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쿵쿵!
엄청난 진동과 함께 풍경이 뒤바뀐다.
과연 하늘에 닿을 정도로 자라난 고목다웠다. 조금만 균형을 잃어도 천 길 낭떠러지.
고목의 어깨에 타고 있던 엑스가 감탄을 뱉어 냈다.
“다들, 이런 장관을 혼자서만 보고 계셨던 겁니까?”
-후후…… 이렇게…… 움직여 보는 게…… 얼마만 인지 모르겠군…… 매일 같은 풍경에…… 질리기도 한참…… 움직일 명분을…… 만들어 줘서 고맙네…… 대식가 친구.
“대식가라니, 뒤끝 한번 여전하시군요.”
간만인 외출에 신난 고목들은 엑스의 말을 어물쩍 넘겨 버렸다.
자연의 섭리를 중요시하는 고목들이다. 룬스톤의 힘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됐다고 한들, 자의로 고목의 숲을 떠날 순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엑스의 부탁이 있었다. 뒤끝이 긴 만큼 받은 은혜는 절대 잊지 않는 고목들!
엑스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인 고목들은 베네타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런 속도라면 습격 전에 도착할 수 있겠는데?’
성큼성큼!
느릿한 말과 달리 고목들의 진격 속도는 어마어마했다. 긴 다리가 쭉쭉 벌려질 때마다 마을 하나를 건너뛰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
그런 고목 위에서 엑스는 머릿속에 그림을 그렸다.
‘파죽지세, 확실히 쉽지 않은 상대다.’
대륙 최강!
명실상부 페이트에서 가장 강한 플레이어라 불리는 송월이 존재한다.
그 송월이 무식하게 힘만 믿고 설쳤으면 모르는 일이지만, 그가 페이트 베타 테스트부터 착실하게 계획해 온 노림수들은 진짜였다.
‘필중의 공성 병기.’
파죽지세와 샤이닝 원의 전투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던 병기들!
엑스는 러닝머신 위에서 그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봤었다.
통렬하게 샤이닝 원 위에 내리꽂히던 바위들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했다.
‘데미지는 유저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라.’
엑스의 생명력은 같은 레벨 유저에 비해 수십 배, 많게는 수백 배였다.
하나, 공성 병기를 무시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걔네들도 바보가 아니거든.”
게임에 재능 좀 있다는 놈들이 전부 뛰어든 판이 바로 페이트다.
그런 페이트에서 최강의 길드라 불리는 파죽지세에 소속된 길드원들이다.
마치 보스 몬스터를 레이드 하는 것처럼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오랜 시간 집요하게 견제를 해 올 건 예정된 수순.
그 총공격을 단신으로 버티면서, 베네타를 지켜 낼 수 있을까?
‘뭐, 지켜 낼 순 있겠지.’
자신만만!
실제로 방금 전 파죽지세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막강한 다른 존재의 피조물과 싸워 이긴 엑스였다.
그것도 모자라 곰 태세를 비롯한 팔문해방, 죽음 부정에 이르는 비장의 수들은 전부 아껴둔 상황!
파죽지세가 최적의 전력으로 대응한다고 해도, 송월을 비롯한 파죽지세의 길드원 절반 정도는 로그아웃 길동무로 삼을 자신이 있었다.
문득 엑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지키기만 해선 남는 게 없잖아?”
남는 게 없을 뿐 아니라 만천하에 자신의 전력이 노출된다!
더군다나 뒤에 도착할 건 워 머신이다.
카이무스의 능력은 엑스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력을 다한 자신의 전투를 보고 파훼법을 찾는 건 카이무스에게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 터.
‘압도적인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
베네타를 지키는 것은 물론, 워 머신이 도착하기 전 파죽지세를 괴멸시켜 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니 고목들의 존재가 이토록 든든할 수 없었다.
-위험……? 허허…… 우리는 매일 죽음을…… 경험하고 있지…… 떨어지는 나뭇잎…… 썩어 가는 나뭇가지…… 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다시 매일 살아난다…… 썩은 잎과 가지는…… 비옥한 양분이 되어…… 새로운 새싹을 피워 낼 테니까.
엑스의 경고에도 고목들은 내빼는 기색이 없었다.
덕분에 엑스도 찝찝한 기분 없이 전투에 매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내, 인벤토리를 뒤지던 엑스가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티예르 가문의 가보!
은사자 목걸이를 목에 건 엑스가 입을 열었다.
“이번엔 명분도 있으니까 적당히 봐주는 건 없을 거야.”
*
베네타는 술렁이고 있었다.
“야야, 지금이라도 로그아웃하자.”
“뭐래. 죽더라도 이 위대한 대전투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데. 이건 몇 번을 로그아웃 당해도 남는 장사야. 지금 나갔다간 무조건 후회할걸?”
“……그런가? 근데, 분위기가 진짜 장난 아니다.”
이런저런, 수다를 떠는 유저들 사이로 베네타의 주민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NPC인 그들에게 사망은 정말로 인생의 끝. 유저들처럼 여유를 부릴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우울한 분위기.
척! 부지런히 짐을 싸던 잡화점 상인을 사내가 붙잡았다.
“이쪽으로 오시죠.”
“……아, 아수스 님?”
“간만입니다. 그간 받은 정보값 갚으러 왔습니다.”
익스플로러의 리더, 아수스!
온갖 정보와 소문에 능통한 아수스다. 베네타 NPC들과도 친분이 두터웠으니 그들을 잃지 않기 위해 보호에 나선 것.
다른 익스플로러 길드원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우리 같은 비전투계열에게 NPC는 귀중한 존재거든.’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온 NPC가 사라진다면? 비전투직에게 그것보다 큰 피해가 없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아수스의 시선이 문득 언덕 위를 향했다.
“거, 인생사 한 번 기구하네.”
대륙의 최고의 부호로 거듭난 티예르 가문!
암철 광산을 발견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부를 누려 보려던 참.
졸지에 강자들의 표적이 되어 버렸으니 가문을 부지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아수스가 고개를 저었다.
‘하나하나 신경 쓰면 페이트 못 하지.’
자신과 관련이 있는 NPC들을 챙기기에도 벅차다.
잡생각을 떨쳐 낸 아수스의 귓가에 문득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란스러운 광장.
중앙에 선 소년이 앞에 모인 이들 앞에서 말하고 있었다.
“동요하지 마세요. 우리들이 결속한다면 베네타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식량과 필요한 물품은 제가 전부 제공하겠습니다.”
아수스가 중얼거렸다.
“……라안 티예르.”
티예르 가문의 어린 후계자, 라안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잃을 것이 많고, 자신의 목을 노리는 자들이 넘치는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아수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런 능력이 있었으니 나날이 명성이 높아지는 거겠지.’
베네타에서 티예르 가문의 평판은 상당히 좋았다.
갑작스럽게 부를 거머쥐었지만 언제나 겸손한 태도, 노동자에 대한 대우를 비롯한 베네타에 내놓는 기부금까지!
“맞습니다. 베네타는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동요하지 말고, 각자 자기 위치를 지킵시다!”
실제로 라안의 말에 베네타의 주민들은 안정을 찾았다.
차근차근 식량을 배급받고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아수스가 그들을 보며 씨익, 웃음을 흘렸다.
“이거 또, 나의 모험심을 자극하는 일이 생겼네.”
파죽지세에게 맞서는 건 위험하다. 엑스 때처럼 본능이 말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아수스는 자타공인, 머리가 살짝 이상한 남자! 그건 다른 익스플로러 길드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수스의 곁으로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여인이 다가왔다.
“당연히 참가할 거지? 난 벌써 참가했어.”
“물론, 현재 방어측 전력은 어때?”
“베네타의 병사들이 2천에, 무장한 주민들이 5백, 유저들은 혼밥 동맹에 우리까지 해서…… 뭐, 말하면 사기만 떨어질 것 같으니까. 생략할게.”
“열악하구만. 뭐, 시간이라도 제대로 끌어 봐야지.”
반가운 지원군은 아니지만 워 머신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어 보겠다!
익스플로러의 전공을 살릴 때가 찾아온 것이었다.
일단, 아수스는 그간 모험으로 얻었던 보물들을 확인했다.
‘혼란 구름을 소환하는 램프.’
아군과 적군의 구분을 흐리게 하는 특수 효과.
파죽지세가 보유한 수많은 성직자들을 생각한다면 효과는 일회용에 가깝겠지만 그게 어디인가? 1분 1초가 모여서 하루가 되는 법이다.
“아수스, 서쪽 문에 부비 트랩 설치 끝냈어.”
“대장! 가져온 무기들은 어떻게 할까요?”
“광장에 가져다주면 필요에 따라 배급할 거야.”
단우를 비롯한 익스플로러의 나머지 길드원들도 합류를 마쳤다.
아수스는 내심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사파의 기술이 압도적인 최강자들에게도 효과가 있을까, 궁금증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우리 행보가 시험대에 오른 기분이야.’
다가오는 결전의 시간!
베네타엔 침묵이 맴돌았다.
포기의 침묵이 아닌, 결속의 침묵이.
전투 클래스 유저들은 병사들과 함께 성벽에서 대기, 아수스를 비롯한 비전투직 클래스는 광장에서 대기했다.
상황에 따라 기민하게 대처하기 위함이었다.
“감사합니다.”
“……아직 안 들어가셨습니까?”
“모험가분들이 힘을 내주시는데, 제가 가만히 있을 수야 없죠.”
라안 티예르가 광장에 남아 있자 아수스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묻진 않았다.
그의 눈은 소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장한 빛을 뿜고 있었으니까.
그러던 중 서쪽 성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적들이 보인다!!”
파죽지세!
지평선 너머로 그들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타다닥! 성벽으로 뛰쳐나간 아수스가 탐험가의 필수품, 망원경을 치켜들었다.
아수스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이거 제대로 작정하고 왔잖아?’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입마개를 한 드레이크였다.
녀석의 입가에서 뚝뚝 떨어지는 붉은 용암을 보니, 재앙에서 길들였다던 송월의 펫이 확실해 보였다.
바람에 나부끼는 수많은 깃발들!
그 뒤로 화려한 장비를 걸친 송월이, 파죽지세의 핵심 간부들이 보였다.
드르르륵!
우렁찬 소리를 내며 끌려오는 공성 병기들은 덤이었다.
아수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전력 중의 전력이다. 베네타는 물론 워 머신까지 박살 내 버릴 생각이잖아. 저 녀석들?’
베네타의 성벽, 그리고 자신들의 준비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길고 짧은 건 언제나 대봐야 아는 법.
기왕 공성전에 참여한 거 이제 와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뭐, 그렇다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지만.”
아수스가 쓴웃음을 삼켰다. 정보를 통해 나름대로 파죽지세의 전력들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정도의 전력을 숨기고 있을 줄이야. 격이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전군, 전투를 준비하라!”
“방벽 전개 준비 완료!”
“성문을 봉쇄하라!”
파죽지세가 점점 가까워진다.
병사들은 활시위에 화살을 걸었고, 일반 주민들을 숨을 죽였다.
얼마 없는 유저들도 언제든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준비를 끝냈다.
그때였다.
쿵.
“……?”
어딘가에서 땅이 울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아수스는 심장 박동과 착각했나 싶었지만, 다른 이들도 느낀 걸로 봐선 아닌 듯했다.
쿵쿵.
“뭐, 뭐야, 이 울림은?”
“이거 설마 대형 마법인가?!”
“……아냐, 파죽지세 쪽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야.”
소리의 근원지는 남쪽이다.
날카로운 직감을 가진 전설의 탐험가 아수스가 황급히 남문을 향해 달렸다.
쿵쿵.
울림은 점점 강해지고, 가까워지고 있었다.
성벽에 올라선 아수스가 망원경을 치켜들었다.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만 확대된 지평선 너머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게 얼마나 멀리서부터 울리는 진동이란 말인가? 대체 어떤 존재가 이런 박력을 낼 수 있단 말인가?
경험이 많은 아수스도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수스가 말을 더듬었다.
“……뭐, 뭐야, 저 나무는?”
이내 지평선 끄트머리에서 모습을 드러낸 움직이는 고목들!
아수스가 거목 군단의 위용에 기겁하기도 잠시, 그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고목의 어깨 위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으니까.
“……엑스? 네가 왜 거기서?!”
혼자 다 해 먹는 먼치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