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목적지는 아르바 대륙 중앙에 위치한 화산!
그 뜨거운 열기를 생각하니 벌써 목이 타는 것 같다. 합리화를 마친 엑스는 거리에서 구입한 50실버짜리 생과일주스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크으, 부지런히 가 보자고.”
엑스는 화산의 북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원래는 원시림을 경유하는 루트를 애용했지만, 어차피 가는 길이라면 미처 둘러보지 못한 화산의 사냥터와 식재료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멀리서부터 강렬한 열기를 뿜어내는 화산! 하지만 코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규모가 상대가 안 되네.”
거인의 산맥과 비교하면 저건 동네 뒷산에도 못 미치는 것 같았다. 단절 대륙에서 단련한 등산 실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엑스가 화산을 등반하기 시작했다. 움직인 지 얼마나 됐다고 후끈하게 몸이 달아오른다.
슥,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고 잠시 멈춰 섰다.
“후우, 의지만으로도 안되는 게 있는 법이지.”
그걸 보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천상의 요리 아니겠는가?
용암이 폭발하는 화산이라고 해도 넘치는 대지의 생명력 때문에 식생이 풍부했다.
메인 재료는 꽃가루 폭죽으로 쓰러트린 억센 불꽃 멧돼지였다.
털 대신 타오르는 불꽃으로 둘러싸인 녀석이었지만 죽고 나니 평범한 돼지고기와 다를 게 없었다.
엑스가 턱을 매만졌다.
“뭐, 그냥 먹어도 상관은 없겠지?”
덕지덕지.
엑스는 꽃가루 폭죽의 숙련도를 올리기 위해 전투에도 꾸준하게 활용하고 있었다.
그 탓에 갈무리한 돼지고기에도 반짝거리는 꽃가루가 붙어 버린 것. 물론, 꽃가루는 먹어도 인체엔 무해했다.
‘정령들 덕분에 아주 잘 알고 있지.’
아직도 달콤하면서 텁텁한 꽃가루의 맛이 입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스스스스! 그림자를 따라 움직인 엑스가 달궈진 불판에 꽃가루 묻은 돼지고기를 얹었다.
그런데 굽는 냄새가 심상치 않았다.
“……어째 심각하게 향긋한데?”
시장이 반찬이라고 굶주려서 그런 건가, 생각했지만 조금 전만 해도 생과일주스를 원샷 한 엑스였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 꽃가루였다.
행동력이 넘치는 엑스는 곧바로 움직였다. 커다란 냄비를 향해 꽃가루 폭죽을 사용, 모인 꽃가루를 손가락으로 찍어 제대로 음미했다.
띠로링!
[천상의 미각이 ‘순수한 꽃가루’에 숨겨진 맛을 찾아냈습니다!]
[최대 체력이 30포인트 증가합니다!]
[최대 마나가 30포인트 증가합니다!]
[지능이 1포인트 증가합니다!]
“……장난 아닌데, 이거?!”
퉷퉷, 꽃가루를 뱉는 데 급급했던 과거엔 느낄 수 없던 맛!
이건 천연 향신료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향이었다. 입안에서 향긋함이 폭죽처럼 터지는 게 꽃가루 폭죽이란 스킬 명을 이제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글지글!
고기의 잡내를 완벽하게 잡는 것은 기본, 향기까지 더 할 수 있다라…….
꽃가루 폭죽의 활용도가 한 가지 더 늘어난 셈이었다. 그럼에도 엑스의 호기심은 여전했다.
‘잠깐, 혹시 춤추는 줄기도 먹을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간단했다.
둘 다 변칙적인 효과가 있는 자연 마법이니까. 실제로 춤추는 줄기를 사용할 때마다 입맛을 다시기도 했었고. 말했다시피 엑스의 행동력은 최고.
“춤추는 줄기.”
콰드드득.
대지를 뚫고 솟아오른 줄기가 오늘따라 맛있어 보인다.
샥, 식칼로 일부분을 잘라 그대로 입에 넣었다. 아삭아삭, 입안 가득 퍼지는 신선한 녹즙과 귓가에 울리는 알림.
띠로링!
‘자연 마법은 식용이 가능하다.’
머릿속에 메모.
사장된 자연 마법에 대한 사실을 하나 밝혀낸 엑스였다.
*
“도착이다.”
그 후로도 한나절 정도 등산한 끝에 울리크의 대장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깡깡! 시끄러운 망치질 소리가 기대감을 증폭시킨다. 엑스는 두둑한 인벤토리를 흐뭇하게 매만졌다.
‘암철을 보고 뭐 이런 걸로 호들갑을 떠냐고 했었겠다?’
뒤끝이 오래가는 엑스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쉽게 볼 수 없는 재료들을 잔뜩 들고 왔으니, 울리크도 자만할 수 없을 터!
“아니, 이게 누구야!”
“간만입니다, 울리크 씨.”
“하하, 꿈자리가 좋더니 자네가 찾아올 줄은 몰랐군.”
과연, 화산 더덕주로 나눈 정은 끈끈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둘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문득 울리크가 눈을 빛내며 물어왔다.
“그렇게 바쁘신 양반이 이런 촌구석에 사는 나를 찾아왔다면 목적은 하나뿐이겠지? 어디, 그래서 쓸만한 재료들은 가지고 왔는가?”
“물론이죠. 아주 잔뜩 들고 왔습니다.”
“좋아, 어서 꺼내 보게!”
화산만큼이나 호쾌한 울리크의 반응.
엑스는 인벤토리에서 하나둘 모아둔 아이템들을 늘어놓았다.
시작은 가볍게 크라켄을 잡으며 획득한 크라켄의 동공과 채찍이었다.
차곡차곡, 엑스가 방문 판매업자처럼 아이템과 효과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건 크라켄의 동공이라 하는 건데, 아직도 굉장한 마력을 품고 있답니다. 약점을 볼 수 있는 특수 효과가 있는데 이게 제작자의 숙련도에 따라 변화한다네요?”
-심연 여왕의 채찍 (유니크)
심연의 지배자, 크라켄을 형상화한 채찍.
변칙적이라 다루기가 상당히 까다롭다.
효과가 봉인되어있다.
제한 : 레벨 850↑, 지능 4,000↑, 힘 1,500↑
공격력 : +800
힘 : +300
지능 : +500
특수 효과 : ?
“그리고 이건 크라켄 모양을 따서 만든 채찍입니다. 마음 같아선 바로 사용하고 싶지만, 보다시피 굉장히 높은 제한이 걸려 있어서요.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해서 울리크 님에게 가져왔습니다.”
속사포 같은 비즈니스 말투!
거기에 정신이라도 홀렸는지 울리크는 잠깐 당황한 눈치였다. 확실히 암철 때와는 다른 반응. 울리크가 크라켄의 동공을 살피더니 중얼거렸다.
“허어, 역시 전설의 괴수 크라켄을 말하는 게 맞았군.”
“네, 굉장히 크긴 한데 그것뿐이더라고요. 물렁물렁해서 때리는 맛도 안 나고. 아, 물론 생긴 것보단 훨씬 맛있었습니다.”
“뭐, 뭐라고?”
“이럴 때가 아니지. 그다음으로 보여드릴 건…….”
울리크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무려 전설의 괴수다.
전설이란 명칭이 붙은 녀석들은 하나하나가 대륙을 뒤흔들만한 힘을 가지고 있단 말이다.
하지만 엑스는 전설의 괴수 크라켄을 어디 바닷속 문어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하고 있었다.
울리크가 여전히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엑스, 자네 대체 어떤 모험을 하고 다닌 건가?”
엑스가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대꾸했다.
“뭐, 보시다시피 여기 반짝거리는 가죽을 가진 이무기도 때려잡았고, 화산보다 훨씬 큰 뱀도 한 마리 잡았고, 머리는 생선에 날개가 달린…… 어쨌든 괴상하게 생긴 괴물도 잡았고.”
툭툭. 모험담과 함께 꺼내지는 무지막지한 재료들!
자신의 실력을 인간계 최강이라 자부하는 울리크로서도 엄두가 나질 않는 것들이 가득했다.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은 울리크가 탄식을 뱉었다.
“비범하다 생각은 했지만, 자네는 정말이지…….”
그러면서도 울리크는 꼼꼼하게 재료들을 살피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울리크가 결론을 내놨다.
척, 울리크는 손가락으로 몇몇 재료들을 가리켰다.
“솔직하게 말하겠네. 이 중에서 내가 다룰 수 있는 재료들은 몇 가지 되지 않네. 특수 제련도 마찬가지. 채찍을 제외한 나머지 장비들은 만질 엄두가 나질 않는군.”
“엥? 어떤 재료도 자신 있으시다면서요.”
“그건 그렇지만, 이것들은 이 세상 재료들이 아니지 않은가? 장담할 수 있네. 아르바 대륙에 이것들을 제대로 활용해 장비를 제작할 수 있는 대장장이는 없네.”
이럴 수가!
엑스는 터져 나오려는 탄식을 억눌렀다. 울리크도 손을 쓸 수 없을 줄이야.
하긴 단절 대륙의 재료들은 울리크라고 해도 다뤄 본 적이 없을 터. 울리크가 선택한 재료는 총 세 가지였다.
“이 나무 그늘 산호초론 반지를 만들고, 보다 급이 떨어져 보이는 이무기 가죽과 비늘로는 허리띠를 만들어 주지. 특수 제련은 시도는 할 수 있지만, 안 하느니만 못할 걸세. 부끄럽지만 이게 내 최선일세.”
나무 그늘 산호초는 정령의 숲에서 얻은 재료였고, 이무기 가죽과 비늘은 아락타시스 것이 아닌, 마찬가지로 정령의 숲에서 때려잡은 이무기의 것이었다.
아쉽지만 별수 있으랴.
엑스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부끄러워하실 것까진 없으시죠. 그래도 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걸 받게.”
“?”
난데없이 울리크가 자신의 품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작은 쇳조각을 꺼냈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냥 쇳조각은 아니었다.
-제자의 증표 (노말)
스승과의 인연을 나타낸 상징물.
투박하지만 단단하다.
아무런 효과도 없는 망치 모형의 아이템.
엑스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울리크가 피식 웃었다.
“자네가 다녀왔다는 그 단절 대륙이, 아무리 봐도 내 스승님의 고향과 같은 곳 같아서 말이야. 그땐 스승님의 허풍인 줄 알았는데 이걸 보니 확신이 생겼다네.”
잠깐, 이거 왠지 범상치 않은 연줄 같다.
울리크를 인간계 최고의 대장장이로 키워 낸 스승, 그것도 모자라서 그는 단절 대륙에서 태어났단다. 그렇다면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
순간, 엑스의 동공이 흔들렸다.
‘……드, 드워프!’
손재주의 끝판왕!
두드리기만 해도 유니크, 전설 등급 아이템을 마구 찍어 낸다는 드워프들.
울리크의 말이 사실이라면 단절 대륙엔 드워프의 땅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었다.
꿀꺽, 엑스가 마른침을 삼키고 확인 차 물었다.
“혹시 그 스승님의 특징을 알 수 있을까요?”
“후후, 아주 개성이 넘치시는 분이지. 허리 정도는 올까 싶을 정도로 짧은 키에 고집 센 성격까지. 하지만 의외로 놀려 먹기 쉬운 구석이 있달까?”
“역시.”
“그래도 실력으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곳에 오른 분이라네. 이런 무지막지한 재료들도 충분히 다룰 수 있으실 걸세.”
그렇다.
보나 마나 드워프다.
불끈, 새로운 활로에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엑스는 울리크가 건넨 증표를 잘 챙겼다.
이 작은 쇳조각이 여기 놓인 재료들을 막강한 장비로 환골탈태시켜 줄 게 분명했으니까.
그나저나 한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엑스는 꺼낸 아이템들을 다시 챙기며 물었다.
“근데 울리크 씨는 스승님과 어떻게 만나시게 된 건가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단절 대륙에 진입하신 건 아닐 테고.”
“내가 산적 시절, 아니 철없을 적 활동하던 곳이 파트란 숲이었네. 스승님과는 그곳에서 처음 만났었네.”
“아, 파트란 숲!”
그렇다면 납득할 수 있었다.
파트란 숲의 관리자는 단절 대륙과 아르바 대륙을 왕래할 수 있는 드니스였으니까.
모종의 이유로, 울리크의 스승이 드니스와 함께 아르바 대륙에 들렀을 가능성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 스승님의 이름이라도 들어 둬야 할 것 같았다.
“울리크 씨, 스승님 성함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만드리온이라네.”
“만드리온이라…….”
뭐든 잘 만들 것 같은 이름부터 대장장이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이름까지 알았으니 찾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걸로 아르바 대륙에서의 볼일은 끝난 셈.
“이거 또 한동안 얼굴 보기 힘들겠군.”
“하하, 제가 워낙 할 일이 많아서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래도 조만간 들르겠습니다. 혹시라도 만드리온 님을 만나게 되면 안부 꼭 전하겠습니다.”
“그래, 자네가 맡긴 재료들은 책임을 지고 명품으로 만들어 보겠네. 이래 봬도 장신구는 스승님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만들 수 있거든.”
훈훈한 인사 끝.
다시 단절 대륙으로!
엑스는 곧바로 굳혀진 세계수의 이파리를 꺼내 들었다.
은은한 빛이 엑스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점점 강렬해지는 빛 속에서 엑스는 새로운 목표를 되새겼다.
‘기다리고 계십쇼. 바로 찾아가겠습니다. 드워프, 아니, 만드리온 님!’
혼자 다 해 먹는 먼치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