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국가 규모의 지역을 방어할 수 있는 초대형 보호막 마법진.
유저들의 정복 전쟁으로 아르바 대륙은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치안을 강화하고 군사력에 많은 돈을 쏟아 붓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이지원은 알고 있었다.
‘너희가 치안을 걱정한다고?’
아르바 왕궁을 지배한 것은 숭배자, 하얀 가면이라는 것을.
인신 공양이라는 만행을 준비하고 있는 녀석들이 일반 백성들을 걱정해서 보호막을 전개한다? 이것만큼 냄새가 구린 일도 없었다.
지금 당장 아르바로 달려갈 순 없었지만, 유저들이 찍어서 올린 스크린 샷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지원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건 일반적인 마법진 구조가 아니야.’
페이트의 마법진에 깊은 조예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쯤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스크린 샷, 곳곳에 드러나 있는 검은 문양들이 이지원에겐 더없이 익숙해 보였으니까.
이지원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멸망의 낙인.”
결론은 나왔다.
이건 마법진이 아니다.
인신 공양을 위한 준비 의식이다.
녀석들은 대륙 최대의 도시 아르바를 통째로 제물로 바칠 생각이었다.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이지원은 차분하게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뭔가 찝찝한 구석을 지울 수 없었다.
‘……너무 허술하잖아.’
하얀 가면의 숭배자가 누구인가?
수십 개의 고대 왕국을 일순간 무너트리고, 단절 대륙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그걸로도 모자라 영겁의 세월을 살며 호시탐탐 다른 존재를 부활시킬 기회를 노리는 녀석이란 말이다.
그 녀석이 이런 식으로 제물을 준비한다고?
이건 완전 동네방네 떠드는 꼴이나 다름이 없었다. 우리가 인신 공양을 준비한다고 광고를 하는 수준이었다.
이지원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봤다.
‘녀석들은 시오라스의 움직임을 알고 있는 건 물론, 내가 룬스톤을 정화했던 것도 알고 있다. 은밀하게 준비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크게 일을 벌인다라…….’
훗, 이지원이 코웃음을 쳤다.
“생각대로 얌전하게 함정에 빠져 줄 것 같아?”
이건 인신 공양의 준비이자 함정이다!
자신들의 본진에서 방해가 되는 이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함정.
명분이야 충분했다. 유저들에게도 아르바의 주민들에게도 이건 보호막을 위한 마법진이란 거짓말을 쳐 뒀으니까.
‘어설프게 마법진을 훼손하다간 국가 반역죄로 잡혀 들어가기 십상이겠는걸.’
이지원은 생각을 마쳤다.
함정일 가능성이 높긴 해도 혹시 모를 가능성을 위해서라도 마법진은 제거해야 되는 것.
거인의 산맥 정복을 마치고 아르바 대륙으로 돌아가 보자고. 돌아가서 제대로 고춧가루를 뿌려 주겠다고!
“이럴 땐 또 기가 막힌 게 있거든.”
씨익,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흘린 이지원이 내려 뒀던 호밀 빵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골똘히 생각한 탓에 까맣게 잊어버린 실패작!
“버리기도 아깝고 이걸 어떻게 처리하냐.”
천상의 미각이 그립다.
우적우적, 씁쓸한 잼 맛에 오만상이 찌푸려졌다.
*
크세르니스엔 활기가 넘쳤다.
풍족하고 비옥한 논과 밭을 무상 제공. 그것도 모자라서 집까지 공짜에다가 세금도 터무니없이 낮았다. 백성들은 불평을 하려야 할 것이 없었다.
“지상이 이런 곳인 줄 알았으면 진작 나올 것 그랬다찌.”
“에이, 그래도 크세르니스처럼 살기 좋은 건 아니거든? 그나저나 진짜 대단하다, 엑스 님.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땐 진짜 쉽지 않을 결정이었을 텐데.”
“엑스찌가 확실히 대단하긴 하찌.”
그런데 그런 엑스찌가 첫 번째로 모신 주민이 바로 나다찌.
말랑은 익스플로러 길드원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이제 크세르니스가 세상에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주민들이 몰리고 외부로 활동하면서 0에 머물러 있던 명성 치도 서서히 증가하고 있었으니까.
길드원, 단우가 해맑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되면 너희들이 조금 피곤해지겠지만.”
“나도 그런 느낌이 든다찌.”
“그래도 너희가 이해해 줘. 다들 보고 싶어서 난리거든.”
동글족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몇몇 유저들은 동글족의 거취에 대해 거액의 골드 현상금까지 내건 상태였다.
하지만 익스플로러의 길드원들은 돈에 넘어가지 않는, 다들 살짝 미친 구석이 있는 유저들.
덕분에 동글족에 대한 기대감은 나날이 커져 갔다.
“크, 이 빙하는 어떻게 녹여야 할까요?”
“흠, 억지로 녹이는 건 좋지 않을 것 같군.”
“그렇다고 가만 놔두면 수십 년은 걸릴 것 같은데?”
아직 빙하가 녹지 않는 크세르니스의 외부.
빙하를 앞에 두고 아수스와 일렉스, 그리고 군스머는 제각기 의견을 내고 있었다.
그냥 화력으로 녹였다간 안에 얼어있는 귀중한 고대의 유산들이 훼손될 터.
이런 면에선 전설의 탐험가, 아수스만한 전문가도 없었다.
“짜잔, 사실 머리를 쓰면 간단한 문제였습니다.”
“오호, 그 가루는 뭔가?”
“이거요?”
가루는 페이트에선 평범한 아이템인 마나의 잿가루였다. 마나에 반응해서 타오르는 지극히 평범한 효과의 아이템.
아수스가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 주자 둘이 감탄을 뱉었다.
“오오, 과연 대륙은 다르구만.”
“무식한 녀석들이 이걸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일렉스와 군스머를 포함한 쿠룰라 전사들은 무서운 속도로 크세르니스 생활에 적응하고 있었다.
엑스의 예상대로 그들은 만렙 경비병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아무리 그래도 새로운 필드를 탐험하는 건데, 진짜 이렇게 든든했던 적이 있었나 싶습니다. 엑스, 그 녀석은 대체 어떤 인복을 가지고 있는 건지.”
퍽퍽.
달려드는 몹들을 단숨에 처리.
수많은 랭커들의 전투를 지켜본 아수스조차 감동하게 만들 정도였으니, 전투에 대해선 말 다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각자의 위치에서 충실하게 일하는 덕분에 크세르니스는 실시간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슥, 주변을 둘러본 자울이 웃음을 흘렸다.
“자네가 돌아오면 반드시 놀랄 수밖에 없겠군.”
엄청난 발전 속도에 한 번.
생각보다 적은 세율에 또 한 번.
하지만 크세르니스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크세르니스는 과거에도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땅이었으니까.
각자의 강점을 지닌 다문화 다종족이 모인 지금이라면 과거보다 더욱더 찬란하게 빛날 게 분명해 보였다.
*
그 시각, 엑스도 놀라고 있었다.
“허, 아무리 봐도 무식한 위력이네.”
턱턱!
귀청이 떨어질 듯한 소리와 함께 몸이 떨린다. 철문 너머에서 허수아비를 두드리는 거인들의 파괴력! 놀라기도 잠시, 정신을 차리고 입을 풀었다.
‘시작은 공손하게.’
웃는 얼굴에 설마 침이라도 뱉으랴.
게다가 젊은 거인들과 달리 경험이 많은 선대 거인이다.
엑스는 팔티탄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고 거인의 수련장에 당당히 들어갈 입성할 생각이었다.
마르티탄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철문이 열렸다.
“워.”
다시 봐도 정말 엄청난 규모였다.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기도 잠시 팔짱을 끼고 있던 팔티탄이 이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마르티탄에게 소리쳤다.
“마르티탄, 뭘 달고 들어온 거냐?”
스윽, 한순간 집중되는 거인들의 시선.
팔티탄이 호통을 쳤다.
“집중!”
빠악!
그러자 거인들이 다시 허수아비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팔티탄의 얼굴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거인의 수련장, 이름대로 거인이 아닌 다른 이가 들어오는 건 썩 달가운 일이 아닌 모양.
마르티탄이 속삭이듯 말했다.
“이쪽은 인간, 엑스 사부…… 아니, 엑스입니다.”
“인간이라고?”
다행히도 사부란 호칭보단 인간이라는 게 흥미를 끈 것 같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엑스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큰소리로 외쳤다.
“처음 뵙겠습니다. 엑스라고 합니다!”
“엑스, 그대가 정말 인간이라고? 크흠, 이거 안 보여서 구분을 할 수 있어야지.”
너무 작아 개미와 구분도 안 된단 소리인가!
엑스는 이번에도 도발인가 싶었지만 팔티탄은 진심이었다. 그는 자리에 쪼그려 앉더니 엑스의 전신을 유심히 살폈다.
“확실히 생김새가 조금 다르군.”
“제가 누구랑 비슷하게 생기기라도 했나요?”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그보다.”
찌릿, 팔티탄의 외눈이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인간이 어떻게 우리들의 산맥에 들어온 건지 궁금해지는군. 보는 눈이 있으니 잠깐 나가서 이야기하지. 마르티탄, 너는 여기서 기다려라.”
일단, 말이 통하면 절반은 넘어온 거다. 엑스는 자신이 단절 대륙에 진입하게 된 계기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듣고 있던 팔티탄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역시 라우니스의 초대였군. 그는 너무 물러서 탈이야.”
다행히도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진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호의적인 태도도 아니었다.
팔티탄은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엑스, 그대가 거인의 산맥에서 활동하는 것을 막을 생각은 없네. 애초에 산맥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 다른 거인들에게도 자네에 대해 설명해 두겠네. 다만.”
쿵!
우레와 같은 소리와 함께 수련장 문이 닫혔다.
“우리들의 수련장은 어중간한 각오로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네. 그대가 어떤 목적으로 수련장을 찾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미안하게 됐네.”
팔티탄은 곧바로 걸음을 돌렸다.
곧바로 동료 거인들과 엑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생각 같았다.
잠자코 있던 엑스가 얼른 입을 열었다.
“어중간한 각오가 아니라면요?”
멈칫한 팔티탄에게 말을 이었다.
“저는 기본기의 끝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자네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군.”
“마르티탄의 전투를 보고 바로 알아차렸습니다. 제가 온 곳에선 그만한 경지에 오른 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없거든요.”
기본기의 끝!
근 평생 수련장을 지킨 팔티탄이지만 자신과 같은 목표를 잡은 이는 처음 만나 보는 것 같았다.
그것도 모자라서 인간. 덕분에 팔티탄은 엑스에게 흥미가 생겼다.
“하지만 정말 자네가 해낼 수 있을까? 수련장엔 자네에게 맞는 물건들이 없네. 허수아비도 대련 인형도, 심지어는 무기도 전부 우리 거인들에게 맞춰져 있지.”
그런 거라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엑스가 자신감 넘치게 대답했다.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드리죠!”
그렇게 수련장에 재입성한 엑스는 곧바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
술렁술렁!
허공을 휘젓는 목도를 보고 거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팔티탄이 외눈을 끔뻑였다.
“대체 어떻게 된 몸뚱아리가……?”
저렇게 자그마한 육체에서 저런 완력이 뿜어져 나온단 말인가! 몇 번을 봐도, 눈을 씻고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손으로 자신보다 몇 배는 커다란 목도를 자유롭게 다루다니.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엑스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뭐, 살짝 불편하긴 하겠네.’
커도 너무 커서 허수아비를 가격할 각도가 나오질 않았다. 정타를 먹이려면 마르티탄을 구타했을 때처럼 필수적으로 땅을 박차야 했다. 물론, 몸이 힘들수록 효과도 배가 되는 법.
탁!
가볍게 땅을 박차면서 목도를 휘둘렀다.
검이라기보단 커다란 통나무를 휘두르는 기분이었지만, 그간 꾸준히 쌓아 온 기본기의 숙련도는 헛된 게 아니었다.
손끝에 선명한 감각을 쫓아 정확하게 휘둘렀다.
그러자 정말 오랜만에 변화가 찾아왔다.
정확하게 휘두르기 (89.6%) : 집중하여 적을 공격하는 법을 깨달았습니다. 휘두르기의 적중률이 30퍼센트 증가합니다.
89.5퍼센트에서 89.6퍼센트로.
단번에 0.1퍼센트나 상승한 숙련도!
추측이 확신이 되는 순간.
엑스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기본기 마스터까지 가즈아!!’
혼자 다 해 먹는 먼치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