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엑스가 중얼거렸다.
“그래, 너도 이상하지?”
그러니까 내 심정은 어떻겠냐?
공허의 마왕이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난데없이 나타난 가짜 황제가 아버지께서 망설이고 있다고 고함을 친다.
이 순간, 그 누구보다 머릿속이 복잡한 건 엑스였다. 엑스는 작게 이를 갈았다.
‘아버지는 다른 존재를 말하는 거겠지.’
눈치를 보아하니 다른 존재가 무언가를 망설이고 있고, 그 영향이 마왕의 행동에 영향을 준 것 같았다.
오로지 파멸만을 원하던, 여태까지의 행보와는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하필이면…….”
페이트 월드의 진정한 주인.
엑스는 운명의 신, 그리고 천계와 얽히게 되면서 그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 참이었다.
그러니까 머릿속은 혼란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운명의 신의 말을 흘려 들어도 될까?
의문이 들었다.
시오라스가 엑스를 일깨웠다.
“엑스,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네.”
“한눈을 파는 걸 보니, 자신은 있나 보구나.”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저 괴물 앞에서 한눈을 팔 새는 없었다.
가짜 황제.
특이하게도 녀석은 가면을 쓰지 않고 있었다. 다만, 얼굴은 멀리서 봐도 인간의 형태로 보이진 않았다.
엑스가 시오라스에게 물었다.
“근데, 가면을 쓰고 있지 않네요?”
“내가 알기로, 가면을 쓰고 있는 숭배자는 둘뿐이네.”
“……아하.”
하얀 가면과 붉은 가면.
녀석들만 가면을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이젠 하나지만. 엑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느껴지는 기운으로 봤을 때, 가짜 황제는 하얀 가면 이상 가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엑스가 설마하며 물었다.
“그럼, 가면들이 최상위 숭배자가 아니라는 말씀?”
“아니. 그들은 숭배자들의 지도자가 맞네.”
“그렇다면 저건?”
시오라스가 턱을 매만졌다.
“글쎄…… 돌연변이라고 해야 할까?”
돌연변이.
최상위 숭배자를 뛰어 넘은 하위 숭배자라는 뜻이었다.
방법이야 보다시피, 수많은 생명들을 다른 존재에게 바친 덕분일 터.
이내, 하늘을 향해 울부짖던 녀석이 이쪽을 바라봤다.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터벅터벅.
무수단을 내려오는 가짜 황제.
채팅창이 폭발했다.
-ㄷㄷㄷㄷ포스 오진다
-레벨이 몇일지 짐작도 안 되는데?
-으으, 화장실 가고 싶은데 도저히 못 가겠다ㅋㅋ
드디어 동대륙의 끝판왕이 나타났다.
공허의 마왕은 여전히 허우적거리는 중이었다. 가짜 황제는 그 모습이 못마땅한 눈치였다. 스윽, 비단옷이 흐느적거렸다.
“아버지의 뜻도 헤아리지 못하는 쓰레기 녀석.”
파콱!
주먹을 쥐자 공허의 마왕이 그대로 폭사했다. 데스나이트들의 검격, 시오라스의 신성 마법, 엑스의 물리 공격에도 버티던 녀석이 단번에 즉사해 버렸다.
꼴깍,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아수스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가 제일 먼저 죽을 것 같은데?”
“그래. 그럴 것 같다.”
“냉정한 자식.”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게 이런 걸 말하는 건가. 그래, 겸허하게 로그아웃을 받아들이자.
아수스는 주제파악을 마쳤다.
예상치 못한 마왕의 죽음에 신들이 우려를 보냈다.
[희생의 신이 당신의 안전을 걱정합니다!]
[전쟁의 신이 오한에 몸서리를 칩니다!]
[광대의 신이 작별의 키스를 날립니다!]
이 와중에도 광대의 신은 미친 짓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엑스는 가짜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했다. 녀석과 눈이 마주치자 음산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후후. 홍동 그리고 백서. 이 무능력한 녀석들.”
“백서?”
홍동은 붉은 가면을 이르는 말.
그렇다면 백서는 하얀 가면의 이름일 터. 가짜 황제의 비웃음은 진심 같았다. 녀석은 진심으로 아군의 무능력함에 기뻐하고 있었다.
“고작 이런 수준에 고전하고 있었다니. 영겁의 세월 동안 성장하기는커녕 퇴물이 되어 버렸구나? 잠시나마 우려했던 내가 부끄럽도다.”
어디 보자.
엑스는 눈치가 굉장히 빠르다. 그리고 자신들끼리 죽고 못 사는 놈들의 관계를 파악하는 건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왜? 경험이 있었으니까.
견적은 금방 나왔다.
피식, 엑스가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네가 그 둘의 따까리였던 모양이구나?”
아수스가 옆구리를 찔렀다.
“안 그래도 기분 나빠 보이는데, 심기는 왜 건드려?”
-팩트 폭력 오지구요 엌ㅋㅋㅋㅋㅋ
[광대의 신이 청량감에 부르르 몸을 떱니다!]
가짜 황제는 정곡을 찔린 것 같았다. 그는 애써 태연하게 웃음을 흘렸다.
“후후, 과거의 일을 언급하는 걸보니 정말 네가 백서가 말하던 놈이 맞구나.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는 것도 모자라, 훼방을 놓는다는 필멸자.”
“오우, 잘 알고 있네. 그 아르바의 새로운 마왕이 말해 줬다고 그러디?”
“……네놈이 그걸 어떻게?”
예상대로 아르바의 마왕, 카이무스가 정보를 전달했던 것이었다. 스트리밍을 통해 위치를 파악, 그 정보들을 백서에게 전달하면 백서가 이 녀석과 연락을 취한 모양이었다.
엑스는 상황파악을 끝냈다.
‘그래, 절대적인 힘은 홍동이나 백서보다 강하다. 하지만 경험은 아니야.
동대륙이라는 먹기 편한 먹잇감을 삼켜 잘 성장한 것뿐이지, 절대적인 계략이나 상황 판단은 백서에 비해 떨어진다.’
그러니 이쪽에도 승산은 있다.
물론, 녀석의 멘탈을 잘 쥐고 흔들어야 했지만 그런 건 또 엑스 전문이었다.
“등신. 떠 먹여 줘도 뱉는 놈은 처음 보네.”
“크, 크흠.”
“야, 엑스, 너 진짜 우리 죽이려고 작정했지?”
거침없는 도발!
당황한 시오라스가 헛기침을 뱉을 정도. 하지만 엑스는 멈추지 않았다.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가짜 황제에게 속에 쌓아둔 말을 뱉었다.
“내가 너였더라면 아예 처음부터 작살을 냈을 거다. 아무리 만만해 보여도 그렇지, 자기 안방에 적이 침입하는 걸 보고만 있다니. 거만한 건지, 성격이 좋은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가장 핵심인 열등감을 건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홍동이나 백서도 이런 등신짓은 안 했을걸?”
“닥쳐라!”
쿠구구구!
결국 폭발한 녀석의 몸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홍등처럼 다른 존재의 기운에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엑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매도 미리 맞는 게 낫지.’
어차피 궁지에 몰리면 변신을 할 게 뻔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변신을 부추긴 뒤, 이성을 잃은 녀석을 상대하는 편이 더욱 편하리라.
모든 것은 철저한 계산대로! 경험에서 우러나온 판단이었지만, 보는 이들의 입장에선 달랐다.
-ㅋㅋㅋㅋㅋ팩폭으로 바로 최종 페이즈로 진입한 거임?
-역시 방송으로 쌓은 말빨 어디 안 가네ㅋㅋ
-트라우마 집요하게 물어뜯는 거 보소ㅋㅋ
시청자들과 달리 신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광대의 신이 당신의 광기에 한 수를 무릅니다!]
[전쟁의 신이 명복을 빕니다!]
[땅의 신이 당신의 묫자리를 고르기 시작합니다!]
“죽긴 누가 죽는다 그래?”
끝을 보고 말리라.
판이 깔아진 이상, 이제부턴 전력을 다해서 저 괴물에게 맞서는 방법밖에 없었다.
시오라스와 리그리앙, 아수스도 각자 포지션을 잡고 거세지는 다른 존재의 기운을 응시했다.
띠로링! 알림이 울렸다.
[대제사장이 자신의 육체를 제물로 바칩니다!]
[대제사장의 육체가 분해됩니다!]
[흘러나온 죽음의 기운이 이면의 존재를 끌어냅니다!]
“대제사장.”
가짜 황제, 숭배자의 직책인 것 같았다. 대제사장의 몸은 공중에 떠오른 채로 조각조각 찢겨나갔다.
애초에 인간은 아닌지라 피 같은 건 흐르지 않았지만, 그 광경이 페이트에선 보기 힘들 정도로 징그러운 면이 있었다.
빠득, 리그리앙이 뼈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간섭이 불가능해.”
공격이 먹히지 않는 상태. 분해되던 대제사장의 입이 이쪽을 보고 움직였다.
“너희들은 큰 착각을 하고 있다.”
“착각?”
“후후, 필멸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단 소리지.”
거 유언 한번 참 개소리 같다.
엑스는 대제사장의 의미심장한 말을 그래도 좀 편하게 들을 수 있었다.
마법진을 구성하는 성벽과 건물을 부수면서 전진했기에, 대규모 인신공양에 걱정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다른 존재가 완전하게 부활하기도 힘들겠지.’
홍동 때보다 강하긴 하겠지만, 엑스도 강해졌다. 그리고 지금은 혼자가 아니었다. 든든한 아군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녀석의 말에 좌중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후후, 영겁의 시간이다. 영겁의 시간 동안 나는 백서처럼 방해를 받지도 않았고, 홍동처럼 기척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 그래, 이 대륙을 처음부터 쥐고 흔든 게 바로 나다.”
허공을 떠다니던 입이 기이하게 씰룩였다.
“필멸자여, 이 땅에서 몇 개의 문명이 멸망을 거듭했을 것 같나? 그 모든 멸망을 누가 계획했다고 생각하나? 그로 인해 희생된 생명은 몇이나 될 것 같나? 후후, 필멸자들의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일이겠지.”
사실인가.
그것까진 알 수 없었지만, 가능성은 충분했다. 대제사장의 말대로 동대륙은 미지의 땅.
게다가 홍동, 백서보다 서열이 아래인 그가 이런 강함을 가지게 된 이유 또한 설명이 됐다.
시오라스가 입을 열었다.
“영겁의 세월 동안 취한 생명을 제물로 바친다면…….”
엑스가 이어서 말을 끝마쳤다.
“정말 진짜에 가까운, 그럴싸한 다른 존재가 나타나겠군요.”
띠로링! 그 순간, 대제사장의 입이 사라지고 알림이 울렸다.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덮였다.
[월드의 이면 ‘다른 존재’가 출현했습니다!]
[다른 존재가 필드를 변형시켰습니다!]
[도시 필드가 ??? 필드로 변형됩니다!]
엑스가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물음표 필드는 또 뭐야? 진짜 등장부터 요란하시네.”
*
찌릿!
용용이는 뇌리에 스치는 기운을 느꼈다.
“……주인에게 뭔 일이 생긴 것 같다뀨.”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
용용이는 침대에 반쯤 몸을 기댄 채로 누군가에게 말했다.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용용이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정말 갔다 와도 되겠냐뀨?”
폴리모프.
제 나이에 맞는, 용용이의 앳된 얼굴엔 좀처럼 걱정이 가시질 않았다. 하필이면 상황이 이렇게 꼬이다니, 용용이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다 주인이 연약하기 때문이다뀨. 이번에 만나면 단단하게 훈련을 시켜야겠다뀨. 밥도 하루에 딱 10끼만 먹일 거다뀨.”
정신과 시간의 동굴에 가둬 놓고 며칠 동안 훈련만 시키겠노라! 용용이는 두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시로 교육을 땡땡이를 쳤던 용용이에게 대륙과 대륙을 건너는 텔레포트쯤이야 식은 죽 먹기.
단절 대륙의 보호막도 시오라스와 같은 수준의 마법을 구사하는 드래곤, 용용이에겐 의미가 없었다.
용용이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무리하지 말고 쉬어라뀨. 다음에 올 땐 꼭 주인이랑 같이 오겠다뀨. 약간 욕심이 많긴 한데, 말했던 것처럼 나쁜 사람은 아니다뀨.”
절레절레, 그 말에 하얀 머리카락이 산들거렸다. 용용이가 눈웃음을 지었다.
“뀨뀨. 뭐든 처음만 어려운 법이다뀨.”
말을 끝마친 용용이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흔들리는 세계수.
단절 대륙을 혼자 탐험하면서 주인을 주려고 챙긴 먹거리도 잊지 않았다.
슈슉!
용용이의 짧은 손가락이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번쩍!
방대한 마나가 마법진에서 용트림 쳤다.
“하여간 손이 많이 가는 주인님이다뀨.”
용용이가 그대로 마법진을 통과했다.
혼자 다 해 먹는 먼치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