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전
열병식 이후 진상(?)을 부리지 않고 얌전히 있던 천태정은 며칠 뒤 외무대신 박노와 만나 조선의 건원칭제를 인정하지는 못하지만 양국 관계를 형제 국가로 바꾸는 것에 합의를 하고는 쓸쓸히 남경으로 돌아갔다.
명 황제인 주율건은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에 노발대발하며 화를 냈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조선으로 기울어진 상태였기에 혼자 분통을 터트릴 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명나라와 달리 사신들을 통해 조선의 강함을 전해 들은 막부와 유구왕국은 서둘러 조공을 바치고 책봉서를 하사받으며 조선이 황제국임을 인정하고 받들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흘러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남쪽에서 따뜻한 기운이 올라오는 봄이 됐다.
광활한 중국 대륙만큼 거대함을 자랑하는 자금성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한 건물은 바로 황제가 집무를 보는 공간인 태화전이었다.
태화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황제의 권위를 상징했는데 화강암으로 만든 삼단의 기단 위에 길이 육십사 미터, 폭 삼십칠 미터, 높이 이십칠 미터의 목조건물로 지어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들게 만드는 태화전 안에서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 대전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금박을 써서 화려하게 장식된 일곱 폭짜리 병풍을 뒤로하고 황금과 보석으로 만들어진 옥좌에 앉은 도르곤은 긴장한 얼굴로 서 있는 대신들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군량 확보는 다 끝났나?”
그러자 병부상서 마충석이 상체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예, 추수와 함께 지방 군현에서 모두 삼백오십만 섬의 군량미를 징발해 당산성 창고에다가 보관 중이옵니다.”
“화약과 기타 물자들은?”
“모두 목표한 물량만큼 비축해 뒀사옵니다.”
시선을 옆으로 돌린 도르곤은 이번에는 총병관인 용골대를 보며 말했다.
“병사들의 준비 상태는 어떤가?”
“지난겨울 동안 혹독한 훈련을 거치며 언제든 싸울 준비를 갖췄고 진충군도 병력을 대폭 증강시켰습니다.”
“좋아.”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도르곤은 이내 정색을 하며 대신들을 봤다.
“이제 복수의 칼을 뽑아 들 때가 된 것 같군.”
“하면…….”
긴장한 얼굴로 용골대가 쳐다보자 도르곤은 날카롭게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출병이다! 산해관을 나가 요서와 만주를 되찾고 한양까지 단번에 진격해 들어가는 거야.”
앉아 있던 옥좌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도르곤은 치켜 든 주먹을 꽉 움켜쥐면서 강하게 소리쳤다.
“짐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조선 왕의 목을 벨 것이다!”
친정 선언에 대신들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모든 것이 폐하의 뜻대로 될 것이옵니다.”
이미 작년부터 날이 풀리면 조선으로 출병할 것임을 도르곤이 천명했었기에 대신들은 아무런 반대 없이 명령을 받아들였다.
조선과의 전쟁에 회의적이던 용골대마저 자신이 만류한다고 해서 멈출 도르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우려하는 마음을 한구석에 품으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청군의 움직임은 북경에서 암약하는 주작단 단원들을 통해 곧바로 도현한테 전달됐다.
급히 소집된 주요 대신들이 도현을 상석에 두고 좌우로 앉아 있는 가운데, 얼굴을 굳힌 이완 단장이 북경에서 들어온 소식을 보고했다.
“청 황제인 도르곤이 아국을 치기 위해 출병 명령을 내렸다고 하옵니다.”
순간 여기저기서 대신들의 탄식과 한숨이 쏟아졌다.
“결국…….”
“허어.”
“으음.”
살짝 미간을 꿈틀거리기는 했지만 도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이완 단장을 봤다.
“병력이 얼마나 동원될 것 같나?”
“현재까지 파악한 바에 따르면 팔기군 팔만과 한인 향용병 삼십칠만이 공격에 나설 것으로 보입니다.”
“도합 사십오만이라…….”
“거기에 보급품을 옮길 치중대 육만 명이 더 추가되옵니다.”
“그럼 병력만 오십만이 넘는다는 이야기요?”
외무대신 박노가 눈을 크게 뜨며 묻자 이완 단장이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런!”
예상보다 많은 숫자에 대신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는데, 현재 조선군이 서천도에 모아 둔 방어 병력이 십팔만가량이니 단순히 계산을 해도 가뿐히 두 배가 넘었다.
도현도 앞에 있는 서탁 위에 올린 주먹을 살짝 말아 쥐었다.
“그리고 청 황제가 직접 친정에 나선다고 하옵니다.”
“끄응, 도르곤이 아주 단단히 작정을 한 모양이군.”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총리대신 임경업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폐하, 청군이 이렇게 나온다면 아국도 서둘러 서천도 방어 전력을 더 보강해야 되지 않겠사옵니까?”
머리를 끄덕인 도현은 국방대신 이시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서천도로 보낼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있나?”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이시영은 약간 경직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도의 동원령을 내리지 않고 기존 병력을 움직인다면 사 개 사단 팔만 명을 더 파견할 수 있사옵니다.”
충분치 않다고 느껴지는지 도현은 살짝 미간을 모으며 말했다.
“좀 더 많이는 안 되나?”
“동원령을 내려 강제징집을 실시한다면 병력을 더 확충할 수 있겠사오나,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지원군을 보내려면 기존 군영에서 차출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사옵니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다른 지역의 방비가 약해져서 그 이상은 무리이옵니다.”
“하면 동원령을 내린다면 얼마까지 가능하겠나?”
“훈련을 시키고 보급품을 지급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리겠사오나 육 개월 안에 삼십만 명까지는 병력을 확충시킬 수 있사옵니다.”
그러자 다른 대신들이 놀란 표정으로 도현을 보며 우려를 나타냈다.
“설마 동원령을 내리시려는 것이옵니까?”
“아무리 비상 상황이라도 그건 너무 피해가 크옵니다.”
“신중하게 판단하셔야 하옵니다.”
마치 미리 입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대신들은 하나같이 반대 의견을 쏟아 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총동원령이 내려지고 징집이 실시된다면 조선 사회 전반에 큰 파급력이 미치기 때문이었다.
당장 모든 재화와 인력이 전쟁에 집중돼서 일반 백성들은 큰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물론 전황이 불리해진다면 총동원령을 내려서라도 청군을 막아 내야겠지만, 자칫 승리를 거두고도 국력을 너무 소모해 하늘 높이 비상하려는 조선의 날개가 꺾여 버릴 수도 있었기에 대신들이 우려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좌중이 시끄러워지자 도현은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짐도 아직은 동원령을 내릴 생각이 없으니 그만 진정들 하시오.”
대신들이 안도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도현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전쟁이 격화되면 상황이 어찌 변할지 모르니 경들은 언제든 모든 역량을 동원해 군부를 지원할 수 있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야 될 것이오.”
“예.”
국가가 존재해야 백성들도 있는 것이기에 전황이 악화되면 총력전을 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대신들도 잘 알고 있었다.
굳은 얼굴로 대신들이 머리를 숙이자 도현은 다시 국방대신인 이시영을 보며 말했다.
“일단 급한 대로 여유 병력을 모두 서천도로 보내 방비를 강화시키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청군이 움직이면 짐이 직접 근위군단을 이끌고 영원성으로 갈 테니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해.”
“친정을 하시려는 것이옵니까?”
총리대신 임경업이 화들짝 놀라 쳐다보자 도현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르곤이 직접 온다는데 짐도 똑같이 나가 맞이해 줘야 되지 않겠소.”
“너무 위험하옵니다.”
“이번에는 장수들에게 전쟁을 맡기시옵소서.”
위험한 전장에 나서는 것을 대신들이 자꾸만 반대를 하자 도현은 단호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청군의 침략을 짐이 직접 막아 낸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소.”
“…….”
“짐이 친정을 한다면 아군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오를 뿐만 아니라 더 이상 동원할 지방군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정예부대인 근위군단을 전장으로 보낼 수 있지 않소.”
도현이 진의를 밝히자 그제야 대신들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번 전쟁으로 오랫동안 끌어온 청과의 악연을 완전히 마무리 지을 것이오.”
도현은 결연한 태도로 대신들에게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 경들도 각오를 단단히 해 두시오.”
대신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하는 말에 모두가 일제히 고개 숙였다.
“알겠사옵니다, 폐하.”
도현은 크게 하나 되어 대전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대신들의 대답을 들으며 전의를 불태웠다.
이미 오래전부터 예상한 전쟁이었기에 조선의 대응은 차분한 가운데 아주 신속하게 진행됐다.
제일 먼저, 도현이 지시한 대로 지방 군영에서 새롭게 사 개 사단 약 팔만 명의 지원군이 차출돼 서천도로 보내졌다.
이로써 청군을 막아 낼 서천도에는 방어 병력이 이십육만 명으로 대폭 늘어났다.
아울러 화약과 여러 보급품 생산에 더욱 박차가 가해졌고 군량미 비축 또한 늘어났다.
그렇게 모인 보급품과 군량은 서천도에 위치한 각 방어 거점을 포함해 후방 보급기지 역할을 맡은 심양성에 보내졌다.
동시에 청과의 전쟁을 진두지휘할 전선 사령부가 만들어졌는데, 사령관으로는 지난 요서 공략전에서 큰 공을 세운 남두병 장군이 임명됐다.
그리고 도현이 친정을 하느라 한양을 비우는 동안 총리대신인 임경업과 국방대신 이시영이 함께 총참모부를 이끌어 후방 지원을 책임지도록 했다.
지휘부 인선이 모두 끝나자마자 남두병 사령관은 참모들을 이끌고 서천도로 달려가 휘하 병력을 장악하고 주변 상황 파악에 나섰다.
그와 함께 조정에서는 전쟁이 벌어지면 전장으로 변할 터라 서천도 주민들한테 작물 파종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가을에 많은 수확물을 거둬들일 생각을 하며 봄철 파종 준비에 여념이 없던 주민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심어 봤자 전쟁으로 제대로 농사를 짓기 어려운 데다가 청군이 약탈해 갈 위험성이 컸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 조선군이 발 빠르게 대처를 하는 사이에 청군도 태화전 앞마당에서 대대적인 출병식을 거행하고는 도르곤이 직접 대군을 지휘해서 북경성을 나와 산해관으로 향했다.
영원성에는 며칠 전부터 조정의 소개 명령에 거주하던 마을을 떠나 성안으로 들어오는 주민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조금이라도 살림살이를 더 많이 가져가려고 바리바리 챙긴 주민들은 조정에서 내준 우마차에 짐을 한가득 싣고 왔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주민들은 등에 지게를 짊어지고 머리마다 보따리를 올린 채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 전 부임해 온 남두병 사령관은 높다란 성문 망루 위에서 그런 모습을 착잡한 얼굴로 내려다봤다.
“사령관님, 여기 계셨군요.”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자 부관인 윤대흠이 가까이 다가왔다.
“자네군.”
“뭘 보고 계셨습니까?”
다시 시선을 성문 아래로 돌린 남두병 사령관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피난민들을 보고 있었네.”
“아, 예.”
“후우, 우리들이 못나서 백성들을 이리 힘들게 하다니 정말 부끄러운 일이야.”
자책 어린 남두병 사령관의 이야기에 부관은 어쩔 수 없는 일임을 강조하며 그를 위로했다.
“청나라 대군을 맞아 백성들을 안전하게 지키려는 고육지책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백성들에게 큰 피해와 고통을 준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 않겠나.”
“…….”
남두병 사령관의 말대로 조정에서 아무리 나중에 피해를 보상해 주고 전쟁 기간 동안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다고 해도, 어찌 됐건 타지살이가 편하지는 않을 테니 힘들게 한 건 사실이었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로 날 찾았나?”
용건을 떠올린 윤대흠은 얼굴을 굳히며 이야기를 했다.
“방금 주작단에서 정보를 보내왔는데 청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병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남두병 사령관은 낮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으음, 올 것이 왔군. 바로 산해관으로 향했다던가?”
“아닙니다. 보급 거점인 당산을 거쳐 나머지 병력과 합류해 움직일 것 같다고 합니다.”
한쪽 손으로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잠시 고심을 한 남두병 사령관은 진지한 어투로 읊조렸다.
“하면 늦어도 다음 달 초쯤에는 산해관에 도착해 본격적인 침공을 시작하겠군.”
“그럴 가능성이 클 겁니다.”
“이제 정말 시작이군.”
“사령관님이 계시니 청군을 틀림없이 막아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군.”
막중한 책임감에 좀처럼 굳은 얼굴을 펴지 못한 채 남두병 사령관이 말을 이었다.
“이 소식이 한양에 전해지면 폐하께서도 곧 친정에 나서시겠군.”
“이미 근위군단 본대는 한양을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래?”
처음 듣는 소식에 남두병 사령관이 조금 놀란 듯이 되묻자 윤대흠이 자세히 설명을 해 줬다.
“폐하와 함께 움직이면 이동하는 데 너무 시간이 지체되니까 먼저 배치를 해 두려는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는 나중에 기병 연대를 이끌고 오신다고 합니다.”
“하긴 군단 병력이 이동하려면 일이 보통 많은 게 아니지. 거기다가 포병대와 보급품까지 같이 옮겨야 되니 한양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못해도 보름은 걸릴 게야.”
“맞습니다.”
“아무튼 전쟁을 앞두고 정예인 근위군단이 합류한다니 다행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이 말은 진심이었는데, 대군에 맞서 서천도를 지켜 내야 되는 남두병 사령관은 단 한 명이라도 많은 병사와 대포가 너무나도 간절했다.
“청군이 움직였으니 우리도 서둘러 방어 준비를 마무리 지어야겠지. 즉시 지휘관 회의를 소집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군례를 취하며 대답한 윤대흠이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 서둘러 망루를 내려가자, 남두병 사령관은 여전히 길게 줄을 서서 성안으로 들어오는 피난 행렬과 멀리 산해관이 있는 서쪽을 바라보며 손에 든 검을 꽉 움켜쥐었다.
한편 대궐에도 청군의 출병 소식이 전해졌고 도현은 지체 없이 친정을 선언하고는 전장으로 떠날 채비를 갖췄다.
“갑옷을 갖고 오너라.”
“예!”
명령을 내린 도현은 문을 등지고 서서 칠현이 얼른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내 뒤에서 문이 스륵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인기척이 느껴지자, 도현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그대로 서서 얼른 갈아입히라는 듯 양팔을 넓게 벌렸다.
“뭐 하고 섰느냐? 하여튼 꾸물거리기는.”
여느 때처럼 타박을 주며 툴툴거리는데 코끝에 언뜻 꽃향기가 스쳤다.
설마하니 칠현이 놈이 여자들처럼 향낭 같은 것을 몸에 가지고 다닐 리도 없고, 창문이 열려 있지도 않은데 웬일인가 싶어 그제야 뒤를 돌아보니, 황후가 살포시 웃고 있는 게 보였다.
“황후?”
깜짝 놀란 도현이 눈을 크게 떴다.
“여긴 어쩐…….”
“어쩐 일로 왔냐고 묻지 마시어요. 지아비께서 먼 길을 떠나시는데 당연히 제가 찾아뵈어야지요.”
그러면서 황후는 손을 뻗어 도현의 옷을 풀려고 했다.
“황후가 직접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칠현이야 제 수족처럼 부리는 녀석이니 옷을 갈아입히게 시키든 먹을 것을 가져오라 이르든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하지만 그 뽀얀 손에 물 한 번 묻히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곱디고운 황후에게 제 수발을 들게 하려니 절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저는 여인이라 낭군님을 위해 칼을 갈지도 못하고 함께 따라갈 수도 없으니, 하다못해 옷 정도는 제가 갈아입혀 드리게 해 주시어요.”
“그래도…….”
“그것마저 못 하게 하신다면 제가 아무것도 해 드릴 게 없지 않습니까.”
사뭇 처연해 보이는 황후의 표정에 도현은 입을 다물었다.
하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뭐든지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어디 도현 혼자만의 것일까.
황후 역시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었음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자신이 어리석었다.
“그럼 부탁하겠소.”
미안함을 담아 도현이 다정스레 말하니 그제야 황후가 기쁜 얼굴로 답했다.
“맡겨만 주시어요.”
허리띠를 풀고 붉은색 용포를 벗기는 손길이 참으로 세심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칠현이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세세한 부분까지 각을 잡고 매무새를 마무리한 다음에야 아쉬운 듯 손을 떼는 황후를 향해 도현이 말했다.
“다음은 칠현이를 부르도록 하지. 황후에게는 너무 무거울 것이오.”
칼과 화살을 막아 내는 갑옷이다.
가녀린 여인의 힘으로는 들기도 버거울 것인데, 혼자서 그걸 다른 사람에게 입힌다는 건 아무리 요령이 있어도 힘든 일일 터였다.
“그렇게 하시어요.”
황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군소리 없이 순순히 물러났다.
“고맙소.”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도현의 입술이 황후의 볼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황후의 양 볼이 복사꽃처럼 화사하게 달아오르더니, 갑자기 까치발을 하곤 도현의 목을 양손으로 감싸 안았다.
“무탈히 다녀오셔요.”
수줍은 듯 속삭이는 목소리.
그리고 입술에 나비처럼 부드러운 감촉이 스쳤다.
황후가 먼저 입맞춤을 해 준 것은 처음이라, 도현이 멍하니 있으려니 어느새 황후가 손을 풀고 떨어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칠현을 불렀다.
“폐하를 잘 부탁하오.”
“예, 마마.”
갑옷을 품에 안은 채 칠현이 깊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얼른 갈아입고 나오시라며 방을 나가는 황후의 뒷모습을 도현이 눈으로 좇는데, 칠현이 앞에서 손가락을 휘휘 내저었다.
“폐하? 왜 넋을 놓고 계십니까, 폐하?”
“에이, 시끄럽다!”
도현은 칠현의 손가락을 탁 내치고는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사람이 모처럼 깊은 감동에 젖어 있는데 말이야, 하여간 배려심이라곤 코딱지만큼도 없는 녀석 같으니.”
“감동은 무슨 감동입니까. 낙엽 떨어지는 것만 봐도 눈물이 난다는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정 그렇게 감동할 게 없으면 저를 보세요! 폐하 때문에 이런저런 일 다 겪었어도 끝까지 붙어 있는 게 참으로 갸륵하지 않습니까?”
“…….”
도현이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
“…….”
“……죄송합니다.”
“알면 됐다.”
그러곤 두 사람은 묵묵히 갑옷을 갈아입는 데 집중했다.
희정당을 나서자 친위대장인 신철이 갑옷을 차려입고 기다리고 있다가 주먹을 쥔 손을 왼쪽 가슴에 대며 군례를 취했다.
“나오셨사옵니까.”
“병사들은 모두 모여 있나?”
“그러하옵니다. 친위대와 근위군단 기병대 오천 명이 폐하를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문득 시선을 들어 하늘을 봤다.
어젯밤까지 비가 내려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하늘은 물감을 뿌려 놓은 것처럼 푸르고 하얀 구름 사이로 태양이 따뜻하게 내리쬐었다.
“하늘도 우리의 출정을 도와주는 것 같군.”
“그렇사옵니다.”
“가지.”
“예.”
상념을 지운 도현은 신철 친위대장을 뒤에 두고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그대로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밖으로 나가자 넓은 공터에 갑옷을 입고 방패를 손에 든 병사 오천여 명이 날카로운 예기를 내뿜으면서 도열해 있었다.
도현이 모습을 드러내자 병사들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일제히 군례를 취했다.
“충!”
병사들이 내지른 소리는 주위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간 도현은 병사들을 천천히 둘러보고는 배에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모두들 알고 있겠지만 이제부터 우린 전장으로 간다. 지금 함께 서 있는 전우 중 누군가는 살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우린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가 적과 맞서 싸울 것이다. 사악한 승냥이 떼 같은 청군이 다시는 아국을 넘볼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조선군의 기백과 용맹함을 보여 주자!”
“와아아!”
“대조선 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도열해 있던 병사들이 각자 가지고 있던 무기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목이 터져라 함성을 내지르자 돈화문 앞 공터가 떠나갈 듯했다.
병사들의 눈에는 승리를 거두겠다는 결의가 가득했다.
주먹을 불끈 쥔 팔을 들어 올리며 병사들의 사기를 돋운 도현은 함성이 서서히 잦아들자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전군 출정하라!”
출정 명령을 내린 도현은 역시 갑옷을 갖춰 입은 칠현이 가져온 말에 올라탔다.
그 옆에 친위대장 신철과 여러 장수들이 섰고 병사들도 각자 군마에 올라 줄을 지어 전장으로 출발했다.
뿌우우웅. 뿌우우웅.
돈화문 망루 위에 선 나팔수가 뿔 나팔을 길게 부는 가운데 아침부터 거리를 가득 메운 채 기다리던 백성들이 함성과 격려로 출정하는 병사들에게 힘을 줬다.
“청나라 놈들을 다 쓸어버려!”
“무사히 돌아와!”
“까짓것 북경까지 점령해 버려!”
백성들은 전쟁터로 가는 자식이나 오빠 같은 병사들한테 미리 준비한 음식을 입에 넣어 주거나 꽃가루를 뿌리고 어깨를 두드려 주며 무사 귀환을 기원했다.
그렇게 백성들의 뜨거운 환송을 받으며 한양 도성을 나선 병사들은 어느새 전쟁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다 잊어버리고 적과 싸워 물리치겠다는 전의에 불타올랐다.
이런 가운데 당산에 도착한 청 황제 도르곤은 며칠간 휴식을 취하며 산해관을 넘기 전에 마지막으로 군대를 재정비했다.
화려한 용포 대신 갑옷을 입은 도르곤은 주요 지휘관들을 소집해 보고를 받고 있었다.
“향용군은 다 집결했나?”
용상에 앉은 도르곤의 물음에 총병관인 용골대가 머리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예, 모두 도착해 편제를 끝마쳤습니다.”
“조선군의 동향은 어떤가?”
“아군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급히 병력을 증강시키고 있다 합니다.”
“놈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우리가 간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겠지.”
“전력을 보강하는 건 물론이고 백성들까지 전부 성안으로 소개시키는 것을 보면 조선군도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심스럽게 우려를 나타내는 용골대와 달리 도르곤은 콧방귀를 뀌며 승리를 자신했다.
“흥! 그래 봤자 조선 놈들이 우릴 막을 수는 없을 거야.”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꼬리를 말고 허둥지둥 성안으로 기어들어 가는 것을 보면 아군에게 겁을 먹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대표적인 강경파인 야골타가 나서며 호기롭게 외치자 방 안에 모여 있던 다른 장수들도 크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하하하!”
“맞습니다.”
“그깟 조선 놈들쯤은 우리의 상대가 안 되지요.”
불과 몇 년 전에 심양성을 공격하다가 큰 낭패를 보고 요서 지역을 힘없이 빼앗긴 것을 잊고 조선군을 만만하게 보는 장수들의 모습에 용골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폐하, 그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첩보에 의하면 요서 지역의 성들이 하나하나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만들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도르곤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심기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봤자 성에 불과할 뿐이지.”
“하오나…….”
용골대가 절대 방심할 상대가 아님을 다시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도르곤이 귀찮은 듯 한쪽 손을 들어 막았다.
“그만! 총병관이 돼서 아군의 사기를 꺾는 말이나 늘어놓으면 어쩌자는 건가?”
“…….”
“조선군이 방비를 철저히 해 놨다고 하지만 우리도 예전에 심양성에서 치욕을 맞본 그 군대가 아니야. 화약 무기를 개량했고 공성전에 쓸 대포도 충분히 준비했어. 그리고 무엇보다 수년간 이어진 전쟁에서 단련된 병사들이 수십만이나 있는데 뭐가 두렵단 말인가!”
마지막에 가서는 질책을 하듯 옥좌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쏘아보자 용골대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용골대를 못마땅하다는 듯이 쳐다본 도르곤은 강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이틀 뒤 산해관으로 간다!”
“옛.”
“야골타 장군.”
“하교하십시오.”
이름이 불린 야골타가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자 도르곤이 말을 이었다.
“선봉에 서서 진격로를 열 수 있겠나?”
눈을 번뜩인 야골타는 지체 없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물론이옵니다.”
흡족한 표정을 지은 도르곤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춤에 차고 있던 보검을 풀어 야골타한테 내밀었다.
“이 보검으로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모조리 다 베어 버리도록 하라.”
두 손으로 보검을 건네받은 야골타는 턱을 치켜들며 의욕에 불타는 얼굴로 말했다.
“날카로운 창이 되어 길을 열겠나이다.”
“그 말을 절대 잊지 말게.”
“옛.”
일어서서 군례를 취한 야골타는 한쪽에 있는 용골대를 힐끗 돌아보고는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용골대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렇다고 화를 낼 수는 없었기에 속으로 분을 삭였다.
“이번에야말로 조선군을 격파하고 대륙의 맹주가 누구인지를 만천하에 알려 줄 것이다!”
“황제 폐하 만세!”
“청 제국 만세! 만세!”
도르곤의 선언에 좌우로 늘어서 있던 장수들이 양팔을 번쩍 치켜들고 만세를 외치며 전의를 다졌다.
이틀 뒤 도르곤이 명령한 대로 당산에 집결한 청군은 산해관을 향해 행군을 시작했다.
이번 전쟁에 참가한 청군은 육만이나 되는 치중대를 포함해 모두 오십일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엄청난 병력이 전쟁에 참가하는 만큼 행군 대열의 길이가 무려 백여 리에 걸쳐 이어졌고, 각종 보급 물자와 화포를 실은 마차 수천 대가 동원됐다.
가히 청나라의 모든 역량을 이번 전쟁에 다 쏟아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진 행군 대열만으로도 상대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친위대 일부와 근위기병 연대를 이끌고 한양을 떠나 쾌속 행군한 도현은 벌써 심양을 지나 푸른 요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숙영지를 만들고 하룻밤 머물 채비를 하고 있었다.
조선의 영토 안이었지만 지존인 도현이 있었기에 숙영지의 경비는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숙영지 한가운데 세워진 커다란 천막 안에서는 도현이 휘하 지휘관들과 앉아 차를 마시며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영원성까지는 얼마나 남았나?”
찻잔을 내려놓으며 도현이 묻자 왼편에 앉아 있던 친위대장 신철이 얼른 대답했다.
“지금 속도로 이동을 계속한다면 나흘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나흘이라…… 이제 거의 다 왔군.”
“그렇사옵니다.”
도보로 움직였다면 아직 압록강도 넘지 못했을 테지만 전원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는 덕분에 하루에 수십 리씩 이동할 수 있었다.
그때 바깥이 조금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휘장이 열리며 약간 굳은 얼굴의 군관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폐하.”
“뭔가?”
군관의 표정에 안 좋은 일이 생겼다는 것을 눈치챈 도현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방금 전선 사령부에서 연락이 왔사온데 청군 본대가 산해관에 도착했다고 하옵니다.”
“으음.”
아니나 다를까, 그다지 반갑지 않은 소식에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당산에서 좀 더 머물 거라 생각했는데 빨리 움직였군.”
“그러게 말이옵니다.”
신철 대장의 비롯한 지휘관들 역시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남두병 사령관은 어떻게 대처를 하고 있다더냐?”
그러자 군관이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며 말했다.
“상황을 보고 받는 즉시 방어군 전체에 갑호 비상령을 내리고 전투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고 하옵니다.”
“잘했군.”
재빠른 상황 대처에 도현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폐하, 청군이 서천도 권역으로 들어오기 전에 내일부터 행군 속도를 올려 서둘러 영원성에 도착해야 될 것 같사옵니다.”
“그래야겠군.”
그의 말에 동의한 도현은 곧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
“상황이 급하게 됐으니 오늘 저녁은 병사들을 일찍 재우고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하도록 하지.”
“예!”
지휘관들이 모두 고개 숙여 답했다.
도현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겼다.
다음 날 새벽 일찍 일어난 도현은 아직 지지 않고 어두운 하늘에서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을 머리 위에 두고 강을 건너 영원성이 위치한 서쪽으로 말을 달렸다.
청나라의 공격에 대비해 조선은 요서 지역을 점령한 초기부터 산해관과 마주한 지점에 성채를 쌓았다.
대군이 쳐들어와도 오랫동안 방어를 할 수 있도록 모두 세 개의 성벽으로 둘러쌌는데, 그 모습이 마치 고동이 나사 형태로 빙빙 말려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고부리성[巻貝城]이라 불렸다.
전쟁이 터지면 제일 먼저 적과 맞닥뜨리는 곳으로 이 개 사단 사만 명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갑호 비상령이 내려지고 청군 본대가 산해관에 도착했다는 소식에 긴장감이 극도로 높아진 가운데, 해가 중천에 떴을 때쯤 야골타가 이끄는 선봉대 십만 명이 고부리성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성 밖은 이미 소개 명령에 따라 깨끗이 비워지고 불에 태워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청군 선봉대가 맞닥뜨린 것은 그런 을씨년스러운 폐허였다.
최대한 빨리 진격로를 열며 요서 지역의 주도인 영원성을 함락시켜야 하는 야골타 입장에서 한눈에 봐도 공략이 쉽지 않아 보이는 고부리성을 치는 건 그리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산해관과 가깝고 영원성으로 가는 진격로 한가운데를 떡하니 막고 있었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만약 고부리성을 이대로 놔둔다면 언제 주둔군이 튀어나와 보급로를 교란시킬지 몰랐기에 원정의 성공을 위해서는 어떻게든 함락을 시켜야 했다.
조선군도 이런 고부리성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성벽을 높고 두껍게 쌓고 화망을 촘촘하게 배치해 청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청군이 삼천 보 정도 떨어진 곳에 진영을 세우고 있는 것을 성주인 이관이 성문 망루 위에 올라와 굳은 얼굴로 지켜봤다.
주작단 단장인 이완의 친동생으로 지금까지 조선이 벌인 모든 전쟁에 빠지지 않고 참전해 크고 작은 공을 무수히 세운 이관은 종이품 부총관이 되어 고부리성 성주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됐다.
벌써 몇 시진째 적진을 살피던 이관은 낮게 침음성을 흘리며 눈에 대고 있던 천리경을 내렸다.
“화포 숫자가 상당히 많군.”
그러자 옆에 있던 부관이 굳은 얼굴로 말을 받았다.
“청군이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온 것 같습니다.”
“그래.”
진채를 세우면서 청군은 아주 보란 듯이 성문 앞에 포대를 방열시켰다.
단단한 성벽을 깨고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당연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청군이 보유한 화포의 숫자였다.
대충 헤아려 봐도 오십여 문은 넘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아무리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진 고부리성이라고 해도 견뎌 낼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기존 청나라 화포와 모양이 상당히 다른 것이 아무래도 전부 홍이포紅夷砲인 것 같습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네.”
예상이 맞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홍이포는 기존에 명과 청이 사용하던 호준포虎蹲砲에 비해 사거리와 위력이 월등히 차이가 나는 화포로, 조선군의 주력인 개량형 천자총통과 비교해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최근 주작단을 통해 입수한 첩보에 의하면 무거운 쇳덩어리에 불과한 통상탄뿐만 아니라 내부에 작약을 넣어 폭발시켜 파편을 만들어 내는 유산탄을 함께 사용하는 걸로 알려졌다.
이게 사실이라면 방어를 해야 되는 조선군 입장에서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적이 막강한 전력을 가지고 나타났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힘없이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목숨을 걸고 청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임을 떠올린 이관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입을 열었다.
“진채를 다 세우면 바로 파상공세를 가해 올 테니 다들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이르게. 우리 모두가 이곳에서 뼈를 묻더라도 성을 지켜 내야만 해.”
그러자 부관도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다음 날 이관이 예상한 대로 청군은 해가 뜨자마자 홍이포를 쏘며 성을 공략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동아시아의 패권을 결정지을 역사적인 전쟁의 막이 올랐다.
청군이 고부리성을 공격한다는 소식은 파발을 통해 바로 영원성에 전해졌다.
남두병 사령관은 보고를 받는 즉시 비상 회의를 소집했고 때마침 하루에 여덟 시진씩 강행군을 해서 전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도현도 여기에 참석했다.
참석자들이 모두 착석하자 남두병 사령관이 참모 중 한 명에게 눈짓을 했다.
“고부리성에서 알려 온 청군 선봉대의 규모를 보고드리겠습니다. 병력은 십만가량에, 지휘관은 맹장으로 이름이 높은 야골타라고 합니다.”
“야골타라…….”
심양 관저 시절부터 도르곤 못지않게 악연을 맺어 온 이의 이름이 나오자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찡그렸다.
“그 포악한 자가 또다시 나선 모양이옵니다.”
“비록 적장이기는 해도 멧돼지처럼 앞으로 돌진하는 추진력 하나만큼은 인정할 만하니 선봉장에 제격이지. 아마 그래서 도르곤이 그자를 내세웠을 게야”
청나라가 자랑하는 용장으로 조선군 장수들도 익히 상대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다들 살짝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봤자 단단히 구축해 놓은 아군 방어선을 뚫어내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박영식 근위군단장의 이야기에 전선 사령관인 남두병 장군이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렇게 자신할 상황이 아닌 것 같소이다.”
“무슨 말인가?”
도현이 쳐다보자 남두병은 고부리성에서 보내온 보고 중 일부를 이야기했다.
“청군이 무려 오십여 문이 넘는 홍이포를 가져왔다고 하옵니다.”
“지금 홍이포라고 했나?”
“그렇사옵니다.”
“이런.”
대번에 도현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방 안에 있던 지휘관들도 크게 술렁였다.
공성전에서 화포의 존재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고부리성이 청군의 공세를 견뎌 낼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가 주작단의 첩보에 의하면 청군이 이번 전쟁에 동원한 홍이포의 수가 최소 백오십여 문이라고 합니다.”
“허어…….”
“이거 청나라가 아주 작정을 하고 덤벼드는 것 같군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지휘관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무리 성벽을 세 겹이나 두르고 단단히 쌓았다고 해도 그 많은 화포들이 집중 포격을 해 댄다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 자명했다.
미간을 모은 채 잠시 뭔가를 고심하던 도현은 남두병 사령관을 보며 입을 열었다.
“곧 도르곤이 이끄는 본대도 고부리성에 당도하겠지.”
“그럴 것이옵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
순간 무슨 뜻인지 몰라 의아한 시선을 보내던 남두병 사령관은 이내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이관 성주가 쉽게 손을 들지는 않겠사오나 청군의 전력을 고려한다면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확실히 홍이포 백오십 문은 고부리성에 있는 아군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벅찼기에 도현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우리도 서둘러 움직여야겠군.”
“그래서 별동대를 바로 출격시킬까 하옵니다.”
그러자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근위군단장 박영식이 우려스러운 얼굴로 남두병 사령관을 쳐다봤다.
“이제 전쟁 초기인데 벌써부터 별동대를 투입하는 건 너무 성급한 것 아닙니까?”
“이렇게 패를 까 보이면 나중에 정말 필요할 때 쓸 수단이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산해관이 바로 뒤에 있어 청군의 보급선이 그리 길지도 않은데, 별동대를 운용한다고 효과가 있겠습니까?”
병참 책임자인 윤찬의 장군의 말에 상당수 지휘관이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승마에 능한 거란 출신 기병들로 별동대를 꾸린 애초 목적이 치고 빠지는 방법으로 병참선을 흔들어 청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부리성은 산해관에서 반나절 거리밖에 안 되는 바로 지척에 위치했기에 윤찬의 장군 말대로 별동대가 병참선을 공격해 봤자 효과가 그리 크지 않았다.
오히려 청군의 반격에 노출될 위험이 더 컸다.
이런 것을 남두병 사령관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지만 지금으로써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고부리성을 이대로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않소.”
“으음.”
“끄으응.”
저마다 탄식과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런 와중에 몸을 살짝 앞으로 돌린 남두병 사령관이 도현을 향해 말했다.
“당초 계획과는 조금 어긋나겠지만, 지금 별동대를 움직이지 않는다면 자칫 더 큰 패착으로 이어질지도 모르옵니다.”
이야기를 듣던 도현은 고심하는 표정을 짓더니 지휘관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초반부터 기세를 빼앗긴다면 다시 주도권을 쥐기가 어려울 테니 어쩔 수 없지. 별동대를 내보내도록 하게.”
“옛.”
“고부리성에 가해지는 압력을 조금은 줄일 수 있겠지만 청군 본대가 본격적으로 나서면 그것도 힘들 텐데, 거기에 대한 대책은 있나?”
진지하게 도현이 묻자 남두병 사령관은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송구하오나 워낙 병력 차이가 많이 나는 상황이라 성 밖에서 적과 회전을 벌일 수 없으니, 지금으로써는 이관 성주와 병사들이 끝까지 버텨 주기를 기대하는 것 외에는 딱히 다른 방법이 없사옵니다.”
그토록 염원하던 고토를 회복하고 제국까지 선포했는데, 또다시 나라에 힘이 부족해 병사들의 피와 희생을 요구해야 된다는 것에 도현은 참담함을 느꼈다.
회의실에 모여 있던 지휘관들 역시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면서 분위기가 아주 무겁게 가라앉았다.
도현이 병사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었기에 남두병 사령관도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얼마간 침묵이 이어진 끝에 도현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가슴이 아픈 일이지만 아무런 희생 없는 승리는 없겠지.”
중얼거리듯 이야기를 하던 도현은 이내 눈을 매섭게 번득이면서 말했다.
“고부리성 병사들이 흘린 피를 적에게 백 배 천 배로 되갚아 줘야 될 것이야. 모두 알겠는가!”
“옛, 폐하.”
한편 고부리성에서는 청군과 조선군 간의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씨이이잉. 콰콰꽝!
“크악!”
포탄에 명중된 성벽 한쪽이 터져 나가면서 병사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는 모습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쳐다보며 이관이 소리쳤다.
“엎드려! 성가퀴 뒤로 최대한 몸을 밀착시키란 말이다.”
“옛.”
그사이에도 청군이 날려 보낸 포탄이 쉬지 않고 성벽 주위에 떨어져 폭발했다.
가만히 버티고 있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혹독한 훈련을 거친 조선군 병사들은 소총을 움켜잡은 채 침착한 얼굴로 성가퀴 뒤에 기대어 적진을 노려봤다.
그걸 본 이관은 당황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고 있는 부하들이 참으로 장하고 자랑스러웠다.
“힘들지만 다들 이를 악물고 버텨라!”
이런 가운데 조선군 포대들도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사격을 하며 청군의 공격에 필사적으로 맞대응했다.
“쏴!”
꽈아앙!
반동에 육중한 화포가 들썩이며 매캐한 화약 연기를 내뱉자 좌우에 서 있던 포수들이 재빨리 달라붙어 포가 바퀴를 뒤로 밀었다.
“영차!”
“더 힘을 써!”
사력을 다해 화포를 포문에서 뺀 포수들은 지체 없이 나무통에 든 화약을 포구에 쏟아붓고는 밀대로 꾹꾹 눌러 다진 뒤 포탄을 들고 와 장전했다.
그러고는 다시 원래대로 화포를 다시 포문에 밀어 넣고 목표를 조준했다.
“조준 끝.”
“발사!”
군관의 외침에 포술장이 화포와 연결된 줄을 있는 힘껏 당기자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큰 굉음을 울리며 포가 발사됐다.
사방이 단단한 벽으로 둘러싸인 포대 안에서 포수들은 일련의 동작을 반복하며 화포를 계속 쏴 댔다.
이틀째 이어진 격렬한 포격전에 청군 대포들도 상당수 파괴됐지만 조선군도 성벽 여기저기가 허물어지고 포대 몇 곳이 박살 나는 피해를 입었다.
“이제 병사들을 돌격시켜도 되지 않겠습니까?”
심복 장수인 달소의 말에 자욱한 포연에 휩싸여 있는 고부리성을 바라보던 야골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조선군 대포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지만, 곧 황제 폐하께서 오실 텐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 공격을 하도록 하지. 부관.”
“예, 장군.”
“일각(15분) 뒤에 공격을 개시할 테니까 보병들을 준비시키도록 해!”
“알겠습니다.”
군례를 취하며 대답한 부관은 대기하고 있던 전령을 불러 예하 부대로 명령을 전달하도록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쉬지 않고 계속되던 청군의 포격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갑작스러운 침묵에 포수들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쯤, 뒤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군관이 크게 소리쳤다.
“사격 중지! 사격 중지!”
목청이 떨어져 나가라 외쳐 대는 목소리에 포수들은 각자 손을 멈추고 귓속에 말아 넣었던 솜뭉치를 빼냈다.
“왜 멈추라는 거야?”
“저놈들, 대체 무슨 꿍꿍인지 원…….”
귓속에 남아 있는 솜뭉치 가닥 때문에 간질거리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적진을 바라보았지만, 거리가 꽤 멀어서 육안으로는 별다른 변화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할까요?”
“음.”
군관은 옆에 서 있던 선임 포술장과 함께 잠깐 쑥덕거리더니 곧 지시를 내렸다.
“어쨌든 이 틈에 화약과 포탄을 보충해 놓는 게 좋겠군. 언제 적들의 포격이 재개될지 모르니 빨리 움직여!”
한숨을 돌리는 것도 잠시, 군관의 호령에 화포 좌우에 서 있던 포수들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쪽에 있는 창고를 열심히 오가며 화약통과 포탄을 가져오는 동안, 다른 몇 명은 길쭉한 솔로 포구 안에 거무스름하게 눌어붙은 찌꺼기들을 치웠다.
“콜록! 이봐, 조심해! 가루 날리잖아.”
“어허, 누구야? 방금 내 발 밟은 게.”
“자칫 잘못하면 다 골로 가는 거니까 조심들 해!”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어 양옆으로 여유 공간이 별로 없는 탓에 이런저런 군소리가 새어 나오긴 했지만, 걸걸한 입버릇과는 다르게 포신을 정비하는 손길만은 누구보다도 노련하고 세심했다.
“딴짓하지 말고!”
“예이.”
“알겠습니다, 나리.”
알아 모시겠다는 듯 웃음 섞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런 병사들을 향해 따가운 눈총을 보낸 군관은 포문 사이로 고개를 들고 굳은 눈빛으로 청군의 동태를 관찰했다.
격렬하게 이어지던 포격이 별다른 이유 없이 갑자기 중단될 때는 적군의 직접 공격이 임박한 경우밖에 없었기에, 적진을 살피는 군관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성벽 위에 있는 병사들도 술렁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뭐, 뭐지?”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던 병사들이 하나둘 성가퀴 위로 고개를 내미는 가운데 전투 경험이 많은 고참병이 표정을 잔뜩 구기며 욕설을 내뱉었다.
“제기랄!”
“왜 그러십니까?”
“곧 청군이 쳐들어올 거야.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참병을 봤다.
“예?”
“그게 무슨…….”
“적들이 포격을 왜 멈췄겠어? 이제부터 병력을 투입해 성벽을 넘겠다는 거야.”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병사들은 정색을 하며 허둥지둥 가지고 있던 소총을 성가퀴에 거치했다.
아니나 다를까, 멀리 청군 보병대가 진채 앞에 전투대형을 갖추고 모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성주님, 청군이 공격을 해 올 모양입니다.”
부관이 다급히 말하자 성문 망루에 서서 적진을 바라보고 있던 이관은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나도 보고 있네.”
그러고는 이내 주위를 둘러보며 목청껏 소리쳤다.
“전투준비! 모두 적군의 돌격에 대비해라.”
이관의 외침에 군관들이 큰 소리로 병사들을 독려했다.
“소총을 거치하고 명령이 있을 때까지 쏘지 마라!”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일어나!”
원래부터 훈련이 잘되어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행동 하나하나에 자신의 목숨이 걸려 있다는 생각에 병사들은 아주 빠르게 움직였다.
그때 누군가 찢어지는 듯한 고함을 내질렀다.
“처, 청군이 공격해 온다!”
병사들이 성가퀴 밖으로 고개를 삐죽 내밀어 쳐다보자 정말 진채 앞에 늘어서 있던 청군 보병들이 대형을 갖춰 고부리성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군.”
성주 이관은 성가퀴 한 모퉁이를 손으로 꽉 움켜쥐고는 좌우를 둘러보며 크게 소리쳤다.
“모두 자리를 확실히 지키고 적을 맞이할 준비를 해라!”
자세를 잡고 소총을 장전하고 있을 때 잠시 멈췄던 포격이 다시 재개됐다.
쉬우우우웅!
꽈아아앙!
“아악!”
“큭.”
“씨팔! 또 포탄이 날아온다.”
“몸을 숙여!”
청군의 돌입에 대비하던 병사들은 욕설을 내뱉으며 황급히 성가퀴 뒤로 몸을 숨겼다.
후두두둑.
조선군 병사들이 파편과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때 청군은 천천히 성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었다.
“앞으로!”
척척척. 척척척.
살기를 잔뜩 피워 올리며 다가오는 청군 보병대의 모습은 성에 있는 조선군에 상당한 압박이 됐다.
포탄이 날아오는 와중에도 피하지 않고 꼿꼿하게 망루에 서서 전방을 주시하던 이관은 예전과 확실히 달라진 청군을 보고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수년 동안 계속된 전쟁에 단련돼서 그런지 전술 운용에 노련미가 넘쳐났고 병사들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적이 강할수록 아군이 흘려야 되는 피가 더 많아지기에 이관 성주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렇다고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이관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부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포를 쏴서 청군의 대열을 흐트러뜨리라고 하게!”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부관은 얼른 전령을 불러 포병 지휘관에게 명령을 전달토록 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조선군 측 화포들이 적을 향해 다시 불을 뿜어 댔다.
퍼퍼퍼펑!
상대편 대포가 아닌 보병들을 상대하기 위해 신관을 적절히 조절한 포탄은 하늘 위에서 폭발해 수많은 파편을 넓은 지역에 뿌렸다.
꽈앙!
“컥.”
“꾸엑!”
비처럼 쏟아지는 파편 세례에 청군 대형 곳곳에 구멍이 생기고 비명과 함께 사상자가 속출했다.
“내 다리!”
“피가 멈추지 않아.”
“살려 줘.”
병사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가는 상황이었지만 야골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공격을 독려했다.
“병사들을 돌격시켜라! 단숨에 성벽을 넘는다.”
둥둥둥!
돌격을 지시하는 북소리가 울리자 어느새 오백 보 거리까지 접근한 청군은 함성을 내지르며 앞으로 달려갔다.
“공격!”
“우와아아아!”
아직 성까지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포격을 뒤집어쓰는 것보다 나았기에 적병들은 숨을 헐떡이며 뛰었다.
그와 동시에 오폭을 우려한 청군 대포의 사격이 다시 중단됐다.
“적이 돌격해 오고 있습니다!”
부관의 말이 아니더라도 전방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이관은 적군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다 적이 소총 유효사거리 안에 완전히 들어오자 손에 든 지휘봉을 위로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지금이다. 사격 개시!”
성벽 위로 머리를 내민 채 적을 조준하고 있던 병사들은 명령이 떨어지자 망설임 없이 소총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탕! 탕! 탕! 탕!
요란한 총성과 함께 총탄이 빗발치듯 쏟아지자 달려오던 적병들이 피를 뿌리며 우수수 쓰러졌다.
“끄악!”
“으윽.”
“적이 성벽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계속 쏴라!”
군관의 독려를 들으면서 병사들은 기계적으로 장전과 사격을 반복했다.
날카로운 총성이 계속해서 울렸고 삽시간에 성벽 위는 소총을 쏘며 나온 화약 연기로 하얗게 뒤덮였다.
격렬한 사격에 적병들은 허둥거리며 바닥에 엎드리거나 돌격을 멈추고 주춤거렸다.
그걸 본 야골타는 혀를 차며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쯧, 멍청한 것들!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공격하라고 해!”
“옛.”
둥둥둥! 둥둥둥!
전투를 독려하는 북소리에 하급 군관들이 주춤거리는 병사들을 다그쳤다.
“뛰어가!”
“빨리 성벽에 붙어라.”
당황해서 허둥대던 병사들은 검을 흔들며 고함을 질러 대는 군관을 돌아보고는 다시 성을 향해 달려갔다.
독전대가 살기 띤 얼굴로 노려보고 있어 어차피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기에 이대로 개죽음을 당하기보다 앞으로 돌격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멈추지 말고 정확히 조준해서 적을 쏴라!”
망루 위에 선 이관은 적이 쏜 총탄과 화살이 빗발치는 위험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상체를 다 드러낸 채 고함을 내지르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거기에 힘을 얻은 조선군 병사들은 적이 바로 코앞까지 육박해 오는데도 겁을 먹거나 주춤거리지 않고 소총을 쐈다.
“이거나 먹어라!”
타아앙! 탕!
“크허억.”
성벽을 향해 뛰어오던 적병 한 명이 크게 휘청거리면서 그대로 땅바닥에 고꾸라지자 총을 쏜 병사는 상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소총을 바로 세우고는 서둘러 재장전을 했다.
개미 떼처럼 적이 몰려오고 있어 다른 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로 정신없이 사격과 재장전을 반복했다.
처음 돌격에 나선 보병대의 절반이 죽거나 다치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으면서도 청군은 악착같이 덤벼들었고, 마침내 성벽 바로 아래까지 도착했다.
“올라가!”
“으차!”
생지옥을 겪으며 악에 받친 청군들은 힘들게 가져온 공성용 사다리를 성벽에 걸치거나 갈고리가 달린 밧줄을 위로 집어 던졌다.
“막아라!”
“성벽을 올라오게 해서는 안 된다!”
병사들이 성가퀴 밖으로 몸을 내밀며 성벽을 타고 올라오려는 적을 쏴서 떨어뜨렸지만 청군의 공격은 시간이 갈수록 더 거세졌다.
아주 끝장을 보려는지, 기선을 잡았다고 판단한 야골타는 병력을 계속해서 추가로 밀어 넣으며 파상공세를 펼쳤다.
타탕! 탕! 탕!
피슝!
“이크.”
성벽에 바짝 붙은 적들이 총을 쏘고 화살을 날릴 때마다 조선군 병사들은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리고는 성가퀴 뒤에서 사격을 가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언제 적들이 성벽을 올라와 아군과 백병전을 벌일지 몰랐다.
“빌어먹을!”
성가퀴를 주먹으로 내려치며 이관이 얼굴을 구기자 부관이 다급히 말했다.
“성주님,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성벽이 위험합니다.”
“으음.”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고심하던 이관은 이내 정색을 하며 소리쳤다.
“황자총통을 쏴서 적을 쓸어버려라!”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부관은 얼마나 다급한지 뒤에 있는 병사를 시키지 않고 자신이 직접 수기手旗를 집어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자 산탄을 장전한 채 대기하고 있던 포수들이 포가 위에 올린 화포를 있는 힘껏 앞으로 밀었다.
“으차!”
“밀어.”
성벽 끝까지 화포를 끌고 간 포수들은 미리 준비해 둔 버팀목을 뒤에 받쳐 포신을 아래로 향하게 했다.
“더 낮게 조준해!”
“이런 망할! 힘 안 쓰고 뭘 하는 거야.”
아무리 조선군이 보유한 화포 중에 두 번째로 작은 소구경이라고 해도 통짜 황동으로 만들어져서 무게가 만만하지 않았기에, 좌우로 선 포수들은 있는 대로 인상을 쓰며 포신을 들어 올렸다.
덜컹.
버팀목을 단단히 고정시키고 포신을 위가 아닌 성벽 아래를 보게 만든 포수들은 군관의 구령에 맞춰 격발기와 연결된 줄을 잡아당겼다.
“쏴!”
퍼퍼펑! 꽈꽝! 꽝!
마치 폭죽이 터지는 듯한 폭음이 울리며 작고 동그란 쇳덩이 수십 개가 부챗살처럼 앞으로 퍼지며 쏟아졌다.
후두두둑.
그렇게 뿌려진 산탄은 공성용 사다리와 밧줄을 붙잡고 성벽을 기어 올라오던 적들을 덮치고 밑에 있는 이들까지 모두 쓸어버렸다.
뿌옇게 주위를 뒤덮은 화약 연기가 바람에 날려 흩어지고 드러난 모습은 끔찍한 지옥도를 방불케 했다.
그나마 시신을 온전히 보존한 이들은 운이 좋은 축에 들었고, 대부분이 네댓 개씩 쇠구슬에 몸이 뚫려 너덜너덜해지거나 팔다리가 하나씩 날아가고 없었다.
어떤 적병은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 나가 누군지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기도 했다.
너무나도 처참한 광경이었는데 성벽을 공략하기 위해서 좁은 지역에 많은 인원이 가득 몰려 있다 보니 피해가 더 컸다.
단 한 번의 산탄 사격에 무려 천여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며, 거세게 밀어붙이던 청군의 기세가 꺾여 버렸다.
“저, 저……!”
말을 탄 채 전투를 지켜보던 야골타와 청군 지휘부는 뜻밖의 사태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제 조금만 더 두들기면 성이 함락될 거라 낙관하고 있었는데 완전히 뒤통수를 얻어맞은 격이었다.
무시무시한 산탄이 휩쓸고 지나간 청군 선두 대열은 그대로 피떡이 되어 박살 났고, 뒤따르던 청군 병사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 자리에 멈춰 서거나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걸 본 야골타는 얼굴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리고는 잔뜩 화가 난 어투로 말했다.
“후퇴시켜.”
그러자 달소를 비롯해 주위에 있던 장수들이 놀란 눈으로 그를 보며 이의를 제기했다.
“후퇴라니요. 너무 성급하신 결정 아닙니까?”
“맞습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큰 타격을 입기는 했지만 아직 승기는 아군한테 있습니다. 이럴 때 더 밀어붙여야 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장수들이 주위로 다가와 시끄럽게 떠들어 대자 야골타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버럭 호통을 쳤다.
“모두 조용!”
“…….”
“성을 함락시키고 싶은 마음은 그 누구보다 내가 더 간절할 걸세. 하나 이미 기세가 꺾여 버렸는데 공격을 계속해 봤자 피해만 늘어날 뿐이야.”
“이렇게 포기하기에는 기회가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장수 중 한 명이 쉽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야기를 하자 야골타는 힐끗 성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성벽 위에서 산탄을 쏴 대는 저 소포들을 제거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거야.”
맹장猛將으로 불리는 야골타였지만 나이가 먹고 연륜이 쌓이면서 멈춰야 할 때를 알게 됐는데,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단호한 태도에 장수도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당장 퇴각 신호를 보내고 포병대에 일러 저 소포들을 모조리 다 박살 내 버리라고 해.”
“알겠습니다.”
잠시 뒤 퇴각을 지시하는 징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면서 깃발이 적진에서 휘날렸다.
“퇴각 신호다!”
그사이 조선군의 산탄 공격이 두세 차례 이어지면서 또다시 무더기로 동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봐야 했던 청군 병사들은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이제 살았어.”
그러고는 포성과 함께 쏟아지는 산탄 공격을 피해 너도나도 뒤로 몸을 돌려 후퇴하기 시작했다.
개미 떼가 흩어지듯 사방으로 퍼지며 물러나는 그 모습이 장관이었으나, 앞부분에 있던 병사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오자 급격한 혼란이 빚어졌다.
“악!”
“젠장, 저리 비켜!”
“미, 밀지 마.”
일순간 발이 꼬여 한 병사가 주저앉는 순간, 욕설과 함께 인정사정없는 발길질이 그 등을 짓밟았다.
다들 제 목숨을 보전하느라 바쁜 와중에 다른 사람이 어떤지 챙길 여유 따윈 없었다.
그건 마치 무리에서 떨어진 약한 짐승을 배척하는 것과도 같았는데, 병사들은 이를 악물고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거칠게 치고 나갔다.
그런 적병들의 등 뒤로 황자총통과 조선군의 소총이 불을 뿜어 댔다.
꽈앙! 타타탕! 탕! 탕!
“적이 후퇴하고 있습니다.”
부관의 들뜬 목소리에 이관은 무수히 많은 시신을 남겨 둔 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청군을 보며 작게 숨을 내뱉었다.
“그렇군.”
성을 지켜 낸 건 다행이었지만 전투는 이제부터 시작이었기에 마음껏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우려했던 것과 달리 거셌던 적군의 공세를 흔들리지 않고 잘 막아 낸 부하들이 실로 자랑스럽고 든든했다.
주위를 둘러본 이관은 초번부터 격렬했던 전투에 지친 기색이 완연한 병사들의 모습에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오늘은 더 이상 전투가 없을 것 같으니 부상병들을 치료소로 보내고 포격에 부서진 곳을 보강하도록 해.”
“예.”
“그리고 전투를 치르느라 허기가 졌을 테니까 밥도 든든히 먹이고 잠시 쉴 수 있도록 해 주게.”
“그리하겠습니다.”
지시를 내리고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린 이관은 멀리 있는 적진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쉽지는 않겠지만 내 목을 걸고 여길 끝까지 사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