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화
“왜 이렇게 귀가 가렵지?”
엑스는 귓구멍을 후비기도 잠시, 프리얀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규율이 적힌 비석을 몰래 본 게 찔리기도 했고, 괜히 카오피나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눈 것을 들키면 일만 복잡해질 것 같았으니까.
어쨌거나, 마음은 홀가분해졌다.
‘무엇보다 신들이 나쁜 놈들이 아니라 다행이네.’
천계의 신들.
그들은 주어진 사명이 있음에도 페이트 월드를 수호하고 있던 것이었다.
신들에 대한 의문은 사라졌지만 천신에 대한 의문은 보다 심해졌다.
그는 누구이고, 어째서 저런 규율을 만들었을까? 엑스는 천신의 거처를 바라봤다.
“그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싶네.”
다음엔 몰래 거처에 진입이라도 해 볼까?
고민은 잠깐 접어두고, 엑스는 천계에서의 수확을 확인했다.
월드에선 하얀 가면과의 전면전이 진행 중인 상황이다.
크세르니스 연합군의 지도자로서, 언제까지 자리를 비워 둘 순 없었으니까.
가장 큰 수확은 역시나 꼬물이였다.
“부럽다. 부러워.”
프리얀의 말투엔 아직도 부러움이 한껏 묻어 있었다. 그만큼 신수의 능력이 뛰어나단 소리였다.
꼬물이가 어떠한 방향으로 성장할지 알 순 없지만, 신수들은 공통적으로 스텟이 뛰어났다.
“걔넨 몸속에 생명력과 마나의 바다를 품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구!”
프리얀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엑스가 흡족한 미소를 흘렸다.
‘용용이가 어렸을 때보다 생명력과 마나가 높으니까.’
그렇다고 용용이가 떨어진다는 건 아니었다.
보스 몬스터 중엔 용용이보다 많은 생명력을 가진 녀석들도 있다. 용용이의 진면목은 무지막지한 기본 스텟에 있었으니까.
엑스가 속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딱 용용이 반만 닮아라……!’
프리얀이 흥, 코웃음을 쳤다.
“너 진짜 욕심쟁이다, 엑스.”
“그걸 이제 아셨습니까?”
“하긴, 내 주머니를 탈탈 털 때부터 알아봤지.”
첫 수확은 여기서 끝이었다.
‘씁, 처음부터 천도복숭아를 먹을 걸.’
그래도 맛보기치곤 엄청난 이득을 봐서 기뻤다.
이내, 엑스는 축지법으로 달려 신들이 모인 곳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지상을 내려다보던 신들이 엑스를 반겼다.
“어딜 갔다 온 겐가, 엑스?”
“잠깐, 신수 구경 좀 하고 왔습니다.”
“신수? 허어, 꿈도 야무지군!”
아무리 그래도 신수는 이르지.
신수를 보유한 이들일까? 타이탄을 포함한 몇몇 신들은 우쭐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약 올라 할 이유가 없는 엑스였지만.
‘나중에 놀라지나 마시죠들.’
속부터 은은히 흘러나오는 승자의 미소. 프리얀도 쿡쿡 웃음을 참고 있었다.
잠자코 있던 새크리디아가 지상의 상황을 전달했다.
“하얀 가면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엑스. 이번 전투에선 별다른 피해가 없었지만, 다음부턴 피해자가 속출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다들 각오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요. 각오는 언제나 중요한 법이죠.”
새크리디아가 슬픈 눈을 보였다.
“……어떤 의미론 당신들이 부러워요.”
다른 신들도 동감하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계의 진실을 알게 된 지금,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게 된 엑스였다.
‘불난 집에 부채질 해 봤자.’
답답한 건 오히려 신들일 터.
엑스는 대신 당당하게 부탁했다.
“그렇다면, 모여서 응원이라도 해 주시죠? 저 같은 모험가들은 목숨보다 명예를 중시하니까요. 막말로, 그냥 말씀 한 마디만 해 주셔도 사기가 최대로 올라갈 겁니다!”
모험가들은 플레이어들을 말하는 것! 엑스는 첫 경험을 떠올렸다.
맹활약을 통해 신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을 때.
‘정말이지, 그런 짜릿함은 처음이었지.’
천계가 내게 집중한다! 알림을 확인한 뒤 느꼈던 기대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새크리디아는 반신반의했다.
“말 한 마디로 사기를 올린다고요? 어렵진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축복도 아니고 말 한 마디가 어렵겠는가?
월드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빈말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타이탄이 큰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거 좋네. 못할 것도 없지!”
다른 신들도 그까짓 응원쯤이야, 어려운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부탁까지 전했으니, 이젠 지상으로 내려갈 때였다. 떠날 준비를 하는 엑스에게 타이탄이 다정히 말했다.
“하늘 길은 밤에 열어두지.”
“그냥 기도를 드리면 될까요?”
“그래. 밤엔 자네의 기도를 듣기 위해서, 특히나 귀를 기울이고 있겠네.”
슈슈슈!
몸을 휘감아오는 빛.
‘다음엔 천상서고에 들러야지.’
낮엔 지상의 전장에서, 밤엔 천계에서! 엑스는 다음을 기약하며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
아르바!
크세르니스 원정군이 머문 이곳은 빠른 속도로 제 색깔을 찾아가고 있었다.
가만히 쉬고 있어 봐야 뭣 하겠는가? 병사들이 나서서 아르바의 흉물을 처리했다.
“영주님께서 혼자 고생하시며 길을 뚫어주셨는데.”
“우리들이 가만히 쉬고 있으면 되겠는가?”
“맞네. 맞아.”
크세르니스 NPC들의 충성심이야 말할 필요가 없었다.
당근, 당근, 또 당근!
크세르니스에게 받은 은혜를 이렇게라도 보답하고 싶은 눈치였다. 플레이어들도 부지런히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크, 엑스의 모험에 동참하게 될 줄이야.”
“우리들도 역사의 한 페이지에 걸릴 만 하지 않을까?”
“그나저나 궁금해 죽겠다야.”
천계로 향했던 엑스!
이번 주 페이트 하이라이트의 시청률은 무려 50퍼센트에 육박했다.
둘에 하나가 엑스의 천계 입성 광경을 목격했다는 것! 덕분에 플레이어들의 기대감은 최고조에 다다른 상태였다.
“이건 정말 만에 하나의 경우지만…….”
“왜?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 엑스가 봤던 비석 있잖아. 그게 초대형 퀘스트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S+랭크보다 높은 난이도인 건 확실한데, 그런 난이도의 퀘스트를 혼자 깨기에는…….”
상식적으로 무리다. 이 순간, 플레이어들이 기대하는 건 콩고물이었다.
사내가 혀를 내둘렀다.
“인마, 양심이 있으면 그런 소린 하지 말아야지.”
“아니, 그래도 솔직하게.”
“기대는 적당히 해라. 김칫국 마시다가 체하겠어.”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기대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엑스가 어떤 소식을 들고 올까?
덕분에 아르바엔 오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엑스가 되돌아온 뒤에도 물러가지 않던 그 분위기는…….
“……어, 어?!”
피조물과의 전투 도중.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사투를 벌이는 플레이어들.
그들의 귓가에 울리는 알림.
띠로링!
[전쟁의 신이 멋쩍게 박수를 칩니다!]
[희생의 신이 일그러진 얼굴로 미소를 흘립니다!]
[태양의 신이 양심에 가책을 느낍니다!]
“이거 설마……?”
“처, 천계의 신들이 우릴 지켜보고 있어!”
“엑스! 엑스, 분명 무슨 퀘스트를 받은 게 분명해!”
크세르니스 원정군만의 일이 아니었다.
아르바 대륙.
하얀 가면의 세력에 맞서 전투를 벌이던 이들의 귓가에 알림이 울렸다.
플론사이드 백금 광산에 이어, 타 지역을 공격하던 파죽지세의 귓가에도.
“……과, 광대의 신이 누구야?”
“너도 광대야? 나한테는 엉덩이를 흔들고 있다는데?”
“뭔지는 몰라도 보통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대륙 동부, 화 제국 지원군과 함께 전진하던 익스플로러의 귓가에도.
신들이 응원이 전해지고 있었다. 당황하기도 잠시, 플레이어들은 상황 파악을 마쳤다.
“……엑스밖에 없어.”
천계에 올라갔던 플레이어는.
“엑스가 그 비석을 통해 뭔가를 해낸 거야!”
꼭 비석의 영향이 아니라고 해도, 엑스가 신들의 태도를 적극적으로 바꾼 것은 분명했다.
일순간, 페이트는 하나가 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거 대활약을 해서, 점수를 따면…… 우리도 천계를 구경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페이트 하이라이트.
신들이 집중하고 있는 지금, 위대한 업적을 세운다면 엑스를 따라 천계에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새로운 던전, 필드를 발견하기만 해도 거둬들일 수 있는 이득이 얼마인가?
그런데, 무려 천계란다.
이건 인생 역전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플레이어들의 눈빛이 돌변했다.
“쓰레기 같은 녀석들! 우리들의 땅에서 사라져라!”
“보는 눈이 있는데,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오오, 광대의 신이시여!”
급상승한 플레이어들의 전투력.
시오라스는 황당할 정도였다.
“내 수백 년을 살며 수많은 전쟁을 경험했지만, 병사들이 이토록 열정적으로 싸우는 전투는 처음일세. 정말이지,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게 뭔지 느껴지는군. 하룻밤 새에 무슨 심경에 변화가 있던 건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음흉한 웃음! 엑스가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말 한 마디의 힘이죠.”
응원이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엑스가 한 것이라곤 쉬운 부탁 하나뿐. 하지만 그 효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어느 누구도 강요할 수 없는, 플레이어들의 자발적인 헌신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소문에 소문을 타겠지.’
덕분에 보다 많은 플레이어들이 다른 존재와의 전투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엑스는 탐욕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게 불가능도 가능하게 만들지.’
조금도 과장된 게 아니었다.
말했다시피 크세르니스 원정군의 평균 레벨은 채 500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평원을 보라.
최소 레벨 800에 달하는 오염된 피조물과 전면전을 벌여도 조금도 밀리는 기색이 없다.
“으으, 뒤져도 신들이 보고 계신다!”
“광대의 신이시여!”
“몸을 내던져서라도 잡는다!”
모두가 제 능력을 십분, 백분 활용하며 싸운 덕분이었다. 엑스는 지금이라도 해답을 찾은 것 같아 기뻤다.
‘봐봐. 백번 이미지 관리하는 것보다 빵 하나 던져주는 게 낫다니까?’
물론, 그 빵은 공갈빵이었지만.
사실상, 엑스가 플레이어들에게 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양심에 가책은 없었다.
신들이 누구인가?
그 누구보다 공명정대하고 월드의 평안을 바라는 이들이다. 그들이 플레이어들의 사투를 무시할 수 있을까?
[전쟁의 신이 당신의 속셈에 경악합니다!]
[상인의 신이 주머니를 보고 울상을 짓습니다!]
[광대의 신이 이미 털린 주머니를 신 나게 흔듭니다!]
위대한 활약을 펼친 누군가는 신에게 보상을 받을 것이고, 그 소식은 또 한 번 페이트 월드에 퍼질 것이다.
보상을 얻기 위해 참전하는 플레이어들이 등장할 테고, 그들 중에서 위대한 활약을 펼치는…….
끝나지 않을 긍정의 순환!
“결국, 승리하게 되는 거지.”
얼추 그림이 보인다.
엑스의 생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얼마 가지 않아 아수스에게서 귓속말이 날아들었다.
아르바 대륙, 동부에 아지트를 둔 길드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단 소식이었다.
‘마지막으로 더 엘리트까지. 이걸로 모든 거대 길드가 움직이기 시작했군.’
그들만이 아니었다. 탄탄한 중견 길드부터, 루키, 중소 길드. 길드가 없는 플레이어들까지!
페이트 하이라이트로 천계에 대한 기대가 커진 상황에서 신들의 눈에 들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야심 있는 페이트 플레이어라면 팔자 좋게 사냥만 하고 있을 순 없으리라.
“복잡하면서도 간단하네.”
그래, 정리하자면 간단했다.
엑스의 말 한 마디가 페이트를 뒤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엑스가 모두의 멱살을 잡고, 페이트를 클라이맥스로 이끌고 있었다!
씨익.
올라가는 엑스의 입꼬리.
“내가 또 한다면 제대로 하지.”
혼자 다 해 먹는 먼치킨