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서유정은 자신의 방, 책상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깜박, 노트북에 떠오른 빈 문서는 좀처럼 채워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엑스 님, 과거엔 어땠을까.”
오늘.
이현서와 나눴던 대화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현재 엑스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일까, 좀처럼 린 온라인 때의 엑스가 상상이 되질 않았다.
문득, 서유정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 말씀대로, 변했다고 해도 그대로인 부분이 훨씬 많은 것 같네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누나는 엄마나 다름없다고 하더니, 이현서는 이지원의 마음을 속속들이 꿰고 있는 것 같았다.
엑스에게 저런 누나가 있다니,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됐다. 그러면서도 뭔가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암만 그래도 상처가 크셨겠죠?”
바탕화면을 장식한 엑스와 용용이!
이내, 물끄러미 화면을 바라보던 서유정이 고개를 저었다. 문서 작성 프로그램은 끄고 노트북을 덮었다.
사실 뭐라도 적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현서와의 대화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있었으니까.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진실을 알게 됐으니까.
하지만 서유정은 당분간 가슴에 묻어두자고 결심했다.
“그 성격에 어련히 준비하고 계시지 않겠어?”
손해 보고는 못사는 성격이자, 되로 받으면 말로 되돌려 주는 성격!
엑스라면 분명 차근차근 복수를 준비하고 있을 것 같았다.
그 복수의 손맛을 자신이 가로챌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미소를 흘린 서유정이 침대 속으로 쏙, 몸을 파묻었다.
‘이제 와서 취재 그만둔다고 하면 난리를 치실 텐데.’
불같이 화를 내는 나갑수의 얼굴이 떠오른다. 서유정은 될 대로 돼라지, 생각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하지만 다음 날, 그녀가 나갑수에게 깨지는 일은 없었다.
“대체 내가 뭘 보고 있는 건지…….”
사무실에 모인 이들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페이트 하이라이트, 이번에도 당당하게 1위를 장식한 엑스. 일명 천상계 플레이어라 불리는 엑스가 정체 모를 ‘검은 촉수’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으니까.
뒤늦게 확인한 서유정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선배, 저기 신대륙이죠?”
“그렇겠지. 저렇게 거대한 촉수가 등장했다면 아르바 대륙 전역이 난리도 아니었을 테니까.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거야, 저 녀석?”
“돌겠네, 대체 레벨이 몇이야 저거? 방금도 혼신의 일격을 별 피해 없이 막아 냈는데요?”
1천 레벨이 넘는 네임드 몬스터를 일격에 보낸 엑스의 투창이 가뿐하게 막혀 버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피해를 받았지만 빠른 속도로 회복하고 있었다!
모인 이들은 손에 땀을 쥐기 시작했다.
누군가 말했다.
“진짜 월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아르바 대륙에선 검은 군단이 설치질 않나. 새롭게 발견한 신대륙에선 거대 촉수 덩어리가 나타나질 않나.”
“어라? 듣고 보니까 둘이 뭔가 비슷하지 않아요?”
“진짜네. 둘이 뭔가 생긴 게 미묘하게 닮았잖아.”
웅성웅성.
직원들은 갖가지 추측들을 내놨다. 다른 시청자들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검은 군단과 저 촉수 덩어리는 뭔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 확신이 서자 누군가 혀를 찼다.
“하, 대륙과 대륙을 잇는 초대형 퀘스트 앞에선 엑스도 별수 없구나. 아까부터 몸도 말이 아닌 것 같고.”
팬심이 넘치는 서유정도 뭐라 반박할 순 없었다. 엑스의 패색이 짙어 보였으니까.
절뚝거리며 적에게서 도망치는 엑스의 모습은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전 세계 수십억 시청자들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카이무스가 검은 군단에게 무너진 것처럼, 엑스도 촉수 덩어리에 무너지겠다고.
하지만 반전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어둠이 자욱한 화면에서 빛이 넘실거린다.
“!”
걷잡을 수 없는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그야말로 여신!
그녀는 사방으로 성스러운 존재감을 발산했다. 촉수 덩어리에 지지 않는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나갑수가 말을 더듬었다.
“누, 누구야 저거?”
“일단 유저는 아닌 것 같습니다!”
“뭔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저런 능력과 미모를 가진 유저가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벌써 화제가 됐었겠지. 저런 NPC가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거냐고, 내 말은!”
정체를 알 수 없는 NPC의 출현.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어도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밀리기만 하던 엑스에게 승산이 생겼다는 것을!
여인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하자 촉수 덩어리의 회복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플레이어의 저력을 보여 주자!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한마음으로 엑스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여인의 등장으로 엑스도 체력을 회복한 모양.
창을 내던지고, 검을 휘두르고, 스킬을 난사하고, 방패로 막아 가며 촉수에게 응전했다.
“이야, 처음 보는 스킬이 대체 몇 개야 이거?! 마법 사용에도 능숙해 보이고…… 엑스, 진짜 무섭네요. 그동안은 제대로 싸운 것도 아니란 말이잖아요?”
서서히 드러나는 엑스의 전력!
그러나 촉수 덩어리는 만만치 않았다. 전보다 광적으로 날뛰는 촉수들.
그것도 모자라서 촉수의 끄트머리에서 화면이 일그러질 정도로 강한 에너지가 포착됐다.
저절로 터져 나오는 짙은 탄식.
“그래도 역부족인가?”
아무리 봐도 피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이내, 엑스를 향해 뻗어져 나가는 광선.
모두가 분전 끝 엑스의 패배를 예상한 그 순간, 예기치 못한 음성이 전 세계로 송출됐다.
-나약한 주인을 구하러 왔다뀨!
“요, 용용아?”
반전에 반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
페이트 하이라이트의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엑스, 쩔지 않냐?”
학교, 직장, 가정, 어디에서도 대화의 시작은 엑스였다.
그럴 만도 했다.
엑스가 보여 준 하이라이트에선 무엇 하나 놓칠 포인트가 없었으니까!
“근접전이면 근접전, 마법이면 마법, 게다가 빠른 상황 판단까지. 대체 부족한 게 뭐야? 파죽지세 때보다 발전했잖아.”
엑스가 하이라이트 속에 남긴 전투는 유저들 사이에서 큰 화제이자 연구 대상이 됐다.
공중을 걷는 듣도 보도 못한 스킬부터, 가장 기본적인 매직 에로우, 누구에게도 밀릴 것 같지 않은 기본기의 활용까지.
“난 그것보다 그 여자가 누군지 궁금해 미치겠다. 사제들 말대로 진짜 여신 아닐까? 생긴 게 새크리디아의 초상화랑 똑같이 생겼더라고.”
여신, 새크리디아!
그녀가 보여 준 존재감 또한 실로 어마어마했다. 생기를 잃은 땅을 되살리는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성녀의 재림을 보는 것 같았다. 이미 몇몇 커뮤니티에선 그녀의 팬클럽이 생길 정도.
“그래도 용용이의 옹알이를 따라올 순 없었지.”
하지만 용용이를 따라올 순 없었으니! 궁지에 몰린 엑스를 구하러 온 용용이의 모습은 영웅 그 자체였다.
톡, 꼬리로 광선을 가뿐하게 튕겨 내는 장면에서 전 세계는 경악에 경악을 거듭했다.
용용이의 합류로 전세는 완벽하게 역전됐다. 엑스와 용용이의 반격 덕분에 여인도 기도에 집중할 수 있었다.
결국, 셋은 승리를 쟁취했다.
“진짜 다시 봐도 믿을 수 없는 하이라이트야. 역대급 스케일에 역대급 짜릿함!”
단 셋이서 대륙을 뒤흔들 능력을 가진 촉수 덩어리를 쓰러트린 것이었다.
그러니까 세상은 기다리고 있었다. 불과 하루 만에 수북하게 쌓인 떡밥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내, 엑스를!
“예상보다 빨리 돌아왔지만.”
내가 돌아왔다!
엑스는 라우니스를 통해 아르바 대륙 동쪽, 파트란 숲으로 워프했다.
달라스는 파트란 숲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라우니스에겐 사실대로 상황을 전달했다. 미식왕의 이름을 대며 자신을 찾아온 동대륙의 손님이 있다고. 인연이 있는 시오라스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었다.
“미식왕, 동대륙에 있던 건가. 그래, 단절 대륙에 대한 건 잠시 잊고 다녀오게. 그리고 시오라스에 대한 걱정도 덜 게나. 그가 누구에게 얌전히 당할 인물은 아니니까 말이야.”
그러면서 라우니스는 한 마디를 덧붙였었다.
“자네가 돌아오면 미식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겠네.”
미식왕에 대한 정보!
미식왕, 아니, 그 사기꾼에 대한 정보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역사에서 완벽하게 부정됐을 뿐만 아니라, 그를 알고 있는 이들 대다수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파밧.
부지런히 걸어 나가던 엑스가 입을 삐죽였다.
“뭐, 보나 마나 단절 대륙에서도 공수표를 남발하셨겠지.”
세살 버릇이 여든 간다고 말이야.
그 허언증은 아직 고치지 못한 모양. 그나저나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미식왕, 그 작자가 동대륙의 여인에게 어떤 헛바람을 불어넣었을까.
‘말을 들어보면 보통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달라스가 지극정성으로 돌본 덕분에 여인은 며칠 전에 정신을 차렸다고 했다.
하지만 생명을 구해 준 달라스와도 쉽게 말을 섞지 않고, 마을을 떠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고 했단다.
“하긴 미식왕의 말만 듣고 동대륙에서 건너온 거니까.”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아르바 대륙을 밟은 것일 터. 굉장히 간절한 목적이 있을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개코, 엑스가 퀘스트의 냄새를 포착하지 못할 리 없었다.
여인을 통해 동대륙 진출의 활로가 열리는 것인가? 입가에 군침이 맴돌았다.
엑스는 차분하게 머릿속을 정리했다.
‘단절 대륙 정복 퀘스트도 당장은 급할 게 없어졌지.’
난이도 SS랭크, 단절 대륙 정복 퀘스트! 사실상 이미 클리어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라우니스는 엘프를 제외한 모든 종족이 화합을 약속했다고 했으니까.
굳이 단절 대륙을 힘으로 억누르지 않아도, 아르바 대륙과의 연합이 가능해진 것.
다만, 문제는 말했다시피 엘프였다.
‘엘프만 어떻게 설득하면 되는데.’
아는 게 있어야지 아부를 떠는 것 아니겠는가?
게다가 엘프는 만날 수 있다고 만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먹고 마시지 않아도 죽지 않으니까, 엘프들은 자신들의 영토에서 나올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정령들에게도, 단절 대륙에서 엘프를 만나는 건 그야말로 사막에서 바늘 찾기란다.
“이제 보니까 급할 게 없어진 게 아니라 할 게 없어진 거잖아.”
엑스는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기도 잠시, 고개를 저었다. 어쨌거나 당장은 엘프를 찾아내고 설득할 방도가 없었다.
그러니 이럴 때 쌓인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일단, 얘기를 들어 보고 결정하자고.”
동대륙은 말할 것도 없고, 아르바 대륙에서도 할 일이 한가득이었다.
이내, 작은 마을 입구에서 장난을 치는 꼬마들이 보였다. 시골 꼬맹이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얘들아, 달라스 님이 어디 계신지 알고 있니?”
하지만 그런 장난꾸러기들도 홀리게 만드는 게 바로 특제 막대 사탕!
그 어떤 순간에서도, 꾸준하게 스텟을 보충하기 위해 직접 만든 간식이었다.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한 재료로 만들긴 했지만, 달달한 맛이 변할 일은 없었다.
“아저씨는 저기 저 무너진 성당에 계세요!”
달라스는 아직 애를 먹고 있는 마을의 악동들. 녀석들을 간단하게 구슬린 엑스는 달라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살짝 기척을 줄이고 접근하자 달라스의 신세 한탄이 들려왔다.
“아아, 나만 멈춰 있는 것 같은 이 기분.”
“간만입니다. 달라스 님.”
“히익, 언제 오셨어요?!”
바닥에 대자로 뻗어 흥얼거리던 달라스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만에 봐서 그런가, 서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특히 새크리디아에 대해선 궁금한 게 한 트럭이었다.
“그러니까 엑스 님의 희생에 감동해서 축복의 효과가 발동됐고, 새크리디아 님이 강림하셨다고요? 하아, 역시 불길한 예감이 맞았어.”
달라스는 앞길이 막막해졌다. 아직도 걸어야 할 희생의 길이 한참 남아있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둘은 이야기를 짧게 줄이고 여인을 찾아갔다.
끼익, 문이 열리자 잔뜩 경계한 듯 몸을 웅크린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엑스라고 합니다.”
“!”
“미식왕 님의 소개로 저를 찾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엑스의 인사에 여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식왕의 알려 준 인상착의와 똑같은 사내다.
드디어 찾았다.
그녀의 눈가엔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눈물이 맺혔다.
그녀의 시선이 뒤에 있던 달라스를 향했다.
달라스는 엑스를 보며 눈치를 키웠다.
“그럼 저는 이만.”
낄 땐 끼고 빠질 땐 빠지자.
달라스가 나가자 여인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엑스 님, 부디 저희 황녀님을……!”
혼자 다 해 먹는 먼치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