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황녀!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단어가 아닐 수 없었다. 동대륙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순 없었지만, 일단 높으신 분들과 관련된 사건의 냄새가 제대로 풍겨 왔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여인의 말에 엑스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네?”
“저희가 믿을 것은 엑스 님뿐입니다.”
“아니, 잠시만요. 일단 고개부터 드시고요.”
엑스의 만류에도 여인은 좀처럼 고개를 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편으론 저런 저자세가 이해가 되기도 했다.
이건 웬만큼 정신이 나간 놈이 아니고서야 받아들일 부탁이 아니었으니까!
‘한마디로 역적이 되라는 거잖아?’
황녀를 도와 제국을 무너트려 달라!
안 그래도 아르바 왕국에 반기를 들어야 할 엑스였다. 한데 그것도 모자라, 서열 최하위 황녀를 도와 동대륙의 황제를 치란다.
엑스는 속으로 탄식을 뱉었다.
‘산 넘어 산이구나.’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손에 의해 쓰이는 법.
황녀를 도와 반란에 성공한다면 동대륙에 크게 한 자리를 해먹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속에서 흑심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선 정보 수집이 우선일 터.
엑스는 본격적으로 대화에 돌입했다.
“제 이름은 서지하라고 합니다. 보다시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황녀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엑스 님을 믿고, 현재 저희 화火 제국의 상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화 제국!
오랜 전쟁 끝에 동대륙을 일통한 국가란다. 전쟁이 사라져서 백성들이 살기엔 부족함이 없었지만,
문제는 언제나 웃대가리들이었다. 화 제국의 경우엔 그 정도가 심해 황제부터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엑스가 경악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 부인이 스물에 자식이 서른인 건 둘째 치더라도. 그만큼 낳아 놨으면 책임이라도 져야지, 오히려 싸움을 부추기고 있다고요?”
황위 계승 전쟁!
말만 들어 보면 싸움 수준이 아니었다. 배가 다르다고 해도 형제, 자매들을 잔혹하게 죽이다니!
서지하는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모두가 폐하의 결정에 의문을 가지기도 잠시, 피비린내가 풍겨오기 시작했습니다. 숙청은 당연하게도 최하위 서열부터 시작됐지요.”
서지하가 모시는 황녀의 나이는 열여섯으로, 서열로 따지면 11번째였다고 했다.
그런 황녀가 서열 최하위가 됐다는 건…… 그간 열에 가까운 황자, 황녀들이 숙청을 당했단 소리였다!
엑스의 낯빛이 심각해졌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니네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반란을 계획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한 마디로 황제가 만악의 근원이었다.
엑스는 겪어 본 게 있었기에 쓰레기 같은 놈들의 속을 잘 알고 있었다.
‘누구 한 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암투는 계속될 터.’
생명, 그것도 자식의 생명을 유희로 생각하는 작자가 얌전히 황제의 자리를 물려준다는 법도 없었다.
과연, 황녀는 최선의 방법을 선택한 것 같았다.
“그래서 황녀님은 지금 안전하신 건가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걱정이 되어 미치겠습니다. 하지만 황녀님이 제게 맡기신 일은 목숨이 끊기는 한이 있더라도 지키고 싶습니다.”
서지하의 눈가엔 비장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부탁을 거절한다면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 것만 같은 기세.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었다.
“그 자식, 아니, 미식왕은 어쩌다 만나신 겁니까?”
“그분께서 황녀님의 목숨을 한 번 살려 주셨었죠.”
“오호라.”
현재로선 누구와도 접점을 만들지 않던 미식왕이 황녀의 목숨을 구했다라…… 갖가지 추측이 떠오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미식왕은 자신의 후계자가 이 사건을 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는 것!
‘그 속내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엑스가 결단을 내렸다.
“좋습니다. 황녀님을 돕겠습니다.”
최하위 황녀를 도와 화 제국의 황체를 치겠노라!
후계자이자 탐욕 덩어리, 엑스의 입장에선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일단 미식왕에 관련된 사건인 데다가, 권선징악의 실천, 게다가 동대륙에서 크게 한자리를 해 먹을 수 있는 가능성까지!
‘성공만 하면 아주 그냥 페이트 인생 펴는 거지.’
그 음흉한 생각을 모르는 서지하는 뚝뚝 눈물을 흘렸다.
“정말,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녀님을 대신해 이 은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겠습니다. 그렇다면 한시라도 빨리 황녀님이 계신 동대륙으로…….”
띠로링!
잠잠하던 알림이 울렸다.
<동대륙으로!>
미지의 대륙, 동대륙.
그곳으로 향하는 항로를 찾아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반의 준비와 고통스러운 항해를 이겨 내야만, 동대륙에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과연, 당신에게 동대륙을 밟을 자격이 있을까요?
조건 : 동대륙 발견
난이도 : A+
보상 : 명성 15,000포인트, 칭호, 동대륙의 환영
시작된 퀘스트!
난이도는 무려 A+랭크였지만 납득할 수 있었다. 동대륙을 발견한다는 건, 현재 아르바 대륙의 역사를 바꿀 일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엑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시작은 날로 먹는 퀘스트인가?’
아르바 대륙에서도 동대륙에 대한 정보는 찾기 힘들다.
동대륙으로 통하는 항로를 찾는 건 더더욱 힘들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터.
하지만 이쪽엔 바다를 건너온 경험자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싸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서지하가 애써 말을 이었다.
“……제, 제가 이곳에 어떻게 도착했었죠?”
“바닷가에 쓸려 내려오신 걸 마을 꼬마가 발견했다고…… 설마 동대륙에서 아르바 대륙에 도착하기까지의 항해를 기억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배가 난파된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론…….”
그녀의 대답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래도 시작은 쉽게 가려나 했더니, 맨땅부터 시작이라니.
별수 있을까, 서지하의 말에 따르면 황녀의 목숨은 찰나의 순간마다 위험한 상황.
“역시 평소 인맥 관리를 제대로 해야지.”
하나, 조급해선 일을 망치는 법이다. 게다가 엑스는 항해나 모험에 관해선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을 알고 있었다.
그 믿는 구석에게 곧바로 귓속말을 날렸다.
*
크세르니스!
아수스가 입맛을 다셨다.
“보면 볼수록 구미가 당기는 도시란 말이지.”
미친 탐험가, 아수스의 구미가 당긴다는 건 객관적으로 희소식이 아니었다.
나아가도 나아가도, 끊이질 않는 과거의 유물과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몬스터들!
톡톡, 아수스가 빙결된 몬스터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지금이야 팔자 좋게 구경하고 있지만, 가면 갈수록 개체 수가 많아지고 있어. 이게 한날한시에 깨어난다고 생각하면…….’
과거의 영토를 수복하려면 빙결된 몬스터를 쓰러트려야 한다!
그 적정선을 찾는 게 보통 골치가 아픈 게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크세르니스의 영주께선 기가 막히게 간단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턱을 매만지던 아수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유저들은 새로운 몬스터라면 사족을 못 쓰지.”
유저들을 이용해 먹겠노라!
엑스는 깨어날 몬스터들을 유저들을 이용해 처리하겠다고 말했었다.
크세르니스의 노동력을 아끼면서 몬스터는 처리하고, 사냥에 지친 유저들에게 숙식을 비롯한 각종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었으니까.
“나도 그렇게 영악하게 살아야 하는데 말이야.”
최근 들어 남 좋은 일만 하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피식, 하지만 자신이 언제부터 이해득실을 따지는 인간이었단 말인가?
흥미에 따라 움직이는 게 바로 아수스와 익스플로러였고, 그들은 엑스가 보여 주는 플레이에 매료된 상태였다.
“슬슬 근처 마을에 소문이 퍼지고 있던데?”
“땅굴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유저들도 있었어.”
“사실 나도 어제 모르는 사람이랑 대화를 했다찌!”
크세르니스도 세상 밖으로 존재감을 발산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먼저 알아차리는 건 페이트 월드의 주인, NPC들이겠지만 유저들에게도 빠른 속도로 정보가 확산되리라.
저벅, 자울의 곁에선 아수스가 웃으며 말했다.
“욕심쟁이 영주님께서 원하시는 세금 파티가 시작되는 거죠.”
“세금 파티는 무슨. 과욕은 화를 부르는 법이지.”
“어라? 이거, 영주님도 양반은 못 되시네.”
엑스에게서 도착한 귓속말!
엑스가 먼저 귓속말을 해 오는 경우는 하나뿐, 바로 부탁이 있을 때뿐이었다.
사실 아수스도 묻게 싶은 게 많았다. 엑스가 보여 준 페이트 하이라이트의 임팩트가 너무나도 컸으니까.
“!”
하지만 이번 부탁은, 그 궁금증을 잊게 만들 정도로 스케일이 컸다.
그리고 미친 탐험가의 흥미를 한껏 자극했다. 아수스의 입꼬리가 한껏 위로 올라갔다.
“좋았어, 간만에 모험이로구나.”
*
동대륙을 향한 항해!
항해란 자고로 골드를 먹는 괴물이었다. 함선만 해도 적게는 수만 골드, 많게는 수십만 골드의 가격을 자랑했으니까. 식량이나 부가적인 소모품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개처럼 벌어 둔 보람이 있었군.’
눈물이 앞을 가려도, 쓸 땐 정승처럼 써야 하는 법.
특히나 비즈니스 관계이자 동맹 관계인 익스플로러에겐 섭섭하지 않게 챙겨 줄 생각이었다.
아수스는 못 해도 보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었다.
‘뭐, 보름이면 충분히 끝낼 수 있겠지?’
바로 리그리앙을 찾아가자.
엑스는 동대륙에 들르기 전, 리그리앙에게 미식왕의 레시피를 전수받을 생각이었다.
전설의 동물, 피닉스를 주재료로 만드는 초호화 레시피!
그러니까 엑스는 피닉스를 보름 만에 때려잡겠다고 결심한 것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경악을 금치 못할 목표였지만, 엑스에겐 자신감이 넘쳤다.
한편으론 궁금증도 들었다.
“흐음, 투창을 버틸 순 있으려나?”
고귀한 피닉스를 닭처럼 보는 엑스!
그런 엑스의 뒤를 남녀 한 쌍이 졸졸 뒤따르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달라스와 동대륙의 여인, 서지하였다.
그토록 애타게 찾던 엑스와 만났으니, 서지하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엑스 님의 뒤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그림자에서 황녀를 모실 정도의 위치에 있었던 서지하는 무예에 대한 조예가 깊어 보였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엑스는 그녀가 뿜는 기의 흐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굉장히 예리한 기의 운용이네.’
그녀의 주먹이 마치 날카로운 쇠붙이처럼 느껴졌다.
새로운 동대륙의 스킬!
관심이 가는 게 당연했다. 주먹을 무기처럼 활용하는 게 강자의 격투와 조합하면 뛰어난 상승효과를 낼 것 같았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제대로 전수해 주시죠.”
“잘난 건 아니지만, 최선을 다해 알려드리겠습니다.”
기를 느낄 수 없는 달라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먹 쥐는 법을 알려 준다는 건가?’
달라스는 수행해야 할 퀘스트가 있었지만, 퀘스트 때문에 이런 모험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엑스의 제안도 있었고.
‘뛰어난 사제는 언제나 큰 힘이 되지.’
특히나 소규모 전투에서는 사제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
빈사 상태를 면할 수 있게 만드는 소량의 회복 마법만 더해져도, 전황은 수시로 뒤바뀌곤 하니까.
엑스는 결심을 마쳤을 때부터, 동대륙에서의 전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서지하의 말대로면 황녀가 보유한 병력은 불과 5백이 되지 못했다. 서지하와 같은 특기 전력은 대략 서른 명 정도.
자신과 익스플로러가 더해진다고 해도 수적으로는 확실히 열세였다. 아수스처럼 믿을 수 있는 전력 하나가 간절한 상황.
그럼에도 이길 자신은 있었지만, 자만은 금물이었다.
‘최소한의 피해로, 압도적인 승리를.’
그리고 최대한의 보상을!
그것이 엑스가 추구하는 전투였다.
머리를 굴리며 나아가자 슬슬 요란한 소리가 들려온다. 화기애애, 깨소금이 쏟아지는 게 언제 들어도 참 듣기 싫은 소리다.
아수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엑스 님, 여기 그 라블리나 아닌가요?”
이런 휴양지에 무슨 볼일이 있단 말인가? 의아한 눈초리를 보내오는 달라스와 서지하.
둘을 뒤로한 채 엑스는 인벤토리에서 낚싯대를 꺼내 들었다. 기억을 되살리자 벌써 입안이 따끔한 기분.
“뭐, 좋으나 싫으나 숨겨진 장소로 통하는 열쇠를 낚아야 되거든요.”
혼자 다 해 먹는 먼치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