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부리성 (98/104)

고부리성

밤낮으로 전투가 계속 이어졌지만 고부리성은 함락되지 않고 망루 위에 조선군 깃발을 꿋꿋하게 휘날렸다.

“잘 버텨 주고 있군.”

그러자 남두병 사령관이 상석에 앉아 있는 도현을 보며 말을 받았다.

“그러게 말이옵니다. 파상공세를 막아 내기가 쉽지 않을 텐데 정말 잘해 주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이대로 고립된 채 싸우다 보면 결국 한계에 부딪치게 되겠지.”

정색을 한 도현은 회의실에 모인 지휘관들을 천천히 둘러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별동대는 언제 움직인다 하던가?”

“오늘내일 안에 습격을 가할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사옵니다.”

“목표는 물론 적이 보유한 대포들이겠지.”

“그렇습니다.”

“적진 한복판에 들어가 대포를 부숴야 하는데 잘해 낼 수 있을지 모르겠군.”

도현의 우려에 남두병 사령관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흑치영 장군이 직접 갔으니 틀림없이 좋은 결과를 알려 올 겁니다.”

“하긴 흑치영 장군이라면 믿을 수 있지.”

뛰어난 맹장이자 측근인 흑치영에 대해 신뢰를 보인 도현은 상체를 들어 의자 등받이에 몸을 살짝 기대면서 이야기를 이었다.

“청군 본대의 동태는 어떤가?”

“주작단의 정보에 의하면 조만간 산해관을 나올 것 같다 하옵니다.”

“도르곤이 직접 움직이는 건가?”

표정을 굳힌 남두병 사령관이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예.”

“그 성격에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것이 더 이상했지.”

실제로 도르곤은 선봉대가 고부리성에 막혀 진격을 하지 못하자 몇 번이나 자신이 직접 나서려고 했지만 휘하 장수들의 만류에 애써 화를 참아 왔다.

“청군 본대가 합류하면 고부리성에 대한 압박이 더 커지겠지.”

도현의 말에 남두병 사령관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고부리성을 함락시켜야지만 진격로가 열릴 테니,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옵니다.”

“후우,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곤경에 처한 아군을 돕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니 정말 답답하군.”

“신도 같은 심정이옵니다만 그렇다고 고부리성을 구하기 위해 다른 지역을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사옵니까.”

“짐도 알고 있네. 그저 홀로 대군에 맞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고부리성 병사들이 안타까워 한 말이야.”

도현뿐만 아니라 회의실에 모여 있는 지휘관들 모두 똑같은 심정이었기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 나라의 지존답게 다시 평정심을 되찾은 그는 자세를 바로 하며 진지한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별동대에 일러 최대한 고부리성을 지원하라 하고 청군이 우회를 해서 다른 성을 공격할 경우를 대비토록 하게.”

“옛.”

“그리고 반격 준비는 어찌 진행되고 있나?”

반격 이야기가 나오자 침울해 있던 지휘관들의 눈이 번뜩이면서 매섭게 빛났다.

“대련 지역 중산에 공격군이 집결을 모두 끝마치고 폐하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대답을 하는 남두병 사령관의 목소리에도 힘이 넘쳤다.

“청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보안을 철저히 하고 있겠지?”

“집결지 주위를 높은 목책으로 완전히 둘러싸고 인근 오십 리 안에 있는 모든 주민들의 이동을 막아 통제하고 있사옵니다.”

“잘했어.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킬 희심의 패이니 절대 노출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될 것이야.”

“염려 마시옵소서.”

대답을 들으며 도현은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지도에서 청군 본대를 뚫어질 듯 노려봤다.

한편 흑치영이 이끄는 별동대 삼만 명은 영원성을 떠나 한창 치열한 공성전이 계속되고 있는 고부리성 근처에 와 있었다.

별동대는 신속한 기동을 위해 대부분이 거란 출신인 기병으로 이루어졌다.

해가 하늘 한가운데 걸릴 때쯤 고부리성에서 육십 리 떨어진 곳에 도착해 행군을 멈춘 별동대는 휴식을 취하며 전장 상황을 살폈다.

“청군 선봉대가 사방을 완전히 둘러싼 채 성을 공략 중이었습니다. 수효는 대략 팔구만 정도로 보였습니다.”

“주작단의 첩보에 의하면, 야골타군의 병력이 십만이 아니었나?”

갑옷을 입은 흑치영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쳐다보며 묻자 보고를 하던 장수가 얼른 보충 설명을 했다.

“전투 중에 죽거나 심하게 다친 숫자가 그만큼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

이해가 된다는 듯이 흑치영은 머리를 끄덕였다.

아울러 이레도 안 돼서 무려 만여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할 만큼 전투가 치열하다는 뜻이었기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성에 있는 아군 상황은 어떤 것 같나?”

“아직까지는 잘 버티고 있습니다만 청군의 포격에 피해가 상당한 것 같았습니다.”

“청군 포대가 어디에 배치되어 있지?”

그러자 장수는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지도에서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깁니다. 다른 곳에도 있습니다만 고부리성 서문 앞에 제일 많은 서른 문의 홍이포가 위치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진채 안으로 옮기지 않고 밤에도 계속해서 여기에 놔두는 건가?”

“예. 잘 아시겠지만 무거워서 이동하는 것이 쉽지 않고, 철수했다가 다시 방열하는 게 보통 손이 많이 가는 일이 아니기에 그냥 고정한 채 쓰고 있었습니다.”

“경비 병력은 얼마나 되지?”

“포대 주위에 한 개 천인대가 경비를 서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백 보 뒤에 진채가 있어서 공격을 받으면 금방 지원 병력이 나와 합류할 것이기에 일이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팔짱을 낀 채 이야기를 들은 흑치영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도 해내야만 되는 일이야.”

잠시 작전 지도를 내려다보던 흑치영은 고개를 들어 천막에 모여 있는 휘하 장수들을 둘러보며 명령을 내렸다.

“성에 있는 아군이 하루하루 피를 흘리며 악전고투하고 있는데 공격이 쉽지 않다고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어. 오늘 밤 자정에 계획대로 적진을 습격할 테니 만반의 준비를 해 두도록 해.”

흑치영의 말에 장수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옛.”

“알겠습니다, 장군.”

새로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보다 세밀한 습격 계획을 세운 흑치영과 장수들은 아직 해가 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대비해 천막을 치고 병사들을 재웠다.

그리고 밤이 되자 미리 준비해 놓은 주먹밥과 건량으로 배를 채웠는데, 긴장을 풀고 전투 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해 소주를 한 잔씩 마시게 했다.

“크으.”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화끈한 열기에 소주를 마신 병사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뱉으며 입맛을 다셨다.

“역시 이 맛이야. 한 잔 더 주시면 안 됩니까?”

그러자 가죽 주머니를 들고 부하들한테 소주를 나눠 주던 군관이 눈가를 찡그리며 말했다.

“취하라고 주는 게 아니야.”

“괜히 감질만 나니까 그렇지요. 제 주량 아시지 않습니까.”

병사가 어떻게든 한 잔 더 얻어 마셔 보려고 야양을 떨었지만 군관은 단호하게 잘랐다.

“안 돼.”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한 잔씩밖에 안 돌렸는데 네놈이 뭐라고 특혜를 주나? 게다가 이제부터 싸우러 나갈 건데 취하면 어찌할 거야. 적군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발이 풀려서 혼자 고꾸라져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참아 봐.”

서슬 퍼런 핀잔에 괜히 나섰다가 본전도 못 찾아 먹은 병사가 뒷목을 긁적였다.

“쩝, 알겠습니다.”

아쉬워서 입맛만 다시는데 그 모양이 심히 처량해 보였는지 군관이 눈가를 살짝 누그러뜨렸다.

“대신 전쟁이 끝나고 무사히 돌아가면 내가 과붓집에서 거나하게 한잔 사도록 하지.”

“정말이십니까? 약속하신 겁니다!”

“내가 언제 빈말하는 거 본 적 있나?”

그러자 곁에서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던 다른 병사들이 헤헤거리며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당연히 저희들도 사 주시는 거겠죠?”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하시면 안 됩니다! 요 두 귀로 똑똑히 들었으니 나중에 발뺌하실 생각일랑 하지도 마십시오.”

덩치 큰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애교를 피우는 모습에 군관은 진저리가 난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알았다, 알았어! 나 참, 무서워서 말도 함부로 못 꺼내겠군.”

군관의 입에서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겉으로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는 한편으로 봉급을 탈탈 털어서 술을 사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부하들이 한 명도 죽거나 다치는 일 없이 모두 무사히 돌아갔으면 하고 바랐다.

야습 준비를 모두 마친 별동대는 모두가 곤히 잠에 빠진 자정이 되자 숙영지를 출발해 고부리성으로 향했다.

마침 달이 가장 어두운 그믐이라 야습에 나선 별동대의 움직임을 가려 줬다.

말발굽 소리도 줄이기 위해 모든 말에 털로 만든 덧신을 신겼고 얼굴은 물론이고 가지고 있는 병장기를 검은 숯으로 칠했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적진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발각되지 않았다.

물론 중간에 청군 순찰대를 몇 번 마주치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상대가 경보를 발령하기 전에 신속하게 처리해 버렸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별들만 보석처럼 반짝이는 가운데, 병사들처럼 얼굴을 숯으로 검게 칠한 흑치영이 눈을 번뜩이며 전방에 위치한 적진을 노려봤다.

“저기군.”

“아직 우리가 온 것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입니다.”

말을 타고 옆에 선 부관의 이야기에 흑치영은 하얀 이빨을 살짝 드러내며 웃었다.

“후후후, 설마하니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야습을 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는 거겠지.”

“우리한테는 잘된 것 아닙니까?”

“맞아.”

고개를 끄덕인 흑치영은 슬쩍 시선을 뒤로 돌려 공격대형을 갖춘 채 조용히 늘어서 있는 기병들을 보고는 말했다.

“방심한 대가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 주자고. 머뭇거릴 것 없이 바로 공격을 개시하도록 해.”

“옛.”

잠시 뒤 신호가 울리자 삼만 명의 별동대는 일제히 땅을 박차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삐이이익.

“돌격!”

“이랴!”

두두두두두.

아무리 덧신을 신겼지만 삼만 기의 기병이 돌격해 들어가며 내는 말발굽 소리를 지울 수는 없었다.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해 어설프게 만들어 둔 목책 뒤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청군 병사는 갑자기 땅이 울리는 소리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글쎄.”

어쩐지 불길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손에 쥔 창을 꽉 움켜쥘 때, 어둠을 뚫고 엄청난 숫자의 기병이 몰려오는 것을 본 병사들은 기겁을 했다.

“헉!”

“저, 저건…….”

“조선군이야!”

비명 같은 청군 병사의 외침과 함께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땡땡땡땡!

그리고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별동대가 쏜 불화살이 어두운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으며 높이 날아올랐다.

화약 무기에 밀려 이제는 많이 퇴색된 활이었지만 그래도 파괴력과 치명성은 여전했기에 조선군 기병대의 필수 무장 중 하나로 운용됐다.

마치 하늘에서 수많은 유성우가 내리는 것처럼 아름답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온 불화살은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청군 병사들에게 치명적인 이빨을 드러냈다.

슈슈슉. 슉.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내며 떨어진 불화살 비는 적들의 몸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크억!”

“으윽.”

“어서 피해!”

뒤늦게 적들이 허둥거렸지만 광범위하게 쏟아지는 불화살을 다 피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운 좋게 목숨을 건진 자들은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더 무시무시한 사신과 맞닥뜨려야 했다.

“단번에 다 쓸어버린다. 가자!”

선두에 서서 외치는 흑치영의 말에 기병들은 더욱 박차를 가하며 군마를 몰아갔다.

“히익.”

“기병이 온다!”

“도망쳐!”

목책이 있었지만 애초에 대충 건성으로 만들어 허술한 데다가 높이마저 낮았기에 별동대는 말을 탄 채 가볍게 뛰어넘었다.

그렇게 포대 안으로 난입한 별동대는 내부를 마구 휘젓고 다니며 적병을 주살했다.

탕! 탕!

“커헉.”

“끄윽.”

창을 내밀며 저항하려던 적들은 기병들이 쏜 권총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겁에 질려 도망치는 적을 뒤쫓아 간 기병들은 가차 없이 검을 내려쳤다.

서걱.

“아악!”

사방에서 검 빛이 난무했고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기선을 제압당하고 숫자마저 적은 경비 병력은 속수무책으로 뒤로 밀렸다.

들리는 건 청군 병사들이 살려 달라고 외치는 고함과 비명뿐이었다.

“하압!”

츄악.

언월도를 휘둘러 제법 지위가 있어 보이는 청군 군관을 양단해 버린 흑치영은 양 떼 속에 뛰어든 늑대처럼 신나게 상대를 몰아붙이는 부하들을 둘러보며 크게 소리쳤다.

“화포부터 박살 내라!”

야습을 벌이기 전에 미리 지시를 받은 것이 있던 기병들은 적을 공격하는 한편 일부가 대열을 빠져나와 약간씩 거리를 두고 방열되어 있는 홍이포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으차!”

기병들은 화약을 잔뜩 넣은 가죽 주머니를 포신에 꾸역꾸역 집어넣고는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치지지직.

도화선은 순식간에 타들어 갔고 이내 커다란 폭음이 울리며 포신이 깨졌다.

꽈앙!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포신이 두 동강 나 버린 홍이포는 완전히 녹여 새로 주조를 하지 않는 이상 다시 사용할 수가 없었다.

“대, 대포가……!”

“조선군을 막아!”

대포를 부수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란 적들이 별동대를 막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기병들이 휘둘러 대는 검에 목숨을 잃거나 허겁지겁 뒤로 물러나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별동대가 신나게 홍이포를 부수고 있을 때 청군 본진의 진채 문이 열리며 황급히 지원 병력이 몰려 나왔다.

“장군, 저길 보십시오!”

꽤 험한 싸움을 벌였는지 입고 있는 갑옷 여기저기에 피를 묻힌 부관의 말에, 고개를 돌려 청군 지원 병력을 본 흑치영은 미련 없이 퇴각 명령을 내렸다.

“대포는 다 부쉈나?”

“예.”

“그럼 더 있을 이유가 없지. 다들 물러나라고 해!”

삐이익. 삐이익.

호각 소리가 울리자 청군을 주살하며 전과를 올리고 있던 별동대 기병들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말 머리를 돌렸다.

“퇴각! 퇴각하라.”

짧은 시간 동안 포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별동대는 썰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순식간에 전장에서 이탈했다.

그러자 지원 병력을 이끌고 나온 청군 장수 달소는 분기탱천한 목소리로 고함을 내질렀다.

“놈들을 잡아라!”

달소가 지휘하는 청군 기병대가 말을 달려 달아나는 별동대를 추격했고 보병 오천 명도 뒤를 따랐다.

전투를 치러 추격해 오는 청군보다 지쳐 있었지만, 거란족이 대부분인 별동대는 초원에서 나고 자란 유목민족답게 뒤쫓아 오는 청군 기병대를 여유 있게 따돌리며 후퇴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청군 기병대를 따돌릴 수 있었지만, 별동대는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대를 적진에서 멀리 끌어냈다.

잡힐 듯하면서도 계속 달아나는 별동대를 보며 조바심이 났지만 적장인 달소를 더 화나게 만드는 건 바로, 상대가 말을 탄 채 몸을 뒤로 돌려 화살을 쏴 대는 것이었다.

도망치는 와중에도 별동대 병사들이 수시로 날려 대는 화살에 벌써 백이 넘어가는 부하가 비명을 내지르며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반격을 하고 싶었지만 정예 팔기군이 아니라 한인 향용인 기병들은 조선군만큼 기마술이 뛰어나지 못했기에 달려가며 화살을 쏘는 재주가 없었다.

짧은 파공음과 함께 또다시 기병 대여섯 명이 쓰러지는 것을 본 달소는 이를 악물며 부하들을 다그쳤다.

“속도를 더 높여! 놈들을 어서 따라잡으란 말이다.”

“이랴!”

달소의 독려에 청군 기병들은 연신 채찍질을 가하며 말을 달렸지만 별동대와 거리는 좀처럼 좁아지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추격에 나선 청군 기병대와 보병 간에 간격이 더 벌어졌다.

“헉헉.”

“빨리 뛰어라!”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뛰어가던 청군 보병들은 지휘관의 말에 숨을 헐떡이며 불평을 늘어놨다.

“젠장, 말을 탄 놈들을 우리보고 어떻게 쫓아가라는 거야.”

“그러게.”

이미 조선군은 물론이고 청군 기병대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지만 멈추라는 명령이 없었기에 보병들은 어두운 밤길을 무턱대고 달려가야 했다.

그런 보병들은 조용히 숨어 지켜보는 눈들이 있었다.

“왔습니다.”

거란 출신 조선군 장수인 홍종수는 부하의 말에 눈을 반짝이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매복지로 들어오는 청군을 쳐다봤다.

“좋아. 적들이 완전히 들어오면 그때 친다.”

“예.”

홍종수의 지시에 길게 자란 풀숲에 은신해 있던 별동대 병사들은 활을 재고 전방을 주시했다.

허리에 권총도 차고 있었지만 활이 더 정확한데다가 사정거리도 길었기에 타격 무기로 선택했다.

달빛이 거의 없어 시야가 그리 좋지 않은 가운데 어둠을 헤치고 달려오는 청군 보병대의 모습이 보였다.

거친 숨소리가 매복해 있는 곳까지 들리는 것이 앞서 간 기병대를 따라가느라 많이 지친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침내 상대가 매복지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자 홍종수는 검을 치켜들며 거침없이 명령을 내렸다.

“쏴라!”

그러자 좌우에 있던 별동대 병사들이 일제히 몸을 드러내며 화살을 날렸다.

슈슈슉! 슉! 슉!

별동대가 쏜 화살은 조선의 비밀 병기라 불리는 편전片箭이었다.

일반 화살에 비해 길이는 짧지만 훨씬 더 치명적인 편전은 아무것도 모른 채 사지로 들어온 적에게 끔찍한 지옥을 선사했다.

첫 화살을 날린 별동대 병사들이 재빨리 두 번째 화살을 전통에서 꺼내 재는 사이에 적들의 비명성이 울렸다.

“크악!”

“커컥.”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적병들이 무더기로 쓰러지며 큰 혼란에 빠졌다.

“매복이다!”

허둥지둥 가지고 있던 방패를 들어 화살을 막으려고 했지만 관통력이 뛰어난 편전은 그대로 뚫고 들어가 적병의 목숨을 빼앗았다.

투욱.

“억.”

가뜩이나 크기가 작아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편전인데 달빛까지 거의 없는 밤이라 적들은 더욱 대처를 하기 어려웠다.

거기다가 살상력은 또 얼마나 좋은지, 갑옷과 방패로 튕겨 내거나 막기도 어렵고 살짝 비껴 맞아도 모조리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순식간에 반수 가까이가 죽거나 치명상을 입었고, 또다시 섬뜩한 파공음을 울리며 편전 세례가 청군 보병들을 덮쳤다.

후두두둑.

이렇게 청군 보병대가 매복에 당해 전멸 위기에 몰려 있을 때 앞서 달려간 기병대도 별동대의 반격에 직면했다.

적진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지자 흑치영은 부하들을 줄지어 세우고는 말 머리를 돌려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적이 따라붙었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전과를 올릴 수 있게 된 것에 희심의 미소를 지으며 아무것도 모른 채 달려오는 적을 쳐다봤다.

흑치영은 언월도를 안장 옆에 걸고 활을 꺼내 편전을 재며 소리쳤다.

“준비!”

드드득.

근육이 불끈 튀어나올 정도로 시위를 팽팽하게 당긴 흑치영은 제일 앞에 서서 달려오는 적장을 겨냥한 뒤 편전을 쐈다.

“쏴!”

명령과 동시에 길게 늘어서 있던 별동대 병사들이 편전을 날렸다.

슈슈슉. 슈슉! 슉!

야습을 당한 복수를 하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돌격해 오던 청군 기병대는 하늘을 까맣게 덮으며 날아오는 편전 세례에 대형이 그대로 무너졌다.

화살 비에 기병들은 우수수 말에서 굴러떨어졌고, 지휘관인 달소마저 어깨에 편전이 날아와 박혔다.

“큭.”

다행히 급소를 피해 낙마를 하지는 않았지만 달소는 힘없이 말 머리 위로 고꾸라졌고, 옆에서 따라오던 부관이 화들짝 놀라 고삐를 잡고 말을 세웠다.

“장군!”

“으으…….”

“괜찮으십니까?”

부축을 받아 겨우 상체를 바로 한 달소는 깊숙이 박힌 편전을 보고는 얼굴을 구겼다.

“빌어먹을.”

“부상이 심하십니다.”

“상관없어.”

거칠게 말을 내뱉은 달소는 직접 깃털이 달린 부분을 부러뜨린 뒤 편전을 뽑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일반 화살보다 훨씬 길이가 짧은 데다 화살촉이 더 날카로운 편전은 어깨 깊숙이 박혀 좀처럼 빼낼 수가 없었다.

오히려 화살촉이 근육과 살을 헤집으면서 부상 부위가 더 벌어졌다.

그사이 연속된 편전 세례에 청군 기병대의 전열이 크게 흐트러지자 흑치영은 활을 집어넣은 뒤 언월도를 빼 들며 소리쳤다.

“돌격! 적을 싹 다 쓸어버려라.”

“우와아아!”

함성을 내지르며 흑치영을 따라 별동대 병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땅을 박차면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양측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고 편전 세례에 주춤하며 멈춰 서 있던 청군 기병대는 무섭게 덮쳐 오는 별동대를 보고는 기겁했다.

“이, 이런.”

두두두두두.

거친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돌격해 들어간 별동대는 날카롭게 청군 기병대 사이를 파고들며 검을 휘둘렀다.

“하압!”

서걱.

“끄억.”

이히히힝.

채챙! 챙! 챙!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적들이 내뱉는 비명과 피가 전장 가득 뿌려졌다.

“이놈들! 내 언월도 맛을 봐라!”

부우웅.

흑치영이 무거운 언월도를 크게 휘두르자 앞을 가로막고 있던 청군 기병의 목이 잘려 날아갔다.

“끄륵.”

깨끗이 잘려진 목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고 숨이 끊어진 청군 기병은 차가운 흙바닥에 쓰러졌다.

벌써 여섯 명째 적병을 죽인 흑치영은 아직 부족한지 언월도를 치켜들며 다음 상대를 찾아 말을 몰았다.

“다 죽여 주마!”

이렇게 전장 곳곳에서 벌어지는 난전에 수많은 목숨들이 사라졌는데, 대부분이 청군 기병들이었다.

청군 지휘관인 달소는 부하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모습에 얼굴을 구긴 채 침음성을 흘렸다.

“이럴 수가.”

청군 기병들도 나름 분전을 펼쳤지만 별동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벌써 반수 가까이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나머지도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아니, 그 전에 전열의 붕괴가 더 빨랐는데, 전의를 상실한 청군은 아무런 명령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말 머리를 돌려 도주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우리가 완전히 당했습니다.”

“크윽…….”

상대가 파 놓은 함정에 빠졌다는 치욕감에 달소가 몸을 부들부들 떠는 가운데 부관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시지요.”

어느새 바로 근처까지 육박해 들어온 조선군의 모습에 달소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네.”

“본진으로 돌아간다. 장군님을 보호해라!”

“옛.”

어깨 부상을 당한 달소는 부관과 함께 기병 스무 명의 호위를 받으면서 황급히 전장을 이탈했다.

병사들을 지휘해야 될 장수마저 도망치면서 청군 기병대의 와해는 더욱 가속화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시신만 남겨 둔 채 대부분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결론적으로 야습은 대성공이었는데, 서른 문 이상의 홍이포를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추격에 나선 청군을 매복에 빠뜨려 수천 명의 사상자를 만들어 냈다.

뒤늦게 야골타가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나타났을 때는 이미 별동대가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지고 난 후였다.

날이 밝고 드러난 청군 포대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엉망으로 난도질당한 시신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가운데 포신이 박살 난 홍이포들이 시커먼 연기를 피워 올렸다.

막판에 직접 추격에 나섰지만 별동대를 잡는 데 실패한 야골타는 잔뜩 굳은 얼굴로 지휘 천막에 앉아 있었다.

“피해 상황을 보고해 봐.”

야골타의 말에 장수 한 명이 주춤주춤 눈치를 보며 일어나 입을 열었다.

“옛. 전사 육천팔백에 중상 오백육십 명 그리고 경상이 천 명가량입니다. 그중 삼천 명이 기병들이고 홍이포도 서른한 문이 파괴돼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이야기를 들은 야골타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단 한 번의 야습에 만 명이나 되는 병사를 잃었단 말이야! 거기다가 홍이포까지 서른한 문이 박살 나다니, 도대체 경계를 어떻게 한 건가!”

“면목이 없습니다.”

예상치 못한 야습과 매복에 걸려 사상자가 발생한 건 그렇다고 쳐도 공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홍이포가 서른한 문이나 파괴된 건 청군 입장에서 너무나도 뼈아픈 일이었다.

당장 공격 병력을 지원할 화력이 부족해져 성을 공략하기가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야습 피해를 수습하는 것도 있었지만 오늘 계획되어 있던 공격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계속된 전투로 지쳐 있던 고부리성의 주둔군은 전열을 재정비할 귀중한 시간을 얻게 됐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겨우 삭이고 있을 때 천막 휘장이 젖혀지며 추격대를 지휘했던 달소가 들어왔다.

초췌한 얼굴에 부상을 당한 한쪽 어깨에는 피가 살짝 배어난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안으로 들어온 달소는 털썩 야골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죽여 주십시오.”

고개를 숙인 채 벌을 청하는 달소의 모습에 야골타는 눈가를 찡그렸다.

마음 같아서는 큰 벌을 내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최측근이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게.”

“장군…….”

“부상은 좀 어떤가?”

“괜찮습니다.”

“그래도 무리를 하면 자칫 상처가 덧날 수도 있으니 당분간 좀 쉬도록 하게.”

야골타의 말에 달소는 고개를 들며 약간 출혈된 눈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성을 공략하는 데 제가 선봉에 서서 어젯밤 당한 치욕을 되갚도록 하겠습니다. 기회를 주십시오.”

“그대의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그 몸 상태로는 병사들을 지휘할 수 없으니 다른 장수들한테 복수를 맡기고 지켜보게.”

“하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한 달소가 다시 부탁을 하려 하는 것을 야골타가 중간에 끊었다.

“그냥 내 말대로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달소가 어쩔 수 없이 수긍을 하자 야골타는 좌우에 늘어서 있는 장수들을 둘러보며 이야기를 했다.

“최대한 빨리 피해를 수습하고 다시 공성전을 재개할 수 있도록 해. 알겠나!”

“옛.”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기는 했지만, 포병대가 큰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과연 제대로 공성전을 벌일 수 있을지 의문이었기에 장수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아침부터 청군이 공격을 재개했으나 화력지원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돌격을 감행했다가 큰 피해를 입고 다시 물러나야 했다.

거기다가 진채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틈만 보이면 습격을 해 대는 별동대 때문에 전력을 온전히 집중할 수가 없어 공성전이 더 어려워졌다.

그렇게 전투가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고 있을 때 마침내 참다못한 도르곤이 본대를 이끌고 산해관을 나왔다.

수십만에 달하는 청군 본대가 도착하자 고부리성 주변 들판이 온통 병사들로 새까맣게 뒤덮인 것 같았다.

성벽 위에 있던 조선군은 그걸 보고 바짝 긴장했는데, 군관들이 단속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크게 술렁였다.

“정말 엄청나게 많네. 한 이십만은 넘는 것 같지?”

병사 한 명이 질린 듯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동료 역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이십만이 뭐야, 내가 보기에는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 같은데.”

“제기랄, 지금도 힘든데 저만큼이나 적이 늘어나면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한탄 섞인 병사의 말에 동료들이 어두운 얼굴로 줄을 지어 도착하는 청군 본대를 쳐다봤다.

“과연 우리가 성을 지켜 낼 수 있을까?”

“하아.”

“…….”

아무리 잘 훈련된 정예들이라고 해도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서 오는 두려움을 다 이겨 내기는 어려웠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자 한쪽에 있던 선임병이 보다 못해 나섰다.

“뭐가 겁난다고 그래! 지금까지도 잘 버텨 왔잖아. 제아무리 청나라 놈들이 떼로 몰려와도 고부리성의 단단한 성벽을 넘지는 못할 거야.”

“맞아, 다 덤비라고 해!”

선임병의 말에 다른 병사들도 동조를 하면서 다시 전의를 불태웠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 내지는 못했다.

“병사들이 동요하는 것 같습니다.”

천리경으로 적진을 살피던 이관은 부관의 말에 시선을 돌려 성벽 위를 쳐다보고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입안이 바짝 마를 정도인데 오죽하겠나.”

“성주님…….”

“그래도 겁을 먹고 물러서는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그렇긴 하지만 자칫 사기가 떨어지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이관 성주가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었기에 얼굴을 살짝 굳히며 말했다.

“군관들한테 일러 병사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잘 다독이라고 하게.”

“……예.”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미지수였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 말고는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부관은 힘없이 대답했다.

그런 부관을 힐끗 쳐다본 이관은 담담한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적들도 본대를 맞이한다고 공격을 해 오지 않을 것 같으니 병사들을 교대로 쉬도록 조치하게.”

“그래도 되겠습니까?”

“마음이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진채를 새로 세우고 공격 준비를 갖추려면 시간이 걸리지 않겠나.”

“그렇군요.”

“그리고 전투가 재개되면 분명 제일 먼저 홍이포로 아군 방어선을 무력화시키려고 들 테니까 포병 지휘관에게 맞상대할 채비를 단단히 갖추라 이르게.”

이관의 지시에 부관은 결연한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한편 본대가 합류하며 다시 활기차게 움직이는 청군 진영과 달리 지휘 천막 안은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갑옷을 입은 채 화려하게 장식된 용상에 앉아 있던 도르곤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좌우로 늘어선 장수들을 쳐다보다가 야골타한테서 시선을 멈췄다.

“야골타.”

“옛, 폐하.”

“공성을 시작한 지 벌써 며칠째인데 아직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다니, 실망이야.”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은 싸늘한 말투에 야골타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조금 더 시간을 주시면…….”

탕!

용상 손잡이를 손바닥으로 세게 내려친 도르곤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며 말했다.

“지금까지 기회를 줬지 않나!”

“…….”

“그런데 그 결과가 뭐야! 삼만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홍이포까지 서른 문 넘게 말아먹고도 아무런 성과가 없잖아.”

가슴을 마구 후벼 파는 질책에 야골타는 벌게진 얼굴로 머리를 들지 못했다.

“지금까지 세운 전공을 생각해 이쯤에서 끝내는 거니까, 그렇게 알고 조용히 물러나 있어!”

노기가 가득한 도르곤의 호통에 야골타는 어깨를 움츠렸다.

“총병관.”

“예.”

담담한 얼굴로 서 있던 용골대가 몸을 돌리며 대답하자 도르곤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일 날이 밝자마자 총공세를 펼쳐 성을 함락시키고 영원성으로 진격할 것이니, 그렇게 알고 준비를 갖추도록 하라!”

성급하게 공격을 하려는 도르곤의 행동이 조금 우려스럽기는 해도, 용골대 역시 월등히 전력이 앞서는 상황이라 결과를 낙관적으로 봤다.

“옛.”

다른 장수들 역시 승리를 의심치 않았는데, 그만큼 고부리성에 있는 조선군과 비교해 청군의 전력은 압도적이었다.

도르곤이 명령한 대로 다음 날 동이 트자마자 청군은 고부리성을 완전히 둘러싼 채 홍이포를 쏘며 공격에 나섰다.

이백여 문이 넘는 홍이포가 일제히 불을 뿜어 대자 고부리성은 순식간에 섬광과 희뿌연 포연에 휩싸였다.

조선군도 즉시 대응 사격을 하며 반격에 나섰지만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 크게 밀렸다.

쏟아붓듯 쏴 대는 포탄 세례에 단단하게 지어진 포대 일부가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고 병사들이 성벽 위에서 버틸 수 없을 정도였다.

성주인 이관이 서 있는 문루 주위도 쉬지 않고 포탄이 날아와 터졌다.

꽈아앙! 꽝!

“성주님, 위험합니다! 엎드리십시오!”

부관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갑옷 끝을 붙잡았지만 이관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대로 서서 적진을 노려봤다.

“성주인 내가 겁을 먹은 모습을 보이면 어떻게 하겠나. 괜찮으니 이거 놓게.”

“성주님…….”

또다시 문루 바로 앞에 포탄이 떨어져 터지는데도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선 이관의 모습에 부관은 호들갑을 떤 자신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는 몸을 바로 세우며 뒤에 있는 병사들을 보며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방패로 성주님의 몸을 가려라.”

“예, 옛.”

그러자 웅크리고 있던 병사들이 황급히 커다란 사각 방패를 들고 와 이관의 몸을 가렸다.

사각 방패 사이로 고개를 내밀어 적진을 살피던 이관은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아군 포병대가 밀리는군.”

“아무래도 수적으로 워낙 차이가 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고부리성에 있는 화포를 다 합쳐 봐야 팔십 문이 채 안 됐기에 처음부터 정면 대결은 어려운 일이었다.

“젠장!”

작게 욕설을 내뱉은 이관은 쉬지 않고 포탄을 쏴 대는 청군 포대를 보며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그렇게 맹렬히 이어진 청군의 포격은 반나절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이백 문이 넘는 홍이포의 일제사격은 가히 무시무시했는데, 고부리성에 떨어진 포탄 숫자만 무려 이천여 발이 훌쩍 넘었다.

만약 연사 속도가 조금 더 빠르고, 계속된 사격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포신을 식히느라 중간쯤부터 돌아가면서 포격을 가하지 않았다면, 이것보다 훨씬 많은 포탄이 고부리성을 강타했을 것이었다.

과녁이 된 성 주위는 희뿌연 먼지구름으로 뒤덮였다.

포연이 조금씩 가라앉고 드러난 고부리성은 성벽 여기저기가 포격에 부서지고 무너져 내려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보급 마차에 실어 온 포탄 상당수를 소모한 도르곤은 말 위에 앉아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고부리성을 쳐다봤다.

“쯧, 포탄을 그렇게 많이 쐈는데도 성벽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못하다니.”

혀를 차며 불만을 드러내자 뒤에 있던 용골대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돌과 흙으로 단단히 쌓았고 성벽 폭이 열 자가 넘는다고 하니 포격으로 부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결국 병사들을 투입해 성벽을 넘어가야 된다는 거군.”

“그렇사옵니다.”

머리를 끄덕인 도르곤은 잠시 더 고부리성을 바라보다가 명령을 내렸다.

“영아대 장군.”

커다란 덩치에 장비처럼 수염을 기른 장수 한 명이 호명을 받자마자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장군이 지휘를 맡아 성벽을 넘도록 하게.”

“영광이옵니다.”

공격 임무를 맡은 영아대는 군례를 취하며 호기롭게 대답했다.

시선을 다시 용골대에게 돌린 도르곤은 지시를 계속 내렸다.

“아군이 성을 공략하기 쉽게 신호를 할 때까지 포격을 계속하도록 해.”

“알겠사옵니다.”

전령들이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고, 도르곤은 고개를 들어 멀리 위치한 고부리성을 보며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눈을 번뜩였다.

격렬했던 포격이 멈추자 성가퀴 위로 머리를 슬쩍 내민 조선군 병사들은 진채 앞에 잔뜩 모여 있는 적병을 보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쳐들어올 모양이야.”

“포격 때문에 미쳐 버리는 줄 알았는데 차라리 잘됐어.”

근처에 있던 동료들도 병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성가퀴 뒤에 숨어 무기력하게 포탄이 제발 다른 곳에 떨어지기를 빌고 있는 것보다 적과 얼굴을 마주 보고 싸우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모두 적군의 돌격에 대비해라!”

소곤거리며 잡담을 하던 병사들은 군관의 외침에 입을 다물고는 무기를 챙겨 들고 각자 위치로 가서 섰다.

그때 잠시 그쳤던 포격이 재개됐다.

슈우우웅~~꽈앙! 쿠쿵!

“씨팔!”

“또 쏘잖아.”

포격이 끝난 줄 알고 방어 태세를 갖추려던 조선군 병사들은 허겁지겁 다시 성가퀴 뒤로 몸을 엎드렸다.

고부리성이 희뿌연 포연에 뒤덮인 가운데 청군은 본격적으로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병력을 움직였다.

“부대 앞으로!”

말에 올라탄 영아대 장군의 외침에 각종 무기로 무장한 향용병 오만이 성을 향해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걷듯이 움직이던 청군은 점점 속도를 높이더니, 오백 보 정도를 남겨 두고는 거의 뛰다시피 달려갔다.

“돌격!”

“우와아아!”

오만에 달하는 청군은 조선군이 포격을 가해 올 것을 대비해서 좌우로 넓게 퍼져 돌격해 들어갔는데, 그 모습이 마치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성벽 뒤에 엄폐해 있던 조선군은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단 한 명의 이탈자 없이 모두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오폭을 염려해 청군의 포격이 뚝 그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일으켜 성벽 앞에 바짝 붙어 섰다.

“각자 위치로!”

“명령이 있을 때까지 절대 사격을 하지 마라!”

군관들이 뒤를 왔다 갔다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병사들의 피해가 얼마나 되나?”

이관 성주가 흙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채로 묻자 옆에 있던 부관이 약간 긴장한 어투로 대답했다.

“전투 중이라 정확한 숫자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포격에 삼백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좌측에 있는 포대가 부서져 제 역할을 못 하게 됐다는 겁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이관 성주는 포격에 직격을 당해 반쯤 무너진 포대를 보고는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우측 포대가 남아 있지만 그것으로는 화력지원을 충분히 해 주기 어렵습니다.”

“어쩔 수 없지. 부서진 포대 안에 있던 화포들은 어찌 되었나?”

“다행히 크게 망가지지 않아서 일단 포대 밖으로 모두 끌어내고 있는 중입니다.”

“잘했네.”

포대가 부서진 건 타격이었지만 그래도 화포들이 멀쩡하다는 이야기에 이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뜩이나 화포 전력이 부족한데 포대와 함께 망실했다면 조선군 입장에서 너무나도 뼈아팠을 것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부서지거나 사용 불량이 된 화포가 열 문이 넘습니다.”

“기세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적이 쏘는 만큼 우리도 반격을 해야만 되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전력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그 정도 피해로 버텼다는 것이 대단한 거야.”

“그렇기는 합니다만…….”

부관도 포병대가 선방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사방이 포위된 상황에서 가용 화력이 계속 줄어드는 것이 불안했다.

그런 부관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이관 성주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지금 돌격해 들어오는 청군을 막지 못하면 우리에게 내일이 없네. 그러니 당장 눈앞에 닥친 일에만 전력을 다하도록 하세.”

“……예.”

부관은 내일이 없다는 이관 성주의 말이 가슴에 무겁게 다가왔다.

그사이 돌격해 들어온 청군이 희뿌연 포연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자 재빨리 거리를 가늠해 본 이관 성주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며 크게 소리쳤다.

“지금이다. 사격 개시!”

“쏴라!”

성가퀴 위로 소총을 내밀고 있던 조선군 병사들이 지체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탕! 탕! 탕!

콩 볶는 듯한 총성이 줄지어 울리며 돌격해 오던 청군 선두가 썩은 짚단처럼 힘없이 우수수 쓰러졌다.

“으악!”

“꾸엑.”

바로 이어서 성벽에 거치해 놓은 황자총통들이 불을 뿜으며 산탄을 발사했다.

꽝! 꽝! 꽝!

후두두둑.

쏟아진 산탄은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용감하게 달려들던 청군 병사들을 순식간에 벌집으로 만들어 버렸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며 선두가 너덜너덜해졌지만 청군은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성벽에 올라라!”

“멈추지 말고 계속 공격해!”

“와아아!”

조선군도 물러서지 않고 필사적으로 맞서 싸우면서 양군은 성벽을 두고 서로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사투를 벌였다.

“청군을 막아라!”

“죽어!”

“끄아악.”

성주인 이관도 직접 공성용 사다리를 걸치고 문루에 오르는 적병을 검으로 내려치며 전투를 독려했다.

“하압!”

푹.

“커헉.”

“끝까지 자리를 지켜라!”

새빨간 피 보라가 일고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며 고부리성에는 한 폭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병사들이 대지를 붉은 피로 물들이며 치열한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을 때, 고향 땅에서는 전장에 나간 자식과 남편을 위해 하늘에 기원을 올리는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깊은 산중에 위치한 산사의 새벽.

차가운 새벽 공기에 손을 호호 불며 마당을 쓸러 나온 동자승은 오늘도 어김없이 불당에 가득 들어차 있는 사람들을 보고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해가 제대로 뜨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 먼 산길을 걸어왔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자승의 머리 위에 커다란 손바닥이 턱 얹혔다.

“주지 스님.”

“허허.”

산신령처럼 눈썹이 허옇게 센 주지 스님은 인자한 미소로 불당 아래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신발들을 가리켰다.

얼기설기 엮은 낡은 짚신이 있는가 하면, 젊은 아가씨나 신을 법한 예쁜 꽃신도 있고, 앞코가 닳아 버린 가죽신도 마구 섞여 있어 가지각색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축축한 흙이 묻어 있다는 점이다.

이슬이 내린 흙길을 열심히 걸어온 흔적이 가득한 신발들을 바라보던 동자승이 주지 스님을 향해 얼굴을 들어 올렸다.

“다들 누군가를 걱정해서 불공을 드리러 온 거겠죠?”

“그렇단다. 소중한 이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해 달라고 부처님께 기도하는 게지.”

주지 스님은 허허 웃으며 동자승의 등을 밀었다.

“자, 꾸물거리면 날이 밝겠구나. 얼른 마당 쓸고 아침 공양을 준비하여라.”

“예.”

동자승이 불당을 뒤로하고 돌아서자, 주지 스님이 두드리는 맑은 목탁 소리가 들려왔다.

마당을 한차례 쓸고 물을 뜨러 우물을 오가는 사이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 산사를 찾았고, 또 산을 내려갔다.

산 아래 마을에서 사찰까지 올라오는 오솔길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있었는데 어느새 그 앞에 하나둘씩 돌무더기가 쌓이기 시작했다는 풍문도 들려왔다.

처음엔 불공을 드리러 매일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 중 한 명이 거기에 모양 좋고 납작한 돌을 표식 삼아 놔둔 게 계기였으나, 사찰을 찾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점점 그 수가 늘어나 지금은 거의 커다란 돌탑만큼 높게 세워졌다는 말이 있었다.

매일매일 수없이 많은 돌이 그 위에 쌓이는데도 용케 탑이 무너지질 않는 것을 보면 참으로 신기하다고 동자승이 말하니, 주지 스님은 사람이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며 기원하는 힘이라는 게 그만큼 대단한 것이라고 답했다.

“한낱 이름 없는 작은 암자에도 이렇게 사람의 발길이 이어지니, 아랫마을은 더하겠구나.”

주지 스님이 온화하게 중얼거린 말처럼 마을의 상황 역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가족의 안위를 비는 부적이 문지방마다 붙어 있는 것은 물론, 나이 지긋한 노부모는 밤낮 가리지 않고 거칠하게 일어선 손바닥을 비비며 하늘을 향해 기도했고, 젊은 아낙은 물가에서 빨래를 하다가도 돌탑이나 성황당이 보이면 눈을 지그시 감고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는 모습을 마음속에 그렸다.

하다못해 개구쟁이 아이들조차 어른들의 이런 모습을 따라 할 정도였으니, 조선의 모든 백성이 병사들의 무사 안위를 걱정하고 기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다들 건강하게 잘 돌아오겠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바라니까 꼭 그랬으면 좋겠어요.”

동자승의 천진난만한 말에 주지 스님은 길게 기른 흰 눈썹사이로 가늘게 눈을 떠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아무렴. 하늘은 결코 사람의 간절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는단다.”

“부처님도요?”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며 주지 스님은 손안에 쥔 염주를 하나씩 넘겼다.

어느새 공성전은 보름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어제부터 직접 지휘를 하기 시작한 도르곤은 끝장을 보려고 작정했는지 병력을 넷으로 나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아가며 성을 공격했다.

쉴 틈을 주지 않고 거세게 몰아치는 공격에 고부리성의 조선군은 고군분투를 하면서도 점점 지쳐 갔다.

교대로 쳐들어오는 청군과 달리 여유 병력이 부족한 조선군 병사들은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아침 해를 맞이해야 했다.

해가 떠오르며 주변을 밝히자 밤새 치러진 격전의 흔적이 고스란히 다 드러났다.

성문 앞은 물론이고 옹벽 안쪽까지 수천 구의 시신이 널려 있었고, 성벽은 마치 붉은색으로 칠을 한 듯 양군 병사들이 흘린 피가 묻어 있었다.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이었지만 잔뜩 지친 얼굴의 조선군 병사들은 무덤덤한 얼굴로 성가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이봐, 아까 창에 찔린 건 괜찮아?”

“그냥 팔뚝에 살짝 스친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지만 임시로 묶어 둔 붕대에 피가 배어 나와 있는 것이 제법 상처가 깊어 보였다.

다른 때 같으면 진즉에 치료소로 옮겨졌을 부상이었으나 지금은 성벽을 지킬 인원이 부족한 상황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당장 말을 건 털보 사내만 해도 허벅지에 화살을 맞는 부상을 입었어도 그냥 참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기가 빠지면 남은 동료들이 그만큼 힘겹게 버텨 내야 된다는 것을 알기에 다들 웬만큼 크게 다치지 않고서는 성벽을 내려가지 않았다.

이런 끈끈한 전우애 덕분에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고부리성이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병사 서너 명이 주먹밥과 뜨거운 국물이 든 나무통을 들고 와서 동료들한테 나눠 줬다.

“배들 고프지. 어서 먹어.”

“안 그래도 뱃가죽이 등에 붙으려고 했는데 잘 가져왔어.”

“먹는 게 남는 거야.”

“맞아, 잘 먹어야 청나라 놈들하고도 계속 싸우지.”

소금 간만 한 주먹밥에 된장국이 전부였지만 밤새 싸우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했던 병사들한테는 더없이 훌륭한 한 끼가 되어 주었다.

그나마 언제 청군이 교대를 끝내고 다시 쳐들어올지 몰랐기에 이렇게라도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포격에 지붕이 날아가 버린 문루에 서 있는 이관한테도 부관이 음식을 가져왔다.

“성주님, 송구스럽지만 이걸로 요기를 좀 하십시오.”

고개를 돌려 부관이 내민 주먹밥과 된장국이 든 나무 그릇을 본 이관은 싫은 기색을 하지 않고 받아 들었다.

“전장에서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지.”

주먹밥을 크게 한입 베어 문 이관은 부관을 보며 말했다.

“자네도 먹어야지.”

“전 나중에 해도 괜찮습니다.”

“언제 짬이 날 줄 알고. 그러지 말고 여유가 있을 때 챙겨 먹게. 안 그러면 힘이 없어서 싸우지도 못해.”

이관의 이야기에 부관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쪽에서 배식을 하고 있는 병사한테 가서 주먹밥과 된장국을 챙겨 왔다.

밥을 먹으면서도 이관은 시선을 앞으로 하고 적진을 살폈다.

지난 이틀 동안 그렇게 많은 적을 죽였는데도 청군은 어찌나 병력이 많은지 표시도 나지 않았다.

여전히 성 주위를 뒤덮어 버릴 정도로 무수히 많은 천막이 쳐져 있었고, 맞서 싸워야 될 적이 넘쳐났다.

그에 비해 고부리성을 지키는 아군은 여전히 전의가 높았으나 갈수록 전력이 줄어들고 있었다.

깨끗하게 비운 나무 그릇을 성가퀴 위에 내려놓으며 이관이 입을 열었다.

“이제 싸울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남았나?”

그러자 부관은 침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부상을 입었지만 무기를 들 수 있는 인원까지 다 포함해도 삼만이 채 안 됩니다.”

“삼 할 넘게 잃었군.”

물리쳐야 할 적은 아직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남아 있는데 부하들은 자꾸만 줄어들어 가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더 큰 문제는 화포입니다.”

“…….”

“포탄과 화약 재고는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만, 청군과 포격전을 벌이는 와중에 보유한 화포의 절반이 못 쓰게 됐습니다.”

청군을 상대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화포 숫자가 뚝 떨어졌다는 이야기에 이관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나 많이 망실됐단 말인가?”

“예. 어젯밤 있었던 포격전이 특히나 격렬했던 데다가 적이 아군 포대를 노리고 사격을 가해 피해가 더 컸습니다. 포대 세 곳이 직격탄을 맞아 포좌와 함께 파괴됐고, 일곱 문이 넘는 화포가 무너진 성벽과 포대 밑에 깔려 버렸습니다.”

“이런!”

“급히 예비 병력을 동원해 허물어진 포대를 파내고 있습니다만 화포를 얼마나 건질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그럼 화포가 몇 문이나 남은 건가?”

그의 물음에 부관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산탄을 쏘는 황자총통을 제외하면 이제 마흔세 문밖에 없습니다.”

“끄으응.”

한 번에 수백 발씩 포탄을 날려 대는 청군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부족한 숫자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면목이 없습니다.”

마치 화포를 망실한 것이 자기 책임인 양 부관이 머리를 숙이자 이관 성주는 고개를 흔들었다.

“적이 포격을 하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지금까지 포병대가 제 역할을 해 주지 않았더라면 성을 지켜 내기 어려웠을 거야.”

말은 괜찮다고 하지만 화포 전력이 줄어든 만큼 방어전이 더 힘겨워질 수밖에 없어 이관 성주는 쓰린 속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문루 한쪽에 있던 군관이 한쪽 팔을 들어 앞을 가리키면서 크게 소리를 쳤다.

“성주님, 적이 다시 공격대형을 갖추고 있습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정말 일단의 청군이 진채를 나와 질서정연하게 도열하고 있었다.

“또 시작이군.”

신음을 내뱉듯 중얼거린 이관 성주는 이내 허리를 펴고는 목에 힘을 준 채 우렁찬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전군 전투준비!”

청군이 움직임을 보이자마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반사적으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병사들은 재빨리 전투 위치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쉴 틈을 안 주는구먼.”

“그래도 밥은 다 먹었으니 다행이지.”

“아직 소화도 안 됐어.”

“소화야 저 자식들하고 싸우면서 하면 되지.”

“제기랄.”

누군가 욕설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청군 진영에서 포성이 울리며 포탄이 날아왔다.

꽝! 꽝! 꽝!

쉬이이익! 쿠쿵!

수백 발의 포탄이 곳곳에 떨어져 폭발하자 성 주변은 순식간에 희뿌연 포연에 휩싸였고 비명과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으아악!”

“내 다리!”

“방포!”

꽈꽝!

조선군 포병대도 즉각 반격에 나섰지만 화포 숫자가 현저하게 줄어들어 청군의 공격에 묻혀 버렸다.

포탄이 터질 때마다 성가퀴 뒤에 엄폐해 있던 병사들이 서너 명씩 피투성이가 되어 나가떨어졌다.

청군의 포격은 지난 전투보다 더 체계적이고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성벽은 물론이고 안쪽 건물들까지 가리지 않고 타격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지진이라도 난 듯 바닥이 흔들리더니 굉음과 함께 지금까지 든든하게 버텨 주던 성벽 한쪽이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힘없이 허물어졌다.

와르르륵.

“저, 저런!”

내구력이 약해져 있는 상태에서 한꺼번에 서너 발의 포탄이 떨어지자 결국 견뎌 내지 못한 것이었다.

시야를 가리던 흙먼지가 가라앉자 위용을 자랑하던 높다란 성벽은 사라져 버리고 돌무더기만 잔뜩 남아 있었다.

절망과 충격에 휩싸인 조선군과 달리 청군은 드디어 성벽을 무너뜨렸다는 사실에 전장이 떠나가라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

아랫입술을 꽉 깨문 이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부관을 보며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뭘 하고 있나! 어서 예비 병력을 투입해 무너진 곳을 틀어막아.”

“아, 옛.”

호통을 듣고 겨우 정신을 차린 부관은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서 허겁지겁 문루를 뛰어 내려갔다.

다시 고개를 돌려 적진을 쳐다본 이관은 공성전을 시작한 이후 가장 위태로운 순간이 됐음을 직감하며 손에 든 검을 꽉 움켜쥐었다.

아니나 다를까, 청군 진형에서 고부리성을 살피던 도르곤은 성벽이 무너져 폭이 무려 서른 자가 넘는 공간이 생기자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끝낼 때가 됐군. 총병관.”

“옛, 폐하.”

“즉시 총공격을 펼쳐 성을 함락시키도록 해!”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용골대는 도르곤의 명령에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잠시 뒤 청군 진영에서 신호 깃발이 휘날리며 진군을 알리는 북소리가 크게 울렸다.

둥둥둥! 둥둥둥!

“전군 돌격!”

“우와아아!”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청군 병력이 함성을 내지르면서 거센 파도가 되어 위태위태하게 서 있는 고부리성을 덮쳐 갔다.

허탈한 얼굴로 무너진 성벽을 바라보고 있던 조선군 병사들은 청군이 몰려오자 겁을 먹고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얼른 정신을 수습하고는 각자 들고 있는 무기를 움켜쥐며 맞서 싸울 태세를 갖췄다.

“씨팔, 어디 누가 이기는지 한번 해보자고!”

“얼른 위치로 가!”

그리고 군관의 구령에 따라 적군을 향해 소총 사격을 가했다.

“쏴!”

타타탕! 탕! 탕! 탕!

탄환이 빗발치듯 날아가자 성을 향해 달려들던 청군이 피 칠갑을 하며 무더기로 흙바닥에 널브러졌다.

“계속 달려라!”

말을 탄 영아대의 호령에 청군 병사들은 전과 달리 머뭇거리지 않고 앞으로 뛰어갔다.

또다시 총성이 울리며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어느새 거리를 좁혀 온 청군도 견제사격을 해 왔다.

피슝.

“크억!”

적이 쏜 총탄이 바람 소리를 내며 옆을 스쳐 지나가자 움찔한 조선군 병사는 바로 옆에 있다가 비명을 내지르면서 쓰러진 동료를 황급히 부축했다.

“이봐! 괜찮아?”

몸을 흔들던 병사는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동료가 즉사해 있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마누라가 아들을 낳았다고 좋아하더니만…….”

죽은 동료의 눈을 감겨 주며 눈물을 흘리던 병사는 이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소총을 집어 들고 일어났다.

“개자식들! 다 죽여 버리겠어!”

성가퀴 앞으로 간 병사는 닥치는 대로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렇게 조선군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덤벼드는 청군의 숫자가 너무나도 많았다.

“진천뢰를 던져!”

“하압!”

“이거나 먹어라.”

청군이 성벽 주위를 새까맣게 둘러싸자 조선군 병사들은 비격진천뢰의 심지에 불을 붙여 냅다 던졌다.

꽈아아앙!

고막이 울릴 정도로 커다란 굉음이 터지고, 폭발이 일어난 곳 반경 삼십 보 안에 있던 적들이 모두 사지가 잘려 나가거나 피투성이가 되어 여기저기 널브러졌다.

“으으…….”

“살려 줘.”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빈 공간은 금세 다른 청군 병사들로 채워지며 성을 공략했다.

“어서 방포해!”

다급한 군관의 외침에 성벽을 따라 길게 배치해 놓은 황자총통들이 불을 뿜었다.

꽝! 꽝! 꽝!

수많은 산탄이 흩뿌려지면서 성벽 밑에서 우글거리는 청군을 덮쳤다.

작고 동그랗게 만들어진 산탄을 뒤집어쓴 적들은 온몸이 찢겨 나갔다.

“멈추지 말고 계속 쏴! 적들이 성벽에 달라붙지 못하도록 더 아래로 조준을 해서 쏘란 말이다!”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포수들을 독려하던 군관은 청군이 쏜 총탄에 가슴을 맞고는 그대로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크윽.”

“구, 군관 어른!”

화들짝 놀라 앞으로 달려 나간 포수들은 청군이 쏴 대는 총탄과 화살 세례에 허겁지겁 몸을 숙여야 했다.

청군의 공격에 고개조차 제대로 못 들 정도였고 곳곳에 피를 흘리며 죽은 조선군 병사들의 시신이 성벽 위에 늘어졌다.

공성용 사다리를 걸친 청군은 엄호사격을 받으며 높다란 성벽을 기어 올라갔고, 조선군은 소총을 쏘거나 기다란 창으로 찔러 그걸 방해했다.

타아앙! 탕!

“어딜 기어 올라와!”

푹.

“끄아악!”

창에 찔리면서 그만 사다리를 놓친 적병은 버둥거리며 그대로 아래로 추락했다.

털썩.

스무 자가 넘는 높이에서 떨어진 적병은 사지를 몇 번 부르르 떨고는 머리가 깨진 채 그대로 절명했다.

이렇게 사상자가 속출했지만 청군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성을 공략했고 성벽은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가는 적병들로 가득했다.

조선군 병사들은 백병전까지 불사하며 끝없이 밀려드는 적을 필사적으로 막아 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굳이 힘들게 성벽을 올라가지 않아도 성내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포격에 성벽이 무너져 내린 곳이었는데 여긴 사다리도 필요 없이 돌무더기를 넘어가기만 하면 됐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청군은 이곳에 병력을 집중시켰다.

조선군도 예비로 빼놓은 병력을 총동원해서 구멍을 틀어막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타타탕! 탕! 탕!

재차 이루어진 조선군의 일제사격에 무기를 들고 무섭게 덤벼들던 적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매캐한 화약 연기가 눈앞을 새하얗게 가리자 총을 쏜 병사들이 재빨리 다음 열에 자리를 비켜 주고는 뒤로 빠져 재장전을 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아악!”

“커컥.”

또다시 적들이 마치 춤을 추듯 몸을 흔들며 넘어졌다.

벌써 이러길 수십 차례, 무너진 성벽 주위가 적군의 시신으로 가득 찼지만, 상대는 좀처럼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양쪽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상태로 있다가는 조만간 적이 코앞까지 들이닥칠 지경이었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간 조선군 장수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더 빨리 움직여라!”

병사들도 상황이 다급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소총이 그냥 장전되는 건 아니었다.

얼마 전 근위군단부터 배치가 되기 시작한 남-삼식처럼 후장식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병사들이 가진 소총은 총구를 세워 일일이 화약포를 입으로 찢어 붓고 총알을 넣은 다음 꽂을대로 쑤셔 줘야 했기에 아무리 재촉을 해도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조선군 병사들은 평소 혹독한 훈련을 거듭해서 일 분에 두 발씩 소총을 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신경이 곤두세운 채 전장 한복판에서 장전과 사격을 계속 반복하다 보니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다.

당연히 장전 속도가 떨어졌고 그만큼 상대가 거리를 좁혀 왔다.

그러자 마음이 다급해진 조선군 병사들이 실수를 하면서 장전 시간이 길어지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당장 몸을 돌려 달아나고 싶었지만 그러면 방어선이 무너져 성벽 위에서 고군분투 중인 동료들이 위험해진다는 생각에 병사들은 이를 악물며 악착같이 버텼다.

그렇게 얼마쯤 더 시간이 지났을까, 결국 적군의 돌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주위를 뒤덮은 희뿌연 화약 연기 사이로 청군 병사들이 나타나 앞으로 육박해 들어왔다.

“허억! 쏴!”

병사들은 황급히 방아쇠를 당겼고 총탄에 맞은 적들이 피를 뿌리며 엎어졌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는데, 바로 뒤따라오던 청병들이 쓰러진 이들을 뛰어넘으며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을 들이밀었다.

“이런 썅!”

“막아!”

총탄을 재장전할 여유가 없게 된 조선군 병사들은 가지고 있는 소총을 창처럼 써서 적과 맞섰다.

조준을 하기 어렵지만 지금 같은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총검을 장착해 두었기에 그나마 밀리지 않고 바로 백병전을 벌일 수 있었다.

어차피 죽여야 될 청군이 발에 차일 만큼 무수히 많았기에 딱히 조준 사격을 할 필요가 없기도 했다.

쿠당탕!

커다란 충돌음이 터지고 양군은 서로 뒤엉켜 상대를 죽이기 위해 눈을 부라리면서 병장기를 휘둘렀다.

채챙! 챙! 챙!

사방에서 쇳소리가 울리며 그만큼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서걱.

“크헉!”

“죽어!”

“흥, 네놈이나 뒈져라.”

좁은 곳에서 총검을 찌르고 검을 내려치며 거친 욕설과 기합을 내질렀다.

피가 흘러 바닥에 웅덩이가 되어 고였고 고성과 온갖 아우성이 난무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던 조선군 병사들은 결국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뒤로 밀렸다.

츄악!

“으윽.”

시뻘건 피가 튀며 군관이 휘두른 검에 옆구리를 길게 베인 적병은 주춤거리며 뒤로 쓰러졌다.

벌써 몇 명째 덤벼드는 적을 죽였는지 몰랐다.

거칠어진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또 다른 적이 코앞에 나타났다.

덩치가 산만 한 거구였는데 생긴 대로 커다란 도끼를 들어 올리더니 그를 향해 내려쳤다.

군관은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검을 위로 들어 올리며 방어를 했다.

츄앙!

쨍.

“큭.”

무언가 깨지는 쇳소리가 울렸다.

공격을 막아 내기는 했지만 무거운 도끼날에 검이 깨져 두 동강이 난 것이었다.

“제길!”

욕설을 내뱉은 군관은 적이 재차 도끼를 내려치려고 하자 황급히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꺼내 쐈다.

탕!

“케헥.”

총성이 터지며 가슴에 탄환을 얻어맞은 상대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몸을 돌려서 피한 군관은 쉴 새 없이 다가오는 적을 향해 권총을 연속해 발사했다.

하지만 여섯 발이 장전된 총탄은 금방 떨어졌고 권총을 집어 던지고는 동강 난 검을 휘두르며 끝까지 싸우던 군관은 어디선가 찔러 온 칼에 치명상을 입고 힘없이 주저앉았다.

“크으…….”

이미 그때는 무너진 성벽을 지키던 조선군 병사 대부분이 죽거나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그렇게 방어선이 뚫리자 청군은 물밀듯이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빌어먹을!”

문루 위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이관 성주는 적이 밀려들어 오는 것을 보고 신음성을 내뱉었다.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지만 결국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다.

아직 다른 곳은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으나 이렇게 된 이상 방어선이 붕괴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당장 성벽 위에서 싸우고 있는 병사들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막아라! 물러서지 말고 적과 맞서 싸워라!”

병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크게 소리를 친 이관은 직접 성가퀴 앞에 서서는 사다리를 걸치고 문루를 기어 올라오는 적병의 머리를 발로 차고 검을 휘둘러 부상을 입혔다.

그렇지만 이미 기울기 시작한 전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새까맣게 달라붙어 공격을 퍼붓는 적들이 하나둘 성벽 위로 올라오면서 조선군 병사들은 급격하게 무너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도망치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 필사적으로 사투를 벌였으나 빠르게 줄어드는 조선군과 달리 상대는 갈수록 숫자가 늘어나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커컥.”

“아악!”

“이런 씨부랄 놈들! 같이 죽자!”

동료들이 죽는 것을 보고 흥분한 조선군 병사 한 명이 핏발이 선 눈으로 성벽 위로 올라온 적들한테 총검을 마구 휘둘러 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잔뜩 몰려온 적들이 창과 검을 사방에서 찔러 오자 병사는 온몸을 난자당한 채 피를 토해 내며 숨이 끊어졌다.

곳곳에서 구멍이 뚫리며 성벽을 넘어오는 적병의 숫자가 늘어났다.

이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다다랐다.

성주인 이관이 있는 문루도 적병들이 밀고 들어와 난전이 벌어졌다.

채챙! 챙! 챙!

타탕! 탕!

이관도 적이 흘린 피로 갑옷을 더럽힌 채 문루를 손에 넣으려는 적과 싸웠다.

문루 안은 양측 장졸들이 서로 뒤엉켜 병장기를 휘두르고 총을 쏴 대는 통에 그야말로 난장판이 됐다.

소총을 쏘고 재장전을 하려던 아군 병사가 적이 내지른 창에 찔려 비명을 토해 냈다.

옆에서 그걸 본 이관 성주는 야차 같은 얼굴을 하며 달려와 검을 내리그었다.

츄아악.

일격에 목이 날아간 적병은 피를 뿌리며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다.

얼굴에 튄 피를 닦아 낼 생각을 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본 이관은 표정을 굳혔다.

성벽 곳곳에서 난전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조선군 병사들이 청군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매몰되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얼마 안 가서 전멸을 당할 상황이었다.

침통한 얼굴을 하고 서 있을 때, 역시 적과 싸우느라 여기저기 피가 튄 부관이 옆으로 다가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성주님,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일단 여길 포기하고 내성으로 가시지요.”

“됐네. 난 병사들과 함께할 것이야.”

죽음을 각오한 듯한 이관 성주의 말에 부관이 다시 그를 설득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비록 외성은 무너졌지만 우리한테는 두 겹이나 되는 성벽이 더 남아 있으니, 분하더라도 뒤로 물러서 적을 막아 내야 합니다.”

부관의 간절한 이야기에 이관은 그제야 흥분했던 마음이 가라앉으며 냉철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든든하게 서 있던 성벽은 어느새 부서지고 금이 가 예전 모습이 아니었다.

그나마도 적들로 가득 들어차 조선군 병사들은 여기저기 흩어진 채 힘겹게 저항을 이어 가고 있었지만 그리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뒤로 시선을 돌리자 시가지 너머로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내성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대로 허무하게 끝낼 수는 없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이관 성주는 다시 전의를 불태우며 말했다.

“내성으로 간다.”

“옛.”

얼른 머리를 숙인 부관은 뒤로 돌아서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여길 포기하고 내성으로 이동한다. 성주님을 모셔라!”

명령이 내려지자 병사들은 지긋지긋하게 덤벼드는 적을 떨쳐 내고는 서둘러 퇴로를 열었다.

“후퇴! 내성으로 가라.”

“뒤로 물러서.”

퇴각 명령에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던 조선군 병사들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외성을 포기하면서도 그냥 무질서하게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군은 군관들의 통제 속에 질서정연하게 후퇴해 피해를 최소화했다.

포대에 있던 포수들도 기다란 꽂을대와 검을 들고 적과 백병전을 벌이다가 얼른 후퇴 대열에 합류했다.

그냥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너무 무거워 어쩔 수 없이 남겨 두고 가야 되는 화포를 적이 노획해서 쓰지 못하도록 재빨리 격발기를 제거한 뒤 포구에 구멍을 내 버렸다.

“뭐 하십니까?”

포술장의 물음에 중년 군관은 한쪽에서 나뒹굴던 나무통을 들어 바닥에 화약을 이리저리 뿌리며 말했다.

“자네들 먼저 가! 난 해야 될 일 있어.”

한시가 급한 상황에 도대체 왜 이러나 하며 쳐다보던 포술장은 이내 눈을 크게 치켜떴다.

“군관 어른, 설마!”

그러자 텅 빈 화약통을 한쪽에 던지며 상체를 바로 한 군관이 초연한 얼굴로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순순히 가기에는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아서 말이야.”

“그래도 이건 아니지요. 내성으로 가서 놈들과 싸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포대 무기고에 잔뜩 쌓여 있는 포탄과 화약을 터트려 자폭하려는 것을 눈치챈 포술장이 다급히 만류했지만 군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화포를 다 잃었는데 내가 가서 할 일이 없지 않나. 하지만 여기서 내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 준다면 아군이 빠져나가서 전열을 재정비하기가 한결 수월해질 거야.”

“…….”

이미 결심을 굳힌 듯한 군관의 말에 포술장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더니 이내 결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 저도 남겠습니다.”

“자네도?”

“예, 혼자보다는 둘이 안 외롭고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한쪽에 있는 새 화약통을 집어 들려고 하자 군관이 정색을 하며 막았다.

“안 돼!”

“군관 어른은 되고 전 왜 안 된다는 겁니까?”

포술장이 발끈하며 따지자 군관은 진지한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우리 둘 다 없어져 버리면 포대원들은 누가 챙기겠어!”

“그건…….”

말끝을 흐리며 머뭇거리자 군관이 타이르듯 말했다.

“앞으로 더 힘든 전투가 계속 이어질 거야. 염치없는 말이지만 자네가 내 몫까지 해 주게.”

“크흑, 군관 어른.”

적군의 함성 소리가 더욱 가까이에서 들리자 군관은 힐끗 포문 쪽을 쳐다보고는 급히 말을 이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네. 놈들이 여기까지 오기 전에 어서 내성으로 가게.”

재촉에 잠시 망설이던 포술장은 벅차오르는 슬픔을 애써 눌러 참으며 마지막으로 군관한테 정중히 군례를 취했다.

“그럼, 저도 곧 뒤따라갈 테니 먼저 저승에 가 계십시오.”

“알겠네.”

포술장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 계단을 내려가자 군관은 곧장 나무 문을 닫았다.

청군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빗장을 단단히 건 군관은 그것으로도 안심이 안 됐는지 무거운 나무 상자를 끌고 와 문을 막았다.

“끄응차.”

쿵.

그러고는 불만 당기면 무기고에 있는 화약과 포탄이 일시에 폭발할 수 있도록 서둘러 작업을 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땀을 뻘뻘 흘리며 화약통의 뚜껑을 뜯고 있을 때 바깥에서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적들이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탕탕!

“문이 잠겨 있잖아.”

“그냥 부숴 버려.”

잠시 뒤 도끼로 문을 찍는 소리가 위협적으로 울렸다.

쿵. 쿵.

도끼날에 금방 문 한쪽이 부서져 나가며 사나운 기세를 내뿜는 적군의 모습이 보였지만, 마지막 화약통을 개봉한 군관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 가는 길이 외롭지는 않겠군.”

청군이 문을 부수는 것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린 군관은 품속에서 부싯돌을 꺼냈다.

아무리 죽음을 각오했다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살짝 머뭇거리던 군관은, 이내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는 손을 움직여 부싯돌을 부딪쳤다.

딱.

경쾌한 마찰음과 함께 부싯돌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엄청난 폭음이 일어나며 군관의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

콰콰꽝!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폭음이 터지면서 단단하게 돌을 쌓아서 만든 포대가 마치 거대한 화산이 용트림을 하는 것처럼 대폭발을 일으켰다.

시커먼 버섯구름이 하늘 높이 치솟는 가운데 돌 조각과 흙무더기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폭발이 얼마나 컸는지 멀찌감치 떨어진 청군 진영에서도 후끈한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포대와 주변 성벽에 몰려 있던 수많은 청군들이 폭발에 휘말려 사지가 갈기갈기 찢어지고 파편에 맞았다.

무시무시한 화염에 삼켜진 청군들은 비명을 내지를 틈도 없이 그대로 녹아내렸다.

승리를 눈앞에 두고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일반 병사들은 물론이고 도르곤을 비롯한 청군 장수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히히힝.

폭발에 놀라 마구 날뛰는 말을 겨우 진정시킨 도르곤은 엄청난 크기의 버섯구름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미친놈들!”

하지만 아직 놀라기에는 일렀는데, 첫 폭발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편에 세워진 포대 역시 대폭발을 일으키며 주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관 성주가 자폭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그쪽 포대 지휘관 역시 청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똑같은 선택을 한 것이다.

두 번에 걸친 대폭발은 한껏 기세를 올리면서 성안으로 몰려 들어가던 청군의 발을 단번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바로 눈앞에서 수많은 동료들이 폭발과 넘실거리는 화염에 휩쓸려 사라졌으니 동요를 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것이었다.

덕분에 뒤처져서 퇴각하던 조선군 병사들이 추격을 뿌리치고 모두 무사히 내성으로 물러설 수 있었다.

그리고 한발 앞서 후퇴해 자리를 잡은 이관 성주는 뜻밖의 상황에 놀라면서도 휘하 장졸들이 죽음으로써 만들어 낸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화포를 쏴라!”

그의 외침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성에 세워진 포대에서 화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꽈꽝! 꽝! 꽝! 꽝!

처음에 비해 화포 수가 현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죽은 동료들의 복수를 하려는 듯 포격이 매서웠다.

포수들은 팔이 떨어질 것처럼 힘들었어도 이를 악문 채 그 어느 때보다 빨리 장전과 사격을 반복했다.

“어서 포탄을 장전해!”

“개자식들, 다 죽여 버리자고.”

특히 상관이 자폭하는 것을 그냥 남겨 두고 와야 했던 포술장과 부하들은 악에 받친 얼굴로 동료를 다그치면서 미친 듯이 화포를 쏴 댔다.

아직 대폭발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머뭇대고 있던 청군은 조선군의 포격에 큰 타격을 입었다.

쿠쿵! 쿵!

“끄아악!”

“크흑.”

돌격을 독려하던 청군 장수인 영아대가 바로 옆에서 터진 포탄 파편에 맞아 목숨을 잃으면서 혼란은 더욱 커졌다.

쏟아진 포탄 세례는 외성 주위에 몰려 있던 청군 대열을 그대로 날려 버렸다.

그래도 아직 남아 있는 병력이 훨씬 더 많았지만 기세가 꺾여 버린 청군은 우왕좌왕하며 그 자리에 엎드리거나 명령이 없었는데도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이대로 밀어붙여 성을 함락시키려고 했던 도르곤은 갑작스러운 반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 저, 우리도 대응사격을 하지 않고 뭘 하는 거야!”

화가 단단히 난 도르곤이 언성을 높이자 뒤에 있던 용골대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했다.

“지금 포를 쏘면 공격에 나선 아군 병력도 피해를 입게 되옵니다.”

실제로 청군과 조선군이 너무 근접해서 붙어 있는 상황이었기에 오폭의 위험이 컸다.

“젠장할!”

얼굴을 구긴 도르곤의 눈치를 살피며 용골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 그래도 외성을 무너뜨렸으니 큰 성과이지 않사옵니까. 오늘만 날이 아니니 일단 여기서 병력을 물렸다가 전열을 재정비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으음…….”

승리를 눈앞에 두고 물러서야 하는 것이 너무나도 쓰라렸지만 그가 보기에도 더 이상 공세를 이어 나가기가 어려웠다.

이맛살을 찌푸린 채 잠시 망설이던 도르곤은 결국 퉁명스러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

“후퇴시켜.”

“옛.”

후퇴 신호가 울리자 청군은 썰물이 빠져나가듯 뒤로 물러났고, 그렇게 조선군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던 외성이 무너지고 화포 전력마저 급감한 상태에서 이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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