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각 (101/104)

* 퇴각

“열어라!”

“옛.”

뒤에 있던 군관이 김진석의 말에 앞으로 나와 커다란 도끼로 손잡이에 걸려 있는 자물쇠를 내려쳐 부쉈다.

덜컹.

굳게 닫혀 있던 나무 문을 병사들이 힘들게 잡아당겼다.

육중한 소리와 함께 양옆으로 문을 열어젖히자 바깥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창고 내부를 희미하게 비췄다.

끼이익.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보니 나풀거리는 흰 먼지들 사이로 바닥부터 천장까지 꽉 들어차 있는 쌀가마들이 보였다.

김진석은 한쪽 손을 들어 코를 틀어막고 그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섰다.

그러고는 좌우에 가득 쌓여 있는 쌀가마니를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대단하군.”

“수십만 명을 먹일 군량이니 이 정도는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 말고도 군량 창고가 백 개나 더 있다고 합니다.”

“하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엄청난 규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애써 끌어 모은 군량을 몽땅 다 우리한테 빼앗겼으니 청 황제가 속이 좀 쓰리겠군,”

“아주 분해서 잠이 안 올 겁니다.”

“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린 김진석은 잔뜩 고무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아군이 쓸 것이니 하나도 빼놓지 말고 남아 있는 보급품들을 전부 다 파악해 보고토록 하게.”

“예.”

부관의 대답을 들으면서 김진석은 흡족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찬찬히 창고 안을 둘러봤다.

청군의 보급 집결지인 만큼 수십만 석의 군량과 화약을 비롯한 각종 병장기 그리고 피복류까지 엄청난 수량의 물자가 노획됐다.

이렇게 확보된 노획품들은 고스란히 조선군의 손에 들어가 다시 청나라를 공격하는 데 쓰이게 됐다.

조선군이 기습 상륙을 해 당산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영원성에서 혈투를 벌이고 있는 도르곤의 귀에도 들어갔다.

☆ ☆ ☆

“지금 뭐라고 했나!”

도르곤이 경악에 찬 얼굴로 되묻자 보고를 하러 온 군관은 연신 그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다, 당산성이 조선군에 함락 당했다고 하옵니다.”

“산해관 너머에 있는 당산성이 어떻게 조선 놈들한테 넘어갔다는 거야!”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도르곤이 그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면서 다그치자 군관은 등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조선군이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와 상륙을…….”

거기까지 말했을 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도르곤이 눈을 무섭게 치켜뜨고는 천막이 떠나가라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도대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북경에 있는 것들은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송구하옵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그저 안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는 이유로 군관이 불호령을 몽땅 다 뒤집어쓰는 가운데 옆에 있던 용골대가 굳은 얼굴로 다급히 물었다.

“당산에 모아 둔 보급 물자들은 어찌 됐다던가?”

“모두 조선군의 손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전부 다 말인가!”

“……예.”

지휘 천막 안이 크게 술렁이며 모여 있던 장수들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북경에서는 그걸 그냥 보고만 있단 말이냐!”

“그것까지는 아직 소식이 들어오지 않아 잘 모르겠사옵니다.”

“에잉!”

도르곤이 얼굴을 구기자 용골대가 한쪽 팔을 내저으며 군관에게 말했다.

“알았으니 더 보고할 것이 없으면 그만 나가 보게.”

“네.”

좌불안석이던 군관은 용골대의 말에 반색을 하고는 얼른 예를 갖추며 지휘 천막 밖으로 물러났다.

무거운 침묵이 흐리는 가운데 장수들은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도르곤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도르곤이 약간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현재 진영에 보급품이 얼마나 남아 있지?”

보급을 맡은 장수는 도르고의 시선에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한 달 정도는 버틸 수 있는 보급품이 있습니다만…….”

“답답해 죽겠군. 어서 속 시원하게 말을 하지 못하겠나!”

“아, 예.”

호통을 들은 장수는 더욱 긴장해 어깨를 살짝 움츠린 채 이야기를 이었다.

“문제는 홍이포에 쓸 화약과 포탄이 부족하다는 것이옵니다.”

“뭐라?”

“그동안 계속된 격렬한 포격전에 소모량이 예상보다 커서 현재처럼 쓴다면 보름을 채 넘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럼 미리 보충했었어야지!”

손바닥으로 앉아 있는 황좌 팔걸이를 내려치며 도르곤이 언성을 높이자 장수는 진땀을 흘리며 변명을 늘어놨다.

“본국에 급히 화약과 포탄을 보내라고 재촉을 했사옵니다.”

“그런데 왜 이런 거야!”

“새로 보내 주기로 한 물자들이 당산성을 출발하기 전에 함락이 되는 바람에…….”

차마 뒷말을 다 잇지 못하고 장수가 끝을 흐리자 도르곤은 앓는 소리를 내며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끄으응.”

많은 희생을 치르고 해자를 메우는 데 성공했으나 여전히 조선군의 막강한 화력에 막혀 고전 중인 상황에서 그나마 맞대응할 수 있는 수단인 홍이포를 못 쓴다면 아예 공성전을 포기해야 될지도 몰랐다.

다른 장수들도 그걸 아는지 당산성이 함락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더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북경에 연락해서 급히 물자를 보내라고 하면 되지 않나?”

반대편에 서 있던 야골타가 끼어들며 말하자 장수는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화약과 포탄은 필요하다고 금방 만들어 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서 당장 그만한 물량을 구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하면 각 군영에 보관 중인 것들이라도 우선 가져와 쓰면 될 것이 아닌가!”

“당산성에 있던 것들이 그렇게 모은 겁니다.”

“이런…….”

마지막 말에 여기저기서 한탄이 쏟아졌다.

조선을 치기 위해 청나라도 많은 준비를 했지만 고부리성에 이어 영원성까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한 저항에 부딪치면서 처음 세웠던 계획이 크게 어긋났다.

화약과 포탄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오히려 전투가 격렬해지면서 소모량이 빠르게 늘어나 보급에 압박을 주고 있었다.

“그래서 이대로 손을 놓고 있겠다는 거야!”

화가 치밀어 오른 도르곤이 사나운 어투로 소리를 치자 장수들은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자 아까부터 한껏 인상을 찌푸린 채 고심에 찬 표정을 짓고 있던 용골대가 도르곤을 보며 이야기를 했다.

“폐하, 일단 지금부터 화약과 포탄 사용을 가능한 한 줄이며 병기창에서 물량이 생산될 때까지 후방에 남아 있는 것들을 최대한 가져와 부족한 양을 메워야 될 것 같사옵니다.”

“그러면 공성전이 어려워지지 않겠나.”

도르곤의 지적에 용골대는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현재로서는 이것 말고는 달리 마땅한 방법이 없사옵니다.”

“후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은 도르곤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실행하라.”

“예.”

애써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했으나 도르곤은 크나큰 분노가 얼굴에 일렁이는 걸 다 감추지 못했다.

☆ ☆ ☆

모든 일에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청군 진영과 달리 영원성의 조선군 본진은 당산성을 함락했다는 소식에 사기가 크게 올랐다.

“노획한 물자가 그렇게 많단 말이지?”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있는 도현의 물음에 남두병 사령관이 잔뜩 고무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상륙군이 다 쓰고도 남을 정도라 예정되어 있던 보급품 수송을 전부 취소했다고 하옵니다.”

“하하하! 그래.”

전쟁만큼 엄청난 재화가 소모되는 것도 없었다.

그래서 역사를 살펴보면 전쟁에 이겨 놓고도 막대한 전비戰費에 나라가 휘정거리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어왔다.

특히나 화약 무기가 주력 병기로 등장하면서 이런 전쟁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해상 무역과 국력 신장으로 그동안 많은 부를 쌓은 조선이었지만 청과의 전쟁에 들어가는 자금이 부담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당산성에서 엄청난 물량의 노획물을 확보해 그런 부담을 상당 부분 덜게 됐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손 통제사께서 수군 함대를 북상시켜 직접 산해관을 치려 한다는 말도 전해 왔사옵니다.”

“산해관을?”

“그렇사옵니다.”

상체를 살짝 앞으로 숙이며 도현이 관심을 보이자 함께 있던 박영식 장군이 자연스럽게 끼어들며 말했다.

“전쟁 전에 총참모부에서 그런 비슷한 의견이 있었지 않사옵니까?”

“그래 생각이 나는 것 같구먼.”

기억을 더듬어 본 도현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수군이 당산성에 이어서 산해관까지 공략한다면 설사 함락을 시키지 못하더라도 장성 밖에 나와 있는 청군을 상당히 흔들게 될 것이옵니다.”

남두병 사령관의 말에 박영식 장군도 동의하면서 이야기를 덧붙였다.

“신도 같은 생각이옵니다. 후방이 흔들리고 보급에 차질이 생긴다면 뒤가 불안해진 도르곤도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흐음.”

한쪽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면서 도현은 잠시 고심을 했다.

산해관을 공격하는 건 도르곤이 있는 청군 본진을 고립시킨 뒤 일거에 격파해 버리려는 원래 계획과 정확히 들어맞는 일이었다.

고개를 든 도현은 눈을 반짝 빛내면서 말했다.

“나쁘지 않은 생각 같군.”

“하면 허락하시는 것이옵니까?”

“도르곤을 압박할 좋은 기회인데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지 않겠어.”

“맞사옵니다.”

“대신 손 통제사한테 너무 무리는 하지 말라고 전하게.”

“예.”

상체를 바로 한 도현은 진지하게 표정을 굳힌 채 다시 입을 열었다.

“도총관이 이끄는 병력이 어디까지 왔다고 했지?”

“요하를 건너 내일이면 부신현阜新縣에 도착한다고 했사옵니다.”

“이제 지척까지 다 왔군.”

“그렇사옵니다.”

조금 무리를 해서 행군할 경우 늦어도 사나흘이면 영원성까지 올 수 있는 거리였다.

“일이 아주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는군. 아주 좋아!”

오랜만에 도현은 회의실이 떠나가라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고 장수들도 표정이 밝았다.

한편 요서에 있는 청군 본영 못지않게 북경도 큰 충격과 혼란에 빠져 있었다.

당산성과 주변 지역이 함락됐다는 것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십만에 달하는 조선군이 추가로 상륙했다는 소식이 연이어 전해지자 청국 조정은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흔들거렸다.

여기에 인근 촌락과 성읍의 주민들이 전란을 피해 하루에도 수천 명씩 줄을 지어 북경으로 몰려들면서 불안감에 기름을 부었다.

조선군이 순식간에 당산성과 주변을 점령했고 청군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소문을 마구 퍼뜨려 혼란이 더욱 커졌다.

특히나 조선군이 반항하는 자는 절대 용서를 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죽이며 약탈한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공포심은 극에 달했다.

물론 상당히 과장된 측면이 많았다.

육전대에 이어 십만에 달하는 병력이 추가로 상륙한 건 맞지만 절반 가까이가 조선군이 아닌 왜국 용병들이었다.

부족한 병력을 매우기 위해 왜국 용병들을 고용한 거였는데 약탈과 살인 같은 일도 군기가 엄정한 조선군이 아닌 이들이 저지른 행동이었다.

조선군이 봐도 심하다 싶은 경우가 많았으나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태에서 승기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상대가 감히 덤벼들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공포를 주는 거였기에 모르는 척 눈을 감았다.

여기에 주작단의 공작이 더해졌다.

이렇게 되자 붙어 보기도 전에 지례 겁을 먹은 청국 조정은 반격을 가해 당산성을 비롯한 점령지를 탈환할 생각을 접고 성문을 굳게 잠그고는 북경성 안에 틀어박혀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덕분에 가장 취약한 상륙 초기를 무사히 넘기고 교두보를 확실히 다진 조선군은 서쪽으로 천천히 진격하며 북경을 압박했다.

원래대로 한다면 팔기군을 포함해 청군 주력이 모여 있어야 되는 것이 북경이었으나 조선을 치기 위해 도르곤이 정예병들을 싹싹 긁어 가 버려서 남아 있는 건 장비와 훈련이 빈약한 향용병뿐이었다.

그러니 강병인 조선군은 물론이고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병력이었지만 혼란스러운 왜국 사정 때문에 싸움에는 이골이 난 용병들의 상대도 되지 않았다.

다급해진 청국 조정은 다른 지역 병사들이라도 급히 데려오려고 했으나 그것 역시 쉽지 않았다.

지방도 주력 병력 대다수가 친정군에 포함되어 장성 밖으로 나가 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화북 지역 전체가 오합지졸만 잔뜩 남은 빈집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의문을 가질 만도 했으나 그러지 않으면 아무리 청나라가 대국이라도 수년간 계속 전쟁을 치르고 또다시 수십만에 달하는 정예병을 꾸려 조선을 치는 건 불가능했다.

말 그대로 도르곤이 청나라의 국력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조리 다 쥐어짜서 조선과 무리한 전쟁을 벌였다는 거였다.

그나마 믿을 수 있는 병력은 남쪽 국경에서 명나라와 대치 중인 군대였는데, 그들을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자칫 위아래로 적을 상대해야 되는 최악의 경우가 벌어질 수도 있어 망설여졌다.

거기다 군대를 불러들인다고 해도 거리가 너무 멀어 북경까지 오려면 아무리 빨라도 한 달 이상이 결렸다.

하지만 조선군은 일주일이면 북경성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북경의 청국 조정은 더욱 위축됐고 그사이 조선군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주변 지역을 정리하면서 교두보 안정에 주력했다.

그러고는 청국의 예상을 깨고 북경이 아닌 산해관 공략에 나섰다.

☆ ☆ ☆

흔히 천하제일관이라 불리는 산해관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위치한 관문이었다.

예전부터 북방 이민족을 막는 군사 요충지였으나 명나라 영락제 이후 북경이 제국의 중심이 되면서 황도를 지키는 첫 번째 방벽으로 그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바로 그 산해관이 갑자기 나타난 조선 함대로 인해 큰 혼란에 빠졌다.

조선군이 상륙해 당산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은 전령을 통해 전해 들었지만 설마하니 여기에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연히 황궁이 위치한 북경으로 진격할거라 생각한 거였다.

급보를 받고 달려온 산해관 성주 여인송은 앞바다를 가득 채우고 있는 조선 함대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저놈들은 뭐야!”

“조선 함대입니다.”

부관의 눈치 없는 대답에 여인송은 얼굴을 와락 구기며 고함을 내질렀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 저것들이 왜 여기에 있냐고?”

“그, 그건…….”

괜히 나섰다가 불벼락을 맞은 부관이 어깨를 움츠리며 머뭇거리자 여인송은 주먹으로 앞에 있는 성가퀴를 내려쳤다.

“빌어먹을!”

당산과 달리 군사 요충지인 산해관에는 비록 향용병이지만 잘 훈련된 정병 삼 만이 주둔하고 있어 조선군한테 함락을 당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잠시 뒤 태산처럼 거대한 군선들이 측면을 드러내고 정렬하면서 현실이 됐다.

“조선군에 저렇게 큰 군선이 있다니.”

놀란 여인송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엄청난 굉음이 울리면서 치우 급 전함들의 함포 사격이 시작됐다.

“사격!”

기함 돛대에 신호 깃발이 올라가자 정렬해 있던 치우 급 전함 여섯 척이 일제히 함포를 발사했고 순식간에 주변 바다가 하얀 포연에 휩싸였다.

퍼퍼퍼펑!

단 여섯 척이었으나 불을 뿜는 함포는 삼백 문에 달했다.

족히 천오백 보가 넘는 거리를 날아간 포탄들이 떨어지면서 산해관 제일 끝 해안에 세워진 성곽인 노룡두는 화염과 먼지 구름으로 뒤덮였다.

쿠쿵! 쿵! 쿵!

“아아악.”

“크흑.”

귀를 때리는 폭음이 연이어 울려 퍼졌고 커다란 바위를 쌓아 만든 성벽이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후폭풍과 파편에 청군 병사들이 걸레처럼 찢겨 나가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여인송도 그만 중심을 잃고 바닥에 넘어졌다.

“윽.”

쉴 새 없이 터지는 포탄에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서 성가퀴에 등을 기댄 여인송은 아수라장이 된 주변 모습에 다급히 소리쳤다.

“어서 반격을 해!”

포대 전체가 튼튼한 벽에 둘러싸인 영원성과 달리 노룡두에 배치된 청군 화포들은 아무런 엄폐물 없이 그대로 성벽 위에 놓여 있어 지금처럼 격렬한 포격을 받는 상태에서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벌써 포탄에 맞아 박살 나거나 쏟아진 파편에 포수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졌다.

겨우 살아남은 화포 몇 문이 응사에 나섰지만 포탄은 치우함에 한참 못 미친 지점에 떨어져 애꿎은 물기둥만 만들어 냈다.

그나마도 조선군이 발사 화염을 보고 집중사격을 가하자 금방 침묵하고 말았다.

그 이후부터는 조선 함대의 일방적인 공격이 이어졌는데 피격 위협이 사라지자 뒤에서 대기하던 신형 판옥선들까지 합류해 마음껏 성벽을 두들겼다.

천하제일관이라는 산해관이 어느새 조선 함대의 과녁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제대로 하고 있군.”

함교에 서서 전투를 지켜보던 통제사 손억기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던 부관이 말을 받았다.

“저 상태라면 지금이라도 육전대를 상륙시켜도 되겠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난공불락의 요새인데 이 정도로 무너질 리가 없지. 조금씩 탄착 지점을 안쪽으로 전진시켜 방어 시설을 완전히 무력화시켜야 될 것이야.”

“예.”

부관의 대답에 손억기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함교 난간을 짚고 섰다.

“후후후. 아무튼 우리 수군이 산해관을 박살 내는 걸 보고 있으니 가슴이 다 시원해지는 것 같구먼.”

“그러게 말입니다.”

보급선을 통해 화약과 포탄을 공급받으면서 포격은 꼬박 하루 동안 계속 이어졌다.

산해관 성벽은 당당하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으로 부서졌는데, 특히 높이 우뚝 솟아 표적이 된 노룡두는 완전히 무너져 내려 포격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보여 줬다.

한참 동안 적진을 살핀 통제사 손억기는 눈에 대고 있던 천리경을 내리고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상륙을 개시하라고 해.”

“옛.”

잠시 뒤 육전대 병사들을 가득 태운 쪽배들이 함대를 빠져나와 해안으로 향했다.

그런 쪽배들 뒤로 조선군 군선들은 해안에서 안쪽으로 들어간 지점을 향해 포격을 퍼부으며 육전대를 지원했다.

슈우우웅.

머리 위로 포탄이 날아가는 파공음을 들으면서 쪽배에 탄 육전대 병사들은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노를 저었다.

“하나, 둘. 하나, 둘.”

“다들 아까 먹은 밥은 다 어디로 처먹은 거야. 더 힘차게 저어!”

촤아악.

날카롭게 날이 선 군도를 빼 들고 뱃머리에 앉은 군관이 연신 독려를 해 대는 가운데 쪽배는 파도를 헤치며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이내 쪽배가 모래톱 위에 올라서자 육전대 병사들은 군관이 소리를 치지 않아도 알아서 총검을 장착한 소총을 들고 해안에 발을 내디뎠다.

신고 있는 가죽신이 물에 젖고 진흙이 묻었지만 실수 한 번에 목숨이 오가는 상황이었기에 아무도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

상륙을 할 때가 가장 취약한 순간이었으나 다행히 아군 함대가 밤새 쏟아부은 포격이 효과가 있었는지 청군의 쏜 화살이나 총탄이 날아오지 않았다.

여기저기 움푹 파여 있는 포탄 구멍과 사지가 잘린 채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을 보고 과연 남은 청군이 있을지 의심스러웠지만 육전대 병사들은 긴장을 풀지 않고 전방을 주시했다.

그때 지휘관의 외침이 들리며 육전대 병사들은 모래사장을 지나 얼마 전까지 성벽이었을 돌무더기들이 있는 곳으로 전진했다.

“무기를 버리지 않고 저항하는 놈들은 가차 없이 다 죽여 버려라!”

“옛.”

“육전대 앞으로!”

산해관 내부로 밀고 들어가는 병사들 뒤로 속속 더 많은 육전대 병력이 상륙하면서 해안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애초에 북쪽에서 넘어오려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성곽이었기에 뒤로 치고 들어오는 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치우 급 전함을 포함한 수십 척의 군선들이 쏟아 내는 포격에 만신창이가 되어 더욱 힘든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송과 청군 병사들이 최선을 다해 저항했지만 함포 지원을 받으면서 거세게 몰아치는 육전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산해관은 허무하게도 육전대가 상륙한 지 채 하루가 되지 않아 조선군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다.

☆ ☆ ☆

와장창.

탁자 위에 있던 잔이 바닥에 던져져 산산조각 났다.

“산해관이 어떻게 됐다고!”

하마터면 잔에 머리를 맞을 뻔한 군관은 바짝 얼어서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조, 조선군에 함락당했다고 하옵니다.”

가뜩이나 보급이 줄어드는 바람에 제대로 공성전을 치르지 못해 짜증이 가득 쌓여 있던 도르곤은 연이은 나쁜 소식에 화를 폭발시키고 말았다.

“당산에 이어 산해관마저 잃다니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천막 안에 모여 있던 장수들이 크게 술렁이는 가운데 용골대가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옵니다. 자칫하면 보급이 완전히 끊기는 건 물론이고 앞뒤에서 협공을 당할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젠장!”

암담한 상황에 도르곤은 뒷목이 뻐근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당장 이 소식이 진중에 퍼지면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지는 건 물론이고 더 이상 공성전을 이어 갈 수 없는 상황에 몰릴 것이 분명했다.

“이 일을 어찌해야 된단 말인가!”

“아뢰옵기 송구스러우나. 이쯤에서 물러나셔야 될 것 같사옵니다.”

“뭐라!”

금방이라도 상대를 잡아먹을 것처럼 눈을 무섭게 치켜뜨며 도르곤이 쳐다봤지만 용골대는 흔들림 없는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내키지 않으시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사옵니다.”

사사건건 그가 하는 말에 대립각을 세우고 호전적인 야골타마저 입을 일자로 꾹 다문 채 퇴각에 반대하지 않았다.

다른 장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모두 적진 한복판에서 보급이 끊긴 채 고립될 수도 있다는 것에 큰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수년간 절치부심 끝에 칼을 빼 들고 출전했던 도르곤은 쉽게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안 돼!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이리 허무하게 물러날 수는 없어.”

“폐하.”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도르곤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쳐다본 용골대가 재차 설득을 하려고 할 때 갑자기 군관 한 명이 다급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폐하! 폐하!”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언짢던 도르곤은 예의를 차리지 않고 허둥거리며 들어오는 군관을 보고 고함을 내질렀다.

“무슨 일인데 이 호들갑이냐!”

“조, 조선군이 나타났사옵니다.”

뜬금없는 말에 도르곤은 미간을 찌푸리자 용골대가 군관을 보면서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아들을 수 있게 자세히 설명을 해 보라!”

그러자 군관은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고는 아까보다 안정된 모습으로 이야기를 했다.

“아군 진영 동편에 새로운 조선군 병력이 나타났다고 하온데, 숫자가 무려 이십만이 넘는다 합니다.”

순간 지휘 천막 안은 경악성으로 가득 찼다.

“뭐라! 지금 얼마라고 했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도르곤이 두 눈을 크게 뜨고는 다그치듯 묻자 군관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대답했다.

“이십만이옵니다.”

“이런, 미친!”

도르곤의 입에서는 바로 욕설이 튀어 나왔고 용골대는 허탈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산해관 함락에 이어서 이십만에 달하는 새로운 병력의 등장까지 지휘 천막 안에 있던 장수들은 이제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 ☆ ☆

조선군 진영에도 도총관 엄황이 이끄는 병력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휘부뿐만 아니라 그동안 힘든 방어전을 펼쳐야 했던 병사들까지 모두 환호성을 내지르며 기뻐했다.

공성전을 벌이는 내내 뒤로 물러나 있지 않고 문루에서 황금 봉황기를 펄럭이면서 직접 병사들과 함께 싸웠던 도현 역시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도총관이 때를 제대로 맞춰 도착했군.”

“그러게 말이옵니다.”

체통 때문에 일반 병사들처럼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지만 남두병 사령관 역시 상당히 들뜬 모습이었다.

“지금 도르곤의 표정이 어떨지 궁금하구먼.”

도현의 말에 장수들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맞장구를 쳤다.

“아주 우거지상이 되어 있을 겁니다.”

“하하하. 뒷목을 잡고 넘어가지 않았으면 다행이지요.”

그렇게 농담을 던지면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후, 조금씩 잦아들었을 때쯤 도현이 입을 열었다.

“남 사령관.”

“하교하시옵소서, 폐하.”

고개를 숙이는 남병두 사령관을 보며 도현은 정색을 한 채 말했다.

“도총관이 지휘하는 병력이 도착하면 바로 공세에 나설 수 있게 미리 준비를 해 놓도록 하시오.”

그러자 남두병 사령관은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드디어 좁은 영원성을 나가 그동안 쌓인 울분을 풀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모여 있던 다른 장수들도 눈을 번뜩이면서 전의를 불태웠다.

한편 용골대와 장수들이 간언을 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조선군과 승부를 볼 거라며 고집을 부리던 도르곤은 도총관 엄황이 이끄는 이십만 대군이 오십 리 밖에 도착하자 결국 후퇴를 결심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데 도르곤이 함구를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산해관이 함락되고 조선군 대병력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병사들이 크게 동요했다.

이대로 있으면 대규모 탈영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인 데다 도르곤으로서도 보급과 퇴로가 막힌 채 양쪽에서 조선군을 맞이하는 건 부담스러웠다.

밤새 고심을 한 끝에 어렵게 결단을 내렸지만 퇴각도 쉽지가 않았다.

당장 조선군이 반격을 해 올 것이 불을 보듯 뻔한 데다 퇴로가 막혀 화북으로 돌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산해관을 다시 탈환하거나 멀리 산악 지역으로 우회해야 했다.

그리고 계속된 전투로 숫자가 많이 줄었다지만 아직 사십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유지하고 있어 이동이 느린 데다 무거운 홍이포와 보급품들까지 챙겨 가야 됐다.

그렇다고 짐을 다 버리고 갈 수도 없었기에 청군의 퇴각 행렬은 자연스럽게 길게 늘어져 버렸다.

청군이 퇴각한다는 보고에 급히 문루로 달려온 도현은 천리경을 눈에 대고 적진을 천천히 살폈다.

과연 청군은 수레마다 보급품을 가득 실고는 개미 떼처럼 길게 줄을 지어 뒤로 후퇴하고 있었다.

그걸 보며 도현은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도르곤이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군.”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거겠지요.”

남두병 사령관의 이야기에 그는 한쪽 팔로 성가퀴를 짚고 서서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후후후. 발버둥을 쳐 봤자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것 아니겠어.”

“맞습니다.”

“나중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지금 바로 청군을 치는 건 어떻사옵니까?”

장수 중 한 명이 조바심을 내며 말하자 도현은 잠시 후퇴하고 있는 청군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아니야.”

“하지만…….”

뭐라 더 반박하려는 장수의 말을 중간에 끊고 도현이 얘기했다.

“성급하게 덤벼들었다간 오히려 역습을 당할 수도 있네. 도르곤이 뒤에 일부 병력을 남겨 두고 우리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있는 걸 보면 모르겠나.”

그 말에 장수가 놀라 앞으로 몸을 기울여 살펴보니 과연 적진에 청군 병사 이삼만 명 정도가 남아 잔뜩 경계를 하며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냥을 할 때 성급함은 곧 독이라지. 토끼몰이를 하듯 천천히 함정으로 몰아넣은 다음에 반격할 틈도 없이 단번에 목덜미를 낚아채 버리는 거야.”

도현은 목표물을 노리는 맹수처럼 진득한 살기를 피워 올렸다.

“신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장수의 사과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도현은 남두병 사령관을 향해 말했다.

“지금부터 진虎 호 계획 이 단계를 발동한다. 각 부대는 언제든 출전할 수 있도록 준비 태세를 갖추도록 하라!”

“예!”

도현은 한 손에 쥐고 있던 지휘봉을 등 뒤로 돌려 뒷짐을 진 상태로 뿌연 먼지구름을 피워 올리며 퇴각하고 있는 청군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도르곤은 휘하 장수들과 함께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야트막한 언덕에 올라 철수 행렬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십만에 달하는 병력이 수만 필의 말과 그와 비슷한 숫자의 수레들하고 뒤섞여 진채를 빠져나오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당당함은 보이지 않고 초라하고 사기가 축 처진 딱 패잔병의 모습이었다.

퇴각을 하면서도 조선군이 공격해 올까 봐 잔뜩 긴장하고 겁먹은 얼굴로 발을 빨리 놀렸다.

그걸 보고 있으려니 도르곤은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은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굴을 구긴 채 얼마쯤 있었을 때 용골대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이제 그만 길을 떠나시지요?”

“새로 나타난 조선군이 어디까지 왔다고 했지?”

“척후 보고에 따르면 이십 리 지점까지 접근했다고 하옵니다.”

“이십 리라…….”

그 정도면 당장 조선군이 눈앞에 들이닥쳐도 전혀 이상이 없을 만큼 바로 지척까지 온 거였다.

“홍이포는 모두 철수시켰나?”

“예. 제일 먼저 빼내 중군과 함께 이동 중이옵니다.”

“잘했어. 조선군과 일전을 벌이거나 산해관을 탈환할 때 꼭 필요한 무기이니 다소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가져가야 할 것이야.”

“알고 있사옵니다.”

“후속 부대는 누가 맡기로 했지?”

“단지귀 장군이옵니다.”

흐음, 하고 콧소리를 흘리며 도르곤이 말했다.

“어떻게든 조선군의 발목을 최대한 붙잡고 늘어지라고 해.”

“예.”

후속 부대는 조선군의 추격을 지연시키기 위한 용도였다.

그래서 일부 독전대督戰隊를 제외하고는 전부 감옥에 갇혀 있다가 끌려온 죄수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몽땅 다 전멸을 당해도 청군 입장에서는 전혀 아까울 것이 없는 병력이라는 뜻이었다.

미련이 남는 얼굴로 힐끗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영원성을 쳐다본 도르곤은 이내 쓸쓸히 말 머리를 돌려 언덕을 내려갔다.

워낙 숫자가 많다 보니 그 뒤로도 반나절이 더 지나서야 퇴각 행렬이 완전히 사라졌다.

커다란 청군 진영에는 후속 부대 삼만 명만이 남아 썰렁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단지 분위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화살받이로 남겨졌다는 생각에 죄수병들은 배신감을 느끼며 극도로 불안해하고 있었다.

만약 독전대가 등 뒤에서 시퍼렇게 날이 선 병장기를 겨누고 있지 않았다면 반란이 일어났어도 몇 번이 터졌을 거였다.

“저희들은 먼저 다 도망가 버리고 우리보고 뒤에 남아서 칼 받이를 하라 이거지.”

“나쁜 놈들.”

“퉤. 더러워서.”

통나무를 잘라서 만든 방책 뒤에 서서 영원성을 바라보고 있던 죄수 부대원들이 바닥에 침을 뱉으며 대놓고 불만을 드러내자 손에 검을 든 군관이 다가와 눈을 부라렸다.

“조용히 하지 못해!”

“말도 못하오.”

제대로 깍지 않아 얼굴에 수염이 텁수룩하게 난 병사가 똑바로 쳐다보며 대들자 군관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놈, 죽고 싶은 거냐!”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들 것처럼 군관이 노려보자 병사도 지지 않고 턱을 치켜들며 강짜를 부렸다.

“씨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다 똑같으니 마음대로 하시오!”

“이이.”

마음 같아서는 당장 목을 베어 버리고 싶었으나 가뜩이나 죄수병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자칫 반란의 도화선이 될 수도 있었기에 군관은 선뜻 손을 쓰지 못했다.

소란에 죄수병들이 수군거리며 시선을 집중시키고 뒤에 있던 독전대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다가와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처럼 긴장이 흐를 때 한쪽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저, 적이다! 조선군이 몰려온다.”

“뭐야!”

“이런.”

허둥지둥 방책으로 가서 앞을 본 군관과 죄수병들은 활짝 열린 성문을 통해 조선군 기병대가 쏟아져 나오는 걸 보고 기겁했다.

그와 동시에 포성이 울리면서 조선군 포대가 불을 뿜어 댔다.

슈우우웅.

“포격이다.”

“으아악.”

꽈아앙! 쿠쿵! 쿵!

포신이 망가지는 걸 각오하고 화약을 최대한 집어넣어 쏘아올린 포탄들은 정확히 청군 진영에 떨어져 방책을 날려 버렸다.

살상 범위 안에 있던 죄수병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사지가 찢겨 나갔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희뿌연 포연 사이로 거친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조선군 기병대가 들이닥쳤다.

두두두두.

“이랴!”

“하!”

“마, 막아!”

부서진 방책을 넘어 들어온 조선군 기병대는 달려오는 속도 그대로 엉거주춤 서 있는 청군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리거나 긴 창을 찔러 넣었다.

서걱.

“커, 컥.”

“꾸엑.”

“다 쓸어버려라!”

지휘관인 신인석이 창을 들고 옆에 서 있던 적병의 목을 치며 외치자 기병들은 더욱 기세를 올리면서 상대를 몰아쳤다.

돌격해 온 기병은 일만이 조금 넘어 병력의 수는 청군이 더 많았으나 역량 자체에서 차이가 났고 무엇보다 싸움에 임하는 자세가 달랐다.

용맹하게 달려들어 병장기를 휘두르는 기병과 달리 상대는 방책을 돌파당하는 순간 도망칠 방법을 찾기에 급급했다.

이히히힝.

채챙.

“악!”

이미 상당수의 적들이 시체가 되어 바닥에 뒹굴었고 몇몇은 싸워 보지도 않고 가지고 있던 무기를 버린 채 등을 돌려 달아났다.

“히익.”

“도망쳐.”

“어딜 가느냐!”

“다시 돌아서 조선군과 싸워라!”

그러자 뒤에 있던 독전대가 검 끝을 겨누며 위협해 다시 싸우도록 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어느새 적진을 가로질러 후미까지 치고 들어온 신인석과 기병들이 독전대를 덮쳐 버렸다.

죄수병들을 위협하며 전투를 독려하던 독전대였지만 전혀 기세가 줄어들지 않은 채 거침없이 달려드는 기병의 칼날 앞에 속절없이 쓰러졌다.

독전대가 박살 나자 홍수에 둑이 무너지듯 주춤하던 죄수병들이 너도나도 앞을 다퉈 도망치기 시작하면서 청군 전열은 빠르게 와해됐다.

결국 도르곤이 남겨 둔 잔존 병력은 채 한 시진을 버티지 못하고 기병대의 공격만으로 완전히 전멸하고 말았다.

도망친 자들도 상당수 있었지만 지휘 체계도 없이 그저 살기 위해서 달아난 패잔병에 불과했다.

물론 그냥 내버려 두면 나중에 마적이 되어 문젯거리가 될 수도 있었으나 퇴각한 청군 본진을 상대해야 됐기에 지금은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도현은 휘하 장수들과 함께 문루에 서서 전투가 모두 끝난 청군 진영을 바라봤다.

전투 중간에 천막과 방책에 불이 붙어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라 시야를 가렸지만 전반적인 모습을 살피는 데 지장이 없었다.

“신 장군이 그동안 쌓인 화를 아주 제대로 풀었군.”

“그러게 말이옵니다.”

“아군 피해는 얼마나 되나?”

전투를 끝내고 막 다시 문루에 올라와 있던 신인석 장군이 도현의 물음에 살짝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사상자가 오백 명가량 나왔사오나 부상자 대부분이 간단히 치료를 받으면 바로 복귀할 수 있는 경상이옵니다.”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기병대 전력에 손실이 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군. 지켜보는 짐이 다 통쾌할 정도로 잘 싸웠어.”

“황공하옵니다.”

그동안 수세적인 자세를 취하면 성에서 방어만 하다가 오랜만에 밖으로 나가 적을 무찌르자 도현은 가슴에 묵혀 둔 체증이 한꺼번에 쓸려 내려간 기분이었다.

신익선 장군을 치하한 도현은 시선을 옆으로 돌려 남두병 사령관을 보며 말했다.

“도총관이 지휘하는 병력은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겠지?”

“예. 곧장 결전 장소로 간다는 전령이 왔사옵니다.”

“좋아.”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이내 정색을 한 채 온몸으로 전의를 불태웠다.

“이번에야말로 도르곤을 죽이고 청을 완전히 몰락시켜 조선이 만대에 걸쳐 찬란한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초석을 단단히 닦을 것이다. 즉시 전장을 수습하고 적을 추격할 준비를 하도록 해라!”

“옛.”

명을 받은 장수들은 결연한 얼굴로 허리를 숙이며 크게 대답했다.

얼마 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전장 정리를 모두 끝낸 조선군은 이만 명의 수비병을 남겨 둔 채 영원성을 나섰다.

☆ ☆ ☆

한편 산해관 방향으로 퇴각했던 청군 본진은 멀리 가지 못하고 영원성에서 오십 리 정도 떨어진 곳에 발이 묶여 있었다.

“뭣들 하는 거야! 어서 저놈들을 쓸어버려.”

말에 탄 채 고함을 고래고래 질러 대는 도르곤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흑치영이 이끄는 조선군 기병대가 나타난 건 영원성을 떠나 반나절쯤 지났을 때였다.

이리로 올 것을 알고 처음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먼지구름을 피워 올리면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기병대는 당황한 경계 병력을 뚫고 들어와 기습 공격을 가했다.

급히 팔기군을 동원해 요격에 나섰지만 조선군 기병대가 타격을 가한 뒤 신속하게 빠져나가 버린 뒤였다.

흑치영이 지휘하는 기병대는 강력한 상대인 팔기군과의 정면 대결을 철저히 피하면서 홍이포를 비롯한 보급 물자들을 망실亡失시키는 데 집중했다.

이런 습격이 계속해서 이뤄지자 청군 지휘부는 팔기군에 보급 물자를 지키도록 했지만 상대는 그걸 또 귀신같이 파악하고 이번에는 후미에 처져서 따라오는 보병대를 공격해 피해를 입혔다.

채챙! 챙! 챙!

“커헉.”

“끅.”

푹!

청군 대열 사이로 뛰어든 조선군 기병들은 좌충우돌하며 근처에 있는 적들을 마구 베어 넘겼다.

습격에 대비하고 있었지만 권총과 화살을 쏘며 빠르게 돌격해 들어오는 기병을 보병이 막아 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순식간에 청군 대열이 흐트러지며 큰 혼란에 빠졌고 그 틈을 이용해 조선군 기병들은 상대의 피해를 더욱 키웠다.

두두두두.

그때 말발굽 소리를 울리면서 행렬 가운데 있던 팔기군이 급히 달려왔다.

“조금만 버텨라! 그럼 지원군이 온다……. 어억.”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적장을 기다란 창으로 꿰어 죽여 버린 흑치영은 힐끗 고개를 돌려 팔기군을 봤다.

“쳇. 조금 더 여유가 있을 줄 알았더니 빨리도 왔군.”

“어떻게 할까요?”

피가 잔뜩 묻어 있는 검을 든 홍종수 장군이 옆으로 다가와 묻자 흑치영은 미련 없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조만간 원 없이 싸우게 될 텐데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지. 철수시켜.”

“옛.”

예전 같았으면 걸어오는 싸움을 절대 피하지 않았을 테지만 얼마 전 야골타가 판 함정에 걸려 부하들을 잃은 이후부터 상당히 신중해지고 절제할 줄을 알게 됐다.

그렇다고 결코 소심해졌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전투가 벌어지면 항상 선두에 서서 적에게 창을 찔러 넣었고 상황에 따라 과감하게 행동하기도 했다.

뿌우웅! 뿌우웅!

흑치영의 지시에 따라 신호수가 뿔 나팔을 길게 두 번 불자 청군 대열을 휘젓고 다니던 조선군 기병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팔기군이 허겁지겁 전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무수히 많은 청군 사상자만 남겨 둔 채 먼지를 피워 올리면서 후퇴해 버린 뒤였다.

또다시 뒷북을 치게 된 야골타는 멀리 사라지는 조선군 기병대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 죽일 놈들!”

“추격할까요?”

부관의 물음에 야골타는 화풀이를 하듯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랬다가 저번처럼 빈 곳을 치고 들어오면 자네가 책임 질 건가!”

“전 그냥…….”

괜히 입을 열었다가 날벼락을 뒤집어쓴 부관은 어깨를 움츠렸다.

두 번째로 습격해 왔을 때 야골타가 이끄는 팔기군이 달아나는 조선군 기병대를 추격해 갔다가 양동작전을 펴서 숨겨 두고 있던 병력이 곧바로 무방비 상태인 보급 부대를 쳐서 큰 피해를 입힌 아픈 기억이 있었다.

그때 귀한 홍이포를 다섯 문이나 잃고 화약을 가득 실은 짐마차 세 대가 박살 나 버리자 야골타는 도르곤한테 불려 가 엄청난 질책을 들어야 했다.

그 뒤부터는 조선군이 똑같은 방법으로 뒤를 치는 걸 염려해서 달아나는 상대를 보고도 추격을 하지 않고 그냥 멍청히 지켜만 봐야 했다.

“됐어. 어서 대열을 정비하고 주변에 척후 병력이나 더 내보내.”

“알겠습니다.”

소규모로 내보내는 척후는 조선군의 먹잇감이 될 뿐이라는 걸 잘 알지만, 그나마 습격 빈도를 줄이려면 이렇게라도 해야 됐다.

팔기군으로 행렬을 둘러싸며 경계를 한층 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해가 질 때까지 청군은 한 차례 더 습격을 받아야 했다.

그 때문에 숙영지 한가운데 세워진 지휘 천막에서는 도르곤의 호통 소리가 시끄럽게 터져 나왔다.

“이게 무슨 꼴이야!”

도르곤이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탁자를 내려치며 소리치자 지휘 천막에 모인 장수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특히 팔기군을 이끌고 하루 종일 조선군의 꽁무니만 쫓아다닌 야골타는 연신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지금까지 입은 피해가 얼마야?”

약간 초췌한 얼굴을 한 왕태봉이 장수들 사이에서 한 발짝 나와 대답했다.

“이천 명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다수의 보급품이 망실됐사옵니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왕태봉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병력 손실도 크지만 가장 심각한 것은 홍이포 다섯 문이 망가지고 보유하고 있던 화약을 절반 가까이 못 쓰게 됐다는 겁니다.”

“그건 또 뭔 소리야!”

눈썹을 치켜 올리며 도르곤이 쳐다보자 왕태봉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사정을 설명했다.

“적이 화약통이 실린 수레에 뭔가를 집어 던진 걸 수상히 여겨 살펴봤더니 화유火油였사옵니다.”

화유는 석유를 가리키는 옛날 말 중 하나였다.

“이럴 수가…….”

“그럼 적이 처음부터 화약을 못 쓰게 만들려고 노렸다는 뜻이 아니오?”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좌중이 다시 한 번 크게 술렁였다.

이게 사실이라면 습격이 단순하게 퇴각을 늦추고 피해를 강요하기 위한 것이 아닌, 처음부터 철저한 계산하에 움직였다는 뜻이었기에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도르곤이 얕은 신음성을 내뱉으며 인상을 찡그리는데 지금껏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용골대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폐하,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내일부터는 행군 속도를 더 올려야겠사옵니다.”

그의 의견에 도열해 있던 장수들 중 한 명이 즉각 반발했다.

“아니 됩니다. 지금도 무리해서 움직이고 있는데 더 속도를 높였다간 문제가 생길 게 뻔하지 않습니까.”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병사들 사정을 하나하나 봐줄 만큼 상황이 녹록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러다 적군과 교전하기도 전에 지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팽팽히 맞서는 말다툼이 이어지자 나머지 사람들 역시 두 편으로 나뉘어 웅성거렸다.

그 모양새를 보고 있던 도르곤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만!”

분노와 짜증이 뒤섞인 목소리로 도르곤이 외쳤다.

사나운 눈빛에 찔끔한 장수들이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병사들이 힘들더라도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위험지역을 하루 빨리 벗어나는 것이야.”

이미 결정을 내린 그는 용골대를 향해 명령했다.

“총병관 생각대로 내일부터 행군 속도를 높이도록 하게.”

“예.”

자기 뜻대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대답하는 용골대의 표정은 어두웠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맞부딪쳐 내린 결단이긴 하지만 원래라면 이런 무모한 짓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 게 그의 본심이었다.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데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진 병사들을 이끌고 움직이기엔 너무나 위험요소가 많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가운데 의자에 앉은 도르곤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더 이상 이동 중에 홍이포와 화약을 망실하는 일이 없도록 경계를 철저히 하라! 그리고 야골타 장군.”

“말씀하십시오.”

“내일은 절대 조선군에 습격을 허용해선 아니 될 것이야.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야골타의 머리가 바닥을 향해 숙여지고, 그 모습을 잠시 일별한 도르곤이 이내 장수들을 향해 크게 손을 내저으면서 귀찮은 듯 말했다.

“다들 나가 봐.”

장수들이 하나둘씩 천막을 빠져나가고 혼자 남은 그는 바람에 얕게 흔들리는 촛불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과연 이 위기를 무사히 잘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자신감을 가지려 해도 가슴 밑바닥에서 스멀거리며 새어 나오는 한 줄기 불안에 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 ☆ ☆

다음 날 청군은 조금이라도 빨리 조선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위험지역을 벗어나기 위해서 새벽 일찍부터 숙영지를 정리하고 행군을 시작했다.

하지만 청군의 희망은 얼마 가지 않아서 바로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언제 도착했는지 최소 수십만은 넘을 것 같은 조선군이 행군로 앞을 떡하니 막고 있었다.

조선군 깃발이 수도 없이 바람에 펄럭였고 띄엄띄엄 통나무 끝을 뾰족하게 잘라 만든 대기병 방어진까지 있었다.

소식을 듣고 황급히 행렬 선두로 달려온 도르곤은 그걸 보고 자신도 모르게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폐하, 저길 보십시오. 적진 가운데 황금 봉황기가 있사옵니다.”

“……!”

왕태봉이 다급히 소리치며 한쪽 팔을 들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자 정말 꿈에서도 절대 잊을 수 없는 황금 봉황기가 당당히 세워져 있었다.

“설마 조선 국왕이 여기에 와 있다는 건가?”

미간을 찌푸린 도르곤의 말에 왕태봉이 착잡한 얼굴로 대답했다.

“황금 봉황기는 조선 국왕을 상징하는 것이니 그렇지 않겠사옵니까.”

“젠장.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군!”

흑치영이 지휘하는 기병대가 위험을 감수하고 수시로 습격을 가해 왔던 이유가 바로 자신들을 지치게 만드는 사이 흩어진 전력을 모아서 일전을 벌이려는 거였다는 걸 도르곤은 뒤늦게 깨달았다.

아랫입술을 질근 씹으며 정면을 노려보던 도르곤은 손에 뒨 말고삐를 꽉 틀어쥐고는 입을 열었다.

“차라리 잘됐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옆에 있던 용골대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도르곤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싸움에 진 개처럼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것 같아 내내 찝찝했었는데, 너른 벌판에서 제대로 한판 붙어 누가 진정한 대륙의 패자인지 결정을 짓는 거야!”

“하오나, 폐하.”

용골대가 놀란 얼굴로 다급히 입을 열려고 하자 도르곤이 한쪽 손을 들어 막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니까 그만해.”

“적이 원하는 전장에서 싸움을 벌이는 건 첫수부터 지고 들어가는 것이옵니다. 재고해 주시옵소서.”

그러자 도르곤이 역정을 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야! 짐이 싸움을 피한다고 해서 조선군이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나. 오히려 더 기세를 올려 아군의 뒷덜미를 물어뜯으려고 할 거야.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정면 대결을 펼쳐 승부를 보는 것이 나아. 보급이 막혀서 그렇지 팔기군이 건재하고 뒤를 받칠 향용병도 머릿수로는 적에게 꿀리지 않잖나. 지금이라면 충분히 조선군을 깨부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어!”

피할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에 말문이 막힌 용골대는 일자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도르곤은 휘하 장수들을 둘러보면서 단호한 어투로 지시를 내렸다.

“오늘 이곳에서 조선 국왕의 목을 베고 저들에게 청군의 무서움을 똑똑히 보여 주겠다. 전군 전투태세를 갖추도록 하라!”

“옛.”

몸을 바로 해 조선군 진영을 쳐다보는 도르곤의 눈에는 광폭한 기운이 일렁거렸다.

한편 밤새 도총관 엄황의 병력과 합류해서 미리 적이 지나갈 길목을 막고 선 도현은 잠시 당황하는 것 같던 청군이 이내 빠르게 전투대형을 갖추는 걸 보고 한쪽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

“역시 예상대로 움직이는군.”

“적들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옵니다.”

“후후후. 그렇지.”

말 머리를 나란히 하며 옆에 선 엄황의 이야기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여기서 지긋지긋한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다. 적을 상대하는데 절대 자비도 베풀지 말라고 하라!”

“알겠사옵니다.”

이번 회전 한번으로 전쟁의 승패는 물론이고 나라의 존망까지 걸려 있다는 걸 알기에 엄황을 비롯한 장수들의 표정에는 긴장과 결연함이 감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군은 이천 보 정도 거리를 두고 각자 전투대형을 갖춘 채 길게 도열했다.

수십만이 한곳에 모여 있었으나 전장이 쥐죽은 듯 고요한 가운데 무겁고 끈적끈적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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