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나오실 줄이야.’
성민지가 멈칫한 이유는 간단했다.
미운 털이 박혔다고 해도 카를라는 메이지의 대표 이사, 게다가 페이트의 창조주인 슈베르트 회장과의 인연이 있다.
페이트의 불안정성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일 터.
물론, 성민지 입장에선 환영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후후, 그렇게 생각했으니 나를 찾아온 거겠죠.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이유라, 하도 많아서 어디부터 시작해야 될까요?”
성민지가 생긋 웃으며 카를라의 눈치를 살폈다. 반응을 떠보려는 속셈이었는데, 과연 내공이 만만치 않았다.
카를라는 여유 넘치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흠, 성민지가 목을 가다듬었다.
“폭발적인 인기 덕에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페이트는 정상적인 게임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많죠. 노력보다 운에 따라 좌우되는 요소가 너무 많아요. 대다수의 메이지 랭커들이 히든 클래스 보유자라는 사실은 이사님도 잘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말하나 마나 엑스가 있겠죠.”
엑스!
페이트 게임 마스터들 사이에서 엑스는 연구 대상이자 애증의 존재였다.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페이트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민원 폭탄에 시달리게 만들었으니까.
성민지라고 다를 건 없었다.
카를라는 눈치가 빨랐다.
“그렇다면 민지 씨는. 아니, GM 분들은 숨겨진 메인 스토리에 플레이어 엑스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단 거군요?”
“맞습니다.”
“그 엑스가 회장님이나 저와 연줄이 닿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건…….”
그냥 굴러 들어온 돌이 아니었다.
카를라, 보통이 아니다.
카를라는 성민지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실 엑스는 처음부터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행보를 보여 왔다.
“네. 솔직히 말하면, 저는 회장님이 특별 권한을 사용해 엑스를 메이지 스트리머로 발탁했을 때부터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성민지의 강단 있는 대답에 카를라는 잠시 침묵하더니,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이번엔 헛짚으신 것 같네요. 저는 GM 분들과 마찬가지로 페이트에 간섭할 권한이 없으니까요. 전 엑스가 어디에 사는 누군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회장님은…….”
그녀는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누가 됐든 절대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 분이시죠.”
성민지는 단번에 납득할 수 있었다.
“그건 저도 동감합니다.”
근 10년을 같이 일해 온 이들조차 신뢰하지 않은 슈베르트 아닌가?
그가 인생을 걸고 개발한 페이트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한 인물에게 페이트를 좌지우지할 힘을 건네주진 않았을 것 같았다.
“엑스나 랭커들에 관한 건 순전히 운이나 페이트의 고유 설정이라고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시스템적인 문제가 존재합니다. 페이트는 명백하게 과몰입을 부추기고 있으니까요.”
가상현실게임이라 불리기 위해선 현실과 다른 점이 존재해야 한다.
리얼한 건 좋지만 현실과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리얼하면 문제가 된다.
‘인간과 다를 바 없는 NPC들이 픽픽 죽어 나가는 게 페이트야.’
그런 의미에서 흔히 제 2의 인생이라 불리는 페이트는 도가 지나쳤다. 크고 작은 사회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여러 가지 게임을 개발해 온 성민지에게 페이트는 정상적인 게임이라 부를 수 없었다.
“개발 단계에서 시뮬레이션을 통해 이 간극을 완벽하게 조정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 보니, 짜잔. 결과물은 예상과 전혀 달랐지만요. 그게 저희의 실수인지, 아니면 회장님의 의도인지 알 순 없지만.”
카를라는 솔직하게 답했다.
“물론, 회장님의 뜻이겠죠.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성민지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고생은 지금부터 이사님이 하셔야죠. 저는 한번 잡은 기회를 쉽게 놓치는 편이 아니거든요. 다음 문제로 넘어가 볼까요?”
넘치는 반골 기질!
성민지는 페이트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하나씩 꼬집었다. 많은 요소들이 있었지만 핵심은 하나였다. 페이트는 완벽하기는커녕, 게임이라고 부르기에도 무리가 있다는 것.
카를라가 한 마디로 정의했다.
“말 그대로, 흔한 게임이 아닌 제 2의 인생이다.”
“그렇기 때문에 페이트엔 위험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저보다 전문가이신 이사님이 더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하고요.”
“민지 씨는 캡슐이 뇌파에 간섭하는 걸 우려하는 거군요.”
성민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류해 온 NPC가 공성전으로 사망해 사라지자, 극심한 우울증을 호소하는 유저들이 속출했다.
당장 심한 건 아니더라도 과몰입을 부추기는 페이트에 갖가지 우려가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최근 들어 페이트에서의 행동과 현실의 행동이 서로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음, 이쪽에 대해선 긍정적인 반응이 더 많지만요.”
“말씀하신 대로 제 전문 분야네요.”
싱긋, 웃어 보인 카를라는 한계를 정했다.
“쉽게 말해 이미지 트레이닝의 연장선이라고 보면 되죠. 보다 효과가 뛰어난 이미지 트레이닝. 당장만 해도 가상현실은 재활 치료에서도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으니까요.”
“그 말씀은 캡슐이 보다 직접적으로 뇌에 간섭할 걱정은 덜어도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인간의 뇌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해요. 캡슐에 달린 기본적인 장치들 정도로는 뇌에 간섭하는 건 어림도 없죠. 리얼한 설정을 통해 몰입을 부추길 순 있어도, 직접적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건 불가능합니다.”
성민지가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듣던 중 가장 반가운 말인 것 같은데요?”
페이트에 대한 애정이 있으니까 의문도 들고 걱정도 되는 것. 성민지는 가장 우려하고 있던 부분이 해결되자 한시름 마음이 놓였다.
그러자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린 무엇을 위해 매일같이 개발에 몰두했던 걸까.’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긴급 패치를 통해 뜯어 고치고 싶은 게 한둘이 아니지만, 불가능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성민지였다.
꽤나 긴 시간 동안 고급 인력인 카를라를 붙잡아 뒀다.
“죄송합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정신을 차린 성민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허한 마음을 알아차린 걸까, 카를라는 꽤나 슬픈 표정으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알면서도 손을 쓸 수 없다는 게 정말 얄궂은 ‘운명’ 같은 일이죠.”
*
“난 열심히 일한 뒤엔 단 게 당기더라?”
성민지는 카페에서 달달한 케이크를 흡입했다. 그녀의 앞엔 잔뜩 인상을 구긴 두 사내가 있었다.
푸욱,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김성철이 그대로 입을 열었다.
“이사님도 아는 게 없으면 어쩐대요.”
“그러니까 큰 기대는 하지 말자고 했잖아.”
“거, 자기 여자한테도 말 못 할 비밀이라는 건가?”
기대보다 얻어 낸 게 없는 카를라와의 대담. 물론, 성과는 있었다.
세계 최고의 뇌 과학자인 카를라에게 가장 중요한 유저들의 안전에 대한 보증을 받았으니까. 침묵 속에서 김성철이 중얼거렸다.
“어쨌거나, 우린 목표로 했던 완벽한 가상현실게임을 만드는 데엔 실패한 거네요.”
그러자 페이트를 개발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완벽한 가상현실게임을 목표로, 슈베르트 회장을 따라 매일같이 야근을 반복하던 과거 시절.
피식, 서명우가 쓴웃음을 뱉었다.
“무슨 계기로 생각이 바뀌신 건지.”
“몰라. 저 이제부터 회장님한테 인사 안 할래요.”
“제대로 마주친 적도 없으면서 인사는 무슨.”
그런 둘의 한탄을 듣고 있던 성민지가 문득, 오물거림을 멈췄다. 과거를 떠올리자 그간 의심할 여지가 없던 초심조차 의심되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기억을 헤집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회장님은 단 한 번도 완벽한 가상현실게임을 만들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어. 그러니까 어떠한 계기로 생각이 바뀐 게 아니야.”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성민지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회장님은 개발 단계부터 이런 페이트 월드를 그리고 계셨던 거였어.”
*
정령의 숲!
엑스와 용용이는 정령들에게 둘러싸인 상태로 성대한 축하를 받고 있었다.
샤랄라.
여전히 넘치는 정령들의 장난기! 덕분에 흩날리는 꽃가루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퉷퉷, 엑스가 입에 들어간 꽃가루를 뱉었다.
“감정이 느껴지는데, 너희들 지금 복수하는 거지?”
“그럴 리가. 우린 한없이 순수한 정령들인 걸?”
“꼭 살아서 돌아와. 보고 싶을 거야.”
“그렇다고 너무 빨리 오진 말고.”
다음 목적지는 거인의 산맥!
정령의 숲과 인접한 곳으로 이름처럼 거인들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거인이라, 사실 아르바 대륙에도 거인 같은 이들이 존재했다.
‘멀리 안 가고 브욜라프만 해도 거인이지.’
일반인의 세 배에 이르는 덩치!
하지만 드니스에 말에 따르면 단절 대륙의 거인들은 기본이 열 배부터 시작한단다.
게다가 그 신체에 대한 자부심도 무척이나 강하다고 했다.
“그들은 자신의 조상들이 던진 돌이 하늘의 별이 됐다고 믿고 있지. 자부심이 강한 거야 흠이 아니지만, 정작 중요한 건 그들의 호전적인 성격이네.”
전투적인 성격!
라우니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더욱더 가관이었다. 단절 대륙에서도 최강의 생물인 드래곤들의 영역을 침범하질 않나, 겁도 없이 세계수를 타고 오르려고 하질 않나.
‘이건 쿠룰라 전사들보다 더한 근육 바보들인데?’
그보다 놀라운 건 그런 무모한 짓을 하고도 살아남았다는 것!
그러니 거인들의 강함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엑스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산맥에는 그런 거인들보다 강한 생물들이 존재한다.’
그 무식하고 호전적인 거인들이 단절 대륙을 정복하지 못한 이유!
그건 바로 거인의 산맥에 존재하는 몬스터들이 거인만큼이나 강하기 때문이었다.
라우니스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각오를 해야 될 걸세. 거인의 산맥엔 크고 작은 지진이 끊이지 않으니까 말이야. 특히 거인 녀석들이 사냥이라도 나가는 날엔 정령의 숲까지 진동이 느껴질 정도니까.”
“알겠습니다. 방심은 금물이죠!”
“훗, 표정엔 조금도 긴장한 기색이 없군.”
그도 그럴 것이 엑스는 굶주린 상태였다. 정령의 숲에선 본의 아니게 전력을 낼 수 없었으니까. 드디어 단절 대륙의 스케일에 걸맞는 사냥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거인의 산맥에 도착하겠노라!
정령의 숲 인근이라고 해도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아르바 대륙으로 치자면 크세르니스에서 루얀 왕국까지 달려야 하는 셈.
축지법으로도 며칠은 부지런히 뛰기만 해야 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라우니스와 드니스가 엑스를 배웅했다.
“안 그래도 엑스 님과 만나고 싶어 하는 아저씨가 한 분 있는데, 제가 굳이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살짝 퉁명스럽긴 해도 엑스 님 하곤 분명 맞는 구석이 있을 거예요!”
“저를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있다고요?”
드니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아무래도 그 아저씨라는 작자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던 모양. 어쨌거나 인맥은 언제나 도움이 되는 법!
‘그 아저씨가 거인이면 좋을 텐데.’
척박하고 낯선 거인의 산맥!
아는 거인이 하나라도 있으면 적응하고 친밀도를 쌓는 데에 도움이 될 터. 그게 누구인지, 캐묻고 싶었지만 대답해 줄 분위기는 아니었다.
듣고 있던 라우니스가 덧붙였다.
“정령의 숲엔 언제든지 편하게 돌아와도 되네. 느긋하게 움직인다고 트집 잡을 생각은 없으니 말이야. 그나저나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군.”
아쉬운 부분이라고?
그렇게 말한 라우니스의 시선은 엑스가 아닌 용용이를 향해 있었다.
반짝반짝. 정령들이 뿌린 꽃가루를 뒤집어쓴 용용이를 바라보던 라우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곳에서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 내가 그들에게 부탁을 해 보겠네. 그들 입장에서도 용용이는 호기심의 대상일 테니까.”
“그들이요? 누구에게 무슨 부탁을 하신다는 건가요?”
라우니스가 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대꾸했다.
“당연히 에인션트 드래곤들 아니겠는가?”
혼자 다 해 먹는 먼치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