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거울 앞에선 이지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게 내 최선이야.”
가장 깔끔해 보이는 옷이 무엇일까. 한동안 고민하던 이지원이 선택한 건 다름 아닌 트레이닝복. 편한 것은 물론, 유명 브랜드의 삼선이 인상적인 옷이었다.
약속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지원은 지하철을 타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생각보다 붐비는 오후의 지하철역, 지하철에 올라탄 이지원이 손잡이를 붙잡았다.
‘운동을 안 하니까 체력이 저질이네.’
페이트 중독자.
잠자고, 먹는 시간 빼고 페이트에 접속해 있는 이지원에게 운동은 사치. 예전이야 며칠씩 PC방에서 밤을 새워도 문제가 없었지만, 확실히 20대 후반에 접어드니 체력이 문제였다.
‘시간을 내서라도 운동 좀 해야겠네.’
페이트는 뇌파를 활용하는 가상현실 게임이다. 몸의 컨디션에 밀접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으니, 철저한 관리가 필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오토바이 타고 올 걸 그랬다.”
1층, 치킨집 창고에 잠들어 있는 배달용 오토바이.
꽉 막힌 에스컬레이터와 뻥 뚫린 국도를 보니 녀석이 그리워졌다.
어쨌거나 약속 장소인 카페가 코앞이었다. 각종 대기업 본사가 모여 있는, 잘사는 동네는 카페도 외관부터 달랐다.
‘확실히 눈에 띄는 차림이네.’
정장을 차려입은 회사원들이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덕분에 남의 시선엔 무감각한 이지원도 자신의 트레이닝복 차림을 한 번 쳐다볼 정도. 하지만 딱 그뿐이었다.
‘어디 보자.’
이지원은 인사하는 알바생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내부를 살폈다.
그때, 누군가 손을 흔들었다. 한적한 카페의 안쪽, 각진 안경을 쓴 중년 사내가 방긋 웃고 있었다.
‘한눈에 알아보겠네.’
이런 곳에서 자신을 반겨 줄 사람이 민석호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이지원이 사내에게 다가갔다.
벌떡, 사내가 일어나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맞으시죠?”
사내, 민석호는 엑스를 배려하고 있었다. 또 조심하고 있었다. 엑스가 누구인가? 명실상부 페이트 최고의 라이징 스타! 때문에 엑스란 이름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않는 그였다.
눈치 빠른 이지원이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이지원이라고 합니다.”
“이지원이라. 이거, 실명을 알게 된 시청자는 제가 처음 아닌가요? 영광도 이런 영광이 없습니다.”
“하하, 영광이라뇨.”
“그보다 혹시 걸어오신 건가요? 이럴 줄 알았으면 기사라도 보내는 건데…… 아니, 제가 생각을 잘못했습니다. 아예 자택 근처에서 약속을 잡을 걸 그랬습니다. 그럼 시간도 뺏지 않고, 식사라도 제대로 대접할 수 있는 건데.”
“괜찮습니다. 부담스럽기도 하고, 이럴 때 운동이라도 하는 거죠.”
민석호는 이지원을 고생시킨 것 같아 미안한 눈치였다.
자리에 앉은 둘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쉰에 접어든 대기업 전무와 이제 서른이 가까워지는 청년. 대한민국 남자들의 공통주제인 군대 이야기에서도 세대 차이가 나는 둘이었지만,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저, 정말 그 녀석을 잡으셨어요? 그 큰 녀석을?!”
“사정이 있어서 낚시만 죽어라 했던 적이 있거든요. 그때 라블니나에서 서식하는 해산물은 전부 먹어 봤을 겁니다. 라블리나에서 대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녀석이면…… 아마, 홍새치일 것 같네요.”
“아아, 그 녀석이 이름이 홍새치군요!”
페이트의 시대.
페이트가 어색할 수도 있는 둘의 첫 만남을 부드럽게 풀어 주고 있었다.
그렇게 수다를 떨면서 시간을 보내자, 카페에 사람들이 빠졌다. 문득, 민석호가 번뜩 차렸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죄송합니다. 귀한 시간을 내주셨는데, 대화를 나누는 게 즐거워서 해야 할 일을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괜찮습니다. 페이트 얘기라면 언제나 환영이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천천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일단, 저희의 조건을 말씀드리는 게 우선이겠죠. 궁금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민석호가 서류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이지원은 귀를 열고, 계약서를 차근히 살폈다. 20분에 가까운 설명이 끝났을 때, 이지원의 동공은 흔들리고 있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계약 조건이 좋아도 너무 좋지 않은가?
계약금만 1년에 10억!
거기에다 각종 인센티브가 붙는다. 금액도 금액이지만, 무엇보다 마음만 먹으면 이지원이 당장에라도 달성할 수 있는 항목이 넘쳐난다.
작게는 시청자 수에서부터, 크게는 레벨을 올려 랭킹에 진입했을 때의 인센티브까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이지원이다.
‘근데 내가 해야 할 건 쥐뿔도 없잖아?’
육뚜기가 엑스에게 바라는 것.
당연히 자신들의 홍보가 아니겠는가? 기업의 홍보나 제품의 홍보, 아수스나 다른 네임드 유저들의 광고를 지켜봤던 이지원이기에 나름대로 각오를 하고 있었던 참이다.
민석호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페이트의 시대가 계속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철이 지나면 잊혀지는 게임이 아니라 또 다른 인생으로써 말입니다.”
“동감합니다.”
“그리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 페이트에서 플레이어 엑스가 정상에 서는 날이 분명 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이지원에게 유리한 불공정계약! 지원은 지원대로 해 주면서 구속하는 것도 원하는 것도 없는 계약.
민석호가 젊음을 바친 회사의 일이다. 그저 팬심으로 제시한 계약이 아니었다. 민석호는 현재가 아닌 미래를 보고 있었다.
엑스가 정상에 섰을 때, 그를 묵묵히 후원해 오던 기업의 존재가 밝혀진다면 어떨까?
홍보는 기본이거니와, 다른 후원 기업과는 다른 행보에 기업 이미지까지 챙길 수 있는 게 당연했다.
민석호는 엑스가 정상을 차지할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엔 육뚜기를 굴지의 대기업으로 키워 낸 회장, 정만석도 동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하는 게 없는 것 같은데…….”
이지원은 기쁘면서도 황당했다.
미래를 본다곤 하지만, 상호 간의 계약이 이렇게 유리해도 된단 말인가? 대기업 걱정만큼 쓸데없는 걱정도 없다지만, 이래도 되나 싶은 게 사실.
하나, 이런 기회를 놓칠 이지원이 아니었다.
씨익, 이지원이 웃어 보였다.
“……하는 게 없으니 페이트라도 잘해 보겠습니다.”
“하하, 역시 호쾌하십니다!”
이지원이 계약서에 서명을 마쳤다.
꿈에 그리던 엑스와의 계약을 따냈으니, 민석호의 얼굴엔 미소가 만발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저녁 시간, 민석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차,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
“어디 보자, 나가서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네요.”
민석호의 말에 이지원은 일단,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하늘 높이 솟은 마천루들, 대도심의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야경을 구경하는 이지원의 시야에 문득, 민석호의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지원 씨, 저 건물 보이시나요?”
“네? 네, 안 보일 수가 없는 건물이네요.”
저게 대체 몇 층인가.
민석호가 가리킨 건 빌딩이었다. 뭐가 들어차 있는지는 몰라도 굉장히 높은 빌딩.
민석호가 말을 이었다.
“40층 이상으로는 거주 공간, 그 아래로는 각종 편의 시설을 비롯한 오락 시설들이 있죠. 예를 들면 헬스장도 있고, 은행도 있고…… 영화관은 물론, 아쿠아리움도 있고…….”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없는 게 없단 소리였다. 근데, 왜 갑자기 자신과 관계도 없는 건물 자랑을 하는 걸까? 의아한 표정을 짓는 이지원에게 민석호가 덧붙였다.
“정 회장님께선 능률적으로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중요시하는 분이시거든요. 저희 기업이 직원 복지에 많은 신경을 쓰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요.”
직원 복지, 당연히 중요하다.
하다못해 알바 시급을 조금만 올려 줘도, 열심히 하는 게 눈에 보인다.
한때 치킨집 CEO였던 이지원이 그 단어를 곱씹은 순간, 설마 할 수밖에 없었다.
민석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53층. 페이트 접속을 위한 캡슐 세팅도, 기본적인 인테리어도 끝난 상태입니다. 지원 씨만 괜찮으시다면 지금 당장부터 사용하셔도 됩니다!”
회장, 정만석.
어렵게 붙잡은 엑스를 위한 그의 통 큰 복지였다.
*
후덥지근한 공기.
순식간에 끈적끈적해지는 뒷목.
화산에서 눈을 뜬 엑스가 입을 열었다.
“왠지 모르게 더 또렷한 느낌인데?”
새로운 환경에서 즐기는 페이트!
기분 탓이겠지만, 왠지 모르게 집중이 잘 되는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하지 않은가?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빌라에서 끝내주는 펜트하우스로 이사를 했는데.
바로 전까지, 광활한 통유리로 내려다보던 한강이 떠올랐다.
절레절레. 잠시 그 잔상에 취해 있던 엑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자, 다시 시작이야. 정신 차리자고!”
바뀐 것은 없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으니까.
깡깡! 안 그래도 들려오는 망치 소리가 정신을 들게 만들었다. 울리크의 공방으로 다가가자 반가운 인사말이 들린다.
“엑스, 자네인가?”
“오셨어요!”
제련에 열중이던 울리크와 단우가 엑스를 보고 반색했다. 엑스가 없던 시간 동안, 그 빈자리를 절실하게 느끼던 둘이었다.
“아무래도, 이 주둥이가 자네의 손맛에 중독돼 버린 것 같아.”
“맞아요. 제가 만드는 건 다 맛이 없고…….”
끝내주는 엑스의 손맛!
결국, 둘은 배를 쫄쫄 굶으며 엑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엑스는 화로에 팬을 달구며 식사를 준비했다.
“역시 끝내주는 솜씨야. 잘 먹었네, 엑스.”
“맛있게 먹은 만큼, 열심히 집중하겠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먹은 만큼 최선을 다해 장비를 만들어 줄 터.
엑스는 둘에게 뇌물 아닌 뇌물을 먹여 가며 화산 근처에서 식재료를 수집했다. 식재료를 잘 손질해 인벤토리에 쟁여 두니, 보험도 이만큼 든든한 보험이 없는 것 같았다.
‘다 살이 되고, 스텟이 되는 법.’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기다리던 장비가 하나씩 완성되기 시작했다.
울리크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투구를 응시했다. 한동안 투구를 살피던 그가 입을 열었다.
“됐어, 이 정도면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겠군.”
인간계 최고의 대장장이, 울리크의 인증!
울리크가 엑스에게 투구를 내밀었다.
투구를 받아 들은 엑스는 일단, 가벼운 무게에 놀라고 말았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 깃털처럼 가벼웠다.
“가볍지만 그 단단함은 아다만티움에 뒤지지 않지.”
“오오.”
울리크의 설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엑스가 육성으로 감탄을 뱉어 냈다.
대륙 정중앙에 위치한 화산이다. 화산도 화산이지만, 내리쬐는 햇볕의 강렬함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이건 빛을 흡수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하지만 암철 투구의 주변에선 짙은 어둠이 맴돌고 있었다. 햇빛을 흡수하는 것은 물론, 주변의 빛까지 빨아들이는 놀라운 광경!
거기에 매끈하게 빠진 외관까지 더 해지니, 엑스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확인해 보자.’
외관을 살폈으니, 이젠 그 능력을 확인해야 할 때.
“……!!”
이내, 떠오른 투구의 정보에 엑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혼자 다 해 먹는 먼치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