는 반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신들도 귀가 있기에 건원칭제 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한 것을 다 알고 있었고 언젠가는 이 문제가 공론화될 거라는 예상을 했었다.

대신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유형원은 어깨를 펴며 말을 이어 갔다.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건원칭제를 주청하는 상소가 전국에서 산더미처럼 쏟아지고, 어제는 북방 지역의 젊은 유생 만여 명이 연대 서명을 한 상소까지 올라왔다고 합니다. 이처럼 백성들의 열망이 뜨거우니 당연히 조정에서 이 문제를 논의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자 원로원에 속한 노신 한 명이 약간 불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청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중차대한 문제를 논의하는 건 아직 시기상조인 것 같소이다.”

은근슬쩍 뒤로 미루려고 하자 처음 이야기를 꺼낸 유형원이 바로 반박을 했다.

“이런 때일수록 더 이번 일을 진지하게 논의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제국을 선포한다면 백성들을 하나로 응집시키고 군대의 사기가 크게 올라갈 겁니다.”

왕당파와 젊은 신하들이 유형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결정을 내리기에는 너무 중차대한 문제가 아니오?”

젊은 사대부들과 달리 아직 명나라에 대한 사대 의식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노신이 떨떠름한 태도를 보이자 유형원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모든 상황이 다 무르익었는데 망설일 이유가 뭐가 있단 말입니까! 설마 경은 주상 전하께서 제위에 오르실 자격이 없다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자칫 불경죄로 몰릴 수도 있는 이야기에 노신은 크게 당황해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는 도현을 향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절대 아니옵니다. 소신이 어찌 그런 불경스러운 마음을 품을 수 있겠사옵니까.”

“당연히 그러할 것이라 믿소.”

단지 조용히 말했을 뿐인데 그 속에 어린 냉엄한 기운에 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노신은 어느새 배어난 식은땀을 소매로 훔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무, 물론이옵니다.”

뛰어난 지도력으로 그 어느 왕보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도현이었기에 지그시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신하들은 바짝 긴장하며 오금이 저려 왔다.

거기다가 이번 일은 반대할 명분마저 마땅치 않았고 까딱 잘못했다가는 역적으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그러니 신하들이 더욱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청과 싸워 만주와 요서 지역을 연달아 점령하면서 민족적 자긍심이 살아나 상국인 명나라에 대한 사대 의식이 예전에 비해 희박해져 있었기에 반발이 적었다.

신중론을 펼치던 노신이 어깨를 움츠리며 물러서자 왕좌 바로 아래에 서 있던 총리대신 임경업이 특유의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미 고토를 회복해 그 어느 때보다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고 주변 어떤 나라도 함부로 보지 못할 국력을 가졌으니, 건원칭제를 하셔도 절대 모자람이 없다고 생각하옵니다.”

“그렇사옵니다. 만주의 유목민이었던 청나라도 스스로 황제라 칭하는데 전하께서 그보다 못할 이유가 없지 않사옵니까.”

“명나라의 굴레에서 벗어나 만천하에 당당히 한민족의 힘을 보여 줄 때가 됐사옵니다.”

“황제 위에 오르십시오!”

미리 입을 맞춰 놓은 대신들은 물론이고 대다수의 신하들이 합세해 바닥에 엎드려 도현의 황제 등극을 주청했다.

명과의 관계 때문에 건원칭제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몇몇 신하들은 우려스러워하면서도 감히 나서서 반대할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당혹스러운 얼굴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깨닫고 체념했다는 쪽이 더 정확했다.

그러자 왕좌에 앉아 신하들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도현이 근엄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경들과 만백성의 뜻이 그렇다면 제국을 선포해 한민족의 기상을 드높이고 그 옛날 대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할 것이오!”

도현의 선언에 대전 가득 모여 있던 대소 신료들은 하나같이 격동에 찬 얼굴로 양팔을 들어 올렸다.

“만세! 대조선 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아직 대관식을 치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질 급한 젊은 신하들은 황제라는 칭호를 입에 담았고, 제후국이라 대놓고 쓰지 못했던 만세라는 구호도 속 시원히 외쳤다.

개국 이후 큰 변곡점이 되는 순간이었는데, 이로써 그동안 형식적으로나마 계속 이어지던 명나라와의 군신관계가 완전히 청산되며 당당한 제국으로 조선이 세상에 우뚝 설 수 있게 됐다.

결정이 내려지자 총리대신인 임경업을 중심으로 후속 조치가 신속하게 진행됐다.

제일 먼저 길지를 택해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낼 원구단圜丘壇을 조성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원구단은 둥근 형태로 된 제천단祭天壇을 말하는 것이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고 해서 예부터 하늘에 제를 지내는 것은 둥글게, 그리고 땅을 모시는 것은 네모나게 만드는 게 원칙이었다.

조선 이전부터 국왕이 하늘을 향해 제를 지내는 건 종종 있어 왔던 일이었다.

하지만 성리학이 중심 이념으로 양반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사대 의식이 강해지면서 천자가 아닌 제후국의 왕이 천제天祭를 지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의견들이 많아 제천단을 없애게 됐다.

그런 제천단을 다시 대대적으로 조성한다는 건 잘못된 악습을 끊어 내고 조선이 명백한 자주국이 되어 천하에 우뚝 서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 원구단의 위치로 낙점된 곳은 오늘날 중구 소공동 지역이었다.

“흐음, 여기가 길지란 말이지?”

원구단 건설을 맡은 궁내부 대신 장선징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자 동행한 관리가 얼른 대답했다.

“예, 하늘의 기운이 가득 모이는 명당 중에서도 명당이라고 합니다.”

“호오, 그래?”

설명을 듣자 아직 아무것도 없는 공터가 어쩐지 신령스러운 곳처럼 느껴졌다.

“공사는 언제부터 시작인가?”

“이틀 뒤에 제를 지내고 바로 터 닦이에 들어갈 계획입니다.”

“나라의 중요한 행사가 열릴 곳이니 각별히 정성을 들여서 건물을 지어야 될 걸세.”

“물론입니다.”

머리를 끄덕인 장선징은 다시 한 번 터를 꼼꼼히 살펴보며 미흡한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틀 뒤, 예정된 대로 원구단 공사가 시작됐는데 첫 삽을 뜨기에 앞서 작업에 참여하는 모든 장인과 인부 들이 몸을 정갈하게 한 다음 제를 올리며 제천단을 만드는 것을 하늘에 고했다.

여기에 국왕인 도현도 친히 참석해 직접 제를 주관하며 공사를 할 장인과 인부 들을 격려했다.

국가적인 행사를 치러야 되는 곳인 만큼 수백 명이 한꺼번에 들어와도 넉넉할 정도로 넓은 대지에 화강암으로 삼 층 단을 쌓고 그 중앙에 황금빛 원추형의 커다란 지붕을 씌웠다.

제단 북쪽에는 역시 화강암 기단 위에 삼 층의 황궁우皇穹宇라는 팔각 정자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선대왕들의 신위 판이 봉안될 예정이었다.

조선이 이제 황제국이 됨을 만천하에 알리는 상징적인 건물이었기에 궁내부에서 직접 공사를 관리 감독하며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재물과 인력을 아끼지 않고 투입한 덕분에 원구단 공사는 하루가 다르게 진척돼,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수확의 계절인 가을이 되자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드러났다.

원구단을 짓는 사이 도현은 제국에 걸맞게 제도와 법령을 정비했는데 형식적으로나마 남아 있던 명나라에 대한 사대 행위가 모두 철폐됐다.

이 과정에서 아직 사대주의를 버리지 못한 일부 양반들이 이치에 어긋난 일이라며 반발할 조짐을 보였지만 송시열을 비롯한 대학자들이 건원칭제를 적극 찬성하고 나오면서 흐지부지되어 버리고 말았다.

오히려 도현이 황제 위에 오른다는 소식에 대다수의 백성들이 크게 환영하며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시간이 흘러 드디어 대망의 대관식 날 아침이 밝았다.

가을 추수로 한창 바쁜 시기였지만 도현이 황제에 즉위하고 제국을 선포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인파들로 한양 거리는 며칠 전부터 북적였다.

그러자 만약에 일어날지 모르는 불미스러운 사태에 대비해 근위군단 병력이 도성 안팎을 물샐틈없이 경비했고, 근접 경호를 맡은 친위대는 비상 태세에 돌입해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다.

포도청도 가용 인력을 총동원해서 치안을 유지했다.

도현의 황제 즉위를 하늘도 축하해 주는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구름처럼 많은 인파가 모여 있는 가운데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입구가 굳게 닫혀 있다가 커다란 북소리와 함께 좌우로 열렸다.

둥둥둥! 둥둥둥!

끼이이익.

황금색 비단에 봉황과 용이 수놓인 깃발을 든 기수대를 앞세우며 취타대가 악기를 연주하면서 나타났다.

그리고 바로 뒤를 이어 날카롭게 눈을 번득이는 친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도현이 눈처럼 하얀 말을 탄 채 모습을 드러냈다.

보통 임금이 대궐 밖을 나설 때는 긴 들채 한가운데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지붕과 차양을 설치한 어가御駕를 타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도현은 직접 말을 몰고 가는 것을 선택했다.

어마御馬가 나타나자 대로 양쪽에 빽빽이 늘어서 있던 백성들은 그 자리에 엎드리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세!”

“대조선 제국 만세!”

조선 역사상 영토를 가장 크게 넓힌 정복 군주라는 것을 알려 주듯 치렁치렁한 곤룡포 대신, 약식이지만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황금 갑옷에 등 뒤로 진홍색 망토를 두른 도현의 모습은 마치 전설 속의 군신이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그가 허리를 똑바로 편 채 안장에 앉아 오연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자 그 강렬한 눈빛과 존재감에 백성들은 감격한 표정으로 더욱 극경의 예를 올렸다.

“흑흑, 조선이 제국을 선포하는 영광스러운 광경을 볼 수 있다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시골에서 올라온 초로의 선비 한 명은 감격에 겨운 나머지 눈물을 주르륵 흘렸고, 혈기 넘치는 젊은 유생들은 들뜬 얼굴로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쳤다.

이런 뜨거운 반응은 긴 어마 행렬이 원구단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광선문光宣門 앞에 행렬을 멈춘 도현은 백마에서 내려 제례복을 입은 총리대신 임경업의 안내를 받으며 원구단 안으로 들어갔다.

제단 앞 공터에는 문무백관과 종친 그리고 황후를 비롯한 황실 식구들이 먼저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 폐하 납시오!”

칠현이 목청을 돋워 크게 소리를 치는 것과 함께 도현이 제단까지 쭉 뻗은 어도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박석을 촘촘하게 깐 어도를 가운데 두고 동편에는 문관이 그리고 서편에는 무관들이 예복을 갖춰 입은 채 늘어서 있었다.

종친과 황실 식구들은 제단 바로 아래 위치했다.

절대왕권을 만들어 낸 지도자답게 어깨를 활짝 핀 도현은 당당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자세로 걸음을 뗐다.

그런 모습에 좌우에 늘어선 문무백관들은 마치 해일처럼 알아서 허리를 숙이며 극경의 예를 취했다.

그 사이를 가르며 느릿하게 걸을 때마다 몸에 걸친 갑옷이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내었고, 장엄하고도 엄숙한 분위기에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떼지 않았다.

다들 눈을 아래에 두고 있는 가운데, 도현의 시선이 그를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황후에게로 가 닿았다.

설화 속의 단군왕검이 저랬을까, 실로 하늘에서 내려온 천인처럼 고결해 보이는 그가 자신의 남편이고 지아비라니…….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차오르는 설렘에 황후는 자기도 모르게 두근거리는 가슴 한쪽을 꾹 눌러 진정시키려 했다.

그렇게 넋을 놓고 있는 황후의 얼굴을 보자 돌연 장난기가 동한 도현이 불현듯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순간 당황하여 짧게 숨을 들이켠 황후는 다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방금 전 도현의 표정을 본 사람이 자기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소맷자락을 들어 올려 입가를 가리고선 살짝 붉어진 눈매로 너무한다는 듯 도현을 흘겨보았다.

‘이제 정신 좀 차렸나?’

‘어떻게 이럴 때조차 장난을 치실 수 있으세요?’

눈짓으로 부부끼리만 통하는 대화를 주고받은 도현은 사뭇 유쾌해진 기분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단을 응시했다.

천천히 돌계단을 올라 제단 앞에 선 도현이 등 뒤로 늘어뜨린 망토를 펄럭이면서 뒤로 돌았다.

광활하게 펼쳐진 넓은 시야 아래, 문무백관들이 차가운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모습은 도현의 가슴속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지배욕을 끓어오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일찍이 진나라의 시황제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세상을 모두 제 발아래 둔 것 같으니 사내로서 이보다 더 한 기쁨은 없으리라.

그 순간 불현듯 우연한 계기에 과거로 회귀해서 수많은 일을 겪은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렵고 힘든 일들이 많았지만 기울어져 가던 조선을 바로 세우고 오늘날 이 영광을 자신의 두 손으로 일궈 냈다는 성취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이제 제국으로서 완전히 새로운 역사를 쓰는 첫걸음을 앞두고 있었다.

“폐하.”

제사장을 맡은 임경업이 옆으로 다가와 나지막하게 말하자 그제야 상념에서 벗어난 도현은 다시 몸을 돌려 제단을 향해 두세 걸음 다가가 섰다.

악단이 장엄한 음악을 연주한 뒤 임경업이 축문을 꺼내 들고는 큰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나라의 큰일을 앞둔 이때에 상제께 고토를 회복하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워 만년 태평성대를 이루기를 기원하옵니다. 상제의 허락을 받아 독립의 기초를 창건하고 스스로 주장하는 권리를 행할지니, 황제의 칭호를 추존코자 하매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 위에 올라 국호를 대조선이라 부르며 이해를 광무 원년으로 삼고 하늘과 땅에 이 사실을 고하옵나이다.”

낭랑하게 축문을 읽어 내려가는 소리가 넓은 원구단 전체로 퍼져 나갔다.

축문을 읽는 것을 마친 임경업은 조심스럽게 제단 위에 축문을 바치고는 한쪽으로 물러섰다.

그러자 성인 남자가 두 팔을 다 벌려도 한참이 남을 정도로 커다란 청동 향로가 놓여 있는 제단을 앞에 두고 선 도현이 천천히 구배를 올렸다.

새로 탄생한 대조선 제국을 하늘에 고하고 영광을 기원하는 자리였기에 도현은 성심을 다해 예를 갖췄다.

그 모습이 얼마나 엄숙한지 모두들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홉 번의 절을 끝내자 제사장인 임경업이 황금색 비단 보자기에 싸인 옥쇄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가져와 그에게 건넸다.

옥쇄는 이번 즉위식을 위해 새롭게 만든 것으로, 순수 황금에 한 쌍의 봉황과 용이 금방이라도 하늘을 날아오를 것처럼 생생하게 조각되었고 용의 입에는 귀한 붉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도현은 몸을 돌려 제단 끝으로 걸어가서는 손에 든 옥쇄를 번쩍 치켜들며 외쳤다.

“천제의 뜻을 받아 대조선 제국의 성립을 선포하노라! 짐과 조선 제국이 가는 길에 무한한 영광이 있을 것이다!”

가슴을 절로 뜨겁게 만드는 그의 선언에 제단 아래 늘어서 있던 문무백관들이 일제히 두 팔을 하늘 위로 들어 올리며 만세를 소리쳤다.

“황제 폐하 만세!”

“대조선 제국 만세! 만세!”

함성 소리는 원구단 돌담을 넘어 밖에까지 울렸고, 그러자 운집해 있던 백성들도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목청을 높여 기쁨에 찬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

제국 선포와 함께 옥쇄를 받고 황제로 즉위한 도현은 그 길로 종묘로 가서 선대왕들께 오늘 일을 고해 알렸다.

그리고 저녁에는 대궐에서 문부백관과 종친들을 모아 성대한 연회를 개최했는데, 막부를 비롯해 화란과 영길리의 대표 등 주변 여러 나라의 사신들을 참석시킴으로써 강대해진 조선의 힘을 과시했다.

일반 백성들도 황실에서 베푼 술과 고기를 마음껏 즐기며 사흘간 흥겨운 축제를 벌였다.

대조선 제국의 선포는 주변국에 엄청나게 큰 파장을 던졌는데, 그중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곳은 바로 북경을 잃고 강남으로 쫓겨났으면서도 아직 옛 영광을 잊지 못하고 있던 명나라였다.

꽝!

“감히 조선이 건원칭제를 하다니 이게 사실인가!”

분노에 찬 명 황제 주율건의 외침이 넓은 남경 황궁 대전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러자 소식을 가져온 예부대신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입에 담기조차 송구스러우나 분명 그런 내용의 외교문서를 보내왔사옵니다.”

“제후국 주제에 건방지게 스스로 황제 위에 오른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사신을 보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해 오다니, 이런 괘씸한!”

주율건이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떨자, 대학사로 예전부터 조선에 대해 감정이 별로 좋지 않던 황보태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건 명백히 황제 폐하에 대한 반역이자 도발이옵니다. 절대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서는 아니 되옵니다.”

“당연한 말이오.”

그러자 공부시랑 시평국이 앞으로 나서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신도 조선의 행동에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지만 섣불리 행동하실 일이 아닌 것 같사옵니다.”

“뭐야!”

불난 곳에 기름을 붓는 말에 주율건은 눈을 부릅뜨며 시평국을 노려봤고 황보태 역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언성을 높였다.

“공부시랑은 조선의 행동을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두자는 게요!”

“그게 아닙니다.”

“그럼 방금 한 말은 뭐요!”

강남 지역의 호족 출신으로 평소 북경 귀족 출신인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황보태가 다그치듯 몰아붙이자 시평국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화북을 상실한 상태에서 물리적으로 조선을 징치할 방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주적인 청나라와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 중인데 유일하게 후방을 위협해 줄 수 있는 조선과 사이가 틀어진다면 도르곤만 이득을 볼 뿐입니다.”

정확한 지적이었지만 주율건과 대다수의 신하들은 조선이 명나라를 능가할 정도로 강국이 됐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닥치시오!”

버럭 호통을 친 주율건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시평국을 질책했다.

“대명 제국의 신하로서 그딴 약한 소리를 하다니 부끄러운 줄 아시오.”

“폐, 폐하.”

“아무리 청나라로 인해 아국이 조금 곤궁한 처지에 몰렸다고 하지만, 제후국 주제에 분수를 모르고 건원칭제를 하다니 이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따끔히 혼을 내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될 것이옵니다.”

명나라가 처한 현실은 알지 못하고 옛 영화에 빠져 시끄럽게 조잘대며 황제의 판단을 흐리는 황보태와 대신들의 모습에 시평국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 칙사를 보내 잘못을 크게 꾸짖고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린 뒤 조선 국왕은 황궁에 입조해 석고대죄를 하도록 하라!”

“예.”

이미 제국을 선포한 조선이 명나라의 말을 들으려고 할지 시평국은 회의적이었다.

그렇지만 이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해 봤자 괜히 황제의 노여움을 살 뿐이었기에 작게 한숨을 내뱉고는 눈을 감았다.

며칠 뒤 주율건의 지시를 받은 칙사가 남경을 떠나 배를 타고 한양으로 향했다.

이 소식은 명나라에서 암약하는 주작단 단원들을 통해 지체 없이 한양에 있는 도현한테 알려졌다.

“날보고 남경 황궁으로 들어와 죄를 빌라고?”

작게 콧방귀를 뀌며 도현이 되묻자 이완 단장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송구스럽게도 명 황제 주율건이 칙사에게 그런 지시를 내렸다고 하옵니다.”

“허어, 그것참,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게 누군지 모르겠군.”

“감히 폐하를 오라 가라 하다니 이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맞사옵니다. 이건 삼전도에서의 굴욕과 같은 무례한 행동이옵니다.”

방 안 좌우에 모여 앉아 있던 대신들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명나라의 오만한 행동을 규탄했다.

하다못해 명나라에 우호적인 대신들까지 도현을 남경 황궁에 입조해 석고대죄토록 했다는 이야기에 큰 불쾌감을 나타냈다.

아무리 상국이라지만 조선을 우습게 보고 깔아뭉개는 명 황제의 태도에 마음속 자존심이 크게 상처를 입은 것이다.

한쪽 팔을 들어 시끄러운 좌중을 조용히 시킨 그는 시선을 돌려 왼편에 앉아 있는 이완 단장을 보며 물었다.

“칙사가 언제쯤 도착한다고 했지?”

“해로를 이용하니 늦어도 사흘 뒤, 빠르면 이틀 안에 제물포에 당도할 것이옵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외무대신.”

“예, 폐하.”

“그래도 지금까지 맺어 온 인연이 있으니 정중하게 맞이하도록 하게.”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그였기에 당연히 크게 화를 내며 명나라 칙사를 그 자리에서 쫓아 보낼 줄 알았던 대신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 명나라 칙사를 이대로 받아들이실 것이옵니까?”

임경업이 조심스럽게 묻자 도현은 보료 등받이에 살짝 몸을 기대며 태연히 말했다.

“안 만날 이유가 없지 않나.”

“하오나…….”

보나 마나 불편한 일이 생길 게 분명했기에 임경업이 우려스러운 얼굴을 하자 도현은 미소를 지은 채 날카로운 눈빛을 번득이며 이야기를 했다.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될 일이네. 아직도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아국을 제후국으로 생각하는 저들의 착각을 산산이 깨 줄 필요가 있어.”

“그런 것이라면 굳이 폐하께서 나서지 않으셔도 신들이 알아서 하겠나이다.”

“아니, 그동안 조선에 와서 온갖 거드름과 유세를 떨며 패악질을 벌이던 저들이 된통 당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어서 그러네.”

마지막 이야기를 하며 얼굴 가득 사악한 미소를 짓는 도현의 모습에, 임경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명나라 칙사들이 혼비백산할 것을 떠올리면서 은근히 기대를 했다.

그건 다른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미 국력이 크게 신장한 조선은 지는 석양이 되어 쪼그라진 명나라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건 그렇고, 요즘 청나라의 움직임은 어떤가?”

도현이 화제를 바꾸자 이완 단장이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여전히 군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 특이할 만한 정보가 하나 포착됐사옵니다.”

“그게 뭔가?”

아무래도 가장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문제였기에 도현뿐만 아니라 방 안에 있는 모든 대신들의 시선이 이완 단장을 향했다.

“가을 추수를 앞두고 전국의 지방 관청에 쌀 이백만 섬을 공출하라는 도르곤의 지시가 내려졌다고 하옵니다.”

“……!”

엄청난 양의 곡식에 일순 좌중이 크게 술렁였다.

“지금 이백만 섬이라고 했나?”

“그렇사옵니다.”

“아니, 청 황제는 그 많은 곡식을 끌어모아서 도대체 어디에 쓰려는 거요?”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농산대신 진대석이 묻자 아까부터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던 국방대신 이시영이 낮은 침음성을 내뱉으면서 이완 단장 대신 입을 열었다.

“끄응, 보나 마나 아국을 침략할 때 쓸 군량미가 아니겠소이까.”

“그런…….”

“산해관과 가까운 당산唐山 지역에 성곽을 쌓고 대규모 창고를 짓고 있는 걸로 미루어 볼 때 국방대신의 짐작이 맞을 가능성이 크옵니다.”

“이놈들이 결국…….”

“도대체 얼마나 많은 병력을 일으키려고 군량미를 이렇게나 준비하는 건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외무대신 박노가 중얼거리자 이시영이 약간 가라앉은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명나라와 싸웠던 병력을 해산시키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니 적어도 삼사십만은 넘는다고 봐야 될 게요.”

그만한 병력과 싸워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숫자가 주는 압박감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두 번이나 아국에 대패를 당하고 그리 오래 전쟁을 치렀는데 아직도 수십만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니, 정말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무슨 병사들을 가래떡처럼 찍어 내는 것도 아니고.”

“더 큰 문제는 그 많은 병력이 그냥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실전을 충분히 겪은 정예들이라는 겁니다.”

이시영의 지적에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도현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이 단장.”

“예.”

“군량미를 모은다는 건 침략이 임박했다는 뜻이 아닌가?”

“그것 말고는 아직 다른 조짐이 없사오나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옵니다.”

심각하게 얼굴을 굳힌 도현은 상체를 바로 하며 다시 말했다.

“그럼 청군이 군대를 일으킨다면 언제쯤이 될 것 같나?”

“추수가 끝난 직후에 바로 움직이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고 준비가 부족하니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겨울에는 북방의 혹독한 추위에 전쟁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고 이미 한 차례 고생을 한 적이 있으니 이 또한 피하려고 하겠지요.”

“그렇다면 봄이 되겠군.”

“날이 풀리는 것과 함께 청군이 움직일 가능성이 크옵니다.”

그러자 좌우에 앉아 있던 대신들 사이에서 탄식과 우려하는 말들이 쏟아졌다.

“이제 겨우 제국이 안정을 찾아가는데 이런 난국이 닥치다니.”

“후우, 어찌해야 될지 정말 걱정입니다.”

국운을 걸고 강적과 맞서 싸워야 하는 풍전등화의 위기가 닥쳤으니 대신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감은 어느새 다 사라져 버리고 청군에 대한 두려움부터 내비치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지 도현은 한쪽 뺨을 실룩였다.

그러고는 손바닥으로 보료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며 버럭 호통을 쳤다.

“굶주린 승냥이 떼가 담을 넘어오면 모조리 몽둥이로 때려잡아 버리면 될 것이지 왜들 겁을 내는 거야!”

“하, 하오나…….”

“이미 싸워서 이겨 본 상대인데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어!”

벼락과도 같은 노호성에 대신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부끄러워하며 머뭇거리는 대신들 틈에서 총리대신 임경업이 도현을 거들고 나섰다.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제아무리 많은 대군을 이끌고 온다 해도 아국군의 철벽과도 같은 방어에 막혀 큰 좌절감을 맛보게 될 것이옵니다.”

“청군이 쳐들어온다면 지옥을 경험하게 해 줄 것이옵니다.”

국방대신 이시영도 청나라와의 싸움에 강한 자신감을 내보였다.

그러자 대신들의 태도도 변해, 전쟁에 대한 우려는 어느새 사라지고 당당히 청나라와 싸워 승리를 쟁취하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다시는 덤벼들지 못하도록 철저히 짓밟아 주는 겁니다.”

“맞습니다. 이제 조선이 예전의 힘없는 약소국이 아니라는 것을 이 기회에 똑똑히 보여 줘야 합니다.”

달라진 신하들의 태도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이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국을 공격하려는 청나라의 의도가 명백한 만큼 거기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해야 될 것이오. 국방대신.”

“예.”

“서천도의 방어 태세는 어떻소?”

“올 초부터 시작한 방어선 보강이 겨울까지 모두 마무리되고 병력도 십사만으로 대폭 증강됐사옵니다.”

“흐음.”

오른손을 들어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잠시 고심을 한 도현은 고개를 들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넓은 서천도를 다 방어하기에는 십사만으로도 부족할 테니 함경도와 강원도에서 각각 일 개 사단을 더 차출해 병력을 보강토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새로운 조선군의 편제를 보면 완편된 일 개 사단의 병력이 약 이만 명이니, 모두 십팔만 명으로 서천도 방어군이 늘어나는 셈이었다.

여기다 성안에서 방어전을 펼친다는 이점과 막강한 화력까지 더해진다면 청나라의 대군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충분히 해볼 만한 전력이었다.

본토에 대한 방어가 다소 취약해지겠지만, 어차피 두 지역은 위협이 거의 없는 최후방에 속해 있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천천히 좌중을 둘러본 도현은 힘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총리 이하 모든 대소 신료들은 군부에 적극 협조해 청과의 전쟁에 대비토록 하시오!”

“옛.”

대신들은 결연한 얼굴로 머리를 숙이며 크게 대답했다.

시원한 바람이 늦여름의 무더위를 밀어내며 사람들의 땀을 식혀 주는 어느 날, 명나라 깃발을 단 관선 한 척이 제물포 포구에 도착했다.

“여기가 조선인가.”

뱃머리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던 중년인의 말에 관복을 입은 젊은 사내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대인.”

“만주와 요서를 차지하며 조선의 기세가 하늘을 찌른다고 하더니 그게 사실인 것 같군.”

중년인의 눈은 크고 작은 배들이 가득 찬 가운데 화물을 싣고 내리는 사람들로 바쁘게 움직이는 선착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확실히 오랜 전쟁의 여파로 피폐해진 명나라와 달리 조선의 첫인상은 뜨겁고 활력이 넘쳐 보였다.

“그래 봤자 변방의 소국일 뿐이지요. 어디 대명 제국과 비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조선의 성장을 인정하기 싫은지 젊은 사내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중년인은 조금 복잡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 말이 맞네.”

그때 경장 갑옷을 입은 무관 한 명이 가까이 다가왔다.

“대인,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알겠네.”

중년인은 바로 명나라 황제인 주율건의 지시를 받고 칙사로 조선을 찾은 예부좌랑 천태정이었다.

제물포에 도착한 칙사 일행은 외무차관 이척의 마중을 받으며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한 뒤 곧장 한양으로 향했다.

제물포에서 한양까지 넓고 잘 포장된 가도가 깔려 있어서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데 큰 불편이 없었지만, 외무대신이 아닌 차관이 나온 것에 대해 칙사 일행은 시종일관 불만을 가득 표시했다.

예전 같았으면 칙사 일행의 심기를 맞추기 위해 조선 관리들이 노심초사하며 눈치를 봤을 터였다.

하지만 이제 제국을 선포함으로써 동등한 관계가 됐고 먼저 기선을 제압하려는 생각에 이척을 비롯한 조선 관리들은 칙사 일행이 화가 났든 말든 일부러 더 신경 쓰지 않고 길을 재촉했다.

무시에 가까운 조선 측의 태도에 당연히 칙사 일행은 크게 반발했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아니꼬우면 돌아가라는 반응에 칙사 일행은 분통이 터졌으나, 그렇다고 그냥 귀국을 했다가는 황제의 불벼락이 떨어질 것이기에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따라갔다.

한양에 있는 객관에 도착해서도 예전과 다른 대우가 계속됐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열렸던 연회는 단 한 번도 개최되지 않았고 칙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뻔질나게 드나들던 대신들의 모습 또한 싹 사라졌다.

그나마 한양에 도착한 첫날 외무대신 박노가 이척과 함께 얼굴을 내민 이후로는 누구 하나 찾는 사람 없이 그냥 방치되다시피 했다.

그렇다고 바깥출입이 자유로운 것도 아니었는데, 근위군단 소속 백인대가 객관을 둘러싼 채 외출을 막았다.

칙사 일행을 보호한다는 명목이었지만 누가 봐도 이건 감금을 하는 것이었다.

부글부글 속을 끓이며 예정된 접견 날짜를 기다리던 천태정은 한양에 도착한지 이레가 지나서야 대궐로 들어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명나라 사신 일행이 도착했사옵니다.”

“들라 하라.”

대전 문이 열리자 명나라 관복을 차려입은 천태정이 수행원 두 명과 함께 잔뜩 굳은 얼굴로 걸어 들어왔다.

좌우로 늘어선 대신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자 순간 위축될 만도 했지만, 오히려 그는 더욱 콧대를 높인 채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도현이 앉아 있는 단을 두세 걸음 앞두고 멈춰 서서는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상당히 무례한 행동에 대신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가운데 황좌 바로 밑에 있던 총리대신 임경업이 나무라듯 말했다.

“명국 사신은 폐하께 예를 갖추시오!”

함께 온 역관이 귓속말로 통역을 하자 천태정은 임경업을 마주 노려보며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폐하라니! 감히 제후국인 조선이 황상을 상징하는 존칭을 쓰다니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작정을 했는지 상대가 처음부터 강하게 도발을 해 오자 임경업도 지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무어라! 이런 무례한 작자가 있나. 아국이 건원칭제를 하고 제국을 선포했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형편이 조금 안 좋아졌다고 신의를 저버리고 황제 폐하를 능멸하는 행동을 하다니, 그동안 명이 돌봐 준 은혜도 모르고 어찌 이럴 수가 있소이까!”

대전에 모여 있던 대신들은 모욕적인 언사에 얼굴을 붉히며 천태정을 노려봤다.

“저, 저자가!”

“무엄하오!”

쏟아지는 질타에도 불구하고 천태정은 턱을 치켜든 채 앞에 있는 도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당장 건원칭제를 취소하고, 조선 왕께서는 황제 폐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야 될 것입니다!”

“그 입 닥치지 못할까!”

참다못한 임경업이 삿대질을 하며 소리치고는 도현을 향해 몸을 돌려 말했다.

“폐하, 더 들을 것도 없사옵니다. 저 무례한 작자들을 대전에서 쫓아내시옵소서.”

“그러시옵소서.”

분위기가 좋지 않을 건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대놓고 조선을 깔아뭉개는 칙사의 언행에 대신들은 크게 흥분했다.

그런데 가장 화를 많이 내야 할 도현은 어찌 된 일인지 너무나도 담담하게 천태정이 하는 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다 했나?”

“…….”

“하고 싶은 말을 다 지껄였냐고?”

의아한 시선을 보내던 천태정은 이내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천태정이 발끈해서 말을 내뱉자 도현은 손바닥으로 앉아 있던 황좌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며 호통을 내질렀다.

탕!

“말이 지나치다? 그럼 한 나라의 지존인 짐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라고 떠들어 대는 사신의 언행은 예법에 맞는 건가!”

“그건…….”

“아까부터 아국이 못 할 일을 한 것처럼 자꾸 매도하는데, 고토를 회복하고 나라의 힘을 키워 제국을 선포한 게 뭐가 그리 문제인가! 정작 자신들의 안방인 북경성을 빼앗은 청나라한테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면서도 아국에는 이리도 패악질을 부리니 이거야말로 비겁한 행동이 아니겠나.”

신랄한 비판에 칙사 일행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고 좌우에 있던 대신들은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제후국이라 아국을 격하시키는데, 조선은 엄연한 자주국이자 수천 년 전에 이미 만주 벌판을 질타하고 태왕을 모신 제국의 후예들이다. 그런 대고구려를 이어받은 우리 조선이 어찌하여 제국을 선포할 자격이 없다 하는가! 명나라야말로 북경과 화북 지역을 모두 잃고 강남으로 밀려나 곤궁한 처지가 되었으니 이제 황제국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있는 것이 아닌가.”

조선의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상대가 가장 아파하는 곳을 건드리자 천태정은 발끈했다.

“지금 황제 폐하와 우리 명나라를 모욕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도현은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천태정을 쳐다보면서 싸늘히 말했다.

“모욕은 그쪽이 먼저 했을 텐데. 이왕 이렇게 됐으니 여기서 짐의 뜻을 확실히 밝히도록 하지. 아국을 동등한 황제국으로 인정하고 달라진 주변 환경을 받아들인다면 오랜 동맹 관계가 계속 유지되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고 방금처럼 패악질을 부리고 억지를 부릴 때는 그 뒷감당은 모두 명나라가 해야 될 것이다.”

“지금 협박을 하시는 겁니까!”

천태정이 정색을 하자 도현은 살기를 피워 올리며 말했다.

“협박이 아니라 경고다.”

“이익.”

치욕감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면서도 천태정은 어깨를 짓누르는 도현의 강한 기운에 함부로 덤벼들지 못했다.

“그리고 그대는 명나라 황제 앞에서도 지금처럼 함부로 말을 하는가.”

천태정의 눈이 부릅떠지며 번뜩였다.

반발심이 가득한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도현이 말을 이었다.

“이번 한 번은 봐주지만 또다시 무례한 행동을 한다면 그 땐 용서치 않을 게야.”

도현이라면 천태정의 뒤에 있는 명나라의 위신이나 외교적 파장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담담히 사형 명령을 내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대신들이 기겁하는 와중에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혼자 고고하게 내뱉을 풍경이 절로 머릿속에 연상됐다.

천태정은 드높은 자존심을 사정없이 꺾어 버리는 도현에게 뭐라고 따끔하게 한마디 해 주고 싶었으나, 그의 눈길을 마주하면 마치 맹수 앞에 선 짐승처럼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도현은 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황좌 등받이에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천태정을 아래로 내려다봤다.

“이만하면 서로 할 이야기는 다 한 것 같군.”

그러곤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려 친위대장인 신철에게 명령했다.

“친위대장.”

“하명하십시오, 폐하.”

“사신들을 객관으로 데려가게.”

“옛.”

머리를 숙여 대답한 친위대장이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원들에게 눈짓했다.

그 즉시 허리에 검을 찬 친위대원들이 칙사 일행을 감싸듯이 옆으로 다가서자, 천태정은 깊은 모멸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오늘 일을 반드시 후회하실 겁니다.”

사뭇 위협적인 말투에도 불구하고 도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갑게 그를 일별했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친위대원들의 재촉하는 몸짓에 어쩔 수 없이 수행원과 함께 몸을 돌린 천태정이 대전을 떠나자, 그 뒤로 대신들의 혀를 차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저런…….”

“제대로 예법도 배우지 못한 자를 칙사라고 보내다니, 명나라도 이제 다된 것 같군.”

“나중에 명나라한테 정식으로 항의서를 보내야 되지 않겠소이까?”

그렇게 칙사 일행을 비난하는 소리로 대전이 시끄러운 가운데, 외무대신 박노가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도현을 봤다.

“무례한 명나라 사신을 따끔히 혼내 줘서 속은 시원합니다만 이대로 보내도 정말 괜찮겠사옵니까?”

박노의 말에 도현 대신 맞은편에 서 있던 국방대신 이시영이 심드렁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화를 내 봤자 멀리 강남으로 밀려난 자들이 뭘 할 수 있겠소.”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지 않소이까. 언제 청나라와 전쟁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우방인 명나라하고 관계가 악화된다면 어부지리를 얻을 곳이 어디겠소?”

답답하다는 듯이 박노가 말을 쏟아 내자 이시영뿐만 아니라 대전에 모여 있던 다른 대신들도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얼굴을 굳히며 술렁였다.

“으음.”

“그것참…….”

“허락을 하신다면 신이 나중에 객관을 찾아가 서로 오해를 풀고 동맹을 공고히 할 수 있도록 잘 설득해 보겠사옵니다.”

나름 고심해서 한 이야기였지만 도현은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이 뭘 우려하는지 모르는 바가 아니나, 그럴 필요 없네.”

“하오나 폐하…….”

“명나라가 바뀐 정세를 인정하고 서로 동등한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될 일이야.”

“그렇지만 시기가 나쁘지 않사옵니까?”

어떻게든 좋게 풀어 보려고 박노가 그를 설득하려 해도 도현의 생각은 확고했다.

“이것저것 따지고 눈치를 본다면 어떻게 제국으로 만천하에 당당히 우뚝 설 수 있겠나! 지금 약한 모습을 보이면 건원칭제는 빛 좋은 개살구로 전락하고 영원히 명나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야.”

진지한 얼굴로 질책하듯 하는 이야기에 대신들은 숙연해졌다.

그러면서 이미 벗어났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명나라의 눈치를 본 스스로가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신들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송구하옵니다.”

“앞에서는 큰소리를 치지만 오랜 전쟁으로 지치고 쇠약해진 명나라이기에 아무런 보복을 가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건원칭제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

잠시 말을 멈추고 좌중을 둘러본 도현은 이내 외무대신 박노에게 시선을 주며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외무대신은 사신들에게 조선이 예전의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확실히 알게 해 주고, 관계가 틀어지면 명나라한테도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주지시키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도현의 지시에 따라 외무대신 박노는 칙사 일행을 강경한 태도로 대했다.

당연히 칙사 일행은 크게 반발하며 항의와 협박을 계속했지만 들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괜히 혼자 발악을 하는 꼴이었다.

그렇게 아무런 성과 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던 어느 날, 객관에 머무는 칙사 일행에게 뜻밖의 연락이 왔다.

“조선군 열병식에 참석하라는 초대장이 왔다고?”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어 신경이 날카로워진 천태정이 눈꼬리를 살짝 치켜 올리며 묻자 수행원인 백중국이 얼른 대답했다.

“예, 얼마 전에 조선 관리가 와서 건네주고 갔습니다.”

그러면서 초대장이 들어 있는 비단 봉투를 탁자 위에 올려놨다.

힐끗 쳐다본 천태정은 작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보나 마나 군사들을 보여 주고 은근슬쩍 날 압박하려는 꼼수인 모양인데 그냥 거절해.”

“대인,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 볼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이번 기회에 청과 싸워 두 차례나 승리를 거둔 조선군의 전력을 살펴보고, 조선 국왕도 열병식에 참석한다고 하니 지난번에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겠습니까.”

“흐음.”

팔짱을 낀 채 잠시 고심하던 천태정은 시선을 들어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백중국을 봤다.

“조선 국왕이 오는 게 확실해?”

“초대장을 준 조선 관리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좋아. 계속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객관에 죽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한번 가 보도록 하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반색을 하는 백중국을 보며, 천태정은 이번에 도현을 만나면 조선이 건원칭제를 한 것에 대해 제대로 담판을 짓고 말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며칠 뒤 열병식이 거행되는 날이 됐다.

소문을 듣고 한양은 물론이고 멀리 떨어진 제물포와 수원에서도 백성들이 구경을 하려고 구름처럼 몰려들어 행사가 열리기로 되어 있는 마포나루 옆 백사장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그러자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은 상인들이, 구경 온 사람들이 이것저것 주전부리를 먹으며 구경할 수 있도록 재빨리 좌판을 깔았다.

“자, 둘이 먹다가 하나가 없어져도 모를 만큼 맛있는 찹쌀떡이오!”

“엿이오! 달달한 호박엿이 왔어요.”

그렇게 북적이는 인파 사이로 칙사 일행이 탄 마차가 감시 겸 호위로 붙여진 조선군 기병들에 둘러싸인 채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마차 창문에 달린 천을 살짝 젖히고 바깥을 내다보던 천태정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살짝 눈가를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아주 잔치를 벌였군.”

“이야기를 들으니 왜국과 유구왕국琉球王國의 사신들도 참석한다고 합니다.”

“그놈들은 뭐 얻어먹을 것이 있다고 아직 귀국하지 않고 여기에 남아 있는 거야?”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면서 박쥐처럼 양다리를 걸치는 두 나라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는 천태정의 눈치를 보며 백중국이 알고 있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게…… 조선 국왕에게 책봉서를 받아 가기 위해 기다리는 중이라고 합니다.”

“책봉서라니! 이자들이 정녕 우리 명나라를 어찌 보고!”

“진정하십시오, 대인.”

“내가 지금 가만히 있게 생겼나! 책봉서는 황상만이 제후국에 내릴 수 있는 칙서勅書가 아닌가!”

책봉서를 하사받는다는 건 아무리 자주권을 가진다고 해도 공식적으로 해당 국가에 예속되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었기에 천태정은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선을 둘러싼 주변 국가인 왜와 유구왕국이 책봉서를 받고 조공을 하게 된다면 제국으로서 위상이 확고해지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명나라는 화북 지역을 잃은 것에 이어서 기존 패권국의 지위마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무너지는 것이었다.

“저들의 행태가 괘씸하지만 일단 지금 중요한 건 조선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조선 문제부터 해결하고 나머지는 그 뒤에 손봐 줘도 늦지 않을 겁니다.”

“자네 말이 맞네.”

애써 화를 가라앉힌 천태정은 본국으로 돌아가면, 명나라를 배신하고 약삭빠르게 조선에 붙은 왜와 유구왕국을 징치해 오늘 일을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과연 천태정의 생각대로 될지는 미지수였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말 투레질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췄다.

이히히힝.

“대인, 도착했습니다.”

마차 문을 열고 땅에 내린 천태정의 눈에 제일 먼저 주위가 잘 보이도록 목재로 높이 세운 귀빈석이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관복을 입은 새파랗게 젊은 조선 관리가 다가와 까딱 고개를 숙이며 칙사 일행을 맞이했다.

자신이 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외무차관도 아니고 아무리 봐도 당하관堂下官(조의 때 당상의 교의에 앉을 수 없는 하급 관리)으로밖에 안 보이는 이를 마중 내보낸 것에 천태정은 얼굴을 살짝 구겼다.

“행사 시간이 다 됐으니 어서 절 따라오시지요.”

자기 말만 하고 조선 관리가 앞장서서 걸어가자 천태정은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애써 참고 발걸음을 뗐다.

귀빈석으로 올라가자 조정 대신들이 벌써 도착해 자리에 앉아 있는 가운데 왜국과 유구왕국에서 온 사신들의 모습이 보였다.

화기애애하게 조정 대신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양국 사신들은 칙사 일행이 나타나자 괜히 헛기침을 하며 은근슬쩍 시선을 피했다.

“흠흠.”

“어험.”

그걸 보고 콧방귀를 뀐 천태정은 대놓고 불쾌한 표시를 내며 수행원들과 비어 있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흥.”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한쪽에서 대기하던 병사들이 뿔 나팔을 입에 대고 길게 불었다.

부우우웅! 부우우웅!

그러자 말을 탄 도현이 친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났다.

“폐하시다!”

도현의 등장에 주위를 빽빽이 채우고 있던 백성들은 흙바닥에 몸을 엎드리면서 예를 갖췄다.

병사들이 인파를 막아서서 만들어 놓은 길을 천천히 가로지른 도현이 말에서 내려 귀빈석으로 올라오자, 먼저 와 있던 조정 대신들이 허리를 깊숙이 숙여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시옵소서, 폐하.”

신하들과 가볍게 눈을 마주치며 걸어가던 도현은 귀빈석 한쪽에 있던 칙사 일행을 봤으면서도 별다른 말을 걸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갔다.

명백한 무시에 천태정은 주먹을 꽉 말아 쥐며 도현을 노려봤다.

그러러나 말거나 가운데 놓여 있는 황좌 앞에 선 도현은 신하들과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는 인파를 스윽 둘러보고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열병식을 거행하라!”

시작을 알리는 뿔 나팔 소리가 행사장 가득 울려 퍼지자 백사장 왼쪽 편에서 수십 개의 깃발을 든 기수단이 열을 맞춰 나타났다.

그 뒤로 기병대와 남-일식 소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줄을 지어 지나갔다.

열을 칼같이 맞추고 수천 명이 마치 한 몸처럼 절도 있게 걸어가는 모습에, 누가 봐도 혹독한 훈련을 거친 정예 병력임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열병식을 위해 근위군단 소속 병력 일만 명이 동원됐다.

척척척.

가죽으로 만든 군화 소리를 내며 발을 맞추고 걸어가던 병사들은 귀빈석에 있는 도현을 향해 크게 군호를 외쳤다.

“충!”

우렁찬 목소리가 넓은 백사장에 쩌렁쩌렁 울리자 구경을 하던 백성들은 조선군의 늠름한 모습에 감격해 박수와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짝짝짝.

“멋있다!”

“우와아아!”

자리에서 일어나 행진 모습을 바라보던 도현도 얼굴 가득 흡족한 미소를 지었고, 대소 신료들 역시 자부심 어린 표정이었다.

함께 관람을 하던 왜와 유구왕국 사신들은 감탄과 부러움이 뒤섞인 시선으로 조선군을 쳐다봤고, 칙사 일행도 놀랍도록 잘 훈련되고 절도 있는 모습에 표정이 굳었다.

“으음.”

천태정이 낮게 침음성을 흘리자 옆에 있던 백중국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대단하군요.”

“흥, 보나 마나 며칠 전부터 줄을 맞춰 걷는 연습만 밤낮으로 시켰겠지.”

“그, 그렇겠지요.”

애써 조선군의 흠집을 찾아내려는 천태정의 눈치를 보면서 백중국은 어색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계속해서 조선군의 핵심 전력인 포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각종 구경의 화포 수십 문과 광역 타격 수단인 신기전이 포가에 실려 지나가는 광경은 앞서 본 병사들하고는 또 다른 위압감을 줬다.

특히 이미 한 번 조선군의 무시무시한 화력에 뜨거운 맛을 본 적이 있는 왜국 사신들은 눈을 반짝 빛내며 큰 관심을 보였다.

천태정도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장비와 훈련이 부족한 명군과 비교해 확연히 차이가 나는 조선군을 보고 속으로 놀랐다.

‘청나라 팔기군을 두 번이나 패퇴시켰다고 하더니 운이 좋았던 것이 아니었어.’

군에 대해 지식이 많지 않은 천태정이었지만 조선군이 보통 강군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어쩌면 조선의 건원칭제를 막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귀빈석에 있는 천태정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 가는 가운데서도 사열 행렬은 끝없이 이어졌고, 병사들은 도현의 앞을 지나갈 때마다 상체를 돌려 오른쪽 주먹을 가슴에 대며 군례를 취했다.

절도와 박력이 넘치는 모습에 천태정은 자신도 모르게 이빨 사이로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끄으응.”

한참 동안 이어진 행진이 끝나고 조선군 병사들이 넓은 백사장을 빽빽하게 메운 채 귀빈석 앞에 오와 열을 맞춰 늘어섰다.

그러자 갑옷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근위군단장 박영식이 말을 타고 앞으로 나왔다.

“부대 차렷!”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며 소리치는 박영식의 구령에 일만 명이 넘는 병사들이 마치 한 몸처럼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부동자세를 취했다.

처척.

고삐를 당겨 말 머리를 귀빈석 쪽으로 향하게 한 박영식은 앞에 서 있는 도현을 바라보며 다시 명령을 내렸다.

“황제 폐하께 군례!”

“추-웅!”

수많은 병사들이 일제히 군례를 취하는 모습은 엄청난 장관이었다.

도현도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는 듯한 벅찬 감동을 느꼈다.

“바로.”

병사들이 자세를 바로 하며 서자 옆에 있던 임경업이 도현에게 나직이 이야기를 했다.

“병사들에게 치하의 말씀을 해 주시지요.”

그러자 도현은 도열해 있는 병사들을 스윽 둘러보고는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있어 짐의 마음이 든든하도다. 그 어떤 군대라도 용맹한 조선군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대조선의 앞길에 영광이 있으라!”

짧지만 강렬한 치하에 병사들은 물론이고 주위에서 구경하던 백성들까지 목이 터져라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 황제 폐하 만세!”

“대조선 제국 만세!”

“황제 폐하께 영광을!”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뜨거운 환호성에 도현은 절로 어깨가 펴지면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반면 귀빈석 한쪽에 자리한 칙사 일행은 자신들이 있는데도 대놓고 황제국만이 쓸 수 있는 만세를 외치는 모습에 표정이 경직됐다.

서서히 환호성이 가라앉자 계속해서 다음 행사가 진행됐다.

귀빈석 앞 백사장이 신속하게 비워지더니 이천 명의 기병대가 나와 동군과 서군으로 나눠 가상 전투를 벌였다.

두두두두.

“이랴!”

“합합!”

뿌연 먼지를 피워 올리며 백사장을 질주한 기병들이 서로 교차했다가 반전을 반복하면서 뛰어난 기마술을 선보이자 여기저기서 감탄성이 쏟아졌다.

“와아!”

“저거 봐. 고삐를 놓고 말을 타고 있어.”

“대단한데.”

말을 빠르게 달리면서도 진영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은 최강의 기병이라는 청나라 팔기군 못지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병 하나하나가 혼연일체가 되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건 팔기군보다 더 뛰어난 것 같았다.

화약 무기가 발달하면서 존재감이 많이 흐려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전장에서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하는 것이 기병이었기에 참석자들은 관심 어린 시선으로 행사장을 바라봤다.

그렇게 역동적이었던 기병대의 시범이 끝나자 남-일식 소총을 소지한 보병 오백여 명이 대열을 맞춰 백사장 가운데로 나왔다.

“부대 전투대형으로!”

처처척.

검을 손에 든 군관의 명령에 병사들이 재빨리 방진을 구축했다.

조금도 허둥대거나 흐트러진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평소 얼마나 반복 훈련을 받아 숙달이 잘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장전!”

바로 이어진 지시에 병사들은 총알과 화약을 소총에 장전했다.

전장식 소총이라 기름종이로 만든 탄약포를 이빨로 찢어 화약과 총알을 총구에 넣은 뒤 기다란 꽂을대로 끝까지 밀어 넣어야 됐지만 병사들은 신속하게 모든 것을 끝냈다.

“조준!”

소총 개머리판을 어깨에 갖다 붙인 병사들은 한쪽 눈을 감고 가늠자로 백오십 보 정도 거리에 세워 놓은 허수아비를 겨냥했다.

“쏴!”

병사들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동시에 총구에서 시뻘건 불이 뿜어져 나왔다.

타타타탕! 타탕! 탕!

요란한 총성이 울리며 희뿌연 화약 연기가 병사들을 뒤덮었고, 이내 군관의 외침이 다시 터져 나왔다.

“재장전!”

일어선 자세 그대로 탄약포와 꽂을대를 꺼낸 병사들은 신속하게 재장전을 끝냈다.

그러고는 금방 재차 사격을 가했고, 그렇게 네 번을 반복한 뒤 허리에 차고 있던 총검을 꺼내 장착하고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돌격!”

“우와아아!”

선두에 선 군관을 따라 용감하게 돌격한 병사들은 날이 서늘하게 서 있는 총검으로 적이라 가정해 만들어 놓은 허수하비를 마구 난도질했다.

“이야압!”

“하압!”

기합을 내뱉으며 총검을 찌르고 베는 병사들의 모습은 가히 실전을 방불케 했다.

삽시간에 허수아비들을 다 쓰러뜨린 병사들은 가지고 있던 소총을 머리 위로 흔들며 함성을 질렀다.

그걸 본 도현은 만족한 얼굴로 박수를 쳤다.

짝짝짝.

“저렇게 용맹한 병사들이 돌격해 들어가면 그 어떤 적이라도 혼비백산해 도망치겠군.”

그러자 주위에 있던 대신들도 따라서 박수를 치며 얼른 맞장구를 쳤다.

“맞사옵니다.”

“신들이 보기에도 정말 대단하옵니다.”

“그동안 병사들이 얼마나 열심히 훈련을 받았는지 알겠어. 수고들 했네.”

고개를 옆으로 돌린 도현의 치하에 이시영 이하 군부 장수들은 감격한 얼굴로 상체를 숙였다.

“망극하옵니다.”

“시범이 끝났는데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저리 칼날처럼 날카로운 군기를 보이며 모여 서 있는 것을 보니 참으로 든든하오.”

도현의 말대로 소총 사격에 이어 백병전 시범까지 끝낸 병사들은 어느새 오와 열을 맞춰 서서 귀빈석을 향해 군례를 취하고는 한쪽으로 들어갔다.

잠시 취타대의 연주를 듣는 동안 백사장에 널브러져 있던 허수아비들이 모두 깨끗이 치워지고, 대신 포병대가 화포와 신기전을 끌고 나와 방열했다.

이번에는 또 어떤 멋진 모습을 보여 줄지 다들 잔뜩 기대하는 가운데 포병대 지휘관이 귀빈석 앞으로 나왔다.

“지금부터 포병대의 화력 시범을 보이겠나이다.”

“시작하라.”

“옛.”

도현을 향해 군례를 취한 지휘관은 몸을 뒤로 돌려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각 포대 방포 준비!”

“방포 준비!”

화포와 신기전 옆에 서서 대기하던 포수들은 크게 복창을 하며 일사불란하게 화약과 포탄을 장전했다.

포수들이 장전한 포탄은 그저 무거운 쇳덩어리에 불과한 구식탄이 아니라 시한신관을 부착하고 내부에 작약을 가득 채운 신형탄이었다.

사격 준비가 모두 끝나자 지휘관은 머리 위로 치켜 올린 검을 밑으로 내리며 목청껏 소리쳤다.

“발사!”

그러자 제일 구경이 작은 가자총통부터 순서대로 화포들이 굉음을 울리면서 포탄을 발사했다.

꽝! 꽝! 꽝!

공기를 찢으며 넓은 한강을 가로질러 날아간 포탄은 건너편에 만들어 둔 과녁에 정확히 명중했다.

슈우우우웅! 꽈아앙!

쿠쿵!

시뻘건 불기둥이 솟구치면서 나무로 만든 커다란 과녁이 산산조각 나는 광경에 백성들은 탄성을 터트렸다.

“우와!”

“저렇게 멀리까지 날아가다니! 족히 이백 보는 넘어 보이지?”

“위력은 어떻고? 단단한 성벽도 한 방에 무너뜨려 버릴 것 같구먼.”

“그러게.”

화포의 위력에 구경 나온 백성들이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지만, 진짜 충격적인 장면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몸을 풀듯 가볍게 한 발씩 사격을 한 포대들은 금방 재장전을 끝내고는 신호수가 흔드는 수기에 따라 일제사격을 개시했다.

퍼퍼펑! 펑! 퍼펑!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폭음을 울리며 쏘아진 포탄들이 날아가 떨어지면서 건너편 백사장에는 불기둥과 흙먼지가 수없이 일어났다.

백사장을 통째로 뒤집어엎어 버릴 것만 같은 엄청난 위력에 백성들은 물론이고 귀빈석에 있던 대소 신료들과 외국 사신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오오!”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감탄사에 흠칫 몸을 떨며, 사람들은 방금 자신의 눈으로 봤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할 광경에 전율했다.

“만약 저기에 병사들이 있었다면…….”

피와 살점으로 뒤덮여 잔혹한 풍경을 연출했을 모습을 상상하자 팔에 소름이 돋았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충격적이었지만 아직 포병대의 화력 시범은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가장 화려하면서도 치명적인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신기전 다섯 대가 장전을 모두 끝내고 발사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화포들이 위력을 과시하며 백성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것을 보고 몸이 근질근질해진 병사들은 이내 기다리던 신호가 떨어지자 지체 없이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치지지직.

“쏴!”

잠시 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백여 발이 넘는 신기전이 불을 내뿜으며 하늘 높이 솟구쳐 날아갔다.

쉬이이익. 쉭! 쉭!

순식간에 포물선을 그리며 강을 넘어간 신기전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미리 만들어 둔 과녁에 쏟아졌다.

그 모습이 마치 천신이 분노해 하늘에서 불벼락을 마구 내려치는 것처럼 보였다.

불벼락이 아니라 불 폭풍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터였는데, 과녁을 포함해 반경 이백 보에 달하는 넓은 공간이 완전히 초토화됐다.

콰콰콰쾅~~! 쿠쿵!

엄청난 폭음이 울리며 신기전이 떨어진 곳은 불바다로 변해 버렸다.

후끈한 열기가 강 건너에서 구경하고 있던 백성들한테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너무 충격적이고 놀라운 장면에 대소 신료와 귀빈석에 있던 외국 사신들은 아무런 말도 못한 채 그저 눈을 크게 부릅뜨고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까지 애써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천태정과 수행원들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이. 이건…….”

“저게 그 말로만 듣던 신기전이라는 무기인가 봅니다.”

“으음.”

저 자리에 명나라 병사들이 서 있는 것을 떠올려 본 천태정은 이내 얼굴을 구기며 침음성을 흘렸다.

그 어떤 군대라도 이런 무지막지한 공격에서 살아남는 건 불가능했다.

천리경으로 사격 모습을 빼놓지 않고 살펴본 도현은 힐끗 시선을 돌려 허망한 얼굴을 하고 있는 천태정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사실 위력은 최고지만 화약 소모량이 너무 크기 때문에 신기전의 실사격은 평소 훈련에서 거의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한두 대로만 사격을 했는데, 이번에는 칙사 일행과 열병식에 참석하는 외국 사신들한테 조선군의 힘을 보여 주라는 도현의 특별 지시에 다섯 대나 동원된 것이었다.

노림수는 정확히 들어맞아 모두들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잠시 뒤 뿌옇게 시야를 가리던 화약 연기와 흙먼지가 가라앉자 목표가 됐던 건너편 백사장의 모습이 드러났다.

신기전이 터지면서 쏟아 낸 불길에 시커멓게 탄 백사장은 그렇지 않은 곳과 확연한 차이를 보였고, 마치 거인이 주먹으로 내려친 것처럼 군데군데 커다란 구덩이가 파였다.

그리고 아직까지 다 꺼지지 않은 불길이 곳곳에서 시커먼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위력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던 백성들은 그제야 하나둘 정신을 차리고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최고다!”

“우와아아아!”

“조선군 만세!”

“만세! 만세!”

조금씩 터져 나오던 외침은 이내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바뀌어 행사장을 가득 울렸다.

조선군에 대한 자부심과 환호로 주위가 시끄러운 가운데, 천태정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신기전에 의해 초토화된 건너편 백사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조선군의 위용을 확실히 보여 준 것에 크게 만족한 도현은 참석한 병사들한테 술과 고기를 푸짐히 내려 치하하는 걸로 열병식을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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