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서회전
훗날 요서회전이라 불리면 후대까지 기억될 조선과 청의 운명을 가르는 전투는 도르곤의 선공으로 시작됐다.
대륙 최강의 기병으로 불리는 팔기군이 무려 팔만 명이나 청군 진영 앞에 나와 살기를 피워 올리며 도열하자 압박감에 조선군 병사들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그걸 본 도현은 살짝 미간을 모았다.
몇 번이나 싸워서 이긴 경험이 있고 혹독한 훈련을 거쳐 최정예로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팔기군이 가지는 위명에 스스로 위축되는 것에 속으로 혀를 찼다.
처음부터 기세에 눌려서는 제대로 싸움을 벌일 수 없다는 생각에 그는 뒤로 돌아 전투대형을 갖춘 채 늘어 서 있는 아군 병사들을 천천히 쓸어 보고는 입을 열었다.
“장졸들은 들어라!”
우렁찬 그의 말에 수십만 병사들의 이목이 모두 집중됐다.
“오늘 이곳에서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것이다. 후대 사람들은 이 전투를 기억하며 그대들의 용맹과 희생을 찬양할 것이고 여기서 흘리는 피 한 방울까지 모두다 영광의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격양된 목소리로 말을 내뱉은 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었다.
“우리가 원한 전쟁은 아니지만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싸워 승리를 거둘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저들이 요하를 넘어 우리의 소중한 가족과 재산을 짓밟고 빼앗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금 점점 높아지는 도현의 음성에 병사들 역시 조금씩 눈에 힘이 들어가며 가지고 있는 병장기를 꽉 움켜쥐었다.
“사랑하는 이들이 적에게 농락당하고 비참하게 죽어 가는 걸 그냥 두고만 볼 것인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청군이 화북으로 퇴각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다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였지만 병사들은 거칠어진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럼 적과 싸우는 데 머뭇거리지 마라! 청군의 피로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심장에 검을 박아 넣는 것이다. 그것이 내 가족과 친인을 살릴 수 있는 길이다. 오늘 흘리는 너희들의 피와 땀은 후대가 대륙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 만 백 년 당당하게 살아갈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 고난의 길에 짐도 끝까지 함께할 것이다!”
“우와아아!”
투쟁심을 자극하는 도현의 말에 병사들은 어느새 두려움과 긴장을 모두 털어 버리고는 흥분한 모습으로 병장기를 들어 올리며 함성을 내질렀다.
바로 그때 청군 진영에서 긴 나팔 소리가 울리면서 팔기군이 앞으로 돌격해 왔다.
뿌우웅! 뿌우웅!
그러자 도현은 손에 쥔 지휘봉 끝으로 팔기군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곳을 청군의 무덤으로 만들어라. 기병대 출진하라!”
명령이 떨이지자 이 순간을 기다리며 복수의 칼날을 갈던 흑치영이 양발로 말 옆구리를 차면서 땅을 박차고 나갔다.
“비명에 죽은 전우들의 복수를 해 줄 날이 왔다. 돌격!”
“이랴!”
“하!”
두두두!
거센 파도처럼 달려 나가는 기병대 뒤로 방열해 있던 화포들이 불을 뿜었다.
“발사!”
꽝! 꽝! 꽝!
제일 강력한 위력을 지닌 충무포는 무게 때문에 가져오지 못했으나 대신 무려 팔십 문에 달하는 화포들이 일제히 포탄을 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쉬이이잉.
크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간 포탄들은 정확히 돌격해 오는 팔기군 머리 위에 떨어져 흙먼지와 연기 기둥을 피워 올렸다.
쿠쿵! 쿵! 쿵!
포탄이 터지면서 쏟아진 수많은 파편이 팔기군 병사와 군마들을 덮쳤다.
날카로운 파편이 박힌 적병들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고 군마들도 달리던 속도 그대로 주저앉고는 울음소리를 냈다.
“끄아악!”
이히히힝.
순식간에 돌격 대형 곳곳에 구멍이 뚫리면서 팔기군 병사들이 죽어 나가자 지켜보던 도르곤은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어서 대응 사격을 하라!”
“옛.”
복명을 한 장수가 신호수에게 손짓을 하고 얼마 있지 않아 청군 홍이포들도 포탄을 쏘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숫자가 크게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오십 문에 달하는 홍이포가 남아 있었기에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오히려 사거리나 화력에서 홍이포가 약간 앞서는 모습을 보이며 흑치영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 기병들을 날려 버렸다.
“으악!”
“컥.”
바로 옆에서 포탄이 터지며 두세 명의 기병이 말과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떨어지면서 목이 부러졌는지 기병들은 아무런 미동이 없었고 그걸 본 흑치영은 입술을 꽉 깨물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조금만 더 버텨라! 거리를 좁히면 화포 공격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흑치영은 말 옆구리를 차며 달리는 속력을 더욱 올렸다.
사방에서 흙기둥이 치솟으며 전우들이 죽어 나갔지만 조선군 병사들은 겁을 먹거나 머뭇거리는 것 없이 그저 앞만 보고 말을 달렸다.
포탄 세례를 헤치며 돌격하는 모습이 사뭇 비장하기까지 했다.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포격을 지나 양군은 삼백 보 거리까지 도달했다.
그러자 기병대 선두에 서 있던 흑치영이 창 대신 안장 옆에 달려 있던 각궁을 꺼내 들면서 외쳤다.
“활을 쏴라!”
어느새 각궁을 손에 들고 편전을 재고 있던 기병들은 흑치영의 명령에 팽팽하게 당긴 시위를 놨다.
슈슈슈슉! 슈슉! 슉!
오만 개에 이르는 편전이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편전의 위력을 잘 알고 있던 야골타와 팔기군 지휘관은 황급히 소리쳤다.
“화살이 날아온다.”
“모두 방패로 몸을 가려라!”
여기저기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오면서 팔기군은 방패를 꺼내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편전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두두둑. 두둑!
둔탁한 소음과 함께 날카로운 편전은 팔기군 병사들의 손에 들린 방패와 갑옷을 그대로 뚫고 들어갔다.
너무나도 허무한 결과에 팔기군 병사들은 경악했고 펀전에 꿰뚫린 이들은 피를 흘리면서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크악.”
“으윽!”
부상을 입은 채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던 이들은 뒤따라오던 동료들의 말발굽에 짓밟혀 목숨을 잃어야 했다.
“머, 멈춰!”
으적. 퍽.
“꾸에엑.”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피가 튀며 처참한 광경이 만들어졌지만 팔기군은 말을 멈출 수 없었다.
그사이 또 한 차례의 편전 세례가 날아와 팔기군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사방에서 비명이 울리고 적병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갔다.
팔기군 역시 그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기마 민족답게 조선군처럼 고삐를 놓고 두 다리를 등자에 넣어 단단히 버티고 서서는 시위를 당겨 화살을 쐈다.
“발사!”
공기를 가르고는 섬뜩한 소리를 내면서 조선군보다 훨씬 더 많은 화살들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조선군이 쏜 편전과 교차해서는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편전과 달리 파괴력이 떨어지는 팔기군의 화살은 얇지만 철판을 입혀 단단한 방패를 뚫지 못하고 그대로 박히거나 튕겨 나갔다.
반대로 팔기군은 또다시 병사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갔다.
상체를 숙여 앞에서 날아오는 편전을 겨우 피한 야골타는 이를 악물었다.
제대로 부딪치기도 전에 벌써 수천 명의 부하들이 낙마해 바닥을 뒹굴고 있는 것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직 머릿수는 팔기군이 더 많았으나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계속 우세를 유지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당장 포격에 이은 편전 세례에 함께 말을 달리던 동료들이 허무하게 죽어 나가자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기다 조금씩 공포심까지 퍼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검도 휘둘러 보지 못하고 대열이 흐트러질 위험마저 있었다.
그렇지만 상황을 타계할 다른 방법이 없었던 야골타는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내지르면서 부하들을 다그쳤다.
“돌격! 더 빨리 말을 몰아라. 조선군과 가까워지면 화살과 포격 세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자 팔기군 병사들은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쉴 새 없이 말 엉덩이에 채찍질을 가했다.
그때 정면에서 달려오는 조선군 기병 대열에서 요란한 총성이 연속해서 터져 나왔다.
탕! 타탕! 탕! 탕!
어느새 각궁을 집어넣은 조선군이 권총을 빼내 쏜 것이다.
좌우로 흔들리는 말 위라서 제대로 조준을 하기 어려웠고 소총에 비해 위력도 약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 데나 그냥 쏴도 다 맞을 만큼 적이 널려 있고 한꺼번에 수만 발이 발사돼 상대편에 치명적인 피해를 안겨 줬다.
피 안개가 피어오르며 선두열에 서 있던 적들이 섞은 짚단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으악!”
“큭.”
연속된 원거리 공격에 무수히 많은 팔기군이 차가운 바닥에 몸을 누였지만 아직도 조선군보다 많은 숫자가 남아 있었다.
이대로 정면충돌한다면 조선군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 ☆ ☆
“이 정도면 대열이 와해됐을 텐데 아직도 버티는 걸 보면 역시 청나라가 자랑하는 팔기군답군.”
말 위에 앉아 천리경으로 전장을 살피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린 도현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도총관 엄황을 봤다.
“도총관.”
“말씀하시옵소서.”
“첫 번째 명적鳴鏑을 쏘게.”
“옛.”
머리를 숙이며 대답한 엄황이 손짓을 하자 대기하고 있던 군관이 등에 맨 전통箭筒에서 명적을 꺼내 시위에 걸고는 이내 하늘 위로 쏘아 올렸다.
퉁.
삐이이익!
명적 소리를 듣고 힐끗 고개를 뒤로 돌린 흑치영은 한 손에 든 언월도를 치켜들며 크게 소리쳤다.
“산개散開!”
그러자 팔기군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던 조선군 기병들이 마치 커다란 학이 날개를 활짝 펼치듯 양쪽으로 갈라졌다.
“뭐, 뭐야?”
갑작스러운 상황에 야골타는 크게 당황했다.
이제 한바탕 격렬하게 맞부딪칠 태세를 갖추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상대가 옆으로 빠져 버리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이미 기마들이 탄력을 받아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상태였기에 재빨리 대처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는 사이에 흡사 조선군이 펼친 학익진 안으로 날카로운 송곳이 된 팔기군이 뛰어드는 모양새가 됐다.
무슨 꼼수를 부리려고 하는지 몰라도 중앙이 얇아지면 돌파하기 더 좋았기에 야골타는 검을 치켜들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이대로 적진 깊숙이 파고들어 간다!”
찝찝함이 머리 한구석을 떠나지 않았지만 야골타는 애써 무시했다.
팔기군이 속력을 줄이지 않고 계속해서 돌격해 들어오자 도현은 입가에 희심의 미소를 지으며 명령을 내렸다.
“죽을 자리인 줄도 모르고 꼬리에 불이 붙은 멧돼지처럼 달려드는군.”
도현의 말에 남두병 사령관이 머리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옵니다.”
“근위 군단의 배치는 다 끝났겠지?”
“물론입니다.”
“그럼 적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주라고 해.”
“옛.”
잠시 뒤 조선군 지휘부가 있는 곳에서 붉은색 삼각 깃발이 흔들렸다.
“장군, 신호기가 올라왔습니다.”
근위 군단을 이끌고 조선군 진영 중앙에 위치해 있던 박영식은 부관의 말에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도 봤네.”
박영식은 전방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우리 뒤에 폐하께서 계신다. 절대 물러서지 말고 목숨을 걸고 위치를 사수해야 될 것이야!”
“다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다시 한 번 더 주지시키도록 해.”
“네.”
조선 최강인 자신의 근위 군단이 저깟(?) 팔기군을 상대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만에 하나 대열이 무너진다면 박영식은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도현의 안위를 지킬 각오였다.
“적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부하 군관의 말에 천억근은 속이 바짝 타들어 갔지만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고는 사격 대형으로 도열해 있는 부하들을 보며 외쳤다.
“모두 긴장을 풀고 명령이 있을 때까지 함부로 발포를 하지 마라!”
수만이나 되는 기마가 한 덩어리가 되어 돌격해 오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하지만 그 기병을 바로 마주 보며 싸워야 되는 입장이 된다면 마냥 감탄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당장 뿌옇게 피어오른 모래먼지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런 병사들의 기색을 눈치챈 천억근은 이대로 놔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앞으로 나서며 크게 소리쳤다.
“정신 똑바로 차려! 훈련 받은 대로만 한다면 우리가 무조건 이긴다. 알겠나!”
“예, 옛.”
뭐라고 더 부하들을 다독이고 싶었지만 이제 팔기군이 백 보 안까지 들어왔기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부터는 함께 뒹굴고 땀을 흘린 부하들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상대의 얼굴까지 보이는 거리였기에 병사들이 느끼는 중압감은 더욱 커졌고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적 선두 화력선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아니, 조금 더 기다려라!”
사선 밖으로 비켜선 천억근은 검을 든 손에 땀이 찼지만 조급해하지 않았다.
“팔십 보!”
충분히 적을 끌어 들였다고 판단한 천억근은 검을 위로 번쩍 치켜 올렸다가 내리며 발포 명령을 내렸다.
“쏴라!”
적을 겨냥하고 있던 병사들은 명령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탕! 탕! 탕! 탕!
한참 기세를 올리면서 말을 달리던 야골타는 앞을 가로막고 있는 조선군 대열이 자신들을 보고도 전혀 동요하는 기색 없이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자 왠지 모를 불안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요란한 총성과 함께 조선군 대열에서 수많은 화염이 번쩍였다.
“이런!”
등줄기가 서늘해지면서 함정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너무 늦고 말았다.
수천 발의 탄환이 정면에서 한꺼번에 쏟아졌다.
이히히힝.
“크억.”
“으윽!”
총탄에 맞은 팔기군 병사들은 타고 있던 말과 같이 앞으로 고꾸라졌고 비명이 사방에서 끝없이 터져 나왔다.
“멈추지 말고 계속 쏴라!”
팔기군 선두가 우수수 쓰러지는 걸 보며 천억근은 손에 든 검을 흔들며 목이 터져라 사격을 독려했다.
병사들도 사격을 멈추면 상처 입은 맹수가 된 팔기군이 당장 달려들어 말발굽으로 자신들을 짓이기려고 할 것을 알았기에 필사적으로 소총을 쏴 댔다.
탕! 탕! 탕!
근위 군단 병사들은 삼단 사격 대형을 취한 채 거의 연속으로 장전과 사격을 반복하고 있었다.
기존에 쓰던 남일식 소총이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지만 후장식 소총인 남삼식이었기에 가능했다.
얼마 전부터 생산을 시작해 근위 군단에서도 겨우 두 개 연대밖에 배치를 못 했으나, 그것만으로도 수만에 달하는 팔기군을 상대로 무시무시한 위력을 선보였다.
끝없이 쏟아지는 탄환 사례에 팔기군 병사들의 시신이 산을 이뤘고 바닥에는 피가 흥건하게 고여 강을 만들었다.
따로 조준을 할 필요도 없었다.
워낙 팔기군의 숫자가 많았기에 그냥 대충 보고 쏴도 다 맞았고 어떤 적병은 한꺼번에 두세 발씩 총탄이 박히기도 했다.
가지고 있던 방패를 들어 몸을 가리기도 했으나, 총탄은 손쉽게 그 방패를 뚫어 버리고 적병의 몸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럼 말 머리를 돌려 옆으로 피해 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 있었으나 그것도 어려웠다.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다가 방향을 바꾸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팔기군은 죽을 걸 알면서도 총구 화염이 쉬지 않고 번쩍이는 조선군 대형 앞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만 명이 집단 대형을 이루고 있는데 갑자기 방향을 틀어 버린다면 어떻게 총탄은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서로 뒤엉켜 더 처참한 결과를 만들어 내기 십상이었다.
실제로 몇몇 적병이 공포심을 이겨 내지 못하고 무단으로 달아나려고 하다가 같은 편과 충돌해 큰 부상을 입고 낙마하는 경우가 있었다.
혼자 다치거나 죽으면 몰라도 그렇게 나뒹군 적병들은 장애물로 변해 뒤따라오던 동료들까지 걸려 넘어지게 만들었다.
연속된 총탄 세례에 이미 쓰러진 팔기군이 못해도 일만 명가량은 됐다.
짧은 순간에 고작 팔십 보도 안 되는 거리에서 희생된 거라고 하기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만에 달하는 팔기군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빗발치는 총탄을 뚫어 내고 어느새 근위 군단 사격 대형 바로 코앞까지 접근했다.
이대로 팔기군이 근위 군단을 덮친다면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될 수도 있었다.
바로 그때 조선군 대열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벌어졌다.
“옆으로 빠져!”
천억근의 외침에 근위 군단 병사들은 장전된 총탄을 끝까지 적에게 쏘고는 신속하게 양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대형 뒤에 숨어 있던 황자총통 서른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사!”
지휘 군관의 외침에 포수들이 격발 장치에 연결된 줄을 힘껏 잡아당기자 포구에서 시뻘건 화염이 뿜어졌다.
꽝! 꽝! 꽝!
악귀처럼 소총을 쏴 대던 조선군이 허둥지둥 흩어지는 모습에 야골타는 눈에 힘을 가득 줬다.
큰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 상대편 대열 앞까지 온 것이다.
이제부터는 지금까지 당한 걸 열 배 백 배 되갚아 주는 일만 남았다.
“놈들이 도망친다. 다 죽여 버려라!”
호기롭게 소리치며 말을 달려가던 야골타는 조선군이 사라진 정면에 떡하니 나타난 화포들을 보고는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눈앞이 번쩍이더니 뜨거운 열기와 매캐한 화약 연기가 진동했다.
멍한 정신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팔기군 병사들이 말과 함께 넘어져 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이 아프게 들어왔다.
수백 개의 자탄으로 이루어진 조란탄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지옥 그 자체였다.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병사들의 비명이 시끄럽게 울려 퍼졌고 주인을 잃은 군마가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서성거렸다.
총탄에 맞으면 그래도 시신은 멀쩡했지만 사지가 찢겨 나갔다.
실제로 쓰러진 적병 대다수가 머리가 깨지고 팔이나 다리 하나가 끓어져 없었다.
일제 포격 한 번에 팔기군 선봉이 완전히 박살 나 버린 거였다.
“내 다리!”
“아악.”
“으윽.”
큰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생채기가 생긴 채 낙마해 쓰러졌다가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운 야골타는 처참한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그때 또다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도망친 줄 알았던 조선군이 재빨리 총탄을 장전하고는 화포 양옆에 서서 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조란탄 공격에 겨우 살아남은 팔기군 병사들은 이어진 총탄 세례에 피를 뿌려야했다.
순식간에 시체 무더기가 계속해서 쌓였고 뒤따라오던 적들은 바닥에 널브러진 말과 사람들을 피하느라 어쩔 수 없이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조선군의 좋은 표적이 되어 목숨을 잃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하지만 조선군도 마냥 좋은 상황만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복수심에 불타는 팔기군이 말을 탄 채 덮쳐 와 검을 내려칠 것이었기에 필사적으로 장전과 사격을 반복해야 됐다.
“어서 장전을 끝내!”
바로 앞에서 들리는 말발굽 소리와 비명에 긴장한 포수 한 명이 그만 화약통을 떨어뜨리자 와락 얼굴을 구긴 군관이 뛰어왔다.
“정신 못 차려!”
화약통을 대신 집어 든 군관은 급히 포신에 화약을 넣었다.
겨우 장전을 끝낸 화포가 다시 불을 뿜자 달려오던 팔기군 십 수 명이 허공에 피를 뿌리면서 엎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몸을 돌린 군관은 바짝 얼어 있는 포수에게 화약통을 넘겨주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실수를 하거나 겁을 먹고 주저한다면 너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료 포수들 전체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다!”
“예, 옛.”
“알겠으면 멍청히 서 있지 말고 어서 맡은 일을 하지 않고 뭘 해!”
군관의 호통에 포수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아까와 달리 다부진 얼굴로 몸을 움직였다.
보병들도 극심한 압박 속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바로 앞까지 와서 검을 치켜드는 적을 향해 정신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뒈져 버려!”
타아앙.
“컥!”
피가 튀기며 달려오던 상대가 앞으로 고꾸라졌지만 병사는 적이 죽었는지 살펴볼 겨를도 없이 주머니에서 탄약포를 꺼내 이빨로 찢고는 총을 장전했다.
그런 뒤 바로 다른 표적을 찾아 총을 쐈다.
탄약 주머니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자신이 몇 명이나 죽였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였지만, 아직도 눈앞에는 그의 목을 베려고 달려드는 팔기군이 차고 넘쳤다.
“젠장. 더럽게 많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엄청난 피해를 내면서도 악착같이 돌격해 오던 팔기군이 마침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말 머리를 뒤로 돌리기 시작했다.
“퇴각, 퇴각하라!”
청군 장수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전의를 상실한 팔기군 병사들은 돌격을 멈추고 어수선하게 뒤로 달아났다.
역시 한계치까지 와 있던 천억근과 병사들은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는 한 명이라도 더 죽이기 위해 등을 보인 적에게 소총을 마구 쏴 댔다.
타탕! 탕! 탕!
팔기군의 대형은 완전히 와해됐고 소총 사격에 한 무더기씩 바닥에 떨어져 나동그라졌다.
☆ ☆ ☆
기세 좋게 달려 나갔던 처음의 기세는 어디 가고, 허겁지겁 도망쳐 들어오는 팔기군의 모습은 참으로 처참했다.
청나라가 자랑하는 정예 병력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형편없는 몰골에 도르곤의 눈썹이 하늘로 솟구쳤다.
“저, 저런!”
차마 말을 잇지 못하며 핏대를 세우고 주먹을 꽉 쥐는 그의 곁에서 총병관 용골대가 비통하게 외쳤다.
“폐하, 놈들이 처음부터 저걸 노렸던 것 같사옵니다!”
“쥐새끼 같은 것들!”
고삐를 쥔 손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그러고 있는 가운데 뒤에 선 장수들은 충격과 놀라움에 크게 술렁였다.
“이럴 수가. 팔기군이 저렇게 허망하게 당하다니…….”
“우리 청군의 자랑거리가…….”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이오?”
전투를 시작하자마자 청군이 가진 가장 강력한 패인 팔기군을 꺼내 승부수를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저리도 간단하게 패배하여 도주하는 꼬락서니를 눈앞에서 바로 목격한 그 충격은 쉽게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 이대로 전투를 포기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조선군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 팔기군이 당했지만 아직 수십만에 달하는 병력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팔기군도 비록 예봉이 꺾인 채 처참한 몰골로 퇴각해 오고 있었으나 완전히 전멸된 건 아니었다.
이를 갈아붙인 도르곤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총병관.”
“예.”
“지금 즉시 보병대를 돌격시켜 조선군 대열을 흔들고 퇴각해 오는 팔기군을 수습해 전열을 재정비토록 하라!”
용골대는 전투 양상을 소모전으로 끌고 가려는 도르곤의 생각을 단번에 눈치채고는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도총관 엄황의 합류로 병력이 크게 늘어났지만 삼십만 대 사십만으로 여전히 청군이 숫자가 더 많았다.
시체로 산을 쌓으며 엄청난 살육전이 벌어지겠으나 소모전으로 간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것이 도르곤의 판단이었다.
실제로 거리를 두고 벌이는 전투는 화력이 앞서는 조선군이 유리해도 서로 뒤섞여 난전에 들어간다면 숫자가 많은 청군이 보다 유리했다.
명령을 받은 장수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가운데 도르곤은 앞에 보이는 조선군 진영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무슨 수를 써서든지 꼭 이기고야 말겠다며 이를 갈고 살벌한 기세를 피워 올리는 그의 패기에 주변인들이 흠칫할 정도였으나, 이미 분노로 눈이 먼 도르곤에겐 그런 것쯤이야 안중에도 없었다.
☆ ☆ ☆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전장을 바라보던 도현은 대륙 최강이라 불리던 팔기군이 꼬리를 내린 채 허겁지겁 물러서는 걸 보고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
“새로 개발한 남삼식 소총의 위력이 대단하군.”
“그러게 말이옵니다.”
“저런 식으로 연발로 총을 쏴 댄다면 팔기군이 아니라 팔기군 할아비라도 그대로 녹아내려 버릴 것이옵니다.”
“맞아.”
“신형 소총의 성능도 뛰어 났지만 팔기군을 막아선 근위 군단 병사들의 목숨을 건 분투奮鬪가 없었더라면 승리를 거두기 어려웠을 겁니다.”
도총관 엄황의 말에 도현은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나도 같은 생각일세. 그 꺾이지 않는 의지와 용기가 우리를 승리로 이끈 거야.”
지축을 울리며 무섭게 달려오는 기병을 앞에 두고 병사들이 느꼈을 압박감과 공포는 가히 지옥문을 눈앞에 둔 것이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을 텐데 그걸 이 악물고 버텨 냈으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지 겪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저길 보십시오.”
남두병 사령관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청군 진영에서 보병들이 물밀 듯 앞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적이 난전을 유도하려는 것 같사옵니다.”
이를 살펴보던 도총관 엄황이 그리 말하자 도현이 삐뚜름하게 입매를 기울였다.
“누가 이기는지 한번 해보자는 거지.”
비단 수술이 달린 지휘봉으로 손바닥을 가볍게 내려치던 그는 탁 소리를 내며 주먹을 거머쥐었다.
“그럼 똑같이 응수해 줘야지. 도총관!”
“예.”
“용병대를 출전시키게.”
“알겠사옵니다.”
도총관 엄황이 손짓으로 신호를 하자, 뒤에 대기하고 있던 군관이 두 번째 명적을 꺼내 하늘로 쏘아 올렸다.
삐이이익.
왜국인들로 구성된 용병대 지휘관인 전적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허공을 가르는 명적을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이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모두 앞으로!”
공기가 찌르르 울릴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였다.
그러자 뒤에 도열해있던 용병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 중 일부는 작은 철판을 가죽으로 연결해 붉은색 칠을 한 간편한 갑옷과 투구까지 챙겨 온 자들도 있었으나, 나머지 대부분은 가슴과 국부에만 보호구를 걸쳤고 그마저도 없는 자들 역시 상당수였으니, 제 몸을 보호하기보다는 공격에 치중하겠다는 뜻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처럼 행색도 제각각인 데다 진흙탕을 구르며 밑바닥 생활을 하는 인간 특유의 거친 기운을 물씬 풍기고 있는 용병들의 단 하나 공통점이라면, 바로 손에 들고 있는 예리한 검이었다.
용병들에게 있어 검이란 곧 밥벌이 수단이었기에 방어구를 갖출 여유는 없어도 무기를 관리하는 일은 빼먹지 않은 듯 날이 푸르스름하게 서 있어 서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왜국 특유의 길쭉하고 도신이 얇은 검을 쥐고 흉흉한 기세를 흩뿌리던 그들은 마치 사냥감을 앞두고 몸을 푸는 늑대 무리처럼 입맛을 다시며 앞으로 나섰다.
용병대라고 하지만 숫자가 무려 일만 명에 달했다.
그리고 다들 어수선한 왜국 정세 속에 말 그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전투 경험이 풍부한 데다 손 속 또한 잔인했고 무엇보다 돈이라는 목적의식까지 확실했다.
잔뜩 살기를 피워 올리며 나아가는 용병대 뒤로 총검으로 무장한 조선군 병사들이 전투대형을 갖춘 채 따라갔다.
“돌격!”
처음부터 체력을 빼지 않기 위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용병대는 재차 이어진 전적의 명령에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면서 달려 나갔다.
“우와아아아!”
“죄다 죽여 버려!”
“두건 하나당 은화 다섯 냥이다!”
“와!”
확실한 동기 부여를 위해 도현은 용병들에게 적병 한 명을 죽일 때마다 은화 한 냥을 주겠다며 포상금을 걸었다.
그 전공戰功은 청군 병사들이 적아를 구별하기 위해 목에 두르고 있는 푸른색 두건으로 구분하기로 했다.
돈에 눈이 돌아간 용병들은 피에 굶주린 승냥이 떼처럼 덤벼들었다.
청군도 지지 않고 달려 나왔고 양군은 전장 한복판에서 만나 거친 파열음을 내면서 충돌했다.
콰콰꽝!
“아악!”
“컥.”
채챙! 챙!
“죽어!”
푹.
“꾸엑.”
살벌한 말들이 오가는 가운데 서로 한데 뒤엉킨 병사들은 가지고 있는 병장기를 상대의 심장에 꽂아 넣거나 베며 혈투를 벌였다.
비명성과 피가 난무했고 양쪽 병사들은 악에 받친 채 오직 상대를 죽이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지휘관인 전적도 말에 탄 채 연신 전투를 독려하면서 가까이 있는 적병과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적을 단번에 밀어 붙여라!”
츄앙.
푸푹.
자신을 노리고 적이 내지른 기다란 창을 비켜 쳐 낸 전적은 상대의 얼굴을 검으로 찔러 버렸다.
“아아악!”
적은 억눌린 비명을 내지르면서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몸을 비스듬히 기울여서 적병의 목을 베어 내 마무리까지 확실히 한 전적은 또 다른 적에게 시선을 돌리고는 날카로운 송곳이 촘촘하게 박힌 철 신발을 들어 상대의 어깨를 힘껏 찍어 버렸다.
퍽!
부상을 입고 비틀거리는 적병을 향해 검을 내려쳤다.
촤아악.
상대의 목이 잘리면서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그의 얼굴로 갑옷을 더럽혔다.
아무렇지도 않게 손바닥으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낸 전적은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적을 찾아 말을 몰았다.
시간이 갈수록 난전은 더욱 치열해졌고 양군 병사들은 서로를 죽고 죽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한편 보병들만큼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화포를 쏘는 포수들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양군 포병대는 서로를 향해 포구를 고정시킨 채 마치 결투라도 벌이듯 포탄을 주고받았다.
거리가 있다 보니 상대를 명중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한 발만 제대로 맞아도 화포와 포수들이 화염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바로 지척에서 빗나간 포탄이 터지며 흙먼지가 피어오르는데도 포수들은 바닥에 엎드리거나 몸을 움츠리지 않고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했다.
“화약을 더 가져와!”
“빨리!”
아까 전 바로 옆에서 터진 포탄에 이마가 찢어져 피를 흘리고 있는 군관은 상처 부위를 붕대로 감을 여유도 없이 어서 포를 쏘도록 연신 포수들을 다그쳤다.
“장전 끝!”
“좋아. 발사!”
포수 한 명이 격발 장치와 연결된 줄을 있는 힘껏 당기자 육중한 포성이 울리면서 화포가 발사됐다.
꽈아앙!
희뿌연 화약 연기 때문에 포탄이 날아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군관은 파공음을 들으며 어쩐지 이번에는 좋은 느낌이 들었다.
“제발 맞아라!”
주먹을 꽉 움켜쥔 군관은 화포 옆에 서서 간절한 시선으로 적진을 뚫어질 듯 바라봤다.
그의 기도가 통했는지 잠시 뒤 목표로 잡았던 적 포대에서 시뻘건 불기둥이 솟구쳤다.
쿠쿵!
쌓여 있던 포탄과 화약이 유폭을 일으켰는지 연이서 화염이 터져 나오며 포대가 통째로 박살 났다.
“우와!”
“명중이다.”
적 포대가 있던 곳에 시커멓게 피어난 버섯구름을 보며 포수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군관도 입가에 얇은 미소를 짓다가 이내 정색을 하며 뒤를 돌아봤다.
“좋아하는 건 나중에 하고 어서 다시 포탄을 장전해라!”
“옛.”
힘차게 대답한 포수들은 능숙한 동작으로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했다.
새로 포구에 화약과 포탄을 밀어 넣고 막 장전을 다 끝냈을 때 한쪽에 있던 포수가 다급히 고함을 쳤다.
“포, 포탄이다!”
“……!”
화들짝 놀라 고개를 치켜뜬 군관은 시커먼 철환 하나가 이쪽으로 날아오는 걸 보고 눈을 크게 치켜떴다.
“아, 안 돼!”
그게 군관이 이 세상에서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순간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폭음과 함께 이들이 있던 곳에 화염이 솟구쳤다.
희부연 먼지가 주위를 뒤덮었다
눈앞이 온통 하얗게 변한 군관과 포수들은 파편에 온몸이 갈기갈기 찢긴 채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흙바닥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졌다.
“으악!”
“커헉.”
그렇게 떨어진 이들은 약간 몸을 꿈틀거리다가 숨이 끊어 졌는지 이내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옆에서 아군 포대가 박살이 났지만 조선군 포수들은 슬퍼할 시간도 없다는 듯이 적을 향해 포탄을 날려 보냈다.
이렇게 양군의 포격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격렬하고 치열하게 전개됐다.
이런 가운데 보병들 간의 전투는 점점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채챙! 챙! 챙!
슈각.
“아악!”
갈색 대지는 양군 병사들이 흘린 피로 검붉게 변해 있었고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사지가 잘려 나가는 격전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좀 더 많은 병력을 내보낸 청군이 유리한 것 같았지만 단병접전短兵接戰에 능한 왜국 용병들이 상대를 거세게 몰아붙이면서 전세가 조금씩 역전됐다.
거기다가 후속해 오던 조선군 병사들이 소총을 쏘며 난전에 가세하자 청군은 더욱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
타타타탕! 탕! 탕!
“돌격 준비!”
지휘관의 외침에 처음부터 총검을 장착하고 있던 병사들은 힘차게 기합을 내뱉으며 자세를 취했다.
“청국 놈들을 끝장내 버리는 거다. 앞으로!”
“우와아아!”
마치 피를 갈구하는 것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총검은 뜨거운 햇살 아래 섬뜩한 빛을 내며 번득였다.
앞으로 돌격해 들어간 조선군 병사들은 총검을 찔러 넣거나 단단한 개머리판으로 적병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이야압!”
푹.
“끄아악.”
빠각.
“캑.”
기다란 총검은 단번에 등까지 뚫고 나왔고 개머리판에 맞은 상대는 피를 튀기며 뒤로 벌러덩 자빠졌다.
“죽어!”
“끄르륵.”
조선군 병사가 내지른 총검에 찔린 적병은 피가 목구멍으로 차올라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숨이 끊어졌다.
난전에 뛰어든 조선군 병사들은 왜국 용병 못지않게 아주 잘 싸웠다.
아니, 몸을 사리지 않고 적과 싸우는 투지鬪志는 돈에 의해 전장에 나선 왜국 용병들보다 훨씬 나았다.
총검만 쓰는 것이 아니라 조선군 병사들은 달려드는 적을 향해 장전해 둔 총탄을 쏘며 상대를 제압했다.
탕! 탕!
“으윽!”
산발적인 총성이 여기저기에서 계속 이어졌고 매캐한 화약연기가 피비린내와 섞여 코를 찔렀다.
총성이 터질 때마다 청군 병사들이 피를 뿌렸다.
총탄에 맞아 쓰러진 적병의 머리에 개머리판을 내리쳐 끝장을 냈다.
나무로 만들어진 개머리판에는 상대편의 머리가 깨지면서 엉겨 붙은 뇌수가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조선군 병사는 상관하지 않고 손에 검을 들고 달려드는 또 다른 적병의 가슴에 총검을 쑤셔 박았다.
이렇게 조선군이 승기를 잡아가자 후방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도르곤은 짜증과 분노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소리쳤다.
“멍청한 것들!”
이미 팔기군이 깨지며 초전부터 계획이 어긋났는데 보병들마저 밀리고 있으니 도르곤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고 벌써 사상자 숫자만 사만이 훌쩍 넘었다.
물론 여전히 본진에는 수십만에 달하는 병력이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기세를 빼앗긴다면 나중에는 역전하기가 더 어려웠다.
조선군을 꺾고 전투에서 이기려면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했다.
답답한 심정으로 한참을 더 전장을 바라보던 도르곤은 마침내 아껴 둔 패를 꺼내 들었다.
“총병감!”
“네.”
“진충군을 준비시키도록 해.”
뜻밖의 지시에 용골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충군을 말씀이시옵니까?”
“그러네.”
진충군은 도르곤의 근위 부대나 마찬가지로 청군에서도 신형 소총을 가장 먼저 보급받았고 조선군을 따라 해 신식 훈련을 시킨 병력들이었다.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고부리성과 영원성을 거쳐 오면서 수십 일간 피 튀기는 공성전을 치르면서도 진충군을 소모품을 쓸 수 없다며 한 번도 전투에 투입시키기 않았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보기만 좋은 황제의 장난감은 절대 아니었다.
수십 번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 입고 있는 푸른색 갑주를 따서 상대한 적들이 푸른 악마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였다.
아무튼 팔기군과 함께 청 황제인 도르곤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군대인 진충군을 상황이 어렵기는 해도 벌써부터 투입한다는 것에 용골대를 비롯한 장수들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중원中原을 적에게 내준다면 아군이 더 위축될 수밖에 없어. 그 전에 상황을 반전시켜야만 돼!”
단호한 도르곤의 말에 다른 장수들은 비장의 패를 너무 일찍 꺼내는 것이 아닌지 우려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용골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황제 앞이라 함부로 말을 꺼내지 못했으나 우세할거라 예상한 난전에서 오히려 청군이 밀리는 모습을 보이자 내심 크게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병력 손실도 컸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패하게 되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금처럼 수십만의 대군이 맞붙어 회전을 벌일 때에는 누가 먼저 승기를 잡아 공세를 펼치는가 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알겠사옵니다.”
“전열이 무너지기 전에 어서 서둘러!”
“옛.”
얼마 안 있어 뿔 나팔 소리가 울리자 청군 진영에서 푸른색 군복을 입은 진충군이 앞으로 나섰다.
모두 삼만 명가량이었는데 정예답게 군기가 바짝 섰고 동작 또한 절도가 있었다.
그런 청군의 움직임을 조선군 지휘부도 놓치지 않았다.
“깃발을 보니 아무래도 진충군인 것 같사옵니다.”
남두병 사령관의 말에 도현은 천리경을 내리며 입가를 실룩였다.
“이대로 중원을 빼앗기면 승기가 완전히 기운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군.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야.”
“그러게 말이옵니다.”
그가 중얼거린 말에 다른 장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입맛을 다시면서 아쉬워하던 도현은 이내 총병관 엄황을 보며 물었다.
“진충군을 상대하려면 병력을 얼마나 더 투입해야 될 것 같나?”
“글쎄요.”
잠시 고심을 하던 엄황은 신중한 어투로 대답했다.
“아군이 상대에 뒤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사오나 확실하게 우세를 점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동수同數 이상을 내보내야 되지 않겠사옵니까.”
“하면 만인대 네 개를 출전시켜야 되겠군.”
“예.”
그러자 남병두 사령관이 굳은 얼굴로 우려를 표시했다.
“지금도 전장이 복잡한데 그러면 자칫 통제가 어려워질 수도 있사옵니다.”
“난전이 확대되면 아군의 피해가 예상보다 늘어날 것이라는 걸 본인도 알고 있소. 그러나 상대가 저리 나오는데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않소이까.”
“차라리 혼란스러운 중원에 병력을 밀어 넣지 말고 우회를 시켜 상대의 측면을 노리는 건 어떻습니까?”
장수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자 엄황과 설전을 벌이던 남두병 사령관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핀잔을 줬다.
“한차례 당했지만 여전히 수만에 달하는 팔기군이 건재한데 청 황제가 그걸 그냥 보고만 있겠나.”
“그건…….”
괜한 말을 꺼내 눈칫밥만 얻어먹은 장수가 살짝 얼굴을 붉힌 채 민망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그 후로도 한동안 갑론을박하며 논쟁이 이어지자 그걸 잠자코 바라보던 도현이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만.”
크지는 않았으나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에 뚝, 하고 말소리가 끊겼다.
“도르곤이 비장의 한 수를 꺼내 들었으니 짐도 그에 상응하는 패를 보여 줘야지.”
“어찌하시려고 그러시옵니까?”
엄황이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도현은 스윽 고개를 돌려 적진을 바라본 뒷이야기를 이었다.
“최 장군.”
뒤쪽에 있던 포병대 지휘관 최진석은 도현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깜짝 놀라 앞으로 나섰다.
“예, 폐하.”
“신기전은 언제든지 쏠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겠지?”
“물론이옵니다.”
도현이 뭘하려는지 깨달은 장수들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신기전을 쓰시려는 것이옵니까?”
“놈들이 자랑하는 진충군을 몽땅 다 불에 태워 버려서 전의를 확실히 꺾어 버리는 거야.”
잠깐 망설이던 남두병 사령관이 신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신기전 재고가 부족해 많아 봤자 두 차례 이상 사용이 불가능하옵니다.”
“짐도 알고 있네.”
“그러시면 좀 더 신중히 생각을 해 보시는 것이…….”
남두병 사령관의 이야기에도 도현의 결심은 바뀌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무기라도 제때 사용하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야. 지금이 바로 신기전을 쓸 때일세.”
“후우. 알겠사옵니다.”
“지금 바로 지시를 내리도록 해.”
“예.”
짧게 대답한 남두병 사령관이 몸을 돌려 가만히 서 있던 최진석에게 눈짓을 하자 바로 신기전 포대로 전령이 달려갔다.
허리를 꼿꼿이 편 도현은 멀리 청군 진영 한복판에 세워진 황룡기를 보면서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곧 지옥을 맛보게 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