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잊혀진 땅은 멸망한 고대 왕국의 터를 말하는 것!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현재 페이트 월드에서 고대 왕국은 완전히 잊혀지다시피 했다. 수백 년을 살아온 시오라스도 고대 왕국에 대해선 알고 있는 게 많지 않을 정도.
‘잊혀진 땅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없지.’
게다가 옥새가 숨겨져 있던 장소도 코산트 고대 왕국의 묘지였다. 옥새를 바라보던 엑스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전설’이라는 새로운 등급에 관심이 쏠려, 뒤늦게 옥새의 진가를 파악했다.
“그러니까 이 옥새를 고대 왕국 터에서 사용하면, 그 터에 대한 소유권과 통치권을 얻게 된다. 거기에다가 조건에 따라 고대 왕국의 존재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이건 정말 미쳐 버린 효과 아닌가?
전설이라는 등급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효과다.
엑스의 머릿속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땅 부자의 꿈, 건물주의 꿈, 영주의 꿈! 페이트에서 자신의 땅을 가지고 있는 유저는 많지 않다. 현재 영지를 소유한 유저는 불과 셋으로, 그것마저도 개인이 아니라 길드의 소유라고 할 수 있었다.
“흐흐.”
하지만 엑스는 잊혀진 옥새를 손에 넣음으로써, 고대 왕국의 터를 날로 먹을 기회를 얻은 것이다. 엑스의 입가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옥새의 효과를 발동시켜보고 싶었다.
하지만 엑스는 꾹 참았다.
“급하게 결정할 이유는 없어.”
드넓은 페이트 월드, 고대 왕국의 터는 많았다. 더 좋은 명당을 놔두고, 당장의 호기심 때문에 코딱지만 한 코산트 섬을 선택할 수는 없는 법! 어차피 엑스는 고대 왕국 원혼들을 해방하기 위해, 수많은 고대 왕국 터를 돌아다녀야 했다.
그 터들을 쭉 한 번 둘러보고, 그중에서 최고의 명당을 선택하면 되는 일!
“그리고 이렇게 큰일은 혼자 생각할 게 아니야.”
솔직히 말해 당장 고대 왕국 터에 대한 소유권과 통치권을 얻는다고 해도, 엑스는 어떻게 그 능력을 활용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시오라스라면 훌륭한 조언을 해 줄 수 있으리라.
‘지금은 잘 챙겨두자고.’
엑스가 잊혀진 옥새를 인벤토리에 챙기고 어깨를 으쓱였다. 이것으로 코산트 고대 왕국의 원혼도 해방하고, 끝내주는 전리품까지 얻어 냈다. 이젠 다음 고대 왕국 유적지로 향할 시간이었다.
*
메이지의 사옥.
김성철과 서명우는 심각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테이블에 놓인 태블릿에선 세상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빨리 돌아가죠. 국물은 한번 식으면 좀 그렇잖아요?
능청스러운 엑스의 말.
듣고 있던 김성철이 영상을 일시 정지시켰다.
“주변에 일렁이는 마나의 양으로 봤을 때, 최소한 350레벨은 넘고. 하늘을 부양하는 특이성과 땅을 뒤흔들 정도의 기운으로 보면 최소한 네임드 몬스터 이상.”
“그런 무지막지한 놈을 단, 2분 만에 때려눕힌 엑스.”
“……미치겠네요.”
김성철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메이지 스트리머 엑스가 움직였다. 그가 숨기고 있던 힘을 처음으로 드러내자, 맞춰지지 않던 퍼즐들이 절로 맞춰지고 있었다.
서명우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회장님 말장난에 완전히 속은 거지. 회장님은 처음부터 대놓고 답을 알려 주고 계셨어. 의문의 플레이어 X가 아니라, 메이지 스트리머 엑스라고.”
물보라 속에서 어인과 사투를 벌이던 플레이어!
김성철과 서명우를 비롯한 게임 마스터들은 나름대로 그 플레이어가 누구일지 조사를 해왔다. 하지만 도대체 연결 고리가 없었다.
최상위권 랭킹에 들지 않으면서, 그런 강함을 가진다는 건 어불성설이었으니까. 하나, 랭커들 중에서 그런 얼굴과 전투 방법을 가진 이는 없었다.
그렇게 X의 정체가 오리무중으로 빠지던 중, 스트리머 엑스가 힘을 드러냈다. 그리고 게임 마스터를 비롯한, 페이트에 관심 좀 있다 하는 유저 대부분은 깨달았다.
X가 엑스였다!
물보라 사이로 얼핏 보이던 장비.
군더더기 없는 기본공격.
엑스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 얼굴까지 똑같은지 확인할 순 없었지만, 다른 증거들만 봐도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회장님이 평소엔 쓰지 않던 권한까지 들먹여 가시면서 엑스를 메이지 스트리머로 선출한 이유……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해할 수 있어요.”
“마찬가지야.”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사기적으로 강할 수 있는 겁니까? 선배, 랭킹 순위권에서 엑스란 이름을 찾아볼 수 없어요. 레벨이 채 300도 안 된다는 건데…….”
레벨이 300도 안 되면서, 최소 350레벨인 네임드 몬스터를 2분 만에 쓰러트린다?
페이트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김성철이기에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명우가 대답했다.
“가능성은 하나겠지.”
“……히든 클래스.”
“그래, 숨겨진 직업 히든 클래스. 굉장한 가능성을 가진 히든 클래스를 엑스가 얻었다. 그게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야.”
결국 히든 클래스란 말인가.
김성철은 내심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업 하나 잘 골라서, 저런 강함을 얻을 수 있다니. 다른 페이트 유저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극심한 박탈감에 시달릴 것 같았다. 서명우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 엑스 접속 시간이 얼마나 되는 줄 알아?”
“접속 시간이요? 거기까진…….”
“하루 24시간 중 21시간.”
“……!”
“접속 기록을 보면 중독자 수준을 넘었지. 이틀 연속으로 페이트에 접속해 있다가 딱 6시간 동안 로그아웃. 그리고 다시 이틀 동안 풀 접속. 이걸 첫 접속 때부터 지금까지 반복했어. 이건 완전 페이트에 미친놈이라고 생각될 정도야.”
김성철은 서명우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히든 클래스만 얻는다고 얻을 수 있는 강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노력과 끈기가 동반되어야 강해질 수 있다. 실제로 히든 클래스를 얻고도, 삽질하는 유저가 꽤 있었으니까.
“엑스는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난 놈이야. 어떤 직업을 가졌어도 지금처럼 강함을 과시할 수 있고, 관심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인정합니다. 린 온라인 때도 그랬으니까요.”
“근데 말이야. 난 엑스가 좀 더 보여 줄 게 있다고 생각해.”
“?”
서명우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회장님이 그저 강하기 때문에, 말주변이 좋기 때문에,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엑스를 메이지 스트리머로 낙점하셨을까?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누구도 종잡을 수 없는 회장님이? 난 아니라고 생각해.”
“그 말은…….”
“엑스를 통해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으신 거겠지. 말했다시피, 보여 주고 싶으신 게 뭔지는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겠지만.”
서명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김성철은 침묵을 지켰다. 그러고는 시선을 살짝 내리깔아 태블릿을 바라봤다. 화면엔 일시 정지된 엑스의 영상이 떠올라 있었다. 김성철이 씨익 웃음을 흘렸다.
“궁금하긴 하네요. 앞으로 엑스가 뭘 보여 줄지.”
엑스에 대한 시기와 질투? 김성철도 페이트를 즐기는 입장이기에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게임을 하는데 잘나가는 이가 부러운 건 당연한 거다. 하지만 그 시기 질투를 무시하게 될 정도로.
엑스라는 유저는 매력적이었다.
김성철이 영상을 재생했다.
-크으, 역시 시청자분들과 함께 먹는 게 최고네요!
“이 정도로 강하면서 먹방을 계속 진행하겠다니. 이쪽에 회장님이나, 저쪽에 엑스나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야. 그러니까 끌린 건가?”
전투에서 살기 넘치는 눈빛을 온데간데없었다. 국물을 삼키고 감탄을 뱉는 엑스의 모습을 보고, 김성철과 서명우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
쨍쨍한 태양!
엑스가 땀을 뻘뻘 흘리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거대한 밀림, 주르피아! 그 중심에는 고대 왕국의 유적지가 있다. 엑스는 땅을 보러온 부자의 눈빛으로 주르피아를 훑어봤다.
“흐음, 땅은 넓은데 교통이 영…….”
주르피아는 대륙의 남서쪽, 외딴곳에 위치했다. 가장 가까운 마을이라고 해 봤자, 꼬박 1시간을 축지법으로 달려야 도착할 정도로.
엑스가 팔짱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다른 땅이 무조건 더 좋다는 법도 없으니까, 기억해 둘까.’
주르피아, 넓은 땅이 특징.
엑스는 짧게 머릿속에 정리해 두곤, 곧바로 밀림으로 진입했다. 주르피아는 넓은 밀림이었다. 때문에 깊숙이 들어가기 전까진 멸망의 낙인에 당하지 않은, 생기 넘치는 몬스터들이 등장했다.
“흐미, 왜 이렇게 빠른 거야?”
“정신 똑바로 차려. 얼굴과 달리 잔인한 놈들이니까!”
우끼끼!
곳곳에서 주르피아의 악동, 붉은 가면 원숭이와 사투를 벌이는 유저들이 보였다. 슬쩍, 유저들을 둘러본 엑스가 스캔을 완료했다.
‘대충 180레벨 정도인가?’
최소 넷 정도로 파티를 이룬 걸 보면, 주르피아 초입의 수준은 200레벨 적정이라고 볼 수 있었다. 코산트 섬보다는 확실히 등장하는 몬스터들이 약했다.
‘그래도 밀림은 종잡을 수 없는 곳이니…….’
언제나 방심은 금물.
엑스는 유저들을 뒤로 한 채, 주르피아 중심으로 진입했다. 쌔애액! 가끔씩 붉은 가면 원숭이들이 딱딱한 야자 열매를 던져댔다.
“짜식들이 간도 크네.”
찌릿! 하지만 엑스가 패기를 발산하자, 밀림의 악동이라 불리는 녀석들도 줄행랑을 치거나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무려 700을 넘어선 엑스의 패기는, 자신보다 약한 상대에게 압도적인 효과를 뿜어냈다.
“찾았다!”
덕분에 엑스는 시간 지체 없이 고대 왕국 유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르피아에 숨겨진 고대 왕국 유적은 비교적 건재했다. 그래도 곳곳에서 유적이라는 걸 알 수 있을 폐건물들이 보였으니.
“망각의 사막이나 코산트 섬에 비하면 양반이네.”
엑스는 멸망의 낙인이 새겨진 기둥을 그대로 통과했다. 침입자에게 멸망의 낙인을 거는 저주가 걸린 기둥이지만, 엑스에게 효과는 적용되지 않았다.
[당신에게 ‘멸망의 낙인’이 새겨집니다!]
[칭호의 효과로 ‘멸망의 낙인’이 무효화됩니다!]
어디 보자, 원혼의 기척이…….
땅도 땅이지만, 무엇보다 퀘스트가 먼저였다. 엑스는 원혼의 기척을 쫓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딱히 느껴지는 게 없었다.
‘코산트 섬처럼 숨겨진 장소가 있는 건가?’
아직 드넓은 유적을 다 둘러본 건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래도 엑스는 일단, 지상의 유적을 샅샅이 뒤졌다. 어느새 주르피아에 어둠이 깔렸다.
‘확실히 없네.’
이번 원혼들도 지하, 숨겨진 장소에 있는 모양. 이제 지하로 통하는 통로만 찾으면 된다. 엑스가 고개를 숙인 순간, 하늘에서 기이한 소리가 울렸다.
까아아아악. 까마귀 울음소리!
하지만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소리가 컸다. 엑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자, 달빛에 빛나는 거대한 까마귀가 보였다. 엑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멸망의 낙인!”
안 그래도 까만색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부리 쪽에 희미하게 빛나는 저 문양은 틀림없이 멸망의 낙인이었다. 게다가 느껴지는 기척 또한 원혼의 것과 똑같았다. 엑스가 작게 미소를 흘렸다.
“딱 보니까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하늘에서 치사하게 싸울 생각인 것 같은데. 너 잘못 생각한 것 같다. 이쪽에도 싸움닭도 있거든.”
뭐, 엄밀히 말하자면 닭은 아니지만.
중얼거린 엑스가 외쳤다.
“가자, 용용아!”
“뀨우우우!”
“얌마, 이럴 때가 아니라니깐?”
“뀨우우우.”
못 본 사이에 더 애교가 많아진 것 같은 용용이. 부비부비, 엑스에게 잠깐 머리를 비빈 용용이가 비행을 시작했다. 쌔애애액! 순간, 용용이의 움직임을 본 엑스가 흠칫했다.
“용용아, 너, 혹시 자면서도 성장하냐?”
혼자 다 해 먹는 먼치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