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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다해먹는 먼치킨-220화 (220/391)

220화

승부는 싱거웠다.

하긴 불완전해도 부활한 다른 존재를 쓰러트렸던 경험이 있었으니까.

‘마왕쯤이야.’

믿지 못한다는 얼빠진 표정과 함께 회색빛으로 물드는 카이무스가 보인다.

사망으로 인한 강제 로그아웃.

엑스가 입을 열었다.

“진짜 마왕이었네, 이 새끼.”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카이무스와 전투를 벌였지만 PK가 시작된다는 알림이 울리지 않았으니까.

카이무스가 사망했음에도 악명이나 명성에 변화도 없었다.

대신 전혀 다른 종류의 알림이 울렸다.

띠로링!

[천계가 당신의 행보에 경악을 표합니다!]

[희생의 신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립니다!]

[전쟁의 신이 눈을 부릅뜹니다!]

[운명의 신이 고개를 돌립니다!]

[광대의 신이 시시한 전개에 하품을 뱉습니다!]

“운명의 신이 고개를 돌린다라…….”

천계의 관심엔 익숙해진 참이었다.

단절 대륙에 이어 아르바 대륙의 마왕을 쓰러트렸으니 그들이 경악을 표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전쟁의 신이 누구일까, 궁금해졌지만 역시나 신경이 쓰이는 건 운명의 신이었다.

“뭐, 호감도가 더 떨어졌을 수도 있겠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운명의 신 하나가 적대를 보인다고 한들,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싶었다.

찝찝하긴 해도 호감도를 올릴 방도가 보이질 않으니, 그냥 대담하게 마음을 먹는 엑스였다.

띠로링!

[위대한 업적!]

[마왕을 처치했습니다!]

[당신의 업적에 ‘아르바 대륙’이 반응합니다!]

[아르바 대륙의 ‘축제’가 앞당겨집니다!]

“오호?”

축제!

일종의 성장 촉진 이벤트라고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각종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험치 2배 같은 대형 이벤트.

페이트에서도 그 효과는 마찬가지였다. 축제는 최초 발견 버프와 동일한 효과를, 축제 기간 동안 특정 지역에 존재하는 모든 유저에게 제공한다.

“이거, 아르바 대륙이라는 게 대륙 규모의 축제가 벌어진 거란 소리인가?”

하지만 대륙 전체에 벌어지는 축제라니!

이런 건 듣도 보도 못한 게 당연했다. 물론,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는가?

남 좋은 일은 한 것 같아서 살짝 배가 아프긴 했지만, 남들보다 더 제대로 뽕을 뽑으면 되는 일.

큘라드의 만족한 목소리가 들린다.

-근질근질했는데 간만에 몸 좀 풀었군.

“네가 한 게 뭐 있다고.”

-네가 한 일이 내가 한 일이고, 내가 한 일이 네가 한 일 아니겠는……?!

첫 만남 때 보였던 적의는 싹 잊어버린 건지. 이젠 농담도 잘하는 큘라드였다.

“다 좋은데 너무 말이 많아.”

엑스는 리치의 구슬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굉음이 끊이질 않았던 주변도 고요해졌다. 다른 존재의 기운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반나절은커녕, 1시간도 걸리지 않았구나.”

“그러게요. 생각보다 약했네요, 마왕은.”

“마왕이 약해? 그것참 기겁할 노릇이군.”

딱딱딱.

리그리앙은 엑스의 요청으로 뒤에 빠져 전투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니까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지반을 뒤집는 엑스에게서 그 자식의 모습이 겹쳐 보였으니까.

리그리앙이 작게 중얼거렸다.

“……멀쩡하지 않으면 난, 널 죽이겠다.”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게 한 소리가 아니다. 할 일이나 하자.”

푹.

리그리앙은 스태프를 흙바닥에 꽂았다. 마나를 흘려보내 탐색을 시작했다.

근방에 존재하는 룬스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그 검은 녀석들은 아무런 조건도 없이 땅에서 솟아나는 게 아니다. 오염된 룬스톤을 매개체로 사용하며, 그 근방에서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

리그리앙의 말은 사실이었다.

탐색을 마친 리그리앙의 뒤를 따르자 훼손된 신전 같은 게 모습을 드러냈다.

안쪽에선 이질적인 다른 존재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녀석들이 여기서 나온 거군요.”

무너진 협곡엔 숨겨진 룬스톤이 존재했던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룬스톤은 오염된 상태.

희생의 여신 새크리디아와 교감할 수 있게 된 엑스는 직접 룬스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고오오오.

신성한 빛과 함께 나타난 새크리디아.

강림은 아니었기에 제대로 된 의식은 없는 것 같았다.

그녀를 향해 리그리앙이 가볍게 목을 숙였다.

‘저 양반이 저런 면도 있었네.’

엑스는 의외의 반응에 흠칫하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무엇보다 신경이 쓰이는 건 카이무스가 검은 군단을 불러낸 위치였다.

‘무너진 협곡에서 크세르니스까진 꼬박 하루를 걸어야 한다. 굳이 검은 군단을 이곳에서 불러낼 이유가 있었을까? 경로엔 마을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데.’

자신의 기척을 알아챈 건가 싶었는데, 반응으로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리그리앙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룬스톤이 존재하는 것 같구나.”

“알지 못하는 룬스톤이요?”

“이곳부터 군단 형태로 움직일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저들을 불러낸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무너진 협곡에서부터 크세르니스 통하는 길목엔, 못해도 대여섯 개의 오염된 룬스톤이 존재할 것이다.”

“!”

리그리앙은 검은 군단이 움직일 수 있는 구역엔 한계가 있다고 했다. 그 한계 구역은 오염된 룬스톤 근처를 말하는 것일 터.

엑스의 얼굴은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외곽에선 과시하듯 진군했던 녀석들이야.’

며칠에 걸쳐 진군하며 길목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던 검은 군단.

엑스는 유저들이 올린 영상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엑스가 입을 열었다.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네요.”

결론이 나왔다.

아르바 대륙에 존재하는 룬스톤이란 룬스톤은 죄다 다른 존재에게 넘어갔다고 봐도 무방했다.

무엇보다 검은 군단이 휩쓸었던 외곽 지역은 완전히 숭배자들의 땅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언제, 어디서, 인신 공양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구나.”

지난번에도 느낀 거지만 어째 가면 갈수록 할 일이 많아진다.

단절 대륙의 화합에 이어 동대륙의 내사에도 간섭을 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요, 이젠 아르바 대륙 전체를 정화하게 생겼다.

반짝!

하지만 엑스의 눈은 초롱초롱하게 빛을 냈다.

“최대한 빨리 부탁합니다, 새크리디아 님.”

그러니 지금부턴 단, 1초도 헛되이 보내지 않겠노라!

아무리 주어진 과업이 많다고 한들, 주눅이 들 엑스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여신을 보채는 엑스의 모습에 리그리앙이 탄식을 삼켰다.

“……요샌 그 녀석보다 네가 더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

쏴아아아아!

텔레포트를 통해 선실로 돌아오자 파도 소리가 들린다.

리그리앙이 얼른 꺼지라고 앙상한 뼈를 휘휘 내저었다.

얌전히 문을 닫고 선실을 빠져나오자, 숙변을 해결하고 나온 느낌처럼 상쾌했다.

카이무스에게 복수에 성공해서? 아니, 복수는 그 자식이 페이트를 접을 때까지 계속된다.

엑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각오한 일 아니겠어?”

최종 보스를 상대하는 일인데 막막한 게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그래도 아무것도 몰랐던 과거에 비하면 정보에도, 실력에도 진전이 있었으니까.

“크, 저 자식들도 징하네.”

“암만 그래도 언제까지 쫓아올 수 있겠어? 접속하기 전에 봤더니 화면에 우리 뒤꽁무니도 잡지도 못하던데. 시청자 수도 계속 떨어지더라고.”

“근데 큰소리쳐 놓은 게 있어서 그만둘 수도 없을걸?”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붙는 함선들!

익스플로러 길드원들은 생고생하는 후발 주자들을 약으로 뱃멀미를 버티고 있었다.

1초도 헛되이 쓰지 않겠노라, 결심한 엑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또 낚시하시게요, 엑스 님?”

“이 근방에서만 잡히는 특산물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웁, 저는 울렁거리는 바다만 봐도 올라오는데.”

헛구역질하던 달라스의 뒤에서 서지하가 나타났다. 유저에게 빌리기라도 한 걸까, 그녀의 손엔 낚싯대가 들려있었다.

“옆에 있어도 될까요?”

“안될 것도 없죠.”

“감사합니다. 정말.”

서지하가 작게 웃음을 흘리며 곁에 앉았다. 동대륙에서 입질을 좀 느껴 봤었는지, 서지하는 낚시에 능숙했다.

휘릭!

쉴 새 없이 월척을 낚아 올렸다.

“허어, 이건 제가 배워야 할 정도인데요?”

“다 살아남기 위해 배운 기술들입니다.”

모진 풍파를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던 나날. 서지하와 황녀는 왕위 쟁탈전이 시작되기 전에도 궁에서 쫓겨나는 게 일상이라고 했었다. 아무래도 어머니의 신분이 문제가 됐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심성만큼은 누구보다 따뜻하신 분입니다.”

노예 출신의 서지하를 키워 줬던 게 바로 황녀의 어머니라고 했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

이런 NPC들의 사연은 퀘스트라든가, 알고 있으면 언젠가 써먹을 기회가 온다. 경청하던 엑스의 귓가에 문득,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저, 전방에 괴생물체 출현!”

망원경으로 바다를 살피던 정찰병이었다.

저렇게 호들갑을 떨 정도면 망원경에 들어온 게 보통 녀석이 아닌 모양.

움찔, 사건이 터지자 손이 근질거린다. 하지만 엑스는 꾹 인내했다.

‘아군의 전력 파악이 필요해.’

괜히 익스플로러를 비롯한 이들을 끌고 온 게 아니었다.

다수와 다수가 맞붙는 전쟁.

동대륙에 발을 내디딘 이후부턴 아군을 제대로 활용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전력 파악이 우선이었다.

엑스가 알고 있는 익스플로러의 전력은 너무나도 오래된 것이었다.

“용용이한테 박살이 났을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까.”

그동안 저들은 얼마나 성장을 했을까? 익스플로러는 일사불란하게 전투를 준비했다.

변태적인 직업들이 가득한 길드답게 앞 선은 정석적인 탱커 대신 전투 사제가 지키고 있었다.

“믿음의 철퇴.”

“그물 전개.”

“폭약 대포도 준비 완료!”

척척 맞아 떨어지는 호흡.

상대적으로 빈약한 전투 사제들을 보조한 건 제단사가 뿜어낸 마나의 실이었다.

마나의 실이 그물이 되고, 그물이 전투 사제들이 밀리지 않게 뒤를 지탱했다.

진짜 사제의 보조도 빠질 수 없었다.

“블레스. 여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달라스는 빠르게 핵심 전투 요원들에게 버프를 걸었다.

슬쩍, 엑스는 낚싯대를 붙잡은 채로 아군의 전투 준비 과정을 엿보고 있었다.

‘사전 준비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데?’

변칙적이면서 견고하지만 투자되는 시간이 문제였다. 전장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한계를 파악했기에 그에 맞는 전술을 계획할 수 있는 법이다.

“그래도 쓴 만큼 시간은 제대로 벌 수 있겠네.”

파아아아악!

바다를 뚫고 모습을 드러낸 건 바다거북!

다만 앞발과 뒷발이 거북이답지 않게 상당히 긴 녀석이었다. 다리만큼은 개구리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쿵! 함선에 등딱지를 부딪쳐 준 덕분에 정보를 파악할 수 있었다.

850레벨 네임드 몬스터.

산전수전 다 겪은 엑스에겐 감흥조차 없는 수치였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녀석이 뿜어내는 압박감에 익스플로러는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피슝! 카타린이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선공했다.

“우리가 언제부터 레벨 같은 걸 신경 썼다고!”

하지만 진짜들의 광기는 무시무시했다.

하나씩 나사가 빠진 이들이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쿵, 충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격 또 공격. 변칙적인 공격 패턴에 이젠 거대 거북이 혼란에 빠진 모양.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지만 그게 전부였다.

‘큰 피해는 없네.’

혼란을 일으킬 순 있지만 쓰러트릴 순 없다.

확실히 비전투직의 한계는 뚜렷했다. 하지만 엑스는 가능성을 목격했다. 개인보다 단체가 효율적이고, 강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철저한 분담 덕분이지.”

아군이 황녀를 보호하면서 버텨줄 수만 있다면, 그동안 적들을 말끔하게 처리하면 그만이다.

이내 페이트 월드 최강의 창, 엑스가 낚싯대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맛을 다시며 진짜 창을 치켜들었다.

“거북아, 거북아 가만히 있어라.”

지금 바로 구워 먹어 줄 테니까!

쾅, 굉음과 함께 타이탄의 화살이 뻗어져 나갔다.

혼자 다 해 먹는 먼치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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