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권-고부리성 함락 (100/104)

20권

* 고부리성 함락

자정을 훌쩍 넘긴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전선 사령부 한쪽에 마련된 회의실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연락을 받고 급히 모여든 장수들은 다시 한 번 자세한 상황 설명을 듣고는 다들 하나같이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별동대 병력이 얼마나 남은 건가?”

남두병 사령관의 물음에 소식을 전하러 왔던 군관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필사적으로 혈로를 뚫었습니다만 탈출에 성공한 병력은 채 삼천이 되지 않습니다.”

순간 넓은 회의실 안은 깊은 탄식과 당혹스러움으로 가득 찼다.

“허어.”

“이럴 수가.”

“정예 기병 삼만이 나가 일 할밖에 남지 않다니.”

전선 사령관인 남두병 장군이 곤혹스러운 속내를 드러낼 만큼 별동대의 패배는 조선군에 큰 충격이었다.

강한 돌파력과 기동력을 지낸 기병을 삼만이나 잃은 것도 뼈아픈 일이었지만, 조선군 지휘부를 힘들게 만드는 건 고립된 고부리성을 측면 지원하고 청군을 괴롭힐 중요한 패가 너무나도 빨리 없어졌다는 점이었다.

거기다가 조선군 제일의 맹장인 흑치영이 적에게 패했다는 것만으로도 아군의 사기를 크게 꺾어 놓는 일이었다.

회의실이 어수선한 가운데 홀로 평정심을 유지하던 도현은 손바닥으로 앉아 있는 황좌 팔걸이를 세게 내려쳐 주위를 환기시켰다.

탕.

“이미 일이 벌어졌으니 지금부터 대책을 세우는 데 집중해야 될 것이오, 전선 사령관?”

“예.”

지목을 받은 남두병 사령관은 상체를 살짝 숙이면서 약간 경직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청군이 이제 어떻게 나올 것 같나?”

잠시 고심을 한 남두병 사령관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동안 후방을 괴롭히고 수시로 야습까지 가해 공성전을 방해하던 별동대가 사라졌으니 더욱 공세를 강화할 것이옵니다.”

별동대가 괴멸된 시점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행동이었기에 다들 동의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 청 황제가 직접 나선 데다 이번에 홍이포를 다수 보충했다고 하니 이미 외성 벽이 무너진 고부리성으로서는 오래 버티기 어려울 것이옵니다.”

고부리성 함락을 거론하자 도현의 눈썹이 찡그러졌다.

“새로 별동대를 구성하는 건 어떤가?”

“애초에 여유 전력을 다 빼내 병력을 편성한 거라 남아 있는 기병이 거의 없는데다가 이번처럼 청군이 함정을 파고 아군을 사냥한다면 오히려 각개격파를 당하는 꼴이 될 것이옵니다.”

남두병 사령관의 말대로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귀중한 기병 전력을 적에게 먹잇감으로 던져 주는 꼴밖에 안 된다.

“그럼 이대로 가만히 고부리성이 함락되는 걸 지켜보기만 하자는 건가!”

짜증이 난 도현의 호통에 남두병 사령관은 머리를 숙이면서도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안타깝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관 장군과 병사들이 최대한 버텨 주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사옵니다.”

“젠장!”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한 도현이 황제로서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내뱉었으나 상황이 이런 만큼 아무도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아니, 회의실에 모여 있는 장수들도 차마 겉으로 내놓지는 못해도 참담하고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주먹을 꽉 말아 쥔 채 부들부들 떨던 도현은 이내 침중한 얼굴로 앞에 서 있는 남두병 사령관을 보며 입을 뗐다.

“총참모부에 준비하고 있는 계획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지으라 이르라. 때가 되면 청군에 맞서 싸우며 뜨거운 피를 흘리고 있는 병사들의 복수를 짐이 직접 해 줄 것이다. 모두 알겠는가!”

“충!”

결연한 얼굴을 한 장수들은 군례를 취하면서 크게 외쳤다.

그걸 보며 황좌에 앉은 도현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핏방울이 맺힐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오늘 일을 뼈에 새겼다.

충격에 휩싸인 영원성과 달리 청군 지휘부는 전쟁을 시작한 이후 처음 올린 승전보에 크게 고무됐다.

“하하하! 정말 오랜만에 들은 통쾌한 소식이로군.”

지휘 천막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트린 도르곤은 앞에 서 있는 야골타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쳐다보며 손짓했다.

“이리 가까이 오라. 장군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짐이 어주를 내리겠노라.”

“황공하옵니다.”

허리를 깊숙이 숙인 야골타는 오른편에 서 있는 용골대를 득의만만한 얼굴로 힐끔 쳐다보고는 조심스럽게 도르곤한테 다가갔다.

그러자 옆에 시립해 있던 내관이 어느새 준비한 황금으로 만들어진 술병과 잔을 가져왔다.

“자, 받게.”

술을 따라 주며 도르곤은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목소리로 치하를 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만 하게.”

“폐하의 충실한 검이 되겠사옵니다.”

“그래.”

노골적인 아부에 용골대를 비롯해 평소 야골타와 감정이 좋지 않은 이들이 눈살을 찌푸렸으나 도르곤은 연신 미소를 지으며 흡족해했다.

“장군이 있어서 아주 든든하군. 공을 세웠으니 그에 합당한 상을 내려야지. 원하는 것이 있나?”

눈을 반짝인 야골타는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저한테 공성전 지휘권을 맡겨 주십시오.”

“흐음?”

도르곤은 의외라는 듯 야골타를 쳐다보았다.

이미 한 번 실패한 고부리성 공략을 자진해서 다시 맡겠다고 하다니, 설마 포상으로 이런 걸 원할 줄은 몰랐기에 주위의 장수들도 약간 술렁거렸다.

“이번에야말로 성을 함락시켜 지난번의 치욕을 설욕하겠습니다.”

바닥에 무릎까지 꿇으면서 청원하는 모양새에 도르곤은 잠시 고심을 하다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자네 말대로 이번엔 꼭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수 있길 바라네.”

“감사하옵니다!”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고 설욕의 기회를 얻은 것에 야골타는 잔뜩 고무된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 ☆ ☆

성루에 서자 끝없이 펼쳐진 벌판이 보였다.

저 지평선 너머에서 피를 흘리며 목숨을 걸고 청군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병사들을 생각하니 도현은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뒷짐을 진 채 한참 말없이 서 있을 때 친위대 백부장인 김덕술이 가까이 다가와 군례를 취했다.

“폐하, 총참모부에서 답신이 왔사옵니다.”

“어서 가져와.”

몸을 옆으로 돌리면서 도현이 말하자 김덕술은 비단 두루마리를 두 손으로 공손히 내밀었다.

밀봉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쳐 내용을 읽어 내려간 도현은 낮게 침음을 흘렸다.

그 모습에 칠현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무슨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 것이옵니까?”

“거란 출신 기병들 일만을 급히 모아 보내 준다는군.”

“좋은 소식이지 않사옵니까.”

의아한 듯 칠현이 되묻자 그는 두루마리를 접어 다시 김덕술에게 주며 이야기를 이었다.

“거기까지라면 그렇겠지.”

“……?”

“애초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명이 앞뒤에서 협공을 하자는 제안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청군 증원 병력 십만이 새롭게 합류할 것이라는군.”

뜻밖의 악재에 칠현은 눈을 크게 떴다.

“시, 십만이라고 하셨사옵니까?”

“그래.”

“아니, 갑자기 그렇게 많은 병력이 어디서…….”

지금도 병력에서 밀리는데 십만이 더 보태진다면 자칫 팽팽한 균형추를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악재였다.

“주작단이 파악한 것에 따르면 죽은 왕영 휘하에 있다가 잡힌 포로와 수감 중이던 죄수 들을 모은 거라는군.”

“허어.”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칠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패를 준비하고 있었다니 역시 도르곤은 만만치 않은 상대야.”

설마 상대가 죄수 부대를 등장시킬 줄은 도현도 미처 예상을 하지 못했다.

주작단을 청나라 곳곳에 침입시켜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 치밀하게 전략을 세웠던 것이 한순간에 무용지물이 될 위기였다.

잘 훈련된 정예가 아닌 어중이떠중이를 모아 놓은 오합지졸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화살받이로 쓰더라도 십만이라는 머릿수를 절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계획을 바꿔야겠어.”

머리를 든 도현은 아직 남아 있던 김덕술을 보며 말했다.

“지금 당장 전령을 보내 용병대를 불러오도록 하고 총참모부에는 진虎 호 계획을 발동하라 이르라!”

“알겠사옵니다.”

청과의 전쟁을 앞두고 조선은 여러 가지 전쟁 계획을 세운 뒤 십이지신十二支神의 이름을 붙여 구분했는데, 진호 계획도 그중 하나였다.

최측근인 만큼 진호 계획이 뭔지 잘 알고 있던 칠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봤다.

“괜찮겠사옵니까?”

그러자 도현은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는 기세 싸움이야. 아무리 날카로운 비수를 숨겨 두고 있더라도 힘 대결에서 밀려 승기를 넘겨준다면 다 말짱 도루묵이 되는 거지. 여기서 우리가 가진 걸 모두 쏟아부어 소진해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물러서서는 안 돼!”

이번에 끝장을 보겠다는 결연한 그의 의지를 잃은 칠현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며 도현에 대한 믿음을 보였다.

“모든 것이 폐하의 뜻대로 되실 것이옵니다.”

몸을 바로 해 드넓은 벌판을 바라보면서 도현은 진한 피비린내를 느꼈다.

“야골타의 군기입니다!”

갑옷을 정비할 시간도 없어 피딱지가 그대로 붙어 있는 채로 성루에 오른 이관은 부관의 말에 멀리 적진 앞에 휘날리는 군기를 보며 낮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으음.”

공성전 초반부터 집요하게 아군을 괴롭히며 수많은 병사들을 비명에 죽도록 만든 깃발이었기에 그로서는 절대 잊을 수가 없었다.

“한동안 안 보이더니 다시 지휘권을 잡은 모양입니다.”

이관은 어금니를 물며 말했다.

“어떤 자가 지휘를 하던 우린 성벽만 잘 지켜 내면 되니 상관할 필요 없어.”

“……예.”

자신이 쓸데없는 호들갑을 떨었다는 걸 깨달은 부관은 아차 하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짧게 혀를 찬 이관은 시선을 돌려 좌우 성벽을 살폈다.

다행히 병사들은 야골타가 다시 나타난 것에 크게 동요를 보이지 않고 담담히 각자 자기 위치에서 적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관이 든든해하는 순간 천지가 진동하는 커다란 폭음이 울리면서 청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꽝! 꽝! 꽝!

씨이이잉~ 콰꽈꽝!

청군이 쏜 포탄은 성벽뿐만 아니라 외성과 내성 사이에 위치한 민가들에도 떨어졌다.

나무로 지어진 목조 가옥들은 폭발에 휘말려 날아갔고 순식간에 내성은 화염과 희뿌연 먼지로 뒤덮였다.

성가퀴 뒤로 숨은 조선군 병사들은 이제 포격쯤은 아무렇지도 않는지 담담한 얼굴로 각자 무기를 꽉 움켜쥔 채 앉아 있었다.

후두두둑.

“포격이 멈추면 곧바로 적이 쳐들어올 거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

폭발에 치솟아 오른 돌가루와 먼지가 비처럼 떨어져 내리는 가운데 상체를 숙인 군관이 성벽 위를 오가면서 병사들을 다독였다.

성벽 밑에 웅크린 채로 간간이 고개를 들어 적진을 살피던 이관 성주는, 오랜 전투에 힘들고 지쳤을 텐데도 불구하고 전의를 잃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이 너무나도 고맙고 미안했다.

“지휘권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만큼 처음부터 세게 몰아칠 거다. 그 전에 적군의 기세를 꺾어 버릴 수 있게 조란탄鳥卵彈을 준비해라!”

“옛.”

짧게 대답한 부관은 즉시 전령을 보내 포병대에 명령을 전달했다.

다시 성벽 위로 머리를 내밀어 적진을 뚫어질 듯 노려본 이관 성주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간격을 두고 길게 늘어선 청군 홍이포들은 쉬지 않고 불을 뿜어 댔고 그때마다 내성 주위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조선군 포대도 온힘을 다해 맞대응하고 있었지만 수적으로 너무 열세였다.

쿠쿵! 쿵! 쿵!

그렇게 한 시진 넘게 이어지는 청군의 포격이 갑자기 뚝 멈췄다.

폭풍 전의 고요와도 같은 무거운 정적이 전장을 뒤덮었다.

그것도 잠시.

곧 이어질 상황이 뭔지 잘 알고 있던 조선군 병사들은 재촉을 하기 전에 알아서 몸을 일으키고는 각자 전투 위치를 잡았다.

아니나 다를까 흙먼지 사이로 청군이 천천히 전진해 오는 것이 보였다.

“적이 온다!”

“퉤. 오늘도 저 자식들 대갈빡을 다 박살 내 버리자고.”

손바닥에 침을 뱉고 비비며 호기롭게 소리치자 주위에 있던 동료들도 덩달아 살기등등한 기세를 띠었다.

“그래. 오늘 한번 살풀이 제대로 해 보자.”

“시벌, 너 죽고 나 살자, 이 자식들아!”

비록 몸에 걸친 옷은 헤지고 낡았으며 흙먼지 때문에 더러워진 얼굴엔 땟국물이 줄줄 흘러 거지꼴이 따로 없었으나 눈에서 타오르는 열기만큼은 진짜였다.

조선군이 쏴 대는 포격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청군은 대형을 넓게 산개시킨 채 앞으로 달려들었다.

“공격!”

“우와아아!”

거센 파도가 밀어 닥치듯 청군이 쉰 보 안까지 들어오자 거리를 재던 포병대 지휘관이 벌떡 일어나 검을 위로 들어 올리고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지금이다. 방포하라!”

퍼퍼펑! 퍼펑! 펑!

포신에 조란탄을 넣고 대기 중이던 조선군 화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발사된 조란탄은 공중에서 폭발하며 이백 개에 달하는 작은 쇠구슬과 차돌을 부챗살처럼 뿌렸다.

“으악!”

“끅.”

자탄을 피하지 못한 적들은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엎어졌다.

포수들이 재장전을 하는 사이 바로 이어서 소총이 발사됐다.

타타탕! 탕! 탕!

촘촘한 화망을 구성한 채 날아든 탄환에 청군 대열 선두가 비명을 내지르면서 섞은 짚단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피 안개가 뿌려지고 팔이나 다리가 잘린 채 꿈틀거리면서 살려 달라 절규하는 부상병들의 모습은 마치 지옥을 연상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군은 단단히 각오를 했는지, 물러서지 않고 계속해서 내성을 향해 전진해 갔다.

“역시 조선군의 대응이 만만치 않습니다.”

말에 앉아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야골타는 심복 장수인 네루탄이 감탄 어린 어투로 이야기를 하자 한쪽 볼을 실룩였다.

“흥. 그래 봤자. 놈들이 설치는 것도 오늘까지야.”

“맞습니다.”

“부관.”

“예, 장군.”

“화차를 내보내!”

“알겠습니다.”

잠시 뒤 깃발 신호가 올라가자 청군 진영에서 충차衝車와 비슷하게 생긴 물건이 여러 개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을 두꺼운 통나무로 감싸고 좌우에 바퀴가 달린 것까지는 같았지만 일반적인 충차와 달리 층을 높이 쌓지 않았다.

기껏 해 봐야 이 층이 채 되지 않아 이걸로 고부리성의 높다란 성벽을 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는 화차를 보며 야골타는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한편 성벽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조선군과 청군의 싸움은 한층 더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무수한 사상자를 내면서도 악착같이 전진해 온 청군은 공성용 사다리와 갈고리가 달린 밧줄을 던지며 성벽을 집요하게 공략했다.

타탕!

“끄악.”

“어서 올라가!”

“이익.”

그런 청군에 성벽 위의 조선군 병사들은 총과 화살을 쏘거나 비격진천뢰를 집어 던졌다.

“이거나 먹어라!”

꽈아앙!

“꾸엑.”

“컥.”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산을 이루는 가운데 서로 악다구니를 내뱉으며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이관 성주도 사다리를 타고 문루 위로 올라오려는 적병의 머리를 검으로 베어 내면서 목이 터져라 전투를 독려했다.

“절대 적이 성벽 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라!”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곳이 없다는 걸 알기에 조선군 병사들은 온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적을 상대했다.

“성주님, 저길 보십시오!”

또 다른 적병에게 검을 박아 넣었다가 뺀 이관 성주는 부관의 말에 고개를 들어 앞을 봤다.

그러자 한눈에 봐도 수상하게 생긴 화차들이 방패병들한테 둘러싸인 채 꾸물꾸물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뭐야?”

“그, 글쎄요. 충차라고 하기에는 높이가 너무 작고…….”

미간을 좁히며 화차를 노려보던 이관 성주는 찝찝한 마음을 떨쳐 내지 못하고 급히 지시를 내렸다.

“화포를 써서 저걸 박살 내 버려!”

이관 성주의 말에 부관이 곤란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저렇게 움직이는 걸 정확하게 맞추기는 어렵습니다.”

스스로도 부관의 말이 맞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자꾸 뒷골이 당기며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든 이관 성주는 날 선 목소리로 소리쳤다.

“뭐든 상관없으니까 저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으란 말이야!”

“아, 알겠습니다.”

평소와 확연히 다른 이관 성주의 반응에 부관은 덩달아 얼굴을 굳혔다.

잠시 뒤 적군에 조란탄을 퍼붓던 화포 몇 문이 고각을 올려 화차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쏴!”

꽝! 꽝! 꽝!

슈우우웅.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간 포탄은 느리지만 계속해서 움직이는 화차들을 한 번에 맞추지 못하고 들판에 떨어져 뿌연 흙기둥을 만들었다.

“고각을 조금 더 낮춰!”

포술장의 말을 들으며 재빨리 화포를 재장전하던 포수들은 적이 쏜 포탄이 주위로 낙하하자 허겁지겁 성가퀴 뒤로 몸을 엎드렸다.

“포탄이 날아온다!”

“어서 피해.”

꽈꽝! 쿵!

포탄이 떨어지며 조선군 포대가 희뿌연 연기에 휩싸인 걸 본 야골타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조선 놈들이 화차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계속 포격을 퍼부어!”

“옛, 장군.”

부관의 대답을 들으면서 야골타는 다시 천리경을 한쪽 눈에 가져다 대고는 성벽을 천천히 살폈다.

그동안 계속된 포격으로 성한 곳이 하나도 없는 내성은 양측 병사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지금도 성벽을 두고 서로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조선군의 필사적인 저항에 청군은 압도적인 숫자를 가지고도 좀처럼 성을 넘지 못했다.

조선군이 밀어내자 공성용 사다리에 매달린 병사들이 허우적거리면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야골타는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버티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촤악!

“더 힘껏 밀어라! 그래 가지고 언제 성벽에 도착할 수 있겠어.”

고함을 치면서 군관이 채찍을 휘둘러 대자 청군 병사들은 몸을 움찔하며 온 힘을 다해 화차를 밀었다.

“으차! 으차!”

커다란 화차 안에는 한 줄당 열 명씩 모두 서른 명의 청군 병사들이 양쪽에 있는 바퀴를 굴려 앞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개자식, 빨리 가고 싶으면 같이 밀면 될 거 아냐.”

젊은 병사가 투덜거리자 옆에 있던 남자가 군관의 눈치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나무라듯 말했다.

“이봐, 군관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흥. 내 말이 틀렸어요.”

“쯧쯧. 몸은 좀 고달프지만 창 하나만 달랑 들고 뛰어가 화살받이가 되는 것보다 백번 낮잖아.”

“그건 그렇지만…….”

“괜히 찍혀서 내일부터 총탄 세례를 받으며 성벽을 기어 올라가기 싫으면 그냥 얌전히 시키는 대로 해.”

“쳇.”

여전히 불만인 표정을 지으면서도 위험한 공격 부대로 빠지기는 싫은지 입을 다물었다.

그때 날카로운 파공음이 울리더니 포탄이 지근거리에 떨어졌는지 큰 폭음과 함께 충격파에 화차가 흔들거렸다.

쉬우우웅!

꽈아앙!

“어어어.”

“히익.”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오며 겁먹은 청군 병사들이 바닥에 엎드려 몸을 떨자 군관이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뜨리고는 고성을 내질렀다.

“이대로 뒈지기 싫으면 어서 일어나서 화차를 밀어!”

사방이 굵은 통나무로 꽉 막혀 바깥 상황을 볼 수 없었던 청군 병사들은 호통에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다시 화차를 움직였다.

문루에 있던 이관 성주는 포탄이 아슬아슬하게 화차를 빗나가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옆으로 떨어졌으면 맞힐 수 있었는데.”

청군 포병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아군 화포들이 불을 뿜었지만 아직까지 명중탄을 내지 못했다.

그사이 화차들은 부서진 외성 벽을 지나 쉰 보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대로라면 얼마 안 있어서 성벽 아래에 도달할 것이 분명했다.

피어오르는 흙기둥 사이를 지나 거북이처럼 꾸물꾸물 접근해 오는 화차들을 노려보던 이관 성주는 안 되겠는지 다시 명령을 내렸다.

“불화살로 저걸 태워 버려!”

“예.”

한눈에 봐도 두꺼운 통나무로 만들어진 화차 외벽을 탄환으로는 뚫기 힘들어 보였기에 불화살로 태워 버리려는 거였다.

얼마 안 있어 궁수들이 불화살을 쏴 댔다.

슈슈슉!

바람을 가르면서 날아간 불화살들을 이내 화차 지붕에 떨어져 깊숙이 박혔다.

두두둑. 두둑.

수십 발의 불화살이 화차에 명중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원하는 대로 불길이 솟아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옆에 있던 부관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물에 젖은 가죽으로 지붕을 덮어 놓은 것 같습니다.”

“젠장!”

부관의 짐작대로 화공을 예상한 야골타는 화차 지붕과 벽을 물에 흠뻑 젖힌 소가죽으로 덮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불화살을 쏴도 화재를 일으키지 못하고 모두 연기를 피워 올리며 허무하게 꺼지고 말았다.

하지만 성과가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는데 끈질기게 포탄을 쏴 대던 조선군 화포에 왼쪽 성벽으로 접근하던 화차 한 대가 명중됐다.

꽈꽝!

“맞았다!”

“그렇지.”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성을 내지르던 포수들은 이내 바로 이어진 엄청난 폭발에 그대로 몸이 얼어붙었다.

쿠쿠쿵!

시뻘건 불기둥이 솟아오르는 것과 동시에 산산조각 난 파편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주위에 있던 적병들이 모두 폭발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고 폭발이 얼마나 컸는지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성벽이 흔들렸다.

이관 성주는 하늘 높이 치솟은 버섯구름을 보며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이, 이건!”

“안에 화약이 가득 실려 있는 모양입니다!”

순간 이관 성주는 상대가 뭘 노리는 건지 깨달을 수 있었다.

“성벽을 무너뜨리려는 속셈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막아!”

다급한 이관 성주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조선군 병사들을 이제 성벽 바로 밑까지 접근한 화차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포탄에 맞아 터지거나 불이 붙어 폭발하는 것들도 있었지만 세 대는 끝까지 살아남아 성벽 아래까지 도달했다.

쿵.

묵직한 충돌음과 함께 화차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앞쪽에 나 있는 작은 견시창을 열어 위치를 확인한 군관은 한쪽 팔을 내저으면서 소리쳤다.

“다 왔다! 어서 빠져나가.”

이 층이 화약으로 잔뜩 채워진 걸 알고 있던 적병들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밀대에서 손을 놓고 허둥지둥 쪽문을 열고 화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빨리 가!”

서로 구르듯이 마구 뒤엉키며 마지막 남은 병사가 문턱을 넘는 순간, 군관의 손에 들린 부싯돌에서 불꽃이 팍 튀겼다.

심지가 빠르게 타들어 감과 동시에 임무를 마친 군관 역시 부하들의 뒤를 따라 서둘러 화차를 벗어났다.

길게 이어진 심지를 따라 맹렬하게 타들어 간 불꽃이 화약통에 닿는 것과 동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폭음이 일며 화차 내부에 가득 채워져 있던 화약이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콰꽈꽝!

돌 조각과 흙무더기가 사방으로 비산하며 시뻘건 불기둥이 성벽보다 높이 치솟았다.

폭음이 터지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감한 이관 성주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뿌옇게 피어 오른 흙먼지가 가라앉자 청군 진영에서 주위가 떠나갈 듯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

“자, 장군, 성벽이!”

외마디 비명과도 같은 부관의 외침에 고개를 든 이관 성주는 성벽 한쪽이 허물어져 구멍이 뚫려 있는 걸 보고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끄으응.”

절망감에 휩싸인 조선군과 달리 드디어 성을 함락할 절호의 기회를 얻은 청군은 기세를 올렸다.

특히 말 위에 앉아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야골타는 성벽이 무너진 걸 확인하자마자 눈을 번뜩였다.

그러고는 주위에 있는 휘하 장수들을 돌아보며 크게 명령을 내렸다.

“공격! 포로는 필요 없다. 눈에 띄는 건 가축까지 모조리 다 죽여 버려라!”

섬뜩한 지시에 대기 중이던 청군 병사들은 함성을 내지르면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와아!”

수만에 달하는 적병이 몰려오는 모습은 마치 거대한 해일이 밀어닥치는 것 같았다.

성벽 위에 있는 조선군 병사들은 지금까지 잘 버텨 왔지만 그걸 보고 크게 술렁였고 군관들마저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이관 성주 또한 엄청나게 몰려오는 적군과 허물어진 성벽을 보는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결연한 표정을 지은 이관 성주는 피 묻은 검을 치켜들며 주춤거리는 병사들의 용기를 복돋웠다.

“각자 위치를 지켜라! 비록 성벽이 일부 무너졌지만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보다 더한 것도 이겨 냈으니 이번에도 성을 지켜 낼 수 있다!”

금방이라도 전투 대열이 무너질 것처럼 두려워하던 조선군 병사들은 이관 성주의 외침에 각자 가지고 있는 무기를 꽉 움켜쥐면서 마지막 용기를 냈다.

“씨발, 어차피 이판사판이여!”

“그래, 도망친다고 해도 갈 곳도 없잖아.”

“맞아!”

“죽을 때 죽더라도 청나라 놈을 한 명이라도 더 데리고 가자고!”

이관 성주는 물론이고 병사들도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적을 맞이했다.

☆ ☆ ☆

도르곤은 청군 진영 중앙에 수십 명이 들어가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천막을 쳐 놓고 그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머리 위로는 두꺼운 가리개가 햇빛을 차단해 주고 있었으나, 전장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열기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는 두 다리를 벌리고 당당하게 어깨를 쭉 편 채 팔을 꼰 자세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청군과 조선군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며 상황을 살피던 그는 마침내 성벽이 무너지고 병사들이 개미 떼처럼 달려들자 눈동자를 형형하게 빛냈다.

“이번엔 꽤 자신 있어 하더니, 결국 야골타 장군이 앙갚음을 제대로 해 주는군.”

줄곧 한일자로 다물려 있던 입매가 위로 휙 올라가 호선을 그렸다.

모처럼 좋아 보이는 기분에 이때를 놓칠세라 옆에 시립해 있던 내관이 재빨리 첨언했다.

“그러게 말이옵니다.”

“흠.”

별다른 대꾸 없이 도르곤은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곧바로 그의 황금 잔에 넘치도록 술이 따라지고, 한입 꿀꺽 삼킨 도르곤이 시선을 용골대에게 돌리면서 말했다.

“장군이 보기엔 어떤가?”

용골대는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속으로 숨을 삼켰다.

비록 사이가 나쁜 야골타가 공을 세우게 된 것이 탐탁지 않긴 했지만 그걸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어쨌든 공적은 그의 것이고 아군에 큰 도움이 될 것도 사실이니 여기선 그저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나으리라.

“화차를 이용한 공격이 제대로 먹힌 것 같사옵니다.”

“맞아. 그 생각을 왜 지금껏 못했는지 통탄할 노릇이야. 그렇지 않은가!”

도르곤은 무릎까지 치며 야골타를 칭찬했다.

“큰 공적을 세웠으니 나중에 돌아오면 상을 내려야 되겠군.”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용골대를 비롯한 다른 장수들이 입을 모아 맞장구를 쳤다.

도르곤은 다시 한 번 잔에 술잔을 가득 따르라 명하며 저 멀리서 불타고 있는 성벽을 바라보았다.

마치 노을이 지고 있는 것처럼 진홍빛을 띤 하늘 아래 일렁이는 불꽃과 검은 연기가 흩날리고 있었다.

“그동안 발목을 잡고 있던 고부리성을 함락시켰으니 이대로 한양까지 거침없이 진격해 들어가면 되겠군.”

이제 청군의 기세를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도르곤은 크게 광소했다.

쏟아져 들어오는 청군을 맞아 이관 성주와 조선군 병사들이 분전奮戰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양군이 서로 뒤엉킨 데다 조선군은 화포를 재장전할 여유조차 없었기에 더 이상 포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포수들은 화포를 쏘는 대신 밀대를 비롯해 손에 잡히는 건 아무거나 집어 들고 성벽 위로 올라온 적군과 몸싸움을 벌였다.

“죽어!”

퍼억!

“커헉.”

총을 쏘던 병사들은 착검을 할 틈도 없이 달려드는 적과 어울려 난전을 벌여야 했고 성벽 위는 비명과 시뻘건 피로 가득 찼다.

서걱.

“꾸엑!”

검을 휘둘러 또 한 명의 적을 쓰러뜨린 이관 성주는 문루 기둥에 기댄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좌우를 둘러봤다.

주위를 지키던 아군이 하나둘 목숨을 잃고 이제 남아 있는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에 비해 적군은 아무리 죽여도 줄어들지 않고 계속해서 몰려왔다.

무너진 성벽을 통해 적들이 들어와 내성 곳곳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는 걸 보고 여기까지가 한계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이관 성주는 막 문루로 올라오려는 청병의 가슴에 검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고 뽑고 있는 부관을 불렀다.

“부관.”

“예.”

“아무래도 이제 틀린 것 같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싸움을 끝낼 때가 됐다는 말일세.”

“성주님!”

안타까운 시선으로 부관이 바라보는 가운데 이관 성주는 이야기를 이었다.

“자네가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네.”

“그게 무엇입니까?”

“비록 성을 내주더라도 내성 창고에 가득 쌓여 있는 군량과 군수품을 적들에게 넘겨줄 수는 없지 않겠나.”

“하면?”

“적들이 손을 쓰기 전에 자네가 병사들을 이끌고 가서 모두 불태워 버리도록 하게.”

“그러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퇴로를 뚫어 성을 빠져나가시지요.”

부관의 말에 이관 성주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됐네. 성주인 내가 성을 버리고 어딜 간단 말인가.”

“하지만…….”

“대조선 제국의 장수로서 부끄럽지 않은 최후를 맞고 싶네.”

이미 이곳에서 죽기를 각오한 걸 깨달은 부관은 감정이 벅차올랐다.

“성주님…….”

“마지막까지 자네한테 어려운 일을 맡기는 것 같아, 미안하이.”

“아닙니다.”

이관 성주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자 부관은 결연한 얼굴로 마지막 군례를 올렸다.

“임무를 완수하고 하늘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그러세.”

부관이 십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문루를 내려가자 이관 성주는 몸을 돌려 주위를 찬찬히 둘러봤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고부리성은 예전의 위용이 넘치는 단단한 모습이 아니었다.

군데군데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던 성벽은 부서지고 갈라진 채 흉한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단 한 명의 도주병도 없이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던 병사들도 다 어디로 가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성벽 위는 적들로 가득했고 간혹 조선군 병사들이 힘겹게 저항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지만 그리 오래 버티기는 힘들어 보였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군.”

허탈감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수십만에 달하는 청군을 상대로 고부리성을 지켜 내는 건 어려운 임무였다.

그렇다고 장수된 자가 비겁하게 상황이 불리하다고 대충 시늉만 하고 물러서거나 적에게 항복할 수는 없었다.

죽기를 각오로 적과 싸웠고 실제로 한 달이 넘도록 적을 막아 내면서 그 옛날 당나라에 좌절감을 안겨 줬던 안시성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외성이 무너지더니 결국 오늘은 내성까지 청군의 침입을 허용하고 만 것이다.

공성전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어느 정도는 예상한 결과라고 해도 이관 성주는 너무나도 분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제대로 지휘를 하지 못해 부하들을 죽게 만드는 것 같아 미안하고 면목이 없었다.

그런 상념도 잠시.

겨우 버티던 병사들 사이를 뚫고 적이 하나둘 문루 위로 올라오자 크게 숨을 내뱉은 이관 성주는 형형한 안광을 번득이며 크게 소리쳤다.

“내가 고부리성의 성주 이관이다. 다 덤벼라!”

그러고는 마지막 힘까지 모두 짜내 적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최후의 순간까지 당당함을 잃지 않고 갑옷을 피로 물들인 채 적과 싸우는 이관 성주의 모습은 비장감마저 느껴졌다.

한편 문루를 내려와 내성 창고로 달려가던 부관은 등 뒤에서 들리는 이관 성주의 외침에 울컥 눈물이 흘러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뒤에 남은 동료들의 운명이 어찌 될지 알고 있었기에 침울한 얼굴을 했다.

그걸 본 부관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딱딱하게 굳은 어투로 입을 열었다.

“성주님과 전우들의 희생을 헛되게 만들지 말자!”

“옛.”

부관과 병사들은 곧장 내성 깊숙한 곳에 위치한 창고로 뛰어갔다.

그동안 공성전을 치르면서 많이 소모했지만 애초에 일 년 이상 버틸 수 있도록 물자를 비축해 놨었기에 창고에는 아직 대부분 보급품들이 가득 차 있었다.

청군의 함성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자 부관은 다급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흩어져서 최대한 많은 곳에 불을 질러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사들은 창고 문을 활짝 열고는 쌓여 있는 군량과 보급품에 불을 놨다.

부관도 횃불을 들고 화약을 놔둔 곳으로 갔다.

끼이익.

어두운 창고 안에 나무로 만든 화약통과 포탄 상자가 빼곡히 들어차 있는 걸 본 부관은 망설임 없이 횃불을 던졌다.

화르르륵.

불은 순식간에 크게 타올랐고 부관은 검을 빼 든 채 행여나 누군가 들어와 불을 끄지 못하도록 입구를 단단히 지켰다.

힐끗 고개를 돌린 부관은 적들이 개미 떼처럼 새까맣게 문루를 둘러싸고 있는 걸 보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장군 모시는 동안 즐거웠습니다. 이제 곧 뒤따라 갈테니 기다리십시오.”

그 순간 엄청난 폭음이 울리면서 창고 밖으로 터져 나온 시뻘건 화염이 부관의 몸을 뒤덮었다.

꽈아아앙!

검을 크게 휘둘러 적들과 거리를 벌인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이관 성주는 귀를 울리는 폭음과 함께 창고가 있는 곳에서 불기둥이 치솟자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어느새 문루 안까지 적이 들어오고 주위를 지키던 병사들 상당수가 차가운 시신이 되어 바닥에 누워 있었지만 마무리를 확실히 지은 것에 그는 안도했다.

이제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에 힘이 빠진 것일까 강렬한 고통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푹.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적병 하나가 검을 그의 목에 박아 넣고 희열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게 신호라도 됐는지 적군의 무기가 연이어 몸을 파고들었고 최후의 순간까지 검을 손에 놓지 않고 싸우던 이관 성주는 무릎을 땅에 대며 최후를 맞이했다.

털썩.

쓰러진 이관 성주의 넋을 위로하듯 보급품 창고에서 시작된 불은 사방으로 옮겨붙으면서 고부리성 전체를 태워 버릴 듯 활활 타올랐다.

그렇게 정확히 사십이 일간 계속된 고부리성 전투는 이관 성주 이하 수비대 전원이 전멸하는 걸로 끝이 났다.

비록 성을 함락시키기는 했지만 오랜 시간 발목이 잡혀 있은 데다가 수만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고 마지막 순간 조선군이 비축해 놓은 보급품을 모두 불태워 버려 전리품까지 제대로 얻지 못한 청군은 상처뿐인 승리였다.

무엇보다 청군 진영을 무겁게 짓누르는 건 고부리성이 끝이 아니라 이제 첫 걸음을 뗐다는 것이었다.

☆ ☆ ☆

“폐하,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사옵니다.”

회의실 탁자에 지도를 펼쳐 놓고 장수들과 작전을 논의하고 있던 도현은 김덕술의 말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무슨 일인가?”

“그것이…… 고부리성이 청군에 함락됐다고 하옵니다.”

“……!”

큰 충격에 순간 회의실 안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어려운 싸움이라는 걸 알았지만 지금까지 이관 성주가 잘 버텨 줬기에 조선군이 반격에 나설 때까지 성을 지켜 낼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이내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도현이 굳은 얼굴로 김덕술을 보며 말했다.

“그게 사실인가?”

“예. 방금 인근 성에서 보낸 전령이 도착해 소식을 알려 왔습니다.”

“으음.”

낮게 침음성을 흘린 도현은 말을 이었다.

“이관 성주는 어찌 됐나?”

“끝까지 싸우시다가 병사들과 운명을 같이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군.”

우직하면서도 책임감이 남다른 이관 성주였기에 충분히 그랬을 거라 짐작됐다.

마지막까지 성을 지킨 것이 대견하면서도 뛰어난 장수를 잃은 것에 그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관 성주는 물론이고 고부리성에서 운명을 달리한 병사들 중에 어느 하나 하찮은 목숨이 있으랴.

착잡하고 미안한 감정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으나 황제인 도현은 언제까지 그런 감정에 싸여 있을 수는 없었다.

“알았으니 물러가도록 해.”

“예.”

허리를 숙인 김덕술이 뒷걸음질로 회의실을 나가자 도현은 좌중을 둘러보며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상황은 들어서 알 테니 이제 청군이 어떻게 움직일 것 같소?”

그러자 오른편에 있던 남두병 사령관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먼저 대답했다.

“고부리성이 무너졌으니 이제 요동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지만, 영원성을 그냥 두면 측면을 공격당할 수도 있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테니까 먼저 여길 치려고 들 것이옵니다.”

“맞습니다.”

다른 장수들도 남두병 사령관의 이야기에 동의를 하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바보가 아닌 이상 영원성을 그냥 지나치지는 않겠지. 거기다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는 먹잇감도 있으니 더욱 그럴 거야.”

그 먹잇감이 바로 도현 자신이라는 건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다들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대소신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굳이 한양을 떠나 영원성까지 친정을 나선 건 바로 이런 점을 노린 것도 있었다.

황제인 도현이 최전선에 있음으로써 아군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갈 뿐만 아니라 조선군 주력이 격파되지 않는 이상 전쟁이 요하 서쪽으로 한정돼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

“문제는 청군이 여기까지 오는 길에 산재해 있는 여러 성들을 하나하나 치고 진격할지 아니면 견제 병력을 놔두고 그대로 진격해 올 것인지 하는 건데…….”

탁자에 펼쳐져 있는 지도에 시선을 주면서 도현이 중얼거리자 근위 군단장인 박영식이 의견을 말했다.

“고부리성에 비해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숫자도 네 개에 공격하기 쉬운 평지에 있는 성이니 다 정리를 하면서 진격해 오지 않겠사옵니까?”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남두병 사령관이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런 점 때문에 오히려 병력을 나눠 일부로 공성전을 벌이게 하고 주력은 바로 영원성으로 진격해 가능성이 크옵니다.”

“우회를 하지 않고 사십 일 넘게 고부리성을 공격했었는데 적이 후방을 취약하게 만들려고 하겠소?”

“상황이 다르니 청군도 다르게 움직인다는 겁니다.”

“뭐가 다르다는 거요?”

박영식 장군이 똑바로 쳐다보면서 묻자 남두병 사령관은 차분한 태도로 이유를 설명했다.

“고부리성은 지리적으로 산해관을 마주 보고 있어서 진격로를 바로 막고 있지만, 다른 성들은 충분히 우회를 할 수 있는 데다 그리 많지 않은 병력으로도 충분히 상대를 할 수 있으니 굳이 힘을 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잠시 말을 끊고 도현과 참석자들을 둘러본 남두병 사령관은 손가락으로 지도 한쪽에 놓여 있는 청군 깃발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이었다.

“이번에 새로 합류할 걸로 파악된 죄수 부대만 가지고도 충분히 네 개 성을 포위할 수 있을 겁니다.”

“하긴 죄수 부대 병력이 십만이라니 그럴 수도 있겠군.”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도현이 남두병 사령관의 말에 동의하자 장수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비록 고부리성이 함락됐지만 중간에 성이 네 개나 있었기에 아직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청군이 곧장 이리로 올 것이라고 하니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적을 맞이할 준비는 다 끝났겠지?”

도현의 시선을 받은 남두병 사령관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대답했다.

“물론이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청군을 상대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사옵니다.”

“좋아. 그대로 놓친 부분이 있을지 모르니 다시 한 번 꼼꼼히 점검하도록 하게.”

“예.”

“그리고 총참모부에서 보낸 병력은 언제쯤 도착할 것 같나?”

총참모부 소속 군관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심양성에 거의 집결이 끝났다는 전갈이 왔으니 늦어도 내달 초에는 당도할 것이옵니다.”

“내달 초라…… 그럼 일주일 정도 남았군.”

“그렇사옵니다.”

지휘봉 끝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잠시 고심하던 도현은 이내 시선을 들며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증원 병력이 도착하면 즉시 진虎호 작전을 개시할 것이니 그렇게 알고 다들 만반의 태세를 갖추도록 하라!”

“옛, 폐하.”

장수들이 우렁찬 대답과 함께 허리를 깊숙이 숙인 가운데 도현은 지도 한쪽에 놓여 있는 청군 깃발을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한편 고부리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은 영원성을 거쳐 한양에 위치한 주작단 본 단에도 알려졌다.

이미 밤이 깊은 시각이라 본단 내부 깊숙한 곳에 위치한 이완 단장의 집무실엔 호롱불 빛만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방도 주인을 닮는다더니 실내는 딱 필요한 만큼의 가구만 놓여 있어 자질구레한 물건이라곤 단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흑단으로 만들어 검고 윤이 나는 목제 책상 앞에 앉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단원들이 보내온 보고서를 읽고 있던 이완 단장은 종이를 넘기던 손을 멈추고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문 쪽을 응시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금방 바깥에서 누군가가 고해 왔다.

“단장님,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게.”

방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내 안으로 심복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며 묻는 눈빛에 그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머뭇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입을 떼었다.

“……고부리성이 함락되었습니다.”

“……!”

담담한 이완 단장의 얼굴에 순간 경악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크게 동요한 것도 잠시, 그는 언제 놀랐냐는 듯 다시 얼굴 표정을 갈무리하고 말했다.

“그럼 청군이 곧 영원성을 치려고 하겠군.”

“예. 그리고…….”

부하는 참담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이관 성주님께서도 전사하셨다 합니다.”

“그렇군.”

이것이 과연 혈육의 죽음을 전해 들은 사람의 반응인가 싶을 정도로 그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성이 함락되었으니 성주인 녀석이 무사히 있을 리가 없지.”

그는 마치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이에 부고 소식을 전한 부하가 오히려 당황하여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한 나라의 장수로서 맡은 바 소임을 당하고 장렬하게 전사했으니 오히려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닌가.”

“하오나…….”

“공과 사는 철저히 구별하는 게 우리 주작단의 원칙이다. 그걸 잊지 말게.”

주작단에 입단할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듣던 소리니 잊어버릴 턱이 없다.

하지만 정녕 이럴 때조차도 흐트러짐 없는 이완 단장의 모습은 실로 존경스럽기도 했고 약간 냉정하게 보이기도 했다.

만약 자신이 가족의 죽음을 앞에 둔다면 똑같이 행동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진 부하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보다 우리에겐 해야만 하는 일이 있지 않나.”

이완 단장은 부하를 향해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이제부턴 청군의 공세가 더욱 더 거세질 테지. 그것에 철저히 대비해야 할 것이야.”

“예.”

“그럼 더 할 말 없으면 물러가게.”

부하가 나간 뒤 혼자 남은 이완 단장은 입에서 길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쉬었다.

동생의 전사 소식을 듣는 순간 호흡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숨을 멈추고 있었던 것이다.

가늘게 떨리는 손끝을 내려다보니 종이가 걸레짝처럼 우그러져 있었고 식은땀이 배어 나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보고서를 읽던 자세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진 몸 또한 마치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기만 했다.

“관아, 관아…….”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마지막으로 보았던 동생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헤어질 때 술이라도 함께할 걸 그랬구나. 너와 함께라면 하룻밤을 꼬박 새어도 아깝지 않았을 텐데…….’

하다못해 동생의 가는 길이 고통스럽지 않았기만을 바라며 이완 단장은 찢어지는 가슴을 움켜쥐고 그대로 마른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어 버렸다.

남두병 사령관의 예상대로 고부리성을 함락시킨 도르곤은 하루를 쉬며 병력을 재편성한 뒤 곧장 영원성을 향해 진격했다.

중간에 흩어져 있는 성에는 각각 삼만씩 병력을 보내 조선군이 함부로 나와 후방을 교란시키지 못하도록 했다.

그렇게 십이만을 빼고도 영원성으로 진격하는 청군 본대의 규모는 사십만이 넘었다.

그에 비해 영원성을 지키는 조선군 병력은 십만이 겨우 넘어 무려 네 배나 차이가 났다.

모든 것들이 불리한 가운데 그나마 조선군이 믿을 수 있는 건 높고 튼튼한 성벽과 팔십 문에 달하는 각종 화포들이었다.

특히 새로 개발한 충무포에 거는 기대가 컸다.

갑옷을 모두 갖춰 입고 머리에 투구까지 쓴 도현은 아침부터 성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방어 태세를 직접 점검했다.

지금은 해자垓子를 넓히는 작업을 둘러보고 있었다.

“깊이가 얼마나 되지?”

바짝 긴장한 얼굴로 서 있던 장수가 도현의 물음에 재깍 대답했다.

“현재 열 자(3미터)가 조금 넘사옵고 앞으로 열석 자까지 팔 계획이옵니다.”

“흐음. 부족한 감이 있지만 어쩔 수 없지. 대신 바닥에 죽창을 촘촘히 박아 넣고 폭도 더 넓히도록 해.”

“알겠사옵니다.”

중요한 군사 요충지인 만큼 기존에 만들어 놓은 해자가 존재했지만 조선군이 성을 함락시킬 때 많이 손상되고 무너져 제 역할을 못 할 정도였다.

그동안은 성벽을 복구하느라 미처 신경을 못 썼는데 청나라와의 전쟁을 앞두고 부랴부랴 다시 복구했다.

하지만 도현의 마음에 차지 않아 다시 병사들을 투입해 해자를 보강하는 작업을 서둘러 진행하고 있었다.

“공성전이 벌어지면 해자가 적을 막는 일 차 저지선이 될 테니 각별히 신경을 써야 될 것이야.”

“염려 마시옵소서.”

걸음을 옮겨 문루 위로 올라온 도현은 멀리 북동쪽 벌판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청군이 어디까지 왔다고 했지?”

그러자 뒤쪽에 서 있던 칠현이 얼른 대답했다.

“어제 조양에 진을 쳤다고 하옵니다.”

“그럼 조만간 도착하겠군.”

“예.”

철저히 준비를 했고 한양을 나설 때부터 각오를 단단히 다졌지만 막상 청나라 대군과 일전을 앞두고 있으니 좀처럼 긴장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때 지평선 한쪽에서 뿌연 먼지 구름이 피어오르는 걸 본 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저게 뭐지?”

“글쎄요.”

망루에 배치된 견시병도 먼지 구름을 목격했는지 비상을 알리는 징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러자 해자를 파고 있던 병사들이 작업을 멈추고 급히 한쪽에 놔둔 병장기를 챙겨 들었고 막사에서 대기 병력이 뛰어나와 성벽 위로 올라왔다.

순식간에 전투태세를 갖추는 병사들을 보고 흡족한 표정을 짓던 도현은 이내 긴장한 눈빛으로 지평선을 바라봤다.

“적이 도착하라면 아직 멀었을 텐데.”

“그러게 말이옵니다.”

“일단 작업 중인 병력을 모두 성 안으로 들이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토록 하라!”

“옛.”

지시를 받은 위사가 문루를 내려가고 얼마 있지 않아서 해자 작업을 하던 병력이 질서 정연하게 성안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남두병 사령관을 비롯한 장수들이 급보를 받고 급히 문루로 달려왔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먼지 구름의 정체를 살피러 갔던 척후병이 말을 타고 돌아왔다.

척후병이 문루로 올라오자 도현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적이냐, 아군이야?”

한쪽 무릎을 바닥이 꿇은 채로 고개를 숙인 척후병은 숨을 가볍게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아군이옵니다.”

“그게 정말이냐?”

“예. 신인석 장군께서 지휘하시는 증원 병력이옵니다.”

“오. 그래.”

그제야 도현의 표정이 밝아졌고 주위에 있던 장수들도 긴장을 풀었다.

잠시 뒤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기병 일만 명은 해자 근처에서 멈춰 섰고 십여 명의 인영이 행렬에서 빠져나와 성안으로 들어왔다.

“충. 신 신인석, 황제 폐하를 뵙사옵니다.”

전장이었기에 예를 다 갖추지 않고 신인석 장군이 절도 있는 자세로 군례를 올리자 도현은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어서 오게. 예정보다 반나절이나 더 빨리 도착했군.”

“전황이 안 좋다는 소식에 조금 서둘렀사옵니다.”

“잘했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을 테니 우선 병사들을 쉬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신인석 장군과 휘하 군관들의 갑옷에 묻어 있는 뿌연 먼지만 봐도 이들이 얼마나 급하게 움직였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아군임이 확인되자 만약을 위해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렸고 기병들은 천천히 열을 지어 안으로 들어왔다.

도현이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 때 남두병 사령관이 다가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기병 전력이 부족해 걱정이었는데 딱 때를 맞춰서 도착했사옵니다.”

“그러게 말이야.”

별동대가 적이 파 놓은 함정에 빠져 괴멸당하는 바람에 조선군의 기병 전력은 절대적인 열세에 처해 있었다.

당장 방어전에서는 큰 문제가 안 됐지만 차후 대대적인 반격에 나설 때 빠른 기동력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돌파 부대 역할을 수행할 기병의 부재는 상당한 약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심이 많던 차에 충분하지는 않아도 때맞춰서 일만이나 되는 기병이 도착하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다시 병사들이 나가 해자를 파는 작업을 계속했고 성벽 위도 이런저런 보강 공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정확히 이틀 뒤 청나라 대군이 뿌연 먼지와 수많은 깃발을 휘날리면서 영원성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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