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서회전 2
신기전을 발사하는 화차火車는 바퀴가 두 개 달린 수레 위에 둥근 구멍이 뚫린 나무 상자를 올려놓은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다.
구멍 개수에 따라 한 번에 날려 보낼 수 있는 신기전 숫자가 결정됐는데 현재는 백 발이 일반적이었다.
단순히 앞에 있는 상대를 향해 무작위로 발사하는 것이 아니라 각도를 조절해 정확히 목표를 타격할 수 있었다.
조선군 대형 뒤편에 이런 화차 스무 대나 약간 거리를 두고 언제든지 신기전을 쏠 수 있게 일렬로 방열되어 있었다.
신기전 부대 지휘관인 이혁권은 말에 앉아 천리경으로 전투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후방에 있는 데다 포격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당장 그가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피 튀기는 혈전을 벌이고 있는 보병들 간의 전투도 장관이었지만 그의 시선을 끄는 건 양군의 포격전이었다.
아군이 쏜 포탄이 적을 박살 낼 때마다 주먹을 불끈 치켜들며 환호하다가 조선군 포대가 시뻘건 화염에 휘말리면 안타까운 탄성을 내뱉었다.
같은 포병대였기에 동변상련의 마음을 느끼며 더욱 마음이 아팠다.
“계속 이렇게 지켜만 보고 있어야 됩니까?”
눈에서 천리경을 뗀 이혁권은 고개를 돌려 부관을 봤다.
“무슨 말인가?”
“동료들이 저리 허무하게 죽어 나가는데 두 손을 놓고 멍하니 있어야 되는 것이 너무 화가 나서 그럽니다.”
울분에 가득 찬 부관의 모습에 그는 짐짓 엄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아직 우리가 나설 때가 아니니 그런 것이야.”
“하오나…….”
“허어. 군관이 돼서 그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하면 어쩌겠다는 게야. 폐하와 여러 장군들께서 자네만큼 생각이 없는 줄 아나!”
따가운 질책에 부관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곧 우리가 나설 때가 있을 테니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리도록 해.”
“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혁권도 아군 포수들이 피를 흘리는 걸 그냥 보고만 있는 것이 편치는 않았다.
그때 등에 깃발을 단 전령 한 명이 말을 타고 급히 달려왔다.
“워워.”
이히히힝.
전령이 고삐를 당겨 말을 세우자 이혁권이 약간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적진 앞으로 나온 진충군을 신기전으로 격멸하라는 폐하의 지시입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명령에 이혁권은 자신도 모르게 눈에 힘을 주며 전령을 봤다.
“알았네.”
“그럼.”
군례를 취한 전령이 말머리를 돌려 지휘부가 위치한 곳으로 되돌아가자 이혁권은 잔뜩 흥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부관을 보며 지시를 내렸다.
“때가 왔다. 발사 준비를 하도록 해.”
“옛!”
힘차게 대답한 부관은 화차 옆에서 대기 중인 포수들한테 가서 명령을 전달했다.
“포격 준비!”
그사이 재빨리 천리경으로 목표를 확인한 이혁권은 사격 제원을 계산한 뒤 크게 소리쳤다.
“전방 천이백 보 고각은 십오에 맞춰라!”
노련한 포수들이 외치는 대로 고각을 조정하자 이내 조준을 끝난 순서대로 붉은색 삼각 깃발을 들어 올렸다.
“하나 포, 조준 끝!”
“둘 포, 완료!”
순식간에 스무 대의 화차가 모두 사격 준비를 끝냈다.
“전 포대 준비가 끝났습니다.”
부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혁권은 마지막으로 목표를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발사!”
명령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섬뜩한 바람 소리를 내며 장전된 신기전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쉬쉬쉬쉭! 쉬쉭! 쉬쉬쉬쉭!
신기전이 솟구치며 뿜어내는 화약 연기가 주변을 삽시간에 뒤덮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화차 하나당 백 발씩 무려 이천 발에 달하는 신기전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 다 발사된 것이다.
희뿌연 연기들 사이로 포수들이 이 차 사격을 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크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간 신기전들은 정확히 진충군 머리 위에 쏟아져 내렸다.
퍼퍼펑! 펑! 펑!
허공에서 신기전이 폭발하자 둥근 나무통 안에 들어 있던 수많은 자탄이 비처럼 떨어져 내려 진충군 병사들의 몸을 찢어 발겼다.
후두두둑.
“꾸엑!”
“아악.”
팔과 다리가 잘려 나가고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적들은 피 칠갑을 한 채 살려 달라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이건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공중에서 터지지 않고 땅에 박힌 신기전은 자탄 대신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매캐한 연기를 뿜어냈다.
치지지직.
“콜록콜록.”
“이건 또 뭐야!”
연신 기침을 해 대며 불발탄인가 하고 생각하는 순간 어디선가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부, 불이야!”
“으헉.”
바닥에 박혀 있던 신기전이 터지면서 사방에 불꽃이 튀었다.
큰 폭발이 아니고 파편도 많이 튀지 않았지만 문제는 불꽃이었다.
적병들의 몸에 붙은 불꽃은 하얀 연기를 맹렬하게 내뿜으면서 금방 갑옷을 태워 버리고 안에 있는 피부를 녹였다.
“살려 줘!”
끔찍한 고통에 적병들은 바닥을 뒹굴며 불을 끄려고 했지만 어찌 된 건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견디다 못한 적병들은 갑옷을 벗어 던지기까지 했다.
적들을 불태우면서 공포 속에 몰아넣고 있는 것의 정체는 바로 백린白燐이었다.
백린은 물을 부어도 절대 꺼지지 않고 하얀 섬광과 연기를 피워 올리면서 주위에 있는 모든 걸 삽시간에 다 태워 버리는 무시무시한 물질이었다.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하고 동료가 산 채로 불에 붙어 태워 졌지만 청군은 자신한테 불꽃이 옮겨 붙을까 봐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지옥 중에 가장 끔찍하다는 염화 지옥이 따로 없었다.
이런 가운데 조선군이 날려 보낸 두 번째 신기전들이 혼란에 빠진 진충군을 다시 덮쳤다.
콰콰꽝!
희뿌연 연기와 불길에 휩싸인 채 진충군이 있던 곳이 온통 쑥대밭이 된 걸 보며 도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제대로 타격을 가했군.”
“사격이 아주 정확했사옵니다.”
“그래.”
작게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허리를 펴며 말했다.
“이 기세를 몰아서 적을 계속 압박해야지. 도총관.”
“예.”
“세 번째 명적을 쏘아 올리게.”
“알겠사옵니다.”
☆ ☆ ☆
삐이이익.
“장군, 보십시오. 세 번째 명적입니다.”
신익석의 말에 흑치영이 고개를 들자 정말 명적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제대로 복수를 해 줄 시간이 왔군.”
흑치영은 눈을 반짝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팔기군을 함정으로 끌어들인 조선군 기병대는 전장을 크게 우회해서 청군 진영 후방에 집결해 있었다.
조란탄 포격에 이은 근위 군단의 집중사격으로 팔기군에 큰 타격을 안겼지만 기병대가 통쾌하게 복수를 해 준 것이 아니었기에 쌓인 분노를 전혀 해소하지 못했다.
그런데 드디어 모든 걸 시원하게 풀어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지금 바로 움직이실 겁니까?”
“당연하지.”
단호하게 말한 흑치영은 눈을 매섭게 번뜩였다.
“내가 선봉에 설 것이야.”
“장군께서 말씀이십니까? 그러나 자칫 부상이라도 입으시면 큰일이니 제가 대신 선봉을 맡겠습니다.”
혹시 모를 위험을 막기 위해 신인석이 만류했지만 흑치영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지난번 팔기군의 말발굽 아래 죽어 간 부하들을 생각할 때면 지금도 잠이 오지 않아. 오늘 그들의 복수를 내 손으로 직접 해 주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 속에 살 것 같네.”
“장군…….”
“그러니 아무 말 하지 말게.”
이미 결심을 단단히 굳힌 흑치영의 모습에 신인석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대신 조심하십시오.”
“걱정 말고 내 뒤나 잘 따라오게.”
뒤를 돌아보자 날카로운 예기를 은은히 피워 올리며 늘어서 있는 기병들이 흑치영의 눈에 들어왔다.
든든한 시선으로 기병을 천천히 훑어 본 흑치영은 손에 든 언월도를 치켜들면서 외쳤다.
“팔기군에 누가 진정한 강자인지 보여 주자!”
“우와아아!”
“적진을 가로지를 때까지 절대 말을 멈추지 마라. 전군 돌격!”
돌격 명령을 내린 흑치영은 발로 타고 있던 말 옆구리를 세게 찼다.
그러자 오랜 세월 그와 함께한 군마는 힘차게 땅을 박차며 앞으로 뛰어 나갔다.
시원한 바람이 안면을 스치고 지나갔고 말이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격렬한 흔들림이 그를 더욱 흥분되게 만들었다.
그런 흑치영 뒤로 수만에 달하는 기병들이 먼지 구름을 뿌옇게 피워 올리면서 빠르게 들판을 질주했다.
☆ ☆ ☆
진충군이 허무하게 박살 나자 손에 든 지휘봉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분통을 터트리던 도르곤은 갑자기 뒤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인상을 찡그렸다.
“이건 또 뭐야!”
“글쎄요?”
몸을 돌려 후방을 살피던 도르곤과 청군 장수들은 뿌연 먼지구름 사이로 한 무리의 기마대가 새까맣게 몰려오는 걸 보고 경악했다.
“저, 저건!”
“조선군 기병대입니다.”
장수들이 크게 술렁이는 가운데 말에 올라앉은 도르곤은 거침없이 밀려드는 기병대의 모습을 보고 고삐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익!”
청군 병사들도 후방에 갑자기 나타난 기마가 조선군인 걸 알고 동요했다.
“이랴!”
“하! 하!”
널찍한 언월도 날로 연신 타고 있는 군마 엉덩이를 때리며 속도를 높이던 흑치영은 적진이 눈앞에 들어오자 목이 터져라 외쳤다.
“궁격 준비!”
그러자 귀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 속에서도 용케 그의 지시를 알아들은 기병들은 안장에 꽂아 두고 있던 각궁을 꺼내 들었다.
화약 무기가 빠르게 도입되면서 중요성이 많이 퇴색됐지만 여전히 각궁은 조선군 기병대의 중요 장비 중 하나였다.
최대 속도로 달리는 중이라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으나 기병들은 두 다리로 단단히 중심을 잡고는 등 뒤에 매고 있던 전통에서 편전을 하나씩 뽑아 시위에 걸었다.
그러고는 팽팽하게 시위를 당기고는 차분히 목표를 겨냥했다.
이 모든 것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 가는 것만 봐도 기병대가 얼마나 혹독한 훈련을 받은 정예들인지 알 수 있었다.
어느새 거리가 오백 보까지 좁혀지고 청군 진영에서 겨우 병력을 추스른 팔기군이 허겁지겁 요격에 나서는 걸 본 흑치영은 치켜 올린 언월도를 아래로 내리며 소리쳤다.
“발사!”
기병들이 명령에 따라 시위를 놓자 편전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팅. 팅.
슈슈슉! 슈슉! 슈슉!
수만 개의 편전이 일제히 날아오르자 하늘은 순간 밤이 된 것처럼 어두워졌다.
정점을 찍은 편전은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하늘을 가득 메운 편전에 적들은 황급히 방패를 들어 올렸다.
“화살이다!”
“방패로 막아라.”
“히익.”
다급한 외침이 청군 진영에서 터져 나왔고 적병들은 커다란 사각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편전은 나무로 된 방패를 여지없이 꿰뚫어 버렸고 적병들은 피를 뿌리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재차 편전들이 날아들며 청군 진영을 혼란에 빠뜨렸다.
근위 군단이 쏴 댄 총탄에 전사한 야골타 대신 팔기군 지휘를 맡은 달소는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청군 병사들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모두 비켜라! 팔기군은 나를 따르라.”
두두두두.
그의 명령에 팔기군 잔존 병력 사만이 바짝 날이 선 모습으로 달려 나갔다.
성난 황소처럼 마주 보고 내달리는 양군은 어느새 백 보 안까지 거리가 줄어들며 이제 상대편 얼굴까지 보일 정도였다.
일촉즉발의 순간 조선군 기병대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탕! 탕! 탕!
가지고 있던 권총을 꺼내 쏜 것이다.
이제 한바탕 뒤섞여 칼부림을 할 생각으로 잔뜩 기세를 피워 올리던 팔기군은 뜻밖의 총격에, 선두 열에 있던 이들이 와르르 낙마했다.
제법 거리가 있는 데다 권총의 위력이 약해 큰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지만 이백여 명이 넘는 적들이 피를 흘리면서 낙마하거나 말과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크악.”
이히히힝.
“끅.”
그러자 자연스럽게 돌격하는 팔기군의 기세가 한풀 꺾여 버렸다.
가뜩이나 조선군보다 뒤늦게 말을 달려 가속도가 제대로 붙지 못한 상태에서 대형까지 살짝 흐트러진 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조선군 기병대는 그걸 놓치지 않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상대가 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죄다 죽여 버려라!”
“우와!”
쿠쿠쿵!
고함을 내지른 흑치영이 커다란 언월도를 내려쳐 적병을 반쪽 내 버리는 걸 신호로 양군이 서로 충돌해 뒤엉켰다.
버벅.
“크악!”
“하압.”
힘과 힘이 서로 부딪치자 묵직한 파열음이 이곳저곳에서 울리며 병사들이 피 안개를 뿌리며 뒤러 나가떨어졌다.
이히히힝.
어느 편이든 힘에서 밀린 쪽이 모든 걸 잃는 거였다.
조선말로 내지르는 비명도 적지 않았지만 낙마하는 이들 상당수가 팔기군이었다.
예봉이 꺾이면서 상대에 틈을 보인 것이 이런 식으로 크게 돌아왔다.
조선군 병사들은 병장기를 마구 휘두르면서 팔기군 대열 안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특히 흑치영은 그동안 쌓인 분노를 이번에 모두 다 쏟아 내기라도 하듯 적병의 숨통을 끊어 놨다.
“이야야압!”
슈각.
“끄헉.”
우렁차게 기합을 내지른 흑치영은 마주 보면서 덤벼드는 적병을 향해 시퍼렇게 날이 선 언월도를 휘둘렀다.
웬만한 사내는 들고 있기조차 무거웠지만 타고난 장사인 흑치영은 한 손으로 언월도를 쥐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했다.
언월도에 베인 적병은 피를 뿌리며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그 상태에서 아직 살아 꿈틀거리는 상대를 흑치영이 탄 군마가 말발굽으로 밟아 무참하게 짓이겼다.
꽈직.
또 다른 적병이 검을 치켜든 채 달려들었다.
“죽어라!”
다리를 살짝 쳐서 군마를 움직인 흑치영은 상대의 검을 가볍게 흘리고는 유연하게 곡선을 그리며 언월도를 앞으로 쭉 뻗었다.
츠릉. 챙!
“아, 안 돼!”
눈앞에 날아오는 언월도 날을 보고 적병이 황급히 몸을 틀었지만 흑치영의 동작이 더 빨랐다.
푹!
“커, 컥.”
마치 짚단을 자르듯 적병의 목이 힘없이 날아갔다.
뼈가 잘려 나가는 것이 창대를 타고 고스란히 전해지자 흑치영은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다 덤벼라!”
갑옷에 피를 잔뜩 묻힌 채 흑치영이 소리치자 근처에 있던 적들은 겁에 질려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그런 흑치영 주위로 피가 튀고 사지가 잘려 나가는 치열한 격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달소는 좌충우돌하며 팔기군 병사들을 마구 베어 넘기는 흑치영의 모습에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짧은 시간 동안 그가 휘두른 언월도에 죽어 나간 숫자만 대략 십 수 명이 넘었다.
병사들의 희생도 컸지만 무엇보다 불교 설화에 나오는 금강야차金剛夜叉처럼 날뛰는 흑치영의 기세에 팔기군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상황이 나빠지기 전에 놈을 처리해야 한다.
서늘한 살기를 피워 올리며 달소는 흑치영에게 다가갔다.
버둥거리며 달아나려는 적병의 등을 길게 베어 버린 흑치영은 옆에서 느껴지는 강한 살기에 고개를 돌릴 틈도 없이 몸을 빙글 돌리며 언월도를 치켜 올렸다.
채챙.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리며 달소의 철퇴가 언월도에 막혔다.
“제법이구나.”
“흥. 그대로 되돌려 주지.”
흑치영이 콧방귀를 뀌며 철퇴를 가볍게 밀쳐 내자 달소는 입술을 실룩이며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다시는 까불지 못하도록. 그 주둥이를 아작 내 주마.”
“어디 한번 해보시지.”
손에 불끈 힘을 주며 달소가 철퇴를 휘두르자 흑치영은 창대로 쳐 내고는 언월도를 앞으로 쭉 내려 그으며 상대의 어깨를 노렸다.
틈을 노린 재빠른 반격이었지만 달소도 장군 자리에 그냥 앉아 있는 건 아닌지 상체를 틀어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 냈다.
그러고는 서로 바짝 붙어 내리 이십여 합을 주고받았다.
채챙. 챙!
한 수 한 수가 맞으면 그대로 숨통이 끊어질 만큼 위력적이었다.
막상막하의 대결이었지만 차츰 시간이 흐를수록 흑치영이 승기를 잡아 갔다.
특히 언월도를 내려치는 흑치영의 완력은 병장기를 맞부딪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달소가 신음을 흘릴 정도로 강했다.
인정하기 싫었으나 이대로 가다가는 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달소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때 언월도를 크게 휘두른다고 흑치영의 허리가 빈 것을 발견한 달소는 눈을 번뜩이며 철퇴를 비스듬히 내려쳤다.
“뒈져라!”
일격에 치명타를 가하기 위해서 달소는 기합과 함께 온힘을 철퇴에 실었다.
위험천만한 순간이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흑치영은 그걸 보고도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고 그런 상대의 얼굴에 달소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사실 이건 달소의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서 흑치영이 의도적으로 빈틈을 보인 것이었다.
함정인 줄도 모르고 달소가 덤벼들자 흑치영은 몸을 틀면서 전광석화 같은 동작으로 언월도를 휘둘렀다.
슈각!
섬뜩한 절단음과 함께 철퇴를 든 달소의 오른쪽 손목이 잘려 나갔다.
“……!”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진지 몰라 두 눈을 껌뻑이던 달소는 잘려 나간 손목에서 붉은 핏줄기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극심한 고통이 느껴지자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악!”
피로 물든 손목을 붙잡고 울부짖는 달소를 차가운 시선을 쳐다보며 흑치영은 아래로 늘어뜨린 언월도를 들어 올리며 마지막 마무리를 지었다.
“끝이다.”
“아, 안 돼!”
머리 위로 떨어지는 언월도에 하얗게 질린 달소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막아 보려 했으나 날카로운 날은 기어코 그의 목과 몸통을 한꺼번에 베어 갈랐다.
“크어억!”
붉은 피 분수가 허공에 솟구치고, 단말마를 지른 달소의 육중한 체구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흑치영은 얼굴에 더러운 흙을 묻히고 나뒹구는 달소의 모습을 아무런 감흥 없이 쳐다보고는 곧바로 또 다른 적을 찾아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치열한 접전 상황에서 지휘관의 전사는 큰 충격과 혼란을 안겨 줬다.
“적장이 죽었다!”
“흑치영 장군께서 적장의 목을 베셨다!”
당장 초반에 타격을 입기는 했지만 팔기군이라는 명성이 어디 가는 건 아닌지 팽팽하게 싸우던 적이 조금씩 삐꺼덕거리더니 이내 급격하게 무너졌다.
반대로 조선군 기병은 더욱 기세를 올리면서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마구 들이댔다.
다른 군대 같았으면 벌써 항복했거나 전열이 붕괴되며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을 터였다.
하지만 달소가 죽고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도 팔기군은 끝까지 전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팔기군이 정예라는 뜻임과 동시에 악착같이 싸워야 될 정도로 현재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거였다.
여기서 밀리면 끝이라는 절박함이 팔기군 병사들의 투쟁심을 고취시켰다.
그렇게 되자 먼저 기선을 제압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군 기병대는 일방적인 전투를 벌이지 못하고 피해가 늘어났다.
서로 상대를 죽이려는 악다구니가 전장에 가득 울렸고 바닥에는 으깨지고 잘려 나간 신체 조각과 선혈이 낭자했다.
나름 선전을 펼쳤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강력했던 저항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힘이 빠지면서 전세는 조선군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어졌다.
처음부터 이렇게 싸웠더라면 상황이 크게 달라졌겠으나 그건 헛된 희망에 불과했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팔기군 병사들이 하나둘 조선군이 휘두른 병장기에 피를 흘리며 말에서 떨어졌다.
팔기군을 괴멸시킨 흑치영과 조선군 기병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곧장 청군 진영 후방을 들이쳤다.
“다 쓸어버려라!”
“우오!”
수만에 달하는 기병대가 검을 뽑아 든 채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드는 모습에 도르곤이 평정심을 잃고 잔뜩 흥분해서 소리쳤다.
“뭐 하고 있어! 어서 방어진을 만들어서 적을 막아!”
급히 소총은 든 적병들이 뒤로 나와 사격 대형을 갖췄지만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에 다들 겁을 잔뜩 집어 먹고는 평소보다 동작이 굼뜨면서 자리를 제대로 못 찾는 등 허둥거렸다.
그러는 사이에 조선군 기병대가 오십 보 안까지 육박해 들어오자 당황한 청군 장수는 아직 대형을 다 만들지 못했음에도 사격 명령을 내렸다.
“쏴라!”
타타타탕! 타앙! 타탕!
총성과 함께 발사된 탄환들이 조선군 기병을 향해 날아갔다.
씨융. 피슝.
말을 달리는 흑치영의 귓가로 탄환이 공기를 찢으며 지나가는 파공음이 들렸다.
좌우에서 따라오던 기병 서넛이 비명을 내지르면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무리 강심장을 지닌 사람이라도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찔할 수밖에 없었지만 흑치영은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직 정면만 노려봤다.
그러고는 언월도를 치켜들며 마치 맹수가 포효를 하듯 크게 기합성을 내질렀다.
“이야아아압!”
그 모습에 청군은 더욱 위축됐고 반대로 조선군 기병대는 전투 의지를 끌어 올리면서 말을 몰았다.
“어서 쏴! 쏘라고.”
청군 장수가 재차 사격을 독려했지만 어느새 살기가 가득한 상대편 얼굴까지 똑똑히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한 기병대에 적병들은 몸이 굳어 버렸다.
“으으.”
“우린 다 죽을 거야.”
손이 떨려 탄환을 제대로 장전하지 못했고 일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등을 보이면서 대형을 무단이탈했다.
“도, 도망쳐.”
“히익.”
그때 육박해 들어온 흑치영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적병의 머리를 언월도로 베어 버렸다.
“하압.”
깔끔하게 잘려 나간 적병의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다른 기병들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청군 대열을 파고들면서 검을 휘둘렀다.
“우웩.”
“커헉.”
조선군 기병들은 검을 쓰는데 거침이 없었고 적들은 대항해 싸우기보다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달아나기에 바빴다.
알아서 적들이 무너지자 흑치영과 조선군 기병들은 마음 놓고 상대를 유린했다.
팔기군에 이어 황급히 방어에 나선 보병대까지 조선군 기병대에 짓밟히자 지금까지 잘 버텨오던 청군 진영이 크게 흔들렸다.
“기병대가 적 후방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사옵니다.”
“역시 흑치영 장군이야.”
지난번 패배의 아픔을 딛고 조선 최고의 돌격장으로서 훌륭하게 제 역할을 수행하자 도현은 얼굴 가득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흑치영이 팔기군을 박살 내고 청군 후방을 흔들어 주면서 서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던 중원도 아군이 승기를 잡아 가고 있었다.
천천히 전장을 넓게 살펴본 도현은 이제 마지막 쇄기를 박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도총관.”
“하교하시옵소서.”
“총공격을 펼쳐 도르곤의 숨통을 끊어 놓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힘차게 대답하는 엄황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도현은 얼굴을 바로 해 병사들의 아우성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로 가득한 전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토록 염원하던 순간이 왔건만 어쩐 일인지 그는 오히려 마음이 더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각 제대 앞으로!”
지휘부에서 붉은색 독전기督戰旗가 휘날리자 대기 중이던 조선군 보병대가 일제히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척척척. 척척척.
삼만 명씩 모두 다섯 개의 보병 제대가 움직였다.
각 제대는 부챗살 모양으로 넓게 퍼져 마치 청군을 반원 모양으로 포위하듯 둘러쌌다.
“앞에 총!”
촤라라락.
지휘관의 외침에 조선군 병사들은 절도 있는 자세로 소총을 가슴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날을 바짝 세운 총검이 햇빛을 받아 서늘하게 번뜩였고 병사들은 긴장하거나 흥분한 기색 없이 차분하게 지시대로 행동했다.
우왕좌왕하는 청군과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속보로!”
“하압!”
탁탁탁. 탁탁탁.
재차 이어진 명령에 조선군 병사들은 구령의 맞춰 걷는 것보다 조금 더 빠르게 다리를 놀렸다.
그런 상태에서 병사들은 상체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고 대형까지 딱 맞췄다.
“흐익!”
“적이 몰려온다!”
조선군이 다가오는 걸 보고 당황한 청군 일부가 명령도 없이 가지고 있는 소총을 쐈다.
탕! 탕!
하지만 아직 거리가 먼 데다 조준도 제대로 안 했기에 탄환은 괜히 바닥을 맞히거나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러자 신기전이 만들어 낸 무시무시한 불지옥 속에서 죽지 않고 겨우 살아남은 청군 장수 홍다구가 급히 진충군 잔존 병력과 소총을 보유한 부대를 끌어모아 방어 대형을 만들었다.
“어서 대형을 갖춰라!”
급한 마음과 달리 꾸물거리는 병사들을 다그치던 홍다구는 고개를 돌려 조선군을 보고는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어느새 조선군은 삼백 보 앞까지 육박해 오고 있었는데 마치 거대한 파도가 밀어 닥치는 기분이었다.
엄청난 위압감에 홍다구는 애써 태연하려고 했지만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병사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는데 뒤를 돌아보자 다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고 주춤 뒷걸음질을 치는 사람까지 있었다.
확실하게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는 좀 더 상대를 끌어들여야 했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자신들이 먼저 무너지겠다는 생각에 홍다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쏴라!”
타타탕! 탕! 탕! 탕!
요란한 총성이 울리며 총구에서 나온 희뿌연 화약 연기가 주변을 온통 뒤덮으며 시야를 가렸다.
피슝. 슈슝. 시이이잉.
탄환이 빗발치듯 조선군 대형으로 날아왔다.
이번에도 역시 기세가 눌린 청군이 제대로 조준을 하지 않고 막 쏴 대는 바람에 발사된 탄환 숫자에 비해서는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선두열에 서 있던 병사 이삼십 명이 피를 흘리며 엎어졌다.
“으윽.”
“컥!”
바로 앞에서 탄환이 마구 날아오는 위험천만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조선군 병사들은 약간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이런 경우를 대비해 혹독한 훈련을 받아 왔기에 다들 정면만 주시한 채 의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탄환에 맞아 빈자리는 다른 병사들이 신속하게 채워 대형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했다.
그렇게 얼마쯤 더 갔을까 함께 움직이던 지휘관이 검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정지!”
처척.
“사격 준비!”
발걸음을 멈춘 병사들은 지휘관의 명령에 선두열이 무릎쏴 자세를 취하며 정면에 위치한 청군의 겨냥했다.
“발사!”
타타타탕! 타타탕!
육중한 총성이 대지를 마구 흔들면서 청군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사격이 이루어졌다.
“삼 열 앞으로!”
제일 뒤에 서 있던 삼 열 병사들이 간격을 넓히고 선 동료들 사이를 지나 선두로 나서며 곧장 무릎쏴 자세를 취했다.
그사이 방금 사격을 끝낸 일 열 병사들은 따로 지시를 하지 않았는데도 능숙한 동작으로 허리에 찬 가방에서 탄약포를 꺼내 총을 장전했다.
“쏴!”
타타타탕! 타탕!
“꾸엑.”
“으윽!”
빗발치는 탄환에 적병들은 비명을 내지르면서 우수수 바닥에 쓰러졌다.
삼 열이 소총을 내리자 다시 이 열이 앞으로 나서 사격 자세를 잡았고, 제일 처음 총을 쐈던 일 열이 장전을 다 끝낸 소총을 가지고 가만히 대기했다.
이런 식으로 조선군 보병대는 쉬지 않고 대열을 계속 바꿔 가며 소총을 쏘면서 야금야금 전진해갔다.
몸을 숨길 엄폐물조차 마땅치 않았던 적병들은 틈을 주지 않고 이어지는 총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치열한 총성이 귓가를 시끄럽게 울렸고 매캐한 화약 연기는 드넓은 전장을 온통 뿌옇게 가득 메웠다.
“피하지 말고 어서 응사해라!”
홍다구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지만 청군은 총탄 세례에 겁을 먹고 부들부들 몸을 떨 뿐 제대로 반격에 나서지 못했다.
몇몇은 머리를 흙바닥에 박고 엎드리기까지 했다.
그걸 보고 홍다구가 얼굴을 구겼지만 당장 그 자신도 탄환에 맞아 죽은 말 뒤에 숨어 있었기에 병사들을 탓할 입장이 아니었다.
“제기랄!”
마음 같아서는 당장 여기 벗어나고 싶었으나 조선군 기병대가 뒤를 막고 있었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아아악!”
바로 옆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갑옷을 입은 군관 한 명이 탄환에 맞아 가슴을 부여잡고 넘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청군 병사들이 공포에 찬 얼굴로 몸을 돌려 달아났다.
“어딜 가는 거냐! 명령 없이 도망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참斬하겠다.”
동요하는 청군 병사들을 향해 홍다구가 고함을 쳤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대열이 그대로 와해될 판이었다.
실제로 군관들이 도망치는 병사들을 검으로 내려쳐 즉결 처분을 하며 겨우겨우 대열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는데 어느새 오십 보 안까지 접근한 조선군이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며 돌격해 왔다.
“돌격!”
뿌옇게 화약 연기를 피워 올리며 마지막 사격을 끝낸 조선군 병사들은 지휘관의 외침에 총검이 부착된 소총을 앞으로 내밀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
“몽땅 다 쓸어버려라!”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함성에 상대는 크게 위축됐고 조선군은 용기백배해서 적진으로 뛰어갔다.
“마, 막아!”
타탕! 탕! 탕!
산발적으로 쏘는 총에 조선군 병사들이 몇 명 쓰러졌지만 그걸로 돌격을 멈춰 세울 수는 없었다.
오히려 더 전의를 불태우면서 거센 파도가 되어 적에게 밀어닥쳤다.
전장 전체에 자욱하게 깔린 화약 연기를 뚫고 달려간 조선군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청군 대열을 파고들었다.
탄환이 옆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부하들 앞에 서서 돌격한 천억근은, 그를 보고 눈을 크게 뜨며 황급히 창을 들어 올리는 적병을 향해 손에 든 검을 휘둘렀다.
“헉!”
“죽어라!”
피가 분수처럼 뿌려지며 가슴을 움켜쥔 적병이 옆으로 쓰러져 버둥거렸다.
일격에 상대를 무력화시킨 천억근은 지체 없이 다른 적을 찾아 검을 찔러 넣었다.
푹.
복부를 파고든 검은 등 뒤로 삐죽 튀어 나왔다.
“끄르륵.”
가래 끓는 소릴 내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은 적병의 가슴을 한쪽 발로 밀쳐내며 검을 뽑아 낸 천억근은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사방이 온통 아수라장으로 변한 가운데 돌격해 들어간 조선군 병사들은 총검을 써서 상대를 찌르거나 베어 넘기고 있었다.
양군의 숫자가 비슷했지만 전의를 상실한 청군은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자리를 지켜라!”
진충군 지휘관인 홍다구가 어떻게든 전열을 유지하려고 고군분투했으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이놈들!”
입고 있는 갑옷을 온통 피로 물들인 채 혼자서 벌써 조선군을 다섯이나 죽였다.
그러나 죽인 것보다 더 많은 조선군이 계속 몰려들었고 어느새 주위에는 살아 있는 청군이 몇 명되지 않았다.
또다시 조선군 한 명이 기합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자 홍다구는 인상을 쓰면서 검을 휘둘렀다.
챙.
우연인지 아니면 그가 방심을 했는지 맑은 쇳소리가 울리며 홍다구의 검이 막혔다.
“제기랄!”
순간 당황한 홍다구는 욕설을 내뱉으며 검을 회수해 다시 내려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조선군 병사의 총검이 홍다구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
“허억.”
뭔가 뜨거운 것이 몸을 관통하는 느낌이 들며 그는 한쪽 팔로 조선군 병사의 소총을 붙잡았다.
“으으.”
믿기지 않는 얼굴로 가슴에 박힌 총검을 내려다본 홍다구는 입을 열어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목에 가득 찬 피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죽어!”
그 상태에서 조선군 병사가 힘을 줘서 총검을 더 밀어 넣자 홍다구는 몸을 축 늘어뜨리면서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총검을 빼 낸 조선군 병사는 다른 적을 찾아 앞으로 뛰어갔고 그렇게 도르곤의 측근이자 청군 고위 장수인 홍다구는 요서 벌판에서 쓸쓸히 최후를 맞이했다.
다급해진 청군 지휘부가 예비 병력을 모두 다 투입해 조선군의 공격을 막아 보려고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앞뒤 전투 대열이 빠르게 무너졌고 청군 병사들은 싸움을 포기한 채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도 아니면 병장기를 내던지고 양팔을 든 채 조선군에 투항했다.
말 그대로 전면적인 붕괴 상황이었다.
☆ ☆ ☆
이제 대형도 뭐도 없이 이리저리 몰리며 조선군에 유린당하는 청군 병사들의 모습에 도르곤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수가…….”
비록 어쩔 수 없이 영원성을 공략을 포기하고 후퇴하는 입장이었지만 회전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조선군과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
승기를 잡았다고 섣불리 성을 놔두고 사방이 탁 트인 벌판으로 나온 도현을 멍청이라며 내심 비웃기까지 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자 그의 생각과 달리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최강이라 자신했던 팔기군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너졌으며 조선군 병사들의 용맹과 전투력은 청군을 훨씬 뛰어넘었다.
초반에 잠깐 팔기군이 상대편 진영 코앞까지 돌격해 들어갔던 걸 제외하고는 시종일관 열세를 면치 못했다.
팔기군의 돌격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상대가 일부러 깊숙이 끌어들였던 것이니 단 한 번도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는 게 맞았다.
사방에서 압박해 들어오는 조선군의 공격에 청군은 전열이 모두 붕괴된 채 무질서하게 뒤로 밀려났다.
전투 의지를 완전히 상실한 청군 병사들은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해 보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전장은 청군 병사들의 고통에 찬 비명성과 흘린 피가 흙바닥에 가득 고였다.
일방적으로 학살을 당하는 참담한 모습에 악다문 도르곤의 입에서는 신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공을 들여 조련시킨 군대가 허망할 정도로 힘없이 무너지고 조선군에 투항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도르곤의 눈은 암울하기만 했다.
“폐하, 전세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기울었습니다. 속히 후퇴를 하시지요.”
착 가라앉은 용골대의 말에 도르곤은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눈을 치켜 올리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 여기서 끝장을 볼 것이야. 당장 본진에 있는 병력을 다 투입해 적과 싸우도록 해!”
“폐하.”
“짐의 말이 안 들리는가!”
극심한 패배감과 분노에 휩싸인 도르곤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행동했다.
그런 도르곤을 안타깝게 쳐다보며 용골대가 일부러 힘을 줘서 말했다.
“더 이상 투입할 병력이 없습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와락 인상을 쓰며 주위를 둘러보던 도르곤은 정말 백여 명가량의 친위대를 제외하고 남아 있는 병력이 거의 없자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 이게…….”
“팔기군은 이미 와해됐고 본진에 있던 예비 병력도 이미 다 써 버린 지 오래됐습니다. 분하지만 우리가 패했습니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폐하…….”
수많은 청군 병사들의 시신과 본진을 향해 새까맣게 몰려오는 조선군을 번갈아 보며 바라보던 도르곤은 얼굴을 새빨갛게 상기시킨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다 순간 단발마를 내뱉으며 몸을 휘청거렸다.
“크윽.”
“폐, 폐하!”
급히 도르곤의 몸을 받쳐 든 용골대는 눈이 뒤집히고 숨을 가쁘게 쉬는 걸 보고 다급히 소리쳤다.
“이런! 폐하를 모시고 여길 빠져나간다. 어서 서둘러라.”
“옛.”
숨을 편안히 쉴 수 있게 갑옷 매듭을 느슨하게 푼 용골대는 도르곤을 직접 들쳐 업고는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잡았다.
“가자.”
두두두두.
남아 있는 청군 장수들과 친위대가 주위를 둥글게 에워싸고는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급히 빠져나갔다.
얼마나 급했는지 아직 전투를 벌이고 있는 잔존 병력들한테 퇴각 명령조차 내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전장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그들은 사력을 다해 포위망을 헤치고 나아갔다.
“여기만 벗어나면 희망이 있다! 더 빨리 달려라.”
용골대의 독려 속에 청군 지휘부는 기적적으로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양쪽 병사들이 서로 뒤엉켜 사투를 벌이고 있는 곳을 지나 탁 트인 벌판이 보이자 희망에 찬 표정을 짓던 청군 지휘부는 언제 나타났는지 앞을 가로 막고 선 조선군 보병대에 눈을 크게 부릅떴다.
“이런.”
언제 조선군 기병대가 쫓아올지 모르는 데다 다른 방향으로 우회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용골대는 그냥 돌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대로 뚫고 지나간다!”
“이랴!”
“하! 하!”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빠르게 다가오는 청군의 모습은 상당히 위압적이었다.
그러나 조선군은 전혀 동요하는 기색 없이 사격 대형을 취하고는 상대를 향해 소총을 들어 올렸다.
“거총!”
처척.
“조준. 발사!”
군관의 명령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수백 개의 총구에서 불을 뿜어져 나왔고 주위가 하얀 화약 연기에 휩싸였다.
타타타탕! 타탕! 탕!
☆ ☆ ☆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까지 함락시키면서 한때 청나라의 전성시대를 이끌던 도르곤은 무리한 조선 원정을 감행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황제인 도르곤과 지휘부가 모두 전사하자 얼마 뒤 남은 청군 병사들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백기를 들어 올렸다.
“와아아아!”
“우리가 이겼다.”
비명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잦아든 전장은 조선군 병사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다들 지치고 힘들었지만 승리가 가져다주는 달콤함에 그 모든 것들이 한순간 다 씻겨 내려갔다.
“대조선제국 만세!”
“만세! 만세!”
이른 아침부터 시작해 오후 늦게까지 계속된 이날 전투로 청군은 무려 십칠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고 이십만에 달하는 포로가 잡혔다.
조선군도 팔만의 사상자가 생겨났지만 청군이 입은 피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바로 주력 병력과 함께 청 황제인 도르곤이 전투 중에 전사했다는 거였는데 이로써 청국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됐다.
대승을 거둔 도현은 사흘간 그 자리에 머물면서 전장을 정리하고 전력을 재정비한 뒤 다시 서쪽으로 진군했다.
도르곤과 원정군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청국 조정은 어느 날 갑자기 북경성 앞에 모습을 드러낸 엄청난 숫자의 대병력과 황금 봉황 깃발에 발칵 뒤집혔다.
뒤늦게 그때서야 만리장성을 넘어 출병했던 원정군이 전멸되고 도르곤까지 전사했다는 걸 알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직 북경성이 건재했지만 당산 지역에 상륙한 군대가 주변을 장악하면서 외부와 접촉을 어렵게 만든 데다 도현이 지휘하는 조선군 본대의 진군이 워낙 빨라 이런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청국 조정도 도르곤이 양자로 받아들여 차기 황제로 유력한 예친왕 도르보와 남아 있는 황실 가족들을 데리고 피난을 떠나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었다.
하지만 상륙군의 존재 때문에 쉽게 성문을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완전히 발이 묶이고 말았다.
북경성을 완전히 포위한 도현은 사자使者를 보내 항복할 것을 종용했다.
죽은 도르곤이 정예를 몽땅 다 조선 원정에 데려가 버리면서 북경에 남아 있는 병력이라고는 전투력이 떨어지는 향용뿐이었다.
그나마도 오만이 채 안 돼서 수십 리에 달하는 성벽을 지키는 것도 벅찰 정도였다.
항복을 두고 조정 대신들 간에 격론이 벌어졌다.
서로 멱살잡이를 할 만큼 치열한 다툼 끝에 아직 우세를 점하고 있던 강경파가 뜻을 관철시켰다.
비록 포위를 당하고 병력마저 부족했지만 이중으로 쌓은 높고 단단한 성벽이 있고 지방 병력을 급히 불러올리면 충분히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 강경파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생각은 산산이 깨져 버리고 말았다.
제시한 시간이 하루가 지나도 북경 성벽에 백기가 내걸리지 않자 도현은 즉시 미리 방열시켜 둔 화포들을 동원해 포격을 개시했다.
본대와 상륙군이 가진 화포를 모두 다 합쳐 무려 삼백 문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포병대가 강철 비를 쏟아붓기 시작한 것이다.
육중한 포성이 사방을 뒤흔들고 북경성은 자욱한 포연으로 뒤덮였다.
바로 북경성에 있는 청군 포대가 반격에 나섰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조선군의 집중 포화에 모두 침묵하고 말았다.
그 뒤로는 조선군 포병대의 일방적인 공격이 이어졌다.
무시무시한 포탄 세례에 북경성은 하루가 다르게 엉망이 되어갔다.
하루에 쏟아지는 포탄 숫자가 평균 천 발에 육박했는데, 발해만을 통해 수군이 원활하게 보급을 해 주고 있기에 가능했다.
북경성을 폐허로 만들어 버릴 기세로 포격을 퍼부으면서도 도현은 단 한 번도 보병을 투입해 성벽을 공략하지 않았다.
계속된 전투로 지친 병사들을 쉬게 하고 가능하면 최소한의 피해로 북경을 함락시키려는 그의 의도 때문이었지만, 그걸 모르는 청군은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
외성 벽이 허물어지고 시가지가 쑥대밭이 되어 갔지만 청국 조정은 지방 병력이 도착하면 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는 희망에 수성을 계속 고집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며칠 뒤 석가장에서 전해진 급보에 모두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북경성을 지원하기 위해 급히 집결하던 산동성 향용군이 석가장 근처에서 조선군 기병대의 기습 공격을 받아 패퇴했다는 것이었다.
오매불망 지원군이 도착해 포위를 풀어 주기를 기다리던 청국 조정에는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아직 남쪽 국경에 있는 군대가 남아 있었지만 병력을 집결시켜 북경까지 오려면 아무리 빨라도 한 달 이상은 기다려야 했다.
당장 하루에도 수백 명씩 사상자가 발생하고 포격에 약해진 성벽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때까지 버틸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려웠다.
아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동안 조정을 주도하던 강경파의 목소리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대신 온건파의 주장이 힘을 받았다.
하지만 청나라의 명운이 달린 일이었기에 쉽게 항복을 결정하지 못하고 지지부진 시간을 끌고 있을 때 결정적인 일이 벌어졌다.
바로 신기전이 북경성 포격에 투입된 것이다.
요서 회전에서 신기전 재고를 모두 소진해 그동안 뒤로 빠져 있었던 화차들은 새롭게 생산한 물량이 대거 도착하자 바로 공격에 투입됐다.
공기를 찢는 특유의 소리를 내며 하늘로 날아오른 수천 발의 신기전들은 일순간 북경성 안을 그야말로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병사들은 물론이고 일반 주민들까지 모두 뛰어 나와 소화 작업에 나섰지만 백린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물을 뿌려 댈수록 더 거세게 타오르면서 기세를 올렸다.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고 하루 만에 겨우 불길을 잡았을 때에는 이미 북경 시가지 절반이 잿더미로 변한 뒤였다.
거기다 포격을 견디지 못하고 성벽 일부가 무너지고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조선군 보병까지 본격적으로 공성전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자 청국 조정은 버틸 힘을 잃고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그리고 행여나 조선군이 공격을 개시할까 봐 바로 성문 지붕에 백기를 내걸고 도현에게 항복을 하겠다는 사신을 보냈다.
☆ ☆ ☆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것처럼 무거운 침묵 속이었다.
도현은 간이로 세운 단상 위 옥좌에서 북경 성문을 바라보며 바람이 머리 위에 걸린 차양을 펄럭이는 소리를 들었다.
단 아래에는 여태껏 함께해 온 장수들이 양옆으로 길게 도열해 있었으며, 그들은 모두 무언가를 기다리듯 긴장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반면 도현의 얼굴은 무표정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쉬이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랬던 그가, 문득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눈썹을 꿈틀거렸다.
도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장수들은 활짝 열어젖혀진 북경 성문 저 너머에서 한 무리가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고 낮게 숨을 들이쉬었다.
본래라면 황금빛 곤룡포를 입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칭송받으며 황태자의 자리에 앉아 오만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아야 할 이가 마치 평민처럼 소박한 옷을 걸치고 직접 제 발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홑겹 의복에 평소 머리에 쓰고 있던 조관마저 없으니 반쯤 벌거벗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기분을 느낀 도르보는 찌르는 듯한 시선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것은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조선의 황제였다.
일렁이는 검은 눈동자에 도르보는 불현듯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뒤를 따르는 이도 몇 없이 흙바닥에 서 있는 그와는 달리, 도현은 믿음직스러운 그의 군사들에 둘러싸여 옥좌에 앉아 있으니 새삼 처지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양부인 도르곤이 살아 있었다면 감히 조선국 국왕 따위가 어디서 눈을 치켜뜨고 있냐며 불같이 화를 내겠지만, 막상 그가 불귀의 객이 되어 버린 지금, 누가 위이고 아래인지는 너무나 극명했다.
도르보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며 조선군 장수들이 양옆으로 길게 도열해 있는 사이를 천천히 지나갔다.
바늘처럼 등을 쑤시는 시선이 끈덕지게 달라붙었지만, 그는 입술을 잘근 씹고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도르곤의 피를 이은 친조카이며 나아가 그의 양자로 입적된 도르보에게 누가 감히 이런 식으로 무례함을 저지른단 말인가.
눈을 마주치기는커녕, 엎드려 얼굴조차 들지 못하는 자들이 부지기수였거늘 뒤늦게 겪는 생소한 치욕에 그는 몸을 잘게 떨었다.
“황제 폐하께 예를 올리시오.”
어느새 단상 앞에 다다르자, 칠현이 도르보를 멈춰 세우고 말했다.
그는 일순 주춤하는 듯싶더니 천천히 몸을 굽히고 땅에 무릎을 대었다.
도르보의 머리가 바닥에 닿는 순간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던 공기가 파르르 떠는 것이 느껴졌다.
삼배구 고두례.
황제에게 올리는 신하의 예였다.
즉 청나라가 조선을 상국으로 인정하며, 스스로가 신하인 것을 승복하는 것이기에 이 행위가 의미하는 바는 매우 컸다.
도르보가 바닥에 머리를 찧을 때마다 쿵, 하는 작은 소리가 울렸다.
고르지 않은 흙과 자갈 때문에 이마에 상처가 났으나 주위에 서 있는 누구 하나 그를 걱정하며 만류하지 않았다.
싸늘할 정도로 냉엄한 분위기 속에서 도르보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박는 동안, 도현은 그 모습을 보면서 통쾌함과 벅찬 감동을 느꼈다.
조선 왕조에서 가장 큰 치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게 바로 삼전도의 굴욕이었으니 그걸 그대로 되돌려 줬다는 사실에 전율과도 같은 짜릿한 감정이 전신을 휘감았다.
“신 예친왕 도르보가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마침내 삼배를 다 끝낸 도르보가 고개를 숙인 자세 그대로 도현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돌조각이 박힌 이마에는 붉게 부어오른 생채기 자국이 선연했고, 더러운 땅바닥에 몇 번이나 얼굴을 갖다 댄 덕에 뺨과 코끝엔 흙먼지가 가득했다.
도르보와 함께 따라온 환관이 금으로 세공한 함을 건네주었다.
뚜껑을 열자 빛을 받아 찬란하게 번쩍이는 옥쇄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천자, 즉 황제를 나타내는 옥쇄를 갖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던가.
그런데 그런 물건이 고스란히 도현에게 바쳐지니 이는 실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사건임이 틀림없었다.
도르보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옥쇄를 받쳐 들고 도현을 향해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도르보라……. 도르곤의 양아들이라지?”
도현의 물음에 도르보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렇사옵니다.”
“하면 예친왕이란 호칭은 틀린 것 아닌가. 도르곤이 죽었으니 이제 그대가 그 뒤를 이어야 할 텐데…….”
원래대로라면 도르보는 도르곤이 후계자로 삼고자 들인 양자였으니 다음 대 황제가 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어떻게 감히 도현의 앞에서 황제라 자청할 수 있을까.
어찌 대꾸할 바를 모르고 도르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도현은 일어서서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청은 제후국으로서 아국을 대대손손 섬기고, 충성을 다 바쳐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겠사옵니다.”
도르보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감격을 이기지 못한 도총관 엄황이 손을 들어 외쳤다.
“대조선제국 만세!”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우와아!”
그동안 억누르고 있던 환호성이 물밀 듯이 터져 나오듯 사방을 가득 메웠다.
귀가 어릿할 정도로 크고 격정적인 함성에 주위의 공기마저 찌르르 진동하는 듯 했다.
병사들이 정신없이 승리를 자축하는 가운데 도현은 단상에서 내려와 애마에 휙 올라탄 뒤, 망토를 휘날리고 고삐를 잡아 쥐었다.
“깃발을 높이 들어 올려라!”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빛 아래 봉황기가 눈부시게 펄럭였다.
하늘조차 이날을 축복하는 듯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가운데, 도현은 지금까지 생사고락을 함께해 온 장수들과 개선행진을 이끌고 북경에 입성했다.
숱한 전투 끝에 조선이 청을 완벽하게 무릎 꿇린,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그리고 병사들의 환호를 받으며 북경성에 발을 디디는 순간 누구보다 도현의 가슴이 크게 벅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