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진짜 징하다. 지치지도 않나?”
“미친, 저녁 먹고 왔는데 아직 저러고 있네요?!”
“하아, 오늘 재수 오지게 털렸다.”
상도덕을 모르는 보라색 고깔모자!
학살이 시작된 지도 어언 한나절, 엑스의 악명은 흑장미 농원에 자자한 상태였다.
매직 에로우 하나로 200레벨에 이르는 저주받은 흑장미를 한 방에 보내 버린다!
그건 최소 400레벨에 다다른 고위 마법사의 모습과도 같았으니까.
지켜보던 뭉크가 혀를 내둘렀다.
“레벨도 레벨이지만, 매직 에로우 숙련도도 엄청나게 높겠는데? 아니, 애초에 저따위 장비로 이런 위력을 내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수군수군.
자신들의 사냥도 잠시 잊고 엑스의 모습에 넋이 나가버린 유저들.
물론, 엑스에게 그들의 대화가 들릴 리 없었다.
슈쾅! 매직 에로우를 난사하던 엑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걸로 20개!’
한나절, 그동안 인벤토리에 쌓인 흑장미 꽃잎의 개수가 20개를 넘어섰다.
앞에 보이는 파티들이 일주일간 사냥을 해도 모을까 말까 한 양의 꽃잎을 손에 넣은 것!
새삼스럽게 천상의 갈무리의 사기성이 와 닿았다.
‘요령만 생기면 하루에 성벽 반 개는 복구할 수 있겠네!’
슈콰아앙!
엑스는 지치기는커녕 점점 더 의욕에 불탔다. 높고 웅장하게 복구될 성벽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 한 편이 든든해지는 기분이었으니까.
문득, 엑스의 시선이 스킬창을 향했다.
매직 에로우 (10%) : 소량의 마나를 소비해 마나의 화살을 발사합니다. 지능에 비례해 그 위력이 상승합니다.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매직 에로우의 연사력과 제어력이 상승합니다.
‘지금 당장 사냥에 쓰기엔 무리겠지만.’
200레벨에 불과한 저주받은 흑장미들을 쓰러트리는 데엔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건 골드를 위한 노가다지 제대로 된 사냥이 아니었다.
엑스는 매직 에로우를 보다 강한 적에게 써먹을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래도 현재 수준은 파악해 둬야지.”
슈우우우!
엑스가 스태프를 왼쪽으로 꺾으며 매직 에로우를 발사했다. 낮은 숙련도 탓에 확실히 제어는 쉽지 않았다.
쾅!
살짝 틀어진 각도로 쏘아진 매직 에로우가 땅에 박혔다.
“뭐, 이 정도만 돼도 합격.”
지금은 기분도 낼 겸 스태프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손가락으로도 발사할 수 있는 매직 에로우였다.
사냥에서나, PK에서나 방심한 적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다시 달려 볼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엑스는 고민하는 와중에도 열심히 스태프를 휘둘렀다.
스태프 끄트머리에서 끊임없이 난사되는 매직 에로우들!
무지막지한 마나량과 그 재생력을 대폭 증가시켜 주는 룬스톤의 축복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털썩. 엑스의 눈치를 보던 파티 하나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냥 갈 때까지 기다리죠?”
어디서 저런 괴물이 튀어나온 걸까?
저 보라색 고깔모자와는 경쟁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양해를 구하고 싶지도 않았다.
척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복장. 괜히 심기를 건드렸다간, 골드는커녕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긴 한숨 속, 누군가 작게 입을 열었다.
“보라색을 좋아하면 살짝 의심해 봐야 된다던데…….”
아니, 의심도 필요 없었다.
저건 100퍼센트 위험한 놈이다.
“으하하하!!”
끊이질 않은 득템에 웃음을 터트리는 엑스를 보며 주저앉은 파티원들이 몸서리를 쳤다.
아무래도 오늘의 허탕이 길어질 것만 같았다.
*
“보람찬 하루였다. 수고했다, 금 손들아!”
엑스는 결국 흑장미 꽃잎을 31개를 먹고 나서야 노가다를 마쳤다.
마을 귀환 주문서를 사용, 아르바로 귀환한 엑스가 곧바로 경매장을 열었다.
‘최근 최고 거래가가 515골드라…….’
그마저도 없어서 못 파는 게 흑장미 꽃잎이었다.
가격들을 살피던 엑스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경매장을 이용하는 것은 다른 유저들, 곧 경쟁자라는 소리였으니까!
‘한 푼이라도 더 받아 내야 직성이 풀리거든.’
고심 끝에 엑스가 흑장미 꽃잎 30개를 개당 514.99골드에 등록했다.
홈쇼핑에서 배운 간단하지만, 기가 막힌 상술! 알뜰한 엑스도 저 상술에 속아 물건을 주문한 적이 있을 정도니, 효과는 보증된 셈이었다.
31개 중, 1개를 남긴 이유야 간단했다.
“이걸 어떻게 먹을지는 차차 생각해 보고.”
레어 등급의 아이템, 흑장미 꽃잎!
일단, 입에 넣고 씹을 수 있으면 뭐든 먹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엑스였다.
그래도 500골드짜리 아이템이니 엑스는 고심해서 먹으리라 다짐했다.
이내, 엑스가 유저들이 모여 있는 광장으로 향했다.
‘다 팔릴 때쯤이면 수로 공사도 얼추 끝나 있겠네.’
지치지 않는 성실한 유령들과 함께 바로 성벽 보수 공사에 들어가면 될 것 같았다.
북쪽으로 향하는 유저들에게 텔레포트를 얻어 타고 수 시간 후, 크세르니스에 도착한 엑스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 아니 성실해도 너무 성실하신 거 아니에요?!”
[훼손된 수로]
내구도 : 48,200/100,000
벌써 4만을 넘어선 수로의 내구도! 과연, 자울이 자신만만하게 나왔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주일은 유령들의 능력을 제대로 과소평가한 것. 이런 속도라면 내일모레쯤이면 수로가 완전히 복구될 것 같았다.
자울이 엑스와 용용이를 반겼다.
“엑스! 어디, 골드는 많이 벌어왔는가?”
“물론이죠. 뭐, 나름대로 많이 벌어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 속도를 따라가려면 더 열심히 벌어야겠는데요?”
“후후, 의욕이 가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허망하게 멸망한 크세르니스를 복구하기 위하여! 유령들은 의욕을 넘어, 악에 받쳐 재건에 여념이 없었다.
쾅쾅! 망치질 소리에 격한 목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감히 우리들의 땅을 이 꼴로 만들어 놓다니!”
“두 번 다신 무너지지 않게. 아주 그냥 제대로 보수하자고. 이번에도 당해 버리면 먼저 성불한 아내와 만날 낯짝이 없단 말이야.”
“좋았어, 망치 나가신다!”
감동 그 자체! 비록 인구는 자신 단 한 명뿐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든든한 지원군들이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
흐뭇한 미소를 띤 엑스가 영지 관리 메뉴를 확인했다.
[무너진 성벽]
내구도 : 680/10,000,000
[무너진 성벽]
내구도 : 320/10,000,000
“성벽을 수리하는 기간도 있을 테니까 가장 내구도가 낮은 성벽들부터 차근차근 복구해 가는 게 어떨까요? 절대 골드가 아까워서 그러는 건 아니고요.”
메이지 랭커로서 개인 방송에 복귀했던 날!
그 날 선물 받았던 30만 골드가 엑스의 인벤토리에 고이 잠들어 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피 같은 골드가 빠져나가는 게 아쉽기도 했지만, 괜히 욕심을 부리지 말고 하나둘씩 복구하는 게 효율적일 것 같기도 했다.
“음, 안 될 이유는 없겠지. 그렇다면 내구도로 따지기보단, 외곽의 성벽을 우선적으로 복구하는 게 좋을 것 같네. 그중에서도 특히 망루를 설치할 수 있는 성벽을 말이지.”
“오오, 역시 폐하십니다.”
사사로운 물욕에 휩싸인 엑스는 놓치고 말았던 포인트!
자울이 아니었다면, 비싼 골드를 쓰고도 비효율적인 선택을 할 뻔했다. 엑스의 감사에 자울이 고개를 저었다.
“감사는 무슨. 그보다 엑스, 그 호칭은 이제 그만 두게.”
“네?”
“폐하라는 호칭을 말하는 걸세. 과거의 나는 크세르니스의 국왕이었지만, 더 이상은 아니야. 더욱이 이제부터 크세르니스를 관리하는 것은 엑스, 바로 자네 아니겠는가?”
자울은 크세르니스의 영주를 엑스라고 인정했다. 새로운 영주가 과거의 망령인 자신을 폐하라고 부르는 건 그가 보기에 좋은 그림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자울 님.”
“그 님 자도, 우리가 좀 더 친해진다면 빼도 좋네.”
장난 섞인 자울의 농담을 엑스가 되받아쳤다.
“그냥 지금부터 빼고 부르면 안 될까요?”
“하하, 그건 안 되지. 그래도 살아온 나이가 있는데.”
“암만 그래도 제가 먹은 밥그릇이 더 많을 걸요?”
티격태격.
“뀨우뀨우.”
주인은 나처럼 의젓해지기 글렀다뀨.
그런 엑스를 보고 용용이가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
“크으, 날씨 좋다. 그치, 용용아?”
“뀨우웃!”
“누가 믿기야 하겠냐고.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이 땅이 전부 눈에 뒤덮여 있다는 걸 말이야.”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볕!
서리 폭풍 절벽이라는 과거의 이름이 무색하게 따뜻한 날씨였다. 무서운 속도로 녹아내리는 빙하가 이해가 될 정도.
엑스는 자울의 권유로 새롭게 드러난 크세르니스 주변 필드를 돌아보는 중이었다.
‘겁도 없이 크세르니스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놈들이 있다고?’
새로운 필드가 드러났으니, 새로운 몬스터가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
자울의 말에 따르면 뉴페이스들은 꽤나 강한 것 같았다.
아찔한 서리 폭풍 절벽 근처를 휙휙 뛰어다니는 것은 기본, 밤엔 야생성 짙은 짐승의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단다.
“강하면 강할수록, 나야 땡큐지.”
하지만 엑스로서는 두 팔을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안 그래도 엑스는 이제 막 메이지 랭커로 올라선 참이다.
400레벨을 넘기면서 필요 경험치량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엑스의 뒤를 바짝 쫓는 하위 랭커들도 있었다.
거기에다 골드를 충당하기 위해 노가다에도 시간을 투자했으니 크세르니스 주변 필드에서 고레벨 몬스터가 등장하는 걸 꺼릴 이유가 없었다.
“뀨우…… 뀨우우?”
“혼자서 돌아다녀 보고 싶다고?”
“뀨우뀨우!”
점점 커가는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 건가 싶었다.
최근 자립심이 강해진 용용이를 보면 기특하면서도,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엑스가 미묘한 눈으로 스텟창을 확인했다.
이름 : 용용이
종족 : 드래곤
포만도 : 78%
레벨 : 400
생명력 : 1,100,000 / 1,100,000
마나 : 650,000 / 650,000
힘 : 7,800 / 민첩 : 6,200
마력 : 6,300 / 제압 : 5,800
“……그래. 그동안 얌전히 따라와 준 것만 해도 고마워, 우리 착한 용용이.”
드디어 그 날이 오고야 만 것이었다!
엑스가 폐관 수련을 한 만큼 용용이도 덩달아 성장을 했다.
희대의 사기 직업 천상의 미식가라고 해도 드래곤의 성장 속도를 따라잡을 순 없었고.
‘간신히 체면을 세우던 힘마저도…….’
가뿐하게 역전이 되어 버린 상태! 이런 게 괜한 자격지심이란 걸까?
엑스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눈치 빠른 용용이가 엑스의 표정 변화를 모를 리 없었다.
나를 너무 좋아해서 탈이다뀨.
용용이가 날개를 펄럭이며 엑스의 곁으로 돌아왔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엑스에게 용용이가 장난스럽게 머리를 비벼 왔다.
“뀨웃! 뀨웃뀨웃!”
“뭐? 새로운 곳에 왔으니, 역시 내기를 해야겠다고?”
“뀨우뀨우!!”
시무룩하지 말고 덤벼라뀨.
챙!
용용이의 도발에 넘어간 엑스가 곧바로 검과 방패를 꺼내 들었다.
진심을 다할 때만 꺼내 드는 최고의 전력 태세! 엑스와 용용이가 동시에 울창한 숲을 노려봤다.
팟! 엑스가 기습적으로 달려나가며 외쳤다.
“지금부터 시작!!”
최근, 지금 순간만큼 긴장했던 적이 있었나? 누군가에겐 유치한 자존심 싸움일지 몰라도, 엑스에겐 절대로 지고 싶지 않은 내기였다.
샤샤샥!
엑스가 나무 사이를 내달리며 적들을 포착했다. 순간, 엑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진짜 보통 놈들이 아닌데!’
혼자 다 해 먹는 먼치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